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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0.02 생사(전강선사 No.349)—죽는 지경을 생각해 봐 | 수업감보(隨業感報) | 범어사 명학동지 구렁이 몸 | 生死二字 釘在額上 裂轉面皮 討箇分曉 | 打算飯錢.
  2. 2021.09.27 시은(전강선사 No.349)—내 마음자리 찾는 회(懷) | 시주것 먹고 等閒過日 못쓴다 | 햇빛 · 공기 · 물 · 이 몸 등등 모두가 시은 | 생사 없는 도(道)래야 된다.
  3. 2021.09.22 생사는 본래 없다(전강선사 No.349)—(게송)千古無人問~ | 인간 생활 목적? | 햇빛, 물, 이 몸, 공기 등 전부가 시은, 시주 | 등한과일 못쓴다 | 생사 없는 도.
  4. 2021.09.01 생사는 본래 없다(No.361)—아무것도 애착 집착할 것이 없다 | 한 생각이 무량겁 | 一超直入如來地 | ‘생사, 열반’ 두 소견을 버리는 것이 바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
  5. 2021.08.20 수불세수(No.198)—(게송)得樹攀枝未足奇 | 의단독로가 될 때까지 피나는 노력을 해야 | 보소재근(寶所在近) |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치라.
  6. 2021.07.25 삼학((No.306))—계 · 정 · 혜(戒定慧), 삼학은 삼위일체 |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참선을 해야 하고, 바른 참선을 하고자 하면 계율을 잘 지켜야.
  7. 2021.07.06 새판잡이(세등선원No.68)—산철에도 정진이 중단되지 아니하고, 여일하게 되아 가도록 잘 잡드리를 해야 다음 철 결제에 연결이 된다.
  8. 2021.06.10 실참((084))—법회의 목적은 업장소멸, 영원한 생사해탈 | 법(法)을 들었걸랑 시간을 아껴 열심히 수행해야 | 죄는 우리 마음자리로부터 일어나는 파도.
  9. 2021.05.23 선방(세등24)—한 생각 딱! 챙겨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 있는 선방 | 참선을 하면 몸이 건강해지고 결정코 깨달음까지 이르른다.
  10. 2021.05.16 선교석((No.587-2))—서산 스님의 『선교석』, 「學者所參活句 如一團火 近之則燎却面門 無佛法措著之處 只有大疑 如烈焰亘天 忽若打破漆桶.... 」

생사(전강선사 No.349)—죽는 지경을 한번 생각해 봐 | 수업(隨業)허기가 업(業)을 이루기가 쉽고, 감보(感報)허기가 보(報) 받기가 그렇게 쉽다 | 동래 범어사 명학동지 구렁이 몸 이야기 | 生死二字 釘在額上 裂轉面皮 討箇分曉 | 閻羅老子 打算飯錢.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13분 37초)

 


[법문] 전강선사(No.349)—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 1 (계축73.12.21)[몽산법어 부록](전349)

수시(須是) 생사이자(生死二字)를 가져라. 생사이자(生死二字)! 이 몸뚱이 나왔다마는 살아왔다마는 죽을 것을 생각해라. 생사 아니냐? 몸은 받아왔다마는 앞으로 죽을 일이 있지 않나. 죽는 지경을 한번 생각해 봐. 그 죽는 지경이 어떤 지경인가 한번 생각해 봐.

요 몸뚱이 얻지 못허고는 도 닦지 못하는 법이니, 요 몸뚱이 잃어버리면 잃어버린 그날부텀은 귀신으로 나타나서 그저 혼백으로 되어 가지고는 혼백이, 뭐 밤낮 이놈의 혼백이라는 건 중무소주(中無所主)해서, 제 정신 하나 없어서, 꿈! 꿈에 봐 꿈에, 꼭 꿈과 같은데 그와는 달라. 식(識)이 좀 다르다 그 말이여. 혼백(魂魄)과 몽식(夢識)과는 좀 달라.
몽식은 더 허망하지? 더 무주(無住)하고? 주(住)함도 없이 그저 그만 중무(中無)해서 뭐 뭐 이럭저럭 이럭저럭 그저 그만 싸우다가 또 어떤 놈허고 무슨 뭐 별짓을 다 해도 요놈의 것이 무슨 뭐 뭐 도무지 중무(中無)여.

아무 무슨 뭔 얼터거리도 없이 그렇게 무상허고 허망한 놈의 것이 귀신이 혼백이 돌아댕기면서 어디 가서 인자 붙어서 중음신(中陰身) 노릇이나 하거나, 글안허면 붙어서 인자 다행히 몸뚱이를 얻지. 그 몸뚱이를 얻으나, 옳은 몸뚱이 사람 몸뚱이를 얻으면 허지마는 혼백이 되기 때문에 어디 그놈이 가 붙은 대로 되지. 가 붙은 대로 되아부러. 개미한테 붙으면 개미가 되고, 뭔 비단 개구리한테 붙으면 비단 개구리가 되고, 벌한테 붙으면 벌이 되아번지고, 이놈의 것은 당초에 그 기가 맥히다 그 말이여.
그 붙는 법이 이상혀. 이 영(靈)이라는 게 모양이 모양 형편도 없으니 가서 그만 들어붙으면 되아번져. 그렇게 수업(隨業)허기가 업(業)을 이루기가 쉽고, 감보(感報)허기가 보(報) 받기가 그렇게 쉽다 그 말이여. 붙는 곳마다 그저 붙어 현신(現身)을, 몸을 얻어.

그러니 왜 그걸 뭐 언제 내가 법문도 했지마는 그 동래 범어사 명학동지(明鶴同知) 얘기허지 않았어? 명학동지가 그렇게 중이 되어 가지고는 돈만 모아서 큰 백만장자가 장자보담도 부자가 되어 가지고, 아! 그놈 가지고 있다가 죽은 뒤에 그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는 고방(庫房)에 제 돈 쟁여 놓은 고방에 가서 따악 지키고 있다 그 말이여.

상좌(上佐) 하나가 대도(大道)를 닦아 가지고 관(觀)을 해보니까 즈그 스승이 죽어서 구렁이가 되아 가지고 고방을 지키고 있거든. 그래 가서 고방 앞에 가서 “스님! 스님!” 부르니까, 아! 그래도 그 무슨 그 어쩐 일인지 이놈의 구렁이가 그 말을 듣고는 나왔다 그 말이여. 생전 못 나오다가.
업(業)을 받아 가지고는 그 고방 밑에 숨었으니 나오면 죽일까 싶으니까 못 나와. 그 애착이 또 무섭고 큰 방앳고 만헌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는 못 나오고 있으니까, 상좌가 도를 깨달라 가지고 가서 부르니께 나왔다 그 말이여.

그래 그 구렁이를 보고 “스님, 그 몸뚱이를 버리시오”
어떻게 버릴 거냐 그 말이여? 구렁이가 되아 가지고도 애착신이 되아 가지고 그 제 몸뚱이가 제일 소중하고 무서운디 어떻게 버릴 거냔 말이여.

“그 몸뚱이를 버리십시오” 이 몸 어디 버릴 수가 있어야지. “스님 머리를 대갈빡을 아무리 죽기 싫지마는 대갈빡을 그만 돌에다 쳐가 때려 가지고 자살하십시요”
원청 도인이니깐 도력으로 그랬던지 아! 그 말을 듣고는 눈물을 철철 흘리고 울다가는 구렁이란 놈이 대갈빡을 때려 가지고 죽었네. 큰 구렁이가 죽었다 그 말이여. 그 혼백을 따라 가지고는 혼백을 데리고 나섰네. 혼을, 구렁이 끌고 댕기는 구렁이 속에서 꿈적꿈적허고 살던 그 혼을 앞세우고 나섰다 그 말이여.

나서 놓으니 이놈의 혼(魂)이, 구렁이 속에 들었던 혼(魂) 그놈이 몸뚱이는 내번지고 인자 혼 되아 가지고 나왔는데, 아! 그놈이 거 붙을라고 헌디 굉장해. 가다가도 그저 벌만 봐도 붙을라 하고, 개구리만 봐도 붙을라 하고, 어디 안 들어갈라고 헌 데 없다 말이여 당최. 이것 뭐 당초에 뭐 그저 꿈적꿈적헌 동충(動蟲) 연비충(蜎飛蟲)한테 다 붙을락 하네.
그놈을 기어니 못 붙게 때리고 때리고 인자 혼백을 때리는 법이 있었든가, 회초리를 가지고는 때렸다 했지? 못 들어가게 해 가지고는 인도해 가다가는 어느 산촌 산막에 들어가서 두 부부가 사는데 자식이 없어 그리 집어넣었어. 그라고 인자 그만두니까 가 붙지. 그 두 부부지간이 늦게까장 자식을 못 낳고 촌막에 사는디 그리 몰아넣었어. 그리 들어가서 거가서 아들이 되었다 그 말이여. 그래 그 아들을 데려다가서 그 도(道)를 가르킨 일이 있지 않어? 내가 얘기허지 않았어?

긍께 우리가 이 몸뚱이 신령으로 이 몸뚱이 잃어버리면은 혼이 되어 가지고는, 그 혼백이 뭐 안 들어갈라고 하는 데 없어. 그거 기가 맥히게 붙어번져. 그러니 실무(實無)지. 아무 실무가 없지. 그거 소용 있어? 이 몸뚱이를 얻어야사 이 몸뚱이를 가져야사—이 몸뚱이 가지고도 그저 망상은 도무지 뭐 분(粉) 싸라기 흩은 것처럼 일어나지마는, 그래도 이 몸 가져야사 화두(話頭)를 도(道)를 닦는다 그 말이여. 이 몸뚱이 없으면 도를 못 닦아.
그러니 이 몸뚱이를 잊어버려 되야? 될 수 있으면은 잊지 않고 도를 닦아야지. 어쨌든지 이 몸뚱이가 병이 나거들란 약도 잘해 먹고 그저 잘 조심해서 몸을 가져 가지고는 도를 닦어야지.

도 닦지 않은 몸뚱이야 그까짓 놈의 거 소용없지, 죄만 짓는 놈의 몸뚱이니까. 이놈의 몸뚱이 가지고는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모도 죄요, 거족동념(擧足動念)이 모도 죄요, 마음만 내도 죄요, 발만 들어도 죄업이요, 죄만 퍼짓는 놈의 몸뚱이거든. 도(道)가 있어야사 인자 참, 도(道)를 닦어야사 그 소중한 몸뚱이요, 참으로 이 귀중한 몸, 이 몸 가지고 도를 닦으니까.

헌디 이 몸이 사(死)가 앞에 있으니, 이 몸이 시방 사형선고를 받고 있으니, 오늘 죽을는지 내일 죽을는지 모르는 무서운 사형선고다. 죄인에 살인 강도를 하고 죄인의 사형은 아무 날 죽인다고 사형헌다고 기한이나 있건마는, 우리의 몸뚱이 사형이라는 것은 기한도 없다. 오늘이냐? 이 시간이냐? 이 뒷 시간인가? 어느 시간이고? 도무지 수유(須臾)를 뭐 앞으로 수유를 머무를 수가 없어. 잠깐 동안인들 안심할 수가 없어.

언제 죽을는지 알 수 없으니 생사이자(生死二字)를 가져라. 나왔다마는 살았다마는 죽을 것을 생각해라. 곧 사자(死字)가 앞에 있다. 금방 죽은 사람만 보고 그 사람은 금방 죽었다마는 나는 안 죽었으니까 오래 살까 싶지? 소용없어. 그 사람이나 내나 똑같어.
생사이자(生死二字)를 가져라. 정재액상(釘在額上)해라. 그 생사이자(生死二字)를 보통 가지지 말고 이 눈 사이에다 눈썹 사이에다 딱! 찍어 두어라, 도장 박듯기. 딱! 찍어라. 그 곧 죽는다.

열두 때 가운데 열전면피(裂轉面皮)해라. 열두 때 가운데 낯 껍데기를 펴지 말어라. '어째서 판치생모락 했는고?' 허면 이거 자연 낯 껍데기가 찡그러지지? 그놈을 생각하니까.
어째 그렇게 힘써서 하라는 건 아니여. '어째 판치생모락 했는고?' 이렇게 성의껏 정성껏 해라.

토개분효(討箇分曉)하야사 시득(始得)다. 확철대오해사 옳다. 공안이란 깨달은... 깨닫지 않은 게 아니다. 확철대오가 있어야 한다, 확철대오가 있어야 하니 분효(分曉)하야사 시득(始得)다. 깨달라야 옳다.
깨닫지 못하고 거가 물고만(묻고만) 있으면 뭐 할 거냐? 천년만년 그만 판치생모만 허고 말 것인가? 확철대오가 있어야 하지. 분명히 허고, 참다이 허고, 철저히 헐 것 같으면은 깨달은 각(覺)이 반다시 앞에 곧 온다.

약지수군축대(若秪隨群逐隊), 만약 느그가 군(群)을 따르고 떼를 쫓아서—그 모도 친구나 찾고, 모도 반연경계(攀緣境界)나 찾고, 그저 어디 놀 경계나 찾고, 화두허다가 안 되니 내던져번지고는 그만 쓸데없이 어디가 얘기나 할라 하고. 타공과시(打空過時)에는, 헛되이 공연히 때를 지낼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그만 그럭저럭 일평생을 그만 지내버린다면 도문(道門)에 나와서.
타시(他時)에 염라노자(閻羅老子)의 타산반전(打算飯錢)할 것이다. 다른 날에 염라대왕이 네 밥값 받을 때, 네 밥값 타산(打算)할 때 어떻게 헐래?

너, 도 닦는다고, 도 닦는다고 말은 허고선 네 평생에 뭣했나? 뭔 도 닦았나? 뭐 있어야지? 염라대왕 철방(鐵棒)을 맞아 갔으니—도 닦는 사람이면 참말로 닦은 사람이면 염라대왕이 철방을 내릴 이치가 있나?
철방으로써 잡아갔으니 염라국에 가서는 밥값 타산할 것이고, 시주것 네 헛되이 먹고 헛되이 보내고 네 무슨 짓 했나? 살생 도둑질 십악중죄(十惡重罪)만 퍼짓고 뭣했나? 이놈을 반전(飯錢)할 때 타산(打算)할 때 어떻게 헐래?

막도(莫道), 내가 너한테 이렇게 말 미리서 안 해 주었다고 원망하지 말아라.

저 동산숭장주(東山崇藏主)가 그 상좌한테 지금 부탁한 법문이여.
내가 너한테 이렇게 설해 주었다고.. 이렇게 설해 주지 아니했다고 허지 말아라. 내가 미리서 이렇게 말해 주지 안 했나? 허니 그렇게 철저히 한번 닦아 나가면서 허송허지 말어라.

많이씩 못허겠구만. 조금씩 허지.(14분24초~28분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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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ㅅ/시주 시은2021. 9. 27. 08:46

시은(전강선사 No.349)—참으로 도를 닦는 학자래야 | 부모 때려죽인 원수를 생각하는 회(懷) | 내 마음자리 찾는 화두를 회(懷) | 시주것 먹고 헛되이 지내지[等閒過日] 말라 | 햇빛 · 공기 · 물 · 이 몸 등등 모두가 시은 | 생사 없는 도(道)래야 된다.


*시은(施恩) ; ①시주(施主)에게서 받은 은혜. ②은혜를 베풂.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9분 9초)

 


[법문] 전강선사(No.349)—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 1 (계축73.12.21)[몽산법어 부록](전349)

동산숭장주(東山崇藏主)가, 동산숭장주라는 큰스님이 송자행각법어(送子行脚法語)라. 아! 자식을, 제자를 행각허러 보내면서 설법을 해 준 법문이란 말이여. “네가 도를 닦으러 나간다 하니 여차(如此)해라” 하고 일러주는 법문이여.
행각(行脚)은, 도를 닦으러 나가는 것은—벌로? 벌로 도 닦는다고? 아무 때나? 도 닦으러 간다고? 어디로 가? 도 닦으러 간다고 그 나가는 그 도학자(道學者)의 행이 그게 그 보통, "내 도 닦는다" 말만? 그거 안 된다. 참으로 진수학자(眞修學者)가 되어야 한다. 참으로 도를 닦는 학자래야 된다.

수이차도(須以此道)로 위회(爲懷)다. 오직 이 도(道)다. 이 도! 나 찾는 도. 내가 나 찾는 도밖에 없어. 이 정법도(正法道), 이 도로써 회(懷)를 할 것이다. 회(懷)라는 것은 깊이깊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생각을 회(懷)락 햐. 아주 부모 때려죽이는 원수를 생각하는 회(懷)나, 내 내가 나 찾는 그, 그 각,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 내 내가 내 이 마음자리 찾는 회(懷)나, 그걸 그런 회(懷)를 회(懷)락 햐.

화두를 공안을 하나 떠억 얻었으면은 탔으면은 그 공안을 화두를 회(懷)락 햐. 그 간절히 간절히 거기에 다 몽쳐 있고, 참으로 깊고도 묘헌 그 의심(疑心)이 거그 다 갖추어져 있고, 그 회(懷)여. 보통 회(懷)가 아니여. 이런 회(懷)로, 이 도(道)로써 그렇게 도로써, 나 깨달은 그 도(道)로써 회(懷)를 헐 것이니... 생각을 할 것이다.

가나오나 어디 가든지 가면은 옷 주고 밥 주고, 모두 밥 먹고 옷 입으니까 배 뜨뜻허고 배 불르고 좋고 '허! 이만 했으면 세상에 한가하고 좋구나' 아무 일 없어. 도문(道門)에 아무 일이 없고, 편안하고, 잠이나 자고, 허! 제기! 그렇게 헌 법 아니다.
철두철미허게, 밥 얻어먹고 옷 입었으면은 밥값과 그 옷값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그 시은(施恩) 갚는 법이다. 시은 갚는 법은 똑 도(道) 생각, 도 한마음 이 닦는 마음, 그놈뿐일 것이다.

번듯이 밥만 먹고 옷만 입고, 밥 해준께 먹고 옷 해준께 입고, 우선 해주니 먹고 우선 입고. 편안하지. 좋지. 번듯이, 뻔뻔하게 먹고 입고 고대로 놀기나 하고 그래서야 될 이치가 있겠느냐. 부지런히 도를 참으로 회(懷)해야 한다. 깊이깊이 생각해서 의단독로(疑團獨露)가 되어야 한다.

등한과일(等閒過日)이니라. 공연히, 공연히 등한히 그럭저럭 헛된 오입이나 하고, 산중(山中)에 중 오입, 돌아댕기면서 얻어먹고 얻어 입고 마음대로 돌아댕기면서 그럭저럭 지내는 고러헌 오입, 그것 참 못쓴다.
진독(進毒)이언정, 차라리 독에 나갈지언정—진독(進毒)이라는 것은, 독(毒)에 나가는 것은 죽는 것이여. 죽는 디 나가는 거여. 사형선고를 받는디 사형 받으러 나가는 거를 진독이라 해야. 모가지 짜르는 데 나가는 걸 진독이락 햐. 진독에 나갈지언정 등한히 그럭저럭 지내면서 공양을, 옷과 시줏밥을 받지 말아라.

열철번신(熱鐵纒身)이언정, 열철(熱鐵)에다가서 몸뚱이를 찌져내야. 볶아내야. 지름 펄펄펄 끓는 디다가서 튀각 튀듯기 사람 몸뚱이를 찌져내는 것을 번철이락 해야. 번철(燔鐵)에다 갖다가 몸뚱이를 찌져낼지언정 시주것을 먹고 그럭저럭 등한(等閒)히 지내지 말아라. 화두 없이 그럭저럭 지내, 이럭저럭 지내, 한 시간 이럭저럭, 그러지 말아라.

시주(施主)라 하니까 시주가 무슨 무엇이 시주여? 전부가 다 시은(施恩)이고 시주지.
일월도 기가 맥힌 시주, 그 햇빛, 햇님이 빛을 주어서 이렇게 밝게 살고, 더운 기운 태양을 주어서 이렇게 더웁게 살고, 저 공산에서 산에서 물이 출출출출 흘러 내려오니까 그 물이 모도 아무 임자 없는 물이요 쓸데없는 쓸데없는 물이니까 그놈 막 먹고 막 쓰고. 그것 기가 맥힌 시은(施恩)이여. 시은 아님이 없어.

이 몸뚱이 받아 나온 것도 시은, 어머니 아버지가 모도 이 모도 시여(施與)해 주신 이 몸뚱이여. 신체발부(身體髮膚)가 모두 부모가 준 이 몸뚱이 아닌가?
무엇이 시은 아님이 없어. 숨쉬는 것도 이 공중에 텅 빈 공중에 숨을 훌훌훌 쉬는 것도 그것도 모도 시은이여. 공중 가운데 공 가운데 허공 가운데 벌레 같은 것이 꽉 차, 박테리아 같은 벌레가 그저 뭐, 뭐 수없이 끓는 놈이 공기 속에 숨 한번 들이쉴 때 막 들어와서 죽고, 한번 내쉴 때 모두 쓸어져 죽고, 맨 시은(施恩)이여.

그러헌 시은을 담뿍 처짊어지고는 공송공과(空送空過)를 혀? 헛되이 공연(空然)히 지내고, 공연히 지내아? 안된다. 등한과일(等閒過日) 못쓴다. 지내놓고 일순간이라도 지내간 광음 헛되이 지내간 광음(光陰)은 다시 되찾을 수 없다. 딸깍 가버리는 시간은 다시 되찾을 수 없으니 그 촌음(寸陰)을 헛척치 말하라. 헛되이 보내지 말아라.

어쨌든지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여타시애(與他厮睚)다. 밤이나 낮이나 항상 이 화두, 내 허는 화두, '어째서 판치생모락 했나?' 말이 그렇게 쉬운 말 같지마는 참 쉬운 말 아니다. 그 하나 깨달라 놓으면은 아! 생사(生死)가 없는 도리니 말할 것 뭐 있나?
세상사를 환히 아는 것, 그런 것이 도(道)인가? 그런 것은 도 아니여. 백만겁지사(百萬劫之事)를 다 안다한들 알아봐, 뭣 할 것인가? 그 어따 쓰는 건가? 생사 없는 도(道)래야 되아.(5분10초~14분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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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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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생사는 본래없다2021. 9. 22. 11:56

생사는 본래 없다(전강선사 No.349)—(게송)千古無人問~ | 인간 생활의 목적이 무엇인가? | 일월, 햇빛, 산에 물, 이 몸뚱이, 공기 등등, 전부가 다 시은(施恩)이고 시주 | 등한과일(等閒過日) 못쓴다 | 생사 없는 도(道)래야 되아.


*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마치 눈병이 일 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1) 4분 54초.

 

 

(2) 2분 58초.

 


[법문] 전강선사(No.349)—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 1 (계축73.12.21)[몽산법어 부록](전349)

 

(1)------------------


천고무인문(千古無人問)인디  만산공두견(萬山空杜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목동일성적(牧童一聲笛)야  기과석양풍(騎過夕陽風)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고(千古)에 무인문(無人問)이다. 천고(千古)에 물을 곳이 없어.
무엇을 물을 곳이 없어? 법(法)을 물을 곳이 없다 그 말이여. 법이란 건 생사해탈법, 생사 없는 법. 본래 생사가 없건마는 왜 이렇게 생사죄업(生死罪業)이 중생죄업이 되어 가지고는 이 중생고를 받고 이거.. 이거 뭐여? 생각해 볼수록 이거 인간이란 이거 뭐냔 말이여, 자체가?

원 인간 생활이라고 해 봤던들 무슨 목적이 있어야지. 뭐여? 그거 아무리 오래 산다한들 칠팔십 년 살다가 뒈지는 것밖에 없는데, 죽는 것밖에 없는데, 뭐여 그것이? 무슨 목적을 그 뭐 무엇을 해놔야 목적일까? 뭘 해놔야 되아? 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뭣 해 놓을 것이 없어, 한 육칠십 년 산다한들.

천고(千古)에 무인문(無人問)이다. 천고에 도(道) 물을 곳이 없어. 똑! 도가 제일인디, 생사 없는 법이 제일인디, 생사 없는 법을 어디 가서 찾으며 어디 가 물어? 아! 이걸 좀 생각해 보란 말이여.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여.
만산공두견(萬山空杜鵑)이다. 만산에 저 모도 산속에 속절없이 두견이 우는 것밖에 없다. 뭐 두견새 곧 소짝소짝 우는 것밖에는 안 되아, 그거 뭐 뭣이여 그거?

목동(牧童)이 일성적(一聲笛)인댄, 목동이 먹인 소가, 소를 먹이는 동자(童子)가 젓대를 불고 돌아간다.
소를 먹이는 동자는 거 바로 깨달은 동자, 나를 바로 찾은 동자, 일 마친 동자여. 그 동자는 소를 타고, 소를 찾아서 잡아타고 젓대를 불고 돌아간다. 아무 태평저, 일없는 젓대를 떠억 불면서 돌아가는구나.

기우과석양(騎牛過夕陽)이다. 젓대를 불면서 저 석양에 돌아간다. 해는 넘어가는 석양으로 돌아간다 그 말이여. 그건 일 마친 동자여. 먹이는 동자여. 소를 먹이는 동자, 본래 잃어버렸던 소를 찾아 가지고 타고는 젓대를 불면서 석양으로 돌아가거든. 그건 일 마친 사람이여.(처음~5분5초)





(2)------------------

시주(施主)라 하니까 시주가 무슨 무엇이 시주여? 전부가 다 시은(施恩)이고 시주지.
일월도 기가 맥힌 시주, 그 햇빛, 햇님이 빛을 주어서 이렇게 밝게 살고, 더운 기운 태양을 주어서 이렇게 더웁게 살고, 저 공산에서 산에서 물이 출출출출 흘러 내려오니까 그 물이 모도 아무 임자 없는 물이요 쓸데없는 쓸데없는 물이니까 그놈 막 먹고 막 쓰고. 그것 기가 맥힌 시은(施恩)이여. 시은 아님이 없어.

이 몸뚱이 받아 나온 것도 시은, 어머니 아버지가 모도 이 모도 시여(施與)해 주신 이 몸뚱이여. 신체발부(身體髮膚)가 모두 부모가 준 이 몸뚱이 아닌가?
무엇이 시은 아님이 없어. 숨쉬는 것도 이 공중에 텅 빈 공중에 숨을 훌훌훌 쉬는 것도 그것도 모도 시은이여. 공중 가운데 공 가운데 허공 가운데 벌레 같은 것이 꽉 차, 박테리아 같은 벌레가 그저 뭐, 뭐 수없이 끓는 놈이 공기 속에 숨 한번 들이쉴 때 막 들어와서 죽고, 한번 내쉴 때 모두 쓸어져 죽고, 맨 시은(施恩)이여.

그러헌 시은을 담뿍 처짊어지고는 공송공과(空送空過)를 혀? 헛되이 공연(空然)히 지내고, 공연히 지내아? 안된다. 등한과일(等閒過日) 못쓴다. 지내놓고 일순간이라도 지내간 광음 헛되이 지내간 광음(光陰)은 다시 되찾을 수 없다. 딸깍 가버리는 시간은 다시 되찾을 수 없으니 그 촌음(寸陰)을 헛척치 말하라. 헛되이 보내지 말아라.

어쨌든지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여타시애(與他厮睚)다. 밤이나 낮이나 항상 이 화두, 내 허는 화두, '어째서 판치생모락 했나?' 말이 그렇게 쉬운 말 같지마는 참 쉬운 말 아니다. 그 하나 깨달라 놓으면은 아! 생사(生死)가 없는 도리니 말할 것 뭐 있나?
세상사를 환히 아는 것, 그런 것이 도(道)인가? 그런 것은 도 아니여. 백만겁지사(百萬劫之事)를 다 안다한들 알아봐, 뭣 할 것인가? 그 어따 쓰는 건가? 생사 없는 도(道)래야 되아.(11분23초~14분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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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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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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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생사는 본래 없다(No.361)—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중생들의 망령된 소견—‘생사(生死)다, 열반(涅槃)이다’ 하는 망령된 소견을 떼어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 아무것도 애착 집착할 것이 없어.
한 생각이 무량겁(無量劫) |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생사(生死), 열반(涅槃)’의 두 소견을 버리는 것이 바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


*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9분 47초)

 

 


[법문] 송담스님(No.361)—합동 천도재 법어(88.06.15) (용361)

부처님 말씀에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다”
생사가 본래 없건마는 중생(衆生)의 망령(妄靈)된 소견(所見)으로 생사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망령된 소견만 여의어 버리면, 바로 생사 없는 해탈도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중생을 제도(濟度)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망령된 소견—‘생사(生死)다, 열반(涅槃)이다’ 하는 그러한 망령된 소견을 떼어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그 망령된 소견이 깨끗이 떨어져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한 것입니다. 산승(山僧)이 남음이 없이 생사 없는 진리를 설해 주신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 밖에 다시 덧붙일 말이 있으리오마는.

『금강경(金剛經)』에 「보살도(菩薩道)를 증득(證得)했으되, 증득했다는 소견을 갖지 말아라.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했으되,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라. 그런 생각을 가지면 그것이 벌써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에 떨어진 것이라, 참 아라한이라 할 수가 없고, 참 보살이라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라한의 성과(聖果)를 증득하고, 보살도를 증득하고, 불과(佛果)를 이루고서도 ‘이루었다’고 하는 상(相)을 가져서는 안 되거든, 하물며 우리 중생들이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남을 사랑하고 하는 생각, 그런 애착과 집착심. 또는 재산에 대한 애착심, 자손에 대한 애착심, 그러한 애착과 집착심을 가져서 되겠느냐 이거거든.
성과(聖果)를 증득하고도 그러한 생각에 집착해서는 안 되거든, 하물며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잠시 왔다가 맺어진 인간관계, 잠시 왔다가 얻은 명예 · 권리 · 재산 등 오욕락(五欲樂)에 대한 애착심, 어찌 그러한 애착심에 얽매여서 해탈도를 증득하지 못해서 되겠느냐.

오늘 천도재를 맞이한 여러 영가(靈駕)와 법보단(法寶壇)에 만년위패(萬年位牌)로 모셔진 모든 영가, 그리고 거량(擧揚)을 통해서 우주법계에 한량없는 영가가 지금 이 법석(法席)에 초청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이 모든 유주무주(有主無主)의 영가들은 이 세상에 부모형제 · 처자권속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밖의 모든 밖에서 얻어진 모든 오욕락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잠시 이 세상에 와서 몸담아 있던 이 육체까지라도 하나도 애착(愛着)을 가질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애착 때문에 해탈도를 증득하지를 못하고, 극락정토(極樂淨土)에도 못 가고,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도 못 가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이 천도 법회(薦度法會)를 인연해서 그러한 모든 애착을 버려 버린다면, 그리고 이 몸뚱이—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버려 버린다면, 영가는 명실공히 대해탈도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혀 아끼고 받든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 몸뚱이는 늙어서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어떠한 사고로 인해서 결국은 이 몸뚱이는 버리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본래 그러한 실다운 것이 아닌 것으로 잠시 인연에 의해서 모여졌기 때문에 인연이 다하면 이것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여.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을 망령(妄靈)된 소견(所見)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슬픔이 있고, 원망이 있고, 괴로움이 있어. 그러한 집착 때문에 헌옷을 벗어 버리고도 갈 곳을 가지 못하고, 이 사바세계에 지나간 인연에 얽매여서 자기도 괴롭고, 유족들도 괴로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간곡히 부탁하노니, 오늘 천도재를 맞이한 여러 영가들은 아무것도 애착할 것이 없어. 집착할 것이 없어. 한 생각 놔 버리면, 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처럼 끝없는 극락정토에 왕생(往生)을 하실 것입니다.

‘한 생각’이 무량겁(無量劫)입니다. '한 생각 놓지 못하고서 무량겁에 감옥 속에 갇혀서 몸부림을 치느냐? 한 생각 놔 버림으로써,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영원한 해탈도를 증득하느냐?' 한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라 하셨습니다. 「한 생각에 바로 부처님의 땅에 뛰어오른다」 이 말은 참다운 말이며, 진실한 말이며, 바른 말인 것입니다.

용화선원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십여 년간을 설하신 바가 바로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깨닫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이나, 이 몸뚱이를 버린 영가나, 이 사천하(四天下) 삼계(三界)에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는 이 한마디를 뼛속 깊이 듣고 실천한다면은 벗어야 할 생사도 없고, 깨달라야 할 열반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生死), 열반(涅槃)’의 두 소견을 버리는 것이 바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영가를 위해서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을 위해서 사족(蛇足)을 이상으로써 마치고자 합니다. (1분52초~11분29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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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말씀에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다”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함령(含靈)• 함식(含識)• 군생(群生)• 군맹(群萌)•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망령(妄靈) ;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남. 또는 그런 상태.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해탈도(解脫道)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참고]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열반(涅槃) : [범] nirvana [파] nibbana 음을 따라 니반나(泥畔那) • 니원(泥洹) • 열반나(涅槃那)라 쓰고, 뜻으로 번역하여 멸(滅) • 적멸(寂滅) • 멸도(滅度) • 원적(圓寂) • 안락(安樂) • 해탈(解脫) 등이라 한다.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를 말함이니,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보살(菩薩) :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각유정(覺有情) • 개사(開士) • 대사(大士)등으로 번역.
①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②대승교에 귀의, 사홍서원을 발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며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자리 • 이타(自利利他)의 행을 닦으며 51위의 수행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이.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 - 수다원 · 사다함 · 아나함 · 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 자의식.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인상(人相) ;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중생상(衆生相) ; 산스크리트어 sattva-saṃjñā 중생이라는 관념·생각.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 스스로 타락하고 포기하여 향상과 노력이 없는 소견.
*수자상(壽者相) ; 산스크리트어 jīva-saṃjñā 목숨이라는 관념·생각. 목숨이 있다는 관념·생각. 생명체라는 관념·생각.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된 소견.
*성과(聖果) ; 성자(聖者)의 지위. 성인(聖人)의 도달경지[果].
성자, 성인이란 무루혜(無漏慧, 번뇌를 끊어내는[無漏] 지혜[慧])의 일부를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도(聖道, 성스러운 길, 성인의 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말한다.
수도(修道), 성도(聖道)는 부파불교의 사향사과(四向四果), 대승불교의 보살십지(菩薩十地)를 말한다.
*불과(佛果) ; 불인(佛因, 부처님이 되기 위한 인因. 즉 모든 선근공덕善根功德)의 대응어. 불도수행의 결과. 불위(佛位). 부처라고 하는 궁극의 결과. 결과로서 부처로 된 상태. 깨달음.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법보단(法寶壇) ;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인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 안에 위패를 모신 단(壇).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법보전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전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거량(擧揚) ; ①설법할 때에,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르는 일. ②화두, 공안(公案)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불교의 진수(眞髓)를 말하는 것. 불법을 선양하여 사람을 인도하는 것.
*유주무주(有主無主) ; ①주인(영가를 인도해 줄만한 인연있는 사람)이 있거나 없는. ②제주(祭主)가 있거나 없는.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청정한 국토로,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 있는데, 괴로움이 없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도 한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왕생(往生) ; 죽어서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어서 정토에 태어남.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서 극락에 태어남.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간다’
[참고] 『증도가(證道歌)』 (영가永嘉 스님)에서.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住相布施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깨닫고 나면 공(功)을 베풀지 않으니 일체 유위법(有爲法)과 같지 않다. 상(相)에 머문 보시는 천상에 나는 복이나, 마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니, 내생(來生)에 뜻과 같지 않음을 초래하게 되리라.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但得本莫愁末 如淨琉璃貪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어찌 무위(無爲)의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것만 하겠는가. 다만 근본을 얻을지언정 지엽은 근심하지 말라. 마치 깨끗한 유리구슬 안에 보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네. 내, 이제 여의주를 아나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함에 마침내 다함이 없도다.
*사천하(四天下) ; 사주(四洲).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있다는 네 대륙. ①남섬부주(南贍部洲) ②동승신주(東勝身洲) ③서우화주(西牛貨洲) ④북구로주(北俱盧洲)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남자 신도), 우바이(優婆夷 여자 신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족(蛇足) ; 화사첨족(畵蛇添足, 뱀을 다 그리고 나서 있지도 아니한 발을 덧붙여 그려 넣는다)의 뜻으로 '쓸데 없이 덧붙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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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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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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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수불세수(No.198)—(게송)得樹攀枝未足奇 | 화두 의단독로가 될 때까지 피나는 노력을 해야 | ‘짜게 먹은 사람이 물을 켠다’는 속담 | 보소(寶所)가 재근(在近)이다 |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치라.

 


*수불세수(水不洗水) ; '물로 물을 씻을 수 없다'는 말. '금으로 금을 교환할 필요가 없다[金不博金]'과 같은 비유이며 대구(對句)로 쓰인다.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이 불성(佛性)을 가진 부처이기 때문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 합일해야지 대상화하여 이분(二分)하거나 자기 밖에서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참고 ❶]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금강경』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도 말고, 법 아닌 것을 취하지도 말아야 한다.

야부(冶父)】 金不愽(博)金 水不洗水
금으로 금을 살 수(교환할 필요가) 없으며,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한다.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只是一般金 豈分能愽所愽 只是一般水 豈分能洗所洗 恁麽 則法則一味 見有二取 二取相亡 一味方現
다만 이 똑같은 금인데, 어떻게 팔 금과 살 금을 나누며, 다만 똑같은 물인데 씻는 물과 씻어지는 물을 어떻게 나누겠는가. 이러한즉 법은 한맛인데 보는 것에 두 가지 취함이 있으니, 두 가지 취함이 서로 없어져야 비로소 한맛이 나타날 것이다.

야부(冶父)】 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 水寒夜冷魚難覓 留得空般載月歸
가지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요,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 비로소 장부로다. 물도 차고 밤도 추워 고기 찾기 어려우니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도다.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得一心存未是奇 一處亦亡是丈夫 到這裡 凡情脫盡 聖解亦亡 但將無私照 却來是非場
일심을 얻어 간직함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 한 곳마저도 없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범부의 망심도 다 떨어지고 성인의 앎도 없으며, 다만 사심 없는 비춤을 가지고 시비의 마당에 다시 올 뿐이다.

 


[참고 ❷] 『종용록(從容錄)』 제51칙 '법안선륙(法眼舡陸)'
水不洗水 金不博金 佛不求佛 法不說法
물로 물을 씻지 못하고 금으로 금을 바꿀 수 없으며, 부처가 부처를 구하지 못하고 법으로 법을 설할 수 없다.

 

 

(16분)

 


[법문] 송담스님(No.198)—1983년 4월 첫째 일요법회(83.04.03) (용198)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하고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니라
나무~아미타불~
수한야랭어란멱(水寒夜冷魚難覓)한디  유득공선재월귀(留得空船載月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요, 나무를 얻어서 그 가지를 붙들고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이것은 족히 기특한 것이 되지를 못하고,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니라. 그 낭떠러지에 그 붙잡고 있던 그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가지고 안 떨어지려고 매달려 있던 그 손을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탁! 놔 버릴 때 바로 대장부(大丈夫)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질까 두려워서 나무가지를 붙잡고 그 안간힘을 쓴다’하는 것은 무엇을 표하는 말이냐 하면 한 마음, 일심을 얻어 가지고 그 일심을 놓치지 아니할려고 그 안간힘을 쓰는 데에다가 비유를 한 것이여.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거나, 관세음보살을 부르거나 또는 옴마니반메훔이나 그러한 주력을 하거나 그 어떠한 자기 나름대로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한 어떤 한 경계를 맛보아 가지고, 그 경계를 놓치지 아니할려고 그 안간힘을 쓰는데,
조끔 시끄러우면 신경질을 내고, 조끔 복잡하면 그걸 피하려고 하는 이유가 한 마음 경계를 얻어가지고...

그 시끄럽고 고요한 것, 복잡하고 편안한 것 그러한 경계에, 그러한 것에 집착을 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말고 용감하게 그놈을 놔 버려. 그 한 곳마저도 놔 버릴 때에 대장부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수한야랭어란멱(水寒夜冷魚難覓)이여. 물은 차고, 밤은 냉랭(冷冷)해서 고기를 찾기가 어려워. 고기란 놈이 저 깊은 물 밑 속에 가서 가만히 숨어 버렸기 때문에 고기를 찾을 수가 없다 그말이여.
유득공선재월귀(留得空船載月歸)로구나. 빈 배에는 달만 가득 싣고 돌아오더라 그말이여.

‘참선하는 사람은 일체 경계(境界)에 집착을 해도 못쓴다. 또 경계를 버리려고 하지도 말아라’ ‘어떠한 경계를 다달았어도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해라’
이렇게 법회 때마다 그렇게 강조를 하고 주장을 하고 설교를 해왔는데, '한 마음마저도 놔 버려야 한다'

‘그러면 화두를 들지 말고 놔 버리란 말인가?’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들려지면, 어찌 화두에 집착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가 안 되고, 공부를 바른길을 찾지를 못하니까, 자꾸 일체 경계에 다다러서 ‘그 경계를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화두를 놓치지 말라’ 이렇게 말을 할 수밖에는 없었지만,
그렇게 애를 쓰고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하게 되면, 마침내는 화두를 들려고 아니해도 저절로 의단이 현전(現前)을 해서 앉아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경계가 시끄럽거나 편안하거나, 조용하거나 복잡하거나, 전혀 그러한 것에 상관이 없이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의단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야 무엇을 집착을 하며, 무엇을 피하며, 무엇을 싫어하고 미워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렇게 될 때 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하고 온갖 노력을 다해서, 법문도 열심히 듣고 화두를 올바르게 거각(擧却)을 해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하도록 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피나는 노력 없이 어떻게 그러한 경계가 올 것이냐 이말이여.
‘짜게 먹은 사람이 물을 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게 몸과 목숨을 바쳐서 일분일초를 알뜰히 정진해 나가고, 역경계(逆境界)와 순경계(順境界) 속에서 일분일초도 등한히 하지 아니하고 애를 써 나간다면 반드시 대도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비(竹篦)를 치고 잠시 입선(入禪)을 하겠습니다.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십시오.
오른다리를 밑으로 잡어댕기고 그 위에다가 왼다리를 올려놓고, 그리고 그 발 위에 배꼽 앞에다가 오른손 손바닥을 위에로 해서 놓고 그리고 왼손바닥을 그 위에다가 포개놓고 엄지손을 이렇게 배를 맞대셔.

그러고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서, 뜰썩뜰썩 이렇게 흔들어서 한 가운데에다가 딱 안정을 시키고,
몸을 단정하게 척량골(脊梁骨)을 세우되 어깨나 목에 힘을 다 빼고, 어금니는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혀끄터리를 갖다 대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뜹니다.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에는 호흡을 바르게 하는데, 호흡을 바르게 하는 것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 것이여.

단전호흡에 들어가기 전에 3번 ‘준비 호흡’을 하는데, 준비 호흡은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가뜩 가슴이 그득하도록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들어마시세요.
가뜩 들어마셨으면 숨을 딱 정지를 해가지고 한참동안 참는 거여.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데까지 참았다가 입을 조끔 벌리고 입으로 ‘후~’하고 숨을 다 내쉬는 겁니다. 내쉬세요. 가슴속에 한 점도 없이 다 내쉬어.(1번)

다 내쉬었으면 다시 한 번 또 코로 들어마셔. 어깨를 좀 드는 듯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십니다. 가뜩 들어마셔 가지고 딱! 정지를 해, 한참 참았다가 입으로 ‘후~’하고 내쉬는 거여.(2번)
다 내쉬었으면 또 한 번 코로 가뜩 들어마셔. 정지. 입으로 또 ‘후~’하고 다 내쉬어요.(3번)
이것이 준비 호흡이 끝났습니다. 다 내쉬었어.

완전히 다 내쉰 다음에 조용하게 인자 코로 들어마시되, 가슴으로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코로 들어 마시되, 불룩하기는 배꼽 밑에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면서 아랫배를 불록하게 만들면 되는 거여, 의식적으로.

아까 (준비 호흡 때) 가슴으로 들어마실 때는 가뜩 들어마셨지만, 이제는 준비 호흡이 아니고 정식으로 단전호흡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렇게 가뜩 들어마시는 게 아니에요. 8부(八部) 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약 8부 쯤만 들어마셔. 아랫배가 1~2cm 쯤 약간 볼록해진 듯 이렇게만 하면 되는 거여.
들어마셨으면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조용하니 내쉬는데, 입으로 내뿜는 게 아니라 입은 다문 채 코로 내쉬어요. 코로 내쉬면서 아랫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렇게 하면서 내쉬는 거여.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 코로 들어마시면서 아랫배가 또 차츰차츰 차츰차츰 볼록해지도록 하면서 마시는 거여. 8부 쯤 들어마셔.
들어마셨으면 또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조용하게 또 내쉬는데, 내쉬는 시간은 약 4초나 5초 쯤 들어마신 시간보다 조금 더 길게 내쉬는 거여.

내쉴 때 ‘이뭣고~?’, 속으로 그렇게 화두를 생각하면서, 화두를 들면서 숨을 내쉬는 거여.
숨을 내쉴 때에 배는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단전호흡과 화두를 함께하는 가장 묘(妙)한 방법입니다.


죽비를 치세요.

(입선 入禪)

같이 입선을 한 이 공덕(功德)으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모두가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기를 축원(祝願)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소(寶所)가 재근(在近)이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또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치라’ 하셨습니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보배 곳, 영원히 평생 동안 쓰고도 남을 소중한 보배. 영원한 보물. 그 보배 곳,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쳐라.(27분21초~43분2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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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득수반지미족기~'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 희로애락 · 빈부귀천 · 시비이해 · 삼독오욕 · 부모형제 · 춘하추동 ·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 · 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관(觀)한다 ; 화두를 들어 나가는 데에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하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한다.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맥힌 상태에서 ‘이뭣고?’ 하는 것을 '화두를 관(觀)한다'고 말한다.

[참고] 송담스님(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78.08.27)
잠시도 화두를 떠나서는 우리의 공부는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화두는 우리의 앞에 역력(歷歷)하고 또록또록하게 나타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 싱겁고 맛없는 한마디 말이지마는 계속 들고 또 들고,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해—‘생각한다’고 하면은 조금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어 나가는 데에는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맥힌 상태에서 ‘이뭣고?’, 이것을 생각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라 하면 이리저리 따지고 비교하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인데, 이 화두를 생각하는 것은 따지고 더듬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하는 그런 이론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인(古人)들은 ‘관(觀)’이라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볼 관(觀)’자. “화두를 관조(觀照)하라”
‘볼 관(觀)’자. “관(觀)하라”

이렇게 ‘본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46분54초~48분26초)

[참고] 송담스님(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
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척량(脊梁 등마루 척/대들보 량) ; 등마루의 거죽 부분. *등마루 ; 등골뼈가 있어서 울룩불룩하게 줄진 등의 가운데 부분.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대도정법(大道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축원(祝願 빌·기원할 축/원할·바랄 원)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보소(寶所) ; 보배[보물寶物]가 있는 곳[所]. 대승(大乘)의 최고 경계인 구경열반(究竟涅槃 깨달음의 극치에 달한 최상의 열반)을 비유한다. 곧 성불(成佛)을 말한다. 반면에 소승의 열반은 진실이 아닌 화성(化城 일시의 환화幻化의 성城)에 비유한다.
보소(寶所)라는 말은, '보배[보물寶物]가 있는 곳[所]'이라는 말은 진심(眞心) · 본래 부처[本佛] · 자성(自性)의 보배이다.
*화성(化城) ; 일시의 환화(幻化)의 성(城). 소승의 경계를 비유함. 법화경에서 설한 7종의 비유 [법화칠유法華七喩]의 하나.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을 대승의 불과(佛果), 곧 '보배가 있는 장소[寶所]에 이르게 하려고 하나, 가는 길이 멀고 험악하므로 중생이 두려워하여 보물을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하니, 방편으로 먼저 소승열반을 설하셨으니, 마치 화성(化城)을 만들어 그곳에서 중생이 휴식을 취해 피로를 다 풀게 한 후 화성(化城)을 없애 버리고, '보물 있는 곳이 멀지 않다[寶所在近]' 하며 대승의 불과(佛果)에 이르게 한다는 것에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

[참고]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 『법화경』 (청량사 | 조인도철 역해), 『법화경』 (시공사 | 이연숙 옮김) 참고.
비구들아, 만일 여래(如來)가 열반할 때가 되면, 또 대중들이 청정할 뿐 아니라 믿고 이해함이 견실하여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이치를 환히 알며 깊은 선정을 성취하게 되면, 여래는 이를 알고 곧 성문과 보살들을 모아 이 가르침을 설한다.
세상에 이승(二乘, 성문과 연각)으로 멸도하는 일은 없나니 오직 일불승(一佛乘)으로써만 멸도(滅度)할 수 있다.
비구들아, 알라. 나는 중생들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그들이 소법(小法)을 즐기며 오욕에 깊이 집착함을 알았기에 방편으로 열반을 설했고, 중생들은 내 말을 듣고는 곧 믿고 받아 지녔다.

예를 들어, 아주 험난한 데다 사람마저 살지 않아 무시무시하며, 길이가 5백 유순이나 되는 나쁜 길[惡道]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진귀한 보물 있는 곳에 가기 위해 그곳을 지나려 한다고 하자.
그때 그들 가운데 한 길잡이[導師]가 매우 총명하여 그 길의 형세를 환히 다 알고 있었기에, 무리들을 이끌고 그 무서운 곳을 지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무리들은 얼마 가지 않아 귀찮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 길잡이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너무나 피곤한 데다 무서워서 도저히 더이상 갈 수가 없소. 게다가 갈 길도 아직 멀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소.’

그러자 갖가지 방편(方便)을 지니고 있는 길잡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 참 딱하도다. 어째서 큰 진귀한 보물을 포기하고 돌아가고자 하는가?’ 그리고는 방편을 써서 그 길의 3백 유순 되는 지점에 신통력으로 성(城) 한 채를 만들어 놓고서 무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두려워 마시오. 그리고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마시오. 여기 이렇게 큰 성이 있으니 들어가서 마음껏 지내시오. 이 성에 들어가면 편안히 지낼 수 있고, 또 앞으로 더 나아가면 보물이 있는 곳[寶所]에 다다를 수 있소’

그러자 지쳐 있던 무리들은 매우 기뻐하며 기적 같은 일[未曾有]이라고 찬탄하며 말했다. ‘이제 이 험한 길[惡道]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얻었도다.’
그리고 그들은 신통력으로 만들어진 성[化城]으로 들어가, 이미 험한 길 다 벗어났고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길잡이[導師]는 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한 뒤 피로가 다 풀린 줄 알고는, 신통력으로 만든 성[化城]을 없애 버리고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어서 갑시다. 보물 있는 곳이 멀지 않소(寶處在近). 예전에 있던 큰 성은 그대들을 쉬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신통력으로 만든 것이었소.’

비구들아, 여래 또한 이와 같아서 그대들을 이끄는 큰 스승(大導師)이다. 그래서 모든 생사 번뇌와 악도(惡道)가 험난하고도 하염없이 긴 것을 알고 또 응당 떠나고 건너야 할 것임을 안다.
그러나 만일 중생들이 단지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만 듣는다면, 부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가까이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또 ‘부처님 되는 길은 멀고도 머니 오래도록 노력하여야 성불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또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겁 많고 약하고 하열(下劣)함을 알기에 중도에 쉬게 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두 가지 열반을 설했다.

그리고 만일 중생들이 이 두 경지에 안주하면 여래는 곧 다시 이렇게 설한다.
‘그대들이 머물고 있는 경지는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운 경지일 뿐이니,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대들이 얻은 열반을 잘 관찰하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진실한 열반이 아니요. 다만 여래가 방편으로 일불승을 분별하여 삼승(三乘)으로 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저 길잡이가 무리들을 쉬게 하기 위하여 신통력으로 큰 성을 만들고, 다시 충분히 쉬었음을 알고는 ‘보물이 있는 곳은 가깝소. 그리고 이 성은 진짜가 아니라 내가 신통력으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일불승(一佛乘) ; 산스크리트어 eka-buddha-yāna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함.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가르침. 모든 중생을 성불하게 하는 부처님의 유일한 가르침.

[참고] 『전심법요(傳心法要)』 (황벽희운黃蘗希運 선사)
言化城者 二乘及十地等覺妙覺 皆是權立接引之敎 竝爲化城 言寶所者 乃眞心本佛自性之寶

화성(化城)이라는 것은 이승(二乘)과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을 말함이니 모두가 방편으로 세워 인도하는 가르침으로써 이를 모두 화성이라 한다. 또 보소(寶所 보배의 장소)라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진심(眞心)인 본래의 부처[本佛]이며, 자성(自性)의 보배를 말한다.

此寶不屬情量 不可建立 無佛無衆生 無能無所 何處有城 若問此旣是化城 何處爲寶所 寶所不可指 指卽有方所 非眞寶所也 故云在近而已 不可定量言之 但當體會契之卽是

이 보배는 정량(情量 범부의 망념분별)에 속한 것이 아니며, 건립할 수도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는데 어느 곳에 성(城)이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이미 화성(化城)이라면 '어느 곳이 보배의 장소[寶所]인가?'라고 묻는다 해도 보배의 장소는 가리킬 수 없다. 가리킨다면 곧 방향과 처소가 있게 되므로 참으로 보배의 장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까이에 있다[在近]'고만 말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헤아려서 말할 수 없으니 다만 당체(當體)에 계합하면 되는 것이다.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쳐라' ; 수불세수(水不洗水).  '물로 물을 씻을 수 없다'는 말. '금으로 금을 교환할 필요가 없다[金不博金]'과 같은 비유이며 대구(對句)로 쓰인다.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이 불성(佛性)을 가진 부처이기 때문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 합일해야지 대상화하여 이분(二分)하거나 자기 밖에서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참고 ❶]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금강경』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도 말고, 법 아닌 것을 취하지도 말아야 한다.

【야부(冶父)】 金不愽(博)金 水不洗水
금으로 금을 살 수(교환할 필요가) 없으며,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한다.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只是一般金 豈分能愽所愽 只是一般水 豈分能洗所洗 恁麽 則法則一味 見有二取 二取相亡 一味方現
다만 이 똑같은 금인데, 어떻게 팔 금과 살 금을 나누며, 다만 똑같은 물인데 씻는 물과 씻어지는 물을 어떻게 나누겠는가. 이러한즉 법은 한맛인데 보는 것에 두 가지 취함이 있으니, 두 가지 취함이 서로 없어져야 비로소 한맛이 나타날 것이다.

【야부(冶父)】 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 水寒夜冷魚難覓 留得空般載月歸
가지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요,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 비로소 장부로다. 물도 차고 밤도 추워 고기 찾기 어려우니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도다.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得一心存未是奇 一處亦亡是丈夫 到這裡 凡情脫盡 聖解亦亡 但將無私照 却來是非場
일심을 얻어 간직함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 한 곳마저도 없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범부의 망심도 다 떨어지고 성인의 앎도 없으며, 다만 사심 없는 비춤을 가지고 시비의 마당에 다시 올 뿐이다.

[참고 ❷] 『종용록(從容錄)』 제51칙 '법안선륙(法眼舡陸)'
水不洗水 金不博金 佛不求佛 法不說法
물로 물을 씻지 못하고 금으로 금을 바꿀 수 없으며, 부처가 부처를 구하지 못하고 법으로 법을 설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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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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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삼학(계정혜)2021. 7. 25. 16:54

삼학((No.306))—계 · 정 · 혜(戒定慧), 삼학(三學)은 삼위일체(三位一體) |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참선을 해야 하고, 바른 참선을 하고자 하면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삼학(三學) ;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이가 본성(本性)을 깨닫는데 반드시 닦아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수행 부류, 계정혜(戒定慧), 계율(戒律) · 선정(禪定) · 지혜(智慧)를 말한다. 또 계학(戒學) · 정학(定學) · 혜학(慧學)이라고도 하고, '아주 뛰어나다'의 뜻으로 '증상(增上)-'으로 시작하여 증상계학(增上戒學, 增戒學) · 증상심학(增上心學, 增心學, 增上意學) · 증상혜학(增上慧學, 增慧學)이라고도 한다.

계율(戒律)에 의해 악업(惡業), 나쁜 짓을 방지하고, 선정(禪定)에 의해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지혜(智慧)에 의해 번뇌를 끊고 본성을 깨닫는다.
불도(佛道) 수행(修行)을 성취코자 하면 계(戒)와 정(定)과 혜(慧), 삼학(三學)을 겸해서 닦아야 하나니, 계(戒)의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의 물이 담기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해야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난다.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92~95. (가로판 p96~100)
帶婬修禪은  如蒸沙作飯이요  帶殺修禪은  如塞耳叫聲이요  帶偸修禪은 如漏巵求滿이요  帶妄修禪은  如刻糞爲香이니  縱有多智라도  皆成魔道니라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으며,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가득차기를 바라는 것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으니, 비록 많은 지혜가 있더라도 다 마(魔)의 길을 이루리라.
    
주해(註解)
此는  明修行軌則이니  三無漏學也라  小乘은  禀法爲戒하야  粗治其末이요 大乘은  攝心爲戒하야  細絶其本이니  然則法戒는  無身犯이요  心戒는 無思犯也라

이것은 수행하는 법칙으로 세 가지 무루학(無漏學)을 밝힌 것이다. 소승은 법(法)을 받아 지키는 것으로 계율을 삼기 때문에 대략 그 끝[末]을 다스리게 되고, 대승은 마음[心]을 거두는 것으로 계율을 삼기 때문에 자세히 그 뿌리[本]를 끊는 것이니 그러므로 법(法)을 지키는 계율은 몸으로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마음으로 지키는 계율은 생각으로 범하는 일까지 없는 것이다.

婬者는  斷淸淨하고  殺者는  斷慈悲하며  盜者는  斷福德하고  妄者는  斷眞實也라 能成智慧하야  縱得六神通이라도  如不斷殺盜婬妄則必落魔道하야 永失菩提正路矣리라  此四戒는  百戒之根故로  別明之하야  使無思犯也라

음란한 것은 깨끗한 성품을 끊고, 살생하는 것은 자비스런 마음을 끊으며, 도둑질하는 것은 복과 덕을 끊고, 거짓말하는 것은 진실한 것을 끊는다。비록 지혜를 이루어 여섯 가지 신통[六神通]을 얻었다 하더라도, 만약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과 거짓말하는 일을 끊지 않는다면, 반드시 마(魔)의 길에 떨어져 영영 보리(菩提)의 바른 길을 잃을 것이다。이 네 가지 계율은 백 가지 계율의 근본이므로, 따로 밝혀서 생각으로도 범함이 없도록 한 것이다.

無憶曰戒요  無念曰定이요  莫妄曰慧라  又戒爲捉賊이요  定爲縛賊이요 慧爲殺賊이라  又戒器完固하야사  定水澄淸하야  慧月方現이니 此三學者는  實爲萬法之源故로  特明之하야  使無諸漏也니라
靈山會上에  豈有無行佛이며  少林門下에  豈有妄語祖리요

기억하지 않는 것[無憶]을 계율이라 하고, 생각이 없는 것[無念]을 선정이라 하며, 망녕되지 아니함[莫妄]을 지혜라 한다。다시 말하면, 계율은 도둑[賊]을 잡는 것이요, 선정은 도둑을 묶어 놓는 것이며, 지혜는 도둑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또한 계의 그릇이 온전하고 견고해야 선정의 물이 맑게 고이고, 따라서 지혜의 달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이 삼학은 참으로 만법의 근원이 되는 것이므로, 특별히 밝혀서 모두 새어 빠뜨리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다.
영산회상에 어찌 함부로 지내는 부처가 있었으며, 소림문하에 어찌 거짓말하는 조사가 있으랴.

*삼무루학(三無漏學) : 세 가지의 흘러 새어 나감이[流漏] 없이 닦아 감을 말한다。망녕된 생각이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법계체성(法界體性)을 지키게 하는 공부에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곧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그것이다。이것을 간단히 삼학(三學)이라고도 한다。그러나 세 가지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고 서로 통하고 같이 이어진 것이다.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도둑[賊] : 번뇌 망상이 참 성품을 해롭게 하는 것이므로, 번뇌를 가리켜 도둑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33 : 87년 6월 화두 불명 수계법어) (No.399 : 89년 9월 첫째 일요법회) (No.425 : 90년 9월 첫째 일요법회) 법문에서 요약.
불도(佛道) 수행(修行)을 성취코자 하면 계(戒)와 정(定)과 혜(慧), 삼학(三學)을 겸해서 닦아야 하나니, 계(戒)의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의 물이 담기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해야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난다.

계(戒)는 그릇에다가 비유를 하고, 또 참선해서 마음을 닦는 정(定)은 그릇에 담는 맑은 물에다가 비유를 했고,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확철대오한 그 깨달음을 하늘에 떠 있는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계율을 잘 지켜서 그 그릇이 온당해야 거기에 맑은 물을 담을 수 있고, 그 맑은 물이 담긴 그릇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고요하게 함으로써 하늘에 뜬 밝은 달이 그릇에 곱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뜬 달이 그릇에 나타나기를 바래면 그릇에다가 맑은 물을 담아야 하고, 그 맑은 물이 잘 담기게 하려면 그릇이 깨지거나 기울어지지 않도록 그릇이 온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참선을 해야 하고, 참선을 장애 없이 잘하려면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율과 참선 수행과 이 깨달음은 삼위(三位)가 일체(一體)입니다. 세 가지가 항상 동시에 갖춰지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만 없어도 그것은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그 솥이 넘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은 부득이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하자니까 셋으로 나눠서 말하는 것이지, 원래는 계와 정과 혜는 하나요 동시입니다.
바른 계(戒)를 지키려면 정과 혜를 닦아야 하고, 바른 정(定)을 얻으려면 계와 바른 혜를 가져야 하고, 바른 혜(慧)를 얻으려면 바른 정과 바른 계가 밑받침이 되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바로 붙이나 꺼꾸로 붙이나 이 세 가지는 동시입니다. 이 계정혜를 동시에 잘 닦으려 참선을 잘해야 합니다.

 

 

 

(6분 20초)

 

 


[법문] 송담스님(No.306)—19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어(86.08.03) (용306)

불교(佛敎)를 한마디로 말해서 삼학(三學)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 중생은 탐진치(貪瞋癡)—탐내는 마음, 또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 탐 · 진 · 치 3가지의 옳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을 돌이켜서 삼학(三學)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삼학은 계 · 정 · 혜(戒定慧) 이것을 삼학이라, '석 삼(三)' 자, '배울 학(學)' 자, 삼학(三學)이라 그러고. 탐 · 진 · 치를 삼독(三毒)이라 그러는데, 삼독을 돌이켜서 바꾸어 가지고 삼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삼학(三學)의 첫째는 계(戒)입니다. 계(戒). 계율(戒律).
5계와 10계 또는 비구 250계 또는 보살 십중대계(十重大戒)와 48경계(四十八輕戒), 이런 계가 있는데, 이 계는 '몸으로 지키는 계'와 '마음으로 지키는 계'가 있습니다.

이 계(戒)를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을 올바르게 가져나감으로 해서 계를 지키고, 그다음에 정(定)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그 탐진치 삼독으로 훨훨 불이 타 가지고 안정을 얻지 못하고 노상 둥둥 떠다니고, 노상 치닫고 잠시도 고요히 안정되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한곳에 안정을 시킴으로 해서 자기의 본성(本性)을 찾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정(定)을 닦음으로 해서 그래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데,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계(戒)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定), 선정(禪定)은 그 그릇에 물을 담는 거와 같고.
그래서 계기(戒器)요, 계의 그릇이요, 정(定)의 수(水)요, 선정(禪定)의 물이다 그 말이죠. 그리고 혜월(慧月)이여, 지혜는 달과 같은 것입니다.

계의 그릇이, 계를 잘 닦음으로써 그 그릇이 깨끗하고 딱 바로 놓여져야 거기에 맑은 참선의 물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맑은 물을 담음으로 해서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그 그릇 안에 물속에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달이 물속에 잘 나타나기를 바래거든 그 물이 맑고 고요해야 하고, 물이 맑고 고요하게 잘 담기게 할라면은 그릇이 깨끗하고 그릇이 바로 놓여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항상 셋이 같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계(戒)만 있고 정(定)이 없어서는 혜가 이룰 수가 없고, 혜(慧)만을 바라면서 선정을 닦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계와 정과 혜, 삼학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인 것입니다. 3가지가 한 체(一體)인 것입니다. 계 있는 곳에는 정과 혜가 있고, 정이 있는 곳에는 계와 혜가 있고, 혜 있는 곳에는 정과 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3가지는 항상 동시요, 한 뭉텅이인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참선을 해야 하고, 바른 참선을 하고자 하면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앞으로 올바른 부처님 제자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바른 지혜를 얻어서 영원한 깨달음과 행복을 얻고자 하거든, 맨 먼저 부처님의 계를 잘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저 산에 나무에 올라가 가지고 물속에서 사는 고기를 구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 모래를 쪄 가지고 밥을 만들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모래를 솥에다 넣고 불을 지핀다 하더라도 그 모래는 밥이 되지 아니한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 좋은 집을 지을라면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나 질컥벌컥한 그 굳지 않는 땅에다가 아무리 설계를 잘해서 훌륭한 집을 지은다 해도 그 집은 얼마 가지 못해서 기둥이 가라앉고 벽이 갈라지고 집이 쓰러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타시는 계율이 얼마만큼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가를 여러분은 잘 아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1분39초~7분5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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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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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새판잡이2021. 7. 6. 07:59

새판잡이(세등선원No.68)—산철에도 정진이 중단되지 아니하고, 여일하게 되아 가도록 잘 잡드리를 해야 다음 철 결제에 연결이 된다.

*새판잡이 ; 새로 일을 벌여 다시 하는 일.
해제(解制)를 하고 산철 동안에 어디서 무엇을 하건 꼭 결제(結制) 때와 같이 정진이 중단 없이 여일(如一)하도록 잘 잡드리를 해야 그다음 철 결제에 연결이 됩니다. 산철 동안에 그럭저럭 지내버리면, 다음 결제 시작하면 다시 또 공부가 새판잽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10년, 20년, 일생을 선방을 다닌다 해도 도업(道業)을 성취를 못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송담松潭)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2분 53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세등68)

오늘 해제하는 마당에 왜 이런 말씀을 허냐 하면은 해제(解制)가 바로 결제(結制)거든.
오늘 해제니까, 벌써 걸망짐 모두 다 싸놓고 어디로 가리라 하는 것을 미리 다 며칠 전부터서 장만해 둔 것을 내가 환히 다 알고 있지마는, 해제가 결제거든.

해제인 줄 알고 걸망 짊어지고 나가면은 봄바람에 기분 참 좋은 것은 사실이나, 행여나 화두(話頭) 하나를 놓쳐버리면은 그것이 어찌 훌륭한 납자(衲子)라 할 수가 있겠느냐.

해제해서 터억 걸망을 지고 나가는 바로 첫걸음부터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정말 지난 석 달 동안 올바르게 정진을 한 사람이고,
걸망 짊어지고 팔도강산을 좁다하고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濶)하고 막 여기저기 싸다니면서, 희희닥거리고 화두는 놓쳐버린다면 그 사람은 석 달 동안 껍데기로만 참선을 했지, 속으로는 진짜 참선을 아니한 사람이다. 이력서를 내보일 것도 없고, 벌써 허는 행동이 바로 언제나 자기의 이력서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어디 산철 결제 하는 데 가서 있으면은 그런 데 가서 정진을 해도 좋고, 그런 데가 없으면은 인연 따라서 지내되, 어디에 가서 어디를 걸어가거나 어느 절에 가서 머물거나, 무엇을 하던지 간에—은사스님 절에 가서 일을 거들거나, 어디 다른 친구 절에 가서 거들거나,
무엇을 하건 간에, 어디를 가건 간에, 꼭 결제 중에 하는 거와 같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 정진이 중간에 중단되지 아니하고, 여일하게 되아 가도록 잘 잡드리를 해야 다음 철 여름 결제에 연결이 된다 그말이여.

그 석 달 동안을 애써서 해 가지고 산철 동안에 그럭저럭 지내버리면, 다음 여름 결제 시작하면 다시 또 공부가 새판잽이가 되는 거여.
그렇게 되면은 앞으로 10년, 20년, 일생을 선방을 다닌다 해도 도업(道業)을 성취를 못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이여.(39분2초~41분5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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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서 머므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걸망 ; 물건을 담아서 등에 질 수 있도록 만든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
*납자(衲子 옷을 꿰맴 납/사람 자) ; 남이 버린 헌 옷이나 베 조각들을 기워서 만든 옷을 입은 수행승. 흔히 참선을 하는 스님(禪僧)이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惺惺]한 상태.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濶) ; 높은 산 깊은 물도 꺼리지 않고. 憚(꺼릴 탄), 濶(넓을 활).
*산철(散철) ; 본철(本철—하안거,동안거)가 아닌 시기.
*새판잡이 ; 새로 일을 벌여 다시 하는 일.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 불도의 수행. 진리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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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참((No.084))—용화사 모든 법회의 목적은 업장소멸하고, 참나의 주인공을 깨달라 영원한 생사해탈 | 참선을 함으로 해서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끊어야 | 법(法)을 들었걸랑 일분일초를 아껴서 열심히 수행해야 | 죄의 종자(種子)가 따로 있어서 죄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우리의 마음자리로부터 일어나는 파도.

*실참(實參 참됨·참으로·진실로 실/헤아릴·살필 참) ; 실참실수(實參實修).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수행하는 것.
실참(實參), 실답게 참구(參究)한다는 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을 말한다.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관념에 그치거나 들어서 아는 지식에 그치지 않고 참으로 실천하는 선수행을 말한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실참실오(實參實悟)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깨달음. 실참(實參), 실답게 참구(參究)한다는 것은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무잡(純一無雜)할 수가 없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10분 12초)

 


[법문] 송담스님(No.084)—1978(무오)년 칠석 법회(78.08.10) (용084)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정월(正月)이나 또는 초파일(初八日)이나 칠석(七夕)이나 백중이나 어떠한 날짜에 열리는 행사건 간에 그 날짜의 명목은 다를망정 그 법회(法會)의 목적은 언제나 한 가지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내간 그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우리의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나아가서 앞날에 있어서 새로 업을 짓지 아니한 가운데 나 자성(自性), 참나의 주인공(主人公)을 깨달라서 영원히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 있는가. 오직 그 목적 하나가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앞으로도 몇억만 겁을 육도(六道)를 윤회하면서 생사고통(生死苦痛) 속에서 흘러갈 것인가.
그 문제를 해결 짓기 위해서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참선을 하기 위해서는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조사선(祖師禪) 활구법문(活句法門)을 자주자주 들어야 하고, 그런 법회를 열기 위해서는 법당(法堂)을 넓혀야겠고, 법당을 넓히는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에 전라북도 남원 대복사(大福寺) 중창(重創)에 대한 유래(由來)에 설화를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정말 우리는 과거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우리가 지은 그 업(業)의 원인으로 인해서 이렇게 여기서 죽어서 저가 태어나고, 저기서 죽어서 여기 태어나기를 몇천만 번을 거듭하면서 천당(天堂)에 올라갔다, 사람이 되었다, 지옥(地獄)으로 떨어졌다, 축생(畜生)이 되었다, 귀신(鬼神)이 되었다, 수라(修羅)가 되었다, 이렇게 육도(六道)를 돌고 돌면서 금생(今生)에 다행히 인도(人道)에 태어나 가지고 법보선원 이 법당(法堂)에 모여서 오늘 이 같은 자리에, 같은 시간에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모인 그 원인이 아무 까닭 없이 우연히 이렇게 만나지는 것이 아니라, 꼭 이 자리에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원인을 우리 스스로가 심어 놓아 가지고 그 종자(種子)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이러한 결과를 우리는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 일분일초 동안도 아무 생각 없이 고냥 고대로 있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생각이던지 일어나면 그 생각이 잠시 머물렀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또 그 생각이 꺼지면 꺼지자마자 또 딴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이 일어났다 또 다른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없어지고, 없어지면 또 생겨나고, 이래서 생각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생각이 바로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 행동으로 인해서 업(業)을 짓고, 업을 지음으로 해서 또 다음 업을 또 맞이하게 되게, 이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참선법(參禪法)을 통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 해서 그 생사심(生死心),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지 아니한 이상은 우리는 그러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앞으로 한량없는 세월 동안 또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남원 읍내 대복이와 같이, 관리(官吏)로서 그러한 착취(搾取)를 하고, 대복이의 증조, 대복이의 부친, 대대(代代)로 내려가면서 못된 짓을 하게 되면 구렁이 되기 십상팔구(十常八九)입니다. 구랭이가 안 되면은 지옥(地獄)에 갈 것이고, 지옥에 안 가면은 소나 말이 되어 가지고 그 빚을 갚아야 되는 것이여.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罪)를 갚으려고 든다면 과거로부터 금생에까지 온 세월, 몇백만 배의 세월을 거쳐도 갚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아무리 갚는다 해도 갚으면서 또 업을 짓게 되기 때문에 생사윤회는 끊일 날이 없는 것이여.

다행히 우리는 삼천년 전에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같이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12년간의 고행(苦行) 끝에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부처님의 은혜로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 생사윤회부터 해탈(解脫)할 수 있는 위없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활구참선법에 의해서만이 그 무량겁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새로 업을 짓지 아니하면서 참나를 깨달라서 생사윤회(生死輪廻)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도 그러한 법(法)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도량(道場)에 발을 들여놨습니다. 그러한 도량에 발을 들여놓았건만, 바른 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용화선원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아니하고 여기서 먹고 자고 똥을 싸면서 죽을 때까지 있어 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른 약(藥)을 알고, 바른 약을 얻었으면 그 약을 여법(如法)히 잘 복용(服用)을 함으로써 병(病)을 낫을 수가 있는 것이지, 약을 알았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그 약을 구해서 호주머니에 넣어 놓고 있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이 아닌 것처럼, 법문(法門)을 들었다고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화사에서 기거를 하고 있다고 해서 또 공부가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법(法)을 들었걸랑 한시 일분일초를 아껴서 잠시도 끊일 사이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생각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 일어날 그 찰나(刹那)를 바로 되잡아 돌려 가지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회광반조(回光返照)를 할 때에 우리의 한량없는 업장(業障)은 봄눈 녹듯이 그 자리에서 녹아지는 것입니다.

원래 죄(罪)라고 하는 것은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죄의 종자(種子)가 따로 있어서 죄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우리의 마음자리로부터 일어나는 파도이기 때문에 그 마음자리 그것만을 올바르게 찾아서 깨달을 때에, 올바르게 찾고 있을 때, 죄는 이미 우리로부터 녹아지는 것이고 새로운 죄도 우리에게는 발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4분49초~15분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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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선방2021. 5. 23. 08:09

선방(세등24)—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 있는 선방, 선불장(選佛場)이다 | 참선을 하면 몸이 건강해지고 결정코 깨달음까지 이르른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10분 4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 (세등24)

숨을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하면서 내쉬는데,
숨을 들어마실 때 어떻게 들어마시냐 하면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불룩하도록 이렇게 하지를 말고, 물론 코로는 들어가겠지만 우리의 기분으로는 저 궁둥이 뒤에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이렇게 볼록해지도록 그런 기분으로 들어마시고,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머물렀다 내쉴 때는 ‘이리 해서 코로 내쉰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내쉴 때도 저리 뒤로 해서, 궁둥이 뒤로 해서 저 뒤로 쑤욱 내보낸다는 그런 기분으로 내쉬어 보시라 그말이여.

저 뒤에서 쑤욱 들어마셨다, 들어마신 호흡을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저 뒤로 쑤욱 배꼽을 뒤로 잡어당기면서 뒤로 내쉬는 거여.

그런데 절대로 무리하게 억지로 하지를 말어. 너무 억지로 해 가지고는 그냥 한 두어 번만 하면 숨이 가쁘게 이렇게 하시다가 ‘아이고! 그거 되아서 못하겠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예요.

아주 수월하게—들어마시는데 3초 걸리고,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한 4~5초 걸리게 조용하게 내쉬고,
이렇게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하는 거기에다가 ‘이뭣고~?’하는 알 수 없는 의단을 거기다가, 배꼽밑에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거기다가 관심을 두고서 화두를 거각(擧却)해 보시라 그말이여.
백 명이면 백 명, 몸도 차츰 건강해지고 가벼워지고 골치 아픈 병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하면 병이 낫거든.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있는 사람도 그게 낫고, 집안에서 무슨 일로 속이 상해서 가슴앓이 속병이 있는 사람도 이것을 하면 그 병이 낫는다 그말이여.

이것을 하면서 화두까지 거기다 겸해서 하면은 결정코 깨달음까지 이르른다 이말이여.
화두는 아니하고 밤낮 고것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병을 고치는 데에는 효과가 있지만 그래 갖고는 그건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여.

거기에다 화두를 꼭 붙여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해 나가면 몸도 건강하고 마침내는 깨달음에까지 이르른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이렇게 해 나가면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지 아니하고 가정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하시고 낮에도 시간 있는 대로 그렇게 하시고,
이 공부는 꼭 앉어서만 하는 게 아니라 일하면서, 말하면서, 걸어가면서, 차 타면서, 행주좌와 간에 할 수 있는 것이라, 오늘 백일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은 모두가 다 이 세등선원에 방부를 들인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못 장소가 형편상 이 세등선원일 수도 있고, 또 보문사일 수도 있고, 군산일 수도 있고, 또 시내일 수도 있고, 조치원일 수도 있고, 청주일 수도 있고, 서울일 수도 있습니다. 장소야 어디건 그거 상관이 없어.

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여. 선불장(選佛場)이여.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 있는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한 생각 한 생각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고, 한 생각 일어나는 그자리에서 숨을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
업장(業障)이 거기에서 봄눈 녹듯이 녹아 없어지거든. 업장이 녹아지면은 소원성취는 거기에 있거든.


내가 그전에는 얼굴이 아주 시커먼 사람인데, 아! 30년을 참선을 하니까, 내 얼굴보고 검다고 하지 않는다 그말이여.
성질이 아주 불같아 가지고 신경질을 잘내기로 아주 유명하고, 고집이 센 사람인데, 아! 참선을 했더니 나 보고 마음보 고약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 별로 없다.
여러분 가운데 혹 얼굴이 검어서 고민인 사람, 얼굴에 무엇이 많이 나서 고민인 사람, 또 신경질을 많이 내고 고집이 세다고 욕을 먹고 그러한 평판이 있는 분,
오장육부에 병이 많은—내가 또 병주머니여서 학교를 다닐 때는 1년에 한 달 내지 두 달은 꼭 결석을 했다.
아, 그런데 출가해 가지고 참선을 하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대단히 건강하다고 그런는데, 내가 별로 약도 많이 먹지도 않고, 병원에 가기를 그렇게 죽기보다 더 싫어한 사람이어서 병원에 잘 안 가고 그러는데, 참선을 해서 이렇게 몸도 건강해진 것 같어.

여러분들도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제가 금방 이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의식주 문제라든지, 일상 생활 속에서 화두를 단속하는 이러한 법을 명심을 해서 실천에 옮기신다면 얼굴도 예뻐질 것이고 오장육부의 병도 다 나아질 것이고,
성격이 고약하다고 평판이 있는 시어머니, 며느리, 스승, 상좌 할 것 없이 다 불보살과 같이—나는 워낙 고약한 사람이라 그렇지, 보통 된 사람이 그만큼 열심히만 하면 틀림없이 금생에 불보살과 같이 될 것을 나는 맹세를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아까 몽산 스님한테 책임을 따져야 됩니다. 몽산 스님이 대신 지옥에 간다고 맹세를 하셨거든.
나도 역시 몽산 스님과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깨닫지 못한다면 나도 여러분을 대신해서 지옥에 간다』고 자신있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도 그것을 느꼈고, 이러한 선지식(善知識)들의 법문을 여지없이 믿기 때문에 추호(秋毫)도 나는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오늘 결제일을 기해서 여기에 모이신 출가한 스님네나 마을에 계신 신도 여러분들, 오늘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정말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결정코 대도를 성취해 주시기를 간곡(懇曲)히 부탁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구름 일어나듯이, 산에 구름 일어나듯이 한도 없이 끝도 없이 천 가지, 만 가지 말을 이렇게 말을 한다 하더라도 저 바다 위에 떠있는 밝은 달은 원래로 말이 없느니라.

마지막 한마디는 끝내 여러분에게 드리지를 못합니다. 이 주장자에게 맡기고 내려갑니다.(1시간16분10초~1시간26분1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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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참고 ❸] 송담스님(No.401)—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이 한 철을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하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들이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들이나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하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 하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하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祖師)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立繩)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54분57초~59분45초)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소원성취(所願成就) ; 소원(바라는 것 또는 바라는 일)을 성취하는 것.

우리가 소원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본래 내 마음과 부처님 마음은 하나였었는데, 번뇌 망상으로 인해 업장(業障)이 가로막기 때문에 성취를 못하는 것이니까, 업장만 소멸한다고 하면은 소원성취는 바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성취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번뇌를 깨끗이 끊어 없애면 내 마음과 부처님 마음이 하나가 되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 감응(感應)이 되어서 소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 내 마음속에 무량겁으로부터 지어 내려오면서 저장해 놓은 번뇌 망상으로 인한 죄업의 종자(種子)를 소멸하고, 그놈을 돌려가지고 깨달음이 되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등등 자신의 본참화두를 철저한 신심(信心)과 큰 분심(憤心)과 큰 의심(疑心)을 가지고 간절히 알뜰히 정진하는 것입니다.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15권 '大智度論釋初品中毘梨耶波羅蜜義第二十六(초품 중 비리야[精進]바라밀을 풀이함)' (용수 지음 | 구마라집 한역 |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 동국역경원)
欲成佛道凡有二門 一者福德 二者智慧 行施戒忍是爲福德門 知一切諸法實相摩訶般若波羅蜜 是爲智慧門 菩薩入福德門 除一切罪所願皆得 若不得願者 以罪垢遮故 入智慧門則不厭生死 不樂涅槃 二事一故

불도(佛道)를 이루고자 하는 데 무릇 두 문이 있으니, 하나는 복덕(福德)이요 둘은 지혜(智慧)의 문이다. 보시(施)와 지계(戒)와 인욕(忍)을 행하는 것은 복덕의 문이요, 모든 법의 실상인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을 아는 것은 지혜의 문이다.
보살은 복덕문에 들어가서 일체의 죄업을 제거하고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죄업의 때[罪垢]에 차단 당했기 때문이다. 지혜의 문에 들어가더라도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열반도 즐기지 않게 된다. 두 일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今欲出生摩訶般若波羅蜜 般若波羅蜜 要因禪定門 禪定門必須大精進力 何以故散亂心 不能得見諸法實相 譬如風中然燈不能照物 燈在密屋明必能照

이제 마하반야바라밀을 출생시키고자 하는데, 반야바라밀은 반드시 선정문(禪定門)을 인하며, 선정문은 반드시 대정진(大精進)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산란한 마음[散亂心]으로는 모든 법의 실상[諸法實相]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바람 속에서 등불을 켜면 물건을 비출 수 없지만 밀실(密室)에다 등을 켜면 밝게 타올라 반드시 물건을 비추는 것과 같다.
*병주머니 ; 갖가지 병이 많은 사람 또는 그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몽산(蒙山) : 남송과 원(元)대의 임제종 양기파 스님, (1231 ~ 1298 또는 1308) 이름은 덕이(德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 시양 고안현(時陽高安縣)에서 났다。그 고향 시양이 당나라 때에는 균주(筠州)였기 때문에 고균(古筠) 비구라고 한 일도 있었고, 여릉도 몽산에 있었으므로 몽산 화상이라 하며,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있었으므로 전산 화상이라기도 하고, 휴휴암(休休庵)에 있었으므로 휴휴암주라기도 하였다.
고산(鼓山)의 완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의 법을 이었다。그의 교화한 시기는 원나라 세조(世祖)때이며, 우리 고려의 충렬왕 때이다。그래서 고려의 고승들과 문필의 거래가 많았고, 그의 저서 가운데 <법어약록(法語略錄)> <수심결(修心訣)>등은 이조 중엽에 있어 우리 글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몽산법어(蒙山法語) ;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 『몽산법어』가 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아까 몽산 스님한테 책임을 따져야 됩니다. 몽산 스님이 '대신 지옥에 간다'고 맹세를 하셨거든' ;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p97-99. (가로판 p95~97)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삼 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추호도’, ‘추호의’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간곡히(懇曲- 간절할 간/간절할 곡) ;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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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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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선교석(禪敎釋)2021. 5. 16. 18:36

선교석((No.587-2))—서산(西山) 스님의 『선교석(禪敎釋)』 법문, 「學者所參活句 如一團火 近之則燎却面門 無佛法措著之處 只有大疑 如烈焰亘天 忽若打破漆桶 則百千法門無量妙義 不求而圓得也」

*선교석(禪敎釋) ; 서산휴정(西山休靜 1520~1604) 지음. 1권. 선(禪)과 교(敎)를 판별하여 해석하고 있는 글이다. 행주(行珠) · 유정(惟政) · 보정(寶晶) 등 세 스님이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가지고 와서 '반야교 중에도 선지(禪旨)가 있으니, 반야로 종지를 삼는 것이 좋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계기가 되어 여러 가지 경전과 조사어록을 인용하여 선(禪)과 교(敎)의 차이를 밝히고 있다.

원교(圓敎) · 돈교(頓敎) · 『능가경』 · 『반야경』과 선문(禪門)의 차이를 문답의 형식으로 구성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지를 밝히며 선가(禪家)의 우월함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선문(禪門)이란 간화선(看話禪)을 핵심으로 하는 선법이라는 점을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

인용 문헌에는 『범일국사집(梵日國師集)』 ·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 · 『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 ·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 『해동칠대록(海東七大錄)』 등이 있는데, 현재 전하지 않는 것도 많으며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에만 보이는 진귀조사(眞歸祖師)에 관한 설도 언급되어 있다. 여러 판본이 있으며 『선문촬요(禪門撮要)』에도 실려 있다.

 

 

(5분 36초)

 


[법문] 송담스님(No.587-2)—1997년 동안거 해제 법어(97.02.22) (용587-2)

 

 

 


서산(西山) 스님의 『선교석(禪敎釋)』, 선(禪)과 교(敎)를 비교해서 판단하는 글이 있는데, 그것이 『선교석(禪敎釋)』이라 한 글입니다.

거기에 보면, 학자소참활구(學者所參活句)는, 선학자(禪學者)가 참구(參究)하는 그 활구(活句), 화두(話頭)는 여일단화(如一團火)하야, 한 무더기 불덩어리와 같애서, 근지즉요각면문(近之則燎却面門)이라. 섣불리 잘못 가까이하다가는 얼굴을 확! 태워 버리게 된다 이거거든.
활구공안(活句公案)에는 무불법조착지처(無佛法措着之處)라. 불법(佛法) 도리(道理)도 거기에다가는 어리댈 수가 없는 것이고, 지유대의(只有大疑)하야 여열염긍천(如烈焰亘天)이라. 다못 알 수 없는 큰 의심(疑心)만이 있어서 마치 훨훨 타는 맹렬한 불덩어리가, 불꽃이 하늘을 찌를 것 같아야 할 것이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아주 간곡히 말씀을 해 주셨지마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복탁(卜度)으로 이리저리 의리(義理)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콱 맥혀야, 알 수 없는 맥힌 의심(疑心)으로 정진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여.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외의 생각은 『화엄경』에 말씀, 『법화경』 『금강경』에 말씀이라도 그런 불교의 교리(敎理)나 도리(道理)를 가지고 이게 비교하고 분석하고 따져서 적용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나가야 그 공부가 옳게 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 가다 보면 처음에는 온갖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혼침(昏沈) 산란(散亂)이 일어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으로, 의심을 거각(擧却)해 나가면, 언젠가는 들지 않아도 제절로 화두가 터억 독로하게,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하게 된다 이거거든.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도 일여(一如)하게 되고, 몽중(夢中)에서도 그 순일무잡한 의단(疑團)이 계속이 되면은 머지않아서 어떠한 찰나에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된다 그 말이여. 홀약타파칠통(忽若打破漆桶)하게 된다 그말이여. 알 수 없는 의심, 콱! 맥혀서 알 수 없지마는 그 의심으로 나가다 보면 어떠한 찰나간에 통 밑구녘 빠지듯이 탁! 의심을 타파하게 된다 이거거든.

사량분별로는 절대로 그런 경계가 오는 것이 아니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나갈 때 터져. 풍선을 불 때 머리카락 바늘구녕만 있어도 아무리 불어도 그 풍선은 빵빵해지지도 않고, 빵빵해지지 않기 때문에 팡! 하고 터지는 수가 없어. 꽉 맥힌 풍선이라야 불고 불고 더 불어서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풍선이 터진 것과 비슷하다 그 말이여.
이로(理路)가, 이치 길이 있고 말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는 그러한 참선은 의리선(義理禪)이요 사구선(死句禪)이라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소의지하(小疑之下)에 소오(小悟)하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큰 의심하에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라, 큰 의심 밑에 크게 깨달음이 있다 하시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 무오(無悟)라, 의심이 없는 공부는 깨달음이 없다」고 하신 것이여.

타파칠통(打破漆桶)을, 홀연히 타파칠통을 하면은 기네 아니네 붙일 수가 없어. 백천법문(百千法門)과 무량묘의(無量妙義)를 불구이원득(不求而圓得)이니라. 백천법문(百千法門)과 한량없는 묘(妙)한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원만(圓滿)하게 깨닫게 된다. 『선교석』에 그러한 법문이 있고.(11분54초~17분3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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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석(禪敎釋)에서 ;

[참고] 況學者所參活頭 沒語路 沒義路 沒滋味 不滯十種病 不涉全提見 亦不涉破病解 忽然噴地一發 則自然洞明一心法界 亦洞明不思議境界 所謂一聞千悟 得大總持者也

더욱이 학자가 참구한 화두는 말길이 없고 뜻길이 없으며 자미가 없어서 10가지 병통에 걸리지 않으며, 전제(全提)의 견해에도 이끌리지 않고, 또한 병통을 파하였다는 알음알이에도 이끌리지 않는다. 홀연히 확! 하고 한 번 폭발하면 자연히 일심법계(一心法界)를 환하니 밝히고, 또한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도 환하게 밝히니, 이른바 '하나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 대총지(大總持)를 얻는다' 한 것이다.

況宗師所示手段 據法離言 殺活臨時 或作靑天霹靂 或起平地干戈 劍刃上能撲人 電光中能穿鍼 雖上根大智 不容思議於其間也

더욱이 종사(宗師)가 보인 수단은 법에 의거하고 말을 여의어 죽이고 살리는 것이 때를 따르는지라, 어떤 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치고, 어떤 때는 태평천지에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며, 칼날 위에서 능히 사람을 때려눕히기도 하고, 번갯불 속에서 바늘을 뀌기도 하니, 비록 상근대지(上根大智)라도 그 사이에 일체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참고] 學者所參活句 如一團火 近之則燎却面門 無佛法措着之處 只有大疑 如烈焰亘天 忽若打破漆桶 則百千法門無量妙義 不求而圓得也

학자의 참구하는 활구(活句)는 마치 한덩어리의 불을 가까이하면 곧 얼굴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불법(佛法)을 둘 곳이 없는 것이니('부처다, 법이다' 그러한 소견을 거기다 갖다가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니), 다만 뜨거운 불꽃이 하늘에 뻗치는 것과 같은 큰 의심이 있어서 문득 칠통(漆桶)을 깨뜨려 버리면 백천(百千)의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는 구하지 않아도 원만히 얻어질 것이다.

然則雖證理成佛 只得素法身者 可與同論耶 故云 祖師傳心處 如鳥飛空 永無蹤迹也 華嚴疏云 圓頓之上 別有一 宗 此禪門之謂也

그래서 비록 이치를 증득하고 부처를 이루더라도 다만 소법신(素法身)을 얻었을 뿐이니, 어찌 같이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사가 마음을 전한 곳은 마치 새가 공중을 나는 것과 같아서 영원히 종적이 없다" 하고, 「화엄소(華嚴疏)」에서 "원돈교(圓頓敎) 위에 따로 또 하나의 종(宗)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선문(禪門)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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