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광액도아2026. 9. 19. 08:34

광액도아(No.151)—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의 길로 돌아서는 것.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 생사해탈 묘법(妙法) | 사바세계라 하는 것은 원래가 믿지 못할 곳 |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중생 |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광액도아(廣額屠兒 넓을 광/이마 액/죽일 도/어조사 아) ; 이마[額]가 넓은[廣] 백정[屠兒]이라는 뜻. 도아(屠兒), 도(屠)는 ‘죽일 도’ 아(兒)는 어조사. 곧 백정(白丁).

*도아(屠兒 죽일 도/어조사 아) ; (산스크리트어) domba, aurabhrika. 도살업(屠殺業)에 종사하는 비천한 사람. 백정. 도살업은 인도의 4성계급 중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이나, 4성계급 밖의 천민이 종사한다. 도자(屠者)라고도 한다.

[참고 ❶]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19권. 8. 범행품(梵行品) ⑤. (담무참曇無讖 한역 |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波羅㮈國有屠兒 名曰廣額 於日日中 殺無量羊 見舍利弗 卽受八戒 經一日一夜 以是因緣 命終得爲北方天王毘沙門子

바라내국(波羅㮈國)에 백정(白丁)이 있었으니 이름이 광액(廣額)입니다. 날마다 한량없는 양을 죽였는데 사리불(舍利弗)을 만나서 8계를 받아 하루 낮과 밤을 지났습니다. 이 인연으로 목숨을 마치고 북방천왕(北方天王) 비사문(毘沙門 : 4천왕 중의 하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참고 ❷] 『선종송고연주통집(禪宗頌古聯珠通集)』 제2권. 세존기연(世尊機緣).
世尊因廣額屠兒日殺千羊 一日至世尊前 颺下屠刀云 我是千佛一數 世尊云 如是如是

세존이, 광액도아(廣額屠兒)가 하루에 천 마리의 양을 죽였는데 어느 날 세존 앞에 이르러 도살하는 칼을 버려서 떨어뜨리고 이르되 ‘나도 이 천불의 하나입니다’ 함으로 인해 세존이 이르되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참고 ❸]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 상권. 고려 부암무기(浮庵無寄) 찬집(撰集).
(게송 120) 佛慮末代衆 於法起斷見 夭傷其慧命 亦亡失法身
부처님께서는 말세 중생들이 부처님 법에 대해 단견(斷見)을 내어 그 지혜의 수명을 요절케 하거나 법신마저 잃어버릴까 염려하셨네.

(게송 121) 更設三種權 以扶一圓實 一切有佛性 一切法常住
다시 세 가지 방편을 베푸시어 한 가지 원만한 진실[一圓實]을 부추기시되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고 일체법은 영원히 머문다 하셨네.

(게송 122) 屠兒廣額者 立地頓成佛 五逆阿闍王 罪滅而妙證
광액(廣額)이라는 백정은 서 있는 자리에서 단박에 성불하였고 오역죄를 지은 아사세왕(阿闍世王)이 죄를 멸하고 오묘한 법을 얻었네.

(게송 123) 是知涅槃法 罪福本平等 若欲疾成佛 應須學此法
그러므로 열반법은 죄와 복에 대해 본래 평등함을 알라. 속히 성불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이 법을 배워야 하느니라.

涅槃經義者 已如前示 此不煩錄
『열반경』의 이치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번거롭게 기록하지 않는다.

言廣額屠兒者 聞一切物 皆有佛性之言 放却屠刀 立地成佛
광액(廣額)이라는 백정은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라는 말을 듣고 바로 도살하는 칼을 놓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성불하였다.

又阿闍世王 聞調達語殺父瓶沙 心卽勞熱 滿身生瘡 天下諸毉無能治者 有一大醫 名曰耆婆 卽白王言 欲治此病 莫如投佛 王卽依言 俱詣佛所 聞罪性空 發菩提心 身瘡便愈云云

아사세왕은 조달(調達)의 말을 듣고 아버지 빈비사라왕[병사왕甁沙王]을 살해하였다. 마음이 곧 괴롭고 열이 나서 온몸에 종기가 돋았는데, 천하의 명의들도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 기바(耆婆)라는 대의원이 왕에게 고하기를, “이 병을 치료하고 싶다면 부처님께 귀의하는 길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곧 그 말에 의지하여 함께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 “죄의 성품은 공한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보리심(菩提心)을 내자 몸에 있던 종기가 모두 치유되었다고 한다.

 

(13분 48초)

광액도아(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13분48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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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차를 탈 때도, 속이 상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다못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잠시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한 때가 없습니다. 눈으로 볼 때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일어나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일어나고, 혀로 음식을 맛볼 때 일어나고, 말할 때 일어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에 잠시도 생각이 안 일어날 때가 없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이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원인이 되는 것이여.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話頭)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고,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이여.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을 조끔도 성화 댈 필요가 없어. 무슨 망상이건 상관이 없어. 일어났다 하면 퍼뜩 '이뭣고?'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천 번 일어나면 천 번.

백정(白丁)이 소를 때려잡을려고 도끼를 쳐들다가도 '이뭣고?'해 가지고 확철대오한 광액도아(廣額屠兒)라고 하는 도사가 있습니다.
백정이 소를 때려잡기 위해서 도끼를 쳐들 그 찰나에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 그밖에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이 많으니까 공부를 못한다. 복잡해서 공부를 못한다. 장사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으로 핑계 대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은 기본자세가 있어서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떠억 정진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자세고, 그럴만한 시간이 있고, 그럴만한 장소가 있으면 기본자세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시간과 장소가 없다고 해서 시간이 흘러가지 아니한 것이 아니고, 생사가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고 기달려 주는 것이 아닐 바에는, 우리는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할 수는 없는 것이여.
일이 바빠서 참선을 안 하다가 지옥에 왔다고 해서 염라대왕이 조끔도 사정을 봐주지는 않습니다.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이 다 그것이 내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업(罪業)으로 인해서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는데, 그러한 상황을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하면 내생에는 더 고약한 환경에 태어날 것이요, 까딱하면 사람으로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축생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 뻔한데,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일수록에 더 발심(發心)을 해야 하고, 더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 놓여진 사람은 우선 아무 고통이 없으니까, '참선이 무슨, 불법이 뭐, 나한테는 상관이 없다. 그냥 이대로 나쁜 짓 안 하고 살아가면 되었지 무슨 불교가 필요하냐? 뭐 참선 이까짓 것 필요...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심심하면 텔레비젼도 보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서 테니스도 치고, 등산도 하고, 아 이렇게 살면 족하지. 뭐 그렇게 앉어서 무릎 아프고, 허리 아프게 앉어서 무슨 참선을 하고...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런 부질없는 지서리를 할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참선을 하라'고 하면 '쯧, 스님네들이나 하시지' 삐긋이 웃고 남의 일—자기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아주 자신이 만만한 그러한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그분도 역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사람이라 다행히 전생에 조끔 복 지은 것이 있어서 그놈 꽂감 빼 먹듯이 빼 먹느라고 별걱정이 없지만, 그 꽂감 몇 접 사다 논 것이 있기로서니 한 개 두 개 빼 먹다 보면 줄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놈이 바닥이 나면 몸이 아프게 되기도 하고, 엊그제까지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간경화증, 동맥경화증, 무슨 암, 무슨 당뇨병, 그러한 진단만 나왔다 하면, 어제의 그 쟁쟁 당당하던 그 용기가 간 곳이 없고, 그 많은 재산도 싫고, 명예 권리도 싫고, 아무 정황이 없다 그 말이여.
사업이 잘되어 갈 때는 큰소리치다가 사업이 벌써 기울어져 가지고 여기서 부도가 툭! 터지고, 저그 터지고 하면 아무 정황이 없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 죽게 되거나 하면 또 정신을 못 채려.

이 사바세계라 하는 것은 원래가 그렇게 믿지 못할 곳인 것입니다.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일 초 일 초가 지내서 한 시간이 지내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내서 하루가 지내고, 하루하루가 지내서 일 년이 지내고, 일 년 일 년이 지내다 보면 벌써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아프고.
그래도 잘 타고난 사람은 환갑도 넘기고 칠십도 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뱃속에서도 죽고, 낳다가도 죽고, 두 살 세 살에도 죽고, 10살 20살에도 죽고, 30~40에 막 재미있게 살 만하다가 턱 꺼꾸러지고. '인생이 무상(無常)하다' 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죽은 것은 보고 '무상하다'고 하면서, 자기 앞에 무상함이 돌아 닥쳐오고 있다고 하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 이것이 바로 '어리석다'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탓으로 해서 우리는 윤회(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이것을 '지혜(智慧)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여.

지혜, 부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지혜(智慧)의 눈을 뜬 범부(凡夫)이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과 부처님의 차이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의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신다면, 그동안에 참선을 하신 분은 정말 오늘부터서는 단 일 초 동안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정말 착실하게 정진을 하시게 될 것이고, 그동안에 참선을 본격적으로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고 '차츰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집이라도 하나 장만해 놓고 그때부터서 하리라. 나이 좀 먹거든 하리라' 이러한 뒤로 미루신 그런 분도 오늘부터서는 착실히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특별한 의식이 있고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의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여.
불경(佛經) 책을 많이 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여, 아직 불경을 한 권도 읽지 아니했어도 상관이 없어. '나모라 다나다라' 염불(念佛) 한마디도 외우지 못해도 그것도 상관이 없어.

다못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 되는 거여.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서 올바르게 이해를 했다면 바로 '이뭣고? 해야겄다. 이뭣고? 해라' 그 말 한마디로 요약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경을 수십 권을 다 읽었어도 '이뭣고?'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경 잘못 읽은 사람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법을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소승법이 있고, 대승법이 있고, 그 위에 최상승법이 있는데, 이 참선법이 바로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32분9초~45분4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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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 ; 대오선(待悟禪).
*대오선(待悟禪 기다릴 대/깨달을 오/고요할 선) ; 참선하는 데 있어서 깨닫기[悟]를 기다리는 것[待].
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데 10가지 병(病)의 하나로, 수행자는 이런 생각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참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7)대오선(111:1979년 동지차례:79.12.22:2분19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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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❷]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 법문에서.(2분20초)
참선하는 데 있어서 제일 몹쓸 병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오선(待悟禪), 「어서 깨달랐으면...」
깨닫기를 바래는 그것이 설사 밤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해서 화두가 제법 일여(一如)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찰나간이라도 「어서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와서 탁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애써서 99%까지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저 천길만길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바래는 마음, 「어서 속히 어떠한 목적을 성취했으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 공부가 잘 되어갈수록 「이 무엇고?」
조끔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또 잘 안된다고 번뇌심이나 짜증도 내지를 말고, 오직 한 생각 한 생각, 산을 보든지, 물소리를 듣던지, 새소리를 듣던지, 기차 소리를 듣던지, 애 우는 소리를 듣던지, 문닫는 소리를 듣던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하는 것입니다.(8분32초~10분51초)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윤회(生死輪廻).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성화(成火 이룰 성/불·화 화) ; ①매우 귀찮게 졸라 댐. ②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고 속이 탐. 또는 그런 증세.
*광액도아(廣額屠兒 넓을 광/이마 액/죽일 도/어조사 아) ; 이마[額]가 넓은[廣] 백정[屠兒]이라는 뜻. 도아(屠兒), 도(屠)는 ‘죽일 도’ 아(兒)는 어조사. 곧 백정(白丁).
*도아(屠兒 죽일 도/어조사 아) ; (산스크리트어) domba, aurabhrika. 도살업(屠殺業)에 종사하는 비천한 사람. 백정. 도살업은 인도의 4성계급 중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이나, 4성계급 밖의 천민이 종사한다. 도자(屠者)라고도 한다.

[참고 ❶]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19권. 8. 범행품(梵行品) ⑤. (담무참曇無讖 한역 |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波羅㮈國有屠兒 名曰廣額 於日日中 殺無量羊 見舍利弗 卽受八戒 經一日一夜 以是因緣 命終得爲北方天王毘沙門子

바라내국(波羅㮈國)에 백정(白丁)이 있었으니 이름이 광액(廣額)입니다. 날마다 한량없는 양을 죽였는데 사리불(舍利弗)을 만나서 8계를 받아 하루 낮과 밤을 지났습니다. 이 인연으로 목숨을 마치고 북방천왕(北方天王) 비사문(毘沙門 : 4천왕 중의 하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참고 ❷] 『선종송고연주통집(禪宗頌古聯珠通集)』 제2권. 세존기연(世尊機緣).
世尊因廣額屠兒日殺千羊 一日至世尊前 颺下屠刀云 我是千佛一數 世尊云 如是如是

세존이, 광액도아(廣額屠兒)가 하루에 천 마리의 양을 죽였는데 어느 날 세존 앞에 이르러 도살하는 칼을 버려서 떨어뜨리고 이르되 ‘나도 이 천불의 하나입니다’ 함으로 인해 세존이 이르되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참고 ❸]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 상권. 고려 부암무기(浮庵無寄) 찬집(撰集).
(게송 120) 佛慮末代衆 於法起斷見 夭傷其慧命 亦亡失法身
부처님께서는 말세 중생들이 부처님 법에 대해 단견(斷見)을 내어 그 지혜의 수명을 요절케 하거나 법신마저 잃어버릴까 염려하셨네.

(게송 121) 更設三種權 以扶一圓實 一切有佛性 一切法常住
다시 세 가지 방편을 베푸시어 한 가지 원만한 진실[一圓實]을 부추기시되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고 일체법은 영원히 머문다 하셨네.

(게송 122) 屠兒廣額者 立地頓成佛 五逆阿闍王 罪滅而妙證
광액(廣額)이라는 백정은 서 있는 자리에서 단박에 성불하였고 오역죄를 지은 아사세왕(阿闍世王)이 죄를 멸하고 오묘한 법을 얻었네.

(게송 123) 是知涅槃法 罪福本平等 若欲疾成佛 應須學此法
그러므로 열반법은 죄와 복에 대해 본래 평등함을 알라. 속히 성불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이 법을 배워야 하느니라.

涅槃經義者 已如前示 此不煩錄
『열반경』의 이치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번거롭게 기록하지 않는다.

言廣額屠兒者 聞一切物 皆有佛性之言 放却屠刀 立地成佛
광액(廣額)이라는 백정은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라는 말을 듣고 바로 도살하는 칼을 놓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성불하였다.

又阿闍世王 聞調達語殺父瓶沙 心卽勞熱 滿身生瘡 天下諸毉無能治者 有一大醫 名曰耆婆 卽白王言 欲治此病 莫如投佛 王卽依言 俱詣佛所 聞罪性空 發菩提心 身瘡便愈云云

아사세왕은 조달(調達)의 말을 듣고 아버지 빈비사라왕[병사왕甁沙王]을 살해하였다. 마음이 곧 괴롭고 열이 나서 온몸에 종기가 돋았는데, 천하의 명의들도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 기바(耆婆)라는 대의원이 왕에게 고하기를, “이 병을 치료하고 싶다면 부처님께 귀의하는 길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곧 그 말에 의지하여 함께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 “죄의 성품은 공한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보리심(菩提心)을 내자 몸에 있던 종기가 모두 치유되었다고 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동[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罪] 행위[業 : 身口意 三業].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지서리 ; ‘짓거리('짓'을 낮잡아 이르는 말)’의 사투리.
* : 몸이나 몸의 일부를 놀려 움직이는 행동이나 행위를 이르는 말.
*사바세계(娑婆世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sahā-loka-dhātu.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현실세계. 사바(산스크리트어 sahā)란 사하(沙訶) · 사가(娑呵) · 삭하(索訶)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에 안주하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번뇌, 고뇌를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뜻에서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이라고 한다. 사바세계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영토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다맛 ; ‘다만(다른 조건이나 상황과는 관계없이 단지)’의 사투리.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나타낸 말.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❶]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❷]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❸]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말.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곧 부파 불교(部派佛敎)를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④열등한 능력이나 소질을 갖춘 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승(乘) ; [산스크리트어] yāna. '타는 것. 수레. 또는 실어 나른다'는 말. 연나(衍那)라고 음사(音寫)한다. 생사의 바다에 빠진 중생을 깨달음의 언덕으로 실어 나른다는 의미로 쓰인다. 중생을 제도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수레에 비유하여 소승(小乘) · 중승(中乘) · 대승(大乘) · 일승(一乘) · 삼승(三乘) · 오승(五乘) 등의 개념으로 활용된다.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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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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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No.151)—참선은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라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 |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하는 법이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수행 방법 |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할 수가 있다'고 믿는 데부터서 시작을 해야 |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의 길로 돌아서는 것.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 생사해탈 묘법(妙法) | 사바세계라 하는 것은 원래가 믿지 못할 곳 |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중생.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 참선법(參禪法).


[참고 ❶]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이 말이여.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불법(佛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흐뭇해 할 줄 알고, 자기 뜻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은 근심 걱정하고 성을 내고 하는, 바로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도 잡히지 아니하면서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듣고, 온갖 일을 하는 그 신기하고도 묘한 대관절 그놈, 그놈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53분35초~55분59초)

[참고 ❷] 『만공법어(滿空法語)』 「법훈(法訓)」 (개정 증보판. 2024년 11월 30일 발행 | 불광출판사) p299~314.
<나를 찾아야 할 필요와 나>

1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나니라.
2 ‘나’라는 의의가 절대 자유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自在)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임의(任意)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
3 망아(妄我)는 진아(眞我)의 소생(所生)인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은 곧 사심(邪心)이요, 진아(眞我)는 정심(正心)으로 시종(始終)도 없고 존망(存亡)도 없고 형상도 없지만 오히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니라.
4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 바에야 육축(六畜)으로 동류(同類)되는 인간이라 아니할 수 없나니, 짐승이 본능적으로 식색(食色)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제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다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면목(自己面目)을 모른다면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윤회하는 한 분자(分子)에 지나지 아니하나니라.
5 동업중생(同業衆生)이 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전로(前路 앞길)가 망망하게 되나니라.
6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생사(生死)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이다.
7 인생은 말 꼬리에 매달려 울며 뒹굴려 가는 죄수처럼 업(業)의 사슬에 끌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의 길을 영겁(永劫)으로 순력(巡歷)하고 있는데, 그 쇠사슬은 자기의 지혜 칼이라야 능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되나니라.
8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받는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이 일(나를 찾는 일)을 알지 못하면 기실 사람의 정신은 잃어버린 인간이니라.
9 석가세존이 탄생 시에 산석(產席)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하신 그 ‘아(我)’도 ‘나’를 가리킨 것이니라.
10 각자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나니라.
11 일체가 다 ‘나(부처)’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하나의 털끝만 한 정력(精力)이라도 나를 찾는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소모하는 것은 나의 손실이니라.
12 누구든지 육신(肉身) · 업신(業身) · 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13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 그대로가 곧 생사(生死) 없는 자리이니라.
14 생사 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의 풀의 정(精)이라도 전우주(全宇宙)의 무장(武裝)으로도 해체시킬 수 없나니라.
15 세상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문구(文句)는 있으나 업식으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나니라.
16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쯤은 자유자재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17 보고 들어서 얻는 지식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니라.
18 나는 무념처(無念處)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념처에 일체유(一切有)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9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구경(究竟)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결국 내가 나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하나니라.


<나를 찾는 법 - 참선법>

1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정로(正路)를 가르쳐 주나니라.
2 수도(修道 참선)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3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생생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든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4 선방(禪房)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5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8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了達)된 사람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상속(相續) 받은 분이니라.
20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22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요, 대(對)가 끊어진 참구법(參究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25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無念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30 참선을 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억생(億生) 억겁(億劫)에 지은 갖은 악(惡),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때는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32 참선법은 상래(上來)로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 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무수도인(無數道人)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1천7백 공안(公案)이나 있는데, 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 곧 “만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일(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33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37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 주지 못하나니라.
40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
51 참선은 모든 업장(業障)과 습기(習氣)를 녹이는 도가니[甕]니라.
73 물질은 각자 그 이름에 따르는 한 가지 책임을 할 뿐인데, 정신은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萬有)의 근본[바탕]이라, 어디서 무슨 일에나 절대 능력자이니, 이 정신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萬能)의 인(人)이 되나니라.
76 도인(道人)은 도인이라는 대명사(代名詞)에 지나지 않는 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상(名相)이 생기기 이전 소식을 증득(證得)하여, 도인이라는 우상(偶像)도 여의고 계(戒)니 수행이니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 독립적 인간이 되어 육도(六道)에 순력(巡歷)하면서 고(苦)를 면하게 되나니라.

(1) 17분 5초.

내가나를깨닫는공부(151-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17분5초).mp3
7.83MB



(2) 12분 35초.

내가나를깨닫는공부(151-2: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12분35초).mp3
5.76MB



[법문]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1)------------------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여. 이 공부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은 누구라도 하면 되는 것이고, 또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 '참선, 참선' 요새 굉장히 그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불법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이 참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참선이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그러면 참선을 내가 직접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에 가서 참선을 지도를 받을 것인가? 어떻게 참선을 해야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 부딪히면 망연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와서 책을 사 봐도 잘 모르겠고, 어떤 스님을 만나서 물어봐도 확실하지를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앉아서 몇 달, 몇 해씩을 해 봤지만, 이것이 옳게 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참선은 참 어려운 것이다. 여간해서는 참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 결론에 도달해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 그런 거사(居士)님이나 보살(菩薩)님도 더러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참선은 제일, 불법 가운데에 제일 높은 수행 방법이면서 제일 쉬운 것입니다.
실지로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 가서 배워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사실 내용에 있어서는 가장 쉬운 것이고 간단한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법(佛法)에 이 참선(參禪)이 없으면 쌀에 알맹이를 빼내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광석 속에 금덩어리를 빼내 버린 광석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에 있어서 참선이라고 하는 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이 없다면 불교는 한낱 다른 종교와 별로 특수하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의 종교가 된 원인인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종교라 하기보다는 사람으로서 참사람이 되는 바른길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유교나 그밖에 종교에 있어서 '착한 일을 해라, 윤리 도덕을 지켜라, 바르게 살아라' 그러한 내용의 교리가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역시 다 그런 내용에 말씀도 참 많지만, 다맛 그런 것에 그쳐 버린다면 불교에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과 똑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데에 그 특수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인은 "그러면 석가여래 부처님은 사람이냐? 뭣이냐?"
"아, 그 사람이다"

"아하! 그러면 부처라 하는 것이 별로 별것이 아니로군요"
"왜 그리야?"

"깨달라 봤자 사람이라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느냐"고, 이렇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 성현 가운데에 성현이 되셨다. 진리와 하나가 되셨다' 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더 부처님을 존경하게 되는데.
우리도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부처님께서 전(傳)하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면, 목숨 바쳐서 도를 닦으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 불자(佛子)가 맨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말세(末世)에 태어난 죄 많은 중생이 머리도 나쁘고, 지식도 없고, 몸도 건강틀 못하고, 여자로 태어났고, 우리 같은 사람이 참선을 한들 무슨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겠는가? 그저 금생에는 참선이 좋다 그러고, 선방 토방에 신발만 벗어 놔도 그 공덕(功德)으로 지옥에는 안 떨어진다고 그러니 금생에는 인연이나 맺으리라' 이러한 지나치게 겸손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최상승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대뜸 처음부터 '나도 견성성불할 수 있다,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나도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 데부터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고 대든 것하고, 벌써 처음부터서 안 될 줄 알고 하는 것과는 그 결과적으로 결과에 나타난 것은 하늘과 땅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참선법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할 때에도 '된다'고 믿고, 된다고 믿어지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안 될 줄 알고, 실패할 줄 알고, 심심풀이로 시험 삼아서 해 갖고 그 일이 백(百)에 하나도 성공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범부(凡夫)를 고쳐서 성현(聖賢)을 맨드는 이 공부를 목숨을 바쳐서 해도 어려웁고 어려울 텐데. 처음부터 안 될 것을 알고, 안 될 폭을 대고, 미리서부터서 넘어질 자리부터 보고 씨름을 하려고 하는 사람과 같애서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나도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 그것이 서면 공부는 절반은 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꼭! 성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떠한 보물이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을려고 할 때에는 혹 찾어지기도 하고, 혹 안 찾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마치 내 호주머니 속에 있는 어떤 물건을 찾은 거와 같애서 그 호주머니 속에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믿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성취를 할 수가 있다고 단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 '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의 마음, 사람 사람이 다 '마음' 소리를 다 하고, '마음'이라는 것을 다 그 말을 알고 있지만, 사실 그 마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을 본격적으로 그 마음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은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단 일 초 동안도 우리로부터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이지만,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은 모냥이 없는 것이고, 형상이 없는 것이라 분명히 거기 있는데 찾으면 알 길이 없는 것이고, 보이지를 아니하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두 손을 이리저리 내저어서 더듬어 봤자 그 마음은 잡히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지만, 모든 것을 보는 그 자체를 볼려고 하면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눈을 통해서 볼 때 거기에 있었는데, 그 보는 그놈을 돌이켜서 다시 볼려고 하면 자취가 없습니다. 여기에 깨닫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웁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한 말을 과거에도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건 깨달음을 100프로 숨김없이 다 표현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지식, 도인(道人)들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선지식 말 한마디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린 분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냐? 여지없이 믿어 버렸기 때문에, 믿으면 말 한마디에 끝나는 까닭인 것입니다.

설사 한마디 말 한마디에 깨닫지를 못한다 하더라도 화두(話頭) 한마디를 받아 가지고, 여지없이 앞도 생각하지 않고, 뒤도 생각하지 않고, 옆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그 한마디 화두만을 의심(疑心), 의관(疑觀) 참구(參究)해 가면 조끔도 깨달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오직 이 한마디 의심뿐인 것입니다.

이 한마디의 의심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해 버리고, '부처님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깨닫게 해 준다' 해도 솔깃하지 아니하고, '염라대왕이 와서 끌어간다' 해도 조끔도 두려운 생각도 없고, 다못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한 앞에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염라대왕이 쇠사슬을 가지고 옥졸이 와서 묶어간다 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되어 버린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최상승법이 어려웁고도 쉬웁고, 쉬우면서 어려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판치생모' 화두뿐만이 아니라 '무자(無字)‘ 화두를 한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시삼마(是甚麼) '이뭣고?' 화두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차를 탈 때도, 속이 상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다못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16분5초~33분10초)





(2)------------------

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잠시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한 때가 없습니다. 눈으로 볼 때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일어나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일어나고, 혀로 음식을 맛볼 때 일어나고, 말할 때 일어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일체처 일체시에 잠시도 생각이 안 일어날 때가 없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이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원인이 되는 것이여.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話頭)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고,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이여.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을 조끔도 성화 댈 필요가 없어. 무슨 망상이건 상관이 없어. 일어났다 하면 퍼뜩 '이뭣고?'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천 번 일어나면 천 번.

백정(白丁)이 소를 때려잡을려고 도끼를 쳐들다가도 '이뭣고?'해 가지고 확철대오한 광액도아(廣額屠兒)라고 하는 도사가 있습니다.
백정이 소를 때려잡기 위해서 도끼를 쳐들 그 찰나에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 그밖에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이 많으니까 공부를 못한다. 복잡해서 공부를 못한다. 장사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으로 핑계 대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은 기본자세가 있어서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떠억 정진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자세고, 그럴만한 시간이 있고, 그럴만한 장소가 있으면 기본자세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시간과 장소가 없다고 해서 시간이 흘러가지 아니한 것이 아니고, 생사가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고 기달려 주는 것이 아닐 바에는, 우리는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할 수는 없는 것이여.
일이 바빠서 참선을 안 하다가 지옥에 왔다고 해서 염라대왕이 조끔도 사정을 봐주지는 않습니다.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이 다 그것이 내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업(罪業)으로 인해서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는데, 그러한 상황을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하면 내생에는 더 고약한 환경에 태어날 것이요, 까딱하면 사람으로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축생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 뻔한데,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일수록에 더 발심(發心)을 해야 하고, 더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 놓여진 사람은 우선 아무 고통이 없으니까, '참선이 무슨, 불법이 뭐, 나한테는 상관이 없다. 그냥 이대로 나쁜 짓 안 하고 살아가면 되었지 무슨 불교가 필요하냐? 뭐 참선 이까짓 것 필요...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심심하면 텔레비젼도 보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서 테니스도 치고, 등산도 하고, 아 이렇게 살면 족하지. 뭐 그렇게 앉어서 무릎 아프고, 허리 아프게 앉어서 무슨 참선을 하고...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런 부질없는 지서리를 할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참선을 하라'고 하면 '쯧, 스님네들이나 하시지' 삐긋이 웃고 남의 일—자기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아주 자신이 만만한 그러한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그분도 역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사람이라 다행히 전생에 조끔 복 지은 것이 있어서 그놈 꽂감 빼 먹듯이 빼 먹느라고 별걱정이 없지만, 그 꽂감 몇 접 사다 논 것이 있기로서니 한 개 두 개 빼 먹다 보면 줄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놈이 바닥이 나면 몸이 아프게 되기도 하고, 엊그제까지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간경화증, 동맥경화증, 무슨 암, 무슨 당뇨병, 그러한 진단만 나왔다 하면, 어제의 그 쟁쟁 당당하던 그 용기가 간 곳이 없고, 그 많은 재산도 싫고, 명예 권리도 싫고, 아무 정황이 없다 그 말이여.
사업이 잘되어 갈 때는 큰소리치다가 사업이 벌써 기울어져 가지고 여기서 부도가 툭! 터지고, 저그 터지고 하면 아무 정황이 없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 죽게 되거나 하면 또 정신을 못 채려.

이 사바세계라 하는 것은 원래가 그렇게 믿지 못할 곳인 것입니다.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일 초 일 초가 지내서 한 시간이 지내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내서 하루가 지내고, 하루하루가 지내서 일 년이 지내고, 일 년 일 년이 지내다 보면 벌써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아프고.
그래도 잘 타고난 사람은 환갑도 넘기고 칠십도 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뱃속에서도 죽고, 낳다가도 죽고, 두 살 세 살에도 죽고, 10살 20살에도 죽고, 30~40에 막 재미있게 살 만하다가 턱 꺼꾸러지고. '인생이 무상(無常)하다' 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죽은 것은 보고 '무상하다'고 하면서, 자기 앞에 무상함이 돌아 닥쳐오고 있다고 하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 이것이 바로 '어리석다'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탓으로 해서 우리는 윤회(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이것을 '지혜(智慧)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여.

지혜, 부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지혜(智慧)의 눈을 뜬 범부(凡夫)이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과 부처님의 차이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의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신다면, 그동안에 참선을 하신 분은 정말 오늘부터서는 단 일 초 동안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정말 착실하게 정진을 하시게 될 것이고, 그동안에 참선을 본격적으로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고 '차츰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집이라도 하나 장만해 놓고 그때부터서 하리라. 나이 좀 먹거든 하리라' 이러한 뒤로 미루신 그런 분도 오늘부터서는 착실히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특별한 의식이 있고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의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여.
불경(佛經) 책을 많이 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여, 아직 불경을 한 권도 읽지 아니했어도 상관이 없어. '나모라 다나다라' 염불(念佛) 한마디도 외우지 못해도 그것도 상관이 없어.

다못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 되는 거여.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서 올바르게 이해를 했다면 바로 '이뭣고? 해야겄다. 이뭣고? 해라' 그 말 한마디로 요약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경을 수십 권을 다 읽었어도 '이뭣고?'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경 잘못 읽은 사람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법을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소승법이 있고, 대승법이 있고, 그 위에 최상승법이 있는데, 이 참선법이 바로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33분11초~45분4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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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사(居士) ; ①고대 인도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던 부호. ②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자 신도. 출가하지 않고 법명(法名)을 받은 재가(在家)의 남자.
*보살(菩薩) ; 여기서는 여자 신도를 일컫는 말이다.
*보살(菩薩) ;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音寫)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하므로 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뜻.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 각유정(覺有情) 등으로도 불린다.
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행하는 자. ② 보살승(菩薩乘)의 준말. ③ 수행자. ④ 고승(高僧)에 대한 존칭. ⑤ 여자 신도를 일컫는 말.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범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 • 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釋迦)에 대한 존칭.
여래(如來)는 부처님 10호(十號)의 하나로 범어 Tathagata(다타가타)의 역(譯)이다.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토방(土房) ; 방에 들어가는 문 앞에다 약간 높고 편평하게 다져 놓은 흙바닥. 여기에 쪽마루를 놓기도 한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❶]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참고 ❷]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德異本) 「2. 공덕과 정토를 밝히다[釋功德淨土]」에서.
公曰 弟子聞達磨初化梁武帝 帝問云 朕一生造寺供僧 布施設齋 有何功德 達磨言 實無功德 弟子未達此理 願和尙爲說
師曰 實無功德 勿疑先聖之言 武帝心邪 不知正法 造寺供養 布施設齋 名爲求福 不可將福便爲功德 功德在法身中 不在修福

자사(刺史) 위공(韋公)이 말했다. ‘제자가 듣기에 달마대사께서 처음 양무제를 교화할 때 황제가 「짐은 평생 절을 짓고 스님을 공양하며 보시를 하고 재를 베풀었는데 어떠한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달마대사께서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제자는 이 이치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화상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 옛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무제는 마음이 치우쳐 정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절을 짓고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며 재를 베풀어 행한 것은 복(福)을 구했다고 하는 것이니 복이 공덕(功德)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덕은 법신(法身)에 있지 복을 닦는 데 있지 않습니다.

師又曰 見性是功 平等是德 念念無滯 常見本性眞實妙用 名爲功德 內心謙下是功 外行於禮是德 自性建立萬法是功 心體離念是德 不離自性是功 應用無染是德 若覓功德法身 但依此作 是眞功德
若修功德之人 心卽不輕 常行普敬 心常輕人 吾我不斷 卽自無功 自性虛妄不實 卽自無德 爲吾我自大 常輕一切故

대사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견성(見性)이 공(功)이요 평등(平等)이 덕(德)이니, 생각 생각에 막힘이 없이 항상 본성품의 진실하고 묘한 작용[眞實妙用] 보는 것을 공덕이라 합니다. 안으로 마음이 겸양하여 낮추면 이것이 공이요 밖으로 예(禮)를 행하면 이것이 덕이며, 자신의 참성품[自性]이 만법을 건립하는 것이 공이요 마음의 본바탕[心體]이 생각을 여읜 것[離念]이 바로 덕이며, 자성(自性)을 여의지 않음이 공이요 사물에 응해 쓰되 물들지 않음이 덕입니다. 만약 공덕의 법신을 찾으려면 다맛 이에 의하여 공덕을 지어야 참된 공덕입니다.
공덕을 닦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이 가볍지 않아 항상 널리 공경을 행합니다. 마음이 항상 남을 가벼이 여기고 나를 내세우는 생각을 끊지 않으면 스스로 공이 없는 것이고, 자심이 허망하여 진실하지 못하면 스스로 덕이 없는 것이니, 이는 나를 내세우는 생각이 스스로 커져서 항상 일체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善知識 念念無間是功 心行平直是德 自修性是功 自修身是德 善知識 功德須自性內見 不是布施供養之所求也 是以福德與功德別 武帝不識眞理 非我祖師有過

선지식이여, 생각 생각 끊임이 없는 것이 공이요, 마음을 평등하고 곧게 쓰는 것이 덕이며,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덕입니다.
선지식이여, 공덕은 모름지기 자성(自性) 안에서 보는 것이요, 보시나 공양만으로 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복덕(福德)과 공덕(功德)은 다른 것이니, 무제가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뿐 우리 조사에게 허물이 있지 않습니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폭을 대다 ; 놓이게 된 형편이나 처지를[폭을] 생각하다.
*조실(祖室 할아버지·조상·개조 조/집·방·거처·몸 실) ; ①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②조사(祖師)가 머무는 방. 또는 선문(禪門)의 사원에서 가장 어른이신 스님이나 스님이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 

 

(43)찾다가저죽는다(111:79년동지:7912.22:7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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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❶]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1979.12.22) (7분1초)
우리는 진묵겁(盡墨劫) 전에 이미 깨달음,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부처님과 조끔도 차별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도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족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한 생각 딱 돌이키면—어디서 깨달음이 오는 것도 아니요, 누가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곳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원만구족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너무나도 간결하고 송곳으로 찌르듯 하는 그러헌 법문을 해 주신 것입니다.

다못 알 수 없는 꽉 맥힌 의심, ‘이 무엇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앉았거나 누웠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죄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괴롭거나 쓰리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프다고 가려 내놓고, 바쁘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잠잘 때라고 가려 내놓고, 속상헌다고 가려 내놓고, 기쁘다고 가려 내놓고, 이리저리 다 가려 내놓으면 언제 공부를 해야 할 때냐?
중생은 단 한 생각 동안이라도 생각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생각 없는 편안하고 고요하고 그러헌 때를 찾어서 공부를 할려고 하면 일생 동안 공부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는 보아야 하고, 귀를 통해서는 들어야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아야 하고, 숨쉬어야 하고, 입을 통해서 맛보고 말을 해야 하고, 손과 몸을 통해서는 따뜻하고 차웁고 딱딱하고 부드러운 거 그런 것을 다 감각을 해야 합니다. 잠시도 육근(六根)을 쉬고 일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나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활동하는 시간을 없이 하고 참선을 헐랴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토록 그 사람이 생각하는 참선은 헐 기약이 없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고 영특해서,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언제나 어디에나 두루하지 아니헌 곳이 없습니다.
그 표현이 바로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요.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진여불성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눈으로 볼 수 없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없고, 손을 통해서 잡을 수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는 깨달라야 합니다.

왜 눈으로 코로 귀로 육식(六識)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진여불성의 표현인데, 어째서 눈으로 볼랴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귀로 들을랴고 하면은 들리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을랴고 하면은 잡히지를 않는 것이냐?
우리는 목숨 바쳐서,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라도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고 법신불(法身佛) 아닌 것이 없건만, 왜 볼려고 허면 볼 수가 없고, 들을려고 허면 들을 수가 없느냐? 우리 모두에게 진묵겁 전부터서 원만구족해 있으면서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냐?

육도법계(六道法界)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시기 때문에 육도(六道)를 여의고 적광토(寂光土)는 따로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뭣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요긴한 길은 오직 이 한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할 때, 불이 펄펄 타오르는 지옥으로 느껴졌던 것이, 한 생각 돌이킨 곳에 바로 그것이 천당이 되고, 극락이 되는 그 묘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 활구참선법 ‘이 무엇고?’ 뿐인 것입니다.(12분14초~19분14초)

[참고 ❷] 영가(永嘉) 스님의 『증도가(證道歌)』 구절.
불리당처상담연(不離當處常湛然) 멱즉지군불가견(覓卽知君不可見)

당처(當處)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湛然]하나, 찾은 즉은 알거라 그대가 보지 못할 것이라.

[참고 ❸]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국사 지눌) 「진심소재(眞心所在)」
或曰息妄心而眞心現矣라 하니 然則眞心體用이 今在何處오
曰眞心妙體가 遍一切處니 永嘉云 不離當處常湛然이나 覓卽知君不可見이라 하며 經云 虛空性故며 常不動故며 如來藏中에 無起滅故라 하시며 大法眼云 處處菩提路요 頭頭功德林이라 하시니 此卽是體所在也니라

혹 말하길, “망심(妄心)을 쉬면 진심(眞心)이 나타난다니, 그렇다면 진심의 체(體)와 용(用)이 이제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하길, “진심묘체(眞心妙體)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다. 영가(永嘉) 스님이 이르시길, ‘당처(當處)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湛然]하나, 찾은 즉은 알거라 그대가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경에 이르시길, ‘허공의 성품인 연고며, 항상 동(動)하지 아니한 연고며, 여래장(如來藏) 중에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연고라’ 하며, 대법안[大法眼文益] 스님이 이르시길, ‘처처가 정각[菩提]의 길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공덕의 총림이라’ 하시니, 이것이 곧 이 마음의 체(體)가 있는 곳이니라.

眞心妙用은 隨感隨現홈이 如谷應聲이니라 法燈云 今古에 應無墜하야 分明在目前이로다 片雲은 生晩谷하고 孤鶴은 下遙天이라 하니 所以로 魏府元華嚴云 佛法이 在日用處하며 在行住坐臥處하며 喫茶喫飯處하며 語言相問處하며 所作所爲하나 擧心動念하면 又却不是也라 하시니

참마음[眞心]의 미묘한 작용은 감(感)을 따라 나타남이 산골짜기 소리를 응(應)하여 메아리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법등태흠(法燈泰欽) 스님이 이르시길, ‘고금에 마땅히 떨어짐이 없어 분명히 목전(目前)에 있다. 조각구름은 날 저문 골짜기에서 나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에서 내려옴이라’ 하니, 그런 까닭으로 위부(魏府)의 원화엄(元華嚴) 장로가 이르시길, ‘불법(佛法)이 날마다 작용하는 곳[日用處]에 있고, 행주좌와하는 곳[行住坐臥處]에 있으며, 차 마시고 밥 먹는 곳에 있고, 말하고 서로 묻는 곳에 있으며, 짓고 행위를 하나 마음을 들어 생각을 동(動)하면 또 옳지 못하니라‘

故知하라 體則遍一切處하야 悉能起用이나 但因緣有無不定일새 故로 妙用不定耳이어니와 非無妙用也이니라 修心之人이 欲入無爲海하야 度諸生死인댄 莫迷眞心體用所在也어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의 본체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여 다 능히 작용을 일으키나니, 다만 인연의 유무(有無)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용(妙用)도 또한 일정하지 않거니와 묘용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마음 닦는 사람은 무위(無爲)의 바다에 들어가 모든 생사를 건너려고 한다면 진심(眞心)의 체(體)와 용(用)이 있는 곳을 미혹하지 말지어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 산스크리트어 kalyāņa-mitra. 팔리어 kalyāņa-mitta.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가라밀(迦羅蜜) • 가리야낭밀달라(迦里也曩蜜怛羅) 등으로 음사(音寫)하고, 지식(知識) • 선우(善友) • 친우(親友) • 선친우(善親友) • 승우(勝友) • 시우(時友) 등이라고도 한역한다. 반대로 악도(惡道)로써 이끄는 사람을 악지식(惡知識)이라고 한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언하대오(言下大悟) ; 말 아래에 크게 깨닫는다. 말(법문) 듣다 깨닫는다. '직하흔번(直下掀飜 바로 뒤집다)'도 같은 뜻의 말이다.
*언하(言下) ; [주로 ‘언하에’의 꼴로 쓰여] 말이 떨어진 바로 그때. 또는 말을 하는 그 즉시.
[참고] 송담스님(No.157)—전강 조실스님 7주기 추모재(81.12.02.음)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상(平常)에 법문하시기를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말 아래 크게 깨달으라” 하셨습니다.
말은, 꼭 ‘선지식이다’라고 널리 알려진 그분의 말씀만이 말씀이 아니고 바람소리, 차 소리, 새 우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우리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가 불보살의 법문이요 선지식의 법문인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도 불보살의 모습이요, 법문이요, 진리의 표현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얼마만큼 간절히 그리고 철저하게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을 내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33)의심관(세등68의심관:5분59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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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 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 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 말이여.

 

(32)의심관(256의심관:5분57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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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❷]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철두철미(徹頭徹尾 통하다·꿰뚫다 철/처음 두/통하다·꿰뚫다 철/꼬리·끝 미) ; 처음[頭]부터 끝[尾]까지 빈틈없고 철저(徹底)하게.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무자(無字) : 화두.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에게서 비롯된 공안.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조주구자(趙州狗子) · 조주무자(趙州無字) ·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 등이라고도 한다.

[참고 ❶]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卷第十三. 「趙州眞際禪師語錄并行狀卷上(南嶽下四世, 嗣南泉願)」 『조주록(趙州錄)』 (선림고경총서 18, 장경각 발행) p70. (책 뒷면에서) p40.
問 : 狗子還有佛性也無? 師云 : 無
學云 : 上至諸佛 下至螘子 皆有佛性 狗子爲什麽無? 師云 : 爲伊有業識性在

한 스님이 물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에서 아래로는 개미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없습니까?”
“그에게 업식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 ❷]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 「제1칙 조주(趙州)의 구자(狗子)」 (무문혜개 찬술 | 금하광덕 역주 | 송암지원 교정) p28~33.
趙州和尙因僧問 :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 “無”
조주스님께 한 수행자가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조주스님 대답하기를 “없느니라” 하였다.

無門曰 : “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絕. 祖關不透, 心路不絕, 盡是依草附木精靈. 且道 如何是祖師關?
무문(無門)이 평한다.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한다. 묘오(妙悟)는 반드시 마음 길이 다하여 끊어져야 한다. 만약 조사관(祖師關)을 뚫지 못하고 마음 길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이 모두는 초목에 의지한 허깨비 종류임을 면치 못한다. 자! 일러 봐라. 어떤 것이 조사관인가?

只者一箇無字, 乃宗門一關也. 遂目之曰 「禪宗無門關」 透得過者, 非但親見趙州, 便可與歷代祖師把手共行, 眉毛廝結, 同一眼見, 同一耳聞, 豈不慶快? 莫有要透關底麼?
단지 이 한 개의 무자(無字), 이것이 종문(宗門)의 첫째 관문이다. 나는 이를 선종무문관이라 부르고자 한다. 만약 이 관문을 뚫고 지나간 자는 다만 친히 조주를 볼 뿐만 아니라, 곧 역대조사와 더불어 손을 잡고 같이 길을 가고 눈썹을 함께 하여 같은 눈으로 보고, 같은 귀로 들을 것이니 이 어찌 기쁘고 시원스런 일이 아니겠느냐! 이 관문을 뚫어보지 않으려는가!

將三百六十骨節 八萬四千毫竅, 通身起箇疑團, 參箇無字, 晝夜提撕. 莫作虛無會, 莫作有無會.
그러자면 360의 뼈마디, 8만4천의 털구멍, 온 몸, 온 정신을 똘똘 뭉쳐 하나의 의문 덩어리를 만들어 이 무자(無字)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라! 밤낮을 가리지 말고 이 문제와 부딪쳐라. 그때 이 무(無)의 뜻이 결코 허무(虛無)의 뜻이라거나,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如吞了箇熱鐵丸相似, 吐又吐不出, 蕩盡從前惡知惡覺, 久久純熟, 自然內外打成一片, 如啞子得夢 只許自知.
마치 한 개의 뜨거운 철환(鐵丸)을 삼킨 거와 같이 토해내려 해도 토해낼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하여 이제까지의 악지악각(惡知惡覺)을 탕진해 버리고 오래오래 지내면서 맑게 익어가면 저절로 내외가 한 조각(一片)이 되리니 이때에는 벙어리가 꿈꾼 것과 같이 나만 스스로 알게 된다.

驀然打發 驚天動地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岸頭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戲三昧.
이때에 돌연히 경지를 타파하여 나아가면 하늘을 흔들고 땅을 뒤집는 소식을 알 것이니, 이때는 관우(關羽) 장군의 큰칼을 빼앗아 손에 잡은 것과 같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생사마당에서 대자재를 얻어 육도사생(六道四生) 속에서 자유로이 노닐 것이다.

且作麼生提撕? 盡平生氣力 擧箇無字 若不間斷 好似法燭一點便著”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오직 평생의 기력을 다 바쳐 이 무자(無字)를 들어라. 만약 끊임없이 지어 가면 마치 촛불에 불을 붙이면 단번에 밝아지듯 한 법이 되리라.

頌曰 : 狗子佛性 全提正令 纔涉有無 喪身失命
송(頌)으로 이른다. 개와 불성! 이 한마디에 불조법(佛祖法)의 바른 법령(法令)은 온전히 반포되었다. 이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유무(有無)의 견해를 가져 어른거린다면 이 사람은 당장에 신명을 잃으리라.

[참고 ❸]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大慧普覺禪書 卷第29) 「答王敎授」
若要直下休歇 應是從前得滋味處 都莫管他 却去沒撈摸處 沒滋味處 試著意看 若著意不得 撈摸不得 轉覺得沒𣠽柄捉把 理路義路心意識 都不行 如土木瓦石相似時 莫怕落空 此是當人放身命處

당장에 쉬려고 한다면 종전의 재미를 얻었던 것들에는 조금이라도 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잡거나 더듬을 수 없는 곳과 재미가 없는 곳으로 가서 한번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만약 마음을 헤아릴 수도 없고 잡거나 더듬을 수 없으며, 붙잡을 요점[𣠽柄]도 없음을 더욱 더 느끼게 되어 이치의 길[理路]과 뜻 길[義路]에 심의식(心意識)이 전혀 가지 않음이 토목와석 같을 때에도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곳이 바로 자신이 신명(身命)을 버릴 곳입니다.

不可忽不可忽 聰明靈利人 多被聰明所障 以故道眼不開 觸途成滯 衆生無始時來 爲心意識所使 流浪生死 不得自在 果欲出生死 作快活漢 須是一刀兩段 絶却心意識路頭 方有少分相應 故永嘉云 損法財滅功德 莫不由茲心意識 豈欺人哉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총명 영리한 사람은 다분히 총명의 장애를 받는 까닭에 도안(道眼)이 열리지 않아 가는 길마다 막히게 됩니다. 중생은 아득한 옛부터 심의식(心意識)에게 부림을 당하여 생사에 유랑하여 자재하지 못합니다. 과연 생사에서 벗어나 쾌활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단칼에 두 동강을 내어 심의식의 길을 끊어야만 그때서야 조금 상응(相應)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가 스님께서 “법의 재물(法財)을 줄이고 공덕을 없앰은 이 마음[心意識]을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고 하시니, 어찌 사람을 속이셨겠습니까.

頃蒙惠敎 其中種種趣向 皆某平昔 所訶底病 知是般事 颺在腦後 且向沒巴鼻處 沒撈摸處 沒滋味處 試做工夫看 如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저번의 편지를 보았습니다만, 그 내용의 여러 가지 공부하는 방향은 모두 내가 평소에 꾸짖은 바의 병통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알았다면 머릿속에서 그것을 털어 버리고, 또한 수단[巴鼻]이 없는 곳과 잡거나 더듬을 수도 없는 곳과 재미가 없는 곳에서 시험삼아 공부해 보십시오. 예를 들자면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조주 선사가 “무(無)”라고 답한 것과 같습니다.

[참고 ❹]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無字)’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 ; 대오선(待悟禪).
*대오선(待悟禪 기다릴 대/깨달을 오/고요할 선) ; 참선하는 데 있어서 깨닫기[悟]를 기다리는 것[待].
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데 10가지 병(病)의 하나로, 수행자는 이런 생각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참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7)대오선(111:1979년 동지차례:79.12.22:2분19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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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❷]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 법문에서.(2분20초)
참선하는 데 있어서 제일 몹쓸 병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오선(待悟禪), 「어서 깨달랐으면...」
깨닫기를 바래는 그것이 설사 밤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해서 화두가 제법 일여(一如)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찰나간이라도 「어서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와서 탁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애써서 99%까지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저 천길만길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바래는 마음, 「어서 속히 어떠한 목적을 성취했으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 공부가 잘 되어갈수록 「이 무엇고?」
조끔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또 잘 안된다고 번뇌심이나 짜증도 내지를 말고, 오직 한 생각 한 생각, 산을 보든지, 물소리를 듣던지, 새소리를 듣던지, 기차 소리를 듣던지, 애 우는 소리를 듣던지, 문닫는 소리를 듣던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하는 것입니다.(8분32초~10분5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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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윤회(生死輪廻).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성화(成火 이룰 성/불·화 화) ; ①매우 귀찮게 졸라 댐. ②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고 속이 탐. 또는 그런 증세.
*광액도아(廣額屠兒 넓을 광/이마 액/죽일 도/어조사 아) ; 이마[額]가 넓은[廣] 백정[屠兒]이라는 뜻. 도아(屠兒), 도(屠)는 ‘죽일 도’ 아(兒)는 어조사. 곧 백정(白丁).
*도아(屠兒 죽일 도/어조사 아) ; (산스크리트어) domba, aurabhrika. 도살업(屠殺業)에 종사하는 비천한 사람. 백정. 도살업은 인도의 4성계급 중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이나, 4성계급 밖의 천민이 종사한다. 도자(屠者)라고도 한다.

[참고 ❶]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19권. 8. 범행품(梵行品) ⑤. (담무참曇無讖 한역 |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波羅㮈國有屠兒 名曰廣額 於日日中 殺無量羊 見舍利弗 卽受八戒 經一日一夜 以是因緣 命終得爲北方天王毘沙門子

바라내국(波羅㮈國)에 백정(白丁)이 있었으니 이름이 광액(廣額)입니다. 날마다 한량없는 양을 죽였는데 사리불(舍利弗)을 만나서 8계를 받아 하루 낮과 밤을 지났습니다. 이 인연으로 목숨을 마치고 북방천왕(北方天王) 비사문(毘沙門 : 4천왕 중의 하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참고 ❷] 『선종송고연주통집(禪宗頌古聯珠通集)』 제2권. 세존기연(世尊機緣).
世尊因廣額屠兒日殺千羊 一日至世尊前 颺下屠刀云 我是千佛一數 世尊云 如是如是

세존이, 광액도아(廣額屠兒)가 하루에 천 마리의 양을 죽였는데 어느 날 세존 앞에 이르러 도살하는 칼을 버려서 떨어뜨리고 이르되 ‘나도 이 천불의 하나입니다’ 함으로 인해 세존이 이르되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참고 ❸]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 상권. 고려 부암무기(浮庵無寄) 찬집(撰集).
(게송 120) 佛慮末代衆 於法起斷見 夭傷其慧命 亦亡失法身
부처님께서는 말세 중생들이 부처님 법에 대해 단견(斷見)을 내어 그 지혜의 수명을 요절케 하거나 법신마저 잃어버릴까 염려하셨네.

(게송 121) 更設三種權 以扶一圓實 一切有佛性 一切法常住
다시 세 가지 방편을 베푸시어 한 가지 원만한 진실[一圓實]을 부추기시되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고 일체법은 영원히 머문다 하셨네.

(게송 122) 屠兒廣額者 立地頓成佛 五逆阿闍王 罪滅而妙證
광액(廣額)이라는 백정은 서 있는 자리에서 단박에 성불하였고 오역죄를 지은 아사세왕(阿闍世王)이 죄를 멸하고 오묘한 법을 얻었네.

(게송 123) 是知涅槃法 罪福本平等 若欲疾成佛 應須學此法
그러므로 열반법은 죄와 복에 대해 본래 평등함을 알라. 속히 성불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이 법을 배워야 하느니라.

涅槃經義者 已如前示 此不煩錄
『열반경』의 이치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번거롭게 기록하지 않는다.

言廣額屠兒者 聞一切物 皆有佛性之言 放却屠刀 立地成佛
광액(廣額)이라는 백정은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라는 말을 듣고 바로 도살하는 칼을 놓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성불하였다.

又阿闍世王 聞調達語殺父瓶沙 心卽勞熱 滿身生瘡 天下諸毉無能治者 有一大醫 名曰耆婆 卽白王言 欲治此病 莫如投佛 王卽依言 俱詣佛所 聞罪性空 發菩提心 身瘡便愈云云

아사세왕은 조달(調達)의 말을 듣고 아버지 빈비사라왕[병사왕甁沙王]을 살해하였다. 마음이 곧 괴롭고 열이 나서 온몸에 종기가 돋았는데, 천하의 명의들도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 기바(耆婆)라는 대의원이 왕에게 고하기를, “이 병을 치료하고 싶다면 부처님께 귀의하는 길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곧 그 말에 의지하여 함께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 “죄의 성품은 공한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보리심(菩提心)을 내자 몸에 있던 종기가 모두 치유되었다고 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동[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罪] 행위[業 : 身口意 三業].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지서리 ; ‘짓거리('짓'을 낮잡아 이르는 말)’의 사투리.
* : 몸이나 몸의 일부를 놀려 움직이는 행동이나 행위를 이르는 말.
*사바세계(娑婆世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sahā-loka-dhātu.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현실세계. 사바(산스크리트어 sahā)란 사하(沙訶) · 사가(娑呵) · 삭하(索訶)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에 안주하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번뇌, 고뇌를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뜻에서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이라고 한다. 사바세계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영토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다맛 ; ‘다만(다른 조건이나 상황과는 관계없이 단지)’의 사투리.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나타낸 말.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❶]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❷]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❸]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말.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곧 부파 불교(部派佛敎)를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④열등한 능력이나 소질을 갖춘 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승(乘) ; [산스크리트어] yāna. '타는 것. 수레. 또는 실어 나른다'는 말. 연나(衍那)라고 음사(音寫)한다. 생사의 바다에 빠진 중생을 깨달음의 언덕으로 실어 나른다는 의미로 쓰인다. 중생을 제도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수레에 비유하여 소승(小乘) · 중승(中乘) · 대승(大乘) · 일승(一乘) · 삼승(三乘) · 오승(五乘) 등의 개념으로 활용된다.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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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ㅈ/전식득지2026. 9. 17. 08:49

전식득지(No.227)—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는 일전(一轉)해 나의 보리(菩提)로 깨달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 |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轉識得智] | 사실 무엇을 깨달으며,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그 경계는 알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뒤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 12부경전(十二部經典)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내증(自內證)의 최고의 법문은 입을 통해서는 다 설할 수가 없다 | 불법(佛法)의 위대성.


*전식득지(轉識得智) ; 수행자가 수행이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도 한다.

식(識)이 지(智)로 변화되는 것을 전의(轉依)라고 하는데, 전의(轉依)의 뜻은 ‘소의(所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轉)은 전변(轉變) 또는 능변현(能變現)의 뜻으로 능동적으로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득(得)은 획득(獲得)과 성취(成就)를 말한다.

번뇌에 오염된 중생의 유루(有漏: 세속)의 마음인 ‘8식’(八識 - 전오식,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을 질적으로 변혁하여[轉識得智] 얻은 4가지 무루(無漏: 열반)의 청정한 지혜, 사지(四智)는 다음과 같다.

①대원경지(大圓鏡智) ;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제8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의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大圓鏡智]’라고 말한다.

②평등성지(平等性智) ;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에 해당하는 오염된 제7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제7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平等性智]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③묘관찰지(妙觀察智) ; 오염된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모든 법(法)의 실상을 묘하게 잘 관찰하여 자유 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④성소작지(成所作智) ; 눈·귀·코·혀·몸의 5관으로 느끼는, 오염된 전5식(前五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여, 중생을 이익과 구제하기 위해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모두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20분 54초)

전식득지(227:1983계해년 성도재 법회:82.12.08.음:20분54초).mp3
19.14MB



[법문] 송담스님(No.227)—1983년(계해년) 성도재 법회(82.12.08.음) (용227)

실로 수도(修道)의 마음을, 도(道)를 닦을려고 마음을 내면 누구나 여러 가지 형태의 악마(惡魔)와 투쟁을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비단 삼천년 전의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 출가해서 도(道)를 닦으려는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속가에서 도를 닦으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발심(發心)을 해서 도를 닦을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날부터 직접 간접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여러 가지 각도에서 나의 도(道)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와 투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사람이 도(道)를 닦아서 도를 이루게 되면 마구니의 무리가 설 땅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구니의 궁전이 들썩들썩해서 넘어질려고 하기 때문에 마왕(魔王)들은 자기의 영토가 무너지고, 자기의 궁전이 무너지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들까지 설 땅이 없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써서 도 이루는 것을 방해 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그 마구니와 싸워서, 그 마구니는 무력(武力)으로 오는 마구니와 그 미인(美人)이 되어 가지고, 미인이라고 하는 표현은 순경계(順境界), 부드러운 그러한 방법으로 나를 갖다가 현혹해 오는 그러한 마구니, 실지는 무력으로 닥쳐오는 마구니보다도 이러한 부드러운 방법을 써서 나를 가장 위하고 나를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다가오는 마구니는 참으로 이겨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무력의 마구니나, 부드러운 마구니와 싸워서 지면 그대로 그 마구니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그 마구니와 끝끝내 싸워 가지고 내가 이기면 출세간(出世間)의 새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마구니가 도리어 귀화해 가지고 나의 수호신이 되는 것이며, 나를 방해 치던 모든 마구니의 권속들은 나를 도와주고 아껴주는 나의 동포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나를 방해 치고 못살게 굴고 잠시도 나의 마음 편안해질 기회를 주지 않던 그런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는 일전(一轉)해 가지고 나의 보리(菩提)로 깨달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유식(唯識)에서는, 범부(凡夫)에 있어서의 식(識)은 전5식(前五識)—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이나, 의식(意識)—제6식(第六識)이나, 7식(七識)이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이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이것입니다.

평등성지(平等性智)나 묘관찰지(妙觀察智)나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와 같은 이런 지(智)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닫기 전의 마구니들이, 깨달으면 그것이 나의 수호신이 되며, 나의 권속이 되며, 나의 위없는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으면 대관절 무엇을 깨닫느냐?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라 가지고 도를 깨달으신 날인데,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대단히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을 합니다.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깨닫고 나면 그 경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생사해탈한다. 생사 속에서 생사가 없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 막연하게 이렇게들 말을 하고 그런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무엇을 깨달으며,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그 경계는 알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치(理致)와 지혜(智慧), 이지(理智)가 둘이 아닌 세계다. 또는 부처님과 부처님이 서로 생각할 뿐이다. 또는 자수용(自受用)하는 스스로 당신만이 맛볼 수 있는, 누릴 수 있는 법락(法樂)이다. 또는 해인삼매(海印三昧)다, 여여실실(如如實實)이다' 그 깨달음의 경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마는.



'무진평등(無盡平等)한 그 진리가 자기 육신에 가득차 가지고 가없는 다함이 없는 적멸(寂滅)의 선(禪)의 낙(樂)이 넘쳐흐른다. 그 적멸한 채로 그냥 일체가 다 그 적멸한 경계 속에 다 돌아가는 것이며, 그 침묵한 채 더할 나위 없는 그 훌륭한 정법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입을 벌려서 법을 설한 것이 아니라 그 적멸의 법락 속에 있는 바로 그 침묵의 그 상태에서 최고의 법(法)이 여지없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적적(寂寂)한 그 침묵 속에서 대웅변이며, 대설법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그러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신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최고의 진리, 영원한 진리, 영원히 생사 없는 이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일러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사유(思惟)를 하실 때에 마왕(魔王)들이 나와서 "당신이 혼자 깨달랐으면 그만이지, 그것은 누구에게 말해봤자 아무도 알아들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공연히 입을 벌려서 그 법을 설해봤자 입만 아프고 피로할 뿐이지 아무 성과를 거둘 수가 없을 것이니 법을 설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마구니들이 부처님을 갖다가 행여나 법을 설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깨달은 사람이 나올까봐 그렇게 방해를 쳤습니다.



그때 천상(天上)에서 또 부처님께 여쭙기를, "이 많은 중생 가운데에는 정법의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방편(方便) 따라서 법을 설하시면 차츰 근기(根機)가 수승해지면 반드시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다 중생의 근기 따라서 방편을 설하셔서 차츰차츰 근기 따라서 소승법으로부터 중승법, 대승법, 그래 가지고 최상승법에 이르기까지 법을 차츰차츰 근기 따라서 설해 가지고 마침내는 위없는 법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도 방편문을 열어주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해 가지고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최초에 깨달으신 뒤 그 침묵한 가운데에 21일간에 걸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하셨습니다.

'화엄경은 입을 열어서 설하신 경전이 아니고, 최초에 부처님이 성불하시자마자 침묵한 가운데에 설해진 경전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들으라고 설하시기 보다는 중생의 근기(根機) 맞춰서 설해진 경전이 아니고, 오직 자내증(自內證)의 경전, 당신이 깨달은 바를 고대로 침묵 속에서 설해졌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함경 12년과 방등경 8년과 21년간에 걸쳐서 반야경을 설하시고, 마지막 8년간은 법화경을 설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 12부경전(十二部經典)을 설하셔 가지고 80세를 일기로 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법은 근기 따라서 그렇게 많은 법을 설하셨으되, 실지에 있어서는 부처님께서 그 적멸하신 채 그 침묵 속에서 설하신 그 법의 극일부분(極一部分)에 지나지 못한 것을 근기(根機) 따라서, 장소와 때와 근기 따라서 조금 열어 보여주신 것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시고자 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내증(自內證)의 최고의 법문은 입을 통해서는 다 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타난 것은 그 일부 밖에는 아니된 것이고,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그 위대한 법(法)은 온 법계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 · 달 · 별들이 반짝거리는 것이며, 봄에는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무성했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열매를 맺고, 겨울이 돌아오면 다시 뿌리로 다 돌아가는 이러한 자연 현상(自然現象)과, 물이 흐르고 새가 날으고 구름이 모았다가 흩어지는 모든 현상, 또 이 사람과 동물들이 났다가 늙어서 병들어 죽는 이런 현상 모든 것이, 모든 이 천상계가 이루어졌다 잠시 머물렀다가 또 변질이 되어 가지고 무너져버리는 모든 현상이, 있는 고대로 이것이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생로병사요, 성주괴공이요, 무상하고 의지할 것 없는 꿈이요, 그것을 따라서 몸부림치고 헤매는 중생은 바로 그것들이 생사윤회(生死輪廻)의 현장이지만,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 진리를 깨닫고 보면 1초 전의 생사요, 지옥이요, 고해(苦海)가 바로 적광토(寂光土)요,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부처님의 끝없는 진리의 세계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숙세에 얼마나 복을 많이 지었기에, 깊은 숙연을 맺었기에 이 무상(無常)한 오탁악세(五濁惡世)요, 생사의 윤회의 바다 속에서 최고의 위없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정말 이 세계는 사방에서 불이 훨훨 타고 있고, 지금 타 들어오고 있고, 우리도 그 불에 의해서 오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러한 위경(危境)에 놓여 있지만,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한 사람에게는 훨훨 타는 불은 나로 하여금 해태(懈怠)를 부릴 수 없게 해주는 스승의 불보살(佛菩薩)의 채찍이요, 인간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핍박해 오는 모든 괴로운 조건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도 해태를 부릴 수 없고, 한 눈을 팔 수 없게 하는 그러한 불보살의 거룩한 채찍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발심(發心)을 한 사람과 발심을 못한 사람에 따라서는 모든 것들이—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그렇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깨달음을 얻은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에게는 찰나간(刹那間)에 어제의 마구니는 정법을 수호하는,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변하고,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굴던 원수는 나의 도반(道伴)이요, 나의 스승이요, 나의 영원한 선지식(善知識)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 말로 말해서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가 일전(一轉)해서 무상대각(無上大覺)으로 변함에 있어서이겠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신, 불교 4대명절(四大名節) 가운데 가장 뜻깊은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맞이해서 재발심(再發心)하고 새로운 각오로써 자기의 오늘날까지의 모든 것을 재검토하고, 자기의 신앙과 자기의 신심에 대해서도 재검토를 해서 진정한 신심으로 새 출발을 해야 할 줄 생각을 합니다.(18분25초~39분1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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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삼천년 전의 부처님’ ;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석가(釋迦)라 한다. 뜻으로 번역하여 능인적묵(能仁寂默) 또는 능적(能寂) · 능유(能儒)라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청신사(淸信士)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자 신도, 곧 우바새(優婆塞).
*청신녀(淸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마구니 ; 마(魔). [산스크리트어]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 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출세간(出世間) ; 세속의 번뇌를 떠나 깨달음의 경지에 이름.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시킨 깨달음의 심리 상태.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일전(一轉) ; 마음이나 사태가 아주 달라지거나 바뀜.
*보리(菩提) : [산스크리트어]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 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산스크리트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 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유식(唯識) ; 모든 차별 현상은 오직 인식하는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일체는 오직 마음 작용에 의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뜻.
*'유식(唯識)에서는, 범부(凡夫)에 있어서의 식(識)은 전5식(前五識)—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이나, 의식(意識)—제6식(第六識)이나, 7식(七識)이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이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이것입니다. 평등성지(平等性智)나 묘관찰지(妙觀察智)나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와 같은 이런 지(智)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닫기 전의 마구니들이, 깨달으면 그것이 나의 수호신이 되며, 나의 권속이 되며, 나의 위없는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 전식득지(轉識得智). 수행자가 수행이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도 한다.

식(識)이 지(智)로 변화되는 것을 전의(轉依)라고 하는데, 전의(轉依)의 뜻은 ‘소의(所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轉)은 전변(轉變) 또는 능변현(能變現)의 뜻으로 능동적으로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득(得)은 획득(獲得)과 성취(成就)를 말한다.

번뇌에 오염된 중생의 유루(有漏 : 세속)의 마음인 ‘8식’(八識 - 전오식,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을 질적으로 변혁하여[轉識得智] 얻은 4가지 무루(無漏 : 열반)의 청정한 지혜, 사지(四智)는 다음과 같다.
①대원경지(大圓鏡智) ;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제8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의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大圓鏡智]’라고 말한다.
②평등성지(平等性智) ;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에 해당하는 오염된 제7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제7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平等性智]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③묘관찰지(妙觀察智) ; 오염된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모든 법(法)의 실상을 묘하게 잘 관찰하여 자유 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④성소작지(成所作智) ; 눈·귀·코·혀·몸의 5관으로 느끼는, 오염된 전5식(前五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여, 중생을 이익과 구제하기 위해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모두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42)전식득지(366:1988년 칠석차례 법어:4분43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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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송담스님(No.366)—19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어(88.08.18)에서.(4분43초)
〇우리가 정말 이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법을 믿는다면 ‘맨 처음에 무엇을 믿느냐’ 하면은 『내가 바로 부처다. 내가 바로 부처』라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한테 무슨 생사(生死)가 있어?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경지를 요달(了達)한 분이 바로 부처님인데, 부처님한테는 번뇌도 없고 생사도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내가 바로 부처다』 그렇게 딱 믿고 대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도 없는 것이다.

지금 그러면 우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는 무엇이며, 어머니한테 받아난 이 육체로 해서 생이 있고, 늙음이 있고, 병이 있고 마침내는 육칠십 살다가 결국은 죽는데, 그 죽음이 있는데 이 있는 죽음,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가 매(昧)했기 때문에, 매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진 것이다. 이렇게 여러분은 우선 알아야 하고 또 그렇게 확실히 조리 있게 알면 그것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서 화두를 들어야 한 번을 들어도 여지없이 화두가 들어지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해서 일체처 일체시에 그놈을 들어 나가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우리의 중생의 무명(無明)으로 인해서 ‘없는 생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생사일망정 바로 거기서 생사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중생은 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전5식(前五識)과 6식(六識, 意識)과 7식(말나식), 8식(아뢰야식), 이런 식(識)으로 해서 일생을 살아가고, 식(識)으로 해서 업을 짓고, 식(識)으로 해서 일체 생사윤회를 하는데,
그 일어나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이 십팔경계에 있어서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고, 그 의단이 독로해 가지고 그것이 툭! 터져 버리면 자성을 깨닫게 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데.

그 자기 본래면목을 바로 깨닫자마자, 그 깨닫기 전의 중생의 그 육근, 육경, 육식 그 식(識)이 부처님의 지(智)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지(智)가 딴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 찰나간에 변해가지고 지(智)로 변하는 것이여. 식(識)이 지(智)로 변하는 것이지, 식(識)이 없어지고 지(智)가 어디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잘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님이 없어. 우리의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서 그 부처님이 어디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여. 중생의 마음, 그것이 바로 일념무생(一念無生)하는 도리를 요달해 버리면 거기에서 바로 성불을 하는 것입니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한다.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 등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물질[色] · 소리[聲] · 향기[香] · 맛[味] · 감촉[觸] · 법(法)의 6가지 외부적인 대상인 6경(六境)을 대할 때 생겨나는 6가지 인식작용이 6식(六識)이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지(智) ; ①산스크리트어 jñāna.  팔리어 ñāṇa.  모든 현상의 이치를 명료하게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이해. 지식. ②산스크리트어 jñāna  깨달음. 깨달은 부분의 지혜. 완전히 아는 것. ③팔리어 paññā  지혜. 혜(慧).
*자수용(自受用) ; 깨달음의 경지를 되새기면서 스스로 즐김.
*법락(法樂) ; 불법(佛法)으로 말미암아 얻는 즐거움. 법열(法悅), 법희(法喜)라고도 한다. 불법을 들음으로써, 알아감으로써, 실천함으로써 생겨나는 즐거움. 진리[法]를 깨달음으로써 얻는 즐거움[樂].
*해인삼매(海印三昧) ;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으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님의 마음 속에는 과거와 현재·미래의 모든 업이 똑똑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무상대도(無上大道) ; 최고의 큰 깨달음.
*‘최고의 진리, 영원한 진리, 영원히 생사 없는 이 진리’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산스크리트어]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천상(天上) : 욕계의 육욕천(六欲天)과 색계•무색계의 여러 천(天)을 통틀어 일컬음. 신(神)들이 사는 곳. 신(神)의 세계.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화엄경(華嚴經) ; 본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이 경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다.
3가지 번역이 있는데, 60권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 번역이고, 80권은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 번역, 40권은 당(唐)의 반야(般若) 번역임. 이 가운데 40권은 60권과 80권의 마지막에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며,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다.

[참고] 법장현수(法藏賢首) 스님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보면,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龍宮)에 가서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화엄경)을 보았는데, 상본·중본·하본 3가지 본(本)이 있었다. 그 중에 상본(上本)이 십삼천대천세계미진수(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 게송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었다 한다. 중본(中本)은 49만 8800게송 1200품(品)이고, 하본(下本)은 10만 게송 38품이었다 한다.

용수보살이 상본과 중본은 사바세계 사람들 마음의 힘으로서 능히 가질 수 없으므로 전하지 않고, 하본(下本)을 외어 세상에 전하였고 또 그것을 간략히 한 약본(略本)이 80권 본, 60권 본이 되었다 한다.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은 ‘미진수(微塵數 셀 수 없는 무한수)’의 품(品)으로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화엄경을 이루고 있으며, 곧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로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전강선사 법문 275번 참고)
*자내증(自內證) ; 자신의 마음을 깨달음. 자신이 직접 체득한 깨달음. 스스로 체득한 내면의 깨달음. 자내소증(自內所證), 자심내증(自心內證).
*'화엄경은 입을 열어서 설하신 경전이 아니고, 최초에 부처님이 성불하시자마자 침묵한 가운데에 설해진 경전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들으라고 설하시기 보다는 중생의 근기(根機) 맞춰서 설해진 경전이 아니고, 오직 자내증(自內證)의 경전, 당신이 깨달은 바를 고대로 침묵 속에서 설해졌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함경 12년과 방등경 8년과 21년간에 걸쳐서 반야경을 설하시고, 마지막 8년간은 법화경을 설하셨습니다 ; 수(隋)나라 때 천태 지의(天台智顗 538-597) 스님이 부처님의 방대한 가르침을 설한 순서에 따라 분류[五時]한 것. 천태종의 교판(敎判, 교상판석敎相判釋).

①화엄시(華嚴時) :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직후 21일간 화엄경을 설하시고(화엄최초삼칠일 華嚴最初三七日),
②녹원시(鹿苑時), ③방등시(方等時) : 12년간 녹야원에서 아함경을, 8년간 유마경등의 대승경전을 설하시고(아함십이방등팔 阿含十二方等八)
④반야시(般若時) : 21년간 여러 반야경을 설하시고(이십일재담반야 二十一載談般若),
⑤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 : 8년간 법화경을, 입멸 때 1일간 열반경을 설하셨다(종담법화우팔년 終談法華又八年).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 ; 십이부경(十二部經)은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그 경문의 서술 형식 또는 내용을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팔만사천 법문.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주요한 네 가지 현상. 출생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생(生), 노쇠하는 현상을 노(老), 병든 현상을 병(病),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사(死)라 한다.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일반적 형식으로서 사상(四相)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고통이기 때문에 사고(四苦)라고도 한다. 생로병사가 사라진 경계가 무위법(無爲法)인 열반(涅槃)이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4~135. (가로판 p139~141)
佛云,  無常之火가  燒諸世間이라 하시고  又云,  衆生苦火가  四面俱焚이라 하시며 又云,  諸煩惱賊이  常伺殺人이라 하시니  道人은  宜自警悟하야  如救頭燃이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살라 버린다」하시고, 또 「중생들의 고뇌의 불이 사면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하시며, 또 「모든 번뇌의 적이 항상 너희들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하시니, 수도인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할지어다.

註解(주해) 身有生老病死하고  界有成住壞空하고  心有生住異滅하니  此無常苦火가 四面俱焚者也라
【謹白參玄人하노니  光陰을  莫虛度하라

몸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세계에는 이루어지고[成] 지속되고[住] 파괴되고[壞] 없어져[空] 버리는 것이 있으며, 마음에는 일어나고[生] 머물고[住] 변해 가고[異] 사라져[滅] 버리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덧없는 고뇌의 불이 사면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치를 참구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부디 광음을 아껴 헛되이 보내지 말라.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成],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住], 쇠퇴하여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壞], 모든 것이 괴멸되어 허공만 있는 과정(상태)[空]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상적광(常寂光). 법신불(法身佛)이 머무르는[住] 정토(淨土).
상적광토는 이상(理想)과 현실(現實), 정(靜 : 寂)과 동(動 : 光)의 본래(本來 : 常) 일체(一體)인 세계로 그것은 여기와 저기,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넘어 체득되는 참된 절대계(絶對界)이고, 상주(常住)의 정토(淨土)이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 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경(危境 위태하다·위태롭다·불안하다·두려워하다 위/지경·경계·경우·처지 경) ; 위태로운 처지(虛地)나 지경(地境).
*해태(懈怠 게으를 해/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선지식(善知識) ; 산스크리트어 kalyāņa-mitra. 팔리어 kalyāņa-mitta.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가라밀(迦羅蜜) • 가리야낭밀달라(迦里也曩蜜怛羅) 등으로 음사(音寫)하고, 지식(知識) • 선우(善友) • 친우(親友) • 선친우(善親友) • 승우(勝友) • 시우(時友) 등이라고도 한역한다. 반대로 악도(惡道)로써 이끄는 사람을 악지식(惡知識)이라고 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사대명절(四大名節) ;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사월초파일(4월 8일), 출가하신 2월 17일, 성도(成道)하신 12월 8일, 열반에 드신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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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