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물(No.175)—(게송)雲起南山北山雨~ | 물은 액체 고체 기체에 따라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습성(濕性), 젖은 성품 |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 이름을 진여 · 자성 · 본성 · 참나 · 밑 없는 배 · 그림자 없는 나무 등등이라 한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다.
*일물(一物) : 한 물건[一物]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 한 모양[一相]도 같은 뜻.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2.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운기남산북산우(雲起南山北山雨)요. 구름이 남산에서 일어나는데 북산에 비가 와. 여명마자기다반(驢名馬字幾多般)고. 이것은 나귀다, 이것은 말이다, 이것은 소다, 이것은 돼지다, 그러한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낱낱이 다른 이름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이 말이여.
청간호묘무정수(請看浩渺無情水)하라. 청컨댄 저 넓고도 넓고 넓은 저 무정(無情)한 저 물을 보라 그 말이여. 기처수방기처원(幾處隨方幾處圓)고. 어느 곳에서는 모나고, 어느 곳에서는 둥근가?
물이라 하는 것은 모난 그릇에 담으면 모나게 담겨지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담아지고, 긴 그릇에 담으면 길게 담아지고, 깊은 그릇에 담으면 깊게 담아지고. 깊은 데를 만나면 밑바닥부터서 차츰차츰 차 올라가 가지고 가뜩차면은 넘고, 높은 데에 처하게 되면 나차운 데로 나차운 데를 향해서 계속 떨어져 흘러 내려가고. 추위를 만나면 얼고, 더위를 만나면 녹고, 뜨거운 것을 만나면 수증기가 되고, 알고 보면 본래 한 물인데 장소와 여건에 따라서 모냥도 변하고 움직임도 변합니다.
그렇지마는 그 본바탕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얼음이 얼었다 하더라도 분명 우리 눈으로 볼 때에는 고체가 되어 가지고 만져 보면은 찹지마는 차운 고체일 때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그것이 녹아서 물이 되어서 액체가 되어 있을 때에도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그것이 증기가 되어서 기체가 되어 있어도 변하지 않는 바가 있어.
그러면 그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습성(濕性)이라 하는 것이여. 습성! 젖은 성품. 습성은 액체일 때에도 그 습성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고, 고체인 얼음덩어리로 있을 때에도 젖은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수증기가 되어서 기체가 되어 있을 때도 그 습성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그 말이여. 남산에 구름이 일어날 때나 북산에서 비가 내릴 때, 그 습성에 있어서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한 바가 없다.
우리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육도(六途)를 돌고 돌아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사람으로 태어나 가지고 오늘 이 시간에 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 자리를 같이했습니다마는, 무량겁을 돌고 돌았지만 그 도는 가운데에 때로는 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말로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돼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범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나라에 하늘나라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옥에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는 지옥 중생이 되기도 했습니다마는, 그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이 이름을 진여(眞如)라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고, 본성(本性)이라 하고, ‘참나’라 하고, 또는 일물(一物)이라 하고, 때로는 밑 없는 배라 하고, 구멍 없는 퉁수라 하고, 그림자 없는 나무라 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처음~7분48초)
*(게송) ‘운기남산북산우(雲起南山北山雨)~’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야부도천 스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 대천계(大千界) · 대천세계(大千世界) · 삼천세계(三千世界) ·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 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 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 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 • 중천 • 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sahā-loka-dhātu.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현실세계. 사바(산스크리트어 sahā)란 사하(沙訶) · 사가(娑呵) · 삭하(索訶)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에 안주하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번뇌, 고뇌를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뜻에서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이라고 한다. 사바세계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영토이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 · 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 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진여(眞如 참·진리·진실·본성·본질·부처 진/같을 여) ; [산스크리트어(범어)] tathatā. 진실(眞實)하여 허망하지 않고 변이(變易)가 없어 그대로임[如]. 진(眞)이란 진실을 말하니 허망함이 없음을 뜻하고, 여(如)는 그 자성에 변이가 없어 항상(恒常) 그러하다[如]는 뜻이다. 여실(如實) · 법계(法界) · 법성(法性) · 법주(法住) · 실제(實際) · 실성(實性) · 실상(實相) · 여래장(如來藏) · 이생성(離生性) · 법신(法身) · 불성(佛性) ·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 여래(如來) · 열반(涅槃) · 일심(一心) · 일여(一如) · 원성실성(圓成實性) · 중실리심(中實理心) · 부사의계(不思議界)의 뜻과도 통한다.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것을 진여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법은 오직 안으로 증득한 바여서 문자나 언어로는 표시할 수 없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이 법은 모든 문자를 벗어나고, 모든 언어를 떠났기 때문이니라. 일체 언어의 경계를 초월하고 언어의 길을 벗어나 모든 희론(戱論)을 없애며, 조작과 조작 아님을 떠나서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고, 모든 머트러운[尋]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떠난 이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이며, 형상이 없는가 하면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형상의 경계를 멀리 떠나며, 모든 범부의 경계를 초월하고 범부의 행을 벗어나고 마군의 경계를 초월하며, 일체 번뇌의 경계를 초월하고 모든 의식의 경계를 떠나서 그 머묾이 없는 최상의 적정(寂靜)인 성스러운 지혜의 경계이니라.
그러므로 이 법은 오직 안으로 증득한 바여서, 이것은 바로 티끌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결백하고 맑고 깨끗한 것이며, 최상이고 최승이자 제일이며 비할 바도 없으며, 항상 머물러 견고하여 결코 부서짐이 없는 법이니,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거나 세간에 출현하지 않거나 간에 이 법은 상주(常住)하느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이 법을 구하기 위해 백천 가지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여 이 법을 얻었으며, 이 법을 얻고 나서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다 이 법에 머물게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 때문에 이 법을 이름하되 진여(眞如)라 하고 실제(實際)라 하며, 일체지(一切智)라 하고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며, 부사의한 경계[不思議界]라 하며, 두 가지가 아닌 경계[不二界]라 하느니라”
[참고 ❷] 『성유식론』 제2권. (호법 등 지음 護法等菩薩造 | 현장 한역 현장 한역) 眞如亦是 假施設名 遮撥爲無 故說爲有 遮執爲有 故說爲空 勿謂虛幻 故說爲實 理非妄倒 故名眞如
진여(眞如) 역시 가정적으로 명칭을 시설(施設)한 것이다. 무(無)에 기욺을 막기 위해 유(有)를, 유(有)의 집착을 막기 위해 공(空)을 설하니, 허환(虛幻)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실(實)을 설한다. 이(理)에 그릇되게 뒤집힘이 없으니 진여(眞如)라고 한다.
[참고 ❸] 『성유식론』 제9권. (호법 등 지음 護法等菩薩造 | 현장 한역 현장 한역)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眞謂眞實 顯非虛妄 如謂如常 表無變易 謂此眞實於一切位 常如其性 故曰眞如 卽是湛然 不虛妄義 亦言顯此 復有多名 謂名法界及實際等
이 제법의 승의(勝義)가 곧 진여이다. 진(眞)이란 진실을 말하니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낸다. 여(如)란 여여하게 상주함[如常]을 말하니 변이(變易)함이 없음을 나타낸다. 즉 이것이 진실하여 모든 위(位)에서 변함없고 여여함[常如]이 그 자성이기에 진여라고 한다. 곧 흔들림 없이 그대로여서 허망의 뜻이 아니니, 이 말 또한 진여를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많은 명칭이 있으니, 이른바 법계(法界) 및 실제(實際) 등으로 이름한다.
*일물(一物) : 한 물건[一物]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 한 모양[一相]도 같은 뜻.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2.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 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밑 없는 배 ; 무저선(無底船). *무저선(無底船 없을 무/밑·바닥 저/배·선박 선) : 밑바닥이 없는 배.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영수(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불법(佛法 부처 불/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佛]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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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념단속(세등10)—일념단속(一念團束) | 화두를 옳게 관(觀)해야 한다[의심관(疑心觀)] | 삼재(三災)는 내 마음으로부터 좇아 일어나는 것. 삼재소멸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부적은 활구참선의 화두(話頭).
*일념단속(一念團束) ; ‘한 생각 단속’.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것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만큼 철저히 발심(發心)을 해서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일념단속(一念團束)을 철저히 하느냐 못하느냐 여기에 달려 있을 뿐인 것입니다.
출가해서 10년, 20년, 30년을 ‘이뭣고?’를 하고 선방(禪房)에 다니시면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참선을 해도, 나를 깨닫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내고 있는 그러한 스님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심성(心性)도 얌전하고 인자하고, 행동도 바르고 깨끗하고, 철저히 참선할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도 10년, 20년, 30년이 되도록 나를 깨닫지 못한 원인이 무엇이냐?
문제는 화두(話頭), 화두를 어떻게 단속해서... (녹음 끊김)... 마음의 눈을 박느냐? 이러한 구체적인 곳에 들어가서 자기의 정진을 지어 나갈 줄 모르기 때문에 ‘이뭣고 이뭣고’ 입으로만 관세음보살 부르듯이 ‘이뭣고’를 천만 번을 찾아 봤자, 그 ‘이뭣고~?’ 하는 골똘한 그리고 간절한 의심(疑心)의 뭉침이 없다고 하면은 아무리 입으로 ‘이뭣고’를 백 번 천 번을 해도 그것은 입 껍데기로만 하는 것이지, 옳게 화두를 관(觀)할 줄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금년은 해 · 묘 · 미(亥·卯·未), 돼지띠 · 토끼띠 · 염소띠, 이 세 가지 띠를 가진 사람이 삼재(三災)를 맞는 해입니다. 인천 용화사에 신도들이 많이 와 가지고 '금년에 삼재가 들었는데 어떻게 해야 이 삼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 가지고 입춘일을 기해서 보통 평상시 오시는 신도보다도 훨씬 많은 신도들이 와 가지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불공(佛供)을 올리고 기도를 하고 그리고서 삼재 면할 부작(符作)을 달라고 모다 그럽니다.
그러나 다른 절에서는 많이 부작을 모다 찍고 마련해서 노나 드리기도 하는 절이 많은 모양입니다마는, 인천(용화사)에서는 그러한 종이로 이루어진 부적(符籍)을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전에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그런 것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부적을 드린 것도 신도의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하고 나아가서 정법(正法)에 발심해서 복과 혜를 닦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方便)이 되는 것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지마는 용화사에서는 그러한 종이로 된 부적을 노나 드리지 안했습니다.
그리고서 삼재 소멸하는 기도는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열심히 듣는 것으로써 삼재 소멸하는 불공 기도를 삼고, 또 앞으로 3년 동안 삼재 액난(厄難)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부적은 무엇으로써 드렸느냐 하면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의 화두(話頭)를 분명히 일러드렸습니다. 이 화두 하나만을 옳게 듣고 옳게 지어 나간다고 하면은 삼재 뿐만이 아니라 무량겁(無量劫) 죄업(罪業)도 거기에서 녹아지는 것이며 사백사병(四百四病), 팔만사천 마구니도 이 화두 앞에는 머리를 싸매고 도망가거나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삼재(三災)는 저 밖에서 뿔 돋친 귀신이 나한테 달라드는 것도 아닌 것이고, 무슨 대가리만 있고 아랫도리는 없는 이상스럽게 생긴 더벅머리가 나한테 달라드는 것도 아닙니다. 「삼재는 어디서부터 일어나느냐?」 하면은 내 마음으로부터 좇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설사 병고(病苦)라든지 손재(損財)라든지 또는 생명을 잃는다든지, 관재구설(官災口舌)이라 하드라도 그것이 전부 과거에 내가 마음으로 지은 그 죄의 원인으로 해서 금생에 받는 것이고, 금생에 내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을 못함으로서 그것이 악(惡)한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이 앞으로 받을 삼재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삼재의 원인을 소멸하고, 앞으로 삼재를 물리치고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내가 내 마음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죄를 지을 수 있는 근원을 다스린다고 하면은 이 방법 이상 더 좋은 삼재 소멸 기도는 없는 것이며, 삼재 소멸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부적은 없는 것입니다.(10분11초~17분22초)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것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 이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눈을 박다 ; ①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②생각의 초점(焦點)을 두다. *정진(精進) : [범어(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옳게 화두를 관(觀)할 줄을’ ; 의심관(疑心觀).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No.68)—1987(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 59초)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 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 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 말이여.
[참고 ❷]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 57초)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 · 앉은삼재),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삼재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삼재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 ❶] 송담스님(No.258)—1985년(을축년) 신수기도입재(1985.02.22) 법문에서. 〇삼재가 들으신 분뿐만이 아니라, 삼재가 안 들으신 모든 사부대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앙(災殃)은 언제나 우리에게 닥아 올 수가 있고 우리에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삼재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그 근본이 일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음이 없다면 삼재가 붙을 수가 없고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 부터 끊임없는 파도가 파도치고 있기 때문에 삼재가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〇대관절 이 삼재라고 하는 것이 왜 그것이 어떠한 이유로 해서 있는 것이냐? 태어난 해에 따라 차례차례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삼재가 오느냐 하는 것은, 이것은 음양오행의 술가들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간 옛날부터서 우리의 생활 경험을 통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삼재가 든 사람은 항시 불보살과 성현께 기도를 하고, 또 항시 3년 동안 근신을 하고,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을 각별히 조심을 해서, 대인 관계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 있어서 근신하고, 지혜롭고, 참을성 있게 그렇게 조심을 해 나가야만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〇생활은 여전히 해 가되 ‘어떻게 근신을 하고 어떻게 조심을 하느냐’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불법을 믿고 항시 염불을 하는 이는 염불을 열심히 하고, 경을 독송하는 이는 경을 열심히 독송하고, 또 참선법을 믿고 실천하는 분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심(一心)으로 화두를 들며 참구를 한다면 어느 틈에 있어서 삼재가 엿볼 수가 있겠습니까. 삼재가 아무리 무섭다 해도 우리의 마음의 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지, 마음에 틈이 없다면 들어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〇삼재가 우리의 마음의 틈을 타서 들어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을 하고 삼재에 걸린 분. 또 앞으로 삼재를 맞이할 분들은 각별히 마음의 문—마음의 문은 눈이 바로 마음의 문이요. 귀가 마음의 문이요. 코와 입이 마음의 문이요. 우리의 몸뚱이가 마음의 문이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의 문인 것입니다. 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 육문(六門)이 바로 삼재가 들어오는 문이 것입니다.
그 문단속을 잘 하는 것으로 모든 도적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삼재를 막아내는, 비단 삼재라고 했습니다마는 더 널리 말을 한다면 육적(六賊)이 될 것이고, 더 방대하게 말한다면 팔만사천 마군(八萬四千魔軍)이 될 것입니다.
그 팔만사천 마군이를 ‘한 생각’에 막을 수도 있고, 도적을 불러 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비끗 잘못하면 바로 삼재와 육적과 팔만사천 도적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도 역시 그 ‘한 생각’ 때문에 육도윤회를 해서 끊임없이 생사를 받고 있습니다마는, 그 ‘한 생각’만 잘 단속해 나간다면 신수기도는 정말 옳게 봉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 ❷] 송담스님(No.336)—1987년 8월 첫째일요법회(87.08.02)에서. (6분7초) 〇그러나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또 바람이 불고 한 그러한 재난은 사실은 큰 재난이라고 할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수재(水災)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재(火災)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팔풍(八風)의 그 풍재(風災), 이러한 재난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수재가 일어나서 육백 명이라고 하는 인명(人命)을 앗아가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훨씬 참혹하고 무서운 재난은 우리 낱낱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재난,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몰아넣는 그러한 무서운 재난인 것입니다.
비가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불어서 얻은 재난은 재산을 앗아갑니다. 재산은 또 부지런히 벌면 보충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설사 그러한 수재로 인해서 생명을 잃었다 하드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지옥에 가란 법은 없습니다. 몸을 바꿔서 좋은 데에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할 수도 있지마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화재로 일어난 그 재난은 영락없이 우리를 축생(畜生)이나 또는 아귀(餓鬼)나 지옥(地獄)으로 우리를 밀어붙이고 마는 것입니다.
무량겁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마음속에 그 수재와 화재로 인해서 많은 피해를 입어 왔습니다. 그 탐진치 삼독, 오욕락(五欲樂), 팔풍경계에 우리는 잠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지금 이 폭풍이나 태풍 이런 것은 여름 한때 장마철에 지나가 버리고 며칠간 그러다가 그치면 또 조용합니다. 또 내년에 이맘때 되면은 또 그러한 것이 오겠습니다마는, 그래도 1년에 한 번 정도 오는 거야 우리가 미리미리 취약지구에 대한 대처를 해 나가고 모다 댐이라든지 그런 것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잘 해나간다면 언젠가는 큰 피해를 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그건 온 나라의 여러 국민들이 모다 합심을 해서 모다 의연금품을 내고 나라에서도 모다 구제를 하고 그러면 어느 정도 또 상처를 또 아물게 할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우리의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그 태풍과 폭풍, 폭우 모다 그런 것은 아무도 우리 자신을 대신해서 그것을 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라에서도 어찌해 볼 수가 없고, 부모형제라 하더라도 어찌 해볼 수가 없고, 오직 나 자신의 마음의 수재와 화재와 풍재는 나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만이, 활구참선을 통해서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대단히 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풍재와 화재 또는 수재 이런 것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번에 지나간 그러한 폭풍이 유(類)가 아닌 것입니다. 폭우가 비교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고대로 놔둔 채,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자신을 갖다가 지옥구덩이에 갖다가 처박기도 하고, 축생의 뱃속에—이 사람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독사가 되기도 하고, 호랑이가 되기도 하고, 또 아귀와 그런 악마가 되게 하는 그러한 무서운 것입니다.
순전히 ‘한 생각’으로 인해서, 그 한 생각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해 가지고 그러한 육도(六途)를 찰나간(刹那間)에 윤회(輪廻)를 하면서 백 년의 꿈을 꾸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 · 등(燈) · 꽃 · 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부작(符作) ; ‘부적(符籍)’의 변한 말.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 ;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조실(祖室 할아버지·조상·개조 조/집·방·거처·몸 실) ; ①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②조사(祖師)가 머무는 방. 또는 선문(禪門)의 사원에서 가장 어른이신 스님이나 스님이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업장(業障 업·선악의 소행所行 업/막다·가로막히다·장애 장)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액난(厄難 액厄·불행한 일·재앙 액/근심·재앙 난) ; 뜻밖에 일어난 재앙(災殃)과 고난(苦難).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동[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罪] 행위[業 : 身口意 三業].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사백사병(四百四病) ; 인체에 일어나는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사대(四大)—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의 부조화로 각 요소에 대해서 101가지 병이 있다고 한다. 지(地)와 화(火)에서 일어나는 열병(熱病)이 202가지, 수(水)와 풍(風)에서 일어나는 냉병(冷病)이 202가지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경전에 그들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일정하지 않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마구니 ; 마(魔). [산스크리트어(범어)]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魔軍)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煩惱)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도고마성道高魔盛]’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벽극풍동壁隙風動],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심극마침心隙魔侵]’고 하시니라. *관재구설(官災口舌) ; 관가로부터 재앙을 입는 일[官災]과 남이 나를 비방하거나 헐뜯어서 해를 입는 일[口舌]을 아울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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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무상(세등10)—우리는 이미 사형 언도를 받은 신세, 다만 그 집행일만 모른다. 무상을 철저히 느끼고 도를 닦아야 | 몽산화상의 출가 인연 | 참선은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것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일념단속(一念團束).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 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잘 들으신 바와 같이 몽산 화상(蒙山和尙)에 출가 동기와 중국에 고봉 선사(高峰禪師)께서 3년을 기한을 하고 ‘3년 동안 열심히 도를 닦아 가지고 견성(見性)을 못하면 내가 죽어 버리리라’ 이렇게 결심을 하고, 3년 동안 밥 먹고 옷 입고, 일체 생활을 다못 화두(話頭) 하나 들고 정진하는 것으로써 3년을 하루같이 애를 썼건마는 조그만큼도 공부가 진행이 없어서, 3년 기한은 머지않았는데 도는 성취를 못해서, ‘이제 나는 죽는 수밖에는 없구나’ 이렇게 앞이 캄캄하고 그러던 차에 꿈에 화두를 얻어 가지고 일주일 만에 대도를 성취한 고봉 스님의 도를 통하신 설화를 말씀을 해 주시고, 그러는 가운데 무자(無字) 화두, 만법귀일(萬法歸一), 판치생모(板齒生毛) 이러한 화두 드는 법에 관해서 자세히 말씀이 계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실 때마다 참선 이야기를 그렇게 간곡히 말씀을 하셨느냐?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머지않아서 우리는 죽음의 마당을 만나지 않고서는 아니됩니다. 단명(短命)한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서 나오기도 하고, 나오다 죽기도 하고, 10년 또는 30년, 많이 살아 봤자 육칠십 세 혹은 칠팔십 세까지 살다가 죽는 이도 있지마는, 한번 태어난 사람치고 죽지 아니한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이만큼 건강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마는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사형(死刑) 언도(言渡)를 내려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집행일만을 아지 못할 뿐이지, 우리에게는 언도가 이미 내려져 있는 그러한 신세인 것입니다.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그날이 그 시간이 바로 나의 사형 집행일(執行日)인 것입니다.
그러한 무상(無常)한, 사형 언도를 받은 그러한 신세로서 무엇이 급한 일이 있으며, 사형 집행일을 코앞에 두고 있는 죄수가 재산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명예 권리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코앞에 ‘죽을 사(死)’ 자를 딱 써서 붙여 놓은 이 마당에 사소한 일로 시비, 인간으로 태어나서 크고 작은 어떠한 일이라도 ‘죽을 사(死)’ 자 앞에는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도(道)를 닦을라면은 철저히 무상(無常)을 느끼고 깨닫지 아니하고서는 그 사람은 도를 성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 맨 처음에 말씀하신 몽산 화상도 애당초에는 유교 사상(儒敎思想)에 철저히 젖어 있는 선비였습니다. ‘불교’ ‘스님’ 하면은 진절머리를 내고, 절 근처에는 지나가다가도 보지도 아니하고, 목탁 소리가 나면 귀를 막을 정도로, 중을 보면은 어제 먹은 밥이 꺼꾸로 넘어올 정도로 비위가 상하고 이렇게 불법(佛法)을 비방하고 반대하던 그런 선비였습니다.
그러나 선영(先塋)에 성묘(省墓)를 갔다가 오는 길에 비가 쏟아져서 잠깐 절 일주문(一柱門)에서 비를 피하다가, 거기서 절에서 『화엄경』을 설하는 법문을 한마디 듣고 그리고 집에를 와서 낮잠이 들었다가, 꿈에 어떤 노인이 와 가지고 흰 옷을 입힐라다, 검은 옷을 입힐라다 이러는 가운데에 그런 싱갱이를 하고 있자,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 그 노인을 꾸짖으면서 ‘금방 오늘 절에서 『화엄경』 법문을 들었는데 그 사람에게 어찌 그런 옷을 입힐 수가 있느냐’고 꾸짖어서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깨서 보니까, 그 꿈에 본 그 자리를 찾아가 보니 강아지 새끼가—개가 새끼를 나았는데 흰 새끼가 죽어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서 ‘아하, 내가 틀림없이 이 흰 강아지로 태어날 것을 오늘 절 일주문에 비를 피하다가 화엄경 법문을 들으므로 해서 그 공덕으로 강아지 보(報)를 받을 것을 면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그길로 절에 가서 완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를 만나 가지고 참선법(參禪法)을 배워 가지고, 그래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했다고 하는 그러한 법문이 계셨습니다.
참선을 할라면은 그러한 생사(生死)가 무서운, ‘무상(無常)이 신속(迅速)해서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죽음이 돌아온다’고 하는 그런 철저한 발심(發心)이 없고서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은 출가(出家)한 스님만 할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속가(俗家)에 있어도 정말 생사가 두려운 줄 깊이 느끼고, 생활 속에서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각만을 올바르게 단속할 줄만 안다면 어디서나 바로 그 자리가 참선하는 도량(道場)이요,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수도장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하더라도 무상을 철저히 느끼지 못하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한량없는 무명업식(無明業識) · 번뇌(煩惱) 망상(妄想) 일어나는 놈을 단속할 줄을 모르고, 일어나는 한 생각을 점점 발전시켜서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을 훨훨 피우며 오욕락(五欲樂)에 사로잡혀서 하루하루를 지낸다고 하면은 아무리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고 가사(袈裟)를 몸에 걸쳤을망정 견성성불은 막연하고 요원(遙遠)한 것입니다.
참선은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것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만큼 철저히 발심을 해서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일념단속(一念團束)을 철저히 하느냐 못하느냐 여기에 달려 있을 뿐인 것입니다.(처음~10분31초)
*삼동(三冬) ; 겨울철의 석 달. *구순 안거(九旬安居 아홉 구/열흘 순/편안할 안/살·거주할 거) ; 수행(修行)하는 스님들이 한 곳에 모여 외출을 금지하고 도를 닦는 일을 안거(安居)라 하는데, 하안거(夏安居,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의 한 안거 기간이 90일이므로 구순 안거(九旬安居)라 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재계(齋戒 재계할 재/재계할 계) ; 재(齋).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身·口·意) 3업(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전강대종사 법어집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가 있다.
*세등선원(世燈禪院) ; 1972년에 건립한, 대전시 서구 탄방로에 위치한 대표적인 비구니 선원. 세등선원은 서울 보문사에 출가한 세등스님(1926~1993)이 고봉 스님을 믿고 따르며 제방에서 수행하다가 대전 복전암 경순 스님 소개로 대전 탄방동에 절터를 마련하였다. 전강 스님께서 도인이 날 터라며 선방을 지으라고 권유하셔서 처음에는 본방 2층 건물을 짓고 수행하다가 수좌들이 많이 모여서 1972년 선방 불사를 하였다. 세등선원은 문을 연 해부터 전강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정진하였다. 전강 스님이 입적한 이후에는 송담 스님께서 1976년부터 1987년까지 안거 결제 · 반살림 · 해제 법문을 하시면서 비구니 수좌들의 수행을 지도하였다. 이후 결제 해제 때는 인천 용화선원 법회에 참석하고 있다. 세등선원은 1972년 선원 건립 당시만 해도 야산에 자리한 조용한 곳이었지만, 유성지구 개발로 도심 속 사찰이 되었다. 세등 스님이 입적한 후에 스님의 뜻을 좇아 세등문도회에서 선원을 운영하고 있다. *조실(祖室 할아버지·조상·개조 조/집·방·거처·몸 실) ; ①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②조사(祖師)가 머무는 방. 또는 선문(禪門)의 사원에서 가장 어른이신 스님이나 스님이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몽산(蒙山) : 남송과 원(元)대의 임제종 양기파 스님, (1231 ~ 1298 또는 1308) 이름은 덕이(德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 시양 고안현(時陽高安縣)에서 났다. 그 고향 시양이 당나라 때에는 균주(筠州)였기 때문에 고균(古筠) 비구라고 한 일도 있었고, 여릉도 몽산에 있었으므로 몽산 화상이라 하며,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있었으므로 전산 화상이라기도 하고, 휴휴암(休休庵)에 있었으므로 휴휴암주라기도 하였다. 고산(鼓山)의 완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의 법을 이었다. 그의 교화한 시기는 원나라 세조(世祖)때이며, 우리 고려의 충렬왕 때이다. 그래서 고려의 고승들과 문필의 거래가 많았고, 그의 저서 가운데 <법어약록(法語略錄)> <수심결(修心訣)>등은 이조 중엽에 있어 우리 글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몽산법어(蒙山法語) ;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 『몽산법어』가 있다. *고봉(高峰) ; (1238~1295) 송대 말기 원대 초기의 임제종 스님. 법명은 원묘(原妙), 법호는 고봉(高峰), 속성은 서(徐)씨. 강소성(江蘇省) 오강(吳江) 출신. 15세에 부모에게 출가할 것을 간청하여 가화(嘉禾) 밀인사(密印寺)의 법주(法住) 스님에게 귀의하여 은사로 삼고 16세에 삭발하여 17세에 구족계를 받아 18세에는 천태교학을 익히다가 20세에 선문(禪門)으로 공부를 바꾸어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단교묘륜(斷橋妙倫 1201~1261)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22세에 3년 사한(死限)을 정하고 참선에 들어가 단교묘륜 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약정했던 3년의 기한이 다가왔을 때 태주(台州)의 정(淨) 사형의 권유로 설암조흠(雪巖祖欽 1215~1287) 선사께 가르침을 청해 지도를 받아 수행하였다. 1271년 임안(臨安 : 浙江省 杭州) 용수사(龍鬚寺)에서 어느날 잠에서 깨어 화두를 의심하던 차에 함께 잠자던 도반이 목침을 밀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설암 선사의 법을 이었다.
1274년 무강(武康 : 浙江省 湖州) 쌍계봉(雙髻峰)에 주석하였다. 1279년 항주(杭州) 천목산(天目山)으로 가서 서봉(西峰)의 위쪽에 있는 사자암에서 지내다가, 사자암 서편 바위 동굴에다가 작은 토굴을 지어 사관(死關)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입적할 때까지 15년 동안 지냈다. 수백 명의 제자를 길렀으며, 수계자는 수만에 이르렀다. 1295년 세수 58, 법랍 43세로 입적하였다. 『고봉대사어록』 상하 2권과 고봉대사어록 上下권 중 법어 · 서신을 수록한 상권에서 발췌한 『선요(禪要)』가 전한다.
*‘중국에 고봉 선사(高峰禪師)께서 3년을 기한을 하고 ‘3년 동안 열심히 도를 닦아 가지고 견성(見性)을 못하면 내가 죽어 버리리라’ 이렇게 결심을 하고, 3년 동안 밥 먹고 옷 입고, 일체 생활을 다못 화두(話頭) 하나 들고 정진하는 것으로서 3년을 하루같이 애를 썼건마는 조그만큼도 공부가 진행이 없어서, 3년 기한은 머지않았는데 도는 성취를 못해서, ‘이제 나는 죽는 수밖에는 없구나’ 이렇게 앞이 캄캄하고 그러던 차에 꿈에 화두를 얻어 가지고 일주일 만에 대도를 성취한 고봉 스님의 도를 통하신 설화’ ; [참고] 고봉스님의 수행에 대한 법문 : ① >>> 이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선요禪要』 28. 通仰山老和尙疑嗣書) ② >>> 이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선요禪要』 2. 시중示衆)
*무자(無字) : 화두.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에게서 비롯된 공안.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조주구자(趙州狗子) · 조주무자(趙州無字) ·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 등이라고도 한다.
無門曰 : “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絕. 祖關不透, 心路不絕, 盡是依草附木精靈. 且道 如何是祖師關? 무문(無門)이 평한다.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한다. 묘오(妙悟)는 반드시 마음 길이 다하여 끊어져야 한다. 만약 조사관(祖師關)을 뚫지 못하고 마음 길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이 모두는 초목에 의지한 허깨비 종류임을 면치 못한다. 자! 일러 봐라. 어떤 것이 조사관인가?
只者一箇無字, 乃宗門一關也. 遂目之曰 「禪宗無門關」 透得過者, 非但親見趙州, 便可與歷代祖師把手共行, 眉毛廝結, 同一眼見, 同一耳聞, 豈不慶快? 莫有要透關底麼? 단지 이 한 개의 무자(無字), 이것이 종문(宗門)의 첫째 관문이다. 나는 이를 선종무문관이라 부르고자 한다. 만약 이 관문을 뚫고 지나간 자는 다만 친히 조주를 볼 뿐만 아니라, 곧 역대조사와 더불어 손을 잡고 같이 길을 가고 눈썹을 함께 하여 같은 눈으로 보고, 같은 귀로 들을 것이니 이 어찌 기쁘고 시원스런 일이 아니겠느냐! 이 관문을 뚫어보지 않으려는가!
將三百六十骨節 八萬四千毫竅, 通身起箇疑團, 參箇無字, 晝夜提撕. 莫作虛無會, 莫作有無會. 그러자면 360의 뼈마디, 8만4천의 털구멍, 온 몸, 온 정신을 똘똘 뭉쳐 하나의 의문 덩어리를 만들어 이 무자(無字)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라! 밤낮을 가리지 말고 이 문제와 부딪쳐라. 그때 이 무(無)의 뜻이 결코 허무(虛無)의 뜻이라거나,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如吞了箇熱鐵丸相似, 吐又吐不出, 蕩盡從前惡知惡覺, 久久純熟, 自然內外打成一片, 如啞子得夢 只許自知. 마치 한 개의 뜨거운 철환(鐵丸)을 삼킨 거와 같이 토해내려 해도 토해낼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하여 이제까지의 악지악각(惡知惡覺)을 탕진해 버리고 오래오래 지내면서 맑게 익어가면 저절로 내외가 한 조각(一片)이 되리니 이때에는 벙어리가 꿈꾼 것과 같이 나만 스스로 알게 된다.
驀然打發 驚天動地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岸頭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戲三昧. 이때에 돌연히 경지를 타파하여 나아가면 하늘을 흔들고 땅을 뒤집는 소식을 알 것이니, 이때는 관우(關羽) 장군의 큰칼을 빼앗아 손에 잡은 것과 같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생사마당에서 대자재를 얻어 육도사생(六道四生) 속에서 자유로이 노닐 것이다.
且作麼生提撕? 盡平生氣力 擧箇無字 若不間斷 好似法燭一點便著”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오직 평생의 기력을 다 바쳐 이 무자(無字)를 들어라. 만약 끊임없이 지어 가면 마치 촛불에 불을 붙이면 단번에 밝아지듯 한 법이 되리라.
頌曰 : 狗子佛性 全提正令 纔涉有無 喪身失命 송(頌)으로 이른다. 개와 불성! 이 한마디에 불조법(佛祖法)의 바른 법령(法令)은 온전히 반포되었다. 이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유무(有無)의 견해를 가져 어른거린다면 이 사람은 당장에 신명을 잃으리라.
당장에 쉬려고 한다면 종전의 재미를 얻었던 것들에는 조금이라도 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잡거나 더듬을 수 없는 곳과 재미가 없는 곳으로 가서 한번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만약 마음을 헤아릴 수도 없고 잡거나 더듬을 수 없으며, 붙잡을 요점[𣠽柄]도 없음을 더욱 더 느끼게 되어 이치의 길[理路]과 뜻 길[義路]에 심의식(心意識)이 전혀 가지 않음이 토목와석 같을 때에도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곳이 바로 자신이 신명(身命)을 버릴 곳입니다.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총명 영리한 사람은 다분히 총명의 장애를 받는 까닭에 도안(道眼)이 열리지 않아 가는 길마다 막히게 됩니다. 중생은 아득한 옛부터 심의식(心意識)에게 부림을 당하여 생사에 유랑하여 자재하지 못합니다. 과연 생사에서 벗어나 쾌활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단칼에 두 동강을 내어 심의식의 길을 끊어야만 그때서야 조금 상응(相應)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가 스님께서 “법의 재물(法財)을 줄이고 공덕을 없앰은 이 마음[心意識]을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고 하시니, 어찌 사람을 속이셨겠습니까.
저번의 편지를 보았습니다만, 그 내용의 여러 가지 공부하는 방향은 모두 내가 평소에 꾸짖은 바의 병통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알았다면 머릿속에서 그것을 털어 버리고, 또한 수단[巴鼻]이 없는 곳과 잡거나 더듬을 수도 없는 곳과 재미가 없는 곳에서 시험삼아 공부해 보십시오. 예를 들자면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조주 선사가 “무(無)”라고 답한 것과 같습니다.
[참고 ❹]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無字)’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화두(공안)의 하나. 〇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조주는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 장삼을 하나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언도(言渡 말씀·호령號令 언/주다·교부하다 도) ; 선고(宣告). 법정에서 판사가 판결의 결과를 알리는 일. 이로써 재판의 효력이 생김.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그날이 그 시간이 바로 나의 사형 집행일(執行日)’ ;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생사라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〇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 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진절머리 ; ‘진저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 *진저리 ; ①몸에 차가운 것이 닿거나 무서움을 느낄 때에 또는 오줌을 눈 뒤에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 ②몹시 귀찮거나 싫증이 나서 끔찍할 때 몸을 떠는 것. *불법(佛法 부처 불/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선영(先塋 조상 선/무덤 영) ; 조상의 무덤. 또는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 *성묘(省墓 살필 성/무덤 묘) ; 조상의 산소를 찾아 인사를 하고 산소를 돌봄. 주로 설, 한식(寒食), 추석(秋夕)에 행한다. *일주문(一柱門) ; 사찰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으로, 한 줄로 세운 기둥 위에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음.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붓다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붓다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싱갱이 ; ‘승강(昇降)이’의 사투리. *승강이(昇降- 오를 승/내리다·깎아내리다 강) ; 실랑이. 실강이. 실갱이. 서로 자기주장을 고집하여 옥신각신하며 다툼. *보(報) ; 과보(果報),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완산정응(皖山正凝)선사 : 원나라 스님. 생몰연대 알 수 없음. 서주대호(舒州大湖) 이(李)씨. 17세에 부모를 여의고 황주(黃州) 쌍천영(雙泉瑛) 선사에 출가. 무명성(無明性) 선사를 배알하고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다시 민(閩)현에 들어가 고봉덕수(孤峰德秀) 선사에 의지하여 반년 만에 비로소 입실(入室), 법의와 불자를 받았다. 후에 고산(鼓山)에서 법을 펴니 대중이 4천(四千)에 이르렀다. 세수 84. 몽산에게 법을 전했으며 어록 몇 권이 있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참선을 할라면은 그러한 생사(生死)가 무서운, ‘무상(無常)이 신속(迅速)해서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죽음이 돌아온다’고 하는 그런 철저한 발심(發心)이 없고서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무상신속(無常迅速) 생사사대(生死事大). *무상신속(無常迅速) 생사사대(生死事大) ; 무상(無常)은 매우 빠르고[迅速], 생사의 일은 크다. *무상신속(無常迅速 없을 무/영원할·항상 상/빠를 신/빠를 속) ; '무상은 매우 빠르다' *무상(無常) ; 모든 사물 ·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생사사대(生死事大) ; 생사대사(生死大事).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가장 중요한 일[一大事].
[참고 ❶]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 德異本) (심재열 역주 | 불국선원) '제6 참청기연(參請機緣 청법의 기연)'에서. p252~253. 현각 : 생사의 일이 크며 무상이 신속합니다.[生死事大 無常迅速] 육조 :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사무쳐 깨닫지 않으며 신속한 무상이 없음을 요달하지 않는가?[何不體取無生 了無速乎] 현각 : 사무쳐 깨달으면 남(生)이 없고, 요달함에 본래로 빠름이 없나이다.[體卽無生 了本無速] 육조 : 그렇도다.[如是如是]
무상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은 크다.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곧 내생(來生)이 도래 하니, 다만 마음을 비우고 자세하게 궁구하라. 궁구하면서 오고 궁구하면서 가다 보면 좋은 생각이 이어지고 나쁜 생각은 자연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맛 여실하게 수행하다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무상(無常)은 매우 빠르고 생사(生死)의 일은 큽니다. 중생계 속에서 생사에 따르는 일은 삼대나 좁쌀처럼 많아서, 한번 마치고 나면 또 한 차례 닥쳐옵니다. 만약 생사(生死) 이 두 글자를 잡아 코 끝에 붙여놓고 번뇌를 끊지[對治] 않는다면, 곧 납월삼십일 죽음을 맞이해서는 손발을 어지럽고 분주히 떠는 것이 마치 끓는 물에 게를 집어넣을 때와 같으니, 비로소 후회해야 이미 늦은 것입니다. 만약 곧장 끊고자 한다면, 청컨대 지금 곧 절단하십시오.
그대는 이미 출가하였으니 반드시 대장부의 뜻을 세우고 용맹하게 정진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무상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이 큰 것을 깊이 믿고, 행주좌와 모든 때에 오로지 이 일[此事]을 잊지 말고 절실하게 참상(참구)하여야 한다. 마치 천 길 깊이의 우물에 떨어진 사람이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오로지 빠져나갈 마음만 가진다면 멀지 않은 날에 반드시 그 생각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공을 들이고도 이루지 못한다면 불법에 영험함이 없는 것이리라.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출가(出家) : [범어(산스크리트어)] pravrajyā 또는 pravrajita. '집[家]에서 나온다[出]'는 말이다. 가정 생활을 떠나서 수도와 포교를 전문으로 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몸 출가[身出家]보다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의 불이 늘 붙고 있는 번뇌 망상의 불집에서 뛰어나오는 마음 출가[心出家]를 하여야 한다.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 몸의 안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353)—1988년 신수기도 회향(88.02.26)에서.(3분21초) 출가(出家)라 하는 말은 말을 바꿔서 말하면 ‘크게 버리는 것’입니다. ‘크게 버리는 것’이 그것이 바로 출가인 것입니다.
출가에도 두 가지 뜻이 있고, 재가(在家)에도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몸뚱이는 세속(世俗)에 있으면서 마음은 출가한—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로서 비록 몸뚱이는 세속에 있으면서도 그 마음은 모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다 버려 버리고, 청정한 신심으로 불법에 귀의(歸依)해서 항상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그런 분은 바로 몸뚱이는 세속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출가한 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몸뚱이는 출가했으면서도 마음은 속가(俗家)에 가 있는 그러한 출가도 있습니다. 비록 출가해서 염의(染衣)를 입고 머리는 깎았으되 마음이 완전히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 탐진치 삼독을 버리고서 청정한 출가인으로서 사문(沙門)으로서 도를 닦지를 못하고, 몸뚱이는 절에 있으면서 마음속에 세속의 명리와 탐심을 버리지 못했다면 이것은 몸뚱이는 출가했으면서도 마음은 출가를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몸뚱이도 세속에 있고, 마음도 완전히 세속의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에 빠져서 일생을 그냥 고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몸뚱이도 마음도 세속에 있는 것입니다.
몸도 출가하고, 마음도 출가한, 정말 청정한 사문은 바로 그러헌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또는 순치황제라든지 역대 조사들은 몸도 출가하고, 마음도 출가한 그러한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많은 거사(居士)라든지, 청신녀 가운데에 몸뚱이는 세속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신심이 돈독해서 정법을 믿고 수행을 쌓아서 도를 얻은 분도 인도나 중국 · 한국 · 일본에 많이, 널리 이름이 알려지지 안 해서 그렇지, 정말 훌륭한 그런 분들도 많이 계시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속가(俗家) ; ①스님이 되기 전에 속했던 가정(집). ②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집.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참고]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견성의 성(性)은 본성(本性), 자성(自性), 본심(本心), 법성(法性) 등과 같으며, 이런 맥락에서 견성을 견자심불성(見自心佛性), 견불성(見佛性), 견자본성(見子本性), 견법성(見法性)이라고도 한다. *무명업식(無明業識) ;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참모습을 직관하지 못하고 그릇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차별을 일으켜 모든 괴로움을 나게 하는 근본번뇌,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작용[業識].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 ; 삼독지화(三毒之火). *삼독지화(三毒之火) ; 삼독(三毒)이라는 불[火]. 탐(貪) · 진(瞋) · 치(癡) 등 삼독이 불과 같아서 모든 선한 근본[善根]을 태워 없애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참고 ❶] 『잡아함경(雜阿含經)』 제8권, 197. 시현경(示現經)에서. (송宋 천축삼장天竺三藏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 한역 |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諸比丘 一切燒然 云何一切燒然 謂眼燒然 若色眼識眼觸眼觸因緣生受 若苦若樂不苦不樂 彼亦燒然
비구들아,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눈[眼]이 불타고 있고, 물질[色]과 안식(眼識)과 안촉(眼觸)과 안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 · 즐거운 느낌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如是耳鼻舌身 意燒然 若法意識意觸意觸因緣生受 若苦若樂不苦不樂 彼亦燒然
귀 · 코 · 혀 · 몸도 마찬가지이며, 이와 같이 뜻[意]도 불타고 있고, 법(法)과 의식(意識)과 의촉(意觸)과 의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 · 즐거운 느낌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以何燒然 貪火燒然 恚火燒然 癡火燒然 生老病死憂悲惱苦火燒然
무엇에 의해 불타고 있는가? 탐욕(貪慾)의 불로 불타고 있고, 성냄[瞋]의 불로 불타고 있으며, 어리석음[癡]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 늙음 · 병듦 · 죽음 · 근심 · 슬픔 · 번민 · 괴로움의 불로 불타고 있느니라.
중생들이 가엾고 고독하나 구원해 줄 이가 없고 빈궁하나 의지할 데가 없으며, 삼독의 불길에 쉬지 않고 맹렬히 타고 삼유의 견고한 감옥에 갇혀 있으며, 항상 모든 번뇌의 나쁜 가시숲에 머물고, 바로 관찰하는 힘이 없습니다. 선법을 좋아하는 마음이 희박하고 부처님의 묘한 법을 잃고는 항상 생사의 물결을 따르며 열반을 두려워하는 것 등을 보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이 이렇게 고뇌하는 것을 보고 큰 정진할 마음을 내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저 중생들을 구제하고 알게 하며, 청정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며, 좋은 곳에 두고 편히 머물게 하며, 기쁘게 하고 마땅한 것을 알게 하며, 구제를 받게 하고 고통을 멸하게 하리라’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가사(袈裟) : [산스크리트어(범어)] kasaya. 범어를 음대로 쓴 것인데, 뜻대로 번역하면 잡색(雜色) • 염색(染色) 곧 순색이 아닌 옷을 말한다. 인도는 더운 곳이므로 속인(俗人)들은 모두 흰 옷을 입는데, 출가한 이는 그 옷을 달리하기 위하여 염색하되 검박한 빛으로 하게 되었다. 또한 품질이 좋은 새 옷감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이것 저것을 주워 모아서 누더기같이 만들었는데, 크고 작은 세 가지[三衣]가 있어서, 다섯 폭으로 된 것[五條]은 일할 때에 입고, 일곱 폭으로 된 것[七條]은 보통 때에 입고, 아홉 폭[九條]으로부터 스물 다섯 폭[二十五條]까지는 법회와 예식에 입게 된다. 그러므로 인도의 승려들은 이 세 가지밖에 다른 옷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가 기후 풍토와 인정 풍속이 같지 아니한 여러 지방에 전파되면서, 가사의 빛도 황색 또는 적색의 보기 좋은 빛으로 변하게 되고, 바탕도 비단으로 하게까지 되었다. 그 모양도 온갖 복덕이 이 법복(法服)으로 말미암아 심어지고 성숙(成熟)되는 것이라 하여, 복을 심는 밭[福田]을 상징(象徵)해서 규모가 반듯하고 법다운 밭두렁과 같은 것으로 하게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불교를 신앙하는 여러 나라와 그 종파에 따라 모양도 달리 한다. 또한 북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추운 곳이기 때문에, 보통 입는 의복 위에 장삼(長衫)을 입고, 그 위에 다시 가사를 입게 되므로, 가사와 장삼이 함께 법복이 된다.
*‘참선은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것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 이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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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