ㅊ/참선(의 목적)2026. 10. 31. 14:46

참선(세등10)—참선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데’ 목적 | ‘내’라는 것이 무엇이냐? |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 바로 ‘나’를 발견하신 것 |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니가 너를 깨달어라!’ ‘너의 참마음을 깨달어라’ | 나를 깨닫기 위한 참선! 이것 말고는 다 소무공덕(小無功德) | 내가 나를 깨닫는 참선이야말로 무량겁 생사윤회의 근원을 끊는 것 | 복(福)과 혜(慧)를 쌍으로 닦아야.


*참선(參禪 참여하다·참구參究하다 참/선 선)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선(禪) ; (산스크리트어) dhyāna, (팔리어) jhāna. 선나(禪那) · 타연나(駄演那 : 馱衍那)라 음사(音寫)하고, 줄여서 선(禪)이라고 한다. 정려(靜慮 : 靜으로는 번뇌를 끊고, 慮로는 바르게 관찰한다) · 사유수(思惟修 생각하여 닦음) · 기악(棄惡 : 모든 악을 버리림) 등이라고 한역한다. 선(禪)을 원인으로 하여 지혜 · 신통 · 사무량 등의 공덕을 일으키기 때문에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도 한다. 진정한 이치를 궁리하고 생각을 안정하게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선종(禪宗)의 선(禪)은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중국으로 건너온 뒤로부터 크게 발달되어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완성되었다.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敎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서 이치나 일에 걸림이 없는 선.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조사선의 방법에 근거하여 화두(話頭)를 궁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이 대두하였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조사선이 곧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간화선(看話禪) ; 화두선(話頭禪).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13분 31초)

참선(세등10:1976병진년 동안거해제:77.1.17:13분31초).mp3
12.39MB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10)—1976(병진)년 동안거 해제 법어(77.1.17) (세등10)(참선의 목적)

이 참선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많은 경을 읽고 교리에 밝고 지식이 풍부하다고 해서 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에 밝은 것은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면은 그 경을 옳게 본 사람이라면은 반드시 나를 깨달을 수 있는 참선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경을 잘 못 보기 때문에 일생을 경만 뒤적거리고 경만 읽고 있지, 경을 옳게 본 사람이면 바로 참선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참선(參禪)은 내가 나를 깨닫는 길입니다. ‘내’라는 것이 무엇이냐?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 하고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좋아할 줄 알고, 꼬집어 뜯으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놈!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일어나는 곳에 ‘나’는 있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 중생심 이것이 바로 ‘참나’가 있는 증거입니다. 그놈을 버리고 나를 찾아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큰 강물이 흘러갈 때에 그 강물이 대관절 어느 수원(水源)으로부터서 그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는가? 그 근원을 알고자 하면은 그 강물을 따라서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흘러가고 있는 그 강물을 떠나서 다른 데를 아무리 방황을 해봤자 그 근원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 강물을 따라서 밑으로 내려가 봤자 바다밖에는 나오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면 반드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여.
성냈다 · 웃었다 · 근심 · 걱정 · 번뇌 · 망상 일어나는 그것을 강물에다 비교한다면 그 일어나는 곳, 그것이 바로 근원이 ‘참나’요, 그것이 나에 ‘본 성품(本性品)’이요, 진여자성(眞如自性)이요, 불성(佛性)인 것입니다.

‘이뭣고?’

성이 날 때나, 슬플 때나, 근심 걱정이 있을 때나, 언제 어디에서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려서 ‘이뭣고?’
화두(話頭)에는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있지마는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이요, 생겨나기 이전에 노상 있었던 화두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이전에도 이 ‘이뭣고?’ 화두는 온 법계(法界)에 노상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총명하고 지혜스러운 부처님께서는 먼저 어릴적부터서 이 화두에 마음을 쏟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같이 버리시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12년간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녹음 끊김)...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서 솟아오르는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그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 바로 우주의 진리가 아니라, 하늘에 뜬 별의 원리가 아니라, 바로 ‘나’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나! ‘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우주에 근본이요, 우주인 것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우주는 존재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우주라고 하는 것은 나의 그림자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없는 허공을 커다란 하나의 거울이라고 생각한다면은 그 거울에 나의 모습이 비추어서 반사해서 돌아온 것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찬 삼라만상(森羅萬象)인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꽃이 피어 있어도 그 마음이 슬픈 자는 그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기보다는 슬픔에 눈물이 흘르는 것입니다. 밝고 밝은 하늘의 달을 보고도 마음이 기쁜 사람은 흥겨워 노래가 나오지만, 마음이 슬픈 자는 그 달을 보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입니다.
달은 슬픔도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꽃도 자체가 슬프거나 기쁜 것도 또는 자체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비단 달과 꽃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요, 일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자식, 일가 친척, 모든 사람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이 편안하고 내가 마음이 기쁘고 내 마음이 착하면 모든 사람이 다 착한 법입니다. 내 마음이 삐뚤어지고, 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내 마음이 뒤숭숭하면 그렇게 사랑하던 자식도 귀찮고 뵈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 마음 하나 바르고, 안정되고, 맑게 유지한다고 하면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해(苦海)가 아니라 극락정토(極樂淨土)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지마는 한마디로 요약하면은 ‘니가 너를 깨달어라!’ ‘너의 참마음을 깨달어라’ 이 말씀 외에는 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많은 말씀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이렇게도 말씀하시고 저렇게도 말씀하셨을 뿐, ‘니가 너를 깨달어라’ 하는 그 말씀 외에는 딴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佛敎)’라고 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불(佛)’자는 인도의 ‘붓다(Buddha)’라 하는 말을 중국에서 ‘불타(佛陀)’라고 음사(音寫)를 해서, 그것이 불타(佛陀)가 한국에서는 ‘붇텨, 붇텨님, 붇텨님’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 ‘부처님’하면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닫는 길이다, 깨닫는 가르침이다’ 이런 말씀이여. 그래서 「불교를 믿는다, 부처님 신도(信徒)가 된다」고 하면은 「깨닫기 위한 수행」 이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은 다 껍데기입니다.
깨닫기 위한, 나를 깨닫기 위한 참선! 이것 말고 다른 어떠한 훌륭한 일을 하고 어떠한 남의 이목을 끄는 그러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무공덕(小無功德)’인 것입니다.

왜 ‘소무공덕’이냐?
절을 짓는 데 시주(施主)를 하고, 부처님 금(金)을 입히는 데 시주를 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돈과 옷을 많이 보시를 하고, 병든 사람 약을 사주고,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적인 방법으로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나의 생사(生死)를 끊는 무루복(無漏福)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는 어디까지나 착한 일이고, 그런 착한 일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니지마는, 궁극적으로 볼 때에는 그것으로 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는 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생사윤회를 끊는 대도(大道)를 성취하는 데에는 별로 큰 공덕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소무공덕(小無功德)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착한 공덕을 지었다고 해서 ‘나는 이런 좋은 일을 했다’ 하고 그러한 자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 뽐내고 이러한 것은 더군다나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양무제가 경을 그렇게 많이 찍어서 보시를 하고, 절을 많이 짓고 탑을 많이 세우고, 스님네에게 그렇게 많은 공양구(供養具)를 올려서 보시 공덕을 지은 것을 크게 자랑을 세워 가지고,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에게 “내가 이러한 착한 일을 했는데 이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달마대사가 너무나 점잖으셨기 때문에 ‘소무공덕(小無功德)’이라고 간단히 한마디하셨을 뿐, 참으로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정말 자비심으로써 상대를 하셨다면은 그 자리에서 양무제를 가만히 둘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 참선법」 이것이야말로 무량겁을 두고 윤회할 생사의 근원을 끊는 것이여.
일 년 이태 삼 년의 삼재(三災),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삼재, 과거의 죄(罪)를 소멸하고 금생의 업(業)을 소멸하고, 영원히 생사해탈(生死解脫)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부적이요, 불공(佛供)이요, 공덕이 되는 것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선만 한다’ 해 가지고 다른 어떠한 착한 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써야 할 최소한도의 액수를 내놓고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아낌없이 보시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福)과 혜(慧), 두 가지를 쌍으로 닦아야만 내가 도(道)를 닦아가는 데에 장애가 없는 것이고, 도를 성취한 뒤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장애가 없는 것입니다. 지혜만 닦고 복을 짓지 아니하면, 혜(慧)는 밝지마는 너무나 모든 여건이 맞지를 안해서 자기와 남을 생사로부터 건져내는 데에 필요한 여건이 갖추지를 못해서 중생 교화하는 데에 막대한 장애에 부닥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복도 지어야 하는 것이고 복만 짓는 데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찾는 참선 공부, 활구참선 그것이 오히려 선행(先行)되어야 하고 그것이 밑바탕이 되고 근본이 되어서 그 위에 복을 닦는 행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27분17초~40분48분)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 참선법(參禪法).
[참고 ❶]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붓다(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이 말이여.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불법(佛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흐뭇해 할 줄 알고, 자기 뜻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은 근심 걱정하고 성을 내고 하는, 바로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도 잡히지 아니하면서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듣고, 온갖 일을 하는 그 신기하고도 묘한 대관절 그놈, 그놈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53분35초~55분59초)

[참고 ❷] 『만공법어(滿空法語)』 「법훈(法訓)」 (개정 증보판. 2024년 11월 30일 발행 | 불광출판사) p299~314.
<나를 찾아야 할 필요와 나>

1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나니라.
2 ‘나’라는 의의가 절대 자유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自在)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임의(任意)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
3 망아(妄我)는 진아(眞我)의 소생(所生)인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은 곧 사심(邪心)이요, 진아(眞我)는 정심(正心)으로 시종(始終)도 없고 존망(存亡)도 없고 형상도 없지만 오히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니라.
4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 바에야 육축(六畜)으로 동류(同類)되는 인간이라 아니할 수 없나니, 짐승이 본능적으로 식색(食色)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제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다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면목(自己面目)을 모른다면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윤회하는 한 분자(分子)에 지나지 아니하나니라.
5 동업중생(同業衆生)이 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전로(前路 앞길)가 망망하게 되나니라.
6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생사(生死)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이다.
7 인생은 말 꼬리에 매달려 울며 뒹굴려 가는 죄수처럼 업(業)의 사슬에 끌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의 길을 영겁(永劫)으로 순력(巡歷)하고 있는데, 그 쇠사슬은 자기의 지혜 칼이라야 능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되나니라.
8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받는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이 일(나를 찾는 일)을 알지 못하면 기실 사람의 정신은 잃어버린 인간이니라.
9 석가세존이 탄생 시에 산석(產席)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하신 그 ‘아(我)’도 ‘나’를 가리킨 것이니라.
10 각자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나니라.
11 일체가 다 ‘나(부처)’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하나의 털끝만 한 정력(精力)이라도 나를 찾는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소모하는 것은 나의 손실이니라.
12 누구든지 육신(肉身) · 업신(業身) · 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13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 그대로가 곧 생사(生死) 없는 자리이니라.
14 생사 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의 풀의 정(精)이라도 전우주(全宇宙)의 무장(武裝)으로도 해체시킬 수 없나니라.
15 세상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문구(文句)는 있으나 업식으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나니라.
16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쯤은 자유자재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17 보고 들어서 얻는 지식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니라.
18 나는 무념처(無念處)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념처에 일체유(一切有)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9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구경(究竟)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결국 내가 나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하나니라.


<나를 찾는 법 - 참선법>

1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정로(正路)를 가르쳐 주나니라.
2 수도(修道 참선)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3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생생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든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4 선방(禪房)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5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8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了達)된 사람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상속(相續) 받은 분이니라.
20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22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요, 대(對)가 끊어진 참구법(參究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25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無念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30 참선을 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억생(億生) 억겁(億劫)에 지은 갖은 악(惡),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때는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32 참선법은 상래(上來)로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 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무수도인(無數道人)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1천7백 공안(公案)이나 있는데, 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 곧 “만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일(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33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37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 주지 못하나니라.
40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
51 참선은 모든 업장(業障)과 습기(習氣)를 녹이는 도가니[甕]니라.
73 물질은 각자 그 이름에 따르는 한 가지 책임을 할 뿐인데, 정신은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萬有)의 근본[바탕]이라, 어디서 무슨 일에나 절대 능력자이니, 이 정신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萬能)의 인(人)이 되나니라.
76 도인(道人)은 도인이라는 대명사(代名詞)에 지나지 않는 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상(名相)이 생기기 이전 소식을 증득(證得)하여, 도인이라는 우상(偶像)도 여의고 계(戒)니 수행이니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 독립적 인간이 되어 육도(六道)에 순력(巡歷)하면서 고(苦)를 면하게 되나니라.

*참선(參禪 참여하다·참구參究하다 참/선 선)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선(禪) ; (산스크리트어) dhyāna, (팔리어) jhāna. 선나(禪那) · 타연나(駄演那 : 馱衍那)라 음사(音寫)하고, 줄여서 선(禪)이라고 한다. 정려(靜慮 : 靜으로는 번뇌를 끊고, 慮로는 바르게 관찰한다) · 사유수(思惟修 생각하여 닦음) · 기악(棄惡 : 모든 악을 버리림) 등이라고 한역한다. 선(禪)을 원인으로 하여 지혜 · 신통 · 사무량 등의 공덕을 일으키기 때문에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도 한다. 진정한 이치를 궁리하고 생각을 안정하게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선종(禪宗)의 선(禪)은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중국으로 건너온 뒤로부터 크게 발달되어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완성되었다.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敎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서 이치나 일에 걸림이 없는 선.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조사선의 방법에 근거하여 화두(話頭)를 궁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이 대두하였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조사선이 곧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42)조사선(685:2004년 하안거결제:4분19초).mp3
3.95MB


[참고] 송담스님(No.685)—2004년 하안거결제 법문(04.06.02)(4분19초)
위타위기수미선(爲他爲己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위타위기(爲他爲己)는 수미선(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거, 비록 그것이 선(善)이 아닌 것은 아니야. 틀림없이, 남에게 보시를 한다든지 자원봉사를 한다든지 다 그것이 선(善)이기는 선이나 그것이 조그만한 선(善)이다 그말이지. 그러나 이것이 다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는 원인밖에는 안 된다 그거죠.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해 가지고 상(相)을 내고, 자랑을 하고, 그러면 그것이 선을 지은 만큼 복을 받기도 하고 또 천당에 가기도 하고 하나 영원성이 없어.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쏘면 아무리 큰 장사(壯士)가 화살을 쏘았다 하더라도 그 올라간 만큼 올라갔다 다시 또 땅으로 떨어지듯이 좋은 일을 해서 복을 받는데, 큰 복을 받는 사람도 있고 작은 복을 받기도 하나, 크나 작으나 복 받을 만큼 받으면 다시 또 타락을 하게 되니까 그것이 영원성이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영원성이 있느냐?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원컨대 솔바람 불고 칡덩쿨 사이로 달이 비치는 그런 데에 가서 길이 무루(無漏)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고자 한다.
무루 조사선이라는 게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활구참선(活句參禪)이여.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이 말씀입니다.(처음~4분30초)

*간화선(看話禪) ; 화두선(話頭禪).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진여자성(眞如自性)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眞如 참·진리·진실·본성·본질·부처 진/같을 여) ; [산스크리트어(범어)] tathatā. 진실(眞實)하여 허망하지 않고 변이(變易)가 없어 그대로임[如]. 진(眞)이란 진실을 말하니 허망함이 없음을 뜻하고, 여(如)는 그 자성에 변이가 없어 항상(恒常) 그러하다[如]는 뜻이다.
여실(如實) · 법계(法界) · 법성(法性) · 법주(法住) · 실제(實際) · 실성(實性) · 실상(實相) · 여래장(如來藏) · 이생성(離生性) · 법신(法身) · 불성(佛性) ·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 여래(如來) · 열반(涅槃) · 일심(一心) · 일여(一如) · 원성실성(圓成實性) · 중실리심(中實理心) · 부사의계(不思議界)의 뜻과도 통한다.

[참고 ❶] 『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佛說除蓋障菩薩所問)』 제10권. (宋 法護 等譯)
除蓋障菩薩白佛言 何名眞如
佛言 善男子 此法唯內所證 非文字語言而能表示 何以故 此法出過諸文字故 離諸言說故 超越一切語言境界 出於言道離諸戲論 離作非作無動無靜 離諸尋伺 是不思議境界 無相非無相而悉遠離出諸相境 超諸凡境 出凡夫行 過諸魔境 超越一切煩惱境界 離諸識境 安處無住最上寂靜聖智境界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것을 진여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법은 오직 안으로 증득한 바여서 문자나 언어로는 표시할 수 없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이 법은 모든 문자를 벗어나고, 모든 언어를 떠났기 때문이니라. 일체 언어의 경계를 초월하고 언어의 길을 벗어나 모든 희론(戱論)을 없애며, 조작과 조작 아님을 떠나서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고, 모든 머트러운[尋]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떠난 이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이며, 형상이 없는가 하면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형상의 경계를 멀리 떠나며, 모든 범부의 경계를 초월하고 범부의 행을 벗어나고 마군의 경계를 초월하며, 일체 번뇌의 경계를 초월하고 모든 의식의 경계를 떠나서 그 머묾이 없는 최상의 적정(寂靜)인 성스러운 지혜의 경계이니라.

是故此法唯內所證 是卽無垢無染 絜白淸淨 最上最勝第一無比 常住堅固究竟無壞之法 如來出世 若不出世 是法常住

그러므로 이 법은 오직 안으로 증득한 바여서, 이것은 바로 티끌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결백하고 맑고 깨끗한 것이며, 최상이고 최승이자 제일이며 비할 바도 없으며, 항상 머물러 견고하여 결코 부서짐이 없는 법이니,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거나 세간에 출현하지 않거나 간에 이 법은 상주(常住)하느니라.

善男子 菩薩爲求此法 歷百千種難行苦行 故得是法 得是法已 令諸有情悉住此法 善男子 故說此法名爲眞如 說名實際 說名一切智 說名一切種智 說名不思議界 說名不二界

선남자여, 보살이 이 법을 구하기 위해 백천 가지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여 이 법을 얻었으며, 이 법을 얻고 나서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다 이 법에 머물게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 때문에 이 법을 이름하되 진여(眞如)라 하고 실제(實際)라 하며, 일체지(一切智)라 하고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며, 부사의한 경계[不思議界]라 하며, 두 가지가 아닌 경계[不二界]라 하느니라”

[참고 ❷] 『성유식론』 제2권. (호법 등 지음 護法等菩薩造 | 현장 한역 현장 한역)
眞如亦是 假施設名 遮撥爲無 故說爲有 遮執爲有 故說爲空 勿謂虛幻 故說爲實 理非妄倒 故名眞如

진여(眞如) 역시 가정적으로 명칭을 시설(施設)한 것이다. 무(無)에 기욺을 막기 위해 유(有)를, 유(有)의 집착을 막기 위해 공(空)을 설하니, 허환(虛幻)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실(實)을 설한다. 이(理)에 그릇되게 뒤집힘이 없으니 진여(眞如)라고 한다.

[참고 ❸] 『성유식론』 제9권. (호법 등 지음 護法等菩薩造 | 현장 한역 현장 한역)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眞謂眞實 顯非虛妄 如謂如常 表無變易 謂此眞實於一切位 常如其性 故曰眞如 卽是湛然 不虛妄義 亦言顯此 復有多名 謂名法界及實際等

이 제법의 승의(勝義)가 곧 진여이다. 진(眞)이란 진실을 말하니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낸다. 여(如)란 여여하게 상주함[如常]을 말하니 변이(變易)함이 없음을 나타낸다. 즉 이것이 진실하여 모든 위(位)에서 변함없고 여여함[常如]이 그 자성이기에 진여라고 한다. 곧 흔들림 없이 그대로여서 허망의 뜻이 아니니, 이 말 또한 진여를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많은 명칭이 있으니, 이른바 법계(法界) 및 실제(實際) 등으로 이름한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明星]이 뜰 무렵 별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하고, 성도회(成道會) · 성도절(成道節) · 성도재일(成道齋日) 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샛별 ; 새벽별. 명성(明星).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새벽별, 태백성(太白星), 계명성(啓明星), 장경성(長庚星) 등이라고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참고 ❶] 『선문염송 · 염송설화』 (혜심 · 각운 지음 | 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1권 3칙 ‘오도(悟道)’
<염송설화(拈頌說話)> 大慧云 釋迦老子正覺山前 從定而起 因見明星忽然悟道 信知時節若至 其理自彰 但記悟道時節因緣而已 則世尊悟處 不在明星上 香嚴悟處 不在擊竹邊

대혜가 이르기를 “석가 노자께서 정각산 앞에서 선정에서 일어나 샛별을 보시는 순간 홀연히 도를 깨달으셨으니, 이는 시절이 이르면 그 이치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인데, 다만 도를 깨달은 시절과 인연을 기록했을 뿐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세존의 깨달음은 샛별에 있지 않고 향엄의 깨달음은 대나무를 때리는 데 있지 않다.

[참고 ❷] 송담스님(No.405)—1989년(기사년) 성도재 법회(90.01.04)

 

(10)명성-1(405:89기사년 성도재:15분19초).mp3
7.01MB


(1)---------------(15분19초)

밤마다 별은 반짝거립니다. 구름이 꽉 낀 날은 안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밤이면 언제나 별은 반짝거립니다. 삼천년이 지난 오늘도 역시 밤에는 별이 빛납니다. 우리도 빛나는 번쩍거리는 그 별을 보고, 삼천년 동안에 아니 수억만 년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별을 봅니다. 번쩍이는 별을 보지마는 별을 보았다고 해서 다 확철대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 별빛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어.

해마다 제방(諸方)에서는 섣달 초하루부터 납월팔일(臘月八日) 새벽까지 만 7일간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부처님께서 납월팔일에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기 때문에 그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또 그 뜻깊은 날을 우리가 그냥 범연(泛然)히 지낼 수가 없어. 그래서 선방에서는 용맹정진을 해. 7일 동안을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완전히 앉은 채 그렇게 용맹정진을 합니다.
   
왜 부처님께서는 그 납월팔일 별을 보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왜 우리는 납월팔일 새벽 하늘의 별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밤마다 번쩍거리는 수없는 별을 보고도 왜 깨닫지를 못할까요?
‘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별을 보고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별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별을 보고 깨달아?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아?
“바로 그 별을 보는 것이다” 이 간단한 한 말씀 속에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으신 바로 그 도리를 단적(端的)으로 설파(說破)하신 것입니다.


천척사륜직하수(千尺絲綸直下垂)한데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하야  만선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척사륜직하수(千尺絲綸直下垂), 천자나 되는 긴 낚시줄을 똑바로 드리우니,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요, 그 낚시가 물에 떨어지자마자 한 물결이 일어나니 일만 물결이 따라서 일어나더라.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 밤은 고요하고 물이 차와서 고기가 그 낚시를 물지를 않아.
만선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로구나. 가득한 배에는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더라.

우리 부처님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셔서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셔가지고,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어. 무량 중생을 제도하셨다.
부처님께서 확철대오하신 그 법을 가섭 존자에게 전하시고, 가섭 존자는 아란 존자, 아란 존자는 상나화수 이렇게 해서 28대를 달마 조사까지 전하고, 달마 조사가 중국으로 오셔서 6조 스님까지, 6조 스님 이후로  5종 가풍이 벌어져서 전강 조실 스님까지 77대를 전해 내려왔습니다.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고, 설할라야 설할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는 이 도리를 깨닫고 또 그것을 전하고 받아서 오늘에 이르렀다.
꼭 깨달을 것이 있고, 꼭 전할 것이 있고 또 전해 받을 것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 됩니다. ‘깨달을 것이 있고, 전할 것이 있고, 받을 것이 있다’고 그렇게 그 말을 따라서 그렇게 인식하고, 또 자기도 깨달으려고 생각을 하고.

이러한 말에 떨어져서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은—마치 배를 타고 가다가 그 갑판 위에서 칼을 가지고 무엇을 하다가 그 칼을 잘못 놓쳐가지고 바닷물에 빠트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 뱃전에서 칼을 잃어 버렸다’해 가지고, 나중에 그 잃어버린 칼을 찾기 위해서 그 장소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 뱃전을 쪼아 가지고 표(標)를 해 놨습니다.
언제라도 그 뱃전 그 자리에서 떨구었으니까, 그 뱃전에다가 표를 해 놔야 그 뱃전 밑으로 내려가면은 그 밑바닥에 칼이 있을 것이다 이거거든.

또 어떤 사람은 산에서 어느 나무 등걸 밑에서 토끼를 한 마리 보았는데, 그 토끼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나무 등걸에서 토끼를 발견했다가 놓쳤으니까, 항상 그 나무 등걸에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토끼가 달아났으니까 여기 가 있으면 그 토끼가 오려니.

그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칼을 잃어버리고 뱃전에다가 표를 한 사람이나, 토끼를 놓치고서 나무 등걸 옆에서 토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퍽 어리석고 바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시겠지만,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으셨으니까 행여나 나도 납월팔일 날 새벽에 하늘에 뜬 그 별을 보면 혹 깨달을란가?’ 이리 생각하고 추운데 새벽에 나가가지고 동쪽에 가장 크게 빛나는 별을 새벽부터 쳐다보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바로 별을 보는 것이니라. 보는 놈이니라”

깨달음이 별로부터 오겠습니까?

저 먼산에 연기가 나는 것을 보면 ‘거기에 불이 났구나’ 뻘건 불은 보이지 않지만 하얀 연기만 일어난 것만 보고도 ‘아! 저기에 벌써 불이 났구나’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담 밖에 담 너머로 뿔만 지나간 것을 보아도 ‘아! 저 담 밖에 소가 지나갔구나’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소 몸뚱이는 담에 가리어서 보이지 않고 뿔 끄터리만 보여도 담 밖에 소 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말이여. 영리한 사람은 척! 연기만 보고 불인 줄 알고, 뿔만 보고도 소인 줄 알아.

어리석은 사람은 연기를 보고 불인 줄을 모르고, 그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저것이 무엇인가? 뿔 끄터리를 보고 벌써 소인 줄 알아야 할 텐데, 저것이 뾰족한 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말인가? 개인가? 사람인가? 지게인가? 이러쿵저러쿵 따진다 말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여. 척! 보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8분46초~24분5초)

(11)명성-2(405:89기사년 성도재:5분13초).mp3
2.39MB


(2)---------------(5분13초)

과거에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고 확철대오를 하셨고, 또 어떤 도인은 복숭화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비로 땅을 쓸다가 돌이 와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도인은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시장에서 장꾼들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했다 그말이여.

어찌 하필 부처님처럼 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여.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비로자나 법신(法身)의 체(體)고, 부는 바람 소리, 흐르는 물소리, 개 짖는 소리, 차 지나가는 소리, 일체가 다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설법(說法)이여.
그러니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 두두물물 삼라만상이 다 우리가 자아를 깨달을 수 있는 때요, 곳이다 그말이여.

언제 어디서 무엇을 보다가, 무엇을 듣다가 깨달을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어떠한 중대한 뉴스를 방송을 한다 할 때, 시간을 잘 모를 때에는 항상 다이얼을 맞춰서 딱 놔두고 기다리듯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깨달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화두를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야 한다 그말이여.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한 경지로 나아가야 그 언젠가 탁!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놓쳐 버리고 사량분별에 떨어진다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는 데에 끄달린다든지, 귀로 무엇을 듣는데 끄달리고 있는 한은 그러한 경지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항상 화두를 잡드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정진이여.
경전도 볼 것이 아니고, 어록도 볼 것이 아니고, 일체처 일체시가 행주좌와 어묵동정 사위의(四威儀)에서 화두만 성성적적(惺惺寂寂) 하게 잡드리해 갈 뿐이여.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똥을 눌 때도 그렇고, 오줌을 눌 때도 그러고, 앉아서도 그러고 서서도 그러고.

이렇게 잡드리해 가지고 안 되는 법이 없어. 고조사(古祖師)들이 ‘그렇게 잡드리해 가지고 안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아주...

부처님께서는 ‘무엇 무엇이 안 하면 내가 어쩌리라’고 함부로 그러한 막담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고인(古人)네는 우리 후인(後人)들을 위해서, 그렇게도 무서운 그러한 맹세를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36분35초~41분48초)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삼라만상(森羅萬象)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
*사바세계(娑婆世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sahā-loka-dhātu.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현실세계. 사바(산스크리트어 sahā)란 사하(沙訶) · 사가(娑呵) · 삭하(索訶)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에 안주하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번뇌, 고뇌를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뜻에서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이라고 한다. 사바세계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영토이다.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이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0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❶]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참고 ❷]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德異本) 「2. 공덕과 정토를 밝히다[釋功德淨土]」에서.
公曰 弟子聞達磨初化梁武帝 帝問云 朕一生造寺供僧 布施設齋 有何功德 達磨言 實無功德 弟子未達此理 願和尙爲說
師曰 實無功德 勿疑先聖之言 武帝心邪 不知正法 造寺供養 布施設齋 名爲求福 不可將福便爲功德 功德在法身中 不在修福

자사(刺史) 위공(韋公)이 말했다. ‘제자가 듣기에 달마대사께서 처음 양무제를 교화할 때 황제가 「짐은 평생 절을 짓고 스님을 공양하며 보시를 하고 재를 베풀었는데 어떠한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달마대사께서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제자는 이 이치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화상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 옛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무제는 마음이 치우쳐 정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절을 짓고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며 재를 베풀어 행한 것은 복(福)을 구했다고 하는 것이니 복이 공덕(功德)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덕은 법신(法身)에 있지 복을 닦는 데 있지 않습니다.

師又曰 見性是功 平等是德 念念無滯 常見本性眞實妙用 名爲功德 內心謙下是功 外行於禮是德 自性建立萬法是功 心體離念是德 不離自性是功 應用無染是德 若覓功德法身 但依此作 是眞功德
若修功德之人 心卽不輕 常行普敬 心常輕人 吾我不斷 卽自無功 自性虛妄不實 卽自無德 爲吾我自大 常輕一切故

대사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견성(見性)이 공(功)이요 평등(平等)이 덕(德)이니, 생각 생각에 막힘이 없이 항상 본성품의 진실하고 묘한 작용[眞實妙用] 보는 것을 공덕이라 합니다. 안으로 마음이 겸양하여 낮추면 이것이 공이요 밖으로 예(禮)를 행하면 이것이 덕이며, 자신의 참성품[自性]이 만법을 건립하는 것이 공이요 마음의 본바탕[心體]이 생각을 여읜 것[離念]이 바로 덕이며, 자성(自性)을 여의지 않음이 공이요 사물에 응해 쓰되 물들지 않음이 덕입니다. 만약 공덕의 법신을 찾으려면 다맛 이에 의하여 공덕을 지어야 참된 공덕입니다.
공덕을 닦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이 가볍지 않아 항상 널리 공경을 행합니다. 마음이 항상 남을 가벼이 여기고 나를 내세우는 생각을 끊지 않으면 스스로 공이 없는 것이고, 자심이 허망하여 진실하지 못하면 스스로 덕이 없는 것이니, 이는 나를 내세우는 생각이 스스로 커져서 항상 일체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善知識 念念無間是功 心行平直是德 自修性是功 自修身是德 善知識 功德須自性內見 不是布施供養之所求也 是以福德與功德別 武帝不識眞理 非我祖師有過

선지식이여, 생각 생각 끊임이 없는 것이 공이요, 마음을 평등하고 곧게 쓰는 것이 덕이며,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덕입니다.
선지식이여, 공덕은 모름지기 자성(自性) 안에서 보는 것이요, 보시나 공양만으로 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복덕(福德)과 공덕(功德)은 다른 것이니, 무제가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뿐 우리 조사에게 허물이 있지 않습니다.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布施)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主].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āna-pati)이라고도 함.
*‘부처님 금(金)을 입히는 데’ ; 개금(改金). 개금불사(改金佛事).
*개금(改金 고치다·다시 개/금 금) ; 불상(佛像)에 새로 금칠을 하는 것.
*개금불사(改金佛事 고치다·다시 개/금 금/부처님 불/일 사) ; 불상(佛像)에 새로 금칠을 하는 것과 그때 행하는 의식.
*보시(布施) : [산스크리트어] dāna. 음을 따라 단나(檀那) · 다나(柁那) · 단(檀) 등으로 음사(音寫)한다. 물질 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05~106.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 한 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참고 ❷] 『백유경(百喩經)』 제1권. (존자尊者 승가사나僧伽斯那 찬집撰集 | 소제蕭齊 천축삼장天竺三藏 구나비지求那毘地 한역漢譯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2. 어리석은 사람이 소젖을 모은 비유(愚人集牛乳喩)」
昔有愚人將會賓客 欲集牛乳以擬供設 而作是念 我今若豫於日日中犛取牛乳 牛乳漸多卒無安處 或復酢敗 不如卽就牛腹盛之 待臨會時當頓犛取 作是念已 便捉牸牛母子 各繫異處

옛날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장차 손님을 청하여 소의 젖을 모아 대접하려고 자리를 마련하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만약 날마다 미리 소젖을 짜두면 소젖은 점점 많아져 마침내 둘 곳이 없게 될 것이며, 또한 맛도 변해 못쓰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기보다는 소젖을 소 뱃속에 모아두었다가 모임이 있을 때쯤에 한꺼번에 짜내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곧 어미소와 새끼를 따로 매어 두었다.

却後一月 爾乃設會迎置賓客 方牽牛來欲犛取乳 而此牛乳卽乾無有 時爲衆賓或瞋或笑

한 달이 지난 후 잔치를 마련하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소를 끌고 와서 젖을 짜려 하였으나 그 소의 젖은 말라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거기 모인 손님들은 성을 내거나 혹은 비웃었다.

愚人亦爾 欲修布施 方言待我大有之時 然後頓施 未及聚頃 或爲縣官水火盜賊之所侵奪 或卒命終不及時施 彼亦如是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보시(布施)를 하려다가 ‘내게 재물이 많이 쌓이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보시하리라’고 생각하지만, 모으기도 전에 관청이나 수재(水災)나 화재(火災)나 혹은 도적에게 빼앗기거나 또는 갑자기 목숨을 마치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보시할 수 없게 된다. 저들 또한 이와 같다.

*무루복(無漏福 없을 무/새다·번뇌 루/복 복) ; 번뇌[漏]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양구(供養具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갖추다·차림·그릇 구) ; 부처님이나 보살님께 바치는 음식물 · 향 · 꽃 등의 물건, 또는 그 물건을 바칠 때 사용하는 기구.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 · 앉은삼재),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삼재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삼재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 ❶] 송담스님(No.258)—1985년(을축년) 신수기도입재(1985.02.22) 법문에서.
〇삼재가 들으신 분뿐만이 아니라, 삼재가 안 들으신 모든 사부대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앙(災殃)은 언제나 우리에게 닥아 올 수가 있고 우리에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삼재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그 근본이 일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음이 없다면 삼재가 붙을 수가 없고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 부터 끊임없는 파도가 파도치고 있기 때문에 삼재가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〇대관절 이 삼재라고 하는 것이 왜 그것이 어떠한 이유로 해서 있는 것이냐? 태어난 해에 따라 차례차례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삼재가 오느냐 하는 것은, 이것은 음양오행의 술가들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간 옛날부터서 우리의 생활 경험을 통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삼재가 든 사람은 항시 불보살과 성현께 기도를 하고, 또 항시 3년 동안 근신을 하고,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을 각별히 조심을 해서, 대인 관계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 있어서 근신하고, 지혜롭고, 참을성 있게 그렇게 조심을 해 나가야만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〇생활은 여전히 해 가되 ‘어떻게 근신을 하고 어떻게 조심을 하느냐’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불법을 믿고 항시 염불을 하는 이는 염불을 열심히 하고, 경을 독송하는 이는 경을 열심히 독송하고, 또 참선법을 믿고 실천하는 분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심(一心)으로 화두를 들며 참구를 한다면 어느 틈에 있어서 삼재가 엿볼 수가 있겠습니까.
삼재가 아무리 무섭다 해도 우리의 마음의 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지, 마음에 틈이 없다면 들어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〇삼재가 우리의 마음의 틈을 타서 들어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을 하고 삼재에 걸린 분. 또 앞으로 삼재를 맞이할 분들은 각별히 마음의 문—마음의 문은 눈이 바로 마음의 문이요. 귀가 마음의 문이요. 코와 입이 마음의 문이요. 우리의 몸뚱이가 마음의 문이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의 문인 것입니다. 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 육문(六門)이 바로 삼재가 들어오는 문이 것입니다.
그 문단속을 잘 하는 것으로 모든 도적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삼재를 막아내는, 비단 삼재라고 했습니다마는 더 널리 말을 한다면 육적(六賊)이 될 것이고, 더 방대하게 말한다면 팔만사천 마군(八萬四千魔軍)이 될 것입니다.

그 팔만사천 마군이를 ‘한 생각’에 막을 수도 있고, 도적을 불러 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비끗 잘못하면 바로 삼재와 육적과 팔만사천 도적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도 역시 그 ‘한 생각’ 때문에 육도윤회를 해서 끊임없이 생사를 받고 있습니다마는, 그 ‘한 생각’만 잘 단속해 나간다면 신수기도는 정말 옳게 봉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16)삼재(336:6분7초).mp3
2.80MB


[참고 ❷] 송담스님(No.336)—1987년 8월 첫째일요법회(87.08.02)에서. (6분7초)
〇그러나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또 바람이 불고 한 그러한 재난은 사실은 큰 재난이라고 할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수재(水災)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재(火災)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팔풍(八風)의 그 풍재(風災), 이러한 재난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수재가 일어나서 육백 명이라고 하는 인명(人命)을 앗아가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훨씬 참혹하고 무서운 재난은 우리 낱낱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재난,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몰아넣는 그러한 무서운 재난인 것입니다.

비가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불어서 얻은 재난은 재산을 앗아갑니다. 재산은 또 부지런히 벌면 보충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설사 그러한 수재로 인해서 생명을 잃었다 하드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지옥에 가란 법은 없습니다.
몸을 바꿔서 좋은 데에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할 수도 있지마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화재로 일어난 그 재난은 영락없이 우리를 축생(畜生)이나 또는 아귀(餓鬼)나 지옥(地獄)으로 우리를 밀어붙이고 마는 것입니다.

무량겁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마음속에 그 수재와 화재로 인해서 많은 피해를 입어 왔습니다. 그 탐진치 삼독, 오욕락(五欲樂), 팔풍경계에 우리는 잠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지금 이 폭풍이나 태풍 이런 것은 여름 한때 장마철에 지나가 버리고 며칠간 그러다가 그치면 또 조용합니다. 또 내년에 이맘때 되면은 또 그러한 것이 오겠습니다마는, 그래도 1년에 한 번 정도 오는 거야 우리가 미리미리 취약지구에 대한 대처를 해 나가고 모다 댐이라든지 그런 것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잘 해나간다면 언젠가는 큰 피해를 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그건 온 나라의 여러 국민들이 모다 합심을 해서 모다 의연금품을 내고 나라에서도 모다 구제를 하고 그러면 어느 정도 또 상처를 또 아물게 할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우리의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그 태풍과 폭풍, 폭우 모다 그런 것은 아무도 우리 자신을 대신해서 그것을 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라에서도 어찌해 볼 수가 없고, 부모형제라 하더라도 어찌 해볼 수가 없고, 오직 나 자신의 마음의 수재와 화재와 풍재는 나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만이, 활구참선을 통해서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대단히 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풍재와 화재 또는 수재 이런 것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번에 지나간 그러한 폭풍이 유(類)가 아닌 것입니다. 폭우가 비교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고대로 놔둔 채,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자신을 갖다가 지옥구덩이에 갖다가 처박기도 하고, 축생의 뱃속에—이 사람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독사가 되기도 하고, 호랑이가 되기도 하고, 또 아귀와 그런 악마가 되게 하는 그러한 무서운 것입니다.

순전히 ‘한 생각’으로 인해서, 그 한 생각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해 가지고 그러한 육도(六途)를 찰나간(刹那間)에 윤회(輪廻)를 하면서 백 년의 꿈을 꾸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범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 『선가귀감(禪家龜鑑)』 전자책(PDF) 다운로드.
>>> 『선가귀감(禪家龜鑑)』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몽산법어(蒙山法語)』 전자책(PDF) 다운로드.
>>>『몽산법어(蒙山法語)』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ㄷ/달마대사2026. 10. 28. 10:15

달마대사(세등10)—활구참선(산 참선)과 사구참선(죽은 참선) |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도를 닦고자 할진대는 먼저 바른 스승을 찾아라」 | 달마 스님과 양무제(梁武帝)의 대화 | 불입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 소무공덕(小無功德) | 내가 나를 깨닫는 참선법이야말로 무량겁을 생사윤회의 근원을 끊는 것.


*달마대사(達摩大師, 達磨大師) : [산스크리트어(범어)] Bodhi-dharma.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 달마는 보리달마(菩提達摩 ·菩提達磨)의 생략형이다. 보리달마다라(菩提達磨多羅) · 달마다라(達磨多羅) · 보리다라(菩提多羅) 등이라고도 하나 보통 달마라고 한다.
달마의 생몰연대는 ?~495, ?~436, 346~495, ?~528, ?~536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종의 전등(傳燈) 계보상 인도로부터는 제27조인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을 이어 제28조이며, 중국에 건너와서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다.

여러 자료를 토대로 달마의 전기를 살펴보면, 달마의 출신지는 파사국(波斯國) · 향지국(香至國) · 바라문국(婆羅門國) · 남천축국(南天竺國) 등이라고 하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남천축국 향지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한다.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을 받고 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건너가 3년이 지나서야,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광주 자사가 예를 갖추어 영접하였으며, 표(表)를 올려 무제에게 아뢰자 무제가 표를 읽고는 사신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10월 1일에 금릉(金陵)에 이르렀다.

무제가 대사에게 묻기를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스님을 득도시키기를 셀 수 없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습니까?[朕卽位已來 造寺寫經度僧不可勝紀 有何功德]”
대사가 대답했다.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並無功德]”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何以無功德]”
“이는 다만 인간과 하늘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하나 실답지가 않습니다[此但人天小果有漏之因 如影隨形雖有非實]”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오?[如何是眞功德]”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해서 체(體)가 스스로 공적(空寂)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淨智妙圓體自空寂 如是功德不以世求]”

무제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성제(聖諦)의 제일가는 뜻[第一義]이오?[如何是聖諦第一義]”
“확연(廓然)해서 거룩함[聖]도 없습니다[廓然無聖]”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對朕者誰]”
“모르겠습니다[不識]“
무제가 알아듣지 못하자, 대사는 근기가 계합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 후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는데, 석굴에서 면벽(面壁)하고 앉아서는 종일토록 침묵을 지키니, 아무도 그 연유를 아는 이가 없어서 그를 일러 벽을 보는 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하였다.

당시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달마 대사에게 가서 아침저녁으로 섬기고 물었으나, 대사는 늘 단정히 앉아서 벽을 바라볼 뿐이어서 아무런 가르침도 듣지 못했다.
마침내 신광은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끊어서 대사의 앞에 놓으니, 대사는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알고서 말했다. “부처님들이 처음 도를 구하실 때는 법을 위해 몸을 잊었다. 네가 이제 내 앞에서 팔을 끊으니, 법을 구할 만하구나”

대사가 그의 이름을 혜가(慧可)라고 바꿔 주자, 신광이 말했다. “모든 부처님들의 법인(法印)을 들을 수 있습니까?[諸佛法印可得聞乎]”
대사가 대답했다. “부처님들의 법인은 남에게 얻는 것이 아니니라[諸佛法印匪從人得]”

“제 마음이 아직 편안치 못하오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소서[我心未寧 乞師與安]”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너를 편안케 해주리라[將心來與汝安]”

“마음을 찾아도 끝내 얻을 수 없습니다[覓心了不可得]”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我與汝安心竟]”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대사는 끝내 소림사(小林寺)를 떠나지 않았다. 황제는 더욱 더 흠모를 하면서 예물을 하사했으나 대사는 굳게 사양하면서 세 번이나 돌려보냈다. 그러나 황제의 뜻이 더욱 단호해지자 대사는 그때서야 비로소 받았다.

다시 9년이 지나자, 대사는 서쪽의 천축으로 돌아가고자 해서 제자[門人]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제가 본 바로는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는 것으로 도의 작용을 삼는 것입니다[如我所見 不執文字不離文字而爲道用]”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汝得吾皮]”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지금 이해한 바로는 아난(阿難)이 아촉불국(阿閦佛國)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我今所解如慶喜見阿閦佛國 一見更不再見]”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汝得吾肉]”

도육(道育)이 말했다. “사대(四大)가 본래 공하고 오온(五蘊)이 있지 않으니, 제가 보기에는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四大本空五陰非有 而我見處無一法可得]”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汝得吾骨]”

마지막에 혜가가 절을 한 뒤에 제자리에 서 있자,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最後慧可禮拜後依位而立 師曰 汝得吾髓]

이에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혜가에게 부촉하고 가사(袈裟)를 전해서 법의 신표로 삼았으며,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당시 광통 율사(光統律師)와 보리유지 삼장(菩提流支三藏)은 대사가 현묘한 교화의 바람을 널리 떨치고 법의 비를 두루 뿌리자, 그들의 치우치고 옹색한 마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서, 앞 다투어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켜 자주 독약(毒藥)을 음식에 넣었다. 그 일이 여섯 차례에 이르렀을 때 이미 교화의 인연도 다하였고 법 전할 사람도 만났으므로, 더 이상 독약에서 벗어나지 않고 단정히 앉아서 열반하니, 웅이산(熊耳山)에 장사지내고 정림사(定林寺)에 탑을 세웠다.

그 뒤 3년 후에 위(魏)의 사신이 서역(西域)에 갔다 오다가 달마대사를 총령(葱嶺)에서 만났는데, 맨발 벗고, 손에는 신 한 짝을 들고 훌훌히 혼자 가고 있었다. 사신이 묻기를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하자, 대사가 대답하기를 ‘서천(西天)으로 간다. 그리고 그대의 임금은 벌써 세상을 뜨셨다’라고 하였다. 사신이 이 말을 듣고 아찔하여 부지런히 동으로 가서 국왕께 복명(復命)하니, 명제(明帝)는 이미 승하하고 효장제(孝莊帝)가 등극해 있었다. 사명을 받들어 위의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황제가 무덤을 열어 보게 했는데, 빈 관에 신 한 짝만이 남아 있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전등록 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28조 보리달마」 p154~p183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음>

저서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이종입二種入(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 『심경송(心經頌)』 · 『파상론(破相論)』 · 『안심법문(安心法門)』 · 『오성론(悟性論)』 · 『혈맥론(血脈論)』 등 여섯 법문(法門)으로 이루어진 『소실육문(小室六門)』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때 간행한 『선문촬요(禪門撮要)』 가운데 『혈맥론』 · 『관심론(觀心論)』 · 『사행론(四行論)』 등이 들어 있다. 『파상론(破相論)』과 『관심론(觀心論)』은 중복되며 달마대사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북종 신수(神秀)의 저술로 보고 있다.

달마의 전기에 관한 자료는 『낙양가람기(落陽伽藍記)』(574년 성립),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담림(曇林)의 「서문」(600년경), 『당고승전唐高僧傳(속고승전續高僧傳)』(649년), 『전법보기(傳法寶紀)』(712년경),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713년),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년경), 『보림전(寶林傳)』(801년), 『조당집(祖堂集)』(952년) 등이 있다.
『보림전』의 기록을 근거로 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년)과 『전법정종기(傳法正宗紀)』(1061년)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최징(最澄)의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證佛法相承血脈譜)』(819년)와 신회(神會)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磨南宗定是非論)』(732년) · 『문답잡징의(問答雜徵義)』, 종밀(宗密)의 『선문사자승습도(禪門師資承襲圖)』 · 『도서(都序)』 ·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 등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1) 10분 47초.

달마대사(세등10-1:1976병진년 동안거해제:77.1.17:10분47초).mp3
9.87MB

 

(2) 12분 41초.

달마대사(세등10-2:1976병진년 동안거해제:77.1.17:12분41초).mp3
11.61MB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10)—1976(병진)년 동안거 해제 법어(77.1.17) (세등10)(달마대사)

(1)------------------

'참선, 참선' 요새 굉장히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외국에까지도 이 참선에 붐이 일어나 가지고 입으로는 아니한 사람이 없고, 말로는 이 참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선(參禪)에는 크게 노나서, 두 가지를 노나서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구(死句) 참선, 죽은 참선 또 하나는 활구(活句) 참선, 산 참선—‘죽은 참선’과 ‘산 참선’이 있습니다.

‘죽은 참선’은 아무리 해봤자 점점 삼재(三災)를 불러 일으키고 팔만사천 마구니를 점점 충동이 쳐 가지고 마구니의 권속으로 떨어져 가지고 저 죽고 남 죽이고 불법(佛法)을 망하는 마구니로 떨어지는 길이고.
‘산 참선’, 활구참선을 해야만 나를 생사로부터 건져내고 다른 사람을 생사의 윤회로부터 건져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영원히 이어 나가는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죽은 참선’이냐?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고, 교리로 따져 들어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이렇게 자꾸 따져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더듬어 들어가는, 그리고 차츰차츰 알아지는 것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무엇이 보이는 것이 있고, 이러한 참선은 이것이 바로 ‘죽은 참선’, 죽음으로 들어가는 생사윤회로 떨어지는 참선입니다.

제가 아무리 경을 많이 읽고 교리에 무불통지(無不通知)하고, 일체 철학 · 문학 · 과학 그런 학문에 맥힘이 없다 하드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지식이요, 지식은 중생심(衆生心)으로 알아 들어가는 것이요, 중생심으로 전해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알았다 해도 그것은 중생심 안에서 있는 일입니다.
많이 알수록 중생심만 더욱 치성(熾盛)하게 만드는 까닭으로 해서—중생심이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여, 생사심을 치성하게 함으로서 생사윤회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에 속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은 알아 들어가고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지식이나 교리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연구해서 얻어져 갖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 그러한 것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동원를 해 가지고 그러한 것으로 더듬어 들어간다면은 그것은 활구참선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반드시 믿을 수 있는 그리고 내가 믿어지는 선각자(先覺者)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시작해야 하고, 공부를 진행해 나가야 하고, 공부를 마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도를 닦고자 할진대는 먼저 바른 스승을 찾아라」

달마 스님은 인도에서 향지국(香至國)이라고 하는 나라의 제3 왕자로 태어난 분으로 일찍이 출가해서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140세가 되도록 서인도 천지을 다니시면서 대법(大法)을 선양을 하시다가 인연이 중국에 있는 것을 짐작을 하시고 말년에 중국으로 건너오셨습니다.
중국에 건너오셔 가지고 맨 처음에 양무제(梁武帝)라고 하는 천자(天子)가 불교에 신심이 장하다는 말씀을 듣고 양무제를 찾아가 면회를 했습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향해서 묻기를 “짐(朕)이 많은 경을 인쇄해서 널리 보시를 하고, 많은 절을 짓고 많은 승려들을 득도(得度)를 해서 절을 짓고 탑을 많이 세우고 했으니 짐의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하기를 “소무공덕(小無功德)입니다. 조끔도 공덕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러운 뜻입니까?”
“확연(廓然)해서 조끔도 성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은 짐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요?”
“모르겠습니다[不識]”

이렇게 대화가 오고 감으로 해서 달마대사는 양무제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그길로 물러나와서 위(魏)나라 숭산에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서 9년 동안을 사람을 상대하지 아니하고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했습니다.

양무제는 그 뒤 훌륭한 의인으로부터서 “대관절 그 왔다간 달마대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요?”
“그이는 불(佛) 후신(後身)으로서 생불(生佛)과 같은 어른으로 부처님의 심법(心法)을 이어받은 대도사입니다”

“하! 그러냐”고, “그러면 그이를 다시 모셔 오도록 하자”
“아닙니다. 그이는 천하의 사람이 다 가서 청한다 해도 그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리해서 양무제는 정말 자기가 그런 대도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푸대접한 것을 깊이 뉘우치고 그 뒤로 부터서는 정말 마음으로부터 달마대사를 숭배하고 존경해 마지않았던 것입니다.

드디어 달마대사는 그러한 천자의 귀위(歸依)를 받고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마는, 그것을 시기하는 다른 율사의 무리들의 무고로 인해서 독약을 여섯 번이나 받았으나 번번이 토해 버림으로써 죽음을 면했습니다.
일곱 번째 독약이 또 왔습니다. 그때는 이미 당신이 인연이 그것인 줄 알고 독약을 토하지 아니하므로 해서 조용히 열반을 맞이했습니다.

그 달마대사께서 중국에 오셔서 어떻게 법을 선양하셨느냐?
달마대사가 중국에 오시기 전에 이미 많은 불경(佛經)이 중국에 들어왔었고 불상(佛像)도 들여왔었고 많은 강사, 율사들이 건너와서 굉장히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달마대사는 ‘불입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이 말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그것은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 가리키는 손가락은 어찌 달을 보라고 하는 것인데, 달은 보지 아니하고 손가락만 보고 있다면 그것이 말이 될 말이냐? 팔만대장경은 달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못하거늘 어찌 달은 보지 아니하고 손가락만 볼 수가 있느냐? 이것은 불법(佛法)이 아니다. ‘참 불법’은 달을 보는 데 있는 것이지 손가락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강사(講師)들의 비위를 건드렸고, 율사(律師)들의 비위를 건드려서 달마대사는 정말 죽음을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많은 경을 읽고 교리에 밝고 지식이 풍부하다고 해서 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에 밝은 것은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면은 그 경을 옳게 본 사람이라면은 반드시 나를 깨달을 수 있는 참선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경을 잘 못 보기 때문에 일생을 경만 뒤적거리고 경만 읽고 있지, 경을 옳게 본 사람이면 바로 참선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17분24초~28분8초)





(2)------------------

참선(參禪)은 내가 나를 깨닫는 길입니다. ‘내’라는 것이 무엇이냐?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 하고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좋아할 줄 알고, 꼬집어 뜯으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놈!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일어나는 곳에 ‘나’는 있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 중생심 이것이 바로 ‘참나’가 있는 증거입니다. 그놈을 버리고 나를 찾아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큰 강물이 흘러갈 때에 그 강물이 대관절 어느 수원(水源)으로부터서 그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는가? 그 근원을 알고자 하면은 그 강물을 따라서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흘러가고 있는 그 강물을 떠나서 다른 데를 아무리 방황을 해봤자 그 근원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 강물을 따라서 밑으로 내려가 봤자 바다밖에는 나오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면 반드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여.
성냈다 · 웃었다 · 근심 · 걱정 · 번뇌 · 망상 일어나는 그것을 강물에다 비교한다면 그 일어나는 곳, 그것이 바로 근원이 ‘참나’요, 그것이 나에 ‘본 성품(本性品)’이요, 진여자성(眞如自性)이요, 불성(佛性)인 것입니다.

‘이뭣고?~~’

성이 날 때나, 슬플 때나, 근심 걱정이 있을 때나, 언제 어디에서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려서 ‘이뭣고?~~’
화두(話頭)에는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있지마는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이요, 생겨나기 이전에 노상 있었던 화두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이전에도 이 ‘이뭣고?’ 화두는 온 법계(法界)에 노상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총명하고 지혜스러운 부처님께서는 먼저 어릴적부터서 이 화두에 마음을 쏟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같이 버리시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12년간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녹음 끊김)...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서 솟아오르는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그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 바로 우주의 진리가 아니라, 하늘에 뜬 별의 원리가 아니라, 바로 ‘나’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나! ‘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우주에 근본이요, 우주인 것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우주는 존재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우주라고 하는 것은 나의 그림자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없는 허공을 커다란 하나의 거울이라고 생각한다면은 그 거울에 나의 모습이 비추어서 반사해서 돌아온 것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찬 삼라만상(森羅萬象)인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꽃이 피어 있어도 그 마음이 슬픈 자는 그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기보다는 슬픔에 눈물이 흘르는 것입니다. 밝고 밝은 하늘의 달을 보고도 마음이 기쁜 사람은 흥겨워 노래가 나오지만, 마음이 슬픈 자는 그 달을 보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입니다. 달은 슬픔도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꽃도 자체가 슬프거나 기쁜 것도 또는 자체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비단 달과 꽃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요, 일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자식, 일가 친척, 모든 사람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이 편안하고 내가 마음이 기쁘고 내 마음이 착하면 모든 사람이 다 착한 법입니다. 내 마음이 삐뚤어지고, 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내 마음이 뒤숭숭하면 그렇게 사랑하던 자식도 귀찮고 뵈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 마음 하나 바르고, 안정되고, 맑게 유지한다고 하면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해(苦海)가 아니라 극락정토(極樂淨土)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지마는 한마디로 요약하면은 ‘니가 너를 깨달어라!’ ‘너의 참마음을 깨달어라’ 이 말씀 외에는 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많은 말씀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이렇게도 말씀하시고 저렇게도 말씀하셨을 뿐, ‘니가 너를 깨달어라’ 하는 그 말씀 외에는 딴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佛敎)’라고 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불(佛)’자는 인도의 ‘붓다(Buddha)’라 하는 말을 중국에서 ‘불타(佛陀)’라고 음사(音寫)를 해서, 그것이 불타(佛陀)가 한국에서는 ‘붇텨, 붇텨님, 붇텨님’ 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 ‘부처님’ 하면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닫는 길이다, 깨닫는 가르침이다’ 이런 말씀이여. 그래서 「불교를 믿는다, 부처님 신도(信徒)가 된다」고 하면은 「깨닫기 위한 수행」 이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은 다 껍데기입니다.
깨닫기 위한, 나를 깨닫기 위한 참선! 이것 말고 다른 어떠한 훌륭한 일을 하고, 어떠한 남의 이목을 끄는 그러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무공덕(小無功德)’인 것입니다.

왜 ‘소무공덕’이냐?
절을 짓는 데 시주(施主)를 하고, 부처님 금(金)을 입히는 데 시주를 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돈과 옷을 많이 보시(布施)를 하고, 병든 사람 약을 사주고,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적인 방법으로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나의 생사(生死)를 끊는 무루복(無漏福)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는 어디까지나 착한 일이고, 그런 착한 일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니지마는, 궁극적으로 볼 때에는 그것으로 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는 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생사윤회를 끊는 대도(大道)를 성취하는 데에는 별로 큰 공덕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소무공덕(小無功德)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착한 공덕을 지었다고 해서 ‘나는 이런 좋은 일을 했다’ 하고 그러한 자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 뽐내고 이러한 것은 더군다나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양무제가 경을 그렇게 많이 찍어서 보시를 하고, 절을 많이 짓고 탑을 많이 세우고, 스님네에게 그렇게 많은 공양구(供養具)를 올려서 보시 공덕을 지은 것을 크게 자랑을 세워 가지고,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에게 “내가 이러한 착한 일을 했는데 이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달마대사가 너무나 점잖으셨기 때문에 ‘소무공덕(小無功德)’이라고 간단히 한마디하셨을 뿐, 참으로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정말 자비심으로써 상대를 하셨다면은 그 자리에서 양무제를 가만히 둘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 참선법」 이것이야말로 무량겁을 두고 윤회할 생사의 근원을 끊는 것이여.
일 년 이태 삼 년의 삼재(三災),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삼재, 과거의 죄(罪)를 소멸하고 금생의 업(業)을 소멸하고, 영원히 생사해탈(生死解脫)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부적이요, 불공(佛供)이요, 공덕(功德)이 되는 것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선만 한다’ 해 가지고 다른 어떠한 착한 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써야 할 최소한도의 액수를 내놓고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아낌없이 보시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福)과 혜(慧), 두 가지를 쌍으로 닦아야만 내가 도(道)를 닦아가는 데에 장애가 없는 것이고, 도를 성취한 뒤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장애가 없는 것입니다. 지혜만 닦고 복을 짓지 아니하면, 혜(慧)는 밝지마는 너무나 모든 여건이 맞지를 안해서 자기와 남을 생사로부터 건져내는 데에 필요한 여건이 갖추지를 못해서 중생 교화하는 데에 막대한 장애에 부닥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복도 지어야 하는 것이고, 복만 짓는 데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찾는 참선 공부, 활구참선 그것이 오히려 선행(先行)되어야 하고 그것이 밑바탕이 되고 근본이 되어서 그 위에 복을 닦는 행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28분8초~40분4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승속(僧俗) ; 스님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참선(參禪 참여하다·참구參究하다 참/선 선)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선(禪) ; (산스크리트어) dhyāna, (팔리어) jhāna. 선나(禪那) · 타연나(駄演那 : 馱衍那)라 음사(音寫)하고, 줄여서 선(禪)이라고 한다. 정려(靜慮 : 靜으로는 번뇌를 끊고, 慮로는 바르게 관찰한다) · 사유수(思惟修 생각하여 닦음) · 기악(棄惡 : 모든 악을 버리림) 등이라고 한역한다. 선(禪)을 원인으로 하여 지혜 · 신통 · 사무량 등의 공덕을 일으키기 때문에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도 한다. 진정한 이치를 궁리하고 생각을 안정하게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선종(禪宗)의 선(禪)은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중국으로 건너온 뒤로부터 크게 발달되어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완성되었다.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敎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서 이치나 일에 걸림이 없는 선.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조사선의 방법에 근거하여 화두(話頭)를 궁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이 대두하였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조사선이 곧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42)조사선(685:2004년 하안거결제:4분19초).mp3
3.95MB


[참고] 송담스님(No.685)—2004년 하안거결제 법문(04.06.02)(4분19초)
위타위기수미선(爲他爲己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위타위기(爲他爲己)는 수미선(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거, 비록 그것이 선(善)이 아닌 것은 아니야. 틀림없이, 남에게 보시를 한다든지 자원봉사를 한다든지 다 그것이 선(善)이기는 선이나 그것이 조그만한 선(善)이다 그말이지. 그러나 이것이 다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는 원인밖에는 안 된다 그거죠.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해 가지고 상(相)을 내고, 자랑을 하고, 그러면 그것이 선을 지은 만큼 복을 받기도 하고 또 천당에 가기도 하고 하나 영원성이 없어.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쏘면 아무리 큰 장사(壯士)가 화살을 쏘았다 하더라도 그 올라간 만큼 올라갔다 다시 또 땅으로 떨어지듯이 좋은 일을 해서 복을 받는데, 큰 복을 받는 사람도 있고 작은 복을 받기도 하나, 크나 작으나 복 받을 만큼 받으면 다시 또 타락을 하게 되니까 그것이 영원성이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영원성이 있느냐?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원컨대 솔바람 불고 칡덩쿨 사이로 달이 비치는 그런 데에 가서 길이 무루(無漏)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고자 한다.
무루 조사선이라는 게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활구참선(活句參禪)이여.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이 말씀입니다.(처음~4분30초)

*간화선(看話禪) ; 화두선(話頭禪).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 · 앉은삼재),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삼재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삼재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 ❶] 송담스님(No.258)—1985년(을축년) 신수기도입재(1985.02.22) 법문에서.
〇삼재가 들으신 분뿐만이 아니라, 삼재가 안 들으신 모든 사부대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앙(災殃)은 언제나 우리에게 닥아 올 수가 있고 우리에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삼재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그 근본이 일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음이 없다면 삼재가 붙을 수가 없고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 부터 끊임없는 파도가 파도치고 있기 때문에 삼재가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〇대관절 이 삼재라고 하는 것이 왜 그것이 어떠한 이유로 해서 있는 것이냐? 태어난 해에 따라 차례차례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삼재가 오느냐 하는 것은, 이것은 음양오행의 술가들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간 옛날부터서 우리의 생활 경험을 통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삼재가 든 사람은 항시 불보살과 성현께 기도를 하고, 또 항시 3년 동안 근신을 하고,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을 각별히 조심을 해서, 대인 관계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 있어서 근신하고, 지혜롭고, 참을성 있게 그렇게 조심을 해 나가야만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〇생활은 여전히 해 가되 ‘어떻게 근신을 하고 어떻게 조심을 하느냐’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불법을 믿고 항시 염불을 하는 이는 염불을 열심히 하고, 경을 독송하는 이는 경을 열심히 독송하고, 또 참선법을 믿고 실천하는 분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심(一心)으로 화두를 들며 참구를 한다면 어느 틈에 있어서 삼재가 엿볼 수가 있겠습니까.
삼재가 아무리 무섭다 해도 우리의 마음의 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지, 마음에 틈이 없다면 들어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〇삼재가 우리의 마음의 틈을 타서 들어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을 하고 삼재에 걸린 분. 또 앞으로 삼재를 맞이할 분들은 각별히 마음의 문—마음의 문은 눈이 바로 마음의 문이요. 귀가 마음의 문이요. 코와 입이 마음의 문이요. 우리의 몸뚱이가 마음의 문이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의 문인 것입니다. 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 육문(六門)이 바로 삼재가 들어오는 문이 것입니다.
그 문단속을 잘 하는 것으로 모든 도적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삼재를 막아내는, 비단 삼재라고 했습니다마는 더 널리 말을 한다면 육적(六賊)이 될 것이고, 더 방대하게 말한다면 팔만사천 마군(八萬四千魔軍)이 될 것입니다.

그 팔만사천 마군이를 ‘한 생각’에 막을 수도 있고, 도적을 불러 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비끗 잘못하면 바로 삼재와 육적과 팔만사천 도적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도 역시 그 ‘한 생각’ 때문에 육도윤회를 해서 끊임없이 생사를 받고 있습니다마는, 그 ‘한 생각’만 잘 단속해 나간다면 신수기도는 정말 옳게 봉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16)삼재(336:6분7초).mp3
2.80MB


[참고 ❷] 송담스님(No.336)—1987년 8월 첫째일요법회(87.08.02)에서. (6분7초)
〇그러나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또 바람이 불고 한 그러한 재난은 사실은 큰 재난이라고 할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수재(水災)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재(火災)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팔풍(八風)의 그 풍재(風災), 이러한 재난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수재가 일어나서 육백 명이라고 하는 인명(人命)을 앗아가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훨씬 참혹하고 무서운 재난은 우리 낱낱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재난,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몰아넣는 그러한 무서운 재난인 것입니다.

비가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불어서 얻은 재난은 재산을 앗아갑니다. 재산은 또 부지런히 벌면 보충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설사 그러한 수재로 인해서 생명을 잃었다 하드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지옥에 가란 법은 없습니다.
몸을 바꿔서 좋은 데에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할 수도 있지마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화재로 일어난 그 재난은 영락없이 우리를 축생(畜生)이나 또는 아귀(餓鬼)나 지옥(地獄)으로 우리를 밀어붙이고 마는 것입니다.

무량겁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마음속에 그 수재와 화재로 인해서 많은 피해를 입어 왔습니다. 그 탐진치 삼독, 오욕락(五欲樂), 팔풍경계에 우리는 잠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지금 이 폭풍이나 태풍 이런 것은 여름 한때 장마철에 지나가 버리고 며칠간 그러다가 그치면 또 조용합니다. 또 내년에 이맘때 되면은 또 그러한 것이 오겠습니다마는, 그래도 1년에 한 번 정도 오는 거야 우리가 미리미리 취약지구에 대한 대처를 해 나가고 모다 댐이라든지 그런 것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잘 해나간다면 언젠가는 큰 피해를 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그건 온 나라의 여러 국민들이 모다 합심을 해서 모다 의연금품을 내고 나라에서도 모다 구제를 하고 그러면 어느 정도 또 상처를 또 아물게 할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우리의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그 태풍과 폭풍, 폭우 모다 그런 것은 아무도 우리 자신을 대신해서 그것을 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라에서도 어찌해 볼 수가 없고, 부모형제라 하더라도 어찌 해볼 수가 없고, 오직 나 자신의 마음의 수재와 화재와 풍재는 나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만이, 활구참선을 통해서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대단히 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풍재와 화재 또는 수재 이런 것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번에 지나간 그러한 폭풍이 유(類)가 아닌 것입니다. 폭우가 비교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고대로 놔둔 채,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자신을 갖다가 지옥구덩이에 갖다가 처박기도 하고, 축생의 뱃속에—이 사람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독사가 되기도 하고, 호랑이가 되기도 하고, 또 아귀와 그런 악마가 되게 하는 그러한 무서운 것입니다.

순전히 ‘한 생각’으로 인해서, 그 한 생각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해 가지고 그러한 육도(六途)를 찰나간(刹那間)에 윤회(輪廻)를 하면서 백 년의 꿈을 꾸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마구니 ; 마(魔). [산스크리트어(범어)]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魔軍)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煩惱)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도고마성道高魔盛]’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벽극풍동壁隙風動],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심극마침心隙魔侵]’고 하시니라.
*권속(眷屬 돌보다·식솔食率 권/무리·혈족 속) ; ①돌봐 주어야[眷] 할 한집안 식구[屬]. ②‘아내’의 낮춤말.
*불법(佛法 부처 불/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혜명(慧命) : 지혜를 생명에 비유한 말.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무불통지(無不通知) ; 무슨 일이든지 두루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치성(熾盛 성할 치/성할 성) ; 불길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성하게 일어남
*선각자(先覺者 먼저 선/깨달을 각/사람 자) ; 남보다 앞서 깨달은 사람.
*달마대사(達摩大師, 達磨大師) : [산스크리트어(범어)] Bodhi-dharma.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 달마는 보리달마(菩提達摩 ·菩提達磨)의 생략형이다. 보리달마다라(菩提達磨多羅) · 달마다라(達磨多羅) · 보리다라(菩提多羅) 등이라고도 하나 보통 달마라고 한다.
달마의 생몰연대는 ?~495, ?~436, 346~495, ?~528, ?~536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종의 전등(傳燈) 계보상 인도로부터는 제27조인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을 이어 제28조이며, 중국에 건너와서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다.

여러 자료를 토대로 달마의 전기를 살펴보면, 달마의 출신지는 파사국(波斯國) · 향지국(香至國) · 바라문국(婆羅門國) · 남천축국(南天竺國) 등이라고 하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남천축국 향지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한다.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을 받고 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건너가 3년이 지나서야,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광주 자사가 예를 갖추어 영접하였으며, 표(表)를 올려 무제에게 아뢰자 무제가 표를 읽고는 사신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10월 1일에 금릉(金陵)에 이르렀다.

무제가 대사에게 묻기를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스님을 득도시키기를 셀 수 없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습니까?[朕卽位已來 造寺寫經度僧不可勝紀 有何功德]”
대사가 대답했다.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並無功德]”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何以無功德]”
“이는 다만 인간과 하늘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하나 실답지가 않습니다[此但人天小果有漏之因 如影隨形雖有非實]”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오?[如何是眞功德]”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해서 체(體)가 스스로 공적(空寂)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淨智妙圓體自空寂 如是功德不以世求]”

무제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성제(聖諦)의 제일가는 뜻[第一義]이오?[如何是聖諦第一義]”
“확연(廓然)해서 거룩함[聖]도 없습니다[廓然無聖]”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對朕者誰]”
“모르겠습니다[不識]“
무제가 알아듣지 못하자, 대사는 근기가 계합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 후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는데, 석굴에서 면벽(面壁)하고 앉아서는 종일토록 침묵을 지키니, 아무도 그 연유를 아는 이가 없어서 그를 일러 벽을 보는 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하였다.

당시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달마 대사에게 가서 아침저녁으로 섬기고 물었으나, 대사는 늘 단정히 앉아서 벽을 바라볼 뿐이어서 아무런 가르침도 듣지 못했다.
마침내 신광은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끊어서 대사의 앞에 놓으니, 대사는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알고서 말했다. “부처님들이 처음 도를 구하실 때는 법을 위해 몸을 잊었다. 네가 이제 내 앞에서 팔을 끊으니, 법을 구할 만하구나”

대사가 그의 이름을 혜가(慧可)라고 바꿔 주자, 신광이 말했다. “모든 부처님들의 법인(法印)을 들을 수 있습니까?[諸佛法印可得聞乎]”
대사가 대답했다. “부처님들의 법인은 남에게 얻는 것이 아니니라[諸佛法印匪從人得]”

“제 마음이 아직 편안치 못하오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소서[我心未寧 乞師與安]”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너를 편안케 해주리라[將心來與汝安]”

“마음을 찾아도 끝내 얻을 수 없습니다[覓心了不可得]”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我與汝安心竟]”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대사는 끝내 소림사(小林寺)를 떠나지 않았다. 황제는 더욱 더 흠모를 하면서 예물을 하사했으나 대사는 굳게 사양하면서 세 번이나 돌려보냈다. 그러나 황제의 뜻이 더욱 단호해지자 대사는 그때서야 비로소 받았다.

다시 9년이 지나자, 대사는 서쪽의 천축으로 돌아가고자 해서 제자[門人]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제가 본 바로는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는 것으로 도의 작용을 삼는 것입니다[如我所見 不執文字不離文字而爲道用]”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汝得吾皮]”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지금 이해한 바로는 아난(阿難)이 아촉불국(阿閦佛國)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我今所解如慶喜見阿閦佛國 一見更不再見]”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汝得吾肉]”

도육(道育)이 말했다. “사대(四大)가 본래 공하고 오온(五蘊)이 있지 않으니, 제가 보기에는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四大本空五陰非有 而我見處無一法可得]”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汝得吾骨]”

마지막에 혜가가 절을 한 뒤에 제자리에 서 있자,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最後慧可禮拜後依位而立 師曰 汝得吾髓]

이에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혜가에게 부촉하고 가사(袈裟)를 전해서 법의 신표로 삼았으며,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당시 광통 율사(光統律師)와 보리유지 삼장(菩提流支三藏)은 대사가 현묘한 교화의 바람을 널리 떨치고 법의 비를 두루 뿌리자, 그들의 치우치고 옹색한 마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서, 앞 다투어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켜 자주 독약(毒藥)을 음식에 넣었다. 그 일이 여섯 차례에 이르렀을 때 이미 교화의 인연도 다하였고 법 전할 사람도 만났으므로, 더 이상 독약에서 벗어나지 않고 단정히 앉아서 열반하니, 웅이산(熊耳山)에 장사지내고 정림사(定林寺)에 탑을 세웠다.

그 뒤 3년 후에 위(魏)의 사신이 서역(西域)에 갔다 오다가 달마대사를 총령(葱嶺)에서 만났는데, 맨발 벗고, 손에는 신 한 짝을 들고 훌훌히 혼자 가고 있었다. 사신이 묻기를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하자, 대사가 대답하기를 ‘서천(西天)으로 간다. 그리고 그대의 임금은 벌써 세상을 뜨셨다’라고 하였다. 사신이 이 말을 듣고 아찔하여 부지런히 동으로 가서 국왕께 복명(復命)하니, 명제(明帝)는 이미 승하하고 효장제(孝莊帝)가 등극해 있었다. 사명을 받들어 위의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황제가 무덤을 열어 보게 했는데, 빈 관에 신 한 짝만이 남아 있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전등록 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28조 보리달마」 p154~p183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음>

저서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이종입二種入(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 『심경송(心經頌)』 · 『파상론(破相論)』 · 『안심법문(安心法門)』 · 『오성론(悟性論)』 · 『혈맥론(血脈論)』 등 여섯 법문(法門)으로 이루어진 『소실육문(小室六門)』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때 간행한 『선문촬요(禪門撮要)』 가운데 『혈맥론』 · 『관심론(觀心論)』 · 『사행론(四行論)』 등이 들어 있다. 『파상론(破相論)』과 『관심론(觀心論)』은 중복되며 달마대사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북종 신수(神秀)의 저술로 보고 있다.

달마의 전기에 관한 자료는 『낙양가람기(落陽伽藍記)』(574년 성립),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담림(曇林)의 「서문」(600년경), 『당고승전唐高僧傳(속고승전續高僧傳)』(649년), 『전법보기(傳法寶紀)』(712년경),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713년),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년경), 『보림전(寶林傳)』(801년), 『조당집(祖堂集)』(952년) 등이 있다.
『보림전』의 기록을 근거로 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년)과 『전법정종기(傳法正宗紀)』(1061년)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최징(最澄)의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證佛法相承血脈譜)』(819년)와 신회(神會)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磨南宗定是非論)』(732년) · 『문답잡징의(問答雜徵義)』, 종밀(宗密)의 『선문사자승습도(禪門師資承襲圖)』 · 『도서(都序)』 ·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 등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혈맥론(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대화 ;
[참고 ❶] 『조당집(祖堂集) 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43~147.
그때에 달마 화상이 바다를 지나 동쪽으로 온 지 3년이 지났다. 양(梁)의 보통(普通) 8년 정미(丁未) 9월 21일에 광주(廣州)에 이르자, 자사(刺史)인 소앙(蕭昂)이 마중을 나왔다가 10월 1일에 무제(武帝)에게 알렸는데, 이듬해 정월 보름에 이르러서야 왕이 몸소 연(輦 : 천자가 타는 수레)을 타고 나와 대사를 청해 대궐로 모셔다가 공양을 올렸다.

그때에 지공(志公) 화상이 고좌사(高座寺)의 수축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주지 영관(靈觀)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이 영관靈觀이라는데 진짜 영관靈觀인가?[汝名靈觀 實靈觀不]”
주지가 대답했다. “예, 그저 화상께서 지시해 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唯願和尙指示唯願和尙指示]”
지공이 말했다. “서천에서 대승 보살이 이 땅에 들어오실 것이다. 만약 그대가 믿지 못하겠거든 나의 참언을 들어라[從西天有大乘菩薩而入此國 汝若不信 聽吾讖曰]”

(중략)

그때 무제가 물었다. “어떤 것이 성제(聖諦)의 제일의(第一義)입니까?[如何是聖諦第一義]”
달마 조사가 대답했다. “텅 비어 성(聖)이랄 것이 없습니다[廓然無聖]”

무제가 물었다. “짐을 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입니까?[對朕者誰]”
조사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不識]”

무제가 다시 물었다. “짐이 즉위한 지 14년 동안 사람을 제도하고 절을 짓고 경을 쓰고 불상을 조성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朕自登九五已來 度人造寺 寫經造像 有何功德]”
조사가 대답했다. “공덕이 없습니다[無功德]”

무제가 말했다.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何以無功德]”
조사가 말했다. “이는 인천(人天)의 작은 과보요, 유루(有漏)의 원인이어서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선인(善因)이 있다고 하나 실상(實相)이 아닙니다[此是人天小果 有漏之因 如影隨形 雖有善因 非是實相]”

무제가 물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如何是實功德]”
조사가 말했다. “청정한 지혜는 오묘하고 원만圓滿해서 본체가 절로 공적하니, 이런 공덕은 세상일로는 구할 수 없습니다[淨智妙圓 體自空寂 如是功德 不以世求]”

무제는 달마 조사의 말뜻을 알지 못하여 얼굴을 붉힌 채 말이 없었다. 달마는 그 해 10월 19일에 인연이 맞지 않는 줄을 스스로 알고 몰래 강을 건너 북쪽의 위(魏)나라로 들어갔다.

지공(志公)이 특별히 무제에게 와서 물었다. “듣건대 서역에서 스님이 왔다는데,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我聞西天僧至 今在何所]”
무제가 대답했다. “어제 강을 건너 위나라로 갔소[昨日送過江向魏]”
지공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셨고, 만나도 만나지 못하셨습니다[陛下見之不見 逢之不逢]”

양무제가 물었다. “그게 누구였던가요?[此是何人]”
지공이 대답했다. “그는 부처의 심인(心印)을 전하는 관음대사(觀音大士)이십니다[此是傳佛心印觀音大士]”
무제가 이내 한탄하면서 말했다. “보아도 보지 못했고, 만나도 만나지 못했도다[見之不見 逢之不逢]”

그리고는 곧 중사(中使) 조광문(趙光文)을 그곳으로 보내 모셔 오게 하였는데, 이에 지공이 말했다. “조광문뿐 아니라 온 나라 사람이 다 가서 청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非但趙光文一人 闔國取亦不迴]”

[참고 ❷] 『전등록 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28조 보리달마」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
여러 자료를 토대로 달마의 전기를 살펴보면, 달마의 출신지는 파사국(波斯國) · 향지국(香至國) · 바라문국(婆羅門國) · 남천축국(南天竺國) 등이라고 하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남천축국 향지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한다.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을 받고 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건너가 3년이 지나서야,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광주 자사가 예를 갖추어 영접하였으며, 표(表)를 올려 무제에게 아뢰자 무제가 표를 읽고는 사신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10월 1일에 금릉(金陵)에 이르렀다.

무제가 대사에게 묻기를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스님을 득도시키기를 셀 수 없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습니까?[朕卽位已來 造寺寫經度僧不可勝紀 有何功德]”
대사가 대답했다.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並無功德]”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何以無功德]”
“이는 다만 인간과 하늘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하나 실답지가 않습니다[此但人天小果有漏之因 如影隨形雖有非實]”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오?[如何是眞功德]”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해서 체(體)가 스스로 공적(空寂)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淨智妙圓體自空寂 如是功德不以世求]”

무제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성제(聖諦)의 제일가는 뜻[第一義]이오?[如何是聖諦第一義]”
“확연(廓然)해서 거룩함[聖]도 없습니다[廓然無聖]”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對朕者誰]”
“모르겠습니다[不識]“
무제가 알아듣지 못하자, 대사는 근기가 계합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 후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는데, 석굴에서 면벽(面壁)하고 앉아서는 종일토록 침묵을 지키니, 아무도 그 연유를 아는 이가 없어서 그를 일러 벽을 보는 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하였다.

*소림(少林) : 중국 하남성(河南省) 숭산 소실봉(嵩山少室峰) 아래에 있는 소림사(少林寺)를 말한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達摩大師)가 9년 동안 이 절 석굴속에서 면벽(面壁)하고 있다가,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하여 중국에 선법(禪法)이 퍼지게 되었다.
*면벽관심(面壁觀心) ; 벽(壁)을 향하여[面] 앉아 자신의 마음[心]을 관[觀]하여 그 본성을 밝히는 것. 좌선(坐禪)의 다른 이름.
*면벽(面壁) ; 좌선(坐禪)의 다른 이름. 벽을 향하여 좌선하는 것.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양 무제(武帝)를 만나 문답하였으나 무제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마침내 물러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의 낙양으로 가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을 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말하지 않고 벽을 향하여 좌선하기 9년을 지냈다. 이를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뒤부터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벽을 향하여 좌선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면벽은 단순히 좌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론 등 문자에 의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관하여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수행법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강사(講師) ; 경론(經論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經과 그 가르침을 주석·연구·정리·요약한 논論)을 가르치는 스님.
*율사(律師) ; 계(戒)와 율(律)에 능통한 스님. 일반적으로 계행이 청정한 수행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 참선법(參禪法).

 

(6-1)내가나를깨닫는공부(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2분26초).mp3
2.23MB

 

[참고 ❶]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2분26초)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붓다(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이 말이여.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불법(佛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흐뭇해 할 줄 알고, 자기 뜻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은 근심 걱정하고 성을 내고 하는, 바로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도 잡히지 아니하면서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듣고, 온갖 일을 하는 그 신기하고도 묘한 대관절 그놈, 그놈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53분35초~55분59초)

 

[참고 ❷] 『만공법어(滿空法語)』 「법훈(法訓)」 (개정 증보판. 2024년 11월 30일 발행 | 불광출판사) p299~314.

<나를 찾아야 할 필요와 나>

 

1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나니라.

2 ‘나’라는 의의가 절대 자유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自在)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임의(任意)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

3 망아(妄我)는 진아(眞我)의 소생(所生)인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은 곧 사심(邪心)이요, 진아(眞我)는 정심(正心)으로 시종(始終)도 없고 존망(存亡)도 없고 형상도 없지만 오히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니라.

4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 바에야 육축(六畜)으로 동류(同類)되는 인간이라 아니할 수 없나니, 짐승이 본능적으로 식색(食色)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제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다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면목(自己面目)을 모른다면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윤회하는 한 분자(分子)에 지나지 아니하나니라.

5 동업중생(同業衆生)이 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전로(前路 앞길)가 망망하게 되나니라.

6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생사(生死)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이다.

7 인생은 말 꼬리에 매달려 울며 뒹굴려 가는 죄수처럼 업(業)의 사슬에 끌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의 길을 영겁(永劫)으로 순력(巡歷)하고 있는데, 그 쇠사슬은 자기의 지혜 칼이라야 능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되나니라.

8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받는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이 일(나를 찾는 일)을 알지 못하면 기실 사람의 정신은 잃어버린 인간이니라.

9 석가세존이 탄생 시에 산석(產席)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하신 그 ‘아(我)’도 ‘나’를 가리킨 것이니라.

10 각자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나니라.

11 일체가 다 ‘나(부처)’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하나의 털끝만 한 정력(精力)이라도 나를 찾는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소모하는 것은 나의 손실이니라.

12 누구든지 육신(肉身) · 업신(業身) · 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13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 그대로가 곧 생사(生死) 없는 자리이니라.

14 생사 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의 풀의 정(精)이라도 전우주(全宇宙)의 무장(武裝)으로도 해체시킬 수 없나니라.

15 세상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문구(文句)는 있으나 업식으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나니라.

16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쯤은 자유자재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17 보고 들어서 얻는 지식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니라.

18 나는 무념처(無念處)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념처에 일체유(一切有)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9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구경(究竟)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결국 내가 나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하나니라.

 

 

<나를 찾는 법 - 참선법>

 

1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정로(正路)를 가르쳐 주나니라.

2 수도(修道 참선)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3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생생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든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4 선방(禪房)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5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8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了達)된 사람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상속(相續) 받은 분이니라.

20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22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요, 대(對)가 끊어진 참구법(參究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25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無念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30 참선을 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억생(億生) 억겁(億劫)에 지은 갖은 악(惡),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때는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32 참선법은 상래(上來)로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 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무수도인(無數道人)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1천7백 공안(公案)이나 있는데, 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 곧 “만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일(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33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37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 주지 못하나니라.

40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

51 참선은 모든 업장(業障)과 습기(習氣)를 녹이는 도가니[甕]니라.

73 물질은 각자 그 이름에 따르는 한 가지 책임을 할 뿐인데, 정신은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萬有)의 근본[바탕]이라, 어디서 무슨 일에나 절대 능력자이니, 이 정신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萬能)의 인(人)이 되나니라.

76 도인(道人)은 도인이라는 대명사(代名詞)에 지나지 않는 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상(名相)이 생기기 이전 소식을 증득(證得)하여, 도인이라는 우상(偶像)도 여의고 계(戒)니 수행이니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 독립적 인간이 되어 육도(六道)에 순력(巡歷)하면서 고(苦)를 면하게 되나니라.







------------------(2)

*진여자성(眞如自性)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眞如 참·진리·진실·본성·본질·부처 진/같을 여) ; [산스크리트어(범어)] tathatā. 진실(眞實)하여 허망하지 않고 변이(變易)가 없어 그대로임[如]. 진(眞)이란 진실을 말하니 허망함이 없음을 뜻하고, 여(如)는 그 자성에 변이가 없어 항상(恒常) 그러하다[如]는 뜻이다.
여실(如實) · 법계(法界) · 법성(法性) · 법주(法住) · 실제(實際) · 실성(實性) · 실상(實相) · 여래장(如來藏) · 이생성(離生性) · 법신(法身) · 불성(佛性) ·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 여래(如來) · 열반(涅槃) · 일심(一心) · 일여(一如) · 원성실성(圓成實性) · 중실리심(中實理心) · 부사의계(不思議界)의 뜻과도 통한다.

[참고 ❶] 『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佛說除蓋障菩薩所問)』 제10권. (宋 法護 等譯)
除蓋障菩薩白佛言 何名眞如
佛言 善男子 此法唯內所證 非文字語言而能表示 何以故 此法出過諸文字故 離諸言說故 超越一切語言境界 出於言道離諸戲論 離作非作無動無靜 離諸尋伺 是不思議境界 無相非無相而悉遠離出諸相境 超諸凡境 出凡夫行 過諸魔境 超越一切煩惱境界 離諸識境 安處無住最上寂靜聖智境界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것을 진여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법은 오직 안으로 증득한 바여서 문자나 언어로는 표시할 수 없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이 법은 모든 문자를 벗어나고, 모든 언어를 떠났기 때문이니라. 일체 언어의 경계를 초월하고 언어의 길을 벗어나 모든 희론(戱論)을 없애며, 조작과 조작 아님을 떠나서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고, 모든 머트러운[尋]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떠난 이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이며, 형상이 없는가 하면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형상의 경계를 멀리 떠나며, 모든 범부의 경계를 초월하고 범부의 행을 벗어나고 마군의 경계를 초월하며, 일체 번뇌의 경계를 초월하고 모든 의식의 경계를 떠나서 그 머묾이 없는 최상의 적정(寂靜)인 성스러운 지혜의 경계이니라.

是故此法唯內所證 是卽無垢無染 絜白淸淨 最上最勝第一無比 常住堅固究竟無壞之法 如來出世 若不出世 是法常住

그러므로 이 법은 오직 안으로 증득한 바여서, 이것은 바로 티끌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결백하고 맑고 깨끗한 것이며, 최상이고 최승이자 제일이며 비할 바도 없으며, 항상 머물러 견고하여 결코 부서짐이 없는 법이니,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거나 세간에 출현하지 않거나 간에 이 법은 상주(常住)하느니라.

善男子 菩薩爲求此法 歷百千種難行苦行 故得是法 得是法已 令諸有情悉住此法 善男子 故說此法名爲眞如 說名實際 說名一切智 說名一切種智 說名不思議界 說名不二界

선남자여, 보살이 이 법을 구하기 위해 백천 가지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여 이 법을 얻었으며, 이 법을 얻고 나서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다 이 법에 머물게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 때문에 이 법을 이름하되 진여(眞如)라 하고 실제(實際)라 하며, 일체지(一切智)라 하고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며, 부사의한 경계[不思議界]라 하며, 두 가지가 아닌 경계[不二界]라 하느니라”

[참고 ❷] 『성유식론』 제2권. (호법 등 지음 護法等菩薩造 | 현장 한역)
眞如亦是 假施設名 遮撥爲無 故說爲有 遮執爲有 故說爲空 勿謂虛幻 故說爲實 理非妄倒 故名眞如

진여(眞如) 역시 가정적으로 명칭을 시설(施設)한 것이다. 무(無)에 기욺을 막기 위해 유(有)를, 유(有)의 집착을 막기 위해 공(空)을 설하니, 허환(虛幻)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실(實)을 설한다. 이(理)에 그릇되게 뒤집힘이 없으니 진여(眞如)라고 한다.

[참고 ❸] 『성유식론』 제9권. (호법 등 지음 護法等菩薩造 | 현장 한역)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眞謂眞實 顯非虛妄 如謂如常 表無變易 謂此眞實於一切位 常如其性 故曰眞如 卽是湛然 不虛妄義 亦言顯此 復有多名 謂名法界及實際等

이 제법의 승의(勝義)가 곧 진여이다. 진(眞)이란 진실을 말하니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낸다. 여(如)란 여여하게 상주함[如常]을 말하니 변이(變易)함이 없음을 나타낸다. 즉 이것이 진실하여 모든 위(位)에서 변함없고 여여함[常如]이 그 자성이기에 진여라고 한다. 곧 흔들림 없이 그대로여서 허망의 뜻이 아니니, 이 말 또한 진여를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많은 명칭이 있으니, 이른바 법계(法界) 및 실제(實際) 등으로 이름한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明星]이 뜰 무렵 별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하고, 성도회(成道會) · 성도절(成道節) · 성도재일(成道齋日) 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샛별 ; 새벽별. 명성(明星).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새벽별, 태백성(太白星), 계명성(啓明星), 장경성(長庚星) 등이라고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참고 ❶] 『선문염송 · 염송설화』 (혜심 · 각운 지음 | 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1권 3칙 ‘오도(悟道)’
<염송설화(拈頌說話)> 大慧云 釋迦老子正覺山前 從定而起 因見明星忽然悟道 信知時節若至 其理自彰 但記悟道時節因緣而已 則世尊悟處 不在明星上 香嚴悟處 不在擊竹邊

대혜가 이르기를 “석가 노자께서 정각산 앞에서 선정에서 일어나 샛별을 보시는 순간 홀연히 도를 깨달으셨으니, 이는 시절이 이르면 그 이치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인데, 다만 도를 깨달은 시절과 인연을 기록했을 뿐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세존의 깨달음은 샛별에 있지 않고 향엄의 깨달음은 대나무를 때리는 데 있지 않다.

[참고 ❷] 송담스님(No.405)—1989년(기사년) 성도재 법회(90.01.04)

 

(10)명성-1(405:89기사년 성도재:15분19초).mp3
7.01MB


(1)---------------(15분19초)

밤마다 별은 반짝거립니다. 구름이 꽉 낀 날은 안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밤이면 언제나 별은 반짝거립니다. 삼천년이 지난 오늘도 역시 밤에는 별이 빛납니다. 우리도 빛나는 번쩍거리는 그 별을 보고, 삼천년 동안에 아니 수억만 년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별을 봅니다. 번쩍이는 별을 보지마는 별을 보았다고 해서 다 확철대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 별빛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어.

해마다 제방(諸方)에서는 섣달 초하루부터 납월팔일(臘月八日) 새벽까지 만 7일간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부처님께서 납월팔일에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기 때문에 그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또 그 뜻깊은 날을 우리가 그냥 범연(泛然)히 지낼 수가 없어. 그래서 선방에서는 용맹정진을 해. 7일 동안을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완전히 앉은 채 그렇게 용맹정진을 합니다.
   
왜 부처님께서는 그 납월팔일 별을 보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왜 우리는 납월팔일 새벽 하늘의 별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밤마다 번쩍거리는 수없는 별을 보고도 왜 깨닫지를 못할까요?
‘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별을 보고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별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별을 보고 깨달아?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아?
“바로 그 별을 보는 것이다” 이 간단한 한 말씀 속에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으신 바로 그 도리를 단적(端的)으로 설파(說破)하신 것입니다.


천척사륜직하수(千尺絲綸直下垂)한데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하야  만선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척사륜직하수(千尺絲綸直下垂), 천자나 되는 긴 낚시줄을 똑바로 드리우니,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요, 그 낚시가 물에 떨어지자마자 한 물결이 일어나니 일만 물결이 따라서 일어나더라.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 밤은 고요하고 물이 차와서 고기가 그 낚시를 물지를 않아.
만선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로구나. 가득한 배에는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더라.

우리 부처님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셔서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셔가지고,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어. 무량 중생을 제도하셨다.
부처님께서 확철대오하신 그 법을 가섭 존자에게 전하시고, 가섭 존자는 아란 존자, 아란 존자는 상나화수 이렇게 해서 28대를 달마 조사까지 전하고, 달마 조사가 중국으로 오셔서 6조 스님까지, 6조 스님 이후로  5종 가풍이 벌어져서 전강 조실 스님까지 77대를 전해 내려왔습니다.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고, 설할라야 설할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는 이 도리를 깨닫고 또 그것을 전하고 받아서 오늘에 이르렀다.
꼭 깨달을 것이 있고, 꼭 전할 것이 있고 또 전해 받을 것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 됩니다. ‘깨달을 것이 있고, 전할 것이 있고, 받을 것이 있다’고 그렇게 그 말을 따라서 그렇게 인식하고, 또 자기도 깨달으려고 생각을 하고.

이러한 말에 떨어져서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은—마치 배를 타고 가다가 그 갑판 위에서 칼을 가지고 무엇을 하다가 그 칼을 잘못 놓쳐가지고 바닷물에 빠트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 뱃전에서 칼을 잃어 버렸다’해 가지고, 나중에 그 잃어버린 칼을 찾기 위해서 그 장소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 뱃전을 쪼아 가지고 표(標)를 해 놨습니다.
언제라도 그 뱃전 그 자리에서 떨구었으니까, 그 뱃전에다가 표를 해 놔야 그 뱃전 밑으로 내려가면은 그 밑바닥에 칼이 있을 것이다 이거거든.

또 어떤 사람은 산에서 어느 나무 등걸 밑에서 토끼를 한 마리 보았는데, 그 토끼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나무 등걸에서 토끼를 발견했다가 놓쳤으니까, 항상 그 나무 등걸에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토끼가 달아났으니까 여기 가 있으면 그 토끼가 오려니.

그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칼을 잃어버리고 뱃전에다가 표를 한 사람이나, 토끼를 놓치고서 나무 등걸 옆에서 토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퍽 어리석고 바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시겠지만,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으셨으니까 행여나 나도 납월팔일 날 새벽에 하늘에 뜬 그 별을 보면 혹 깨달을란가?’ 이리 생각하고 추운데 새벽에 나가가지고 동쪽에 가장 크게 빛나는 별을 새벽부터 쳐다보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바로 별을 보는 것이니라. 보는 놈이니라”

깨달음이 별로부터 오겠습니까?

저 먼산에 연기가 나는 것을 보면 ‘거기에 불이 났구나’ 뻘건 불은 보이지 않지만 하얀 연기만 일어난 것만 보고도 ‘아! 저기에 벌써 불이 났구나’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담 밖에 담 너머로 뿔만 지나간 것을 보아도 ‘아! 저 담 밖에 소가 지나갔구나’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소 몸뚱이는 담에 가리어서 보이지 않고 뿔 끄터리만 보여도 담 밖에 소 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말이여. 영리한 사람은 척! 연기만 보고 불인 줄 알고, 뿔만 보고도 소인 줄 알아.

어리석은 사람은 연기를 보고 불인 줄을 모르고, 그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저것이 무엇인가? 뿔 끄터리를 보고 벌써 소인 줄 알아야 할 텐데, 저것이 뾰족한 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말인가? 개인가? 사람인가? 지게인가? 이러쿵저러쿵 따진다 말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여. 척! 보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8분46초~24분5초)


(11)명성-2(405:89기사년 성도재:5분13초).mp3
2.39MB


(2)---------------(5분13초)

과거에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고 확철대오를 하셨고, 또 어떤 도인은 복숭화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비로 땅을 쓸다가 돌이 와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도인은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시장에서 장꾼들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했다 그말이여.

어찌 하필 부처님처럼 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여.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비로자나 법신(法身)의 체(體)고, 부는 바람 소리, 흐르는 물소리, 개 짖는 소리, 차 지나가는 소리, 일체가 다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설법(說法)이여.
그러니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 두두물물 삼라만상이 다 우리가 자아를 깨달을 수 있는 때요, 곳이다 그말이여.

언제 어디서 무엇을 보다가, 무엇을 듣다가 깨달을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어떠한 중대한 뉴스를 방송을 한다 할 때, 시간을 잘 모를 때에는 항상 다이얼을 맞춰서 딱 놔두고 기다리듯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깨달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화두를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야 한다 그말이여.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한 경지로 나아가야 그 언젠가 탁!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놓쳐 버리고 사량분별에 떨어진다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는 데에 끄달린다든지, 귀로 무엇을 듣는데 끄달리고 있는 한은 그러한 경지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항상 화두를 잡드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정진이여.
경전도 볼 것이 아니고, 어록도 볼 것이 아니고, 일체처 일체시가 행주좌와 어묵동정 사위의(四威儀)에서 화두만 성성적적(惺惺寂寂) 하게 잡드리해 갈 뿐이여.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똥을 눌 때도 그렇고, 오줌을 눌 때도 그러고, 앉아서도 그러고 서서도 그러고.

이렇게 잡드리해 가지고 안 되는 법이 없어. 고조사(古祖師)들이 ‘그렇게 잡드리해 가지고 안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아주...

부처님께서는 ‘무엇 무엇이 안 하면 내가 어쩌리라’고 함부로 그러한 막담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고인(古人)네는 우리 후인(後人)들을 위해서, 그렇게도 무서운 그러한 맹세를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36분35초~41분48초)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삼라만상(森羅萬象)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
*사바세계(娑婆世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sahā-loka-dhātu.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현실세계. 사바(산스크리트어 sahā)란 사하(沙訶) · 사가(娑呵) · 삭하(索訶)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에 안주하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번뇌, 고뇌를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뜻에서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이라고 한다. 사바세계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영토이다.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이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0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❶]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참고 ❷]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德異本) 「2. 공덕과 정토를 밝히다[釋功德淨土]」에서.
公曰 弟子聞達磨初化梁武帝 帝問云 朕一生造寺供僧 布施設齋 有何功德 達磨言 實無功德 弟子未達此理 願和尙爲說
師曰 實無功德 勿疑先聖之言 武帝心邪 不知正法 造寺供養 布施設齋 名爲求福 不可將福便爲功德 功德在法身中 不在修福

자사(刺史) 위공(韋公)이 말했다. ‘제자가 듣기에 달마대사께서 처음 양무제를 교화할 때 황제가 「짐은 평생 절을 짓고 스님을 공양하며 보시를 하고 재를 베풀었는데 어떠한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달마대사께서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제자는 이 이치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화상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 옛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무제는 마음이 치우쳐 정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절을 짓고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며 재를 베풀어 행한 것은 복(福)을 구했다고 하는 것이니 복이 공덕(功德)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덕은 법신(法身)에 있지 복을 닦는 데 있지 않습니다.

師又曰 見性是功 平等是德 念念無滯 常見本性眞實妙用 名爲功德 內心謙下是功 外行於禮是德 自性建立萬法是功 心體離念是德 不離自性是功 應用無染是德 若覓功德法身 但依此作 是眞功德
若修功德之人 心卽不輕 常行普敬 心常輕人 吾我不斷 卽自無功 自性虛妄不實 卽自無德 爲吾我自大 常輕一切故

대사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견성(見性)이 공(功)이요 평등(平等)이 덕(德)이니, 생각 생각에 막힘이 없이 항상 본성품의 진실하고 묘한 작용[眞實妙用] 보는 것을 공덕이라 합니다. 안으로 마음이 겸양하여 낮추면 이것이 공이요 밖으로 예(禮)를 행하면 이것이 덕이며, 자신의 참성품[自性]이 만법을 건립하는 것이 공이요 마음의 본바탕[心體]이 생각을 여읜 것[離念]이 바로 덕이며, 자성(自性)을 여의지 않음이 공이요 사물에 응해 쓰되 물들지 않음이 덕입니다. 만약 공덕의 법신을 찾으려면 다맛 이에 의하여 공덕을 지어야 참된 공덕입니다.
공덕을 닦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이 가볍지 않아 항상 널리 공경을 행합니다. 마음이 항상 남을 가벼이 여기고 나를 내세우는 생각을 끊지 않으면 스스로 공이 없는 것이고, 자심이 허망하여 진실하지 못하면 스스로 덕이 없는 것이니, 이는 나를 내세우는 생각이 스스로 커져서 항상 일체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善知識 念念無間是功 心行平直是德 自修性是功 自修身是德 善知識 功德須自性內見 不是布施供養之所求也 是以福德與功德別 武帝不識眞理 非我祖師有過

선지식이여, 생각 생각 끊임이 없는 것이 공이요, 마음을 평등하고 곧게 쓰는 것이 덕이며,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덕입니다.
선지식이여, 공덕은 모름지기 자성(自性) 안에서 보는 것이요, 보시나 공양만으로 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복덕(福德)과 공덕(功德)은 다른 것이니, 무제가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뿐 우리 조사에게 허물이 있지 않습니다.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布施)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主].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āna-pati)이라고도 함.
*‘부처님 금(金)을 입히는 데’ ; 개금(改金). 개금불사(改金佛事).
*개금(改金 고치다·다시 개/금 금) ; 불상(佛像)에 새로 금칠을 하는 것.
*개금불사(改金佛事 고치다·다시 개/금 금/부처님 불/일 사) ; 불상(佛像)에 새로 금칠을 하는 것과 그때 행하는 의식.
 *보시(布施) : [산스크리트어] dāna. 음을 따라 단나(檀那) · 다나(柁那) · 단(檀) 등으로 음사(音寫)한다. 물질 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05~106.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 한 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참고 ❷] 『백유경(百喩經)』 제1권. (존자尊者 승가사나僧伽斯那 찬집撰集 | 소제蕭齊 천축삼장天竺三藏 구나비지求那毘地 한역漢譯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2. 어리석은 사람이 소젖을 모은 비유(愚人集牛乳喩)」
昔有愚人將會賓客 欲集牛乳以擬供設 而作是念 我今若豫於日日中犛取牛乳 牛乳漸多卒無安處 或復酢敗 不如卽就牛腹盛之 待臨會時當頓犛取 作是念已 便捉牸牛母子 各繫異處

옛날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장차 손님을 청하여 소의 젖을 모아 대접하려고 자리를 마련하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만약 날마다 미리 소젖을 짜두면 소젖은 점점 많아져 마침내 둘 곳이 없게 될 것이며, 또한 맛도 변해 못쓰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기보다는 소젖을 소 뱃속에 모아두었다가 모임이 있을 때쯤에 한꺼번에 짜내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곧 어미소와 새끼를 따로 매어 두었다.

却後一月 爾乃設會迎置賓客 方牽牛來欲犛取乳 而此牛乳卽乾無有 時爲衆賓或瞋或笑

한 달이 지난 후 잔치를 마련하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소를 끌고 와서 젖을 짜려 하였으나 그 소의 젖은 말라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거기 모인 손님들은 성을 내거나 혹은 비웃었다.

愚人亦爾 欲修布施 方言待我大有之時 然後頓施 未及聚頃 或爲縣官水火盜賊之所侵奪 或卒命終不及時施 彼亦如是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보시(布施)를 하려다가 ‘내게 재물이 많이 쌓이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보시하리라’고 생각하지만, 모으기도 전에 관청이나 수재(水災)나 화재(火災)나 혹은 도적에게 빼앗기거나 또는 갑자기 목숨을 마치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보시할 수 없게 된다. 저들 또한 이와 같다.

*무루복(無漏福 없을 무/새다·번뇌 루/복 복) ; 번뇌[漏]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양구(供養具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갖추다·차림·그릇 구) ; 부처님이나 보살님께 바치는 음식물 · 향 · 꽃 등의 물건, 또는 그 물건을 바칠 때 사용하는 기구.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범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 『선가귀감(禪家龜鑑)』 전자책(PDF) 다운로드.
>>> 『선가귀감(禪家龜鑑)』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몽산법어(蒙山法語)』 전자책(PDF) 다운로드.
>>>『몽산법어(蒙山法語)』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ㅎ/한물건(一物)2026. 10. 19. 08:16

일물(No.175)—(게송)雲起南山北山雨~ | 물은 액체 고체 기체에 따라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습성(濕性), 젖은 성품 |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 이름을 진여 · 자성 · 본성 · 참나 · 밑 없는 배 · 그림자 없는 나무 등등이라 한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다.


*일물(一物) : 한 물건[一物]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 한 모양[一相]도 같은 뜻.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2.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 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는가?」 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 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 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진여(眞如 참·진리·진실·본성·본질·부처 진/같을 여)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眞如 참·진리·진실·본성·본질·부처 진/같을 여) ; [산스크리트어(범어)] tathatā. 진실(眞實)하여 허망하지 않고 변이(變易)가 없어 그대로임[如]. 진(眞)이란 진실을 말하니 허망함이 없음을 뜻하고, 여(如)는 그 자성에 변이가 없어 항상(恒常) 그러하다[如]는 뜻이다.
여실(如實) · 법계(法界) · 법성(法性) · 법주(法住) · 실제(實際) · 실성(實性) · 실상(實相) · 여래장(如來藏) · 이생성(離生性) · 법신(法身) · 불성(佛性) ·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 여래(如來) · 열반(涅槃) · 일심(一心) · 일여(一如) · 원성실성(圓成實性) · 중실리심(中實理心) · 부사의계(不思議界)의 뜻과도 통한다.

(7분 45초)

한물건(一物)(175:1982년 7월 첫째 일요법회:7분45초).mp3
7.10MB



[법문] 송담스님(No.175)—1982년 7월 첫째 일요법회. (용175) (일물)

운기남산북산우(雲起南山北山雨)허고  여명마자기다반(驢名馬字幾多般)고
나무~아미타불~
청간호묘무정수(請看浩渺無情水)하라  기처수방기처원(幾處隨方幾處圓)고
나무~아미타불~

운기남산북산우(雲起南山北山雨)요. 구름이 남산에서 일어나는데 북산에 비가 와.
여명마자기다반(驢名馬字幾多般)고. 이것은 나귀다, 이것은 말이다, 이것은 소다, 이것은 돼지다, 그러한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낱낱이 다른 이름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이 말이여.

청간호묘무정수(請看浩渺無情水)하라. 청컨댄 저 넓고도 넓고 넓은 저 무정(無情)한 저 물을 보라 그 말이여.
기처수방기처원(幾處隨方幾處圓)고. 어느 곳에서는 모나고, 어느 곳에서는 둥근가?

물이라 하는 것은 모난 그릇에 담으면 모나게 담겨지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담아지고, 긴 그릇에 담으면 길게 담아지고, 깊은 그릇에 담으면 깊게 담아지고. 깊은 데를 만나면 밑바닥부터서 차츰차츰 차 올라가 가지고 가뜩차면은 넘고, 높은 데에 처하게 되면 나차운 데로 나차운 데를 향해서 계속 떨어져 흘러 내려가고. 추위를 만나면 얼고, 더위를 만나면 녹고, 뜨거운 것을 만나면 수증기가 되고, 알고 보면 본래 한 물인데 장소와 여건에 따라서 모냥도 변하고 움직임도 변합니다.

그렇지마는 그 본바탕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얼음이 얼었다 하더라도 분명 우리 눈으로 볼 때에는 고체가 되어 가지고 만져 보면은 찹지마는 차운 고체일 때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그것이 녹아서 물이 되어서 액체가 되어 있을 때에도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그것이 증기가 되어서 기체가 되어 있어도 변하지 않는 바가 있어.

그러면 그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습성(濕性)이라 하는 것이여. 습성! 젖은 성품.
습성은 액체일 때에도 그 습성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고, 고체인 얼음덩어리로 있을 때에도 젖은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수증기가 되어서 기체가 되어 있을 때도 그 습성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그 말이여. 남산에 구름이 일어날 때나 북산에서 비가 내릴 때, 그 습성에 있어서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한 바가 없다.


우리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육도(六途)를 돌고 돌아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사람으로 태어나 가지고 오늘 이 시간에 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 자리를 같이했습니다마는, 무량겁을 돌고 돌았지만 그 도는 가운데에 때로는 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말로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돼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범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나라에 하늘나라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옥에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는 지옥 중생이 되기도 했습니다마는,
그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이 이름을 진여(眞如)라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고, 본성(本性)이라 하고, ‘참나’라 하고, 또는 일물(一物)이라 하고, 때로는 밑 없는 배라 하고, 구멍 없는 퉁수라 하고, 그림자 없는 나무라 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처음~7분4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운기남산북산우(雲起南山北山雨)~’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야부도천 스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 대천계(大千界) · 대천세계(大千世界) · 삼천세계(三千世界) ·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 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 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 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 • 중천 • 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sahā-loka-dhātu.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현실세계. 사바(산스크리트어 sahā)란 사하(沙訶) · 사가(娑呵) · 삭하(索訶)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에 안주하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번뇌, 고뇌를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뜻에서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이라고 한다. 사바세계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영토이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 · 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 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진여(眞如 참·진리·진실·본성·본질·부처 진/같을 여) ; [산스크리트어(범어)] tathatā. 진실(眞實)하여 허망하지 않고 변이(變易)가 없어 그대로임[如]. 진(眞)이란 진실을 말하니 허망함이 없음을 뜻하고, 여(如)는 그 자성에 변이가 없어 항상(恒常) 그러하다[如]는 뜻이다.
여실(如實) · 법계(法界) · 법성(法性) · 법주(法住) · 실제(實際) · 실성(實性) · 실상(實相) · 여래장(如來藏) · 이생성(離生性) · 법신(法身) · 불성(佛性) ·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 여래(如來) · 열반(涅槃) · 일심(一心) · 일여(一如) · 원성실성(圓成實性) · 중실리심(中實理心) · 부사의계(不思議界)의 뜻과도 통한다.

[참고 ❶] 『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佛說除蓋障菩薩所問)』 제10권. (宋 法護 等譯)
除蓋障菩薩白佛言 何名眞如
佛言 善男子 此法唯內所證 非文字語言而能表示 何以故 此法出過諸文字故 離諸言說故 超越一切語言境界 出於言道離諸戲論 離作非作無動無靜 離諸尋伺 是不思議境界 無相非無相而悉遠離出諸相境 超諸凡境 出凡夫行 過諸魔境 超越一切煩惱境界 離諸識境 安處無住最上寂靜聖智境界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것을 진여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법은 오직 안으로 증득한 바여서 문자나 언어로는 표시할 수 없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이 법은 모든 문자를 벗어나고, 모든 언어를 떠났기 때문이니라. 일체 언어의 경계를 초월하고 언어의 길을 벗어나 모든 희론(戱論)을 없애며, 조작과 조작 아님을 떠나서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고, 모든 머트러운[尋]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떠난 이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이며, 형상이 없는가 하면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형상의 경계를 멀리 떠나며, 모든 범부의 경계를 초월하고 범부의 행을 벗어나고 마군의 경계를 초월하며, 일체 번뇌의 경계를 초월하고 모든 의식의 경계를 떠나서 그 머묾이 없는 최상의 적정(寂靜)인 성스러운 지혜의 경계이니라.

是故此法唯內所證 是卽無垢無染 絜白淸淨 最上最勝第一無比 常住堅固究竟無壞之法 如來出世 若不出世 是法常住

그러므로 이 법은 오직 안으로 증득한 바여서, 이것은 바로 티끌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결백하고 맑고 깨끗한 것이며, 최상이고 최승이자 제일이며 비할 바도 없으며, 항상 머물러 견고하여 결코 부서짐이 없는 법이니,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거나 세간에 출현하지 않거나 간에 이 법은 상주(常住)하느니라.

善男子 菩薩爲求此法 歷百千種難行苦行 故得是法 得是法已 令諸有情悉住此法 善男子 故說此法名爲眞如 說名實際 說名一切智 說名一切種智 說名不思議界 說名不二界

선남자여, 보살이 이 법을 구하기 위해 백천 가지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여 이 법을 얻었으며, 이 법을 얻고 나서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다 이 법에 머물게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 때문에 이 법을 이름하되 진여(眞如)라 하고 실제(實際)라 하며, 일체지(一切智)라 하고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며, 부사의한 경계[不思議界]라 하며, 두 가지가 아닌 경계[不二界]라 하느니라”

[참고 ❷] 『성유식론』 제2권. (호법 등 지음 護法等菩薩造 | 현장 한역 현장 한역)
眞如亦是 假施設名 遮撥爲無 故說爲有 遮執爲有 故說爲空 勿謂虛幻 故說爲實 理非妄倒 故名眞如

진여(眞如) 역시 가정적으로 명칭을 시설(施設)한 것이다. 무(無)에 기욺을 막기 위해 유(有)를, 유(有)의 집착을 막기 위해 공(空)을 설하니, 허환(虛幻)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실(實)을 설한다. 이(理)에 그릇되게 뒤집힘이 없으니 진여(眞如)라고 한다.

[참고 ❸] 『성유식론』 제9권. (호법 등 지음 護法等菩薩造 | 현장 한역 현장 한역)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眞謂眞實 顯非虛妄 如謂如常 表無變易 謂此眞實於一切位 常如其性 故曰眞如 卽是湛然 不虛妄義 亦言顯此 復有多名 謂名法界及實際等

이 제법의 승의(勝義)가 곧 진여이다. 진(眞)이란 진실을 말하니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낸다. 여(如)란 여여하게 상주함[如常]을 말하니 변이(變易)함이 없음을 나타낸다. 즉 이것이 진실하여 모든 위(位)에서 변함없고 여여함[常如]이 그 자성이기에 진여라고 한다. 곧 흔들림 없이 그대로여서 허망의 뜻이 아니니, 이 말 또한 진여를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많은 명칭이 있으니, 이른바 법계(法界) 및 실제(實際) 등으로 이름한다.

*일물(一物) : 한 물건[一物]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 한 모양[一相]도 같은 뜻.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2.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 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는가?」 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 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 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밑 없는 배 ; 무저선(無底船).
*무저선(無底船 없을 무/밑·바닥 저/배·선박 선) : 밑바닥이 없는 배.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영수(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불법(佛法 부처 불/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佛]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 『선가귀감(禪家龜鑑)』 전자책(PDF) 다운로드.
>>> 『선가귀감(禪家龜鑑)』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몽산법어(蒙山法語)』 전자책(PDF) 다운로드.
>>>『몽산법어(蒙山法語)』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