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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5.20 상기병(No.578)—數息觀 | 수식관이 차츰 발달한 것이 지금의 단전호흡 | 가슴이 답답할 때는 단전호흡을 반대로 | 화두를 단전에 두고 관(觀)하라.
  2. 2020.05.16 소소영령(No.220)—(게송)麒麟鸞鳳不成群 尺璧寸珠那入市 凜凜威光混太虛 天上人間總不知.
  3. 2020.05.06 사십이장경(No.593)—『사십이장경』 제27장 | 사견(邪見) 공견(空見)에 빠지지 말라 | 의심관(疑心觀) | 『사십이장경』 제18장.
  4. 2020.05.04 심원의마(心猿意馬) (No.593)—(게송)四時循環暖復寒 獼猴深戀六華村 耳聲眼色曾無暇 念念那知是死門.
  5. 2020.04.26 수식관(No.578)—不淨觀. 數息觀 | 수식관이 차츰 발달한 것이 지금의 단전호흡 | 가슴이 답답할 때는 단전호흡을 반대로 | 화두를 단전에다 두고 관(觀)하라.
  6. 2020.04.25 생사심(No.475)—(게송)此事本無生~ | 생사(生死) 문제 | 생사는 본래 없다 | 윤회의 근원인 생사심을 깨뜨릴라면 의단이 독로하게 화두를 들어라.
  7. 2020.04.22 소소영령(No.297)—(게송)因能生所所生能 能所俱忘生不生 老蚌吸乾鯨海水 珊瑚枝上月三更 | 법문 듣고, 참선해야만 생사 문제를 해결.
  8. 2020.04.12 선(禪)과 교(敎) (No.602)—『사십이장경』 | 최상승 법문에 대한 확실한 신념 | 마음·부처·중생 세 가지가 차별이 없다 | 내 마음에 부처를 찾는 방법이 '이뭣고?'
  9. 2020.04.09 실참실오(No.220)—마치 팔십 노인이 바람과 물을 거슬러 밑 없는 쇠배를 끌고 올라간 거와 같다 | (게송)到岸從來不用船~ | 촉목보리(觸目菩提).
  10. 2020.04.02 성주괴공(No.533)—'한 생각' 속에 생사가 있다. 그래서 그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면 한 생각 속에도 생사해탈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ㅅ/상기병2020. 5. 20. 13:14

상기병(No.578)—수식관(數息觀) | 수식관이 차츰 발달한 것이 지금의 단전호흡 | 전강 조실 스님 때부터서 단전호흡을 권하게 된 동기는 상기병을 미연에 방지하고, 걸리지 아니하면서 정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단전호흡을 설하시게 된 것 | 가슴이 답답할 때는 단전호흡을 반대로 | 상기병 예방, 화두를 단전에 두고 관(觀)하라.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20분 40초)

 

[법문] 송담스님(No.578)—96년(병자년) 동안거결제 법어(96.10.15) (용578)

 

호흡을 단전호흡을 하는데, 부처님 당시부터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하는, 참선 수행자가 그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행에 들어가는데 수식관이 대단히 요긴한 것인데.

 

어떻게 해서 부처님께서 수식관을 설하시게 되었느냐 하면은 비파사나(vipassanā)라고 신(身) · 수(受) · 심(心) · 법(法),

'이 몸뚱이[身]는 더러운 것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몸에 아홉 구멍으로부터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고 몸안은 피와 오줌과 고름과 똥이 가득차 있고, 머지않아서 인연이 다하면은 죽어서 썩어 문드러진다. 그런 이 몸뚱이는 하여간 더러운 똥 주머니다' 이러한 생각을 항상 그렇게 관(觀)하며.

 

밖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수(受),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눈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거나, 귀로 받아들이거나, 코나 혀로 받아들이거나, 몸뚱이로 받아들이거나, 생각으로 받아들이거나 밖에서 무엇만 받아들였다 하면은 그것이 결국은 차츰차츰 변해 가지고 고통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이다.

 

셋째에 가서는 우리의 마음[心]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하루에면 수천수만.... 일(一) 호흡지간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것이 모두 무상하다 그말이여.

아침에 먹었던 생각이 벌써 밤에는 딴 생각,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할려고 마음을 먹어도 금방 그 생각이 변해 버리고. 이것을 누구를 줄려고 마음먹었다 해도 돌아서면서 마음이 변해 가지고 줄 생각이 없어지고. 우리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시시때때로 변해서 무상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내 몸[身]과 받아들이는 것[受]과 우리의 마음[心]을 제외한 것, 모든 것이 바로 법(法)인데 그것을 '제법(諸法)이라, 모든 법이다' 그러거든.

모든 법은 무아(無我)다. '내'라고 하는 자성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몸은 더러운 것이요,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것이요, 우리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요, 그 밖에 모든 법은 다 무아 한 것이다.

 

그것을 제자들한테 설한 가운데에 유독(唯獨) 육체에 대한 집착심을 갖고 또 이성 간에 이쁘게 생긴 사람, 마음에 든 사람에 애착심을 가지고 그러니까,

일단은 '이 몸뚱이라 하는 것은 내 몸이나 다른 사람 몸이나 할 것 없이 다 똥 주머니요, 피고름 주머니요, 다 더러운 것이다'하는 부정관(不淨觀)을 가리켜서 그것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이 몸뚱이가 정말 싫어지고.

 

이 몸뚱이를 끌고다니는 자체가 이 몸뚱이를 먹여야 하고, 입혀야 하고, 이 몸뚱이를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하고 그래 봤자 결국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밖에는 안되고. 이 몸뚱이가 싫어지고 아주 원수같이 느껴져서 이를 마치 뱀을 목에다가 칭칭 감고 다니는 것처럼 이 몸뚱이가 싫어지게 되었다 그말이여.

 

그래서 녹장외도(鹿杖外道)한테 가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바리때하고, 요 입는 가사(袈裟)하고 밖에 없는데 이것을 당신한테 줄 테니 제발 자비로써 나를 좀 죽여 달라"고,

이래가지고 몽둥이로 쳐서, 맞아서 죽은 사람 또 목 매달아서 자살한 사람, 물에 빠져서 죽은 사람, 그래서 60명 가량이 한 여름에 죽었습니다.

 

포살(布薩) 날을 기해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기 위해서 대중 종을 쳐서 모여 놓고 보니 60명이 비었으니 "어떻게 대중이 이렇게 많이 줄었느냐?" 아란존자 보고 물으니까,

"그렇게 해서 부정관(不淨觀)을 하다가 이렇게 60명이 자살하고 녹장 비구한테 자원을 해 가지고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여쭈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렇다면은 수식관(數息觀)을 해라"

 

수식관이 차츰 발달한 것이 지금의 단전호흡(丹田呼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수식관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하니 내쉬고 '하나',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고 '둘',

이렇게 해서 열까지 세어 올라갔다가 열에서 그 다음에는 열하나로 가지 말고 아홉, 여덟, 일곱... 해서 까꾸로 해서 하나로 내려오고 해서 하루 종일 호흡을 세는 거여.

 

그것이 잘되면은 하나에서 스물까지 올라갔다가 열아홉, 열여덟 내려오고 그것이 잘되면 서른, 마흔 해서 백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도록,

그런 동안에 중간에 망상이 일어나 가지고 '몇까지 세었는가?' 잊어버리면 다시 다 없었던 걸로 하고 다시 하나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이렇게 하기를 몇 날 며칠을—한 달, 두 달, 한철 내 하다보면 그것이 차츰차츰 되어간다 그말이여.

 

사실 여러분도 한번 해 보실 만한 일인데, 초학자(初學者)들은 해 볼 만한 일인데,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것이 수식관인데, 지금 용화사에서 초학자에게 수식관부터 하라고 그렇게 간곡히 권(勸)은 하고 있지 않으나,

워낙 망상이 심하고 정진이 잘 안되고 건강도 안 좋고 그러면 수식관을 한번 자기가 몇까지 세었다가 또 내려올 수가 있는가. 그것을 자기가 얼마만큼 정신 집중력이 있고 되어가는 것을 시험 삼아 한번 해 보시길 바라는데.

 

전강 조실 스님 때부터서 단전호흡을 권하게 된 동기는 여러분께서도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으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첫 철에 너무 용을 쓰고 용기를 내서 의심을 하다가 결국은 상기(上氣)가 복받쳐 올라서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고 뒤통수가 툭 툭 터져서 곪아터지고, 목구멍으로부터서는 선지피가 막 쿨쿨 넘어오고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공부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니까, 직지사에서 제산 스님께서 "그렇게 내가 시킨 대로 안 하고 네 멋대로 해 가지고 병이 나면 다 내가 너를 공부를 잘못 가르켜 가지고 그랬다고 할 것 아니냐"

 

제산 스님께서는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을 관(觀)하라.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관(觀)해라' 그렇게 참선하는 법을 일러 주셨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조실 스님께서 『서장(書狀)』을 보나, 『선요(禪要)』를 보나 보면 그렇게 공부하라는 법은 없고.

 

조주 무자(無字)를 관하시는데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라는 것을 너무 용을 쓰고 하시다가 결국은 상기병(上氣病)이 나 가지고 그렇게 하시다, 결국은 그러한 병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계속해 가지고 깨달음을 얻으시긴 얻었지만,

그 상기병으로 해서 피가 거꾸로 넘어온 그걸로 해서 참 여러 해 동안을 고생을 하시고, 만행을 하신 그런 과거를 생각하셔서 우리 후학(後學)들에게는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용을 쓰고 그렇게 하지 말고 급(急)하고 완(緩)한 것을 득기중(得其中)이여. 그 중(中)을 얻어야 한다.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너무 용을 써서 되게 몰아붙인 것도, 과도하게 몰아진 것도 못쓰고, 그렇다고 해서 매카리 없이 멍하니 그렇게 해서도 안 되지마는.

그래서 그러한 병을 미연에 방지하고 그런 상기병과 같은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아니하면서 정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단전호흡을 설하시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단전호흡을 전강 조실 스님께서 처음으로 그것을 창안하신 것이 아니고, 임제종(臨濟宗) 종사(宗師)들은 단전호흡에 대한 언급을 별로 안 하셨지만, 육조 스님 밑에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라고 조동종(曹洞宗)의 개종이신, 그 조동종에서는 단전호흡을 정식으로 다 수좌(首座)들에게 권장을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그래서 특히 이 간화선(看話禪)을 하는,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서 수행해 나가는 간화선에 있어서 폐단이 너무 간절하게 한답시고 용을 쓰고 의심을 일으키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와 같은, 약으로는 낫을 수 없는 그런 무서운 장애에 부닥치게 되기 때문에 초학자일 때부터 단전호흡을 잘 기본으로 익혀 나가는데,

 

처음에는 준비 호흡.

준비 호흡은 가뜩 가슴으로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꾸었다가 입으로 '후-'하고 다 내뿜어. 또 가뜩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물렀다 내쉬고 하기를 두서너 번 그렇게 해 가지고 허파 안에 있는 묵은 공기를 다 쓸어버리고.

 

그리고서 인자 본 호흡으로 들어가는데, 조용히 들어마시되 가슴으로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아랫배 단전(丹田)이 약간 볼록하도록 들어마셨다가 잠시 쉬었다가 조용하니 코로 내쉬되, 볼록해졌던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이렇게 해 나가는데.

 

그 호흡을 수식관처럼 '하나, 둘' 셀 필요는 없고, 계속 그렇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드는데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길게 이렇게.

다 내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그러는데,

 

이것도 잘못하면 내쉬는 숨만 있고 들어마시지를 못해.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콱! 맥혀 가지고 영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말이여.

그게, 이 단전호흡을 하는데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잘되는 게 아니라 어쩌다 하나씩은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호흡이 잘되지를 않고,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굉장히 그것 때문에 고민을 호소하는 사람을 가끔 보게 되는데, 그러헐 때는 어떻게 허느냐?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를 볼록이 하고 내쉴 때는 배를 홀쪽이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나,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체해 가지고 할 때는 그 반대로 하는 거여.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를 홀쪽이 하고, 숨을 내쉴 때는 배를 볼록하게 만들어. 반대로 하는 거여. 그렇게 하다 보면 이 가슴 답답한 것이 차츰차츰 없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가슴 답답한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호흡법과 배가 볼록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것을 반대로 얼마 동안 해도 상관이 없고, 그렇게 해서 편안하면 상당히 오래까지도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답답한 것이 없는 사람은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가 볼록하게 하되 너무 가뜩 들어마셔 가지고 배가 터질 때까지 그렇게 잔뜩 들어마셔 가지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참고 그렇게 무리하게 해서는 안 돼.

들어마시되, 준비 호흡 3번 할 때에는 가뜩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완전히 내뿜도록 다 내뿜고, 3번을 준비 호흡은 그렇게 하지만, 본 호흡으로 들어가서는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시는 거야.

 

팔부쯤만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 게 아니고, 한 3~4초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내쉬되 또 완전히 다 내뿜으려 하질 말고 편안할 만큼만 내쉬는 거여.

10분 20분 30분을 해도 숨이 가쁘거나 힘들게 하는 것은 그건 잘못한 거고, 한 시간 두 시간을 해도 조금도 무리가 없도록 자연스럽게 해야 해.

 

자기의 호흡량에 맞추어서, 자기 체질에 맞추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해야 되지 그것을 무리하게 하니까 꽉 체해 가지고, 막혀 가지고 숨도 못 쉬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야.

단전호흡을 하기는 하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해야지, 무리하게 하면 그런 부작용이 일어나서 고생을 하는 수가 있으니까 그 점을 유의를 하기를 바라고.

 

 

화두를 드는 것은 간절한 의심이라고 하니까 '이뭣고?'하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화두를 해서는 안된다 그말이여.

알 수 없는 의심을 갖되, 그 화두가 배꼽 밑에 단전에다 두고 화두를 관(觀)하는 거야. 이건 말로써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문제나 자꾸 스스로 해 보면 그 말을 알아들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들어마실 때는 배가 볼록하게 하고, 내쉴 때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한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우리의 생각이 단전에 가서 자연히 거기에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하는 그 의심이 단전에 가 있게 된다 그말이여.

 

단전에 가 있게 하는 방법이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이렇게 불어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거기가 생각이 있게 되고, 차츰차츰차츰 내쉴 때는 배가 홀쪽한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우리의 생각이 단전에 가서 머물게 된다 그말이여.

 

그 머무른 거기에서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렇게 해서 하면 단전에다가 화두를 두고 관하는 뜻이 거기서 스스로 계합(契合)을 하게 된다 그말이여.

 

그렇게 해 나가면 상기병(上氣病)이 일어날라야 일어날 수가 없어.

단전호흡을 안 하고 이 머리로만 '이뭣고? 이뭣고?'하니까 자연히 우리의 기운이 머리로 올라가 가지고 나중에는 머리가 뽀개지려고 그러고, 뒤통수가 뜨끈뜨끈하니 열이 오르고 나중에는 그렇게 해서 상기병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20분41초~41분2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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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관(數息觀) ; (산) ānāpāna-smrti (팔) ānāpāna-sati

출입하는 숨을 세어서 마음을 통일하는 것. 그것에 의해 마음의 산란을 막음. 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법. 염입출식(念入出息) · 식념관(息念觀) · 지식념(持息念) 등이라고도 한다.

 

음사어(音寫語)로 아나반나삼매(阿那般那三昧) · 아나파다념(阿那波那念) ·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 안반(安般) · 안반념(安般念) · 안반관법(安般觀法) · 안반수의(安般守意) 등이라고도 한다.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은 이 수식관을 집중적으로 설한 경전이다. 수식관에 제시된 기초적 관법은 사념처(四念處)에서 간화선(看話禪)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행법의 저변에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비파사나(팔리어 vipassanā, 산스크리트어 vipaśyanā) ; 비바사나(毘婆舍那)·비발사나(毘鉢舍那)로 음역. 능견(能見) · 정견(正見) · 관찰(觀察) · 관(觀)이라 번역.

비파사나(위빳사나)는 ‘분리해서vi  보는 것passanā’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대상[유위제법(有爲諸法)—오온(五薀)·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명상하고 관찰하여 법(法)의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무아(無我)인 특성을 통찰하는 수행.

 

비파사나는 마음[心] · 마음부수[心所] · 물질[色]로 구분되는 71가지 구경법들 가운데 하나를 통찰하는 수행인데 이처럼 법을 통찰해 들어가면 제법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徹見)하게 된다.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비파사나의 힘으로 탐·진·치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 · 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비파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 그 자체이지 결코 특정한 수행기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초기불교 이해」 (각묵 스님, 초기불전연구원) 참고.

*사념주관(四念住觀) ; (산스크리트어) catvāri smrty-upasthānāni (팔리어) cattāro sati-patthānāni]

신 · 수 · 심 · 법(身·受·心·法) 네 가지 대상에 혼신의 정력을 기울여 정확하고 빈틈없고 면밀하게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주의를 집중하여 관찰하는 수행. 이 수행은 자신의 탐욕과 모든 번뇌를 제거하여 최상의 지혜,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네 종류의 수행 방법. 네 가지의 관상법(觀想法). 네 종류의 실상을 바르게 관찰하여 마음이 고요해지는 내관(內觀). 신념주(身念住, 身念處) · 수념주(受念住, 受念處) · 심념주(心念住, 心念處) · 법념주(法念住, 法念處)의 네 가지에 대해 관찰하는 수행.

 

①신념주(身念住, 身念處) : 부모에게 받은 육신이 부정(不淨)하다고 관하는 것.

②수념주(受念住, 受念處) : 우리의 마음에 낙(樂)이라고 하는 음행·자녀·재물 등을 보고, 낙이라고 하는 것은 참 낙이 아니고, 모두 고통(苦痛)이라고 관하는 것.

③심념주(心念住, 心念處) :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변화 생멸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

④법념주(法念住, 法念處) : 위의 셋을 제하고, 다른 만유에 대하여 실로 자아(自我)인 실체(實體)가 없으며, 또 자아가 없으므로 소유도 없다고, 무아관(無我觀)을 하는 것.

 

신 · 수 · 심 · 법(身·受·心·法) 네 가지를 따로따로 관하기도 하고[별상념처관 別相念處觀], 신수심법(身受心法)은 부정(不淨)하며, 고(苦)이며, 무상(無常)하며, 무아(無我)라고 총합하여 관하기도[총상념처관 總相念處觀] 한다.

 

'염주(念住)'의 염(念)에 해당하는 팔리어 사티(sati)는 '과거를 기억하는 기능'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앞에 나타난 모습, 현재에 대한 주의 집중, 분명한 알아차림, 충분히 깨어있음, 주의 깊음, 마음이 대상을 챙김(마음챙김)'의 뜻이 있다. 주(住)에 해당하는 파타나(팔리어 patthāna)는 '긴밀하고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현장법사(600~664) 이전에 번역한 경전의 번역을 말하는 구역(舊譯)에서는 사념처(四念處)라 하고, 신역에서는 사념주(四念住)라고 함. 사념처관(四念處觀)과 같음. 사의지(四意止), 사지념(四止念), 사념(四念), 사념수관(四念隨觀)이라고도 한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부정관(不淨觀) ; 몸이 청정하지 못한 것을 관찰하는 것. 초기불교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수행법으로, 특히 탐욕이라는 번뇌를 물리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몸의 더러움을 관찰하여 몸에 대한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탐욕을 없에게 한다. 부정상(不淨想)이라고도 한다.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다섯 가지 수행법[五停心觀] 중 하나로 첫 번째인 부정관은 탐욕, 두 번째인 자비관(慈悲觀)은 분노, 세 번째인 연기관(緣起觀)은 어리석음, 네 번째인 계분별관(界分別觀)은 아집(我執), 다섯 번째인 수식관(數息觀)은 산란한 마음을 대치하기 위해 닦는다. 또한 사념처(四念處) 중 신념처(身念處)의 여러 가지 수행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녹장외도(鹿杖外道) ; 녹장(鹿杖) · 녹장사문(鹿杖沙門) · 녹장범지(鹿杖梵志) · 물력가난제(勿力伽難提) · 미린전타라(彌隣陀羅) · 녹난제(鹿難提)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교설한 부정관(不淨觀)을 잘못 이해한 비구들이 세상에 대해 싫어하고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 녹장에게 찾아와서 목숨을 끊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 대가로 의발(衣鉢, 가사와 발우)을 주겠다고 하는 말에 욕심이 난 녹장이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살해하였다. 비구를 죽인 칼을 씻으러 강에 갔던 녹장은 천마(天魔)로부터 해탈하지 못한 이를 해탈하게 한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하는 칭찬을 받자 더 큰 공덕을 얻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비구들을 찾아다니며 해탈시켜 주겠다고 하였고, 많은 비구들이 그에게 요청하여 모두 60여 명을 살해하였다.

부처님께서 이 사실을 들어서 아시고 대중을 모아 놓은 후,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入出息念 : 數息觀)을 설법하였다. 그리고 살생은 어떠한 경우에도 죄가 된다는 것을 교설하고 4바라이(四波羅夷)의 제3에 해당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제정하였다.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식사)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드는데, 나무에는 안팎에 칠(漆)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한다.

응량기(應量器)란 법에 응하는 또는 1명의 식량에 마땅한 그릇이니 먹을 만큼의 분량을 담는 그릇이고, 또 남의 공양을 받기에 마땅한 수행과 덕을 갖춘 성현(聖賢)이 사용하는 그릇이란 뜻이다.

*가사(袈裟) : 잡색(雜色) • 염색(染色) 곧 순색이 아닌 옷을 말한다。인도는 더운 곳이므로 속인(俗人)들은 모두 흰 옷을 입는데, 출가한 이는 그 옷을 달리하기 위하여 염색하되 검박한 빛으로 하게 되었다.

또한 품질이 좋은 새 옷감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이것 저것을 주워 모아서 누더기같이 만들었는데, 크고 작은 세 가지(三衣)가 있어서, 다섯 폭으로 된 것(五條)은 일할 때에 입고, 일곱 폭으로 된 것(七條)은 보통 때에 입고, 아홉 폭(九條)으로부터 스물 다섯 폭(二十五條)까지는 법회와 예식에 입게 된다. 그러므로 인도의 승려들은 이 세 가지밖에 다른 옷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가 기후 풍토와 인정 풍속이 같지 아니한 여러 지방에 전파되면서, 가사의 빛도 황색 또는 적색의 보기 좋은 빛으로 변하게 되고, 바탕도 비단으로 하게까지 되었다。그 모양도 온갖 복덕이 이 법복(法服)으로 말미암아 심어지고 성숙(成熟)되는 것이라 하여, 복을 심는 밭(福田)을 상징(象徵)해서 규모가 반듯하고 법다운 밭두렁과 같은 것으로 하게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불교를 신앙하는 여러 나라와 그 종파에 따라 모양도 달리 한다.

또한 북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추운 곳이기 때문에, 보통 입는 의복 위에 장삼(長衫)을 입고, 그 위에 다시 가사를 입게 되므로, 가사와 장삼이 함께 법복이 된다.

*포살(布薩) ; 산스크리트어 poṣadha, 산스크리트어 upavāsa, 산스크리트어 upavasatha, 팔리어 uposatha의 음사. 단식(斷食)·정주(淨住)·선숙(善宿)·근주(近住)·장정(長淨)이라 번역.

출가자들은 음력 매월 15일과 29일(또는 30일)에 한곳에 모여 계율의 조목을 독송하면서 그 동안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고, 재가(在家)의 신도는 육재일(六齋日) 곧 음력 매월 8·14·15·23·29·30일에 하루 낮 하룻밤 동안 팔재계(八齋戒)를 지키는 일.  포사타(布沙陀,哺沙陀), 포쇄타(褒灑陀)라고도 쓴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1분 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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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피 ; ①선지. 짐승을 잡아 죽여서 받은 피. 식어서 굳어 덩어리진 피를 말한다. ②다쳐서 선지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선요(禪要) ; 『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매카리 ; 매가리. 맥아리. 맥(脈 기운이나 힘)을 속되게 이르는 말.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육조, 청원행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조동종(曹洞宗) ; 중국의 선종은 달마(達磨)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때의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 크게 성했다. 조동종은 이 혜능 문하인 청원행사(靑原行思)의 계통으로부터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와 그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 839-901)에 의해 형성된 종파이다.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은 자신이 본래 부처의 청정한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묵묵히 좌선만 하면 저절로 그 청정한 성품이 드러난다는 묵조선(默照禪)을 선양하였다.

 

이 이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법안 문익(法眼文益)선사의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 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동」은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동이겠지만, 「조」는 동산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이 그 종지를 크게 밝혀서 완성한 때문이라 하는 말도 있다. 중국의 문법에 선후와 시종을 거꾸로 붙이는 전례가 아주 없는 바도 아니지만 제자의 이름을 스승의 이름 위에 놓은 것이 당연한 경우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송나라 이후에는 조계산(曹溪山)의 「조」로써 육조의 바른 갈래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왔다. 또한 조산 본적의 조산도 조계산을 사모하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것이다. 그 가풍은 정편 오위(正偏五位)를 세워서 아주 세밀하고 말과 행실이 서로 일치하고, 이치와 일이 무르녹게 합하여, 본래면목으로써 종지(宗旨)를 삼는다.

일본의 조동종은 도원(道元, 1200-1253)이 1223년 송나라에 들어가 중국 조동종의 선승인 여정(如淨)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계승하였다. 도원 선사는 1227년 귀국하여 일본에 조동종을 전파하였다.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팔부(八部) 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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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소소영령2020. 5. 16. 15:58

 

 

소소영령(No.220)—(게송)麒麟鸞鳳不成群  尺璧寸珠那入市  凜凜威光混太虛  天上人間總不知.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9분 33초)

 

[법문] 송담스님(No.220)—1983년(계해년) 동안거결제 법회(83.11.19) (용220)

 

기린난봉불성군(麒麟鸞鳳不成群)하고  척벽촌주나입시(尺璧寸珠那入市)인고

나무~아미타불~

늠름위광혼태허(凜凜威光混太虛)헌데  천상인간총부지(天上人間總不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기린난봉불성군(麒麟鸞鳳不成群)하고, 기린과 난봉새는 다른 짐승들과 떼를 짓지를 아니하고,

척벽촌주나입시(尺璧寸珠那入市)인가. 옥(玉)이 직경이 한 자나 되는 그런 크고 좋은 옥과, 그 구슬이 직경이 한 치나 되는 그런 큰 좋은 보주(寶珠), 보배 구슬이 어찌 시장에 나돌겠는가.

 

기린(麒麟)이라고 하는 짐승은 머리에 뿔이 두 개가 난 것이 아니라 뿔이 하나만 난, 그런 아주 성스러운 짐승인데.

그 나라 왕이나 천자가 성인(聖人)이 출세(出世)를 해 가지고 임금님이 되면 천자가 되면 그 기린이라고 하는 동물이 나타나고, 성인이 아닌 무도(無道)한 사람이 왕이나 천자가 되면 어디에 숨었는지 깊이 숨어 버리고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마빡에는 뿔이 하나가 났는데 그 짐승의 성질이 아주 어질고 성스러워.

 

그리고 난봉(鸞鳳), 봉황(鳳凰)새 · 난(鸞)새는 빛깔이 청황적백흑 오색(五色)이 찬란하고 그리고서 그 소리는 궁상각치우 오음(五音)을, 그 아름답고 곱고 거룩한 음성을 지녔어. 이 새도 역시 그런 성현이 출세할 때에 한해서 나타나는 그러한 참 상징적인 새인데.

그러한 기린과 같은 성스러운 짐승이나, 그런 봉난새 같은 그런 좋은 새는 보통 짐승들하고 짝을 지어서 놀지를 안해.

 

그리고 직경이 한 자나 되는 그러한 좋은 옥(玉)과 직경이 한 치나 되는 그러한 보배 구슬은 시장에 나돌지를 않는다 그말이여. 누가 그런 절세(絕世) 보배를 갖다가 함부로 시장에 팔러 나올 것이냐 그말이여.

 

이 기린이나 봉난새나 이런 척벽촌주(尺璧寸珠)는 무엇을 그것에다가 비유를 했냐 하면 차사(此事)거든. 이 일.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부터서 있었으며, 천지가 무너져 없어져도 그것은 무너진 때가 없는,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부터서 있는데 태양보다도 더 밝고, 밝기로 말하면 태양보다도 더 밝고 검기로 말하면 옻칠보다도 더 검어.

‘그놈’이 클 때에는 온 법계 천지를 다 둘러 삼켜도 오히려 부족하고, ‘그놈’이 작을 때에는 바늘로 꽂을 수도 없을 만큼 작을 수도 있어.

 

‘그놈’이 밥 먹고 옷 입고, 오고 가고, 앉고 서고 눕고 또 슬플 때 울고 억울할 때 분(忿)을 내고, 그러한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시청언동(視聽言動)하는 사이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데 ‘그놈’을 여읠라야 여읠수가 없어. 행주좌와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소소영령한데 어떻게 ‘그놈’을 여읠수가 있냐 그말이여.

그런데 ‘그놈’을 찾을려고 하면은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자취가 없어. 육도법계(六途法界)를 다 두루 찾아도 간 곳이 없고, 그렇게 육도법계를 다 찾아도 자취가 없었던 것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벌써 행주좌와 어묵동정하는 사이에 소소영령하다 그말이여.

 

바로 ‘이놈’을 가리켜서 기린과 봉난새에다가 비유하고 척벽과 촌주에다가 비유를 한 것이여. 그러한 천상천하에 짝이 없는 그러한 보배를 우리 모두는 낱낱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늠름위광혼태허(凜凜威光混太虛)여. ‘그놈’이 늠름헌 그 위엄스러운 빛이 이 끝없는 태허(太虛) 속에 세차게 흐르고 있어.

그렇게 세차게 흐르고 있건만 천상인간(天上人間)에 총부지(總不知)여. 천상과 인간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더라 그말이지요.(처음~9분4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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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기린난봉불성군(麒麟鸞鳳不成群)~' ; 『금강경오가해』 제 24.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야부 게송 참고.

*璧(둥근 옥•아름다운 옥 벽), 凜(찰•늠름할 름), 混(섞을•많이 흐르는 모양 혼)

*尺(자 척), 寸(마디•치 촌), 1치[寸]는 약 3.03cm에 해당하고 1자[尺]의 10분의 1. 那(어찌 나)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무도(無道) ; 말이나 행동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나서 막됨.

*절세(絶世 뛰어날 절/세상 세) ; 세상(世上)에 견줄 데가 없을 정도로 아주 뛰어남[絶].

*보배 ; ①아주 귀하고 소중한 물건. ②아주 귀하고 소중하며 꼭 필요한 사람이나 물건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태허(太虛 클 태/비다·마음·하늘 허) ; ①우주의 본체 또는 기(氣)의 본체. 중국 철학에서, 음양(陰陽)을 낳는 기(氣)의 본체를 달리 이르는 말. 송나라 장횡거(張橫渠)가 주장한 개념으로 이것이 응집되어 만물이 되고, 만물이 분해하여 이것이 된다고 한다. ②'하늘(지구 표면 위에 높이 펼쳐진 공간)'을 달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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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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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사십이장경2020. 5. 6. 08:31

사십이장경(No.593)—『사십이장경』 제27장 | 사견(邪見) 공견(空見)에 빠지지 말라 | 화두가 성성적적한 가운데 의단이 독로하면 그때는 그 의단을 관(觀)해 나가는 거여. 의심관(疑心觀) | 『사십이장경』 제18장.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 후한(後漢)의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이 함께 한역.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보시(布施), 애욕의 단절 등 불교의 요지를 42장에 걸쳐 적절한 비유로써 간명하게 풀어 설한 경(經). 최초의 한역(漢譯) 불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27장.

佛言 夫爲道者 猶木在水 尋流而行 不觸兩岸 不爲人取 不爲鬼神所遮 不爲泂流所住 亦不腐敗 吾保此木 決定入海 學道之人 不爲情欲所惑 不爲衆邪所嬈 精進無爲 吾保此人 必得道矣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도를 닦는 사람은 마치 나무가 물에 있어서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것과 같다. 양쪽 기슭에도 닿지 않으며, 사람이 건지지도 않으며, 귀신에게 가로 막히지도 않으며, 소용돌이에 머물지도 않으며, 또 썩지도 않는다면, 나는 이 나무가 결정코 바다에 들어갈 것을 보장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정욕에 미혹되지 않고, 온갖 삿된 견해에도 휘말리지 않고, 함이 없이 정진해 나간다면, 나는 이 사람이 반드시 도를 얻을 것을 보장한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18장.

佛言 吾法 念無念念 行無行行 言無言言 修無修修 會者近爾 迷者遠乎 言語道斷 非物所拘 差之毫釐 失之須臾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법은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하며, 말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닦되 닦음이 없이 닦나니,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진리와 가깝지만 모르는 사람은 더욱 멀어지리라.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며 물질에 매이지 아니하니 털끝 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잠깐 사이에 잃어버리리라.

 

(18분 54초)

 

[법문] 송담스님(No.593)—1997년 정축년 하안거 해제 (용593)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하시기를,

'대저 도(道)를 닦는 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한 나무토막이 물에 있어서 흐름을 따라서 흘러 흘러가다보면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 또 흘러가다가 어떠한 사람한테 이렇게 사람이 건져버리지 않고 또 어떠한 귀신이나 그런 것에 의해서 차단을 당하지 아니하고, 또 소용돌이치는 그런 물 소용돌이 속에 빠져서 빙빙 돌면서 떠내려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가다가, 흘러 내려가다가 썩어져서 없어져버리지만 않는다면, 그 나무토막은 결정코 바다에 도달하는 거와 같다'

 

그러면 <양쪽 언덕에, 물이 흘러가다가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는다>하는 것은 생사(生死)니 열반(涅槃)이니 하는 그러한 소견(所見)에, 그러한 두 언덕에 집착(執著)을 하지 아니한 것을 비유한 것이고.

<사람에게 건짐을 당하지 않는 것>은 인천(人天)에, 사람의 세계나 하늘나라에 선업(善業)을 지어가지고 복(福) 받는데 빠지지 아니한 것을 비유한 것이여.

 

사람이 살아감에 악(惡)한 짓은 하지 말고 선업(善業)을 닦아서 사람으로 태어나되 좋은 곳에 태어나고, 하늘나라에 태어나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이 도문(道門)에 있어서는 그렇게 복(福) 받고 호강하고 잘 먹고 잘산 거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복 받고,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고 그러면 자연히 사람이 교만해지고 거만해지고 남을 업신여기고 편안한 데에 빠져가지고 도(道) 닦을 마음을 내기가 어려워서 그거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별로 그걸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귀신에 차단(遮斷)을 당하지 않는 것>은 사견, 불법을 믿으면서도 정법(正法)에 대한 바른 사상이 백히지를 못하고 사견(邪見)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사견에 빠져 놓으면 겉으로는 열심히 도(道)를 닦은 것 같애도 속마음에 사견에 떨어져 있어 놓으면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현(出現)해도 그 사람은 제도할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이미 그릇에, 아무리 그 그릇이 좋아도 못된 것이 가뜩차 갖고 있으면 다른 것을 아무리 그 그릇에다 담으려고 담어도 소용이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견 가운데에도 가장 으뜸가는 사견은 인과법(因果法)을 믿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견(空見)에 집착해 빠지는 것이여.

공견에 빠지면은 인과법을 믿지 않고 막행막식 해가지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법도(法度)가 없어가지고 마구잽이 닥치는 대로 하거든.

 

인과법을 철저히 믿으면 말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하고 무서운 것을 알며, 행동 하나가 얼마나 무섭고 소중한 것인 줄 알며, 그러기 때문에 인과법을 철저히 믿어야 저절로 악업(惡業)을 짓지 아니하고 정법(正法)을 믿고서 정법에 대한 바른 사상이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물이 빙빙빙 도는 회오리 소(沼)에 한 번 빠지면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해> 삼계(三界)의 회오리거든.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 삼계(三界)의 회오리 속에 빠지면 여간해서 거기에서 헤어나지를 못해.

그속에는 오욕락(五欲樂)—재산에 대한, 색(色)에 대한, 명예 권리에 대한, 또 안락(安樂)과 수면(睡眠)에 대한 그런 오욕락에 빠져가지고, 그리고 서로 인연을 악연(惡緣)과 선연(善緣)을 지어가지고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고 또 복수하고 은혜를 갚고 그러한 업연(業緣)에 얽혀가지고 여간해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그말이여.

 

인과법을 믿되, 믿기는 철저히 믿되, 거기에 '어떻게 하면 인과(因果) 속에서 해탈(解脫)할 수 있느냐?'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여.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고 정법에 의해서 수행(修行)을 해야 우리가 이 생사(生死)의 윤회(輪廻) 속에서 살면서 거기에 얽히지 아니하고 해탈(解脫)하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 나무토막이 흘러가다가 썩어서 부패해가지고 부서져버리면 바다에 이르지 못하는데> 그것은 무엇에다가 비유한 것이냐 하면은 불교에 소승(小乘)과 중승(中乘)에, 이승(二乘)에는 멸진정(滅盡定) 외도(外道), 멸진정이라고 하는 경계(境界)가 있는데 그 멸진정에 한 번 빠져 놓으면 몇만 겁(劫)이 지내도 거기서 헤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말이여.

 

수행을 하되, 참선(參禪)을 하되 무기(無記)에 빠져가지고, 그 편안하고 깨끗하고 조용한 그 경계에 빠져서 그것에 맛을 들여 가지고 거기에 빠진 채 그것이 공부인 줄 알고 수행을 하면 결국은 이승(二乘)의 멸진정(滅盡定)에 빠져가지고 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참선을 하되 처음에는 화두를 들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자꾸 일으켜 가지고 또 챙기고 또 챙기고 하지만, 차츰차츰 망상(妄想)이 가라앉고 조용하고 깨끗해지면 화두 드는 것도 귀찮애지고, 화두를 들면은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가 흩어질까 두려워서 화두를 들지 않고 가만히 고요한 것을 맛보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기공(無記空)에 빠지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산승(山僧)이 항상—화두가 끊어지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와서 화두를 놓치거나 하면 다시 자기의 화두를 들되, 이미 들어진 화두가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한 가운데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거든 거기에서는 자꾸 거기다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그렇게 어거지로 거기다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말고, 이미 독로한 그 의단을 묘(妙)하게 잘 관(觀)해 가도록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보면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그 의심관(疑心觀)을 하다가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르르 하니 의심이 성성(惺惺)하지를 못하고 그냥 의심이 없어져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럴 때는 터억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자기의 화두[本參話頭]를,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때는 한 번 또 챙겨야 하는 거여. 챙겨가지고 또 성성하고 적적한 가운데 의단이 독로하면 그때는 그 독로한 의단을 터억 관(觀)해 나가는 거여.

 

'어떤 것이 무기(無記)냐?' '어떤 것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들려져 갖고 있느냐’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관찰을 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 생사(生死)니 열반(涅槃)이니 한 소견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인천(人天)의 선업(善業)에 걸리지 아니하고> <사견(邪見)에 맥히지 아니하고> <삼계(三界)의 회오리에 빠지지 아니하고> <이승(二乘)의 멸진정(滅盡定)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거각(擧却)해 가지고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해도 성성적적하게 의단이 독로한 채로 나가면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고조사(古祖師)가 한결같이 보증(保證)을 하시고 증명(證明)을 하신 바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들어갈 수 있도록 간곡(懇曲)하게 설법을 해 주시는 선지식, 또 그러한 선지식이 설해주신 법문을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라도 자주 들으면서 정진(精進)을 해 간다면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에 말씀하시기를,

'내 법(法)은 염무념념(念無念念)이요, 생각하되 생각 없이 생각하고, 행무행행(行無行行)하며, 행하되 행하는 바가 없이 행하고, 언무언언(言無言言)하며, 말을 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수무수수(修無修修)하야, 닦되 닦음이 없이 닦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바로 나의 정법(正法)이다' 그 말씀입니다.

 

이 무념(無念)의 념(念), 무행(無行)의 행(行), 무언(無言)의 언(言), 무수(無修)의 수(修)의 이 뜻을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수행하는 요지(要旨)가 거기에 있어.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이 수행법을 아지를 못한 사람은, 미(迷)한 사람은 저 멀다 그말이여.[會者近爾 迷者遠乎]

 

이것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닦아가는 이 법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여, 말길이 끊어졌으며, 비물소구(非物所拘)여, 이것을 가로막을 아무 물건도 거기는 없는 것이며, 그런데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이것이 무념(無念)이요, 이것이 무행(無行)이요, 이것이 무언(無言)이요, 이것이 무수(無修)요, 이것이 무증(無證)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그것이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말이여.

실지수유(失之須臾)여. 수유(須臾)라고 하는 것은 잠깐, 번갯불 번쩍하는 그 찰나간(刹那間)을 ‘수유(須臾)’라 그러는데, 수유 동안에 놓쳐버리는 것이여.

 

근게 도저히 이 도리(道理)는 여기에 나아가려면은 활구참선(活句參禪)보다 더 요긴(要緊)한 방법은 없다 그말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녹음법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나아가야 거기에는 병폐(病弊)가 붙지를 못하고 사견(邪見)이 거기에는 붙지를 못하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복탁(卜度)으로 요리조리 따지고 비교하고 분석해서 의리(義理)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면은 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할 뿐만 아니라 점점 도(道)에는 멀어져 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 보았자 그것은 사견(邪見)이요, 저 죽고 남 죽이고 불법(佛法)을 망해 먹을 외도(外道)가 되는 것이다.

 

일생 동안을 알 수가 없고, 아무것도 얻은 바도 없고, 본 바도 없고, 느낀 바도 없어도 그 상관이 없어.

알 수 없는 의단으로 나가면은 결정코 깨달음을 얻고야만 마는 것이고,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하지 아니해서 그렇다면 그것은 아무도 원망할 것도 없고, 그것은 별로 나쁜 것이 없어.

 

아무리 바르게 열심히 해도 인연이 도래하지 아니하면 더디 깨닫게 되는 것이고, 얼마 안 닦아도 퍼뜩 깨달은 사람은 전생(前生)에 많이 닦아 놓은 사람이고.

전생에 닦아 놓은 것이 없으면은 금생(今生)에 비록 열심히 한다고 해도 더디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고, 마지막 죽어갈 때도 깨닫지 못하고 의단이 독로한 채 터억 숨을 거둘 수 있다면은 무엇이 원통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빨리 깨달라 가지고 '아무개가 견성(見性)했다', '내가 빨리 조실(祖室)도 한바탕 해야겠다', '천하(天下)를 향해서 큰소리도 한번 쳐봐야겠다'

쯧! 도(道)가 무엇인 줄 모를 때에는 혹 그런 생각도 할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먹을 것도 안 먹고, 하고 싶은 것도 안 하고 청춘을 버리고 참 도(道)를 닦게 될 수도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해도 그것이 오히려 좋고, 누가 나를 무시를 하거나 업신여기거나 일생을 바보처럼 산다 해도 그 속에 한량없는 법희선열(法喜禪悅)이 있는 법이지, 누가 알아주고 그런다고 해서 그게 괴롭기만 하지 그 별로 좋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은 과거에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께서 말씀하신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든지,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선교석(禪敎釋)」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바보가 되아 가지고 말귀도 못 알아듣고, 오직 배고플 때 밥이나 먹고 화장실이나 갈 줄이나 알제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똥멍청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고.

만공(滿空) 스님께서도 "그러한 바보가 되어서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일대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니라"고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 도반들께서도 그러한 마음으로 수행을 하신다면은 결정코 남에게 속지 않는, 속임을 당하지 않는 진정한 수행자가 되실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많은 수행자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21분2초~39분5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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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二十七 無著得道)』 -- 卍新纂大日本續藏經 第37冊 No.669 四十二章經註 (1卷) 【宋 守遂註 明 了童補註】

佛言 夫爲道者 猶木在水尋流而行 不觸兩岸 不爲人取 不爲鬼神所遮 不爲洄流所住 亦不腐敗 吾保此木決定入海

(註) [不觸生死涅槃兩岸 不爲人天有漏善業所取 不爲邪見鬼神所遮 不爲三界洄流所住 亦不腐敗於二乘滅定 決入薩婆若海]

 

學道之人 不爲情欲所惑 不爲衆邪所嬈 精進無爲 吾保此人 必得道矣

(註) [情欲不能惑 衆邪不能嬈 正進無爲 道遠乎哉]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十八)』

佛言 吾法 念無念念 行無行行 言無言言 修無修修 會者近爾 迷者遠乎 言語道斷 非物所拘 差之毫釐 失之須臾.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법은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하며, 말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닦되 닦음이 없이 닦나니,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진리와 가깝지만 모르는 사람은 더욱 멀어지리라.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며 물질에 매이지 아니하니 털끝 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잠깐 사이에 잃어버리리라.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시절인연(時節因緣) ; 시절이 도래(到來)하고 인연이 합쳐지는 기회.

[참고] 시절(時節) : 어떤 시기나 때. 도래(到來)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기회(機會)—어떠한 일, 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

*도래(到來 이를 도/올 래)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법희선열(法喜禪悅) ;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듣고 따르는 기쁨[喜]과 선정(禪定)에 드는 기쁨[悅].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심원의마(心猿意馬) (No.593)—(게송)四時循環暖復寒 獼猴深戀六華村 耳聲眼色曾無暇 念念那知是死門 |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

 

*심원의마(心猿意馬) ; 마음[心]이라는 원숭이[猿]와 생각[意]이라는 말[馬]. 의마심원(意馬心猿).

마음과 생각이 제멋대로 대상(對象)을 향해 항상 동요하고 고요하지 못한 모양이 질주하여 달리는 말[馬]과 쉼 없이 움직이고 조잘대는 원숭이[猿]와 흡사하기 때문에 생긴 비유이다. 일정하지 않게 예측불허로 변화하는 생각을 나타낸다.

 

(5분 20초)

 

[법문] 송담스님(No.593)—1997년 정축년 하안거 해제 (용593)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헌디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성안색증무하(가)(耳聲眼色曾無暇)헌데  염념나지시사문(念念那知是死門)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이다. 춘하추동 사시(四時)가 돌고 돌아서 따뜻하다가 또 다시 추워지고, 추워졌다가 다시 또 따뜻해지고, 그게 사시가 돌고 도는 가운데에,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다. 원숭이는 깊이 육화촌(六華村)을 그리워하더라.

 

원숭이는 계절 따라서 맛있는 열매가 여는 계절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말이지.

꽃이, 여섯 가지의 아름다운 꽃이 피고 지고 하면 거기에는 맛있는 과일이 열렸다가 또 익어 가니까 육화촌(六華村)을 항상 그렇게 깊이 그리워한다 그말이여.

 

이성안색증무하(가)(耳聲眼色曾無暇)여. 귀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온갖 색상을 보는데 틈이 없어.

이 말은 아까 원숭이가, 산에서 사는 원숭이로 여러분은 알아들으셨었는지 모르는데, 이 원숭이는 '마음에 원숭이'를 말하는 거여.

 

우리의 '마음'을 원숭이에다가 비유하고, 우리의 '뜻'을 말에다가 비유해서 '심원의마(心猿意馬)'라고 고인(古人)네들이 비유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건데,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팔식(八識)이 원숭이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뛰었다가 내려갔다 이 나무 저 나무로 건너다니면서 온갖 수선을 피고, 저는 운동을 하느라 그러는지 그렇게 설쳐대는 것이 마치 우리의 마음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반연(攀緣)해가지고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나부대는 우리의 마음에 원숭이가 마치 그와 같다.

 

그 눈과 코와 귀와 혀와 몸뚱이를 통해서 우리의 팔식(八識)이 놀아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희로애락과 흥망성쇠 속에 우리의 마음의 원숭이가 육근(六根)을 통해서 놀아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이 바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누가 알거나 그말이여.(처음~5분3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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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 ; 중봉명본 스님의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峯和尙廣錄)』 제30권 '警世二十二首' 게송 참고.

*심원의마(心猿意馬) ; 마음[心]이라는 원숭이[猿]와 생각[意]이라는 말[馬]. 의마심원(意馬心猿).

마음과 생각이 제멋대로 대상(對象)을 향해 항상 동요하고 고요하지 못한 모양이 질주하여 달리는 말[馬]과 쉼 없이 움직이고 조잘대는 원숭이[猿]와 흡사하기 때문에 생긴 비유이다. 일정하지 않게 예측불허로 변화하는 생각을 나타낸다.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〇전오식(前五識) ; 팔식(八識)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말한다.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〇의식(意識) ; 팔식(八識) 가운데 제6 의식을 말한다. 육식(六識)의 하나.

①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 인식하는 마음 작용. ②알고 사고하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 의식은 과거, 미래에의 대상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즉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예상할 수가 있다.

6식설(六識說)에서는 의식(意識)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제6 의식은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존재인데, 그 단계를 셋으로 나누면 첫째 제6 의식, 둘째가 제7 말나식, 셋째가 제8 아뢰야식이다.

 

〇말나식(末那識) ; 말나(末那)는 [산스크리트어] manas의 음사로, 의(意)라고 번역.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의(意)라 하지 않고 말나(末那)라고 한다. 8식설(八識說)에서 마음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8식(八識: 8가지의 식) 가운데 하나로 제7식(第七識),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또는 말나(末那)라고도 한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끊임없이 자아(自我)라고 오인하여 집착하고, 아뢰야식과 육식(六識)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육식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으로, 항상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네 번뇌와 함께 일어난다. 제8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種子)를 이끌어 내어 인식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생각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

 

〇아뢰야식(阿賴耶識) ; 8식설(八識說)에서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진(眞)과 망(妄)이 함께 있다고 하여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라고도 하며, 본래 깨끗한 것이 드러나 있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고 하여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반연(攀緣 잡을·매달릴·의지할 반/인연 연) ; ①마음이 대상경계에 의지해 움직임(작용을 일으키는 것). 대상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혼란. ②인식함. ③인식 대상. ④얽매임. 집착함. ⑤인연에 끌림.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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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수식관2020. 4. 26. 12:03

수식관(No.578)—不淨觀. 數息觀 | 수식관이 차츰 발달한 것이 지금의 단전호흡 | 가슴이 답답할 때는 단전호흡을 반대로 | 화두를 단전에다 두고 관(觀)하라.

 

*수식관(數息觀) ; (산) ānāpāna-smrti (팔) ānāpāna-sati

출입하는 숨을 세어서 마음을 통일하는 것. 그것에 의해 마음의 산란을 막음. 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법. 염입출식(念入出息) · 식념관(息念觀) · 지식념(持息念) 등이라고도 한다.

 

음사어(音寫語)로 아나반나삼매(阿那般那三昧) · 아나파다념(阿那波那念) ·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 안반(安般) · 안반념(安般念) · 안반관법(安般觀法) · 안반수의(安般守意) 등이라고도 한다.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은 이 수식관을 집중적으로 설한 경전이다. 수식관에 제시된 기초적 관법은 사념처(四念處)에서 간화선(看話禪)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행법의 저변에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20분 40초)

 

[법문] 송담스님(No.578)—96년(병자년) 동안거결제 법어(96.10.15) (용578)

 

호흡을 단전호흡을 하는데, 부처님 당시부터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하는, 참선 수행자가 그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행에 들어가는데 수식관이 대단히 요긴한 것인데.

 

어떻게 해서 부처님께서 수식관을 설하시게 되었느냐 하면은 비파사나(vipassanā)라고 신(身) · 수(受) · 심(心) · 법(法),

'이 몸뚱이[身]는 더러운 것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몸에 아홉 구멍으로부터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고 몸안은 피와 오줌과 고름과 똥이 가득차 있고, 머지않아서 인연이 다하면은 죽어서 썩어 문드러진다. 그런 이 몸뚱이는 하여간 더러운 똥 주머니다' 이러한 생각을 항상 그렇게 관(觀)하며.

 

밖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수(受),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눈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거나, 귀로 받아들이거나, 코나 혀로 받아들이거나, 몸뚱이로 받아들이거나, 생각으로 받아들이거나 밖에서 무엇만 받아들였다 하면은 그것이 결국은 차츰차츰 변해 가지고 고통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이다.

 

셋째에 가서는 우리의 마음[心]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하루에면 수천수만.... 일(一) 호흡지간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것이 모두 무상하다 그말이여.

아침에 먹었던 생각이 벌써 밤에는 딴 생각,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할려고 마음을 먹어도 금방 그 생각이 변해 버리고. 이것을 누구를 줄려고 마음먹었다 해도 돌아서면서 마음이 변해 가지고 줄 생각이 없어지고. 우리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시시때때로 변해서 무상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내 몸[身]과 받아들이는 것[受]과 우리의 마음[心]을 제외한 것, 모든 것이 바로 법(法)인데 그것을 '제법(諸法)이라, 모든 법이다' 그러거든.

모든 법은 무아(無我)다. '내'라고 하는 자성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몸은 더러운 것이요,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것이요, 우리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요, 그 밖에 모든 법은 다 무아 한 것이다.

 

그것을 제자들한테 설한 가운데에 유독(唯獨) 육체에 대한 집착심을 갖고 또 이성 간에 이쁘게 생긴 사람, 마음에 든 사람에 애착심을 가지고 그러니까,

일단은 '이 몸뚱이라 하는 것은 내 몸이나 다른 사람 몸이나 할 것 없이 다 똥 주머니요, 피고름 주머니요, 다 더러운 것이다'하는 부정관(不淨觀)을 가리켜서 그것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이 몸뚱이가 정말 싫어지고.

 

이 몸뚱이를 끌고다니는 자체가 이 몸뚱이를 먹여야 하고, 입혀야 하고, 이 몸뚱이를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하고 그래 봤자 결국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밖에는 안되고. 이 몸뚱이가 싫어지고 아주 원수같이 느껴져서 이를 마치 뱀을 목에다가 칭칭 감고 다니는 것처럼 이 몸뚱이가 싫어지게 되었다 그말이여.

 

그래서 녹장외도(鹿杖外道)한테 가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바리때하고, 요 입는 가사(袈裟)하고 밖에 없는데 이것을 당신한테 줄 테니 제발 자비로써 나를 좀 죽여 달라"고,

이래가지고 몽둥이로 쳐서, 맞아서 죽은 사람 또 목 매달아서 자살한 사람, 물에 빠져서 죽은 사람, 그래서 60명 가량이 한 여름에 죽었습니다.

 

포살(布薩) 날을 기해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기 위해서 대중 종을 쳐서 모여 놓고 보니 60명이 비었으니 "어떻게 대중이 이렇게 많이 줄었느냐?" 아란존자 보고 물으니까,

"그렇게 해서 부정관(不淨觀)을 하다가 이렇게 60명이 자살하고 녹장 비구한테 자원을 해 가지고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여쭈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렇다면은 수식관(數息觀)을 해라"

 

수식관이 차츰 발달한 것이 지금의 단전호흡(丹田呼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수식관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하니 내쉬고 '하나',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고 '둘',

이렇게 해서 열까지 세어 올라갔다가 열에서 그 다음에는 열하나로 가지 말고 아홉, 여덟, 일곱... 해서 까꾸로 해서 하나로 내려오고 해서 하루 종일 호흡을 세는 거여.

 

그것이 잘되면은 하나에서 스물까지 올라갔다가 열아홉, 열여덟 내려오고 그것이 잘되면 서른, 마흔 해서 백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도록,

그런 동안에 중간에 망상이 일어나 가지고 '몇까지 세었는가?' 잊어버리면 다시 다 없었던 걸로 하고 다시 하나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이렇게 하기를 몇 날 며칠을—한 달, 두 달, 한철 내 하다보면 그것이 차츰차츰 되어간다 그말이여.

 

사실 여러분도 한번 해 보실 만한 일인데, 초학자(初學者)들은 해 볼 만한 일인데,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것이 수식관인데, 지금 용화사에서 초학자에게 수식관부터 하라고 그렇게 간곡히 권(勸)은 하고 있지 않으나,

워낙 망상이 심하고 정진이 잘 안되고 건강도 안 좋고 그러면 수식관을 한번 자기가 몇까지 세었다가 또 내려올 수가 있는가. 그것을 자기가 얼마만큼 정신 집중력이 있고 되어가는 것을 시험 삼아 한번 해 보시길 바라는데.

 

전강 조실 스님 때부터서 단전호흡을 권하게 된 동기는 여러분께서도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으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첫 철에 너무 용을 쓰고 용기를 내서 의심을 하다가 결국은 상기(上氣)가 복받쳐 올라서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고 뒤통수가 툭 툭 터져서 곪아터지고, 목구멍으로부터서는 선지피가 막 쿨쿨 넘어오고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공부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니까, 직지사에서 제산 스님께서 "그렇게 내가 시킨 대로 안 하고 네 멋대로 해 가지고 병이 나면 다 내가 너를 공부를 잘못 가르켜 가지고 그랬다고 할 것 아니냐"

 

제산 스님께서는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을 관(觀)하라.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관(觀)해라' 그렇게 참선하는 법을 일러 주셨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조실 스님께서 『서장(書狀)』을 보나, 『선요(禪要)』를 보나 보면 그렇게 공부하라는 법은 없고.

 

조주 무자(無字)를 관하시는데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라는 것을 너무 용을 쓰고 하시다가 결국은 상기병(上氣病)이 나 가지고 그렇게 하시다, 결국은 그러한 병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계속해 가지고 깨달음을 얻으시긴 얻었지만,

그 상기병으로 해서 피가 거꾸로 넘어온 그걸로 해서 참 여러 해 동안을 고생을 하시고, 만행을 하신 그런 과거를 생각하셔서 우리 후학(後學)들에게는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용을 쓰고 그렇게 하지 말고 급(急)하고 완(緩)한 것을 득기중(得其中)이여. 그 중(中)을 얻어야 한다.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너무 용을 써서 되게 몰아붙인 것도, 과도하게 몰아진 것도 못쓰고, 그렇다고 해서 매카리 없이 멍하니 그렇게 해서도 안 되지마는.

그래서 그러한 병을 미연에 방지하고 그런 상기병과 같은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아니하면서 정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단전호흡을 설하시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단전호흡을 전강 조실 스님께서 처음으로 그것을 창안하신 것이 아니고, 임제종(臨濟宗) 종사(宗師)들은 단전호흡에 대한 언급을 별로 안 하셨지만, 육조 스님 밑에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라고 조동종(曹洞宗)의 개종이신, 그 조동종에서는 단전호흡을 정식으로 다 수좌(首座)들에게 권장을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그래서 특히 이 간화선(看話禪)을 하는,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서 수행해 나가는 간화선에 있어서 폐단이 너무 간절하게 한답시고 용을 쓰고 의심을 일으키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와 같은, 약으로는 낫을 수 없는 그런 무서운 장애에 부닥치게 되기 때문에 초학자일 때부터 단전호흡을 잘 기본으로 익혀 나가는데,

 

처음에는 준비 호흡.

준비 호흡은 가뜩 가슴으로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꾸었다가 입으로 '후-'하고 다 내뿜어. 또 가뜩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물렀다 내쉬고 하기를 두서너 번 그렇게 해 가지고 허파 안에 있는 묵은 공기를 다 쓸어버리고.

 

그리고서 인자 본 호흡으로 들어가는데, 조용히 들어마시되 가슴으로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아랫배 단전(丹田)이 약간 볼록하도록 들어마셨다가 잠시 쉬었다가 조용하니 코로 내쉬되, 볼록해졌던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이렇게 해 나가는데.

 

그 호흡을 수식관처럼 '하나, 둘' 셀 필요는 없고, 계속 그렇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드는데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길게 이렇게.

다 내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그러는데,

 

이것도 잘못하면 내쉬는 숨만 있고 들어마시지를 못해.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콱! 맥혀 가지고 영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말이여.

그게, 이 단전호흡을 하는데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잘되는 게 아니라 어쩌다 하나씩은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호흡이 잘되지를 않고,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굉장히 그것 때문에 고민을 호소하는 사람을 가끔 보게 되는데, 그러헐 때는 어떻게 허느냐?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를 볼록이 하고 내쉴 때는 배를 홀쪽이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나,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체해 가지고 할 때는 그 반대로 하는 거여.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를 홀쪽이 하고, 숨을 내쉴 때는 배를 볼록하게 만들어. 반대로 하는 거여. 그렇게 하다 보면 이 가슴 답답한 것이 차츰차츰 없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가슴 답답한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호흡법과 배가 볼록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것을 반대로 얼마 동안 해도 상관이 없고, 그렇게 해서 편안하면 상당히 오래까지도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답답한 것이 없는 사람은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가 볼록하게 하되 너무 가뜩 들어마셔 가지고 배가 터질 때까지 그렇게 잔뜩 들어마셔 가지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참고 그렇게 무리하게 해서는 안 돼.

들어마시되, 준비 호흡 3번 할 때에는 가뜩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완전히 내뿜도록 다 내뿜고, 3번을 준비 호흡은 그렇게 하지만, 본 호흡으로 들어가서는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시는 거야.

 

팔부쯤만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 게 아니고, 한 3~4초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내쉬되 또 완전히 다 내뿜으려 하질 말고 편안할 만큼만 내쉬는 거여.

10분 20분 30분을 해도 숨이 가쁘거나 힘들게 하는 것은 그건 잘못한 거고, 한 시간 두 시간을 해도 조금도 무리가 없도록 자연스럽게 해야 해.

 

자기의 호흡량에 맞추어서, 자기 체질에 맞추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해야 되지 그것을 무리하게 하니까 꽉 체해 가지고, 막혀 가지고 숨도 못 쉬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야.

단전호흡을 하기는 하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해야지, 무리하게 하면 그런 부작용이 일어나서 고생을 하는 수가 있으니까 그 점을 유의를 하기를 바라고.

 

 

화두를 드는 것은 간절한 의심이라고 하니까 '이뭣고?'하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화두를 해서는 안된다 그말이여.

알 수 없는 의심을 갖되, 그 화두가 배꼽 밑에 단전에다 두고 화두를 관(觀)하는 거야. 이건 말로써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문제나 자꾸 스스로 해 보면 그 말을 알아들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들어마실 때는 배가 볼록하게 하고, 내쉴 때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한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우리의 생각이 단전에 가서 자연히 거기에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하는 그 의심이 단전에 가 있게 된다 그말이여.

 

단전에 가 있게 하는 방법이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이렇게 불어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거기가 생각이 있게 되고, 차츰차츰차츰 내쉴 때는 배가 홀쪽한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우리의 생각이 단전에 가서 머물게 된다 그말이여.

 

그 머무른 거기에서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렇게 해서 하면 단전에다가 화두를 두고 관하는 뜻이 거기서 스스로 계합(契合)을 하게 된다 그말이여.

 

그렇게 해 나가면 상기병(上氣病)이 일어날라야 일어날 수가 없어.

단전호흡을 안 하고 이 머리로만 '이뭣고? 이뭣고?'하니까 자연히 우리의 기운이 머리로 올라가 가지고 나중에는 머리가 뽀개지려고 그러고, 뒤통수가 뜨끈뜨끈하니 열이 오르고 나중에는 그렇게 해서 상기병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20분41초~41분2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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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관(數息觀) ; (산스크리트어) ānāpāna-smrti (팔리어) ānāpāna-sati

출입하는 숨을 세어서 마음을 통일하는 것. 그것에 의해 마음의 산란을 막음. 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법. 염입출식(念入出息) · 식념관(息念觀) · 지식념(持息念) 등이라고도 한다.

 

음사어(音寫語)로 아나반나삼매(阿那般那三昧) · 아나파다념(阿那波那念) ·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 안반(安般) · 안반념(安般念) · 안반관법(安般觀法) · 안반수의(安般守意) 등이라고도 한다.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은 이 수식관을 집중적으로 설한 경전이다. 수식관에 제시된 기초적 관법은 사념처(四念處)에서 간화선(看話禪)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행법의 저변에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비파사나(팔리어 vipassanā, 산스크리트어 vipaśyanā) ; 비바사나(毘婆舍那)·비발사나(毘鉢舍那)로 음역. 능견(能見) · 정견(正見) · 관찰(觀察) · 관(觀)이라 번역.

비파사나(위빳사나)는 ‘분리해서vi  보는 것passanā’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대상[유위제법(有爲諸法)—오온(五薀)·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명상하고 관찰하여 법(法)의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무아(無我)인 특성을 통찰하는 수행.

 

비파사나는 마음[心] · 마음부수[心所] · 물질[色]로 구분되는 71가지 구경법들 가운데 하나를 통찰하는 수행인데 이처럼 법을 통찰해 들어가면 제법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徹見)하게 된다.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비파사나의 힘으로 탐·진·치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 · 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비파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 그 자체이지 결코 특정한 수행기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초기불교 이해」 (각묵 스님, 초기불전연구원) 참고.

*사념주관(四念住觀) ; (산스크리트어) catvāri smrty-upasthānāni (팔리어) cattāro sati-patthānāni]

신 · 수 · 심 · 법(身·受·心·法) 네 가지 대상에 혼신의 정력을 기울여 정확하고 빈틈없고 면밀하게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주의를 집중하여 관찰하는 수행. 이 수행은 자신의 탐욕과 모든 번뇌를 제거하여 최상의 지혜,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네 종류의 수행 방법. 네 가지의 관상법(觀想法). 네 종류의 실상을 바르게 관찰하여 마음이 고요해지는 내관(內觀). 신념주(身念住, 身念處) · 수념주(受念住, 受念處) · 심념주(心念住, 心念處) · 법념주(法念住, 法念處)의 네 가지에 대해 관찰하는 수행.

 

①신념주(身念住, 身念處) : 부모에게 받은 육신이 부정(不淨)하다고 관하는 것.

②수념주(受念住, 受念處) : 우리의 마음에 낙(樂)이라고 하는 음행·자녀·재물 등을 보고, 낙이라고 하는 것은 참 낙이 아니고, 모두 고통(苦痛)이라고 관하는 것.

③심념주(心念住, 心念處) :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변화 생멸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

④법념주(法念住, 法念處) : 위의 셋을 제하고, 다른 만유에 대하여 실로 자아(自我)인 실체(實體)가 없으며, 또 자아가 없으므로 소유도 없다고, 무아관(無我觀)을 하는 것.

 

신 · 수 · 심 · 법(身·受·心·法) 네 가지를 따로따로 관하기도 하고[별상념처관 別相念處觀], 신수심법(身受心法)은 부정(不淨)하며, 고(苦)이며, 무상(無常)하며, 무아(無我)라고 총합하여 관하기도[총상념처관 總相念處觀] 한다.

 

'염주(念住)'의 염(念)에 해당하는 팔리어 사티(sati)는 '과거를 기억하는 기능'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앞에 나타난 모습, 현재에 대한 주의 집중, 분명한 알아차림, 충분히 깨어있음, 주의 깊음, 마음이 대상을 챙김(마음챙김)'의 뜻이 있다. 주(住)에 해당하는 파타나(팔리어 patthāna)는 '긴밀하고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현장법사(600~664) 이전에 번역한 경전의 번역을 말하는 구역(舊譯)에서는 사념처(四念處)라 하고, 신역에서는 사념주(四念住)라고 함. 사념처관(四念處觀)과 같음. 사의지(四意止), 사지념(四止念), 사념(四念), 사념수관(四念隨觀)이라고도 한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부정관(不淨觀) ; 몸이 청정하지 못한 것을 관찰하는 것. 초기불교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수행법으로, 특히 탐욕이라는 번뇌를 물리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몸의 더러움을 관찰하여 몸에 대한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탐욕을 없에게 한다. 부정상(不淨想)이라고도 한다.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다섯 가지 수행법[五停心觀] 중 하나로 첫 번째인 부정관은 탐욕, 두 번째인 자비관(慈悲觀)은 분노, 세 번째인 연기관(緣起觀)은 어리석음, 네 번째인 계분별관(界分別觀)은 아집(我執), 다섯 번째인 수식관(數息觀)은 산란한 마음을 대치하기 위해 닦는다. 또한 사념처(四念處) 중 신념처(身念處)의 여러 가지 수행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녹장외도(鹿杖外道) ; 녹장(鹿杖) · 녹장사문(鹿杖沙門) · 녹장범지(鹿杖梵志) · 물력가난제(勿力伽難提) · 미린전타라(彌隣陀羅) · 녹난제(鹿難提)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교설한 부정관(不淨觀)을 잘못 이해한 비구들이 세상에 대해 싫어하고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 녹장에게 찾아와서 목숨을 끊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 대가로 의발(衣鉢, 가사와 발우)을 주겠다고 하는 말에 욕심이 난 녹장이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살해하였다. 비구를 죽인 칼을 씻으러 강에 갔던 녹장은 천마(天魔)로부터 해탈하지 못한 이를 해탈하게 한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하는 칭찬을 받자 더 큰 공덕을 얻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비구들을 찾아다니며 해탈시켜 주겠다고 하였고, 많은 비구들이 그에게 요청하여 모두 60여 명을 살해하였다.

 

부처님께서 이 사실을 들어서 아시고 대중을 모아 놓은 후,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入出息念 : 數息觀)을 설법하였다. 그리고 살생은 어떠한 경우에도 죄가 된다는 것을 교설하고 4바라이(四波羅夷)의 제3에 해당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제정하였다.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식사)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드는데, 나무에는 안팎에 칠(漆)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한다.

응량기(應量器)란 법에 응하는 또는 1명의 식량에 마땅한 그릇이니 먹을 만큼의 분량을 담는 그릇이고, 또 남의 공양을 받기에 마땅한 수행과 덕을 갖춘 성현(聖賢)이 사용하는 그릇이란 뜻이다.

*가사(袈裟) : 잡색(雜色) • 염색(染色) 곧 순색이 아닌 옷을 말한다。인도는 더운 곳이므로 속인(俗人)들은 모두 흰 옷을 입는데, 출가한 이는 그 옷을 달리하기 위하여 염색하되 검박한 빛으로 하게 되었다.

또한 품질이 좋은 새 옷감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이것 저것을 주워 모아서 누더기같이 만들었는데, 크고 작은 세 가지(三衣)가 있어서, 다섯 폭으로 된 것(五條)은 일할 때에 입고, 일곱 폭으로 된 것(七條)은 보통 때에 입고, 아홉 폭(九條)으로부터 스물 다섯 폭(二十五條)까지는 법회와 예식에 입게 된다. 그러므로 인도의 승려들은 이 세 가지밖에 다른 옷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가 기후 풍토와 인정 풍속이 같지 아니한 여러 지방에 전파되면서, 가사의 빛도 황색 또는 적색의 보기 좋은 빛으로 변하게 되고, 바탕도 비단으로 하게까지 되었다。그 모양도 온갖 복덕이 이 법복(法服)으로 말미암아 심어지고 성숙(成熟)되는 것이라 하여, 복을 심는 밭(福田)을 상징(象徵)해서 규모가 반듯하고 법다운 밭두렁과 같은 것으로 하게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불교를 신앙하는 여러 나라와 그 종파에 따라 모양도 달리 한다.

또한 북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추운 곳이기 때문에, 보통 입는 의복 위에 장삼(長衫)을 입고, 그 위에 다시 가사를 입게 되므로, 가사와 장삼이 함께 법복이 된다.

*포살(布薩) ; 산스크리트어 poṣadha, 산스크리트어 upavāsa, 산스크리트어 upavasatha, 팔리어 uposatha의 음사. 단식(斷食)·정주(淨住)·선숙(善宿)·근주(近住)·장정(長淨)이라 번역.

출가자들은 음력 매월 15일과 29일(또는 30일)에 한곳에 모여 계율의 조목을 독송하면서 그 동안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고, 재가(在家)의 신도는 육재일(六齋日) 곧 음력 매월 8·14·15·23·29·30일에 하루 낮 하룻밤 동안 팔재계(八齋戒)를 지키는 일.  포사타(布沙陀,哺沙陀), 포쇄타(褒灑陀)라고도 쓴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1분 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선지피 ; ①선지. 짐승을 잡아 죽여서 받은 피. 식어서 굳어 덩어리진 피를 말한다. ②다쳐서 선지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선요(禪要) ; 『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매카리 ; 매가리. 맥아리. 맥(脈 기운이나 힘)을 속되게 이르는 말.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육조, 청원행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조동종(曹洞宗) ; 중국의 선종은 달마(達磨)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때의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 크게 성했다. 조동종은 이 혜능 문하인 청원행사(靑原行思)의 계통으로부터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와 그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 839-901)에 의해 형성된 종파이다.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은 자신이 본래 부처의 청정한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묵묵히 좌선만 하면 저절로 그 청정한 성품이 드러난다는 묵조선(默照禪)을 선양하였다.

 

이 이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법안 문익(法眼文益)선사의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 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동」은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동이겠지만, 「조」는 동산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이 그 종지를 크게 밝혀서 완성한 때문이라 하는 말도 있다. 중국의 문법에 선후와 시종을 거꾸로 붙이는 전례가 아주 없는 바도 아니지만 제자의 이름을 스승의 이름 위에 놓은 것이 당연한 경우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송나라 이후에는 조계산(曹溪山)의 「조」로써 육조의 바른 갈래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왔다. 또한 조산 본적의 조산도 조계산을 사모하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것이다. 그 가풍은 정편 오위(正偏五位)를 세워서 아주 세밀하고 말과 행실이 서로 일치하고, 이치와 일이 무르녹게 합하여, 본래면목으로써 종지(宗旨)를 삼는다.

일본의 조동종은 도원(道元, 1200-1253)이 1223년 송나라에 들어가 중국 조동종의 선승인 여정(如淨)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계승하였다. 도원 선사는 1227년 귀국하여 일본에 조동종을 전파하였다.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팔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ㅅ/생사심2020. 4. 25. 20:30

생사심(生死心) (No.475)—(게송)此事本無生~ | 일대사(一大事), 생사(生死) 문제 | 생사는 본래 없다 | 윤회의 근원인 생사심을 깨뜨릴라면 의단이 독로하게 화두를 들어라.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정리.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16분 5초)

 

[법문] 송담스님(No.475)—92년 6월 첫째 일요법회(92.06.07) (용475)

 

차사본무생(此事本無生)하니  수연처처명(隨緣處處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신료여사지(信了如斯旨)하면  귀가파문정(歸家罷問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차사(此事)는 본무생(本無生)이여  수연처처명(隨緣處處明)이다.

이 일은 본래 남이 없어[無生]. 그러니 인연 따라서 곳곳마다 다 밝더라.

 

차사(此事). 생사(生死). 일대사(一大事).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 생사(生死) 문제.

 

이 생사 때문에 생(生), 나서 죽고 나서 죽고 하는 이 생사, 일대사 문제 때문에 우리 부처님께서는 삼천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을 하셨고, 역대조사(歷代祖師)도 이 일대사 문제 때문에 이 사바세계에 오셨고, 우리 이 법보제자 형제자매들도 이 일대사 문제 때문에 오늘 임신년 6월 첫째 일요법회에 또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생사 문제는 그 도리(道理)를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생사고해(生死苦海)를 윤회(輪廻)를 하지만, 그러나 그 도리를 확실히 깨달아 버리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남이 없어[本無生]’

 

분명히 우리는 그 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생로병사(生老病死), 이 세상에 태어나서 늙어서 병들어서 죽는 이 고통스러운 생애를 가지고, 한 생만 그런 게 아니라 무량겁(無量劫)을 그렇게 살아왔고 또 무량겁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들은 그 도리를 분명히 깨달아서 생이, 남이 없다고 하는 것,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설해 주셨습니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고, 여름에는 더웁고, 겨울에는 춥고 이러한 상황이 남이 없는[無生] 도리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어.

 

봄에 꽃이 피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눈이 와.

확실히 우리 눈에는 무상(無常)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 우리 눈에 무상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또 우리 인생,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분명히 부모의 인연으로 이 세상에 몸을 받아났다가 차츰차츰 자라서 결국은 늙어서 병들어 죽지마는, 그 춘하추동 순환하는 것이나 사람이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이나 관점에 따라서는 똑같은 것이여.

 

똑같이 무상하고 믿을 수 없는 허망한 것으로 보면 한없이 무상하고 허망한 것이지만, 그 본질에 들어가서는 다맛 인연 따라서 변화가 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조금도 불어나거나 줄어들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봄에 꽃이 핀 도리나, 가을에 단풍이 지는 도리가 바로 거기에 진리가 표현되고 있다. 진리가 설해지고 있다.

 

사람이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도 다못 인연 따라서 그러한 변화가 있을 뿐이지 그 본바탕에 들어가서는 남이 없고, 남이 없기 때문에 또한 멸(滅)도 없다 이거거든.

아직은 우리는 그러한 이치를 확실히 체달(體達)은 못했지만 모든 부처님과 성현들이 한결같이 그것을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이 생사 속에 본래 생사는 없다’고 하는 것을 콱! 믿고, 다못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해 나가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정말 뜻있게 알뜰하게 살아갈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신료여사지(信了如斯旨)하면, 이와 같은 뜻을 확실히 믿어버리면,

귀가파문정(歸家罷問程)하리라. 자기의 본고향(本古鄕)에 돌아가는데 길을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있는 자리, 지금 하고 있는 일,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거거든.

 

이와 같은 도리를 믿지 아니하면 밤낮 타향 객지에서 자기 고향이 어디가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이 사람 보고 물어보면 이쪽으로 가라고, 저 사람 보고 물어보면 저쪽으로... 갈팡질팡. 그날 하루를 공연히 다리만 아프게 방황하고 안정이 없는 종잡을 수 없는 피로한 하루를 살아가듯이.

인생이라는 게 대관절 해도 해도 그 일이 끝도 없고, 한 일을 겨우 겪으면 또 한 어려운 일이 또 앞을 가로막고. 흥망성쇠와 빈부귀천과 그러한 감내(堪耐)하기 어려운 생로병사의 마주치는 곳에서 한(恨) 많은 인생을 살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법에 의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어떠한 어려운 일, 어떠한 괴로운 일, 어떠한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즉각 마음을 가다듬고 화두를 들고 살아가면 어떠한 일을 닥치더라도 상관이 없거든.

화두를 들고 자기의 근본을 탁! 가다듬는다면 어려운 일, 슬픈 일, 괴로운 일, 억울한 일도 다 풀어 나갈 수가 있고, 그 사람 앞에는 풀리지 않는 일이라고는 없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일을 지혜롭게 자비롭게 처리해 나가면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거거든.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 나가는 데 관해 요긴한 법문을 간곡히 해 주셨는데,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생사의 고해 속에서 무량겁을 이렇게 오고, 또 앞으로 무량겁을 생사고해 속에서 몸부림을 쳐야 할 그 근원이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하는 우리의 생사심(生死心).

눈으로 보고 생각이 일어나고, 귀로 듣고 중생의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이것이 바로 생사심(生死心)인데, 그 생사심을 결국은 그놈을 깨뜨려 버려야 하는데, 억지로 그놈을 깨뜨리려고자 한다고 해서 깨뜨려지는 것이 아니거든.

 

그 생사심을 깨뜨릴라면은 결국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단속을 해라. 화두,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를 들고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것이 생사심을 깨뜨리고, 그 마음길을 끊어버리는 가장 중요하고도 요긴하고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여.

 

생사심(生死心)을 억지로 그놈을 누를려고 한다든지, 억지로 끊을라고 한다든지, 억지로 참으려고 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더 일어나는 것이여. 무슨 생사심, 무슨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즉각 ‘이뭣고?’ 또 일어나면 또 ‘이뭣고?’

 

자꾸 ‘이뭣고?’ 간절한 의심으로 ‘이뭣고?’를 거각(擧却)해 나가면 결국은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화두가 들리게 되고,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터억! 독로하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결국은 그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조사관(祖師關)을 뚫게 되고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처음~16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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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차사본무생~’ ; 『태고집(太古集)』 (雪栖편, 김달진 역주 | 세계사) p205 ‘무능(無能)’ 참고.

*무생(無生) ; ①생겨남[生]이 없는 것[無]. 일체법이 생겨나고 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것도 자성적 실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생겨나거나 멸하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

②성문사과(聲聞四果)의 하나인 아라한(阿羅漢 arhat)의 한역어. 삼계의 번뇌를 여의어 다시 삼계에 목숨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에서 무생이라고 한다.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생사대사(生死大事) ;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의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이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도리(道理) ; 이치(理致). 생기고 없어지고 변화하는 모든 만유(萬有)를 꿰뚫고 있는 법칙.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진리. 진리와 결합된 이론이나 증명. 타당한 이치.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3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 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생사 문제는 그 도리(道理)를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생사고해(生死苦海)를 윤회(輪廻)를 하지만, 그러나 그 도리를 확실히 깨달아 버리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남이 없어[本無生]'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체달(體達 몸 체/통달할 달) ; ①몸[體]으로 직접 통달(通達)함. 몸소 경험하여 막힘이 없이 트이다. ②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다못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해 나가면' ; '한 생각 단속[一念團束].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고향(本古鄕) ; 본향(本鄕). 고향.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감내(堪耐 견딜 감/견딜 내) ; 어려움을 참고 견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를 들고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것이 생사심을 깨뜨리고, 그 마음길을 끊어버리는[心路絶] 가장 중요하고도 요긴하고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여' ; 심로절(心路絶) ; 사량분별로 이리저리 따지고 헤아리는, 마음[心]으로 모색할 길[路]이 끊어졌다[絶]는 말. 심사로절(尋思路絶). 심식로절(心識路絶).

우리의 육근(六根), 육식(六識)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경계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고 자꾸 화두를 들어 나가면 마음길은 저절로 거기서 끊어져 들어간다. 마음길 끊어짐으로써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고,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확철대오(廓徹大悟)가 가까워지는 것이다.

 

[참고 ❶] 『전심법요(傳心法要)』 (황벽 선사)

空却見聞覺知 卽心路絶無入處 但於見聞覺知處認本心 然本心 不屬見聞覺知 亦不離見聞覺知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비우면 마음으로 모색할 길이 끊어져 들어갈 곳이 없다. 다만 견문각지하는 곳에서 본심을 알아차릴 일이다. 그러나 본심은 견문각지에 속하지 않고, 또한 견문각지를 여의지도 않는다.

 

[참고 ❷] 『무문관(無門關)』 (무문 혜개 스님) 제1칙 ‘조주구자(趙州狗子)’ .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61. *絶=絕(끊을 절).

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附木精靈

 

참선을 하려면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하고, 오묘한 깨달음은 마음길이 끊어져야 한다. 조사의 관문을 꿰뚫지 못하고 마음길이 끊어지지 못하면 모두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붙은 도깨비일 따름이리라.

 


[참고 ❸] 송담스님(No.427)—90년 10월 첫째일요법회 (2분 20초)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이론적인 연구나 추구보다는 바로 화두 공안에 입각해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 가야만 하루 하면 하루, 한 시간 하면 한 시간, 일 분 하면 일 분, 한 번 화두를 듦으로써 마음길이 일 분 동안 끊어진다면 그만큼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 마음길이 끊어짐으로써 그것이 바른 수행이고, 마음길이 끊어짐으로써 조사관을 타파해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다.

 

왜 그러냐?

생사(生死)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삼세육추(三細六麤)의 생각, 그 생각으로 인해서 온갖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업(業)을 지어 가지고 거기서 생사윤회를 하기 때문에 생사윤회를 끊으려면은 우리 마음으로부터서 일어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단속을 해야 한다.

 

단속은 덮어 놓고 그놈을 끊으려고 그러고 억누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계(境界)를 당하든지—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우리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식(六識)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경계에 즉(卽)할 때마다 화두를 들고 자꾸 화두를 들어 나가면 화두를 듦으로써 마음길은 저절로 거기서 끊어져 들어간다 그말이여.

마음길 끊어짐으로써 의단이 독로하게 되고,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확철대오(廓徹大悟)가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말이여.(27분21초~29분41초)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공안(화두)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공안(화두) 하나를 받아서, 그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ㅅ/소소영령2020. 4. 22. 11:16

소소영령(No.297)—(게송)因能生所所生能  能所俱忘生不生  老蚌吸乾鯨海水  珊瑚枝上月三更 | 법문 듣고, 참선해야만 생사 문제를 해결.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10분 55초)

 

[법문] 송담스님(No.297)—86년 법보재 법회(86.03.16.음) (용297)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하고  능소구망생불생(能所俱忘生不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노방흡건경해수(老蚌吸乾鯨海水)하니  산호지상월삼경(珊瑚枝上月三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이요. 능(能)으로 인해서 소(所)가 생겨나고, 소(所)로 인해서 능(能)이 생겨난다. 능(能)이라 하는 것은 주체 · 주관이고, 소(所)라고 하는 것은 객체 · 객관을 말한 것입니다.

내가 ‘내’라고 한 이 능(能), 주체심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모든 바깥 경계가 인식되어 지는 것이고.

또 객관 세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그것으로 인해서 주체심(主體心)이 동(動)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경계를 만나면 육식(六識)이 생기거든.

그 식(識)이 없다면 경계(境界)를 봐도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안 해. 식이 없으면 경계가 있다 해도 일어날 것이 없고, 경계가 없다면은 식이 있어도 발생할 계기를 갖지를 못해.

그래서 육식(六識)과 육진(六塵)은 표리(表裏)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이여.

 

능소구망생불생(能所俱忘生不生)이여. 그래서 능(能)과 소(所)가 함께 없어져 버리면, 주체와 객체가 동시에 공(空)해 버리면 생(生)하되 생(生)할 것이 없어.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여. 뻑뻑이 머무른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항상 이 주관과 객체가 서로 어울리고 서로 얽히고 서로 뒤범벅이 되어서, 이놈이—어린애들 싸우는데, 한 놈이 위에서 누르고 밑에 눌렸던 놈이 또 위로 뒤집어지고 그래가지고 위에서 누르다가 또 밑으로 깔리고 하듯이, 그 작업으로 인해서 무량겁(無量劫)토록 생사고해(生死苦海)의 세계가 벌어지는 것인데.

 

노방흡건경해수(老蚌吸乾鯨海水)여. 큰 조개! 조개가 있어서 온 바닷물을 한 입에 다 들어마셔 버려. 그래가지고 바닷물이 바짝 마르도록 바닷물을 다 들어마셔 버리면.

산호지상월삼경(珊瑚枝上月三更)이여. 바다 밑에 그 아름답고 찬란한 산호 가지가 삼경(三更) 달에 빛이 나더라.

 

여기서 이 노방(老蚌)이라고 하는 게, 늙은 조개가 얼마나 크면 그 한없이 깊은 그 넓고 깊은 그 바닷물을 쫘악 다 들어마셔 버릴 것이냐 그말이여.

우리는 이 크고도 큰 늙은 조개, 인자 조개 새끼 쬐그만 것이 아니라 몇억 겁을 갖다가 커서 커 가지고 한번 쭉 들어마셔 버리면 바닷물이 그 조개 속으로 쏴악 다 들어가 버릴 만큼 그러한 늙은 조개가 어디에 있느냐?

 

비단 여기서는 바닷물을 둘러 마신다고 했지만 바닷물뿐만이 아니라, 이 시방(十方)에 가득차 있는 무한대(無限大)한 이 허공, 해와 달과 저 끝없는 하늘나라에 있는 수많은 별까지라도 한목 다 둘러 삼킬 수 있는 그러한 무서운 조개, 참 고조 할아버지보다도 더 무서운 조개가 우리 이 몸뚱이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조개는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히지도 않고,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으면서 우리의 콧구녁으로도 들락거리고, 우리의 눈으로도 드나들고, 우리의 귀로도 드나들고, 팔만사천 모공으로 드나들고 항상 우리의 눈앞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라 그말이여.

 

그놈이 형투리가 있는 놈 같으면, 모양과 빛깔이 있는 놈 같으면 제 아무리 큰들 한도가 있는 것이지만, 이놈은 빛깔과 모양이 없는 것이라 이것이 ‘크다’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어.

크고 작은 것을 떠나, 크기로 말하면은 우주를 다 둘러 삼키고도 한이 없고, 작기로 말하면은 바늘 꽂을 땅도 없는 것이니 그래서 이것이 신기하고도 묘(妙)하고 소소영령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도 왔다갔다하고, 무량겁 이전에 생겨난 때가 없이, 무량겁 미래에도 없어질 때가 없어.

그러한 물건을 우리는 이 똥주머니 속에, 이 가죽푸대 속에 항상 그놈이 살아 있다 그말이여.

 

몸뚱이를 부모한테 받아날 때에 그놈도 같이 왔고, 이 몸뚱이가 죽어도 그놈은 없어지는 법이 없이 다시 또 새 옷을 갈아입어. 생사(生死)에 걸림이 없어, 그놈은. 밤낮 옷을 갈아입지마는 그놈은 생할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는 것인데.

 

그놈을 깨달아야지, 그놈을 깨닫는 것이 불법(佛法)인데, 그놈을 찾는 것이 참선(參禪)이고, 그것을 깨닫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고, 그 도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해탈(生死解脫)이요, 그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거든.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우리는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생사윤회를 해탈을 하는 것입니다.

 

 

위패(位牌)에다가 이름을 써서 벽에다 거는 것이야 어디다 못 걸겠습니까? 한국에 수천 개 사찰이 있으니 사찰에 법당에 아무데라도 다 걸 수가 있고, 새로 절을 지어서 걸 수도 있고, 여러분 가정에다도 뭐 얼마든지 걸 수가 있어.

 

이름을 써서 거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나 또는 그렇게 위패로 모셔진 영가(靈駕)나 법문(法門)을 듣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바로 우리의 그 늙은 조개를 갖다가 바로 깨달아야 되거든.

바로 깨닫는 참선 법문을 듣고, 참선 수행을 해야만 이 생사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30분6초~41분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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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인능생소구생능~’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境由能境 能由境能’ p110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귀(耳根)·코(鼻根)·혀(舌根)·몸(身根)·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六境)과 같음.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진(塵)이라 함.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 희로애락 · 빈부귀천 · 시비이해 · 삼독오욕 · 부모형제 · 춘하추동 ·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 · 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식(識) ; 산스크리트어 vijñāna 팔리어 viññāṇa 대상을 식별하고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인식 작용. 인식 주관.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8식설(八識說)·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공(空) ; 잇달아 일어나는 분별과 망상이 끊어진 상태. 번뇌와 분별이 소멸된 상태. 분별과 차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삼경(三更 석 삼/밤 시각 경)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이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형투리(形투리) ; 물건의 모양과 테두리를 구어적으로 이르는 말.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견성의 성(性)은 본성(本性), 자성(自性), 본심(本心), 법성(法性) 등과 같으며, 이런 맥락에서 견성을 견자심불성(見自心佛性), 견불성(見佛性), 견자본성(見子本性), 견법성(見法性)이라고도 한다.

*억겁다생(億劫多生) ; 무한히 길고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태어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세상).

*위패(位牌 지위·높여서 어떤 사람 위/명찰·위패 패) ; 죽은 사람의 위(位 이름 · 지위. 높여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를 모시는 나무패.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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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선(禪)과 교(敎)2020. 4. 12. 22:21

선(禪)과 교(敎) (No.602)—『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9장 | 불설일자(不說一字),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에 대한 확실한 신념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 내 마음에 부처를 찾는 방법이 '이뭣고?'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

 

*선(禪)과 교(敎) ;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선(禪)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敎)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8~29, 34~35. (가로판 p29~30, 35~36)

世尊 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 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주해) 三處者 多子塔前分半座 一也 靈山會上擧拈花 二也 雙樹下槨示雙趺 三也 所謂迦葉 別傳禪燈者 此也 一代者 四十九年間所說五敎也 人天敎 一也 小乘敎 二也 大乘敎 三也 頓敎 四也 圓敎 五也 所謂阿難 流通敎海者 此也.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이 세째이니, 이른바 가섭존자가 선(禪)의 등불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 이것이다.

한평생 말씀하신 것이란, 49년 동안 말씀하신 다섯 가지 교(敎)인데, 첫째는 인천교, 둘째는 소승교, 셋째는 대승교, 넷째는 돈교, 다섯째는 원교이다. 이른바 「아난존자가 교의 바다를 널리 흐르게 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然則禪敎之源者 世尊也 禪敎之派者 迦葉阿難也 以無言 至於無言者 禪也 以有言 至於無言者 敎也 乃至心是禪法也 語是敎法也 則法雖一味 見解則天地懸隔 此 辨禪敎二途.

 

그러므로 선(禪)과 교(敎)의 근원은 세존이시고,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니,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선(禪)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敎)이다.

또한 마음[心]은 선법(禪法)이고 말[語]은 교법(敎法)이다. 법은 비록 한맛이라도 견해는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떨어진 것이니, 이것은 선과 교의 두 길을 가려 놓은 것이다.

 

 

是故 若人 失之於口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이 모두 교(敎)의 자취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禪旨)가 되리라.

 

(주해) 法 無名故 言不及也 法 無相故 心不及也 擬之於口者 失本心王也 失本心王則世尊拈花 迦葉微笑 盡落陳言 終是死物也 得之於心者 非但街談 善說法要 至於燕語 深談實相也 是故 寶積禪師 聞哭聲 踊悅身心 寶壽禪師 見諍拳 開豁面目者 以此也 此 明禪敎深淺.

 

법(法)은 이름이 없는 것이므로 말로써 미치지 못하고, 법(法)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무엇이나 말하여 보려고 한다면 벌써 본심(本心)을 잃은 것이요, 본심을 잃게 되면 부처님이 꽃을 드신 것이나 가섭존자의 미소가 모두 쓸데없는 이야깃거리만 될 것이다.

마음에서 얻은 사람은 장꾼들의 잡담이라도 훌륭한 설법이 될뿐 아니라, 새소리와 짐승의 울음까지도 진리를 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보적선사는 통곡하는 소리를 듣고 깨쳐 춤추고 뛰놀았으며, 보수선사는 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는 것을 보고 참 면목을 깨친 것이 이 까닭이다. 이는 선(禪)과 교(敎)의 깊고 옅은 것을 밝힌 것이다.

 

(9분 36초)

 

[법문] 송담스님(No.602)—1998년 2월 첫째일요법회(98.02.01) (용602)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하시기를, 꿀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꿀은 겉을 먹으나, 파고 속을 먹으나, 저 밑바닥을 먹으나, 동서사방 아무 쪽에서 뜯어서 먹어봐도 다 달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이냐 하면은 불법(佛法)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49년 동안 설하신 모든 경전이 어느 구절 어느 토(吐) 하나라도 다 진리의 말씀이고, 다 좋은 말씀이고 거룩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부처님께서 처음에 보리수(菩提樹) 하에서 깨달으셔 가지고 삼칠일(三七日) 동안 설하신 것이 <화엄경(華嚴經)>이시고 [最初華嚴三七日],

그다음에, 화엄경을 설하셔도 중생들이 아직 성숙이 안되어가지고 못 알아들으니까 <아함경(阿含經)>을 12년 동안 설하시고, 그다음에 조끔 중생의 근기(根機)가 나아지니까 <방등경(方等經)>을 8년 동안 설하시고 [阿含十二方等八],

그다음에 또 수승이 되니까 21년 동안 <반야경(般若經)> 육백 부(六百部)를 설하셨습니다. [二十一載談般若]

 

그러한 다음에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이다. 마지막에 가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임종하실 때에 <열반경(涅槃經)>, 최후에 <유교경(遺敎經)>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방대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法)을 설하시고도 그 구절구절이 다 거룩하고 훌륭한, 모든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그렇게 방대한 법문을 설하셨지만, "내가 녹야원(鹿野苑)에서 최초에 설법(說法)험으로부터 마지막 이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에 단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노라"

거기에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을 설(說)하신 것입니다.

 

그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이 오늘날 우리가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언하대오(言下大悟)하는 활구참선 법문으로 맥락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화엄경> <법화경> <원각경> <금강경> 그 좋은 법문(法門)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공부를 안 하고 덮어놓고 '이뭣고?'만 해 갖고 되냐?

육조(六祖) 스님 같은 분은 육신보살(肉身菩薩)로 보살 화현(化現)이기 때문에 일자무식(一字無識)이었지마는, 언하(言下)에 대오(大悟) 해가지고 그런 부처님으로부터 33대의 법등(法燈)을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그런 분이 몇 분이나 되느냐?

우리 말세(末世)에 태어난 범부중생(凡夫衆生)들은 '이뭣고?' 해 갖고 안된다. 어쨌든지 경전공부를 해야 하고, 또 '아미타불'을 불러서 죽어서 극락세계라도 가야지 '이뭣고?' 밤낮 해봐라. 누가 요새 세상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

 

이렇게 그럴싸한 말을 가끔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경전이 정말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보면, 내 마음을 닦어서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고 불법(佛法), 부처님[佛]과 법(法)과 우리 중생(衆生)이 바로 이 세 가지가 차별(差別)이 없다’고 하는 것을 구구절절이 말씀을 하신 것이고, 그 내 마음에 부처를 찾는 방법이 '이뭣고?'거든.

 

'이뭣고?'가, 유식하고 아이큐가 높고 그렇다고 해서 '이뭣고?' 꼭 잘하는 게 아니여.

낫 놓고 기역자를 몰라도 그 올바른 방법으로—첫째는 이 법(法)을 철저히 믿고 '참 부처님은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하는 그것을 철저히 믿기만 하면—올바른 방법, 올바른 방법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을 이론적으로 따지지 아니하고, 꽈악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의 본성(本性),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달을 수가 있다고 믿고 그렇게 실천해 나가면 반드시 이것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수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하면은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물이 흘러가면 그 물을 거슬러서 올라가면 최후에 그 본원(本源), 물이 발생하는 그 발생하는 샘을 찾을 수 있듯이,

번뇌망상,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팔만사천 번뇌가 발꾸락에서 난 것도 아니고, 등어리에서 난 것도 아니고,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마는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본성(本性) 자리에서 그것이 나온 것이라, 그놈 일어날 때마다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착...

 

처음부터서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꾸자꾸 하다 보면은 저절로 화두(話頭)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고,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일체처(一切處)에서 바로 항상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꾸준히 해나가면 반드시 그런 때가 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本性)을 찾을려고 노력을 해야 그 사람은 불법(佛法)을 옳게 믿는 것이고, 옳게 믿어야 옳게 수행(修行)을 할 수가 있어. 그래야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해야 자기도 중심(中心)이 잡히게 되는 것이고, 탐심과 치심과 허영(虛榮)과 허욕(虛慾)의 노예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가정을 다스리며, 자기를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 머리만 좋아가지고 고시에 파쓰(pass) 했다고 해서 훌륭한 판검사가 되고 훌륭한 변호사가 될 수 있으며, 시험에 행정고시 합격했다고 해서 자기를 바로잡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훌륭한 관리가 되며 훌륭한 장관이 되며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사리사욕(私利私慾)에 꽈악! 쩔은 인간이 어떻게 바른 정치를 하냐 이거여.

 

이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참선(參禪)을 하니까 나를 뽑아 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내가 또 정치 할 생각도 없고, 대통령에 나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누구든지 참선하는 사람을 꼭 뽑으라' 그런 얘기도 아닙니다.

 

정치를 바로 하려면은 바른 법을 믿고, 자기 마음을 닦을 줄 아는 사람이 해야 하고,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자녀들이 앞으로 훌륭한 정치가가 되고 훌륭한 법률가가 되고 훌륭한 학자가 될라면, 어려서부터 젊어서부터 불법(佛法)을 믿고 자기 마음 닦는 공부를 하도록 그렇게 지도(指導)를 하시라는 뜻으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43분1초~52분3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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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 후한(後漢)의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이 함께 한역.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보시(布施), 애욕의 단절 등 불교의 요지를 42장에 걸쳐 적절한 비유로써 간명하게 풀어 설한 경(經). 최초의 한역(漢譯) 불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십이장경 ;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9장(第三十九章)

佛言 學佛道者 佛所言說 皆應信順 譬如食蜜 中邊皆甛 吾經亦爾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도(佛道)를 배우는 사람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모두 마땅히 믿고 따라야 한다. 비유하자면 꿀을 먹을 때에 한 가운데나 가장자리가 모두 단맛인 것과 같이, 나의 경전(가르침)도 또한 그러하다"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 ; 수(隋)나라 때 천태 지의(天台智顗 538-597) 스님이 부처님의 방대한 가르침을 설한 순서에 따라 분류[五時]한 것. 천태종의 교판(敎判, 교상판석敎相判釋).

①화엄시(華嚴時) :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직후 21일간 화엄경을 설하시고(화엄최초삼칠일 華嚴最初三七日),

②녹원시(鹿苑時), ③방등시(方等時) : 12년간 녹야원에서 아함경을, 8년간 유마경등의 대승경전을 설하시고(아함십이방등팔 阿含十二方等八)

④반야시(般若時) : 21년간 여러 반야경을 설하시고(이십일재담반야 二十一載談般若),

⑤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 : 8년간 법화경을, 입멸 때 1일간 열반경을 설하셨다(종담법화우팔년 終談法華又八年).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내가 녹야원(鹿野苑)에서 최초에 설법(說法)험으로부터 마지막 이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에 단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노라' ;

[참고] 서산대사의 『선교석(禪敎釋)』 (淸虛 休靜撰)에서.

世尊偈云 始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於是二中間 未曾說一字 此固敎外別傳之謂也 智度論

 

세존은 게송으로 이르시되 ‘처음 녹야원(鹿野苑)으로부터 마지막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말하는 것이다. 『지도론』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육조(六祖) : (638 ~ 713)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

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스물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 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麈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麈埃)」라고 지었다.

 

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십팔 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칠십육 세로써 입적하였다。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육신보살(肉身菩薩) ;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 그대로 보살의 위치에 이른 사람.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법등(法燈 부처님의 가르침 법/등·불법 등) ; ①법(法,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燈불)에 비유한 말. 법이 무명(無明)과 미혹(迷惑)의 어둠을 깨뜨리는 것이 마치 암흑을 비추어 밝히는 등불과 같으므로 이와 같이 비유한다.

②부처님이나 조사, 또는 불법(佛法)을 수행하는 스님을 가리키기도 한다.

③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등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면면히 전해지는 등등상속(燈燈相續), 등등상전(燈燈相傳)의 뜻으로 전등(傳燈)과 통하는 말.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팔만사천 경전이 정말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보면, 내 마음을 닦어서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고 불법(佛法), 부처님[佛]과 법(法)과 우리 중생(衆生)이 바로 이 세 가지가 차별(差別)이 없다’고 하는 것을 구구절절이 말씀을 하신 것이고, 그 내 마음에 부처를 찾는 방법이 '이뭣고?'거든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나타낸 말.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실참실오(No.220)—실다웁게 정진을 하고 실다웁게 깨닫는 것은 마치 팔십 고령의 노인이 바람을 거슬르고 물을 거슬르면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로 만든 배를 끌고 올라간 거와 같다. 참선하는 사람은 아무 조건도, 되니 안되니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이를 악물고 끌어 올려라.

(게송)도안종래불용선~ | 촉목보리(觸目菩提). 눈으로 뭣을 탁! 보면 보는 그 찰나에 분명하다.

 

*실참실오(實參實悟)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깨달음.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실참(實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무잡(純一無雜)할 수가 없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16분 40초)

 

[법문] 송담스님(No.220)—1983년(계해년) 동안거결제 법회(83.11.19) (용220)

 

실다웁게 정진을 하고 실다웁게 깨닫는 것은 마치 팔십(八十) 고령에 할아버지, 그 노인이 바람을 거슬르고 물을 거슬르면서 한 척의 배, 한 척의 밑 없는 쇠로 만든 배를 끌고 올라간 거와 같혀.

 

배라고 하는 것이 밑이 없으면은 나무로 만든 배도 가라앉아 버리는데, 쇠로 만든 배는 더 말할 것이 없거든.

바람을 따라서 뭣이던지, 바람을 등지고 가야 바람의 기운을 타서 수월하고, 물도 물의 흐름을 따라서 배를 끌고 내려가야 한결 수월할 텐데, 쇠로 만든 배, 그나마 밑이 빠진 배를 바람도 거슬러—바람을 거슬른다는 것은 바람을 안고 막 나아간다 그말이여. 물도 역수(逆水)를 해서, 물이 흐르는 반대 방향으로 향해서 밑 없는 쇠 배를 끌고 간 거와 같다하니 그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이냐 그말이여.

 

그나마 그 배를 요새 무슨 장사(壯士)와 같은 그런 그 장사가 끌고 간다면 혹 또 모르는데, 젊고 혈기 방장(血氣方壯)한 젊은 청년이라면 또 모르는데, 팔십 먹은 아주 기진맥진(氣盡脈盡)한 그러한 노인이 밑 없는 쇠로 만든 배를 바람과 물을 거슬러서 끌고 올라간 거와 같다 그래.

 

보통 사람 같으면 끌어 올릴려고 생각도 못하고 애당초 아주 포기를 해 버릴 것인데, 이 '참선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나이 많고 적은 것도 따지지 말고, 바람을 거슬르고 안 거슬르고 한 것도 따지지 말고, 또 물도 거슬르고 안 거슬르고 한 것도 따지지 않고, 쇠배거니 나무배거니, 또 밑이 있고 없고 한 것도 따지지 말라 이거여. 이 배를 어떻게 끌고 올라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도 따지지 말라 이거여.

 

다못 생각 생각이 사이가 없어. 염염상속(念念相續)해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끌고 가는데, 그 한 걸음 속에다가 평생 기량을 갖다가 다 거기다 쏟으라 그말이여.

젖 먹던 힘, 아주 젖 먹을 때의 힘까지 다해서 한 걸음 한 걸음을 이를 악물고 끌어 올려라 이거여.

 

그렇게 해 가지고 저 위에 끌어 올릴라고 끌어 올릴라고 해도 그 무거운 쇠로 만든 밑 빠진 배가 바닥에 아주 가라앉아 버렸을 텐데, 그 무거운 배를 바람과 물을 (거슬러) 끌어 올리는데 아무리 끌어 올릴라고 해도 까딱도 안해, 까딱도 허거나 말거나 또 있는 힘을 다해서 끌어 올리는 거여.

그래 가지고 힘줄이 끊어지고 다리뼈가 부러졌을 때에 바람이 갖다가 반대 방향으로 불어 주고, 흐르던 물이 꺼꾸로 흘러 주면서 그렇게 까딱도 안하던 그 쇠배가 바람결 따라 물결 따라 수르르르~ 허니 움직이기 시작한 거와 같이.

 

그렇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화두가 영 간절하게 들리지를 않고, 그렇게 화두를 들고 애를 쓰지만 순수하게 들리는 때는 잠깐이고 금방 번뇌와 망상이 뒤죽박죽이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또 잠이 와 가지고 그 눈 뚜깽이는 천근만근 무겁게 눈 뚜깽이는 내려 눌리고, 머리 골치는 그 잠이 오는 잠을 억지로 잠을 안 잘려고 눈을 뒤집어 뜨고 그냥 막 참고 정신을 차릴려고 하다 보면은 골이 더럭더럭 아프고,

시간은 영 10분이 지나가기를 한 시간만큼 그렇게도 시간이 지루하고 안 넘어가고, 다리는 저리고 허리는 아프고 몸은 몸비듬을 틀어서 몸이 아주 주리(周牢)를 튼 것처럼 괴롭고 아, 이런다 그말이여.

 

그렇지만, 옛날 사람은 입었던 저고리를 벗어서 땅바닥을 치고, 깔고 앉았던 방석을 들어서 방바닥을 치면서 통곡을 하고 '이거 조주가 무자(無字) 화두를 내 가지고 내 신세를 이렇게 망친다'고 아주 고인(古人)을 갖다가 원망을 하기도 하고 그랬다고 그럽니다마는, 오죽 답답하고 답답하면 그렇게 방바닥을 치면서 고인을 한탄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리석은 생각이고, 그러거나 말거나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한 생각도 물러슬 겨를이 없이, 다시 또 정신을 가다듬어서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정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몸이 괴로울 때에는 조용허니 일어나서 밖에 가서 한 5분, 이렇게 동서(東西)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하면서 화두를 들면, 그 몸이 지루하고 골치 아프고 그랬던 것이 간 곳이 없이 다시 시원해지면 또 다시 와서 정진을 하고 이렇게 해서 하루 하루를 알뜰하게 이렇게 단속을 해 나간다면,

 

반드시 그 무거웠던 밑 없는 쇠로 만든 배가 까딱도 안하던 것이 바람이 방향을 바꾸고 물이 방향을 바꿔서 흐를 때 처럼,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화두를 들려고 안해도 저절로 들어지고, 앉으나 서나 누우나 밥을 먹을 때나, 눈으로 산을 보나 땅을 보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화두의 그 의단(疑團)이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독로(獨露)해서 행주좌와와 어묵동정 간에 일부러 딴생각을 좀 할려고 해도 딴생각이 안 일어나.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져 갖고 있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두를 타파(打破)해서 자기 면목(面目)을 보게 될 소식이 가까와진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게 순수무잡한 경계가 와도 조금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빨리 깨달았으면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이럴 때에 어떤 선지식(善知識)이 나를 툭! 터지게 좀 해줬으면 그런 생각도 내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조급한 생각을 내지 말고, 어떠한 생각도 내지 말고, 다못 그 순수무잡한 의단을 관조(觀照)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러한 경계가 올 것이고 그런 경계가 왔을 때에 지혜스럽게 정진을 단속해 나가면 결정코 화두를 타파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금년 계해년 삼동안거가 그러한 한 철이 되도록 각별히 노력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도안종래불용선(到岸從來不用船)하고  탄연대도투장안(坦然大道透長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요연원불인타오(了然元不因他悟)하고  면목분명총일반(面目分明總一般)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도안종래불용선(到岸從來不用船)하고, 저 언덕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데에는 본래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여.

우리가 눈으로 보는 저 강물, 강을 건너서 저 언덕으로 가는 데에는 목선이나 똑딱선이나 무슨 배를 타던지 배를 타고 건너가지만, 우리의 생사(生死)를 건너서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가는 데에는 무슨 그러한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다.

 

탄연대도투장안(坦然大道透長安)이다. 탄연(坦然)히 큰 길이 있어서 어디서든지 장안(長安)으로 길이 똑바로 뚫려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동서남북 어디에서든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앉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어떠한 생각을 하던지 간에,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길에는 일직선으로 시간도 걸리지 않고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대도(大道)가 뚫려져 있다 그말이거든.

 

요연원불인타오(了然元不因他悟)여. 그 길이 요연(了然)해서 원래 다른 것을 인(因)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여.

 

부처를 인해서 부처가 깨달라 주는 것도 아니요, 조사가 깨달라 주는 것도 아니고 원래 시간과 공간으로 거리가 없이 바로 길이 직선으로 뚫려져 있어서 면목분명총일반(面目分明總一般)이여. 그 면목(面目)이 분명(分明)하다 말이여.

바로 무엇을 볼 때, 무슨 소리를 들을 때 촉목보리(觸目菩提)여. 눈으로 뭣을 탁! 보면 보는 그 찰나에 분명하거든. 그것이 면목분명한 것이 총일반(總一般)이여. 모두가 다 일반(一般)이다 그말이여.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보살님네는 설사 이 결제에 참석을 못 하시고 댁에서 사신다 하더라도 백일기도에 동참했으면 이 삼동안거에 방부를 붙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생활하시면서 항시 꼭 이 용화사 선방에 계신 거와 같은 그러한 마음, 이 법당에 계신 그러한 마음으로 생활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고 생활 자체가 정진이 되고 생활 자체가 기도가 되도록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한 철을 지내신다면 모든 업장(業障)이 바로 거기에서 다 소멸(消滅)이 되시고, 업장이 소멸이 되면 자연히 여러분의 크고 작은 모든 소원도 성취가 되실 것입니다.(41분33초~58분2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실참실오(實參實悟) ; 

 

[참고 ❶]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서답(書答)」 ‘답노상서(答盧尙書 노상서에게 답함)’에서.

所以古德云 路途之樂 終未到家 見解入微 不名見道 參須實參 悟須實悟 閰羅大王 不怕多語 若要實參實悟 須是從前坐禪處得底 經敎上得底 古人語錄上得底 宗師口頭下得底 有滋味寶悟處 一時掃向他方世界 好字細看

 

그러므로 옛 스님은 ‘길의 즐거움은 종내 집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보고 알아 미세한 데 들어가는 것은 도를 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참구는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염라대왕은 많은 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알차게 참구하여 진실로 깨달고자 하면, 종전에 좌선(坐禪)해서 얻은 것과 경전에서 얻은 것과 고인의 어록에서 얻은 것과 종사의 입을 통해 얻은 것 등에서 자미(滋味)있고 소중히 여긴 깨달았던 경계를, 한꺼번에 다른 세계에 쓸어 버리고 자세하게 살펴야 좋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참고 ❷]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26. 「시중(示衆)」에서

若論實參實悟 正如八十公(翁?)公 向逆風逆水裏 牽一隻無底鐵船相似 不問上與不上 徹與不徹 直須心心無間 念念無虧 一步一步 盡平生伎倆睚(厓?)將去 睚到著脚 不得處 筋斷骨折時 驀然水轉風回 卽是到家消息 卽今莫有到家底麼 (卓柱杖一下 云) 十萬八千

 

만일 실답게 정진을 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말하자면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배를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함과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묻지 말고, 곧 마음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평생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밀어서 다리를 붙일 수 없는(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과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 이르르면 별안간 물살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집에 이르른 소식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이가 있느냐? (주장자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십만(十萬) 팔천리(八千里)로다.

 

[참고 ❸]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상권 ‘흥성사입원소설(興聖寺入院小說)’에서.

若也眞實參學者 參須實參 悟須實悟 始得 且作麽生是實參實悟耶 於二六時中 四威儀內 以生死大事爲念 離心意識 參出凡聖路 學以無心無爲 綿密養之 常常無念 常常不昧 了無依倚 到冥然地 自然合道 不見古人云 無心方見本來人

 

만약 진실한 참학자(參學者)라면 참구는 반드시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한 참구이며 진실한 깨달음인가?

하루 열두 시간과 사위의(四威儀) 가운데서 생사의 큰 일을 생각하되, 심의식(心意識)을 떠나 참구하여 범성(凡聖)의 길을 벗어나고 무심(無心)과 무위(無爲)를 배우고 그것을 면밀히 길러 언제나 무념(無念)하고 항상 어둡지 않아, 마침내 기댈 곳이 다 사라지고 명연(冥然)한 자리에 이르면 자연히 도에 합할 것이다. 고인이 ‘무심(無心)이어야 비로소 본래인(本來人)을 본다’라는 말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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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다웁게 정진을 하고 실다웁게 깨닫는 것은 마치 팔십(八十) 고령에 할아버지, 그 노인이 바람을 거슬르고 물을 거슬르면서 한 척의 배, 한 척의 밑 없는 쇠로 만든 배를 끌고 올라간 거와 같혀'

[참고]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26. 「시중(示衆)」에서

若論實參實悟 正如八十公公 向逆風逆水裏 牽一隻無底鐵船相似 不問上與不上 徹與不徹 直須心心無間 念念無虧 一步一步 盡平生伎倆睚(厓?)將去 睚到著脚 不得處 筋斷骨折時 驀然水轉風回 卽是到家消息 卽今莫有到家底麼 (卓柱杖一下 云) 十萬八千

 

만일 실답게 정진을 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말하자면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배를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함과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묻지 말고, 곧 마음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평생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밀어서 다리를 붙일 수 없는(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과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 이르르면 별안간 물살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집에 이르른 소식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이가 있느냐? (주장자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십만(十萬) 팔천리(八千里)로다.

*실참실오(實參實悟)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깨달음. 실참(實參), 실답게 참구(參究)한다는 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무잡(純一無雜)할 수가 없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장사(壯士 장壯하다·굳세다·씩씩하다 장/선비·사내·남자 사) ; 기개와 힘이 아주 굳센[壯] 사람[士].

*혈기 방장하다(血氣方壯-- 피 혈/기운 기/바야흐로·이제 한창 방/굳세다·씩씩하다·크다·성盛하다 장) ; 혈기(血氣, 힘을 쓰고 활동하게 하는 원기)가 바야흐로[方] 왕성하다[壯].

*기진맥진(氣盡脈盡 기운 기/다할 진/맥 맥/다할 진) ;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기력(氣力)이나 맥(脈)이 다함[盡].

*애당초(-當初) ; ‘당초(當初, 일의 맨 처음)’를 강조하여 이르는 말.

*주리(周牢)를 틀다 ; 주리 틀다. 예전에, 죄인을 심문할 때 주리(죄인의 두 다리를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두 개의 긴 막대기를 끼워 비틀던 형벌)의 형벌을 주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화두(話頭)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게송) '도안종래불용선(到岸從來不用船)~' ; 『금강경오가해」 제25.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종경 스님 게송 참고.

*장안(長安) ; ①중국 산시 성(山西省) 시안 시(西安市)의 옛 이름. 전한(前漢)과 당나라의 수도로 역사상 이름난 국제도시였다. ②수도(首都)라는 뜻으로 '서울(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곳)'을 이르는 말.

*탄연(坦然 평탄할•뚜렷할 탄/그럴•명백할 연) ; 훤한 모양. 마음이 가라앉아 편안하고 고요한 모양.

*요연(了然 밝을 요/그럴•명백할 연) ; ①분명(分明)한 모양(模樣). ②명백(明白)한 모양(模樣).

*촉목보리(觸目菩提) ; 눈에 접촉 되는 것, 일체가 그대로 보리(菩提, 깨달음)이다 라는 뜻.

*일반(一般) ; ①전체에 두루 해당되는 것. ②서로 다를 바가 없는 마찬가지의 상태.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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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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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성주괴공2020. 4. 2. 20:09

성주괴공(No.533)—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 그 한 생각 속에 생사가 있다. 그래서 그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면 한 생각 속에도 생사해탈(生死解脫)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成],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住], 쇠퇴하여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壞], 모든 것이 괴멸되어 허공만 있는 과정(상태)[空]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10분 50초)

 

[법문] 송담스님(No.533)—1994년(갑술년) 하안거결제 법어(94.05.25) (용533)

 

이 지구가, 지구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통해서 결국은 언젠가는 이 세계도 무너져서 없어질 때가 돌아오는 것이여.

이 몸뚱이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통해서 결국은 죽어서 없어지듯이 이 세계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어.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 현재현겁(現在賢劫), 미래성숙겁(未來星宿劫)이 있는데, 그 장엄겁(莊嚴劫)에도 성주괴공이 있고, 현겁(賢劫)에도 성주괴공이 있고, 미래 성숙겁(星宿劫)에도 성주괴공이 있는데,

 

이 겁(劫)이라 하는 것은 소겁(小劫)이 있고 중겁(中劫)이 있고 대겁(大劫)이 있는데, 사람의 목숨이 제일 많이 살 때가 팔만사천 세(歲)고, 제일 수명이 짧을 때가, 인수(人壽) 정명(定命)이 짧을 때가 십 세인데,

 

팔만사천 세에서 백년 지나면은 한 살 씩이 줄어져. 또 백년이 지내면 한 살이 줄어지고 또 백년이 지내면 한 살이 줄어지고 해가지고 열 살 때까지 내려와. 그것을 '감겁(減劫)'이라 그러고.

열 살까지 내려오면 그다음의 백년이 지내면은 사람 목숨이 한 살씩이 더 불어나. 또 백년이 지내면 열두 살, 또 백년이 지내면 열세 살, 해서 십 세로부터 팔만사천 세까지 올라가는 거여. 그것을 '증겁(增劫)'이라 그러는데.

 

한 번 감해져가지고 십 세까지 갔다가 또 다시 백년만에 한 살씩 불어나서 팔만사천 세까지 가는 것을 증겁(增劫).

감겁(減劫), 증겁(增劫) 합해서 이것을 '일소겁(一小劫)'이라 하는데, 일소겁(一小劫)이 스무 번을 되풀이를 하면 이것을 '(일)중겁(一中劫)’이라 하는 거여.

 

그러면 성주괴공(成住壞空)에 있어서 성(成), 이 세계가 이루어지는데 20소겁(小劫)이 걸리게 되는 거고.

또 20소겁이 되면은 주겁(住劫)이 되는 거여. 머무르는, 세계가 이루어져가지고 그러한 상태로 이렇게 머물렀다가, 그다음 20소겁 동안에 차츰차츰 무너지고[壞], 그다음 20겁은 완전히 텅 빈 상태[空]에서 20겁이 지내는 거여.

 

그래서 성주괴공(成住壞空), 20겁이 네 번이 되면은 이것이 80소겁인데, 이것을 '일대겁(一大劫)'이라 그러는 건데.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 동안에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했는데 주겁 동안에, 성주괴공에 주겁(住劫) 동안에 출세를 하셨어.

그리고 현재 석가모니 부처님은 현겁천불(賢劫千佛)에—주겁(住劫) 동안인데, 현겁천불에 네 번째 부처님으로 태어나신 거여.

이다음 56억 7천만 년 후에 미륵불(彌勒佛)이 하강(下降)을 하시는데, 그리고 그다음에 차츰차츰 해서 마지막 부처님이 누지(樓至) 부처님이 출현을 하신다 그말이여.

 

이렇게 해서 현겁천불(賢劫千佛)이 출현하신 다음에는 미래성숙겁(未來星宿劫) 부처님이 또 천불(千佛)이 출세하셔.

미래성숙겁 천불도 성주괴공의 이 사기(四期)에 걸쳐서 해 가지고 이렇게 출현을 하시는데.

 

우리는 다행히 이 현재현겁(現在賢劫) 제4 부처님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을 하신 세상에 출현하셨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수(人壽) 백세(百歲) 정명(定命) 때 출현을 하셨는데, 지금 2천5백34년이 되아, 이천육백년 대 지금이 되었으니까 지금은 인수(人壽) 정명(定命)이 약 74세 정도야.

 

지금 사람의 평균수명이 70세 남짓 되니까 얼추 맞아 들어가는데, 앞으로 태어난 사람은 차츰차츰 사람 목숨이 짧아진다고 이 추측이 되는데.

과학이 발달함으로써 요새 사람의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 전쟁이 나고 그래가지고 원자탄이니 수소탄이니 화학무기가 발달하면 사람이 어떻게 죽어갈는지 몰라.

그래서 평균수명이 꼭 앞으로도 계속해서 줄어(길어)진다고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꼭 육체(肉體)를 가지고 말을 하지만, 정말 사람의 생사(生死) 문제는 육체에다 기준을 둘 수가 없고.

우리의 생각이, 한 생각이 일어나면 새로 태어나고 그 생각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을 거쳐서 꺼지면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핍진(逼眞)한 생각이다 그말이여.

 

이 육체도 역시 뱃속에서 태어나가지고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수백억만 번의 변화를 거쳐서 이렇게 오고 있으니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여.

다 '아무개가 몇 해에 몇 년도에 태어나가지고 몇 년도에 죽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닌 거여. 완전히 딴 사람이 되아가지고 있는 거여. 어제의 나는 죽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여.

 

예를 들어서 촛불을 하나 켰을 때, 그 촛불이 처음에 탁 불을 댕길 때 그때의 초가, 그때의 그 불이 한 시간 쯤 있다가 그 타고 있는 그 '불'과 한 시간 전의 '불'이 같은 불이 아니여. 초도 그 초가 아닌 거여.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몸뚱이도 변(變)해 가고 우리의 생각도 변해 가고 있어서,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항상 그때의 그것이 아니여. 태양도 계속 불이 타고 있는 불덩어리인데, 어제의 불덩어리가 오늘의 불덩어리가 아닌 거여.

 

그래서 확실히 그렇게 '변(變)해 가고 있고 고대로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다면, 우리도 마음 놓고 '아직도 내가 젊으니까 앞으로 몇 해는 더 살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공부를 미룰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거거든.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각각 자기의 생각을 말해보라"

 

한 사람은, "하루 동안에도 우리가 죽음은 올 수가 있습니다"

"너 공부 못하겠다"

 

"한 식경(食頃)에도 죽음이, 밥 먹을 동안에도 죽음은 올 수가 있습니다"

"너도 공부 못하겠다"

 

"한 생각(호흡)에도 죽음이 올 수가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하겠다"

 

이러한 말씀이 아마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우리는 '그 한 생각 속에 생사가 있다. 그래서 그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면 한 생각 속에도 생사해탈(生死解脫)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그러한 희망을 가지고 어쨌든지 그 한 생각을 알뜰하게 야무지게 단속하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거니와 갑술년, 2538년의 갑술년은 다시 오지 않고 영원히 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명심(銘心)을 하시고, 이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座右銘)」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알뜰하게 이 한 여름을 잘 정진(精進)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보살선방(菩薩禪房)에 방부(房付)를 들이신 보살님들이나 시민선방(市民禪房)에 방부를 들이는 거사님들이나 또 가정에서 정진을 하시는 백일기도에 동참(同參)하신 분, 전국 여러 선방에서 정진하시는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들도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21분29초~32분2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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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주요한 네 가지 현상. 출생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생(生), 노쇠하는 현상을 노(老), 병든 현상을 병(病),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사(死)라 한다.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일반적 형식으로서 사상(四相)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고통이기 때문에 사고(四苦)라고도 한다. 생로병사가 사라진 경계가 무위법(無爲法)인 열반(涅槃)이다.

삼라만상의 사상(四相)인 생주이멸(生住異滅)과 세계의 생성소멸 과정을 나타내는 성주괴공(成住壞空)도 동일한 형식이다.

*정명(定命) ; ①날 때부터 정하여진 운명. ②전생의 인연에 의하여 정하여진 목숨. 증겁(增劫)과 감겁(減劫)에 의하여 수명에 차이가 있는데, 나이가 팔만 살부터 100년마다 한 살씩 줄어 열 살 까지 줄었다가[減劫], 다시 100년마다 한 살 씩 늘어 팔만 살까지 이른다[增劫]고 한다.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핍진하다(逼眞-- 가까이하다 핍/참 진) ; ①실물[眞]과 아주 가깝고[逼] 비슷하다. ②(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우리는 '그 한 생각 속에 생사가 있다. 그래서 그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면 한 생각 속에도 생사해탈(生死解脫)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그러한 희망을 가지고 어쨌든지 그 한 생각을 알뜰하게 야무지게 단속하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

일념단속(一念團束).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각국사(眞覺國師) 좌우명(座右銘) ;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 (김달진 역주 | 세계사) p353.

菩薩子 菩薩子 常自摩頭深有以 摩頭因得審思量 出家本意圖何事

보살님이여, 보살님이여. 항상 머리를 만지는 것 깊은 까닭이 있네. 머리를 만지며 깊이 생각하나니 '출가한 본의가 무엇이었던가?'

 

僧其相貌俗其心 可不慚天而愧地 麤行狂言任汝爲 鑊湯爐炭何廻避

겉모양은 승려로서 그 마음은 속심(俗心)이라면,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느냐. 거친 행동과 미친 소리를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쇳물이 끓는 솥에 삶기는 고통과 숯불에 달구어지는 고통을 받는 지옥을 어찌 피할 수가 있겠느냐.

*확탕노탄(鑊湯爐炭) 지옥 ; 확탕(鑊湯)과 노탄(爐炭). 쇳물이 끓는 솥에 삶기는 고통과 숯불에 달구어지는 고통을 받는 지옥.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보살선방(菩薩禪房) ; 보살선원(菩薩禪院). 스님이 수행하는 선원과 같은 기간과 방식으로 보살님(신도)들이 정진 할 수 있는 선원. 용화선원에는 스님선원, 보살선원이 있고 또 매일 언제든지 와서 정진할 수 있는 시민선원이 있다.

*시민선방(市民禪房) ; 시민선원(市民禪院). 직장인, 학생, 주부 등과 같은 하루 종일 시간을 낼 수 없는 분들이 언제든지 시간 나는 대로 와서 정진할 수 있도록 용화선원에 개설되어 있는 신도 선원.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