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22.05.22 이뭣고(No.240)—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 | 화두를 바르게 들기가 쉽지 않다 | 법문에 국집 말고, 법문 들을 때일수록 자기 화두가 더욱 성성하게 들려져 있어야.
  2. 2019.03.21 동사섭(同事攝) (No.240)—각 선원마다의 가풍(家風)에 따르는 것이 동사섭(同事攝) 수행.
  3. 2019.03.21 관조(觀照) (No.240)—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 | 화두를 바르게 들기가 쉽지 않다 | 말에 떨어지지 말라 | 법문 들을 때일수록 자기 화두가 더욱 성성하게 들려져 있어야.
  4. 2018.10.16 아만(我慢) (No.240)—아만(我慢)을 꺾고 허공같이 빈 마음이 되어야 공부가 옳게 되어가는 것 | ‘양반 못된 것이 장바닥에 가서 큰소리친다’ | 동사섭(同事攝).
  5. 2018.10.16 국집(局執) (No.240)—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 | 화두를 바르게 들기가 쉽지 않다 | 법문에 국집 말고, 법문 들을 때일수록 자기 화두가 더욱 성성하게 들려져 있어야.
  6. 2018.05.24 소소영령(昭昭靈靈) (No.240)—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 | 화두를 바르게 들기가 쉽지 않다 | 법문에 국집 말고, 법문 들을 때일수록 자기 화두가 더욱 성성하게 들려져 있어야.
  7. 2018.05.24 경계(境界) (No.240)—답답하고 지루할 때가 한 고비 올라서려는 중요한 고비 | 경계에 속지 마라.
  8. 2018.05.24 은산철벽(銀山鐵壁) (No.240)—(게송)正宗消息沒滋味~ | 은산철벽(銀山鐵壁), 화두가 그렇게 되게 맥혀 버려야 한다 | 무조건하고 바보처럼 ‘이뭣고?’ | 大疑之下 必有大悟.
  9. 2018.03.07 인과(因果) (No.240)—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들으면 인과설을 들어도 그것이 최상승법이 되는 것 | 인과의 법칙을 인증하면서도, 거기에서 초월하는 길이 바로 불법(佛法).
  10. 2018.03.07 수구여병(守口如甁) (No.240)—(게송)休說人之短與長 非徒無益又招殃 若能守口如甁去 此是安身第一方.
ㅇ/이뭣고? 화두2022. 5. 22. 10:25

이뭣고(No.240)—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 | 화두를 바르게 들기가 쉽지 않다 | 법문에 국집 말고, 법문 들을 때일수록 자기 화두가 더욱 성성하게 들려져 있어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송담스님(No.306)—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회]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64분6초~66분26초) [ 참선법 A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를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이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큰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큰 메겡이로 메쳐서 그 간장독이 쩍!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佛祖)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송담스님(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

 

(11분 33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 (용240)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인데, 「그 찾는 그놈을 다시 되찾는다」 그것입니다.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하면 일상생활(日常生活)인데. 일상생활에 앉고 서고 눕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도 내고 슬퍼하기도 하고, 이것이 바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인데, 이것이 일생생활이거든.

그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거든.
이 몸뚱이를 끌고 서울도 가고, 서울에서 요리 끌고 오기도 허고, 이 몸뚱이를 시켜서 성도 내게도 하고, 슬퍼하게도 하고, 말도 시키기도 하고, 또 밥도 먹으라 그러고, 그 안에서 조정하는 놈이 있어.
그놈이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는 없는데, 분명히 이 몸뚱이 안에 이 몸뚱이를 운전하는 조종하는 놈이 있다 그말이여.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그말이여. ‘이것이 무엇이냐?’ ‘이뭣고?’

‘대관절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을 허지만,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허는 이놈이 바로 무엇이냐?」 이거여.
「‘이뭣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 뭣고?」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 찾는 놈을 되찾는 것이거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종일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렇게 허라는 것은 아니여.
‘이뭣고?’ 이렇게 허되, 그 속의 뜻은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말이거든.

그러나 실지로 헐 때에는 자꾸 「‘이뭣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러라는 게 아니여.

또 뭣헌 분은 「‘이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이 있다」 그렇게 내가 말씀을 했더니, 한 번 할 때에 육백만 번이면 열 번을 허면 육천만 번이고, 또 백 번을 하면 육억 번이다.
그래가지고 ‘내가 백 번이야 그까짓 것 1분 동안에 백 번을 하면 10분 동안이면은 천 번을 할 수가 있고 허니까, 그것을 육백에다 곱하면 이렇게 되겠다’ 해 가지고는 「이뭣고」 「이뭣고」.....「이뭣고」를 갖다가 수없이 그렇게 하는데, 그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말이거든.

한 번을 하되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한 그 간절(懇切)한 의심(疑心)으로 하라는 거지, 입으로 그저 횟수를 많이 채우라는 말씀은 아니거든. ‘이뭣고?’
그리고 ‘간단(間斷)없이 하라’ 그 말도,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말이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 말소리가 끊어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어요.

이 참선이라 하는 건 참, 바르게 하는 방법을 가르켜 드리기도 참 어렵고, 또 그것을 방법을 바르게 배우기도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너무 쉬웁고 간단한데 실지로 해보면 이 화두(話頭)를 바르게 들 줄 알기가 그렇게 쉬운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3년씩 또는 10년씩 선방(禪房)에 다니면서도 또 그 공부를 하셔도 그 진짜 화두를 올바르게 들고 있는 분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화두 하나만 제대로 딱 들어 버린다면 견성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성불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생사해탈하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부득이(不得已)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한다’ 부득이 해서 ‘견성(見性)을 해야 한다’ 부득이해서 ‘성불(成佛)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을 하지,
사실은 생사해탈해야 할 생사도 없는 것이고, 깨달라야 할 법(法)도 없고, 도(道)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해탈 해야 한다’하면, ‘생사해탈’이란 말에 딱! 국집(局執)을 하고, ‘견성을 해야 한다’하면 그 견성이라고 하는 말에 꽉! 국집을 하고, ‘성불을 해야 한다’하면 그 성불이라는 말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 그 국집하는 찰나에 화두를 놓치게 되고 자기를 놓치게 되는 것이여.

‘견성성불해라, 생사해탈을 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화두를 들게 하기 위해서, 바로 자기를 관조(觀照)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그 말에 떨어지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

방안에 있는 파리를 문을 닫고서 파리를 내키면 그 파리가—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내키면은 천장에 가 붙고, 천장에 가 붙은 파리를 내키면 동쪽 벽에 붙고, 동쪽 벽에 파리를 내키면 서쪽에 가 붙고, 서쪽 벽에 붙은 파리를 내키면 남쪽에 가서 붙고.
이래가지고 그 파리 내키면은 반드시 어디 가서 또 붙는다 그말이여.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어디에 가도 붙으면 안 되거든.

다맛 알 수 없는 의심만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가야지, 무엇이 좋다고 한다고 해서 그 좋다고 하는데 붙으면 안 돼.

이렇게 오늘 갑자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 법요식에 사부대중이 이렇게 모이셨는데,
그 법문(法門)을 듣고 무엇을 많이 알기 위해서 법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 법문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생각이 떨어진다면, 그건 좋은 생각에 집착했더라도 마찬가지고 더군다나 옳지 못한 생각에 집착했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집착한 마음이 떨어진다면 여기까지 오셔서 법문을 들은 공덕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무슨 법문을 들었어도 그 법문에 국집을 하면 좋은 약을 먹고서도 그 약에 중독(中毒)이 된 거와 같애요.
그 약을 먹은 것은 속에 병이 떨어지라고 먹는 것이지, 그 약을 먹고 약에 중독이 되서 부작용이 일어난다면 그 약을 차라리 안 먹은 것만도 못하거든.

오늘 법요식뿐만이 아니라 팔만대장경 경전도 역시 마찬가지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설하신 모든 법문이 또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법(法)에 국집하면—아주 신심 있는 이는 그 법에 매우 깊이 국집을 하는 수가 있는데, 그 국집을 한다면 부처님 법문을 옳게 가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했고 금강경(金剛經)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마는 「법(法)이라 하는 것은 강을 건너가는 배와 같은 것이다(知我說法 如筏喩者)」 그 배는 강을 건너는 데 목적이 있지, 강을 건너가지고서도 그 배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것입니다.
「법에 국집해도 못쓰거든 하물며 법 아닌 것에 있어서랴(法尙應捨 何況非法)」 금강경에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법문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기의 화두를 놓아 버려서는 아니 되거든.
법문을 들을 때일수록 자기의 화두가 더욱 성성(惺惺)하게 잘 들려져 있어야 하거든.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판치생모」 화두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정전백수자」하시는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을 해야 하거든.

그 알 수 없는 화두가 들어져 있는 상태에서 법문을 들어보면 법문이 더욱 더 잘 들리고, 비단 법문 들을 때뿐만이 아니라 생활을 하면서—밥 먹을 때에도 그렇고, 세수할 때도 그렇고, 차를 탈 때에도 그렇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그 화두가 항시 들려져 있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하시도록 그렇게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21분46초~33분1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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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부득이(不得已)하다 ; 마지못하여 할 수 없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내키다 ; (사람이 무엇을)공간을 넓히려고 바깥쪽으로 물리어 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는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것, 즉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줄임말이다.
풀이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대 반야경 육백부(六百部) 중에서 五七七권에 해당되고, 그 내용이 약 3백송(三百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대략 서기 150~200년경의 대승경전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 밝게 비출 수 있다는 금강석을 부처님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로 비유한 것이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예리하고 반짝이는 완전한 반야의 공지(空智)로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뜻.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421칙. 「백수(栢樹)」 『선문염송 · 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51~252.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僧云和尙莫將境示人 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조주(趙州)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선사가 말하였다. "나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노라"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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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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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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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ㄷ/동사섭2019. 3. 21. 19:07

*동사섭(同事攝) ; 보살(菩薩)이 중생을 제도하고 섭수(攝受)하기 위하여 행하는 4섭(四攝 :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하나.

 

불보살(佛菩薩)이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그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같이 일하며 어울려 지내면서 일심동체가 되어 고락(苦樂), 화복(禍福)을 함께 함으로써 자연스레 중생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 들이는 것을 말한다.

 

(2분 37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용240)

 

다른 데 선방에 다니신 스님네들은 용화사에 와서 지내시면 무엇인가 좀 다른 데하고 다른 점이 있는 것을 혹 발견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송광사는 송광사대로 또 해인사는 해인사대로 또 통도사나 범어사는 거기 거기대로 또 불국선원은 불국선원대로 그 선원마다 가풍(家風)이 있고 법도가 있어서, 다른 점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쪼끔 자기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 여기는 이렇게 하는구나’

내 마음에는 쪼끔 언짢지마는, ‘여기의 법대로 한번 따라 보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나라고 해서 이렇게 못할 것이 뭐 있느냐’ 그렇게 의젓한 마음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넓은 마음으로 또 그렇게 한번 해 보거든.

 

이러한 좀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정진을 허시면 훨씬 그릇이—앞으로 우리는 내 자신의 생사 문제 뿐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할 그러헌 대원(大願)을 가지고 수행을 해 나가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그 중생들은 각기 업(業)이 달라서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 얼굴이 다르듯이 그 성격도 다르고, 그래서 그 많은 중생을 제도헐랴면 나도 그 중생과 동사섭(同事攝)을 해야 하거든.

그 중생과 뜻을 맞춰 가면서 결국은 그 중생을 제도해야 하기 때문에, ‘내’라고 하는 것이 다 비워져 없어져 버려야만 되거든.

 

당장 이 선방에 와서 참선해 나가는 때부터 내 마음, 내 주견(主見), 내 선입관을 버려 버리고 이 선원의 법도에 따르는 연습부터 해야, 그래야 나중에 일체 중생을 제도할 때 동사섭 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갖추어지리라고 생각을 합니다.(37분51초~40분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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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풍(家風) ; ①종풍(宗風)—종문(宗門)의 풍규(風規 풍습상의 규정). 문풍(門風)—선문(禪門)에 있어서의 종풍(宗風).

②선림(禪林, 선종禪宗)에서의 행위의 규범. 청규(淸規, 선원에서 일상의 생활규정). 선종에서 가르침을 나타낼 경우, 각자가 갖는 독자적인 방식, 또는 지도의 방법을 말함.

③그 종(宗)만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가르침의 방식. 지도의 방법. ④한집안에서 오래 지켜 온 생활 습관이나 규범.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주견(主見) ; 자기의 주장을 담은 의견.

 

Posted by 닥공닥정
ㄱ/관조2019. 3. 21. 18:40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7분 16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용240)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인데, 「그 찾는 그놈을 다시 되찾는다」 그것입니다.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하면 일상생활(日常生活)인데. 일상생활에 앉고 서고 눕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도 내고 슬퍼하기도 하고, 이것이 바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인데, 이것이 일생생활이거든.

 

그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거든.

이 몸뚱이를 끌고 서울도 가고, 서울에서 요리 끌고 오기도 허고, 이 몸뚱이를 시켜서 성도 내게도 하고, 슬퍼하게도 하고, 말도 시키기도 하고, 또 밥도 먹으라 그러고, 그 안에서 조정하는 놈이 있어.

그놈이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는 없는데, 분명히 이 몸뚱이 안에 이 몸뚱이를 운전하는 조종하는 놈이 있다 그말이여.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그말이여. ‘이것이 무엇이냐?’ ‘이뭣고?’

 

‘대관절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을 허지만,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허는 이놈이 바로 무엇이냐?」 이거여.

「‘이뭣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 뭣고?」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 찾는 놈을 되찾는 것이거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종일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렇게 허라는 것은 아니여.

‘이뭣고?’ 이렇게 허되, 그 속의 뜻은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말이거든.

 

그러나 실지로 헐 때에는 자꾸 「‘이뭣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러라는 게 아니여.

 

또 뭣헌 분은 「‘이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이 있다」 그렇게 내가 말씀을 했더니, 한 번 할 때에 육백만 번이면 열 번을 허면 육천만 번이고, 또 백 번을 하면 육억 번이다.

그래가지고 ‘내가 백 번이야 그까짓 것 1분 동안에 백 번을 하면 10분 동안이면은 천 번을 할 수가 있고 허니까, 그것을 육백에다 곱하면 이렇게 되겠다’ 해 가지고는 「이뭣고」 「이뭣고」.....「이뭣고」를 갖다가 수없이 그렇게 하는데, 그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말이거든.

 

한 번을 하되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한 그 간절(懇切)한 의심(疑心)으로 하라는 거지, 입으로 그저 횟수를 많이 채우라는 말씀은 아니거든. ‘이뭣고?’

그리고 ‘간단(間斷)없이 하라’ 그 말도,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말이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 말소리가 끊어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어요.

 

이 참선이라 하는 건 참, 바르게 하는 방법을 가르켜 드리기도 참 어렵고, 또 그것을 방법을 바르게 배우기도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너무 쉬웁고 간단한데 실지로 해보면 이 화두(話頭)를 바르게 들 줄 알기가 그렇게 쉬운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3년씩 또는 10년씩 선방(禪房)에 다니면서도 또 그 공부를 하셔도 그 진짜 화두를 올바르게 들고 있는 분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화두 하나만 제대로 딱 들어 버린다면 견성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성불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생사해탈하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부득이(不得已)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한다’ 부득이 해서 ‘견성(見性)을 해야 한다’ 부득이해서 ‘성불(成佛)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을 하지,

사실은 생사해탈해야 할 생사도 없는 것이고, 깨달라야 할 법(法)도 없고, 도(道)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해탈 해야 한다’하면, ‘생사해탈’이란 말에 딱! 국집(局執)을 하고, ‘견성을 해야 한다’하면 그 견성이라고 하는 말에 꽉! 국집을 하고, ‘성불을 해야 한다’하면 그 성불이라는 말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 그 국집하는 찰나에 화두를 놓치게 되고 자기를 놓치게 되는 것이여.

 

‘견성성불해라, 생사해탈을 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화두를 들게 하기 위해서, 바로 자기를 관조(觀照)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그 말에 떨어지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

 

방안에 있는 파리를 문을 닫고서 파리를 내키면 그 파리가—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내키면은 천장에 가 붙고, 천장에 가 붙은 파리를 내키면 동쪽 벽에 붙고, 동쪽 벽에 파리를 내키면 서쪽에 가 붙고, 서쪽 벽에 붙은 파리를 내키면 남쪽에 가서 붙고.

이래가지고 그 파리 내키면은 반드시 어디 가서 또 붙는다 그말이여.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어디에 가도 붙으면 안 되거든.

 

다맛 알 수 없는 의심만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가야지, 무엇이 좋다고 한다고 해서 그 좋다고 하는데 붙으면 안 돼.(21분46초~29분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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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부득이(不得已)하다 ; 마지못하여 할 수 없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내키다 ; (사람이 무엇을)공간을 넓히려고 바깥쪽으로 물리어 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Posted by 닥공닥정
ㅇ/아만2018. 10. 16. 16:20

*아만(我慢 나 아/거만할·게으를 만) ; ①오온(五蘊 :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아(我)를 실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우열의 관점에서 남과 나를 차별하여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아관.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8분 48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용240)

 

금년 여름엔 용화사 보살선원(菩薩禪院)이 지대방을 터 가지고 큰방을 만들었고, 지대방은 저 뒤에 별채에다가 지대방을 크게 해서 사물함도 거기다가 다 하고 또 세수하고 씻는 것도 바로 거기 옆에다 넓게 해서 잘 해놓았습니다.

 

해마다 방부(房付)를 들이는 보살님네 수효가 늘어나고, 또 해마다 좋은 보살님네들이 오시고, 또 해를 거듭할수록 모든 질서가 잘 잡혀가고, 그래서 원장으로서 너무 참 기쁜 마음이 있어서 더 공부를 잘 하시도록 이렇게 모든 선방을 잘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더욱 신심을 돈독(敦篤)히 해서 열심히 또 법답게 정진을 잘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이 팔도(八道)에서 각성바지가 모다 모였어.

다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시면 다 집안 어른이고, 다 집안에서는 큰소리 한번 치면 집안 식구가 꼼짝을 못하고 심지어 거사님까지도 다 꼼짝을 못하시겠지만, 이 선방에 와서는 큰소리칠라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첫째, 하심(下心)을 하고 아만(我慢)을 꺾고 빈 마음으로—마음속이 허공과 같이 텅 비워서, 빈 마음이 되어야 공부가 옳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집에서 큰소리친다고 해서 여기서도 목에다 힘을 주고, 꺼떡허면은 눈을 곤두세우고 큰소리치고, 옆에 사람 꼼짝 못허게 허고 자기의 권위를 세울려고 그러고.

그러헌 마음을 가지신다면 여기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결제(結制)를 한 아무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집에서 큰소리칠 수 있을수록에 여기서는 하심을 하고, 옆에 분이나 대중의 뜻을 받들고, 행여나 자기로 인해서 옆의 분들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해마다 점점 잘되어가고 있지만 금년에는 더욱 잘 해주시기를 바래서 이렇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속담에 ‘양반 못된 것이 장바닥에 가서 큰소리치고, 개 못된 것이 들판에 가서 짖는다’고 그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참, 이 선방에 오셔서는 무엇이고 그 선원의 법도(法度)에 자발적으로 따라 주셔서 순종을 허면서 좀 불편한 점이 있고 내 마음에 안 든 점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편헐려고 여기를 온 것이 아니고 또 큰소리칠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 무엇이던지 일부러 고생을 사서라도 한번 해봐야겠다. 이것을 이기는 것도 도(道)에 들어가는 한 단계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기쁜 마음으로 법도에 순종을 하고 대중과 같이 행동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비구(比丘) 스님네 선방에서도 역시 보살님네와 같이 이 말이 적용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데 선방에 다니신 스님네들은 용화사에 와서 지내시면 무엇인가 좀 다른 데하고 다른 점이 있는 것을 혹 발견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송광사는 송광사대로 또 해인사는 해인사대로 또 통도사나 범어사는 거기 거기대로 또 불국선원은 불국선원대로 그 선원마다 가풍(家風)이 있고 법도가 있어서, 다른 점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쪼끔 자기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 여기는 이렇게 하는구나’

내 마음에는 쪼끔 언짢지마는, ‘여기의 법대로 한번 따라 보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나라고 해서 이렇게 못할 것이 뭐 있느냐’ 그렇게 의젓한 마음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넓은 마음으로 또 그렇게 한번 해 보거든.

 

이러한 좀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정진을 허시면 훨씬 그릇이—앞으로 우리는 내 자신의 생사 문제 뿐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제도할 그러헌 대원(大願)을 가지고 수행을 해 나가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그 중생들은 각기 업(業)이 달라서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 얼굴이 다르듯이 그 성격도 다르고, 그래서 그 많은 중생을 제도헐랴면 나도 그 중생과 동사섭(同事攝)을 해야 하거든.

그 중생과 뜻을 맞춰 가면서 결국은 그 중생을 제도해야 하기 때문에, ‘내’라고 하는 것이 다 비워져 없어져 버려야만 되거든.

 

당장 이 선방에 와서 참선해 나가는 때부터 내 마음, 내 주견(主見), 내 선입관을 버려 버리고 이 선원의 법도에 따르는 연습부터 해야, 그래야 나중에 일체 중생을 제도할 때 동사섭 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갖추어지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아무 소리 말고 그저 그러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개선해야 할 좋은 점이 있으면 입승(立繩) 스님을 통해서 좋은 의견을 제출하시면은 또 이 원장이나 사무실에서도 고칠 것은 얼마든지 고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는.

그런 것은 매우 신중하게 지금 당장만을 생각하지 않고 두고두고 장래를 위해서 참으로 그 의견이 좋은 일이고 꼭 고쳐야 할 만한 일이면은 그런 의견은 좋은 기회를 타서 건의를 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실 스님 때부터서 내려오는 전통은 될 수 있으면 지켜 가면서 그것을 잘 운용을 해 나가는데 묘(妙)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꾸 법도를 뜯어고치고 자꾸 제도를 이리 고쳤다 저리 고쳤다 허는 것은 좋은 것 같지마는 그것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기본은 항시 서 있으면서도 우리가 신심과 지혜로써 운용을 잘해 나간다면 얼마든지 다 보완이 되어 가리라고 생각을 합니다.(33분20초~42분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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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선원(菩薩禪院) ; 스님이 수행하는 선원과 같은 기간과 방식으로 보살님(신도)들이 정진 할 수 있는 선원. 용화선원에는 스님선원, 보살선원이 있고 또 매일 언제든지 와서 정진할 수 있는 시민선원이 있다.

*지대방 ; 절의 큰방 머리에 있는 작은 방. 이부자리, 옷 등의 물건을 넣어 두는 곳이며, 스님들이 잠깐 휴식을 하기도 하는 곳이다.

*큰방 ; 스님들의 본업인 수행을 행하는 장소. 예불과 공양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참선만을 행하는 선원(禪院)에서 대중이 한 자리에 모여 참선수행하는 방(房)을 '큰방'이라 한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돈독(敦篤)히(도타울 돈/도타울 독) ; 도탑고 성실하게. *도탑다 ; (정이나 사귐이)깊고 많다.

*팔도(八道) ; ①우리나라 전체. ②[역사] 조선 시대, 전국을 여덟 개로 나눈 행정 구역.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말한다.

*각성바지(各姓--) ; 성이 각각 다른 사람.

*하심(下心) ;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겸손하게 갖는 것.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법도(法度 법 법/법도 도) ; 법칙(法則)과 제도(制度). 법규(法規)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규칙이나 의례를 가리키는 말이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비구(比丘) ;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남자 스님. 걸식하는 남자 수행승.

산스크리트어 bhikṣu 팔리어 bhikkhu의 음사. 걸사(乞士)·파번뇌(破煩惱)·파악(破惡)·포마(怖魔)라고 번역.

*가풍(家風) ; ①종풍(宗風)—종문(宗門)의 풍규(風規 풍습상의 규정). 문풍(門風)—선문(禪門)에 있어서의 종풍(宗風).

②선림(禪林, 선종禪宗)에서의 행위의 규범. 청규(淸規, 선원에서 일상의 생활규정). 선종에서 가르침을 나타낼 경우, 각자가 갖는 독자적인 방식, 또는 지도의 방법을 말함.

③그 종(宗)만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가르침의 방식. 지도의 방법. ④한집안에서 오래 지켜 온 생활 습관이나 규범.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동사섭(同事攝) ; 보살(菩薩)이 중생을 제도하고 섭수(攝受)하기 위하여 행하는 4섭(四攝 :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하나.

불보살(佛菩薩)이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몸을 나타내되, 그들과 사업·이익을 같이하면서, 일심동체가 되어 고락(苦樂)을 같이하고 화복(禍福)을 함께 함으로써 진리의 길로 이끌어 들이는 것을 말한다.

*주견(主見) ; 자기의 주장을 담은 의견.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Posted by 닥공닥정
ㄱ/국집2018. 10. 16. 15:51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11분 33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용240)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인데, 「그 찾는 그놈을 다시 되찾는다」 그것입니다.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하면 일상생활(日常生活)인데. 일상생활에 앉고 서고 눕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도 내고 슬퍼하기도 하고, 이것이 바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인데, 이것이 일생생활이거든.

 

그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거든.

이 몸뚱이를 끌고 서울도 가고, 서울에서 요리 끌고 오기도 허고, 이 몸뚱이를 시켜서 성도 내게도 하고, 슬퍼하게도 하고, 말도 시키기도 하고, 또 밥도 먹으라 그러고, 그 안에서 조정하는 놈이 있어.

그놈이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는 없는데, 분명히 이 몸뚱이 안에 이 몸뚱이를 운전하는 조종하는 놈이 있다 그말이여.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그말이여. ‘이것이 무엇이냐?’ ‘이뭣고?’

 

‘대관절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을 허지만,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허는 이놈이 바로 무엇이냐?」 이거여.

「‘이뭣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 뭣고?」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 찾는 놈을 되찾는 것이거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종일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렇게 허라는 것은 아니여.

‘이뭣고?’ 이렇게 허되, 그 속의 뜻은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말이거든.

 

그러나 실지로 헐 때에는 자꾸 「‘이뭣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러라는 게 아니여.

 

또 뭣헌 분은 「‘이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이 있다」 그렇게 내가 말씀을 했더니, 한 번 할 때에 육백만 번이면 열 번을 허면 육천만 번이고, 또 백 번을 하면 육억 번이다.

그래가지고 ‘내가 백 번이야 그까짓 것 1분 동안에 백 번을 하면 10분 동안이면은 천 번을 할 수가 있고 허니까, 그것을 육백에다 곱하면 이렇게 되겠다’ 해 가지고는 「이뭣고」 「이뭣고」.....「이뭣고」를 갖다가 수없이 그렇게 하는데, 그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말이거든.

 

한 번을 하되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한 그 간절(懇切)한 의심(疑心)으로 하라는 거지, 입으로 그저 횟수를 많이 채우라는 말씀은 아니거든. ‘이뭣고?’

그리고 ‘간단(間斷)없이 하라’ 그 말도,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말이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 말소리가 끊어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어요.

 

이 참선이라 하는 건 참, 바르게 하는 방법을 가르켜 드리기도 참 어렵고, 또 그것을 방법을 바르게 배우기도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너무 쉬웁고 간단한데 실지로 해보면 이 화두(話頭)를 바르게 들 줄 알기가 그렇게 쉬운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3년씩 또는 10년씩 선방(禪房)에 다니면서도 또 그 공부를 하셔도 그 진짜 화두를 올바르게 들고 있는 분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화두 하나만 제대로 딱 들어 버린다면 견성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성불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생사해탈하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부득이(不得已)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한다’ 부득이 해서 ‘견성(見性)을 해야 한다’ 부득이해서 ‘성불(成佛)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을 하지,

사실은 생사해탈해야 할 생사도 없는 것이고, 깨달라야 할 법(法)도 없고, 도(道)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해탈 해야 한다’하면, ‘생사해탈’이란 말에 딱! 국집(局執)을 하고, ‘견성을 해야 한다’하면 그 견성이라고 하는 말에 꽉! 국집을 하고, ‘성불을 해야 한다’하면 그 성불이라는 말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 그 국집하는 찰나에 화두를 놓치게 되고 자기를 놓치게 되는 것이여.

 

‘견성성불해라, 생사해탈을 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화두를 들게 하기 위해서, 바로 자기를 관조(觀照)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그 말에 떨어지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

 

방안에 있는 파리를 문을 닫고서 파리를 내키면 그 파리가—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내키면은 천장에 가 붙고, 천장에 가 붙은 파리를 내키면 동쪽 벽에 붙고, 동쪽 벽에 파리를 내키면 서쪽에 가 붙고, 서쪽 벽에 붙은 파리를 내키면 남쪽에 가서 붙고.

이래가지고 그 파리 내키면은 반드시 어디 가서 또 붙는다 그말이여.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어디에 가도 붙으면 안 되거든.

 

다맛 알 수 없는 의심만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가야지, 무엇이 좋다고 한다고 해서 그 좋다고 하는데 붙으면 안 돼.

 

이렇게 오늘 갑자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 법요식에 사부대중이 이렇게 모이셨는데,

그 법문(法門)을 듣고 무엇을 많이 알기 위해서 법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 법문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생각이 떨어진다면, 그건 좋은 생각에 집착했더라도 마찬가지고 더군다나 옳지 못한 생각에 집착했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집착한 마음이 떨어진다면 여기까지 오셔서 법문을 들은 공덕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무슨 법문을 들었어도 그 법문에 국집을 하면 좋은 약을 먹고서도 그 약에 중독(中毒)이 된 거와 같애요.

그 약을 먹은 것은 속에 병이 떨어지라고 먹는 것이지, 그 약을 먹고 약에 중독이 되서 부작용이 일어난다면 그 약을 차라리 안 먹은 것만도 못하거든.

 

오늘 법요식뿐만이 아니라 팔만대장경 경전도 역시 마찬가지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설하신 모든 법문이 또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법(法)에 국집하면—아주 신심 있는 이는 그 법에 매우 깊이 국집을 하는 수가 있는데, 그 국집을 한다면 부처님 법문을 옳게 가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했고 금강경(金剛經)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마는 「법(法)이라 하는 것은 강을 건너가는 배와 같은 것이다(知我說法 如筏喩者)」 그 배는 강을 건너는 데 목적이 있지, 강을 건너가지고서도 그 배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것입니다.

「법에 국집해도 못쓰거든 하물며 법 아닌 것에 있어서랴(法尙應捨 何況非法)」 금강경에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법문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기의 화두를 놓아 버려서는 아니 되거든.

법문을 들을 때일수록 자기의 화두가 더욱 성성(惺惺)하게 잘 들려져 있어야 하거든.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판치생모」 화두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정전백수자」하시는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을 해야 하거든.

 

그 알 수 없는 화두가 들어져 있는 상태에서 법문을 들어보면 법문이 더욱 더 잘 들리고, 비단 법문 들을 때뿐만이 아니라 생활을 하면서—밥 먹을 때에도 그렇고, 세수할 때도 그렇고, 차를 탈 때에도 그렇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그 화두가 항시 들려져 있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하시도록 그렇게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21분46초~33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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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〇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부득이(不得已)하다 ; 마지못하여 할 수 없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내키다 ; (사람이 무엇을)공간을 넓히려고 바깥쪽으로 물리어 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는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것, 즉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줄임말이다.

풀이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대 반야경 육백부(六百部) 중에서 五七七권에 해당되고, 그 내용이 약 3백송(三百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대략 서기 백오십~이백 년경의 대승경전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 밝게 비출 수 있다는 금강석을 부처님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로 비유한 것이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예리하고 반짝이는 완전한 반야의 공지(空智)로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뜻.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용화선원刊) p53.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Posted by 닥공닥정
ㅅ/소소영령2018. 5. 24. 21:54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11분 33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용240)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인데, 「그 찾는 그놈을 다시 되찾는다」 그것입니다.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하면 일상생활(日常生活)인데. 일상생활에 앉고 서고 눕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도 내고 슬퍼하기도 하고, 이것이 바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인데, 이것이 일생생활이거든.

 

그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거든.

이 몸뚱이를 끌고 서울도 가고, 서울에서 요리 끌고 오기도 허고, 이 몸뚱이를 시켜서 성도 내게도 하고, 슬퍼하게도 하고, 말도 시키기도 하고, 또 밥도 먹으라 그러고, 그 안에서 조정하는 놈이 있어.

그놈이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는 없는데, 분명히 이 몸뚱이 안에 이 몸뚱이를 운전하는 조종하는 놈이 있다 그말이여.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그말이여. ‘이것이 무엇이냐?’ ‘이뭣고?’

 

‘대관절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을 허지만,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허는 이놈이 바로 무엇이냐?」 이거여.

「‘이뭣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 뭣고?」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 찾는 놈을 되찾는 것이거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종일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렇게 허라는 것은 아니여.

‘이뭣고?’ 이렇게 허되, 그 속의 뜻은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말이거든.

 

그러나 실지로 헐 때에는 자꾸 「‘이뭣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러라는 게 아니여.

 

또 뭣헌 분은 「‘이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이 있다」 그렇게 내가 말씀을 했더니, 한 번 할 때에 육백만 번이면 열 번을 허면 육천만 번이고, 또 백 번을 하면 육억 번이다.

그래가지고 ‘내가 백 번이야 그까짓 것 1분 동안에 백 번을 하면 10분 동안이면은 천 번을 할 수가 있고 허니까, 그것을 육백에다 곱하면 이렇게 되겠다’ 해 가지고는 「이뭣고」 「이뭣고」.....「이뭣고」를 갖다가 수없이 그렇게 하는데, 그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말이거든.

 

한 번을 하되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한 그 간절(懇切)한 의심(疑心)으로 하라는 거지, 입으로 그저 횟수를 많이 채우라는 말씀은 아니거든. ‘이뭣고?’

그리고 ‘간단(間斷)없이 하라’ 그 말도,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말이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 말소리가 끊어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어요.

 

이 참선이라 하는 건 참, 바르게 하는 방법을 가르켜 드리기도 참 어렵고, 또 그것을 방법을 바르게 배우기도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너무 쉬웁고 간단한데 실지로 해보면 이 화두(話頭)를 바르게 들 줄 알기가 그렇게 쉬운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3년씩 또는 10년씩 선방(禪房)에 다니면서도 또 그 공부를 하셔도 그 진짜 화두를 올바르게 들고 있는 분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화두 하나만 제대로 딱 들어 버린다면 견성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성불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생사해탈하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부득이(不得已)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한다’ 부득이 해서 ‘견성(見性)을 해야 한다’ 부득이해서 ‘성불(成佛)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을 하지,

사실은 생사해탈해야 할 생사도 없는 것이고, 깨달라야 할 법(法)도 없고, 도(道)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해탈 해야 한다’하면, ‘생사해탈’이란 말에 딱! 국집(局執)을 하고, ‘견성을 해야 한다’하면 그 견성이라고 하는 말에 꽉! 국집을 하고, ‘성불을 해야 한다’하면 그 성불이라는 말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 그 국집하는 찰나에 화두를 놓치게 되고 자기를 놓치게 되는 것이여.

 

‘견성성불해라, 생사해탈을 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화두를 들게 하기 위해서, 바로 자기를 관조(觀照)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그 말에 떨어지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

 

방안에 있는 파리를 문을 닫고서 파리를 내키면 그 파리가—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내키면은 천장에 가 붙고, 천장에 가 붙은 파리를 내키면 동쪽 벽에 붙고, 동쪽 벽에 파리를 내키면 서쪽에 가 붙고, 서쪽 벽에 붙은 파리를 내키면 남쪽에 가서 붙고.

이래가지고 그 파리 내키면은 반드시 어디 가서 또 붙는다 그말이여.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어디에 가도 붙으면 안 되거든.

 

다맛 알 수 없는 의심만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가야지, 무엇이 좋다고 한다고 해서 그 좋다고 하는데 붙으면 안 돼.

 

이렇게 오늘 갑자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 법요식에 사부대중이 이렇게 모이셨는데,

그 법문(法門)을 듣고 무엇을 많이 알기 위해서 법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 법문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생각이 떨어진다면, 그건 좋은 생각에 집착했더라도 마찬가지고 더군다나 옳지 못한 생각에 집착했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집착한 마음이 떨어진다면 여기까지 오셔서 법문을 들은 공덕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무슨 법문을 들었어도 그 법문에 국집을 하면 좋은 약을 먹고서도 그 약에 중독(中毒)이 된 거와 같애요.

그 약을 먹은 것은 속에 병이 떨어지라고 먹는 것이지, 그 약을 먹고 약에 중독이 되서 부작용이 일어난다면 그 약을 차라리 안 먹은 것만도 못하거든.

 

오늘 법요식뿐만이 아니라 팔만대장경 경전도 역시 마찬가지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설하신 모든 법문이 또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법(法)에 국집하면—아주 신심 있는 이는 그 법에 매우 깊이 국집을 하는 수가 있는데, 그 국집을 한다면 부처님 법문을 옳게 가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했고 금강경(金剛經)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마는 「법(法)이라 하는 것은 강을 건너가는 배와 같은 것이다(知我說法 如筏喩者)」 그 배는 강을 건너는 데 목적이 있지, 강을 건너가지고서도 그 배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것입니다.

「법에 국집해도 못쓰거든 하물며 법 아닌 것에 있어서랴(法尙應捨 何況非法)」 금강경에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법문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기의 화두를 놓아 버려서는 아니 되거든.

법문을 들을 때일수록 자기의 화두가 더욱 성성(惺惺)하게 잘 들려져 있어야 하거든.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판치생모」 화두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정전백수자」하시는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을 해야 하거든.

 

그 알 수 없는 화두가 들어져 있는 상태에서 법문을 들어보면 법문이 더욱 더 잘 들리고, 비단 법문 들을 때뿐만이 아니라 생활을 하면서—밥 먹을 때에도 그렇고, 세수할 때도 그렇고, 차를 탈 때에도 그렇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그 화두가 항시 들려져 있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하시도록 그렇게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21분46초~33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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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부득이(不得已)하다 ; 마지못하여 할 수 없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내키다 ; (사람이 무엇을)공간을 넓히려고 바깥쪽으로 물리어 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는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것, 즉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줄임말이다.

풀이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대 반야경 육백부(六百部) 중에서 五七七권에 해당되고, 그 내용이 약 3백송(三百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대략 서기 150~200년경의 대승경전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 밝게 비출 수 있다는 금강석을 부처님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로 비유한 것이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예리하고 반짝이는 완전한 반야의 공지(空智)로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뜻.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용화선원刊) p53.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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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 이치(理致)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 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11분 11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 하안거 결제  백일기도 입재.(용240)
 
처음에는 앉는 자세를 배우고  호흡하는 법도 배우고 그래가지고 화두(話頭) 드는 법을 배워서  가면, 처음에는 곧잘 그런대로 되어가서 이렇게 되어가면  되겠구나
그렇게 해서 앉는데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기는 허지만 별로 졸음도  오고, 생각은  생각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화두만 자꾸 들고 나가고,
그대로 가면 이거  달만  내가 무슨 공부에 대해서 기초를 잡을  있겠구나. 이런 식으로 해서 3년만 하면 내가 틀림없이 견성(見性)  거다 이런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대들었는데.
 
과연 처음에는 졸음도  오고 생각만  일어났다 꺼졌다 는데, 나중에  달을  가도 별로 공부가 처음 시작할 때보다 무엇이  나아진  같지 않고,
 달을 해도처음에는 졸음은  왔었는데  달쯤 허니까 졸음이  퍼일어나고, 졸음에 빠졌다가 졸음에서 겨우 어떻게 정신차려서 졸음이 깰만 하면 그때는  망상(妄想) 퍼일어나고,망상을 실컷 하다가 보면은 나중에는  졸음이 오고.
그래서 졸음과 망상이 번갈라 가면서 일어나 가지고 도대체 공부가 잘된 것 같지를 않고.
 
나중에는 울화통(鬱火통) 터질라 그러 가슴이 답답하고,  시간이 대여섯 시간처럼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지고, 가만히 시계를 보면은 앞으로 10분만 지내면 이제 방선(放禪) 하겠다하는데  10분이 1시간보다도  지루하고 길게 느껴진다.
이럴   답답할  일어나서 밖에 가서 포행(布行)  하고 바람도 쐬면 좋겠는데, 5분이나 10 남겨 놓고 자발없이 일어날 수도 없고, 이렇게 해서  ,  , 한 철이 지내갑니다.
 
그런데  답답허고 지루하고 그때  공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때가 참으로 공부해 나아가는데 중요한 고비다하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셔야 합니다.
공부가  걸음 나아갈려면 그러헌 답답허고 견디기 어려울 그런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시간이 지루허고, 그런 고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애기를 길러  경험이 있으시면 아시겠지만, 갓난애기를 길러 보면 무럭무럭   먹고  크다가 설사병이 나기도 하고 어디 병이 나기도 하고 그런데,  병을 앓고 나면 살은 빠지지만 그전에 아니 하던 새로운 재주를 부리게 됩니다.
재롱을 피우게 되기도 하고,  이상한 귀여운 짓을 하게 되고,  말을 그동안에 한마디도 못하던 애기가 무슨 말도 한마디씩 허기도 허고 그러는데.
병치레하고 나면  크거든.   가량  크면서, 살은 빠지면서 키는 크고 그러면서 재롱은 늘고 그러는 것을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던지 사업을  때나, 학문을 하거나  이런 참선을  때에도  고비 올라서려고  때에는 반드시 그러헌 진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답답하고 재미가 없고 공부가 허기 싫어지기도 하고 그러헌 고비를 만났을 , 조금도 그것을 짜증을 내거나 내가  공부가  될려고 () 두터워서  공부 못할 징조인가 보다 이런 생각을 갖지를 말고,
 
「이건 공부를 허다 보면  계단 올라설려고  때에 이런 증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깊이 명심을 하고,
그러한 경계(境界) 나타나더라도 오히려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허면서, 짜증이나 또는 물러서려는 그런 생각을 갖지 말고서, 오히려 좋은 징조라고 하는 것을 알고서 고비를  지혜롭게 넘겨야 하는 것입니다.
 고비를 넘기고 나면 한결 앉기도 수월하고 공부허기도 수월해지는 것을 느끼게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수월하게  들리고 화두가  들린다 해서  좋아하는 마음을 내기가 쉬운데  좋아하는 마음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지어가면 우리 공부허는 사람의 주변에는 항시 마군(魔軍)이가 와서 육근문두(六根門頭)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마군이(마구니)가 와서 기다리고 있느냐?’하면 공부를 해서 () 이루게 되면 마군이가  자리가 영토가 좁아지는 것입니다.
 
나라도 법도(法度) 있어서 잘해 나가면 도둑이 발붙일 곳이 없어지듯이, 나라가 법이 문란해지고 경찰이나 군인이나 이런 힘이 모다 분열이 되어가지고 힘이 타락되어 가지고 힘이 없어지면, 곳곳에 깡패가 득실거리고 도둑이 일어나고 그래가지고 일반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운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다스려지고 모다 법률에 기강이 서고 그러면 도둑이나 깡패나 모다 사기꾼들이 발붙일 곳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도둑이나 깡패나 그런 못된 사람들은 나라가 질서가 잡히는 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군이들도 역시, 공부해 나가는데 있어서 마군이들도  수행인이 공부를 열심히 허면 그래가지고 그이가 () 통하게 되면 자기네 발붙일 곳이 없기 때문에, 항시 주변에서 지키고 있다가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틈을 타서 침입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눈으로도 들어오고, 귀로도 들어오고, 코나 입으로도 들어오고, 몸뚱이로도 들어오고, 생각을 통해서도 들어와서,  육근문두에 항시 마군이가 틈을 엿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은   생각 어떻게 먹느냐?   생각 마군이가 들어오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파트나 주택가에  틈을 타서 강도나 절도가 들어오는 거와 마찬가지로 집안 문단속을  하고, 집안을 잘 거시기하면 그러헌 도둑이 엿보지를 못하겠지만, 도둑은 항시 그런  나오기를이모저모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은 들어오고.
 주인이  단속을 해도 영리한 도둑은 일부러  틈을 맨들어 가지고 갖은 수단을 부려 가지고 틈을 내도록 한눈을 팔도록 맨들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들어오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닦는 사람에게는  점을 명심을 하고, 어떠한 경계를 만나더라도  경계에 속지를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군이가 들어올 때에, 마군이가 나를 유혹할 때에는 언제라도 나의 뜻에 맞는 내가 좋아하는 그러한 탈을 쓰고 나에게 접근을  온다고 하는 사실.
사기꾼이 어떠한 사람을 사기를  때에는 흉악한 그러헌 얼굴을 가지고 나타나지 아니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써 나에게 접근을  오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면은 돈벌이가 잘된다고 유혹을 하고, 그이가 () 좋아하면 그런 것을 가지고 와서 유혹을 하고, 명예나 권리를 좋아하면 명예나 권리 그런 것을 미끼로  가지고 그것을 잘해준다고 이렇게  가지고 접근을  오는 것입니다.
 
우리 공부해 나아가는 데에도 반드시 그와 같다고 허는 것을 명심을 하고, 그러헌 경계에 내가 현혹되지 않도록 좋은 것을 보아도 거기에서 화두를 들고, 더군다나  뜻에 맞지 않는 것을 보고는 더욱  화두를 들고서 공부를  나가야 허는 것입니다.(10분35초~2145)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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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울화통(鬱火통) ; [주로 치밀다 터지다’, ‘터뜨리다 등과 함께 쓰여]몹시 답답하거나 분한 마음이 쌓이고 쌓인 . ‘울화(鬱火)’ 강조하여 이르는 말이다.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자발없다 ; (언행이)가볍고 참을성이 없다.
*() ; (산스크리트어 : karma카르마)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선악(善惡)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 과보(果報).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단전호흡 ; 분류 참선(자세, 호흡)’ 참고.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마구니(마군 魔軍)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육근문두(六根門頭) ; 육근(六根 : 眼耳鼻舌身意)  . 육근과의 경계.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법도(法度 법 법/법도 도) ; 법칙(法則)과 제도(制度). 법규(法規)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규칙이나 의례를 가리키는 말이다.
*() ; ①인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 존재의 총칭. ②육체. ③집착 또는 색욕.

 

Posted by 닥공닥정
ㅇ/은산철벽2018. 5. 24. 10:44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은(銀)으로 만든 산이요, 쇠[鐵]로 만든 벽에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앞뒤가 다 끊어져 버린 절박한 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아무것도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거기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가리킴.

 

수행자에게 이 은산철벽은 내 몸과 목숨을 다해서 뚫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는 관문(關門)으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 등어리에 올라타고서 그 입부리를 소 등에다가 처쑤셔박는 것처럼,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입부리와 머리와 몸을 압량해서, 합해서 처박고 돌격을 해 들어가야 한다.

자기의 근기(根機)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건강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어리석고 영리한 것도 따질 것도 없고, 남녀노소도 따질 것도 없고, 유식 무식도 따질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되 불급불완(不急不緩), 너무 용을 쓰고 몰아붙여도 안 되고 너무 늘어져 처져도 안 되고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어야 한다. 공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따질 것이 없다.

 

(10분 11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용240)

 

정종소식몰자미(正宗消息沒滋味)헌대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로다

나무~아미타불~

타파은산철벽거(打破銀山鐵壁去)하면  차시방도사생하(此時方渡死生河)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종소식몰자미(正宗消息沒滋味)라.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몰자미(沒滋味)여. 아무 재미가 없다 그말이여.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여. 여하약하(如何若何)가 다 소용이 없어. 이러쿵저러쿵 잘하니 못하니, 잘되니 안 되니, 시비(是非)가 여기에는 붙지를 못한다 그말이여.

 

타파은산철벽거(打破銀山鐵壁去)하면, 은산철벽을 타파해 버리면,

차시방도사생하(此時方渡死生河)니라. 이때가 바로 생사대하(生死大河)를 건너가는 것이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타파해 버려. 무슨 은산철벽이냐?

화두(話頭)의 의심,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이 알라야 알 수 없고, 앞으로 나갈라야 앞도 맥히고, 뒤로 물러설라야 뒤도 맥히고,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둘러봐야 꽉 맥혀서,

마치 쥐가 쇠뿔 속으로 들어가서 나아가자니 앞도 맥히고, 물러서자니 뒤도 맥히고, 쇠뿔통이 좁아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돌아서도 못하고.

 

이 쇠뿔이 무엇이냐 하면은 중국에 가면 물소가 있는데, 물소뿔이 기드란헌데 그 기드란한 물소뿔을 가지고 쥐 잡는 쥐덫을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물소뿔 속에 저 안에다가 쥐가 좋아하는 음식물을 넣어 놓으면 쥐가 그 좋은 냄새를 맡고서 그걸 먹으려고 쇠뿔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가서 그 음식을 물고 잡아댕겼다 하면은 찰크닥! 뒷문이 닫혀 가지고 쥐가 꼼짝없이 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 쥐가 물소뿔에 들어가서 꼼짝 못허고 잡혀.

 

앞으로 나가자니 꽉 맥혔고 뒤로 물러서자니 뒤도 닫혀서 돌아서자니 좁아서 돌아서지도 못하고, 화두를 들고 의심을 허되 이렇게 꽉! 맥히도록 맥히게 공부를 지어가야 한다.

 

알아 들어갈 것이 있고, 따질 것이 있고, 이론적으로 분석허고 그래 가지고 무슨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알아 들어가고 더듬어 들어가고 그렇게 화두를 참구(參究)를 허면 그것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해서 의리선(義理禪)이라 해서 그것은 바른 참선이 아니여.

 

무조건하고 ‘이 무엇고?’ ‘이뭣고?’

다못 바보처럼 멍청이처럼 무조건하고 ‘이뭣고~?’

그저 아무것도 몰라도 상관이 없으니까 모를수록에 더 좋으니까 ‘이뭣고~?’

 

「그저 ‘이뭣고?’하면은 거기에서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거기에서 생사(生死)를 해탈(解脫)을 하고, 거기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그러니까 나도 해야겠다」

다못 그런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바보처럼 탁! 맥힌 상태에서 ‘이뭣고~?’

 

바보처럼 그렇게 해 갈수록에 그 사람은 상근대지(上根大智)고,

이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이렇게도 해봤다 저렇게도 해봤다, 이렇게 서성거리고 더듬거리고 갈팡질팡하고 이런 사람은 상근대지(上根大智)라 할 수가 없어. 아직 이 활구참선하는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들어가는 인연(因緣)이 성숙하지 못한 증거여.

 

참으로 이 최상승법에 발심(發心)을 헌 사람이면 뭘 많이 알려고 헐 필요도 없고, 이리저리 따질 것도 없고, 그저 찰나간(刹那間)에 바보 똥멍청이가 되어가지고 그저 ‘이뭣고~?’ 그렇게만 들어가야 된다 그말이여.

그 상태를 갖다가 쥐가 쇠뿔 속에 들어가서 꼼짝 못한 거와 같고 이것이 바로 은산철벽이다 그말이여.

 

은(銀)으로 만들어진 산(山)이요, 쇠[鐵]로 맨든 벽(壁)에 부딪힌 것 같애서, 갈라야 갈 수가 없어. 뚫고 나갈라야 뚫을 수가 없어. 화두가 그렇게 되게 맥혀 버려야 헌다 그말이여.

 

그래서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 되게 맥히고 그 의심이 간절(懇切)하고 크면 클수록 큰 깨달음을 얻는데, 그 의심이 「어떻게 해서 의심이 터지냐 ?」하면,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고, 그동안에 보고 듣고 한 경전이나 불교교리 그런 것을 가지고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이렇게 나가면은 죽을 때까지 그런 식으로 따져도 그것은 확철대오(廓徹大悟)라 하는 것은 오지를 않고.

 

무조건하고 꽉! 맥힌 의심만으로만 나가. 그러니 얼마나 답답허겄냐 그말이여.

 

무슨 책을 보면 환히 알아지는 것이 있고 느껴지는 것이 있고 얻어지는 것이 있고, 날마다 보면 날마다 본만큼 무엇인가 알아지는 것이 있으니까 좀 재미도 있고 답답허지를 않은데,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무조건하고 그저 ‘이뭣고?’만 허니, 오늘도 그 모냥이고 하루를 더 해도 그만이고, 일주일을 해도 알 수가 없고, 한 달을 해도 알 수가 없고, 석 달을 지내도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고 답답허기만 허다.

 

그것이 공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그것이 참으로 공부가 바르게 되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바르게 해 가야 거기에서 업장이 소멸이 되고 결국은 확철대오를 해서 생사를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처음~10분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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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정종소식몰자미~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권6) (사명대사) '贈淳長老' 게송 참고.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여하약하(如何若何) ; 이러쿵저러쿵. 이러하다는 둥 저러하다는 둥 자꾸 말을 늘어놓는 모양.

*시비(是非) ; ①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 ②이러니저러니 좋지 않게 트집을 잡아서 말함. ③옳고 그름.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뭣고? ; 분류 ‘이뭣고 화두’ 참고.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견성의 성(性)은 본성(本性), 자성(自性), 본심(本心), 법성(法性) 등과 같으며, 이런 맥락에서 견성을 견자심불성(見自心佛性), 견불성(見佛性), 견자본성(見子本性), 견법성(見法性)이라고도 한다.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대의지하(大疑之下) 필유대오(必有大悟) ;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p52-53.

當於本參公案上(당어본참공안상)에 有疑(유의)호리니  大疑之下(대의지하)에  必有大悟(필유대오)하리니  千疑萬疑(천의만의)를  倂作一疑(병작일의)하야  於本參上(어본참상)에  取辦(취판)호리라

若不疑言句(약불의언구)가 是爲大病(시위대병)이니라  仍要盡捨諸緣(잉요진사제연)하고  於四威儀內(어사위의내)와 二六時中(이륙시중)에  單單提箇話頭(단단제개화두)하야  廻光自看(회광자간)호리라

 

바로 모름지기 본분을 의지하야 법다이 하야사 비로소 옳으리라。 반드시 본참공안상에 의정을 두리니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으리니, 천의만의(千疑萬疑)를 아울러 한 의심을 지어서 본참상에 판단할지니라.

만약 언구(言句,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큰 병이니라。 반드시 모든 인연을 다 버리고 사위의(四威儀)와 열두 때 가운데에 다만 화두를 잡아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볼지니라.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

*인과(因果) : ①원인과 결과. 현상을 생성시키는 것과 생성된 현상. ②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이치. ③선악의 행위에는 반드시 그 과보가 있다는 도리.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18분 21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용240)

 

어떤 사람이 귀를 꽉 먹게 되었는데, 어렸을 때는 대단히 귀가 잘 들렸는데 중간에 귀가 꽉 먹었어요. 그래 가지고는 여간 귀에다 큰 소리를 질러야 겨우 좀 들리고 그런데.

 

참, 발심을 해서 공부도 열심히 헐려고 그러는데, 그분이 정진을 기도를 열심히 하고 그랬더니,

그 공부를 할 때 그리고 기도를 할 때, 항시 ‘대관절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이 있어서 금생에 내가 귀를 먹었나?’ 항시 그것이 궁금해서 그것이 알고 싶어서 간절한 마음이 항시 마음에 떠나지 아니한 상태에서 참선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랬는데.

 

아! 우연히—전생에 자기가 참선을 했었는데, 옆에서 어떻게 떠드는 바람에 자꾸 그리 신경이 쓰이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저놈의 소리를 안 들을고’하고 항시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아! 그것이 원인이 되어가지고 금생에 귀가 절벽이 되었다 하는 것을—스스로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언젠가, 그 정승(政丞)을 한 사람이 마누라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어서 그걸 찾어봤더니 저 강원도 산골짜기에 숯쟁이 영감한테 가서 떠억 살고 있는 것을 발견을 했어.

그래서 그 할멈 보고 ‘왜 와 버렸냐?’고 ‘따라가자’고 허니까 ‘싫다’고. 숯쟁이 영감이 좋으니까 거기서 살겠다고 안 와.

 

그래서 기가 맥혀서 정승이고 판서고 다 소용없고, 대관절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저 할망구가 나 같은—임금님 밑에는 이 나라에서 내가 최고인데, 나를 버리고 저 천하에 보기 싫게 생긴 숯쟁이 영감한테 반해가지고 저리 가버렸냐?

너무너무 궁금하고 기가 맥혀서 그길로 오대산에 들어가 가지고 그 스님한테 물어봤더니,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 참선을 허면 숙명통(宿命通)이 열리면은 그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지 참선을 하라’고.

 

너무너무 분하고 속이 상하고 또 의심이 나고 한 바람에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저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배고프면 한 숟갈 얻어먹고 그렇지 않으면 말고 허면서 3년 간을 죽어라하고 공부를 했는데.

 

아! 그까짓 것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그런 것 알 생각을 말고 오직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원(願)을 세우고서 공부를 해야 할 텐데, 하도 마누라 도망가 버린 것이 분하고 억울하고 가슴이 아퍼서 마냥 그 생각을 속에다 꼭 가지고서 자나깨나 참선을 했는데,

아! 툭 터져 가지고—터진 것이 누진통(漏盡通)을 한 것이 아니라 숙명통(宿命通)이 터져 가지고 보니까, 전생(前生)에 자기가 그 오대산에서 공부한 스님이었었다 그말이여.

 

이 얘기를 그전에 해서 알고 계신 분도 많겠지만, 그 할멈은 무엇이냐 하면은 전생에 자기 누데기 속에서 살고 있던 '이'였었다 그말이여.

누데기 속에서 '이'가 되어가지고 사는데 그놈이—겨울에 누데기를 빨 수가 없어서 한 해 겨울을 누데기를 빨지 않고 입은 바람에 '이'가 그 속에서 차츰차츰 큰 것이 상당히 커졌다 그말이여.

 

그래 그것을 똑 까서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밖에다 버리면은 얼어죽을 것 같고 ‘이것도 다 전생의 인연(因緣)이니까 누데기 속에서 살어라’ 해 가지고,

거기서 가려우면 요리 떠들고 보면 크막한, 보리쌀만한 '이'란 놈이 거기서 피를 빵빵하니 빨아먹고 거기서 뻐르적뻐르적 뻐르적하는데.

 

그놈이 새끼를 쳐 가지고 새끼도 여럿 낳고, 그놈을 집어내 놓고 심심하면 지대방에서 씨름도 시키고 달음박질도 시키고 그랬는데 그렇게 한 해 겨울을 지낸 다음에 인자 누데기를 벗어서 빨게 되는데,

그 누데기를 벗어서 빠는데 그냥 갖다가 삶으면 '이'가 죽을 것 같아서 그 마치 개가 왔길래 개한테다 '이'를 다 건너주어 버렸다 그말이여.

 

‘그 개한테 가서 잘 살어라’ 그러고 보냈는데, 아! 그 개가 숯쟁이 영감이 되었어.

그 스님한테 있는 동안에는 정승·판서 마누라 노릇을 허다가, 그 개한테 건너간 그 시절이 돌아오니까 어떻게 찾어갔는지 그 산중에—서울 사는 그 정승부인이 보따리 하나 싸 짊어지고 무작정 걸어간 것이 그 강원도 산중으로 해서 숯쟁이 영감을 찾어가게 되었다 그말이여.

 

대번에 숯쟁이 영감 집에 간 것이 아니라, 강원도 어느 장터에 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까 숯쟁이 영감을 보니 숯쟁이 영감하고 이야기가 되어 가지고 눈이 맞아서 결국은 졸랑졸랑 따러가게 되었어.

 

가서 보니 생전 처음 만나—그 정승의 부인으로서 얼마나 고귀한 집안에서 호강을 하고 살았겠습니까마는, 아! 그 숯쟁이 영감 첫눈에 그냥 그 전에부터 같이 살던 사람과 같이 그렇게 남같이 느껴지지를 않고 대번에 그냥 따라가는데 조금도 서슴이 없이 따라갔다 그말이여.

 

이조(李朝) 때만 해도 남녀가 분명해서 외간남자(外間男子) 하고는 함부로 얘기도 못허고 그러는데, 대번에 첫눈에 그냥 싹 마음에 들면서 기분이 좋다 그말이여. 그래서 따라가 가지고 그 숯쟁이 영감하고 당장 물 한 그릇 떠 놓지도 않고 그냥 사는데.

정승이, 자기 본 남편이 와서 그렇게 가자고 그냥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잡고 사정을 해도 다 소용이 없고 팔팔 잡아떼고 안 가는 바람에 영감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억장이 무너져 가지고 울면서 오대산을 찾아가 가지고 결국은 그 전생사(前生事)를 다 알게 되었다 그말이여.

 

지금 내가 이 이야기는 인과설(因果說)을 얘기하자고 내가 이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니고,

참선(參禪) 이야기만 허면 꾸벅꾸벅 졸고, 어째서 멀쩡허니 앉어서 잡담을 허거나 그럴 때에는 눈이 초롱초롱하다가도 참선 법문만 허면 꾸벅꾸벅,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도 ‘그 꼬라지 보기 싫으니까 눈을 감고 법문(法門)을 한다’ 그러셨는데.

 

‘왜 참선법을 들으면 졸음이 오냐?’허면, 이 참선법을 바로 듣고 바로 공부를 하게 되면 마군(魔軍)이가 자기의 궁전이 흔들리고 자기의 영토가 좁아지고 자기의 모든 것이 다 권속이 멸망이 되니까,

그래서 그 법문을 못 듣게 허기 위해서 온 천하에 마군이는 그 참선 법문 듣는 사람의 눈탱이로 다 올라붙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눈을 갖다가 잡어 누르는 바람에 아무리 정신을 채리고 눈을 부릅뜰려고 해도 안 된다 그말이여. 손톱으로 허벅지가 멍이 들도록 집어뜯어도 눈탱이 무거운 것은 안 없어져.

 

그래서 이 참선법을 얘기하면은 조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가끔 이런 인과설도 얘기하게 되는데, 정법(正法)을 믿는 마음으로 들으면 인과설을 들어도 그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 되는 것입니다.

 

인과설을 듣고서 거기에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거기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잘못된 자기의 성격을 고쳐 나가고 참으로 이 정법을 바로 믿고 실천할 수 있게 된다면, 인과설이 바로 최상승법이 되는 것입니다.

 

신랑이 멀쩡한 나무랄 데 없이 이쁘고 얌전하고 솜씨있고 한 자기를 놔두고, 한눈을 팔고 첩을 얻거나 외박을 하거나 그러헌 분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이 숯쟁이 영감과 그 정승 판서의 부인을 생각해보면 ‘아! 이것이 내가 전생에 지은 업(業)의 인연(因緣)으로 이런가 보다’ 내가 미웁고 내가 싫어서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전생에 내 몸 안에 살던 '이'를 내가 개한테 건네주었기 때문에 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아니 할만큼 그렇게 못 생기고 천한 숯쟁이 영감한테 간 그 정승의 부인을 생각을 해서,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거나 또는 남편이 좋아하는 그 여자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갖은 수단을 써서 기어이 뗄라고 하고,

뭣한 이는 남편의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런 남의 뒷조사 잘하는 그런 데다가 돈을 많이 주고 부탁해 가지고 그 뒷조사를 시키니까, 하다 보니까 남편의 법에 저촉된 잘못된 것이 드러나 가지고 그 여자 밝혀낼라다가 남편을 쇠고랑을 차게 허는 그러한 참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있습니다마는.

 

그런다고 바가지를 긁고 싸움을 한다고 해서 남편이 자기한테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그러헐 때 알면서도 모르는 듯 오히려 더 가정에 충실하고 남편에게 잘하고 애들한테도 잘하고 그러면서 인과법을 철저히 인식을 해가지고 이 참선을 열심히 허신다면,

남편도 용서가 되고 자기도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없어지면서 참으로 인생을 똑바로 보고 살게 되고, 더 훌륭한 아내로서 가정주부로서 엄마로서 하루하루를 뜻있게 살 수 있고,

오히려 그런 것이 계기가 되어가지고 진실하게 발심을 해서 도를 닦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가면 남편이 잠시 바람을 피우다가도 다시 내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인식을 못하고 기다릴 줄을 모르고 계속 강짜를 부려가지고 기어이 아주 죽여서라도 그것을 뗄려고 하면 무장 더 되게 들어붙는 거고.

처음에는 그래도 비밀리 지낼 때에는 가정에 대해서도 남편으로서 최소한도로 의무를 다허고 그러다가, 자기 부인이 정말 그 내용을 확실히 알고 강짜를 부리기 시작허면 인자 형식마저도 지키지 아니하고 아주 남남이 되고 웬수가 될 수 밖에 없게 되고, 나중에 다시 가정에 돌아오지 않고 마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인연이라 하는 것은 전생에 그렇게 맺어서 또 만나게 되는데, 남편이 외도를 허는 것이나 부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나 이러헌 관계가 다 전생에 자기가 그렇게 지어 가지고 그러헌 남편을 만나게 되고, 또 그러헌 아내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전생에 참 많은 여자를 울리고 그렇게 난잡허게 지낸 사람은 그 사람이 금생에 여자로 태어나 가지고 그렇게 행실이 얌전하고 얼굴도 참 이쁘고 솜씨도 좋고 허면서도 계속 남편한테 소박(疏薄)을 당하는 그러헌 예도 많습니다.

 

이 세상의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인과의 법칙에 어긋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든 물질에 이르기까지도 전부 정확한 인과의 법칙에 의해서 모든 것이 생성이 되고 변해가고 이렇게 자꾸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과법을 한낱 권선징악(勸善懲惡)하기 위한 하나의 이야기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이것은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듯이 추호(秋毫)도 어김이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 ‘한 생각’ 잠깐 먹은 것도 그것이 한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런 것까지도 낱낱이 다 현실화되고 마는데, 하물며 내 입을 통해서 밖으로 표현이 되고 행동을 통해서 밖에 표현이 된 것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더 구체적으로 실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그러헌 인과의 법칙을 인증(認證)하면서도, 철저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인증하면서도 거기에서 초월하는 길이 바로 이 불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을 부정(否定)하고 인증을 아니 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증을 하고 틀림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거기에서 초월하는 길이 바로 이 불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잘못 인식하면 인과를 갖다가 부정해 버리는 그러한 데에 떨어질 수가 있는데,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인과의 법칙을 잘못 이해하면 거기에 딱 국집(局執)을 해서 구속이 당해가지고 자유를 얻지를 못하는 그것도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을 똑바로 인식하면서도 거기에서 초월하는 길,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을 옳게 믿는 것입니다.

 

인과의 법을 잘못 인식하면 숙명론(宿命論)이나 운명론(運命論)에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또 인과의 법칙을 인증을 안 하면 그것은 올바른 생각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46분48초~65분0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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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絶壁 끊을·끊어질 절/벽·벼랑 벽) ; ①아주 험한 낭떠러지. ②아주 귀가 먹었거나 사리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정승(政丞 정사 정/도울·정승 승) ;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 행정부의 최고 기관)의 수반(首班 행정부의 우두머리)인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을 통틀어 이르는 말.

*숯쟁이 ; 숯 굽는(나무를 태워 숯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원(願) ; 소원(所願). 바라고 원함. 또는 바라고 원하는 일.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①신족통(神足通) ②천안통(天眼通) ③천이통(天耳通) ④타심통(他心通) ⑤숙명통(宿命通) ⑥누진통(漏盡通)—이 있는데,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佛菩薩)만이 능한 것이다.

*누데기 ; ‘누더기(누덕누덕 기운 헌 옷)’의 사투리.

*크막하다 ; 큼직하다(무엇이 꽤 크다).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마치 ; ‘맞추어. 알맞게’의 옛말.

*이조(李朝) ; 근세조선(近世朝鮮)을, 임금의 성을 좇아 ‘이씨 조선(李氏朝鮮)’이라는 뜻으로 이르는 말.

*외간남자(外間男子) ; 여자가 상대하는, 남편이나 친척이 아닌 남자.

*'물 한 그릇 떠 놓지도 않고 그냥 사는데' ; ‘혼례(婚禮 결혼식)도 않고 그냥 산다’는 뜻. 가난한 집안의 혼례를 이르는 말로 작수성례(酌水成禮), 물 한 그릇만 떠 놓고 혼례를 치른다는 말이 있다.

*억장이 무너지다 ; 극심한 슬픔이나 절망 따위로 몹시 가슴이 아프고 괴롭다.

*억장 ; ①‘가슴’을 속되게 이르는 말. ②억장(億丈)으로 '썩 높은 것. 또는 그런 높이.'

*전생사(前生事) ; ①'전생(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삶)'에 있었던 일. ②'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이미 지나간 일'을 일컫는 말.

*인과(因果) ; ①원인과 결과. 현상을 생성시키는 것과 생성된 현상. ②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이치. ③선악의 행위에는 반드시 그 과보가 있다는 도리.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꼬라지 ; ‘꼬락서니(사람의 모습이나 행색을 속되게 이르는 말)’의 사투리.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눈탱이 ; 눈퉁이(눈두덩의 불룩한 곳을 속되게 이르는 말).

*집어뜯다 ; ‘꼬집다’의 사투리.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강짜 ; ‘강샘(결혼한 상대자나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異性)이 다른 이성을 좋아할 경우에 지나치게 시기함)’을 속되게 이르는 말.

*무장 ; 갈수록 더. 더욱. 한사코.

*소박(疏薄 멀리할·거칠 소/엷을·업신여길 박) ; 아내나 첩을 인격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모질게 대함.

*권선징악(勸善懲惡 권할 권/착할 선/혼날 징/악할 악) ;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추호도’, ‘추호의’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한데 ; ①사방, 상하를 덮거나 가리지 아니한 곳. 곧 집채의 바깥. 노천(露天). ②일정하게 정하여진 자리가 아닌 다른 곳.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인증(認證) ; 인정(認定)하여 증명(證明)함.

*부정(否定) ; ①그렇지 않다고 단정함. 또는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음. ②옳지 않다고 반대함.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숙명론(宿命論) ; 운명론(運命論). 모든 일은 미리 정하여진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일어나므로 인간의 의지로는 바꿀 수 없다는 이론.

세상이나 인생의 모든 것이 숙명(宿命 :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에 의해 예정되고 절대적으로 지배받는다고 보아 인간의지의 자유와 창조는 인정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무력하다는 주장.

 

Posted by 닥공닥정
ㅅ/수구여병2018. 3. 7. 10:56

*수구여병(守口如甁) ; ‘입을 지키기를 병마개 꽉 틀어막듯이 하라’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을 함부로 해서 시비 · 싸움이 일어나 온갖 원망 · 재앙이 일어나고, 입으로 음식 먹는 양을 조절을 못해 병이 많이 나니, 입을 잘 단속해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라는 뜻의 말.

 

(6분 5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용240)

 

휴설인지단여장(休說人之短與長)이라  비도무익우초앙(非徒無益又招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능수구여병거(若能守口如甁去)하면  차시안신제일방(此是安身第一方)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휴설인지단여장(休說人之短與長)하라  비도무익우초앙(非徒無益又招殃)이니라.

다른 사람의 잘하고 잘못하고 한 것을 말하지 말아라. 아무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앙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다.

 

약능수구여병거(若能守口如甁去)하면, 만약 능히 병마개 틀어막듯이 입을 그렇게 잘 막아 버리면,

차시안신제일방(此是安身第一方)이니라. 이것이 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데 최고의 방법이니라.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병은 입으로부터 들어오고, 모든 재앙은 입으로부터 나온다’ 하셨습니다.

 

‘병(病)이 입으로 들어온다’하는 것은 음식을 잘못 먹어가지고—맛있는 것을 과식을 하고, 좋다 한다고 함부로 먹고—음식을 잘못 먹어가지고 그래가지고 병이 나는 수가 너무너무 많고.

 

또 ‘모든 재앙(災殃)은 입에서 나온다’ 말을 잘못해 가지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시비(是非)가 일어나고—부부간에도 말 때문에 싸움을 참 많이 하고,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도 그렇고, 친구 간에도 그렇고, 형제간에도 그렇고, 동서 간에도 그렇고, 집안에 모다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있는 것은 대부분 말 때문에 그런 거여.

 

말을 풀쑥 한 것이 그것이 사람에 의해서 이리 전해지고 저리 전해지고 하면은 본의 아니게 서로 오해를 사게 되고, 그래 가지고는 속으로 꽁하니 섭섭한 마음을 품고,

차라리 가서 따지고 한바탕 싸움을 하고 나면 다 별것이 아닌데, 차마 따질 수는 없고 계속 속으로 ‘저 사람이 나한테 그렇게 했단 말인가?’ 해 가지고는, ‘두고 보자’해 가지고 꽁해 가지고는 1년, 3년 되어도 속에 섭섭한 것이 풀리지를 않고,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을 버리지를 못하고,

그래가지고 나중에 뭔 일이 있을 때에는 그 섭섭한 생각이 있기 때문에 좋게 해줄 일도 좋게 안 해주고.

 

여기에 모이신 분은 마음보를 그렇게 쓰실 분은 안 계시겠지만 그래 사람이라는 게 섭섭한 말을 이리저리 전해 들으면은 속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입도 꼭 다물어 버리고 기왕이면 귀까지 다물어 버렸으면 참 좋겠지만—그 어떤 사람이 귀를 꽉 먹게 되었는데, 어렸을 때는 대단히 귀가 잘 들렸는데 중간에 귀가 꽉 먹었어요. 그래 가지고는 여간 귀에다 큰 소리를 질러야 겨우 좀 들리고 그런데.

 

참, 발심(發心)을 해서 공부도 열심히 헐려고 그러는데, 그분이 정진을 기도를 열심히 하고 그랬더니,

그 공부를 할 때 그리고 기도를 할 때, 항시 ‘대관절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이 있어서 금생에 내가 귀를 먹었나?’ 항시 그것이 궁금해서 그것이 알고 싶어서 간절한 마음이 항시 마음에 떠나지 아니한 상태에서 참선(參禪)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랬는데.

 

아! 우연히—전생에 자기가 참선을 했었는데, 옆에서 어떻게 떠드는 바람에 자꾸 그리 신경이 쓰이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저놈의 소리를 안 들을고’하고 항시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아! 그것이 원인이 되어가지고 금생에 귀가 절벽이 되었다 하는 것을, 스스로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입니다.(42분8초~48분1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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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휴설인지단여장~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권4) '贈許生' 사명대사 게송 참고.

*재앙(災殃) ;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시비(是非) ; ①옳음과 그름. ②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 또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하는 말다툼.

*풀쑥 ; 갑자기 나서서 어떤 말을 함부로 툭 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마음보 ; 마음을 쓰는 속 바탕.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절벽(絶壁 끊을·끊어질 절/벽·벼랑 벽) ; ①아주 험한 낭떠러지. ②아주 귀가 먹었거나 사리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