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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4.13 사바세계(No.198)—(게송)得之在心應在手~ | 공부 요점, 모든 경계 위에서 화두를 들어라 | 사바세계가 도닦기 좋다 | 대신통(大神通)과 소신통(小神通).
  2. 2021.03.16 상(相)(No.024)—도인 81행 | 상(相)에 의지하지 아니한 진실한 신심 | 금강경 사구게 | 여러분 자신, ‘참나’를 보고, '참 이름'을 들어야 된다.
  3. 2021.03.14 선지식(No.024)—참선하려면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 진묵겁 전에 우리는 다 성불해 마쳤다 | 도인 81행 | 상(相) | 진실한 신심 | 금강경 사구게.
  4. 2021.03.07 수행((No.587-2))—오조 홍인대사의 『최상승론(最上乘論)』, 「但能著破衣 飱麤飱 了然守本眞心 佯癡不解語 最省氣力而能有功 是大精進人也」
  5. 2021.01.22 선근((No.479))—(게송)一佛二佛千萬佛 | 부처님들은 어떻게 선근을 심었나? |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인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것은 화두를 거각해야. 1
  6. 2020.12.24 식신(No.454)—(게송)石火光陰走~ | 망령된 식신(識神) | 화두 의심을 놓치면 정념을 잃어버린 것이라, 정념을 잃고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7. 2020.12.20 상기병(No.445)—화두를 안 들기가 더 어렵다 | 상기(上氣)와 단전호흡. 단전호흡 안 하면 참선 못합니까? | 상기병 약은 단전호흡과 요료법.
  8. 2020.12.19 사십이장경(No.593)—우란분재 | 목련존자가 수행자들에게 올린 공양 공덕으로 아귀도에 있는 어머니를 구제 | 『사십이장경』 제11장, 無心道人.
  9. 2020.12.09 생사는 본래 없다(No.636)—(게송)月磨銀漢轉成圓~ | 정중로월(井中撈月) | 우리는 이미 사형언도를 받은 처지 |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
  10. 2020.12.01 삼요(No.256)—(게송)법왕권실영쌍행~ | 도를 닦을진댄 먼저 급히 바른 스승을 찾아야 할 것이다 | 도(道)는 자기가 자기를 사무쳐 버리는 것.
ㅅ/사바세계2021. 4. 13. 10:45

사바세계(No.198)—(게송)得之在心應在手~ | 부처님과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 공부 요점 -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지 마라 | 모든 경계 위에서 화두를 들어라.
발심할 수 있는 사바세계에 태어나야만 도를 이룰 수가 있다 | 대신통(大神通)과 소신통(小神通).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1) 15분 27초.

 

(2) 11분 40초.

 


[법문] 송담스님(No.198)—1983년 4월 첫째 일요법회(83.04.03) (용198)

(1)-----------------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한데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4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이것을 마음에 얻어. 이것을 얻되, 마음에 있어서 이것을 얻는다. 그리고 응재수(應在手)라. 응하는 데에는 손으로 응(應)을 한다 그말이여.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눈달, 겨울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그 눈이 쏟아지는 속에 달이 뜨며, 봄이 돌아오면 그 봄바람 속에 꽃이 피어.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눈 내리는 속에 달이 뜨며, 봄이 돌아오면은 동풍이 부는데 그 동풍이 부는 속에 꽃이 피어난다 그말이여.

우리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진(六塵)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졌을 때 그게 '마음에 얻는다'
마음에 그러한 육진(六塵)이 비추어지면 그것을 상대하게 될 때에는 손으로 글씨를 쓰게 될 때는 글씨를 쓰고, 일을 하게 될 때에는 일을 하고, 그것이 응할 때에는 손으로 그것을 응하게 된다 그말이여.

우리 일신상(一身上)에는 그러려니와 우주법계에 자연계에 있어서는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가을에는 휘황창 달이 밝고, 봄이 오면 동풍이 불고 꽃이 피는 것이여. 이렇게 하기를 몇억만 겁(劫)을 그렇게 해 내려왔다 그말이여.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는데, 새벽이 돌아오면 아침마다 닭은 오경(五更)이 되면은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봄이 돌아오면은 곳곳마다, 산이나 들이나 집이나 골짜구니마다 울긋불긋 꽃이 피더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나,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우리가 부처님보단 우리의 본성(本性), 자성(自性) 자리에 있어서 모자라거나, 부처님이 우리 중생보다 더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뜻을, 내가 나를 깨닫지를 못해서 오직 그 하나 때문에 우리는 중생의 탈을 벗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달이 법회를 열고 무슨 말을 할 말이 있느냐? 무슨 기특하고 재미있는 얘기 거리가 있는 것이냐?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법상에 올라오며, 무엇을 듣기 위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이렇게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이렇게 모이시는 것이냐?
왜 과거에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성현들은 이 문제를 해결을 했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동서 사방으로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인가?

천 번 만 번 법문을 듣고 서울로 지방으로 법회를 법문을 들으러 다녀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냥 마찬가지여. 법문을 들을 때에는 가슴이 좀 후련하고 무엇인가 얻은 바가 있는 것 같다가, 한 시간 두 시간 지내고 하루 이틀이 지내면 도로 답답하고 방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말이여.

공부해 나가는 그 근본 뜻을 바로 알아버리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정진(精進)이요, 수도(修道)요, 공부를 해가는 것인데, 그 공부해 나가는 그 요점을 바로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행여나 무슨 좋은 말씀을 들을까?’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법문을 들을까?’ 밤낮 들어봐도 들을 때 뿐이고 공부는 조금도 나아가는 것이 없다 그말이여.

일용 생활,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세수하고, 오줌 누고, 똥 누고, 걸어 다니고, 차 타고, 하는 이러한 일상생활,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는다면 이것은 영원히 찾아도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여.
여의고 그놈을 떠나서—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무엇을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잡고, 발로 걸어 다니고,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놈을 버리고, 그놈을 떠나서 나의 자성(自性) 자리가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그놈을 버리고 찾겠지만, 그놈을 떠나서는 세상없이도 없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놈을 버리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하는 뜻을 모르는 사람은 항시 마음만 급하고 마음만 바뻐. ‘내가 이렇게 공부를 안 해서 어떻게 하나!’ ‘오늘도 이렇게 그럭저럭 하루가 지냈구나!’ ‘이러한 모다 그 이런 복잡한 일 때문에 내가 공부를 못한다’
남편 때문에 못하고, 자식 때문에 못하고, 살림살이 때문에 못하고, 병 때문에 못하고, 그러한 것 때문에 못한다고 핑계를 대고 마음만 조급하다 그말이여.
마음이 조급하니까 짜증만 내고 신경질만 내고 일체 생활에 안정을 잃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평과 불만이 가뜩차 있어. 그러니 무슨 일을 한들 그 일이 제대로 되며, 무슨 공부가 될 것이냐 그말이여.

「공부하는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은 모든 기회(機會)와 경계(境界) 위에서 잡아가지고 쓸 수가 있다 그말이여.
기회,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기회와 경계상에 그놈을 여의지 않고,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턱! 잡어서 써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는 바로 거기서 잡아 낚아채야 하고, 귀로 무엇을 소리를 들을 때에는 듣는 그 찰나에 퍼뜩 잡아서 써야 해.

속담에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번갯불 번쩍하는 그 번갯불에다가 콩을 구워 먹어.
번갯불 번쩍할 때 바로 그때를 이용해서 바늘귀를, 바늘에다 실을 폭 뀌듯이, 그 찰나를 잘 잡아 쓸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공부하는 바른 길을 터득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여.(처음~15분39초)




(2)------------------

선방에 3년, 10년, 20년, 30년을 다녀도 그러한 기회와 경계를 여의고 따로 공부를 지어 나가려고 그러고, 그놈을 여의고 공부를 할려고 한 사람은 아무리 애써봤자 공부에 진취가 있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쪼끔 시끄러우면 파르르 신경질을 내고, 쪼끔 복잡하면 도망할 궁리를 하고, 경계와 기회를 피하고 도피해 가지고 따로 공부를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맞는 일, 내 마음에 맞는 사람, 내 마음에 맞는 장소, 모든 일이 내 마음과 내 마음에 순(順)하는, 내 마음대로 되는, 조끔도 내 마음을 거슬리지 아니한 그러한 곳은 저 천상에, 하늘나라 천당에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천당에 가면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고, 모든 즐겁고 기쁘고 편안하기는 하지만, 거기서는 도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도(道)를 이루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신 것입니다.

천당(天堂)은 좋고 기쁘고 편안한 일만 있어서 그러한 상태에서는 발심(發心)을 할 수가 없어. 축생(畜生)이나 지옥(地獄)은 모든 일이 괴로움만 있어서 괴로움이 지나치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우리의 근기(根機)로 그것을 이겨 나갈 수가 없어.
오직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이 사바세계는 내 마음에 합당한 일도 있고, 기쁘고 편안한 일도 있으려니와 슬프고 괴롭고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도 있어서 우리가 분심(憤心), 발심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야만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일부러 무상(無上)의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위해서, 대도를 성취해서 영원한 해탈도를 증득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 사바세계에도 오셨는데, 우리는 과거에 무슨 수승한 인연이 있어서 다행히 금생에 이 사바세계에 왔습니다.
이 '사바세계가 좋다'고 하는 것은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여져 있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가 좋다는 것이여.

그런데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피하고 슬픈 일은 피하고 기쁜 일만을 찾고, 괴로운 일을 피하고 즐거운 일만을 찾고, 시끄러운 것을 피해서 조용한 것만을 찾고, 벌써 시끄러운 것을 버릴려고 할 때에 그르쳐 버렸고, 다시 편안하고 즐거운 곳을 찾을 때에 두 번째 어긋나 버리는 것입니다. 계속 어긋나고 그르치기만 해 가지고 언제 바른길을 한 걸음이라도 갈 수가 있느냐 이말이여.

공부하는, 참으로 발심을 해서 진정으로 대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경계—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괴로운 일이나 즐거운 일이나, 어떠한 순경계(順境界)나 역경계(逆境界)를 만났을지라도 바로 그 기회와 그 경계를 단 일분일초라도 놓치지 말고 바로 되잡아 써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지어간다면 우리가 있는 장소는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그 시간이 어느 시간이 되었건, 어떠한 일을 만나건, 어떠한 사람을 상대하건, 우리는 곳곳마다 최상의 선방(禪房)이요, 바로 부처님 회상(會上)이요, 닥치는 일마다 부처님이요, 불보살을 친견한 것이요,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면 모든 소리는—나를 칭찬하는 소리나,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나, 새가 우는 소리나, 닭이 우는 소리나, 개가 짓는 소리나, 자동차 소리나, 모든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소리요, 부처님의 법문(法門)이 될 것이며,
내가 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은—저 해와 달은 말할 것도 없고 흘러가는 구름과 물, 겨울에 내리는 눈이나, 봄에 피는 꽃이나,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나,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나, 모든 것이 다 불색(佛色), 부처님의 몸이, 불신(佛身)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접촉하는, 상대하게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되고, 바로 그것이 최상의 육신통(六神通)으로 되는 것입니다.

소신통(小神通)은 내일 일을 알고, 여기서 서울 일을 알고, 앞으로 다가올 10년 20년 뒷일을 알고, 여기서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서울도 왔다갔다 축지법을 하고, 이러한 것은 소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조그마한 신통이라 하는 것이고.
참으로 최상의 대신통(大神通)이라 하는 것은, 부르면 대답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대간하면 한숨 자고, 이것이 바로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삿된 사람은 소신통이 대신통인 줄 착각을 하는 거고, 참으로 불법(佛法)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옳게 인식한 사람은 바로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바로 이것이 신통 중에 최고로 크고 높은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대신통을 착각을 해 가지고 소신통을 추구한 사람은 공부해 나가다가 사견(邪見)에 빠지기가 쉽고, 마구니의 권속으로 끌려가서 미치거나 삿된 경계에 빠지는 것이고.
소신통에 집착을 하지 아니하고 참으로 대신통의 위대함에 눈뜬 사람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시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고 항시 부처님에 설법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못하겠습니까.(15분40초~27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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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득지재심응재수~'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대도사(大導師 큰 대/길·인도하다·이끌다 도/스승 사) ; 불(佛) · 보살(菩薩)의 존칭. '크신[大] 길 인도하는[導] 스승[師]'이라는 말.
도(導)는 「길[道] · 인도(引導)하다 · 이끌다」의 뜻으로, 대도사는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길로 인도하는 큰 스승이라는 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度] 하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대도사(大度師)와 같은 뜻이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 삼무차별(三無差別 :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불원천리(不遠千里)하다 ; 천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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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천당(天堂) ; ①천상(天上)에 있다는 신(神)의 전당(殿堂), 하늘의 세계.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을 통칭하는 말. ②정토교(淨土敎)의 극락세계(極樂世界).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일분일초(一分一秒) ; '1분과 1초'로 아주 짧은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부처님 회상(會上) ; 불회상(佛會上). 부처님[佛]의 회상(會上). 부처님 계시는 곳.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불색(佛色) ; 불색신(佛色身). 형체를 갖춘 부처님의 몸을 일컫는 말. 상대어는 법신(法身)으로 진리를 인격화한 부처님을 가리킨다.
*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도(度)·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여섯 가지 수행의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대간하다 ; ‘고단하다(지쳐서 피곤하다)’의 사투리.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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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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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상(相)2021. 3. 16. 14:35

상(相)(No.024)—도인 81행 | 상(相)에 의지하지 아니한 진실한 신심 | 금강경 사구게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삼도(三途)를 면하고, 나의 이름을 들은 사람은 해탈도를 증득하여지이다'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9분)

 


[법문] 송담스님(No.024)—1976년(병진년) 동안거 결제(76.10.15.음) (용024)

스승을 찾는 데에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 이후로 선지식이 일양(一樣)으로 밖으로 보아서 인물이 잘나고, 법문을 들어보면 아주 변재(辯才)가 있고 말이 조리(條理)가 분명해서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만 하고.
그리고 그 행동은 대도사의 품위가 있고 몸에서는 광명이 비치며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풍기며, 한 번 뵙기만 해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숭배심과 신앙심이 우러나오는 그러한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춘 그러한 도인(道人)으로만 세상에 출현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도인은 가끔 있을 수 있을지언정, 대체로 불보살과 역대 대도사가 출현하실 때에는 여든한[八十一] 가지의 그러한 가지가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는 의심스럽고 '세상에 저게 무슨 도인인가? 저게 무슨 불법인가? 저래 가지고 무슨 중생교화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사람 앞에 법문을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이렇게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찌 보면 어린애 같고, 어찌 보면 바보 같고, 어찌 보면 미치광이 같고, 그러한 양상(樣相)으로 출현하신 선지식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중생이 한번 보고 한번 들음으로써 신심이 더욱 돈발(頓發)할 수 있는 그러한 훌륭한 양상으로 출현을 한 것이 낫지, 어찌 미치광이같이 바보같이 어린애같이 주책없는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의아스럽게 맨드는 그러한 양상으로 출현을 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여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습니다.

중생은 무엇을 듣던지 보던지 단통 상(相)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자기 나름대로 저울질을 하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눈에 들면은 좋다고 그러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야단입니다. 그러다가 조그만한 허물만 보였다면 대번에 손가락질을 하고 비방을 하고 "아! 큰스님인 줄 알고 큰 도인인줄 알았더니 내가 잘못 봤다. 어디가 도인이 그럴 수가 있느냐?" 대번에 돌아서서 욕을 하고 비방을 하고 다른 사람까지 가서 법문을 듣지 못하도록 선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相)을 보고 믿는 신도, 상을 보고—법문을 잘하니까, 얼굴이 잘 생겼으니까, 참 음성 소리가 좋으니까, 참 인정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스님이 참 좋다. 이러한 식으로 믿기 시작한 그 신심은 머지않아서 변해 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서 상(相)에, 모냥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정말 진실한 돈독한 신심으로 법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선입관, 주견을 잊어버리고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신(信)하는 그 신심은 어떠한 행동이나 어떠한 언어나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어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자기의 진실된 믿음은 동요가 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求)하는 자는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금강경을 날마다 한 번씩 읽고 그러기를 몇십 년을 하는 그러한 신심을 가진 불자(佛子)가 금강경에 씌어 있는 단 한 구절의 게송의 뜻마저도 바로 보지 못하고, 마냥 정법을 비방하고 바로 선지식을 믿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하는 자는 삿된 도를 행한지라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부처님은 32상과 80종호를 다 갖추셨고 그 음성은 원음(圓音)으로써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은 모든 중생이 자기의 근기에 맞춰서 각기 자기 나름대로 전부 그 법문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원음을 갖추셨으니까 나는 그분을 부처님으로 숭배한다. 그러한 거룩한 상호를 가지셨으니까 부처님을 숭배한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 앞에 머리 숙여 목숨 바쳐 귀의한다' 이러한 사람은 「참 여래를 보지 못한 사람이다」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한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얼굴을 한 번만 본 사람도, 나의 이름을 한 번만 들은 사람도 결정코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대해탈도(大解脫道)를 얻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할 때는 밑을 보지 말고 저의 얼굴을 보시면서 들으십시오.
30년을 두고 발원을 하기를 '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삼도(三途)를 면하고, 나의 이름을 들은 사람은 해탈도를 증득하여지이다' 이렇게 간절히 축원을 해왔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을 자칫 잘못 들으시면은 여러분은 돌아서서 웃으시게 됩니다.
「나」라고 하니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낱낱이 「나」를 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기 이름을 한 가지 두 가지씩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임시로 붙여 놓은 이름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참 이름'을 바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참나’를 본 사람이 어찌 삼악도에 떨어지며, 여러분 자신의 '참 이름'을 들을 수 있다면 어찌 해탈도를 증득 못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드렸지마는, 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송담(松潭) 얼굴을 봐도 절대로 악도를 면하고 해탈도를 증득하리라고 저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때에는 저의 얼굴을 똑바로 보시면서 들어야 졸음이 안 온 것입니다. 요렇게 밑으로 참선 한 척하고 있으면은 남 봄에는 점잖하니 듣고 있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꾸벅꾸벅 하고 계신 분이 계시거든요. 그렇게 되면은 제가 목이 아프도록 이야기한 보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19분41초~28분4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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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양(一樣) ; ①한결같은 모양. 또는 같은 모양. ②한결같이 그대로. 또는 꼭 그대로.
*변재(辨才 말 잘할 변/재주 재) ; 말을 잘하는[辨] 능력과 재주(才操).
*조리(條理) ;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대체로 불보살과 역대 대도사가 출현하실 때에는 여든한 가지의 그러한 가지가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는 의심스럽고 '세상에 저게 무슨 도인인가? 저게 무슨 불법인가? 저래 가지고 무슨 중생교화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사람 앞에 법문을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이렇게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찌 보면 어린애 같고, 어찌 보면 바보 같고, 어찌 보면 미치광이 같고, 그러한 양상(樣相)으로 출현하신 선지식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 도인(道人)의 81행(行). 도인의 여러 가지 행에 있어서 81행이 있는데, 「도인의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좋고 궂은 모든 행위가 다 포함될 수가 있다.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광행(狂行) · 영아행(嬰兒行)도 있고, 승행(僧行) · 속행(俗行) · 남자행 · 여자행, 그리고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까지 이르나 도안(道眼, 道의 眼目)이 명백하면 아무 걸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81행 가운데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인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친다.

[참고] 『경허집(鏡虛集)』 '여등암화상(與藤菴和尙 등암화상에게 주다)'에서.
達磨大師入唐土 敷演最上乘法 不論誦經念佛持呪禮拜 不論長坐不臥一食卯齋 不論禪定解脫 不論持戒破戒僧俗男女 見性卽成佛 若以誦經等餘外法 妄爲佛法 殺却無罪過

달마대사가 당나라에 들어와 최상승법을 폈는데, 경을 읽고 염불하고 주문을 외고 예배하는 것을 논하지 않았으며, 장좌불와 일종식도 논하지 않았으며, 선정과 해탈도 논하지 않았으며, 계(戒)를 지키고 파하는 것이나 승속 남녀도 논하지 않았으며, 자기 성품을 보면 곧 성불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경을 읽는 등이나 그밖의 법을 망령되이 불법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又云 栴多羅見性成佛 不論作殺生業 縱作業 不同他人 業拘不能 白衣見性成佛 不論淫欲 縱有餘習 亦不相妨 洪州云 善亦是心 不可將心還修於心 惡亦是心 不可將心還斷於心 牛頭禪師云 心無異心 不斷貪淫

또 "전다라가 견성성불함에 살생업을 지은 것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업을 짓더라도 다른 사람과 달라서 업에 구애되지 않으며, 속인이 견성성불함에 음욕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또한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홍주(마조도일) 스님은 "선(善)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닦을 수 없고, 악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끊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우두 선사는 "마음에 다른 마음이 없으니 탐심과 음욕을 끊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故善知識牧牛 有八十一行 自佛行梵行 乃至有殺盜淫酒等行 而道眼明白 亦無所碍 故潙山禪師云 只貴正眼 不貴行李處 故此法門逈出三乘 汎學者 實不可思議 古有習小乘戒律者 皆誹謗禪師 而如蟷螂捍轍 斥鷃笑鵬 置之莫論

그러므로 선지식의 목우행(牧牛行)에 81가지가 있으니,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 이르기까지 도안(道眼)이 명백하면 아무 구애될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산선사는 "다만 안목이 바름만 귀하게 여기고 행리(行履)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법문은 삼승을 멀리 벗어났으니, 범범하게 배우는 사람은 실로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 소승의 계율을 익힌 이들은 모두 선사를 비방했으나 이는 버마재비(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고 뱁새가 대붕(大鵬)를 비웃는 격이니, 제쳐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양상(樣相 모양·형태·상태 양/서로·모양·바탕 상) ; 사물이나 현상의 모양이나 상태.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단통 ; 그 자리에서 대번에 곧장.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금강경』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금강경』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色見聲求 是行邪道 作麼生 不行邪道去 但知聲色本非眞 自然不被聲色惑 見盡自於玄旨會 情忘能與道相親

색상으로 보고 음성으로 구하는 것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삿된 도(道)를 행(行)하지 않겠는가?
다못 이 소리와 색상이 본래 참[眞]이 아닌 줄 알면 자연히 소리와 색상에 현혹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소리를 듣고 색상(色相)을 보는 그 견(見)이 다하면, 자연히 현현(玄玄)한 뜻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정(情)이 다하면 능히 도(道)와 더불어 서로 친(親)하게 될 것이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원음(圓音) ; 치우침 없는 원만한 음성. 들을 수 없는 이가 없는 음성. 모든 유정이 제각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부처님께서 한 음성[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실 때, 모든 중생이 제각기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평등하게 이해하는 원만한 부처님의 가르침.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사도(四道) ;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 것. ①가행도(加行道). 번뇌를 끊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 ②무간도(無間道). 간격이나 걸림 없이 지혜로써 번뇌를 끊는 단계. ③해탈도(解脫道).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④승진도(勝進道). 뛰어난 수행으로 해탈의 완성에 이르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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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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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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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선지식(스승)2021. 3. 14. 12:56

선지식((No.024))—참선을 하려면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 진묵겁(塵墨劫) 전에 우리는 다 성불해 마쳤다 | 법문 듣는 법 | 도인 81행 | 상(相)에 의지하지 아니한 진실한 신심 | 금강경 사구게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19분 30초)

 


[법문] 송담스님(No.024)—1976년(병진년) 동안거 결제(76.10.15.음) (용024)

조실 스님께서 그날 하시던 법문—참선을 할 사람, 참선을 헐라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냐?

첫째,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참선은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 것이지마는,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하는 참선은 아무리 밤잠을 안 자고 밥을 굶으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고 해도 그 참선은 결단코 우리에게 깨달음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이 무슨 깨닫게 해 준 것도 아니고, 무엇을 가리켜 줄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선지식한테 무엇을 배울 것도 없고,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른 참선을 헐라고 할 때에는 바른 선지식의 지도가 없이는 천 명, 만 명 가운데에 한 사람도 바로 깨달은 사람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는데 선지식을 만나지 아니하면은 바로 깨달을 수가 없느냐?
가리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에 가리켜 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은 우리는 혼자라도 얼마든지 스승 없이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가리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스승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가리켜 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은 부처님 당시에 1,250인을 비롯해서 모든 사부대중, 인천(人天) 백만억 대중이 어째서 부처님 당시에 일시에 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지 못했겠습니까?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출현을 하셔 가지고 정법을 선양(宣揚)하시고, 그동안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이 삼십이상(三十二相)과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나투시면서 천백억 화신(化身)으로 이 우주법계 방방곡곡에 오늘도 수없이 많은 불보살과 선지식이 출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설법을 잠시도 그치지 아니하고 설법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리킬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세계에 40억이라고 하는 인구는 말할 것도 없고, 시방법계(十方法界)에 가득차 있는 무량무변(無量無邊) 중생이 한 사람도 깨치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켜 줄 수 없고 배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깨닫지 못한 채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 부처님 참법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 이러한 말들은 잠꼬대 같은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즉 우리는 진묵겁(塵墨劫) 전에 우리는 다 성불해 마쳤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밥 먹고, 똥 싸고, 울고 웃고 한 이 모든 것이 고대로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온전히 깨달은 상태에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깨달을려고 하기 때문에 점점 미(迷)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깨달으려고 하지 말아야겠느냐?' 이렇게 반문을 하시겠지마는, 우리는 어떠한 법문(法門)을 들을 때라도 그 법문에 의지해서 바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입니다. 어떤 법문을 들으면 항시 그 반대쪽 상대되는 말을 연상(聯想)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의 버릇입니다.
부처님 설법, 큰스님네의 설법을 들어도 그 설법을 듣는 가운데에 바로 자기에 본참화두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법문을 옳게 듣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법문을 듣더라도 그 법문에 의해서 그다음 생각, 그다음 생각으로 차츰 추리해 들어가는 그러한 법문을 듣는 태도는 영리한 사람이긴 하지마는, 법문을 참으로 옳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법문을 듣더라도 그 법문을 듣자마자, 들음과 동시에 자기가 들고 있는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분명해질 때, 소소영령(昭昭靈靈)해질 때 그 법문은 참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졌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바르게 법문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꼭 법당에만 들어와서 어떠한 법사님의 법문을 들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문을 바로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하늘을 보고도 산을 보고도 물을 보고도, 개 짖는 소리를 듣고도, 소와 말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이놈 저놈’하고 욕지거리 하는 소리를 듣고도, 누가 나한테 어리석은 억울한 욕을 퍼붓고 달라드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의 목에 칼을 댈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찰나 찰나에 자기에게 주어진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까지는 우리는 이러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자주자주 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법문을 듣고서 그 시간에 들은 법문을 졸졸졸졸 한마디도 잊어버리지 않고 조르르 옮기는 그러한 영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법문을 듣는 동안 잠깐도 귀를 팔지 아니하고, 한눈을 팔지 않고서 열심히 들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법문을 듣고 돌아서서 한마디도 옮길 수 없지마는 들을 때나, 법문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걸음이 자기에게 주어진 본참화두가 분명히 들려서 알 수 없는 의심이 골똘해진 그 사람. 그 사람에게 비교할 때에 뒤에 사람이 앞에 사람의 몇천 배, 몇만 배 법문을 잘 제대로 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해 드린 말씀을 통해서 '법문(法門)은 어떻게 듣는 것이 옳다'
또 법문은 법당 안에서만 잘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에 돌아가서 사회에 나가서 어디서 무엇을 보던지, 듣던지, 무엇을 느끼던지, 어떠한 사건을 당하던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언제라도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깊은 신심(信心)으로, 불같은 의심(疑心)으로, 분심(憤心)을 일으켜서 자기의 본참(本參)을 들고 또 들고 해서,
우리의 일상 모든 생활 속에 화두에 대한 의심이 한덩어리가 되도록,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제일 법문을 잘 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에 법문을 한 번 듣고서 하루, 한 달, 석 달, 일 년, 계속해서 그러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면 구태여 법문을 자주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이면 법회 때에 빠져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어쨌든지 듣던 말 또 듣고, 듣던 말 또 듣더라도 자주 자주 법회에 참석해서 본참화두가 타성일편이 될 때까지는 선지식의 법문을 소홀히 들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스승을 찾는 데에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 이후로 선지식이 일양(一樣)으로 밖으로 보아서 인물이 잘나고, 법문을 들어보면 아주 변재(辯才)가 있고 말이 조리(條理)가 분명해서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만 하고.
그리고 그 행동은 대도사의 품위가 있고 몸에서는 광명이 비치며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풍기며, 한 번 뵙기만 해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숭배심과 신앙심이 우러나오는 그러한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춘 그러한 도인(道人)으로만 세상에 출현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도인은 가끔 있을 수 있을지언정, 대체로 불보살과 역대 대도사가 출현하실 때에는 여든한[八十一] 가지의 그러한 가지가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는 의심스럽고 '세상에 저게 무슨 도인인가? 저게 무슨 불법인가? 저래 가지고 무슨 중생교화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사람 앞에 법문을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이렇게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찌 보면 어린애 같고, 어찌 보면 바보 같고, 어찌 보면 미치광이 같고, 그러한 양상(樣相)으로 출현하신 선지식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중생이 한번 보고 한번 들음으로써 신심이 더욱 돈발(頓發)할 수 있는 그러한 훌륭한 양상으로 출현을 한 것이 낫지, 어찌 미치광이같이 바보같이 어린애같이 주책없는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의아스럽게 맨드는 그러한 양상으로 출현을 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여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습니다.

중생은 무엇을 듣던지 보던지 단통 상(相)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자기 나름대로 저울질을 하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눈에 들면은 좋다고 그러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야단입니다. 그러다가 조그만한 허물만 보였다면 대번에 손가락질을 하고 비방을 하고 "아! 큰스님인 줄 알고 큰 도인인줄 알았더니 내가 잘못 봤다. 어디가 도인이 그럴 수가 있느냐?" 대번에 돌아서서 욕을 하고 비방을 하고 다른 사람까지 가서 법문을 듣지 못하도록 선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相)을 보고 믿는 신도, 상을 보고—법문을 잘하니까, 얼굴이 잘 생겼으니까, 참 음성 소리가 좋으니까, 참 인정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스님이 참 좋다. 이러한 식으로 믿기 시작한 그 신심은 머지않아서 변해 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서 상(相)에, 모냥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정말 진실한 돈독한 신심으로 법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선입관, 주견을 잊어버리고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신(信)하는 그 신심은 어떠한 행동이나 어떠한 언어나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어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자기의 진실된 믿음은 동요가 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求)하는 자는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금강경을 날마다 한 번씩 읽고 그러기를 몇십 년을 하는 그러한 신심을 가진 불자(佛子)가 금강경에 씌어 있는 단 한 구절의 게송의 뜻마저도 바로 보지 못하고, 마냥 정법을 비방하고 바로 선지식을 믿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하는 자는 삿된 도를 행한지라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부처님은 32상과 80종호를 다 갖추셨고 그 음성은 원음(圓音)으로써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은 모든 중생이 자기의 근기에 맞춰서 각기 자기 나름대로 전부 그 법문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원음을 갖추셨으니까 나는 그분을 부처님으로 숭배한다. 그러한 거룩한 상호를 가지셨으니까 부처님을 숭배한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 앞에 머리 숙여 목숨 바쳐 귀의한다' 이러한 사람은 「참 여래를 보지 못한 사람이다」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한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얼굴을 한 번만 본 사람도, 나의 이름을 한 번만 들은 사람도 결정코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대해탈도(大解脫道)를 얻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할 때는 밑을 보지 말고 저의 얼굴을 보시면서 들으십시오.
30년을 두고 발원을 하기를 '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삼도(三途)를 면하고, 나의 이름을 들은 사람은 해탈도를 증득하여지이다' 이렇게 간절히 축원을 해왔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을 자칫 잘못 들으시면은 여러분은 돌아서서 웃으시게 됩니다.
「나」라고 하니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낱낱이 「나」를 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기 이름을 한 가지 두 가지씩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임시로 붙여 놓은 이름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참 이름'을 바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참나’를 본 사람이 어찌 삼악도에 떨어지며, 여러분 자신의 '참 이름'을 들을 수 있다면 어찌 해탈도를 증득 못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드렸지마는, 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송담(松潭) 얼굴을 봐도 절대로 악도를 면하고 해탈도를 증득하리라고 저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때에는 저의 얼굴을 똑바로 보시면서 들어야 졸음이 안 온 것입니다. 요렇게 밑으로 참선 한 척하고 있으면은 남 봄에는 점잖하니 듣고 있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꾸벅꾸벅 하고 계신 분이 계시거든요. 그렇게 되면은 제가 목이 아프도록 이야기한 보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9분11초~28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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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선양(宣掦 베풀·널리 알릴 선/오를·나타낼 양) ; 명성이나 권위 따위를 널리 떨치게 함.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팔만세행(八萬細行) ; 부처님의 모든 행동은 원만하여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다는 것.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들이 전부 부처님의 위의(威儀, 훌륭한 행위)에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화신(化身) ; 화현(化現)한 몸[身]. 변화된 신체. 화신불(nirmaka-kaya 化身佛). 부처의 삼신(三身 : 法身 · 報身 · 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응화신(應化身) · 변화신(變化身) ·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시방법계(十方法界) ; 시방세계(十方世界).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무량무변(無量無邊) ; 한없이 크고 넓음. 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진묵겁(塵墨劫) ; 티끌[塵]이 쌓여 먹[墨]이 될 만큼의 오랜 시간[劫].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연상(聯想 뒤를 이을 련/생각 상) ;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현상. '기차'로 '여행'을 떠올리는 따위의 현상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귀를 팔다 ; 귀를 딴 데로 돌리어 잘 듣지 않다.
*한눈 ; 마땅히 볼 데를 보지 않고 딴 데를 보는 눈.
*한눈을 팔다 ; 해야 할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정신을 딴 데로 돌리다.
*걸음걸음이 ; 걸음을 걸을 적마다.
*골똘해진--->골똘하다 ; (사람이 한 가지 일에)온 정신을 쏟아 딴생각이 없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불같은—> 불같다 ; 정열이나 신념, 감정 따위가 뜨겁고 강렬하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일양(一樣) ; ①한결같은 모양. 또는 같은 모양. ②한결같이 그대로. 또는 꼭 그대로.
*변재(辨才 말 잘할 변/재주 재) ; 말을 잘하는[辨] 능력과 재주(才操).
*조리(條理) ;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대체로 불보살과 역대 대도사가 출현하실 때에는 여든한 가지의 그러한 가지가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는 의심스럽고 '세상에 저게 무슨 도인인가? 저게 무슨 불법인가? 저래 가지고 무슨 중생교화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사람 앞에 법문을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이렇게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찌 보면 어린애 같고, 어찌 보면 바보 같고, 어찌 보면 미치광이 같고, 그러한 양상(樣相)으로 출현하신 선지식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 도인(道人)의 81행(行). 도인의 여러 가지 행에 있어서 81행이 있는데, 「도인의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좋고 궂은 모든 행위가 다 포함될 수가 있다.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광행(狂行) · 영아행(嬰兒行)도 있고, 승행(僧行) · 속행(俗行) · 남자행 · 여자행, 그리고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까지 이르나 도안(道眼, 道의 眼目)이 명백하면 아무 걸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81행 가운데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인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친다.

[참고] 『경허집(鏡虛集)』 '여등암화상(與藤菴和尙 등암화상에게 주다)'에서.
達磨大師入唐土 敷演最上乘法 不論誦經念佛持呪禮拜 不論長坐不臥一食卯齋 不論禪定解脫 不論持戒破戒僧俗男女 見性卽成佛 若以誦經等餘外法 妄爲佛法 殺却無罪過

달마대사가 당나라에 들어와 최상승법을 폈는데, 경을 읽고 염불하고 주문을 외고 예배하는 것을 논하지 않았으며, 장좌불와 일종식도 논하지 않았으며, 선정과 해탈도 논하지 않았으며, 계(戒)를 지키고 파하는 것이나 승속 남녀도 논하지 않았으며, 자기 성품을 보면 곧 성불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경을 읽는 등이나 그밖의 법을 망령되이 불법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又云 栴多羅見性成佛 不論作殺生業 縱作業 不同他人 業拘不能 白衣見性成佛 不論淫欲 縱有餘習 亦不相妨 洪州云 善亦是心 不可將心還修於心 惡亦是心 不可將心還斷於心 牛頭禪師云 心無異心 不斷貪淫

또 "전다라가 견성성불함에 살생업을 지은 것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업을 짓더라도 다른 사람과 달라서 업에 구애되지 않으며, 속인이 견성성불함에 음욕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또한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홍주(마조도일) 스님은 "선(善)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닦을 수 없고, 악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끊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우두 선사는 "마음에 다른 마음이 없으니 탐심과 음욕을 끊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故善知識牧牛 有八十一行 自佛行梵行 乃至有殺盜淫酒等行 而道眼明白 亦無所碍 故潙山禪師云 只貴正眼 不貴行李處 故此法門逈出三乘 汎學者 實不可思議 古有習小乘戒律者 皆誹謗禪師 而如蟷螂捍轍 斥鷃笑鵬 置之莫論

그러므로 선지식의 목우행(牧牛行)에 81가지가 있으니,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 이르기까지 도안(道眼)이 명백하면 아무 구애될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산선사는 "다만 안목이 바름만 귀하게 여기고 행리(行履)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법문은 삼승을 멀리 벗어났으니, 범범하게 배우는 사람은 실로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 소승의 계율을 익힌 이들은 모두 선사를 비방했으나 이는 버마재비(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고 뱁새가 대붕(大鵬)를 비웃는 격이니, 제쳐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양상(樣相 모양·형태·상태 양/서로·모양·바탕 상) ; 사물이나 현상의 모양이나 상태.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단통 ; 그 자리에서 대번에 곧장.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금강경』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금강경』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色見聲求 是行邪道 作麼生 不行邪道去 但知聲色本非眞 自然不被聲色惑 見盡自於玄旨會 情忘能與道相親

색상으로 보고 음성으로 구하는 것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삿된 도(道)를 행(行)하지 않겠는가?
다못 이 소리와 색상이 본래 참[眞]이 아닌 줄 알면 자연히 소리와 색상에 현혹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소리를 듣고 색상(色相)을 보는 그 견(見)이 다하면, 자연히 현현(玄玄)한 뜻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정(情)이 다하면 능히 도(道)와 더불어 서로 친(親)하게 될 것이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원음(圓音) ; 치우침 없는 원만한 음성. 들을 수 없는 이가 없는 음성. 모든 유정이 제각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부처님께서 한 음성[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실 때, 모든 중생이 제각기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평등하게 이해하는 원만한 부처님의 가르침.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사도(四道) ;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 것. ①가행도(加行道). 번뇌를 끊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 ②무간도(無間道). 간격이나 걸림 없이 지혜로써 번뇌를 끊는 단계. ③해탈도(解脫道).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④승진도(勝進道). 뛰어난 수행으로 해탈의 완성에 이르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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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수행2021. 3. 7. 16:50

수행((No.587-2))—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최상승론(最上乘論)』 법문, 「但能著破衣 飱麤飱 了然守本眞心 佯癡不解語 最省氣力而能有功 是大精進人也」

*수행(修行 닦을 수/행할 행) ; ①불도(佛道)를 닦음.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실천하는 것. 행하는 것. ②오로지 한 생각에만 집중하여, 한결같이 그것을 잊지 않고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

*불도(佛道) ; ①불과(佛果).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말한다. ②불과(佛果)에 이르는 방법. 불과를 성취하여 성불하기 위한 인행(因行,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 행)을 말한다. ③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가르침.

 

(8분 25초)

 


[법문] 송담스님(No.587-2)—1997년 동안거 해제 법어(97.02.22) (용587-2)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고 하는 법문에 보면은 '수행하는 사람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수행을 해 나가야 하느냐?'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단능착파의(但能着破衣)하고, 다맛 능히 헤어진 옷을 입고, 누데기 옷이죠. 누데기 옷이라 하니까 헌옷도 찢어서 헝겊을 대 가지고 조작으로 누데기 옷을 만들어라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새 옷을 입지 말라'고 하시고, 새 옷을 누가 해 오면 거기다가 괴색(壞色) 물을 들여 가지고 쪼가리, 헌 쪼가리를 어느 옷 끝에다가 그것을 기우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헌옷이라고 하는 표식(表式)이죠.
무명옷이면 무명옷, 기지옷이면 기지옷, 새 옷이면 새 옷, 인연 따라서 생긴 대로 입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무슨 천이 되었건 먹물 옷을 들여서 그렇게 입고.
손추손(飱麤飱)하며, 밥은 거칠은 음식을 먹어라. 꼭 맛있고 좋은 그런 음식만을 취할 것이 아니라, 보리밥이면 보리밥, 잡곡밥이면 잡곡밥, 밥이면 밥, 죽이면 죽, 국수면 국수, 식단이 나온 대로 그냥 그것을 먹으라 그거거든. 입는 것과 먹는 것에 대한 말씀을 그렇게 하시고.

마음가짐은 요연수본진심(了然守本眞心)하야, 요연(了然)히는, 확실하게 근본 참마음을 지켜라 그거거든. 근본 참마음이 무엇이냐?
우리의 마음은 본래청정(本來淸淨)한 것이고, 더 보태고 뺄 것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내게 있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 거여.
그 '근본 마음을 확실히 지킨다'고 하는 것은 참선 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게 되고, 선지식(善知識)을 찾게 되고, 선지식의 말 한마디로 그것을, 그 화두(話頭)를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할 때까지 그걸 밀고 나가는 것이여.

양치불해어(佯癡不解語)하면, '거짓 양(佯)' 자, '어리석을 치(癡)' 자.
속은 환-하지. 뭐 바보가 아니고 멀쩡하니까 환하겠지만, 거짓 어리석은 척하라 말이여. 바보 노릇을 하라 그거거든. 말귀도 못 알아들은 것처럼 바보가 되라 그 말이여.

어디 가서, 참선 선방(禪房)에 가서 똑똑한 체하고, 잘난 체하고, 유식한 체하고, 수완이 있는 것처럼 뽐내고 그러란 것이 아니고,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을 들이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목탁 치면 가서 아무 말없이 공양하고, 목탁 치면 가서 소지(掃地)하고 운력하고, 속이 있는지 없는지, 바보인지 천치인지, 무식한지 유식한지, 전혀 옆에 사람도 모르게 완전히 숙맥(菽麥)이 되라 이거거든.
그렇게 지내는 것이 최생기력이능유공(最省氣力而能有功)이라. 가장 기력(氣力)은 덜면서도 능히 공(功)이 있다. 가장 힘은 덜 들이면서도 수행을 철저하게 하고 큰 깨달음을 얻는 데는 가장 효과적이다 이거거든.

세속(世俗)에서는 유식한 척하고, 잘난 척하고, 똑똑한 척해야 남이 알아주고, 높은 자리에 벼슬도 하고 좋은 데에 취직도 하고 벌어묵고 살고 남이 알아줘야 하겠지만, 출가(出家)해서 도(道)를 닦는 마당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똑똑해야 합니까? 명예와 지위 · 부귀 · 권리를 얻기 위해서 똑똑해야 하는 것이냐 그말이여.
바보 천치가 되어서 열심히 정진하면 가는 곳마다 밥이 있고. 공부하다 얼어 죽은 사람 없어요. 이왕 출가해서 도(道)를 닦을 바에는 청춘도 버리고 인생도 버리고, 이 세상에 안 태어난 셈 치고 오조 홍인대사의 『최상승론』의 법문과 같이 그렇게 해야 과연 정진(精進)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입니다.


산승(山僧)이 처음에 출가(出家)할 때, 규정에 의해서 일주일 만에 고암(古庵) 스님과 전강 조실 스님을 모시고 계(戒)를 받고, 계를 받고 며칠 동안 '도량석(道場釋), 천수(千手)는 외어야 하고, 예불(禮佛)드리는 것은 외어야 한다'고 그래서 그것을 며칠 동안에 그것을 외우고, 목탁 치는 법도 조실 스님한테 나주(羅州) 다보사(多寶寺) 나한전(羅漢殿)에서 일주일간을 기거하면서 그걸 대충 다 배웠습니다. 그걸 배워는 놓고는 한번도 불공(佛供) 한번도 해 보지도 않고 바로 묵언(默言)을 했습니다.

뭐 '군대 안 갈라고 묵언(默言)했다'고 무슨 불교신문엔가 그런 말이 났는데, 그때는 병역법(兵役法)이 없었습니다. 군인에 간 사람은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라 해 가지고 자원한 사람에 한해서 갔지 병역법이 없었어요. 훨씬 몇 해 뒤에사 병역법이 생겼는데.
나는 그때 묵언(默言)을 시작한 것은 아주 일생 동안을 바보 천치 농판이 되어 가지고 안 태어난 셈 치고 그저 조실 스님 모시고 그렇게 일생을 지낼라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한 10년 그러다가 묵언을 텄습니다마는, 지금 생각으로서는 조실 스님 명령을 안 하시고 이런 원장(院長)이라고 하는 직책도 맽기시지 안 했으면 저는 훨씬 더 좋았으리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17분31초~25분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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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선근2021. 1. 22. 09:21

선근((No.479))—(게송)一佛二佛千萬佛 | 과거 부처님들은 어떻게 선근을 심었느냐? |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인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선근(善根) ; 온갖 선(善)을 낳는 근본(根本), 뿌리. 좋은 과보를 받을 만한 착한 인(因), 행위. 청정한 행위를 할 근성. 일반적으로 탐욕이 없는 것[無貪], 성냄이 없는 것[無瞋], 어리석음이 없는 것[無癡] 등을 선근이라 한다.


*선(善) ; [산스크리트어] kuśala  올바르고 청정하여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름.


선근을 심는 데에는 첫째, 나의 욕심(慾心)을 버리고, 우리가 도(道)에 들어가는 첫째 관문(關門)이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것인데, 그 아상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10분 42초)

[법문] 송담스님(No.479)—1992년 하안거 해제(92.08.13) (용479)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하여  금일의전득거력(今日依前得渠力)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한 부처님, 두 부처님 내지 천만 부처님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여. 부처님들이 모두 다 눈은 옆으로 백이고, 코는 바로 이렇게 백이셨드라 그거거든.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로, 석년(昔年)에 무량겁으로부터 오시면서 친(親)히 선근(善根)을 심어 왔어. 온갖 선근을 심어 왔기 때문에,

금일의전득거력(今日依前得渠力)이여. 금일(今日) 이와 같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얻으시게 되었더라.

그러한 선근(善根)을 심어 오지 안 했으면 어찌 삼명육통과 32상과 80종호를 갖추어서 스스로 깨닫고 무량(無量) 중생을 제도(濟度)하실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 그런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부처님이 몸소 시범(示範)하신 바와 같이 그런 선근(善根)을 심지 않고서는 그런 삼명육통과 32상과 80종호를 갖출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과거에 그런 부처님들은 어떻게 선근을 심었느냐?

육조(六祖)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천만 부처님 처소(處所)에서 일심(一心)으로 공양(供養)을 하고, 그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수순(隨順)을 하고, 또 모든 보살(菩薩)이나 선지식 또는 스승님 · 부모 또는 연세가 많은 어른 존장(尊丈)의 처소에서는 항상 공경하고 그 뜻을 받들어서 순종하고, 그 명령에 어기지 않고 그 뜻을 받들어서 그렇게 해서 선근을 심어 왔고.


그런 부처님이나 보살님이나 또는 선지식 스승 부모뿐만이 아니라 육도(六道) 중생을 만나서는 살해(殺害)를 하지 아니하고, 그러한 중생을 속이지 않고, 천대하지 아니하고, 훼방하지 아니하고, 욕하지 아니하며, 그 축생(畜生)을 타지 아니하며 채찍질을 하지 아니하며 그 고기를 먹지 아니해. 항상 그 육도 중생을 '어떻게 하면은 좋게 해 줄까? 이익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상대해 왔더라 그말이여. 그렇게 해서 선근(善根)을 심어.

그리고 일체 빈고(貧苦),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중생을 상대할 때에는 자민심(慈愍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상대하고, 싫어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그 중생(衆生)이 요구하는 바는 자기의 힘 따라서 베풀고, 이렇게 해서 선근을 심었더라.


그러면 일체 악류(惡類), 악한 무리들—나를 해꼬자하고, 해꼬자하려는 그런 악한 무리를 상대할 때에는 유순(柔順)하고 화평(和平)한 마음으로 상대하고, 인욕(忍辱)하고 환희(歡喜)한 마음으로 이렇게 맞이하고.

나에게 좋게 해 준 사람을 환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악한 마음으로 나에게 피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그러한 상대를 만나서도 유순하고 인욕하고 환희한 마음으로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보살(菩薩)에 마음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그 뜻을 어기지 아니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런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고, 고집 세고 비꼬인 생각을 쉬게 하는, 그렇게 해서 선근을 심었다 그거거든.


이것이, 그렇게 무량겁을 선근을 심어 왔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대표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우리의 교주(敎主)이시고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같은 그러한 성현 중에 대성현(大聖賢)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성현을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 순종(順從)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낱낱이 구체적으로 간략히 선근(善根)을 심는 법을 육조(六祖) 스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말씀을 드렸거니와, 우리는 우리와 같은 하근기(下根機)로서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불보살과 스승과 어른 존장, 그리고 모든 육도 중생과 빈곤한 그런 중생들, 심지어는 우리를 해꼬자할 악한 무리들에까지도, 그러한 무리를 만나서도 우리의 마음을 변하지 아니하고 선근을 심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근기 약한 것만을 한탄하고 그러한 선근 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런 선근을 심는 데에는 첫째, 나의 욕심(慾心)을 버리고, 나를 생각하는 아상(我相)—우리가 도(道)에 들어가는,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이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것인데, 그 아상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12분38초~23분1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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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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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식신2020. 12. 24. 20:27

식신(No.454)—(게송)石火光陰走~ | 망령(妄靈)된 식신(識神)을 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착각을 하지 마라 | 화두 의심을 잠깐이라도 놓치면 그것이 정념(正念)을 잃어버린 것이라, 정념을 잃고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식신(識神) ; ①심식(心識). 인식 주체. 마음(心).  ②분별의식(分別意識). 의식작용을 일으키는 것.

 

[참고] 『벽암록(碧巖錄)』 제99칙 '본칙평창(本則評唱)'

長沙云 學道之人不識眞 只爲從前認識神 無量劫來生死本 癡人喚作本來人 如今人 只認得箇昭昭靈靈 便瞠眼努目 弄精魂 有什麼交涉

 

장사경잠이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다못 종래로 식신(識神)을 (법신으로) 그릇 인식을 하고 있더라. 식신은 무량겁으로부터 이어 온 생사의 근본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본래인(本來人)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람들이 단지 또렷또렷하고 신령한[昭昭靈靈] 그것을 진실이라 오인하여 눈을 치켜뜨고 그 헛것과 놀아나지만 본질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11분 26초)

 

[법문] 송담스님(No.454)—91년 하안거해제 법어(91.08.24) (용454)

 

석화광음주(石火光陰走)하고  홍안진백두(紅顔盡白頭)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간백년몽(人間百年夢)이  부유일생사(蜉蝣一生事)니라

나무~아미타불~

 

석화광음주(石火光陰走)하고, 이 세월은 탁! 돌과 돌을 부딪치면 불이 번쩍 하듯이 그렇게 참 세월은 빠른 것이고,

홍안(紅顔)은 진백두(盡白頭)다. 엊그제 빨간 소년이 금방 흰머리가 난 노인이 되고 말아. 지금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이 생각해 보면 새파란 소년 소녀일 때가 엊그제 같을 것입니다.

 

인간백년몽(人間百年夢)이, 인간의 백년 세월이라는 것이 꿈같은 것인데, 일생의 모든 일이란 것이 하루살이 신세 밖에는 안 돼.

잘살 건 못살 건, 잘낫 건 못낫 건, 지내 놓고 보라 그말이여. 백년이라는 게 무엇이여? 그것이 꿈에 지내지 못하고, 하루살이 신세에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느냐 그거거든.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참 많은 도반들이 운집을 하셨고 또 신남신녀 여러분들도 참 이렇게 많이 모였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 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법문은 더할 것이 없으나 기왕 이렇게 도반들이 모이셨으니까, 앞으로 해제 동안에 더운 여름도 다 갔고, 이 서늘한 해제 동안에 산철 결제를 들어가던지 또는 그냥 행각(行脚)을 하든지 간에 무엇이든지 정진을 잘 하시되.

 

흔히 성성(惺惺)하고 깨끗하게 그렇게 정진이 되어가기를 바라는데, 사실은 성성하고 깨끗하고 담담(淡淡)한 그런 경계(境界)만을 자꾸 그런 경계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그러한 경계에 탐착하는 것도 그것도 정념(正念)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거거든.

공부해 나가는 데에는 잠깐 동안도 바른 생각, 정념을 잃어서는 안 되는데, 그 정념을 잃어버리면은 벌써 이단(異端)에 떨어지는 거여.

한 생각 삐끗하면은 돌이키기가 어려워. 얼마 동안을, 까딱하면 영원히 잘못 떨어질 수도 있어.

 

그래서 정신이 흐리멍덩하고 망상이 일어나고, 물론 그런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징징담담(澄澄湛湛),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거, 참 그렇게 하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한 시간, 두 시간뿐만이 아니라 방선 죽비만 안 치면은 4시간도 좋고 5시간도 좋고 계속 이렇게 앉아 있고 싶을 그러한 경지가 오는데 그러한 순청절점(純淸絶點), 순수하고 맑고 깨끗한 그러한 경지에 따악 빠져서 그놈을 지키고 앉았는 거, 그것 참 좋은 것 같지만 그것이 정념을 잃어버리는 가장 무서운 경계다 그거거든.

 

왜 그것이 무서운 경지냐?

 

'능히 강(講)하고, 능히 말하고, 능히 움직이고, 능히 고요하고 그러한 것을, 그런 놈이 바로 이놈이 아니냐. 말할 때는 말하는 놈, 밥 먹을 때는 밥 먹은 놈, 무슨 연설할 때는 연설하는 놈, 일할 때는 일하고, 그런 놈이 바로 이놈이지, 그것 밖에 부처가 어디가 있으며 그것 밖에 나의 주인공이 어디가 있느냐? 이것이 바로 깨달은 경지다’ 해 가지고 바른 정진을 해 나가지 않고, 그것을 아주 자기가 한소식 한 것처럼 그것이 바로 바른 경지라고 그렇게 착각을 하는 사람,

그것은 자기의 망식(妄識)이여. 그게 망식, 망령(妄靈)된 식신(識神)을 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착각을 한 것이다 그말이여.

 

아까는 ‘맑고 깨끗한, 성성한 그것이 바로 자기의 참 경계’로 한 것은 ‘맑고 깨끗하다’라고 하는 경계에 집착하고 있는 거거든.

 

또 어떤 사람은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써 자기의 참 경계를 삼아. 그것이 바로 정념이라고 그렇게 착각을 하거든.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거.

망상이 일어나면 딱! 눌러 버리고 또 무슨 망상이 일어나면 딱 눌러 버리고, 그리고는 딱 그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경계로써 정념을 삼는데. 그것은 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경지가 지속이 되면 조용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말할 수가 없지. 그러나 그것은 돌로 풀을 눌러 놓는 거와 같애.

그래서 돌만 떠들면은 다시 터 나오고, 오랫동안 눌러놔도 돌 어느 틈인가 뚫고 다시 (풀이) 노라니 있다 뚫고 나온 거라, 그것도 바른 경지가 아니고 바른 생각이 아니다 그말이여.

 

또 자기의 몸을 ‘이 몸뚱이는 허공(虛空)과 같은 것이다’ 해 가지고, 허공과 같은 것이니 그래가지고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 해. 아무 생각을 안 일으키고 허공과 같은 경지에서 꼭 그 경계를 벼람빡과 같이, 장벽(牆壁)과 같이 그렇게 따악 그 경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지켜 나가는 거야.

 

그래 가지고 그것이 ‘자기의 참 바른 공부다’ 이리 생각하고 그러는 경지로 지켜 나가는 거.

이런 것은 공망(空亡),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다’ 그랬는데,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써 고요한 그걸 들여다보고 앉아 있으면 그것은 아무리 오래 들여다봤자 그것은 무기공에 떨어진 것이여.

 

앞에 말한 것이 전부가 다 ‘왜 그것이 바른 경지(境地)가 아니냐? 바른 공부가 아니냐?’하면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망상이 일어나도 그것을 누르고 없애려고 하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둔 채 화두만을 의심만을 딱!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한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단(疑團)만을 탁! 챙겨 나가야지, 망상이 일어난 것을 누를라고 한다든지 또 맑고 깨끗한 경지를 성성한 경계를 지켜나간다든지, 아무리 성성적적해도 화두(話頭)를 놔 버리면 그것은 잘못된 경지여.

 

그래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 화두에 대한 의심을 잠깐이라도 놓쳐 버리면 그것이 정념(正念)을 잃어버린 것이라, 정념을 잃어버리고서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어.

이것을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사부대중 여러 도반들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는 바입니다.

 

바르게 화두를 잡드리해 나가면 의심이 더이상 깊을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어. 그러한 가운데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야 언젠가는 툭! 터져서 의단을 타파(打破)하면 자기 면목을 보게 되고, 그때는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야 하는 거야.(53분18초~64분4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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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석화광음주(石火光陰走)~’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西山 休靜) ‘탄세(嘆世, 세상을 탄식함)’ 게송 참고.(石火光陰走 紅顔盡白頭 山中十年夢 人世是蜉蝣)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행각(行脚) : ①수행자가 일정한 주소를 갖지 않고 스승이나 벗을 구하여, 자기의 수행이나 교화를 위해 곳곳을 편력하는 것. ②스승의 슬하(膝下)를 떠나서 선(禪) 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좋은 벗을 구하여, 마치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과 같이 발길 닿는 대로 여러 곳을 편력하는 것. 이것을 행하는 자를 행각승(行脚僧) 또는 운수(雲水)라고 함.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담담하다(淡淡-- 묽을·담담할 담) ; 동요없이 차분하고 평온하다.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 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정념(正念) ; 바른 생각. 선종(禪宗)에서의 바른 생각이란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한 생각(參究一念). 일체 경계(境界)에 끌려가지 않고, 바로 자기의 본참공안으로 돌아오는 것.

*징징담담(澄澄湛湛 맑을 징/즐길·가라앉을 담) ; 맑고 깨끗한 것.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순청절점(純淸絶點) ; 순수하고 맑고 티끌[點]이 끊어진 것.

*망식(妄識) ; 망(妄)으로서의 식(識). 망령된 사유분(思惟分)에 근거한 진실되지 않은 식(識).

*망령(妄靈) ;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남. 또는 그런 상태.

*식신(識神) ; ①심식(心識). 인식 주체. 마음(心). ②분별의식(分別意識). 의식작용을 일으키는 것.

[참고] 『벽암록(碧巖錄)』 제99칙 '본칙평창(本則評唱)'

長沙云 學道之人不識眞 只爲從前認識神 無量劫來生死本 癡人喚作本來人 如今人 只認得箇昭昭靈靈 便瞠眼努目 弄精魂 有什麼交涉

 

장사경잠이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다못 종래로 식신(識神)을 (법신으로) 그릇 인식을 하고 있더라. 식신은 무량겁으로부터 이어 온 생사의 근본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본래인(本來人)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람들이 단지 또렷또렷하고 신령한[昭昭靈靈] 그것을 진실이라 오인하여 눈을 치켜뜨고 그 헛것과 놀아나지만 본질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7분 45초)

[참고] 송담스님(No.258)—1985년 신수기도 입재(85.02.22).

학도지인불식진(學道之人不識眞)하고  지위종래인식신(只爲從來認識神)이로구나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인대  치인환작본래신(癡人喚作本來身)이로구나

 

학도지인(學道之人)이 불식진(不識眞)하고 지위종래인식신(只爲從來認識神)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된 것을, 참 이치를 아지 못하고, 다못 종래로 식신(識神)을 삼어, 식신을 가지고 자기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 그렇게 그릇 인식을 하고 있더라 그말이여.

 

그 식신(識神),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눈으로 무얼 보면 청·황·적·백을 분별을 하고 크고 작은 것을 알고, 코로 냄새를 맡으면은 ‘저거 좋은 향내다’ ‘저것은 독한 가스 냄새다’ 그 향내를 분별하고, 손으로 무엇을 만져 보면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을 알고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생각으로—무슨 말을 들으면 ‘저것은 좋은 일이다, 저것은 나쁜 일이다’ ‘저것은 예쁘다 밉다’ 그런 것을 분별을 하고. 이러한 것이 모두 우리의 식신(識神)의 작용이라 할 것입니다.

 

그 식신(識神)이라 하는 것은 무시겁래(無始劫來)의 생사본(生死本)이여. 저 비롯함이 없는 저 무량겁 이전으로부터서 오는 낳다 죽었다, 낳다 죽었다하는 생사윤회의 근본인데.

치인(癡人)은 환작본래신(喚作本來身)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이 생사의 근본인 이 알음알이를 불러 가지고 본래신(本來身)이라 하더라 그말입니다.

 

참선을 하게 되면은 '바로 이 눈으로 무얼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할 줄 아는 이놈을 내놓고 어디가 마음이라 하는 것이 있을 것인가? 바로 이놈이 나의 면목이다'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깨달은 분상에 보면은 눈으로 볼 줄 알고, 귀로 들을 줄 알고, 코로 냄새 맡을 줄 알고,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그놈을 여의고 본래신(本來身)이 없겠지마는,

깨닫지 못한 분상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뜻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바로 그놈이 바로 부처다. 그놈이 진여다. 그것이 바로 나의 참 면목이다. 이놈을 여의고 무엇이 있을 것인가, 바로 이놈이다’ 그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그 생각 낼 때에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과 거의 같은 표현인 것 같지마는 천지(天地)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그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일 수 있으나 또 한 사람은 영원히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생사(生死)의 근본을 그릇 인식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하는 사람은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이 ‘아, 이것이로구나’ 그 생각이, 살생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도둑질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음행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더 무서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하셨지만, 산목숨을 죽이면은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행히 영겁 뒤에 사람의 몸을 받아 난다 하더라고 단명보(短命報)를 받거나, 평생에 병고(病苦)를 받는다 하셨습니다.

 

살생(殺生)이 그렇게 무서운 죄지만 식신(識神), 생사윤회의 근본인 이 알음알이를 나의 본래의 부처라고 착각하는 그 죄는 영원한 생사(生死), 다시는 헤어나기 어려운—불조(佛祖)가 출세(出世)하셔도,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세하셔도 구제할 수 없는 그러한 무서운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살생하는 죄는 참회(懺悔)를 하면 용서받을 수가 있지마는, 생사의 근본인 알음알이를 ‘참나’의 면목으로 착각해서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은 참회할 길이 없고 구제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착각에 빠진 사람은 남에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식신(識神)을 갖다가 자기의 본래신(本來身)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24분24초~32분8초)

*(게송) '學道之人不識眞 只爲從來認識神 無始劫來生死本 癡人喚作本來身' ; 장사경잠(長沙景岑)선사 게송. 『선문염송·염송설화 5』 (동국역경원刊) 제495칙 본명(本命)' p36 참고.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무기공(無記空) ; ①의식이 깨어있지 않고 멍하거나 기억이 없으면서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상태 ②참선중에 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421칙. 「백수(栢樹)」 『선문염송 · 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51~252.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僧云和尙莫將境示人 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조주(趙州)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선사가 말하였다. "나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노라"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타성일편(打成一片) : 좌선할 때 자타(自他)의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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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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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상기병2020. 12. 20. 20:33

상기병(No.445)—화두를 안 들기가 더 어렵다 |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과 「화두를 바르게 들어가는」 이 3가지를 잘 알아서 해나가는 것은 우리가 도업(道業)을 바르게 빠르게 그리고 크게 성취하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 | 상기(上氣)와 단전호흡. 단전호흡 안 하면 참선 못합니까? | 호흡과 화두 | 상기를 낫으는 약은 단전호흡과 요료법.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19분 23초)

 

[법문] 송담스님(No.445)—1991년 5월 첫째 일요법회 (용445)

 

시삼마(是甚麼).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아버지의 피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 한 방울이 만나 가지고 이 몸을 받아 낳는데, 이 몸은 머지않아서 병들어서 늙어서 결국은 또 버리게 되는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이 있거든.

 

그놈이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성도 낼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욕심도 낼 줄도 알고, 착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고, 한 생각 돌이켜서 착하게 먹으면은 찰나간(刹那間)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같이 되기도 하고 천사와 같이 되기도 하는데,

한 생각 비뚤어지면은 찰나간에 악마가 될 수도 있어. 나찰(羅刹) 귀신이 될 수도 있고, 독사가 될 수도 있고. 한 생각 잘못 먹으면 음흉하기가 구렁이보다도 더 고약하게 될 수도 있다 그말이여.

 

그러한 놈을 우리가 낱낱이 다 가지고 있어. 대관절 그놈이 무엇인가?

이거 화두(話頭)가 무엇인 줄도 모르고, 불법(佛法)이 무엇인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가만히 자기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의심(疑心)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거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시삼마 화두는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가운데에 가장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여. 화두를 새로 타기 전에 모두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참공안(本參公案)이여.

 

의심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거든. 이건 화두를 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화두를 안 들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그말이여.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몰랐으니 의심이 없을 수가 없고, 다못 올바르게 참구(參究)해 나가는 법만 몰랐지 이 시삼마 본참공안은 사람 사람이 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어.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그 참구하는 방법을 바로 알고 하면 공부하다가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고, 이걸 바르게 참구를 안 하면 이거 하다가 정신이 샐쭉해지기도 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착각을 하는 수가 있고, 이걸 참구를 잘못하면 상기병(上氣病)이 올라서 골이 뽀개질라 그러고 눈알이 빠질라 그러고 잘 안돼.

 

그래서 바르게 이 화두를 들어가는 법을 알고 공부를 해야 한다 그말이여.

 

전강(田岡) 조실 스님께서도 대발심(大發心)을 하시고 대분심(大憤心)이 나고 대의단(大疑團)이 한목 일어나 가지고 어떻게 무섭게 하셨던지, 다못 거문고 줄 고를 때에 너무 팽팽하게 해도 안되고 너무 느슨하게 해도 안되는 것인데, 어릴적 그 순수한 마음으로 너무 긴(緊)하게 급(急)하게 하셨기 때문에 상기병이 일어나셨다 그말이여.

그래서 눈알이 뻘겋게 충혈이 되고, 머리에 부스럼이 일어나 가지고 툭툭 터지고, 코에서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에는 앉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또 그런 상기병이라든지 그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아무리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더라도 상기병과 같은 그런 무서운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 호흡법,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 알아서 하고.

 

그런 가운데에 올바르게 화두를 잡드리해 나가는,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과 「화두를 바르게 들어가는」 이 3가지를 잘 알아서 해나가는 것은 우리가 도업(道業)을 바르게 빠르게 그리고 크게 성취하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상기(上氣)와 단전호흡>

 

얼마 하지도 못해 가지고 상기병이 나서 고생하는 스님네가 참 많습니다. 미리 일어나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서 단속을 해야지, 한번 상기병이 터져 놓으면 약을 먹어 가지고도 안되고 여간해서 이거 고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머리가 띵하고 목이 뻣뻣하고 ‘이뭣고?’만 할라면 골치부터 아퍼서, 공부만 조금 가행정진을 하고 애써 좀 힘차게 할려고만 하면 벌써 골치부터 아퍼.

그럭저럭 잡담하고 살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딱 정신차려서 화두만 들고 공부만 할려고 하면 아프기 시작해.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안 할 수도 없고.

 

출가를 안 했다면 이거 뭐 잡담을 하고 지내도 상관이 없고, 뭐 장사를 하고 지내도 상관이 없고, 뭐 농사를 지어도 상관이 없고 아무렇게 지낸들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머리를 깎고 출가 해가지고 참선을 안 하면 무엇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천상 할 것은 참선밖에는 없고, 할려고 하면은 골치만 아프고, 큰일이거든.

 

어떤 분은 가끔 ‘단전호흡 안 하면 참선 못합니까?’ 그런 질문을 가끔 와서 하는데 상기만 안된다면 뭐 꼭 단전호흡을 안 해도 상관이 없어.

체질상 단전호흡을 안 하면 상기가 잘 오르게 된 그런 체질을 가진 사람이 있거든. 그런 사람은 꼭 단전호흡을 해야 하고.

 

아무리 신경을 쓰고 해도 상기가 잘 안된 체질을 타고난 사람이 있어. 기운이 밑으로 내려가서 그런 사람은 혹 단전호흡을 안 해도 상관이 없겠지만. 특히 체질을 기운이 위로 잘 올라가는, 조금 신경쓰면 얼굴이 벌게지는 그런 체질을 가진 사람은 단전호흡을 꼭 해야 하거든.

출가를 안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은 단전호흡을 해야 하고, 참선을 안 한 사람도 사회의 학문을 해도 단전호흡을 해야 해. 지지리 공부해 가지고 고시에 합격해 갖고도 상기로 고생하는 사람도 내가 봤거든.

 

이 단전호흡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보통 호흡보단 조금 더 길게. 보통 호흡은 1초 동안에 들어마셨다 1초 동안에 내쉬고 보통 그렇게 하고, 혹 호흡이 좀 느린 사람은 2초 동안에 들어마셨다 2초 동안에 내쉬고 그런데.

1초가 걸린지 2초가 걸린지 그것도 아지도 못하고, 무심 속에 호흡은 마지막 죽기 전까지는 그때그때 따라서 달음박질하거나 산을 올라가고 그럴 때는 좀 급하게 쉬고 또 그렇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는 느리게 쉬고, 호흡에 대해서는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눈을 뜨나 감으나 호흡을 하고 있는데,

 

이 단전호흡이란 것은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거여. 어떻게 하느냐?

들어마시는 호흡 약 3초 동안에 들어마셔 가지고 또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내쉬면서 조금 길게 3~4초, 이렇게 해서 한번 들어마셨다가 정지했다가 내쉬는데 약 10초 가량 걸리도록. 의식적으로 하거든.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배꼽 밑에 단전(丹田),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게 만들면서 숨을 들어마시는거여. 들어마셔 가지고 약 3초 동안 딱 정지를 하거든. 정지했다가 조용하게 숨을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만드는 거여.

 

그러면 들어마신 호흡을 이렇게 해 가지고는 저 아랫배까지 이렇게 밀어넣을랴고 생각할 필요는 없고, 그냥 들어마시기만 하고 배는 약간 볼록하게만 만들면 돼. ‘호흡이 거기까지 내려간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들어마신 다음에는 정지를 하거든. 정지한 상태로 약 3초 동안을 가만히 있다가 또 내쉬면서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거 조금도 힘이 드는 거 아니여.

 

처음에는 한 10초 걸려서 하면은 별로 힘이 안 드는데 ‘될 수 있으면 오래 참을수록 좋다’해 가지고, 그런 소리를 어디서 들어가지고, 들어마셔 가지고 참기를 한 30초 정도 참었다가 얼굴이 벌게지면 그때 내쉬고. 아, 그렇게 억지로 하는 사람이 있다 그말이여. 그러다가는 큰일난 것이다 그말이여.

 

처음에는 그렇게 한 9초나 10초 동안에 하다가 차츰차츰 1년을 하고 이태를 하다 보면 호흡이 조금씩 길어져서 나중에는 혹 20초 동안에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 내쉬고,

나중에는 10초 동안에 들어마시고, 10초 동안에 머물르고, 10초 동안에 내쉬고 해서 한번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는데 30초 걸려서 하는, 무리가 없이 할 수가 있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리를 하면서까지 억지로 그렇게 시간을 늘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잘 아셔야 해.

 

그런데 호흡은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어쨌든지 무리가 없고 편안하도록 하면 되어.

언제나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여. 누구에게나 고정된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길게 해도 편안하면 길게 하고, 짧게 해서 편안하면 짧게 하고, 어쨌든지 무리가 없이 편안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호흡과 화두의 관계>

 

그러면 ‘호흡에 신경을 쓰면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이 시원찮고, 화두에 대해서 간절히 의심을 하면 호흡이 잘 안된다' 이런 말씀을 한 분이 있는데, 그럴 것이다 그말이여.

그럴 것이나, 처음으로 참선하는 사람은 이 호흡 쪽으로 신경을 써서 해서 호흡이 잘 익숙해져서 무심 상태에서도 호흡이 잘되면은 나중에는 호흡에 대해서는 그냥 저절로 놔둬 버리고 화두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좋다 그말이여.

 

그런데 호흡과 화두의 관계는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다 숨이 나가면 또 스르르~하니 들어마셨다가 또 정지했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그러면은 숨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이뭣고?’ 또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이뭣고?’ 최초에 시작하는 얼마 동안은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그러다가 한 달쯤 된 다음에는 또 두 달, 석 달 이렇게 지나간 뒤에는 꼭 호흡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않아도 되요.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뭣고’ 그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이 있으면, 그 다음에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 화두를 새로 들지 않고, 그 들어있는 의심을 따악 관조(觀照)를 하거든. 『알 수 없는 의심』을 보는 거여.

 

또 숨을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쉴 때도 아까 들었던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세 번째에도 화두를 새로 ‘이뭣고?’ 안 들어도 괜찮은 거여. 그러다가 딴 생각[別念]이 나거나 화두가 없어져 버리면 그때 또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뭣고?’ 한번 또 거각(擧却)을 하는 거여. 챙기는 거여.

 

이렇게 해서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밥 먹을 때까지 그대로 의심이 있으면, 뭐 아침에 한번 들은 채로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되는 거고, 한번 들었던 화두가 하루 종일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할 필요가 없거든.

 

그리고 그렇게 해 나가면 상기(上氣)가 일어날 까닭이 없으나, 그러나 이미 상기가 일어났거나 또 중간에 본의 아니게 상기가 일어날 때에는, 그 상기를 낫을려고 약도 먹고 쑥도 뜨고 온갖 좋다는 건 다 해도 그렇게 별로 큰 효과가 없어.

 

상기를 낫으는 약은 결국은 단전호흡으로 낫어야 돼.

단전호흡을 정말—우선 화두 드는 것은 보류해 놓고, 상기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은 화두는 좀 보류해 놓고 단전호흡에 전력을 해야 해. 그러면 상기가 다스려지고, 상기가 다스려지면 그때 화두를 챙기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부득이해서 단전호흡을 해도 잘 안되는 경우는 요료법(尿療法)을 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여. 그건 기운을 밑으로 내리고 혈압도 내리고 기운을 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건 굉장히 효과가 있는 거여. 그건 새삼스럽게 자세히 말씀을 안 드리겠습니다.(23분23초~42분4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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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세간(世間 : 이 세상, 미혹한 세계)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보살. 자비의 화신.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1분 32초)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이뭣고’ 그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이 있으면, 그 다음에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 화두를 새로 들지 않고, 그 들어있는 의심을 따악 관조(觀照)를 하거든. 『알 수 없는 의심』을 보는 거여'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5분 59초)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5분 57초)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딴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요료법(尿療法) ; 요료법은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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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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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사십이장경2020. 12. 19. 11:02
사십이장경(No.593)—우란분재(盂蘭盆齋) | 목련존자의 효도, 목련존자가 수행자들에게 올린 공양 공덕으로 아귀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어머니를 구제 |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11장, 무심도인(無心道人).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 후한(後漢)의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이 함께 한역.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보시(布施), 애욕의 단절 등 불교의 요지를 42장에 걸쳐 적절한 비유로써 간명하게 풀어 설한 경(經). 최초의 한역(漢譯) 불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11장.
佛言 飯惡人百 不如飯一善人
飯善人千 不如飯一持五戒者
 
飯五戒者萬 不如飯一須陀洹
飯百萬須陀洹 不如飯一斯陀含
飯千萬斯陀含 不如飯一阿那含
飯一億阿那含 不如飯一阿羅漢
 
飯十億阿羅漢 不如飯一辟支佛
飯百億辟支佛 不如飯一三世諸佛
飯千億三世諸佛 不如飯一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백 명의 악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착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천 명의 착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오계를 지키는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만 명의 오계 지키는 사람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수다원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백만 명의 수다원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사다함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천만 명의 사다함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아나함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일 억의 아나함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십 억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분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백 억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삼세제불 가운데, 한 분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다.
천 억의 삼세제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분의 무념(無念) · 무주(無住) · 무수(無修) · 무증(無證)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다.
 

(15분 24초)

 

[법문] 송담스님(No.593)—1997년 정축년 하안거 해제 (용593)
 
오늘은 정축년 하안거(夏安居) 해제(解制)날입니다.
하안거 해제에다가, 백중(百中) 우란분재일(盂蘭盆齋日)에다가, 백일기도 회향을 겸해서 이렇게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어째서 우란분재,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하는 우란분재에 법요식을 하안거 해제일에 행하게 되느냐?
이것은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의 효도(孝道)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 청제(靑提) 부인은 남편이 남겨놓은 많은 재산을 삿된 생각으로 낭비를 하면서 살생(殺生)을 하고 갖은 죄(罪)를 지었습니다. 그 죄 지은 과보로 아귀도(餓鬼道), 무간지옥도(無間地獄道)에 떨어져서 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그 아들 목련이 효심(孝心)이 지극해가지고 그 어머니가 어디서 무얼하고 무슨 고통을 받고 계신가 그것이 궁금했고, 급기야는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있는 것을 알고서 갖은 방법으로 어머니를 그 지옥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려고 애를 썼지마는 끝내 이루지를 못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부처님께 간청을 해서 어머니를 구제(救濟)하는 방법을 여쭈어보니까, '여름 하안거 해제날 석 달 동안을 더위를 무릅쓰고 열심히 도 닦은 스님네께 공양(供養)을 올림으로 해서 그 공덕(功德)으로 어머니를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가 있느니라' 그 방법을 가르켜 주셨어.
 
그래서 목련존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양할 거리를, 백 가지 과일과 모다 맛있는 음식을 잘 마련을 해가지고 해제 때—부처님 회상(會上)에서 지내던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멀고 가까운 데에서 각기 모다 공부하고 있던 수행자(修行者)들이 부처님 회상에 해제 때에는 모다 모여들었습니다.
그 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이 공양(供養)을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공덕으로 지옥에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을 그 어머니 청제 부인을 지옥고로부터 이렇게 벗어나게 해 드린 고사(故事)가 『목련경(目連經)』이라든지 『우란분경(盂蘭盆經)』이라든지 그런 경전을 보시면은, 사람으로서는 그 처절한 고통 받는 그 내용을 소상(消詳)하니 알 수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因緣)으로해서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지 삼천년이 되는 오늘날에 이르도록 동남아 여러 국가나 중국 · 한국 · 일본 불교국가에, 믿는 나라에서는 이 칠월(七月) 해제일을 기해서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저 선망부모를 위시(爲始)해서, 가족에 아들딸 형제자매 원근친척들의 영혼을,
물론 그 가운데는 비명(非命)으로 돌아가신 분—횡사(橫死)해서 돌아가신 분, 교통사고나 또는 물에 빠져죽고 목 매달아 죽고, 약 먹고 자살하고 한 온갖 비명횡사한 그런 영가(靈駕)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영가들을 천도하는 법요식을 해마다 연례 행사로써 거행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백중(百中)날이 좋으냐 하면은 석달 동안을 열심히 수행해서 몸도 청정하고 마음도 청정한 수행자들, 수행자들에게 공양 올린 공양공덕(供養功德)이 얼마나 장(壯)한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보면은,
‘악(惡)한 사람 백 명에게 공양하는 것보단 착한 사람 한 사람한테 공양(供養)하는 것이 낫고,
착한 사람 천 명에게 공양하는 것보단 오계(五戒)를 지키는 한 사람에게 공양하는 게 낫고,
 
오계를 지키는 사람 만 명에게 공양하는 것보단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한 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수다원과를 증득한 백만 명에게 공양한 것보단 사다함(斯陀含)을 증득한 한 성현한테 공양한 것이 낫고,
사다함 천만 인에게 공양한 것보단 아나함(阿那含) 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아나함 일 억의 성현에게 공양한 것보단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한 분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십 억의 아라한에게 공양한 것보단 한 분의 벽지불(辟支佛)에 공양한 것이 낫고,
백 억의 벽지불에게 공양한 것보단 한 사람에, 삼세제불(三世諸佛)의 한 분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천 억의 삼세제불에 공양한 것보단 한 무심도인(無心道人)에게 공양한 것이 낫다’
 
『사십이장경』에는 '무념(無念) · 무주(無住) · 무수(無修) · 무증(無證)한 사람에게 공양(供養)한 것이 낫다' 그러는데.
무념(無念)이요, 무주(無住)요, 무수(無修)요, 무증(無證)한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서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그말인데.
 
이 무심도인은 어떠한 것이 무심도인(無心道人)이냐?
생각을 하되 생각 없는 생각을 하고, 행(行)을 하되 행이 없는 행을 하고, 닦되 닦음이 없이 닦고, 증(證)하되 증한 바가 없이 증하는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하는데, 이 무심(無心)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이러한 것이 무심도인이다’ 이렇게 말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무심도인(無心道人)인지 아닌지를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석 달 동안을 열심히 수행한 수행자 가운데에는 몸도 마음도 청정(淸淨)해서 무심(無心)한 경계(境界)에 들어간, 들어갈 공부를 했고 그 가운데에는 이미 무심한 경계에 들어간 스님이 몇 분인가는 있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설사 오늘날 당장 완전히 진무심(眞無心) 경계에 들어가지 안 했다 하더라도 그 목적지를 향해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도 준(準) 무심도인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름 해제 때 모이신 그 스님네들에게 공양을 올리면은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비명횡사해서 거리 중천에서 갈 곳을 모르고 해매고 있는 우리의 선망부모와 가족들로 하여금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공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무심도인(無心道人).
 
'내가 무심도인이다'하면 그게 무심도인이 아니여.
'내가 한 소식을 했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무심도인이 아니고, '나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했다'한 생각을 가지면 이미 그것이 무심도인이 아닌 거여.
 
어떻게 하면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가느냐?
 
본참공안(本參公案)—'이뭣고?' 화두가 되었건, '판치생모(版齒生毛)' 화두가 되었건, '무자(無字)' 화두가 되었건,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정(指定) 받은 그 본참공안을 하나를 가지고 일체처 일체시에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은산철벽(銀山鐵壁)에 탁! 부딪힌 것처럼, 나아갈라야 나아갈 데도 없고 물러설라야 물러설 수도 없고, 오직 꽉 맥힌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본참공안에 실참실수(實參實修) 해 나감으로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마침내는 무심도인이 되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왕궁에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셔가지고 일생,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해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說)하신 요점이, 목적(目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해제법문(解制法門)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그것을 경청(敬聽)을 했음으로 해서 해제법문을 산승(山僧)이 설할 것은 없습니다. 또 설할 줄도 모릅니다.
다맛 석 달 동안을 그 삼복성염(三伏盛炎)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수행을 하고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을 만났으니 너무 반갑고, 고향에 일가친척을 만난다고해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일가친척은 만나봤자 거북하고 신경쓰이고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서 저기서 한 철을 지내고 모인 도반들은 안면이 있는 분이나, 안면이 없는 분이나 이렇게 해제를 하고 만나면 수십년 보고 싶었던 고향친구가 이보다 더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변이 없어서 내가 반가운 척은 못합니다마는, 마음속으로는 정말 반가운 것입니다.
 
나와 같이 한 목적을 향(向)해서 가는 도반이요, 현재 한 목적을 향해서 고행(苦行)을 해 나가는 형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또 다시 만나야 할 도반이요 궁극(窮極)의 목적지에서 다시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또 만나가지고 중생교화(衆生敎化)를 해야 할 그러한 도반이기 때문에 그러리라고 생각을 합니다.(5분38초~21분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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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란분재(盂蘭盆齋) ; 지옥도와 아귀도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베푸는 재(齋).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극심한 고통을 받는 악도(惡途) 중생과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일체 유주무주(有主無主) 영가를 구제하고자 삼보(三寶)에 공양하고 재(齋)를 베푼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우란분재가 성행하였다고 전한다.
 
우란분회(盂蘭盆會) · 우란분절(盂蘭盆節) · 우란법회(盂蘭法會) · 우란재(盂蘭齋)라고도 한다.
우란분재일인 음력 7월 15일은 많은[百] 대중에게 공양하는 날이라 해서 백중(百衆), 많은 음식을 마련하여 공양한다 해서 백종(百種), 안거(安居)가 끝나는 날이라 해서 백종(百終)으로 부르고, 세시일로는 백중(百中 · 白衆 · 백족白足)이라 한다.
*우란분(盂蘭盆) ; 산스크리트어 ullambana. 우란은 오람바나(烏藍婆拏)라고도 음사(音寫)하고, 도현(倒懸 :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극심한 고통), 또는 구도현(救倒懸 : 거꾸로 매달린 고통에서 구제한다)이라 한역(漢譯)한다.
분(盆)은 그릇(식기)의 뜻으로, 한역하면 구기(救器)라고 하며, 뜻으로 구성해 말하자면 '거꾸로 매달린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해 (음식을 가득 담아 삼보三寶에 공양 올리는) 그릇[救倒懸器]'이라 한다.
 
절에서, 음력 7월 15일에 지옥이나 아귀의 세계에서 거꾸로 매달려 고통 받고 있는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하는 의식.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의하면 부처님 제자 중에 신통력이 제일인 목련존자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고 있는 어머니를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신통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모두 모이는 하안거가 끝나는 7월 15일인 자자일(自恣日)에 삼보(三寶)에 공양하게 하여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악도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십대제자(十大弟子) ; 석가모니의 제자 중 수행과 지혜가 뛰어난 10명을 이르는 말.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목련경(目連經) ; 목련 존자(目連尊者)가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건진 일을 다룬 경문으로, 음력 칠월 백중날이면 이 경을 읽고 기도한다.
*우란분경(盂蘭盆經) ; 1권.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 번역. 목련(目連)존자가 아귀(餓鬼)의 고통을 겪고 있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 세존의 가르침대로 자자일(自恣日)에 여러 부처님와 보살, 그리고 스님에게 갖가지 음식과 과일을 지성으로 공양하여 어머니를 제도하였다는 효성을 설한 경.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 후한(後漢)의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이 함께 한역.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보시(布施), 애욕의 단절 등 불교의 요지를 42장에 걸쳐 적절한 비유로써 간명하게 풀어 설한 경(經). 최초의 한역(漢譯) 불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十一)』
佛言 飯惡人百 不如飯一善人
飯善人千 不如飯一持五戒者
 
飯五戒者萬 不如飯一須陀洹
飯百萬須陀洹 不如飯一斯陀含
飯千萬斯陀含 不如飯一阿那含
飯一億阿那含 不如飯一阿羅漢
 
飯十億阿羅漢 不如飯一辟支佛
飯百億辟支佛 不如飯一三世諸佛
飯千億三世諸佛 不如飯一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
 
*무심도인(無心道人) ; ①모든 번뇌망상이 사라져 더이상 추구할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가리킨다. 모든 것에 대하여 구하는 것이 없고 얻는 것도 없는 수행자.
②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 무심적적(無心寂寂)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사량계교심을 다 놓아버리고 언제나 천진무구한 본연자성(本然自性)으로 살아가는 사람.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진무심(眞無心) ; [참고 ①]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제19권 대혜보각선사법어(大慧普覺禪師法語) '시청정거사(示淸淨居士)'에서. (김태완 옮김 | 소명출판) p25~26 참고.
古德有言 尋牛須訪跡 學道訪無心 跡在牛還在 無心道易尋 所謂無心者 非如土木瓦石頑然無知 謂觸境遇緣 心定不動 不取著諸法 一切處蕩然無障無礙 無所染汚 亦不住在無染汚處 觀身觀心如夢如幻 亦不住在夢幻虛無之境 到得如此境界 方始謂之眞無心 且非口頭說底無心 若未得眞無心 只據說底 與默照邪禪何以異哉
 
옛 스님이 말했습니다. '소를 찾으려면 모름지기 자취를 찾아야 하고, 도를 배우려면 무심(無心)해야 한다. 자취가 있으면 소 또한 있을 것이요 무심이 되면 도를 찾기 쉽다'
이른바 무심(無心 마음이 없다)이라는 것은 마치 흙 · 나무 · 기와 · 돌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 접촉하고 인연을 만남에 마음이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고,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고 일체처에 탕연해 무장무애하고, 오염된 바가 없으나 오염이 없는 곳에 머물지 않고, 몸과 마음을 꿈이나 환(幻)같이 보면서도 꿈이나 환이라는 허무한 경계에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경계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진무심(眞無心 참으로 마음이 없다)'이라 할 수 있고, 입으로만 말하는 무심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아직 진무심에 이르지 못했으면서 단지 말만하고 있다면 묵조사선(默照邪禪)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참고 ②]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법어(法語)」에서 '상강종대왕심요(上康宗大王心要, 강종 대왕에게 심요를 올림)' (김달진 역주 | 세계사) p156~158 참고.
佛言此法 非思量分別之所能解 又云 菩薩住是不思議 於中思議不可盡 入此不可思議處 思與非思皆寂滅 是故若要廣談義路 不無萬論千經 若圓直造眞源 曷若無心無事 老龐偈云 無心心不起 超三越十地 究竟眞如果 到頭只這是
 
부처님 말씀에 「이 법은 사량과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시고, 또 「보살은 이 불가사의한 경지에 머무르고, 거기서는 생각이나 헤아림으로는 다 알 수 없다. 이 불가사의한 경지에 들어가면 생각과 생각 아닌 것이 모두 적멸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의로(義路 뜻)를 널리 말하려면 만론천경(萬論千經)이 없지 않지만, 두렷이 참 근원에 바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어찌 마음이 없고 일이 없는 것만이야 하겠습니까?
노방(老龐)의 게송에,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삼현(三玄)과 십지(十地)를 뛰어넘는다. 진여의 결과를 이루어 보면 필경에 다만 그것이니라' 하였고.
 
德山和尙云 但無心於事 無事於心 虛而靈 空而妙 若毛端許言之本末者 皆爲自欺 毫氂繫念 三途業因 瞥爾生情 萬劫覊鏁
聖名凡號 盡是虛聲 殊相劣形 皆爲幻色 汝若求之 得無累乎 是知直下無心 最爲省要 內若無心 外卽無事 無事之事 是名大事 無心之心 是名眞心
 
덕산 화상은 「다만 일에 마음이 없어야 한다. 마음에 일이 없으면 허(虛)이면서 신령하고 공(空)이면서 묘하다. 털끝만큼도 말[言]의 본말(本末)을 허락하면 그것은 다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생각에 매이면 삼도(三途)의 업이 잠깐 동안에 정(情)을 내어 만겁 동안을 얽매이고 만다. 그리하여 성인이란 이름과 범부란 이름이 모두 빈 음성이요, 뛰어난 모양과 못난 형상이 모두 허깨비의 빛깔이다. 만일 네가 그것을 구하려 한다면 어찌 누(累)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장에 무심(無心)한 것이 가장 긴요한 일입니다. 안으로 마음이 없으면 밖으로 일이 없을 것이니 일이 없는 일이 큰 일[大事]이요, 마음이 없는 마음이 참 마음[眞心]입니다.
 
所謂無心者 無心無無心 亦無無心盡 是眞無心 無事者 無事無無事 亦無無事盡 是眞無事 若以事遣事 事事彌增 將心無心 心心却有
 
이른바 ‘마음이 없음[無心]'이란 마음도 없고 마음 없는 것도 없으며, 마음의 없음이 다했다는 것도 없는 것이라 그것이 '참 무심[眞無心]'이며, '일이 없음[無事]'이란 일도 없고 일의 없음도 없으며, 또 일의 없음이 다했다는 것도 없는 것이라 그것이 '참으로 일이 없는 것[眞無事]'입니다. 만일 일로써 일을 보내려면 일마다 더욱 늘 것이요,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없애려면 마음과 마음이 도리어 있게 될 것입니다.
 
不若一刀截斷左右葛藤 更不思前念後 直然放下放到無放下處 無放下處 亦放下 到者裏 方始大事現前 朗然獨耀 此是諸聖 放身捨命之處 成佛作祖之處 此名大眞佛 亦名法身佛 亦名如如佛
 
한 칼로 좌우의 갈등을 끊고, 앞뒤 생각을 하지 않고 당장 놓아버리되[放下], 놓아버림이 놓아버릴 것이 없는 데에 이르고, 놓아버릴 것이 없는 것까지도 놓아버리고 거기에 이르면 비로소 큰 일이 앞에 나타나 환히 홀로 빛날 것이니, 이것은 모든 성인이 몸과 목숨을 놓아버린 곳이요,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된 곳입니다. 이것을 대진불(大眞佛)이라 하고 또 법신불(法身佛)이라 하며 또 여여불(如如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然若以此名句文義 掛在心頭 又却不是 所以道 微言滯於心首 飜爲緣慮之場 實際居於目前 盡是名相之境 知是般事 撥置一邊 但向十二時中四威儀內 看箇話頭
 
그러나 이런 이름이나 뜻을 마음에 두면 그것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세한 말도 마음에 걸리면 도리어 생각을 반연하는 마당이 되고, 실제가 눈앞에 있으면 모두 이름과 형상의 경계다' 하였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일은(이 일을 안 바에야) 한 쪽에 치워 두고, 다만 십이시(十二時)와 사위의(四威儀) 안에서 저 화두를 간(看)해야 할 것입니다.
 
僧問法燈 百尺竿頭 如何進歩 燈云啞 世出世間 善惡攀緣 種種分別 莫敎相續 亦莫斷除 念念起時 但擧話頭云啞 不得作瘖啞會 不得向意根下思度 不得向擧起處承當 不得將心待悟 莫管有味無味 悟與不悟 但時時擧覺 念念提撕 日久月深 知其功能耳
 
어떤 스님이 법등(法燈) 스님에게 「백 척의 장대 끝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법등 스님은 「아(啞)!」 하였습니다.
세간과 출세간의 선악의 반연과 갖가지 분별을 계속하게 하지도 말고 또 끊어 버리려 하지도 말며,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다만 <아> 하고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로써 알려고 하지 말고(음아瘖啞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말고) 의근을 향하여 따지고 헤아리지 말며, 종사가 거량하는 곳을 향하여 알아맞히려 하지도 말고,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마십시오. 맛이 있고 없음과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에 관계하지도 마십시오. 다만 때때로 들어 느끼고 생각을 거듭해, 세월이 오래 되면 그 공능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昔茶陵 郁和尙 常看此話 至於喫茶喫飯 未嘗忘却 一日因赴外請 騎驢過橋 橋陷驢倒 不覺失聲云啞 豁然大悟 便作偈云 我有神珠一顆 久被塵勞關鏁 今朝塵盡光生 照破山河萬朶 此是古今實參實悟底樣子也 請陛下 依此樣子參 隨有見處 宣問山僧 山僧敢不得穴加針 應病進藥 鍊金作礪 濟川作舟乎
 
옛날 다릉(茶陵)의 욱(郁) 화상은 항상 이 화두를 들되,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을 때에도 일찍이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외부 청을 받아 나귀를 타고 다리를 지나가다가 다리가 무너져 나귀가 거꾸러지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 하는 소리를 내어 활연히 깨우쳐 게송을 읊기를, '내게 있는 한 알의 신령한 구슬 오랫동안 티끌 속에 묻혔더니, 오늘에야 티끌이 없어지고 광명이 나서 모든 산과 물을 두루 비춘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진실로 참구하고 진실로 깨우치는 본보기입니다. 청컨대 폐하께서도 이 본보기에 의하여 참구하시되, 보신 곳[見處]을 따라 산승에게 물으시면 산승이 어찌 감히 혈(穴)을 얻어 침을 놓고, 병을 따라 약을 쓰며, 금을 단련하는 데에 숫돌이 되고, 물을 건너는 데 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은(銀)으로 만든 산이요, 쇠로 만든 벽에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앞뒤가 다 끊어져 버린 절박한 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아무것도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거기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가리킴.
 
수행자에게 이 은산철벽은 내 몸과 목숨을 다해서 뚫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는 관문(關門)으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 등어리에 올라타고서 그 입부리를 소 등에다가 처쑤셔박는 것처럼,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입부리와 머리와 몸을 압량해서, 합해서 처박고 돌격을 해 들어가야 한다.
자기의 근기(根機)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건강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어리석고 영리한 것도 따질 것도 없고, 남녀노소도 따질 것도 없고, 유식 무식도 따질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되 불급불완(不急不緩), 너무 용을 쓰고 몰아붙여도 안 되고 너무 늘어져 처져도 안 되고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어야 한다. 공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따질 것이 없다.[송담스님(No.577) 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7~158 에서.(가로판 p150~151)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실참실수(實參實修)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수행하는 것. 실참(實參), 실답게 참구(參究)한다는 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을 말한다.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관념에 그치거나 들어서 아는 지식에 그치지 않고 참으로 실천하는 선수행을 말한다.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습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1600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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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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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ㅅ/생사는 본래없다2020. 12. 9. 20:21

생사는 본래 없다(No.636)—(게송)月磨銀漢轉成圓~ | 물에 비춘 달빛과 달을 건지려는 잔나비들, 정중로월(井中撈月) |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사형 언도를 받고 있는 처지 |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

 

*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15분 8초)

 

[법문] 송담스님(No.636)—2000년(경진년) 설날 통알 및 설날차례(2000.2.2) (용636)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한데  소면서광조대천(素面舒光照大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하니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이요  취산순환유루인(聚散循環有漏因)이로다

나무~아미타불~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한데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이여. 찰나 찰나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데, 그 구백생멸의 단위가 일찰나(一刹那)여.

구백 찰나가 모여서 한 생각인데, 1초의 몇천 분의 일이 될는지, 그 시계가 똑딱똑딱똑딱 지내가는 그 사이에 우리의 생명도 그렇고, 모든 중생의 생명도 그렇고, 산천초목도 다 죽음을 향해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한 가족으로 한 부부로 만났다가 생이별 사이별하고, 부모자식 간의 인연으로 태어났다가도 부모가 먼저 죽고, 자식이 먼저 죽기도 합니다.

그렇게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또 내생(來生)에는 인연 따라서 또 인간 세상에서 만날 수도 있고, 천상에 가서 만날 수도 있고, 축생계에서 만날 수도 있고, 지옥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나되—인연 따라서 만나기는 하지마는, 한 생(生)을 바꿀 때 깨끗하게 전생사(前生事)를 망각을 해 버리기 때문에 무슨 인연으로 만난지도 모르고 또 만나서 가족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런 것이 유루(有漏)의 인연(因緣)이요, 무상법(無常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정들었던 부모를 여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들었던 아들과 딸을 여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 인연 따라서 만나고 인연이 다하면 또 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 가운데에서 생멸(生滅)하고, 취산순환(聚散循環)하는 것이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이요,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으로 지고 또 달이 떴다가 또 달이 지고 하는 이런 것이 우리의 생명을 재촉하는 북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미 사형(死刑) 언도(言渡)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데, 북을 치면서 계속 가 가지고 마지막에 사형을 당한 거와 같은 그러한 상황에다가 비유할 수가 있고, 현실적으로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죽음이 동시에 판결이 나 있는 것입니다. 다못 어느 날 어느 시에 집행이 되느냐? 그것만 모를 뿐이지 이미 우리는 죽음을, 딱 사형 언도를 받고 있는 처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정월 초하룻날 왜 이런 생사 문제를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은 사실은 생사 속에 살고 있지마는 ‘생사 없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생사 없는 진리를 확실히 깨달을라면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이 대관절 무엇이냐? 생사의 근본이 무엇이냐?

그 근본을 확실히 우리가 이해하고 확실히 믿고, 그 생사 없는 도리를 바른 공부를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확실히 깨닫고 보면, 분명히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해탈도를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병을 낫을려면은 그 병의 근원을 알아야 거기에 따라서 침을 맞고, 쑥을 뜨고, 약을 먹고 물리치료를 받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원인을 모르고서는 병을 낫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이요. 저 달이 하늘에서 돌고 돌다 보면은 초승달이 차츰차츰 커져 가지고 보름날이 되면은 완전히 둥그런 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둥근 달이, 환하게 쟁반 같은 달이 떠 가지고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다 비춘 것입니다.

 

그런데 잔나비는 어느 날 숲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놀다가 숲속에 있는 샘을 들여다보니까 그 속에 둥근달이 비추거든. 그러니까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물에 빠졌다고 야단법석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저 달을 건져서 다시 허공으로 돌려보내야지, 저 물속에 잠겨버리면 온 세계가 어두워지니 어떻게 할 거냐?' 잔나비의 우두머리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팔에 팔을 연결을 해 가지고 저 물속에 빠져있는 달을 건지자'

 

이래 가지고 팔에 팔을 연결해 가지고 수십 마리가, 한 놈은 나무를 붙잡고 팔을 늘이면은 그다음에는 그 팔을 잡고 또 팔을 늘이고 해 가지고, 간신히 수십 마리가 팔에 팔을 연결해 가지고 물에 달락말락 하니까, 그 여러 마리가 매달리니까 그 중에 팔 약한 놈이 손을 갖다가 놔가지고 수십 마리가 물속에 다 빠졌습니다.

그것이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입니다. 산산이가 팔을 연결해 가지고 물속에 있는 달을 건지려고 하나 그것이 건져지겠습니까?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원래 그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달빛이 물에 비춘 것뿐이라고 이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은 어찌 물속에 있는 달을 건지려고 할 것이냐. 이런 고인(古人)의 게송(偈頌)인데.

 

이건 무엇을 비유해서 한 말이냐 하면은, 우리는 분명히 이 법당 안에 수만의 영가(靈駕)가 봉안(奉安)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우리 눈으로 분명히—이승을 하직(下直)한, 이승에 처자 권속과 부모형제를 놔둔 채 저승으로 떠나신 그런 영가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걸 ‘돌아가셨다’ 그러고, ‘죽었다’하고, 교통사고나 뭐 병고로 모다 그렇게 모다 사실 돌아가셨다고 다 말들을 하는데.

 

아까 조실 스님의 법문 가운데도 있었습니다마는,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죽었다, 태어났다' 그런 것이지, 생사(生死)로 인증(引證)을 하는 것이지,

마치 허공의 달이 허공에 떠 있으면서 달빛만 물에 비춘 거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생사가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이나 산승(山僧)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말씀이지만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이고, 이 공부를 열심히 함으로써 진실한 법보제자(法寶弟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천도(薦度) 차례 법요식이 끝나면은 떡국을 맛있게 잘 끓여 놨습니다. 법요식(法要式)이 끝나면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맛있는 떡국을 잘 잡숫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6분15초~21분2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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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월마은한전성원~’ ; 『관음예문(觀音禮文)』에 나오는 게송. 舒 펼(서).

*(게송) ‘찰나생멸무상법~’ ; 『관음예문(觀音禮文)』의 무상게(無常偈)에 나오는 게송. 促 재촉할·빠를(촉), 催 재촉할·독촉할(최), 金烏(금오) - '해'를 가리키는 말, 玉兎(옥토) - '달'을 가리키는 말.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약 0.013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전생사(前生事) ; ①'전생(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삶)'에 있었던 일. ②'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이미 지나간 일'을 일컫는 말.

*유루(有漏) ; ①샘[漏]이 있는[有].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는. ②누(漏)는 마음에서 더러움이 새어 나온다(漏泄 누설)는 뜻으로 '번뇌'를 말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든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차별이나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③생존에 집착하는 번뇌.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언도(言渡) ; 선고(宣告). 법정에서 판사가 판결의 결과를 알리는 일. 이로써 재판의 효력이 생김.

*대천세계(大千世界) ;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약칭.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정중로월(井中撈月 우물 정/가운데·속 중/잡을·건질 로/달 월) ; ‘우물 속에 있는 달을 건진다’

[참고]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제7권 (東晉天竺三藏佛陀跋陀羅共法顯譯) ‘明僧殘戒之餘’

佛告諸比丘 過去世時 有城名波羅奈 國名伽尸 於空閑處有五百獼猴 遊行林中 到一尼俱律樹 樹下有井 井中有月影現 時獼猴主見是月影 語諸伴言 月今日死 落在井中 當共出之 莫令世間長夜闇冥 共作議言 云何能出 時獼猴主言 我知出法 我捉樹枝 汝捉我尾 展轉相連 乃可出之 時諸獼猴卽如主語 展轉相捉 小未至水 連獼猴重 樹弱枝折 一切獼猴墮井水中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세에 가시(伽尸)라는 나라에 파라나(波羅奈)라는 성이 있었다. 한적한 곳에 오백 마리의 원숭이가 살고 있었는데 숲속을 유행 중에 한 니구율나무 밑에 이르렀을 때, 나무 밑에 있는 우물에 달이 비치고 있었다.

이때 원숭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우물 속 달 그림자를 보고 무리들에게 말했다. “지금 달이 우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세상이 어두워지지 않게 꺼내줘야 하겠다” 함께 의논했다. “어떻게 해야 꺼낼 수 있을까?”

 

우두머리가 말했다. “내가 꺼내는 방법을 안다. 내가 나뭇가지를 잡고 너는 내 꼬리를 잡고 그렇게 서로 이어서 늘어뜨리면 꺼낼 수 있다” 원숭이 무리가 우두머리의 말에 따라 서로의 꼬리를 잡고 늘어뜨렸는데 물에 이르기 전에 이어진 원숭이들이 너무 무거워 나뭇가지가 부려져 모두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잔나비 ; ‘원숭이’의 사투리.

*산산(山山)이 ; 원숭이.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봉안(奉安) ; 죽은 사람의 위패(位牌), 화상(畵像)이나 시신 따위를 모시어 둠.

*이승 ;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세계나 일생 동안을 이르는 말.

*하직(下直) ; ①먼길을 떠날 때 웃어른에게 작별을 아룀. ②'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저승 ;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이 가서 산다는 세상.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생사가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2분33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여기 (용화선원 대웅전 법보단)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대웅전 법보단, 舊 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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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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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삼요(No.256)—(게송)법왕권실영쌍행~ | 도를 닦을진댄 먼저 급히 바른 스승을 찾아야 할 것이다 | 도(道)는 자기가 자기를 사무쳐 버리는 것.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심과 분심이 확고하고 불같은 그러한 뜨거운 신심, 분심이 한목 솟구치지 않고서는 화두를 들어도 들 때뿐이고 금방 돌아서면 없어져버리고, 하루는 겨우 한 듯하다가 이틀 사흘 가면 차츰차츰 풀어져 버리고. 이것이 모두가 다 그 신심과 분심이 철저하게 뒷받침되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째서 화두를 들어도 간절한 의심이 안 나는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진정한 의심이 나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그 점에 있어서 고민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어 볼 것도 없이 신심과 분심이 철저하지 못한 그 까닭이라고 할 것입니다.

 

[법문]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 (용256)

 

(10분 38초)

 

법왕권실영쌍행(法王權實令雙行)하니  뇌권풍치해악경(雷捲風馳海岳傾)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한데  도가원불섭도정(到家元不涉途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법왕권실영쌍행(法王權實令雙行), 법왕(法王)의 권(權)과 실(實)이 하여금 쌍(雙)으로 행하게 한다.

대법왕(大法王)은 권(權), 방편(方便)으로—팔만사천 가지의 그 좋은 가지가지 방편으로 중생의 근기에 맞도록 방편법을 쓰시고, 그 근기가 수승함에 따라서 그 방편을 거두시고서 실법(實法)으로써 제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편법과 실법을 자유자재로 두 가지를 써서, 뇌권풍치해악경(雷捲風馳海岳傾)이여. 이 뇌성벽력(雷聲霹靂)하는, 그 뇌성이 치고, 바람이 치달아서 바닷물이 넘치고 산이 거꾸러진다 그말이여.

 

법왕(法王)의 권실, 방편법과 실법을 자유자재로 쓰는 그 거동이 마치 번개치고 폭풍이 불고, 바닷물이 넘치고, 그래가지고 산이 넘어지고 하는 그렇게 참 자유자재하며 변화가 무쌍(無雙)하며, 어떠한 업(業)이 두터운 중생, 어떠한 악한 중생이라도 그 법왕의 권실쌍행(權實雙行)하는 앞에서는 다 봄눈 녹듯이 다 녹아져 버릴 것이다.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하면, 그렇게 뇌성벽력을 하고, 바람이 갖다가 폭풍이 불고 바닷물이 넘치고 산이 거꾸러지고 이러다가, 천지를 진동하는 그 벽력 한 소리에 구름은 다 흩어져버리고.

집에 돌아오는데 원래로 길을 걸을 필요가 없다.(到家元不涉途程) 집으로 돌아오는데, 자기의 본고장을 잃어버리고 타향에 방랑객으로서 타향살이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데다가, 이 도 닦아서 자기 본심을, 본 불성(佛性)을 깨닫는 것을 갖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다가 비유해서 표현한 건데.

 

고향집에 돌아오는데 원래로 길을 걸어서 돌아올 것이 없다.

자기 서 있는 데가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자기 고향집이더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이 도를 닦고자 할진대는 먼저 급히 바른 스승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바른 스승만 만나서 그 앞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몸과 목숨을 다 바칠 수 있는 그러한 바른 스승만 우리가 만난다면 도(道)는 걸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다 도를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여.

 

소를 끌어다가 맑고 깨끗한 물 있는 데다가 대준 거와 같아서, 소는 주인이 끌어다가 갖다가 대주면 믿고 꿀꺽꿀꺽꿀꺽 양껏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을 믿기 때문에 주인이 갖다가 끌어다가 대준 물이라면 마음놓고 먹을 수 있듯이, 바른 스승 또 내가 믿어지는 스승이라면 한마디 밖에는 더이상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 말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가 전부고, 일생의 수도(修道)가 도 닦는 것이 바로 거기에 다 있는 것입니다.

 

그 선지식(善知識)을 참으로 깊이 믿고 목숨 바쳐서 믿을 수 있다면, 입으로 법을 설하지 아니해도 먼빛으로 거동만 봐도 온통 화두(話頭)가 독로(獨露)하게 되고, 신심이 돈발(頓發)하게 되고.

웃거나, 울거나, 방귀를 뀌거나, 똥을 싸서 뭉게거나 그것이 하나도 허물로 보이지 아니하고 다못 신심이 돈발하고,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온통 몸과 마음이 한덩어리가 되어버린 것 뿐인 것입니다.

 

선지식이 무엇을 많이 가르켜 주고, 말을 많이 해 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이 무엇을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 도(道)라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한번 탁! 봐 버리면 되는 것이지, 무슨 어려운 이론을 연구하고 무슨 그러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사무쳐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믿지 않고서는 이것은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초학자(初學者)를 위해서 ‘도 닦아가는 사람이 먼저 바른 스승을 만나야 한다. 바른 스승을 만나서 옳게 공부를 지어 나가야 한다’ 옳게 지어 나갈라면, 첫째 바른 사상이 탁! 중심 잡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바른 믿음, ‘나도 성불할 수 있다. 결정코 나도 도를 이룰 수가 있다’고 하는 신념이 서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과거의 불보살과 모든 선지식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을 지어가지고 대도를 성취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시고 계시는데, 나는 오늘날토록 무엇을 하느라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면서 오늘까지 도를 이루지 못했던가’ 그 분심(憤心)이 속에서 솟구쳐 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선지식으로부터 간택 받은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해서 대의심(大疑心)이 돈발(頓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심과 분심이 밑받침되지 않고서는 대의정(大疑情)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심과 분심이 확고하고 불같은 그러한 뜨거운 신심, 분심이 한목 솟구치지 않고서는 화두를 들어도 들 때뿐이고 금방 돌아서면 없어져버리고, 하루는 겨우 한 듯하다가 이틀 사흘 가면 차츰차츰 풀어져 버리고. 이것이 모두가 다 그 신심과 분심이 철저하게 뒷받침되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째서 화두를 들어도 간절한 의심이 안 나는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진정한 의심이 나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그 점에 있어서 고민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어 볼 것도 없이 신심과 분심이 철저하지 못한 그 까닭이라고 할 것입니다.(45분17초~55분5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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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법왕권실영쌍행~'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종경(宗鏡) 서(序)」에서.

*법왕(法王) : [범] dharmarāja  부처님은 진리, 곧 법을 가장 밝게 깨치시고, 법을 걸림 없이 쓰시고 법을 널리 가르쳐서 법에 있어 제일 높은 어른이므로, 「법의 임금」이라고 존칭한 말이다。또한 모든 세속 임금들에게도 큰 스승이 되고, 온갖 성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므로 법왕이라 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권•실(權•實) : 부처님의 깊은 이치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대번에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방편으로써 처음에는 옅은 이치의 차별법(差別法)을 중•하(中•下) 근기에게 설한 가르침을 권(權)이라 하는데 소승교를 가리킴이요,

나중에는 참된 실상(實相)의 둘 아닌 법(不二法•眞如•平等), 영원히 변함이 없는 구극적(究極的)인 진리법을 설한 가르침을 실(實)이라 하는데 대승교를 가리킨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자유자재(自由自在 스스로·저절로 자/말미암을 유/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인 것.

*자재(自在 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①자기가 원하는 대로인 것.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인 것. 자유자재로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원하는 대로의 경지. ②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 ③자유롭다. 자신에게 의존하다. ④독립. ⑤느긋한 심신의 작용. 잡혀지지 않는 것. ⑥불보살에 갖추어진 힘을 말함.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도 함.

*뇌성벽력(雷聲霹靂) ; 천둥소리와 벼락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고향(故鄕) ; 본래 살던 곳. 본고향(本故鄕). 본향(本鄕).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 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달마혈맥론(達摩血脈論) ;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혈맥론(血脈論)』이라고도 한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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