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선지식(스승)'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21.12.04 선지식((No.233))—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이타에 맥힘이 없는 것 | 바른 안목을 갖춘 선지식의 점검.
  2. 2021.03.14 선지식(No.024)—참선하려면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 진묵겁 전에 우리는 다 성불해 마쳤다 | 도인 81행 | 상(相) | 진실한 신심 | 금강경 사구게.
  3. 2020.09.19 선지식(No.256)—사리불 두 제자의 뒤바뀐 수행 | (게송)법왕권실영쌍행~ | 도 닦을진댄 먼저 급히 바른 스승을 찾아야 | 철저한 신심 · 분심 · 의심.
  4. 2020.03.12 선지식(No.058)—참선, 깨달음은 일상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다 | 선지식의 지도 | 공안은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요, 나침반 | 물속에서 "물이 어디가 있느냐?"
  5. 2019.11.15 선지식(善知識) (No.122)—첫 일요법회 | 열반경 제행무상게(諸行無常偈) 일화 | 위법망구의 마음가짐 | 도인 81행 | 자기 집안에서 선지식을 찾아야.
  6. 2019.10.06 선지식(善知識) (No.201)—송담 스님의 출가 일화 / 간화선은 모든 중생의 근기에 맞는, 사견(邪見)에 빠지지 아니하고 확철대오 할 수 있는 가장 수승한 법.
  7. 2019.07.28 선지식(善知識) (No.086)—전강 스님의 선지식 정화 | 전강 스님에게 마지막 관문을 통과시키게 하는 법을 쓰신 만공 스님의 지도.
  8. 2016.04.08 선지식(善知識) (No.026)—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 전강 스님의 수행, 깨달음. 만공 스님과의 법거량, 인가.
  9. 2016.04.03 선지식(善知識) (세등선원No.09)—깨닫기 전에도, 또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안목을 갖춘 선지식의 탁마와 오후(悟後)의 지도하에 여법하게 정진해야.
ㅅ/선지식(스승)2021. 12. 4. 05:27

선지식((No.233))—부처님은 복(福)과 혜(慧)가 원만구족(圓滿具足), 우리도 복과 혜를 항시 겸해서 닦아 가야 | 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맥힘이 없는 것 | 법광(法狂) | 바른 안목(眼目)을 갖춘 선지식(善知識)의 점검.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이여. 현중현을,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들은 그 사람을 '옳게 보았다'고 인가(印可)를 하셨습니다.

 

 

(13분 2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智慧)의 눈을 뜨는데 가장 빠르고 가까운 최고의 법(法)입니다마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우리가 지어온 죄업(罪業)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애서 여러 가지 장애가 많고, 도(道)를 닦는 데에도 장애가 많고 세속에 살아가는 데도 여러 가지 내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한 것은 과거에 지은 업장(業障)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조석(朝夕)으로 이렇게 참회(懺悔)를 함으로써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그래야 도 닦아가는 데도 장애가 없고 세속에 어떠한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해 나가는 데에도 뜻과 같이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은, 가장 올바르게 닦아가는 수행은 지혜와 또 복덕과, 복(福)과 혜(慧)를 겸(兼)해서 닦아 가는 길인 것입니다.
지혜(智慧)만을 닦고 복(福)을 닦지 아니하면 가장 그 비근한 예를 들면, 머리는 좋은데 박복(薄福)해서 되는 일이 없이 내생(來生)에 태어나는 게고, 복(福)만 닦고 지혜를 닦지 아니하면 내생에 몸을 태어나되 복은 있어서 돈은 좀 많이 있으나 머리가 돌대가리가 되어서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나 이웃에도 그러한 예를 보실 수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智慧)와 복(福)을 함께 겸해서 닦아가라' 부처님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이 지혜와 복, 복과 혜를 겸전(兼全)하신 최고의 성현(聖賢)이 누구냐 하면 바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할 때 '두 가지가 구족하신 높은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具足)하시다' 하는 것이 바로 이 '복(福)과 혜(慧), 이 두 가지가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시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아 가는데 있어서도 복과 혜를 항시 겸해서 닦아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데에도 그렇고, 세속에 사회인으로서 수행을, 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공안(公案)을 이르되, 이(理)와 사(事)를 다, 이(理)와 사(事)에 걸림이 없어야만 바로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만 맞고 사(事)에 맞지 아니하면 이것은 원만(圓滿)하게 보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치(理致)만 맞고 사(事)를 무시하게 되면 이것은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어서, 사(事)라고 하는 것은 현실(現實)을 사(事)라고 하는 것이고,
이치상으로는 선(善)과 악(惡)이 두 가지가 아니고,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부처와 중생(衆生)이 두 가지가 아니요, 크고 작은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맑은 것과 깨끗한 것이 두 가지가 아닙니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도 두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이치상으로만 본다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천칠백 공안(公案)을 하나도 맥힘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事)에도 맞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이여. 현중현을,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들은 그 사람을 '옳게 보았다'고 인가(印可)를 하셨습니다.

처음에 한 철 내지 두 철, 늦어도 한 3년 알뜰히 정진(精進)하게 되면 누구나 이 체중현(體中玄) 도리, 공(空)에 이치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이 공(空)의 이치만 보는 것, 그것만을 가지고 옳게 일렀다고 인가(印可)를 하게 되고, 본인도 의심 없이 '자기가 바로 보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법(法)에는 현밀(顯密)이 있어서, 은밀(隱密)히 할 말과 또 이렇게 나타내서[顯] 할 부분이 있는 것인데, 현밀을 가리지 못하고 마구잽이 말하게 되고, 이치로 보면 생사(生死)가 없기 때문에 육도(六道)도, 인과(因果)도 모두가 인증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事)를 보지 못하면, 사(事)의 이치를 보지 못하면 인과(因果)도 부정(否定)을 하게 되고 삼강(三綱)과 오륜(五倫)도 부정을 하게 되고, 선악(善惡)도 부정을 하게 되어서 거침없이 무애도인(無碍道人)으로 이 세상에 천상천하(天上天下)에 거침없이 말과 행동을 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조사(祖師)들이 대단히 이것을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맥힘이 없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을 만나냐, 못 만나냐에 따라서 좋은 그릇이, 좋은 재목(材木)이 훌륭한 건물을 짓게 되기도 하고, 또 좋은 재목이 아까웁게도 큰 성과(成果)를 거두지를 못하고 버리게 되는 수도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 말씀하시기를,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飜成毒藥)이다'
제호(醍醐)는 우유로 만드는 최고의 맛있는, 영양이 있고 맛있는 음식인데, 그 제호에 최고에 맛이 변해 가지고 독약(毒藥)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잘 관리를 해야지 변질(變質)되어 버리면, 아깝다고 그것을 먹게 되면 병(病)이 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치를 보는,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도 대단히 희귀한 일이고 참 소중한 일이지만, 공(空)의 이치를 본 그 경계(境界)는 잠시도 거기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분일초도 '내가 봤다'는 생각, '알았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거기에 주저앉게 되면 그 공부는 거기서 멈추게 되고, 하는 짓은 미친 짓 밖에는 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참선(參禪)하다 한 소식해 가지고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법광(法狂)이라 해서, 법으로 미친 '법광'이 되어 가지고, 불조(佛祖)도 막 매도(罵倒)해 버리고 쳐부셔 버리고 욕을 퍼붓어 버리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잽이 말을 막 함부로 하고 이래 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망치고, 많은 사람을 갖다가 그르치게 되고 불법(佛法)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達磨) 스님도 「혈맥론(血脈論)」에 '이금차도(而今此道)에 난득기인(難得其人)이라, 이 도(道)에 참, 사람 만나기 어렵다' 학자(學者)는 바른 스승을 만나기 어렵고 또 선지식(善知識)은 바른 학자를 만나기가 어렵다고 통탄(痛歎)을 하신 것입니다.

선지식을 만났다고 해서 그 선지식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못 자기의 그 소견(所見)을 바르냐 그르냐를 점검(點檢) 간택 받는 일뿐인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본 경계(境界)이기 때문에 너무너무 신기하고 너무너무 묘하고 힘이 솟구치고 환희에 넘쳐서 자기로서는 자기를 점검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바른 안목(眼目)을 갖춘 선지식(善知識)의 점검이 아니면 백(百)이면 백 다 잘못... 중간 잠깐 지나가야 할 그 경계에서 거기서 주저앉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28분35초~41분3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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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2분 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한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2분 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2분 26초)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어떤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가려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2분 36초)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❺]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 (4분 18초)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삼현 ; 보조국사의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참고 ①]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보조지눌 1158~1210 |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176~180. p200~20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542~546.

問 向來所說 旣聞命矣 古今禪門達者 見性成佛 豈非一分性淨之體 不具相用耶

또 물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잘 들었다. 그러나 고금 선문(禪門)의 통달한 사람이 견성하여 성불한 것이 어찌 일부분 성정(性淨)의 체성이 모양[相]과 작용[用]을 갖추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答 不然 汝豈不聞 永嘉眞覺大師 一宿曹溪 開悟本心作歌 其略 曰 心鏡明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萬像森羅影現中 一顆圓光 非內外 一性 圓通一切性 一法 遍含一切法 一月 普現一切水 一切水月 一月攝 諸佛法身 入我性 我性 還共如來合

나는 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왜 듣지 않았던가? 영가 진각(眞覺) 대사는 조계(曹溪)에서 하룻밤을 묵다가 본심을 깨치고 노래를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마음 거울이 밝아 걸림이 없음이여. 탁 트이고 밝게 사무쳐 사계(沙界)를 두루했다. 삼라만상의 그림자가 그 가운데 나타나니, 한 덩이 뚜렷한 광명은 안팎이 없다. 한 성품이 일체의 성품에 뚜렷이 통하고 한 법이 일체의 법을 모두 머금고 있다. 한 달이 일체의 물에 두루 나타나매, 일체의 물의 달이 한 달에 포섭된다. 모든 부처의 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오매, 내 성품이 여래와 하나로 합한다’ 하였다.

又英邵武 開悟本心作偈 其略 曰 十方齊現一毛端 華藏重重帝網寒
又大慧禪師 秉拂云 欲識佛性義 當觀時節因緣 時節 若至 其理自彰 乃至須知微塵諸佛出世 降王宮坐道場 轉法輪降魔軍 度衆生入涅槃 摠不出這箇時節 諸人 若信得及 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

또 영소무(英邵武)도 본심을 깨치고 게송을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시방 세계가 한 털끝에 한꺼번에 나타나매, 화장세계(華藏世界)가 중중하여 제망(帝網)이 차다[寒]’
또 대혜(大慧) 선사는 불자(拂子)를 들고 ‘불성(佛性)의 뜻을 알고자 하면 시절인연을 관찰해야 하나니, 시절이 오면 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티끌수 같이 많은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와 왕궁에 태어나 도량에 앉고, 법륜을 굴려 마군을 항복하게 하고 중생을 구제하신 뒤에 열반에 들되, 그 모두가 이 시절을 벗어나지 않은 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런 줄을 믿으면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이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古今)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 하였다.

如是等開悟本心 得見自心鏡內 帝網重重無盡法界者 禪門傳記中 不可勝數 昧者 不知其源 不覽禪錄 亦不見華嚴大論之旨故 纔聞禪者 說卽心卽佛 以謂不過性淨佛也 是大愚惑
非謂華嚴敎門 說理未盡 但學者 滯在言敎義理分際 未能忘義了心 速證菩提 所以達摩西來 欲令知月不在指 法是我心故 不立文字 以心傳心耳

본심을 깨치고 제 마음 거울 속에 제망(帝網)처럼 중중한 무진법계(無盡法界)를 본 이런 일들은 선문의 기록 가운데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있다. 그런데 우매한 사람들은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선문의 기록도 보지 못하고, 또 화엄대론(華嚴大論)의 뜻도 보지 못하였으므로 참선하는 이들의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것은 성정(性淨)의 부처에 지나지 않는다 하니, 매우 어리석고 미혹한 일이다.
화엄교문에서 이치를 다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학자들이 말로 표시된 의리(義理 사상이나 내용)의 한계에 걸리어, 능히 뜻을 잊고 마음을 깨달아 보리를 빨리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와 달은 손가락에 있지 않듯이, 법이 곧 내 마음임을 알게 하려 하셨기 때문에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마음을 마음에 전한 것이다[以心傳心].

是以禪門 只貴破執現宗 不貴繁辭義理施設 故 所有破執言句 近於一分理性 離言絶慮之義 昧者 不知其義 每將相似語例 便謂同於頓敎 是大不然 設於華嚴無盡法界重玄法門 生於法愛 解分 未忘 亦爲所破也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다만 집착을 부수고 종지(宗旨)를 나타내는 것을 귀히 여기고, 번거로운 말로 뜻을 나열해 놓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을 타파한 여러 가지 언구(言句)가 일부분 말을 여의고 생각이 끊어진 이성(理性)의 뜻에 어느 정도 가깝지마는, 우매한 사람들은 그 뜻를 알지 못하고 매양 비슷한 말의 예(例)를 가져 돈교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설사 「화엄경」의 다함없는 법계의 매우 심오한 법문에 대해서도 그 법에 애착하여 지해(知解)를 버리지 못하면 그것도 타파해야 할 것이다.

台敎 亦云 圓門生着 尙爲初敎 所破 但性海果分 是法界證處 不可預談 亦不是心思意解 所及 故 淸凉祖師 亦云 圓音 非扣而常演 果海 離念而心傳 又云 佛證離言
是知禪門 離念相傳 是頓證法界處也 決非頓敎中 不說法相 唯見眞性 一念不生 卽名爲佛也

천태교(天台敎)에서도 ‘원문(圓門)이라도 집착하는 마음을 내면 초교(初敎)와 같이 타파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다만 성해(性海)의 과분(果分)은 법계를 증득한 곳이라, 미리 말할 수도 없고 또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뜻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량 조사는 ‘원음(圓音)은 묻지 않아도 항상 연설하시고, 과해(果海)는 생각을 여의고 마음으로 전한다’ 하고, 또 ‘부처님은 말을 여의었음을 증득하셨다’ 하였다.
이로써 선문에서는 생각을 여의고 서로 전한 것이 법계를 단박 증득한 곳이요, 결코 돈교에서와 같이 법상(法相)을 설하지 않고 오직 진성만 보아 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곧 ‘부처’인 것은 아닌 줄을 알아야 한다.

何以知其然 禪有三玄門 一 體中玄 二 句中玄 三 玄中玄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선문에는 삼현문(三玄門)이 있다. 첫째는 체중현(體中玄 체 가운데 현)이요, 둘째는 구중현(句中玄 구 가운데 현)이며, 셋째는 현중현(玄中玄 현 가운데 현)이다.

初體中玄門 引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等事事無碍法門 以爲初機悟入之門
此亦是言敎中 解分 未忘故 以句中玄無跡平常灑落言句 令其破執 頓忘佛法知解也 此亦有灑落知見 灑落言句故 以玄中玄良久默然棒喝作用 鍛鍊
當此之時 頓忘前來第二玄門灑落知見 灑落言句 故 云 得意忘言道易親 是謂頓證法界處也(此中三玄 雖非臨濟本意 且順古師之意 明之)

첫째의 체중현의 문에서는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자기와 타인은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는 등의 일일이 서로 걸리지 않는[事事無碍] 법문을 인용하여, 첫 근기의 깨쳐 들어가는 문을 삼았다.
그러나 이것도 언교(言敎)에 대해 지해(知解)와 분별을 버리지 못했으므로, 구중현의 자취 없고 평상(平常)한 쇄락(灑落 산뜻한)한 언구(言句)로 그 집착을 부수어 불법의 지해를 단박 잊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쇄락한 지견과 쇄락한 언구가 있기 때문에, 현중현의 양구(良久)와 방할(棒喝) 등의 작용으로 단련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앞의 둘째 현문의 쇄락 지견과 쇄락 언구를 잊기 때문에 ‘뜻을 얻고 말을 잊으매 도와 친하기 쉽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법계를 단박 증득하는 곳이다.(이 가운데 비록 삼현三玄이 임제臨濟의 본의가 아니나 옛 스님의 뜻을 따라 밝힌 것이다)

禪門 亦有爲初機下劣人 指示隨流妄染中 有性淨妙心 令其易解信入 信入然後 忘其解分 方爲親證
若不忘解分 坐在解脫深坑 不能於萬行緣起門中 轉身無滯故也

선문에도 처음 들어온 사람이나 하열한 근기를 위해 흐름을 따르는 허망과 더러움[妄染] 속에도 성품이 깨끗한 묘한 마음[性淨妙心]이 있다고 가리켜 보여, 그들로 하여금 쉽게 알고 믿어 들어가게 하였다. 믿어 들어간 뒤에 그 지해와 분별을 잊어야 비로소 몸소 증득하였다 할 수 있다.
만약 지해와 분별을 잊지 못하면,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 속에 앉아 있을 것이니, 그것은 온갖 행의 연기문 가운데서 몸을 돌려 걸림이 없이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고 ②]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는 글)’ p210~211. P216~217. P229. P23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p564~565. P571.

禪門亦有爲密付難堪 借敎悟宗之者 說眞性緣起 事事無碍之法 如三玄門 初機得入 體中玄所明云 無邊刹境自他 不隔於毫端 十世古今始終 不離於當念 又云 一句明明該萬像等 是也

선문에도 은밀히 부촉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교문을 빌어, 종지를 깨닫는 자를 위하여 진성(眞性)이 연기(緣起)하는 사사무애 법을 설하는 경우도 있으니, 삼현문(三玄門)에서 처음 근기[初機]가 들어갈 수 있는 체중현(體中玄)에서 밝힌 것과 같다. 거기에 “가없는 세계 경계[刹境]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하고, 또한 “한 글귀가 밝고 밝아 온갖 현상을 거두어 들인다”한 등등이 이것이다.

禪門中 此等圓頓信解 如實言敎 如河沙數 謂之死句 以令人生解碍故 竝是爲初心學者 於徑截門活句 未能參詳 故 示以稱性圓談 令其信解不退轉故 若是上根之士 堪任密傳脫略窠臼者 纔聞俓截門 無味之談 不滯知解之病 便知落處 是謂一聞千悟 得大摠持者也

선문 가운데도 이런 원돈(圓頓) 신해(信解)하는 진실한 말씀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지만, 이것을 사구(死句)라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해의 장애를 내게 하기 때문이며, 아울러 초심 학자는 경절문(徑截門)의 활구(活句)를 아직 참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품에 부합하는 원만한 말씀을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여 퇴전치 않게 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상근기로서 은밀히 전한 뜻을 감당하여 기존의 격식[窠臼]을 벗어날 수 있는 이라면, 경절문의 맛없는 말을 조금 듣기만 하고도 알음알이[知解]의 병통에 걸리지 않고 곧 속뜻[落處]을 아니, 이 이를 ‘하나를 듣고 천을 깨달아 대총지(大摠持)를 얻은 자’라 한다.


〇禪門亦有多種根機 入門稍異 或有依唯心唯識道理 入體中玄 此初玄門 有圓敎事事無碍之詮也 然 此人 長有佛法知見在心 不得脫灑 或有依本分事祇對灑落知見 入句中玄 破初玄門佛法知見 此玄 有徑截門 庭前栢樹子麻三斤等話頭

선문에도 또한 여러 가지 근기가 있어서 들어가는 문이 다소 다르다. 어떤 이는 유심(唯心)과 유식(唯識)의 도리에 의하여 체중현(體中玄)에 들어가기도 하니 이는 처음 현문[初玄門]인데, 원교의 사사무애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항상 불법의 지견(知見)이 마음에 남아있어서 이를 벗어나 깨끗함을 얻지 못한다.
어떤 이는 본분사에 의지하여 쇄락한 지견에만 대하여 구중현(句中玄)에 들어가 초현문(初玄門)의 불법 지견을 타파한다. 이 현문(玄門)에 경절문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와 마삼근(麻三斤) 등의 화두가 있다.

然 立此三玄門古禪師之意 以本分事祇對話頭 爲破病之語 故 置於第二玄 然 未亡灑落知見言句 猶於生死界 不得自在 故 立第三玄中玄 良久默然棒喝作用等 破前灑落知見 所以云 三玄施設 本由遣病 若望上祖初宗 卽未可

그러나 이 삼현문을 세운 것은 옛 선사의 뜻인데, 본분사에 상응하는 화두로 병을 타파한다는 말을 삼기 때문에 제이현(第二玄)에 둔 것이다. 그러나 쇄락한 지견이라는 언구를 잊지 못하여 오히려 생사에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삼(第三) 현중현(玄中玄)의 양구, 묵연, 방, 할의 작용 등을 세워서 앞의 쇄락한 지견을 타파한다.
그러므로 “삼현문을 시설한 것은 본래 병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 만일 옛 조사의 처음 종지에서 보면 그것도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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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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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선지식(스승)2021. 3. 14. 12:56

선지식((No.024))—참선을 하려면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 진묵겁(塵墨劫) 전에 우리는 다 성불해 마쳤다 | 법문 듣는 법 | 도인 81행 | 상(相)에 의지하지 아니한 진실한 신심 | 금강경 사구게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19분 30초)

 


[법문] 송담스님(No.024)—1976년(병진년) 동안거 결제(76.10.15.음) (용024)

조실 스님께서 그날 하시던 법문—참선을 할 사람, 참선을 헐라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냐?

첫째,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참선은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 것이지마는,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하는 참선은 아무리 밤잠을 안 자고 밥을 굶으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고 해도 그 참선은 결단코 우리에게 깨달음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이 무슨 깨닫게 해 준 것도 아니고, 무엇을 가리켜 줄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선지식한테 무엇을 배울 것도 없고,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른 참선을 헐라고 할 때에는 바른 선지식의 지도가 없이는 천 명, 만 명 가운데에 한 사람도 바로 깨달은 사람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는데 선지식을 만나지 아니하면은 바로 깨달을 수가 없느냐?
가리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에 가리켜 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은 우리는 혼자라도 얼마든지 스승 없이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가리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스승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가리켜 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은 부처님 당시에 1,250인을 비롯해서 모든 사부대중, 인천(人天) 백만억 대중이 어째서 부처님 당시에 일시에 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지 못했겠습니까?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출현을 하셔 가지고 정법을 선양(宣揚)하시고, 그동안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이 삼십이상(三十二相)과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나투시면서 천백억 화신(化身)으로 이 우주법계 방방곡곡에 오늘도 수없이 많은 불보살과 선지식이 출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설법을 잠시도 그치지 아니하고 설법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리킬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세계에 40억이라고 하는 인구는 말할 것도 없고, 시방법계(十方法界)에 가득차 있는 무량무변(無量無邊) 중생이 한 사람도 깨치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켜 줄 수 없고 배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깨닫지 못한 채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 부처님 참법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 이러한 말들은 잠꼬대 같은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즉 우리는 진묵겁(塵墨劫) 전에 우리는 다 성불해 마쳤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밥 먹고, 똥 싸고, 울고 웃고 한 이 모든 것이 고대로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온전히 깨달은 상태에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깨달을려고 하기 때문에 점점 미(迷)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깨달으려고 하지 말아야겠느냐?' 이렇게 반문을 하시겠지마는, 우리는 어떠한 법문(法門)을 들을 때라도 그 법문에 의지해서 바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입니다. 어떤 법문을 들으면 항시 그 반대쪽 상대되는 말을 연상(聯想)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의 버릇입니다.
부처님 설법, 큰스님네의 설법을 들어도 그 설법을 듣는 가운데에 바로 자기에 본참화두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법문을 옳게 듣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법문을 듣더라도 그 법문에 의해서 그다음 생각, 그다음 생각으로 차츰 추리해 들어가는 그러한 법문을 듣는 태도는 영리한 사람이긴 하지마는, 법문을 참으로 옳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법문을 듣더라도 그 법문을 듣자마자, 들음과 동시에 자기가 들고 있는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분명해질 때, 소소영령(昭昭靈靈)해질 때 그 법문은 참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졌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바르게 법문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꼭 법당에만 들어와서 어떠한 법사님의 법문을 들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문을 바로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하늘을 보고도 산을 보고도 물을 보고도, 개 짖는 소리를 듣고도, 소와 말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이놈 저놈’하고 욕지거리 하는 소리를 듣고도, 누가 나한테 어리석은 억울한 욕을 퍼붓고 달라드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의 목에 칼을 댈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찰나 찰나에 자기에게 주어진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까지는 우리는 이러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자주자주 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법문을 듣고서 그 시간에 들은 법문을 졸졸졸졸 한마디도 잊어버리지 않고 조르르 옮기는 그러한 영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법문을 듣는 동안 잠깐도 귀를 팔지 아니하고, 한눈을 팔지 않고서 열심히 들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법문을 듣고 돌아서서 한마디도 옮길 수 없지마는 들을 때나, 법문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걸음이 자기에게 주어진 본참화두가 분명히 들려서 알 수 없는 의심이 골똘해진 그 사람. 그 사람에게 비교할 때에 뒤에 사람이 앞에 사람의 몇천 배, 몇만 배 법문을 잘 제대로 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해 드린 말씀을 통해서 '법문(法門)은 어떻게 듣는 것이 옳다'
또 법문은 법당 안에서만 잘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에 돌아가서 사회에 나가서 어디서 무엇을 보던지, 듣던지, 무엇을 느끼던지, 어떠한 사건을 당하던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언제라도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깊은 신심(信心)으로, 불같은 의심(疑心)으로, 분심(憤心)을 일으켜서 자기의 본참(本參)을 들고 또 들고 해서,
우리의 일상 모든 생활 속에 화두에 대한 의심이 한덩어리가 되도록,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제일 법문을 잘 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에 법문을 한 번 듣고서 하루, 한 달, 석 달, 일 년, 계속해서 그러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면 구태여 법문을 자주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이면 법회 때에 빠져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어쨌든지 듣던 말 또 듣고, 듣던 말 또 듣더라도 자주 자주 법회에 참석해서 본참화두가 타성일편이 될 때까지는 선지식의 법문을 소홀히 들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스승을 찾는 데에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 이후로 선지식이 일양(一樣)으로 밖으로 보아서 인물이 잘나고, 법문을 들어보면 아주 변재(辯才)가 있고 말이 조리(條理)가 분명해서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만 하고.
그리고 그 행동은 대도사의 품위가 있고 몸에서는 광명이 비치며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풍기며, 한 번 뵙기만 해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숭배심과 신앙심이 우러나오는 그러한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춘 그러한 도인(道人)으로만 세상에 출현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도인은 가끔 있을 수 있을지언정, 대체로 불보살과 역대 대도사가 출현하실 때에는 여든한[八十一] 가지의 그러한 가지가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는 의심스럽고 '세상에 저게 무슨 도인인가? 저게 무슨 불법인가? 저래 가지고 무슨 중생교화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사람 앞에 법문을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이렇게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찌 보면 어린애 같고, 어찌 보면 바보 같고, 어찌 보면 미치광이 같고, 그러한 양상(樣相)으로 출현하신 선지식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중생이 한번 보고 한번 들음으로써 신심이 더욱 돈발(頓發)할 수 있는 그러한 훌륭한 양상으로 출현을 한 것이 낫지, 어찌 미치광이같이 바보같이 어린애같이 주책없는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의아스럽게 맨드는 그러한 양상으로 출현을 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여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습니다.

중생은 무엇을 듣던지 보던지 단통 상(相)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자기 나름대로 저울질을 하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눈에 들면은 좋다고 그러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야단입니다. 그러다가 조그만한 허물만 보였다면 대번에 손가락질을 하고 비방을 하고 "아! 큰스님인 줄 알고 큰 도인인줄 알았더니 내가 잘못 봤다. 어디가 도인이 그럴 수가 있느냐?" 대번에 돌아서서 욕을 하고 비방을 하고 다른 사람까지 가서 법문을 듣지 못하도록 선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相)을 보고 믿는 신도, 상을 보고—법문을 잘하니까, 얼굴이 잘 생겼으니까, 참 음성 소리가 좋으니까, 참 인정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스님이 참 좋다. 이러한 식으로 믿기 시작한 그 신심은 머지않아서 변해 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서 상(相)에, 모냥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정말 진실한 돈독한 신심으로 법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선입관, 주견을 잊어버리고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신(信)하는 그 신심은 어떠한 행동이나 어떠한 언어나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어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자기의 진실된 믿음은 동요가 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求)하는 자는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금강경을 날마다 한 번씩 읽고 그러기를 몇십 년을 하는 그러한 신심을 가진 불자(佛子)가 금강경에 씌어 있는 단 한 구절의 게송의 뜻마저도 바로 보지 못하고, 마냥 정법을 비방하고 바로 선지식을 믿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하는 자는 삿된 도를 행한지라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부처님은 32상과 80종호를 다 갖추셨고 그 음성은 원음(圓音)으로써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은 모든 중생이 자기의 근기에 맞춰서 각기 자기 나름대로 전부 그 법문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원음을 갖추셨으니까 나는 그분을 부처님으로 숭배한다. 그러한 거룩한 상호를 가지셨으니까 부처님을 숭배한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 앞에 머리 숙여 목숨 바쳐 귀의한다' 이러한 사람은 「참 여래를 보지 못한 사람이다」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한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얼굴을 한 번만 본 사람도, 나의 이름을 한 번만 들은 사람도 결정코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대해탈도(大解脫道)를 얻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할 때는 밑을 보지 말고 저의 얼굴을 보시면서 들으십시오.
30년을 두고 발원을 하기를 '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삼도(三途)를 면하고, 나의 이름을 들은 사람은 해탈도를 증득하여지이다' 이렇게 간절히 축원을 해왔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을 자칫 잘못 들으시면은 여러분은 돌아서서 웃으시게 됩니다.
「나」라고 하니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낱낱이 「나」를 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기 이름을 한 가지 두 가지씩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임시로 붙여 놓은 이름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참 이름'을 바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참나’를 본 사람이 어찌 삼악도에 떨어지며, 여러분 자신의 '참 이름'을 들을 수 있다면 어찌 해탈도를 증득 못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드렸지마는, 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송담(松潭) 얼굴을 봐도 절대로 악도를 면하고 해탈도를 증득하리라고 저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때에는 저의 얼굴을 똑바로 보시면서 들어야 졸음이 안 온 것입니다. 요렇게 밑으로 참선 한 척하고 있으면은 남 봄에는 점잖하니 듣고 있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꾸벅꾸벅 하고 계신 분이 계시거든요. 그렇게 되면은 제가 목이 아프도록 이야기한 보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9분11초~28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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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선양(宣掦 베풀·널리 알릴 선/오를·나타낼 양) ; 명성이나 권위 따위를 널리 떨치게 함.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팔만세행(八萬細行) ; 부처님의 모든 행동은 원만하여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다는 것.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들이 전부 부처님의 위의(威儀, 훌륭한 행위)에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화신(化身) ; 화현(化現)한 몸[身]. 변화된 신체. 화신불(nirmaka-kaya 化身佛). 부처의 삼신(三身 : 法身 · 報身 · 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응화신(應化身) · 변화신(變化身) ·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시방법계(十方法界) ; 시방세계(十方世界).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무량무변(無量無邊) ; 한없이 크고 넓음. 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진묵겁(塵墨劫) ; 티끌[塵]이 쌓여 먹[墨]이 될 만큼의 오랜 시간[劫].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연상(聯想 뒤를 이을 련/생각 상) ;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현상. '기차'로 '여행'을 떠올리는 따위의 현상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귀를 팔다 ; 귀를 딴 데로 돌리어 잘 듣지 않다.
*한눈 ; 마땅히 볼 데를 보지 않고 딴 데를 보는 눈.
*한눈을 팔다 ; 해야 할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정신을 딴 데로 돌리다.
*걸음걸음이 ; 걸음을 걸을 적마다.
*골똘해진--->골똘하다 ; (사람이 한 가지 일에)온 정신을 쏟아 딴생각이 없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불같은—> 불같다 ; 정열이나 신념, 감정 따위가 뜨겁고 강렬하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일양(一樣) ; ①한결같은 모양. 또는 같은 모양. ②한결같이 그대로. 또는 꼭 그대로.
*변재(辨才 말 잘할 변/재주 재) ; 말을 잘하는[辨] 능력과 재주(才操).
*조리(條理) ;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대체로 불보살과 역대 대도사가 출현하실 때에는 여든한 가지의 그러한 가지가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는 의심스럽고 '세상에 저게 무슨 도인인가? 저게 무슨 불법인가? 저래 가지고 무슨 중생교화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사람 앞에 법문을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이렇게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찌 보면 어린애 같고, 어찌 보면 바보 같고, 어찌 보면 미치광이 같고, 그러한 양상(樣相)으로 출현하신 선지식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 도인(道人)의 81행(行). 도인의 여러 가지 행에 있어서 81행이 있는데, 「도인의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좋고 궂은 모든 행위가 다 포함될 수가 있다.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광행(狂行) · 영아행(嬰兒行)도 있고, 승행(僧行) · 속행(俗行) · 남자행 · 여자행, 그리고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까지 이르나 도안(道眼, 道의 眼目)이 명백하면 아무 걸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81행 가운데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인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친다.

[참고] 『경허집(鏡虛集)』 '여등암화상(與藤菴和尙 등암화상에게 주다)'에서.
達磨大師入唐土 敷演最上乘法 不論誦經念佛持呪禮拜 不論長坐不臥一食卯齋 不論禪定解脫 不論持戒破戒僧俗男女 見性卽成佛 若以誦經等餘外法 妄爲佛法 殺却無罪過

달마대사가 당나라에 들어와 최상승법을 폈는데, 경을 읽고 염불하고 주문을 외고 예배하는 것을 논하지 않았으며, 장좌불와 일종식도 논하지 않았으며, 선정과 해탈도 논하지 않았으며, 계(戒)를 지키고 파하는 것이나 승속 남녀도 논하지 않았으며, 자기 성품을 보면 곧 성불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경을 읽는 등이나 그밖의 법을 망령되이 불법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又云 栴多羅見性成佛 不論作殺生業 縱作業 不同他人 業拘不能 白衣見性成佛 不論淫欲 縱有餘習 亦不相妨 洪州云 善亦是心 不可將心還修於心 惡亦是心 不可將心還斷於心 牛頭禪師云 心無異心 不斷貪淫

또 "전다라가 견성성불함에 살생업을 지은 것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업을 짓더라도 다른 사람과 달라서 업에 구애되지 않으며, 속인이 견성성불함에 음욕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또한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홍주(마조도일) 스님은 "선(善)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닦을 수 없고, 악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끊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우두 선사는 "마음에 다른 마음이 없으니 탐심과 음욕을 끊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故善知識牧牛 有八十一行 自佛行梵行 乃至有殺盜淫酒等行 而道眼明白 亦無所碍 故潙山禪師云 只貴正眼 不貴行李處 故此法門逈出三乘 汎學者 實不可思議 古有習小乘戒律者 皆誹謗禪師 而如蟷螂捍轍 斥鷃笑鵬 置之莫論

그러므로 선지식의 목우행(牧牛行)에 81가지가 있으니,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 이르기까지 도안(道眼)이 명백하면 아무 구애될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산선사는 "다만 안목이 바름만 귀하게 여기고 행리(行履)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법문은 삼승을 멀리 벗어났으니, 범범하게 배우는 사람은 실로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 소승의 계율을 익힌 이들은 모두 선사를 비방했으나 이는 버마재비(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고 뱁새가 대붕(大鵬)를 비웃는 격이니, 제쳐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양상(樣相 모양·형태·상태 양/서로·모양·바탕 상) ; 사물이나 현상의 모양이나 상태.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단통 ; 그 자리에서 대번에 곧장.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금강경』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금강경』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色見聲求 是行邪道 作麼生 不行邪道去 但知聲色本非眞 自然不被聲色惑 見盡自於玄旨會 情忘能與道相親

색상으로 보고 음성으로 구하는 것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삿된 도(道)를 행(行)하지 않겠는가?
다못 이 소리와 색상이 본래 참[眞]이 아닌 줄 알면 자연히 소리와 색상에 현혹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소리를 듣고 색상(色相)을 보는 그 견(見)이 다하면, 자연히 현현(玄玄)한 뜻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정(情)이 다하면 능히 도(道)와 더불어 서로 친(親)하게 될 것이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원음(圓音) ; 치우침 없는 원만한 음성. 들을 수 없는 이가 없는 음성. 모든 유정이 제각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부처님께서 한 음성[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실 때, 모든 중생이 제각기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평등하게 이해하는 원만한 부처님의 가르침.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사도(四道) ;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 것. ①가행도(加行道). 번뇌를 끊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 ②무간도(無間道). 간격이나 걸림 없이 지혜로써 번뇌를 끊는 단계. ③해탈도(解脫道).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④승진도(勝進道). 뛰어난 수행으로 해탈의 완성에 이르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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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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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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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선지식(스승)2020. 9. 19. 08:04

선지식(No.256)—사리불 두 제자의 백골관, 수식관 뒤바뀐 수행 | 부처님의 혜안(慧眼) | (게송)법왕권실영쌍행~ | 도를 닦고자 할진대는 먼저 급히 바른 스승을 찾아야 할 것이다 | 도(道)는 자기가 자기를 사무쳐 버리는 것 | 바른 신심 · 뜨거운 분심 · 간절한 의심.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선지식(善知識)이 무엇을 많이 가르켜 주고, 말을 많이 해 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이 무엇을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 도(道)라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한번 탁! 봐 버리면 되는 것이지, 무슨 어려운 이론을 연구하고 무슨 그러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사무쳐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믿지 않고서는 이것은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21분 33초)

 

[법문]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 (용256)

 

부처님의 왼팔과 같은 사리불(舍利弗) 존자가 두 제자를 가르키는데, 한 제자에게는 백골관(白骨觀)을 하도록 가르키시고, 한 제자에게는 수식관(數息觀)을 하도록 지도를 하셨습니다.

 

백골관 ‘흰 백(白)’자, ‘뼈 골(骨)’자, 백골관이라 하는 것은 공동묘지에 가 가지고, 그 인도는 풍장(風葬)이라 해가지고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지 아니하고 그냥 저 숲속에다 그냥 놔둡니다.

놔두면 독수리란 놈들이 달라들어서 삽시간에 그 눈알도 다 빼먹고 살도 다 뜯어먹고 뼈만 앙상하니 내놓습니다.

 

그래서 뼈가 풍마우습(風磨雨濕)에 닳고 닳고 얼고 불고 해 가지고는 나중에 인자 그것이 다 없어지는데, 처음에 시체를 갖다 놓으면은 차츰차츰 썩어 들어가 가지고는 피부가 인자 문드러져서 다 없어지고, 그 다음에 뼛골만 앙상하게 남아서 닳아져 없어질 때까지 매일 가서 밥만 얻어다 먹으면 계속 그 시체 옆에서 그것을 계속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걸 관찰을 하면서 거기서 정진하는데 그것을 백골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식관(數息觀)이라 하는 것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또 조용히 내쉬고, 또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 내쉬고 해서, 한 번 들어마셨다 내쉬고 ‘하나’ 또 들어마셨다 내쉬고 ‘둘’,

그렇게 해서 셋, 넷, 다섯, 여섯... 해서 ‘열’까지 세어 올라가면 또 그다음에는 아홉, 여덟, 일곱, 여섯... 해서 거꾸로 세어 내려오고, 또 하나까지 내려오면 하나에서 열, 열에서 하나,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러면서 그것이 잘되면 그다음에는 하나에서 스물까지 세어 올라가고, 또 스물에서 열아홉, 열여덟, 열일곱... 해서 거꾸로 세어서 하나까지 내려오고. 중간에 딴생각이 나거나, 몇 까지 세었는가를 잊어버리면 다시 또 하나에서 시작하고.

이러기를 서른, 마흔, 쉰... ‘백’까지 세어 올라갔다가 ‘백’에서 아흔아홉, 아흔여덟, 아흔일곱... 해서 하나까지 거꾸로 세어 내려옵니다.

 

계속 새벽부터 저녁, 저녁부터 새벽까지, 날이면 날마다 그 자기의 호흡을 세는 것입니다. 세어 올라갔다... 이것을 수식관이라 하는데.

이 백골관이나 수식관이 우리 수행해 나가는데 대단히 요긴한 하나의 수행 방법이 될 것입니다마는.

 

그런데 그 두 제자가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그렇게 철저히 정진을 10년, 20년, 30년 이렇게 했습니다. 했는데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했습니다.

못하니까, ‘열반(涅槃)이니, 무루지법(無漏之法)이니, 그따위 것이 어디가 있어? 그러한 것이 있었다면 왜 내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못했을까?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못했지, 그러한 참으로 깨달음이란 것이 있고, 무루지법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벌써 깨달음을 얻었어야 할 거다. 우리가 못한 것으로 봐서는 틀림없이 그런 것이 없어. 괜히 그런 것이 있다고 속여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왜 그런 것이 있다면 깨달을 텐데,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할 것이다’하는 생각을 하냐 하면은 ‘오계, 십계, 내지 250계, 계율을 하나도 어김없이 철저히 지키고, 새벽부터 저녁,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분일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아니하고 이렇게 살이 다 마르고,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하도록 이렇게 하는 데도 깨닫지를 못합니까? 그렇다면야 이거 열반이니, 견성이니, 성불이니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말을 스스로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렇게 막 분개해 가지고 막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서 사리불과 그 백골관과 수식관을 한 사람을 불러다 놓고서,

“사리불아! 네가 두 제자를 지도하는데 있어서 방법이 거꾸로 되었느니라. 한 사람은 세탁업을 하던 사람이고, 한 사람은 쇠붙이를 다루는 성냥간을 하는 사람인데, 쇠붙이를 다루는 성냥간 하는 사람에게는 응당 호흡을 세는 수식관을 시켜야 옳고, 세탁업을 하던 사람에게는 백골관을 시켜야 할 것인데, 너는 꺼꾸로 성냥간하는 쇠붙이 다루는 사람에게는 백골관을 시켰고, 또 세탁소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수식관을 시켰어.

꺼꾸로 시켰기 때문에 그 수행 방법과 그 사람과의 인연이 맞지 아니해서 그렇게 피골이 상접하도록 정진을 했건마는 도업(道業)은 성취하지 못하고 마침내 사악(邪惡)한 소견을 일으켜서 정법을 비방하게 만들었느니라”

 

그렇게 사리불을 꾸짖으시고, 그 두 백골관하던 사람과 수식관하던 사람에게 이런 설법을 해서 언하(言下)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수행을 해 나가는 데는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던지, ‘아미타불’을 부른다든지 또는 백팔참회(百八懺悔)를 한다든지, 삼천배 예배를 한다든지, 또는 단식을 하고, 묵언을 하고, 또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고, 이러한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고. 또 주력(呪力)을 한다든지, 경을 외운다든지 또는 화두를 참구해서 참선을 한다든지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습니다.

 

있는데, 주력을 해서는 안 될 사람도 있고, 또 참선을 시켜서는 안 될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주력이나 참선을 해서 안 될 사람에게 이것을 시켜 놓으면 얼마 안 가서 미친병이 생기기도 하고, 헛것을 보고 자꾸 정신이 미치고 그래가지고 바르게 닦아가지를 못할 뿐만 아니라, 정법(正法)에 누(累)를 끼치고 사람들로 하여금 회의심을 품게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의 근기(根機) 따라서 때로는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내지 고왕경 같은 그런 경(經)을 외우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 같은 그런 염불(念佛)을 하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옴마니반메훔’이나 그 밖에 무슨 ‘능엄주(楞嚴呪)’라든지 그런 주력을 시킬 수도 있고.

 

대뜸 처음부터서 화두(話頭)를 주어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이 참선법(參禪法)을 해야 할 사람도 있는 것이어서, 또 화두도 ‘시삼마(是甚麼)’라든지, ‘무자(無字) 화두’라든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든지, 그 사람에게 적합한 화두를 간택을 해서 그 사람에게 맞도록 공부를 지어가도록 지도를 해야 할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괜찮은 사람도 있고, 그 사람에 한해서는 주력을 해서는 안 될 그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눈밝은 그러한 선지식(善知識)이라야 능히 중생의 근기를 거울 속 들여다보듯이 보고서 거기에 맞춰서 지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사리불이 두 제자—쇠붙이를 다루는 성냥간 하던 사람이나, 세탁업을 하던 사람, 그 두 사람을 갖다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 사람에게 백골관을 시키나, 저 사람에게 백골관을 시키나, 누구나 수식관은 하면 다 좋을 것이고, 누구나 백골관 하면 다 좋을 것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마는.

부처님의 혜안(慧眼)으로 볼 때에는 그 조그마한 터럭끝 만한 차이로서 도를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 때로는 마침내는 사견(邪見)까지 발동을 하게 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꿰뚫어 보시게 되는 것입니다.

 

 

법왕권실영쌍행(法王權實令雙行)하니  뇌권풍치해악경(雷捲風馳海岳傾)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한데  도가원불섭도정(到家元不涉途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법왕권실영쌍행(法王權實令雙行), 법왕(法王)의 권(權)과 실(實)이 하여금 쌍(雙)으로 행하게 한다.

대법왕(大法王)은 권(權), 방편(方便)으로—팔만사천 가지의 그 좋은 가지가지 방편으로 중생의 근기에 맞도록 방편법을 쓰시고, 그 근기가 수승함에 따라서 그 방편을 거두시고서 실법(實法)으로써 제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편법과 실법을 자유자재로 두 가지를 써서, 뇌권풍치해악경(雷捲風馳海岳傾)이여. 이 뇌성벽력(雷聲霹靂)하는, 그 뇌성이 치고, 바람이 치달아서 바닷물이 넘치고 산이 거꾸러진다 그말이여.

 

법왕(法王)의 권실, 방편법과 실법을 자유자재로 쓰는 그 거동이 마치 번개치고 폭풍이 불고, 바닷물이 넘치고, 그래가지고 산이 넘어지고 하는 그렇게 참 자유자재하며 변화가 무쌍(無雙)하며, 어떠한 업(業)이 두터운 중생, 어떠한 악한 중생이라도 그 법왕의 권실쌍행(權實雙行)하는 앞에서는 다 봄눈 녹듯이 다 녹아져 버릴 것이다.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하면, 그렇게 뇌성벽력을 하고, 바람이 갖다가 폭풍이 불고 바닷물이 넘치고 산이 거꾸러지고 이러다가, 천지를 진동하는 그 벽력 한 소리에 구름은 다 흩어져버리고.

집에 돌아오는데 원래로 길을 걸을 필요가 없다.(到家元不涉途程) 집으로 돌아오는데, 자기의 본고장을 잃어버리고 타향에 방랑객으로서 타향살이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데다가, 이 도 닦아서 자기 본심을, 본 불성(佛性)을 깨닫는 것을 갖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다가 비유해서 표현한 건데.

 

고향집에 돌아오는데 원래로 길을 걸어서 돌아올 것이 없다.

자기 서 있는 데가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자기 고향집이더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이 도를 닦고자 할진대는 먼저 급히 바른 스승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바른 스승만 만나서 그 앞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몸과 목숨을 다 바칠 수 있는 그러한 바른 스승만 우리가 만난다면 도(道)는 걸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다 도를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여.

 

소를 끌어다가 맑고 깨끗한 물 있는 데다가 대준 거와 같아서, 소는 주인이 끌어다가 갖다가 대주면 믿고 꿀꺽 꿀꺽 꿀꺽 양껏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을 믿기 때문에 주인이 갖다가 끌어다가 대준 물이라면 마음놓고 먹을 수 있듯이, 바른 스승 또 내가 믿어지는 스승이라면 한마디 밖에는 더이상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 말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가 전부고, 일생의 수도(修道)가 도 닦는 것이 바로 거기에 다 있는 것입니다.

 

그 선지식을 참으로 깊이 믿고 목숨 바쳐서 믿을 수 있다면, 입으로 법을 설하지 아니해도 먼빛으로 거동만 봐도 온통 화두(話頭)가 독로(獨露)하게 되고, 신심이 돈발(頓發)하게 되고.

웃거나, 울거나, 방귀를 뀌거나, 똥을 싸서 뭉게거나 그것이 하나도 허물로 보이지 아니하고 다못 신심이 돈발하고,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온통 몸과 마음이 한덩어리가 되어버린 것 뿐인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이 무엇을 많이 가르켜 주고, 말을 많이 해 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이 무엇을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 도(道)라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한번 탁! 봐 버리면 되는 것이지, 무슨 어려운 이론을 연구하고 무슨 그러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사무쳐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믿지 않고서는 이것은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초학자(初學者)를 위해서 ‘도 닦아가는 사람이 먼저 바른 스승을 만나야 한다. 바른 스승을 만나서 옳게 공부를 지어 나가야 한다’ 옳게 지어 나갈라면, 첫째 바른 사상이 탁! 중심 잡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바른 믿음, ‘나도 성불할 수 있다. 결정코 나도 도를 이룰 수가 있다’고 하는 신념이 서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과거의 불보살과 모든 선지식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을 지어가지고 대도를 성취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시고 계시는데, 나는 오늘날토록 무엇을 하느라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면서 오늘까지 도를 이루지 못했던가’ 그 분심(憤心)이 속에서 솟구쳐 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선지식으로부터 간택 받은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해서 대의심(大疑心)이 돈발(頓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심과 분심이 밑받침되지 않고서는 대의정(大疑情)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심과 분심이 확고하고 불같은 그러한 뜨거운 신심, 분심이 한목 솟구치지 않고서는 화두를 들어도 들 때뿐이고 금방 돌아서면 없어져버리고, 하루는 겨우 한 듯하다가 이틀 사흘 가면 차츰차츰 풀어져 버리고. 이것이 모두가 다 그 신심과 분심이 철저하게 뒷받침되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째서 화두를 들어도 간절한 의심이 안 나는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진정한 의심이 나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그 점에 있어서 고민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어 볼 것도 없이 신심과 분심이 철저하지 못한 그 까닭이라고 할 것입니다.(34분25초~55분5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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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불도이제자(舍利弗度二弟子) ; 사리불이 두 제자에게 백골관(白骨觀)과 수식관(數息觀)을 잘 가르치지 못하고 뒤바뀌게 가르쳐서 비구들이 여러 해가 지나도록 정(定)을 얻지 못하였고, 이런 인연으로 '열반(涅槃)이나 무루(無漏)의 법이 없다'는 잘못된 소견을 낸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 이러한 사리불의 잘못을 꾸짖으시고 다시 두 사람의 성품에 알맞게 법을 말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도록 했다.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南本, 36권본) 제24권 '22.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 ⑥'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ㅅ/선지식(스승)2020. 3. 12. 17:37

선지식(No.058)—참선, 깨달음은 일상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다 | 선지식의 지도 없이는 깨닫지 못한다 | 공안은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요, 나침반 | 물속에서 "물이 어디가 있느냐?"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 "깨닫기 전에도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하에 화두를 타서 정진을 해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서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지도를 또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21분 24초)

 

[법문]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용058)

 

오늘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는 동지에 대한 말씀과 또 참선, 참선법에 대한 말씀 그리고 불공(佛供)을 드리는 법에 관한 말씀, 그리고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印可) 받을 때에 법담(法談)하신 내용, 그리고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의 고양이 문답 법문,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정말 실참실오(實參實悟), 실다웁게 닦아서 실다웁게 깨달라야만 생사(生死)를 당적(當敵)하는 것이지 간혜(乾慧), 영리해서 이리저리 발라 맞추고 따져서 말 잘하고 그러한 재주 기운 가지고 생사는 면(免)할 수 없다고 하는 말씀으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참선(參禪)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은 탁자(卓子) 위에 모셔 놓은 부처님, 또는 삼천년 전에 정반왕에 탄생하셨다가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신 싯다르타(siddhartha), 석가모니(釋迦牟尼) 그 부처님만이 부처님인 줄 알고.

바로 지금 산승(山僧)은 말을 하고 있고, 여러분은 지금 산승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듣고 있는 그놈, 그놈을 여의고는 '참 부처님'은 안 계신 것입니다. 그놈을 항시 놓치지 말고 그놈에서 자기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놈이 있길래 눈을 통해서 볼 수 있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입을 통해서 말하고 음식을 먹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문을 열매 뜰에는 나무가 섰다. 그 나무를 봄으로 해서 그 나무를 통해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그것이 견성(見性)이라' 하셨습니다.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하 없는 모든 일은 다 할 수가 있어도 한 가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나의 몸으로부터서 부처님을 밖으로 내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만 번 뛰었다 엎쳤다 온갖 짓을 다하고 한다 하더라도 나로부터서 나의 부처님을 밖으로 내몰 수가 없어요.

 

오히려 그 부처님을 안 볼려고 하고 내몰려고 할수록 나의 부처님은 더욱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나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너무 분명하고 가깝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가 아닌 줄 알고 그놈을 내놓고 찾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나의 자성(自性)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뜰 앞에 있는 나무, 누가 못 보는 것입니까?

누구라도 장님이 아닌 도막에는 문을 열면은 뜰 앞에 있는, 뜰에 있는 나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무만 보고, 나무(나)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너무 평범한 것은 우리는 그것이 위대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국왕의 은혜, 국가 민족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다 우리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갚을려고 해도 갚기가 어렵지마는 정말 고마운 것은 공기(空氣)라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무의식중(無意識中)에도 언제라도 우리는 제절로 이 공기가 우리 코를 통해서 드나들고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탄광, 장성에서 탄광에 화재가 나가지고 이번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마는, 그러한 일을 당해 봐야 공기가 맑은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없을 때에는 공기가 얼마나 우리에게 고마움을 주고 있는가를 아무도 느끼지를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 것—언제나 나의 부처, 나의 성품, 나의 마음자리는 이 몸으로부터 조금도 떠나 있지를 않습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입으로 말하고 음식을 먹을 때, 발로 걸어 다닐 때, 울고 웃고 성낼 때 바로 그곳에 '나'가 있건만, 어째서 내가 나를 보지를 못해?

이것은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설명을 들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만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이 무엇이냐?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그동안에 책을 보거나 법문을 듣거나 해서 알고 있는 불교의 모든 지식, 상식, 교리 그러한 것을 고대로 놔버리고 다못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 「이 무엇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각기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그 화두가 같은 분도 있고 다른 분도 계시겠지마는, 다른 분이야 무슨 화두를 받았건 말았건 자기가 받은 그 화두 그것을 이론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저 바보처럼,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는 사람은 길이 빠른 것이고,

영리하고 똑똑해서 자꾸 이리저리 그것을 사량복탁(思量卜度), 중생심(衆生心)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파고들고 비교하고 이러는 동안에 점점 시간만 굴러가고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나쁜 버릇만 자꾸 생겨 가지고 길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동이 소를 끌어다가 맑은 시냇물에다가 끌고 가서 대주면 그저 소는 꿀꺽꿀꺽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듯이 선지식이 '이렇게 하라'하면은 그렇게만 바보처럼 고지식하게 계속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한결같이 그렇게 들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바보처럼 그렇게 하는 사람은 빨리 그리고 크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고, 그 말을 믿지 못해서 그 말이 아무래도 곧이가 들리지 않아서 이 책도 떠들어 보고 저 책도 떠들어 보고, 이리도 따져 보고 저리도 따져 보고 갈팡질팡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뭐 좋은 말이라도 한마디 더 듣고 싶어서 갈팡질팡하면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10년 20년 세월이 속절없이 지내가고 남는 것은 지해(知解), 사량심(思量心)만 더해 가지고 생사를 면하기는 썩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세지총명(世智總眀)은 득도(得道)하기가 어렵다'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말한 영리하고 지능지수가 높고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은 이 정법,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기가 썩 어렵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선지식들도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서 불보살(佛菩薩)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해도 깨닫자 생각지도 아니하고, 나찰(羅刹) 귀신이 와서 죽인다고 해도 두려워할 줄도 모른, 콱! 맥힌 아주 쑥맥 바보가 된다면은 내가 이 자리에서 당장 너에게 생사해탈(生死解脫) 했다고 인가를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도 계시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은 이론을 통해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내고 슬퍼하고 걸어 다니고 하는 이놈. 분명히 눈으로 볼 줄도 알고 귀로 들을 줄도 알건마는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찾아보면 간 곳이 없어. 「이놈이 대관절 무엇인고?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걸어갈 때에도 「이뭣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뭣고?」

기쁜 일을 당했을 때도 「이뭣고?」

산을 보아도 「이뭣고?」

기차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다못 그렇게 일념 일념을 단속해 나가. 1초 1초를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면 결국은 「이뭣고?」를 할려고 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시 눈앞에 나타나게.

이렇게 해서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못 가서 반드시 확철대오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 "깨닫기 전에도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하에 화두를 타서 정진을 해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서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지도를 또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스승 없이 독학할 수도 있고 자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참선은 여러 가지 경전을 사다 놓고, 조사어록을 사다 놓고, 참선에 관한 일본 서적 · 한국 서적 · 중국 서적을 사다 놓고 혼자 이 책 저 책을 읽어 가면서 혼자 자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 명 만 명 속에도 제대로 공부가 되질 못하는 것이고, 만 명 가운데 한 사람도 깨달은 사람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는 몰라도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 없이 깨달은 사람은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위음왕불은 부처님 가운데에 최초의 부처님이십니다.

땅속에서 땅을 파 가지고 금을 찾는다든지, 바닷속을 뒤져 가지고 보석을 찾는다든지 하는 것은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혹 눈에 띄기도 하겠지마는,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은 것은 스승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언제나 나와 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찾으면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것은 화두를 항시 의심을 해서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이지마는, 정말 바로 말하자면 찾음으로 해서 자기를 잃게 되는 소치(所致)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되 선지식의 지도에 의해서 찾아야만, 찾음으로써 잃어버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떠억 앉아서 물을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물속에 풍덩 주저앉아 가지고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는 거와 같은 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 공안은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공안이요, 천칠백 화두라 합니다마는 그 공안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열쇠요, 나침반입니다.

그러나 무슨 소견이 났을 때에는 그 공안은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냐?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냐?'를 시험해 보기 위한 좋은 시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랐다'할 때에 그 사람에게 공안을 하나 턱 물어보면은 그 공안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떠한 표정을 짓느냐?

입 벌리기 전에 벌써 '저 사람은 바로 본 사람이다. 바로 못 본 사람이다.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하는 것을 입 벌리기 전에 선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마는 짐짓 입을 벌리게 해 보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 봤자, 입 벌리기 전에 알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물속에—묻는 사람도 물속에 떠억 앉았고, 깨달랐다고 온 사람도 물속에 같이 들어앉아서 "어떤 것이 물이냐? 물이 어디가 있느냐?"하고 물어본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앉은 줄을 모르고 물을 찾기 위해서 위로 아래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벌써 그 사람 '아! 이 사람이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일체 공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벌써 찾으면 저 죽는 것이고, 찾으면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깨닫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물쇠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하는 것을 깊이 인식을 하시고,

화두를 공부하다가 조금 잘 들리지 아니하고, 의심이 잘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화두가 나빠서 그런가 보다'해 가지고 이 화두, 저 화두 이렇게 화두를 바꿀려고 쌌거나 그래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곧 그렇게 하면은 곧 잘될 것 같지마는 얼마 해 가다 보면은 아무리 해도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마음의 눈 박을 곳을 얻지를 못한 채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몸이 뒤틀리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영 이것이 공부가 되는 것인지 안되는 것인지 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다못 무조건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 해 나감으로 해서 언젠가는 차츰차츰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은 이 알 수 없는 의심 앞에 굴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 줄어지면서 화두 들어지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좋아하지도 말고, 또 화두가 잘 안 들린다고 해서 짜증을 내거나 번뇌심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심한 분은 '아휴, 내가 참선은 내가 인연이 없나 보다' '나는 나이가 먹고, 여자고, 말세중생(末世衆生)이라 참선은 안되나 보다' 이래 해 가지고 다시 염불을 한다든지.

'내가 업장(業障)이 많으니까 기도를 해 갖고 업장을 소멸한 다음에 해야겠다' 이래 가지고 선방에서 몇 철씩 하다가도 기도하러 돌아다니고 이런 분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공부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보다는 영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잘 안될 때, 그때가 한 계단 공부가 올라서려는 그러한 고비에서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잘 고비를 넘겨야만,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잘 넘겨야만 공부가 한층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8분52초~30분1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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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 ; 전강 조실 스님이 수행하시던 1920년대 당시 유명한 혜월 · 혜봉 · 한암 · 용성 · 보월 · 만공 선사를 말씀하신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법담(法談 부처의 가르침 법/말씀·말할 담) ; 불교의 도리에 관하여 나누는 이야기. 또는 그러한 설법(說法). 선사(禪師)들이 본분(本分 : 근본 깨달음本覺)에 대하여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 법화(法話)와 같은 말.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의 고양이 문답 법문' ; 남전참묘(南泉斬猫) 공안.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207칙. 「참묘(斬猫)」 『선문염송 · 염송설화 7』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

(古則) 南泉一日因東西堂 爭猫兒 師遂提起云 大衆 道得則救取 道不得卽斬却也 衆無對 師斬爲兩段 復擧前話 問趙州 州便脫草鞋 於頭上戴出 師云子若在 恰救得猫兒

 

남전(南泉)이 어느 날,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에서 고양이 때문에 싸우자, 고양이를 번쩍 쳐들고는 말하였다. "대중들이여, 말하면 살릴 것이요, 말하지 못하면 베리라" 그러자 대중에서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에 선사가 두 동강 내었다.

 

나중에 이 일을 들어 조주(趙州)에게 물으니, 조주가 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니,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실참실오(實參實悟)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깨달음.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실참(實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무잡(純一無雜)할 수가 없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참고]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서답(書答)」 ‘답노상서(答盧尙書 노상서에게 답함)’에서.

所以古德云 路途之樂 終未到家 見解入微 不名見道 參須實參 悟須實悟 閰羅大王 不怕多語 若要實參實悟 須是從前坐禪處得底 經敎上得底 古人語錄上得底 宗師口頭下得底 有滋味寶悟處 一時掃向他方世界 好字細看

 

그러므로 옛 스님은 ‘길의 즐거움은 종내 집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보고 알아 미세한 데 들어가는 것은 도를 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참구는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염라대왕은 많은 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알차게 참구하여 진실로 깨달고자 하면, 종전에 좌선(坐禪)해서 얻은 것과 경전에서 얻은 것과 고인의 어록에서 얻은 것과 종사의 입을 통해 얻은 것 등에서 자미(滋味)있고 소중히 여긴 깨달았던 경계를, 한꺼번에 다른 세계에 쓸어 버리고 자세하게 살펴야 좋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참고]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상권 ‘흥성사입원소설(興聖寺入院小說)’에서.

若也眞實參學者 參須實參 悟須實悟 始得 且作麽生是實參實悟耶 於二六時中 四威儀內 以生死大事爲念 離心意識 參出凡聖路 學以無心無爲 綿密養之 常常無念 常常不昧 了無依倚 到冥然地 自然合道 不見古人云 無心方見本來人

 

만약 진실한 참학자(參學者)라면 참구는 반드시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한 참구이며 진실한 깨달음인가?

하루 열두 시간과 사위의(四威儀) 가운데서 생사의 큰 일을 생각하되, 심의식(心意識)을 떠나 참구하여 범성(凡聖)의 길을 벗어나고 무심(無心)과 무위(無爲)를 배우고 그것을 면밀히 길러 언제나 무념(無念)하고 항상 어둡지 않아, 마침내 기댈 곳이 다 사라지고 명연(冥然)한 자리에 이르면 자연히 도에 합할 것이다. 고인이 ‘무심(無心)이어야 비로소 본래인(本來人)을 본다’라는 말을 모르는가?

 

*당적(當敵 막다·지킴 당/원수·적·상대 적) ; 대적(對敵)해 능히 감당(堪當)함.

*간혜(乾慧) : 비록 깨쳐서 지혜가 났더라도, 정(定)의 힘이 충실하지 못하면 그것은 마른 지혜라고 한다. 마른 지혜는 죽고 나는 이치를 알더라도, 나고 죽는 데 마음대로 자유자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乾 = 하늘 건, 마를 간)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평상화(平常話) ; ①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②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이야기[話]. 일상생활 이야기. 일상생활.

[참고 ❶]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참선(參禪)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10분2초~11분29초)

 

[참고 ❷]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군금욕심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처음~5분6초)

 

*소지 ; '소제(掃除, 청소淸掃)'의 사투리.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일찰나(一刹那) ; 극히 짧은 순간.

*탁자(卓子) ; ①물건을 올려놓기 위하여 책상 모양으로 만든 가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 ②불상(佛像) 앞에 붙박이로 만들어 두고, 공양물(供養物) · 다기(茶器) 따위를 차려 놓는 상.

*싯다르타(siddhartha) ;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출가하기 전 태자(太子) 때의 이름. 실다(悉多) · 실달다(悉達多) · 실달(悉達)이라고도 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 Śākya-muni (팔리어) 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문을 열매 뜰에는 나무가 섰다. 그 나무를 봄으로 해서 그 나무를 통해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그것이 견성(見性)이라' 하셨습니다.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421칙. 「백수(栢樹)」 『선문염송 · 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51~252.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僧云和尙莫將境示人 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조주(趙州)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선사가 말하였다. "나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노라"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부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도막 ; ①짧고 작은 동강. ②'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사량복탁(思量卜度)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해(知解) ; 상량(商量). 알음알이.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쑥맥 ; '숙맥(菽麥)'의 비표준어.

*숙맥(菽麥 콩 숙/보리 맥) ; ①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의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나온 말로 사리 분별을 못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이르는 말. ②콩과 보리.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소치(所致 것·바 소/이르다·도달하다 치) ; (주로 '~의 소치'의 구성으로 쓰여) 어떠한 까닭으로 일어난[致] 바[所]. 어떤 까닭으로 생긴 일.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사실은 공부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보다는 영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잘 안될 때, 그때가 한 계단 공부가 올라서려는 그러한 고비에서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잘 고비를 넘겨야만,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잘 넘겨야만 공부가 한층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  '공부가 안될 때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고비’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Posted by 닥공닥정
ㅅ/선지식(스승)2019. 11. 15. 10:04

선지식(善知識) (No.122)—첫 일요법회 | 열반경 제행무상게(諸行無常偈) 일화 | 위법망구의 마음가짐 | 도인 81행 | 자기 집안에서 선지식을 찾아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1) 20분 32초.

(2) 10분.

 

[법문] 송담스님(No.122)—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 (용122)

 

(1)------------------

 

오늘은 5월 4일, 양력으로 5월 4일 첫번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그동안은 매달 음력 24일에 관음재법회(觀音齋 法會)를 거행해 오던 것을 관공서나 회사 · 학교에 다니신 분들도 참여하시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양력으로 매월 첫번째 일요일에 변경해서 법회를 거행하게 된 처음 법회 날입니다.

 

이조 오백 년 동안 한국불교는 부녀자들만이 기복(祈福)을 위해서 다니는 그러한 종교로 전락을 해 내려왔습니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해방이 된 뒤로 또 정화불사(淨化佛事)가 일어난 뒤로 남자 분들 또 교수 · 학생 · 지성인들도 불법에 관심을 가지고 믿고 또 실천하는 분들이 이렇데 날로 불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인들도 그전에는 육십, 칠십 먹은 할머니들, 노인들만이 믿는 것으로 그렇게 해 내려왔던 것이 근자에는 여러분들이 보신 바와 같이 젊은 분들 이렇게 많이 불법을 믿고 실천을 하시게 된 것 모두가 대단히 다행한 일일 수 없습니다.

 

오늘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함께 모여서 법회를 갖게 되니 마음이 흐뭇하기 그지없습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께서 『몽산법어(蒙山法語)』를 중심으로 해서 법(法)을 설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관음재법회를 일요법회로 고치는 데는 꼭 모든 남자 분들 또는 직장에 나가신 분들이 참여하시기 위해서 했다고 아까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앞으로 저 법당이 완공이 되면 법당만 해서 백이십 평이 넘는 큰 법당이 이룩하게 됩니다.

그때는 우리가 이렇게 콩나물시루처럼 앉아서 법회를 열지 아니하고 좀 여유를 가지고 줄을 잡아서 앉아서 모두 정식으로 가부좌(跏趺坐) ·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면서 실지로 참선을 30분 내지 1시간, 실수(實修)를 하는 그러한 참선법회로 그렇게 운영을 했으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밤낮 '이 참선(參禪)을 하면 좋다' 이렇게 말씀만 하고 실지로 여러분과 같이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들이고, 앉은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話頭) 드는 법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를 해 드리지 못하고, 댁으로 가셔서 잘 하시기만을 당부를 해 왔었던 것이 항시 마음에 '정말 옳게 하시는지, 자세는 올바르게 하시는지, 또는 호흡은 올바르게 하시는지, 화두는 옳게 들고 계시는지' 그것이 궁금하고, 미흡한 생각을 가져왔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법당이 이룩된 대로 정말 본격적으로 참선을 지도하고 실천을 하시도록 이렇게 법회를 운영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러한 뜻에서 특별히 참선에 대해서, 참선을 본격적으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 설해진 법문(法門)을 골라 봤습니다.

 

맨 처음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읊으신 게송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이 게송은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게송(偈頌)입니다.

 

'제행(諸行)'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모든 현상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귀로 들을 수 있는 것,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것, 일체가 다 제행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무상(無常)하다. 덧덧함이 없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생멸법(生滅法)이다.

났다 없어졌다, 났다 죽었다 났다 죽었다 하는 이러한 생멸(生滅)하는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생멸(生滅),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이 생멸은 우리가 몸담아 있는 이 세계에 삼라만상(森羅萬象)에도 생멸이 있고, 우리의 육체에도 생멸이 있고, 우리의 의식, 우리의 생각에도 생멸이 있습니다.

 

이 세계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 무엇이 생겼다가 잠시 동안 머물렀다가 그것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가지고 마침내는 무너져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주괴공이 있습니다.

이 세계에는 성주괴공이 있고, 우리 육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가지고 늙어서 병들어서 죽는 생로병사가 있고,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이, 물에서 물거품이 포르르르 이렇게 올라오듯이 무슨 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 가지고 그것이 잠시 동안 머물렀다가 다른 생각으로 이렇게 변해 가지고, 변해 발전해 가지고 결국은 다시 꺼져 버립니다.

그 생각이 꺼지자마자 또 딴생각이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래 가지고 잠시 그 생각이 머물러 있다가 또 얼마 안 있다가 다른 생각으로 이렇게 발전하다가 다시 또 그 생각이 꺼지고, 이것이 계속해서 되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에는 성주괴공이 있고, 우리의 육체에는 생로병사가 있고,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이 있습니다.

 

이 생주이멸, 우주의 중심이 바로 우리 낱낱이 우리 자신들이 우주세계의 중심점인 것입니다.

나는, 내가 우주의 근본이고 중심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낱낱이가 요 우주법계의 중심점이 바로 낱낱이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우주가 동서남북 · 상하 · 사유로, 사방 · 사유 · 상하로 시방세계(十方世界)에 입체적으로 벌어져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우주세계가, 무한대로 벌려져 있는 우주세계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건립(建立)이 되어 있는데, 그러면 그 우주세계는 누가 건립을 했느냐 하면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우주세계를 자기가 건립을 해 놓은 것입니다. 자기로 인해서 건립이 된 것이고, 다른 사람 아닌 자기가 건립 된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우주 모든 것은 하나님이 건설을 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불교에서는 바로 이 시방세계는 자기가 건립을 한 것이고,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건립된 것입니다.

 

우주를 손 하나 까딱 아니하고 전체를 가루도 없이 파괴할 수도 있고,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또 우주를 건립할 수도 있는 그러한 신묘한 위력을 우리 자신들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 여하에 따라서 극락(極樂)을 건설할 수도 있고, 자기 마음 한 생각에 그 극락을 지옥(地獄)으로 변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교를 정말 잘 이해를 하시게 되면—경(經)을 보시든지, 참선을 하시든지 해서 참으로 이러한 묘한 이치를 통달하게 되면 이것은 추호(秋毫)도 거짓말도 아니고, 무슨 상상적인 그러한 이야기도 아닌 것입니다.

 

그 생멸법—그런데 세계나, 우리의 육체나, 우리의 생각은 바로 그 생멸법 속에 놓여 있다 이것입니다. 생멸법으로 되어 있다.

왜 그러냐? 우리는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에 이것이 온전히 생멸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어떻게 하면 이 생멸법이 아닌 열반(涅槃)의 세계, 극락세계로 변조 · 개조를 할 수가 있느냐?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생멸심, 생사심(生死心), 바로 그놈이 멸(滅)해 다했을 때 적멸(寂滅)이 되는 것입니다. 적멸, 적멸은 다른 표현으로 열반(涅槃)이라고도 합니다마는.

 

열반이니, 적멸이니 하는 말은 「생사 없는 세계다」 이 말입니다.

생멸이 다했으니까, 생사가 다하면 바로 생사가 없는 열반의 세계가 된다 이런 말입니다.

 

이 게송은 열반경(涅槃經)에 나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과거에 인행(因行) 때에 설산(雪山)이라고 하는 깊은 산중에서 목숨을 바쳐서 도를 닦고 계셨을 때, 아무리 생명을 바쳐서 고행정진을 해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어. 그래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정진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디선지 그 아름답고 묘한 음성 소리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시생멸법(是生滅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러한 게송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눈을 번쩍 뜨고 앞뒤 좌우를 두루 살펴보았지만 그러한 아름답고 묘한 진리의 노래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대관절 이 노래를 누가 읊었단 말인가?'

 

자세히 살펴보니 저만큼, 눈은 부리부리하고 송곳니는 사자 송곳니, 코끼리 송곳니처럼 나온, 사람을 잡아서 날고기로 먹고, 사람을 잡아서 생피를 음식으로 삼는 나찰(羅刹) 귀신이 눈을 부라리면서 두 손을 독수리 손처럼 만들어 가지고 부처님을 노려보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대관절 저러한 극악무도한 나찰 귀신의 입에서 그러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 리는 없겠는데 그래도 생물은 동물,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나찰 귀신밖에 없기 때문에 "아까 그 노래는 과연 니가 읊었느냐?"하고 나찰 귀신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나찰 귀신은 "예? 뭐라고 하십니까? 행자(行者)님, 저는 지금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오냐. 니가 그렇게 배가 고프면 내가 너에게 내 몸을 바쳐도 좋으니까, 대관절 아까 그 노래는 정말 네가 읊었겠지? 니가 그 노래를 읊었다면 그 다음 구절이 있을께 아니냐? 그 노래는 절반밖에는 안 돼. 그 다음 구절을 나를 위해서 읊어다오"

 

"안 됩니다. 나는 배가 고파서 안 됩니다. 나는 배가 고파서 그러한 노래를 읊을 힘도 없고 빨리 당신을 내가 잡아먹어야겠습니다"

"잡아먹어도 좋다. 그러나 그 노래를 먼저 나를 일러줘야 하지 않겠느냐"

 

"못합니다. 먼저 먹어야 일러주지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내 몸을 니 입에다가 넣고 귀만 남겨놓고 그 노래를 읊어다오. 귀가 있어야 그 소리를 들을 거 아니냐? 그 소리만 듣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네 밥이 되어도 여한이 없겠노라"

 

그러니까 나찰 귀신의 입에서 이와 같은 게송이 들려왔습니다.

 

생멸멸이(生滅滅已)하면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그 생멸이 다하면 적멸이 낙(樂)이 되느니라' 그 말을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이 법문을 나만 듣고 깨달음을 얻었거니와, 이대로 나찰 귀신의 밥이 된다면 나를 제외한 모든 중생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자리에서 나무가 되었건, 바위가 되었건 닥치는 대로 이 게송을 써 놨습니다.

그리고서 나찰 귀신을 향해서 몸을 날려서 던졌습니다. 그러자마자 하늘에서는 장엄한 하늘나라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그 무섭고 험악하게 생긴 나찰 귀신은 찰나간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의 모습으로 변해가지고 공경스럽게, 뛰어내리시는 부처님을 받들어 모셨습니다.(처음~20분37초)

 

 

 

(2)------------------

 

우리는 이 열반경에 있는 이 게송의 뜻을 통해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는 내 몸을 잊어버려야 한다. '법을 위해서는 내 몸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하는 도(道)에 들어가는 가장 최초요, 중간이요, 마지막인 그러한 중요한 마음가짐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을 바칠 수 있을 때—자기의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자기 나름대로, 자기 깜냥대로 알고 있는 그러한 선입관,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생불(生佛)이 출현해도 그 사람은 제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입관(先入觀)이라 하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무엇을 듣고 보고 생각하고 해 가지고 자기의 살림을 속으로 딱 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거기에서 생식(生食)을 하고,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별짓 다해 봤자 그 선입관을 버리지 않고서는, 자기의 살림을 탁! 털어서 버리지 않고서는, 공부는 거기에서 중단이 되고 결국은 사도(邪道)에 빠지고만 마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이 우리 생각대로 모습은 부처님과 같이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그 음성은 원음(圓音)이시고 그 모든 점에 있어서 존경을 받을 만큼 그렇게 훌륭하냐 하면, 꼭 그러한 모습으로만 이 세상에 출현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든지 또는 부대사(傅大士)라든지, 역대 선지식들이 출현을 하실 때 팔십일 행(八十一行)으로, 여든한 가지의 가지가지 모습으로 출현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바보 천치로도 나타나시고, 때로는 미치광이로도 나타나시고, 때로는 도둑놈 소굴에서 도둑놈과 한패가 되어서 출현하실 때도 있고, 거지로 출현하실 때도 있고, 심지어는 저런 나찰 귀신과 같은, 사람을 막 생으로 잡아먹는 나찰의 모습으로도 나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러한 바른 선지식을 우리는 친견할 수 있느냐?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선입관을 버리고 참된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자기의 마음을—'참되다'하는 것은 '완전히 비운다'고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완전히 빈 마음, 깨끗한 것은 빈 것 보다도 깨끗한 것은 없습니다.

빈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되었을 때 우리는 도처(到處)에서 선지식을 만나 뵐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달마 스님께서도 『혈맥론(血脈論)』에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스승을 찾되 스승을 모냥으로 보고 구한다든지, 음성을 보고 구한다든지, 이러한 눈을 가지고 선지식을 찾는다면 선지식은 곁에다 두고도 선지식은 만나 뵙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식은 꼭 어느 깊은 산중에나 절에만 가야 그래서 40년 50년 오랫동안 절에 계신 아주 거룩하게 생긴 그러한 노스님을 찾아가야만 된다. 그런 스님 가운데에서 선지식을 찾는다' 그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은 첫째, 자기 집안에서 선지식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와 한솥밥을 먹는, 한 지붕 밑에서 선지식을 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참으로 사랑해 주시고 돌봐주신 부모님이나 시부모님 그런 훌륭하고 인격적으로 존경할만한 분이면 더욱 좋겠고, 자기를 달달볶고 사사건건이 참견을 하고 심지어는 미워하고 꼬타리를 잡어서 자기를 탄압을 하고 핍박을 하고 심할 경우에는 자기를 쫓아낼려고까지 하는 그러한 부모일망정 거기에서 선지식의 한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의 업(業)을 참회(懺悔)하고 웬수로서 상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자기의 참 자기로 돌아갈 때에 자기를 핍박하던 어른이 정말 불보살(佛菩薩) 화현(化現)처럼 느껴지게 될 때에는 그렇게 고약했던 어른이 정말 어떻게 된 것인지 불가사의하게도 불보살의 모습으로 마음이 변해진 것을 느낄 날이 오는 것입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몸을 던져서 나찰 귀신에게 던졌을 때, 그 사람을 잡아먹는 나찰 귀신이 찰나간에 제석천왕이 되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에도 이러한 경험을 그동안에 신행(信行)을 통해서, 부처님을 믿고 염불하고 참선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지로 자기 가정에서 그러한 일을 경험하신 분이 적지 아니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경험을 해 본 사람만이 이것을 알게 됩니다.

 

'가정에서 부처님을 친견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첫째, 자기 마음이 참 진실해지고 자기 마음이 깨끗해지면 법계(法界)가 깨끗해진다고 하는 원각경에 있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까닭없이 자기의 생전 사후를 맡아줄 며느리를 또는 자식을 무엇 때문에 부모가 미워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온전히 이것은 그 원인이 부모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과거에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핍박을 당하게 되기도 하고 또 잘 지은 사람은 그렇게 귀여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어서 원인은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그 원인을 자기가 구명(究明)을 해서 해결하지 아니하고 그 원인은 놔둔 채 자식은 부모에게 그 원인을 전가(轉嫁)를 시키고, 부모는 자식 · 며느리에게 원인을 갖다가 떠넘겨 가지고 미워하고 이런다고 해서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요, 불법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처님을 친견을 하고, 이웃에서 부처님을 친견을 하고, 직장에서 불보살을 친견을 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한 생각 한 생각을 노력을 하고 참되게 단속을 해 나가면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불법을 믿는 보람을 가까운 장래에 획득을 할 수가 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20분41초~30분4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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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재일(觀音齋日) ; 매월 음력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기복(祈福 빌 기/복 복) ; 복을 구하거나 빎.

*정화(淨化) ; 한국불교 정화운동. 1910년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국권을 상실한 한일합병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 1911년 일제는 한국불교를 억압하고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사찰령을 제정·공포하였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승단이 급속도로 세속화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 불교계를 혁신하고 한국불교에 남아있는 식민주의 불교, 왜색불교를 청산하기 위해 1954년부터 1960년대에 걸쳐 일어난 한국불교 정화운동.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몽산법어(蒙山法語) ;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 『몽산법어』가 있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실수(實修) ; 실참실수(實參實修).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수행하는 것. 실참(實參), 실답게 참구(參究)한다는 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을 말한다.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관념에 그치거나 들어서 아는 지식에 그치지 않고 참으로 실천하는 선수행을 말한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 제행무상게(諸行無常偈), 설산게(雪山偈)라고 한다. 번역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니, 이것이 나고 죽는 법이로다. 생과 멸이 다하면은(생멸심이 끊어지면), 적멸이 낙이 되느니라.’

열반경에 부처님 과거 인행(因行) 때에 설산에서 설산동자로 고행을 하고 계실 때, 앞의 두 구절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을 들은 후에, 나머지 게송을 듣기 위해 나찰 귀신으로 변한 제석천왕(帝釋天王)에게 몸을 바친 전생담에서 나온 게송.

*열반경(涅槃經) : [범] Mahaparinirvana-sutra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여러 가지가 있어서, 소승부에 속한 것이 세 가지나 되고, 대승부에 속한 것이 남본(南本)과 북본(北本)이 있다。보통으로 말하는 것은 북본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북량(北凉)의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인데, 13품 40권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석가여래께서 팔십 년의 한 세상을 마칠 때의 설법과 자세한 사연이 적혀 있으며, 특히 부처님의 금강신(金剛身)은 늘 계시어서(常住不滅) 죽음이 없으며, 부처님의 참 수명은  끝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소승의 <열반경>은 주로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으로써, 입멸 전후에 걸쳐 유행(遊行) • 발병(發病) • 순타(純陀)의 공양 • 최후의 유훈 • 멸후의 비탄 • 사리 팔분(舍利八分)등을 주요한 것으로 하고, 대승의 <열반경>은 교리를 주로 하여, 열반이란 사실에 불타론(佛陀論)의 종국과 불교의 이상을 말하였다.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지옥(地獄) : 중생들이 자기가 지은 죄업으로 말미암아 그 과보로 사후(死後)에 가서 나게 되는, 고통이 극한 지하의 감옥을 말한다。 그러나 육신의 사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우리의 마음속에 천당과 지옥이 있는 것이다.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추호도’, ‘추호의’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인행(因行) ; ①수행. (부처가 되기 위한) 인(因)이 되는 행(行). 깨달음을 여는 근본이 된다.

②수행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요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롯이 수행정진하는 것. 보살이 인행(因行)을 닦아서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얻는 것을 수인감과(修因感果)라고 한다.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제석천왕(帝釋天王) ;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 신[天神]들의 제왕[帝]인 샤크라〔釋〕라는 뜻. 제석(帝釋), 석제(釋帝), 제석천(帝釋天), 제석왕(帝釋王), 제석태자(帝釋太子), 천주(天主)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 등으로 음역하고 줄여서 석제환인(釋提桓因, 釋帝桓因) · 제석천(帝釋天)이라 한다.

『법화현찬(法華玄贊)』에서는 “범어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에서 ‘석가’는 성(姓)씨이며 ‘능(能)이라 한역하고, ‘제바’는 ‘천(天)’이라 한역하며, ‘인달라’는 ‘제(帝)’라 한역하니 곧 ‘능천제(能天帝)’라 한다” 뜻으로 보면 ‘석가(능히) 제바(하늘의) 인달라(제왕)’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이 있는데 그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과 32신(神)을 통솔하면서 불법(佛法)과 불제자를 보호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그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그 성(城)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

제석천은 본래 인도 성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 중 벼락을 신격화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서는 범천(梵天)과 함께 호법선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나타나 법회를 수호하고 사바세계 인간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여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동일시하여 숭배하였다.

<잡아함경>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와구(臥具)·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신중탱화(神衆幀畵)에 한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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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깜냥 ; 어떤 일을 가늠해 보아 해낼 만한 능력.

*생불(生佛) ; ‘현실로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는 의미로, 부처님과 같이 덕이 높은 사람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로 고승(高僧 행동이나 덕이 높은 스님)을 찬미하는 호칭이다.

*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원음(圓音) ; 치우침 없는 원만한 음성. 들을 수 없는 이가 없는 음성. 모든 유정이 제각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부처님께서 한 음성[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실 때, 모든 중생이 제각기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평등하게 이해하는 원만한 부처님의 가르침.

*포대화상(布袋和尙) ; 중국 후량(後梁) 때의 스님.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출신. 자기가 자칭하는 이름은 계차(契此)였다. 체구가 비대하고,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배가 불룩하고, 말이 일정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자고 누웠다.

항상 지팡이에 베자루 하나를 걸어 메고, 소용되는 물건은 모두 그 속에다 넣었다. 저자나 마을에 들어갔다가 물건을 보면 달라고 하여, 먹을 것은 무엇이나 주기만 하면 받아 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그 자루에 넣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별호를 지어 장정자(長汀子) 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 불렀다. 혹 사람들에게 무엇을 달라 했다가 돈을 주면 돌려 주었고, 남에게 길흉을 예언해 주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916년 3월에 명주 악림사(嶽林寺) 동쪽 행랑 밑의 반석 위에 단정히 앉아서 게송을 읊었다.

미륵진미륵(彌勒眞彌勒)  분신천백억(分身千百億) 시시시시인(時時示時人)  시인자불식(時人自不識)

미륵 부처님, 참 미륵 부처님이 분신(分身)해서 천백억 부처님이 되었다. 때때로 당시 사람들에게 보이되,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아지를 못하는구나.

 

게송을 마치고 편안히 앉아서 떠났는데, 그 뒤에 다른 고을 사람들은 여전히 대사가 포대를 메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사람들은 포대화상을 미륵 보살의 화현(化現)이라 하여,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참고] [전등록 3] (제27권) (동국역경원 | 김월운 옮김) p459-463 참고.

*도인(道人)의 81행(行) ; 도인의 여러 가지 행에 있어서 81행이 있는데, 「도인의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좋고 궂은 모든 행위가 다 포함될 수가 있다.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광행(狂行) · 영아행(嬰兒行)도 있고, 승행(僧行) · 속행(俗行) · 남자행 · 여자행, 그리고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까지 이르나 도안(道眼, 道의 眼目)이 명백하면 아무 걸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81행 가운데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인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친다.

 

[참고] 『경허집(鏡虛集)』 '여등암화상(與藤菴和尙 등암화상에게 주다)'에서.

達磨大師入唐土 敷演最上乘法 不論誦經念佛持呪禮拜 不論長坐不臥一食卯齋 不論禪定解脫 不論持戒破戒僧俗男女 見性卽成佛 若以誦經等餘外法 妄爲佛法 殺却無罪過

 

달마대사가 당나라에 들어와 최상승법을 폈는데, 경을 읽고 염불하고 주문을 외고 예배하는 것을 논하지 않았으며, 장좌불와 일종식도 논하지 않았으며, 선정과 해탈도 논하지 않았으며, 계(戒)를 지키고 파하는 것이나 승속 남녀도 논하지 않았으며, 자기 성품을 보면 곧 성불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경을 읽는 등이나 그밖의 법을 망령되이 불법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又云 栴多羅見性成佛 不論作殺生業 縱作業 不同他人 業拘不能 白衣見性成佛 不論淫欲 縱有餘習 亦不相妨 洪州云 善亦是心 不可將心還修於心 惡亦是心 不可將心還斷於心 牛頭禪師云 心無異心 不斷貪淫

 

또 "전다라가 견성성불함에 살생업을 지은 것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업을 짓더라도 다른 사람과 달라서 업에 구애되지 않으며, 속인이 견성성불함에 음욕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또한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홍주(마조도일) 스님은 "선(善)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닦을 수 없고, 악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끊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우두 선사는 "마음에 다른 마음이 없으니 탐심과 음욕을 끊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故善知識牧牛 有八十一行 自佛行梵行 乃至有殺盜淫酒等行 而道眼明白 亦無所碍 故潙山禪師云 只貴正眼 不貴行李處 故此法門逈出三乘 汎學者 實不可思議 古有習小乘戒律者 皆誹謗禪師 而如蟷螂捍轍 斥鷃笑鵬 置之莫論

 

그러므로 선지식의 목우행(牧牛行)에 81가지가 있으니,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 이르기까지 도안(道眼)이 명백하면 아무 구애될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산선사는 "다만 안목이 바름만 귀하게 여기고 행리(行履)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법문은 삼승을 멀리 벗어났으니, 범범하게 배우는 사람은 실로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 소승의 계율을 익힌 이들은 모두 선사를 비방했으나 이는 버마재비(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고 뱁새가 대붕(大鵬)를 비웃는 격이니, 제쳐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 karma 카르마).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원각경(圓覺經) : [범] Mahavaipulya-purnabuddha-sutra-prasannartha-sutru 1권。 자세히는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당나라 때 불타다라가 번역。 대승(大乘) 원돈(圓頓)의 교리를 말함。 주로 관행(觀行)을 말하다。 주석서 종밀(宗密)의 <대소> 12권, <대초> 13권。<약소> 5권, <약초> 12권.

*구명(究明 연구할·궁구할 구/밝다·밝히다 명) ;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 원인 따위를 깊이 연구하여 밝힘.

*전가(轉嫁 돌릴 전/떠넘길 가) ; 자기의 잘못이나 책임 등을 남에게 떠넘겨[嫁] 옮김[轉].

 

 

 

Posted by 닥공닥정
ㅅ/선지식(스승)2019. 10. 6. 14:11

선지식(善知識) (No.201)—송담 스님의 출가 일화 / 간화선은 모든 중생의 근기에 맞는, 사견(邪見)에 빠지지 아니하고 확철대오 할 수 있는 가장 수승한 법.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20분 46초)

 

[법문] 송담스님(No.201)—1983년(계해년) 춘계산철 해제 법회 (용201)

 

송담이 처음에 출가할 때, 출가하기 전에 학생 때부터 ‘참선을 하면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방에 가서 참선에 관한 책을 여러 권을 구해 가지고, 근데 일본 책인데 구한 책이 마치 조동종 계통의 책을 구했습니다.

 

일본의 도원 선사(道元禪師)는 귀족 출신으로 어려서 조실부모를 해서 출가해 가지고 당나라로 건너가 가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은 것이, 여정 선사(如淨禪師)라고 하는 조동종 계통의 대종장(大宗匠)을 만나가지고 거기서 한 3년 간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아서 일본으로 돌아와가지고 조동종(曹洞宗)의 초조(初祖)가 되었습니다.

 

그 조동종 도원 선사의 어록을 구하고 또 조동종의 참선법 · 교리 · 선학 그런 것을 해설해 놓은, 도원 선사에 대한 연구하는 책을 구하고 그래가지고 그놈을 날마다 읽고 그래가지고 조동종의 참선을 참 여러 달을 내 나름대로 했는데, 그 조동종에서는 임제종(臨濟宗) 계통에 간화선(看話禪)을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법이라 해 가지고 힐난하게 비방하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또 임제종 계통에서는 조동종의 참선을 묵조사선(默照邪禪)이니 해 가지고 대단히 또 조동종 계통의 묵조선을 공격을 하고 해서, 중국에서부터서 임제종과 조동종 간에는 대종사끼리 그렇게 힐난하게 아주 사마외도라고 참 극렬한 표현을 하면서 피차 비방을 하고.

그런데 내가 학생 때 마치 그 조동종 계통의 책을 읽어 가지고 나도 '확실히 조동종 계통의 참선법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간화선은 대단히 나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아무래도 속가(俗家)에서는 도저히 참선을 할 수가 없어요. 여러가지 복잡하고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참선을 할라면은 천상 절로 가서 해야겠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절에를 갔는데, 마치 전강(田岡) 조실 스님이 훌륭하시단 말씀을 듣고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절을 찾아갔습니다.

 

광주 지산동 골짜구니에 들어가면 향로봉 밑에 ‘자운사’라 한 조그만한 암자가 있었는데, 그 절에다가 그해 여름에 전강 조실 스님과 또 종정을 지내신 윤고암 스님, 두 스님이 거기에서 참선방을 하신다 그래 가지고 거기를 찾아가서 방부(房付)를 들였습니다.

내가 꼭 중노릇을 할려고 간 것은 아니고 참선을 할려고 갔는데, 집에서 다 한복을 만들고 그래가지고 식량과 찬대(饌代) 모다 그런 것을 다 준비를 해 가지고 가서 방부를 들이고 그래 있는데.

 

가자마자 조실 스님을 만나 뵈옵고, 나는 거기서는 화두 어쩌고 해도 ‘그건 다 못된 참선을 하고 있다’ 이리 생각을 하고, 나는 내 속으로 조동종의 묵조선(默照禪)을 딱 하고 있는데 조실 스님이 "너는 앉아서 뭣을 하냐?"

"참선합니다"

 

"무슨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그냥, 이렇게 속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소상하니 (말하라 해서) "생각없는 생각으로 관조를 하고 있습니다"

 

"너 조동종의 묵조선을 하고 있구나"

"예, 그렇습니다. 왜 그것이 나쁩니까?"

 

"차라리 참선을 안 하는 것이 낫지, 천하 못쓸 것이니다"

"그것이 왜 나쁜가요? 어떤 참선이 좋습니까?"

 

"화두를 타 가지고 화두를 의심을 해야지, 화두도 없이 그렇게 앉아서 무슨 깨달음에 이르겠느냐"

"그 화두라 하는 것이 화두를 들고 앉아서 깨닫기를 기다리고 앉었는 것이 그것이 어찌 바른 참선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원래부터 우리는 본래 이 자신이 부처고 우리 자성이 있는데, 그 있는 자성을 바로 보기 만하면 관조하기 만하면 고대로 새로 깨달을 것 없이 본래 부처인대, 무엇을 깨달을 것을 기다릴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벌써 시작할 때부터서 소견이 삿된 것이 아닙니까?"

 

내가 조동종 계통에 읽은 책을 본 대로, 있는 대로 다 조실 스님 앞에 내 놓으면서 계속 조실 스님하고 토론을 해서 며칠을 해가지고 며칠 동안을 내가 강경허니 버티다 버티다 내가 딸려 가지고, 결국은 조실 스님한테 항복을 하고 화두(話頭)를 정식으로 타서 참선을 했습니다.

 

 

난 중이 될려고 가지도 않았는데 조실 스님이 장삼(長衫)을 주시면서 입으라고 하시고, 들어가자마자 나를 조실 스님이나 고암 스님이나 거기에 계신 여러 스님네들 또 신도들도 이십 여명 있었는데 모다 나를 스님 대우를 했습니다. 계(戒)도 받지도 않고 또 행자(行者)도 아니죠.

 

그랬는데 나를 ‘은(隱) 수좌, 은 수좌’하고 수좌(首座)로 아주 정식으로 대접을 받었습니다. 장삼을 입고 예불을 하고 또 조실 스님이 어디 법회가 있어서 가시게 되면은 나를 시자(侍者)로 데리고 가시고, 그래서 승속 간에 나를 아주 스님으로 대접을 하고 그래서 참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철을 지냈는데, 그 지내보니까 모다 거기에 모이신 스님네나 모다 정말 이 고봉 스님처럼 목숨을 바쳐서 철두철미하게 정진을 했으면 나도 그것을 보고 발심(發心)을 해서 그냥 그길로 계를 받고 출가를 했을런지도 모르는데,

모다 입선(入禪)하고 방선(放禪)하고 하는데 형식적으로 하고, 방선만 했다 하면은 돌아서서 잡담하고 맨 뭐 못된 소리나 하고.

 

그래서 내 자신이 ‘에이, 이런 데 있으면은 나까지 물이 들겠다’ 그래 가지고 '절에 가서 있을 것이 아니라 다시 집으로 가서 선조(先祖) 산소 밑에 그 산재각(山齋閣)이 여러 군데가 있는데 그런 데 가서 방을 하나 치워 놓고 혼자 생식(生食)을 하면서 차라리 참선을 한 것이 낫겄다’ 이리 생각을 해 가지고 해제를 하고서 짐을 꾸려 가지고 나오니까,

 

조실 스님께서 "아, 중이 될 줄 알았는데 중이 안 되고 가는가?"

"예, 애당초부터 중이 될라고 오지도 않았고, 어디 산재각 같은 데 가서 혼자 생식을 하면서 정진을 좀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 자네가 언제라도 중이 될 때에는 내한테 와서 중이 되어야 하네"

"아, 그렇고 말고요. 되기만 함사 내가 스님한테 와서 상좌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중 될 생각은 아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실 스님이 손을 잡고 이별을 하시면서 "자네가 아무때라도 날 찾아오고 말 것이네" 그러시거든요.

그래도 속으로는 ‘내가 확철대오나 하면 스님을 찾을까, 내가 중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속으로는 생각을 하면서도 각박하게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 "예, 제가 스님을 찾아 오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로 그렇게 하고는 보따리를 짊어지고 집으로 와서 다시 산재각 재실(齋室)을 찾아가서 생식을 하면서 겨울 한철을 지냈습니다.

 

지내고 보니, 절에 있으니까 새벽 3시가 되면 자동으로 대중과 같이 일어나서 같이 정진하게 되고 시간 맞춰서 하니까 참 좋은데, 혼자 가서 하니까 새벽에 영 일어나기가 어렵고,

또 자명종을, 시계를 틀어 놓고 하니까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일어나서 억지로 세수를 하고, 추우니까 이불을 둘러쓰고 앉었으니까는 영 졸음이 퍼오고 참 안 좋다 그말이여.

 

조실 스님을 모시고 있으니까 아침마다 법문을 듣고, 그때도 조실 스님이 꼭 『초발심자경(初發心自警)』 법문을 설하시고 그래서 법문을 듣고, 또 법회가 가끔 있어서 또 법문을 듣고,

또 대중과 같이 하니까 해태심(懈怠心)을 낼라야 낼 수가 없고 그래 좋더니, 혼자 있으니까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헐라고 해도 그 혼침(昏沈)을 막기가 어렵고, 해태심이 나서 억지로 이를 갈아붙이고 해도 잘 안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다시 내가 결심을 하기를 '내가 천상 이 공부를 헐라면은 싫거나 좋거나 가서 출가를 해서 중이 되어야겠고, 일단 중이 된 이상에는 남이야 공부를 하거나 말거나, 잡담을 하거나 말거나, 술을 먹거나 담배를 먹거나 고기를 먹거나, 무슨 별 못된 짓을 하거나 말거나, 남의 흉을 보지를 말아야겠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고 해태를 할수록에 나는 더 분심을 내고 더 신심을 내서 공부를 해야겠다. 그러니 그 시비에 내가 말려들지 아니하고, 잡담하고 그런 데 내가 말려들지 아니할려면 묵언(默言)을 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가 아직 학교를 졸업을 채 못한 때인데, 그때 집안에선 모다 다니던 학교니까 졸업하고 절에 가도 늦지 않으니까 졸업을 마치고 가라 그래서, 그래서 다시 학교에 들어가가지고 그럭저럭 그냥 졸업을 하고는,

졸업한 날 학교 이발소에 가서 면도로 머리를 싹 깎어버리고는 그길로 절로 가서 조실 스님을 찾아가서 뵈옵고, 가니까 마침 고암 스님도 계시고 조실 스님도 계시고 해서 거기서 며칠 사이로 그저 가사 · 장삼을 준비를 해가지고는 계(戒)를 받았습니다.

 

받고 나서 며칠 안 있다가 묵언을 하고 그렇게 정진을 했는데, 근기(根機)가 원래 둔하고 약해서 고봉 스님처럼 그렇게 철저히 정진을 못하고, 묵언을 하면서도 온갖 시비에 다—자연히 뭔 말을 하면은 손짓 발짓을 하고 뭐라고 써서 문답을 하고, 그렇게 철저히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한 과거를 생각해 볼 때에 ‘선지식(善知識)을 여의고서는 이 공부는 못할 것이다’한 것을 알고.

 

조동종은 원래 그런 무슨 삿된 종파가 아니고, 육조(六祖) 스님 밑에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라고 하는 큰 도인이 있었는데, 그 청원행사 선사 밑에서 벌어지는 종파가 이 조동종입니다.

임제종은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 밑에서 벌어졌고, 조동종은 청원행사 선사 밑에서 벌어진 동산(洞山) 선사나 조산(曹山) 선사, 그런 대선지식 밑에서 벌어진 종파로써 전혀 삿된 종파가 아닙니다.

 

아닌데, 왜 묵조사선이라고 하냐?

 

선학사(禪學史)적으로 본다면은 오히려 조동종이 임제종보다도 더 사형(師兄)이기 때문에 조동종이나 그 선학사상(禪學史上)으로 볼 때에는 조동종이 오히려 달마 스님으로부터서 내려오는 정통이다. 이렇게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에는 이 조동종 계통의 종파가 정식으로 내려오지를 못했습니다.

조동종이 내려오지를 못하고 임제종이 계속해서 계계승승해서 오늘날까지 내려와서, 그러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사람으로서 조동종 계통의 묵조선을 헐라야 내려오는 종사(宗師)가 없어서 천상 묵조선을 할라면은 책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는데, 책을 봐가지고 참선을 한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하는 방법은 알 수가 있지만 공부를 하다가 어떤 소견이 난다든지 경계(境界)가 났을 때에 어떤 종사가 없기 때문에 점검을 받을 수가 없어. 이런 어떤 경계가 났을 때 이것이 옳은 경계인지 나쁜 경계인지 알 수가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옳게 해 가면서도 그른지 옳은지 의심을 끊틀 못하고, 잘못된 경계가 나타나도 그것이 옳은 경계인 줄 알고 거기에 그대로 나간다면은 정말 삿된 소견에 떨어져서 자기도 그르치고 자기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도 그르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말이여.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아닌 것을 생각하라’ 조동종 계통의 어록을 보면 공부하는 방법을 그렇게 표현을 했다 그말이여.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아닌 생각을 생각하라’ 무슨 말이여?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아닌 것을 어떻게 생각해?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 믿어지는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 가지고, 아까 고봉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단(丹), 단을 얻어가지고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목숨 바쳐서 정진을 여법히 하지 않고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앞으로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과 같은 또는 달마 스님과 같은 그러한 대종사가 나오셔서 우리 중생의 근기에 맞춰서 이 간화선보다도 더 훌륭한 법을 개척을 해서 지도를 하신 때에는 몰라도, 그러기 전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보다도 더 수승한 모든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는, 사견(邪見)에 빠지지 아니하고 확철대오 할 수 있는 법은 아직까지는 없다고 산승(山僧)은 믿는 바입니다.

 

‘과거에, 무슨 육조 스님 이전에 무슨 화두란 소리가 어디가 있느냐?’

좁은 소견으로 내가 삼십 여년 전에 국집(局執)했던 그러한 생각이 떠올라서, 마치 오늘 고봉 스님의 단(丹)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확철대오 할 수 있는 그 단(丹)이라고 하는 법문이 나왔기에 지나간 일을 더듬어서 여러 대중께 말씀을 드렸습니다.(31분2초~51분4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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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종장(宗匠 근본·우두머리 종/장인·우두머리 장) ; 수행한 바가 다른 이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여 법맥을 이어받은 고승(高僧).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조동종(曹洞宗) ; 중국의 선종은 달마(達磨)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때의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 크게 성했다. 조동종은 이 혜능 문하인 청원행사(靑原行思)의 계통으로부터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와 그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 839-901)에 의해 형성된 종파이다.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은 자신이 본래 부처의 청정한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묵묵히 좌선만 하면 저절로 그 청정한 성품이 드러난다는 묵조선(默照禪)을 선양하였다.

 

이 이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법안 문익(法眼文益)선사의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 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동」은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동이겠지만, 「조」는 동산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이 그 종지를 크게 밝혀서 완성한 때문이라 하는 말도 있다. 중국의 문법에 선후와 시종을 거꾸로 붙이는 전례가 아주 없는 바도 아니지만 제자의 이름을 스승의 이름 위에 놓은 것이 당연한 경우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송나라 이후에는 조계산(曹溪山)의 「조」로써 육조의 바른 갈래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왔다. 또한 조산 본적의 조산도 조계산을 사모하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것이다.

 

그 가풍은 정편 오위(正偏五位)를 세워서 아주 세밀하고 말과 행실이 서로 일치하고, 이치와 일이 무르녹게 합하여, 본래면목으로써 종지(宗旨)를 삼는다.

일본의 조동종은 도원(道元: 1200~1253)이 1223년 송나라에 들어가 중국 조동종의 선승인 여정(如淨)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계승하였다. 도원 선사는 1227년 귀국하여 일본에 조동종을 전파하였다.

*초조(初祖) ; 한 종(宗)을 처음 세운 스님.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하였다.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마외도(邪魔外道) ; 불법(佛法)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외도. ‘사마’란 삿된 마구니라는 뜻으로 불도(佛道)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을 장애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인데, 외도 중 삿된 견해로써 불도 수행자를 어지럽히는 자를 사마외도라 한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묵조사선(默照邪禪) ;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한 공부. 이것은 깜깜한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찬대(饌代 반찬 찬/대금 값) ; 반찬값. 반찬(飯饌) 값[代].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장삼(長衫) ; 스님의 웃옷.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를 넓게 만든다.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시자(侍者) ; ①시중(侍從)을 드는 사람. ②스승, 장로를 따라서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승(高僧)의 가까이서 시중을 들고 명령에 따르며, 항상 용무를 다하는 제자를 말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재각(齋閣) ;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

*선조(先祖) ; 한집안에서 윗대의 조상.

*생식(生食) ; 음식물을 익히지 않고 날로 먹음. 또는 그런 음식.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 고려 중기 보조지눌(普照知訥)이 지은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신라의 원효(元曉)가 지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고려 후기 야운(野雲)이 지은 《자경문(自警文)》의 세 가지의 글을 합쳐서 한 권으로 엮은 책.

《계초심학인문》은 불교에 입문한 초심 행자가 알아야 할 범절과 수행에 관한 내용이고, 《발심수행장》에는 수행에 필요한 마음가짐이 적혀 있고, 《자경문》에는 수행인이 스스로 일깨우고 경계해야 할 내용이 담겨 있다.

*해태(懈怠 게으를 해/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육조(六祖) : (638 ~ 713)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 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 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스물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고 지었다. 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십팔 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칠십육 세로써 입적하였다。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청원 행사(靑原行思) : (? – 740) 속성 유(劉)씨。강서성 길안부(吉安府) 여릉현(廬陵縣)에서 났다。어려서 출가하여 깨친 바 있어, 조계(曹溪)에 가서 육조의 인가를 받고, 대중의 상수(上首)로 있었다.

그리하여 육조 문하의 장로(長老)이더니, 뒤에 그 고향인 길주(吉州) 청원산 정거사(青原山靜居寺)에서 교화하였는데, 육조가 열반한 뒤에 학자들이 그 곳에 많이 모였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8년에 입적하였다.

*남악회양 선사(南嶽懷讓禪師) ; 『육조단경(六祖壇經)』 참청기연품(參請機緣品)에서.

懷讓禪師  金州杜氏子也  初謁嵩山安國師  安發之曹溪參扣  讓至禮拜

師曰 甚處來  曰 嵩山  師曰 什麼物 恁麼來  曰 說似一物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曰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師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西天般若多羅 讖汝足下出一馬駒 踏殺天下人 應在汝心 不須速說  讓豁然契會 遂執侍左右一十五載 日臻玄奥 後往南嶽 大闡禪宗 敕諡大慧禪師

 

회양 선사는 금주 두씨의 아들이다. 처음 숭산의 혜안 국사를 뵈니 혜안 국사는 조계로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회양 스님이 찾아뵙고 예배하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육조) “어디에서 왔느냐?”  (회양) “숭산에서 왔습니다”

 

(육조)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회양)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

 

(육조) “도리어 닦아 증득할 수 있느냐?”  (회양) “닦아 증득함은 없지 없지 않으나 오염은 없습니다”

 

(육조) “다만 오염되지 않는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호념(護念)하는 바이라 네가 이미 이와 같고 나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서천의 반야다라 존자가 너의 발 아래 한 망아지가 나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예언을 하셨으니 네 마음속에 두고 모름지기 함부로 말하지 말라"

 

회양이 훤칠하게 깨우치고는 육조 스님을 15년 동안 모시면서 날이 갈수록 공부가 깊어졌다. 뒷날 남악으로 가서 선종(禪宗)을 크게 떨쳤다. 왕이 대혜선사라 호를 내렸다.

*사형(師兄) ; 한 스승 밑에서 자기보다 먼저 그 스승의 제자가 된 스님를 높여 이르는 말. 법형(法兄)이라고도 한다.

*종사(宗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조사(祖師)와 같다.

*언어도단(言語道斷) ; 말할 길이 끊어졌다는 뜻으로, 어이가 없어서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 ‘말이 안 됨’으로 순화.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단(丹) ; 신약(神藥, 신통할 정도로 효험이 있는 약). 여기서는 중생의 무량겁 업장(業障)을 녹이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달을 수 있는 약, '화두(話頭)'를 말한다.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 ①깨달음과 중생제도의 중대한 부처님의 임무. ②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인연 ③부처님이 정도,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여러가지 방편으로 이끌어, 모두 구한다고 하는 중대한 인연. 일단인연(一段因緣)이라고도 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고봉 스님의 단(丹)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확철대오 할 수 있는 그 단(丹)이라고 하는 법문' ; 송담스님(No.201) ‘고봉스님’ 법문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Posted by 닥공닥정
ㅅ/선지식(스승)2019. 7. 28. 14:36

선지식(善知識) (No.086)—전강 스님의 선지식 정화 | 전강 스님에게 마지막 관문을 통과시키게 하는 법을 쓰신 만공 스님의 지도.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19분 51초)

 

[법문] 송담스님(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78.08.27)(용086)

 

입추(入秋)가 지나고 처서(處暑)가 지났는데 아직도 잔서(殘暑)가 혹심(酷甚)해서 대단히 더웁고 훈증(薰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오늘 7월 관음재(觀音齋)에 여기 사부대중께서 많이 법회에 참석을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모다 제방(諸方)에서 해제(解制)를 마치시고, 석 달 동안 그 더위를 이겨내면서 용맹, 가(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시고 해제를 마치고 오신 모다 납자(衲子) 스님네 그동안 정진하시느라고 대단히 노고가 많으셨을 줄 생각합니다.

 

오늘은 전강 조실 스님의 6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印可) 받으신 내용에 대해서 법문이 계셨습니다.

 

원래 참선(參禪)은 처음 시작할 때에도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해 가지신 선지식으로부터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서 참선을 시작해야 하고 또 그러한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정진을 해야 하고 정진을 한 끝에 무슨 소견이 나거나 얻은 바가 있을 때에도 반드시 그런 바른 정법(正法)을 갖으신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達摩)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고, ‘스승 없이 깨달은 사람은 만 명 가운데에도 드물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걸어가는 길도 가다가 두 갈래 세 갈래 길이 나오면은 반드시 그 길 아는 사람에게 물어야만 자기의 목적지에 어김없이 도착할 수가 있거든,

 

하물며 눈으로 보이지 아니한 마음으로 가는 이 도(道), 참선이야말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선각자(先覺者)의 바른 지시 없이 자기 마음대로 공부를 지어간다든지,

바른 안목을 갖추지 못한 그러한 분에게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백 명이면 백 명, 만 명이면 만 명, 중간에 가다가 주저앉거나 또는 곁길에 빠져서 헤매거나, 삿된 길에 떨어져서 영원히 자기 신세를 망치고 남을 망치고 그리고 불법(佛法)을 망하게 할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전생에 얼마나 도를 많이 닦으셨는지, 아마도 전생에 불보살(佛菩薩)이나 위대한 조사(祖師) 스님네가 말세(末世)의 정법을 선양하기 위해서 화현(化現)으로 나타나신 그러한 성현이신, 필시 그러한 어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23살의 젊은 연세로 견성(見性)을 하셔서 한국의 여섯 분의 큰 선지식으로부터 차례차례 인가를 다 맡으시고,

거의 지리산, 태백산을 위시(爲始)한 명산대찰에 선지식들을 차례차례 다 만나시고 강사가 되었건, 선사가 되었건 조실로 계신 분은 닥치는 대로 법(法)을 거량(擧揚)을 해서 거의, 확철대오 하지 못하고 선지식 노릇하고 계신 그러한 분들 모조리 다 색출을 해서 소탕을 해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때 당시 태백산에 8대 도인(道人)이라 해가지고 태백산 골짝 골짜구니마다 도인이라 해가지고 도인 노릇을 하고 있는 그런 가짜 도인들을 전부 다 이 법문답(法問答)을 통해서 다 스스로 도인의 감투를 벗어버리고 조실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는 없도록 그렇게 하셔서 노상 박 금봉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식 정화(淨化)를 전강 스님이 하셨다”고 이렇게 노상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금봉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스님은, 전강 스님은 일생동안을 차라리 조실 자리에 앉지 말고 납자의 위치에서 일생을 지내셨으면 참 좋았을 것을 그랬다”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하고 여쭤 봤더니 “납자의 위치에 있으면 얼마든지 어떠한 선지식이라도 가서 법거량(法擧揚)을 해가지고 정화를 할 수가 있는데, 스스로 조실(祖室)의 위치에 앉게 된 뒤에는 조실의 체모(體貌)가 있어서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근자에 와서 선지식의 인가도 없이 절절이 많은 조실들이 지금 한국에 수십 명의 조실 스님이 계십니다. 이럴 때에 정말 확철대오 했고 또 선지식으로부터 분명히 인가를 받은 그러한 조실이라야 정말 학자(學者)를 바로 제접(提接)해서 정법을 유통해 나갈 것이어늘, 자기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선지식의 분명한 인가도 없이 조실의 책임을 띄고서 많은 후배들을 그르치고 있지 않느냐.

 

이럴 때에 전강 스님이 그러한 정화를 다시 한번 해주어야만 말세의 정법이, 불법이 바른 것과 삿된 것이 깨끗이 가려질텐데 전강 스님이 조실의 명예를 띄고 그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제 선지식 정화를 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이 참 안타깝다” 이러한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6대 선지식으로부터 차례차례 다 인가를 받고서 마지막 판에 만공(滿空) 스님 회상(會上)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가서 떠억 절을 하시니까 “십마물(什麽物)고? 무슨 물건인고?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와서 절을 허는고?” 다시 한번 일어서서 떠억 절을 하시니까 “무슨 물건이여?” 또 물으신다 말씀이여.

그래 조실 스님께서는 주먹을 들어서 만공 스님 앞에 턱 이렇게 들었습니다. “어허! 습기를 버리지를 못했구나” 만공 스님께서 그렇게 점검을 하셨던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자신(自信)이 만만(滿滿)해서 쪼끔도 막힐 바가 없고, 의심이 없으셨건마는 그날 이후로 계속 만공 스님 회상에 머물러 계시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전강 조실 스님의 하시는 말씀, 하시는 거동에 대해서 만공 스님께서는 인증을 하시지 아니하고, 사사건건이 전강 조실 스님을 비웃고, 놀려 대고 이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뭐라고 입만 벌리시면 “자네보다는 나어” 도대체 입을 벌리지도 못하게 하시고 비웃고, 조롱하고 해서 그러니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 열흘을 지내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절대로 선지식이 학자를 조롱하실 리도 없고, 속일 리도 없고, 아니기 때문에 아니라고 하시겠지’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정신을 재차 가다듬어서 철봉대(鐵棒臺)를 붙잡고 서서 밤을 지새기를 몇날 며칠, 한 달, 두 달, 이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셨던 것입니다.

 

‘결단코 선지식이 나를 조롱할 까닭도 없고 속이실 리가 없다. 반드시 까닭이 있기 때문에 그러신 것이다’ 이리 생각하시고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하는 화두를 들고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만공 스님을 최후로 만나지 못하셨던들, 만공 스님의 법 쓰시는 것을 정말 깊이 믿지 아니 하셨던들, 조실 스님께서는 꼭지가 덜 떨어진 채로 선지식 노릇을 하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선지식은 정말 학자로 하여금 정말 조끔도 의심 없는 경지에까지 들어가도록 이렇게 대자비를 가지시고 법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참선을 올바르게 하고자 할 때에는 그러한 만공 스님과 같은 그러한 훌륭한 선지식의 지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재삼(再三) 느끼게 됩니다.

 

만공 스님 말고 용성 스님이라든지, 한암 스님이라든지 혜월 스님이라든지 혜봉 스님이라든지, 그러한 선지식들도 다 만공 스님 만큼 그렇게 훌륭한 선지식이셨고, 각기 그 선지식마다 특이한 좋은 점을 장점을 가지고 계셔서 그러한 선지식들도 다 학자로서는 두루 다 찾아뵈어야 하고 지도도 받아야 하지마는,

그 여러 선지식 가운데에도 특별히 만공 스님은 그러한 점에 있어서 학자의 마지막 중요한 관문을 통과시키게 하는 그러한 밝고도 밝은 그러한 안목을 갖으셨던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혜봉 스님께서 “거년(去年) 가난은 비(非)가난이요 무입추지지(無立錐之地)러니, 금년 가난이 시(是)가난이라 추야무(錐也無)로다. 그 공안에 있어서 어떻게 일러야 조사선(祖師禪)을 보았다고 하겠느냐?”

조실 스님께서는 거침없이 “능각이 뾰족하고 뽀족해서 저와 같지 않습니다[稜角尖尖不似他]” 이렇게 대답하심으로써 쪼끔도 의심이 없으셨지마는,

 

후일에 그때 혜봉 스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은 것을 인가해 주신 걸로 알았었던 것을 후에사 그것이 아니라, ‘분명히 내가 그것을 잘못 일른 것이고 혜봉 스님께서 인가해 주신 것이 아니다’한 것을 스스로 깨달으시고 이 용화사에서 연전(年前)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운집(雲集)한 가운데에 그것을 대중 앞에 공포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은 우리의 정진도 일기지사(一期之事)로 느낀 바가 있다든지, 얻은 바가 있다든지, 어떠한 한 분의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고 해서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만한 것을 얻은 것으로써 만족을 삼을 일이 결단코 아니라고 한 것을 다시 또 뼈아프게 느끼게 됩니다.

 

진리는 한(限)이 없이 높고 크고 깊은 것이어서 우리가 정진하는 가운데에 조그마한 쪼끔 느낀 바가 있고, 어떤 공안에 맥힌 바가 한두 공안에 통과한 바가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족(足)함을 삼고 살림을 삼고 주저앉아서는 아니될 줄 생각합니다.

 

‘옳다! 인자 되었다!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 그 사람은 기껏 옳게 공부를 해 가다가 거기서부터 비뚤어 가는 것이 되는 것이고, 계속 정진을 해 나가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되는 것이고,

좋은 제호(醍醐), 우유로 만들어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바로 제호라고 하는 음식인데, ‘그 좋은 맛있는 제호상미(醍醐上味)를 변질케 해서 독약으로 만드는 격이 된다’고 고인이 말씀하신 뜻이 얼마나 뼈아프고 소중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가운데에 스님이 되었건 또는 거사가 되었건 또는 청신녀가 되었건 참으로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고자 하신다면 바른 선지식을 찾아서 올바른 지도하에 공부를 하실 것이고,

공부하시다가 어떠한 종류의 얻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눈밝은 선지식의 점검을 통해서 씻어버릴 것은 씻어버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다시 올라서야 할 사람은 다시 올라서도록 간곡히 부탁을 드리는 바입니다.(처음~20분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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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 ; 일 년 중 늦여름 더위가 물러가는 때. 이십사절기의 하나. 양력으로 8월 23일경이며, 더위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며 벼가 익는 시기이다.

*잔서(殘暑 남을 잔/더울·더위 서) ; 늦여름의 한풀 꺾인 마지막 남은[殘] 더위[暑].

*혹심(酷甚 독할·심할 혹/심할 심) ; ①정도가 가혹(苛酷)하고 심(甚)함. ②매우 지나침.

*훈증(薰蒸 불피움·태울 훈/찔 증) ; ①불피워 태우고[薰] 찜[蒸]. ②찌는 듯이 무더움.

*관음재(觀音齋) ; 관음재일(觀音齋日). 매월 음력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제방(諸方) ; ①모든 지방 ②모든 종파의 스님.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정법안장(正法眼藏) ; 부처님의 바른 교법이라는 뜻.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모든 것을 간직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체득한 깨달음을 뜻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〇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전강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http://emokko.tistory.com/231)’ 참고.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법거량(法擧揚 법 법/들 거/나타낼·밝힐 량) ;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禪) 수행자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법문답(法問答) ; 법거량(法擧揚).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객(禪客)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정화(淨化) ;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함.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체모(體貌 몸 체/얼굴 모) ; 체면(體面). 남을 대하기에 번듯하고 떳떳한 입장이나 면모.

*학자(學者) ; 학인(學人). 도학자(道學者).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제접(提接 이끌 제/응대할·가까이할 접) ; (수행자를) 가까이하여 이끌다.

*만공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http://emokko.tistory.com/231)’ 참고.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언하대오(言下大悟)에서] (용화선원) p53.

*연전(年前) ; 여러 해 전.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참고] 우바새—upasa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수행자를 모시고, 신세를 지므로 이렇게 말한다.

우바이—upasi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 (같은 말=靑信女,近事女,近善女,近宿女)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일기지사(一期之事) ; ①한 때의 일. 일시적인 일. ②당장의 일.

*득소위족(得少爲足) ;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을 삼는다.

*제호(醍醐) : 옛날 인도에서 우유로써 만드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품질이 좋은 것으로 맛이 제일 좋고, 열병(熱病)에 귀중한 약품도 되는 것이 제호다。이것은 히말라야 산에 있는 '비니'라는 풀만을 먹은 소의 젖으로 만든 것이 더욱 좋다고 한다.

*제호상미(醍醐上味) 번성독약(翻成毒藥) ;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74~75. (가로판 p78)

〇然(연)이나  一念子(일념자)를  爆地一破然後(폭지일파연후)에  須訪明師(수방명사)하야  決擇正眼(결택정안)이니라

그러나 한 생각을 깨친 뒤에는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 눈이 바른가를 결택 받아야 하느니라。

    

註解(주해) 此事(차사)는  極不容易(극불용이)하니  須生慚愧(수생참괴)하야사  始得(시득)다  道如大海(도여대해)하야  轉入轉深(전입전심)하니 愼勿得小爲足(신물득소위족)하라  悟後(오후)에  若不見人則(약불견인즉) 醍醐上味(제호상미)가  翻成毒藥(번성독약)하리라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으니 모름지기 부끄러운 생각을 내야 한다。도(道)란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더 깊어 가는 것이니,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 하지 말라。깨친 뒤에 만약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대도정법(大道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Posted by 닥공닥정
ㅅ/선지식(스승)2016. 4. 8. 11:24

선지식(善知識) (No.026)—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 전강 스님의 수행, 깨달음. 만공 스님과의 법거량, 인가.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 마음의 . 선우(善友).

 

(14분 36초)

 

[법문] 송담스님(No.026)—76 동지법문 (76.12.22)(용026)

 

참선을 나가는 데에는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떠한 것이 바른 스승이냐? 실오실참(實悟實參), 실답게 닦아 가지고 실다웁게 깨달라서 바른 선지식(善知識) 인가(印可) 맞아야 한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목구녕에서 선지피가 덩어리 덩어리 맺혀서 쏟아지도록, 그렇게 말로써 형언할 없는 그러한 고행정진을 하셔 가지고, 급기야 확철대오를 가지고서 한국의 6대선지식으로부터서 법문답(法問答) 가지고 인가를 받으셨습니다.

 

조실 스님께서 받으신 인가는오냐, 옳게 알았다. 니가 견성을 했다이렇게 인가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과 법문답을 가지고 선지식이 조실 스님의 깨달은 증득한 힘과 역량이 너무나도 투철하시고 확철대오를 하셨기 때문에 어떠한 선지식도 조실 스님의 밝고 투철한 깨달은 경지에 대해서 무릎을 꿇지 않코서는 배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옳다, 니가 옳다하고 말씀하실 겨를 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러한 다섯 분의 선지식의 인가를 받어 가지고 마지막에 만공 큰스님한테 가지고 만공 큰스님과 법거량(法擧揚) 하셨는데, 만공 스님께서는 중요한 꼬타리를 ! 붙잡으셔 가지고 조실 스님을 인정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처음에는 조실 스님께서는 만공 스님께서나를 떠볼라고, 시험해 볼라고 이러시지 않나?’하고 처음에는 범연(泛然) 그렇게 생각하셨다가 두고 두고 인정(認定) 하시고, 놀리시고, 무시를 하시고, 그러시기 때문에,

선지식이 학인(學人) 그러실 수는 없다.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기 때문에 저러신 것이지, 어찌 선지식으로서 깨달은 학인이 온다면 분명히 깨달은 사람을 깨달았다고 하실 일이지, 절대로 거짓말하시거나, 후배를 농락하실 리는 없다

 

그래 가지고 거기서 생각을 돌이켜 가지고, 철봉대(鐵棒臺) 붙잡고 날새기 공부를 하시면서 그때 하신 화두가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였습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화두를 철봉을 붙잡고 밤이슬을 맞으면서 며칠을 두고 용맹정진을 끝에 확철대오를 하셨던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철봉을 잡고, 남이야 개천가에서 히히닥거리고 장난을 하거나, 잡담을 하거나 그런 것도 불구하고, 어떻게 발심(發心) 하고 () 나서 철봉대를 붙잡고 정진을 하신 가운데,

개천에서무무(無無) 역무(亦無)어떤 도반들이 그런 소리를 지르면서, 가재를 잡으면서 모다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을 보고서 그때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즉시에 무슨 공안(公案) 도리가 나타났냐 하면은 마조(馬祖) 원상(圓相),

마조 스님이 둥그러미를 땅에다가 그려 놓고서 안에 들어가도 치고,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친다이렇게 어떠한 스님에게 법을 물었습니다. 스님이 둥그러미 안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은 가지고 계시던 주장자로 스님을 방맹이 쳤습니다.

맞은 스님이 말이, 조주 스님을 ! 쳐다보면서스님은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조주 스님은 아무 말씀도 하시고,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공안에 대해서 조실 스님께서는 여지없이 간파(看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분이 솟구쳐 나고, 어떻게 말로써 표현할 없는 분이 나던지,

그길로조실로 계시는 만공 스님께서는 이미 보월 스님에게 조실 자리를 물려주시고 당신께서는 금선대(金仙臺) 은퇴하고 계실 때입니다. 증사(證師) 그렇게 금선대에 계시고, 조실에는 만공 스님의 수제자이신 보월 스님께서 조실로 계실 ,

 

조실방에 뛰어 들어가서 보월 조실 스님 앞에다가 원상 떠억 그려 놓고 안에 들어가도 치고, 안에 들어가지 해도 친다고 하셨으니, 말씀 일러주십시오보월 스님께서 원상을 손으로 이리 뭉개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천하 선지식으로서 학자를, 이렇게 천하 학자를 죽일 수가 있습니까. 이래 가지고 조실에 앉어 계실 수가 있습니까?” 고함을 지르면서 그러니까, 사람 보소, 사람 !” 그리고 어리둥절하실 ,

 

그길로 금선대에 쫓아 내려가서 만공 스님 앞에 가서제가 조실 스님을 매장(埋葬) 하고 왔습니다! 세상에 조실에 앉아서 천하 학인의 눈을 그렇게 멀릴 수가 있습니까?” 이래 가지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셨죠.

 

그렇게 해서 전강 조실 스님은 만공 스님께 정식으로 다시 그렇게 해서어디 안에 일러봐라그러니까큰스님께는 이르겠습니다.”

 

옆에 용담 스님이라고 하는, 여러분이 지금 선가귀감(禪家龜鑑) 번역한 것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처음에 용담 스님께서 선가귀감을 번역을 하신 것입니다. 그걸 번역을 했던 것을 근본으로 해서 법정 스님이 새로 교정을 가지고 내놓은 것이 요새 발간해 나오는 선가귀감입니다.

처음에 번역했던 용담 스님이 전강 조실 스님과는 아주 다정한 도반이었었습니다.

 

마치 용담 스님이 옆에 계시는데, 그러면용담, 자네가 묻소그래서 용담 스님이 원상을 떠억 그려 놓고서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노라.” 그러니까는 조실 스님께서 거기서 터억 일르셨습니다. 이것은 설파(說破) 되기 때문에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을 하시지 했습니다.

 

그리고 밖에 처음에 만공 스님한테 가서 절을 하니까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전강 스님께서)주먹을 터억 내미니까는허어, 습기를 면치 못했구나. 아니다! 견성이 아니다. 견성이 아니다이렇게 부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스님, 그때 법을 다시 물어 주십시요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허허허, 보게.”

 

이렇게 해서 그날부터서는 모든 공안에 대해서 정식으로 탁마(琢磨) 허락을 하셔 가지고, 천칠백 공안 낱낱이 만공 스님과 서로 탁마를 가지고,

결국은 만공 스님께서허허, 학자(學者) 선지식 똥구녁에 들어가기도 하고, 선지식이 학자 똥구녁에도 들어간 것일세이렇게 해서 모든 탁마를 마치시고,

 

그래 가지고 조실 스님을 하직을 하고 팔도에 자유자재로 다니시면서 오후보림(悟後保任) 가지고, 말년에 이르러서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말년 회향을 우리를 지도하시면서 마지막 열반하신 그날까지 법상에 올라가셔서 설법을 주시고 열반(涅槃) 드셨던 것입니다.


그러한실오실참(實悟實參) 가지고 바른 선지식의 인가를 맞아야,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우리가 목숨 바쳐 의지해서 공부에, 참선에 지도를 받을 있는 바른 스승이다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지식은, 우리의 도를 지도해 주실 선지식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목수(木手)에다가 비교할 수가 있고, 도를 배우는 학자는 재목(材木)에다가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재목도 좋은데다가 좋은 훌륭한 목수를 만나야 훌륭한 집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물건을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목이 좋고 훌륭한 재목이라 하더라도 목수를서투르고, 경솔하고, 지혜롭지 못한 서투른 목수를 만나 놓으면은 아까운 재목을 버리고 말아 버리는 것입니다. 설사 재목이 조금 좋은 재목이라 하더라도 훌륭한 목수를 만나 놓으며는 상당한 효과를 나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기(根機) 수승하지를 못해서 중근기, 하근기라 하더라도 바른 스승을 만나 가지고 올바르게 지도를 받고, 그래서 올바르게 수행을 한다고 하면은 누구나 자기에게 있는참나 깨달라서 생사해탈을 수가 있는 것이지마는,

우리 근기가 비교적 순수하고, 근기가 수승하다 하더라도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자기는 영원히 깨닫기커녕은 삿된 도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은 깨달은 바가 분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공자님 말씀에소인(小人) 유재자다(有才者多)이라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인놈 가운데 재주있는 놈이 많느니라이런 말씀을 공자님이 하셨습니다.

재주가 있어 가지고, 잘하고 똑똑하고, 영리하고 수단 좋고, 이러한 사람이 소인놈 가운데에소인(小人) 유교에서는 군자(君子) 상대말로 사용합니다. ‘군자가 아닌 소인 속에 재주있는 사람이 많다이렇게 공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불가(佛家)에도세지총명(世智聰明),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가 있고, 총명한 사람은 도에 들어오기가 어렵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바른 선지식을 만나냐, 만나느냐, 만나 가지고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서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하는 바른 길에 들어갈 있느냐, 없느냐의 판가름이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받어 가지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 가지고, 만나기 어려운 선지식을 만나 가지고도 바로 믿지 못하고 갈팡질팡, 그렁저렁 하다가 아까운 세월 보내고, 마지막 죽어 때에 천만 가슴을 쥐어뜯고,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를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155~2942)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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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印可 도장 /옳을·인정할 )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선지피 ; ①선지. 짐승을 잡아 죽여서 받은 . 식어서 굳어 덩어리진 피를 말한다. ②다쳐서 선지처럼 쏟아져 나오는 .

*법문답(法問答) ; 법거량(法擧揚).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객(禪客) 사이에 주고받는 () 대한 문답.

*꼬타리 ; ‘꼬투리(어떤 이야기나 사건의 실마리)’ 사투리.

*범연(泛然) ; ①두드러진 데가 없이 평범하게. ②특별한 관심이 없어 데면데면하게.

*학인(學人) ;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 성자. 수행승. () 닦는 수행승.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철봉대(鐵棒臺) ; 체육 도구의 하나. 기둥 사이에 일정한 높이로 쇠막대를 평행하게 걸쳐 놓은 기구.

*날새기 ; 저녁, 밤을 지나 날이 밝아 때까지 자지 않는 .

*발심(發心) ; ①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원어) 發起菩提心 발기보리심, 發菩提心 발보리심.

*(/忿)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 푸른 ,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 참의(叅意)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5 165원상(圓相)’ 공안.

馬祖因見僧參  畫一圓相云  入也打不入也打  僧便入  師便打  僧云和尙打某甲不得  靠却拄杖  休去.

 

마조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와서 뵙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하고 물으시니, 스님이 원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스님을 후려치니까, 스님이 말하기를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 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참고] 송담스님(No.282)-86 1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2분 19초)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그려 놓고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공안을 물은데 어떤 스님이 안에 들어갔어.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스님을 한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 했습니다. 아무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공안에 스님이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방을 후려치니까 스님이 ()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라 하는데,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 소견(所見)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 되는 것입니다.

*마조(馬祖) 스님, 만공 스님, 보월 스님 ;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역대 스님 약력참고.

*간파하다(看破--) ; 속내(드러나지 않은 일이나 숨겨진 마음) 꿰뚫어 알아차리다.

*용담(龍潭) 스님 ; 생몰년 미상. 성은 (), 법명은 초안(初眼)이며, 용담은 법호이다.

한용운(韓龍雲) 스님의 수제자로, 덕숭산 만공(滿空) 선사의 회상에서 지도를 받아 득의처(得意處) 인증(認證)받았다. 《선가구감》 연구에 골몰하여 완벽한 번역과 풀이를 위해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여러 고승들과 함께 「불교혁신총동맹」을 결성하여 불교혁신운동을 전개하였고, 「선학원」 부이사장, 「해동역경원」 부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 419, 신의주에서 병원을 하고 있던 동생을 만나겠다며 김구 선생과 함께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러 월북하였으나, 소식이 단절되었다.—[선가구감] (용담 스님 역주 | 효림) 편역자 소개에서.

*선가귀감(禪家龜鑑) ; 조선 서산대사가 경전과 어록 중에서 수행의 지침이 선종(禪宗) 중심으로가장 요긴하고도 절실한 부분을 가려 뽑은 불교 개론서.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선가귀감 있다.

*설파(說破) ;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탁마(琢磨 , )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 ②옥이나 따위를 쪼고 .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

*오후보림(悟後保任) ;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 습기(習氣) 제하고 ()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공부. 장양성태(長養聖胎).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 <수심결修心訣>에서.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 범부(凡夫) 미혹했을 사대(四大)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 법신(法身)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靈知) ()부처인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 없고, 무루(無漏)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 비록 본래 성품(本性)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 이루어 성인(聖人) ()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比喩)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모든 기관(諸根)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 되는 것과 같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 집착(執着)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

*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Posted by 닥공닥정
ㅅ/선지식(스승)2016. 4. 3. 15:10

선지식(善知識) (세등선원No.09)—깨닫기 전에도, 또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안목을 갖춘 선지식의 탁마와 오후(悟後)의 지도하에 여법하게 정진해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 마음의 . 선우(善友).

 

(16분 9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세등09)

 

내가 나의 본참공안(本參公案) 여지없이 타파(打破)하고 불조의 허물을 여지없이 꿰뚫어 보게 때에 우리는 반드시 선지식을 그때에 친견을 해서 단련을 받고, 깨닫고 뒤에 우리 공부 지어가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친견을 못하면은 지지리 애써서 좋은 경지에 들어갔다가 거기에서 애석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에마치 제호() 인도에서 가장 영양이 많고 맛있는 음식인데 그런 우유로써 만든 것인데, 제호를 관리를 못함으로써 그것이 변질이 되면은 사람을 해롭게 하는 독약으로 변할 수가 있다 그말이여.

그러한 좋은 맛있는 귀중한 제호와 같은 음식을 얻어 가지고 관리를 잘못해 가지고 독약을 만든다고 해서는 기가 막히게 애석한 일이다.

 

그렇게 애를 가지고 깨달은 경지에 도달을 했다 허드라도 선지식(善知識) 만나서 오후(悟後) 공부 지어가는 구체적인 지도를 받지 못하게 되면은 외도 마구니가 되어 수도 있고, 공부가 지지리 고비에 올라서 가지고 망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선지식을 만나서 지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공부를 해서 어떤 그런 좋은 경지에 올라섰다 하드라도 그것을 ()함을 삼지를 말어야 한다.

 

깨달은 뒤에 만약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은 ()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만나서 철저한 지도를 받아야 한다.

반드시 불조기연(佛祖機緣), 일체 공안에 대한 탁마(琢磨) 해야 하고, 불조의 제자를 지도하는 가운데에 문답이라든지, 역대조사(歷代祖師) 출가해서 도를 닦아서 교화하는 모든 기연상(機緣上) 조금이라도 걸림이 있으면은 이것은 깨달은 것이 옅은 것이여. 그래서 현묘(玄妙)함을 다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현묘함을 다하지 못하고서 일기지사(一期之事)—정진한 사람은 열심히 공부하면 반드시 일기지사가 있는데, 그러한 일기지사로써 만족함을 삼고 현묘함을 다하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원만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까지 해롭게 맨들고 결국은 불법(佛法)까지 망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깨달은 뒤에 반드시 선지식을 만나서 탁마를 하고 정식으로 인가(印可) 받아서 일체 불조기연상(佛祖機緣上) 맥힘이 없도록 이렇게 다음에 터억 자기의 자취를 감추고 철저히 오후(悟後) 보림(保任) 다음에 유교, 불교, 도교의 그러한 심지어 제자백가지설(諸子百家之說)까지라도 한바탕 거쳐서 보고 그래 가지고 다생습기(多生習氣) 녹여야 한다.

 

그래 가지고 원명무애(圓明無碍)해서그저 밝아서 조금도 맥힘이 없어야사, 높이 그리고 멀리 날을 수가 있어서, 빛이 멀고 그리고 넓게 비추어서 자기 자신도 정말 확철대오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데에 맥힘이 없어야 비로소 부처님과 역대조사를 욕되게 허지 아니하고 은혜를 갚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를 여법(如法)하게공부를 처음과 중간과 끝을 이렇게 여법하게 단속해 나가지 아니하고 조금 얻은 것을 가지고 족함을 삼고 여법하게 단속해 나가지 아니한다 하면은 반드시 다시 옛날 깨닫기 이전의 그러한 생활로 다시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말할 때에는 깨달은 같지마는 경계를 당하면은 도로 () 버려. 말이 법도가 없이 미친 사람처럼 취한 사람처럼 말이 함부로 나와 가지고 입만 벌렸다 하면은 큰소리치고, 입만 벌렸다 하면은 입에 담을 상스러운 소리로 세월을 보내고,

어찌 보면 미친 사람 같고, 어찌 보면 도인 같고, 어찌 보면 취한 사람 같고,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사람을 속이고.

 

불법에는 공공연하게 누구에게라도 말을 있는 면이 있고, 함부로 까발쳐서 말을 해서는 되고 은밀히 때와 장소를 가려서 사람의 근기(根機) 따라서 말이 있고, 주어서는 말이 있는 것이여.

함부로 말해 주어서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러헌 사람에게는 말해 주어서는 절대로 그러헌 말씀도 있는 것인데, 그것을 가리지를 못하고 함부로 말을 가지고 오히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신심이 떨어지게 맨든다든지, 오히려 의심을쓸데없는, 망설이는, 주저하는, 갈팡질팡하는 의심을, 회의심(懷疑心) 일으키게 하는 그러헌 경우도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부처님이 팔만사천 법문을 말하셨지마는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말해 주어도 이익이 되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다 그말이여. 반드시 근기와 사람의 현재 도달해 있는 경지에 따라서 말이 있고, 주어서는 말이 있는데, 그것을 가리지를 못한다 그말이여.

그것이 깨달은 뒤에 바른 선지식의 철저하고 직접적인 지도를 받지 못하고, 오후(悟後) 깨달은 뒤에 정진를 올바르게 하지 못하고서 잘못 단속을 함으로써 일어나는 폐단이다.

 

철저히 깨닫기 전에 옳은 선지식의 철저한 지도하에 공부를 하고,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안목을 갖춘 선지식의 탁마와 오후(悟後) 지도를 받아 가지고 여법하게 정진을 사람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 가지고 저도 망하고 남도 망하고 불법을 망해. 모르는 사람이 보면아따, 도인이다. 거리낌이 없고 기가 맥힌 도인이라고 잘못 좋게 판단한 사람이 있지마는,

불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높고, 얼마나 깊고, 얼마나 원만한 것이기에 그렇게 방편을 선방편(善方便) 줄을 모르고, () () 가리지를 못하고, 중생의 근기를 살피지를 못하고서 함부로 인과(因果) 갖다가 부정해 버려.

말을 나투어서 말이 있고, 은밀히 해야 말이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을 가리지 못해 가지고는 죽고, 죽이고, 불법 망하고, 이것이 얼마나 해가 되는 것이냐 그말이여.

 

, 공부라는 것이 깨닫기 전에도 기가 맥히게 중요한 것이지마는 중간에 공부가 잘되어 때에도 참으로 지혜스럽고 자상하고 조심스럽게 단속을 나가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참으로 바른 선지식의 알뜰하고 직접적이고 간절한 지도를 받어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인은 , 그것에 대해서 깊이 명심을 해야 .

 

그리고 공부는 () 없는 것이여. 바다와 같아서 깊이 들어갈수록 한량이 없이 드는(?) 것이여.

부처님하면은 부처님은 공부 하고 인자 끝났으니까 아무 것도 하고, 그것으로써 마지막 도달할 데에 도달했으니까 더이상 곳이 없냐 하면 그게 아니라, 부처님도 한량없이 공부를 나가시는 것이여. 끝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도 끝이 없는 것에 공부라 하는 것이여. 부처님이라고 해서 끝났으니까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여.

 

하물며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서 확철대오 했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어. 깨달은 뒤에도 한이 없는 것이 우리가 나아갈 공부라, 세계에 육도법계에 중생도 없을 때까지 나도 공부하고 중생 교화하고, 중생 교화 하면서 공부하고, 공부가 자리(自利) 이타(利他) 둘이 아니고, 동시에 중생도 없을 때까지 우리의 공부는 끝이 없는 것이여.

 

달마스님이 말씀하시기를부처님의 마음 깨닫는 도리가 우리가 우리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요, 깨닫지 못하면 중생인데, 깨달은 부처님이나, 마음이나, 우리 깨닫지 못한 중생이 조끔도 차이가 없다

부처님하면 우리와는 동떨어진 전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그러헌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마음과 우리 중생이 조끔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성, 본분(本分) 도리(道理) 입각(立脚)해서 보면은 하나도 차별이 없는 것이여. 부처나, 마음이나, 우리 중생이나,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본분 도리에 입각해서는 깨달을 것도 없고 () 것도 없고, () 없고 () 없고, 열반도 없고 조금도 차등이 없는 거여.

우리가 참선(參禪) 하는 것은 차등(差等) 없는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공부하면 반드시 확철대오 있는 능력과 자격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여. 우리는 그렇게 믿고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375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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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화두(話頭) 대한 의심(疑心) 관조(觀照) 나가는 , 없는 그리고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이상 의심이 커질 없고, 이상 깊을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가슴속이 가득 차고,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때에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때에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불조기연(佛祖機緣) : 차별기연(差別機緣) ①중생이 발심하여 구경의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모든 보살이 근기(根機) 단계에 따라 가지가지 방편을 써서 중생에게 작용하는 것。 ②선종에서는 종사가 학자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베푸는 수단으로, 고금(古今) 불조의 언교(言敎)•기연(機緣)•공안 등을 말함.

*탁마(琢磨 / )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 ②옥이나 따위를 쪼고 .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 받아 계승해 대대의 조사(祖師).

*기연(機緣 기틀·기회·작용· /인연·이유·연줄 ) ; ①시기인연(時機因緣) 준말. 어떠한 기회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동기. ②중생의 소질이나 능력이 부처님 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인연, 조건이 되는 . ③가르침을 주고받게 스승과 제자의 인연.

*현묘하다(玄妙-- 검을·깊을·고요할·신묘할 /묘할·신묘할·젊을 ) ; (이치나 기예의 경지가)헤아릴 없이 미묘하다.

*일기지사(一期之事) ; ①한 때의 . 일시적인 . ②당장의 .

*인가(印可 도장 /옳을·인정할 )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오후보림(悟後保任) ;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 습기(習氣) 제하고 ()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공부. 장양성태(長養聖胎).

*제자백가(諸子百家) ; 중국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친 여러 학자 여러 학파를 통틀어 이르는 .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 하며, 학파들을 백가(百家) 부른다. 음양가(陰陽家) 추연, 유가(儒家) 공자와 맹자 순자, 묵가(墨家) 묵자, 법가(法家) 한비자, 도가(道家) 노자와 장자, 병가(兵家) 손자 등이 있다.

*습기(習氣) ; 과거의 인식행위경험학습 등이 아뢰야식(阿賴耶識)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 같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

*여법(如法 같을·같게 ·따를·좇을 /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없는 미혹함)하는 .

*공공연하다(公公然--) ; (사실이)거리낌이나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회의심(懷疑心) ; 어떤 일이 올바른지 확실한지 여부를 의심하는 마음.

*선방편(善方便) ; 선교방편(善巧方便). 방편에 정교한 . 뛰어난 수단. 부처님이 () 설함에, 교묘하게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 여러가지 방법·수단을 사용하는 .

*인과(因果) ; ①원인과 결과. 현상을 생성시키는 것과 생성된 현상. ②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이치. ③선악의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가 있다는 도리.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신분· )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대해탈(大解脫)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첫구절에서 말한  일원상(一圓相)’ 이것을 나타냄이다.

*도리(道理) ; 이치(理致). 생기고 없어지고 변화하는 모든 만유(萬有) 꿰뚫고 있는 법칙.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진리. 진리와 결합된 이론이나 증명. 타당한 이치.

*입각(立脚 /다리 ) ; 어떤 사실이나 주장 따위을 근거로 삼아 거기에 [] 디딤[]( 입장에 )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차등(差等 어긋날·다를 /등급·같을 ) ; 고르거나 가지런하지 않고 차별이 있음.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