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요(전강선사 No.014)—(게송)草屋無三壁 老僧竹床禪 靑山四面雨 定中千年夢 | 신심, 분심, 의심, 삼요(三要)다. 세 가지가 제일 중요허다 | 셋을 꼭 갖춰야 헐 것이니라.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9분 31초)
[법문] 전강선사(No.014)—전강선사 일대기 제7호(경술1970년 12월 10일 새벽.음) (전014)
우리 도인(道人)의 청빈(淸貧) 생활이다. 도(道) 닦는 우리 도인들은 청빈이여. 아주 ‘깨끗 · 맑을 청(淸)’ 자, ‘가난헐 빈(貧)’ 자. 아주 깨끗허고 가난혀.
부귀 밖에, 권리 밖에, 지위 밖에. 향당(鄕黨)도 여의어 버리고, 가족도 다 그만 사별해 버리고 이렇게 외로운, 고독헌 객이 되아 가지고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濶)하고, 산 높고 물 널룬 것을 꺼리지 않고, 관계허지 않고. 집도 절도 없는 것을 도무지 관계없이 모도 이런 데 이렇게 토굴 하나 지어놓고 이렇게 모여서 야삼주삼(夜三晝三)에, 밤이나 낮이나 도 닦는 마음! 이렇게 깨끗허게 도 닦는 마음. 청빈이여! 가난허고 깨끗혀다.
사면(四面)에 무삼벽(無三壁)이다. 사면에 삼벽이 없어. 아무 어디 뭐, 벽(壁)이 서이 다 없으니 뭐가 있는가? 아무것도 없구나! 이렇게 모인 이 자리에서 도밖에는 닦을 것이 없어. 아무리 해 봤던들 도밖에, 도 닦는 마음밖에는 없다. 아무것도 없지.
사면에 우급(雨急)이여. 사면에 들입대 그저 모도 비밖에는 오지 않고, 험악헌 눈밖에는 오지 않어. 비 오고 눈 오는 것은, 모도 그저 이 세상 풍파 속에 사바세계(娑婆世界) 이 모도 그 기가 맥힌 괴로운 속을 말헌 것이여. 정중천년몽(定中千年夢)이다. 정(定) 가운데 가만히 화두(話頭) 하나를 들고서는 천년 꿈같이, 꿈속에, 꿈에 뭐 아무 무슨 세상사에 무슨 뭐 실무애착(實無愛着)이지. 무슨 애착이 있는가?
다맛 정중에서... 인자 무량만겁(無量萬劫) 어서 속히 성불(成佛)해서, 오늘 당장 그만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해서, 오늘 성불해서 그저 곧 중생 제도허면사 그런 다행이 없지마는, 왜 허지 않고, 다맛 철두철미허게 헐지언정, 각(覺) 깨달을 마음을 두느냐. 어서 못 깨달은 걸 한탄하고, 어서 헐려고 급속심을 두느냐. 그러헌 급속심(急速心)도 다 내버리고, ‘늦게 발심(發心)했다’는 마음도 다 그만두어 버리고, 오늘부텀 믿었으니, 오늘부텀 도를 닦는 학자가 되았으니, 닦아 갈지언정...
처억 그 믿는 마음, 제일(第一)에 신근(信根)이다. 처음에 들어와서는 믿는 마음, 철저히 믿는 마음. ‘나 찾는 법을 믿지 않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다시는 이 법밖에 없구나!’ 믿었다. 믿었지마는 분심(憤心), 분헌 마음이 있어야 헐 것이다. 원! 세상에 여태까지 나를 내가 알지 못허고 살다니! 이게 무슨 꼬라지인가. 나를 모르고 살아온 동안이 이거 얼마인지, 몇 년인지, 몇천 년인지, 몇억만 년인지, 시간 뭐 공간 아무것도 알들 못허고는 이렇게까지 미(迷)해 와. 이렇게 미래구의(迷來久矣)여. 안 분헐 수 없지. 참말로 분허다. 분심(憤心).
분심이, 아무리 또 철저히 허지마는 의단(疑團)이 없으면 안된다. 절대 화두를 들고 의심(疑心)이 있어야 하느니라. 화두에 의심이 없으면은 시위대병(是爲大病)이다. 화두에 의심이 없으면은 제일 병이다.
신심, 분심, 의심, 삼요(三要)다. 세 가지가 제일 중요허다. 구궐기일(苟闕其一)이면, 그 하나만 궐해도, 신심이 없던지, 신심은 있지마는 분심이 없던지, 그다음에 의심이 없던지 허면은 세 가지가 다 못쓴다. 세 가지 고놈이 똑같이 중대헌 놈이여. 절족지정(折足之鼎)이 종성폐기(終成廢器)니라. 솥이 발 서이래야 되지, 발 하나만 없어도 못쓴다. 걸어 놓으면 그만 기울어져 버리고 가라앉어 버리고 안 된다. 고 셋을 꼭 갖춰야 헐 것이니라. 도 닦는 디는 고 삼요(三要)여. 세 가지 요긴헌 것이 신심이요, 분심이요, 의심이드라. (처음~9분58초)
*(게송) ‘초옥무삼벽~’ ; 『청허당집(淸虛堂集)』 ‘초옥(草屋)’ 참고.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향당(鄕黨 시골·마을·고향 향/마을·향리鄕里 당) ; 자기가 태어났거나 살고 있는 시골의 마을. 또는 그 마을 사람들.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濶) ; 높은 산 깊은 물도 꺼리지 않고. 憚(꺼릴 탄). 濶(넓을 활). *서이 ; ‘셋’의 사투리. *들입대 ; 들입다(세차게 마구).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언하(言下) ; [주로 ‘언하에’의 꼴로 쓰여]말이 떨어진 바로 그때. 또는 말을 하는 그 즉시.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신근(信根) ; 신(信, 진리에 대한 확신)의 뿌리. 신념(信念,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의 기초. 신근의 근(根)은, 나무뿌리와 같이 능히 유지시키는 것과 생기게 하는 것을 뜻함. [참고] 〇신(信) : ①진리에 대한 확신。 ②신은 마음을 맑게 하고 해태를 막는 정신작용이다。 마치 수정주(水精珠)가 능히 탁한 물을 맑게 하듯이 마음에 신(信)이 있으면 마음으로 하여금 맑게 하는 것이다. 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에 「만약 일체중생이 처음에 삼보의 바다에 들어오매 신(信)으로써 근본을 삼고 불가에 머무르거든 계(戒)로써 근본을 삼으라」하시고, 지도론(智度論)에 「불법대해(佛法大海)에는 신(信)으로 능입(能入)을 삼고 지(智)로 능도(能度)를 삼는다」하시며, 화엄경에 「신(信)은 도(道)의 으뜸이 되고 공덕의 어머니가 된다(信爲道元 功德母)」하신 것이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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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요(No.256)—(게송)법왕권실영쌍행~ | 도를 닦을진댄 먼저 급히 바른 스승을 찾아야 할 것이다 | 도(道)는 자기가 자기를 사무쳐 버리는 것.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〇신심과 분심이 확고하고 불같은 그러한 뜨거운 신심, 분심이 한목 솟구치지 않고서는 화두를 들어도 들 때뿐이고 금방 돌아서면 없어져버리고, 하루는 겨우 한 듯하다가 이틀 사흘 가면 차츰차츰 풀어져 버리고. 이것이 모두가 다 그 신심과 분심이 철저하게 뒷받침되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째서 화두를 들어도 간절한 의심이 안 나는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진정한 의심이 나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그 점에 있어서 고민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어 볼 것도 없이 신심과 분심이 철저하지 못한 그 까닭이라고 할 것입니다.
[법문]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 (용256)
(10분 38초)
법왕권실영쌍행(法王權實令雙行)하니 뇌권풍치해악경(雷捲風馳海岳傾)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한데 도가원불섭도정(到家元不涉途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법왕권실영쌍행(法王權實令雙行), 법왕(法王)의 권(權)과 실(實)이 하여금 쌍(雙)으로 행하게 한다.
대법왕(大法王)은 권(權), 방편(方便)으로—팔만사천 가지의 그 좋은 가지가지 방편으로 중생의 근기에 맞도록 방편법을 쓰시고, 그 근기가 수승함에 따라서 그 방편을 거두시고서 실법(實法)으로써 제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편법과 실법을 자유자재로 두 가지를 써서, 뇌권풍치해악경(雷捲風馳海岳傾)이여. 이 뇌성벽력(雷聲霹靂)하는, 그 뇌성이 치고, 바람이 치달아서 바닷물이 넘치고 산이 거꾸러진다 그말이여.
법왕(法王)의 권실, 방편법과 실법을 자유자재로 쓰는 그 거동이 마치 번개치고 폭풍이 불고, 바닷물이 넘치고, 그래가지고 산이 넘어지고 하는 그렇게 참 자유자재하며 변화가 무쌍(無雙)하며, 어떠한 업(業)이 두터운 중생, 어떠한 악한 중생이라도 그 법왕의 권실쌍행(權實雙行)하는 앞에서는 다 봄눈 녹듯이 다 녹아져 버릴 것이다.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하면, 그렇게 뇌성벽력을 하고, 바람이 갖다가 폭풍이 불고 바닷물이 넘치고 산이 거꾸러지고 이러다가, 천지를 진동하는 그 벽력 한 소리에 구름은 다 흩어져버리고.
집에 돌아오는데 원래로 길을 걸을 필요가 없다.(到家元不涉途程) 집으로 돌아오는데, 자기의 본고장을 잃어버리고 타향에 방랑객으로서 타향살이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데다가, 이 도 닦아서 자기 본심을, 본 불성(佛性)을 깨닫는 것을 갖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다가 비유해서 표현한 건데.
고향집에 돌아오는데 원래로 길을 걸어서 돌아올 것이 없다.
자기 서 있는 데가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자기 고향집이더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이 도를 닦고자 할진대는 먼저 급히 바른 스승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바른 스승만 만나서 그 앞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몸과 목숨을 다 바칠 수 있는 그러한 바른 스승만 우리가 만난다면 도(道)는 걸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다 도를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여.
소를 끌어다가 맑고 깨끗한 물 있는 데다가 대준 거와 같아서, 소는 주인이 끌어다가 갖다가 대주면 믿고 꿀꺽꿀꺽꿀꺽 양껏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을 믿기 때문에 주인이 갖다가 끌어다가 대준 물이라면 마음놓고 먹을 수 있듯이, 바른 스승 또 내가 믿어지는 스승이라면 한마디 밖에는 더이상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 말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가 전부고, 일생의 수도(修道)가 도 닦는 것이 바로 거기에 다 있는 것입니다.
그 선지식(善知識)을 참으로 깊이 믿고 목숨 바쳐서 믿을 수 있다면, 입으로 법을 설하지 아니해도 먼빛으로 거동만 봐도 온통 화두(話頭)가 독로(獨露)하게 되고, 신심이 돈발(頓發)하게 되고.
웃거나, 울거나, 방귀를 뀌거나, 똥을 싸서 뭉게거나 그것이 하나도 허물로 보이지 아니하고 다못 신심이 돈발하고,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온통 몸과 마음이 한덩어리가 되어버린 것 뿐인 것입니다.
선지식이 무엇을 많이 가르켜 주고, 말을 많이 해 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이 무엇을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 도(道)라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한번 탁! 봐 버리면 되는 것이지, 무슨 어려운 이론을 연구하고 무슨 그러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사무쳐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믿지 않고서는 이것은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초학자(初學者)를 위해서 ‘도 닦아가는 사람이 먼저 바른 스승을 만나야 한다. 바른 스승을 만나서 옳게 공부를 지어 나가야 한다’ 옳게 지어 나갈라면, 첫째 바른 사상이 탁! 중심 잡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바른 믿음, ‘나도 성불할 수 있다. 결정코 나도 도를 이룰 수가 있다’고 하는 신념이 서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과거의 불보살과 모든 선지식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을 지어가지고 대도를 성취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시고 계시는데, 나는 오늘날토록 무엇을 하느라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면서 오늘까지 도를 이루지 못했던가’ 그 분심(憤心)이 속에서 솟구쳐 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선지식으로부터 간택 받은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해서 대의심(大疑心)이 돈발(頓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심과 분심이 밑받침되지 않고서는 대의정(大疑情)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심과 분심이 확고하고 불같은 그러한 뜨거운 신심, 분심이 한목 솟구치지 않고서는 화두를 들어도 들 때뿐이고 금방 돌아서면 없어져버리고, 하루는 겨우 한 듯하다가 이틀 사흘 가면 차츰차츰 풀어져 버리고. 이것이 모두가 다 그 신심과 분심이 철저하게 뒷받침되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째서 화두를 들어도 간절한 의심이 안 나는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진정한 의심이 나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그 점에 있어서 고민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어 볼 것도 없이 신심과 분심이 철저하지 못한 그 까닭이라고 할 것입니다.(45분17초~55분55초)
*법왕(法王) : [범] dharmarāja 부처님은 진리, 곧 법을 가장 밝게 깨치시고, 법을 걸림 없이 쓰시고 법을 널리 가르쳐서 법에 있어 제일 높은 어른이므로, 「법의 임금」이라고 존칭한 말이다。또한 모든 세속 임금들에게도 큰 스승이 되고, 온갖 성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므로 법왕이라 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권•실(權•實) : 부처님의 깊은 이치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대번에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방편으로써 처음에는 옅은 이치의 차별법(差別法)을 중•하(中•下) 근기에게 설한 가르침을 권(權)이라 하는데 소승교를 가리킴이요,
나중에는 참된 실상(實相)의 둘 아닌 법(不二法•眞如•平等), 영원히 변함이 없는 구극적(究極的)인 진리법을 설한 가르침을 실(實)이라 하는데 대승교를 가리킨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자유자재(自由自在 스스로·저절로 자/말미암을 유/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인 것.
*자재(自在 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①자기가 원하는 대로인 것.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인 것. 자유자재로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원하는 대로의 경지. ②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 ③자유롭다. 자신에게 의존하다. ④독립. ⑤느긋한 심신의 작용. 잡혀지지 않는 것. ⑥불보살에 갖추어진 힘을 말함.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도 함.
*뇌성벽력(雷聲霹靂) ; 천둥소리와 벼락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고향(故鄕) ; 본래 살던 곳. 본고향(本故鄕). 본향(本鄕).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 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달마혈맥론(達摩血脈論) ;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혈맥론(血脈論)』이라고도 한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〇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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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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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방금 결제 법어로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우리는 경청을 했습니다. 더이상 결제 법문을 산승(山僧)이 법문이라고 설할 것도 없고, 이미 우리는 조실 스님의 그 천지를 진동할만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들었습니다.
산승이 이 자리에 올라와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새로 선방(禪房)에 나와서 방부(房付)를 들인 초심학자(初心學者)를 위해서 몇 마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세 가지 요긴한 것을 갖추어야 한다.
무엇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은 첫째, 대신근(大信根)을 가져야 해. 둘째는 대분지(大墳志)를 가져야 하고, 셋째는 대의단(大疑團)이 있어야 한다.
첫째, 큰 신근(信根), 큰 신심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믿는 것이냐?
내가 바로 부처요, 여법(如法)하게 열심히만 정진을 하면 반드시 깨칠 수 있다고 하는, 고조사(古祖師)와 같이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여.
왜 내가 고조사와 같이 깨달을 수가 있느냐, 깨칠 수 있느냐.
무량겁(無量劫) 전에는 부처님이나 모든 조사나 우리가 다 같이 원각(圓覺), 본각(本覺)으로써의 한 존재였었다 그말이여.
한 생각 무명심(無明心)이 발동함으로 해서 나는 아직까지도 나의 본각을 잊어버린 채 이렇게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을 뿐이지,
이 오음(五陰),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친 이 오음색신(五陰色身) 속에 분명히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면목을 깨닫기만 하면 언제라도 우리는 바로 본고향(本故鄉)에 돌아갈 수가 있다.
그러한 교리상으로도 그러려니와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조사들이 다 그렇게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선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법에 의지해서 열심히만 공부하면 왜 나라고 해서 못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한 대신근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는 대분심(大憤心)인데, 무슨 분심이냐 하면은 '왜 과거에 부처님과 조사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중생을 교화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삼독 고해(苦海)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느냐' 그러한 속에서 끓어오르는 그런 분심을 가져야 한다 그거거든.
그러한 분심이 없고서는 사소한 일에 끄달리고 철저하게 정진할 수 있는 용기가 나지를 않아.
분심(憤心)을 갖느냐, 안 갖느냐에 따라서 아무리 신근(信根)이 철저하다 해도 분심이 없고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여.
평소에는 도저히 그만큼 무거운 것을 들어 본 적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불이 나면 엄청난 무거운 것을 불끈 들고 문밖으로 나가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이 분심 때문에 그러거든.
처음부터 자신(自信)을 갖지 못하고 분심이 없어가지고 그럭저럭 이렇게 지내면 만날 지내 봤자 360일을 동서남북으로 걸망짐을 지고 왔다갔다해 봤자, 언제 그렇게 정처없이 떠돌기만 해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겠느냐.
분명히 자기 고향이 있는 방향을 알고 그 방향을 향해서 자나깨나 그 목적지를 향해서 부지런히 가야할 것이다.
셋째, 대의정(大疑情), 대의단(大疑團)을 가져야 한다.
대의정(大疑情)이라 하는 것은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화두—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話頭),
화두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화두인데, 그 화두가 아무리 많다 해도 그 화두를 자기 멋대로 아무거나 하나 추려 가지고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안된다 그말이여.
자기가 마음대로 취택한 화두는 언제라도 공부가 좀 잘 안된 성 싶으면 자기가 또 바꿀 수가 있어서, 자꾸 화두를 이놈으로 했다 저것으로 했다 바꿔 싸면, 마치 우물을 파는데 여기 좀 끌적거려 봐서 물이 안 나오면 저쪽에 가서 끌적끌적 해 보고, 몇십 군데를 파 봤자 정말 좋은 물을 얻을 수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여.
화두를 이놈으로 했다 안되면 저놈으로 하고, 저놈으로 화두 했다 안되면 한 철 만에 바꾸고 두 철 만에 바꾸고 그러면 종내 그 사람은 큰 깨달음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한번 화두를 탔으면 공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을 전혀 따질 필요가 없어. 잘되어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낼 것이 없고, 잘 안되어도 잘 안된다고 번뇌심을 낼 필요가 없어.
안될수록에 더욱 그 화두를 향해서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 한결같이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서 이 대신근과 대분지와 대의정은 그 중에 하나만 없어도, 세 다리로 서 있는 솥이 그 중에 하나만 부러져도 솥이 넘어져 버리는 거와 같아서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가 없다.
그런데 대신심과 대분지와 대의단을—이것은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하나도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것이다—그러한 것을 염두(念頭)에 항상 가져야 할 것인데.(6분15초~16분29초)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원각(圓覺) ; ‘원만(圓滿)한 신령스러운 각성(覺性)’ 부처님의 원만한 깨달음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 원만한 깨달음의 경지인 청정한 본심을 일컬어 원각묘심(圓覺妙心)이라 한다.
일체의 생명에는 본래부터 깨달음[本覺]이 있고 진심(眞心)이 있어서, 체(體)의 입장에서 그것을 표현을 하면 일심(一心)이라 하고, 인과(因果)의 인(因)을 잡아서 표현을 하자면 그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 표현하고, 인과(因果)의 과(果)로 잡아서 표현을 하면 그것을 원각(圓覺)이라 한다.
*본각(本覺) : 본래 갖추어져 있는 깨달음. 부처님의 본래의 깨달음.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무명(無明) :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
『기신론(起信論)』에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육도윤회(六途輪廻)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오음(五陰) ; 오온(五蘊)의 구역(舊譯).
*오온(五蘊) : 온(蘊)은 무더기•모임•집합•더미를 뜻함.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의 무더기.
①색온(色蘊) : 몸이라는 무더기. 몸의 감각 무더기 ②수온(受蘊) : 괴로움이나 즐거움등, 느낌의 무더기 ③상온(想蘊) :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어내는 생각•관념의 무더기 ④행온(行蘊) :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의지•충동•의욕의 무더기 ⑤식온(識蘊) : 식별하고 판단하는 인식의 무더기.
*오음색신(五陰色身) ; 오온색신(五蘊色身). 오온으로 이루어진 육신[色身 형질을 가진 몸].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본고향(本故鄕) ; 본향(本鄕). 고향.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불급불완(不急不緩) ;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대중 외호(外護)를 잘하고, 불사(佛事)를 많이 하고, 보시를 많이 하고,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지키고, 이런 것도 신심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신심이지만 이 종문(宗門) 중에 있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의 참다운 신심이라 하는 것은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정진만 하면 나도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가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이것이 진정한 대신심인 것입니다.
「나는 말세(末世)에 태어났으니까, 나는 여자니까, 나는 무식하니까, 나는 병이 들었으니까, 참선한들 무슨 확철대오가 있을 것인가? 그저 금생에는 인연이나 맺으리라」 이러한 생각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해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여.
남녀노소도 불구하고, 말세도 불구하고,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나도 결정코 견성성불 할 수가 있다」고 믿는 것이 이것이 진정한 신심인 것입니다. 참선은 그러한 마음 없이 참선해 가지고는 되덜 않습니다. 그 생각이 아주 철저해야 합니다.
「이건 내가 양보할 수가 없다. 나도 기어코 할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목숨을 바쳐야겠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해.
그 다음에는 대분심(大憤心).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을 교화하고 계시는데, 나는 어찌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확철대오를 못하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못했던가」 그것이 분해 가지고 그 분심(憤心)이 솟구쳐 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 분심이 있어야 혼침(昏沈)도 물러가고, 산란심(散亂心)도 물러가고, 저절로 신심이 일어나는 법이고, 사소한 시비에 내가 걸려들 까닭도 없고, 사소한 불평불만이 있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그 신심과 분심이 약하기 때문에 혼침이 일어나고, 산란심이 일어나고, 사소한 시비에 걸려들고 '니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시비가 일어나는 법이지,
밥이 맛이 있니, 지니 되니, 짜니 싱거우니 일어나고, 누가 뭔 말을 하면은 사소한 일에 진심(瞋心)이 일어나고 그러지, 참으로 신심과 분심이 돈발(頓發)했다면 무슨 시비(是非)가 그 앞에 있어?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시간이 가는지를 모르고, 칭찬했다고 해도 좋아할 것도 없고, 누가 나보고 잘못했다고 억울한 소리를 해도 성이 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가서는 대의심(大疑心)이여.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뭣고?' 조주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분은 '무자(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는 사람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는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앉아서도 화두, 서서도 화두, 밥을 먹으면서 한 숟갈 한 숟갈 밥을 떠 넣으면서도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그 생각뿐이여.
세수를 하면서, 양치질을 하면서, 똥을 누면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 있느냐 이 말이여.(30분7초~35분4초)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외호(外護) ; 불법(佛法)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데 힘이 되도록 수행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신(身)·구(口)·의(意)를 보호하는 것을 내호(內護)라고 한다. 내호와 외호를 합하여 이호(二護)라고 한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시비(是非) ; ①옳음과 그름. ②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 또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하는 말다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〇‘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마삼근 (麻三斤) : 화두의 하나。『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대답하기를 『마 삼근(삼 서근)이니라』하였다.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법당에 계신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 사부대중이 ‘이뭣고?’,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시는 분이 많으실 줄 생각을 합니다마는,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에도 ‘이뭣고~?’
다못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무조건하고 그렇게만 참구(參究)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다가 그걸로 이리저리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분석해 보고, 그런 것이 아니여. 이 참선(參禪) 공부에는 일체 철학이나 일체 과학이나 모든 이론이 여기에는 인용되어서는 아니 되고. 여기에 그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서도 아니 되고.
그래서 옛날에 이 공부는 ‘무얼 많이 알고 배우고 하면은 오히려 이 공부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경을 알고, 학교를 많이 다니고 해서 지식이 풍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여기에다가 끌어들여서 그것을 동원하지만 아니하면, 뭐 하등(何等)에 해로울 것도 없지만,
중생의 습기(習氣)라 하는 것이 그렇기가 어려워서 뭘 많이 알면 아는 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놈을 갖다가 끌어들여 가지고 그놈으로 이리저리 분석도 하고, 적용도 해 보고, 종합도 해 보고, 그렇게 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내려 보고도 싶고 이럴 수가 있어서 하는 말이지, 꼭 많이 알면 못 쓴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도 상관이 없고,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고,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첫째는 큰 신심(信心).
‘내가 본래 부처다. 나도 부처님이다. 그러니 어찌 내라고 해서 이 공부를 못할 것이 있는가? 나도 열심히 하면 결정코 성불(成佛)을 할 수 있다’고 하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신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태산(泰山)을 끼고 바다를 건너뛸려고 하는 것은 할 수가 없는 일이여.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내게 본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을 찾는 거와 같고,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자래를 잡은 거와 같아서 손만 넣으면 잡히게 되어 있는 것이여.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하면 바로 거기에 나의 본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라, 올바른 방법으로 참구만 하면 누구라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큰 분심(憤心)을 가져야 하는데, 무슨 분심이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祖師)와 모든 선지식들은 진즉 이 문제를 결판을 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 받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육도(六途) 속에서 이렇게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가.
그 점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을 가져야 해. 분심을 가져야 용맹심이 나고, 용맹심을 내야 퇴태(退怠)를 안 하게 되는 것이여.
분심이 없고 용맹심이 없으면 공부에 아무 매카리가 없어 가지고, 어제도 그럭저럭 오늘도 그럭저럭, 공부를 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여간해서 이 공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을 요달(了達)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손수 머리를 깎어 버리고 6년, 어떤 경전에는 12년이라고 되어있는 데도 있습니다마는, 그 무서운 고행을 하셨고.
달마대사도 소림굴에 들어가서 9년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셨고, 장경(長慶) 스님이라 하는 분은 포단(蒲團)을, 방석을 7개를 뚫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좌선을 지극정성으로 했으면, 궁뎅이로 방석이 뚫어져서 못 쓰게 되면은 또 다른 방석을 가지고 또 정진을 하고, 1년 이태 이렇게 한 방석을 가지고 한결같이 앉아서 정진을 하고 용맹정진을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다 보니까 멀쩡한 방석이 닳고 닳아서 구녁이 뚫어져. 이렇게 하기를 7개 포단을 뚫었다 이거여.
향림(香林) 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어.
타성일편이라 하는 것은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이 독로해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해. 그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했다.
조주(趙州) 스님은 소년 시절에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확철대오해서 견성(見性)을 한 그러한 고불화현(古佛化現)이라고 할 만큼 그런 큰스님인데, 30년에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했어. 잡되게 마음을 쓰지를 안 했다.
이 공부는 이만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이지만 이만한 끈기와 정성과 용기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조금 해 보고 ‘아이고, 그놈의 것 못 해 먹을 지서리다’, ‘인연이 없나 보다’, ‘내가 근기가 약한가 보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고인(古人)은 하루해가 넘으면 ‘오늘도 이렇게 깨닫지를 못하고 하루해가 넘어갔구나’ 이래가지고 발을 뻗고 통곡을 한 스님도 있다고 합니다.
밤에 잘 때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졸음을 깨면서 정진을 한 그런 스님도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습니다.
저녁에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 무거운 돌덩어리를 지고서 지리산을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밤새 다니면서 정진을 한 그런 스님도 있습니다. 그 돌이 지금 지리산 쌍계사 육조 스님 정골탑 앞에 그 돌이 지금도 놓여 있습니다마는.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그렇게 목숨 바쳐서 정성을 들이지 않고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우리는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이고!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일찌감치 그만두고 아미타불(阿彌陀佛) 10번만 불러도 극락세계로 갈 수가 있다는데, 우리 같은 여자가, 더군다나 속가에 있으면서 그 참선은 감히 생각지도 못헐 일이다. 그저 염불(念佛)이나 해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가야겠다'
혹 그렇게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분이 있으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려운 면으로 보자면 그렇고.
쉬운 면으로 보자면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다' 그랬습니다. 세수를 하다 보면 코를 만지지 않을라고 해도 저절로 코가 만져지는 것이여. 내가 나를 찾는 공부가 쉽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운 것이다 그말이여.
밥 먹을 때, 옷 입을 때, 걸어갈 때, 말할 때,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무엇을 들을 때, 바로 거기에 있거든.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찾을라고 함으로 해서 달아나버리고 놓쳐버리는 것이지, 찾을라고 하지 아니하면 언제나 거기에 있거든. 그러니 그것이 쉽다고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26분25초~38분)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 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매카리 ; 매가리. '매가리'는 '맥(脈, 기운이나 힘)'을 속되게 이르는 말.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요달(了達 마칠·완전히 료/통달할 달) ; 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면벽관심(面壁觀心) ; 벽(壁)을 향하여[面] 앉아 자신의 마음[心]을 관[觀]하여 그 본성을 밝히는 것. 좌선(坐禪)의 다른 이름.
*면벽(面壁) ; 좌선(坐禪)의 다른 이름. 벽을 향하여 좌선하는 것.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양 무제(武帝)를 만나 문답하였으나 무제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마침내 물러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의 낙양으로 가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을 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말하지 않고 벽을 향하여 좌선하기 9년을 지냈다. 이를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뒤부터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벽을 향하여 좌선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면벽은 단순히 좌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론 등 문자에 의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관하여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수행법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조주(趙州) : (七七八 – 八九七) 이름은 종심(從諗)이고 속성은 학(郝)씨인데, 산동성(山東省) 조주부(曹州府)에서 났다。어려서 출가하여 남전(南泉) 보원선사(普願禪師)의 법을 받고, 그 문하에서 이십 년 동안 있었다。팔십 세까지 각처로 돌아다니다가(行脚) 비로소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서 학자들을 제접(提接)하기 사십 년。당나라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 일백이십 세에 입적하였다。<어록(語錄)> 3권이 남았고, 그의 교화가 참으로 커서 '조주 고불(趙州古佛)'이라고 일컬었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지서리 ; '짓거리(‘짓’을 속되게 이르는 말)'의 사투리.
*쌍계사 육조 스님 정골탑 ; 경남 하동군 쌍계사에 있는, 신라 성덕왕때 삼법 스님이 중국 선종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두개골)을 모셔와 안치한 석감(石龕) 위에 세운 탑을 말한다.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1) 21분 28초.
(2) 21분 19초.
[법문] 송담스님(No.183)—82년 9월 첫째일요법회(용183)
(1)------------------
무변찰해허명경(無邊刹海虛明鏡)이요 적겁매진광미휴(積劫埋塵光未虧)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종래천성부동진(從來千聖不同塵)헌디 하사횡신성색리(何事橫身聲色裏)인고
나무~아미타불~
무변찰해허명경(無邊刹海虛明鏡)이요. 가없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텅 비고 밝은 거울인데, 그 밝고 빈 거울에 무량겁을 두고 티끌이 쌓이고 쌓여서 그 거울을 티끌로 뒤덮었건만, 그 거울 자체의 광명은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더라.
종래천성부동진(從來千聖不同塵)헌디 하사횡신성색리(何事橫身聲色裏)인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성현들은 그 티끌과 한 가지 하지 안 했어. 시방찰해가 온통 티끌인데, 그 티끌에 조금도 묻지를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는 소리와 빛, 소리와 빛의 티끌 속에 몸을 비겼는고. 티끌 속에 왜 파묻혀서 허우적거리고 있느냐.
오늘은 임술년 9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무더웠던 여름도 다 가고 칠석도 지내고, 백중도 지내고 제법 서늘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슬프고 기쁜, 이 슬픔과 기쁨으로 범벅이 된 인생살이는 한 벼개에 꿈에 지내지 못하고[悲歡一枕夢], 한바탕 꿈에 지내지 못하고, 일생동안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만나는 인생살이도 잠깐 불과 10년 동안에 정, 애정, 인정 얽힌 것에 불과한 것이여[聚散十年情].
말없이 머리를, 고개를 돌이켜 보니[無言却回首] 산마루 위에는 흰구름이 일어나는구나[山頂白雲生]' 이러한 게송을 맨 처음에 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출현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12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갖은 고행을 하시고, 그 가운데 여러 스승을 차례차례로 사사(師事)하고 차례차례로 버리시기를 12년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두고 고행을 하신 끝에 마침내 보리수(菩提樹)하에서 새벽 동천(東天)에 반짝거리는 샛별을 보시고 성불(成佛)을 하셨습니다.
그 부처님이 아니셨던들 우리는 영원토록 생사(生死)의 고해(苦海)에서 몸부림치며 육도법계(六途法界)를 윤회를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무엇이 바른 길인가? 무엇이 우리의 참다운 행복인가? 그것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러한 성현 가운데 성현을 스승으로 받들 수가 있기에, 우리는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태어났으면서도 우리는 외롭지 아니하고 우리는 슬프지 아니하고,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찾아서 희망과 보람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法)을 믿으면서도 아직도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까닭은 우리의 신심(信心)이 바르지 못하고 철저하지 못하고, 실천에 있어서 대분심(大憤心)과 용기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절에 10년, 20년을 다니고 평생토록 부처님밖에는 모르고 그러면서도 바로 깨닫지 못한 것은 그 믿음이 바르지 못하고 철저하지 못한 까닭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어떻게 믿어야 바르게 믿는 것이냐?
어떤 사람은 '용화사 가서 정법(正法)을 믿어라.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으려면 주안 용화사를 가라' 이런 말을 듣고 분개를 하면서 '어찌 용화사만 정법이고, 용화사만 최상승법이냐, 부처님 법은 온 시방법계에 두루하고, 꽉 차 있는 것이 불법인데 어찌 용화사만 불법일 것이냐. 어느 절에서도 어느 절에 가도 부처님은 다 모셔 있고, 어느 절에 가도 스님은 다 계시고, 설교하는 절은 어디라도 다 정법이 있지 어찌 용화사만 정법이겠느냐' 그렇게 분개를 하는 분이 있다 이것입니다.
그 말이 절대로 일리가 있는 말일 것입니다. 어찌 하필 용화사 부처님만 참 부처님이고 용화사 스님들만 진짜스님이고, 용화사 설법만 정법이겠습니까.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 法身)은 우주법계에 꽉 차서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고, 오히려 눈을 가리우고 부처님을 아니 볼라고 하니까 열 손가락 사이마다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마는.
바로 말하자면 부처님 안 계신 곳이 어디가 있으며, 불법 없는 곳이 어디가 있으며, 무엇이 정법이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혜의 눈을 뜬 사람은 눈을 감아도 부처님이요 눈을 떠도 부처님이요, 귀를 막아도 부처님이요 귀를 열어도 부처님이요, 하늘 땅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법신체(法身體) 아닌 것이 없지마는.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예를 들자면 철이 들어서 아무데를 가더라도 산에를 가도 좋고, 바다를 가도 좋고, 숲속을 가도 좋고, 사막을 가도 좋고, 아무데를 가도 걱정이 없을 만큼 몸이 단련이 되고 그만큼 튼튼한 사람은 상관이 없지만, 아직 자라지를 못해서 그런 사람은 함부로 산에 가도 위험한 것이고, 함부로 물가에 가도 위험한 것이고, 함부로 험악한 데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용화사로 가야 참선 하는 법을 기초부터서 잘 배울 수가 있다'한 말이 그렇게 해서 해당이 되는 것이지, 바로 참선을 화두를 들 줄 알고 올바르게 공부할 수 있다면야 산꼭대기를 가나, 바닷가에를 가나, 무인도를 가나, 어디를 가서 한들 공부를 못하겠습니까.
정(正)과 사(邪)를 가릴 줄을 알고 공부하는 법을 바로 안다면 외도(外道), 마구니 속에 들어가서 한들 무엇이 방해로울 것이 있습니까.
정법은 다른 게 아니고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절을 많이 하고, 시주를 많이 하고, 멸치 꼬리 하나도 안 먹고, 파 마늘을 안 먹고, 모기 파리 하나도 안 죽이고,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아니하고, 이렇게 계율을 청정히 지키면서 그저 절밖에는 모르고 일생을 사는 그러한 스님, 그러한 청신사 청신녀들이 계시는데 대단히 훌륭하지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불법(佛法)을 바로 믿었다고 할 수가 없거든. 물론 불교를 믿는 사람이 계율을 청정히 갖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일이로되 거기에 그쳐 가지고 불법을 참으로 바로 믿었다고 할 수가 없어.
'불법을 바로 믿었다', 정신(正信)이라 하면 자기도 아무리 죄가 많건, 근기가 약하건, 여자건, 말세에 태어났건, 무식하건,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자기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을 가지면 그것이 바로 불법을 바르게 믿는 것이여. 그 신념이 서 있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어.
'죄가 많으니까 나는 불법을 깨달을 수가 없을 것이다. 업(業)이 많고 근기(根機)가 약하고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깨달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말세(末世)에 태어난 사람이 무슨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차라리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차라리 염불을 하고 경을 열심히 읽어야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죽을 때 아미타불이 나를 반야용선(般若龍船)에다 태워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데려다 주실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은 어떠한 근기에는 혹 약이 될 수가 있겠지만, 거기에 국집(局執)한다면 불법을 바르게 믿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법을 바르게 믿고도 대분심(大憤心)과 대용기(大勇氣)가 없으면은 도는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천안통, 천안제일(天眼第一)인 아나율 존자는 애당초에 부처님 사촌으로 출가해 가지고,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는데 꾸벅꾸벅 졸았다 그말이여.
조니까, 부처님께서 걱정을 하시기를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가 없고, 썩은 흙벽에다가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조개가 바다 속에서 천년 동안을 잠을 자고도 파도 소리 때문에 잠 한숨 못 잤다고 그런 말이 있는데, 세상에 법문(法門)을 들으면서 졸음을 자다니 그래가지고 무슨 도업(道業)을 성취할 것이냐. 축생만도 못한 놈'이라고 크게 꾸지람을 하셨습니다.
'법문을 듣다가 졸아? 그것이 축생 과보(畜生果報) 밖에는 무엇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참 뼈아픈 꾸지람을 듣고 분심이 나서 6일간을 잠을 안 잤습니다. 눈 한번 깜빡 아니하고 앉은 채로 6일을 버텼습니다. 6일을 눈을 깜빡거리지 아니하고, 6일을 딱 버티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눈이 탁 멀자 천안통(天眼通)이 열렸던 것입니다. 천안통이 열려가지고 염부제(閻浮提)의 모든 사물과 상황을 손바닥 위에 구슬을 보듯이 그렇게 온 세계를 다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천안통이 열려서 온 세계를 손바닥에 구슬 보듯이 보았지만, 바느질하는 데에 바늘귀는 꿸 수가 없었던지, 원시경전에 보면 아나율 존자가 바느질을 할 때에는 부처님께서 항시 바늘귀를 꿰어 주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처음~21분31초)
(2)------------------
부처님 말씀 한마디에 6일 동안을 분심을 내 가지고 잠을 안 자 가지고 결국은 눈이 멀어버린 그 제자를 위해서 바늘귀를 꿰어 주시고, 바느질도 해 주시고, 여러 가지 그 시중을 부처님께서 손수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 눈병이 났는데 아사세왕(阿闍世王) 어의(御醫)이며, 부처님의 주치의를 맡고 있던 기파(耆婆)대감을 명해 가지고 아나율 존자의 눈병을 치료하게 했습니다마는, 기파대감이 아무리 좋은 약을 쓰고 침을 놓고 치료를 해도 조금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래 기파대감이 부처님께 "저의 힘으로는 나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가 어의로서 못 고치는 병이 없는데 어찌 아나율의 눈병을 못 고친단 말이냐?"
"못 고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잠을 자야 하는데, 좋은 약을 쓰면서 잠을 자야 눈병이 나을 텐데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네가 내 말 한마디에 분심을 낸 것은 좋지마는, 그래도 잠을 자면서 정진을 해야지 그렇게 잠을 안 자 가지고 되겠느냐"
아무리 잠을 자라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끝까지 잠을 안 자 가지고 결국은 눈이 그렇게 멀어버렸던 것입니다.
또 부처님 제자, 십대제자 가운데에 지혜가 제일인 사리불 존자가—목련 존자와 부처님 왼팔 오른팔 그 두 수제자(首弟子)인 그 사리불 존자가 지혜로서 제일인데, 그 사리불 존자는 원래 외도의 제자로 있다가 목련 존자와 함께 자기 자신의 제자 백 명들을 이끌고 부처님께 귀의해서 부처님 법문을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해 가지고 십대제자 가운데에 지혜가 제일인 그러한 성현인데, 그 사리불 존자는 전생에 무엇이었었냐 하면은 독사(毒蛇)였었던 것입니다.
그 사리불 존자는 전생에 독사가 되어 있었을 때가 있었기 때문에 성현이 되어 가지고서도 그 진심(瞋心)을 내는 습기(習氣)가 항시 조금씩 나타났다 이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앉아서 좌선을 하시다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셔서 포행을 하시는데, 부처님의 아드님이신 라후라 존자가 아직 어렸을 때인데 그 라후라가 부처님 뒤를 따라서 부처님을 모시고 같이 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라후라 존자는 아주 6살 어렸을 때 출가를 했는데, 출가했을 때 부처님께서 그 당신의 수제자인 사리불 존자를 시켜서 '네가 좀 거두어 주어라' 이렇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래 라후라 존자의 은사 스님이 사리불 존자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께서 그 당신의 아드님이신 라후라 존자가 따라온 것을 이리 보시더니, "네가 어떻게 그렇게 해서 바짝 말랐느냐? 어떻게 몸이 그렇게 폐로(肺癆)와졌느냐? 그렇게 쇠약해졌느냐?" 이렇게 물어 보셨습니다.
그 라후라 존자가 게송으로써 대답하기를, 소락(酥酪)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그 빠다(버터)와 비슷한 음식인데 내나 우유를 끊이면은 거기에서 떠오르는 기름을 모아 가지고 만드는 음식인데,
"소락을 먹으면 몸이 튼튼해지고 또 기름을 먹으면은 몸이 튼튼해지고 그러한 것을 또 무슨 고기라든지 모다 그런 것을 먹으면 힘이 생기고 한 것을 부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게송으로써 부처님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지금 이 대중 가운데에 누가 제일 큰스님인고?" 그렇게 물어보셨습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저의 스승인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 밑에 제일 큰스님이지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이 "사리불은 부정식(不淨食)을 하느니라"
부정식이라 하는 것은, '아니 불(不)’자, '조촐할 정(淨)’자, 부정(不淨), "부정식을 하느니라. 청정한 음식을 안 먹고 청정하지 못한 음식을 먹느니라" 아, 부처님이 밑도 끝도 없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말이여.
그러니까 그 라후라 존자가 자기 스승한테 가서 "아, 부처님이 그 스님 보고 부정식을 한다고 하시데요" 그렇게 말을 했다 그말이여.
그 말을 듣고 사리불 존자는 그 뒤부터서는 일체 어떠한 신도나 왕이나 대신이나 장자가 공양 청장을 해도 응하지를 안 했습니다.
부처님도 그전에까지도 왕이나 대신이나 장자나 신심 있는 신도가 좋은 음식을 마련해 놓고 공양 청(請)을 하면 모다 제자를 거느리고 가서 공양을 잡숫고 오시고 그랬는데 부처님도 딱! 끊어 버리시고 안 가시자, 부처님이 안 가신 뒤에는 사리불한테 모다 공양 청을 하면은 사리불이 또 가서 공양을 받아 자시고 오시고 그랬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그 말씀을 한 그 말을 듣고 부터서는 사리불도 딱! 끊어버리고 공양에 응하지를 안 했습니다.
그때 왕과 대신과 장자들이 사리불에 공양을 청하러 갔습니다. "나는 가지를 않겠다"
"어째서 안 가십니까? 부처님도 안 가시고 사리불 존자까지 안 가시면 우리 신도들은 어떻게 청정한 법문을 들으며, 법의 인연을 맺는 복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부처님께 가서 "부처님마저도 공양을 응하시지 아니하고, 사리불 존자까지도 응하시지 아니한다면은 어떻게 우리 신도가 복을 지으며 법문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발 부처님은 정 안 가신다면 사리불 존자라도 가도록 좀 말씀을 해 주십시오"
"사리불 존자는 내가 아무리 말하고 너희들이 아무리 청한들 결단코 가지를 아니할 것이다"
"왜 그렀습니까?"
사리불 존자는 전생에 독사였었는데, 독사로서 어느 왕을 물었다. 그래서 독사가 왕을 물어버리고 어디로 달아나 버렸는데, 왕의 몸에 그 독이 번져가지고 죽게 되었어. 그래서 천하의 명의를 다 불러다가 그 독사에 물린 독을 빼고 병을 낫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나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 의원들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이 독을 뺄 수가 없고 그 독사로 하여금 스스로 이 독을 빨게 해야만 이 병은 나을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 독사를 오게 할 수가 있느냐?' 그래 그 의원들이 모다 합심을 해 가지고 주문을 외워 가지고 그 독사가 제절로 왕 앞에 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독사가 왕 앞에 와서 딱 도사리고 있는데 그 옆에다가 장작불을 갖다가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는 불을 펴서 훨훨훨 타게 해 놓고서는, '독사야! 네가 이 왕을 물었는데, 네가 문 자리에서 거기다가 네가 이 독을 빨아먹으면 너를 살려주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너는 이 모닥불에다가 집어넣어서 태워 죽이리라'
독사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의 독을 밖으로 내뿜기 위해서 물었는데 어찌 내가 그 독한 독을 다시 빨아먹을 수가 있을까보냐. 차라리 내가 불더미 속에 들어가서 타서 죽을지언정 나는 그 독을 다시는 못 빨아먹겠다. 이래가지고 그 독사가 펄쩍 뛰어가지고 불더미 속에 들어가서 타서 죽었습니다. 그 타서 죽은 그 독사가 사리불 존자다 이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무슨 말이든지 한마디 딱 했다 하면은 한 번 탁! 결심을 하고 독한 마음을 먹고 결심을 해 버리면 천하 없는 사람이 뭐라 해도 그 뜻을 굽히지를 안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부처님께서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그 말씀 한마디 했다고 해서 왕이나 대신이나 장자가 공양 청장을 해도 다시는 응하지를 아니했다 이것입니다.
그 부정식이라는 게, 첫째 그 짐승을 죽일 때에 그 현장을 목격하지 아니한 고기, 그 짐승을 죽일 때에 비명 지른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한 고기, 또 나를 위해서 일부러 죽이지 아니한 고기, 또 세 사람 이상의 손을 거친 고기, 독수리나 맹수 같은 것이 먹다가 버린 고기, 이러한 종류의 다섯 가지 고기를 깨끗한 고기라 해서 이것을 오정육(五淨肉)이라, 다섯 가지 깨끗한 고기라 해서 이것을 오정육이라 그러고.
그렇지 아니한 고기는 다 그것이 부정한 고기다 이것입니다. 또 음식에 파나 마늘이나 부추 모다 그러한 것이 들어간 음식은 이것이 깨끗한 음식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신도 집에서 밥을 먹게 되면 음식 속에 그러한 부정한 것이 섞여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무심히 먹다 보면 부정식을 하게 되는데, 그래 사리불 존자는 아라한과(阿羅漢)를 증득한 성현이라 신통이 다 육신통(六神通)이 자재(自在)하고 그렇지만 또 무심할 경우에는 또 그런 음식 속에 그러한 것이 혹 섞여 있을 수가 있어서 무심히 먹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은 부정식을 한다' 한 말씀을 하셨는데.
라후라 존자가—'어째서 네가 그렇게 살이 쪽 빠져 가지고 그렇게 그러느냐'한 말 끝에 '뭐 공양 청을 안 하고 그 영양 있는 것을 안 먹으니까 이렇게 살이 빠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한 그러한 뜻으로 넌즈시 그 돌려서 게송으로 읊으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 말 한마디에 다시는 공양에 응하지 아니할 그 고집, 그 의지력, 그 결단심, 이러한 것이 결국은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그런 밑거름이 되지 안 했겠느냐?
그리고 아나율 존자는 '법문 듣다가 존다'고—우리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녹음으로 들으면 '존다'고 그 꾸지람을 하신 법문을 가끔 듣는데, 어떠한 법문 가운데에는 '눈구녘을 쑤셔 버린다'고 이러한 참 과격한 꾸지람을 하시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
법문을 듣다가 꾸지람을 듣기도 예사고, '눈구녁을 쑤셔 버린다'고 이러한 말씀을 들을 수도 있는데, 어떠한 신도 하나는 조실 스님 법문을 빠뜨리지 않고 듣다가 눈구녁을 쑤셔 버린다는 말을 듣고 몇 해 동안을 법문을 들으러 안 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또 산승의 말을 들으면서 졸고 계신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졸고 있는 사람 보기가 싫어서 조실 스님도 법문하실 때 눈을 감고 많이 법문을 하시고, 산승도 그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보면 도대체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듣기가 싫으면 꾸벅꾸벅 졸고 있을까?
'차라리 안 보고 모두가 눈이 초롱초롱해서 저의 말을 잘 듣고 계시리라' 이렇게 생각이 들어가야 좋은 말이 술술 나오지, 여기서 저기서 듣기 싫어서 졸고 있고, 하품을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고 있으면 무슨 신심으로 얘기를 법문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한마디 꾸지람을 듣고 그 꾸지람을 명심을 해서 분심을 내서 아나율 존자와 같이 잠을 안 자고, 사리불 존자와 같이 다시는 공양에 응하지 아니할만한 그러한 고집과 결단심이 없어가지고 어떻게 대도를 성취할 것이냐 이 말이여.
'분심이 안 난다. 신심이 안 난다. 아무리 화두(話頭)를 들어도 의심(疑心)이 안 난다. 어떻게 하면 의단(疑團)이 일어날 수가 있겠으며, 어떻게 하면 분심이 나겠습니까? 어떻게 좋은 말씀을 한마디해서 신심과 분심과 대의단이 나도록 해달라'고 가끔 그러한 수좌(首座) 스님들이 와서 그렇게 부탁을 합니다마는, 신심과 분심과 의단은 자기 자신이 일으켜야지 어떻게 그것을...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한마디 한 그 말에서 분심을 내고, '법문을 듣다 졸려 가지고 그래가지고 어떻게 도를 성취할 것이냐? 죽어서 조개밖에는 못될 것이다. 죽어서 축생의 과보밖에는 못될 것이다' 이런 말 한마디에도 대분심을 내고.
이러한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채찍을 가해 가지고 분심을 내야지, 내가 장군죽비(將軍竹篦)로 한 대, 두 대 쳐 본들 그때만 등어리가 따끔하고 돌아서면 그만인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있느냐.(21분32초~42분51초)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시방찰해(十方刹海) ; 시방세계(十方世界). 찰(刹)은 범어 ksetra의 음역으로 뜻은 토지 · 육지 · 영역. 따라서 찰해는 육해(陸海), 즉 육지와 바다란 의미로 세계를 말한다.
*빗기다[橫] ; ①'가로지르다(양쪽 사이에 기다란 막대나 줄 따위를 가로로 놓거나 꽂다)'의 옛말. ②'비끼다(비스듬히 놓이거나 늘어지다)'의 옛말.
*사사하다(師事-- 스승 사/섬길 사) ; 스승[師]으로 섬겨[事] 가르침을 받다.
*보리수(菩提樹) ; 산스크리트어 bodhi-vṛkṣa 원래 이름은 아설타(阿說他, 산스크리트어 aśvattha)이며, 그 열매를 필발라(畢鉢羅, 산스크리트어 pippala)라고 하는 데서 이 나무를 필발라수(畢鉢羅樹)라고도 하고, 붓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였으므로 보리수라고 함. 상록 교목으로, 잎은 심장 모양이며 끝이 뾰족함.
*샛별 ; 새벽별. 명성(明星).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새벽별, 태백성(太白星), 계명성(啓明星), 장경성(長庚星) 등이라고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비로자나(毘盧遮那) ;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이르는 말. 비로자나는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을 형상화한 것.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법신체(法身體) ; 법신(法身)의 체(體)를 가리키는 말.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부처님을 가리킨다.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법불(法佛) · 이불(理佛) · 실불(實佛) · 법신불(法身佛) · 법성신(法性身) · 자성신(自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한물건’이란 것도 이것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絶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〇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십대제자(十大弟子) ; 석가모니의 제자 중 수행과 지혜가 뛰어난 10명을 이르는 말.
①사리불(舍利弗) : 산스크리트어 śāriputra의 음사.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지혜가 뛰어나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 일컬음. 원래 목건련(目犍連)과 함께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sañjaya)의 수제자였으나 붓다의 제자인 앗사지로부터 그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250명의 동료들과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됨.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다.
②목건련(目犍連) : 산스크리트어 maud galyāyana의 음사.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신통력이 뛰어나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일컬음. 원래 산자야(sañjaya)의 수제자였으나 사리불(舍利弗)과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됨.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다.
③가섭(迦葉) : 산스크리트어 kāśyapa의 음사. 마가다국(magadha國) 출신으로, 엄격하게 수행하여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일컬음. 결혼했으나 아내와 함께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됨. 붓다가 입멸한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한 제1차 결집(結集) 때, 그 모임을 주도함.
④수보리(須菩提) : 산스크리트어 subhūti의 음사. 사위국(舍衛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공(空)의 이치에 밝아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일컬음. 그래서 공(空)을 설하는 경(經)에 자주 등장하여 설법함.
⑤부루나(富樓那) : 산스크리트어 pūrṇa의 음사. 바라문 출신으로, 설법을 잘 하여 설법제일(說法第一)이라 일컬음. 녹야원(鹿野苑)에서 붓다의 설법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됨. 인도의 서쪽 지방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하다가 거기에 입적함.
⑥아나율(阿那律) : 산스크리트어 aniruddha의 음사. 붓다의 사촌 동생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에 왔을 때, 아난(阿難)·난타(難陀) 등과 함께 출가함. 통찰력이 깊어 천안제일(天眼第一) 이라 일컬음.
⑦가전연(迦旃延) : 산스크리트어 kātyāyana의 음사. 인도의 서쪽에 있던 아반티국(avanti國)의 크샤트리야 출신으로, 왕의 명령에 따라 붓다를 그 나라로 초청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출가함.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함. 교리에 밝아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 일컬음.
⑧우바리(優波離) : 산스크리트어 upāli의 음사. 노예 계급인 수드라 출신으로 석가족의 이발사였는데, 아난(阿難)·난타(難陀)·아나율(阿那律) 등이 출가할 때 같이 붓다의 제자가 됨.
계율에 엄격하여 지계제일(持戒第一)이라 일컬음. 붓다가 입멸한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한 제1차 결집(結集) 때, 계율에 대한 모든 사항을 암송함으로써 율장(律藏)의 성립에 크게 기여함.
⑨나후라(羅睺羅) : 산스크리트어 rāhula의 음사. 붓다의 아들.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에 왔을 때,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犍連)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함. 지켜야 할 것은 스스로 잘 지켜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일컬음.
⑩아난(阿難) : 산스크리트어 ānanda의 음사. 붓다의 사촌 동생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에 왔을 때 난타(難陀)·아나율(阿那律) 등과 함께 출가함. 붓다의 나이 50여 세에 시자(侍者)로 추천되어 붓다가 입멸할 때까지 보좌하면서 가장 많은 설법을 들어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일컬음.
붓다에게 여성의 출가를 3번이나 간청하여 허락을 받음. 붓다가 입멸한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한 제1차 결집(結集) 때, 아난이 기억을 더듬어 가며 “이렇게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붓다께서는……”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암송하면, 여러 비구들은 아난의 기억이 맞는지를 확인하여 잘못이 있으면 정정한 후, 모두 함께 암송함으로써 경장(經藏)이 결집됨.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염부제(閻浮提) ; 염부(閻浮). 남염부제(南閻浮提). 섬부주(贍部洲). 남섬부주(南贍部洲). 산스크리트어 jambu-dvīpa의 음사. 염부(閻浮), 섬부(贍部)는 jambu의 음역어이며, 제(提)와 주(洲)는 dvipa의 각각 음역어 및 의역어이다. jambu는 나무 이름.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네 대륙(四洲)이 있는데, '염부'라는 이름은 여기에 자란다는 점부(jambu)에 유래하며, 남방에 있기 때문에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 함. 불전(佛典)에서는 ‘인간세계의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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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진심(瞋心) ; 왈칵 성내는 마음.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대하여 미워하거나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페롭다 ; '파리하다(몸이 마르고 낯빛이나 살색이 핏기가 전혀 없다)'의 사투리.
*소락(酥酪 연유 소/쇠젖 락) ; 소나 양 등의 젖.
*오정육(五淨肉) ; 스님들이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다섯 가지의 청정한 고기. 오종정육(五種淨肉).
①나를 위해 죽이는 것을 목격하지 않은 것(不見爲我殺). ②나를 위해 죽였다는 것을 듣지 못한 것(不聞爲我殺). ③나를 위해 죽였다고 의심되지 않는 것(不疑爲我殺). ④수명이 다하여 저절로 죽은 것(自死). ⑤새가 먹다 남긴 것(鳥殘).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 -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자재(自在 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①자기가 원하는 대로인 것.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인 것. 자유자재로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원하는 대로의 경지. ②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 ③자유롭다. 자신에게 의존하다. ④독립. ⑤느긋한 심신의 작용. 잡혀지지 않는 것. ⑥불보살에 갖추어진 힘을 말함.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도 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장군죽비(將軍竹篦) ; 보통 죽비(竹篦)는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40~50센티의 불교 용구인데, 장군죽비는 참선할 때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진 수행자의 어깨를 쳐서 졸음을 쫓는 약 2m의 큰 죽비.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1) 5분 37초.
(2) 4분 52초.
[법문] 송담스님(No.356)—88년 4월 첫째일요법회(1988.04.03)(용356)
(1)------------------
불법(佛法)을 믿지 않고 다른 외도(外道)를 믿는다던지 또는 불법을 믿되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지 못하고 방편설(方便說)에 떨어져 있는 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이 최상승법을 믿고 또 활구참선을 의지해서 공부를 시작한 지가 벌써 오래된 그런 사람도 진정으로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활구참선의 삼요(三要)를 갖추어서, 그 삼요는 대신심(大信心) · 대분심(大憤心) 그리고 대의심(大疑心) 대의단, 이 3가지를 한목 갖추어야 그래야 진실한 수행자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신심이란 게 무엇이냐? 무엇을 믿어야 대신심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냐?
내가, 내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 내 자신이 바로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믿는 것이 그것이 바로 대신심이여.
‘이론상으로는 우리도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참선을 해서 가지고 있는 불성을 깨달으면 바로 그것이 견성이다’ 이렇게 다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따로 있고, ‘내’라고 한 놈이 불성을 속에 가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할 줄 알고, 말을 들을 줄 알고, 성도 낼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아는 그 당처(當處), 그 당처를 여의지 않고 그 당처가 바로 불성이라, 바로 그것이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놈을 철저히 믿어야 그놈을 여의고 따로 부처를 찾지 않게 되는 거여.
그놈을 여의고 따로 ‘참 부처’를 찾는 한에는 영원히 찾어도 부처님은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이 신심이 꽉 아주 견실(堅實)해야 그래야 참선을 할 수가 있는 것이여. 바른 참선을 할 수가 있어.
그 다음에 대분심(大憤心).
왜 내 자신이 부처이고, 그러면서 왜 이렇게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느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불보살, 역대조사는 진즉 이 문제를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을 해서 생사해탈을 하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이렇게 육도를 윤회하면서 생사고해 속에서 이렇게 헤매이고 있는가?
왜 멀쩡한 부처님이면서 부처님으로서 살지를 못하고, 부처님으로서 행하지를 못하고, 어찌 이렇게 업풍에 따라서 이렇게 윤회를 거듭하고 있고, 언제 그 기한 없이 이렇게 고취(苦趣) 속에 빠져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뼛골에 사무치도록 분심! 한탄이라고 할까? 원망이라고 할까? 기가 맥힐 일입니다. 그러한 뼛속에서부터 사무치는 그런 분심이 없고서는 도는 닦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신심과 대분심은 동시에 발(發)해져야 하는 것입니다.(17분12초~22분49초)
(2)------------------
‘참선을 허지만 참, 참선이 안된다. 정진이 잘 안된다. 혼침이 오고 망상심이 일어난다. 의단이 독로하지를 못하고 화두가 순일하지를 못한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 공부를 잘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공안을 타파를 못하고 확철대오를 못한 것이 아니냐’
많은 분들이 그것을 호소를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마는 순전히 그 원인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세하게 따지면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이 삼요(三要)를 갖추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단(大疑團), 이 삼요를 갖추지 못함으로 해서 공부가 화두가 순일하지 못하고 의단이 독로하지를 못하는 것이지, 그밖에 딴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방편설(方便說 방법·수단 방/편할 편/말씀 설) ; 실상(實相)으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상대와 조건에 알맞는 방법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 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당처(當處) ; ①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 그곳. 또는 이곳. ②그대로. 지금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곳에서.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말뚝 신심 ; 말뚝은 보기에는 견고해 보이나 뿌리가 없어 외부의 힘에 쉽게 흔들리거나 썩어 버린다. 이것에 비유하여 보기에는 열심인 듯하나, 꾸준하지 않고 잠깐 일어난 신심을 '말뚝 신심'이라 한다.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폐침망찬(廢寢忘餐 폐할 폐/잘 침/잊을 망/밥 찬) : 자는[寢] 것을 폐(廢)하고 밥 먹는[餐] 것을 잊으며[忘] 일에 심혈을 기울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 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세간(世間)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 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왼쪽 보처(補處).
또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 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한다. 또 광세음(光世音)·관세음(觀世音)·관세자재(觀世自在)·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쓰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의 주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다. 한국에서는 동해에 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가 관음 도량으로 유명하다.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아귀(餓鬼 굶주림·굶길 아/귀신·아귀 귀) ; 항상 굶주림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귀신. 전생에 탐욕이나 질투가 많아, 악업을 지은 사람이 죽은 뒤 육도(六道) 중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 태어나 고통을 당한다.
아귀의 배는 산과 같이 크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큼 작다. 먹을거리가 없어 항상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에 있고, 우연히 먹을 것을 얻더라도 입에서 불이 나거나 먹을 것이 화염으로 변하여 고통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