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18분 23초)

 

[법문] 송담스님(No.457)—1991년 11월 첫째 일요법회(용457)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많은 마구니들이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妨害)를 친다 그거거든. 그럴 때에 어떻게 그 마장(魔障)을 극복하고 나가느냐? 그건 참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한 어떤 사람이, 나를 방해를 친 사람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다. 내가 파순이다’하고 나오는 경우는 없어.

방해 친 사람이 친구일 수도 있고, 방해 친 사람이 가족일 수도 있고.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은 나를 해치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나와 인연이 깊은 사람이 나를 직접 간접으로 나를 해치게 되는 것이여.

 

 

옛날에 이름이 '자라'라고 하는 사람이 인도에 있었는데,

그이는 어디를 가니까, 어떤 사람이 큰 자라를 잡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백 냥을 내면은 이 자라를 팔겠다. 이 자라를 고아 먹으면 죽을 사람도 살아나고 무슨 병이든지 이 자라를 고아 먹으면 낫는다”해 가지고 ‘백 냥에 사라’고 막 시장가에서 떠들어 댄다 그말이여.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 모아 가지고 그 자라를 구경하고 있는데 ‘그대로 보고 있다가는 저놈이 팔려가서 반드시 가마솥에 들어가겠다’ 생각하니까,

이 '자라'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기한테 있는 돈 전부를 긁고 또 그것 갖고도 안 되니까 집도 그 사람한테 아주 다—우선 급히 팔라니 살 사람이 없으니까, 그 자라 파는 사람한테 자기 집까지 다 주고 그 자라를 샀습니다.

 

자라를 사 가지고 그 자라를 짊어지고 저 깊은 물에 가서 그 자라를 집어넣었어.

자라란 놈이 영물(靈物)이라. 용왕의 권속이고 자라도 오래되면은 말을 했던지,

“내 생명을 건져 주었으니 나도 은혜를 갚을 수 밖에 없다. 앞으로 얼마 안 있으면 큰 홍수가 져 가지고 여기 마을이고 무엇이고 할 것 없이 전부 다 물에 잠겨서 다 떠내려가고 사람도 무엇도 다 떠내려가고 다 죽을 테니 내 말을 들으라. 큰물이 지면 이것저것 다 따지지 말고 저기 있는 저 큰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서 단단히 몸을 붙들어 매고 잘 있으면 반드시 홍수가 빠지면 살아날테니까 그렇게 하라”

 

그래서 반신반의(半信半疑)를 하고 있다가 얼마 지나니까 과연 그 비가 작달비가 몇 시간을 쏟아져 가지고는 물이 차츰차츰 불고 바닷물이 거꾸로 올라오고 그래 가지고는 홍수가 져 가지고 그런데.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고 그저 이불 짐을 짊어지고 양식을 싸 짊어지고 그저 이리저리 하다가 다 떠내려가고.

 

그 사람은 아무 소리 안 하고 고목나무 위로 올라가서 가만있으니까,

조금 있으니까 아! 그때 자기가 살려준 자라가 그 홍수 속에서 어떻게 찾아와 가지고는 “내려오라”고, “내가 당신을 짊어져서 태워다가 저 다른 육지에다 갔다 실어다 줄 테니까 내 등어리에 타라”고. “넘어지지 않도록 꼭꼭 몸을 붙들어 매고 타악 엎지라”고 해 가지고는 이렇게 가는데.

 

한참 가니까 어떤 아주 귀부인이, 귀하게 생긴 젊은 여인이 홍수에 떠내려 온다 그말이여.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간신히 그 사람을 잡어가지고 등어리에다 태우고 갔어.

 

아! 그 사람(귀부인)을 태우기 전에 얼마 가니까 그 자라 팔아먹은 사람이 떠내려와. 그래서 그 사람을 떠억 등어리에다 태웠는데 얼마 가니까 아주 젊은 여자가 물에 빠져 가지고 곧 가라앉았다 떴다 하니까 이 '자라'라는 사람은 그 사람도 살려줄라고 건질라고 하니까 자라 장수가 절대로 그 사람을 못 태우게 해.

 

그 사람을 태우면 이 자라 한 마리에 세 사람이나 타면 우리까지 죽으니까, 절대로 저 사람을 못 태우게 발길로 막차고 못 오게 한다.

그런데 먼저 그 '자라'라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 그 사람도 사람인데” 그래서 자라 보고 “아야 자라야! 저 사람도 태우자. 니가 힘이 들겠지만 저 사람도 살려야지 어떻게 하냐”

 

자라는 두 사람이 타 가지고 상당히 힘이 들지만, 하도 이 사람이 ‘세 사람 태우자’고 ‘살리자’고 싸니까 그러면 ‘실어 보자’고. 그래 가지고 세 사람을 간신히 태웠는데 자라란 놈이 간신히 가.

 

얼마 가니까 나비 떼들이 수천 마리가 날아왔다. 그래 가지고 엉겨붙으니까 그 자라 팔아먹은 사람은 손으로 그 나비를 앵기는 대로 때려서 죽이고 못 들어붙게 해. 또 그 나비도 하늘로 날아가 버리면 할 것이지만 하필 그 자라 등어리에만 붙으려고 싼다 그말이여.

 

그래도 그 '자라'라는 사람은 자라 장수, (자라) 팔은 사람 보고 “그러지 마라. 사람만 생명이 있는 게 아니라 저런 나비도 이렇게 홍수가 지다 보니 아마 고목나무 속에서 살다가 고목나무가 쓰러지니까 그래 그냥 나비들이 갈 곳이 없으니까 우왕좌왕하다가 마치 이 자라가 가고 사람이 붙어서 가니까 자기도 거기서 좀 쉬어볼까 하고 그냥...”

 

그 나비가 이동할 때에 수천 마리가 둥우리가 되어 가지고 그렇게 날아가는데, 그렇게 간신히 간신히 해 가지고 저쪽 안전지대로 피난을 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기진맥진해 가지고 있는데, 그 세 번째 탄 그 여인이 굉장히 부잣집의 딸인데 자기 생명의 은인(恩人)이라 해 가지고 자기집에 가 가지고—어디 여행을 갔다오다가 큰물을 만나서 아마 배가 뒤집어져 가지고 그렇게 홍수에 휩싸였던지—자기집에서 참 잘 해 먹이고 또 금은보화를 많이 주었어.

 

주니까 그 자라 팔아먹은 사람이 그걸 보더니 눈이 활딱 뒤집어지면서—그러고 그 여인은 가 버렸는데, 그 '자라'라는 사람 보고 “그 재산 반을 나한테 내놔라!” “왜 이것이 당신 것이요?”

“안 내놔? 좋게 내노라고 할 때에 내놔” 그래 안 내놓으니까 그놈이 가서 관청에다 고발을 했어. “아! 이놈이 내 보물이고 내 재산인데, 이놈을 홍수 난 틈에 내 것을 가지고 안 준다”고 고발을 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진짜 이 '자라'라는 사람이 붙잡혀 들어갔어.

 

그 자라 장수가 어떻게 교활하고 말씨가 좋던지 관리도 그 사람 말을 곧이듣고, 진짜 이 '자라'라는 사람은 말도 잘 못하고 그냥 기가 막혀서 우물우물하니까 사실로 그렇게 오인(誤認)을 하고서 강도로 강도죄를 씌워서 처형을 하기 위해서 인제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그 판사가—그때도 판사라고 했는가 어쩐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 판사가 판결문을 이렇게 작성을 하는데 어디서 난데없이 나비 떼들이 와 가지고 붓끄터리에 들어붙고, 판사 얼굴에 들어붙고, 팔에 들어붙고 해 가지고 도대체 글씨를 쓸 수가 없어!

그저 아무리 털어버려도 도로 또 붙고, 끝도 없이 몰려들어 가지고 글씨를 못 쓰게 한다 그말이여.

 

이것참! 필유곡절(必有曲折)이다. 그래 가지고 “대관절 어떻게 된 것이냐? 바른대로 말을 해라”

그래 가지고 사실을 주욱 얘기하고 그 부잣집 딸이 정식으로 연락이 되어 가지고 보증을 서고 해 가지고 사기꾼이 처형을 당하고, 이 '자라'라는 사람은 풀려났는데.

 

이 세상은—6·25동란 났을 때 인민군들이 모다 몰려오고 할 때, 다 아는 사람, 그 집 덕을 본 사람이 다 원한심을 품고 사람을 많이 죽이고—알게 되면 친하게 되고, 친하게 되면은 그것이 나중에 한 생각 변하면은 웬수(怨讐)가 되는 것이여.

 

그래서 고조사(古祖師)도 「원수를 만들고 싶지 아니하면 사람을 알고 지내지 말아라. 사람을 알고 지내면은 정(情)이 들고 친하게 되면은 그것이 나중에 원수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부터 누구든지 웬수처럼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실 분은 안 계시겠지만.

‘인간은 다 정(情)으로 산다’ 그렇지만 이 정이라 하는 것이 부모 자식 간의 정 또 부부간의 정, 그 정이라 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정이 없을 수가 없지만, 정이라 하는 것이 참 이 고약한 거여.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면치를 못하고, 그런 정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신세를 망치고 큰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이라 하는 것은 너무 깊이 관여하다 보면 거기에 얽매이게 되는 거여. 얽매였다 하면은 헤어날 수가 없어.

 

그래서 자식이다 부부를 웬수처럼 볼 것까지는 없지만, 너무 정 속에 해 가지고 죽고 못살고 그러지 말고, 반(半)만 덜어서 참선(參禪)하는 데다가 정열을 쏟고, 그저 세속적인 정은 담박(澹泊)하게 사는 것이 좋다 그거거든.

어피차 인생은 만나면 헤어지게 되어 있어. 생이별(生離別) 아니면 사이별(死離別)하게 되어 있는 것이거든. 그러니 너무 정을 붙일 것이 못되아!

 

그저 숙세에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어쨌든지 정법(正法)을 믿고 정심(正心)으로 담박하게 살아갈지언정, 거기에 빠져가지고 헤어나지 못하면 도(道)도 못 닦고 결국은 그것이 육도윤회(六途輪廻)의 근본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거거든.

 

그래서 전생(前生)에 다 업연(業緣)으로 만난 것이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내고 다 그렇거든. 업연으로 만났기 때문에 좋은 일 보다는 근심 걱정 속상한 일이 더 많아, 일생을 살다보면.

 

그러니 내가 지어서 만났고 내가 지은 업연으로 다 받게 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대번에 하루 아침에 탁! 끊을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런 용기도 있을 수가 없고 또 그렇게 끊는다고 한다면은 가정이 파탄이 되고 큰일나는 것이고 그러니까,

 

그저 살되,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해 나가면 자연히 모든 일이 다 풀려가는 거여.

 

속상하는 일이 있어도 그 속상하는 마음을 밖으로 함부로 노출을 시키고, 함부로 표정을 짓고, 함부로 말을 하고, 함부로 행동을 하면 하루도 가정이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니, 속상하고 언짢더라도 터억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스스로 그 마음을 안정을 해 나가도록 해 나가면, 자연히 다 해결되어 갈 것이다 그말이여.

 

억지로 참는 것—우선 일단은 참아야겠지마는, 억지로 참고 또 참고, ‘참는다’고 하는 것이 능사(能事)가 아니여. 참고 참다가 나중에 그놈이 쌓이고 쌓여서 터질 때에는, 자기도 감내(堪耐)를 못 하고 막 일통을 저지르고 참 무서운 결과가 오는 것이니까.

참는다기 보다는 그 생각을 돌이켜. 숨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몇번만 그렇게 하면 그 치밀어 오르는 놈이 스르르 가라앉게 되거든.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과의 관계, 내게 닥쳐오는 모든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

자연히 거기에서 스스로 하심(下心)을 하게 되고, 스스로 하심을 하면은 만복(萬福)이 다 돌아오는 거고, 하심을 못하고 그놈을 진심(瞋心)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할려고 하면은 백 가지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말이여.(27분56초~46분1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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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살자(殺者)•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어떤 일에 장애가 생기는 것. 불도(佛道) 및 선법(善法)의 수행에 장애가 생기는 것.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큰물 ; 홍수(洪水 비가 와서 강이나 개천에 갑자기 크게 불어난 물).

*작달비 ; 장대비. 굵직하고 거세게 좍좍 쏟아지는 비.

*오인(誤認 그릇할 오/알 인) ; 잘못 보거나 그릇되게 인식함.

*필유곡절(必有曲折) ;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음.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담박(澹泊)하다 ; (사람이)욕심이 없고 순박하다.

*생이별(生離別) ; 혈육이나 부부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만날 기약 없이 헤어짐.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정심(正心) ; 마음을 곧고 바르게 가짐.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육도윤회(六途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의 인연을 부른다.

*능사(能事) ; 잘하는 일. 또는 쉽게 잘 해낼 수 있는 일.

*감내(堪耐) ; 어려움을 참고 견딤.

*하심(下心) ;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겸손하게 갖는 것.

*진심(瞋心,嗔心) ; 왈칵 성내는 마음.

 

Posted by 닥공닥정

*본고향(本鄕) ; 본향(本鄕). 고향.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7분 23초)

 

[법문] 송담스님(No.457)—1991년 11월 첫째 일요법회(용457)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야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나무~아미타불~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고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한번 본심왕(本心王)을 배반(背反)한 이래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이냐. 몇 번이나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途)에 들어갔고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을 몇 번이나 겪어왔더냐 그말이여.

몇 수십만 번을 짐승이 되었다가 날짐승이 되었다가, 긴짐승이 되었다가, 네발 달린 짐승이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이러면서 돌고 돌아서 금일에까지 왔더냐.

 

원래는 우리도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똑같은 조금도 차등(差等)이 없는 본심왕이었다 그말이여.  그 본심의 왕을 배반한 탓으로 해서 우리는 삼악도와 사생을 돌고 돌아서 몇억만 겁(劫)을 겪어 가지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더라.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고, 오늘 번뇌(煩惱)에 물든 그 번뇌염을 깨끗이 다 씻어 버리고,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다.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을 떠나서 객지(客地)로 객지로 떠돌아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떠돌이 신세로써 참 거러지 신세가 되어 가지고 그렇게 떠돌다가 비로소 자기 고향 갈 길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기쁘겠느냐 이거거든.

 

남북 이산가족(離散家族)들이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가족 상봉, 그것참 그러한 경험이 있으신 분이 많이 계시겠지만 정든 사람과 이별하고, 고향과 가족 친지를 이별하고, 한 나라에 손바닥만한 땅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한 그런 것 생각해 보면 참 기가 막히지마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원래 본심왕이였었는데 그 왕이 그 본심왕을 갖다가 등져 버리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가지고 삼악도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돌고 돌면서 갖은 고초를 당하고 금생에까지 무량겁(無量劫)을 겪어 왔을 뿐만 아니라 내생(來生)에도 무량겁을 두고 또 그런 것이 거듭될 그런 신세가,

다행히 불법(佛法)을 만나고 정법(正法)을 만나서 우리가 본심왕의 본위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면 이건 참 50억 인구 가운데에 가장 행운아라고 할까, 가장 행복한 삶을 받아났다고 할 것입니다.

 

이 정법,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을 헛되이 지내지 아니하고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화두를 잘 거각(擧却)하고 단속하고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함으로써 우리의 본고향(本故鄕)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이거거든.

 

고향을 모를 때에는 갈 곳도 없고, 가 봤자 별 목적이 없어.

그러니 '우선 잘 먹고 보자, 우선 잘 입고 보자, 나중에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갈갑시 우선 부자로 살아 보자, 좋은 차도 가져 보자, 좋은 집도 가져 보자' 하지만, 고향이 있는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았다면 한시바삐 고향길을 향해서 계속 걸어야 하거든.

 

입는 것도 얼어죽지 아니하면 족(足)하고 먹는 것도 굶어죽지 아니하면 족하고, 어쨌든지 한 걸음이라도 빨리 고향을 향해서 게으르지 않게 걸어가는 것 밖에는 어디에다가 시간과 힘을 허비할 것이냐 그거거든.(19분49초~27분1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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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일종위배본심왕~’ ; 『석문의범(釋門儀範)』 '관욕(灌浴)' 입실게(入室偈) 참고.

*본심왕(本心王) ; 본래 진여불성(眞如佛性).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사생(四生) ;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네 가지 생(生), 네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이른다.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겁(劫) ; (산) Kalpa 음을 따라 갈랍파(羯臘波) 또는 겁파(劫波)라 하고, 다시 줄여서 겁(劫)이라고만 한다.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오랜 세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거러지 ; ‘거지’의 사투리.

*이산가족(離散家族) ; 남북 분단 따위의 사정으로 이리저리 흩어져서 서로 소식을 모르는 가족.

*몽매지간(夢寐之間) ; 잠을 자며 꿈을 꾸는 동안.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인(業因)에 의하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육도윤회(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道)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내생(來生) ; 죽은 후에 다시 맞이한다는 미래의 삶.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회광반조(廻光返照) :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갈갑시' ; '삼수갑산을 갈망정',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삼수갑산(三水甲山) ;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각각 함경남도 북서쪽과 동북쪽에 있는 오지(奧地)의 지역명이다. 이 두 지역은 특히 날씨가 춥고 산세가 험하여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귀양지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삼수갑산(三水甲山)’은 ‘춥고 험한 지역’이나 ‘유배지’ 등과 같은 일반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삼수갑산을 가다 ; ‘멀고 험한 곳으로 가다’ ‘매우 어려운 지경에 이르다’의 의미를 지님.

*한시바삐 ; 조금이라도 빨리.

*족하다(足-- 충족하다·가득 참 족) ;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다.

 

Posted by 닥공닥정
ㅁ/무영수2018. 9. 4. 08:21

*무영수(無影樹 없을 무/그림자 영/나무 수) ; 그림자 없는 나무.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저선(無底船 밑바닥이 없는 배)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19분 35초)

 

[법문] 송담스님(No.457)—1991년 11월 첫째 일요법회(용457)

 

일주무영수(一株無影樹)를   이취화중재(移就火中栽)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부대삼춘우(不待三春雨)라도 홍화난만개(紅花爛漫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주무영수(一株無影樹)를  이취화중재(移就火中栽)다.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를 불 속에다가 옮겨 심어서 재배를 했더라.

 

부대삼춘우(不待三春雨)라도, 삼춘(三春)—봄, 삼춘의 비를 기다리지 안 해도 홍화(紅花)가 난만개(爛漫開)다. 붉은 꽃이 난만히 피었더라.

 

나무는 다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여. 큰 나무나 작은 나무나 그림자가 다 있는 것인데, 이 한 그루의 나무는 그림자가 없는 나무여. 그 그림자 없는 나무를 땅에다가 심는 것이 아니라 불구덩이 속에다가 심었더라.

 

그림자 있는 나무를 땅에다 심으면 반드시 비가 내려야 그 수분을 흡수해 가지고 다 자라게 되고 꽃도 피고 그럴텐데, 이 그림자 없는 나무는 땅에다 심지 않고 불구덩이에다 심었어.

그러기 때문에 봄비를 기다리지 아니해도, 봄비가 오지 안 해도 그 그림자 없는 나무에서 그 붉은 꽃이 그저 곱게 곱게도 피었더라 그거거든.

 

이 그림자 없는 나무, 이것은 그 나무 모양이 푸른 것도 아니요, 노란 것도 아니요, 빨간 것도 아니여. 일체 모양이 없는데, 어떻게 그 나무를 또 불구덩이 속에다 심느냐 그거거든.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고, 아무리 알라고 해도 알 수 없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그놈을 나무에다가 비유해서 읊은 시(詩)다 그거거든.

 

그 나무를 왜 하필 불구덩이에다 심느냐 하면, 우리 중생의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요, 그 몸뚱이 속에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항상 훨훨 타고 있거든.

그 불구덩이 속에, 탐진치 삼독에 훨훨 타오르고 있는 그 불구덩이 속에다가 이 그림자 없는 나무를 한 그루를 심었더라.

 

이 우리의 몸뚱이는 항상 이 몸뚱이 자체는 똥과 피와 오줌 고름 모다 그런 것이 속에 가득차 있는데, 그것을 엷은 가죽으로 싸아 가죽 주머니 속에다 그것을 담어놨다 그말이여.

그래서 나오느니 아홉 구멍에서 항상 더러운 것이 꾸역꾸역 기어나와. 매일 같이 아침 저녁으로 씻고 닦고 분을 바르고 향수를 발라봤자 아홉 구멍에서는 끊임없이 더러운 것이 기어나오거든.

 

그리고 그 더러운 똥주머니속에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그 마음의 불, 그 탐진치 삼독의 불이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거든. 훨훨~훨훨훨 타올라.

혹 부처님 경전을 읽거나 이렇게 법문을 들을 때에는 잠시 그것이 꺼진 듯 했다가 금방 돌아서면 도로 타오르거든.

 

어떻게 하면 이 똥주머니를 좋게 가꾸며, 영양을 섭취하고 건강관리를 하고 그리고 또 예쁘게 옷을 입히고 단장을 할까? 거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갖는데,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는 이 탐진치 삼독의 불 그놈을 잡드리하는 데는—물론 이 자리에 계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참 그 문제 때문에 지금 여기에 오시고 정진(精進)을 할라고 애쓰신 분들이지만 세계 50억 60억 인구가 거개가 다 별로 그 그림자 없는 나무를 가꾸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 몸뚱이는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혀봤자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금방 무너져 버린거여. 십 분도 못 가서 내장부터서 썩어 들어가는 것이여.

그렇게 저를 위해서 참 몇십 년간을 공력을 들여서 봉양(奉養)을 했건만 한숨에 배신을 해 버려.

 

그놈 받들다가 참, 속담에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고, 그놈 하나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단속하다가 결국은 가는 것은 잔뜩 업(業)을 짓고 결국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버리고 만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그림자 없는 나무가 불구덩이 속에 심어져 있는데, 그냥 그대로 놔 둬도, 삼춘(三春)의 비를 맞지 않아도 붉은 꽃이 난만(爛漫)하게 필 수가 있을까?

그 타오르는 불속에 있는 그림자 없는 나무를 잘 가꾸어서 거기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그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할라면 정말 나의 모든 것, 이 몸뚱이와 우리의 모든 정신을 거기에다 바쳐서 그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할려고 노력을 해야 그림자 없는 나무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봄비는 필요가 없어. 봄비가 온다고 해서 불속에 있는 그림자 없는 나무가 꽃이 필 리는 없거든.

그래서 봄비는 기다릴 것은 없으나, 정말 발심을 해서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닫고 명예와 권리와 재산과 모든 그런 오욕(五慾)이 정말 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는 철저한 발심(發心),

그리고 ‘이 문제는 오직 내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 결심,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신념.

 

그러한 바탕 위에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話頭)를 간택 받아 가지고 이 화두에 대한 의심,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임자년 녹음법문을 통해서 여러분은 아주 잘 들으셨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염념상속(念念相續)하고, 오직 인생으로 태어나서 이것 밖에는 할 것이 없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만 있다면, 앉아서도 '이뭣고?'서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 누면서도 '이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가만히 있어도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듣고, 몸뚱이를 통해서 모든 것을 감각하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생각을 통해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때로는 성을 내고 때로는 슬퍼하고 기뻐하고, 우리는 아무 그런 생각없이 완전 무념(無念)의 경지에는 단 1분 동안도 있어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생각이 일어나고, 무엇인가 육근(六根)을 통해서 무엇인가 알음알이가 움직일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그 곳에서 화두를 드는 것 뿐이여.

망상(妄想)이 일어난다고 조금도 걱정할 것도 없어. 그 망상 일어나는 그 찰나에 떠억 고대로 놔둔 채, 일어나는 망상을 없앨라고 하지 말고 그대로 놔둔 채, 터억 ‘이뭣고?’ 화두만 거각(擧却)하면 되는 것이여.

 

학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똑똑하고 안 똑똑한 것도 상관 없고, 남자니 여자도 따질 것도 없고, 출가 재가도 따질 것도 없어.

 

앉았을 때는 앉아서 ‘이뭣고?’

섰을 때는 서서 ‘이뭣고?’

슬퍼하는 생각 일어날 때는 슬픈 그 생각에 오래 잠겨 있지 말고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속상하는 생각에 왜 오래 거기에 머물러 있느냐 그말이여. 속상하는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터억 숨을 들어마셔. 내쉬면서 ‘이뭣고?’

 

세상에 이보다 더 간단하고도 쉬운 법이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그 괴로움을 이기고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가 있느냐.

그렇게 해서 자꾸 거각하고 또 거각하고.

 

‘화두가 잘 안 들린다, 망상 때문에 화두가 잘 안 들린다,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안된다’

'안된다'고 걱정할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 그말이여, 안되면 다시 들면 그만이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걱정할 것이 뭐 있느냐 그말이여, 일어난 줄 알면 ‘이뭣고?’거든.

 

‘이뭣고?’ 이 공안,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이는 무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는 분은 정전백수자,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시는 분은 판치생모,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자꾸 거각해서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해 나가거든.

 

거기에 무슨 망상이 거기에 붙으며, 붙어봤자 그냥 놔둔 채 화두만 들면 망상은 저절로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건데.

이렇게 정성을 들이고 노력을 하는 것인데, 그럼으로써 거기에 의단을 타파(打破)하고 그래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이 도리(道理)는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몸으로써 경험을 하고 깨달음으로써 우리에게 증명(證明)을 해 주신 것이여. 이 세상에 이것밖에는 믿을 것이 없고 이것밖에는 할 것이 없다 이거거든.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자식을 낳기를 원하고, 재산이 많지 않은 사람은 많은 재산을 갖기를 원하고, 명예나 권리가 없는 사람은 갖은 수단을 써서 그런 것을 구하지만 그 마음먹은 대로 다 구해지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설사 뜻대로 이루어졌다 해도 그건 영원성이 없고 잠시 그러다가 또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가는 거여.

 

그런데 이 일대사 문제는 자꾸 하고 또 하고 하면 아무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마는 그 속에 신심(信心)이 나고 환희심이 나고, 더 분심(憤心)이 나고 더욱 해 갈수록 더 발심이 되는 거여.

‘내가 어쩌다 이런 좋은 법을 만났을까? 내가 만약에 이 법을 안 만났으면 내 신세가 어떻게 되었을까?’ 해를 거듭할수록 이렇게 신심이 굳건해져 가고.

 

그렇다고 해서 급한 생각을 낼 필요가 없거든. 급한 생각을 낸다고 해서 공부가 더 잘된 것이 아니여.

초심(初心), 초발심(初發心), 처음으로 이제 발심을 해 가지고 참선을 시작한 사람은 그 초발심의 그 강렬한 신심으로 우격다짐으로 막 몰아부칠라고 그러거든.

 

초발심자가 그만한 분심이 있어야 하고 그만한 열의가 있어야 하기는 하지만 차츰차츰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여법(如法)하게 해 나가다 보면 그런 만용적인 우격다짐 식의 그러한 신심이 차츰 순화가 되고,

그래서 이 몸뚱이와 생각을 알날신심(遏捺身心)—막 완력으로 몰아붙이고 몸뚱이를 들볶으고 생각을 너무 지나치게 막 몰아대고—하는 그런 것이 차츰차츰 순화가 되어서 정신을 올바르게 가다듬고 나가는 묘한 관(觀)을 스스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까지는 정말 참 열심히 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서 그럭저럭 하다말다 해 가지고서는 안되는 것입니다마는.(처음~19분4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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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일주무영수(一株無影樹)~’ ; 『소요당집 외(逍遙堂集 外) - 한글대장경 169』 (동국대학교 역경원) 37쪽 소요 태능(逍遙太能)의 ‘일선화(一禪和)에게 답함’의 둘째 게송 참고. (一株無影木 移就火中栽 不假三春雨 紅花爛漫開)

*삼춘(三春) ; 봄의 석 달. 맹춘(孟春), 중춘(仲春), 계춘(季春)을 이른다.

*맹춘(孟春 맏·첫·처음 맹/봄 춘) ; ①초봄(이른 봄). ②음력 1월.

*중춘(仲春 버금·둘째·가운데 중/봄 춘) ; ①봄이 한창인 때라는 뜻. ②음력 2월.

*계춘(季春 끝·마지막·막내 계/봄 춘) ; ①늦봄(늦은 봄). ②음력 3월.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니(優婆尼)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정진(精進) ; 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불교] 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봉양(奉養) ; 받들어 모시고 섬기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난만하다(爛漫-- 빛날 란/넘쳐 흐를 만) ; ①(꽃이)한창 만발하여 성하다. ②(빛이나 광채가)어지러울 정도로 강하고 선명하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귀(耳根)·코(鼻根)·혀(舌根)·몸(身根)·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경(六境) ;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알음알이 ; ①어떤 인식대상에 대해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그 인식대상에 대한 형상 즉 이미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②마음이 번뇌에 덮여있는 상태, 말하자면 거울에 때가 낀 상태에서 가지는 이러한 앎을 깨달음[무루혜 無漏慧-모든 번뇌를 해탈(解脫)한 성자(聖者)의 지혜]과 구분하여 알음알이라 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타성일편(打成一片) : 좌선할 때 자타(自他)의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열 가지 병이 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회광반조(廻光返照) :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우격다짐 ; 억지로 우겨 내몰거나 강요함.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알날신심(遏捺身心  누를 알/누를 날/몸 신/마음 심) ; 몸과 마음을 억누르다. 『몽산법어』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에 나오는 구절.

 

*묘한 관(觀) ; 묘관(妙觀).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ㅅ/선불장2018. 9. 2. 07:58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부처님을 만들어 내는 장소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승당(僧堂). 선방(禪房).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9분 47초)

 

[법문] 송담스님(No.792) - 2018년 하안거 해제.(용792)

 

오늘은 무술년 7월 15일(음력), 하안거 해제일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옛날 녹음기가 없을 때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 조실 스님의 법문을 육성으로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말세라 하더라도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은 과학의 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조실 스님 법문을 녹음기를 통해서 듣고, 그리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열심히 ‘이뭣고?’를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행주좌와 간에 항상 한다면 말세일수록 더욱 다행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흥망성쇠가 있고, 우리의 몸에는 생로병사가 있지마는 흥망성쇠와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 생사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길이 바로 나의 자성의 부처님을 찾는 길인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고, 벼슬이 아무리 높고 하다 하더라도 나의 자성불(自性佛)을 찾는 공부를 안 하면 돈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권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비록 말세(末世)라 하더라도 참나를 찾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나의 속에 있는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바로 현대 말세가 생부처님[生佛]이 살아계신 시대와 같은 것입니다.

 

슬플 때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참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요,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방법이 있고 길이 있는데 안 하는 것은 자기가 신심이 부족하거나 게을러서 그런 것이니 신심을 내서 게으른 생각을 이겨내고, 그 속에서 ‘이뭣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오히려 이 흥망성쇠가 있는 이 말세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철저하게 무상을 깨닫고 참나를 찾는 공부를 하기에 좋은 선불장이 되는 것입니다.

 

어피차 한번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은 아무리 권리가 높고, 재산이 많고, 힘이 세다 하더라도 그것은 면할 수가 없는데, 그 흥망성쇠 속에서 항상 ‘이뭣고?’를 하고 최상승법을 믿고 열심히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수행을 한다면,

이 말세야말로 부처님을 깨닫고 나의 몸속에 있는 자성의 부처님을 찾는 열심히 최상승법을 실천을 해 나간다면 말세일수록에 우리로 하여금 무상(無常)을 깨닫고 참나를 깨닫는 가장 좋은, 부처님 찾는 선불장이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 모이신 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청신사・청신녀 여러분은 산승이 이렇게 구십이 넘은 늙은이로서 이렇게 간곡한 마음으로 여러분께 이 말씀을 드리게 된 보람을 산승(山僧)은 느낍니다.

여러분은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을 의지해서 열심히 ‘이뭣고?’를 해서 이 받기 어려운 사람몸 받은 이 말세에 여러분은 나를 찾는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리라고 산승은 굳게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분은 손을 한번 들어보세요.

(대중 손 든 다음, 박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세에 비록 우리가 만났지마는 이렇게 최상승법을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이 그것을 듣고 열심히 실천을 하겠다고 손을 들어주셨으니 산승은 굳게 믿겠습니다.

(대중 박수)

 

권리가 아무리 높고, 재산이 아무리 많고, 힘이 아무리 세다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는 생사(生死)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있거나 없거나, 권리가 있거나 없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열심히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내가 나의 마음의 부처를 찾는 공부를 열심히만 한다면 이 말세가 바로 부처님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박수를 치고 손을 들어주신 것을 정말 믿습니다.

 

이것을 열심히 해야 불법을 옳게 믿는 것이고, 이것을 열심히 해야 생사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서 열리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산승이 이렇게 간곡히 열심히 여러분에게 하는 이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아니하면 후생에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가서 무엇을 가지고 대답을 할 것인가.

그때 가서 ‘아! 내가 그때 그 법문을 듣고 열심히 이뭣고?를 안 했구나’하고 그때 가서 후회하고 한탄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산승이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말을 명심을 하고 열심히 ‘이뭣고?’를 해서 결정코 자성불을 깨달아서 견성성불하실 것으로 확신을 합니다.(11분9초~20분5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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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700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자성불(自性佛) ; 자성(自性)이 즉 부처라는 뜻.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생부처님[生佛] ; ‘현실로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는 의미로, 부처님과 같이 덕이 높은 사람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로 고승(高僧 행동이나 덕이 높은 스님)을 찬미하는 호칭이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교법(敎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을 시기별로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으로 분류하는데,

처음 정법시대는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를 얻게 되지마는, 그 다음 상법시대는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그 다음 말법시대는 곧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만 남아 있어 수행하고 증득하는 자가 없는 시기이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사염주(四念住)를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될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곧 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 다 반드시 견성성불한다」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다만 우리는 사학(邪學)과 외도(外道)가 번성한 이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뿐 아니라 정법은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〇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Posted by 닥공닥정
ㅈ/정법(시대)2018. 9. 2. 07:18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교법(敎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을 시기별로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으로 분류하는데,

처음 정법시대는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를 얻게 되지마는, 그 다음 상법시대는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그 다음 말법시대는 곧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만 남아 있어 수행하고 증득하는 자가 없는 시기이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사염주(四念住)를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될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곧 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 다 반드시 견성성불한다」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다만 우리는 사학(邪學)과 외도(外道)가 번성한 이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뿐 아니라 정법은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10분 44초)

 

[법문] 송담스님(No.792) - 2018년 하안거 해제.(용792)

 

인생여환우여몽(人生如幻又如夢)이요  낙일종시고일장(樂日終時苦日長)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야심두무정혜(若也心頭無正慧)하면  사장하물답명왕(死將何物答冥王)고

나무~아미타불~

 

인생여환우여몽(人生如幻又如夢)이요  낙일종시고일장(樂日終時苦日長)이다.

인생은 환상과 같고 또 꿈과 같은 것이며, 즐거운 날이 끝나면 괴로운 날이 길도다.

 

만약 마음에 바른 지혜가 없으면,(若也心頭無正慧)

죽어서 무슨 물건으로 염라대왕 앞에 대답을 할 것인가.(死將何物答冥王)

 

이 게송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읊으신 게송(偈頌)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빈부귀천과 생로병사 속에서 일생을 살다가 가는데, 냉정히 살펴보면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못하고 꿈과 같은 것이다 그말이지. 부자로 살거나 높은 벼슬을 하거나 권리를 행하거나 다 환상이요 꿈이다 그거거든.

즐거운 날이 있으면 잠시간이요, 금방 즐거움이 끝나면은 고통 오는 날이 돌아온다 그말이지.

 

만약에 마음에 바른 지혜가 없다면, 참선(參禪)을 해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사장하물(死將何物)로 답명왕(答冥王)고, 죽어서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가면 무엇을 가지고 대답을 할 것이냐.

 

이 게송은 정말 우리 말세(末世)에 태어났으나 다행히 불법을 믿고, 이 자리에 모이신 비구・비구니・청신사・청신녀 여러분은 이 법당에서 서산대사의 진리가 담긴 이 게송을 우리가 같이 듣게 됩니다.

 

세상은 비록 말세가 되어서 세계가 여기저기서 전쟁을 하고 조용할 날이 없지마는 우리는 다행히 불법을 믿고, 또 이 자리에 모여서 전강 조실 스님의 최상승 법문(法門)을 다 같이 듣고 또 산승(山僧)의 간절한 말씀을 여러분에게 하고, 여러분이 듣게 된 인연을 생각하면 말세라고 한탄할 것도 없고.

비록 말세라 하더라도 우리가 정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면 바로 말세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7월 15일(음력), 하안거 해제날이고 백종날입니다.

온 세계가 서로 전쟁을 하고 헐고 뜯고 조용한 날이 없지마는 우리가 정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면 말세라고 조끔도 한탄할 것도 없고,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모다 그런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데에 관여할 것도 없고, 말세일수록 더욱 무상(無常)을 깨닫고 열심히 정법을 믿고 ‘이뭣고?’를 한다면 오히려 이 말세에 태어난 것이 대단히 다행하고 다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천년 전에 태어났거나 삼천년 전에 부처님 때에 태어났거나 불법을 믿고 참나를 찾는 공부를 하면 삼천년 전이나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을 것입니다.

어피차 인생이라 하는 것은 한번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서 죽기 마련인데, 그 생로병사 속에 살면서 영원을 사는 길이 바로 나의 불성(佛性)을 찾는 ‘이뭣고?’인 것입니다.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뭔 일이 마음대로 되어도 ‘이뭣고?’ 마음대로 안 되어도 ‘이뭣고?’를 찾아서 나의 몸속에 있는 나의 부처님을 찾는 참선을 한다면 말세라고 해서 조금도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다 흥망성쇠의 이야기고 생로병사의 사건들이지마는 그럴수록에 항상 나의 자성불(自性佛)을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오히려 온 세상이 무상하고 흥망성쇠가 있을수록에 우리는 무상을 깨닫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말세라고 해서 무엇이 부족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천년 전에 부처님 계실 때 태어났어도 불법을 믿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고, 비록 말세에 태어났어도 정법을 믿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말세가 한탄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이 모두가 흥망성쇠의 사건들이지마는 그 흥망성쇠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나의 자성(自性)의 부처님을 찾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성 부처님을 찾는 것이, 이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이요, 말세를 정법시대로 만드는 오직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처음~11분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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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인생여환우여몽(人生如幻又如夢)~'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계쌍인소사(誡雙印小師, 쌍인소사에게 훈계함)'

*서산대사(西山大師) ; (1520~1604) 조선의 스님. 평남 안주 출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西山)이라고도 함.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함.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동배(同輩) 여러 명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지내다 숭인(崇仁)의 설법을 듣고 남아 여러 경전을 정독하고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18세. 그 3년뒤 21세에 계(戒)를 받음.

 

그 후 명산 제찰(名山 諸剎)을 찾아다니면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벗을 찾아 봉성「鳳城(南原)」을 지나가다 우연히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옛 사람 일찌기 일렀더구나.

금문일계성(今聞一鷄聲)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닭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나니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도다.

홀득자가저(勿得自家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문득 자가 것을 깨닫고 나니 온갖 것이 다만 이뿐이로세.

천만금보장(千萬金寶藏)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팔만대장경도 본시는 한 장 빈 종이로세.

 

그 뒤로 관동(關東)의 명산을 두루 편답하니 그 때 나이가 30이었다.

1552년(명종 7)에 새로 부활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고, 3년 후에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으나 2년 후에 그 직책을 사양하고 금강산·지리산·묘향산에서 수행함.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하니, 그는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평남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켜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79세의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감. 그 뒤로도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등지를 왕래하며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1604년(선조 37) 정월 23일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함. 세수 85세, 선납(禪臘) 65.

 

그 날 아침 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남여(籃輿 : 주로 산길에 쓰이는 뚜껑이 없고 의자같이 된 가마)를 타고 여러 암자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신 후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를 갖추고 불전에 분향한 다음 스스로 붓을 들고 조실에 들어가서 그의 자화상에 이렇게 적었다. 즉

 

팔십 년 전 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 년 후 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 오늘은 내가 너로다.

 

하고, 다시 임종게(臨終偈)로써 (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

억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불에 떨어진 흰눈 한 조각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이렇게 써놓고 고요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저서 : 삼가귀감(三家龜鑑)·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청허집(淸虛集)·운수단(雲水壇).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자성불(自性佛) ; 자성(自性)이 즉 부처라는 뜻.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