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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30 용화선원((No.587-2))—'조실(祖室)'이란? | 고봉 · 금봉스님의 전강스님 찬(讚) | 전강스님께서 남기신 녹음법문 | 용화사에서 조실로 전강스님을 모시는 이유.
  2. 2021.08.26 이뭣고((No.233))—어떠한 근기라도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말세 중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수행법인 간화선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3. 2021.08.21 인과((No.479))—(게송)見色非干色~ | 업 위에 다시 또 업을 지어서 생사윤회를 한다 | 마구니를 퇴치할 수 있는 좋은 무기는 '이뭣고?'.
  4. 2021.08.19 신통(No.198)—(게송)得之在心應在手~ | 공부 요점, 모든 경계 위에서 화두를 들어라 | 사바세계가 도닦기 좋다 | 대신통(大神通)과 소신통(小神通).
  5. 2021.08.14 의심(화두드는 법) ((세등51))—대의지하 필유대오 | 최상승법은 일념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는 것 | (게송)摩尼珠人不識~ | 깨닫기를 바랄 것이 없다.
  6. 2021.08.01 이뭣고((No.306))—화두 게문 : 示[佛名] 有一物於此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 是甚麼 | ‘이뭣고?’ 공덕 | 심농(心農) | 법의 기쁨 | 참선은 우리의 본업(本業).
  7. 2021.07.30 인과((No.306))—내가 과거에 지어 금생에 받게 되는 것 | 계는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마땅히 잘 지켜야 | 연비와 참회.
  8. 2021.07.27 용무생사((전강선사 No.026))—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다.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 천칠백 공안이 그 자물쇠통 채워 놓은 것이 다 달러.
  9. 2021.07.26 오계((No.306))—계 · 정 · 혜 |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계율을 잘 지켜야 | 불법의 목적 :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만(覺滿) | 소승계와 대승계 | 연비와 참회.
  10. 2021.07.24 비유((No.117))—오무기(五武器) 왕자 이야기.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지혜(智慧)의 무기 / 지혜의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
ㅇ/용화선원2021. 8. 30. 08:32

용화선원((No.587-2))—불조(佛祖)와 같은 법력 · 도력 · 원력 · 덕행과 시절인연과 지연과 복력을 다 갖추고, 나아가서 건강까지도 갖추어야 조실(祖室)이라고 하는 직책을 가지고 부처님의 지혜 법등(法燈)을 높이 들어서 모든 후배 도반들에게 봉사하는 직책.

만공 스님의 제자이신 고봉 스님과 금봉 스님의 말씀 "말세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태어났을까? 만공 스님도 꼼짝을 못했거든. 그 혜(慧)가 빠르기를 번갯불과 같았다" |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 | 용화사에서 조실(祖室)로 전강 스님을 모시는 이유 | (게송)금생약불종사어~, 일파유조수부득~.


*용화선원(龍華禪院) ; 용화선원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수행하는 도량입니다.
조실인 전강선사께서는 23세에 견성하시어 혜봉, 혜월, 용성, 한암, 보월, 만공 등 당대의 6대 선지식과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의 법맥을 이으셨습니다.

그 후 1961년에 용화사에 선원을 개설하신 이래로 수많은 수행자들을 제접하시다가 1975년에 열반하시면서 송담스님께 법좌를 물려주셨고, 이후 용화사는 오늘에 이르도록 참선 수행도량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용화선원의 모든 운영은 스님들과 신도들의 수행 정진을 위한 공간으로서 움직여지고 있으며, 특히 일반 신도분들에게는 법회를 중심으로 신행활동을 하면서 더 나아가 불교의 진수인 활구참선을 널리 수행할 수 있도록 보살선방과 시민선방을 개설하여 참선입문에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13분 12초)

 


[법문] 송담스님(No.587-2)—1997년 동안거 해제 법어(97.02.22) (용587-2)

말씀이 나왔습니다마는, 이 '조실(祖室)'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와 같은 법력(法力)과 불조와 같은 도력(道力)과 불조와 같은 원력(願力)과 불조와 같은 덕행(德行)과 시절인연(時節因緣)과 지연(地緣)과 복력(福力)을 다 갖추고, 나아가서 건강(健康)까지도 갖추어야 조실(祖室)이라고 하는 직책(職責)을 가지고 부처님의 지혜(智慧) 법등(法燈)을 높이 들어서 모든 후배 도반들에게 봉사(奉仕)를 하는 직책입니다.
지금 열거한 그런 여러 가지의 힘을 갖추지 못하고, 되나캐나 조실(祖室)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은 자기가 죽는 길이며, 대중(大衆)을 죽이는 것이며, 불법(佛法)을 망하는 일이라고 산승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전강(田岡) 대종사(大宗師)는 우리가 존경하는 만공(滿空) 스님의 제자이신 고봉(高峰) 스님, 또 만공 스님의 제자이신 금봉(錦峰) 스님, 그러한 스님께 들은 바로는, "말세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태어났을까? 만공 스님도 꼼짝을 못했거든. 그 혜(慧)가 빠르기를 번갯불과 같았다" 그런 큰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금봉 스님께는 내가 직접 들었고, 고봉 스님께는 내가 직접은 듣지 못하고 그 말을 가깝게 모신 시자(侍者)를 통해서 그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은 무슨 일을 처리한 데에는 두서(頭緖)가 없으셨고, 모도 참 '제삼자(第三者)가 어떻게 생각할 건가?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전혀 그런 것을 고려하시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뭐 이러쿵저러쿵, '돈 얘기를 많이 하시네 어쩌네' 녹음법문에도 돈 얘기도 많이 하신 것은 사실이나, 그 돈을 참 좋아하시고 그러시는 것 같애도, 내가 30여 년을 모신 바로는 전혀 돈을 모르셨습니다. 좋아하시기는 하면서도 전혀 그걸 모르셨고.
돈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그 돈을 함부로 쓰시지도 않고 고스란히 다 예금을 해 놓고 열반(涅槃)하시면서 나에게 그것을 다 전(傳)하고 가셨습니다. 그것으로 대전에 불양답(佛糧畓)을 사놨다가 그것을 팔아서 여기 용궁장, 이 터를 사서 지금 시민선원도 하고 또 주차장도 하고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마는.

좋아하신 것 같애도 전혀 애착심(愛着心)이 없었고, 그것을 하시기를 말년에 자꾸 그 통장을 나를 주실려 그러고, 나보고 자꾸 법상(法床)에 올라가라고 하셨지만, 저는 극구(極口) 그것을 사양을 했습니다.

"조실 스님, 돈은 조실 스님 쓰시고 싶은 대로 쓰십시오. 병든 수좌(首座)들에게 약값도 주시고 여비(旅費)도 주시고 마음대로 쓰시지 그걸 뭐하러 그걸 저한테 전할라고 하십니까? 제가 능력이 있으면 조실 스님이 돈을...."
"그걸 내가 나 쓸라고 내가 돈을 모인 것이 아니다. 너를 위해서 내가, 돈을 내가 모인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시길래.

"저, 제가 힘이 있으면 조실 스님이 돈을 전해 주시지 안 해도 내가 얼마든지 하는 것이지, 돈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니가 참 내 뜻을 모르는구나" 하시고, 그렇게 참 섭섭하게 생각을 하셨습니다.

내가 주변이 없어서 신도한테 '돈 내라' 그런 얘기도 잘 못하고, 또 구변(口辯)이 없어서 설법(說法)도 잘 못하고, 또 내가 그런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러한 여러 가지 능력, 힘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조실(祖室)을 안 하고, 조실 스님께서 열반을 하셨어도 우리가 조실 스님 법문에 의지해서 공부하면, 우리가 조실로, 살아계신 조실(祖室)로 모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러한 것은 여담(餘談)입니다마는, 오늘 이런 말씀을 올릴 수밖에 없어서 이 자리를 빌려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조실 스님께서 (당신) 열반하신 뒤를 걱정을 하셔 가지고, 열반하시기 전 한 10년 이래로 마치 녹음기(錄音器)가 나와 가지고 그 녹음기를 통해서 날마다 대중을 앞에 놓고 그 기력(氣力)이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녹음을 해 놓으셨습니다.
당신 「일대기(一代記)」에 대해서도 하셨고, 『초발심자경(初發心自警)』이나 『몽산법어(蒙山法語)』나 『선가구감(禪家龜鑑)』이나 또 이 닥치는 대로 후배 우리들을 위해서 많은 요긴(要緊)한 법문(法門)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해제일을 맞이해서 조실 스님의 사자후(獅子吼)를 우리는 다같이 듣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열반(涅槃)하셨지마는, 우리는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을 교주(敎主)로 모시고 불교(佛敎)를 믿고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22년 전에 열반하셨지만,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이렇게 우리는 꼭 생존 시에 하신 법문과 같이 우리는 경건하고 엄숙하게 법문(法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조실 스님 지난 추모재 때도 간략히 언급을 했습니다마는—제방(諸方)에 다른 선원(禪院)은 나는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스님을 조실로 모시건 다 그 문중에서 존경할 만한 법력(法力)이 있는 스님을 조실로 모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우리 이 용화사와 전강 조실 스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까지라도 조실 스님 이상 가는 대도인(大道人)이, 앞에 말한 그런 여러 가지 법력(法力)과 도력(道力)과 원력(願力)과 덕행(德行)과 복력(福力)을 다 갖추신 그런 대도사가 나온다면 물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조실로 추대된들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러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조실의 이름을 띠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나 대중을 위해서나 우리 정법문중(正法門中)을 위해서 삼가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과거에 참 숙세(宿世)에 깊은 인연(因緣)이 있어서 오늘 이 자리에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된 것을 산승은 대단히 감격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오늘 해제는 했지마는, 어느 산중(山中)에 가서 또 방부(房付)를 들인다 하더라도, 지난 한철보다도 훨씬 더 알차고 짬지게 정진(精進)을 하셔서 도업(道業)을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로다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금생에, 오늘 이렇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산승(山僧)이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드렸는데, 그리고 서산(西山) 스님의 법문과 5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법문을 소개를 했습니다마는, 이런 말씀을 깊이 명심(銘心)을 하고 따르지 아니하면, 후세에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이것입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한 줌 버들가지를 거두어 얻지 못해서, 거두어 잡지 못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玉欄干)에 맺어두노라.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오늘 회향(回向)을 맞이했습니다. 회향을 맞이해서 소원을 모다 성취하고 보람 있는 새해를 맞이해서 또 열심히 법문 듣고 그 법문에 의해서 알뜰하게 생활을 통해서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합니다.(26분~39분1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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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ㅇ/이뭣고? 화두2021. 8. 26. 06:48

이뭣고((No.233))—어느 외국인 수행자의 물음 | 어떠한 근기라도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말세 중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수행법인 간화선 |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참선법은 최상승법, 교외별전(敎外別傳) |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송담스님(No.306)—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회]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64분6초~66분26초) [ 참선법 A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를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이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큰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큰 메겡이로 메쳐서 그 간장독이 쩍!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佛祖)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송담스님(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

 

 

 

(1) 13분 37초.

 

 

(2) 12분 42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1)-----------------

어제 외국(外國)에서 와서, 한국에 와서 수행을 참선을 한 분이 몇 분이 찾아왔었는데,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만리타국(萬里他國)에서 와 가지고 그렇게 모다 정진(精進)을 할려고 애를 쓰다가, 구산(九山) 방장(方丈) 큰스님께서 열반(涅槃)하셨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그러면서 한 분이, "사대(四大)가 비아(非我)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이것이 내가 아니고"
모두 이 사대(四大)는 육체(肉體)란 말인데, 육체가 사대로써 이루어졌으니까, '사대가 내가 아니다' 그 말은 ‘요 육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아니다’ 그 말이여.

"망념(妄念)도 본적(本寂)이다" 망상 망념도 그것이 본래(本來) 적적(寂寂)한 것이다 그 말이여.
"적요상지(寂寥常知)해서" 적적허니, 적적한 가운데에 항상 안다 그 말이여. 적적(寂寂)해서 모든 견문(見聞)이 끊어졌는데 끊어진 가운데에 항상 앎이 없는... 앎이 없이 아는 놈이 있다 이건데.
"이러한 경계에 떠억 앉었으니 도무지 의심(疑心)이 일어나지를 안 하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겄습니까? 아무리 화두를 방장(方丈) 스님한테 무자(無字)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을 해도 도무지 의심이 안 난다" 이것입니다.

"앉았으면 환허니 망상(妄想)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이 세상에 이 몸뚱이가 있는 것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도대체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이러한 경지에서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하니 무슨 의심이 나지를 않으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겄습니까?"
말인즉슨은 '사대(四大)가 내가 아니요, 망념(妄念)이 본래적적(本來寂寂)해서 적요상지(寂寥常知)'한 그러한 경계는 옛날 고조사(古祖師)들, 선지식의 어록(語錄)에나,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경전(經典)에도 많이 그러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四大)가 비아(非我)'니, '망념(妄念)이 본적(本寂)'이니, '적요상지(寂寥常知)'니, 그러한 말을 듣고 그러한 말의 뜻을 알아 가지고 그러한 경계를 따악 이렇게 맛보면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단히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이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기가 맥히지.
그러나 이것은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나, 그러한 경계를 지켜 나가고 맛보고 앉었으면 이것은 올바른 수행법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 이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參禪)하는 법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관법(觀法)으로 많이 공부를 지도하고 또 관법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질박(質朴)하고 강직(剛直)하고 그래서 그러한 수행법을 써도 이 공부를 바로 하고 또 깨달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지해(知解)가 날카로워져. '알 지(知)' 자, 알음알이, 알음알이의 그 지해가 날카로워지고 근기(根機)는 차츰차츰 경박해지고 그래 가지고 그러한 식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자칫하면 묵조사선(默照死禪)에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닌 경계를 긴 것으로 착각을 해서 삿된 경계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육조 스님으로부터서 시작을 해 가지고 임제 스님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을 통해서 학자를 제접(提接)을 하고, 대혜종고 선사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이 완전히 체계화가 되었습니다.

원래 이 화두(話頭)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이뭣고?'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의 화두(話頭)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인데, '대관절 이놈이 무슨 물건이냐?' 이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는 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들을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以前)에,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도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기 이전에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自然的)으로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인생(人生)이란 게 뭐냐?
어데서 왔으며, 뭣하러 왔으며, 또 어데로 가는 것이냐?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썽도 낼 줄 알고, 착할 때에는 불보살(佛菩薩)과 같고, 한 생각 뒤집어지면 찰나간에 나찰귀신(羅刹鬼神)처럼 포악하게도 될 수 있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연적(天然的)으로 주어진 이 과제를, 그것을 갖다가 어떠한 근기(根機)의 사람이라도, 상근(上根)이나 중근(中根)이나 하근(下根), 어떠한 근기라도 고대로만 하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보살(菩薩) 화현(化現)이나 선지식이 출현(出現)하셔서 우리 말세(末世) 중생(衆生)들에게 더 적합한 훌륭한 수행 방법을 개발을 하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때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만큼 훌륭한 수행법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막연하게 화두(話頭)도 없이 요요상지(了了常知)한 그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러니, 그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외도(外道)들이 배꼽 밑에 환하게 불이 켜진 것을 들여다보도록 그렇게 지도하는 그러한 그 외도에 수행법도 있습니다마는,
물론 우리 불교에도 아침에 해가 뜰 때에, 해가 벌겋게 뜰 때 그 해, 둥그런 그 해를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하루 종일 그 둥그런 벌-건 달이(해가) 양 눈썹 사이 미간(眉間)에 종일 그것이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관(觀)하고, 또 달이 뜰 때는 그 달을 한 시간 이렇게 쳐다보고 있다가 나중에 그 달이 없을 때에도 두 눈썹 사이에 그 달이 항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하고, 이러한 일륜관(日輪觀)이니 월륜관(月輪觀)과 같은 이러한 관(觀)을 통해서 수행(修行)하는 법(法)이 우리 불법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러한 이 관법(觀法)은 이 관법을 통해서 도(道)를 성취한 그런 특수한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指導下)에 하지 아니하면, 백이면 백 다 미치게 되거나 삿된 데에 빠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법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주력(呪力)을 외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력도 밀교(密敎)에서는 이 주력을 굉장히 소중하니 생각하고 그 수행하는 방법으로 이 주력을 하는데, 이것도 주력을 잘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생식기를 끊어 버린다던지, 자기가 자기의 몸에 칼로 난도질을 쳐서 피를 흘린다던지, 머리를 기둥에다 받아서 박이 터지도록 한다던지 이래서, 주력이나 또 이런 관법 같은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끊어져 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렇게 해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41분39초~55분16초)





(2)-----------------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 스님이 천하 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法擧揚)을 해 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맡었지만, 원오극근 선사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하시지 안 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 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한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갖다가 막 강짜로 압력을 가해 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어갈 때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데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생각을 내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먹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데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하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의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55분18초~1시간7분5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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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인과((No.479))—(게송)見色非干色~ | 한량(限量)없는 업(業)을 짓고 업 위에 다시 또 업을 지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된다.
마구니,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 있는 좋은 무기는 '이뭣고?' | 마구니는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다.


*인과(因果) ; ①원인과 결과. 현상을 생성시키는 것과 생성된 현상.
②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이치.
③선악의 행위에는 반드시 그 과보가 있다는 도리.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15분 16초)

 

 


[법문] 송담스님(No.479)—1992년 하안거 해제(92.08.13) (용479)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성색불애처(聲色不礙處)가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색(色)을 보되 색(色)에 관계치 아니하고, 관여(關與)하지 아니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다.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어.

우리는 눈을 통해서 온갖 색상(色相)을 보는데, 그 색상이 눈에 들어오면 들어오자마자 그것에 관여를 하게 됩니다. '빨갛다 노랗다 파랗다', '크다 적다', '좋다 나쁘다' 그것이 바로 색에 관여하는 것이거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여. 무슨 소리든지 귀로 들으면, '아, 저건 자동차 소리다. 비행기 소리다. 저건 애기 소리다. 저것은 개 짖는 소리다' 거기에서만 끝나지 아니하고, '저것은 나를 해롭게 하는 소리다. 나한테 욕하는 소리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다' 온갖 사람의 말을 듣고서 그렇게 관여를 하고, 거기에서 싫어하는 생각을 내고, 미워하는 생각을 내고, 다투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고, 원한심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色相). '저 사람은 이쁘다. 미웁게 생겼다. 뵈기 싫게 생겼다. 입맛 떨어지게 생겼다' '저 아무 점께 나한테 저렇게 욕한 인간이 또 오는구나'
하루 종일 · 날마다 · 달마다 · 일 년 내내 · 일생 동안을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을 보고 그렇게 시비(是非)를 일으키고 업심(業心)이 발동(發動)을 하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를 통해서 시비를 일으키고 업이 발동을 해서, 얼굴에 그 표현(表現)이 되고 행동으로 표현이 돼.
그래서 한량(限量)없는 업(業)을 짓고 업 위에 다시 또 업을 지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데.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에,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거나 눈에 무슨 색상이 들어오거나, 처음에는 관여를 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들어오거나 말거나 거기에 걸리지를 안 해.
눈에 보이면 보인 대로 맺겨 두고,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면은—내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거나, 나를 비방(誹謗)하는 소리를 듣거나 그냥 그런대로 놔두는 거여.
귀를 막고 안 들을려고 할 것도 없고, 눈을 감고 안 보려고 할 것도 없어. 보이면 보인 대로 놔두고 들으면 들린 대로 흘려보내는 거여.

부처님께서 어느 외도(外道)를 만나셨는데, 그 외도가 입에 못 담을 비방(誹謗)을 해. 온갖 비방을, 부처님 비방을 한다. 부처님 제자들에 관한 비방, 부처님에 관한 비방, 다 얼토당토않는 소리로 갖은 고약한 소리를 해 가지고 부처님 앞에 욕을 하고 비방을 하는데, 부처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소리를 그만하라는 말도 않고 다 들으셨다 그말이여.

다 듣고 난 다음에, "이제 말이 끝났습니까?"
"네, 끝났다"고.

"응, 그러면 내가 한마디 묻겠는데, 내 집에 참 손님이 오셔서 그 주인이 참 갖은 음식을 많이 차려서 내놓고 손님한테 내놨는데, 손님이 그 음식을 안 먹고 가면 그 음식은 누가 먹어야 겠습니까?"

"그 손님이 안 먹으면 주인이 먹어야죠"
"그러면 되었다"고. 그리고서 부처님이 거기서 떠나셨습니다.

내게 당치않는 행동이나, 내게 당치않는 말로써 나를 비방을 하거나 욕을 하거나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것을 취(取)하지 아니하면, 그것에 관여(關與)하지 아니하면, 그 욕과 악한 비방은 한 사람이 다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공연한 사람을 흔들어 놓을 흔들려고 그러고, 공연한 사람을 비방을 하고 욕하고 했으면, 상대방이 그놈을 받아들이면 그리 건너가겠지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무심(無心)으로 상대(相對)해.
화두(話頭)를 떠억—그럴수록에 당치않는 소리를 하면 얼굴 하나 찌푸릴 것도 없이 화두를 떠억 들고 '이 뭣고?' 그러면 구태여 안 들을라고 할 것도 없어.

그냥 열심히 들은 것처럼 눈을 따악 뜨고 잘 들은 척하고, 들으면서 그냥 '이뭣고?'를 떠억 하란 말이여. 그러면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는 한 사람 입으로 도로 들어가는 거여.
그놈 지가 토해 낸 독(毒)을 잔뜩 들어마시고, 그 사람은 그 지은 죄업(罪業)으로 삼악도(三惡道)에 가서 고(苦)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도, 그 (욕하는) 말을 들으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뭣고?'를 하고, '판치생모'를 하고, '정전백수자'를 하고, '무자' 화두를 했기 때문에 그 공덕(功德)으로—(욕한 사람은) 한량없는 삼악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다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그 (욕한) 사람이 불법(佛法)을 믿게 될 것이다 이거거든.
같이 싸우고 그랬으면 다 같이 지옥에 떨어질 텐데, 내가 거기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시비(是非)에 말려들지 아니하고, 떠억 정심(正心)으로 상대를 하고 나는 화두를 들고 최상승법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욕한) 사람이 지은 죄 만큼은 받어야 되는 거고,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그래도 그놈을 받고 나서는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했을 때에는 불법(佛法)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그 인과법(因果法)이 역연(歷然)하고.
또 내가—그렇게 비방을 하고 욕을 한 데도—동심(動心)이 안 되고 떠억 화두를 들 수 있게끔 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많은 부처님과 많은 선지식에게 공양(供養)을 하고 선근(善根)을 심어 온 그 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나를 비방하고 욕한 데 마음이 동요가 안 되고 화두를 거각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들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이미 잘 길렀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단적으로 한 그런 예를 들었거려니와,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데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겠습니까. 팔풍(八風) 경계, 여덟 가지 종류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러한 오탁악세(五濁惡世)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가 부닥치는 많은 일들, 정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많할 것입니다마는, 이 예(例)와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를 무장(武裝)하고 그러한 '이뭣고?'에 철갑과 투구로써 무장을 하고 나간다면 그 앞에 이기지, 당해낼 수 있는...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천하 간단한 무기(武器)의 하나지마는 팔만사천 마구니를 퇴치(退治)할 수 있고, 팔만사천의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에 그러한 좋은 무기를 우리는 지닐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선지식(善知識)과 여러 도반들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 팔만사천 마구니를 우리가 그것으로 이겨 낼 수가 있느냐 하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거든.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팔만사천 번뇌(煩惱)가, 그놈이 자라고 자라 가지고 팔만사천 마구니가 되어서 자기(自己)에게 다시 핍박(逼迫)해 들어온 것이거든.
그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여. 저 타방세계(他方世界)에서 만들어져 가지고 침범(侵犯)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거든. 자기가 심은 씨가 그러한 열매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이 뭣고?' 하나만 탁! 챙기면 천하 없이 무서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권속도 그 앞에는 무릎을 꿇 수밖에 없고, 결국은 그것들이 나를 보호하고 나로 하여금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깨달라서 성불(成佛)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호위병(護衛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도반들은 앞으로 어데서 어떠한 일을 만나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항상 정심(正心)으로 화두(話頭)를 드는 그 정진력(精進力)으로 나아간다면 어디를 가거나 무장무애(無障無礙)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을 만나고 역경계(逆境界)에 처(處)하더라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화두(話頭)를 들고 나아간다면 무장무애하게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에 더 분심(憤心)이 나고,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23분20초~38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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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ㅇ/육신통(삼명육통)2021. 8. 19. 06:50

신통(No.198)—(게송)得之在心應在手~ | 부처님과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 공부 요점 -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지 마라 | 모든 경계 위에서 화두를 들어라.
발심할 수 있는 사바세계에 태어나야만 도를 이룰 수가 있다 | 대신통(大神通)과 소신통(小神通).


*신통(神通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①신기(神奇 신비롭고 기이하다)할 정도로 묘(妙)하다. ②모든 것을 신기(神奇)롭게 통달(通達)함.

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六神通]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신통력(神通力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힘 력) : 수행을 통(通)하여 도달하는 걸림없는 초인간적인(神) 능력(力).

 

 

 

(1) 15분 27초.

 

 

(2) 11분 40초.

 

 


[법문] 송담스님(No.198)—1983년 4월 첫째 일요법회(83.04.03) (용198)

(1)-----------------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한데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4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이것을 마음에 얻어. 이것을 얻되, 마음에 있어서 이것을 얻는다. 그리고 응재수(應在手)라. 응하는 데에는 손으로 응(應)을 한다 그말이여.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눈달, 겨울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그 눈이 쏟아지는 속에 달이 뜨며, 봄이 돌아오면 그 봄바람 속에 꽃이 피어.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눈 내리는 속에 달이 뜨며, 봄이 돌아오면은 동풍이 부는데 그 동풍이 부는 속에 꽃이 피어난다 그말이여.

우리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진(六塵)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졌을 때 그게 '마음에 얻는다'
마음에 그러한 육진(六塵)이 비추어지면 그것을 상대하게 될 때에는 손으로 글씨를 쓰게 될 때는 글씨를 쓰고, 일을 하게 될 때에는 일을 하고, 그것이 응할 때에는 손으로 그것을 응하게 된다 그말이여.

우리 일신상(一身上)에는 그러려니와 우주법계에 자연계에 있어서는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가을에는 휘황창 달이 밝고, 봄이 오면 동풍이 불고 꽃이 피는 것이여. 이렇게 하기를 몇억만 겁(劫)을 그렇게 해 내려왔다 그말이여.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는데, 새벽이 돌아오면 아침마다 닭은 오경(五更)이 되면은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봄이 돌아오면은 곳곳마다, 산이나 들이나 집이나 골짜구니마다 울긋불긋 꽃이 피더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나,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우리가 부처님보단 우리의 본성(本性), 자성(自性) 자리에 있어서 모자라거나, 부처님이 우리 중생보다 더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뜻을, 내가 나를 깨닫지를 못해서 오직 그 하나 때문에 우리는 중생의 탈을 벗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달이 법회를 열고 무슨 말을 할 말이 있느냐? 무슨 기특하고 재미있는 얘기 거리가 있는 것이냐?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법상에 올라오며, 무엇을 듣기 위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이렇게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이렇게 모이시는 것이냐?
왜 과거에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성현들은 이 문제를 해결을 했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동서 사방으로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인가?

천 번 만 번 법문을 듣고 서울로 지방으로 법회를 법문을 들으러 다녀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냥 마찬가지여. 법문을 들을 때에는 가슴이 좀 후련하고 무엇인가 얻은 바가 있는 것 같다가, 한 시간 두 시간 지내고 하루 이틀이 지내면 도로 답답하고 방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말이여.

공부해 나가는 그 근본 뜻을 바로 알아버리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정진(精進)이요, 수도(修道)요, 공부를 해가는 것인데, 그 공부해 나가는 그 요점을 바로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행여나 무슨 좋은 말씀을 들을까?’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법문을 들을까?’ 밤낮 들어봐도 들을 때 뿐이고 공부는 조금도 나아가는 것이 없다 그말이여.

일용 생활,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세수하고, 오줌 누고, 똥 누고, 걸어 다니고, 차 타고, 하는 이러한 일상생활,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는다면 이것은 영원히 찾아도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여.
여의고 그놈을 떠나서—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무엇을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잡고, 발로 걸어 다니고,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놈을 버리고, 그놈을 떠나서 나의 자성(自性) 자리가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그놈을 버리고 찾겠지만, 그놈을 떠나서는 세상없이도 없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놈을 버리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하는 뜻을 모르는 사람은 항시 마음만 급하고 마음만 바뻐. ‘내가 이렇게 공부를 안 해서 어떻게 하나!’ ‘오늘도 이렇게 그럭저럭 하루가 지냈구나!’ ‘이러한 모다 그 이런 복잡한 일 때문에 내가 공부를 못한다’
남편 때문에 못하고, 자식 때문에 못하고, 살림살이 때문에 못하고, 병 때문에 못하고, 그러한 것 때문에 못한다고 핑계를 대고 마음만 조급하다 그말이여.
마음이 조급하니까 짜증만 내고 신경질만 내고 일체 생활에 안정을 잃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평과 불만이 가뜩차 있어. 그러니 무슨 일을 한들 그 일이 제대로 되며, 무슨 공부가 될 것이냐 그말이여.

「공부하는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은 모든 기회(機會)와 경계(境界) 위에서 잡아가지고 쓸 수가 있다 그말이여.
기회,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기회와 경계상에 그놈을 여의지 않고,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턱! 잡어서 써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는 바로 거기서 잡아 낚아채야 하고, 귀로 무엇을 소리를 들을 때에는 듣는 그 찰나에 퍼뜩 잡아서 써야 해.

속담에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번갯불 번쩍하는 그 번갯불에다가 콩을 구워 먹어.
번갯불 번쩍할 때 바로 그때를 이용해서 바늘귀를, 바늘에다 실을 폭 뀌듯이, 그 찰나를 잘 잡아 쓸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공부하는 바른 길을 터득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여.(처음~15분39초)




(2)------------------

선방에 3년, 10년, 20년, 30년을 다녀도 그러한 기회와 경계를 여의고 따로 공부를 지어 나가려고 그러고, 그놈을 여의고 공부를 할려고 한 사람은 아무리 애써봤자 공부에 진취가 있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쪼끔 시끄러우면 파르르 신경질을 내고, 쪼끔 복잡하면 도망할 궁리를 하고, 경계와 기회를 피하고 도피해 가지고 따로 공부를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맞는 일, 내 마음에 맞는 사람, 내 마음에 맞는 장소, 모든 일이 내 마음과 내 마음에 순(順)하는, 내 마음대로 되는, 조끔도 내 마음을 거슬리지 아니한 그러한 곳은 저 천상에, 하늘나라 천당에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천당에 가면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고, 모든 즐겁고 기쁘고 편안하기는 하지만, 거기서는 도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도(道)를 이루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신 것입니다.

천당(天堂)은 좋고 기쁘고 편안한 일만 있어서 그러한 상태에서는 발심(發心)을 할 수가 없어. 축생(畜生)이나 지옥(地獄)은 모든 일이 괴로움만 있어서 괴로움이 지나치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우리의 근기(根機)로 그것을 이겨 나갈 수가 없어.
오직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이 사바세계는 내 마음에 합당한 일도 있고, 기쁘고 편안한 일도 있으려니와 슬프고 괴롭고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도 있어서 우리가 분심(憤心), 발심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야만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일부러 무상(無上)의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위해서, 대도를 성취해서 영원한 해탈도를 증득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 사바세계에도 오셨는데, 우리는 과거에 무슨 수승한 인연이 있어서 다행히 금생에 이 사바세계에 왔습니다.
이 '사바세계가 좋다'고 하는 것은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여져 있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가 좋다는 것이여.

그런데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피하고 슬픈 일은 피하고 기쁜 일만을 찾고, 괴로운 일을 피하고 즐거운 일만을 찾고, 시끄러운 것을 피해서 조용한 것만을 찾고, 벌써 시끄러운 것을 버릴려고 할 때에 그르쳐 버렸고, 다시 편안하고 즐거운 곳을 찾을 때에 두 번째 어긋나 버리는 것입니다. 계속 어긋나고 그르치기만 해 가지고 언제 바른길을 한 걸음이라도 갈 수가 있느냐 이말이여.

공부하는, 참으로 발심을 해서 진정으로 대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경계—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괴로운 일이나 즐거운 일이나, 어떠한 순경계(順境界)나 역경계(逆境界)를 만났을지라도 바로 그 기회와 그 경계를 단 일분일초라도 놓치지 말고 바로 되잡아 써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지어간다면 우리가 있는 장소는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그 시간이 어느 시간이 되었건, 어떠한 일을 만나건, 어떠한 사람을 상대하건, 우리는 곳곳마다 최상의 선방(禪房)이요, 바로 부처님 회상(會上)이요, 닥치는 일마다 부처님이요, 불보살을 친견한 것이요,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면 모든 소리는—나를 칭찬하는 소리나,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나, 새가 우는 소리나, 닭이 우는 소리나, 개가 짓는 소리나, 자동차 소리나, 모든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소리요, 부처님의 법문(法門)이 될 것이며,
내가 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은—저 해와 달은 말할 것도 없고 흘러가는 구름과 물, 겨울에 내리는 눈이나, 봄에 피는 꽃이나,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나,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나, 모든 것이 다 불색(佛色), 부처님의 몸이, 불신(佛身)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접촉하는, 상대하게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되고, 바로 그것이 최상의 육신통(六神通)으로 되는 것입니다.

소신통(小神通)은 내일 일을 알고, 여기서 서울 일을 알고, 앞으로 다가올 10년 20년 뒷일을 알고, 여기서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서울도 왔다갔다 축지법을 하고, 이러한 것은 소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조그마한 신통이라 하는 것이고.
참으로 최상의 대신통(大神通)이라 하는 것은, 부르면 대답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대간하면 한숨 자고, 이것이 바로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삿된 사람은 소신통이 대신통인 줄 착각을 하는 거고, 참으로 불법(佛法)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옳게 인식한 사람은 바로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바로 이것이 신통 중에 최고로 크고 높은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대신통을 착각을 해 가지고 소신통을 추구한 사람은 공부해 나가다가 사견(邪見)에 빠지기가 쉽고, 마구니의 권속으로 끌려가서 미치거나 삿된 경계에 빠지는 것이고.
소신통에 집착을 하지 아니하고 참으로 대신통의 위대함에 눈뜬 사람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시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고 항시 부처님에 설법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못하겠습니까.(15분40초~27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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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득지재심응재수~'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대도사(大導師 큰 대/길·인도하다·이끌다 도/스승 사) ; 불(佛) · 보살(菩薩)의 존칭. '크신[大] 길 인도하는[導] 스승[師]'이라는 말.
도(導)는 「길[道] · 인도(引導)하다 · 이끌다」의 뜻으로, 대도사는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길로 인도하는 큰 스승이라는 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度] 하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대도사(大度師)와 같은 뜻이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 삼무차별(三無差別 :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불원천리(不遠千里)하다 ; 천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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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천당(天堂) ; ①천상(天上)에 있다는 신(神)의 전당(殿堂), 하늘의 세계.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을 통칭하는 말. ②정토교(淨土敎)의 극락세계(極樂世界).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일분일초(一分一秒) ; '1분과 1초'로 아주 짧은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부처님 회상(會上) ; 불회상(佛會上). 부처님[佛]의 회상(會上). 부처님 계시는 곳.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불색(佛色) ; 불색신(佛色身). 형체를 갖춘 부처님의 몸을 일컫는 말. 상대어는 법신(法身)으로 진리를 인격화한 부처님을 가리킨다.
*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도(度)·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여섯 가지 수행의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대간하다 ; ‘고단하다(지쳐서 피곤하다)’의 사투리.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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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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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화두드는 법) ((세등51))—참선에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들어 있다.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 (게송)摩尼珠人不識~ | 바로 공부를 지어 가는 마당에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어.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8분47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51)—1984(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어(84.07.17) (세등51)

처음에 선방에 와 가지고 정진을 하되, 올바르게 공부를 못해 가지고 참 가석하게도 몸에 병이 난다든지 또는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돌이키기 어려운 그러한 지경에 이른 사람을 가끔 봅니다.

이 참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이거여. 화두를 타 가지고 그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는 데 있어서 큰 의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여.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여. 큰 의심을 가지고 정진을 해야 그 큰 의심이 터지면서 크게 깨달어. 의심이 시원찮으면 깨닫기도 어려우려니와 설사 어떠한 소견이 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깨달음이라 볼 수가 없어. 그러니 큰 깨달음(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무슨 법문을 듣거나, 무슨 경을 보거나, 무슨 일을 만나거나 온갖 종류에 의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의심이 날 때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일에 대한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 다른 의심을 풀려고 하지 말고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유리병이 있는데, 그 유리병은 주둥이는 쪼끄마하고 그 밑에 몸뚱이는 크낙해 가지고 그 유리병 속에다가 오리 새끼를 집어넣었다. 오리 새끼 금방 깐 거야 조그마하기 때문에 그 유리병 작은 주둥이로 집어넣었어. 오리 새끼를.
넣어 가지고 날마다 물도 주고 먹이도 주고 해 가지고 그 오리를 먹여 살렸는데 한 달 두 달 석 달 넉 달 크니까, 그 오리가 크막한 애미가 되었어. 몸뚱이는 크니까 그 안에서 맘대로 오리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컸는데, 그 오리를 유리병 밖으로 꺼내야겠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유리병을 깨지도 말고 그 오리도 다치지 않게 어떻게 이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느냐?' 이러한 문제를 냈다.

이것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중에 하나지만, 어떤 사람이 수수께끼처럼 이 문제를 물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여. '유리병을 어떻게 깨지 않고 그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는가?' 그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오리를 죽여 가지고 대가리 띠어서 꺼내고, 날갯죽지 꺼내고, 발목쟁이 꺼내고, 몸뚱이도 토막을 내서 꺼내고, 아 그렇게나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유리병을 유리를 갖다가 확 깨 가지고 그렇다면은 오리를 다치지 않고 꺼낼 수가 있겠으나, '유리병도 조금도 깨지 말고 다치지 않게 하고 그리고서 오리도 상하지 않게 어떻게 꺼낼 수가 있는가?'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자기는 '이뭣고?' 화두를 하고 있는데, 누가 그 오리 꺼내는 문제를 제기를 했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도 '어떻게 하면 오리를 꺼낼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자기는 '이뭣고?'를 해라 그 말이여.
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분은, 설사 다른 공안—오리 새끼 꺼내는 공안이 되었건, 또는 이뭣고 공안이 되었건, 또는 판치생모 화두에 대한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건 간에, 그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이외의 화두나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하물며 세속에 어떠한 문제나 경전에 있는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어. 천 가지 만 가지 모든 의심을 만났을 때에 탁! 똘똘 그놈을 뭉쳐서 자기의 본참공안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렇게 해 나간다면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산을 보더라도 '아, 산이 푸르르구나, 산봉우리에는 구름이 끼였구나' 이런 식으로 쫓아가지 말고, 푸른 산을 보자마자 바로 자기의 화두(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정전백수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판치생모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자기의 본참화두로 돌아와. 이것이 바로 천의만의(千疑萬疑)가 병작일의(倂作一疑)다 그 말이여. 이 화두에, 자기의 본참(本參)에 대한 의심이 철저하지 못하면 이것이 큰 병(病)이여.
꺼떡허면 자기 화두는 놔 버리고 어믄 다리를 긁어. 어믄 일에 신경을 쓰고, 어믄 일에 걸려든다 그 말이여. 이것이 병 중에서는 최고의 큰 병이여.

눈으로 보면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무엇을 들으면 듣는 데에 끄달리고, 먹는 데에 끄달리고, 뭘 생각하는 데에 끄달리고, 남이 잘하고 잘 못하는 데에 끄달리고, 그게 다 발심(發心)이 철저하지를 못하고 자기의 본참(本參)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 육근(六根) 육식(六識) 십팔계(十八界)에 잠시도 편안할 겨를이 없이 십팔천(十八天)을 돌고 돌아. 그러다가 잘못 끌어 박히면은 삼악도에 떨어져서 헤어날 기약이 없다 그 말이여.

삼악도(三惡途)가 어디에 있으며, 십팔천(十八天)이 어디가 있는가?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일념 속에 들어 있고, 십팔천이 일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 생각을 맹렬히 단속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에 충실하다면 당장 금생에 그 사람에게는 삼악도도 찾을 길이 없고, 십팔천도 어디서 찾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금생에 결정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요, 세세생생에 어느 곳에 삼악도를 찾을 것이냐 그 말이여. 내가 떨어져야 할 삼악도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십팔천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니주인불식(摩尼珠人不識)이여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육반신용(六般神用)이 공불공(空不空)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마니주(摩尼珠), 이 마니주를 터억 지니면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고, 육도법계를 자유자재로 댕기되 하나도 손상을 입지를 안 해. 그 마니주를 지녔건만 사람이 알지를 못하더라.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여. 그 마니주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여래장(如來藏) 속에 그것이 떠억 감추어져 있더라 그 말이여. 여래장이 무엇인가?

여래장은 바로 우리 중생심(衆生心)이어늘, 중생심 그 제8식(第八識)이 바로 그것이 여래장인데, 그 여래장 속에서 일체 희로애락과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일어나는 색성향미촉법, 육근 · 육식 · 육진(六塵. 六境)이 바로 여래장 속에서 일어나는 물결인데, 그 여래장 속에 그 마니주가 들어 있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여섯 가지 신통(神通)을 부리는데, 그 여섯 가지 신통이—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고, 혀를 통해서 맛을 보고, 육체 몸을 통해서 차고 덥고 하는 것을 느끼고, 의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인식을 한다. 그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 마니주를 가진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신묘한 신통이다.

그런데 그 신통은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요, 분명히 있으되 비어 있는 것이고, 분명히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 그렇게 소소영령하건마는 그놈을 찾어보면 돌이켜 찾어보면 자취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비었으되 비지 아니한 것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로구나. 이 마니주, 이 한 알갱이 구슬이 뚜렷하게 빛나고 있건마는, 분명히 색깔이 빛깔이 있으되 빛깔이 없더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차 있으되 찾으면 간 곳이 없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소소영령하건마는 볼라야 볼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으니, 어찌 이것이 색상(色相)이 있다고 하며 색상이 없다고 할 것인가? 있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니,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가 없어.

중생의 소견으로 '있네, 없네' 따질 필요가 없어. 따져봤자 맞지 아니한 것을 왜 따져?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가지고서는 56억 7천만년 뒤에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따져도 이것은 해결 날 문제가 아니여. 오직 본참공안에 충실해서—나아가자니 앞이 맥히고, 물러서자니 뒤도 맥혀. 꽉 맥힌 의심으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불 속에 들어앉은 거와 같아서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앞이 맥혔으니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자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어. 왼쪽으로도 맥혔고, 오른쪽으로도 맥혔어.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불이 훨훨훨 타고 있다 그 말이여. 그냥 있을 수도 없고 나가자니 팔방이 사방이 꽉 맥혔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거냐?

'이뭣고?'

우리는 꿈을 꿀 때에 무서운 호랑이나 큰 구랭이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뿔 달린 무서운 악귀 같은 것에 핍박을 받아서 도망갈라고 하니 발이 떨어지지를 않고, 그 자리에 있자니 잡혀 죽게 생겼고,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꿈을 꾸는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옛날에 참선하지 아니할 때에는 고함을 지른다든지, 막 도망갈라고 몸부림을 치되 도망갈 수도 없고, 그러다가 한참동안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자기가 지르는 자기의 고함소리에 눈을 뜨고 보면 전신에 땀이 흠뻑 젖어 갖고 있는 그러한 꿈을 꾼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법을 알아 가지고 참선을 한 뒤에는 그러한 상황 속에 화두를 탁! 들어 버리면 눈이 딱! 떠져 버린단 말이여.
비단 꿈속에 뿐만이 아니여. 인간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나는 일, 속상하는 일, 기분 나쁜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슬픈 일을 당하거나, 기쁜 일을 당하거나, 일체 선악 경계를 당했을 때, 화두를 딱! 들어 보라 그 말이여. 어디에 속상한 일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분한 생각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슬프고 괴로운 생각이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정진을 다그쳐 나가면 깨닫기를 바랠 것이 없어. 독 안에 든 자라와 같아서 지가 어디를 갈 거냐 그 말이여. 깨달음을 기다리지도 말고, 조급한 생각을 내지도 말고, 누가 와서 나를 깨닫게 해 주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어. 바로 공부를 지어 가는 마당에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어.

'어서 빨리 깨달러 가지고 남 앞에 큰소리 한번 쳐보리라'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가 있어. 큰소리쳐서 뭣해?(23분11초~41분5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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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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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이뭣고? 화두2021. 8. 1. 06:51

이뭣고((No.306))—화두 게문 : 示[佛名] 有一物於此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 是甚麼 | ‘이뭣고?’ 효과와 공덕 | 팔만대장경은 노정기(路程記) | 법(法)의 양식(糧食), 심농(心農) | 법의 기쁨 | 참선은 우리의 본업(本業), 그 밖에 모든 것은 부업.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 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송담스님(No.306)—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회]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 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 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64분6초~66분26초) [ 참선법 A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를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이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큰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큰 메겡이로 메쳐서 그 간장독이 쩍!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佛祖)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송담스님(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

 

 

(17분 54초)

 

 


[법문] 송담스님(No.306)—19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어(86.08.03) (용306)

지금부터서 그 오계(五戒)를 지키면서 부처님 제자로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기 위해서 닦아 가는 화두(話頭) 법문을 설하겠습니다. 불명(佛名)을 이제 타신 분이나, 또 화두를 타신 분이나, 오계를 받고자 하신 분도 다 같이 들으시면 좋습니다.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그런데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을 하는 그 대답할 줄 아는 놈.
욕하면은 파르르르 성을 내는데 그 성낼 줄 아는 놈.
칭찬하면 기뻐하는데 그 기뻐할 줄 아는 놈.
다치면은 아픈데 그 아플 줄 아는 놈.
배가 고프면 배고픈, 밥먹을 줄 아는 놈.

한 생각 악한 생각이 일어나면 독사와 같은 마음이 나는데, 나찰귀(羅刹鬼)와 같고 독사와 같이 되는데, 또 한 생각 탁! 돌이켜서 착하게 먹으면 또 천사가 되기도 한다 그말이여.
찰나(刹那)간에 독사도 되기도 하고, 찰나간에 천사도 되기도 하는 그러한 그 신기하고도 묘하고 소소영령한 놈이 우리 모두 가슴속에 있어.

그놈을 성이 날 때도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슬픈 일을 당해도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중생들은 뭐 하나가 기분이 나쁘면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더 생각에 생각을 더 펴 가지고 점점 속이 상해 나가고, 또 누가 미우면 조금 잘못한 점이 있으면 과거에 몇해 전에 있었던 일까지 이 생각 저 생각 기억을 더듬어 가지고 점점 그 사람을 미워하고 그러는 법이고.
도(道)를 닦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은 언짢은 일을 당하더라도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다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냉큼 ‘이뭣고?’ 이래 버리거든.
누가 미운 짓을 해도 냉큼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해 버리면, 구태여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욕을 하고 때리고 속상하는 소리를 해 가지고 그 사람과 다툴 필요도 없는 것이여.

그래서 도를 안 닦는 사람은 사소한 일로 해서 점점 죄를 짓게 되고 웬수를 만들고 시끄럽게 만들고 남과 웬수를 맺게 되는 거고, 집안을 결국은 수라장(修羅場)으로 만드는 거고.
이 도를 닦는 사람은 여간해서 그런 환경에 휩쓸리지를 아니하고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를 하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어. 남을 원망할 필요도 없고 언제나 마음속은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또 귀빈을 맞이해서 사는 그런 마음, 항상 천당이나 극락(極樂)에서 사는 그런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를 젓고 갈 때에 노 젓는 사람이 노 젓기에 따라서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도 닦는 사람은 자기의 한 생각을 잘 조정함으로써 자꾸자꾸 승화되어 가고 도가 깊어지는 것이고, 도를 안 닦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눈을 보면 봄으로 해서 죄를 짓고, 뭣을 들으면 들음으로 해서 점점 번뇌(煩惱)의 불집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은 최상승법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한마디 ‘이뭣고?’는 이 한마디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팔만대장경, 해인사에 그 팔만대장경판이 있는데 그놈을 목판에다 찍어 놓으면 수천 권이 되는데 그놈을 읽을 수 있습니까? 읽어도 다 해석도 못하죠. 그러나 ‘이뭣고~?’ 한마디를 하면 팔만대장경을 한번 다 읽은 거와 똑같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는 공덕이 다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지만, ‘이뭣고?’ 한번하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한 공덕보다도 더 낫다.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 할라면은 백일 동안을 계속 불러야 하는데, ‘이뭣고?’ 한번 하는데 1초도 안 걸립니다. 그만큼 ‘이뭣고?’는 공덕이 장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뭣고?’는 ‘이뭣고?’할 때에 당장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 되는 것이여.

노정기(路程記), '여기서 어느 목적지에 갈라면은 어디 행 기차를 타고 가서 내려 가지고, 그다음에 버스를 타고 얼마를 북쪽으로 가다가 뭐이 나오면 한다' 그렇게 적혀 있는 노정기만 자꾸 읽고 있는 사람과 직접 그런 것을 다 알아 가지고 당장 한 걸음 출발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마찬가지거든.

밤낮 농사짓는 법을 책으로 연구하고 해 봤자 그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당장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서 밥을 지어 가지고 밥을 바로 입에다 떠 넣는 것이여, ‘이뭣고?’는.
당장 밥을 떠서 입에다 넣어서 깨물어 먹으면은 배가 부르지만, 밤낮 책만 펴 가지고 농사짓는 법만 연구해 가지고 언제 그것이 배가 부르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농사짓는 법을 잘 연구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농사를 짓는 법도 있지만, 이미 농사 잘 짓는 법 아는 사람과 같이 그 사람과 같이 농사를 짓고, 이미 다른 사람이 농사지어 논 놈을 갖다가 밥을 해서 딱! 놔주면 입에다 떠 넣어준 것입니다.

‘이뭣고?’하라고 가르켜 준 것은 밥을 여러분 입에다 떠 넣어준 거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기만 하면 되는 거여.
입에다 이렇게 떠 넣어 주어도 뱉어 버리고 씹지도 않고 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힘으로도 어찌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번 해 보세요.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할 때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는 거와 같애. 그래서 ‘이뭣고?’ 이것이 법(法)의 양식(糧食)입니다. 법의 양(糧)이여, 도(道)의 양식이거든.
그래서 이 법의 양식을 부지런히 먹고 잘 씹어서 삼키면 여러분은 도를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 심(心)’자, ‘농사 농(農)’자, 심농(心農)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루는 수행하실 때에 들녘을 지나는데, 어느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바라문(婆羅門)이 부처님이 탁발(托鉢)을 하시니까, "밥을 못 주겠다"
"왜 못 주느냐?"

"우리는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지어가지고 이렇게 먹지만, 당신네들은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안 하고, 밤낮 서늘한 그늘 속에 앉아서 있다가 때만 되면 거저 밥을 얻어먹으러 오니 우리는 공밥 먹는 사람에게는 밥을 줄 수가 없다. 이 피땀 흘려서 농사지은 것을 어찌 당신들한테 줄 수가 있겠느냐"

부처님 말씀이 "당신만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나도 농사를 지었소. 당신보다도 더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소"
"어찌 도를 닦는 사문(沙門)이 거짓말을 허요"

"아하, 거짓말이 아니요. 당신네들은 몸뚱이를 가지고 몸뚱이를 먹여 살리는 양식을 가꾸는 농사를 짓지마는, 우리는 영혼을 해탈케 하는 도를 이루게 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다.
당신이 짓는 농사 양식(糧食)으로는 먹어봤자 하루밖에는 참을 수가 없지만, 우리 마음의 농사는 금생 뿐만이 아니라 영원을 두고 배부르는 그런 농사를 짓는 것이고. 당신네 농사는 당신밖에는 배가 부르지 않지마는, 우리 마음의 농사는 우리 스스로도 영원히 배부르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고 배고픔을 면케 하는 해탈도를 증득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 것이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에 감동이 되어서 보리심(菩提心)을 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농사는 ‘마음의 농사’야!

농사는 짓는 때가 있고 그 때를 타서 열심히 해야지, 씨만 심어 놓고 가꾸지를 안 하면 그 농사는 폐농(廢農)을 하게 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때맞춰서 땅을 갈고, 모자리를 해서 그놈을 때맞춰서 심고, 그래 가지고 농약을 주고 비료를 주고 그래 가지고 그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짓게 되는데, 그걸 등한히 해 보십시오.
벌레가 다 먹어버리고 물을 맞춰서 주지 않으면 말라 죽거나 물에 너무 오랫동안 잠기면은 병이 생기고, 그렇게 해서 수확을 거두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가꾸는데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농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농사짓는 모자리의 씨를 심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부지런히 가꾸어서 때맞춰서 잘 가꾸어 나가야지, 일시라도 등한히 해 버리면 벌레가 와서 침식을 하게 되고 말라 죽거나 떠 죽거나 그렇게 해서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道)도 잠시도 등한히 하면 그렇게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팔만사천 마구니가 도를 이루지 못하도록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구니가 왜 우리 도 닦는 것을 방해를 치냐’하면 도인(道人)이 생겨나면 자기네 설 땅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구니의 궁전이 흔들리게 되고 마구니가 소탕이 되어서 마구니 살 곳이 없기 때문에 마구니가 자기 설 땅을 지키고 자기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도 닦는 사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방해를 놓는 것입니다.
그 마구니를 항상 우리는 잘 대항해서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 심왕(心王) 국토를 잘 지켜나가야만 우리는 도를 성취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마구니는 눈을 통해서 들어오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고,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뚱이를 통해서 들어오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들어올라고 하는 그 찰나에—이미 들어와 버리면 쫓아내기가 어려워—들어올라고 할 때 딱! 그놈을 문을 닫아 걸어야 되거든.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날 때, 무엇이 눈을 통해서 들어올 때, 어떠한 사물이 귀를 통해서 들릴 때,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뚱이를 통해서 들어올 때에 바로 그 즉시 ‘이뭣고?’ 이렇게 한다면, 마구니가 우리의 국토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물러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만 자꾸 해 보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에 낙(樂)이 있는 것입니다. 법에 기쁨이 있어. 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열심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날의 자기가 아닌 딴 사람으로 성장 또 향상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해탈도를 향해서 우리는 정말 부지런히 닦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세속에 다 직업이 있지만, 이 ‘이뭣고?’ 내가 나를 닦는, 나의 영혼을 갖다가 해탈케 하는 이 직업이 정말 우리의 본업(本業)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저 몸뚱이를 살찌게 하고 또 의식주를 위해서 다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까짓 것들이 우리의 영원한 영혼을 위하는 직업에다 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실천하는 학자는 이 참선을 갖다가 본업으로 알고, 그 밖에 모든 것을 부업(副業)으로 알고서 본업과 부업을 열심히 또 충실히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정이나 개인이나 사회 국가에 있어서 정말 충실하고자 하면 이 ‘이뭣고?’ 사업을 잘해야 그래야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제대로 되어가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정말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루어져 봤자 별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정말 우리는 몸과 목숨을 다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 바칠 것은 오직 이것뿐인 것입니다.(32분47초~50분4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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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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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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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인과((No.306))—내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렇게 받게 되는 것 | 계(戒)는 불자(佛子)로서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마땅히 잘 지켜야 | 연비(燃臂)와 참회.


*인과(因果) ; ①원인과 결과. 현상을 생성시키는 것과 생성된 현상.
②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이치.
③선악의 행위에는 반드시 그 과보가 있다는 도리.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12분 17초)

 


[법문] 송담스님(No.306)—19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어(86.08.03) (용306)

이상 말한 다섯 가지 계율은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그러한 소중한 것인데 이것을 파(破)하게 되면, 이것을 범(犯)하게 되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살생(殺生)을 범한 사람은 평생 동안 병치레를 하거나 또 오래오래 살지를 못하고 단명(短命)을 하거나 이렇게 되고.
또 도둑질을 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평생 동안 가난뱅이가 되고 남의 것을 훔친 그 죄로 항상 가난뱅이 보(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돈을 빌려 줘도 갚지를 않게 되고, 무엇을 해도 재수가 없어서 사업도 잘 안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음(邪淫)을 한 사람은 사음을 한 죄로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부정(不淨)한 남편, 부정한 아내와 짝지어지게 되어서 항상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고민을 하는 사람, 또 아내가 부정하다고 밤낮 가정에 불화(不和)가 일어나는 그러한 것은 과거 전생에 자기가 부정한 행실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바람피는 남편 꼴을 보게 되고 부정한 아내를 맞아서 속을 썩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렇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생에 혹 그러한 일을 당하고 있거나 당하더라도 이것이 전부 전생에 자기가 지은 죄값으로 이런 일을 당한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인식을 하고 그것을 상대를 용서하고, 자기를 앞으로 그러한 일이 없도록 스스로 청정한 행을 갖도록 노력을 한다면 복잡했던 가정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다시 화목하는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술! 술을 많이 먹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지옥에 가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면, 여간해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렵게 어렵게 사람이 된다하더라도 돌대가리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아주 지능지수가 50도 못되게 이렇게 태어나 가지고 바보 천치로 태어나서 먹을 것 밖에는 모르고, 무엇이 좋고 하는 선악을 분별을 못하고, 본말(本末)을 가리지를 못하고, 사람은 분명히 사람인데 아주 바보로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도 그렇게 폐인이 되지만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그런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속에 몸담아 살면서 그렇지 않아도 살기가 어려운데, 이 5계를 받아 가지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다 보면 꼼짝을 못하겠다. 정말 자유 없는 그러한 참 구속된 부자유한 그런 생활을 살게 될 것이 아닌가. 에이, 차라리 받지를 말까?' 이런 망설임을 가지시는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만큼 어렵지만, 그것을 부처님의 법을 믿고 그것을 잘 지켜나감으로 해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자비심이 넘쳐 흐르고, 복덕이 풍족하고, 몸과 마음이 청정하고, 그리고 진실하고, 그리고 지혜가 넘친다면, 우리는 금생에 인격을 완성을 하고, 어디를 가나 모든 사람의 신망을 받고 존경을 받고, 어디 가서 무슨 말을 한마디를 하고 뭣을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나를 따라 주고,
그렇게 해서 내가 모든 사회에 등불이 되어주고, 나침반이 되어주고, 소금이 되어서 사회를 가는 곳마다 다 정화를 할 수 있는 그러한 인격자가 된다면, 그것이 우리 불자가 부처님의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참선을 열심히 해서 도를 닦은 보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상 설한 다섯 가지 계율은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자진해서 잘 지켜야 할 것이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지키겠습니다' 그래.
"능히 잘 지키겠는가?"
(수계자) "지키겠습니다"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해야 할 바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수계자) "지키겠습니다"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마땅히 잘 지켜야 할 것이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수계자) "지키겠습니다"

여러분은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키겠다고 맹세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향불로써 여러분의 팔에 연비(燃臂)를 받게 됩니다.
연비를 받는 뜻은 우리가 이 시간 이전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범한 크고 작은 모든 죄를 참회하고, 참회함으로써 깨끗이 다 씻어버리고 앞으로는 다시는 범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뜻으로, 그리고 새로 태어난, 새로 불자(佛子)로 태어나서 새사람이 되어서 살기를 맹세하는 뜻으로 연비를 받게 되겠습니다.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우리는 오계를 받고 연비를 하고 부처님께 서약(誓約)을 하고 참회를 함으로써 우리의 과거에 지은 모든 죄는 봄눈 녹듯이 다 녹아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은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해졌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에 대해서는 여러분 이 시간을 기해서 다 깨끗해졌습니다.

그것을 다시는 생각해내지도 말고 그것을 돌아보지도 말고 오직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부처님 아들로 딸로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고, 새로운 마음으로 부처님 제자로서 희망과 보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20분31초~32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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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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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ㅇ/용무생사2021. 7. 27. 13:45

용무생사((전강선사 No.026))—경계를 보고, 툭! 봐 버리는 것이 제일 도력(道力)이 있다 | 아는 것이 아니기 따문에 모르는 것도 아니니라 |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천칠백 선사가 다 그 근본 본대의야 틀림이 없지마는, 그 맨들아 논 공안 그 자물쇠통 채워 놓은 것이 다 달러.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修德寺 能仁禪院) 「법훈(法訓)」 '나를 찾는 법—참선법(參禪法)' p262. p264~265.

*공부의 과정(課程)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 •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理無碍) • 사무애(事無碍)하게 되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나니라.

*지무생사(知無生死) ; 생사 없음을 아는 것.
*계무생사(契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에 계합하는 것.
*체무생사(體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체달함.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이무애(理無碍) ; 이치(理致)에 걸림이 없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의 경지(境地).
*사무애(事無碍) ; 사물(事物)에 걸림이 없는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경지.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 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1) 12분 14초.

 

 

(2) 13분 21초.

 

 


[법문] 전강선사(No.026)—전강선사 일대기 제13호(경술1970년 12월 22일 새벽.음) (1971년 1월 18일 새벽) (전026)

(1)------------------

선전어가섭(禪傳於迦葉)허고 교전어아란(敎傳於阿難)이라, 교(敎)는 아난한테 전했다 했지마는, 교가 또 어디 교가 전(傳)이 어디 있나? 교전이 어디 있어? 율종이 어디 있으며?
그대로 선종(禪宗)한테 그대로 그대로 그만 선종한테 꽉 묶어져 있는 율이고, 선종한테 그대로 붙어 있는 교여.

또 교(선)가 암만 불구문자(不拘文字)니, 문자도 거그는 소용이 없으니 교(敎)가 무슨 소용이 있나 했지마는, 부처님이 또 곧 가르치고 전허고 모도 말로 허신 것이 그 교(敎)인디, 어떻게 또 교를 여지없이 모도 없애 버리고 뭐 선(禪)만 어떻게 헐 수 있는가?

그러니 그 가운데 다 뚤뚤 뭉혀서 전해 내려온 것이 그게 선(禪)이여!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도리를 그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 그것이 선이고, 곧 교이고, 그것이 율이고, 그런 것이여. 하나도 떼지 말고 그대로 다 갖춰야 된다 그 말이여.
우리 몸뚱아리에, 몸뚱이만 가지고 사나? 눈도 있도, 귀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육근(六根)이 다 있어야 허는 것이고, 항상 그렇게 보아야 허제.

허지마는 통도사에는 율행이, 율사가 나온 디고, 그다음에는 '부자 절'이라. 돈 버는 절이여. 그래서 누룩을 모도 디뎌서 그놈 가지고 팔아서 돈을 많이 벌고, 모도 부(富)헌 디여. 그러기 따문에 걸망을 짊어지고 잘 나오들 못헌 디여. 스님한테 정해 상좌(上佐) 노릇허면은 한 뭉텡이 돈 벌어서 논 사고 다 이런 디제.

허지마는 경봉 스님은 그때 시대에도 그렇게 있으면서 나오기도 어려운 도저히 형편도 못 되고, 구하 스님이 주지니 그 밑에 얼마든지 강사(講師)로도 해야 할 것이고, 삼직(三職)으로도 해야 할 것이고, 그 구하 스님이 경봉 스님 일인(一人)이라 했어.
아, 그랬지마는 그것 다 턱! 때려 치와 버리고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에 나와서 참선을 했어. 허다가 어째 또 본산(本山)에 안 들어올 수 없어 들어왔다가는 본산에서 잽혀 가지고, 붙잽혀 가지고 못 나가고 그래 있다가, 인제 그 농사를 통도사는 지니까, 농사를 잘 지어 놓고 물꼬 좀 보러 갔다가 물꼬를 막는 바람에 툭! 터져 버렸다. 툭 깨 버렸어.

그 깨는 것이, 툭 터진 것이 대오(大悟), 우리 대오허는 법이 그게—자, 부처님도 경계 보고 깼제. 별 탁! 뜬 놈 보고, 탁! 봐 버렸제. 권렴(捲簾), 주름 턱! 주름 살 턱! 거둔 것 보고 장경(長慶) 도인도 툭 깨 버렸제. 이렇게 경계를 보고 탁 깨아.
오히려 경계(境界)를 보고 깨는 것이 말, 언하대오(言下大悟) 보담도 더 힘이 있어. 척! 경계를 척 보고, 툭! 봐 버리는 것이 제일 도력(道力)이 있다는 것이여.

도(道)도 그놈 깨달라도 힘이 설찬히 차별이 있어. 여지없이 바로 깨달은 힘이—힘이 있게 깨달을 것 같으면은 보림(保任)도, 보림허기가 퍽 쉽기도 허고, 또 희미허게 깨달라 놓을 것 같으면은 그 힘대가리 없는 각(覺)이라는 게 그 우스운 것이여.
그만 그저 공안은 하나 봤다 허지마는 모도 맥힌 대문이 있고, 또 설사 안 맥히드래도 모도 그런가 저런가 허는 희미허고. 그 천(淺)이면 그려, 그것이.

경계를 보고 깨는 거, 또 언하, 언하대오, 언하대오가 그것 또 참 언하에 툭! 깨는 거, 말 · 법문 듣다 깨는 거, 이 경계 보고 깨는 것만은 오히려 못허다 했지?
그다음에는 자기가 문자참선(文字參禪), 문자 중에서 글을 보고 깨는 거, 그건 퍽 그 힘대가리 없다는 것이여. 허니 참선은 '강사 참선'이 어렵고. 왜 어렵냐? 어떻게 쪼사 놨던지, 언구(言句)를 이래 쪼사 놨던지 그 어려와.

너무 많이 알수록에 아는 놈이 장애가 되어서 의심(疑心)이 잘 일어나들 않고, 해석이 자꾸 붙고 '요런 것이 아닌가?' 허다가도 '에, 아니다'고 내던져도, 또 그 따지는 습관이 '향상이다. 오! 향상은 어떤 거제?' '향하다. 오! 향하는 어떤 것이제?' 이래 가지고는 무슨 여러가지 그 모도 그 이해(理解)가 이해, 이치의 해가 나.
보통 아무 근원 없이 일어나는 망상보담도 고 향상(向上) · 향하(向下) 같은 그런 이(理)에 가서 이로(理路)가, 이치길이 자꾸 나온 것이 그것이 대해(大害)라. 큰일나! 그녀러 거.

안 헌다 해도 자신이 밤낮 허고 앉었거든, 고 짓을. 그래 가지고는 아침 때 그러지, 안 헐라다가도 또 저녁 때 그러지. 자신도 마음대로 못혀.
하! 오직 해야사, 얼마나 참, 강(講)을 삼십여 년을 허셨으니, 옛날에 그 누구... 저 무슨 스님이제? 서산(西山) 스님 찾아... 소요 스님! 소요 스님!

소요 스님이 그 강(講)을 삼십 년이나 했으니 무척도 했제, 삼십 년이란 세월을. 그 경(經)을 그리 잘 보고, 속서(俗書)는 통달했고. 그래 가지고는 확, 이건 너무 알아 가지고는 당최 뭐 턱! 말헐 것 같으면은 모르는 것이 있어야제. 환허다.
허지마는 어디 아는 것이, 어디 아는 것이 그게 참선이여? 그렇게 큰 강사기 따문에 아는 것이 참선 아닌 줄을 확연히 알았거든.

알았으니까, '교외(敎外)에 별전선지(別傳禪旨)다. 교(敎) 밖에 별(別)로 전(傳)헌 선지(禪旨)가 있다. 교 밖에 별전선지는 아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이 아니니 세상에 아는 것 밖에 무슨 도리일 것인가 말이여.
그러면 모르는 것인가? 꽉 맥혀서 몰랐으면은 우리 범부(凡夫)처럼 과거도 꽉 막혀 모르고, 또 금생에 와서도 지나지 않은 일은 다 꽉 맥혀 모르고, 오늘 있어 내일 일을 모르고, 또 금생에 이 몸 가지고 있지마는 내버리고 갈 일도 모르고, 우리 중생은 그러허니, 그렇게 꽉 맥혀서 모르는 것인가?

아는 것이 아니기 따문에 모르는 것도 아니니라.

꽉 맥혀 모르는 것이 그것이 법(法)이여?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법이 아니면은 아는 것, 모르는 것 그 중간 사이, 그 아는 놈 모르는 놈 젖혀 놓고 그 중간에 비유(非有) 비무(非無) 뭐 고런 것이 법인가? 그것도 아니여.
아는 놈도 아니기 따문에 모르는 놈도 아니여. 그러기 따문에 그 쫌도 아니여. 모르는 놈, 아는 놈 그 중간 토막도 아니여. 그러니 뭣이냐 그말이여? 이런 꼴 좀 보소.

뭐라고 해 놓으면 그것은 교외별전(敎外別傳) 선법(禪法)이 아니여! 그 무슨 법이 그러헌 법이 있겄느냐 그말이여?
그러니, 모르는 법, 아는 법, 그 중간에 그 가운데 그것, 그다음에 밝은 거, 그러니께 어두운 거, 어두운 것 밝은 것, 그것 짬 사리도 아무것도 아니여.

거기에서 만약에 무슨, 무슨 고 밖에 또 도리를 갖다가서 '옳다! 그 도리다'해 가지고는 그놈을 갖다 집착허고 앉었어도 그건 법이 아니다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니 단진범정(但盡凡情)이여. 범정(凡情) 다 해 버렸어. 범부정(凡夫情)은 다 없다. 모르는 범부정, 모르고 알고 모도 그 범부정, 아나 모르나 다 범부정, 중도 제일까장 다 범부정, 그놈의 범부정 쏴악 쓸어 버렸으니, 그러고 인자 성정이 아닐 것인가?

성인(聖人)의 정(情), 성인의 뜻, 성해, 이런 제...
별무성해(別無聖解)다! 별도 성해가 어디 있어? 그 성해에 어디가 머무를 것이여?

그것, 무슨 법이 이러헌 법이 있느냐 그 말이여.
교외(敎外)에 별전(別傳), 교 밖에 별전법이니라. 세상에 이런 법이여.(17분18초~29분30초)





(2)------------------

그러니 '입타불입타(入打不入打)다' 원상 그려 놓고.
원상(圓相)이 그 최고 도리여. 다시 원상 더 나갈 도리는 없어, 입 열어서 말허자면.

고불(古佛)이 미생전(未生前)이요, 옛 부처가 나기 전이여. 거, 옛 부처도 생기기 전이니, 거 또 옛 부처가 나기 전이지마는, 천지도 나기 전이지마는, 거기에서 제불(諸佛)이 출세허기도 허고 제불이 열반허기도 허고 그런 디여.
제불출신처(諸佛出身處)요, 제불열반처(諸佛涅槃處)요, 천성(千聖)도 불식처(不識處)요, 불불(佛佛)도 서로 보지 못헌 곳이요,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요, 오히려 알지 못했어.

이러헌 원상을 척 그려 놓고 '거기에 들어가도 죽고, 거그 나와도 죽는다'
하, 이거! 그게 그 최고여! 거 거그서 그 중생 해탈 많이 시키는 공안이여. 그러기 따문에... 그러기 따문에 마조(馬祖)가 답살천하인(踏殺天下人)허는 공안이니라. 천하인을 답살해 죽이는 공안이다. 거그서 무슨 상량(商量)으로 답허냐 그 말이여.

그놈, 당시에 마조 스님이 물으니까, 학자 하나가 원상 안으로 쑥 들어갔다.
응, 그놈 하나 답허면, 그놈 또 봐야 허네. '그 학자가 눈이 있나 없나? 왜 들어갔나?'

원상 안에 쑥 들어가니 마조 스님은 쳤다. 따악!
아, 칠 수밖에 없제.

치니까, 척! 쳐다 보고 "타모갑부득(打某甲不得)입니다. 모갑을 치지 못했습니다"
마조 스님은 휴거(休去)를 했다. 아무 말이 없어.

그 학자는 왜 들어갔으며, 들어가 가지고는 맞아 놓고는 "저를 못 쳤습니다" 그러니께 마조 스님은 쉬어 버렸다.
고것이, 그 공안에 응, 거 법로(法路)여. 법을 써.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용무생사가 그게 현중현(玄中玄) 도리인데.

체중현(體中玄)은 고대로—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무일물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로 체중현이라 헌다든지, 모도 그러헌 그 법견(法見)을 가지고 체중현이라 햐.
왜 향상(向上)도 그 체중현일 것이고 뭐 그렇지 그 뭐여?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도 그 체중현 밖에 더 되아?

귀로 들을 수 있고, 뜻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헐 수 있고. 고러헌 것 가지고는, 체중현 가지고는...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경(經)부텀 들으면 아는 것이여. 들어가지고 아는 것이 체중현이여.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구중현(句中玄)이여. 구중현이라는 것은 처컥 들으면 벌써 그만 그 체중현 해(解)는 벗거져.
'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는디, 한 물건도 없는 그 가운데에 역무일물(亦無一物)이, 또한 일물지해(一物之解)도 없다' 요렇게 해서 고 지견(知見)까장 벗거질 수가 있지마는, 고것도 인천위사(人天爲師)는 되아. 인천의 스승은 된다 했어.

그러나 이 현중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되어야지.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척, 그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인자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그 말이여.


아, 이 불 피워라. 불 피우고 지침허는 어른은 와서 지침 좀 않게 옆에 앉으시라고 그려. 누가 그리 지침허시는고? 약 좀 잡솼으면 쓰겄는데.
그 차와 그러요. 요리 나오시요. 내가 허라는 대로 해요. 나오시요. 어서! 그 나오시요. 그러고 글안허면 저 방으로 들어가서 앉으셔. 냉해서 그런다.

법문 안 들어도 괜찮해. 어서! 그러시요. (괜찮아요.) 저 옆으로 가란 말이요. 허허! 지침을 자꾸 해싼게 내가, 내가 법문 안 허고 가면 쓰겄소? 이 법문이 중요헌 법문인디. 인자 여 끝마치는 법문이여.
옳제! 더 들어 앉으시요 쑥! 괜찮해야. 뜨스운 자리 요렇게 앉으면 한결 가라앉습니다. 인자 보시오. 허허! 그 참. 차우니까 그런데.


이 공안 법문이여. 참말로 공안 법문이여.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생사 없는 걸 그대로 써 나가여.
오(悟)를 허되 참으로 터꺽! 보고 툭 깼네. 힘이 있어야!

그래서 원상을 그려 놓고 '입타불입야타(入打不入也打)'
거그에 한마디 일른다. 옳게 설사 일러. 옳게 이른다 해도, '그 중이 어떻게 들어간 중이냐? 눈이 있나 없나?' 얼른 못 개려내는 거여.

어째서 또 들어가서는 "모갑(某甲)을 치지 못했습니다"
마조 스님은 휴거(休去)헌 것은 뭣인가?

그런 것은 체중현 도리나, 고렇게 들어서 공안을 어찌 짐작해 알어 가지고 생전 꿈도 소용없어!
'그런 것인가? 어찌 요런 것인가?' 그 때문에 안 되아. 그것이 어디 선(禪)인가? 그 선 아니여.

처억! 만공 스님 십대문답 어떻게 된 까닭을 주욱... '(십대문답) 저 끝에 가서 백지(白紙) 네모진 디다 한 쪽 귀텡이에다가 원상(圓相)을 해 놨느니라' 헌 걸 그걸, 그런 것을 바로 선사(禪師) 뜻을 봐야 혀. 그래서 천칠백 공안이니라.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천칠백 선사가 다 그 근본 본대의야 틀림이 없지마는, 그 맨들아 논 공안 그 자물쇠통 채워 놓은 것이 다 달러.

그놈이 바로 나가지 못하면 아무리 깨달랐다 해도 안 되아. 하나만 봐 가지고는 넘, 그래 중생 교화를 못하는 거, 용무생사도 안 된 거, 자기도 항상 해 나가도 그렇게 활발치를 못혀. 걸려! 걸리면, 설사 하나는 옳게 했다 하드래도, 그거 안 되아.
그러면은 경봉 스님이 물 대다가 툭 깨쳐 가지고는 그만 야단치든 경계는 그거는 체중현이여. 암만 천하없이 그래도, 강사(講師) 소견으로 있든 때여.

모도 들어 가지고 대교를 모도 판단해서, 그 다 알아 가지고 모도 인자 허다가 보니 그 들난 곳이 그 강사 처음에 공, 뭐 뭐, 입으로 다루던, 설시(說時)는 사오(似悟)나, 말헐 때에는 설헐 때에는 깨달은 것 같지마는 대경환미(對境還迷)허든 경계, 그 경계와 물구녁에 논 물 대다가 툭 막어 가지고 툭! 그만 보든 경계와는 영 달라. 그러지마는 그것도 체중현이여.
그러기 따문에 체중현이기 따문에 체중현을 아는 것 다르고, 또 보는 것 달라.

그 체중현을 처꺽 봤지마는, 그러기 따문에 추어망담(醜語妄談)이 개시선(皆是禪)이고 개시묘(皆是妙)고, 그만 막 들입대 그만 부인와도 욕을 막 들입대 했다 그 말이여.
그때 뭐, 뭐 내가 들어가 야단났었는디, 자기는 그때 경계를 모르든 것이여. 아, 그러기 따문에 내가 그때 가서 그렇게 탁! 해 가지고는 그만, 그 내가 갖다 고함 질러서 옥련봉 밑에로 올라가서 그런 걸 다 모르제. 모르기 따문에 한번도 말 안 혀.

"아니, 경봉 스님 더러 안 하더냐?" 허면은 "통 못 들었소" 그려.
아, 여그, 여그 종성 수좌도 거그 지냈단디, 내가 물어봤어. 흥, "한번 그런 말 못 들었소" 허거덩.

그래도 어찌 학자(學者)를 가르키시다가 당신이 어떠헌 경계를 얻었다는 거, 그런 것은 말허는 법이여.
만공 큰스님도 다 그런 말했고, 혜월 큰스님께서도 그 견성은, '단지불회시즉견성(但知不會是卽見性)이라' 헌 디서 툭 깨가지고는 했다는 말씀 다 학자한테 허고,
전혀 안 허신다는 것은 그 경봉 스님이 그때 시대를, 그만 그때 경계를 모르시든 것이여. 꿈겉이.

그래도 그 생리적으로 뭐 그렇게 미친 것은 아니기 따문에 다 아는 것인데, 모른다 한다니,
나 그러나 저러나 또 알아도 그럴 수도 있겠제.

그때 경봉 스님이 만약에—암만 천하없이 별소리 다 해도, 정영신이가 얻어먹고 들어가서, 걸식허고 들어가서 한번 안 대질렀으면, 거그서 그만 그대로 경봉 스님은 출세했으면은 안 되아. 되들 안 혀.
그때 그 답허고 점두(點頭) 턱 허고 내려와서는, 점두 척 허고 내려와서는, 보광전에 앉어 가지고는 그 뒤부텀은 한번도 입 뗀 법이 없어. 입을 뗀 법이 없었댜. 그저 앉으면 정진만 허고 앉었었어. 그럴 것이거든. 참말로 정진을 해야 허는 것이거든.

턱! 그 경계 들어갔다고—흥! 일예(一翳)가 재안(在眼)이면, 한 가리움이 눈에 있으면은 공화난타(空華亂墮)다. 허공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했으니 뭣 헐 것이 있어. 뭣을 닦아?
허어! 참 닦아야 한다. 인자 참 정말이다.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원각대지가 낭연독존을 해야 헌다.

낭연독존은 해서 그건 지킨 건가? 말허자니 그런 것이제. 아, 이거! 말만 허면은 조비모락(鳥飛毛落)이니 그럼 어떻게, 어떻게 헐 것인가? 누() 밖에 어떻게 설헐 것인가.(29분36초~42분5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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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임제록(臨濟錄)』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산승의 견처(見處)는 불조(佛祖)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가로판 p215, p219)
[ 三玄(삼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역주(譯註)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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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ㅇ/오계2021. 7. 26. 13:50

오계((No.306))—오계(五戒) | 계 · 정 · 혜(戒定慧), 삼학(三學)은 삼위일체(三位一體) |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참선을 해야 하고, 바른 참선을 하고자 하면 계율을 잘 지켜야 | 불법의 목적 :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 |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 | 연비(燃臂)와 참회.


*오계(五戒) ; (산스크리트어 pañca-śīla) 재가(在家)의 신도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①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②불투도(不偸盜). 주지 않은 것을 빼앗지 말라.
③불사음(不邪婬).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④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하지 말라.
⑤불음주(不飮酒). 취기(醉氣)가 있는 것에 취(醉)하지 말라.

 

*계(戒) ; 불교에 귀의한 자가 선(善)을 쌓기 위해 지켜야 할 규범.
[참고] 송담스님(No.340)—1987년 10월 첫째 일요법회.
계(戒)는 계기(戒器)라, 그릇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그리고 정(定)은 정수(定水), 물에다가 비유를 하고, 혜월(慧月), 혜(慧)는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戒)를 잘 가짐으로 해서 참선, 정(定)을 잘 장애 없이 닦을 수가 있고, 그래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다.
계의 그릇이 온당(穩當)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을 그 그릇에 담을 수가 있고, 그 맑은 물이 그릇에 잘 담겨져 있어서 안정이 되어야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그 그릇에 나타나는 거와 같이,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온당하게 참선(參禪)을 할 수가 없고, 온당하게 정진을 하지 않고서 지혜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하고자 하고 지혜의 눈을 뜨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부처님의 계를 받아서 그것을 잘 가짐으로 해서 도(道)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14분31초~16분33초)


*선(善) ; [산스크리트어] kuśala  올바르고 청정하여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름.

말법(末法)에 우리 초학자(初學者)들에 있어서는 첫째 이 소승계, 몸뚱이로 지키는 계부터서 철저히 지키고 나아가서는 마음으로 지키는 대승계까지도 잘 지킬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승계와 소승계를 우리는 아울러서 잘 지키는 그러한 최상승(最上乘) 정법학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1) 19분 50초.

 

 

(2) 12분 17초.

 

 


[법문] 송담스님(No.306)—19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어(86.08.03) (용306)

(1)------------------

지금부터 여러분께서는 불명(佛名)과 오계(五戒)와 또 화두(話頭)를 타시게 되겠습니다.

첫째, 오계(五戒)를 먼저 설하게 되겠습니다. 아까 법상에서 잠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제자가 될 때에는 오계를 받고 또 불명을 타고 또 공부해 나가는 바른 법을 배워서 마음을 닦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佛敎)를 한마디로 말해서 삼학(三學)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 중생은 탐진치(貪瞋癡)—탐내는 마음, 또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 탐 · 진 · 치 3가지의 옳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을 돌이켜서 삼학(三學)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삼학은 계 · 정 · 혜(戒定慧) 이것을 삼학이라, 석 삼(三)자, 배울 학(學)자, 삼학(三學)이라 그러고. 탐 · 진 · 치를 삼독(三毒)이라 그러는데, 삼독을 돌이켜서 바꾸어 가지고 삼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삼학(三學)의 첫째는 계(戒)입니다. 계(戒). 계율(戒律).
5계와 10계 또는 비구 250계 또는 보살 십중대계(十重大戒)와 48경계(四十八輕戒), 이런 계가 있는데, 이 계는 '몸으로 지키는 계'와 '마음으로 지키는 계'가 있습니다.

이 계(戒)를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을 올바르게 가져나감으로 해서 계를 지키고, 그다음에 정(定)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그 탐진치 삼독으로 훨훨 불이 타 가지고 안정을 얻지 못하고 노상 둥둥 떠다니고, 노상 치닫고 잠시도 고요히 안정되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한곳에 안정을 시킴으로 해서 자기의 본성(本性)을 찾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정(定)을 닦음으로 해서 그래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데,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계(戒)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定), 선정(禪定)은 그 그릇에 물을 담는 거와 같고.
그래서 계기(戒器)요, 계의 그릇이요, 정(定)의 수(水)요, 선정(禪定)의 물이다 그말이죠. 그리고 혜월(慧月)이여, 지혜는 달과 같은 것입니다.

계의 그릇이, 계를 잘 닦음으로써 그 그릇이 깨끗하고 딱 바로 놓여져야 거기에 맑은 참선의 물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맑은 물을 담음으로 해서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그 그릇 안에 물속에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달이 물속에 잘 나타나기를 바래거든 그 물이 맑고 고요해야 하고, 물이 맑고 고요하게 잘 담기게 할라면은 그릇이 깨끗하고 그릇이 바로 놓여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항상 셋이 같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계(戒)만 있고 정(定)이 없어서는 혜가 이룰 수가 없고, 혜(慧)만을 바라면서 선정을 닦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계와 정과 혜, 삼학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인 것입니다. 3가지가 한 체(一體)인 것입니다. 계 있는 곳에는 정과 혜가 있고, 정이 있는 곳에는 계와 혜가 있고, 혜 있는 곳에는 정과 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3가지는 항상 동시요, 한 뭉텅이인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참선을 해야 하고, 바른 참선을 하고자 하면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앞으로 올바른 부처님 제자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바른 지혜를 얻어서 영원한 깨달음과 행복을 얻고자 하거든, 맨 먼저 부처님의 계를 잘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저 산에 나무에 올라가 가지고 물속에서 사는 고기를 구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 모래를 쪄 가지고 밥을 만들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모래를 솥에다 넣고 불을 지핀다 하더라도 그 모래는 밥이 되지 아니한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 좋은 집을 지을라면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나 질컥벌컥한 그 굳지 않는 땅에다가 아무리 설계를 잘해서 훌륭한 집을 지은다 해도 그 집은 얼마 가지 못해서 기둥이 가라앉고 벽이 갈라지고 집이 쓰러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타시는 계율이 얼마만큼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가를 여러분은 잘 아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불살생(不殺生).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둘째, 불투도(不偸盜),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자기 물건 아닌 것을 취하지 말아라.

셋째,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자기의 아내나 자기의 남편이 아닌 사람과 방사(房事)를 하지 말아라.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아닌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되면은 그것은 피차에 괴로움과 불행을 가져오고 가정을 파탄시키고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고, 그래서 마침내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고 가정도 불행하고 사회도 시끄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음을 하지 말아라.

넷째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거짓말하면은 진실성을 잊어버려서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직업을 갖건 진실하지 못하면 자기는 설 곳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말아라. 술을 마시게 되면은 차츰 과음을 하게 되고 술 취한 상태에서 말을 하게 되면 실수를 하게 되고 아무도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믿어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술을 많이 먹게 되면 머리가 나빠지고 결국은 중독이 걸리게 되면은 폐인(廢人)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는 이상 말한,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지 말아라, 망어(妄語)를 하지 말아라, 술을 먹지 말아라, 이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산목숨을 왜 죽이지 말아야 하냐? 산목숨을 죽이게 되면 자기 자비심(慈悲心)을 손상하게 되어.

아까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스스로 자기가 깨닫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깨달은 사람으로 온 법계가 가득차게 하려는 이런 3가지의 큰 목적이 우리 불법(佛法)의 목적인데, 그 목적을 달성할라면 첫째, 자비심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살생을 하게 되면은 그 자비심이 없어져 버려. 그러니 도를 이룰 수도 없고, 도를 이룬다고 해도 무엇을 위한 도냐 이말이여. 그래서 불자(佛子)는 마땅히 살생을 하지 말고 자비심을 길러야 한다.

또 불자는 마땅히 도둑질하지 말아라. 불자는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고, 각만(覺滿)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데 남의 것을 훔칠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남의 것을 훔치는 이 도둑질을 하면은 복덕(福德)을 손상을 해.
복력(福力)이 있어야, 내 복덕이 있어야 나의 모든 좋은 영향력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서 배고픈 사람은 배부르게 해주고, 옷이 없는 사람은 옷을 주어서 따뜻하게 하고,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는 약이 되어주고, 이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까지도 다 바치면서 베풀면서, 그래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인데,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것이냐.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 것을 남에게 보시하는 그런 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에 사음을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내 몸과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가져서, 청정하게 가져야 자기도 도를 이룰 수가 있고 또 다른 사람도 제도를 할 수가 있지, 내 몸과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더러운 상태에서 어떻게 남을 청정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결국은 도(道)는 자비와 복덕과 이 청정한 마음이 모두가 도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고, 그것이 도를 이루는 바탕이 되는데 어찌 몸과 마음을 부정(不淨)하게 가질 수가 있느냐. 그래서 셋째에 가서는 사음을 하지 말아라 그것이여.

넷째에 가서 망어(妄語)를 왜 하지 말아야 하냐. 망어를 하면 진실(眞實)한 마음을 손상하게 되어.
도를 이루려면 앞에 말한 3가지에다가 또 이 진실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서 도를 이루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데, 거짓말을 풀풀 해 가지고 스스로 진실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자기도 도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실치 못한 사람의 말을 누가 믿어주며 어디 가서 중생을 제도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진실한 행동과 진실한 말과 진실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에 가서 술을 먹지 말아라. 세속에서 살라면은 남녀 간에 다 술을 마시게 되고 술을 권하게 되고 이러는데, "아, 이 5계를 받어서 '술을 먹지 말아라'하는 계를 받게 되면 이제 술은 입에다도 못 대겠다. 이거 참! 그 5계 중에 고놈 하나는 뺐으면 좋겠다" 그러한 말을 하는 분도 있는데.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술을 먹지 말아라’한 계율을 다섯 가지의 계(戒) 속에 ‘술을 먹지 말라’고 하는 조목을 넣으신 데에는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지혜(智慧)를 손상을 해.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다가, 또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다가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거꾸로 먹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다 제정신으로 술을 먹고 권하고 그러지만, 차츰 주기(酒氣)가 돌게 되면 자기도 막 먹고 남도 무리하게 권하고 해 가지고 술이 술을 먹게 되고, 나중에는 제정신을 완전히 잃게 되면 그 술이 사람을 먹어버리게 되어서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날이 계속이 되면 나중에는 중독이 걸리고 술을 안 먹고는 배기지를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부터서 마시고, 그 술이 주기(酒氣)가 가시기 전에 또 마시고, 가실라 하면 또 목이 조금 마를라 하면 또 홀짝 마시고 홀짝 마시고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하루종일 아주 술이 취해 가지고.
그렇게 되어 가지고 혀는 꼬부라지고 두 다리는 헛발질을 하고, 하는 말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말을 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이 장사를 하면 옳게 하겠습니까? 사업을 하면 옳게 하겠습니까? 무슨 정치를 하면 옳게 하겠습니까?

결국은 이 '술'이라 하는 것은 세속에서 참 아주 끊기 어려우면서도, 이 술 때문에 눈이 나빠지고, 술 때문에 심장이 나빠지고, 제일 두려운 것이 술 때문에 간이 나빠지고, 술 때문에 사람이 자기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우리 하근기(下根機) 중생들에게는 ‘술을 먹지 말아라’한 계율은 대단히 중요한 계율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지금 사람을 죽이며, 도둑질을 하며, 사음을 하며, 누가 거짓말을 쓸데없이 풀풀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 그러한 앞에 말한 4가지는 어지간한 사람이면 설사 계를 받지 안 해도 산목숨을 죽이기를 다 싫어하고 또 이 도둑질하라고 해도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사음도 역시 마찬가지고 거짓말도 누가 쓸데없이 거짓말 풀풀 하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술은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그걸 먹은 것이 별로 죄가 안 되리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도를 닦고자 하는 사람은 이 술을 참 삼가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율은 형식적으로 지키는, 몸뚱이 형식적으로 지키는 계가 있고, 마음으로 지키는 계, 두 가지로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몸뚱이로 지키는 계’는 소승계(小乘戒)고, 대승계(大乘戒)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인 것입니다.
‘실지로 저 놈을 내가 죽이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었어도 실지로 죽이지만 아니하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안됩니다. 그러나 대승계는 이미 마음속에 ‘그를 죽이리라’하고 마음먹었다 하면 이미 대승계는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사음이나 그런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지로 도둑질을 안 하고 속으로 마음으로 ‘저걸 내가 기어코 훔치고야만 말리라’하고 마음을 먹었어도 기회가 안 닿던지, 중간에 마음이 ‘에이, 내가 그래서는 안 되겠다’하고 안 했다면 그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마는 대승계는 이미 한 생각 도둑질할 마음을 냈을 때 대승계는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승계는 차라리 지키기가 쉬웁습니다. 허나 대승계는 '한 생각' 탁! 일어나면 이미 범한 것이 되기 때문에 대단히 지키기가 어렵고 또 차원이 높은 계인 것입니다.

우리 하근기, 중근기, 말법(末法)에 우리 초학자(初學者)들에 있어서는 첫째 이 소승계, 몸뚱이로 지키는 계부터서 철저히 지키고 나아가서는 마음으로 지키는 대승계까지도 잘 지킬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승계와 소승계를 우리는 아울러서 잘 지키는 그러한 최상승(最上乘) 정법학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39초~20분29초)





(2)------------------

이상 말한 다섯 가지 계율은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그러한 소중한 것인데 이것을 파(破)하게 되면, 이것을 범(犯)하게 되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살생(殺生)을 범한 사람은 평생 동안 병치레를 하거나 또 오래오래 살지를 못하고 단명(短命)을 하거나 이렇게 되고.
또 도둑질을 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평생 동안 가난뱅이가 되고 남의 것을 훔친 그 죄로 항상 가난뱅이 보(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돈을 빌려 줘도 갚지를 않게 되고, 무엇을 해도 재수가 없어서 사업도 잘 안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음(邪淫)을 한 사람은 사음을 한 죄로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부정(不淨)한 남편, 부정한 아내와 짝지어지게 되어서 항상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고민을 하는 사람, 또 아내가 부정하다고 밤낮 가정에 불화(不和)가 일어나는 그러한 것은 과거 전생에 자기가 부정한 행실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바람피는 남편 꼴을 보게 되고 부정한 아내를 맞아서 속을 썩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렇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생에 혹 그러한 일을 당하고 있거나 당하더라도 이것이 전부 전생에 자기가 지은 죄값으로 이런 일을 당한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인식을 하고 그것을 상대를 용서하고, 자기를 앞으로 그러한 일이 없도록 스스로 청정한 행을 갖도록 노력을 한다면 복잡했던 가정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다시 화목하는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술! 술을 많이 먹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지옥에 가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면, 여간해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렵게 어렵게 사람이 된다하더라도 돌대가리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아주 지능지수가 50도 못되게 이렇게 태어나 가지고 바보 천치로 태어나서 먹을 것 밖에는 모르고, 무엇이 좋고 하는 선악을 분별을 못하고, 본말(本末)을 가리지를 못하고, 사람은 분명히 사람인데 아주 바보로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도 그렇게 폐인이 되지만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그런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속에 몸담아 살면서 그렇지 않아도 살기가 어려운데, 이 5계를 받아 가지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다 보면 꼼짝을 못하겠다. 정말 자유 없는 그러한 참 구속된 부자유한 그런 생활을 살게 될 것이 아닌가. 에이, 차라리 받지를 말까?' 이런 망설임을 가지시는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만큼 어렵지만, 그것을 부처님의 법을 믿고 그것을 잘 지켜나감으로 해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자비심이 넘쳐 흐르고, 복덕이 풍족하고, 몸과 마음이 청정하고, 그리고 진실하고, 그리고 지혜가 넘친다면, 우리는 금생에 인격을 완성을 하고, 어디를 가나 모든 사람의 신망을 받고 존경을 받고, 어디 가서 무슨 말을 한마디를 하고 뭣을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나를 따라 주고,
그렇게 해서 내가 모든 사회에 등불이 되어주고, 나침반이 되어주고, 소금이 되어서 사회를 가는 곳마다 다 정화를 할 수 있는 그러한 인격자가 된다면, 그것이 우리 불자가 부처님의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참선을 열심히 해서 도를 닦은 보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상 설한 다섯 가지 계율은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자진해서 잘 지켜야 할 것이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지키겠습니다' 그래.
"능히 잘 지키겠는가?"
(수계자) "지키겠습니다"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해야 할 바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수계자) "지키겠습니다"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마땅히 잘 지켜야 할 것이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수계자) "지키겠습니다"

여러분은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키겠다고 맹세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향불로써 여러분의 팔에 연비(燃臂)를 받게 됩니다.
연비를 받는 뜻은 우리가 이 시간 이전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범한 크고 작은 모든 죄를 참회하고, 참회함으로써 깨끗이 다 씻어버리고 앞으로는 다시는 범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뜻으로, 그리고 새로 태어난, 새로 불자(佛子)로 태어나서 새사람이 되어서 살기를 맹세하는 뜻으로 연비를 받게 되겠습니다.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우리는 오계를 받고 연비를 하고 부처님께 서약(誓約)을 하고 참회를 함으로써 우리의 과거에 지은 모든 죄는 봄눈 녹듯이 다 녹아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은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해졌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에 대해서는 여러분 이 시간을 기해서 다 깨끗해졌습니다.

그것을 다시는 생각해내지도 말고 그것을 돌아보지도 말고 오직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부처님 아들로 딸로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고, 새로운 마음으로 부처님 제자로서 희망과 보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20분31초~32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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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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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비유((No.117))—오무기(五武器) 왕자 이야기.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지혜(智慧)의 무기 /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지혜(智慧)의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參禪法).

 



*비유(譬喩) ; 교설(敎說 가르치며 설명함)의 의미와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실례나 우화(寓話) 등을 들어 설명하는 것. 줄여서 비(譬) 혹은 유(喩)라고도 한다.

 

 

 

(10분 3초)

 

 


[법문] 송담스님(No.117)—1980(경신)년 신수기도 회향(80.02.24) (용117) (인연,인과,비유)

옛날에 오무기(五武器)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는데, 그 왕자는 아주 훌륭한 그 선생을 찾아가 가지고 다섯 가지의 무술을 익혔습니다. 활 쏘는 법 또 칼 쓰는 법 또 방패 쓰는 법 또 방(棒), 몽둥이 봉술 그리고 또 창을 쓰는 법,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을 아주 선생님에 못지않을 만큼 잘 배워서 능란하게 익혀 가지고 그 선생의 인가를 받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큰 광야를 만났는데, 광야를 지내오는 도중에 키는 야자수만큼 그렇게 몇십 척이 되는지 크고 그리고 눈은 큰 쟁반처럼 부리부리하고 그리고 아금니는 독수리 발톱처럼 생긴 그 무서운 아금니에다가 전신(全身)에는 기름기가 흐르는 털이 전신에 털이 나 갖고 있는 그러한 무서운 괴물을 만났습니다.

괴물이 앞을 턱! 가로막고서 "내가 여러 날을 굶었는데 마치 니 토실토실한 니 몸을 내가 먹어야겠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고서 달라들었습니다.
그때 이 오무기(五武器)라고 하는 왕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활을 갖다가 쏴 가지고, 그 괴물에 목을 향해서 쐈습니다. 뚫고 영락없이 뚫고 들어가 가지고 퍽! 쓰러질 줄 알았는데 쓰러지기 커녕은 그 화살이 그 번질번질한 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괴물은 또 한 발 다가왔습니다.

거기서 또 칼을 빼 들고 달라들어서 그 칼로 괴물에 목을 갖다 쳤습니다. 툭! 쓰러질 줄 알았는데 쓰러지지도 않고 칼이 괴물에 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다음에 몽둥이를 휘둘러 가지고 몽둥이로 후려쳤는데 몽둥이도 딱! 들어붙어 버렸습니다. 방패도 딱 들어붙어 버렸습니다. 창도 갖다가 냅대 염통을 향해서 찌르고 달라들었는데 들어가지도 않고 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몸에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무기가 다 그 괴물에 몸에 붙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주먹으로 냅대 치고 달라들었습니다. 주먹이 그 괴물에 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다음에는 발길로 냅대 찼습니다. 발로 냅대 차도 발이 딱 붙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목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목을 가지고 그 괴물에 가슴팍에다 냅대 쳐 받았는데 모가지까지, 머리까지 괴물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괴물이 하는 말이 "이제 다섯 가지의 무기와 니 주먹과 다리와 머리까지도 내 몸에 붙어버렸어. 이제 너는 꼼짝 못 하게 되었으니 이제 너는 내 입속으로 들어갈 수밖에는 없다. 어쩌냐, 각오는 단단히 되었느냐?"

오무기(五武器) 하는 말이 "허허, 니가 잘 몰랐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진짜 무기가 있는데 그 무기는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다. 인자 니가 나를 삼킬라면 삼켜 봐라. 내가 니 뱃속에 들어가 가지고 그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를 가지고 내두르면 니 창자 속이 갈기갈기 찢겨 가지고 너는 펄펄 뛰다가 죽어. 그러면 내가 니 배를 째고 나오면 되는 것이니 먹을라면 먹어라. 먹을수록 나는 더 좋다"
아, 그러니까 그 괴물이 아! 그 찬찬히 쳐다보니까 조끔도 두려운 기색이 없고 아주 자신이 만만해 가지고 먹으라고 하는데 겁이 왈칵 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금강이라는 무기를 빼 들고 달려들면 참으로 자기가 죽을까 싶어서 거기서 항복을 하고 빌었다고 하는 말씀이 경전에 나옵니다.

이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금강은 어떠한 쇠나 어떠한 것으로서도 이 금강은 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것을 갖다가 '금강'이라 그러고. 『금강경(金剛經)』이라고 하는 경(經), 우리의 지혜(智慧) 지혜를 갖다가 금강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법보선원, 용화사 법보선원에 와서 이 금강을, 우리가 낱낱이 다 가지고 있는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지혜(智慧)를 개발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고 배워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건, 어떠한 슬픔을 만나건, 어떠한 괴로움을 만나건, 그때일수록 그 금강을 갖다가 챙겨야 할 줄 생각합니다.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가슴이 아플 때도 '이뭣고?'
억울할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해서 그 참선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슬픔과 그 괴로움과 그 억울함 때문에 가슴속에 불이 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병이 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가정이 파탄이 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일가친척과 웬수가 되지만, 정법(正法)을 믿는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사람은 그러한 어려운 고비 고비를 잠깐도 놓치지 말고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화두를 들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허리를 쭈욱 펴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그때그때를 잘 단속해 나간다면 그러한 어려운 일들, 그 광야에서 나타났던 그 괴물, 괴물도 꼼짝을 못하고 항복을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고 많은 괴로움과 재난도 이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화두(話頭) 한 생각으로써 결국은 다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신수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결국은 어떠한 기도 기도도, 어떠한 불공(佛供)도, 어떠한 수행도—아까 여러 가지의 무기를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활이나 칼이나 창이나 몽둥이가 염불 · 기도 · 독경 · 주력 모다 이러한 것에다가 비유를 한 것이고,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는 바로 내가 나의 참마음을 깨닫는 지혜를 얻는 길, 참선 화두에다가 비교를 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 길을 철저히 믿고 성실하게 해 나가면 얼마 안 가서 여러분은 과연 이 금강이라고 하는 무기가, 이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무섭고 훌륭하다고 하는 것을 직접 마음으로 느끼실 것입니다. 그것을 느꼈을 때 여러분은 신심(信心)을 안 낼라야 안 낼 수가 없고, 분심(憤心)을 안 낼라야 분심을 안 낼 수 없고, 깨달음을 얻지 아니할라야 아니할 수가 없이 제절로 얻어질 것입니다.

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여러분의 소원이 경각간(頃刻間)에 이루어지고, 앞으로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그 어려운 것이 오히려 나에 도움이 되어주도록,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밑거름이 되어지게 하는 묘(妙)한 방법을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55분52초~65분5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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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기 왕자' 이야기 ; 『본생경(本生經)』 제6장 원망품(願望品) '55 오무기태자(五武器犬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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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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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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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