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이뭣고? 화두2021. 8. 26. 06:48

이뭣고((No.233))—어느 외국인 수행자의 물음 | 어떠한 근기라도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말세 중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수행법인 간화선 |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참선법은 최상승법, 교외별전(敎外別傳) |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송담스님(No.306)—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회]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64분6초~66분26초) [ 참선법 A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를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이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큰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큰 메겡이로 메쳐서 그 간장독이 쩍!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佛祖)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송담스님(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

 

 

 

(1) 13분 37초.

 

 

(2) 12분 42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1)-----------------

어제 외국(外國)에서 와서, 한국에 와서 수행을 참선을 한 분이 몇 분이 찾아왔었는데,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만리타국(萬里他國)에서 와 가지고 그렇게 모다 정진(精進)을 할려고 애를 쓰다가, 구산(九山) 방장(方丈) 큰스님께서 열반(涅槃)하셨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그러면서 한 분이, "사대(四大)가 비아(非我)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이것이 내가 아니고"
모두 이 사대(四大)는 육체(肉體)란 말인데, 육체가 사대로써 이루어졌으니까, '사대가 내가 아니다' 그 말은 ‘요 육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아니다’ 그 말이여.

"망념(妄念)도 본적(本寂)이다" 망상 망념도 그것이 본래(本來) 적적(寂寂)한 것이다 그 말이여.
"적요상지(寂寥常知)해서" 적적허니, 적적한 가운데에 항상 안다 그 말이여. 적적(寂寂)해서 모든 견문(見聞)이 끊어졌는데 끊어진 가운데에 항상 앎이 없는... 앎이 없이 아는 놈이 있다 이건데.
"이러한 경계에 떠억 앉었으니 도무지 의심(疑心)이 일어나지를 안 하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겄습니까? 아무리 화두를 방장(方丈) 스님한테 무자(無字)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을 해도 도무지 의심이 안 난다" 이것입니다.

"앉았으면 환허니 망상(妄想)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이 세상에 이 몸뚱이가 있는 것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도대체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이러한 경지에서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하니 무슨 의심이 나지를 않으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겄습니까?"
말인즉슨은 '사대(四大)가 내가 아니요, 망념(妄念)이 본래적적(本來寂寂)해서 적요상지(寂寥常知)'한 그러한 경계는 옛날 고조사(古祖師)들, 선지식의 어록(語錄)에나,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경전(經典)에도 많이 그러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四大)가 비아(非我)'니, '망념(妄念)이 본적(本寂)'이니, '적요상지(寂寥常知)'니, 그러한 말을 듣고 그러한 말의 뜻을 알아 가지고 그러한 경계를 따악 이렇게 맛보면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단히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이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기가 맥히지.
그러나 이것은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나, 그러한 경계를 지켜 나가고 맛보고 앉었으면 이것은 올바른 수행법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 이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參禪)하는 법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관법(觀法)으로 많이 공부를 지도하고 또 관법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질박(質朴)하고 강직(剛直)하고 그래서 그러한 수행법을 써도 이 공부를 바로 하고 또 깨달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지해(知解)가 날카로워져. '알 지(知)' 자, 알음알이, 알음알이의 그 지해가 날카로워지고 근기(根機)는 차츰차츰 경박해지고 그래 가지고 그러한 식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자칫하면 묵조사선(默照死禪)에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닌 경계를 긴 것으로 착각을 해서 삿된 경계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육조 스님으로부터서 시작을 해 가지고 임제 스님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을 통해서 학자를 제접(提接)을 하고, 대혜종고 선사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이 완전히 체계화가 되었습니다.

원래 이 화두(話頭)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이뭣고?'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의 화두(話頭)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인데, '대관절 이놈이 무슨 물건이냐?' 이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는 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들을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以前)에,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도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기 이전에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自然的)으로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인생(人生)이란 게 뭐냐?
어데서 왔으며, 뭣하러 왔으며, 또 어데로 가는 것이냐?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썽도 낼 줄 알고, 착할 때에는 불보살(佛菩薩)과 같고, 한 생각 뒤집어지면 찰나간에 나찰귀신(羅刹鬼神)처럼 포악하게도 될 수 있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연적(天然的)으로 주어진 이 과제를, 그것을 갖다가 어떠한 근기(根機)의 사람이라도, 상근(上根)이나 중근(中根)이나 하근(下根), 어떠한 근기라도 고대로만 하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보살(菩薩) 화현(化現)이나 선지식이 출현(出現)하셔서 우리 말세(末世) 중생(衆生)들에게 더 적합한 훌륭한 수행 방법을 개발을 하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때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만큼 훌륭한 수행법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막연하게 화두(話頭)도 없이 요요상지(了了常知)한 그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러니, 그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외도(外道)들이 배꼽 밑에 환하게 불이 켜진 것을 들여다보도록 그렇게 지도하는 그러한 그 외도에 수행법도 있습니다마는,
물론 우리 불교에도 아침에 해가 뜰 때에, 해가 벌겋게 뜰 때 그 해, 둥그런 그 해를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하루 종일 그 둥그런 벌-건 달이(해가) 양 눈썹 사이 미간(眉間)에 종일 그것이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관(觀)하고, 또 달이 뜰 때는 그 달을 한 시간 이렇게 쳐다보고 있다가 나중에 그 달이 없을 때에도 두 눈썹 사이에 그 달이 항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하고, 이러한 일륜관(日輪觀)이니 월륜관(月輪觀)과 같은 이러한 관(觀)을 통해서 수행(修行)하는 법(法)이 우리 불법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러한 이 관법(觀法)은 이 관법을 통해서 도(道)를 성취한 그런 특수한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指導下)에 하지 아니하면, 백이면 백 다 미치게 되거나 삿된 데에 빠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법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주력(呪力)을 외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력도 밀교(密敎)에서는 이 주력을 굉장히 소중하니 생각하고 그 수행하는 방법으로 이 주력을 하는데, 이것도 주력을 잘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생식기를 끊어 버린다던지, 자기가 자기의 몸에 칼로 난도질을 쳐서 피를 흘린다던지, 머리를 기둥에다 받아서 박이 터지도록 한다던지 이래서, 주력이나 또 이런 관법 같은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끊어져 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렇게 해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41분39초~55분16초)





(2)-----------------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 스님이 천하 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法擧揚)을 해 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맡었지만, 원오극근 선사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하시지 안 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 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한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갖다가 막 강짜로 압력을 가해 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어갈 때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데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생각을 내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먹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데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하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의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55분18초~1시간7분5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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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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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