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용무생사2021. 7. 27. 13:45

용무생사((전강선사 No.026))—경계를 보고, 툭! 봐 버리는 것이 제일 도력(道力)이 있다 | 아는 것이 아니기 따문에 모르는 것도 아니니라 |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천칠백 선사가 다 그 근본 본대의야 틀림이 없지마는, 그 맨들아 논 공안 그 자물쇠통 채워 놓은 것이 다 달러.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修德寺 能仁禪院) 「법훈(法訓)」 '나를 찾는 법—참선법(參禪法)' p262. p264~265.

*공부의 과정(課程)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 •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理無碍) • 사무애(事無碍)하게 되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나니라.

*지무생사(知無生死) ; 생사 없음을 아는 것.
*계무생사(契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에 계합하는 것.
*체무생사(體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체달함.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이무애(理無碍) ; 이치(理致)에 걸림이 없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의 경지(境地).
*사무애(事無碍) ; 사물(事物)에 걸림이 없는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경지.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 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1) 12분 14초.

 

 

(2) 13분 21초.

 

 


[법문] 전강선사(No.026)—전강선사 일대기 제13호(경술1970년 12월 22일 새벽.음) (1971년 1월 18일 새벽) (전026)

(1)------------------

선전어가섭(禪傳於迦葉)허고 교전어아란(敎傳於阿難)이라, 교(敎)는 아난한테 전했다 했지마는, 교가 또 어디 교가 전(傳)이 어디 있나? 교전이 어디 있어? 율종이 어디 있으며?
그대로 선종(禪宗)한테 그대로 그대로 그만 선종한테 꽉 묶어져 있는 율이고, 선종한테 그대로 붙어 있는 교여.

또 교(선)가 암만 불구문자(不拘文字)니, 문자도 거그는 소용이 없으니 교(敎)가 무슨 소용이 있나 했지마는, 부처님이 또 곧 가르치고 전허고 모도 말로 허신 것이 그 교(敎)인디, 어떻게 또 교를 여지없이 모도 없애 버리고 뭐 선(禪)만 어떻게 헐 수 있는가?

그러니 그 가운데 다 뚤뚤 뭉혀서 전해 내려온 것이 그게 선(禪)이여!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도리를 그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 그것이 선이고, 곧 교이고, 그것이 율이고, 그런 것이여. 하나도 떼지 말고 그대로 다 갖춰야 된다 그 말이여.
우리 몸뚱아리에, 몸뚱이만 가지고 사나? 눈도 있도, 귀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육근(六根)이 다 있어야 허는 것이고, 항상 그렇게 보아야 허제.

허지마는 통도사에는 율행이, 율사가 나온 디고, 그다음에는 '부자 절'이라. 돈 버는 절이여. 그래서 누룩을 모도 디뎌서 그놈 가지고 팔아서 돈을 많이 벌고, 모도 부(富)헌 디여. 그러기 따문에 걸망을 짊어지고 잘 나오들 못헌 디여. 스님한테 정해 상좌(上佐) 노릇허면은 한 뭉텡이 돈 벌어서 논 사고 다 이런 디제.

허지마는 경봉 스님은 그때 시대에도 그렇게 있으면서 나오기도 어려운 도저히 형편도 못 되고, 구하 스님이 주지니 그 밑에 얼마든지 강사(講師)로도 해야 할 것이고, 삼직(三職)으로도 해야 할 것이고, 그 구하 스님이 경봉 스님 일인(一人)이라 했어.
아, 그랬지마는 그것 다 턱! 때려 치와 버리고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에 나와서 참선을 했어. 허다가 어째 또 본산(本山)에 안 들어올 수 없어 들어왔다가는 본산에서 잽혀 가지고, 붙잽혀 가지고 못 나가고 그래 있다가, 인제 그 농사를 통도사는 지니까, 농사를 잘 지어 놓고 물꼬 좀 보러 갔다가 물꼬를 막는 바람에 툭! 터져 버렸다. 툭 깨 버렸어.

그 깨는 것이, 툭 터진 것이 대오(大悟), 우리 대오허는 법이 그게—자, 부처님도 경계 보고 깼제. 별 탁! 뜬 놈 보고, 탁! 봐 버렸제. 권렴(捲簾), 주름 턱! 주름 살 턱! 거둔 것 보고 장경(長慶) 도인도 툭 깨 버렸제. 이렇게 경계를 보고 탁 깨아.
오히려 경계(境界)를 보고 깨는 것이 말, 언하대오(言下大悟) 보담도 더 힘이 있어. 척! 경계를 척 보고, 툭! 봐 버리는 것이 제일 도력(道力)이 있다는 것이여.

도(道)도 그놈 깨달라도 힘이 설찬히 차별이 있어. 여지없이 바로 깨달은 힘이—힘이 있게 깨달을 것 같으면은 보림(保任)도, 보림허기가 퍽 쉽기도 허고, 또 희미허게 깨달라 놓을 것 같으면은 그 힘대가리 없는 각(覺)이라는 게 그 우스운 것이여.
그만 그저 공안은 하나 봤다 허지마는 모도 맥힌 대문이 있고, 또 설사 안 맥히드래도 모도 그런가 저런가 허는 희미허고. 그 천(淺)이면 그려, 그것이.

경계를 보고 깨는 거, 또 언하, 언하대오, 언하대오가 그것 또 참 언하에 툭! 깨는 거, 말 · 법문 듣다 깨는 거, 이 경계 보고 깨는 것만은 오히려 못허다 했지?
그다음에는 자기가 문자참선(文字參禪), 문자 중에서 글을 보고 깨는 거, 그건 퍽 그 힘대가리 없다는 것이여. 허니 참선은 '강사 참선'이 어렵고. 왜 어렵냐? 어떻게 쪼사 놨던지, 언구(言句)를 이래 쪼사 놨던지 그 어려와.

너무 많이 알수록에 아는 놈이 장애가 되어서 의심(疑心)이 잘 일어나들 않고, 해석이 자꾸 붙고 '요런 것이 아닌가?' 허다가도 '에, 아니다'고 내던져도, 또 그 따지는 습관이 '향상이다. 오! 향상은 어떤 거제?' '향하다. 오! 향하는 어떤 것이제?' 이래 가지고는 무슨 여러가지 그 모도 그 이해(理解)가 이해, 이치의 해가 나.
보통 아무 근원 없이 일어나는 망상보담도 고 향상(向上) · 향하(向下) 같은 그런 이(理)에 가서 이로(理路)가, 이치길이 자꾸 나온 것이 그것이 대해(大害)라. 큰일나! 그녀러 거.

안 헌다 해도 자신이 밤낮 허고 앉었거든, 고 짓을. 그래 가지고는 아침 때 그러지, 안 헐라다가도 또 저녁 때 그러지. 자신도 마음대로 못혀.
하! 오직 해야사, 얼마나 참, 강(講)을 삼십여 년을 허셨으니, 옛날에 그 누구... 저 무슨 스님이제? 서산(西山) 스님 찾아... 소요 스님! 소요 스님!

소요 스님이 그 강(講)을 삼십 년이나 했으니 무척도 했제, 삼십 년이란 세월을. 그 경(經)을 그리 잘 보고, 속서(俗書)는 통달했고. 그래 가지고는 확, 이건 너무 알아 가지고는 당최 뭐 턱! 말헐 것 같으면은 모르는 것이 있어야제. 환허다.
허지마는 어디 아는 것이, 어디 아는 것이 그게 참선이여? 그렇게 큰 강사기 따문에 아는 것이 참선 아닌 줄을 확연히 알았거든.

알았으니까, '교외(敎外)에 별전선지(別傳禪旨)다. 교(敎) 밖에 별(別)로 전(傳)헌 선지(禪旨)가 있다. 교 밖에 별전선지는 아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이 아니니 세상에 아는 것 밖에 무슨 도리일 것인가 말이여.
그러면 모르는 것인가? 꽉 맥혀서 몰랐으면은 우리 범부(凡夫)처럼 과거도 꽉 막혀 모르고, 또 금생에 와서도 지나지 않은 일은 다 꽉 맥혀 모르고, 오늘 있어 내일 일을 모르고, 또 금생에 이 몸 가지고 있지마는 내버리고 갈 일도 모르고, 우리 중생은 그러허니, 그렇게 꽉 맥혀서 모르는 것인가?

아는 것이 아니기 따문에 모르는 것도 아니니라.

꽉 맥혀 모르는 것이 그것이 법(法)이여?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법이 아니면은 아는 것, 모르는 것 그 중간 사이, 그 아는 놈 모르는 놈 젖혀 놓고 그 중간에 비유(非有) 비무(非無) 뭐 고런 것이 법인가? 그것도 아니여.
아는 놈도 아니기 따문에 모르는 놈도 아니여. 그러기 따문에 그 쫌도 아니여. 모르는 놈, 아는 놈 그 중간 토막도 아니여. 그러니 뭣이냐 그말이여? 이런 꼴 좀 보소.

뭐라고 해 놓으면 그것은 교외별전(敎外別傳) 선법(禪法)이 아니여! 그 무슨 법이 그러헌 법이 있겄느냐 그말이여?
그러니, 모르는 법, 아는 법, 그 중간에 그 가운데 그것, 그다음에 밝은 거, 그러니께 어두운 거, 어두운 것 밝은 것, 그것 짬 사리도 아무것도 아니여.

거기에서 만약에 무슨, 무슨 고 밖에 또 도리를 갖다가서 '옳다! 그 도리다'해 가지고는 그놈을 갖다 집착허고 앉었어도 그건 법이 아니다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니 단진범정(但盡凡情)이여. 범정(凡情) 다 해 버렸어. 범부정(凡夫情)은 다 없다. 모르는 범부정, 모르고 알고 모도 그 범부정, 아나 모르나 다 범부정, 중도 제일까장 다 범부정, 그놈의 범부정 쏴악 쓸어 버렸으니, 그러고 인자 성정이 아닐 것인가?

성인(聖人)의 정(情), 성인의 뜻, 성해, 이런 제...
별무성해(別無聖解)다! 별도 성해가 어디 있어? 그 성해에 어디가 머무를 것이여?

그것, 무슨 법이 이러헌 법이 있느냐 그 말이여.
교외(敎外)에 별전(別傳), 교 밖에 별전법이니라. 세상에 이런 법이여.(17분18초~29분30초)





(2)------------------

그러니 '입타불입타(入打不入打)다' 원상 그려 놓고.
원상(圓相)이 그 최고 도리여. 다시 원상 더 나갈 도리는 없어, 입 열어서 말허자면.

고불(古佛)이 미생전(未生前)이요, 옛 부처가 나기 전이여. 거, 옛 부처도 생기기 전이니, 거 또 옛 부처가 나기 전이지마는, 천지도 나기 전이지마는, 거기에서 제불(諸佛)이 출세허기도 허고 제불이 열반허기도 허고 그런 디여.
제불출신처(諸佛出身處)요, 제불열반처(諸佛涅槃處)요, 천성(千聖)도 불식처(不識處)요, 불불(佛佛)도 서로 보지 못헌 곳이요,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요, 오히려 알지 못했어.

이러헌 원상을 척 그려 놓고 '거기에 들어가도 죽고, 거그 나와도 죽는다'
하, 이거! 그게 그 최고여! 거 거그서 그 중생 해탈 많이 시키는 공안이여. 그러기 따문에... 그러기 따문에 마조(馬祖)가 답살천하인(踏殺天下人)허는 공안이니라. 천하인을 답살해 죽이는 공안이다. 거그서 무슨 상량(商量)으로 답허냐 그 말이여.

그놈, 당시에 마조 스님이 물으니까, 학자 하나가 원상 안으로 쑥 들어갔다.
응, 그놈 하나 답허면, 그놈 또 봐야 허네. '그 학자가 눈이 있나 없나? 왜 들어갔나?'

원상 안에 쑥 들어가니 마조 스님은 쳤다. 따악!
아, 칠 수밖에 없제.

치니까, 척! 쳐다 보고 "타모갑부득(打某甲不得)입니다. 모갑을 치지 못했습니다"
마조 스님은 휴거(休去)를 했다. 아무 말이 없어.

그 학자는 왜 들어갔으며, 들어가 가지고는 맞아 놓고는 "저를 못 쳤습니다" 그러니께 마조 스님은 쉬어 버렸다.
고것이, 그 공안에 응, 거 법로(法路)여. 법을 써.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용무생사가 그게 현중현(玄中玄) 도리인데.

체중현(體中玄)은 고대로—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무일물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로 체중현이라 헌다든지, 모도 그러헌 그 법견(法見)을 가지고 체중현이라 햐.
왜 향상(向上)도 그 체중현일 것이고 뭐 그렇지 그 뭐여?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도 그 체중현 밖에 더 되아?

귀로 들을 수 있고, 뜻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헐 수 있고. 고러헌 것 가지고는, 체중현 가지고는...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경(經)부텀 들으면 아는 것이여. 들어가지고 아는 것이 체중현이여.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구중현(句中玄)이여. 구중현이라는 것은 처컥 들으면 벌써 그만 그 체중현 해(解)는 벗거져.
'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는디, 한 물건도 없는 그 가운데에 역무일물(亦無一物)이, 또한 일물지해(一物之解)도 없다' 요렇게 해서 고 지견(知見)까장 벗거질 수가 있지마는, 고것도 인천위사(人天爲師)는 되아. 인천의 스승은 된다 했어.

그러나 이 현중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되어야지.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척, 그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인자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그 말이여.


아, 이 불 피워라. 불 피우고 지침허는 어른은 와서 지침 좀 않게 옆에 앉으시라고 그려. 누가 그리 지침허시는고? 약 좀 잡솼으면 쓰겄는데.
그 차와 그러요. 요리 나오시요. 내가 허라는 대로 해요. 나오시요. 어서! 그 나오시요. 그러고 글안허면 저 방으로 들어가서 앉으셔. 냉해서 그런다.

법문 안 들어도 괜찮해. 어서! 그러시요. (괜찮아요.) 저 옆으로 가란 말이요. 허허! 지침을 자꾸 해싼게 내가, 내가 법문 안 허고 가면 쓰겄소? 이 법문이 중요헌 법문인디. 인자 여 끝마치는 법문이여.
옳제! 더 들어 앉으시요 쑥! 괜찮해야. 뜨스운 자리 요렇게 앉으면 한결 가라앉습니다. 인자 보시오. 허허! 그 참. 차우니까 그런데.


이 공안 법문이여. 참말로 공안 법문이여.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생사 없는 걸 그대로 써 나가여.
오(悟)를 허되 참으로 터꺽! 보고 툭 깼네. 힘이 있어야!

그래서 원상을 그려 놓고 '입타불입야타(入打不入也打)'
거그에 한마디 일른다. 옳게 설사 일러. 옳게 이른다 해도, '그 중이 어떻게 들어간 중이냐? 눈이 있나 없나?' 얼른 못 개려내는 거여.

어째서 또 들어가서는 "모갑(某甲)을 치지 못했습니다"
마조 스님은 휴거(休去)헌 것은 뭣인가?

그런 것은 체중현 도리나, 고렇게 들어서 공안을 어찌 짐작해 알어 가지고 생전 꿈도 소용없어!
'그런 것인가? 어찌 요런 것인가?' 그 때문에 안 되아. 그것이 어디 선(禪)인가? 그 선 아니여.

처억! 만공 스님 십대문답 어떻게 된 까닭을 주욱... '(십대문답) 저 끝에 가서 백지(白紙) 네모진 디다 한 쪽 귀텡이에다가 원상(圓相)을 해 놨느니라' 헌 걸 그걸, 그런 것을 바로 선사(禪師) 뜻을 봐야 혀. 그래서 천칠백 공안이니라.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천칠백 선사가 다 그 근본 본대의야 틀림이 없지마는, 그 맨들아 논 공안 그 자물쇠통 채워 놓은 것이 다 달러.

그놈이 바로 나가지 못하면 아무리 깨달랐다 해도 안 되아. 하나만 봐 가지고는 넘, 그래 중생 교화를 못하는 거, 용무생사도 안 된 거, 자기도 항상 해 나가도 그렇게 활발치를 못혀. 걸려! 걸리면, 설사 하나는 옳게 했다 하드래도, 그거 안 되아.
그러면은 경봉 스님이 물 대다가 툭 깨쳐 가지고는 그만 야단치든 경계는 그거는 체중현이여. 암만 천하없이 그래도, 강사(講師) 소견으로 있든 때여.

모도 들어 가지고 대교를 모도 판단해서, 그 다 알아 가지고 모도 인자 허다가 보니 그 들난 곳이 그 강사 처음에 공, 뭐 뭐, 입으로 다루던, 설시(說時)는 사오(似悟)나, 말헐 때에는 설헐 때에는 깨달은 것 같지마는 대경환미(對境還迷)허든 경계, 그 경계와 물구녁에 논 물 대다가 툭 막어 가지고 툭! 그만 보든 경계와는 영 달라. 그러지마는 그것도 체중현이여.
그러기 따문에 체중현이기 따문에 체중현을 아는 것 다르고, 또 보는 것 달라.

그 체중현을 처꺽 봤지마는, 그러기 따문에 추어망담(醜語妄談)이 개시선(皆是禪)이고 개시묘(皆是妙)고, 그만 막 들입대 그만 부인와도 욕을 막 들입대 했다 그 말이여.
그때 뭐, 뭐 내가 들어가 야단났었는디, 자기는 그때 경계를 모르든 것이여. 아, 그러기 따문에 내가 그때 가서 그렇게 탁! 해 가지고는 그만, 그 내가 갖다 고함 질러서 옥련봉 밑에로 올라가서 그런 걸 다 모르제. 모르기 따문에 한번도 말 안 혀.

"아니, 경봉 스님 더러 안 하더냐?" 허면은 "통 못 들었소" 그려.
아, 여그, 여그 종성 수좌도 거그 지냈단디, 내가 물어봤어. 흥, "한번 그런 말 못 들었소" 허거덩.

그래도 어찌 학자(學者)를 가르키시다가 당신이 어떠헌 경계를 얻었다는 거, 그런 것은 말허는 법이여.
만공 큰스님도 다 그런 말했고, 혜월 큰스님께서도 그 견성은, '단지불회시즉견성(但知不會是卽見性)이라' 헌 디서 툭 깨가지고는 했다는 말씀 다 학자한테 허고,
전혀 안 허신다는 것은 그 경봉 스님이 그때 시대를, 그만 그때 경계를 모르시든 것이여. 꿈겉이.

그래도 그 생리적으로 뭐 그렇게 미친 것은 아니기 따문에 다 아는 것인데, 모른다 한다니,
나 그러나 저러나 또 알아도 그럴 수도 있겠제.

그때 경봉 스님이 만약에—암만 천하없이 별소리 다 해도, 정영신이가 얻어먹고 들어가서, 걸식허고 들어가서 한번 안 대질렀으면, 거그서 그만 그대로 경봉 스님은 출세했으면은 안 되아. 되들 안 혀.
그때 그 답허고 점두(點頭) 턱 허고 내려와서는, 점두 척 허고 내려와서는, 보광전에 앉어 가지고는 그 뒤부텀은 한번도 입 뗀 법이 없어. 입을 뗀 법이 없었댜. 그저 앉으면 정진만 허고 앉었었어. 그럴 것이거든. 참말로 정진을 해야 허는 것이거든.

턱! 그 경계 들어갔다고—흥! 일예(一翳)가 재안(在眼)이면, 한 가리움이 눈에 있으면은 공화난타(空華亂墮)다. 허공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했으니 뭣 헐 것이 있어. 뭣을 닦아?
허어! 참 닦아야 한다. 인자 참 정말이다.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원각대지가 낭연독존을 해야 헌다.

낭연독존은 해서 그건 지킨 건가? 말허자니 그런 것이제. 아, 이거! 말만 허면은 조비모락(鳥飛毛落)이니 그럼 어떻게, 어떻게 헐 것인가? 누() 밖에 어떻게 설헐 것인가.(29분36초~42분5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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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임제록(臨濟錄)』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산승의 견처(見處)는 불조(佛祖)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가로판 p215, p219)
[ 三玄(삼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역주(譯註)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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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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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