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선근2017. 6. 17. 21:41

*선근(善根) ; 온갖 () 낳는 근본(根本), 뿌리. 좋은 과보를 받을 만한 착한 (), 행위. 청정한 행위를  근성. 일반적으로 탐욕이 없는 [無貪], 성냄이 없는 [無瞋], 어리석음이 없는 [無癡] 등을 선근이라 한다.

 

*() ; [산스크리트어] kuśala  올바르고 청정하여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 궁극적인 진리에 따름.

 

(3분 1초)

 

[법문] 송담스님(No.663)—2002 동안거해제 법어(02.02.06)(용663)

 

근기(根機) 약하고 그래서  갈수록 어렵고 참지 못해 가지고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마는, 그래도 숙세의 정법(正法)에 대한 인연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갈수록 재미가 없는  길을 우리는 목숨을 걸고 취택(取澤)을 했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대한 숙세의 선근 종자(善根種子) 없다면 아무나  공부를 믿게 되기도 어렵고   공부에 착수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숙세의 깊은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공부를 믿게 되고   공부를 하겠다고 착수를 했고, 그래서   이태    년을 우리는 오직   길을 향해서 정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다행한 일이고,  사바세계(娑婆世界) 태어난  자체를 우리는 원망하는 바가 없고,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공부를 만나게 되고  법을 실천을   있게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겸허하게 생각할 따름인 것입니다.

 

설사 공부를 하다가 힘이 들고 지쳐서 몸을 가누기가 어렵다 해도 우리는  길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고, 설사 병이 나서 꿍꿍 앓게 되더라도 우리는 앓는 가운데에서도 생각만큼은 화두(話頭)에 대한  생각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고, 심지어는 꿍꿍 앓다가 숨을 거둔  찰나에도 우리는 화두를,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들면서 눈을 감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철저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최상승법을 믿고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948~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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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숙세(宿世 지날·묵을 /세상·시대 ) ;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 세상[].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취택(取擇 가질 /뽑을 ) ; 택취(擇取). 여럿 가운데서 필요한 것을 ()하여 골라 뽑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모두 사바세계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한다.

Posted by 닥공닥정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 ; ‘다만 알지 못할  알면 이것이  성품을 [見性] 것이니라

 

[참고] 『수심결(修心訣) (보조지눌 스님)

〇問  作何方便  一念廻機  便悟自性

  只汝自心  更作什麼方便  若作方便  更求解會  比如有人  不見自眼  以謂無眼  更欲求見  旣是自眼  如何更見  若知不失  卽爲見眼  更無求見之心  豈有不見之想  自己靈知  亦復如是  旣是自心  何更求會  若欲求會  便會不得  但知不會  是卽見性

 

() 어떤 방편을 지어야  생각 기틀을 돌이켜서  자성을 깨달을  있습니까?

() 다만 너의 스스로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지으려 하는고. 만일 방편을 지어서 다시 알기를 구한다면,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하고서는 눈이 없다 하여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의 눈인데 무엇을 다시 보리오. 만일 잃지 않은  알면  눈을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도 없거니 어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으리오.

자기의 영지(靈知) 또한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일 알려고 한다면  알지 못할 것이니, 다만 알지 못할  알면 이것이  성품을 [見性] 것이니라.

 

(5분 55초)

 

[법문] 송담스님(No.663)—2002 동안거해제 법어(02.02.06)(용663)

 

방금 해제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간곡한 법문을 경청을 했습니다. 해제날인데 결제 법회 때에 들을 만한 그러한 법문을 경청을 했습니다.

마땅히 해제(解制)에는 해제 법문을 선택할 것이 결제(結制)  들을 만한 법문을 들은 것은,   동안 결제를 해서 안거(安居) 했으되 해제 ・ 결제라 하는 것은우기(雨期), 여름철에 우기에   안거를 하고,  겨울철에 추울 때는 그래서 겨울 안거를 하겠지마는그것은 부득이해서 기후에 따라서 결제 ・ 해제가 있을  우리의 정진을 하는 데 있어서는 결제 ・ 해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해제를 했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정진하는 데에 무엇이  끝나고 그런 것이 아니고, 해제날 정식으로 다시 우리의 자신을 반성하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참회(懺悔) 하고 그리고 해제날 다시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을 다시 시작하는 그런 각오가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초학자(初學者)가 마땅히 들어야  만한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정진을 시작하는 그런 마음으로 듣기 위해서 그런 법문을 선택을 했습니다.

 

아까 마지막 무렵에 조실 스님의 법문에 정진을 해서   없는 의단(疑團) 독로(獨露)해야  사람이 올바르게 정진을  것이지. 정진을  가지고 무엇이 알아진 것이 있다든지, 무엇이 나타난 것이 있다면 정진을 바로  것이 아니다 그런 말씀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갈수록   없는 의단이 독로해야 옳게 정진하고 있는 것이고, 해제를 하고 나서도 정말   없는 의단이 독로해야  사람이  철을 올바르게 정진한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분명히  몸뚱이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 주인공이 밤낮없이 그놈이 작용을 하고 있고, 활동을 하고 있고, 눈을 통해서 온갖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듣고, 앉고 서고 눕고 거닐고  그러한 소소영령한 놈이 있건마는 찾아보면은 눈으로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갈수록  수가 없을 뿐이지. ‘! 이것이로구나하고 알아진 것이 있고, 보이는 것이 있다면은  사람은 공부가 빗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인의 말씀에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이다’.

다맛   없어. ‘다맛   없는 것이 이것이 자기의 성품을 보는 이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하신 법문도 있습니다.

 

  있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성(自性) 보는 것이,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양이 있고 색상이 있는 것이라면 응당 눈으로  수가 있겠고 손으로 만져볼 수가 있겠으나 본래 모양이 없는 것이고 색상이 없는 것이라 그릴 수도 없고 표현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없는 의단이 독로하고,   없는 의심으로 의관(疑觀)으로 나가야 올바르게 정진을 하는 것이고, 올바르게 정진을 해야 바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352~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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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解制  /만들·법도 ) ; (안거)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

*결제(結制 맺을 /만들·법도 )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 15일에 결제한다.

*안거(安居 편안할 /있을 )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인도의 불교도들은 4 15(또는 5 15)부터 3개월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 15일부터 7 15일까지 하안거(夏安居), 10 15부터 다음해 1 15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물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 한다.

*참회(懺悔 뉘우칠 /뉘우칠 )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부끄러워할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改過自新),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罪隨心滅).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心本空寂),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罪業無寄).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있습니다.

*의단(疑團 의심할 /덩어리 ) ; 공안(화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 영령(靈靈) 함께 밝은 .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 의미하는 .

*자성(自性) ; ①사물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 하는 .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모르는 사람은 힘을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밖에는 없지만, 한 ,  ,   이렇게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해도 화두가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 독로(獨露)하걸랑,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 하는 거여.   없는 의심의 ()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일은   없는 의단(疑團)만을  잡드리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 () 긴완(緊緩) 득기중(得其中) 해야 . 그것이 묘한 ()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아는 사람은 바로 ()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 의심(疑心) ()’으로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관해 나가면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의심의 ()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 막론하고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 2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  ,  , 3, 5, 10년을 해도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하고, 고대로 하면서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묘한 의관(疑觀)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조정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의심관, ()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활구참선(活句參禪) 의심(疑心) 이라야 .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 서산에 지려고  ,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때에,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빨갛고 아름다운 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수가 없는데, 해가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해를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떨어져서  보일 때까지  시간 내지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때까지 관찰하고서,  다음에는 밤새  눈을 감으나 뜨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다시   관을 해서,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밤새 관하고,  이튿날 관하고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일관이라든지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 있는데,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의단(疑團)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해도   없는 의심이해가   봐두었던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 .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역대조사(歷代祖師)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ㅅ/소소영령2017. 6. 17. 18:17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 영령(靈靈) 함께 밝은 .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 의미하는 .

 

(3분 38초)

 

[법문] 송담스님(No.663)—2002 동안거해제 법어(02.02.06)(용663)

 

한산정상월륜고(寒山頂上月輪孤)하야  조견청공일물무(照見晴空一物無)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가귀천연무가보(可貴天然無價寶)  매재오음익신구(埋在五陰溺身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산정상월륜고(寒山頂上月輪孤)  조견청공일물무(照見晴空一物無). 한산(寒山) 산봉우리에 외로운 달이 밝았는데, 맑은 하늘에 비추되  물건도 없구나.

 

가귀천연무가보(可貴天然無價寶), 가히 귀(貴)엽다 천연의 값없는 보배가,

매재오음익신구(埋在五陰溺身軀). 오음(五陰)으로 뭉쳐진  육체 속에 파묻혀 있구나.

 

밝은 달이 한산(寒山) 봉우리에 둥그랗게 떠있는데,  달이  허공을 비추되  물건도 없다 그거여.

우리 육체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 주인공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육체 속에    없는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묻혀 있다.   물건이  법계(法界)를 두루 비추고 있건마는  우리의 주인공을  수가 없다 이거거든. 한산(寒山) ()입니다.(처음~351)

 

 

 

 

[참고] 『임제록(臨濟錄)

〇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 없고 ()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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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한산정상월륜고~’ ; 『한산자시(寒山子詩)』에서 한산(寒山)의 시.

*오음(五陰) ; 오온(五蘊). () 무더기모임집합더미를 뜻함.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요소의 무더기, 물질적 요소인 색온(色蘊) 정신요소인 4(···) 합쳐 부르는.

①색온(色蘊) : 몸이라는 무더기. 몸의 감각 무더기. ②수온(受蘊) : 괴로움이나 즐거움등, 느낌의 무더기. ③상온(想蘊) :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어내는 생각관념의 무더기. ④행온(行蘊 :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의지충동의욕의 무더기. ⑤식온(識蘊) : 식별하고 판단하는 인식의 무더기.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한산(寒山) ; 중국 당나라 때 사람. 성명은 알 수 없고, 천태(天台) 당흥현(唐興縣)의 서쪽 70리에 한암(寒巖)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대개 그 바위굴 속에 있었으므로 ‘한산’이라 하고, 때로는 국청사(國淸寺)에 가기도 했다.

몸은 바싹 마르고, 꼴은 거지와 같고 보기에 미친 사람 비슷한 짓을 하며, 국청사 절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습득(拾得)에게 대중이 먹고 남은 밥을 얻어서 댓통에 넣어가지고 한산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미친 짓을 부리면서도 하는 말은 불도(佛道)의 이치에 맞으며 또 시를 잘하였다.

어느날 태주자사(台州刺史) 여구윤(閭丘胤)이 사람을 보내 한암(寒巖)에 찾아가서 옷과 약 등을 주었더니, 한산은 큰 소리로 “도적놈아! 이 도적놈아!”하면서 바위굴로 물러났고 “너희들에게 말한다, 각각 노력해라!”하면서 바위굴로 들어간 뒤에는 그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한다. 세상에서 한산, 습득, 풍간(豊干)을 3성(聖)이라 부르며, 또 한산을 문수보살, 습득을 보현보살 화현이라 한다. 『한산시』 3권이 있다.

—[참고] 여구윤(閭丘胤)의 ‘한산자시집서(寒山子詩集序)’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