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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1.26 번뇌 망상(No.233)—번뇌망상이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
  2. 2022.08.08 수마((No.233))—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도(道)를 장애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 생력(省力)이 득력(得力).
  3. 2022.08.08 의심(화두드는 법)((No.233))—알 수 없는 그 묘관(妙觀) | 경(經)은 노정기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그 생각에 즉(卽)해서 | 수마(睡魔) | 득력(得力).
  4. 2021.12.11 득력((No.233))—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수마(睡魔) | 생력(省力), 힘을 덜은 것이 바로 득력(得力), 힘을 얻는 것이 된다.
  5. 2021.12.06 선(禪)과 교(敎)((No.233))—경(經)은 노정기(路程記) | 참선법은 교외별전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6. 2021.12.04 선지식((No.233))—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이타에 맥힘이 없는 것 | 바른 안목을 갖춘 선지식의 점검.
  7. 2021.08.29 자비((No.233))—(게송)山徑無人鳥不回~ |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어려울수록에 우리는 참나 찾는 공부를 더욱 노력해야. 이것이 우리 불자(佛子)가 하는 길.
  8. 2021.08.28 혼침((No.233))—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수마(睡魔) | 생력(省力), 힘을 덜은 것이 바로 득력(得力), 힘을 얻는 것이 된다.
  9. 2021.08.26 이뭣고((No.233))—어떠한 근기라도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말세 중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수행법인 간화선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10. 2021.08.25 제호상미 번성독약((No.233))—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 | 바른 안목을 갖춘 선지식의 점검. 1
ㅂ/번뇌 망상 (대책)2024. 1. 26. 12:11

번뇌 망상(No.233)—참선법은 교외별전(敎外別傳) |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번뇌망상이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다생에 도(道)를 장애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번뇌 망상 다스리는 법 ;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내버려 두고, 즉각 자기 본참공안을 들고 나간다.

[참고] 송담스님(No.531)—1994년 5월 첫째일요법회.
처음에는 암만 망상을 안 할려고 해도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아무리 화두를 간단없이 들려고 해도 1분도 안 가서 딴 생각[別念]이 들어오고 끊어지고, 그러지만 끊어지면 또 들고, 끊어지면 또 들고,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내버려 둬 버려. 내버려 두는 것이 망상을 다스리는 법이여.
지나간 생각이 일어나거나 미래 생각이 일어나거나, 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그냥 일어난 그 찰나에 그냥 고대로 놔두어 버리고 자기 본참공안을 터억 거각을 해 나가. 「이뭣고?」(18분26초~19분18초)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2분)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古人)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하지 아니하고 정신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力]을 갖다가 덜었다[省].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60분54초~1시간12분5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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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佛法) ; 부처님[佛]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산스크리트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겁(劫) ; (산스크리트어 Kalpa)  음을 따라 갈랍파(羯臘波) 또는 겁파(劫波)라 하고, 다시 줄여서 겁(劫)이라고만 한다.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오랜 세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사구게(四句偈) ; 네 구(句)로 이루어진 게(偈).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로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시가(詩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노정기(路程記 길 노(로)/길 정/기록할 기) ; 여행할 때 여행의 경로(經路)나 일정(日程) 따위를 적은 글[記].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세로판 p28, p34. 가로판 p29, p35.
世尊 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是故 若人 失之於口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拈花微笑]이 모두 교의 자취[敎迹]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敎外別傳禪旨]가 되리라.

*부처님[佛] ; 불(佛)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Buddha의 음사(音寫)인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 깨달은 분) · 각(覺 깨달음)이라 번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당처(當處) ; ①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 그곳. 또는 이곳. ②그대로. 지금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곳에서.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❶]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❷]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  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 所能恐怖  有如是等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了事人]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현로(顯露 나타날·드러날 현/나타날·드러날 로) ; 겉으로 나타내어 보여 줌.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에서.(9분10초)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業)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 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 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 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44분3초~53분14초)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눈뚜껑 ; ‘눈꺼풀’의 사투리.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 曠劫障道(광겁장도) 睡魔莫大(수마막대).(『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에서)
*수마(睡魔) ; 수행을 방해라는 ‘졸음 · 잠(睡)’을 마구니[魔]에 비유한 말. 참선할 때 어느새 잠이 와 졸음이 쏟아지면 정신 차려 정진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졸음 · 잠(睡)’을 수마(睡魔)로 일컫는다.
[참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에서.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이어다. 曠劫障道(광겁장도)는 睡魔莫大(수마막대)니 二六時中(이육시중)에 惺惺起疑而不昧(성성기의이불매)하며, 四威儀內(사위의내)에 密密廻光而自看(밀밀회광이자간)하라.

삼경(三更 : 저녁 9시에서 새벽 3시)이 아니면 잠자지 말라. 끝없는 오랜 세월 두고 수도에 방해되는 일은 수마(睡魔 : 잠 ・ 수면)보다 더한 것이 없다. 12시간(현재의 24시간) 어느 때나 또렷이 깨어서[惺惺] 의심을 일으켜 흐려지지 말며,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다니거나 항상 자세히 빛을 돌이켜 스스로 마음을 살펴보라.

一生(일생)을 空過(공과)하면 萬劫(만겁)에 追恨(추한)이니 無常(무상)은 刹那(찰나)라 乃日日而驚怖(내일일이경포)요, 人命(인명)은 須臾(수유)라 實時時而不保(실시시이불보)니라. 若未透祖關(약미투조관)인댄 如何安睡眠(여하안수면)이리요.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면 만겁에 한이 될 것이다. 무상(無常)은 찰나와 같으니 날마다 놀라 두려워할 것이며, 사람의 목숨은 잠깐[須臾]이니 실로 늘 보존되는 것이 아니니라. 만약 조사관(祖師關 : 화두)을 뚫지 못하였다면 어찌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겠는가?

頌曰(송왈) 睡蛇雲籠心月暗(수사운롱심월암)하니 行人到此盡迷程(행인도차진미정)이로다 箇中拈起吹毛利(개중염기취모리)하면 雲自無形月自明(운자무형월자명)하리라.

게송으로 말하노라. 독사 같은 졸음[睡蛇]의 구름 끼어 마음의 달[心月]을 어둡게 하니, 도 닦는 이 여기 와서 길을 몰라 헤맨다. 이 가운데 취모리(吹毛利) 빼어 들면 구름 저절로 없어지고 달이 스스로 밝으리라.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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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ㅎ/혼침(수마) 산란2022. 8. 8. 12:31

수마((No.233))—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다생(多生)에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 생력(省力), 힘을 덜은 것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수마(睡魔) ; 수행을 방해라는 ‘졸음 · 잠(睡)’을 마구니[魔]에 비유한 말. 참선할 때 어느새 잠이 와 졸음이 쏟아지면 정신 차려 정진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졸음 · 잠(睡)’을 수마(睡魔)로 일컫는다.

[참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에서.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이어다. 曠劫障道(광겁장도)는 睡魔莫大(수마막대)니 二六時中(이육시중)에 惺惺起疑而不昧(성성기의이불매)하며, 四威儀內(사위의내)에 密密廻光而自看(밀밀회광이자간)하라.

삼경(三更 : 저녁 9시에서 새벽 3시)이 아니면 잠자지 말라. 끝없는 오랜 세월 두고 수도에 방해되는 일은 수마(睡魔 : 잠 ・ 수면)보다 더한 것이 없다. 12시간(현재의 24시간) 어느 때나 또렷이 깨어서[惺惺] 의심을 일으켜 흐려지지 말며,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다니거나 항상 자세히 빛을 돌이켜 스스로 마음을 살펴보라.

一生(일생)을 空過(공과)하면 萬劫(만겁)에 追恨(추한)이니 無常(무상)은 刹那(찰나)라 乃日日而驚怖(내일일이경포)요, 人命(인명)은 須臾(수유)라 實時時而不保(실시시이불보)니라. 若未透祖關(약미투조관)인댄 如何安睡眠(여하안수면)이리요.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면 만겁에 한이 될 것이다. 무상(無常)은 찰나와 같으니 날마다 놀라 두려워할 것이며, 사람의 목숨은 잠깐[須臾]이니 실로 늘 보존되는 것이 아니니라. 만약 조사관(祖師關 : 화두)을 뚫지 못하였다면 어찌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겠는가?

頌曰(송왈) 睡蛇雲籠心月暗(수사운롱심월암)하니 行人到此盡迷程(행인도차진미정)이로다 箇中拈起吹毛利(개중염기취모리)하면 雲自無形月自明(운자무형월자명)하리라.

게송으로 말하노라. 독사 같은 졸음[睡蛇]의 구름 끼어 마음의 달[心月]을 어둡게 하니, 도 닦는 이 여기 와서 길을 몰라 헤맨다. 이 가운데 취모리(吹毛利) 빼어 들면 구름 저절로 없어지고 달이 스스로 밝으리라.

 

 

(5분 46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1시간7분12초~1시간12분5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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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省力]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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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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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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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화두드는 법)((No.233))—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 |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 | 경(經)은 노정기(路程記) | 참선법은 최상승법, 교외별전(敎外別傳).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하는,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수마(睡魔) | 생력(省力), 힘을 덜은 것이 바로 득력(得力), 힘을 얻는 것.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19분 41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끊어져 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렇게 해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 스님이 천하 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法擧揚)을 해 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맡었지만, 원오극근 선사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하시지 안 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 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한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갖다가 막 강짜로 압력을 가해 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어갈 때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데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생각을 내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먹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데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하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53분16초~1시간12분5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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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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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ㄷ/득력2021. 12. 11. 04:54

득력((No.233))—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다생(多生)에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 생력(省力), 힘을 덜은 것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省力]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5분 46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1시간7분12초~1시간12분5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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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ㅅ/선(禪)과 교(敎)2021. 12. 6. 03:28

선(禪)과 교(敎)((No.233))—경(經)은 노정기(路程記) |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 교외별전(敎外別傳) |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선(禪)과 교(敎) ;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선(禪)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敎)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8~29, 34~35. (가로판 p29~30, 35~36)

(5)世尊 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 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주해) 三處者 多子塔前分半座 一也 靈山會上擧拈花 二也 雙樹下槨示雙趺 三也 所謂迦葉 別傳禪燈者 此也 一代者 四十九年間所說五敎也 人天敎 一也 小乘敎 二也 大乘敎 三也 頓敎 四也 圓敎 五也 所謂阿難 流通敎海者 此也.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이 세째이니, 이른바 가섭존자가 선(禪)의 등불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 이것이다.
한평생 말씀하신 것이란, 49년 동안 말씀하신 다섯 가지 교(敎)인데, 첫째는 인천교, 둘째는 소승교, 셋째는 대승교, 넷째는 돈교, 다섯째는 원교이다. 이른바 「아난존자가 교의 바다를 널리 흐르게 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然則禪敎之源者 世尊也 禪敎之派者 迦葉阿難也 以無言 至於無言者 禪也 以有言 至於無言者 敎也 乃至心是禪法也 語是敎法也 則法雖一味 見解則天地懸隔 此 辨禪敎二途.

그러므로 선(禪)과 교(敎)의 근원은 세존이시고,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니,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선(禪)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敎)이다.
또한 마음[心]은 선법(禪法)이고 말[語]은 교법(敎法)이다. 법은 비록 한맛이라도 견해는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떨어진 것이니, 이것은 선과 교의 두 길을 가려 놓은 것이다.


(6)是故 若人 失之於口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이 모두 교(敎)의 자취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禪旨)가 되리라.

(주해) 法 無名故 言不及也 法 無相故 心不及也 擬之於口者 失本心王也 失本心王則世尊拈花 迦葉微笑 盡落陳言 終是死物也 得之於心者 非但街談 善說法要 至於燕語 深談實相也 是故 寶積禪師 聞哭聲 踊悅身心 寶壽禪師 見諍拳 開豁面目者 以此也 此 明禪敎深淺.

법(法)은 이름이 없는 것이므로 말로써 미치지 못하고, 법(法)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무엇이나 말하여 보려고 한다면 벌써 본심(本心)을 잃은 것이요, 본심을 잃게 되면 부처님이 꽃을 드신 것이나 가섭존자의 미소가 모두 쓸데없는 이야깃거리만 될 것이다.
마음에서 얻은 사람은 장꾼들의 잡담이라도 훌륭한 설법이 될뿐 아니라, 새소리와 짐승의 울음까지도 진리를 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보적선사는 통곡하는 소리를 듣고 깨쳐 춤추고 뛰놀았으며, 보수선사는 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는 것을 보고 참 면목을 깨친 것이 이 까닭이다. 이는 선(禪)과 교(敎)의 깊고 옅은 것을 밝힌 것이다.

 

 

(7분 2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60분54초~1시간7분5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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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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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ㅅ/선지식(스승)2021. 12. 4. 05:27

선지식((No.233))—부처님은 복(福)과 혜(慧)가 원만구족(圓滿具足), 우리도 복과 혜를 항시 겸해서 닦아 가야 | 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맥힘이 없는 것 | 법광(法狂) | 바른 안목(眼目)을 갖춘 선지식(善知識)의 점검.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이여. 현중현을,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들은 그 사람을 '옳게 보았다'고 인가(印可)를 하셨습니다.

 

 

(13분 2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智慧)의 눈을 뜨는데 가장 빠르고 가까운 최고의 법(法)입니다마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우리가 지어온 죄업(罪業)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애서 여러 가지 장애가 많고, 도(道)를 닦는 데에도 장애가 많고 세속에 살아가는 데도 여러 가지 내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한 것은 과거에 지은 업장(業障)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조석(朝夕)으로 이렇게 참회(懺悔)를 함으로써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그래야 도 닦아가는 데도 장애가 없고 세속에 어떠한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해 나가는 데에도 뜻과 같이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은, 가장 올바르게 닦아가는 수행은 지혜와 또 복덕과, 복(福)과 혜(慧)를 겸(兼)해서 닦아 가는 길인 것입니다.
지혜(智慧)만을 닦고 복(福)을 닦지 아니하면 가장 그 비근한 예를 들면, 머리는 좋은데 박복(薄福)해서 되는 일이 없이 내생(來生)에 태어나는 게고, 복(福)만 닦고 지혜를 닦지 아니하면 내생에 몸을 태어나되 복은 있어서 돈은 좀 많이 있으나 머리가 돌대가리가 되어서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나 이웃에도 그러한 예를 보실 수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智慧)와 복(福)을 함께 겸해서 닦아가라' 부처님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이 지혜와 복, 복과 혜를 겸전(兼全)하신 최고의 성현(聖賢)이 누구냐 하면 바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할 때 '두 가지가 구족하신 높은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具足)하시다' 하는 것이 바로 이 '복(福)과 혜(慧), 이 두 가지가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시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아 가는데 있어서도 복과 혜를 항시 겸해서 닦아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데에도 그렇고, 세속에 사회인으로서 수행을, 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공안(公案)을 이르되, 이(理)와 사(事)를 다, 이(理)와 사(事)에 걸림이 없어야만 바로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만 맞고 사(事)에 맞지 아니하면 이것은 원만(圓滿)하게 보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치(理致)만 맞고 사(事)를 무시하게 되면 이것은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어서, 사(事)라고 하는 것은 현실(現實)을 사(事)라고 하는 것이고,
이치상으로는 선(善)과 악(惡)이 두 가지가 아니고,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부처와 중생(衆生)이 두 가지가 아니요, 크고 작은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맑은 것과 깨끗한 것이 두 가지가 아닙니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도 두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이치상으로만 본다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천칠백 공안(公案)을 하나도 맥힘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事)에도 맞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이여. 현중현을,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들은 그 사람을 '옳게 보았다'고 인가(印可)를 하셨습니다.

처음에 한 철 내지 두 철, 늦어도 한 3년 알뜰히 정진(精進)하게 되면 누구나 이 체중현(體中玄) 도리, 공(空)에 이치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이 공(空)의 이치만 보는 것, 그것만을 가지고 옳게 일렀다고 인가(印可)를 하게 되고, 본인도 의심 없이 '자기가 바로 보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법(法)에는 현밀(顯密)이 있어서, 은밀(隱密)히 할 말과 또 이렇게 나타내서[顯] 할 부분이 있는 것인데, 현밀을 가리지 못하고 마구잽이 말하게 되고, 이치로 보면 생사(生死)가 없기 때문에 육도(六道)도, 인과(因果)도 모두가 인증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事)를 보지 못하면, 사(事)의 이치를 보지 못하면 인과(因果)도 부정(否定)을 하게 되고 삼강(三綱)과 오륜(五倫)도 부정을 하게 되고, 선악(善惡)도 부정을 하게 되어서 거침없이 무애도인(無碍道人)으로 이 세상에 천상천하(天上天下)에 거침없이 말과 행동을 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조사(祖師)들이 대단히 이것을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맥힘이 없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을 만나냐, 못 만나냐에 따라서 좋은 그릇이, 좋은 재목(材木)이 훌륭한 건물을 짓게 되기도 하고, 또 좋은 재목이 아까웁게도 큰 성과(成果)를 거두지를 못하고 버리게 되는 수도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 말씀하시기를,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飜成毒藥)이다'
제호(醍醐)는 우유로 만드는 최고의 맛있는, 영양이 있고 맛있는 음식인데, 그 제호에 최고에 맛이 변해 가지고 독약(毒藥)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잘 관리를 해야지 변질(變質)되어 버리면, 아깝다고 그것을 먹게 되면 병(病)이 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치를 보는,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도 대단히 희귀한 일이고 참 소중한 일이지만, 공(空)의 이치를 본 그 경계(境界)는 잠시도 거기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분일초도 '내가 봤다'는 생각, '알았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거기에 주저앉게 되면 그 공부는 거기서 멈추게 되고, 하는 짓은 미친 짓 밖에는 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참선(參禪)하다 한 소식해 가지고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법광(法狂)이라 해서, 법으로 미친 '법광'이 되어 가지고, 불조(佛祖)도 막 매도(罵倒)해 버리고 쳐부셔 버리고 욕을 퍼붓어 버리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잽이 말을 막 함부로 하고 이래 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망치고, 많은 사람을 갖다가 그르치게 되고 불법(佛法)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達磨) 스님도 「혈맥론(血脈論)」에 '이금차도(而今此道)에 난득기인(難得其人)이라, 이 도(道)에 참, 사람 만나기 어렵다' 학자(學者)는 바른 스승을 만나기 어렵고 또 선지식(善知識)은 바른 학자를 만나기가 어렵다고 통탄(痛歎)을 하신 것입니다.

선지식을 만났다고 해서 그 선지식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못 자기의 그 소견(所見)을 바르냐 그르냐를 점검(點檢) 간택 받는 일뿐인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본 경계(境界)이기 때문에 너무너무 신기하고 너무너무 묘하고 힘이 솟구치고 환희에 넘쳐서 자기로서는 자기를 점검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바른 안목(眼目)을 갖춘 선지식(善知識)의 점검이 아니면 백(百)이면 백 다 잘못... 중간 잠깐 지나가야 할 그 경계에서 거기서 주저앉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28분35초~41분3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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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2분 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한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2분 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2분 26초)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어떤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가려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2분 36초)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❺]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 (4분 18초)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삼현 ; 보조국사의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참고 ①]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보조지눌 1158~1210 |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176~180. p200~20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542~546.

問 向來所說 旣聞命矣 古今禪門達者 見性成佛 豈非一分性淨之體 不具相用耶

또 물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잘 들었다. 그러나 고금 선문(禪門)의 통달한 사람이 견성하여 성불한 것이 어찌 일부분 성정(性淨)의 체성이 모양[相]과 작용[用]을 갖추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答 不然 汝豈不聞 永嘉眞覺大師 一宿曹溪 開悟本心作歌 其略 曰 心鏡明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萬像森羅影現中 一顆圓光 非內外 一性 圓通一切性 一法 遍含一切法 一月 普現一切水 一切水月 一月攝 諸佛法身 入我性 我性 還共如來合

나는 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왜 듣지 않았던가? 영가 진각(眞覺) 대사는 조계(曹溪)에서 하룻밤을 묵다가 본심을 깨치고 노래를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마음 거울이 밝아 걸림이 없음이여. 탁 트이고 밝게 사무쳐 사계(沙界)를 두루했다. 삼라만상의 그림자가 그 가운데 나타나니, 한 덩이 뚜렷한 광명은 안팎이 없다. 한 성품이 일체의 성품에 뚜렷이 통하고 한 법이 일체의 법을 모두 머금고 있다. 한 달이 일체의 물에 두루 나타나매, 일체의 물의 달이 한 달에 포섭된다. 모든 부처의 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오매, 내 성품이 여래와 하나로 합한다’ 하였다.

又英邵武 開悟本心作偈 其略 曰 十方齊現一毛端 華藏重重帝網寒
又大慧禪師 秉拂云 欲識佛性義 當觀時節因緣 時節 若至 其理自彰 乃至須知微塵諸佛出世 降王宮坐道場 轉法輪降魔軍 度衆生入涅槃 摠不出這箇時節 諸人 若信得及 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

또 영소무(英邵武)도 본심을 깨치고 게송을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시방 세계가 한 털끝에 한꺼번에 나타나매, 화장세계(華藏世界)가 중중하여 제망(帝網)이 차다[寒]’
또 대혜(大慧) 선사는 불자(拂子)를 들고 ‘불성(佛性)의 뜻을 알고자 하면 시절인연을 관찰해야 하나니, 시절이 오면 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티끌수 같이 많은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와 왕궁에 태어나 도량에 앉고, 법륜을 굴려 마군을 항복하게 하고 중생을 구제하신 뒤에 열반에 들되, 그 모두가 이 시절을 벗어나지 않은 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런 줄을 믿으면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이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古今)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 하였다.

如是等開悟本心 得見自心鏡內 帝網重重無盡法界者 禪門傳記中 不可勝數 昧者 不知其源 不覽禪錄 亦不見華嚴大論之旨故 纔聞禪者 說卽心卽佛 以謂不過性淨佛也 是大愚惑
非謂華嚴敎門 說理未盡 但學者 滯在言敎義理分際 未能忘義了心 速證菩提 所以達摩西來 欲令知月不在指 法是我心故 不立文字 以心傳心耳

본심을 깨치고 제 마음 거울 속에 제망(帝網)처럼 중중한 무진법계(無盡法界)를 본 이런 일들은 선문의 기록 가운데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있다. 그런데 우매한 사람들은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선문의 기록도 보지 못하고, 또 화엄대론(華嚴大論)의 뜻도 보지 못하였으므로 참선하는 이들의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것은 성정(性淨)의 부처에 지나지 않는다 하니, 매우 어리석고 미혹한 일이다.
화엄교문에서 이치를 다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학자들이 말로 표시된 의리(義理 사상이나 내용)의 한계에 걸리어, 능히 뜻을 잊고 마음을 깨달아 보리를 빨리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와 달은 손가락에 있지 않듯이, 법이 곧 내 마음임을 알게 하려 하셨기 때문에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마음을 마음에 전한 것이다[以心傳心].

是以禪門 只貴破執現宗 不貴繁辭義理施設 故 所有破執言句 近於一分理性 離言絶慮之義 昧者 不知其義 每將相似語例 便謂同於頓敎 是大不然 設於華嚴無盡法界重玄法門 生於法愛 解分 未忘 亦爲所破也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다만 집착을 부수고 종지(宗旨)를 나타내는 것을 귀히 여기고, 번거로운 말로 뜻을 나열해 놓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을 타파한 여러 가지 언구(言句)가 일부분 말을 여의고 생각이 끊어진 이성(理性)의 뜻에 어느 정도 가깝지마는, 우매한 사람들은 그 뜻를 알지 못하고 매양 비슷한 말의 예(例)를 가져 돈교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설사 「화엄경」의 다함없는 법계의 매우 심오한 법문에 대해서도 그 법에 애착하여 지해(知解)를 버리지 못하면 그것도 타파해야 할 것이다.

台敎 亦云 圓門生着 尙爲初敎 所破 但性海果分 是法界證處 不可預談 亦不是心思意解 所及 故 淸凉祖師 亦云 圓音 非扣而常演 果海 離念而心傳 又云 佛證離言
是知禪門 離念相傳 是頓證法界處也 決非頓敎中 不說法相 唯見眞性 一念不生 卽名爲佛也

천태교(天台敎)에서도 ‘원문(圓門)이라도 집착하는 마음을 내면 초교(初敎)와 같이 타파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다만 성해(性海)의 과분(果分)은 법계를 증득한 곳이라, 미리 말할 수도 없고 또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뜻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량 조사는 ‘원음(圓音)은 묻지 않아도 항상 연설하시고, 과해(果海)는 생각을 여의고 마음으로 전한다’ 하고, 또 ‘부처님은 말을 여의었음을 증득하셨다’ 하였다.
이로써 선문에서는 생각을 여의고 서로 전한 것이 법계를 단박 증득한 곳이요, 결코 돈교에서와 같이 법상(法相)을 설하지 않고 오직 진성만 보아 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곧 ‘부처’인 것은 아닌 줄을 알아야 한다.

何以知其然 禪有三玄門 一 體中玄 二 句中玄 三 玄中玄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선문에는 삼현문(三玄門)이 있다. 첫째는 체중현(體中玄 체 가운데 현)이요, 둘째는 구중현(句中玄 구 가운데 현)이며, 셋째는 현중현(玄中玄 현 가운데 현)이다.

初體中玄門 引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等事事無碍法門 以爲初機悟入之門
此亦是言敎中 解分 未忘故 以句中玄無跡平常灑落言句 令其破執 頓忘佛法知解也 此亦有灑落知見 灑落言句故 以玄中玄良久默然棒喝作用 鍛鍊
當此之時 頓忘前來第二玄門灑落知見 灑落言句 故 云 得意忘言道易親 是謂頓證法界處也(此中三玄 雖非臨濟本意 且順古師之意 明之)

첫째의 체중현의 문에서는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자기와 타인은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는 등의 일일이 서로 걸리지 않는[事事無碍] 법문을 인용하여, 첫 근기의 깨쳐 들어가는 문을 삼았다.
그러나 이것도 언교(言敎)에 대해 지해(知解)와 분별을 버리지 못했으므로, 구중현의 자취 없고 평상(平常)한 쇄락(灑落 산뜻한)한 언구(言句)로 그 집착을 부수어 불법의 지해를 단박 잊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쇄락한 지견과 쇄락한 언구가 있기 때문에, 현중현의 양구(良久)와 방할(棒喝) 등의 작용으로 단련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앞의 둘째 현문의 쇄락 지견과 쇄락 언구를 잊기 때문에 ‘뜻을 얻고 말을 잊으매 도와 친하기 쉽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법계를 단박 증득하는 곳이다.(이 가운데 비록 삼현三玄이 임제臨濟의 본의가 아니나 옛 스님의 뜻을 따라 밝힌 것이다)

禪門 亦有爲初機下劣人 指示隨流妄染中 有性淨妙心 令其易解信入 信入然後 忘其解分 方爲親證
若不忘解分 坐在解脫深坑 不能於萬行緣起門中 轉身無滯故也

선문에도 처음 들어온 사람이나 하열한 근기를 위해 흐름을 따르는 허망과 더러움[妄染] 속에도 성품이 깨끗한 묘한 마음[性淨妙心]이 있다고 가리켜 보여, 그들로 하여금 쉽게 알고 믿어 들어가게 하였다. 믿어 들어간 뒤에 그 지해와 분별을 잊어야 비로소 몸소 증득하였다 할 수 있다.
만약 지해와 분별을 잊지 못하면,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 속에 앉아 있을 것이니, 그것은 온갖 행의 연기문 가운데서 몸을 돌려 걸림이 없이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고 ②]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는 글)’ p210~211. P216~217. P229. P23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p564~565. P571.

禪門亦有爲密付難堪 借敎悟宗之者 說眞性緣起 事事無碍之法 如三玄門 初機得入 體中玄所明云 無邊刹境自他 不隔於毫端 十世古今始終 不離於當念 又云 一句明明該萬像等 是也

선문에도 은밀히 부촉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교문을 빌어, 종지를 깨닫는 자를 위하여 진성(眞性)이 연기(緣起)하는 사사무애 법을 설하는 경우도 있으니, 삼현문(三玄門)에서 처음 근기[初機]가 들어갈 수 있는 체중현(體中玄)에서 밝힌 것과 같다. 거기에 “가없는 세계 경계[刹境]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하고, 또한 “한 글귀가 밝고 밝아 온갖 현상을 거두어 들인다”한 등등이 이것이다.

禪門中 此等圓頓信解 如實言敎 如河沙數 謂之死句 以令人生解碍故 竝是爲初心學者 於徑截門活句 未能參詳 故 示以稱性圓談 令其信解不退轉故 若是上根之士 堪任密傳脫略窠臼者 纔聞俓截門 無味之談 不滯知解之病 便知落處 是謂一聞千悟 得大摠持者也

선문 가운데도 이런 원돈(圓頓) 신해(信解)하는 진실한 말씀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지만, 이것을 사구(死句)라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해의 장애를 내게 하기 때문이며, 아울러 초심 학자는 경절문(徑截門)의 활구(活句)를 아직 참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품에 부합하는 원만한 말씀을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여 퇴전치 않게 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상근기로서 은밀히 전한 뜻을 감당하여 기존의 격식[窠臼]을 벗어날 수 있는 이라면, 경절문의 맛없는 말을 조금 듣기만 하고도 알음알이[知解]의 병통에 걸리지 않고 곧 속뜻[落處]을 아니, 이 이를 ‘하나를 듣고 천을 깨달아 대총지(大摠持)를 얻은 자’라 한다.


〇禪門亦有多種根機 入門稍異 或有依唯心唯識道理 入體中玄 此初玄門 有圓敎事事無碍之詮也 然 此人 長有佛法知見在心 不得脫灑 或有依本分事祇對灑落知見 入句中玄 破初玄門佛法知見 此玄 有徑截門 庭前栢樹子麻三斤等話頭

선문에도 또한 여러 가지 근기가 있어서 들어가는 문이 다소 다르다. 어떤 이는 유심(唯心)과 유식(唯識)의 도리에 의하여 체중현(體中玄)에 들어가기도 하니 이는 처음 현문[初玄門]인데, 원교의 사사무애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항상 불법의 지견(知見)이 마음에 남아있어서 이를 벗어나 깨끗함을 얻지 못한다.
어떤 이는 본분사에 의지하여 쇄락한 지견에만 대하여 구중현(句中玄)에 들어가 초현문(初玄門)의 불법 지견을 타파한다. 이 현문(玄門)에 경절문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와 마삼근(麻三斤) 등의 화두가 있다.

然 立此三玄門古禪師之意 以本分事祇對話頭 爲破病之語 故 置於第二玄 然 未亡灑落知見言句 猶於生死界 不得自在 故 立第三玄中玄 良久默然棒喝作用等 破前灑落知見 所以云 三玄施設 本由遣病 若望上祖初宗 卽未可

그러나 이 삼현문을 세운 것은 옛 선사의 뜻인데, 본분사에 상응하는 화두로 병을 타파한다는 말을 삼기 때문에 제이현(第二玄)에 둔 것이다. 그러나 쇄락한 지견이라는 언구를 잊지 못하여 오히려 생사에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삼(第三) 현중현(玄中玄)의 양구, 묵연, 방, 할의 작용 등을 세워서 앞의 쇄락한 지견을 타파한다.
그러므로 “삼현문을 시설한 것은 본래 병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 만일 옛 조사의 처음 종지에서 보면 그것도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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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ㅈ/자비2021. 8. 29. 07:06

자비((No.233))—(게송)山徑無人鳥不回~ |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어려울수록에 우리는 참나 찾는 공부를 더욱 노력을 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불자(佛子)가 하는 길.


*자비(慈悲) : [범] maitri  자비는 사랑하는 것과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네 가지 끝없는 마음(四無量心) 가운데 두 가지이다。모든 중생에게 실제로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慈)」라 하고(慈能與樂), 중생의 고통을 실제로 덜어 주며 근본적으로 그 근심 걱정과 슬픔의 뿌리를 뽑아 내어 주는 것을 「비(悲)」라고 한다(悲能拔苦).

 

 

(11분 1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산경무인조불회(山徑無人鳥不回)헌디  고촌암담냉운퇴(孤村暗淡冷雲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원승답파유리계(院僧踏破琉璃界)하고  강상고빙급수래(江上敲氷汲水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산경무인조불회(山徑無人鳥不回)헌디, 산길에 사람이 없는데 새는 돌아오지를 안 해.
온 산중에 눈이 적설(積雪)이 와 가지고 허옇게 눈이 내렸는데, 그러니 산에 아무도 오고가는 사람이 없어. 그러고 새도 눈이 워낙 많이 쌓여 놓으니까 어디에 가부렀는지 돌아오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고촌암담냉운퇴(孤村暗淡冷雲堆)로구나. 외로운 마을에 눈이 내리니까 껌껌하고 암담한데 차운 구름만 쌓여. 앞으로 얼마나 더 눈이 쏟아질런지 하늘과 땅이 온통 껌껌해 가지고 차운 구름만 쌓인다 그 말이여.
이 세계가 새해를 맞이했건마는, 평화(平和)가 돌아올 조짐은 보이지를 않고, 날이 갈수록 점점 무서운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러한 경계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원승답파유리계(院僧踏破琉璃界)헌디, 그 산중에 눈이 내려 가지고 사람 왕래도 없고 새도 돌아오지도 않고, 온 골짜기 골짜구니마다 눈이 쌓이고 찬 구름이 쌓이는데, 그 절간에 스님이, 참선(參禪)하는 스님은 그 허연 눈 덮인 산길을, 유리세계(琉璃世界)와 같은 그런 허연 세계를 터벅 터벅 터벅 걸어가지고,
강상고빙급수래(江上敲氷汲水來)로구나. 저 강(江) 위로 가 가지고 그 강에 얼음을 구녁을 뚫어 가지고, 얼음을 쳐서 구녁을 뚫어 가지고 거기서 물을 길러 오더라 그 말이여.

깊은 산중에 계곡으로 흘러가는 물을 홈대를 놔 가지고 연결을 해서 물을 받아서 그렇게 먹고 살다가, 엄동설한(嚴冬雪寒)이 되니까 골짜구니에 물이 다 얼어 버리고 홈대마저도 다 얼음으로 가뜩차서 물을 먹을 수가 없어. 계곡에서는 물을 먹을 수가 없으니까 저 넓은 강 있는 데로 가면, 가서 그 얼음을 깨 가지고 구녕을 뚫어서 물을 길러 온다 그 말이여.

온 세계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자기가 잘살기 위해서, 자기 나라가 잘살기 위해서 서로 나라와 나라끼리 싸우고, 무서운 무기를 발명을 해서 무력으로써 싸움을 해 가지고 자기 나라에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래 하는데 결국은—물론 우리나라도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軍隊)도 양성(養成)해야 하고, 무기도 많이 맨들어야 하고, 비행기나 군함도 많이 있어서 그걸 잘해야만 외적(外敵)이 침범(侵犯)해 들어오지를 못하니까 부득이해서 이것을 하기는 해야 합니다. 절대로 등한(等閑)히 할 수는 없고 잘해야 하는데, 참 성현(聖賢)의 눈으로 본다면 이 중생세계(衆生世界)가 이래 가지고는 안 될 일이거든.

어떻게든지 온 세계 사람들이, 온 나라가 이 성현의 뜻을 깨달라 가지고 싸움으로써 자기의 나라를 지키려고 하지 말고 서로 돕는 자비(慈悲)로써 나아간다면, 무기를 맨드는 대신 서로 인류복지(人類福祉)를 위해서 그걸 쓰게 된다면 세계에 굶어 죽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요, 병들어 죽은 사람도 다 구제할 수가 있을 것이요, 이웃지간에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도우면서 살 수 있는 이러한 평화(平和)를 가져오도록 해야 하는데, 온 산천(山川)이 꽁꽁 얼어서 사람 길이 다 끊어졌다 말이여.

그런데 그 수행하는, 그 산중(山中)에 그 절에서 수행하는 그 수좌(首座)가 눈길을 밟아서 저 강에 얼음을 구녁을 뚫고 거기서 물을 길어온 것은, 온 세계가 이렇게 싸움을 하고 있는 이 속에서도 우리 정법(正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자성(自性)을 깨닫고, 나아가서는 온 중생(衆生)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서 이 세계(世界)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차게 하려는 그러한 자리이타(自利利他)에 신심(信心)을 가지고 이렇게 모여서 공부를 하려고 한 이것이 바로 거기에다가 비유를 해서 게송(偈頌)을 읊어 봤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어려울수록에 우리는 참나 찾는 공부를 더욱 노력을 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자(佛子)가 하는 길인 것입니다. 앞으로 이 다음 법회가 열릴 때까지 정말 착실히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나가실 때 이 법당 앞의 층계(層階)에서 『관음예문』 그 책을 노나 드릴 테니까, 충분히 많이 준비가 되었으니까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서서히 내려가십시오. 일시에 와- 몰리게 되면은 모다 다치게도 되고 그러니까, 조끔 기다리셨다가 저 앞에서부터 차츰차츰차츰 조용하게 질서 있게 나가시면서 책을 받아 가시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이 도(道)를 닦고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첫째, 스스로 조용할 줄을 알고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차를 탈 때나 어디를 가던지 한 생각 딱! 단속(團束)하면 어디를 가나 자중(自重)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할 때 다르고, 금방 또 법당(法堂) 밖에 나가면 또 다르고, 또 저 후원(後院)에 가서 공양(供養)을 할 때 다르고 하면은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양을 하실 때나, 또 이 법당 안에 계실 때나, 또 법당 밖에 나가서 책을 받으실 때나, 또 정거장에 가서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나, 또 가정에 돌아가셔서 모다 가족 모다 생활을 하실 때나, 어디를 가나 한 생각을 탁! 단속(團束)을 하신다면 참 그 마음가짐이나 또 말씨나 그 행동에 있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정해지는 청정한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보나, 위에서 보나, 밑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앞에서 보나, 언제나 훌륭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1시간12분55초~1시간24분1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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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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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혼침(수마) 산란2021. 8. 28. 09:02

혼침((No.233))—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다생(多生)에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 생력(省力), 힘을 덜은 것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5분 46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1시간7분12초~1시간12분5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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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省力]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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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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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ㅇ/이뭣고? 화두2021. 8. 26. 06:48

이뭣고((No.233))—어느 외국인 수행자의 물음 | 어떠한 근기라도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말세 중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수행법인 간화선 |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참선법은 최상승법, 교외별전(敎外別傳) |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송담스님(No.306)—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회]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64분6초~66분26초) [ 참선법 A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를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이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큰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큰 메겡이로 메쳐서 그 간장독이 쩍!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佛祖)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송담스님(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

 

 

 

(1) 13분 37초.

 

 

(2) 12분 42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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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외국(外國)에서 와서, 한국에 와서 수행을 참선을 한 분이 몇 분이 찾아왔었는데,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만리타국(萬里他國)에서 와 가지고 그렇게 모다 정진(精進)을 할려고 애를 쓰다가, 구산(九山) 방장(方丈) 큰스님께서 열반(涅槃)하셨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그러면서 한 분이, "사대(四大)가 비아(非我)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이것이 내가 아니고"
모두 이 사대(四大)는 육체(肉體)란 말인데, 육체가 사대로써 이루어졌으니까, '사대가 내가 아니다' 그 말은 ‘요 육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아니다’ 그 말이여.

"망념(妄念)도 본적(本寂)이다" 망상 망념도 그것이 본래(本來) 적적(寂寂)한 것이다 그 말이여.
"적요상지(寂寥常知)해서" 적적허니, 적적한 가운데에 항상 안다 그 말이여. 적적(寂寂)해서 모든 견문(見聞)이 끊어졌는데 끊어진 가운데에 항상 앎이 없는... 앎이 없이 아는 놈이 있다 이건데.
"이러한 경계에 떠억 앉었으니 도무지 의심(疑心)이 일어나지를 안 하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겄습니까? 아무리 화두를 방장(方丈) 스님한테 무자(無字)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을 해도 도무지 의심이 안 난다" 이것입니다.

"앉았으면 환허니 망상(妄想)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이 세상에 이 몸뚱이가 있는 것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도대체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이러한 경지에서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하니 무슨 의심이 나지를 않으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겄습니까?"
말인즉슨은 '사대(四大)가 내가 아니요, 망념(妄念)이 본래적적(本來寂寂)해서 적요상지(寂寥常知)'한 그러한 경계는 옛날 고조사(古祖師)들, 선지식의 어록(語錄)에나,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경전(經典)에도 많이 그러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四大)가 비아(非我)'니, '망념(妄念)이 본적(本寂)'이니, '적요상지(寂寥常知)'니, 그러한 말을 듣고 그러한 말의 뜻을 알아 가지고 그러한 경계를 따악 이렇게 맛보면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단히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이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기가 맥히지.
그러나 이것은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나, 그러한 경계를 지켜 나가고 맛보고 앉었으면 이것은 올바른 수행법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 이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參禪)하는 법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관법(觀法)으로 많이 공부를 지도하고 또 관법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질박(質朴)하고 강직(剛直)하고 그래서 그러한 수행법을 써도 이 공부를 바로 하고 또 깨달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지해(知解)가 날카로워져. '알 지(知)' 자, 알음알이, 알음알이의 그 지해가 날카로워지고 근기(根機)는 차츰차츰 경박해지고 그래 가지고 그러한 식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자칫하면 묵조사선(默照死禪)에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닌 경계를 긴 것으로 착각을 해서 삿된 경계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육조 스님으로부터서 시작을 해 가지고 임제 스님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을 통해서 학자를 제접(提接)을 하고, 대혜종고 선사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이 완전히 체계화가 되었습니다.

원래 이 화두(話頭)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이뭣고?'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의 화두(話頭)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인데, '대관절 이놈이 무슨 물건이냐?' 이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는 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들을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以前)에,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도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기 이전에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自然的)으로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인생(人生)이란 게 뭐냐?
어데서 왔으며, 뭣하러 왔으며, 또 어데로 가는 것이냐?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썽도 낼 줄 알고, 착할 때에는 불보살(佛菩薩)과 같고, 한 생각 뒤집어지면 찰나간에 나찰귀신(羅刹鬼神)처럼 포악하게도 될 수 있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연적(天然的)으로 주어진 이 과제를, 그것을 갖다가 어떠한 근기(根機)의 사람이라도, 상근(上根)이나 중근(中根)이나 하근(下根), 어떠한 근기라도 고대로만 하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보살(菩薩) 화현(化現)이나 선지식이 출현(出現)하셔서 우리 말세(末世) 중생(衆生)들에게 더 적합한 훌륭한 수행 방법을 개발을 하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때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만큼 훌륭한 수행법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막연하게 화두(話頭)도 없이 요요상지(了了常知)한 그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러니, 그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외도(外道)들이 배꼽 밑에 환하게 불이 켜진 것을 들여다보도록 그렇게 지도하는 그러한 그 외도에 수행법도 있습니다마는,
물론 우리 불교에도 아침에 해가 뜰 때에, 해가 벌겋게 뜰 때 그 해, 둥그런 그 해를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하루 종일 그 둥그런 벌-건 달이(해가) 양 눈썹 사이 미간(眉間)에 종일 그것이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관(觀)하고, 또 달이 뜰 때는 그 달을 한 시간 이렇게 쳐다보고 있다가 나중에 그 달이 없을 때에도 두 눈썹 사이에 그 달이 항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하고, 이러한 일륜관(日輪觀)이니 월륜관(月輪觀)과 같은 이러한 관(觀)을 통해서 수행(修行)하는 법(法)이 우리 불법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러한 이 관법(觀法)은 이 관법을 통해서 도(道)를 성취한 그런 특수한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指導下)에 하지 아니하면, 백이면 백 다 미치게 되거나 삿된 데에 빠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법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주력(呪力)을 외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력도 밀교(密敎)에서는 이 주력을 굉장히 소중하니 생각하고 그 수행하는 방법으로 이 주력을 하는데, 이것도 주력을 잘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생식기를 끊어 버린다던지, 자기가 자기의 몸에 칼로 난도질을 쳐서 피를 흘린다던지, 머리를 기둥에다 받아서 박이 터지도록 한다던지 이래서, 주력이나 또 이런 관법 같은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끊어져 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렇게 해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41분39초~55분1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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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 스님이 천하 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法擧揚)을 해 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맡었지만, 원오극근 선사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하시지 안 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 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한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갖다가 막 강짜로 압력을 가해 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어갈 때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데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생각을 내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먹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데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하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의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55분18초~1시간7분5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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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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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제호상미 번성독약((No.233))—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 |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맥힘이 없는 것.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飜成毒藥) | 법광(法狂) | 이금차도(而今此道)에 난득기인(難得其人) | 바른 안목(眼目)을 갖춘 선지식(善知識)의 점검.


*제호상미(醍醐上味) 번성독약(翻成毒藥) ;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74~75. (가로판 p78)
然(연)이나  一念子(일념자)를  爆地一破然後(폭지일파연후)에  須訪明師(수방명사)하야  決擇正眼(결택정안)이니라

그러나 한 생각을 깨친 뒤에는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 눈이 바른가를 결택 받아야 하느니라。

註解(주해)
此事(차사)는  極不容易(극불용이)하니  須生慚愧(수생참괴)하야사  始得(시득)다  道如大海(도여대해)하야  轉入轉深(전입전심)하니 愼勿得小爲足(신물득소위족)하라  悟後(오후)에  若不見人則(약불견인즉) 醍醐上味(제호상미)가  翻成毒藥(번성독약)하리라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으니 모름지기 부끄러운 생각을 내야 한다。도(道)란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더 깊어 가는 것이니,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하지 말라。깨친 뒤에 만약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제호(醍醐) : 옛날 인도에서 우유로써 만드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품질이 좋은 것으로 맛이 제일 좋고, 열병(熱病)에 귀중한 약품도 되는 것이 제호다。이것은 히말라야 산에 있는 「비니」라는 풀만을 먹은 소의 젖으로 만든 것이 더욱 좋다고 한다.

 

 

(13분 2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智慧)의 눈을 뜨는데 가장 빠르고 가까운 최고의 법(法)입니다마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우리가 지어온 죄업(罪業)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애서 여러 가지 장애가 많고, 도(道)를 닦는 데에도 장애가 많고 세속에 살아가는 데도 여러 가지 내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한 것은 과거에 지은 업장(業障)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조석(朝夕)으로 이렇게 참회(懺悔)를 함으로써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그래야 도 닦아가는 데도 장애가 없고 세속에 어떠한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해 나가는 데에도 뜻과 같이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은, 가장 올바르게 닦아가는 수행은 지혜와 또 복덕과, 복(福)과 혜(慧)를 겸(兼)해서 닦아 가는 길인 것입니다.
지혜(智慧)만을 닦고 복(福)을 닦지 아니하면 가장 그 비근한 예를 들면, 머리는 좋은데 박복(薄福)해서 되는 일이 없이 내생(來生)에 태어나는 게고, 복(福)만 닦고 지혜를 닦지 아니하면 내생에 몸을 태어나되 복은 있어서 돈은 좀 많이 있으나 머리가 돌대가리가 되어서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나 이웃에도 그러한 예를 보실 수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智慧)와 복(福)을 함께 겸해서 닦아가라' 부처님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이 지혜와 복, 복과 혜를 겸전(兼全)하신 최고의 성현(聖賢)이 누구냐 하면 바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할 때 '두 가지가 구족하신 높은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具足)하시다' 하는 것이 바로 이 '복(福)과 혜(慧), 이 두 가지가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시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아 가는데 있어서도 복과 혜를 항시 겸해서 닦아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데에도 그렇고, 세속에 사회인으로서 수행을, 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공안(公案)을 이르되, 이(理)와 사(事)를 다, 이(理)와 사(事)에 걸림이 없어야만 바로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만 맞고 사(事)에 맞지 아니하면 이것은 원만(圓滿)하게 보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치(理致)만 맞고 사(事)를 무시하게 되면 이것은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어서, 사(事)라고 하는 것은 현실(現實)을 사(事)라고 하는 것이고,
이치상으로는 선(善)과 악(惡)이 두 가지가 아니고,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부처와 중생(衆生)이 두 가지가 아니요, 크고 작은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맑은 것과 깨끗한 것이 두 가지가 아닙니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도 두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이치상으로만 본다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천칠백 공안(公案)을 하나도 맥힘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事)에도 맞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이여. 현중현을,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들은 그 사람을 '옳게 보았다'고 인가(印可)를 하셨습니다.

처음에 한 철 내지 두 철, 늦어도 한 3년 알뜰히 정진(精進)하게 되면 누구나 이 체중현(體中玄) 도리, 공(空)에 이치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이 공(空)의 이치만 보는 것, 그것만을 가지고 옳게 일렀다고 인가(印可)를 하게 되고, 본인도 의심 없이 '자기가 바로 보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법(法)에는 현밀(顯密)이 있어서, 은밀(隱密)히 할 말과 또 이렇게 나타내서[顯] 할 부분이 있는 것인데, 현밀을 가리지 못하고 마구잽이 말하게 되고, 이치로 보면 생사(生死)가 없기 때문에 육도(六道)도, 인과(因果)도 모두가 인증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事)를 보지 못하면, 사(事)의 이치를 보지 못하면 인과(因果)도 부정(否定)을 하게 되고 삼강(三綱)과 오륜(五倫)도 부정을 하게 되고, 선악(善惡)도 부정을 하게 되어서 거침없이 무애도인(無碍道人)으로 이 세상에 천상천하(天上天下)에 거침없이 말과 행동을 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조사(祖師)들이 대단히 이것을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맥힘이 없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을 만나냐, 못 만나냐에 따라서 좋은 그릇이, 좋은 재목(材木)이 훌륭한 건물을 짓게 되기도 하고, 또 좋은 재목이 아까웁게도 큰 성과(成果)를 거두지를 못하고 버리게 되는 수도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 말씀하시기를,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飜成毒藥)이다'
제호(醍醐)는 우유로 만드는 최고의 맛있는, 영양이 있고 맛있는 음식인데, 그 제호에 최고에 맛이 변해 가지고 독약(毒藥)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잘 관리를 해야지 변질(變質)되어 버리면, 아깝다고 그것을 먹게 되면 병(病)이 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치를 보는,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도 대단히 희귀한 일이고 참 소중한 일이지만, 공(空)의 이치를 본 그 경계(境界)는 잠시도 거기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분일초도 '내가 봤다'는 생각, '알았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거기에 주저앉게 되면 그 공부는 거기서 멈추게 되고, 하는 짓은 미친 짓 밖에는 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참선(參禪)하다 한 소식해 가지고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법광(法狂)이라 해서, 법으로 미친 '법광'이 되어 가지고, 불조(佛祖)도 막 매도(罵倒)해 버리고 쳐부셔 버리고 욕을 퍼붓어 버리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잽이 말을 막 함부로 하고 이래 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망치고, 많은 사람을 갖다가 그르치게 되고 불법(佛法)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達磨) 스님도 「혈맥론(血脈論)」에 '이금차도(而今此道)에 난득기인(難得其人)이라, 이 도(道)에 참, 사람 만나기 어렵다' 학자(學者)는 바른 스승을 만나기 어렵고 또 선지식(善知識)은 바른 학자를 만나기가 어렵다고 통탄(痛歎)을 하신 것입니다.

선지식을 만났다고 해서 그 선지식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못 자기의 그 소견(所見)을 바르냐 그르냐를 점검(點檢) 간택 받는 일뿐인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본 경계(境界)이기 때문에 너무너무 신기하고 너무너무 묘하고 힘이 솟구치고 환희에 넘쳐서 자기로서는 자기를 점검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바른 안목(眼目)을 갖춘 선지식(善知識)의 점검이 아니면 백(百)이면 백 다 잘못... 중간 잠깐 지나가야 할 그 경계에서 거기서 주저앉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28분35초~41분3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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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2분 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한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2분 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2분 26초)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어떤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가려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2분 36초)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❺]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 (4분 18초)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삼현 ; 보조국사의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참고 ①]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보조지눌 1158~1210 |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176~180. p200~20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542~546.

問 向來所說 旣聞命矣 古今禪門達者 見性成佛 豈非一分性淨之體 不具相用耶

또 물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잘 들었다. 그러나 고금 선문(禪門)의 통달한 사람이 견성하여 성불한 것이 어찌 일부분 성정(性淨)의 체성이 모양[相]과 작용[用]을 갖추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答 不然 汝豈不聞 永嘉眞覺大師 一宿曹溪 開悟本心作歌 其略 曰 心鏡明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萬像森羅影現中 一顆圓光 非內外 一性 圓通一切性 一法 遍含一切法 一月 普現一切水 一切水月 一月攝 諸佛法身 入我性 我性 還共如來合

나는 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왜 듣지 않았던가? 영가 진각(眞覺) 대사는 조계(曹溪)에서 하룻밤을 묵다가 본심을 깨치고 노래를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마음 거울이 밝아 걸림이 없음이여. 탁 트이고 밝게 사무쳐 사계(沙界)를 두루했다. 삼라만상의 그림자가 그 가운데 나타나니, 한 덩이 뚜렷한 광명은 안팎이 없다. 한 성품이 일체의 성품에 뚜렷이 통하고 한 법이 일체의 법을 모두 머금고 있다. 한 달이 일체의 물에 두루 나타나매, 일체의 물의 달이 한 달에 포섭된다. 모든 부처의 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오매, 내 성품이 여래와 하나로 합한다’ 하였다.

又英邵武 開悟本心作偈 其略 曰 十方齊現一毛端 華藏重重帝網寒
又大慧禪師 秉拂云 欲識佛性義 當觀時節因緣 時節 若至 其理自彰 乃至須知微塵諸佛出世 降王宮坐道場 轉法輪降魔軍 度衆生入涅槃 摠不出這箇時節 諸人 若信得及 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

또 영소무(英邵武)도 본심을 깨치고 게송을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시방 세계가 한 털끝에 한꺼번에 나타나매, 화장세계(華藏世界)가 중중하여 제망(帝網)이 차다[寒]’
또 대혜(大慧) 선사는 불자(拂子)를 들고 ‘불성(佛性)의 뜻을 알고자 하면 시절인연을 관찰해야 하나니, 시절이 오면 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티끌수 같이 많은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와 왕궁에 태어나 도량에 앉고, 법륜을 굴려 마군을 항복하게 하고 중생을 구제하신 뒤에 열반에 들되, 그 모두가 이 시절을 벗어나지 않은 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런 줄을 믿으면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이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古今)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 하였다.

如是等開悟本心 得見自心鏡內 帝網重重無盡法界者 禪門傳記中 不可勝數 昧者 不知其源 不覽禪錄 亦不見華嚴大論之旨故 纔聞禪者 說卽心卽佛 以謂不過性淨佛也 是大愚惑
非謂華嚴敎門 說理未盡 但學者 滯在言敎義理分際 未能忘義了心 速證菩提 所以達摩西來 欲令知月不在指 法是我心故 不立文字 以心傳心耳

본심을 깨치고 제 마음 거울 속에 제망(帝網)처럼 중중한 무진법계(無盡法界)를 본 이런 일들은 선문의 기록 가운데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있다. 그런데 우매한 사람들은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선문의 기록도 보지 못하고, 또 화엄대론(華嚴大論)의 뜻도 보지 못하였으므로 참선하는 이들의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것은 성정(性淨)의 부처에 지나지 않는다 하니, 매우 어리석고 미혹한 일이다.
화엄교문에서 이치를 다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학자들이 말로 표시된 의리(義理 사상이나 내용)의 한계에 걸리어, 능히 뜻을 잊고 마음을 깨달아 보리를 빨리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와 달은 손가락에 있지 않듯이, 법이 곧 내 마음임을 알게 하려 하셨기 때문에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마음을 마음에 전한 것이다[以心傳心].

是以禪門 只貴破執現宗 不貴繁辭義理施設 故 所有破執言句 近於一分理性 離言絶慮之義 昧者 不知其義 每將相似語例 便謂同於頓敎 是大不然 設於華嚴無盡法界重玄法門 生於法愛 解分 未忘 亦爲所破也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다만 집착을 부수고 종지(宗旨)를 나타내는 것을 귀히 여기고, 번거로운 말로 뜻을 나열해 놓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을 타파한 여러 가지 언구(言句)가 일부분 말을 여의고 생각이 끊어진 이성(理性)의 뜻에 어느 정도 가깝지마는, 우매한 사람들은 그 뜻를 알지 못하고 매양 비슷한 말의 예(例)를 가져 돈교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설사 「화엄경」의 다함없는 법계의 매우 심오한 법문에 대해서도 그 법에 애착하여 지해(知解)를 버리지 못하면 그것도 타파해야 할 것이다.

台敎 亦云 圓門生着 尙爲初敎 所破 但性海果分 是法界證處 不可預談 亦不是心思意解 所及 故 淸凉祖師 亦云 圓音 非扣而常演 果海 離念而心傳 又云 佛證離言
是知禪門 離念相傳 是頓證法界處也 決非頓敎中 不說法相 唯見眞性 一念不生 卽名爲佛也

천태교(天台敎)에서도 ‘원문(圓門)이라도 집착하는 마음을 내면 초교(初敎)와 같이 타파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다만 성해(性海)의 과분(果分)은 법계를 증득한 곳이라, 미리 말할 수도 없고 또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뜻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량 조사는 ‘원음(圓音)은 묻지 않아도 항상 연설하시고, 과해(果海)는 생각을 여의고 마음으로 전한다’ 하고, 또 ‘부처님은 말을 여의었음을 증득하셨다’ 하였다.
이로써 선문에서는 생각을 여의고 서로 전한 것이 법계를 단박 증득한 곳이요, 결코 돈교에서와 같이 법상(法相)을 설하지 않고 오직 진성만 보아 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곧 ‘부처’인 것은 아닌 줄을 알아야 한다.

何以知其然 禪有三玄門 一 體中玄 二 句中玄 三 玄中玄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선문에는 삼현문(三玄門)이 있다. 첫째는 체중현(體中玄 체 가운데 현)이요, 둘째는 구중현(句中玄 구 가운데 현)이며, 셋째는 현중현(玄中玄 현 가운데 현)이다.

初體中玄門 引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等事事無碍法門 以爲初機悟入之門
此亦是言敎中 解分 未忘故 以句中玄無跡平常灑落言句 令其破執 頓忘佛法知解也 此亦有灑落知見 灑落言句故 以玄中玄良久默然棒喝作用 鍛鍊
當此之時 頓忘前來第二玄門灑落知見 灑落言句 故 云 得意忘言道易親 是謂頓證法界處也(此中三玄 雖非臨濟本意 且順古師之意 明之)

첫째의 체중현의 문에서는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자기와 타인은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는 등의 일일이 서로 걸리지 않는[事事無碍] 법문을 인용하여, 첫 근기의 깨쳐 들어가는 문을 삼았다.
그러나 이것도 언교(言敎)에 대해 지해(知解)와 분별을 버리지 못했으므로, 구중현의 자취 없고 평상(平常)한 쇄락(灑落 산뜻한)한 언구(言句)로 그 집착을 부수어 불법의 지해를 단박 잊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쇄락한 지견과 쇄락한 언구가 있기 때문에, 현중현의 양구(良久)와 방할(棒喝) 등의 작용으로 단련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앞의 둘째 현문의 쇄락 지견과 쇄락 언구를 잊기 때문에 ‘뜻을 얻고 말을 잊으매 도와 친하기 쉽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법계를 단박 증득하는 곳이다.(이 가운데 비록 삼현三玄이 임제臨濟의 본의가 아니나 옛 스님의 뜻을 따라 밝힌 것이다)

禪門 亦有爲初機下劣人 指示隨流妄染中 有性淨妙心 令其易解信入 信入然後 忘其解分 方爲親證
若不忘解分 坐在解脫深坑 不能於萬行緣起門中 轉身無滯故也

선문에도 처음 들어온 사람이나 하열한 근기를 위해 흐름을 따르는 허망과 더러움[妄染] 속에도 성품이 깨끗한 묘한 마음[性淨妙心]이 있다고 가리켜 보여, 그들로 하여금 쉽게 알고 믿어 들어가게 하였다. 믿어 들어간 뒤에 그 지해와 분별을 잊어야 비로소 몸소 증득하였다 할 수 있다.
만약 지해와 분별을 잊지 못하면,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 속에 앉아 있을 것이니, 그것은 온갖 행의 연기문 가운데서 몸을 돌려 걸림이 없이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고 ②]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는 글)’ p210~211. P216~217. P229. P23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p564~565. P571.

禪門亦有爲密付難堪 借敎悟宗之者 說眞性緣起 事事無碍之法 如三玄門 初機得入 體中玄所明云 無邊刹境自他 不隔於毫端 十世古今始終 不離於當念 又云 一句明明該萬像等 是也

선문에도 은밀히 부촉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교문을 빌어, 종지를 깨닫는 자를 위하여 진성(眞性)이 연기(緣起)하는 사사무애 법을 설하는 경우도 있으니, 삼현문(三玄門)에서 처음 근기[初機]가 들어갈 수 있는 체중현(體中玄)에서 밝힌 것과 같다. 거기에 “가없는 세계 경계[刹境]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하고, 또한 “한 글귀가 밝고 밝아 온갖 현상을 거두어 들인다”한 등등이 이것이다.

禪門中 此等圓頓信解 如實言敎 如河沙數 謂之死句 以令人生解碍故 竝是爲初心學者 於徑截門活句 未能參詳 故 示以稱性圓談 令其信解不退轉故 若是上根之士 堪任密傳脫略窠臼者 纔聞俓截門 無味之談 不滯知解之病 便知落處 是謂一聞千悟 得大摠持者也

선문 가운데도 이런 원돈(圓頓) 신해(信解)하는 진실한 말씀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지만, 이것을 사구(死句)라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해의 장애를 내게 하기 때문이며, 아울러 초심 학자는 경절문(徑截門)의 활구(活句)를 아직 참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품에 부합하는 원만한 말씀을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여 퇴전치 않게 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상근기로서 은밀히 전한 뜻을 감당하여 기존의 격식[窠臼]을 벗어날 수 있는 이라면, 경절문의 맛없는 말을 조금 듣기만 하고도 알음알이[知解]의 병통에 걸리지 않고 곧 속뜻[落處]을 아니, 이 이를 ‘하나를 듣고 천을 깨달아 대총지(大摠持)를 얻은 자’라 한다.


禪門亦有多種根機 入門稍異 或有依唯心唯識道理 入體中玄 此初玄門 有圓敎事事無碍之詮也 然 此人 長有佛法知見在心 不得脫灑 或有依本分事祇對灑落知見 入句中玄 破初玄門佛法知見 此玄 有徑截門 庭前栢樹子麻三斤等話頭

선문에도 또한 여러 가지 근기가 있어서 들어가는 문이 다소 다르다. 어떤 이는 유심(唯心)과 유식(唯識)의 도리에 의하여 체중현(體中玄)에 들어가기도 하니 이는 처음 현문[初玄門]인데, 원교의 사사무애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항상 불법의 지견(知見)이 마음에 남아있어서 이를 벗어나 깨끗함을 얻지 못한다.
어떤 이는 본분사에 의지하여 쇄락한 지견에만 대하여 구중현(句中玄)에 들어가 초현문(初玄門)의 불법 지견을 타파한다. 이 현문(玄門)에 경절문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와 마삼근(麻三斤) 등의 화두가 있다.

然 立此三玄門古禪師之意 以本分事祇對話頭 爲破病之語 故 置於第二玄 然 未亡灑落知見言句 猶於生死界 不得自在 故 立第三玄中玄 良久默然棒喝作用等 破前灑落知見 所以云 三玄施設 本由遣病 若望上祖初宗 卽未可

그러나 이 삼현문을 세운 것은 옛 선사의 뜻인데, 본분사에 상응하는 화두로 병을 타파한다는 말을 삼기 때문에 제이현(第二玄)에 둔 것이다. 그러나 쇄락한 지견이라는 언구를 잊지 못하여 오히려 생사에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삼(第三) 현중현(玄中玄)의 양구, 묵연, 방, 할의 작용 등을 세워서 앞의 쇄락한 지견을 타파한다.
그러므로 “삼현문을 시설한 것은 본래 병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 만일 옛 조사의 처음 종지에서 보면 그것도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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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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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