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전강선사 No.011)—(게송)商量是鬼窟~ | 참선에는 상량, 문자도 소용없다. 귀한 것이 의심이다 | 내가 나를 찾는 이 참선법, 생사 없는 법이 사바세계밖에 없다 | 참선법밖에는 생사를 해탈허는 법이 없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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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전강선사(No.011)—전강선사 일대기 제4호(경술1970년 12월 3일 새벽.음) (전011)
상량(商量)은 시귀굴(是鬼窟)이다. 상량선(商量禪)이라는 게 못써. 공연히 앉어서 공부헌닥 하면서 참으로 의심(疑心)을 허지 않고, 상량선을 하고 앉었거든. 요리 한번 생각해 보고 조리 한번 생각해서, 그 상량이 붙도록 화두를 든다 그 말이여. 상량선! 자꾸 그 무슨 이치를 찾고, 거다가 이상스럽게 모도 무슨 별별 도리를 끄집어다가 붙여서.
판치생모(板齒生毛)면 판치생모, 알 수 없는 의심만 딱 들고서는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닥 했는고?’ 판대기 이빨에 털 난 걸 알 수가 없으니, 알 수 없는 그것이 조주(趙州)의 뜻이고, 판대기 이빨에 털 난 그 뜻이란 말이여. 그 알 수 없는 놈 하나뿐이지 거가서 무엇이 있을 것이여. 상량(商量)해서, 사량(思量)해서 붙여 봤던들 되냔 말이여.
상량(商量)은 시귀굴(是鬼窟)이다. 상량이란 건 귀신굴이여. 귀신(鬼神)이라는 게 이 몸뚱이 내버리면 귀신인디. 또 귀신이 뭐, 따로 있나? 이 사람이 사람 몸 가지고 있다가 사람 몸 버리면 귀신이지. 귀신이라는 것은 그거 또 더 이상스럽게 사람 몸뚱이 가져 있을 때보담도 사람 몸뚱이 내버린 뒤에는 귀신의 상량이라는 것은 말로 못혀. 이놈이, 귀신 상량이라는 것은 당초에 그건 뭐 어따가 비유헐 수 없이, 그 번뇌(煩惱) 망상(妄想)! 그놈뿐이여. 숭악헌 근원도 없이 퍼일어난 놈이, 내 근본 정신도 없이 그만 일어나는 놈이 그 귀신 생각인디, 그걸 귀신 상량이라, 귀굴리(鬼窟裏)라 그려. 그래서 상량선이라는 것은 귀굴리선(鬼窟裏禪)이라 그런다 그 말이여.
그러니 제일 주의헐 것이 상량선이여. 안 헌닥 허지마는 상량선을 허기 따문에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이 오들 않고, 화두일념(話頭一念) 지경이 오들 않고, 고 상량 따문에 망가(亡家)헌다. 집을 잊어버리고 실업(失業)한다. 업(業)을 잊어버리는 법이다. 상량이 아닐 것 같으면은 화두(話頭)라는 것이 그대로 의단독로(疑團獨露)가 올 것이며, 어디 그 헛된 선(禪)인가? 참, 옳은 선(禪)이지.
공연히 따진다. 어서 깨달을라는 마음을 다 붙이기도 허고, 그놈이 그 무슨 이치를 찾아 붙인다. 아, 이런 놈의 꼴 봐라. 아무리 해봐도 이치는 아니여. 천하 없는 이치를 다 붙여 봐. 그 이치가 무슨 이치가 참선인가. 아니거든. ‘깨달랐다’ 허니까, 뭐 깨달을 것 같으면 무엇이 뭐, 물건이 무엇이 하나가 있는 줄 알고.
어쩠던지 상량선은 안 해야 옳아. 그거 귀신 참선인디, 귀신 참선은 참선이 아니여. 그 까달(까닭) 따문에 타성일편 지경이, 의심 하나가 그저 의단독로해서 주삼야삼(晝三夜三)에 밤이나 낮이나 그 덩어리가 뭉쳐져 가지고, 알 수 없는 의심이 꽉 뭉쳐져 가지고는 독로(獨露)가 되지를 못혀.
문자(文字)는 시조박(是糟粕)이다. 문자라는 것이 조박(糟粕)이여. 일체 문자선, 문자 참선도 그 못써. 그 무슨 글귀를 집어대고 들어대고 해서 그 모도 문자 인증을 헌다 그 말이여. 문자 중 인증이 모도 그것이 조박―고인이 술 짜, 옛사람들이 술 짜 먹어 버린 술 찌꺼리인데, 그 찌꺼리 그것을 자꾸 내가 먹을라고, 술 찌꺼리를 먹어 보니 그 무엇이여. 아무 소용없지.
문자도 소용없는 법이여. 참선에는 문자도 소용이 없어. 그러헌즉 참선학자라는 것은 그만 불구문자(不拘文字)다. 문자에 얽히들 안 혀. 사교입선(捨敎入禪)이다. 배운 그 교(敎)를, 문자를 버려 버리고 선(禪)에 들어온 것이다. 참선허는데 무슨 문자여? 무슨 교(敎)란 말이여? 거가서. 소용없다.
화두 하나, 의심 하나 딱 참, 귀재의정(貴在疑情)이다. 귀헌 것이 의심이다. 화두 해 나가는 법! 내가 언제든지 올라와 화두 해 나가는 법을 이렇게 말해 주지 않어!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다고 했는고?’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인고?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냐?” “판대기 이빨에 털 났느니라”
‘어째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닥 했노? 아, 판대기 이빨에 털 난 놈, 알 수가 없구나’ 그 판대기 이빨에 털 난 놈, 고것이 조주 뜻이여. 뭐 다른, 따로 조주 스님 뜻을 가 찾아? ‘해 보니까 조주 스님 뜻이 다르고, 판대기 이빨에 털 난 그 의지가 다르고 아, 두 가지로 자꾸 생각이 나간다’고 요러고 앉었어. 그 무슨 그런 참선을 허고 앉었어.
‘어째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닥 했는고...?’ 그 판대기 이빨에 털 난 놈이 알 수가 없으니, 그 그놈 찾는 거 아닌가. 아, 그러면 그렇게 찾기는 찾되 의심(疑心) 다르고, 거기에 따진 것 달라. 상량(商量) 달러. 인자 불 꺼 버려라. 여그 올라오면 후끈해서 그만...
참, 이 이상 더, 천상천하에 어디 무슨 뭐 별별 세계에 다 없는 참선법(參禪法)이 우리 사는 이 남섬부주(南贍部洲), 이 세계에 있단 말여. 남섬세계에 가서 남부세계에 가서 있거든. 세상에 이 세계는, 그저 인생이 나면 죄만 퍼 짓고, 그저 인생이 나오면은 살래야 살 수 없고, 그저 나오다가 죽기도 허고, 이것 좀 살다가 죽기도 허고, 맨 놈의 남섬부주 죄짓는 세상인디, 아! 이 세계에 와서 있다. 이 참선법이. 생사 없는 법이!
그 세상에 다 있제. ‘나’는 다 있고. 누가 주인공이 없어? ‘나’는 다 있고. 주인공은 다 있지마는 어째 남섬부주에 꼭 난 사람이래야 꼭 주인공, 내가 나를 찾는 이 참선법이 있어. 그거 묘하다! 사바세계(娑婆世界)를 여의고는 없거든. 그러허니 불불(佛佛)이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는 이 사바세계를 오신단 말이여. 사바세계에 내려오셔서 사바세계 중생을 제도(濟度)헐려고 내려오신다 그 말이여. 그러니 부처님이 대도(大道)를 이루어 가지고는, 불과(佛果)를 증(證)해 가지고는 오실 디가, 출세(出世)헐 디가 여그밖에 없어.
부처가 되아 가지고 불과(佛果)를 증해 가지고는 가만히 중생교화(衆生敎化)도 않고 있을 수가 있나. 제일 큰 일이 중생교화인디, 중생을 교화 안 헐 것 같으면은 어찌 될 것이냐 말이여. 뭐가 될 것인가 말이여. 이 중생은 전부 생사고(生死苦)만 받고 있게.
부처님도 석일(昔日)에 우리와 같은 동아(同我), 똑같은 범부(凡夫)인데 그렇게 생사고를 같이 받아 오시다가 먼첨 성불을 했으니 어서 속히 중생을 위해야 헐 것 아닌가. 중생 때, 불과(佛果) 증허기 전 중생 때 부처님도 우리와 같이 생사고를 받았으며, 모도 미(迷)헌 우리 중생 사바세계에서 같이 부모형제가 되았으며, 그 인연 깊은 인연을 천만 겁 중에 같이 해 나왔는데 모도가 부모형제인데, 그 사바세계에서 생사고를 받고 있는 그 중생을 제도 안 허고 무엇을 헐 것인가? 부처님이 불과를 이룰 것 같으면은 곧 당장에 그만 사바세계에 인자 하강(下降)허셔 가지고는 중생교화를 허는 것이여.
참선법! 참선법밖에는 생사를 해탈허는 법이 없는데, 무엇을 헐 것이여!
약문하자시(若問何者是)냐? 그럼 묻노니 어떤 것이 옳느냐?
세상에 상량(商量)도 귀신굴이요, 문자(文字)도 고인조박(古人糟粕)밖에는 안 되아. 짜 먹어 버리고 내버린 찌꺼리밖에 안 된다. 약문(若問)허노니, 내가 돌이켜 묻노니 하시(何是), 시(是)냐? 어떤 것이 그러면 참선법, 옳은 선법이냐? 방행여우적(棒行如雨滴)이다. 방맹이를 때리되, 방맹이로 막 치되 방맹이가 하나가 아니라 우적(雨滴)이니라. 빗방울이니라 했다. 그러니 어디 어떤 것이 참선이라고, 어떤 게 옳은 것이냐고 참선 도리를 묻거드면은 방맹이로 빗방울처럼 막 뚜드려 팬다 그 말이여.
그러니 어디 어디 그 뭔 이치를 가르켜 놓았어? ‘참선이 요런 것이다’ 가르켜 놓았어? ‘참선 이치가 요런 것이다’ 딱! 가르켜 놓을 것 같으면은 그것은 선(禪)이 아니여. 무엇이라고 딱 손가락처럼 착 나오면은 그거 참선법도 아니고 상견(相見)도 아니고 그거 아무것도 아니여. 그렇게 허들 못혀.
*(게송) ‘상량시귀굴(商量是鬼窟)~’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 박경훈 역 | 동국대학교 역경원) p63 ‘일선자(一禪子)에게’ 참고. *조강(糟糠 지게미 조/겨 강) ; ①지게미(술을 짜낸 찌꺼기)와 쌀겨라는 뜻. ②가난한 사람이 먹는 변변하지 못한 음식(飮食). ③조강지처(糟糠之妻 : 가난할 때 고생을 같이 하던 아내)의 준말. *조박(糟粕 술지게미 조/지게미 박) ; 고인조박(古人糟粕).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인들의 저서와 말은 모두 찌꺼기란 뜻으로, 무릇 참된 도는 말과 글로 전달될 수 없으므로 현재 전하는 모든 것은 술지게미에 불과하다는 뜻.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알음알이. 지해(知解).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상량선(商量禪 헤아릴 상/헤아릴 량/좌선 선) ;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상량(商量 : 알음알이, 知解)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조주(趙州) : (778 – 897) 이름은 종심(從諗)이고 속성은 학(郝)씨인데, 산동성(山東省) 조주부(曹州府)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南泉) 보원선사(普願禪師)의 법을 받고, 그 문하에서 20년 동안 있었다. 80세까지 각처로 돌아다니다가[行脚] 비로소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서 학자들을 제접(提接)하기 40년. 당나라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 120세에 입적하였다. <어록(語錄)> 3권이 남았고, 그의 교화가 참으로 커서 「조주 고불(趙州古佛)」이라고 일컬었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귀굴리(鬼窟裏) ; 귀신 굴 속. 수행자가 시끄러운 것을 피하고 고요한 것만 취해서 화두가 성성(惺惺)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혼혼(昏昏)한 경계에 취해서 묵조(默照)나 정식분별(情識分別)에 잠겨 있는 상태를 비유한 말.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삼야삼(晝三夜三) ; 밤낮. 밤이나 낮이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불구문자(不拘文字) ; 문자(文字)에 걸리지[拘] 아니한다[不].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0~131 역주. (가로판 p126~127) 『전등록』 제9권, 『오등회원(五燈會元)』 제4권, 복주고령신찬선사(福州古靈神贊禪師). 고령 신찬선사(古靈神贊禪師)가 행각을 하던 중 백장(百丈) 선사를 만나서 깨달은 후에 본사로 돌아왔다. 은사 스님이 목욕하며 때를 밀게 하니, 신찬 선사가 등을 만지며 이르되 「좋은 불당(佛堂)에 부처가 성스럽지 못하다」하거늘 스승이 돌아보니, 신찬 선사가 이르되 「부처 비록 성스럽지 못하나 능히 방광(放光)은 할 줄 아는구나」하였다.
또 은사 스님이 경을 볼 때에 벌이 창에 와 나가려 하거늘, 신찬 선사가 보고 송(頌)을 읊되, 空門不肯出 投窓也大痴 百年鑚故紙 何日出頭期 '빈 문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창문에 부딪히니 어리석구나. 백 년을 옛 종이(故紙 경전)를 비벼댄들 어느 날에 나갈 기약이 있으리오?'
은사 스님이 경을 놓고 묻되 「네 행각하야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 신찬 선사가 이르되 「백장화상(百丈和尙)의 가르치심을 받아 이제 스님의 은덕을 갚고저 하옵니다」
스승이 재계(齋戒)하고 신찬 선사를 청하야 설법하라 하거늘, 신찬 선사가 법좌(法座)에 올라 이르되, 靈光獨耀 逈脫根塵 體露眞常 不拘文字 眞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영광(靈光)이 홀로 비취어 근진(根塵)을 멀리 벗어나며 체(體)는 진상(眞常)이 드러나 문자에 걸리지 아니하고, 진성(眞性)은 물듦이 없어 본래 스스로 원성(圓成)하니 다만 망연(妄緣)을 여의면 곧 여여불(如如佛)이라'하니, 스승이 그 말에 깨달았다. *사교입선(捨敎入禪) ; '교(敎)를 버리고[捨] 선(禪)에 들어간다[入]' '일정한 교학(敎學)을 마치고 선종(禪宗)에 입문하는 것' 선가(禪家)의 수행관(修行觀)의 하나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法門)인 교(敎)는 올바르게 공부하고 이해하면 참선을 철저히 할 마음이 날 수밖에는 없고, 진리는 실(實)답게 닦고, 참답게 깨달아서 체달(體達)하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갈 수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가르쳐서 알게 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교(敎)에서 닦은 뒤에는 그것을 몽땅 내버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인 선(禪)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수행관이다.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설하신 부처님 법문인 교(敎)는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공부하면 참선을 철저히 할 마음이 날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참선을 올바르게 하면 교(敎)가 하나도 버릴 말씀이 없습니다. 교(敎)와 선(禪)은 둘이라 할 수가 없고, 전부가 다 소중하고도 훌륭한 법문(法門)입니다. *귀재의정(貴在疑情) ; 귀재기의정(貴在起疑情). ‘귀한 것이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데에 있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48~149. (가로판 p141~142) 做工夫호대 貴在起疑情이니 何謂疑情고 如生不知何來인대는 不得不疑來處오 死不知何去인대는 不得不疑去處이니라 生死關竅를 不破則疑情이 頓發하리니 結在眉睫上하야 放亦不下하며 趁亦不去하야 忽然一朝에 撲破疑團하면 生死二字가 是甚麼 閒家具오 噁
공부를 짓되 귀한 것이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데에 있으니 무엇을 일러 의정이라 하는고? 태어나되 어디서 온 줄을 모를진댄 온 곳을 의심치 않을 수 없고, 죽되 어디로 가는지 모르건댄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나니라。 생사의 관문을 깨뜨리지 못한즉 의정이 몰록 일어나리니, 눈썹 위에 맺어 두어 놓을래야 놓을 수 없고 쫓아도 가지 아니하야 홀연 하루아침에 의심덩어리[疑團]를 깨뜨리면, 생사(生死) 두 글자가 이 무슨 부질없는 것일까 보냐? 엑[噁]! *남섬부주(南贍部洲) ; 수미산(須彌山 :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의 사방에 있다는 사주(四洲 : 네 대륙)의 하나. 섬부(贍部)는 산스크리트어 jambu의 음사(音寫)로 잠부(jambu) 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와 같이 일컫는다. 수미산 남쪽에 있으며,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다.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고 한다. 염부제(閻浮提), 염부주(閻浮洲)와 같음. *‘생사 없는 법이!’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불과(佛果) ; 불인(佛因, 부처님이 되기 위한 인因. 즉 모든 선근공덕善根功德)의 대응어. 불도수행의 결과. 불위(佛位). 부처라고 하는 궁극의 결과. 결과로서 부처로 된 상태. 깨달음. *증(證) ; ①깨달음. ②깨달은 바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체화(體化)함.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석일(昔日 옛날 석/날 일) ; 옛적(이미 많은 세월이 지난 오래전 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견(相見) ; 상(相)이 있다는 견해.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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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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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화두드는 법)(No.423)—정진이란 마치 깨 한 말을 큰 나무 밑에서 깨알 하나씩 굴러 올려서 나무 꼭대기에다 올리는 정도의 정성 | 끝없는 망상의 물결 | 불급불완(不急不緩)한 올바른 참구 | 단제(單提) 전제(全提). 화두 드는 요령.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12분 2초)
[법문] 송담스님(No.423)—1990년 하안거해제 및 8월 첫째일요법회(용423)
고인(古人)이 이 정진(精進)하는 것을 말씀하시기를 마치 깨 한 말을 큰 나무 밑에다가 놓고, 깨알 하나를 들어서 나무 몸퉁이에다가 이렇게 굴려서, 굴려서 올라가 가지고 저 나무 위에다가 빈 그릇을 하나 놔두고, 굴려 올려가 가지고 그 그릇에다가 그 한 말의 깨를 다 올리는 정성.
그냥 평지에서 이렇게 굴린다면은 하기가 쉽겠지만, 서 있는 나무에다가 이렇게 발판을 놓고 또는 사다리를 걸치던지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 깨알을 굴려서 올리다가 뚝! 땅에 떨어지면은 다시 또 그 깨를 줏어서 다시 또 올리고, 그래서 간신히 하나를 갖다 올려놓은 다음에는 또 깨알 하나를 다시 또 들어서 올리고 해서, 한 말의 깨를 저 위에 있는 꼭대기에 있는 빈 그릇에다가 다 옮기는 거와 같은 그러한 정도의 정신을 가지고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 아마 한 주먹 깨를 올린다 해도 몇 날 며칠이 걸릴 것입니다. 그것이 하다 보면 떨어져 버릴테니까요. 좀 굵은 것 같으면은—굵은 팥알 정도만 되어도 굴리기가 쉬울 텐데, 참깨 알이나 들깨 알 그 쬐끄만 것을 갖다가 굴리다 보면 그것이 한 자도 못 올라가서 떨어지고, 한 치도 못 올라가서는 몇십 번을 떨쿨거다 그 말이여. 그러니 그 한 말의 깨를 올릴라면은 3년 갖고도 안되고, 10년 갖고도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지은 그 삼세육추(三細六麤)의 그 미세한 망념과 거칠은 망념이 끝없이 일어나는데,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눈으로 들어오는 망념(妄念)으로 인해서 또 화두를 놓치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망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식(六識)이 일어나는데, 그 참 앞으로 컴퓨터가 발달이 되면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그 망상(妄想) 일어나는 것을 아마 기록할 수 있는 때도 아마 머지않아서 오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 일어나는 망상을 기록을 해 놓고 보면 참 기구절창할 것입니다.
그러한 망상, 마치 저 호수나 바다에 가면 끝없이 크고 작은 물결이 일어나고, 일어나는 자리에서 또 다시 새로 일어나고 그러듯이, 우리의 진여(眞如)의, 불성(佛性)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끝없는 물결, 망상의 물결이, 그놈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오늘날까지 왔고 영겁을 두고 윤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마는.
그 일어나는 망상의 물결을 생각 생각이 돌이키고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그래서 처음 뭐 1년 2년 3년에 그것이... 과거에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확철대오하기도 하고, 칠 일 만에 되기도 하고, 구순(九旬) 석 달 만에 되기도 하고, 3년 안에 되기도 하고 하는, 그런 조사(祖師) 스님네의 일화도 많이 전해옵니다마는 사실 그러한 분들은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가 있고, 우리도 그만큼만 참 몸과 목숨을 바쳐서 한다면 우리도 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연히 욕심을 내서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인다고 해서 이 정진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순서가 있고, 자기의 힘에 따라서 알맞게 해야지, ‘뱁새가 황새 흉을 내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마는.
과거에 도인(道人)들, 과거에 모다 선각자(先覺者)들이 하신 일도 우리가 그 정신은 어디까지나 본받아야 하지만 그 선지식(善知識)들이 하신 고대로 우리가 흉내낼 일도 있고, 흉내는 내서는 아니되고 정신만을 본받아서 해야 할 점도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어쨌든지 조급한 생각을 내서도 아니되고, 그렇다고 해서 미리 겁을 집어먹고 늘어져 쳐져가지고 그렇게 해서도 아니될 것입니다. 이 공부는 지극히 간단하지만 간단하면서도 참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범부(凡夫)도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에 의지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잘 들으면서 열심히 하면 올바른 방법을 터득할 것이고, 올바른 방법을 터득해 가지고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나가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항상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그건 틀림이 없지만 그 공부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용맹심과 또 철저히 믿는 신심과 화두를 거각하는 데 있어서 불급불완(不急不緩)한 참 올바른 참구(參究), 대의단이라고 했습니다마는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이는 그런 무모한 그러한 참구를 그것을 갖다가 대의단(大疑團)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대의단이어야 합니다마는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하고, 큰 의심 밑에 크게 깨닫고, 작은 의심 밑에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이 없다’고 이렇게 이 활구참선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고인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그 큰 의심이라고 하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처음부터서 막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하고 억지로 막 몰아붙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 익히고, 그리고 단제(單提)로 해서 그렇게 해 가지고 어느 정도 기초를 이루어가지고 그래 가지고 전제(全提)로 들어가서 그 ‘간절하면서도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그러한 간절한 의심, 이건 참 말로써 간단하게 표현하기가 어렵고, 그런 단계를 거쳐서 본인이 꾸준히 일구월심(日久月深) 해 나가면 그 전제(全提),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 하는 그 의심, 간절하고도 그 간절한 의심을 거각해 나가는 그것을 반드시 스스로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의심을 터득을 해야 어디 가서 정진을 하던지 정진하다가 병나는 법이 없습니다.
원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력하게 잘 타고난 근기(根機)는 처음부터서 전제로 몰아붙이고, 단전호흡이고 뭣이고 그까짓 것도 소용없이 한마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 한마디만 듣고 막 몰아붙여도 석 달 안에 또는 일주일 안에, 길어봤자 3년 안에 툭 터져버릴 그러한 근기도 있습니다.
있으나, 하근기(下根機)는 그렇게 몰아붙이면 흔히 상기병(上氣病)이 일어나기도 하고, 골치 아픈 병이 일어나기도 하고, 바른 정진의 힘을 얻기도 전에 병이 먼저 나 가지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고, 그런 분을 종종 저는 만나게 됩니다마는. 그래서 저는 오늘 이런 몽산(蒙山) 스님의 무자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이렇게 지금 자상하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화두 드는 법을 잘 알아서 전제로 잘해 나가시는 분에게는 군더더기 말이 될는지 모릅니다마는, 아직도 이 화두를 드는 요령에 대해서 확연히 모르시는 분, 이제 새로 시작한 초학자들은 오늘 이 산승의 말씀을 잘 듣고 정진하는 데에 어긋짐이 없도록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 이 삼요(三要)를 갖추어서 정진을 해 가지고 결정코 금생에 이 몸으로 확철대오를 하시도록 부탁을 드립니다.(33분39초~45분41초)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참선(死句參禪)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무량겁래(無量劫來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이래·그 이후로 래(내))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 이래(以來).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삼세육추(三細六麤 석 삼/가늘 세/석 삼/거칠 추)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3상(相)과 지말무명(枝末無明)의 6상(相)을 말함. 3세(細)란 그 상(相)의 작용이 미세하므로 세(細)라 하고, 6추(麤)는 거칠고 엉성하기 때문에 추(麤)라 함.
청정한 진여의 마음이 근본무명에 의하여 망동하여 유전하는, 진실에서 어긋난 마음으로의 3가지 미세한 마음 상태[三細]와 이어지는 거칠은 6단계의 마음 상태[六麤]를 설명하는 '대승기신론'에서 밝힌 교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기구절창하다(崎嶇絶唱하다) ; 너무 기구해 말을 꺼낼[唱] 수 없다[絶]. 말할[唱] 수 없이[絶] 세상살이가 순탄하지 못하고 가탈이 많다. [참고] ‘유치찬란하다(幼稚燦爛하다)’가 형태는 [幼稚+燦爛하다]인데, ‘수준이나 정도가 엄청나게 낮다’라는 뜻입니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No.09)—1976(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4분21초) 다맛 단정(端正)히 앉을지언정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이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억제를 한다든지 구속을 한다든지, 무리를 가해서 하지 말고, 단정하게만 허고서 일체 긴장과 억제를 싹 풀어 버리고서 화두를 들되, 지금도 이렇게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마는 호흡을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자연스럽고 부담없이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면서 화두를 들되,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 무자(無字)를 허는 이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
그렇게 애써서 해가되, 혹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꾸벅 또 꾸벅, 이렇게 혼침이 오면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또 (한두 번 소리내어) 화두를 또 들고, 그렇게 해도 아무리 해도 날씨는 더웁고 그래 가지고 혼침이 오면은 살모시 이렇게 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살모시 일어나서 밖에 가서 왔다갔다 한 5분—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못쓰니까, 한 5분 왔다갔다 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와서 또 정진을 하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은 자연히 모든 마(魔)가 소멸(消滅)이 되고. ‘마가 소멸된다’는 것은 혼침도 그것이 마(魔)고, 산란심(散亂心)도 그것도 마(魔)다 그말이여. 밖에서 들어오는 마(魔), 안에서 일어나는 마(魔), 모든 것이 다 마(魔)여, 마(魔)라고 볼 수가 있는데.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다져 나감으로써 그 마가 소멸이 되고, 마가 소멸이 되면은 눈이 떠억 안정이 된다 그말이여. 눈이 깜빡 깜빡 깜빡하는 것도 안정이 되고,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안정이 된다. 그 눈이 안정이 되면은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따악 안정이 되면은 몸도 안정이 되어서, 조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른다.(12분8초~16분28초)
[참고 ❷]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3분57초) 화두를 들으라 들으라 하니까, "화두를 어떻게 듭니까? 어디가 놔졌어야 그놈을 들지,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들어서 배꼽 밑에다가 딱 붙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그다가 붙이며.." 아주 그 대답하기가 대단히 거북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고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이해를 하시면 되는 것이고.
"생각은 되는데 관(觀)이 안 됩니다. 근데 그 어떻게 하면 관(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묻는 이도 있습니다. 또 "관(觀)이란 게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도 있는데.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입니다. 생각에 일종인데, 그 생각을 자꾸 화두를 생각하고—사량심(思量心)으로 생각해 갖고는 안 되고, 사량심이 아닌 꽉 맥힌 의심(疑心),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한 번씩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그러고.
한 번 '이뭣고?' 하고 화두를 한 번 생각하면, 들었으면, 그 생각이 한참 동안, 1분이 되었건 3분이 되었건 내지 10분 동안이라도 그 생각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여가 딱 있으면 그동안에 「화두가 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딴생각이 쑥 들어와 가지고 화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으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고. 또 딴생각이 들어오지는 안 했지마는 '이뭣고?' 한 그 생각이 희미해져 버려. 그래 가지고는 화두를 든 것인지 안 든 것인 중도 모르고 그냥 조용한 채 우두거니 앉어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른 새에 까빡 이렇게 (졸게) 되고 하는데. 그럴 때는 또 다시 화두를 떠억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한 번씩 챙기는 것이여.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들어져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서 계속 그렇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그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한 번 들어서 그 생각이 쭈욱 있으면 자꾸 연거퍼 그 위에다 자꾸 포개 놓지 안 해도 되어요.
이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15분5초~19분2초)
[참고 ❸]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2분28초) 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37분50초~40분19초)
*일언지하(一言之下) ; 한마디 말 끝에.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용맹심(勇猛心) ; 두려움 없이 용감하며 기운차고 씩씩한 맹렬한 마음.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불급불완(不急不緩) ;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하고, 큰 의심 밑에 크게 깨닫고, 작은 의심 밑에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이 없다’ ; 대의대오(大疑大悟) 소의소오(小疑小悟) 불의불오(不疑不悟).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이 없으면 깨닫지 못한다' [참고] 『박산화상참선경어(博山和尙參禪警語)』 (成正 集) <卍續藏 第63冊 No.1257> '시초심주공부경어(示初心做工夫警語)'에서. 做工夫 貴在起疑情 何謂疑情 如生不知何來 不得不疑來處 死不知何去 不得不疑去處 生死關竅不破 則疑情頓發 結在眉睫上 放亦不下 趁亦不去 忽朝樸破疑團 生死二字是甚麼閑家具 噁 古德云 大疑大悟 小疑小悟 不疑不悟
공부를 짓되 귀한 것이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데에 있으니 무엇을 일러 의정이라 하는고? 태어나되 어디서 온 줄을 모를진댄 온 곳을 의심치 않을 수 없고, 죽되 어디로 가는지 모르건댄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나니라. 생사의 관문을 깨뜨리지 못한 즉 의정이 몰록 일어나리니, 눈썹 위에 맺어 두어 놓을래야 놓을 수 없고 쫓아도 가지 아니하야 홀연 하루아침에 의심덩어리[疑團]를 깨뜨리면, 생사 두 글자가 이 무슨 부질없는 것일까 보냐? 엑[噁] ! 고덕(古德)이 말씀하시기를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 무자(無字) 화두.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단제(單提) ;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단제(單提)는 그냥 ‘무~’ 하고, 의심을 붙이지 않고 아무 일체 다른 말은 없이 ‘무~’만을 관하는 것.
[참고 ❶] 송담스님(No.423)—1990년(경오년) 하안거해제 및 8월 첫째일요법회(편집 정리)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단제(單提)는 그냥 ‘무~’ 하고 아무 일체 다른 말은 없이 ‘무~’를 관하는 것. 단제는 무자(無字)를 하는데 생각을 한군데다 집중하는 데에는 좋은 이익이 있는데, 까딱하면 ‘무(無)~~’ 그놈만 들여다보다가 스르르르 혼침(昏沈)에 빠지기가 쉽다. 그리고 혹 오신통(五神通)은 날른지는 모르나, 확철대오는 할 수가 없다. 누진통(漏盡通)은 할 수가 없다.
전제(全提)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전제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간절히 의심을 들다보면 의심을 들어서 정신을 성성(惺惺)하게 하는 데에는 대단히 좋으나, 성성(惺惺)한 가운데에도 적적(寂寂)하고, 성성하면서도 적적하도록 참구(參究)하는 묘리(妙理)를 얻지 못하면은 공연히 생각이 어지러워. 적적하게 들어가지를 못하고 비교적 성성하기는 하는데 생각이 이렇게 고요해지지를 못하는 흠집이 있어. 그래 가지고 좀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하고 의심을 아주 힘을 써서 간절히 간절히 하다 보면 상기(上氣)가 되는 폐단이 있고, 골치가 아파지는 폐단도 있다. 그리고 화두가 의심이 자꾸 끊어져. 잠깐 들으면 있다가 또 끊어지고 또 끊어지고 자꾸 이렇게 단절이 되면, 그때는 근제(勤提)를 하라. ‘부지런할 근(勤)’ 자, 자주자주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라.
그래서 몽산 스님은 이 단제(單提)와 전제(全提)를 초학자의 단계에서는 단제로 해 가지고, 기초가 이루어져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된 다음에는 전제(全提)로써 화두를 잘 거각(擧却)해 나가라.
생각 생각이 화두를 들고, 또 금강과 같은 그 금강지(金剛志), 견고한 뜻을 분(奮)내서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되도록 그렇게 해서 항상 행주좌와 간에 회광반조(廻光返照)하고 살피고 또 살펴서, 혼침(昏沈)이 오면은 전제(全提)를 하고, 산란심(散亂心)이 일어나면 단제(單提)를 하고, 간단(間斷) 자꾸 생각이 끊어지고 화두가 순일하게 연속이 안 될 때에는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서[勤提], 일구월심해서 밀밀면면(密密綿綿)하고 면면밀밀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면 그 순수무잡한 의단(疑團)이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면 수질각차(手跌脚蹉) 해서, 어떠한 찰나에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많은 도인들이 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도업(道業)을 성취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잡드리해 나간다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만 명이면 만 명 다 틀림이 없이 다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참고 ❷] 송담스님(No.423)—1990년(경오년) 하안거해제 및 8월 첫째일요법회(90.08.05)에서.(18분46초) 수행수시용심진(修行須是用心眞)이라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時道易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미오이도단재아(迷悟二途端在我)하고 시비이자막수인(是非二字莫隨人)이어다 나무~아미타불~
수행(修行)은 수시용심진(須是用心眞)하라. 수행해 나가는 데는 모름지기 그 마음 씀을 참되게 해라. 진실하게 해라.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時道易親)이니라. 마음이 만약 참되다면 도는 친하기 쉬우니라.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나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하셨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어. 오직 간택함을 혐의(嫌疑)한다’ 간택(揀擇), 간택은 이리저리 가리는 거여. 가리고 이것저것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가리는 것이 간택인데, “그 '간택을 혐의한다'고 한 말이 무서운 간택이라” 조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그 도를 수행을 해 나가는데 그 마음 씀을 참되게 해라. 그 마음 씀이 참되면은 도는 친하기가 가깝다. 바로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
‘마음 쓴다’고 하는 표현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화두를 들어 나갈 때에 그 화두(話頭), 화두는 다른 말로 하면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그 공안은 따져—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고 분석하고 더듬어 들어가고 이런 것이, 제일 공안을 참구(參究)하는 데에 주의할 것이 바로 이 따지는 것이거든.
공안을 분석하고 따져서 아무리 따지고 따져서 들어가 봤자, 그렇게 따져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천하 없는 그럴싸한 결론을 얻어서 수긍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으로써 얻어지는 결론이라, 그것은 망상(妄想)에 지나지 못한 것이여.
어쨌든지 화두는 ‘이 무엇고?’ 화두를 하던지,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던지, 조주의 무자(無字)를 하던지, 화두를 드는 그 찰나에 마음길이 끊어져야 되는 거여. ‘이뭣고?’ 다못 ‘이뭣고?’ 그 의심뿐이여. 앞 생각도 끊어지고 뒷 생각도 끊어지고, ‘이것이 옳게 하는가 그르게 하는가?’ 그런 생각까지도 끊어져버리고,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해.
또 조주(趙州) 무자(無字), 무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뿐이지, ‘어째서 없다고 하는 것이 나은가, 어째서 무라고 하는 것이 나은가?’ 그러한 생각도 거기에는 붙어서는 안 돼.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런데 무자(無字) 화두는 자고로 대단히 논란이 많은 화두여. 논란이 많지마는 그 무자 화두에 옳게 참해 가지고 참구를 바르게만 하면 그 무자 화두를 타파함으로써 많은 큰 깨달음을 얻은 도인들이 배출을 하는 것입니다.
몽산 스님께서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이라고 하는 법어도 설하시고 또 『몽산법어(蒙山法語)』에는 무자 화두가 많이 거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역시 무자 화두를 가지고 정진하는 분들이 많아서 오늘은 그 무자 화두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몽산 스님의 그 ‘무자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단제(單提)와 전제(全提)가 있는데, (단제는) 그냥 ‘무(無)~~~’ 거기는 전혀 의심을 붙이지 않고 ‘무(無)~~~’ 『어느 스님이 조주 스님한테 ‘저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여쭈어 보니까, 조주 스님이 ‘무(無)’ 그러셨단 말이여』
조주 스님이 ‘무(無)’라 그랬으니 ‘무(無)’, 그냥 ‘무(無)’ 하고, 무슨 망상이 일어나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무슨 소리가 귀에 들리거나 ‘무(無)~~~’ 항상 무자(無字)가 끊어지지 않도록. 앉아서도 ‘무(無)’, 서서도 '무(無)’, 밥 먹으면서도 ‘무(無)’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러지 않는 거여, 단제(單提)는. 그냥 ‘무(無)’ 하고 무자(無字)만을 항상 생각하고, 무자(無字)만을 들어서 ‘무(無)’ 해 가지고 그 ‘무(無)’를 관하는 거여. 이것이 단제인데. 전제(全提)는 조주의 뜻,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거여.
그러면 단제(單提)는 어떠한 이익이 있느냐 하면은 항상 ‘무(無)’ 하는 무자에다가만 자꾸 정신집중을 하기 때문에 복잡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 없어. 그리고 비교적 무(無)에 정신집중을 하기가 무난해 그저, 초학자로서. 그런데 그 무자(無字)를 하는데 생각을 한 군데다 딱 집중하는 데에는 참 좋은 이익이 있는데, 까딱하면 그 ‘무(無)~~’ 그놈만 들여다보다가 스르르르하니 혼침(昏沈)에 빠지기가 쉽다 그 말이여.
왜 혼침에 빠지기 쉽냐 하면은 정신집중이 잘된 반면에 생각이 조용한 데 이렇게 빠져 가지고 스르르하니 잠이 들어버려. 계속 또 잠이 들다가 또 일어나서 또 ‘무(無)~’ 평생 동안 무(無)하면 정신집중은 비교적 잘되고,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무(無)’ 하나만을 생각하니까 조금도 어려움이 없고 이 생각 저 생각이 안 일어나고 좋은데,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분(分)이 없어.
그저 조용하니 조용한 데에만 집중만 해서 혹 오신통(五神通)까지도 날 수가 있어. 조용하고 고요하고 고요한 데에 집중을 하다보면 저절로 망상이 끊어져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아주 무심(無心)경계에 들어가서 혹 오신통은 날른지는 모르나, 확철대오는 할 수가 없다. 누진통(漏盡通)은 할 수가 없는 것이여.
그런데 전제(全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간절히 간절히 의심을 들다보면 의심을 들어서 정신을 성성(惺惺)하게 하는 데에는 대단히 좋아. 그런데 성성(惺惺)한 가운데에도 적적(寂寂)하고, 성성하면서도 적적하도록 이 참구(參究)하는 묘리(妙理)를 얻지 못하면은 공연히 생각이 어지러워. 적적하게 들어가지를 못하고 비교적 성성하기는 하는데 생각이 이렇게 고요해지지를 못하는 흠집이 있어. 그래 가지고 좀 성질이 급하고 그런 양성(陽性)을 가진,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하고 의심을 아주 힘을 써서 간절히 간절히 하다 보면 상기(上氣)가 되는 폐단이 있고, 골치가 아파지는 폐단도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몽산 스님은 이 단제(單提)와 전제(全提)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말씀을 하셨나 하면은, 초학자(初學者)는 단제로써 공부를 지어 나가라. 다맛 ‘무(無)~’ 하고 단제로 공부를 해 나가면, 그걸 일구월심(日久月深)해 나가면 생각도 가라앉고 망상도 가라앉고, 좀 자리가 잡혀. 더군다나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무(無)~~~’ 무(無)를 길게 이렇게 하면서 숨을 내쉰다 말이여.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무~~~’ 이렇게 단제로 그렇게 일구월심 얼마동안 정진을 해 나가면 순숙(純熟)해져서 망상도 다 가라앉아 버리고 이렇게 된 다음에 전제(全提)로 들어가라 이거여.
단제로 계속하다 보면 너무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맑고 좋으니까 계속해서 단제로만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망상도 가라앉고 그래서 순숙해지면 그때 가서 전제(全提)로 들어라. ‘무(無), 무(無)~~~’가 아니라 ‘무(無)? 어째서 무(無)?’ 그때 가서 ‘어째서?’에다가 의심의 초점을 두어 가지고 의심으로 들어가라 이거거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까지 처음에는 다 하다가 나중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무(無)’라고 한 소리까지 안 하고 ‘어째서?’ 그렇게만 해도 벌써 의단(疑團)이 딱 나중에는 드러나게 된다 그 말이여. 의단이 드러나면—‘어째서?’ 소리도 안 해도 떠억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한 그 의단이 드러나게 된다면, 뭐 자꾸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런 소리를 자꾸 뜰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나 처음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 해야 돼. 이렇게 해서 자꾸 의심이 끊어지면 또 하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그렇게 길게 여러 글자를 안 하더라도 의심이 들리면 다못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만 해나가도 된다 그 말이여. 이 초학자가 단제로써 기초를 다져 가지고, 단전호흡과 아울러서 단제로 기초를 다진 뒤에는 ‘무(無)?’ ‘무(無)라니?’ 이렇게만 해도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초학자의 단계에서는 단제로 해 가지고, 기초가 이루어져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된 다음에는 전제(全提)로써 화두를 잘 거각(擧却)해 나가면 ‘어째서?’ 하고 용을 쓰고 이마에다가 힘을 들여서 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여. 기초도 되지도 않고, 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어째서?’ 하고 어거지로 힘을 쓰고 한다면 육단심(肉團心)이 동(動)해 가지고 상기가 일어나고 골치 아픈 병이 생기고, 화두도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의단이 독로하지를 못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몽산법어집을 낸 그 몽산 스님의 무자 화두를 관하는 법에는 이렇게까지 참 자상하게 말씀을 해놓으셨고, 또 그렇게 해 나가되 그래도 정진하다 보면 이렇게 겨울에 문을 닫고 정진을 하면은 30분만 지나면은 사람 콧구멍에서 나오는 모다 탄산가스로 인해서 공기가 탁해지고 방안 온도가 높아지면 아무리 성성하게 잡드리를 해도 혼침에 들기가 쉽고, 또 요새처럼 여름에 날씨가 더웁고 그러면 아무리 정신을 차려도 꺼벅꺼벅 졸음이 온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는 전제(全提)로,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전제(全提)로 단속을 하고 또 그렇게 하다가도 워낙 산란심(散亂心)이 많으면 그때는 또 단제로 화두를 들어 보라 그 말이여. ‘무(無)’ 단제로 한 번 해 보고. 화두가 의심이 자꾸 끊어져. 잠깐 들으면 있다가 또 끊어지고, 또 끊어지고 자꾸 이렇게 단절이 되면, 그때는 근제(勤提)를 하라. ‘부지런할 근(勤)’자, 자주자주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라.
그래서 혼침 올 때는 전제(全提)로 들어 보고, 산란심이 일어날 때에는 단제로 한번 대체를 해 보고, 자꾸 화두가 끊어져싸면 근제, ‘부지런할 근(勤)’자 근제로 단속을 하고, 이렇게 해서 전제(全提)와 단제(單提)와 근제(勤提)를 적절하게 운용을 해서 혼침과 산란과 간단(間斷)을 단절되는 것을 대처해 나가는, 스스로 그걸 잘 방편을 써서 단속을 해 나가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14분51초~33분38초)
*전제(全提) ; 전(全) 부분이 들고 일어남(全分提起)의 뜻. 본래 그대로 나타냄. 전부를 그대로 나타내 보임.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전제(全提)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하근기(下根機 아래 하/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나 근성, 능력이 가장 낮은 사람.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몽산(蒙山) : 남송과 원(元)대의 임제종 양기파 스님, (1231 ~ 1298 또는 1308) 이름은 덕이(德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 시양 고안현(時陽高安縣)에서 났다. 그 고향 시양이 당나라 때에는 균주(筠州)였기 때문에 고균(古筠) 비구라고 한 일도 있었고, 여릉도 몽산에 있었으므로 몽산 화상이라 하며,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있었으므로 전산 화상이라기도 하고, 휴휴암(休休庵)에 있었으므로 휴휴암주라기도 하였다. 고산(鼓山)의 완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의 법을 이었다。그의 교화한 시기는 원나라 세조(世祖)때이며, 우리 고려의 충렬왕 때이다。그래서 고려의 고승들과 문필의 거래가 많았고, 그의 저서 가운데 <법어약록(法語略錄)> <수심결(修心訣)>등은 이조 중엽에 있어 우리 글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몽산법어(蒙山法語) ;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 『몽산법어』가 있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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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의심(전강선사 No.018)—『고봉선요(高峰禪要)』 ‘시중(示衆 其五)’ | 화두 의심은 불이고 번뇌망상은 나무인데, 다 태워버린다. 망상이 있을수록에 화두가 점점 커져! | 사람 몸뚱이 얻기 과연 어렵다 | 십선봉행허고 참선 화두를 해야사 도솔천 내원궁으로 가느니라.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만일 이 일[此事]을 말하자면 마치 큰 불무더기의 맹렬한 불길이 하늘까지 뻗쳐서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는데, 세간의 온갖 물건을 무엇이나 집어 던져도 한 조각의 눈[雪]이 닿자마자 곧 녹아버리는 것과 같나니 어찌 털끝만치인들 딴 생각이 용납되겠는가. 만일 이렇게 화두를 잡드리해 나가면 기한내에 성취하는 공(功)을 만(萬)에 하나도 잃지 않겠지만 만일 그렇게 못한다면 비록 오랜 세월을 경과하여도 고생만 할 뿐이리라.
(1) 16분 17초.
(2) 11분 17초.
[법문] 전강선사(No.018)—전강선사 일대기 제8호(경술1970년 12월 13일 음) (전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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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화두 허는 경계나 내가 한마디 얘기허고 내려갈까? 여까장 해두고 잉. 기운 없어 못허겄고. 법문이 고함지르기 시작허먼 법문 못해야. 뱃속에서 안 나오니깐 고함을 지르거든.
약론차사(若論此事)인댄, 이 일을 의논할진대. 이 일은 무엇인고? 참선법, 화두법이여. 여대화취(如大火聚)다. 큰 불무더기 같다. 불무더기가 조그만헌 불무더기가 아니라 큰 불무더기다.
어째 큰 불무더기냐? 집채라도 큰 집채에 불이 타면 클 것이고, 적은 집에 불타면 적은 불무더기일 것이다. 불무더기라 하는 것은 나무가 많이 쟁여져 있어야, 거그 불이 붙어야 큰불이다. 나무 없으면은 불이 붙을 수가 있나? 나무가 가뜩 쟁여져 가지고 그 불붙어야사 큰 불무더기니라.
그런 참선법도 여차(如此)하다. 망상(妄想)이 잔뜩 있는 사람, 습기(習氣)도 많고 망상도 많고 그렇게 그만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그뜩 괴어 차 있는 사람일수록에 그 사람이 공부를 허는 것이여. 처음에는 그렇게 해도 안 되지마는, 그 사람이 공부를 해야사 공부가 인자 된다 그 말이여. 그렇게 많이 구원겁(久遠劫) 중으로 오면서 그 많이 탐진치를 익혀 왔고, 그 망상! 망상이 무엇인가, 모도 그 습기 망상이지. 살생 · 도둑질 · 거짓말 그저 모도 이런 망상, 그거 모도 그런 것으로써 습기 지어서 그 망상이지. 그러니 그런 망상이 많이 있는 사람이래야 화두가 떠억 되는 것이여. 큰 불무더기가 냉기가 많이 있으면 불이 잘 타데끼—불은 화두인디, 나무는 그놈이 번뇌 망념인디, 나무 그놈을 막 들입대 큰불이 태워 버린다 그 말이여.
처음에는 마침 화두를 배워 놓으니, ‘판치생모(板齒生毛), 어째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이놈을 배워 놓으니, 잔뜩 불 땐 굴뚝에 연기 뻥뻥 나오는데 들여다보는 것 같지. 그 들여다볼 수 있나? 막 연기가 눈으로 푹 대들고, 코로 입으로 막 대든디 들여다볼 수 있어? 그와 같혀. 그와 같기도 허고, 문자상철우상사(蚊子上鐵牛相似)여. 모구(모기)란 놈이 쐬소, 쐬로 된 소 뚫는 것 같여. 그 모구 부드러운 주뎅이, 고것으로 쐬소를 뚫으니 되아? 그렇게, 안 들어가. 되도 안 혀. 그렇다 그 말이여. 그러지마는 화두라 하는 것은 그러헌 사람이 해야 혀.
젠장! 영리해서 말, 법문 잘 알아듣고 이치를 딱딱 분석해서 알고, 그 사람 못혀. 고 영리한(靈利漢)은, 날카로운 영리헌 사람은 이치길을 자꾸 만들아, 이치를 모두 뭘 만들아서 그래서 못혀. 망상이 꽉 찬 사람이 척 들어와서 화두를 배워 보면 깜깜 칠통(漆桶)이여. 무슨 어떻게 헌 지도 몰라. 그래도 그만 그대로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이렇게 그만 무식허게 대들어야 혀. 영리허게 요리조리 주박성(湊泊性)으로 대들면 못써. 상량선(商量禪)으로 대들면 아무짝에도 못써.
확 대들어서 알 수 없는 놈을 하나 추켜들고는 자꾸 이놈을 챙긴다. ‘어째서 판자 이빨에 털이 났다 했는고?’ 그놈 없어지기 전에 어서 또 끄집어 일받고 일받고 허면은 그놈의 망상이 어디 틈, 비집을 틈을 어디 얻어서 나올 수가 없어. 못 나와. 그까짓 거 나오거나 말거나 판대기 이빨에 털만 자꾸 ‘어째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아! 요놈만 자꾸 거각(擧却)하는데, 어디 망상이 어디서 불거져?
그까짓 염(念), 일어나는 망상 두려워허지 말어라. 자꾸 화두만 이놈 이렇게 자꾸 챙겨라. 그러면 맹렬헌 불이 낭기 태우데끼, 일체 망상이 판치생모 생각하는 디 당최 어리대도 못헌다. 그와 같여.
그러헌 더운 불꽃[烈焰]이 큰 불무더기가 긍천(亘天)이다. 하늘까장 뻐질렀다. 원청 큰 불무더기이기 따문에 증무소간(曾無少間)이다. 그 불무더기가 원청 냉기가 하도 많이 쟁여져 있으니까, 그 큰 불무더기가 타도 ‘일찍이 조금도 사이가 없다’ 어떻게 많이 드리 타는지.(43분1초)
그러니 망상 번뇌가 많이 있는 그 사람은 화두 그놈이 점점점점 불무더기 타데끼 자꾸 커지제. 망상이 있을수록에 화두가 점점 커져! 소유지물(所有之物)을—비단 냉기만 태우는 것이 아니라, 일체 도모지 모냥 있는 물건은 다 태운다. 옥석(玉石)도 태우고 쐬도 녹아 버리고 무슨 물건이든지 다 태와 버린다.
실개투지(悉皆投至)면은, 거다가 집어넣어 봐라. 뭣이 안 타는가? 유여편설(猶如片雪)이다. 그 큰 불무더기가 불이 많이 크게 탈수록에 더 열이 많고 굉장한 강해서 여간 천하없는 무슨 못 태울 물건이라도 거그 들어가면은 봄눈같이 녹아져 버린다. 이 비유인디, 화두를 이와 같이 다루어라. 화두만 자꾸 챙기면은,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 턱 챙기면은 의심 그놈이 불인디 뭐가 안 녹아지겄나? 무슨 망상이 거 와 붙겠나? 자꾸 화두 의심만 길러라! 알 수 없는 놈만 키워 길러 나가거라.
세상에! 이 법같이 쉬운 참선법이 없는데, 더군다나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인데 어째서 안된다고 하냐 그 말이여. 그저 바람 쐬다가도 또 한번썩 생각하고, 들어가 또 좌(座)에 앉어서 생각허고.
알 수 없는 화두 의심을 그놈을 자꾸 생각해야제, 고것 의심 없이 지해(知解) 상량(商量)으로 들어가 봐. 요리 알고 저리 알고, 무슨 이치고, 뭐 요따구 놈의 선(禪) 해봐, 무엇이여? 그런 선은 그건... 무슨 그러니 그러기 따문에 뭐 신선도도 못 되제. 그것이 무엇이여?
점착변소(點着便消)다. 그 불무더기에는 그저 집어넣기 전에 다 탄다. 어디 뭐, 거그 부닥쳐서 타나? 더도 들어오도 못혀. 화두가 일념이, 이렇게 의심이 성대(盛大)헐 것 같으면은 큰 불무더기와 같애서 참! 만무일실(萬無一失)이다. 만(萬)이 참선허는데 하나도 잃은 법이 없어. 하나도 안된 법이 없어.
쟁용호말(爭容毫末)이냐? 호말(毫末)같은 거, 터럭겉은 걸 집어넣어 봐라. 거가 어디 어리댈 수나 있나? 화두 의심이 돈발(頓發)되면은 그깥은 무슨 세상, 무슨 번뇌 망상이 무슨 소용이 있어? 번뇌 망상 그까짓 걱정헐 게 뭐여? 또 잠이 그것이 어디서 와? 잠! 잠이 그것이 뭐 근본이 있는 것인가, 그것이? 근본도 없는 것이 공연히 들어와서 심월(心月)을 어둡게 만들지.
약능임마제지(若能恁麼提持)를 해 봐라. 활구참선허는 사람이 만약 능히 이와 같이 화두를 제지(提持)해 봐라. 똑 날로 날로 다루어 해봐라. 다맛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판치생모? 어째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요놈에서, 알 수 없는 요놈 거각한 디서, 망념이 무엇이 생겨날 디가 없어! 아, 해보면 알제.
헐똥말똥 좀 허다 말다 “아이고, 이놈의 것! 안 되니 그만 말아 버릴까 어쩔까” 요렇게 헌 놈의 참선이래야 안 되지. 괘명(掛命)허고, 목숨을 한번 그까짓 것 죽고 사는 걸 불고(不顧)해 버리고 한번 해보아라, 안 되는가? 죽도 않느니라, 그래도.
안 허고 어떻게 헐 꺼여? 이렇게 한바탕해서 내가 나를 깨달라 놓고 봐야지, 그 요따구로 살다 말아? 요따구로 살다 죽고 말아? 어디 가 처백힐 것이며, 그놈의 곳 참! 궁금혀. 어디가 처백힐 것인가? 참, 이놈 안 갈 수 없다. 가는 길이로구나. 돌아오지 못헐 놈의 길을 간다. 다시는 못 와. 요까짓 몸뚱이 가지고 어떻게 오나? 요 몸뚱이 내버리고 어디를 와? 한번, 부모 처자 권속이라도 작별허고 이별해 버리면 그만이다. 다시는 그건 못 만나는 것이여.
그까짓 영(靈), 그것 뭐 이 몸뚱이 안에 있든 거, 누가 보기나 알기나 허간디? 그놈의 처백힐 곳을 한번 생각해 보아라.
지금 말세(末世)다. 지금 가장 말세인데, 이번에는 만약에 한번 처백혀 버리면은 참말로 못 나온다. 그놈의 처백힌 곳이 무간지옥인가, 아비지옥인가, 소 배때기인가, 말 배때기인가, 귀신 배때기인가 알 수는 없다마는, 한번 처백히면은 다시는 나올 수가 없다. 요몸이나따나, 인신(人身) 몸뚱이 얻기 과연 어렵다.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쉽지 못하다.
누가 저번에 질문허기를 “지금 이렇게 사람이 많이 생겨 나오는디 참, 사람 때문에 주체 못허겄는디, 그렇게 사람 몸뚱이가 나기 어렵다고 그래 놨답니까? 그 가뜩 사람 땜에 못 살겠는디” 이러드구만. “야, 그것도 설찬히 질문도 헐 만한 말이다마는, 그게 어리석느니라” 내가 그랬어.
“그놈이 모도 그 이 몸뚱이 있는 물건, 몸뚱이로 모도 생명 붙어 있는—사람 몸뚱이 말고—짐승 몸뚱이, 벌거지 몸뚱이, 날라댕기는 연비(蜎飛) 몸뚱이, 바다 가운데 있는 몸뚱이, 큰 놈 작은 놈 다 모도 한량도 없는 놈 다 그놈 숫자를 좀 쳐 보고, 땅속에 파묻혀 있는 개구락지니 꺼갱이니, 뭐 또 저 물속에서 모도 그 해치깡에서 생겨난 그런 충이니, 박테리아 충이니, 공중 드리 전부 수륙공해(水陸空海) 전부를 다 쳐서, 사람 인명허고 그놈 비교 좀 해 보자.
부처님 말씀에 영(靈)은 마찬가지라고 했으니 돼지 영이나, 소 영이나, 사람 영이나, 개 영이나 똑같다 했으니 또 뭐 벌레 몸뚱이는 달라? 준동함령(蠢動含靈)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요, 다 불성(佛性)이 있다. 불성은 똑같은 거 아닌가. 부처 되는 불성이 있다 했으니—그놈이, 대구 같은 놈 저런 놈이, 그 큰 놈이 알 낳아 놓으면은 처음에 나올 때는 찌끄만 눈만 생겨 가지고, 허다가 그놈이 차츰차츰 이물성대(以物盛大), 뭘 많이 먹고 크면 이만큼 커지고. 그렇제, 어디 본래 그놈이 무슨 뭐 불성(佛性)이 적고 큰가? 허니, 그렇게 한번 따져 보아라. 짐승취에 들어가거나, 공계에 일체 중음신(中陰身 ), 귀신 배때기에 들어가던지 이렇게 허제, 이 사람 몸뚱이 그렇게 쉽게 들어오겄나? 허니 그 어리석은 말이다” 내가 그랬어.
이 몸뚱이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다 이 몸뚱이 내던져 버리고 턱 가서 얼른 장만해 오면 거 괜찮허제. 허지마는, 그렇게 못 되아. 과약(果若) 참, 어렵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인신난득(人身難得)이라. 사람 몸뚱이 다시 장만허기가 그렇게 어려우니라. 그거, 허니 난조지상(難遭之想)을 한번 생각해 봐라. 몸뚱이 다시 얻기 어려운 생각을 한번 지어라. 지어서 금생에 미루지를 말고 결정코 화두 성불을 해라.(57분41초~1시간13분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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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말세다. 지금 이 말세가 어떤 말세인고? 우리 석가모니불 나오신 이 사바세계 출세(出世)—백 세에 출세허셨는데, 인자 백 년 지나가면 일 년씩 감해져서 천 년 지나가면 십 년 감해져서 육천 년만 지나갈 것 같으면 십 세 정명(定命)이 온다. 십 세 정명 올 것 같으면은 인자 거기에서 도병겁(刀兵劫) 일어나, 무슨 질병겁은 뭐, 도병겁, 도창겁이 막 일어나 가지고는 다 거그서 몸뚱이 생긴 것들 다 뿌어져 버리고 다 모가지 잃어버리고 중음신(中陰身)으로 되는디, 중음신으로 삼재(三災) 속에 들어가서 그놈의 속에서 이 육신 몸뚱이는 없지마는, 중음신 몸뚱이라는 것이 꿈에 있는 몸뚱이 같은 거, 몽혼신(夢魂身)도 아니지, 이것은 아주 꿈도 없제. 업신(業身)이지.
업신이 그 중에 들어서 무수(無數) 대고(大苦)를 받네! 그놈의 고(苦)라는 것은, 중음신의 고라는 것은 일구난설(一口難說)이여. 그렇게 얼마를 고(苦)를 받고 있을 터이니, 거그 한번 빠져 놓으면 6억 7천만년 후에도 미륵회상(彌勒會上)을 못 참여혀. 언제 그것들이 나와서 미륵존불 회상에 참여헐 것이여? 지금 잘 닦아야, 잘 닦아서 견성을 했다고 하드래도 견성해 가지고 입태(入胎), 태에 들어갈 때도 안 매(昧)하고, 주태(住胎), 태에 들어가서도 안 매하고, 출태(出胎), 태어날 때도 안 매할 정도가 되어야사 허느니라. 미륵회상에 참여하니라. 우리가 그때 어디 가 있을 거여? 다시 사바세계 나오드래도 그래 깨달라 가지고 나와야사 환허제.
이렇게 이렇게 미(迷)해 가지고 이렇게 멍청해 가지고 오늘 이 목숨 잊어버리면은 향하처거(向何處去)오? 요 지경, 요 따위 되아 가지고서는 그만 이 숭악한 말세, 이 삼재(三災)에 들어가 버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여그서 이렇게 해 놓은 거 무언 줄 아시요? 뭔 줄 알아?
여다가 딱! 예불(禮佛)은 고대로 하고, 예불은 각 사찰에서 허는 대로 고대로 예불 내가 딱 해 놓고는, 거다가서 우리 참선 학자들, 우리 선학자들 부처님께 축원(祝願) 하나, ‘그저 정법문중(正法門中)에 퇴타(退墮) 않고 속성대각(速成大覺)해서, 나도 깨달라서 일체중생 제도해 줍소사’ 아, 그러면은 거그에 수명 부귀 장수가 거그 다 들었고. 수명 부귀 장수가 무엇이여, 정법문에 물러가지 않고 확철대오허면은 천하에 그만이 아닌가!
이렇게 축원 딱 해 번지고는, 고 밑에 가서는 떠억 십악참(十惡懺)을 허거든. 십악참이라 하는 것이 그 십중대계(十重大戒)여. 그 범망경(梵網經)에서 나온 것이여. 십중대계를 딱, 그 심지법문(心地法門)이거든. 견성(見性)해야사, 견성헌 이야 법(法)을 설혀. 견성해야 대승계(大乘戒)를 설혀.
멋대가리도 없이 그깟... 비구계(比丘戒), 내가 그걸 비방하는 게 아니여. 비구계 이백오십 계, 비구니계(比丘尼戒) 오백 계, 받아 놓았자 그 당장에 잊어버리는 거, 계상(戒相)도 모르는 거. 내가 설허는 것 안 됐다고 혀?
십중대계는 그대로 환해서, 참선 화두학자면 그대로 가지게 되아. 다 십중대계 딸렸거든. 그러면 계행(戒行)도—살생도 않는디, 또 살생도 않지만 파(破)할 것이 어디 있어? 가지고 범허는 것이 없으니 계상(戒相)까장 다 없어, 화두를 해 나가니까.
화두 학자가 십선(十善)을 봉행(奉行)해야 되아. 십악(十惡)을 이렇게 참회(懺悔)하고 십선봉행을 해야사 대번에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으로 간다 했거든. 십중봉행만 하면은, 십중봉행만 하면은, 십선봉행만 하면은 그대로 도솔천 내원궁으로 간다 그 말이여. 도솔천 내원궁으로 갈 것 같으면 불과(佛果) 증(證)해 가지고 내려오지, 그냥 범부(凡夫)로 내려오는 법은 없어.
허니까, 똑 이렇게 예불허고, 아침에는 십중대계 그 참회를 따악 십악참회를 허면은—십악을 안 하면은, 내가 십악 죄를 안 지으면은 십선봉행(十善奉行)이여. 지악위선(止惡爲善)이니까. 꼭 십선봉행을 해야사, 십선봉행허고 화두를 참선 화두를 해야사 도솔천 내원궁으로 가느니라. 인자는 도솔천 내원궁으로 가서 우리가 피난해 가지고 내려와야지, 성불(成佛)해 가지고 내려와야지, 사바세계 어름어름허다가는 안 되아. 응! 그 말 잘 듣겠소? 그걸 잘 알아, 잘 알아들어야 되아.
그러니 여그서 이렇게 예불 똑 하고, 그 십악참 허는 거 고것 알고, 화두 딱 배운 보살님네 고렇게 해서 아침이라도 일어나시거들랑 방에서 딱 고렇게 예불 젓수고. 일어나서—모도 잠자고 그런디, 모도 뿌시럭뿌시럭 일어나서 잠 못 자게 그러지 말고, 가만히 혼자 일어나서 심배(心拜)라도, 마음으로라도 따악 이렇게 앉어서 도솔천 내원궁을 향해서 저! 제오천 도솔천인게. 극락세계(極樂世界) 가 버리면은, 극락세계 가서 넨장! 몇천만 겁을 나오도 않고 말 것이여 고대로? 속히 또 나와서 사바세계 우리 모도 인연(因緣) 중생을 제도(濟度)해야지. 고렇게 똑 해 주십시오.
내가 여다가 이렇게 해 놓고—다른 데야 허든 말든, 내 여그서 딱 작정을 해 놨습니다. 작정해 가지고는 고대로 꼭 해 나가니까. 그래 가지고 나, 또 용주사도 중앙선원이라 해서 거그도 “그렇게 해라!” 거그도 그렇게 합니다. 나! 다른 디야, 내가 관계없는 디야 내가 뭣 헐라고 내 말 비방허고 안 들을 턴디 뭣 헐라고 그렇게 헐 것이여. 안 혀. 여, 장삼(長衫)도 이렇게 맨들아서, 예복 장삼 간단허게 맨들아서 이렇게 떡 입고. 여그서만 내 입지, 다른 데 나가서 입으라고 안 허거든. 여그 딱 대중이 걸어 놨다가 요렇게 똑 허고 그럽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안 가르켜 논 짓을 내가 혀? 거, 외도(外道)라고?
부처님 꼭 고대로 해논 대로 내가 딱 해 논 것입니다.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 하생경(下生經) 보시란 말씀이여. 거기에 어떻게 해 놨는가. 십선봉행을 허면은 도솔천 내원궁으로 가는 것과 도솔천 내원궁에 불과(佛果) 증(證)해 가지고 미륵회상에 오는 것과. 환혀! 그런디 요새 모도 사교(邪敎)라는 것은 ‘곧 미륵님이 나오신다. 명년에 나오신다, 우명년(又明年)에 나오신다’ 요렇게 잡아 꾀이여. 어디 그건가?
이거 이대로, 부처님께서 미래불(未來佛) 그대로 다 설해서 수기(受記) 주어서 해 놓은 미륵회상을 내가, 다 미륵상생 하생경을 보고 내가 이렇게 딱 했지, 벌로 내가 이렇게 해 논 줄 아십니까? 꼭 우리 화두학자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 사상사(事象事) 그까짓 소용 있나? 참선허면 그만이제” 그러지 말란 말씀이여. 그래서는 안 됩니다.
화두, 화두... 여까장 내가 그랬는데. 되아서 그만허고 내려가야써.
이렇게만 화두를 잡드리헐 것 같으면 극일지공(剋日之功)이, 날로 허는 공(功)이 만무일실(萬無一失)이다. 조금도 실(失)이 없다. 잃어진 법이 없어. 꼭! 화두 의심만 찾어라.
의심이 아니면은 그 모든 중생의 번뇌 망상을 태워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일체 번뇌 망상을 화두가 태워 버리는 법이고, 일체 티끌 우주 삼라만상, 초목 총림 다 태우는 건 불이 태우는 것인데, 불 그놈이 일체 냉기 초목 총림 산하대지를 막 다 태워 버린 뒤에는 불도 없네. 불 자체도 없어. 그놈으로 인해서 불이 있다가 냉기 다 타 버리면 불도 없네. 그걸 연소화멸(煙消火滅)이라 그려. 연소(煙消), 연기도 없어지고 불도 멸해 버리고 냉기 다 타 버리고 없어.
우리 화두도 화두 고놈이 일체 번뇌 망상을 다 태와 버려. 모도 집어생켜 버려! 찌깽이도 없이 다 먹어 버려! 판치생모(板齒生毛), 알 수 없는 의심이! 다 씹어 쌔그라 돌려 없애 버린 뒤에는 화두도 없어. 화두 없어. 번뇌 망상 꽉 맥힌 놈이 화두인디, 화두도 없어. 아! 화두도 없고 번뇌 망상도 없네! 그 지경을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이라 햐. 사람도 없어져 버리고 경계도 없어진 곳이여. 거그서 그대로 근쳐 버리면은 될 것인가?
확철대오허는 공안이, 그걸 깨닫는 공안이 거그 있어! 그래야사 인자 거그에 생사 없는 곳까장 다 봐 버리지.(1시간13분58초~1시간25분13초) (일대기 8호 끝)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습기(習氣 익히다·익숙하다·습관 습/기운·기세·힘 기)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구원겁(久遠劫) ; 아득하게 멀고 오랜 옛날. *냉기 ; ‘나무’의 사투리. *들입대 ; 들입다. 세차게 마구.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이 일을 논하자면, 모기가 쇠로 된 소에 오르는 것과 같아서 다시 이러쿵 저러쿵 묻지 않고 당장에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버리고 한 번 뚫어서 몸으로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런 때 마치 백천만억 향수해(香水海)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취(取)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고갈됨이 없지만, 설사 뜻이 견고하지 않고 마음이 한결같지 않아 아득히 출렁대며 동으로 날고 서로 날다가 설사 네가 날아서 비비상천에 이른다하더라도 여전히 다만 한 마리 굶주린 모기일 뿐이더라.
*영리한(靈利漢) ; 명석한 이해력을 지닌, 두뇌가 민첩한. 또는 그러한 사람. 영리(靈利). 영리(伶利)라고도 한다. 분별에 치우쳐 불도(佛道)로 가는 길에 장애가 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주박(湊泊 모일·항구 주/머무르다·배를 대다 박) ; ‘배가 정박한다’는 뜻. 머뭇거리다. 머무르다. *상량선(商量禪 헤아릴 상/헤아릴 량/좌선 선) ;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상량(商量 : 알음알이, 知解)이다. *일받다 ; ‘일으키다’의 사투리.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해(知解) ; 상량(商量). 알음알이.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심월(心月) ; 마음의 달. 밤의 어둠을 비추는 달처럼 밝고 깨끗하게 닦인 마음으로 실상을 밝게 아는 ‘지혜’를 비유한다. 대상을 비추어보는 마음 자체를 나타내보이기도 한다. *괘명(掛命 걸다 괘/목숨 명) ; ‘목숨 걸고’ *불고(不顧 아니 불/돌아볼 고) ; 돌아보지 않음.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요몸이나따나, 인신(人身) 몸뚱이 얻기 과연 어렵다.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쉽지 못하다’ ; 인신난득(人身難得). *인신난득(人身難得) ;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설찬히 ; 솔찬이. 솔찬히. ‘아주 많이. 상당히. 제법’의 사투리. *벌거지 ; ‘벌레’의 사투리. *연비(蜎飛 장구벌레 연/날 비) ; 날아다니는 작은 벌레. *꺼갱이 ; ‘지렁이’의 사투리. *해치깡 ; ‘수채, 시궁창, 늪, 진흙, 해감’의 사투리. 해초, 해초깡, 해치 등도 같은 뜻의 사투리이다. *수륙공해(水陸空海) ; 물[水]과 육지(陸地)와 바다와 같은 하늘[空海]을 아울러 이르는 말. *‘준동함령(蠢動含靈)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요, 다 불성(佛性)이 있다. 불성은 똑같은 거 아닌가’ ;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모든 중생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고 있다’.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涅槃經)』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역 北涼 天竺三藏 曇無讖 譯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제7권, 4.여래성품(如來性品)④. 佛說中道 一切衆生悉有佛性 煩惱覆故 不知不見 是故應當勤修方便 斷壞煩惱
부처님께서 중도를 말씀하실 때에 「온갖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지만 번뇌가 가려서 알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서 번뇌를 끊어야 한다」 *준동함령(蠢動含靈 꿈틀거릴 준/움직일 동/머금을·품을 함/신령·신령할 령) ; 꿈지럭거리며 움직이는 함령(含靈, 심령心靈을 가지고 있는 것). 모든 생물. 중생(衆生).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 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짐승취 ; 축생취(畜生趣). *육취(六趣) ; 육도(六途, 六道)와 동일.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취(地獄趣), 아귀취(餓鬼趣), 축생취(畜生趣), 아수라취(阿修羅趣), 인간취(人間趣), 천상취(天上趣)가 있다. *취(趣) ; 중생이 번뇌로 말미암아 지은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세계를 말한다. *중음신(中陰身) ; 이 생(生)을 끝내고 다음 생(生)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 상태. 중유(中有) · 중온(中蘊)이라고도 한다. 중음신은 뜻으로 생기고 뜻으로 이루어진 의생신(意生身) 또는 의성신(意成身)이라고도 한다. 중유 또는 중음신의 기간은 불교 부파마다 다르게 설명하지만 보통 49일 동안 중음신의 상태로 머문다고 하여, 절에서 행해지고 있는 사십구재(四十九齋)[또는 칠칠재(7·7재, 七七齋)]는 이 중음신의 기간에서 비롯되었다.
*사유(四有) ; 산스크리트어 catvāro bhavāh. 사유(死有) · 중유(中有) · 생유(生有) · 본유(本有) 등 한 번의 윤회 과정을 넷으로 나눈 것. 유(有)는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 바바(bhava)의 한역어(漢譯語)로 유정중생(有情衆生)의 생존을 뜻한다.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유정중생은 모두 사유(四有)를 갖춘다. 사유 중에서 생유(生有)와 사유(死有)의 기간은 아주 짧은 찰나이지만 중유(中有)와 본유(本有)의 기간은 일정하지 않다.
①사유(死有) : 죽는 찰나를 말한다. ②중유(中有) : 죽어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으로 사유(死有)에서 생유(生有)에 이르는 기간이니 중음(中陰)이라고도 한다. ③생유(生有) : 태어나는 순간, 즉 모태에 탁태(托胎) · 결생(結生)하는 찰나이다. ④본유(本有) : 본시유(本時有) · 전시유(前時有) 등이라고도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으로 생유(生有)로부터 사유(死有)에 이르는 기간이다. *과약(果若) ; 과연(果然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알고 보니 정말로. *난조지상(難遭之想 어려울 난/만날 조/갈 지/생각 상) ;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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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석가(釋迦)라 한다. 뜻으로 번역하여 능인적묵(能仁寂默) 또는 능적(能寂) · 능유(能儒)라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정명(定命) ; ①날 때부터 정하여진 운명. ②전생의 인연에 의하여 정하여진 목숨. 증겁(增劫)과 감겁(減劫)에 의하여 수명에 차이가 있는데, 나이가 팔만 살부터 100년마다 한 살씩 줄어 열 살 까지 줄었다가[減劫], 다시 100년마다 한 살 씩 늘어 팔만 살까지 이른다[增劫]고 한다. *도병겁(刀兵劫) ; 중겁(中劫) 말기에 일어나는 소삼재(小三災)의 하나. 분노로 말미암아 서로 해치려는 마음에서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마다 무기가 되어 서로를 해치고 죽이는 재난이다. 도병겁은 칠일 밤낮 동안 계속되며 인구가 만 여명으로 줄어들어서야 비로소 자비심을 일으켜 끝이 나고 다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도병재(刀兵災) · 도재(刀災) · 도병중간겁(刀兵中間劫)이라고도 한다.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앉은삼재),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삼재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삼재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혼(夢魂) ; 꿈속의 넋. *업신(業身) ; 업(業)의 몸[身]. 육식(六識)—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이 무량겁으로 모든 업을 능히 짓기도 하며, 모든 업을 능히 받기도 하므로 이름을 업신(業身)이라 한다. [참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편찬 | 수덕사 능인선원) 〇사람에게 세 가지 몸이 있으니 첫째는 법신(法身)이요, 둘째는 업신(業身)이요, 셋째는 육신(肉身)이로다. 법신은 불신(佛身)이요, 업신은 곧 귀신(鬼身)이요, 육신은 곧 사람의 색신(色身)이로다. 색신 가운데 업신과 법신이 구족(具足)하여 서로 여의지 않건마는 중생의 업보(業報)가 중하여 다못 업신이 구원겁을 드나들며 사생(四生) 육취(六趣)의 육신(肉身)으로 인하여 모든 악업을 짓도다.(p231)
〇사람에게 법신(法身) · 업신(業身) · 육신(肉身), 세 가지 몸이 있다 하니 어떠한 것이 육신인고?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다. 지(地)는 살이요, 수(水)는 눈물 · 콧물 · 대소변이요, 화(火)는 따뜻한 기운이요, 풍(風)은 콧김 · 입김 · 동정(動靜)이니 이 네 가지를 부모에게서 얻어 육신을 지었다가 명(命)이 다하여 임종을 하매 지(地)는 땅으로 돌아가고, 수(水)는 물로 돌아가고, 화(火)는 불로 돌아가고, 풍(風)은 바람으로 돌아가 사대가 흩어지니 허황(虛荒)하기 일장춘몽(一場春夢)이요, 장마에 두엄 버섯이니라.
어떠한 것이 업신(業身)인고?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이 여섯 가지 식심(識心)이로다. 눈으로 일체 만물을 보아 탐하여 모든 업을 지으며, 귀로 일체 소리를 들어 좋고 언짢은 소견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코로 모든 냄새를 맡아 좋고 언짢은 소견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혀로 모든 음식을 맛보아 좋고 언짢은 소견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몸으로 춥고 더운 분별망상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뜻으로 밉고 어여쁘고 좋고 나쁜 일체 망상(妄想)을 내어 모든 업을 지어, 이 여섯 놈이 무량겁(無量劫)으로 드나들며 모든 업을 능히 짓기도 하며, 모든 업을 능히 받기도 하니, 이러므로 이름을 업신(業身)이라 함이로다.
어떠한 것이 법신(法身)인고? 일찌기 발심하여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여 다생죄업(多生罪業)을 참회하고, 옛 성현의 친절언구(親切言句) 천칠백 화두(話頭) 가운데 자기에게 합당한 화두를 분명히 결택(決擇)하여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중에 모든 망상(妄想)이 적적(寂寂)한 가운데 화두가 성성(惺惺)하여, 들지 아니하되 화두가 스스로 들림이 샘물 흘러가듯 간단(間斷)이 없이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에 이르러, 홀연히 망상 구름이 흩어지고 마음달이 홀로 드러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비추어 그 밝은 빛이 하늘과 땅이 궤멸(潰滅)하여도 이 광명(光明)이 길이 멸하지 아니하며, 이것을 이름하되 불생불멸지도(不生不滅之道)라 하나니라.
이같은 이치를 통달한 사람을 선지식이라 이름하며, 혹 도사(導師)라 이름하며, 혹 보살(菩薩)이라 이름하며, 혹 부처라 이름하나니, 천당(天堂) · 불찰(佛刹)에 임의 자재하여 천상(天上)에 가서 나매 천상 사람을 제도하며, 인간에 나매 인간을 제도함에 이르므로 인천(人天)에 스승이 되며, 사생(四生)에 자비로운 부모가 되는 고로 이 사람의 이름이 조어장부(調御丈夫) · 천인사(天人師) · 불(佛) · 세존(世尊)이로다.(p233~236)
〇누구든지 육신(肉身) · 업신(業身) · 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現像) 그대로가 곧 생사 없는 자리이니라.(p247)
〇꿈이라 하는 것은 업신(業身)의 동작인데, 깨어 있을 때는 생각만으로 헤매다가 잘 때 업신이 제 몸을 나투어 가지고 육신이 하던 행동을 짓는 것이니라.(p257)
〇인생은 자기 업신(自己業身)의 반영(反映)인 이 몽환(夢幻) 세계를 실상(實相)으로 알고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마치 은행나무가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이성(異性)으로 감응(感應)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같으니라.(p266)
〇우리가 느끼는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의 육식(六識)은 장소에 따라 변하고, 때에 따라 흩어지나니,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천류(遷流)하는 육식으로 어찌 인생이 근본 정신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p270)
*무수(無數 없을 무/세다·셈하다·헤아리다 수) ; 헤아릴[數] 수 없음[無]. *일구난설(一口難說 한 일/입 구/어려울 난/말씀 설) ; 내용이 복잡하거나 길어서 한[一] 입[口]으로는 다 설명(說明)하기 어려움[難]. *미륵불(彌勒佛) : [산스크리트어]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 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매하다(昧-- 어두울 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모른다. 어둡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향하처거(向何處去) ; 어디로 갈 것이냐?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축원(祝願)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십악참회(十惡懺悔) ;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10가지 죄—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욕(貪慾), 진에(瞋恚), 사견(邪見)—를 지은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십중대계(十重大戒) ; 대승 불교에서, 보살이 범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열 가지 계율. ①살생, ②도둑질, ③간음, ④거짓말, ⑤술의 구입 및 판매, ⑥보살 및 비구나 비구니의 죄과를 들추어 말함, ⑦자기를 높이고 타인을 비방함, ⑧베푸는 데 인색함, ⑨화내어 타인의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음, ⑩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를 비방함 등을 금하고 있다. *범망경(梵網經) : 이 경은 범어나 파리어(巴利語 pali)로 된 것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기록대로 본다면 본래 61품, 백이십 권 되는 원문을 구마라습이 번역하면서, 그 중 열째 권인 「노사나불이 말씀하신 보살의 심지 계품(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만을 번역하여 상•하 두 권으로 만들었다. 상권에는 심지 법문(心地法門)을 말하였고, 하권에는 보살의 십중대계(十重大戒)와 48 경구죄(輕垢罪)를 말하였는데, 경구죄란 것은 중대한 죄악은 아니나 깨끗하지 못한 허물이 된다는 뜻이다. 보살계는 심지 법문을 주장하는 대승계이며 성계(性戒)이다. 그러므로 이 경은 율부(律部)에 속하지 않고 <화엄경>과 같은 부류에 들게 된다. 이 경을 해석한 글이 많지마는 신라의 대현(大賢)이 지은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 3권과 원효(元曉)의 <사기(私記)> 2권과 의적(義寂)의 <범망경보살계본소(梵網經菩薩戒本疏)> 상•하권 같은 것들이 가장 유명하다. *심지법문(心地法門) ; 마음바탕, 근본 마음자리 법문.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 법문.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어] dharma [팔리어]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 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 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대승계(大乘戒) ; 대승의 보살이 받아 지켜야 할 계율. 보살계라고도 한다. 「범망경」에서 설하는 십중금계(十重禁戒) ·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와 「선계경(善戒經)」에서 설하는 삼취정계(三聚淨戒)등을 말함. 이 삼취정계 안에는 율의계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대승계 속에는 소승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취정계란 ①부처님이 정한 규율을 지킴으로써 악행을 막는 섭률의계(攝律儀戒), ②한걸음 더 나아가 선행을 하는 섭선법계(攝善法戒), ③중생을 교화하고 그 이익을 위해 힘을 다하는 섭중생계(攝衆生戒)를 말한다. *계상(戒相) ; 계(戒)의 상(相). 계율에 대한 생각. 그 계상(戒相)의 청정성, 집착의 여부는 그것을 일으키는 주체에 따라 달라진다. [참고] 『화엄경』 60권본 권10 제14 명법품(明法品)(대정장9. p.460c) 不生持戒相故 於戒無著 是名淸淨尸波羅蜜
계를 지킨다는 상(相)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계에 집착함이 없다. 이것을 청정시바라밀이라 한다.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십선(十善) ; 십악(十惡)을 행하지 않는 일. *십악(十惡) ; 나쁜 과보(果報)를 가져오는 열 가지 악(惡)한 행위. 몸[身]과 말[口]과 생각[뜻, 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십악업(十惡業) · 십불선업(十不善業) · 십악업도(十惡業道) · 십흑악(十黑惡) 등이라고도 한다.
몸[身]으로 짓는 세 가지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淫 삿된 음행. 邪行). 말[口]로 짓는 네 가지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생각[뜻, 意]으로 짓는 세 가지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또는 치암(癡暗 어리석음).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불과(佛果) ; 불인(佛因, 부처님이 되기 위한 인因. 즉 모든 선근공덕善根功德)의 대응어. 불도수행의 결과. 불위(佛位). 부처라고 하는 궁극의 결과. 결과로서 부처로 된 상태. 깨달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어름어름하다 ; ①말이나 행동을 똑똑하게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자꾸 우물쭈물하다. ②일을 대충하고 눈을 속여 넘기다. *젓수다 ; ①궁중에서 ‘잡수다’를 이르던 말. 잡수다-->‘먹다’의 높임말. ②신과 부처님께 소원같은 것을 비는 것. ③(사람이 제사를)차려 올리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장삼(長衫) ; 스님의 웃옷.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를 넓게 만든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 ; 본이름은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 1권. 유송(劉宋)의 저거경성(沮渠京聲) 번역. 세존이 미륵보살에게 12년 뒤에 목숨을 마치면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도솔천의 정경을 묘사한 다음, 도솔천에 왕생하여 미륵보살을 만나기 위한 수행법을 설함.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 1권.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 번역.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 미래에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 후 세 번의 법회에서 설법하여 수많은 중생을 구제한다고 설함. *사교(邪敎 간사할 사/가르칠 교) ; ①부정한 가르침. 외도(外道)의 가르침. ②사회에 해를 끼치는 나쁜 짓을 가르치는 종교. *명년(明年) ; 올해의 바로 다음에 오는 해. *미래불(未來佛) ; ①미래에 나타날 부처님. 특히 미래에 나타날 미륵불(彌勒佛)은 현재 미륵보살로 도솔천에 머물면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계시며,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 후 세 번의 법회에서 설법하여 수많은 중생을 구제한다고 예정되어 있다. ②미래세에 성불(成佛)할 가능성을 가진 중생을 일컫는 말. 일체 중생은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기 때문애, 여러 가지 수행을 통해 미래세에 성불할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중생을 미래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기(受記, 授記) ; 부처가 그 제자들에게 수행하여 얻은 깨달음의 결과로서 언제 어디서 부처가 되리라고 예언함. 또는 그 교설(敎說). *벌로 ; ‘건성으로. 함부로. 멋대로’의 사투리. *사상(事象 일 사/모양 상) ; 관찰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여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물(事物)과 현상(現象).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극일지공(剋日之功 해내다·이루어내다 극/날·해·기한 일/~에·~에 있어서 지/공·공로·공적 공) ; 기한[日] 내에[之] 성취하는[剋] 공(功). *만불실일(萬不失一 일만 만/아니다·아니하다·없다 불/잃다·잘못하다·그르치다·어긋나다 실/한 일) ; 만(萬)에 하나도 그르치지[失 잃지·잘못하지·어긋나지] 아니하다[不]. 만(萬)에 하나도 그르침[失]이 없다[不]. ①조금도 틀림이 없다. ②실수(失手)가 한 번도 없음. [참고] 『고봉선요(高峰禪要)』 ‘시중(示衆 其五)’ (고봉 화상 |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p69~70, 72. 若論此事인댄 如大火聚 烈焰亘天하야 曾無少間이라 世間所有之物을 悉皆投至라도 猶如片雪 點着便消어니 爭容毫末이리오. 若能恁麽提持하면 剋日之功을 萬不失一이어니와 儻不然者인댄 縱經塵劫이라도 徒受勞矣리라
만일 이 일[此事]을 말하자면 마치 큰 불무더기의 맹렬한 불길이 하늘까지 뻗쳐서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는데, 세간의 온갖 물건을 무엇이나 집어 던져도 한 조각의 눈[雪]이 닿자마자 곧 녹아버리는 것과 같나니 어찌 털끝만치인들 딴 생각이 용납되겠는가. 만일 이렇게 화두를 잡드리해 나가면 기한내에 성취하는 공(功)을 만(萬)에 하나도 잃지 않겠지만 만일 그렇게 못한다면 비록 오랜 세월을 경과하여도 고생만 할 뿐이리라.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찌깽이 ; ‘찌꺼기’의 사투리.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 ;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 임제(臨濟)가 세운 네 가지의 학자 제접법인 사료간(四料揀)의 하나. *사료간(四料揀) : 임제(臨濟)가 세운 네 가지의 학자 제접법. 인(人)은 주체로서의 자기(自己). 경(境)은 객관(客觀). 탈(奪)은 부정하는 것.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08. 212. 四料揀(사료간) 奪人不奪境(탈인불탈경)은 待下根(대하근)이요 奪境不奪人(탈경불탈인)은 待中根(대중근)이요 人境兩俱奪(인경양구탈)은 待上根(대상근)이요 人境俱不奪(인경구불탈)은 待出格人(대출격인)이라.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은 하등 근기들을 다루는 법이고,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은 중등 근기들을 다루는 법이며,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은 상등 근기를 다루는 법이고,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지 않는 것은 ‘격 밖의 사람[出格人]’을 다루는 법이다.
*‘생사 없는 곳까장’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산스크리트어]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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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화두드는 법)(No.414)—무자 화두 | 불급불완(不急不緩)한 묘한 관, 의심관(疑心觀) | 무자(無字)를 드는데 두 가지, 단제(單提), 전제(全提) | 전강선사와 산승의 공부 지도 방법은, 처음에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되 처음에는 수식관(數息觀)으로부터 들어가 가지고 나중에 수식관이 잘되면은 그다음에 전제(全提)로 공부를 해 나가라.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10분41초)
[법문] 송담스님(No.414)—1990년 4월 첫째 일요법회(용414)
이 화두,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화두를 하시는 데에 무(無) 자를 ‘어째서 무자(無字)라고 했는고?’ ‘어째서 무자(無字)라고 했는고?’ 아주 뭐, 두 주먹을 부릅쥐고 무릎 위에다가 탁! 놓고는 아침부터서 점심, 점심부터 저녁, 저녁부터서 뭐 밤에 잠도 주무시지도 않고 그냥.
그러다가 예불(禮佛) 시간에 예불을 하시면 “지심귀명례...” 하고 엎드려 가지고는 “삼계대사 사생자부...” 떠억 그냥 엎드려서 잠이 들어 버렸어. “시아본사...” 해도 다 일어나는데 안 일어나시고 엎드린 채 예불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쿡쿡 찌르면서 “일어나라”고 하니까 입승(立繩) 스님이 “그거 놔두라”고. “밤잠 안 자고 정진(精進)하다가 엎드려 있는데 잠시 좀 자게 놔두라”고.
처음에는 수군덕거리고 욕하고 뭐 빈정대고, 그렇지만 한 달, 두 달을 열심히 한결같이 나가니까 대중(大衆)이 모다 ‘보통 애가 아니구나!’ 대중 가운데 그 어린 사람이 그렇게 공부한 것을 보고 모두 몇 사람이 따라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나름대로 모다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그랬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하고 화두를 의심한 것은 대단히 좋은데, 조실 스님께서는 그 불급불완(不急不緩)한 묘한 관으로, 의심관(疑心觀)으로 해 가는 것을 모르셨어. 어려서 워낙 발심(發心)을 철저히 해 놓고 분심(憤心)이 솟구쳐 오르니까 목숨을 바쳐서 거기에다 아주 용맹스럽게 해 나가실중만 알으셨지, 불급불완한 묘(妙)한 의관으로 해 나가는 것을 그걸 누가 선배가 있어서 그것을 일러주셨으면 되었을텐데 그걸 못하셨어.
『몽산법어(蒙山法語)』에 보면은 무자(無字)를 드는데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단제(單提), 그냥 ‘무~~’ 하고 아무 일체 다른 말은 없이 ‘무~’만을 항상 들여다보는 거여. 조주 스님이 ‘무’ 했으니까 ‘무~’만 들여다보는 거여. 숨을 들어마시다 내쉬면서 ‘무~’ ‘어째서 무라 했는고’ 그런 게 아니여, 그냥 ‘무~’만 들여다보는 이것을 단제(單提)라고 그러고.
전제(全提)는 ‘어째서 무라고 했는가?’ ‘조주 스님은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이렇게 의심을 하는 거 이것은 전제인데, ‘무~’ 하고 단제로 하는 데에도 장단점이 있고, 전제로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하는 데에도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러면 ‘무~’ 하는 데는 무슨 장점이 있느냐 하면,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하고 (전제로) 자꾸 하다 보면 성질이 급한 체질을 가진 사람은 너무 되게 몰아대다가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고, 생각이 끊어지질 않아. 점점 어지러운 생각, 복잡한 생각이 막 일어나거든. 그냥 ‘무~’ 하면 이 생각 저 생각 그런 복잡한 생각은 일어나지 아니한데 의심(疑心)이 없어. 의심이 없으면 깨닫지 못하거든. 「의심이 작으면 작게 깨닫고, 의심이 크면 크게 깨닫고, 의심이 없으면 깨닫지 못한다」 그랬어.
그런데 ‘무~’ 하고 무(無)만 항상 들여다보면 이 생각 저 생각 복잡한 생각은 일어나지 않고 조용해지고 좋기는 좋은데, 까딱하면은 너무 조용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혼침(昏沈)에 빠질 우려가 있고 무기(無記)에 떨어지거든. 무기에 떨어지면 아무리 고요하고 편안하고 맑고 좋다 해도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는 거여.
그러면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고 의심이 있어야 하는데,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큰 의심이 있어야 크게 깨닫는다」 그랬으니 ‘처음부터서 크게 의심을 해야겠다’ 해 가지고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고서 ‘어째서 무라 했는고?’ 아주 여기다가(미간에다) 그냥 '내 천(川)' 자를 쓰고서 막 몰아대면 영락없이 피가 넘어오고, 상기(上氣)가 되어 가지고 눈알이 튀겨져 나올려고 하고 골이 벌어질라 그러고 목이 뻗뻗해져. 이뭣고? ‘이‘ 소리만 하면 벌써 골치부터 아퍼지기 시작하는 거여.
그러니 몽산(蒙山) 스님은 처음에는 단제로 ‘무~’ ‘무~’ 하고 무만 자꾸 들어서 그래 순일(純一)해져. 순숙(純熟)해져서, 인자 순숙해진 다음에 2단계에 나아가서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고 의심을 든다면, 전제로 한다면 이것이 가장 단제와 전제를 효율적으로 활용을 해서 폐단 없이 깨달음에 나아가는 수행을 할 수가 있다. 몽산어록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 하고 무(無) 자만 바라만 보도록 그렇게 하라고는 전강 조실 스님도 가르키시지를 않았고 또 산승(山僧)도 그렇게 공부를 하라고는 한 번도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그 대신 처음에는 단제 전제 할 것 없이, 처음에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 하는 법을 잘 자세를 익히고 그다음에는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해서 그 단전호흡이 잘 되도록 그렇게 익힌 다음에,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렇게 하라고 지도를 해 왔습니다.
이렇게 해 가면 몽산 스님이 염려하시는 단제와 전제의 장단점이 잘 융합된 효율적인 정진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단전호흡을 잘 익히고, 단전호흡을 하되 처음에는 수식관(數息觀)으로부터 들어가 가지고 나중에 수식관이 잘되면은 그다음에 전제(全提)로 공부를 해 나가되 별 탈이 없으리라고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조실 스님께서도 단제(單提)에 대한 것은 말씀을 하시지 않고, 전제(全提)를 하도록 많은 설법을 하셨고, 산승도 역시 조실 스님의 뜻을 따라서 그렇게 말씀을 해 왔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처음에 전제로 공부를 하시되 너무 힘을 써 가지고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병이 나셨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실 스님께서도 항상 단전호흡에 대한 법문을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아마 이 자리에는 앞으로 여름 안거를 위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갈려고 하는 수좌(首座)님들이 몇 분인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따로 내가 만나서 화두를 일러드림사 좋지마는 그러한 시간이 없으니 이 법상(法床)에서 이렇게 말씀을 한 것을 잘 명심해서 듣고, 그렇게 해서 화두를 탄 걸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선방에 가서 정진을 잘하기를 바래고.
또 여기에 참석하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들도 새로 오신 분이나, 오래 전부터서 이 법문(法門)을 들으시고 공부를 하신 분이나, 오늘 이 조실 스님의 법문이나 또는 산승의 말씀은 앞으로 공부해 나가는 데에도 잘 명심해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51분42초~62분12초)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전강대종사 법어집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가 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 · 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禮拜)하는 의식.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 (가로판 p116) 禮拜者는 敬也며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
예배라 하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며 '굴복하는 것'이니,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니라.
(註解) 身口意가 淸淨하면 則佛出世니라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것이니라.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대중(大衆)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mahā-samgha, mahā-sabhā. 음역하면 마하승가(摩訶僧伽)이다. 많은 사람의 모임이란 뜻으로 참선 수도하는 스님들의 모임 또는 일반적으로 법문을 청하여 듣는 사부대중(四部大衆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을 일컫는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불급불완(不急不緩 아닐 불/급할 급/아닐 불/느릴 완) ;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조실 스님께서는 그 불급불완(不急不緩)한 묘(妙)한 관으로, 의심관(疑心觀)으로 해 가는 것을 모르셨어’ ; 묘관(妙觀). 묘한 관(觀).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 불급불완(不急不緩), 너무 급하고 조급하게도 하지 말고 너무 늘어져 처지지도 말게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1987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음)(5분59초)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 말이여.
[참고 ❷]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57초)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몽산법어(蒙山法語) ; 중국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참고]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몽산법어』는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데에 관한 법문(法門)만을 수록한 법어집입니다. 여러분이 이 『몽산법어』 서문(序文)을 읽어보시면 이 책이 어떠한 책이며, 얼마나 공부해 나가는 데 요긴한 책인가를 아실 수가 있고. 그리고 이 몽산법어를 한 구절씩—여러분은 선지식(善知識)을 항상 만나 뵙기가 어려우니까 공부하다가 가끔 법문을 듣고 싶으면, 이 몽산법어를 한 편씩을 보시면 선지식 법문 들은 거와 같아서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또 의정(疑情)이 돈발을 해서 참선이 잘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몽산법어> 총 68편의 동영상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몽산법어'에도 자세한 용어풀이와 함께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단제(單提) ;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단제(單提)는 그냥 ‘무~’ 하고, 의심을 붙이지 않고 아무 일체 다른 말은 없이 ‘무~’만을 관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No.423)—1990년(경오년) 하안거해제 및 8월 첫째일요법회(편집 정리)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단제(單提)는 그냥 ‘무~’ 하고 아무 일체 다른 말은 없이 ‘무~’를 관하는 것. 단제는 무자(無字)를 하는데 생각을 한군데다 집중하는 데에는 좋은 이익이 있는데, 까딱하면 ‘무(無)~~’ 그놈만 들여다보다가 스르르르 혼침(昏沈)에 빠지기가 쉽다. 그리고 혹 오신통(五神通)은 날른지는 모르나, 확철대오는 할 수가 없다. 누진통(漏盡通)은 할 수가 없다.
전제(全提)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전제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간절히 의심을 들다보면 의심을 들어서 정신을 성성(惺惺)하게 하는 데에는 대단히 좋으나, 성성(惺惺)한 가운데에도 적적(寂寂)하고, 성성하면서도 적적하도록 참구(參究)하는 묘리(妙理)를 얻지 못하면은 공연히 생각이 어지러워. 적적하게 들어가지를 못하고 비교적 성성하기는 하는데 생각이 이렇게 고요해지지를 못하는 흠집이 있어. 그래 가지고 좀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하고 의심을 아주 힘을 써서 간절히 간절히 하다 보면 상기(上氣)가 되는 폐단이 있고, 골치가 아파지는 폐단도 있다.
그리고 화두가 의심이 자꾸 끊어져. 잠깐 들으면 있다가 또 끊어지고 또 끊어지고 자꾸 이렇게 단절이 되면, 그때는 근제(勤提)를 하라. ‘부지런할 근(勤)’ 자, 자주자주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라. 그래서 몽산 스님은 이 단제(單提)와 전제(全提)를 초학자의 단계에서는 단제로 해 가지고, 기초가 이루어져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된 다음에는 전제(全提)로써 화두를 잘 거각(擧却)해 나가라.
생각 생각이 화두를 들고, 또 금강과 같은 그 금강지(金剛志), 견고한 뜻을 분(奮)내서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되도록 그렇게 해서 항상 행주좌와 간에 회광반조(廻光返照)하고 살피고 또 살펴서, 혼침(昏沈)이 오면은 전제(全提)를 하고, 산란심(散亂心)이 일어나면 단제(單提)를 하고, 간단(間斷) 자꾸 생각이 끊어지고 화두가 순일하게 연속이 안 될 때에는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서[勤提], 일구월심해서 밀밀면면(密密綿綿)하고 면면밀밀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면 그 순수무잡한 의단(疑團)이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면 수질각차(手跌脚蹉) 해서, 어떠한 찰나에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많은 도인들이 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도업(道業)을 성취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잡드리해 나간다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만 명이면 만 명 다 틀림이 없이 다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조주(趙州) : (778 – 897) 이름은 종심(從諗)이고 속성은 학(郝)씨인데, 산동성(山東省) 조주부(曹州府)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南泉) 보원선사(普願禪師)의 법을 받고, 그 문하에서 20년 동안 있었다. 80세까지 각처로 돌아다니다가(行脚) 비로소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서 학자들을 제접(提接)하기 40년. 당나라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 120세에 입적하였다. <어록(語錄)> 3권이 남았고, 그의 교화가 참으로 커서 「조주 고불(趙州古佛)」이라고 일컬었다. *전제(全提) ; 전(全) 부분이 들고 일어남(全分提起)의 뜻. 본래 그대로 나타냄. 전부를 그대로 나타내 보임.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전제(全提)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의심이 작으면 작게 깨닫고, 의심이 크면 크게 깨닫고, 의심이 없으면 깨닫지 못한다’ ; 대의대오(大疑大悟) 소의소오(小疑小悟) 불의불오(不疑不悟).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이 없으면 깨닫지 못한다. [참고] 『박산화상참선경어(博山和尙參禪警語)』 (成正 集) <卍續藏 第63冊 No.1257> '시초심주공부경어(示初心做工夫警語)'에서. 做工夫 貴在起疑情 何謂疑情 如生不知何來 不得不疑來處 死不知何去 不得不疑去處 生死關竅不破 則疑情頓發 結在眉睫上 放亦不下 趁亦不去 忽朝樸破疑團 生死二字是甚麼閑家具 噁 古德云 大疑大悟 小疑小悟 不疑不悟
공부를 짓되 귀한 것이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데에 있으니 무엇을 일러 의정이라 하는고? 태어나되 어디서 온 줄을 모를진댄 온 곳을 의심치 않을 수 없고, 죽되 어디로 가는지 모르건댄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나니라. 생사(生死)의 관문을 깨뜨리지 못한 즉 의정이 몰록 일어나리니, 눈썹 위에 맺어 두어 놓을래야 놓을 수 없고 쫓아도 가지 아니하야 홀연 하루아침에 의심덩어리[疑團]를 깨뜨리면, 생사 두 글자가 이 무슨 부질없는 것일까 보냐? 엑[噁] ! 고덕(古德)이 말씀하시기를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무기(無記) : [산스크리트어] Avyaksita.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대의지하(大疑之下) 필유대오(必有大悟) ;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 [참고 ❶] 『몽산법어』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p52-53. (가로판 p53) 當於本參公案上(당어본참공안상)에 有疑(유의)호리니 大疑之下(대의지하)에 必有大悟(필유대오)하리니 千疑萬疑(천의만의)를 倂作一疑(병작일의)하야 於本參上(어본참상)에 取辦(취판)호리라 若不疑言句(약불의언구)가 是爲大病(시위대병)이니라 仍要盡捨諸緣(잉요진사제연)하고 於四威儀內(어사위의내)와 二六時中(이륙시중)에 單單提箇話頭(단단제개화두)하야 廻光自看(회광자간)호리라
반드시 본참공안상에 의정(疑情)을 두리니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으리니, 천의만의(千疑萬疑)를 아울러 한 의심을 지어서 본참상에 판단할지니라. 만약 언구(言句,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큰 병이니라. 반드시 모든 인연을 다 버리고 사위의(四威儀)와 열두 때 가운데에 다만 화두를 잡아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볼지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이뭣고? ;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몽산(蒙山) : 남송과 원(元)대의 임제종 양기파 스님, (1231 ~ 1298 또는 1308) 이름은 덕이(德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 시양 고안현(時陽高安縣)에서 났다. 그 고향 시양이 당나라 때에는 균주(筠州)였기 때문에 고균(古筠) 비구라고 한 일도 있었고, 여릉도 몽산에 있었으므로 몽산 화상이라 하며,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있었으므로 전산 화상이라기도 하고, 휴휴암(休休庵)에 있었으므로 휴휴암주라기도 하였다. 고산(鼓山)의 완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의 법을 이었다。그의 교화한 시기는 원나라 세조(世祖)때이며, 우리 고려의 충렬왕 때이다。그래서 고려의 고승들과 문필의 거래가 많았고, 그의 저서 가운데 <법어약록(法語略錄)> <수심결(修心訣)>등은 이조 중엽에 있어 우리 글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순일(純一)하다 ; 다른 것과의 섞임이 없이 순수하다.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〇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수식관(數息觀) ; (산스크리트어) ānāpāna-smrti (팔리어) ānāpāna-sati 출입하는 숨을 세어서 마음을 통일하는 것. 그것에 의해 마음의 산란을 막음. 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법. 염입출식(念入出息) · 식념관(息念觀) · 지식념(持息念) 등이라고도 한다.
음사어(音寫語)로 아나반나삼매(阿那般那三昧) · 아나파다념(阿那波那念) ·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 안반(安般) · 안반념(安般念) · 안반관법(安般觀法) · 안반수의(安般守意) 등이라고도 한다.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은 이 수식관을 집중적으로 설한 경전이다. 수식관에 제시된 기초적 관법은 사념처(四念處)에서 간화선(看話禪)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행법의 저변에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여름 안거 ; 하안거(夏安居).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방부(房付 방·거처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선실(禪室)과 같은 말. ②선원(禪院). ③‘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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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의심(No.151)—참선 공부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라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 |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하는 법이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의 종교. 최상승법은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 데부터서 시작을 해야 |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의 길로 돌아서는 것.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 생사해탈 묘법(妙法) | 사바세계라 하는 것은 원래가 믿지 못할 곳. 즐거운 것, 건강한 것도 잠시.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중생 | 참선법은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 |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 | (게송)山光水色裡~.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3) 17분 5초.
(2/3) 12분 34초.
(3/3) 14분 4초.
[법문]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1/3)----------------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여. 이 공부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은 누구라도 하면 되는 것이고, 또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 '참선, 참선' 요새 굉장히 그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불법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이 참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참선이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그러면 참선을 내가 직접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에 가서 참선을 지도를 받을 것인가? 어떻게 참선을 해야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 부딪히면 망연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와서 책을 사 봐도 잘 모르겠고, 어떤 스님을 만나서 물어봐도 확실하지를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앉아서 몇 달, 몇 해씩을 해 봤지만, 이것이 옳게 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참선은 참 어려운 것이다. 여간해서는 참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 결론에 도달해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 그런 거사님이나 보살님도 더러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참선은 제일, 불법 가운데에 제일 높은 수행 방법이면서 제일 쉬운 것입니다. 실지로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 가서 배워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사실 내용에 있어서는 가장 쉬운 것이고 간단한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법(佛法)에 이 참선(參禪)이 없으면 쌀에 알맹이를 빼내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광석 속에 금덩어리를 빼내 버린 광석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에 있어서 참선이라고 하는 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이 없다면 불교는 한낱 다른 종교와 별로 특수하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의 종교가 된 원인인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종교라 하기보다는 사람으로서 참사람이 되는 바른길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유교나 그밖에 종교에 있어서 '착한 일을 해라, 윤리 도덕을 지켜라, 바르게 살아라' 그러한 내용의 교리가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역시 다 그런 내용에 말씀도 참 많지만, 다맛 그런 것에 그쳐 버린다면 불교에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과 똑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데에 그 특수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인은 "그러면 석가여래 부처님은 사람이냐? 뭣이냐?" "아, 그 사람이다"
"아하! 그러면 부처라 하는 것이 별로 별것이 아니로군요" "왜 그리야?"
"깨달라 봤자 사람이라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느냐"고, 이렇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 성현 가운데에 성현이 되셨다. 진리와 하나가 되셨다' 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더 부처님을 존경하게 되는데. 우리도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부처님께서 전(傳)하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면, 목숨 바쳐서 도를 닦으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 불자(佛子)가 맨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말세(末世)에 태어난 죄 많은 중생이 머리도 나쁘고, 지식도 없고, 몸도 건강틀 못하고, 여자로 태어났고, 우리 같은 사람이 참선을 한들 무슨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겠는가? 그저 금생에는 참선이 좋다 그러고, 선방 토방에 신발만 벗어 놔도 그 공덕으로 지옥에는 안 떨어진다고 그러니 금생에는 인연이나 맺으리라' 이러한 지나치게 겸손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최상승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대뜸 처음부터 '나도 견성성불할 수 있다,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나도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 데부터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고 대든 것하고, 벌써 처음부터서 안 될 줄 알고 하는 것과는 그 결과적으로 결과에 나타난 것은 하늘과 땅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참선법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할 때에도 '된다'고 믿고, 된다고 믿어지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안 될 줄 알고, 실패할 줄 알고, 심심풀이로 시험 삼아서 해 갖고 그 일이 백(百)에 하나도 성공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범부(凡夫)를 고쳐서 성현(聖賢)을 맨드는 이 공부를 목숨을 바쳐서 해도 어려웁고 어려울 텐데. 처음부터 안 될 것을 알고, 안 될 폭을 대고, 미리서부터서 넘어질 자리부터 보고 씨름을 하려고 하는 사람과 같애서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나도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 그것이 서면 공부는 절반은 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꼭! 성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떠한 보물이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을려고 할 때에는 혹 찾어지기도 하고, 혹 안 찾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마치 내 호주머니 속에 있는 어떤 물건을 찾은 거와 같애서 그 호주머니 속에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믿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성취를 할 수가 있다고 단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 '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의 마음, 사람 사람이 다 '마음' 소리를 다 하고, '마음'이라는 것을 다 그 말을 알고 있지만, 사실 그 마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을 본격적으로 그 마음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은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단 일 초 동안도 우리로부터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이지만,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은 모냥이 없는 것이고, 형상이 없는 것이라 분명히 거기 있는데 찾으면 알 길이 없는 것이고, 보이지를 아니하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두 손을 이리저리 내저어서 더듬어 봤자 그 마음은 잡히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지만, 모든 것을 보는 그 자체를 볼려고 하면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눈을 통해서 볼 때 거기에 있었는데, 그 보는 그놈을 돌이켜서 다시 볼려고 하면 자취가 없습니다. 여기에 깨닫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웁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한 말을 과거에도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건 깨달음을 100프로 숨김없이 다 표현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지식, 도인(道人)들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선지식 말 한마디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린 분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냐? 여지없이 믿어 버렸기 때문에, 믿으면 말 한마디에 끝나는 까닭인 것입니다.
설사 한마디 말 한마디에 깨닫지를 못한다 하더라도 화두(話頭) 한마디를 받아 가지고, 여지없이 앞도 생각하지 않고, 뒤도 생각하지 않고, 옆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그 한마디 화두만을 의심(疑心), 의관(疑觀) 참구(參究)해 가면 조끔도 깨달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오직 이 한마디 의심뿐인 것입니다.
이 한마디의 의심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해 버리고, '부처님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깨닫게 해 준다' 해도 솔깃하지 아니하고, '염라대왕이 와서 끌어간다' 해도 조끔도 두려운 생각도 없고, 다못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한 앞에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염라대왕이 쇠사슬을 가지고 옥졸이 와서 묶어간다 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되어 버린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최상승법이 어려웁고도 쉬웁고, 쉬우면서 어려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판치생모' 화두뿐만이 아니라 '무자(無字)‘ 화두를 한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시삼마(是甚麼) '이뭣고?' 화두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차를 탈 때도, 속이 상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다못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16분5초~33분10초)
(2/3)----------------
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잠시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한 때가 없습니다. 눈으로 볼 때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일어나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일어나고, 혀로 음식을 맛볼 때 일어나고, 말할 때 일어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에 잠시도 생각이 안 일어날 때가 없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이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원인이 되는 것이여.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話頭)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고,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이여.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을 조끔도 성화 댈 필요가 없어. 무슨 망상이건 상관이 없어. 일어났다 하면 퍼뜩 '이뭣고?'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천 번 일어나면 천 번.
백정(白丁)이 소를 때려잡을려고 도끼를 쳐들다가도 '이뭣고?'해 가지고 확철대오한 광액도아(廣額屠兒)라고 하는 도사가 있습니다. 백정이 소를 때려잡기 위해서 도끼를 쳐들 그 찰나에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 그밖에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이 많으니까 공부를 못한다. 복잡해서 공부를 못한다. 장사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으로 핑계 대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은 기본자세가 있어서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떠억 정진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자세고, 그럴만한 시간이 있고, 그럴만한 장소가 있으면 기본자세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시간과 장소가 없다고 해서 시간이 흘러가지 아니한 것이 아니고, 생사가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고 기달려 주는 것이 아닐 바에는, 우리는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할 수는 없는 것이여. 일이 바빠서 참선을 안 하다가 지옥에 왔다고 해서 염라대왕이 조끔도 사정을 봐주지는 않습니다.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이 다 그것이 내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업(罪業)으로 인해서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는데, 그러한 상황을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하면 내생에는 더 고약한 환경에 태어날 것이요, 까딱하면 사람으로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축생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 뻔한데,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일수록에 더 발심(發心)을 해야 하고, 더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 놓여진 사람은 우선 아무 고통이 없으니까, '참선이 무슨, 불법이 뭐, 나한테는 상관이 없다. 그냥 이대로 나쁜 짓 안 하고 살아가면 되었지 무슨 불교가 필요하냐? 뭐 참선 이까짓 것 필요...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심심하면 텔레비젼도 보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서 테니스도 치고, 등산도 하고, 아 이렇게 살면 족하지. 뭐 그렇게 앉어서 무릎 아프고, 허리 아프게 앉어서 무슨 참선을 하고...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런 부질없는 지서리를 할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참선을 하라'고 하면 '쯧, 스님네들이나 하시지' 삐긋이 웃고 남의 일—자기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아주 자신이 만만한 그러한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그분도 역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사람이라 다행히 전생에 조끔 복 지은 것이 있어서 그놈 꽂감 빼 먹듯이 빼 먹느라고 별걱정이 없지만, 그 꽂감 몇 접 사다 논 것이 있기로서니 한 개 두 개 빼 먹다 보면 줄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놈이 바닥이 나면 몸이 아프게 되기도 하고, 엊그제까지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간경화증, 동맥경화증, 무슨 암, 무슨 당뇨병, 그러한 진단만 나왔다 하면, 어제의 그 쟁쟁 당당하던 그 용기가 간 곳이 없고, 그 많은 재산도 싫고, 명예 권리도 싫고, 아무 정황이 없다 그 말이여. 사업이 잘되어 갈 때는 큰소리치다가 사업이 벌써 기울어져 가지고 여기서 부도가 툭! 터지고, 저그 터지고 하면 아무 정황이 없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 죽게 되거나 하면 또 정신을 못 채려.
이 사바세계라 하는 것은 원래가 그렇게 믿지 못할 곳인 것입니다.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일 초 일 초가 지내서 한 시간이 지내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내서 하루가 지내고, 하루하루가 지내서 일 년이 지내고, 일 년 일 년이 지내다 보면 벌써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아프고. 그래도 잘 타고난 사람은 환갑도 넘기고 칠십도 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뱃속에서도 죽고, 낳다가도 죽고, 두 살 세 살에도 죽고, 10살 20살에도 죽고, 30~40에 막 재미있게 살 만하다가 턱 꺼꾸러지고. '인생이 무상(無常)하다' 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죽은 것은 보고 '무상하다'고 하면서, 자기 앞에 무상함이 돌아 닥쳐오고 있다고 하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 이것이 바로 '어리석다'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탓으로 해서 우리는 윤회(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이것을 '지혜(智慧)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여.
지혜, 부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지혜(智慧)의 눈을 뜬 범부(凡夫)이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과 부처님의 차이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의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신다면, 그동안에 참선을 하신 분은 정말 오늘부터서는 단 일 초 동안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정말 착실하게 정진을 하시게 될 것이고, 그동안에 참선을 본격적으로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고 '차츰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집이라도 하나 장만해 놓고 그때부터서 하리라. 나이 좀 먹거든 하리라' 이러한 뒤로 미루신 그런 분도 오늘부터서는 착실히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특별한 의식이 있고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의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여. 불경(佛經) 책을 많이 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여, 아직 불경을 한 권도 읽지 아니했어도 상관이 없어. '나모라 다나다라' 염불(念佛) 한마디도 외우지 못해도 그것도 상관이 없어.
다못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 되는 거여.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서 올바르게 이해를 했다면 바로 '이뭣고? 해야겄다. 이뭣고? 해라' 그 말 한마디로 요약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경을 수십 권을 다 읽었어도 '이뭣고?'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경 잘못 읽은 사람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법을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소승법이 있고, 대승법이 있고, 그 위에 최상승법이 있는데, 이 참선법이 바로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33분11초~45분4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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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최상승법은 날마다 해 가지고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법이여. '저는 참선을 한 지가 3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정말... (녹음 끊김) 뭣헌 사람은 "공부를 하면 뭣이 흰옷 입은 것이 휙 지내가고 무슨.. 뭣이 부처님이 나와서 뭣을 주어서 받으려고 하니까 없어져 버리고 그랬다"고. 아주 자기가 공부를 잘한 것처럼 또 "부처님이 뭣을 줘서 그놈을 먹으니까 시원하니 아주 배창시까지 아주 얼음을 먹은 거 같이 그렇게 시원하고 좋더라"고, "이거 내가 도통한 거 아니냐" 그 말을 앉은 자리마다 이 새로 들어온 신도들한테 얘기를 해 가지고 자기는 아주 공부를 잘한 것처럼 으시대고 "이 소리는 누구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가지고는 그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뭣이, 뭐이 나와 가지고 무슨 뭘 줄까 하고, 밤낮 눈을 감고 몸부림을 쳐도 아무도 안 준다"고, "내가 공부를 잘못한 것이 아니냐" "아니 그 소리를 어디서 들었냐?" 헌께 "자기가 그랬단 말 하지 말라고 하드라"고.
세상에 그분이 퍽 점잖은 분이고, 불교를 아주—소시(少時) 때부터 과부가 되어 가지고, 소시 때부터 삼사십 년간을 참선을 한 분인데, 세상에 그러한 요물 같은, 요사스런 삿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여. 그 틈틈이 경을 읽어 가지고 설법을, 뭐 부처님 경에 있는 얘기를 하는데 어떻게 잘하는지 몰라. 그러다 내가 들어가면 딱! 입이 붙어버려.
참선이라 하는 것은 뭘 아는 것이 아니고, 뭣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여. 무슨 부처님이 나타나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나고 그런 것이 아녀. 혹 참선을 하다 보면 혼침(昏沈)이 들어서 비몽사몽간에 뭣이 혹 보이기도 하고, 그리 아니한 것은 아니나, 그것이 까빡할 동안에 헛것이 보인 것이지, 어찌 그것이 견성(見性)이요 도통(道通)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런 것은 얘기할 거리도 못 되는 것이고, '하아, 내가 이거 도통하려고 이런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도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여.
참선은 '성성(惺惺)하다' 하는 것은 혼침(昏沈)에 떨어지지 아니한 것을 성성하다 그런 거여. 성성하면서도 적적해야 하는 거여. '적적(寂寂)하다'는 것은 산란심(散亂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여.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하면서도 성성한 가운데에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터억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치 칠십 먹은 노인이 과부가 외아들이 저 타관(他官)에 가서 온다고 하는 날짜가 되어도 오지 아니하고 한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두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일 년이 되어도 일자(一字) 서신(書信) 한마디 없이 소식 없을 때,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먼 산에 구름을 봐도 아들 생각, 날아가는 새를 봐도 아들 생각, 떡을 봐도 아들 생각, 밥을 봐도 아들 생각, 맛있는 음식을 봐도 아들 생각, 어떤 청년을 봐도 아들 생각, 자나깨나 아들 생각하듯이 '이뭣고?' 자나깨나 '이뭣고?'
처음에는 잊어버리는 시간이 많지만, 자꾸 챙기고 또 챙기고 하면 그것도 길이 들어서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이 걸어갈 때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밥을 먹을 때도, 차를 탈 때도, 누가 나에게 억울한 소리를 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이렇게 되어 진 때가 꼭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것을 조끔 공부에 공부 길에 들어섰다. 조끔 득력(得力)을 했다. 혹 이렇게는..
그런 것도 '아, 내가 인자 공부가 아주 잘된다' 그것도 뽐낼 것도 되지도 안 혀. 인자 그렇게 되어 가야 인자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되어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고 한결같이 공부를 더 잘 지어 갈뿐이지, 그것도 어디다 뭘 자랑할 것, 그것도 내놓을 것이 아니여.
삿된 소견, 삿된 경계 나타나는 걸 가지고 자랑을 하고, 그렇게 더군다나 또 그런 소리를 듣고 자기도 빨리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앉았다면 어찌 그것을 최상승 학자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하는 공부는 백이면 백하나까지 못쓰게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바른 스승 없이 하면 열심히 할수록 빨리 미치거나, 삿된 지경에 경계에 빠지거나 하는 것이여. 하다 말다 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열심히 할수록 빨리 못쓰게 되는 것이 이 공부여. 그래서 이 공부가 최상승이요, 반드시 해야 하고, 하면 꼭 되는 것이지만 첫째,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바른 스승이, 어떠한 사람이 과연 바른 스승이냐?
'바른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했고, 바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그것이 바른 스승이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려면 자기 자신이 정말 바른 신심(信心)을 가지면 묘(妙)하게 불보살(佛菩薩)의 지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화현(化現)은 이 사바세계에 육도법계(六途法界)에 가뜩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불보살의 화현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도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도 그렇거든 하물며 이 무루법(無漏法), 최상승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서—나, 참나를 찾아야 되는데, 참나는 번뇌 망상, 번뇌 망상을 버리고 찾지 말고, 중생의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癡心) · 오욕락(五欲樂) · 번뇌(煩惱) · 망상(妄想) 바로 거기에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거기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화두를 떠억 챙기면 그것이 공부를 바로 해 들어가는 것이여.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오직 의심(疑心)만을 관(觀)해 나가는 것이여. 망상이 일어나도 그 망상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바로 거기서 '이뭣고?' 이것이 바로 망상을 다스리는 공부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굴복 받는 길이요, 일체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길이여.
산광수색리(山光水色裡)에, 저 산에 푸르른 경치, 햇볕에 반짝거리는 물결, 그 모습이 면목자단적(面目自端的)이여. 면목이 그 면목(面目)의 단적(端的)을 갖다가 나타낸 것이다. 산은 푸르르고 흐르는 물이 반짝이는 그 모습이 바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의 한 모습이다.
욕식개중의(欲識箇中意)인댄, 이 낱 가운데에 참뜻을 알고자 할진대는, 팔냥(八兩)이 시반근(是半斤)이라. 여덟 냥(兩)이 이 반 근(斤)이다. 열엿 냥(兩)이 한 근(斤)인데, 여덟 냥이 반 근이다. 여덟 냥이 반 근?
여기에 이르러서 중생이 사량분별심으로 '아하!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털끝 하나에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겨울 결제까지 두 달 남짓, 춥도 더웁지도 않는 좋은 계절입니다. 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최상승법을 닦는, 참선을 하는 우리 도반(道伴)들은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는,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책(經冊)을 열심히 읽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45분46초~59분50초)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사(居士) ; ①고대 인도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던 부호. ②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자 신도. 출가하지 않고 법명(法名)을 받은 재가(在家)의 남자.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 • 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釋迦)에 대한 존칭. 여래(如來)는 부처님 10호(十號)의 하나로 범어 Tathagata(다타가타)의 역(譯)이다.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토방(土房) ; 방에 들어가는 문 앞에다 약간 높고 편평하게 다져 놓은 흙바닥. 여기에 쪽마루를 놓기도 한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폭을 대다 ; 놓이게 된 형편이나 처지를[폭을] 생각하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
[참고 ❶]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1979.12.22) (7분) 우리는 진묵겁(盡墨劫) 전에 이미 깨달음,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부처님과 조끔도 차별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도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족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한 생각 딱 돌이키면—어디서 깨달음이 오는 것도 아니요, 누가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곳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원만구족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너무나도 간결하고 송곳으로 찌르듯 하는 그러헌 법문을 해 주신 것입니다.
다못 알 수 없는 꽉 맥힌 의심, ‘이 무엇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앉았거나 누웠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죄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괴롭거나 쓰리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프다고 가려 내놓고, 바쁘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잠잘 때라고 가려 내놓고, 속상헌다고 가려 내놓고, 기쁘다고 가려 내놓고, 이리저리 다 가려 내놓으면 언제 공부를 해야 할 때냐? 중생은 단 한 생각 동안이라도 생각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생각 없는 편안하고 고요하고 그러헌 때를 찾어서 공부를 할려고 하면 일생 동안 공부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는 보아야 하고, 귀를 통해서는 들어야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아야 하고, 숨쉬어야 하고, 입을 통해서 맛보고 말을 해야 하고, 손과 몸을 통해서는 따뜻하고 차웁고 딱딱하고 부드러운 거 그런 것을 다 감각을 해야 합니다. 잠시도 육근(六根)을 쉬고 일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나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활동하는 시간을 없이 하고 참선을 헐랴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토록 그 사람이 생각하는 참선은 헐 기약이 없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고 영특해서,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언제나 어디에나 두루하지 아니헌 곳이 없습니다. 그 표현이 바로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요.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진여불성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눈으로 볼 수 없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없고, 손을 통해서 잡을 수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는 깨달라야 합니다.
왜 눈으로 코로 귀로 육식(六識)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진여불성의 표현인데, 어째서 눈으로 볼랴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귀로 들을랴고 하면은 들리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을랴고 하면은 잡히지를 않는 것이냐? 우리는 목숨 바쳐서,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라도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고 법신불(法身佛) 아닌 것이 없건만, 왜 볼려고 허면 볼 수가 없고, 들을려고 허면 들을 수가 없느냐? 우리 모두에게 진묵겁 전부터서 원만구족해 있으면서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냐?
육도법계(六道法界)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시기 때문에 육도(六道)를 여의고 적광토(寂光土)는 따로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뭣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요긴한 길은 오직 이 한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할 때, 불이 펄펄 타오르는 지옥으로 느껴졌던 것이, 한 생각 돌이킨 곳에 바로 그것이 천당이 되고, 극락이 되는 그 묘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 활구참선법 ‘이 무엇고?’ 뿐인 것입니다.(12분14초~19분14초)
혹 말하길, “망심(妄心)을 쉬면 진심(眞心)이 나타난다니, 그렇다면 진심의 체(體)와 용(用)이 이제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하길, “진심묘체(眞心妙體)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다. 영가(永嘉) 스님이 이르시길, ‘당처(當處)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湛然]하나, 찾은 즉은 알거라 그대가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경에 이르시길, ‘허공의 성품인 연고며, 항상 동(動)하지 아니한 연고며, 여래장(如來藏) 중에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연고라’ 하며, 대법안[大法眼文益] 스님이 이르시길, ‘처처가 정각[菩提]의 길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공덕의 총림이라’ 하시니, 이것이 곧 이 마음의 체(體)가 있는 곳이니라.
참마음[眞心]의 미묘한 작용은 감(感)을 따라 나타남이 산골짜기 소리를 응(應)하여 메아리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법등태흠(法燈泰欽) 스님이 이르시길, ‘고금에 마땅히 떨어짐이 없어 분명히 목전(目前)에 있다. 조각구름은 날 저문 골짜기에서 나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에서 내려옴이라’ 하니, 그런 까닭으로 위부(魏府)의 원화엄(元華嚴) 장로가 이르시길, ‘불법(佛法)이 날마다 작용하는 곳[日用處]에 있고, 행주좌와하는 곳[行住坐臥處]에 있으며, 차 마시고 밥 먹는 곳에 있고, 말하고 서로 묻는 곳에 있으며, 짓고 행위를 하나 마음을 들어 생각을 동(動)하면 또 옳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알라. 마음의 본체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여 다 능히 작용을 일으키나니, 다만 인연의 유무(有無)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용(妙用)도 또한 일정하지 않거니와 묘용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마음 닦는 사람은 무위(無爲)의 바다에 들어가 모든 생사를 건너려고 한다면 진심(眞心)의 체(體)와 용(用)이 있는 곳을 미혹하지 말지어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언하대오(言下大悟) ; 말 아래에 크게 깨닫는다. 말(법문) 듣다 깨닫는다. '직하흔번(直下掀飜 바로 뒤집다)'도 같은 뜻의 말이다. *언하(言下) ; [주로 ‘언하에’의 꼴로 쓰여] 말이 떨어진 바로 그때. 또는 말을 하는 그 즉시. [참고] 송담스님(No.157)—전강 조실스님 7주기 추모재(81.12.02.음)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상(平常)에 법문하시기를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말 아래 크게 깨달으라” 하셨습니다. 말은, 꼭 ‘선지식이다’라고 널리 알려진 그분의 말씀만이 말씀이 아니고 바람소리, 차 소리, 새 우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우리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가 불보살의 법문이요 선지식의 법문인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도 불보살의 모습이요, 법문이요, 진리의 표현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얼마만큼 간절히 그리고 철저하게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을 내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 59초)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 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 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 말이여.
[참고 ❷]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 57초)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〇‘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 ; 대오선(待悟禪). *대오선(待悟禪 기다릴 대/깨달을 오/고요할 선) ; 참선하는 데 있어서 깨닫기[悟]를 기다리는 것[待]. 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데 10가지 병(病)의 하나로, 수행자는 이런 생각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참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 법문에서.(2분20초) 참선하는 데 있어서 제일 몹쓸 병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오선(待悟禪), 「어서 깨달랐으면...」 깨닫기를 바래는 그것이 설사 밤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해서 화두가 제법 일여(一如)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찰나간이라도 「어서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와서 탁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애써서 99%까지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저 천길만길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바래는 마음, 「어서 속히 어떠한 목적을 성취했으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 공부가 잘 되어갈수록 「이 무엇고?」 조끔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또 잘 안된다고 번뇌심이나 짜증도 내지를 말고, 오직 한 생각 한 생각, 산을 보든지, 물소리를 듣던지, 새소리를 듣던지, 기차 소리를 듣던지, 애 우는 소리를 듣던지, 문닫는 소리를 듣던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하는 것입니다.(8분32초~10분5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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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윤회(生死輪廻).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동[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罪] 행위[業 : 身口意 三業].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지서리 ; ‘짓거리('짓'을 낮잡아 이르는 말)’의 사투리. *짓 : 몸이나 몸의 일부를 놀려 움직이는 행동이나 행위를 이르는 말.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다맛 ; ‘다만(다른 조건이나 상황과는 관계없이 단지)’의 사투리.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나타낸 말.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❶]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말.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곧 부파 불교(部派佛敎)를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④열등한 능력이나 소질을 갖춘 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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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시 ; ‘창자’의 사투리. *소시(少時 젊을 소/때 시) ; 젊었을 때.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관(他官 다르다·다른 곳 타/마을 관) ; 제가 나서 자란 곳이 아닌 다른 지역이나 고장. *일자(一字) ; ①한 글자라는 뜻으로, 아주 적은 지식을 이르는 말. ②한마디의 글.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도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 [참고 ❶] 송담스님(No.577)—19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열심히만 참선 정진해 가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니까,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루 속에 든 자라, 자기가 아무리 종일토록 버르적거려도 구덕 속에 들어있는 자라는 거기에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아무개야!” “예”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놈을 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거든.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 하여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幻化, 幻과 같은 變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부터 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법(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 있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님이다.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 (4분52초) 〇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루법(無漏法) ; 번뇌를 끝낸 것. 누(漏)는 누설(漏泄)의 준말로 번뇌를 뜻한다.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 상태. 사제(四諦) 가운데 깨달음의 결과인 멸제(滅諦)와 그 원인인 도제(道諦)에 해당하는 모든 현상. 범부의 지혜를 유루지(有漏智)라 하는 데 비하여 도를 이룬 성자의 지혜를 무루지라 한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 (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게송) ‘산광수색리(山光水色裡)~’ ; 『경허집(鏡虛集)』 ‘우음(偶吟 우연히 읊다)’ 게송 참고. *단적(端的 바를 단/과녁·확실할 적) ; ①(명사)곧바르고(기울거나 굽지 아니하고 곧고 바르다) 명백한 것. ②(관형사)곧바르고 명백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 모든 곳에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개중(箇中) ; ①이 낱 가운데 · 이 가운데 · 낱낱 · 하나 하나 · 각각 등의 뜻. 차중(此中) · 개리(箇裏) · 저리(這裏) 등과 같다. '불법(佛法) 중에서' 또는 '이 도리 속에서'라는 뜻이기도 하다. ②개중의(箇中意) · 개중사(箇中事) · 개중소식(箇中消息) 등으로 쓰인다. ③개중인(箇中人)이라고 하면 '저간의 사정 · 도리를 알고 있는 사람' 또는 '불법에 정통한 사람'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말한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 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〇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벌어진다’ [참고] 『신심명(信心銘)』 (삼조三祖 승찬대사僧璨大師)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毫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네. 오직 간택함을 혐의(嫌疑)하니.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없으면 툭 트이어 명백하리라.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벌어지니 도(道)가 현전하기를 바라거든 따름[順]과 거슬림[逆]을 두지 말라.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참선을 하는 우리 도반들은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는,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책(經冊)을 열심히 읽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 [참고] 『운수단가사(雲水壇謌詞)』 (서산대사) 부록(附錄) '거량(擧揚)'에 있는 게송.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내게 한 권의 경(經)이 있으니 종이나 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펴보면 한 글자도 없건만 항상 큰 광명을 놓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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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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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화두드는 법)(No.423)—무자 화두 | (게송)修行須是用心眞~ | 화두를 드는 그 찰나에 마음 길이 끊어져야 |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과 아울러서 단제로 기초를 다진 뒤에는 순숙해지면 그때 가서 전제(全提)로 들어라 | 전제(全提)와 단제(單提)와 근제(勤提)를 적절하게 운용을 해라.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수행(修行)은 수시용심진(須是用心眞)하라. 수행해 나가는 데는 모름지기 그 마음 씀을 참되게 해라. 진실하게 해라.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時道易親)이니라. 마음이 만약 참되다면 도(道)는 친하기 쉬우니라.
아까 전강(田岡) 조실 스님 법문에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라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하셨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어. 오직 간택함을 혐의(嫌疑)한다’ 간택(揀擇), 간택은 이리저리 가리는 거여. 가리고 이것저것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가리는 것이 간택인데, “그 '간택을 혐의한다'고 한 말이 무서운 간택이라” 조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그 도를 수행을 해 나가는데 그 마음 씀을 참되게 해라. 그 마음 씀이 참되면은 도는 친하기가 가깝다. 바로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
‘마음 쓴다’고 하는 표현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화두를 들어 나갈 때에—그 화두(話頭), 화두는 다른 말로 하면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그 공안은 따져,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고 분석하고 더듬어 들어가고 이런 것이 제일 공안을 참구(參究)하는 데에 주의할 것이 바로 이 따지는 것이거든.
공안을 분석하고 따져서 아무리 따지고 따져서 들어가 봤자, 그렇게 따져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천하 없는 그럴싸한 결론을 얻어서 수긍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으로써 얻어지는 결론이라 그것은 망상(妄想)에 지나지 못한 것이여.
어쨌든지 화두는 ‘이뭣고?’ 화두를 하던지,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던지, 조주의 무자(無字)를 하던지, 화두를 드는 그 찰나에 마음 길이 끊어져야 되는 거여. ‘이뭣고?’ 다못 ‘이뭣고?’ 그 의심뿐이여. 앞 생각도 끊어지고 뒷 생각도 끊어지고, ‘이것이 옳게 하는가 그르게 하는가?’ 그런 생각까지도 끊어져버리고,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해.
또 조주(趙州) 무자(無字), 무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뿐이지, ‘어째서 없다고 하는 것이 나은가, 어째서 무라고 하는 것이 나은가?’ 그러한 생각도 거기에는 붙어서는 안 돼.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런데 무자(無字) 화두는 자고로 대단히 논란이 많은 화두여. 논란이 많지마는 그 무자 화두에 옳게 참(參)해 가지고 참구를 바르게만 하면 그 무자 화두를 타파(打破)함으로써 많은 큰 깨달음을 얻은 도인(道人)들이 배출을 하는 것입니다.
몽산 스님께서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이라고 하는 법어도 설하시고 또 『몽산법어(蒙山法語)』에는 무자 화두가 많이 거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역시 무자 화두를 가지고 정진하는 분들이 많아서 오늘은 그 무자 화두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몽산 스님의 그 ‘무자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단제(單提)와 전제(全提)가 있는데, (단제는) 그냥 ‘무(無)~~~’ 거기는 전혀 의심을 붙이지 않고 ‘무(無)~~~’
어느 스님이 조주 스님한테 ‘저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여쭈어 보니까, 조주 스님이 ‘무(無)’ 그러셨단 말이여. 조주 스님이 ‘무(無)’라 그랬으니 ‘무(無)~~~’, 그냥 ‘무(無)~~~’ 하고, 무슨 망상이 일어나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무슨 소리가 귀에 들리거나 ‘무(無)~~~’ 항상 무자(無字)가 끊어지지 않도록. 앉아서도 ‘무(無)’, 서서도 '무(無)’, 밥 먹으면서도 ‘무(無)’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러지 않는 거여, 단제(單提)는. 그냥 ‘무(無)~~~’ 하고 무자(無字)만을 항상 생각하고, 무자(無字)만을 들어서 ‘무(無)~~~’ 해 가지고 그 ‘무(無)’를 관하는 거여. 이것이 단제인데. 전제(全提)는 조주의 뜻,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거여.
그러면 단제(單提)는 어떠한 이익이 있느냐 하면은 항상 ‘무(無)~~~’ 하는 무자에다가만 자꾸 정신집중을 하기 때문에 복잡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 없어. 그리고 비교적 무(無)에 정신집중을 하기가 무난해 그저, 초학자로서. 그런데 그 무자(無字)를 하는 데 생각을 한군데다 딱 집중하는 데에는 참 좋은 이익이 있는데, 까딱하면 그 ‘무(無)~~~’ 그놈만 들여다보다가 스르르르 하니 혼침(昏沈)에 빠지기가 쉽다 그 말이여.
왜 혼침에 빠지기 쉽냐 하면은 정신집중이 잘된 반면에 생각이 조용한 데 이렇게 빠져 가지고 스르르 하니 잠이 들어버려. 계속 또 잠이 들다가 또 일어나서 또 ‘무(無)~~~’ 하면, 평생 동안 무(無)하면 정신집중은 비교적 잘되고,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무(無)’ 하나만을 생각하니까 조금도 어려움이 없고 이 생각 저 생각이 안 일어나고 좋은데,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분이 없어. 그저 조용하니 조용한 데에만 집중만 해서 혹 오신통(五神通)까지도 날 수가 있어. 조용하고 고요하고 고요한 데에 집중을 하다 보면 저절로 망상이 끊어져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아주 무심(無心) 경계에 들어가서 그래 가지고 혹 오신통은 날른지는 모르나, 확철대오는 할 수가 없다. 누진통(漏盡通)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전제(全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간절히 간절히 의심을 들다 보면 의심을 들어서 정신을 성성(惺惺)하게 하는 데에는 대단히 좋아. 그런데 성성(惺惺)한 가운데에도 적적(寂寂)하고, 성성하면서도 적적하도록 이 참구(參究)하는 묘리(妙理)를 얻지 못하면은 공연히 생각이 어지러워. 적적하게 들어가지를 못하고 비교적 성성하기는 하는데 생각이 이렇게 고요해지지를 못하는 흠집이 있어.
그래 가지고 좀 성질이 급하고 그런 양성(陽性)을 가진,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하고 의심을 아주 힘을 써서 간절히 간절히 하다 보면 상기(上氣)가 되는 폐단이 있고, 골치가 아파지는 폐단도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몽산 스님은 이 단제(單提)와 전제(全提)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말씀을 하셨나 하면은, 초학자(初學者)는 단제로써 공부를 지어 나가라. 다맛 ‘무(無)~~~’ 하고 단제로 공부를 해 나가면, 그걸 일구월심(日久月深)해 나가면 생각도 가라앉고 망상도 가라앉고, 좀 자리가 잡혀.
더군다나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무(無)~~~’ 무(無)를 길게 이렇게 하면서 숨을 내쉰다 말이여.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무~~~’ 이렇게 단제로 그렇게 일구월심 얼마 동안 정진을 해 나가면 순숙(純熟)해져서 망상도 다 가라앉아 버리고 이렇게 된 다음에 전제(全提)로 들어가라 이거여.
단제로 계속하다 보면 너무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맑고 좋으니까 계속해서 단제로만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망상도 가라앉고 그래서 순숙해지면 그때 가서 전제(全提)로 들어라. ‘무(無), 무(無)~~~’가 아니라 ‘무(無)? 어째서 무(無)?’ 그때 가서 ‘어째서?’에다가 의심(疑心)의 초점을 두어 가지고 의심으로 들어가라 이거거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까지 처음에는 다 하다가, 나중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무(無)’라고 한 소리까지 안 하고 ‘어째서?’ 그렇게만 해도 벌써 의단(疑團)이 딱 나중에는 드러나게 된다 그 말이여. 의단이 드러나면, ‘어째서?’ 소리도 안 해도 떠억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한 그 의단이 드러나게 된다면, 뭐 자꾸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런 소리를 자꾸 뜰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나 처음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 해야 돼. 이렇게 해서 자꾸 의심이 끊어지면 또 하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그렇게 길게 여러 글자를 안 하더라도 의심이 들리면, 다못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만 해 나가도 된다 그 말이여. 이 초학자가 단제로써 기초를 다져 가지고, 단전호흡과 아울러서 단제로 기초를 다진 뒤에는 ‘무(無)?’ ‘무(無)라니?’ 이렇게만 해도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초학자의 단계에서는 단제로 해 가지고, 기초가 이루어져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된 다음에는 전제(全提)로써 화두를 잘 거각(擧却)해 나가면 ‘어째서?’ 하고 용을 쓰고 이마에다가 힘을 들여서 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여. 기초도 되지도 않고, 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어째서?’ 하고 어거지로 힘을 쓰고 한다면 육단심(肉團心)이 동(動)해 가지고 상기가 일어나고 골치 아픈 병이 생기고, 화두도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의단이 독로하지를 못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몽산법어집을 낸 그 몽산 스님의 무자 화두를 관하는 법에는 이렇게까지 참 자상하게 말씀을 해놓으셨고, 또 그렇게 해 나가되 그래도 정진하다 보면 이렇게 겨울에 문을 닫고 정진을 하면은 30분만 지나면은 사람 콧구멍에서 나오는 모다 탄산가스로 인해서 공기가 탁해지고 방안 온도가 높아지면 아무리 성성하게 잡드리를 해도 혼침에 들기가 쉽고, 또 요새처럼 여름에 날씨가 더웁고 그러면 아무리 정신을 차려도 꺼벅꺼벅 졸음이 온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는 전제(全提)로,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전제(全提)로 단속을 하고 또 그렇게 하다가도 워낙 산란심(散亂心)이 많으면 그때는 또 단제로 화두를 들어 보라 그 말이여. ‘무(無)’ 단제로 한 번 해 보고. 화두가 의심이 자꾸 끊어져. 잠깐 들으면 있다가 또 끊어지고 또 끊어지고 자꾸 이렇게 단절이 되면, 그때는 근제(勤提)를 하라. ‘부지런할 근(勤)’ 자, 자주자주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라.
그래서 혼침 올 때는 전제(全提)로 들어 보고, 산란심이 일어날 때에는 단제로 한번 대체를 해 보고, 자꾸 화두가 끊어져싸면 근제, ‘부지런할 근(勤)’ 자 근제로 단속을 하고, 이렇게 해서 전제(全提)와 단제(單提)와 근제(勤提)를 적절하게 운용을 해서 혼침과 산란과 간단(間斷)을 단절되는 것을 대처해 나가는, 스스로 그걸 잘 방편을 써서 단속을 해 나가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14분51초~33분38초)
*(게송) ‘수행수시용심진(修行須是用心眞)~’ ; 중봉명본 스님의 「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二十九 ‘寄同參十首’ 게송 참고.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저서로는 《전강대종사 법어 「언하대오(言下大悟)」》가 있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혐의(嫌疑 싫어할 혐/의심할·괴이히 여길·두려워할·의심스러울 의) ; 꺼리고 싫어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〇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2분33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몽산(蒙山) : 남송과 원(元)대의 임제종 양기파 스님, (1231 ~ 1298 또는 1308) 이름은 덕이(德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 시양 고안현(時陽高安縣)에서 났다。그 고향 시양이 당나라 때에는 균주(筠州)였기 때문에 고균(古筠) 비구라고 한 일도 있었고, 여릉도 몽산에 있었으므로 몽산 화상이라 하며,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있었으므로 전산 화상이라기도 하고, 휴휴암(休休庵)에 있었으므로 휴휴암주라기도 하였다. 고산(鼓山)의 완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의 법을 이었다。그의 교화한 시기는 원나라 세조(世祖)때이며, 우리 고려의 충렬왕 때이다。그래서 고려의 고승들과 문필의 거래가 많았고, 그의 저서 가운데 <법어약록(法語略錄)> <수심결(修心訣)>등은 이조 중엽에 있어 우리 글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 ; 『몽산법어(蒙山法語)』의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을 말함.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은 조주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참선 수행에 있어서 본참공안에 대해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 참구를 하지 않고, 사량분별 · 알음알이로 공부를 삼는 잘못된 병폐를 10가지로 정리하여 그 병폐를 알고 극복해 올바른 활구참선을 하기 위한 몽산 스님의 법문. *몽산법어(蒙山法語) ; 중국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참고]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몽산법어』는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데에 관한 법문(法門)만을 수록한 법어집입니다. 여러분이 이 『몽산법어』 서문(序文)을 읽어보시면 이 책이 어떠한 책이며, 얼마나 공부해 나가는 데 요긴한 책인가를 아실 수가 있고. 그리고 이 몽산법어를 한 구절씩—여러분은 선지식(善知識)을 항상 만나 뵙기가 어려우니까 공부하다가 가끔 법문을 듣고 싶으면, 이 몽산법어를 한 편씩을 보시면 선지식 법문 들은 거와 같아서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또 의정(疑情)이 돈발을 해서 참선이 잘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몽산법어> 총 68편의 동영상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몽산법어'에도 자세한 용어풀이와 함께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단제(單提) ;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단제(單提)는 그냥 ‘무~’ 하고, 의심을 붙이지 않고 아무 일체 다른 말은 없이 ‘무~’만을 관하는 것. *전제(全提) ; 전(全) 부분이 들고 일어남(全分提起)의 뜻. 본래 그대로 나타냄. 전부를 그대로 나타내 보임.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전제(全提)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상기(上氣) ; ①[한의] 피가 뇌로 몰리는 현상.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나며, 발한, 두통, 이명(耳鳴), 현기증 따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②얼굴이 흥분이나 수치감으로 붉어짐.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〇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 ·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육단심(肉團心) : [범어] Hrdaya. 흘리다야(紇利陀耶)는 번역해 육단심(肉團心)이며 약칭이 육심(肉心)이다. 4심(四心)의 하나. 사람 육신의 오장(五臟) 중의 심장(心臟)이다. 그 형태가 8판(瓣)의 육엽(肉葉)으로 이루어졌다. 의근(意根)이 의탁한 곳. *탄산가스(炭酸gas) ; 탄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가스. 대기 중에 소량 존재하는 무색 무취의 기체로 공기보다 약 1.5배 무겁다. 탄소를 포함하고 있는 물질이 탈 때나 동물이 호흡할 때 생기며 식물의 광합성에 사용된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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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의심(화두드는 법) (전강선사 No.014)—아는 걸로는 소용없어. 知之一字 衆禍之門 | 참구(參句)라 하는 것은 그대로 활구(活句) | 탁! 맥혀서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다'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먹는다'
아미타불 한마디 부른 가운데에 구백 생멸심(九百生滅心)이 그 속에 들어 있다 | 입껍데기로만 말어라 | 하근 중생은 화두밖에는 없어 | 화두가 안 들린 원인은 이 못된 중생념, 십악(十惡) | 화두가 안 되도 물러가지 아니허면 다 된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 12분 6초.
(2) 15분 3초.
[법문] 전강선사(No.014)—전강선사 일대기 제7호(경술1970년 12월 10일 새벽.음) (전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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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시(如何是)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인고? 어떤 것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인고?” 생사해탈법이 서천(西天)에서, 서역(西域)서 왔으니까 서래의를 물은 것이여. 서래, 그때는 그 인도(印度) 모도 저 서래(西來) 아닌가. 서쪽 아닌가, 여그서. 확철대오(廓徹大悟)헌 생사 없는 대해탈법이 서쪽에서 왔으니까 서래의(西來意)를 묻는 것이여.
“그 서쪽에서 온 그 뜻이 어떻습니까?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자 이빨에 털이 났느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느니라”
그 원, 세상에 그... 따지면 그 뭐 아무데나 붙일 수 있제. 수수꺼끼, 아(兒)들 수수꺼끼처럼. 뭐 수수꺼끼나 뭐 다를 것이 무엇이 있어.
수수꺼끼 그녀러 것, 그것 참 처음에 들어 보면 깜깜 알 수 없지. 그러지마는 그 따져서 모도 붙여 보면은 다 알 수 있는 것이여. 허지마는, 그 수수꺼끼 그거 천 개, 만 개를 다 알아 봤던들 그 뭣허는 것이여? 따져서 모도 아는 것이니.
이리저리 생각해 마음으로 따져서 아는 것은 소용없다 그말이여. 그걸 해석이라 그래. 모도 해석해서, 모도 생각을 붙여서, 뉘기 짜서 아는 것 가지고는 소용없어. 그러기에 지지일자(知之一字) 중화지문(衆禍之門)이여. 아는 것이라는 것은 중화(衆禍)의 문이여. 아는 걸로는 소용없어. 참선법은 그게 아니여.
‘어째서 판자 이빨, 판자 이빨에 털이 났다고 했는고?’ ‘조주 스님이 그렇게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으니,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닥 했는고?’ 법상(法床)에 올라올 때마다 내가 해 주지. 왜 이래? 이놈을 가지고 모도 대중이 지금 철두철미허게 정진해 나가니까, 이걸 해 줄 수밖에 없지. 제일 중요헌 것이니까.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저 나무 판자 말이여, 나무 판자. 나무로 썰어 논 판자 말이여! ‘판자 이빨에 터럭이 났다’ 어떤 것을 판자 이빨이라 하며, 판자 이빨에 뭔 털이 나? 털이 왜 거가 나? 원 당최, 세상에 거 뭔 소리냔 말이여? 무슨 뜻이여? 알 수 없구나! 알 수 없는 그 의심. 알 수 없는 걸 의심이라고 안 혀? 가령, 사람을 내가 하나 잊어버렸는디, 그 사람이 도망갔는디 ‘어디로 갔나? 어디로 갔을까?’ 간 곳을 알 수 없다.
‘응! 그 사람이 아무 디가 있을 것이다. 거그 있는가?’ ‘아무 디 찾아가면 거 있을 것이다. 아! 거그는 저, 어디 무슨 지리산 가 있을까?’ 고렇게 따지지를 말어. 그 사람이 갔는데, '어디로 갔는고?' 알 수 없구나.
‘어디로 갔는가? 금강산으로 갔는가? 태백산 속으로 들어갔는가?’ 이렇게 분석허지를 말고. ‘어디로 갔는고?’ 알 수 없어. 그저 무조건 여하약하허고 알 수 없다.
참의(參意)라는 것은—참구와 참의와 달라. 참구(參句)라 하는 것은 그대로 활구(活句)여, 그것이. '살 활(活)' 자, '글귀 구(句)' 자, 활구여. 활구를 참상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상허지 말어라. 사구라 하는 것은 그건 내가 먼첨 죽고 남 죽이는 것이여, 그거. 천하에 못쓴 것이 참선에 사구다 그 말이여. 사구(死句)라 하는 것은 모도 아는 것이여. 이치도 있고, 모든 이치가 거그 들어붙고. 모도 아는 것이고, 모도 해석해서. 그것이 선(禪)이 아니여. 참선이라는 것은 그걸 선이라고 안 혀. 허니, 탁! 맥혀서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을 활구(活句)락 햐.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다’ 당장에 판대기 이빨에 털 난 도리를 알 수 없지. 그 도리를 알 수 없는 것이 조주의 뜻이니라. 조주의 뜻이여. ‘어째서 조주 스님은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고 했는고?’ 그 조주의 뜻을 찾는 것이,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는 놈을 알 수 없는 것이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난 놈이 다르고, 조주 스님의 뜻이 다르고, 요리 가서 찾고 조리 가고, 그거 못써. 그걸 참의(參意)라 햐. ‘조주 스님 뜻은 무엇이여, 판대기 이빨에 털은 무엇이며, 그건 다른가 어쩐가?’ 모도 참의여. 참구(參句)가 못 되고 참의(參意)여! 활구가 못 되고 사구여! 요것을 분간해서, 화두를 똑! 한 밥 먹을 동안을 허드래도 고렇게 야물딱지게 다루어 들어가야 혀. 화두 잘못허면은, 화두병 들어 버리면은 그만이니까. 무슨 공부여. 공부는, 무슨 공부가 그런 공부가 있나? 그건 소용없는 공부여.
이치로 모도 그 수수꺼끼 같은 거, 왜 그런 것도 처음에 들으면 꽉 맥혀 모르제. 그놈을 자꾸 상량(商量)허면은, 사량(思量)을 붙이면은 그만 알거든.
인방(寅方), “인(寅)은, 호랭이는 질고, 용단(龍短)이라. 용은 짜룹다. 그게 뭔 뜻이냐?” 아, 그놈의 것, 용은 지드란헌 지드란헌 배암 같이 생긴 진 놈이고, 호랭이는 쪼끄만헌 짜룬 것인디, 어째서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닥 했는고? 아, 그거 알 수 없거든.
그것 따져 보면 안다 그말이여. 용단(龍短)이다. 용이라 하는 것은 진방(辰方)을 용이라 햐, 진방. 동서남북에 방우가 다 있어. 열두 방우가 있지 않어? 자축인묘진사오미(子丑寅卯辰巳午未)...
진방이 거, '용 진(辰)' 자, 진방. 용(龍)이라고 헌단 말이여. 진방에서 해가 뜰 때에는 해가 자룹고, 인방(寅方)에서 해가 뜰 때에는 해가 질다 그 말이여. 그러니께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다 그 말이여. 그놈을 갖다가서 “무엇이냐?” 물으면, 따지면 알거든. 그 방우를 따지면 아는 그런 것이여.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먹는다. 그 뭔 뜻이냐?” 아, 그거 설찬히 어렵다 그 말이여. 그 생각해 보면 또 그것도, 퇴깽이는 묘방(卯方). 동방(東方)이 묘(卯)거든. 동쪽이 묘니까, 묘에서 해가 올라와 가지고, 퇴깽이 알이란 말이여. 저 유방(酉方)으로 넘어가거든. 해 넘어가는 데 유방(酉方)이니까. 유방, 닭이 집어먹는다 그 말이여.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생킨다 그 말이여. 아, 거 모도 설찬히 수수께끼라도 그렇게...
그렇게 따지는 건 절대 아니여, 선(禪)이라는 것은.
또 그러고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그대로 딱! 내가 어제 아침에, “그 꿀 먹을 때에 어떻게 했으면 살아 가겄느냐?” “달다!”
내가 도장원(都壯元)했다고 안혀? 내가 도장원했다고 안혀? 역사적으로 도장원이지! 당시에 어찌 바로 해 놨는데, 아니라고 헐 수가 있는가? 못 하지.
그, 고렇게 공안이란 게 딱! 조사관(祖師關)이란 게 백혀 있어.
조사관은 도무지, 뭔 데서 갖다와서 무슨... 어떻게 무슨 저... 뭐락 하노? 그 출처(出處)같은 거, 그런 것도 없어. 출처가 어디 그 조사관에 가 출처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고, 어록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여. 다맛 조사서래의에 딱! 답해 논 것이 ‘판치생모’여. 그 조사관 딱! 해 놓은 것이여.(9분59초~22분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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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阿彌陀佛) 부른 사람이 ‘아미타불밖에 없으니,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은 극락세계 간다’ 이렇게 믿고는 고성염불(高聲念佛) 헌다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러고 앉었지. 그 부르면서 그 속에는 아미타불 한마디 부른 가운데에 구백 생멸심(九百生滅心)이 거그 그 속에 들어 있다. 온갖 분별심이 거 다 붙어 있네.
멸업장진언(滅業障眞言) ‘옴 아로륵계 사바하’ 업장(業障) 녹인다고 “옴 아로륵계 사바하, 옴 아로륵계 사바하” 그놈 소리, 고성염불 소리에, “아로륵계 사바하, 아로륵계 사바하” 뭔, 저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이 부르는 속에 가서 미세헌 생사념(生死念)이 꽉! 들어찼네. 이것을 알아야 혀. 그러니 “그 구피변(口皮邊)으로, 입껍데기로 헌 것이 무슨 이익이 있느냐?” 그랬거든. 그 이익이 없어.
경을 읽드래도 “여시아문(如是我聞) 일시불재사위국(一時佛在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그거 뭣이여?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니라. 네 마음 네가 한번 반조(返照)를 못허면은, 알 수 없는 놈이 반조여.
내가 나를 몰랐으니까 아지 못헌, 알 수 없는 놈을 하나 추켜들어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 거기에는 그 미세한 가리같은—가리 찌클으면 부우 허데끼—고러헌 망념(妄念)이 없어.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래야 중생념을 항복 받는 것이지, 그 이외에는 없는 것이여. 그래서 그 의단독로를, 구피변(口皮邊)을 제일 말했거든. 입껍데기로만 말어라 이 말이여.
그래서 ‘옴마니반메훔’이라든지, 정상화불수(頂上化佛手) 주문(呪文)이라든지, 팔만사천 주문 읽는 법이 거, 고성지(高聲持)가 있지. 소리 높여, '높을 고(高)' 자, '소리 성(聲)' 자, '가질 지(持)' 자, 고성지가 있고. 그다음 미성지(微聲持)가 있고, '가늘 미(微)' 자, '소리 성(聲)' 자, '가질 지(持)' 자, 미성지가 있고. 그다음에 유가지(唯加持)가 있고, '오직 유(唯)' 자, '더할 가(加)' 자, '가질 지(持)' 자, 유가지가 있고. 그다음 금강지(金剛持)가 있어, 금강지. 금강지라는 것이 그것은 뭐...
“옴마니반메훔” 그것 고성지고, 내 귀에만 들린 것 (작은 목소리로)“옴마니반메훔” 그것 미성지고, 유가지라 하는 것은 셋바닥도 동(動)치 않고, 설근(舌根)도 동치 않고 헌게 유가지고, 그다음에 금강지여.
금강지라 하는 것은, 당초에 금강지라는 것은 셋바닥이고 무슨 뭔, 동치 않고 동허고... 거그는 천성(千聖)도 불식(不識)이여! 불불(佛佛)도 불상견(不相見)이여!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여! 금강지라는 것은. ‘금강지로 들어가야 헌다’ 해 놨어. 그러니 그게 바로 곧 그 선(禪)보담도 더 혀. 그 밀(密)이여. 밀교(密敎)라는 게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여.
그래 가지고는 처억 그 관법(觀法)이 있는디, 이사무사지묘(以思無思之妙)다. 생각으로써 생각 없는 묘(妙)가 있어. 그 헐래야 못허는 것이여. 반사영염(返思靈焰)에 무궁(無窮)이다. 도리어 영염(靈焰)에 신령스런 불꽃, 영염에 무궁을 관한다. 영염무궁(靈焰無窮)을 관한다. 또 그 생각도, 사진(思盡)이 환원(還源)이다. 그 생각이 다하여 근원에 돌아가느니라.
그 근원이 어디가 근원인가? 근원이 어디인디 근원으로 돌아가는가 말이여? 생전 해야 그건 중생념으로 되지 않어! 관법과 반조법(返照法)과 다 그려. 이렇지. 어떻게 허는 것이 불... 허니, 우리 중생은 성상상주(性相常住)해서 사리불이(事理不二)헌 곳이 어느 곳인가 말이여?
그 나가상정(那伽常定)이니라. ‘나가상정에 들어온다’ 허는 게, 그것이 참으로 바로 돌아가는 귀향처인디, 구경처(究竟處)인디 어떻게 혀? 중생념으로 되아?
이 중생은 도무지 눈만 뜨면, 잠만 잘 것 같으면 제팔 뢰야식장(第八賴耶識藏)에 가 딱 잠겨서, 근본식(根本識), 근본무명(根本無明)에 가 딱! 주저앉어 잠겨 가지고는, 천지(天地) 분간(分揀) 아무것도 모르고 매(昧)해 버리는 건디. 거그서 일념이 나올 것 같으면은 그만 육식(六識)으로 벌어져, 육정(六情)으로 벌어져 육근의식이 되아 가지고는, 그 육백 생멸심이 퍼일어나 가지고는 전부 생멸심 뿐인데 어떻게 헐 거냔 말이여.
거, 그래 가지고는, 그걸 가지고는 뭐 아무리, 뭐 지성으로 해 보고 그대로 되는가? ‘옴마니반메훔’을 많이 많이 부를 것 같으면은 그만 부귀, 굉장헌 부귀를 헌다 했어. 어디 그 되나? 정상화불수(頂上化佛手)는 칠 일만 헐 것 같으면은 아, 그만 육신통(六神通)이 막 난다 했어. 그 되나? 미쳐 버리지. 중생견(衆生見)으로 되냐 그말이여? 벌써 금강지를 턱 들어가서도 그와 같은 관법이 있는디.
허니, 우리 범부선(凡夫禪)이라 하는 것은 범부는, 우리 지금 중생이라 하는 것은 그저 이 말세선, 우리도 지금 말세선이여. 이 말세선이기 따문에 말세(末世) 학자라는 건 상근이 없어. 뭐 상근(上根) · 중근(中根) · 하근(下根)이 언제는 있고 언제는 없으리오마는, 헐 수 없이 또 그놈의 말세가 있어. 말세 중생이라는 것은 너무 간혜(乾慧)가 많아. 마른 그 간혜가 너무 많여. 간혜 많은 것이, 너무 퍼떡 퍼떡 잘 아는 것이 그것이 하근(下根)이여. 상근대지(上根大智)는 분석, 따지는 게 없어! 그만 막 들어가지. 그대로.
허니, 우리 하근 중생이 어쩔 수 없어! 화두밖에는 없어.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냐?” “판치생모(版齒生毛)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 났느니라”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그놈의 중생념 속에, 중생 그 망상 번뇌 속에서 요것 하나를 처억 그놈을 어떻게 만들아 가지고, 받아 가지고 해볼라니 되냔 말이여? 죽어도 안 되는 것이 그뿐이다. 오직해야 ‘역수탱주(逆水撑舟)니라’ 물을, 들입대 흘러가는 기맥힌 급류 중에, 급허니 흘러가는 물에 사람이 거그 발자취도 거그 뭐 대보지 못헐 만헌 그러헌 그 급류에 배를 끄집어 올린 것 같다.
그러니 왜 그렇게 안 될 꺼여? 화두가 왜 그렇게 도망가? 유구유원(悠久悠遠)이여. 더욱 멀어져. 헐라고 허면 더 멀어져. 아! 이런 화두를 끄집을라면 더 멀어지네. 이런, 이런 놈의 꼴 좀 보소!
왜 그렇게 안 된 원인이 뭐냐 이 말이여. 그렇게 화두가 안 들린 원인이라는 것은 뭐냐 허면은 이 못된 중생념—그 살생이나 하고, 도둑질이나 하고, 사음 음행질이나 하고, 거짓말이나 하고, 두 가지 양설(兩舌), 그저 악구(惡口), 고런 놈의 습기(習氣), 그저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 이 십악(十惡) 그 중죄짓는 버르쟁이, 그 마음 고놈으로써, 일어나는 마음으로써 퍼진 고놈이 전면의지(纏綿意地)해서—뜻 땅에, 내 뜻 뿌럭대기가 꽉! 솜처럼 때리 얽허져 가지고는 그놈 조금 잠복시켜 놓고 화두를 ‘어째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해도, 그놈이 그만 도로 퍼일어나.
이놈의 것은 도무지 백억천만 겁에 내 생겨난 때가 없이 오면서 지어 논 놈의, 그놈의 그만 그 번뇌 망상이 그놈이 뒤끓어 일어나니, 도모지 화두를 추켜들라면은 그렇게도 급류 중에 배 끌어올릴라 헌 것처럼 조금 이러면, 한 일 고쯤 끄집어 올려 놓으면 십 고나 물러가고, 십 고 끄집어 올려 놓으면 백 고나 물러가고, 이놈이 이렇다 그 말이여. 허지마는, 불가불 이 말세 학자가 닦을 것은 선(禪)이여.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났다 했는고?” 의심, 알 수 없는 놈만 찾어. 안 되면 또 허고, 안 되면 또 허고, 안 되도 또 해서 물러가지 말어라. 그 신심(信心)만 물러가지 아니허면, 참으로 발심해서 그 철저헌 신심만 물러가지 아니헐 것 같으면은 수불견성성불(誰不見性成佛)이냐? 누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못할 꺼냐? 허! 물러가지 아니허면 다 된단 말이여.
허니, 처음에 화두학자가 처음 들어와서, 한 사나흘이나 한... 여그 선생님도 저 봐. 아주 참, 세상에서 아주 강연도 참, 웅변대회에서 제일가신 선생님이시고, 학교 선생님도 여태까장 수십 년을 해 나오시고 또 다 저 종교계에서 근 20년 동안 종교를 참, 그렇게 도를 닦아 오셨지마는, 무척 깊으라니 연구를 많이 허셨어.
그래 가지고 저렇게 오셔서 지금 참말로 이... 그래도 참선은 아마 그렇게 몇 철을 앞두고 해 보시지는 안 했는가 어쩐가 말씀은 그러지마는, 또 많이 허셨는지도 모르제. 이렇게 오셨지마는, 마음은 그저 한 일주일에 그만 일 마치고, ‘참선법이 참말로 그와 같이 깨달은 법이 있다면은 내가 일주일 동안에, 일주일 꺼리 밖에 될 것 뭐 있나?’ 그래 가지고 한 일주일 한번 해 보신다고 어저께 오셨는디 아, 이렇게 오셔서 엊저녁부텀 무척 고생을 하셨겠지.
그같이 편안헌 방에서 잠 편안히 잘 주무셨을 것이고, 좋은 그저 참 이부자리 속에서 편안히 주무셨을 터인디, 여기에 오셔서 그만 같이 모도 한방에서 이렇게 고생허고 주무시고, 인자 앞으로 일주일 동안을 한번 저렇게 고생을 같이 해보신다고 밥도 같이 그만 그 반찬도 아무것도 없고, 또 아침부터 죽 자시고, 이것을 모도 저렇게 견뎌 가시면서 한 일주일 동안 해보신다고 하는 그러헌 용맹심(勇猛心)을 가지고 오셨는데. 무척 참, 그 용맹심 거룩헌 마음이시여.
“계시라”고. 이렇게 해놨는데. 일주일 동안에 한번 용맹심으로써 일 마칠 마음을 가지신 것이여. 허지만 일주일 동안에 못헌다고 해서 퇴타(退墮)가 있으면 안 된단 말씀이여. 또 일주일, 또 일주일, 그저 언제까지든지 일주일 일주일이 자꾸 계속되아 나가야 허신단 말씀이여. 여까장.
내 그저, 내가 그래 정성스런 마음으로써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여. 미국사람 같은 사람은 손이 오면은 반찬이 있건 없건 한 가지면 한 가지 채려 놓고 “정성껏 채렸으니 많이 잡사 주십시오” 우리 동양사람은 잔뜩 채려 놓고도 “반찬이 없지마는 많이 잡사 주십시오” 그래 동양사람 인사는 그 좀, 그 서양사람 인사만치 바르지 못혀. 그대로가 못 된다 그 말이여. 모도 꾸며대서... 내 있는 대로 헌 말씀이여. 여까장 했습니다.(38분23초~53분22초)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서천(西天) ; ①서쪽 하늘. ②서천 서역국(西天西域國 : 인도의 옛 이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〇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〇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태어나면서 아는 경우인가? 예컨대, 조주 스님(778~897)이 사미였을 때에 본사(本師)와 함께 행각하여 남전(南泉)에 이르렀는데, 마침 남전 스님(748~834)이 누워 있었다. 본사가 절을 하고서 조주 스님이 막 절을 하려고 하는데 남전 스님이 물었다.
‘최근 어디를 떠나왔는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서상(瑞像)을 떠나왔습니다’
남전 스님이 물었다. ‘서상을 보았는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서상은 보지 못했지만, 눈앞에서 다만 누워 있는 여래를 봅니다’
남전 스님이 이에 일어나 물었다. ‘그대는 스승이 있는 사미인가? 스승이 없는 사미인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스승이 있는 사미입니다’
남전 스님이 말했다. ‘누가 그대의 스승인가?’
만약 요즈음의 선객이라면, 곧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퉁기거나, 한 개 원상(圓相)을 그리거나, 한 번 고함을 지르거나, 박수를 한 번 치거나, 소매를 털고서 곧장 가거나 하는 등등의 더러운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그대들은 보아라. 저 조주 스님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초봄이니 아직 춥습니다. 스님에게 만복이 깃들기를 삼가 빕니다’
남전 스님은 방망이를 휘두르지도 않고, 고함을 지르지도 않고, 현묘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경론을 인용하지도 않고, 옛사람의 공안(公案)을 말하지도 않고, 사실을 말하지도 않고, 이치를 말하지도 않고, 다만 확실하게 그에게 말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
조주 스님은 이미 평상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다시 물었다. ‘향하여 다가갈 수 있습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향하여 다가가려 하면 어긋난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향하여 다가가지 않으면 어떻게 도를 압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도는 앎[知]에 속하지도 않고, 알지 못함[不知]에 속하지도 않는다. 앎은 허망하게 깨어 있는 것이고, 알지 못함은 깜깜한 무기(無記)이다. 만약 참으로 의심없이 도에 통달하면, 마치 커다란 허공과 같아서 막힘없이 텅 비었는데, 어떻게 그 속에서 억지로 옳으니 그르니 할 수 있겠느냐?’조주 스님은 그 말을 듣고서 밝게 깨달았다.
남전 스님은 ‘도는 앎에 속하지도 않고, 알지 못함에 속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지만, 규봉 스님(780~841)은 그것을 일러 ‘신령스런 앎[영지(靈知)]’이라 하였고, 하택 스님(684~758)은 그것을 일러 ‘지(知) 한 글자는 온갖 묘함의 문(門)이다’라 하였고, 황룡사심(1043~1114) 스님은 말하기를 ‘지(知) 한 글자는 온갖 재앙의 문(門)이다’라 하였으니, 규봉과 하택을 알기는 쉬우나 사심(死心)을 알기는 어렵다. 여기에 이르러선 모름지기 테두리와 격식을 벗어난 안목을 갖추어야 하니,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없고, 남에게 전해 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원오 선사(先師 1063~1135)께서는 말씀하시길 ‘조주의 선(禪)은 다만 입술 위에 있으니, 그것을 어떻게 하기는 어렵다(다른 번역 : 조주의 선이 그저 말로 되는 것이라면 무에 어려울 게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마치 용병(用兵)을 잘하는 자가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그대의 수초(水草)를 양식으로 삼아 그대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참선의 요점을 논하자면 방석에 앉는 것을 집착하여 공부를 삼아 혼침과 산란 가운데 떨어지거나, 편안하고 고요한 속에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모두 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리니 오직 세월을 허송할 뿐 아니라 시주들의 공양을 소화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루 아침에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필경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산승이 옛날 대중에 있을 때 죽과 밥 먹는 두 때를 제외하고 방석 위에 올라앉지 않고 다만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걸음걸음에 여의지 않고 마음 마음이 간격이 없었다. 이와같이 3년을 지내도록 일찌기 한 생각도 게으른 마음이 없다가 하루는 문득 나의 고향[自家]을 밟고 나니 원래 한 걸음도 옮긴 것이 아니었더라.
혼침과 도거, 희로애락이 그대로 진여불성이고 지혜해탈이건만 다만 인연이 이러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제호상미가 도리어 독약이 되었다. 영리한 사람이 가령 당장에 그른 줄 알아 온 몸으로 짊어지더라도 바로 아침에 삼천 번을 때리고 저녁에 팔백 번을 때릴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어찌 '지(知)라는 한 글자가 모든 재앙의 문이다'라는 말을 알지 못하는가?
만약 이 일을 논하자면, 모기가 쇠로 된 소에 오르는 것과 같아서 다시 이러쿵 저러쿵 묻지 않고 당장에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버리고 한 번 뚫어서 몸으로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런 때 마치 백천만억 향수해(香水海)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취(取)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고갈됨이 없지만, 설사 뜻이 견고하지 않고 마음이 한결같지 않아 아득히 출렁대며 동으로 날고 서로 날다가 설사 네가 날아서 비비상천에 이른다하더라도 여전히 다만 한 마리 굶주린 모기일 뿐이더라.
(주해) 거룩한 빛이 어둡지 않다는 것은 첫 머리의 「밝고 신령하다」는 것을 맺는 말이요, 만고에 밝다 함은 「본래부터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맺는 말이며,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하는 것은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하는 것을 맺는 말이다。「문(門)」이란 범부와 성인이 드나든다는 뜻이 있으니, 마치 하택신회 선사가 이른바 ‘알 지(知)’자 한 자가 온갖 묘한 이치의 문이라고 한 것과 같다.
아! 「이름 지을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다」는 데서 시작하여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것으로 끝을 맺으니, 이 한 권에 얽힌 넌출을 한마디 말로 모두 끊어 버렸다。그리하여 처음과 끝을 일해(一解)로써 말하고, 중간에는 온갖 행동을 들어 보였으니, 마치 유교 경전의 삼의와 같다。지해(知解) 두 글자는 불법에 큰 해독이 되므로 특별히 들어서 끝을 마치니 하택신회 선사가 조계의 적자가 못 됨은 이 때문이다.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참구(參句) ; 언구(言句 화두)를 참상(參祥)하는 것.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參意)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參句)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참상(參祥) ; 참구(參究).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알음알이. 지해(知解).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질다 ; ‘길다’의 사투리. *짜룹다 ; ‘짧다’의 사투리. *방우 ; ‘방위(方位)‘의 사투리. *진방(辰方) ; 이십사방위(二十四方位)의 하나. 정동(正東)에서 남으로 30도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각도 안의 방향이다. 진(辰)은 십이지(十二支)의 다섯째 지지(地支)로 용(龍)을 상징한다. *퇴깽이 ; ‘토끼’의 사투리. *설찬히 ; 솔찬이. 솔찬히. ‘아주 많이. 상당히. 제법’의 사투리. *도장원(都壯元) ; 장원(壯元). ①예전에, 과거(科擧)의 갑과(甲科)에서 일등으로 급제하는 일이나 그 사람을 이르던 말. ②글을 제일 잘 지어 성적이 첫째임. 또는 그런 사람.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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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고성염불(高聲念佛) ; 크고 높은 소리로 외는 염불. 큰소리로 염불하면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그치게 하여 쉽게 삼매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참고] 『아미타경통찬소(阿彌陀經通贊疏)』 중권(中卷) (규기찬窺基撰) 〇高聲念佛 有十種功德 一、能排睡眠 二、天魔驚怖 三、聲遍十方 四、三塗息苦 五、外聲不入 六、心不散亂 七、勇猛精進 八、諸佛歡喜 九、三昧現前 十、往生淨土
고성염불에 열 가지 공덕이 있다. ①능히 수면(睡眠)을 쫓는다. ②천마(天魔 : 魔王 波旬)가 두려워한다. ③염불소리가 시방(十方)에 두루한다. ④삼도(三塗 :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을 쉬게 한다. ⑤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⑥마음에 산란함이 없어진다. ⑦용맹히 정진한다. ⑧모든 부처님께서 환희하신다. ⑨삼매가 나타난다. ⑩정토(淨土)에 왕생한다.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 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 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니라' ; 「십무익(十無益 : 열 가지 무익한 것)」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선사의 시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청매집(靑梅集)』 (하권)에 있는 게송. 「십무익송(十無益頌)」이라고도 한다. ①심불반조 간경무익(心不返照 看經無益) 마음을 반조치 아니하면 경을 봐도 이익이 없고 ②부달성공 좌선무익(不達性空 坐禪無益) 성품의 공함을 요달치 못하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고 ③경인망과 구도무익(輕因望果 求道無益) 원인을 가벼이 하고 과보를 바라면 도를 구해도 이익이 없고 ④불신정법 고행무익(不信正法 苦行無益) 정법을 믿지 않으면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고 ⑤부절아만 학법무익(不折我慢 學法無益) 아만을 꺾지 않으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고 ⑥내무실덕 외의무익(內無實德 外儀無益) 안으로 실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위의를 세워도 이익이 없고 ⑦흠인사덕 제중무익(欠人師德 濟衆無益) 스승으로서의 덕이 부족하면 중생을 제도해도 이익이 없고 ⑧심비신실 교언무익(心非信實 巧言無益) 마음이 진실치 않으면 교묘한 말을 해도 이익이 없고 ⑨일생괴각 처중무익(一生乖角 處衆無益) 일생을 괴각질을 하면 대중과 함께 해도 이익이 없고 ⑩만복무식 교만무익(滿腹無識 憍慢無益) 뱃속에 무식만 가득하면 교만해도 이익이 없다.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 조선 중기의 스님. 호는 청매(靑梅), 자는 묵계(默契). 청허휴정(淸虛休靜 서산대사)의 제자. 명아주 지팡이에 갈포옷을 입고 금강산 · 태백산 · 지리산 · 구월산을 두루 다녔다. 이렇게 삼십여 년 지내다 묘향산에서 참선하던 중,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을 따라 승병장의 한 사람으로 3년 동안 싸워 공을 세웠다. 왜군이 물러가자 전라도의 부안 변산에 이르러 아차봉(丫嵯峰) 마천대(摩天臺) 기슭 월명암에서 지냈다. 또 그림에 능해 1617년(광해군 9) 왕명으로 벽계정심(碧溪淨心) · 벽송지엄(碧松智嚴) · 부용영관(芙蓉靈觀) · 청허휴정(淸虛休靜) · 부휴선수(浮休善修) 등 다섯 스님의 진영을 그려 조사당(祖師堂)에 모시고 제문(祭文)을 지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의 연곡사(燕谷寺)에서 1623년(인조 1) 76세에 입적하였다. *반조(返照) ; 돌이켜 살펴보는 것.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가리 ; ‘가루[분(粉), 분말(粉末)]’의 사투리. *찌클다 ; ‘뿌리다(곳곳에 흩어지도록 던지거나 떨어지게 하다)’의 사투리. *망념(妄念) ; 망상(妄想).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셋바닥 ; ‘혓바닥(‘혀’를 속되게 이르는 말)’의 사투리.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 ;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하다. *이사무사지묘(以思無思之妙) ; ’생각으로써 생각 없는 묘(妙)‘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11권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703~704 참고. 師問 如何是眞佛住處 祐曰 以思無思之妙 返思靈焰之無窮 思盡還源 性相常住 事理不二 眞佛如如」 師於言下頓悟
대사(앙산)가 물었다. “어떤 것이 참 부처가 사는 곳입니까?” 영우 선사가 말하기를 “생각하면서도 생각 없는 묘함으로써 신령한 불꽃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되,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품[性]과 모습[相]이 항상 머무르고 일[事]과 이치[理]가 둘이 아니라서 참 부처가 여여(如如)하리라” 대사가 이 말끝에 단박에 깨달았다. *나가상정(那伽常定) ; 행주좌와(行住坐臥)의 4위의(四威儀) 어느 때에도 항상(恒常) 삼매[定]에 들어 있는 부처님의 경지를 말함. 나가(那伽)는 용 또는 코끼리。 물에서는 용이 제일 힘이 세고 육지에서는 코끼리가 제일 힘이 세기 때문에 부처와 아라한을 나가(那伽)라 한다. *구경처(究竟處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곳·때·지위 처) ; 최후의 도달처. 주로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인 경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제팔 뢰야식장(第八賴耶識藏) ; 제팔 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참고] 〇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〇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근본식(根本識) ; 본식(本識), 근식(根識) 등이라고도 한다. 근본식은 유식학파에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지칭하는 말로 주로 사용한다. *근본무명(根本無明) ; 모든 번뇌(煩惱)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깨닫지 못하고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리킨다. 곧 진여(眞如)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한 생각으로 가장 미세하게 움직이는 마음이며, 생사윤회의 근본이 된다. 지말무명(枝末無明)의 상대어. 무시무명(無始無明), 근본혹(根本惑), 근본불각(根本不覺), 근본번뇌(根本煩惱), 원품무명(元品無明) 등과 같은 뜻이다. *매(昧)하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모른다. 어둡다. *육정(六情) ; 육근(六根). *중생견(衆生見) ; 중생의 번뇌에 얽매여 전도몽상(顚倒夢想 :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한 잘못된 견해.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상근(上根 위 상/뿌리 근)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매우 뛰어난 사람. *간혜(乾慧) : 비록 깨쳐서 지혜가 났더라도, 정(定)의 힘이 충실하지 못하면 그것은 마른 지혜라고 한다。마른 지혜는 죽고 나는 이치를 알더라도, 나고 죽는 데 마음대로 자유자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乾 = 하늘 건, 마를 간)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역수탱주(逆水撑舟 거스를 역/물 수/배를 젓다 탱/배 주) ;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다’ *십악(十惡) ;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〇몸(身)—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婬 삿된 음행). 〇말(口)—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〇뜻(意)—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⓪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전면의지(纏綿意地 얽을 전/얽힐 면/뜻 의/땅 지) ; 마음의 밭에 얽히고설켜. [참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보조국사(普照國師)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서. 〇無始習熟 愛欲恚痴纏綿意地 暫伏還起 如隔日瘧 一切時中 直須用加行方便智慧之力 痛自遮護 豈可閒謾 遊談無根 虛喪天日 欲冀心宗而求出路哉.
비롯함이 없는 옛적부터 익혀 온 애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에 얽히고설켜서, 잠깐 조복 되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마치 하루 걸러 앓는 학질병과 같으니라. 어느 때에나 모름지기 바로 수행을 더하는 방편과 지혜의 힘을 써서, 간절히 스스로 막아 지켜야 하거늘, 어찌 한가하게 근거 없는 잡된 이야기를 하여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마음의 근본을 깨닫기를 바래며 생사 벗어나는 길을 구하고자 하겠는가? *고 ; '공이[杵]'의 사투리. *공이 ; 절구나 방아확에 든 물건을 찧거나 빻는 기구. 메공이, 돌공이, 쇠공이, 절굿공이, 방앗공이 따위가 있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용맹심(勇猛心) ; 두려움 없이 용감하며 기운차고 씩씩한 맹렬한 마음.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선문(禪門) ; 선종(禪宗).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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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의심(화두드는 법)((No.233))—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 |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 | 경(經)은 노정기(路程記) | 참선법은 최상승법, 교외별전(敎外別傳).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하는,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수마(睡魔) | 생력(省力), 힘을 덜은 것이 바로 득력(得力), 힘을 얻는 것.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〇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19분 41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끊어져 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렇게 해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 스님이 천하 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法擧揚)을 해 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맡었지만, 원오극근 선사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하시지 안 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 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한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갖다가 막 강짜로 압력을 가해 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어갈 때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데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생각을 내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먹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데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하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53분16초~1시간12분54초)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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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단독로((No.217))—(게송)南北東西無定着 生涯只在一枝筇 舌頭細嚼煙霞味 直入千峰更萬峰 | 오직 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향해서 목숨을 걸어 가는 데에다가 비유하는 게송입니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한디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구나. 동서남북 정처가 없어. 출가해서 걸망을 지고 도반과 선지식을 찾아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하기 위해서 행각을 하는 분상에는 동서남북 정착(定着)함이 없어. 생애(生涯)는 지재일지공(只在一枝筇)이여. 오직 주장자 하나에 온 생애를 다 맽겨버렸다 그 말이여. 주장자가 동쪽으로 행하면 동쪽으로, 금년 여름에는 동쪽에서 지내다가 겨울철에는 북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갔다 남쪽으로 갔다 동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갔다, 주장자 하나로 생애를 맽겼는데.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煙霞味)여. 무엇을 먹고 사느냐? 무슨 음식을 먹고서 영양을 섭취해 가지고 이 생애를 끌고 가느냐? 연하(煙霞), 안개와 연기를 씹어서 먹고 거기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도 안개는 끼고, 끼어 있는 그 안개를 먹고 살지, 쌀이나 콩이나 팥이나 무슨 고기나 그러한 세속에서 말하는 영양 있는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하루 세끼 밥을 먹되 맛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한 오리도 걸칠 것이 없이, 그러기 때문에 밥을 먹되 쌀이 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실오라기가 없는 그런 옷을 입고, 그리고 먹는 것은 연하(煙霞), 자욱이 아침에 끼었다 낮에는 또 벗거지고, 다시 해가 저물면 또 끼었다가 또 벗거지고 하는 그 자욱한 안개를 먹고 산다. 이 안개라고 하는 것은 생사(生死) 요달(了達)을 하기 위해서 입으로 물질로 된 그것을 먹고 이 영양을 섭취한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는 알 수 없는 공안 화두에 대의심(大疑心) 그놈 하나로 그놈에다가 나에 온갖 정성과 온갖 분심(憤心)과 생명을 거기다가 걸고, 먹어도 먹은 줄을 모르고 추워도 추운 줄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고 오직 그 의단(疑團) 하나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연하(煙霞)를 먹고 산다.
그래 가지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다. 천봉(千峰), 바로 천(千) 봉아리 속을 향해서 들어가고 다시 또 만(萬) 봉아리를 향해서 간다.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그 수없는 것을 보고, 수없는 것을 듣고, 수없는 생각이 일어나는 그것들이 모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우리 앞에 제출되는 모든 것은 바로 그것이 천 봉오리고 만 봉오리다 그 말이여. 그 봉오리 봉오리 넘을 때마다 거기에서 피렴심(疲厭心)도 느끼지 아니하고, 소득심(所得心)도 갖지를 아니하고, 만족심도 갖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향해서 목숨을 걸어 가는 데에다가 비유하는 게송입니다.(처음~8분29초)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의심(화두드는 법) ((세등51))—참선에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들어 있다.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 (게송)摩尼珠人不識~ | 바로 공부를 지어 가는 마당에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어.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처음에 선방에 와 가지고 정진을 하되, 올바르게 공부를 못해 가지고 참 가석하게도 몸에 병이 난다든지 또는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돌이키기 어려운 그러한 지경에 이른 사람을 가끔 봅니다.
이 참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이거여. 화두를 타 가지고 그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는 데 있어서 큰 의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여.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여. 큰 의심을 가지고 정진을 해야 그 큰 의심이 터지면서 크게 깨달어. 의심이 시원찮으면 깨닫기도 어려우려니와 설사 어떠한 소견이 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깨달음이라 볼 수가 없어. 그러니 큰 깨달음(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무슨 법문을 듣거나, 무슨 경을 보거나, 무슨 일을 만나거나 온갖 종류에 의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의심이 날 때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일에 대한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 다른 의심을 풀려고 하지 말고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유리병이 있는데, 그 유리병은 주둥이는 쪼끄마하고 그 밑에 몸뚱이는 크낙해 가지고 그 유리병 속에다가 오리 새끼를 집어넣었다. 오리 새끼 금방 깐 거야 조그마하기 때문에 그 유리병 작은 주둥이로 집어넣었어. 오리 새끼를. 넣어 가지고 날마다 물도 주고 먹이도 주고 해 가지고 그 오리를 먹여 살렸는데 한 달 두 달 석 달 넉 달 크니까, 그 오리가 크막한 애미가 되었어. 몸뚱이는 크니까 그 안에서 맘대로 오리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컸는데, 그 오리를 유리병 밖으로 꺼내야겠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유리병을 깨지도 말고 그 오리도 다치지 않게 어떻게 이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느냐?' 이러한 문제를 냈다.
이것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중에 하나지만, 어떤 사람이 수수께끼처럼 이 문제를 물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여. '유리병을 어떻게 깨지 않고 그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는가?' 그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오리를 죽여 가지고 대가리 띠어서 꺼내고, 날갯죽지 꺼내고, 발목쟁이 꺼내고, 몸뚱이도 토막을 내서 꺼내고, 아 그렇게나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유리병을 유리를 갖다가 확 깨 가지고 그렇다면은 오리를 다치지 않고 꺼낼 수가 있겠으나, '유리병도 조금도 깨지 말고 다치지 않게 하고 그리고서 오리도 상하지 않게 어떻게 꺼낼 수가 있는가?'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자기는 '이뭣고?' 화두를 하고 있는데, 누가 그 오리 꺼내는 문제를 제기를 했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도 '어떻게 하면 오리를 꺼낼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자기는 '이뭣고?'를 해라 그 말이여. 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분은, 설사 다른 공안—오리 새끼 꺼내는 공안이 되었건, 또는 이뭣고 공안이 되었건, 또는 판치생모 화두에 대한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건 간에, 그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이외의 화두나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하물며 세속에 어떠한 문제나 경전에 있는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어. 천 가지 만 가지 모든 의심을 만났을 때에 탁! 똘똘 그놈을 뭉쳐서 자기의 본참공안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렇게 해 나간다면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산을 보더라도 '아, 산이 푸르르구나, 산봉우리에는 구름이 끼였구나' 이런 식으로 쫓아가지 말고, 푸른 산을 보자마자 바로 자기의 화두(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정전백수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판치생모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자기의 본참화두로 돌아와. 이것이 바로 천의만의(千疑萬疑)가 병작일의(倂作一疑)다 그 말이여. 이 화두에, 자기의 본참(本參)에 대한 의심이 철저하지 못하면 이것이 큰 병(病)이여. 꺼떡허면 자기 화두는 놔 버리고 어믄 다리를 긁어. 어믄 일에 신경을 쓰고, 어믄 일에 걸려든다 그 말이여. 이것이 병 중에서는 최고의 큰 병이여.
눈으로 보면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무엇을 들으면 듣는 데에 끄달리고, 먹는 데에 끄달리고, 뭘 생각하는 데에 끄달리고, 남이 잘하고 잘 못하는 데에 끄달리고, 그게 다 발심(發心)이 철저하지를 못하고 자기의 본참(本參)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 육근(六根) 육식(六識) 십팔계(十八界)에 잠시도 편안할 겨를이 없이 십팔천(十八天)을 돌고 돌아. 그러다가 잘못 끌어 박히면은 삼악도에 떨어져서 헤어날 기약이 없다 그 말이여.
삼악도(三惡途)가 어디에 있으며, 십팔천(十八天)이 어디가 있는가?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일념 속에 들어 있고, 십팔천이 일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 생각을 맹렬히 단속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에 충실하다면 당장 금생에 그 사람에게는 삼악도도 찾을 길이 없고, 십팔천도 어디서 찾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금생에 결정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요, 세세생생에 어느 곳에 삼악도를 찾을 것이냐 그 말이여. 내가 떨어져야 할 삼악도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십팔천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니주(摩尼珠), 이 마니주를 터억 지니면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고, 육도법계를 자유자재로 댕기되 하나도 손상을 입지를 안 해. 그 마니주를 지녔건만 사람이 알지를 못하더라.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여. 그 마니주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여래장(如來藏) 속에 그것이 떠억 감추어져 있더라 그 말이여. 여래장이 무엇인가?
여래장은 바로 우리 중생심(衆生心)이어늘, 중생심 그 제8식(第八識)이 바로 그것이 여래장인데, 그 여래장 속에서 일체 희로애락과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일어나는 색성향미촉법, 육근 · 육식 · 육진(六塵. 六境)이 바로 여래장 속에서 일어나는 물결인데, 그 여래장 속에 그 마니주가 들어 있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여섯 가지 신통(神通)을 부리는데, 그 여섯 가지 신통이—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고, 혀를 통해서 맛을 보고, 육체 몸을 통해서 차고 덥고 하는 것을 느끼고, 의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인식을 한다. 그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 마니주를 가진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신묘한 신통이다.
그런데 그 신통은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요, 분명히 있으되 비어 있는 것이고, 분명히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 그렇게 소소영령하건마는 그놈을 찾어보면 돌이켜 찾어보면 자취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비었으되 비지 아니한 것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로구나. 이 마니주, 이 한 알갱이 구슬이 뚜렷하게 빛나고 있건마는, 분명히 색깔이 빛깔이 있으되 빛깔이 없더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차 있으되 찾으면 간 곳이 없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소소영령하건마는 볼라야 볼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으니, 어찌 이것이 색상(色相)이 있다고 하며 색상이 없다고 할 것인가? 있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니,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가 없어.
중생의 소견으로 '있네, 없네' 따질 필요가 없어. 따져봤자 맞지 아니한 것을 왜 따져?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가지고서는 56억 7천만년 뒤에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따져도 이것은 해결 날 문제가 아니여. 오직 본참공안에 충실해서—나아가자니 앞이 맥히고, 물러서자니 뒤도 맥혀. 꽉 맥힌 의심으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불 속에 들어앉은 거와 같아서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앞이 맥혔으니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자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어. 왼쪽으로도 맥혔고, 오른쪽으로도 맥혔어.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불이 훨훨훨 타고 있다 그 말이여. 그냥 있을 수도 없고 나가자니 팔방이 사방이 꽉 맥혔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거냐?
'이뭣고?'
우리는 꿈을 꿀 때에 무서운 호랑이나 큰 구랭이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뿔 달린 무서운 악귀 같은 것에 핍박을 받아서 도망갈라고 하니 발이 떨어지지를 않고, 그 자리에 있자니 잡혀 죽게 생겼고,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꿈을 꾸는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옛날에 참선하지 아니할 때에는 고함을 지른다든지, 막 도망갈라고 몸부림을 치되 도망갈 수도 없고, 그러다가 한참동안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자기가 지르는 자기의 고함소리에 눈을 뜨고 보면 전신에 땀이 흠뻑 젖어 갖고 있는 그러한 꿈을 꾼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법을 알아 가지고 참선을 한 뒤에는 그러한 상황 속에 화두를 탁! 들어 버리면 눈이 딱! 떠져 버린단 말이여. 비단 꿈속에 뿐만이 아니여. 인간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나는 일, 속상하는 일, 기분 나쁜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슬픈 일을 당하거나, 기쁜 일을 당하거나, 일체 선악 경계를 당했을 때, 화두를 딱! 들어 보라 그 말이여. 어디에 속상한 일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분한 생각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슬프고 괴로운 생각이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정진을 다그쳐 나가면 깨닫기를 바랠 것이 없어. 독 안에 든 자라와 같아서 지가 어디를 갈 거냐 그 말이여. 깨달음을 기다리지도 말고, 조급한 생각을 내지도 말고, 누가 와서 나를 깨닫게 해 주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어. 바로 공부를 지어 가는 마당에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어.
'어서 빨리 깨달러 가지고 남 앞에 큰소리 한번 쳐보리라'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가 있어. 큰소리쳐서 뭣해?(23분11초~41분57초)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