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의심(화두드는 법)2022. 11. 22. 19:39

의심(화두드는 법) (전강선사 No.014)—아는 걸로는 소용없어. 知之一字 衆禍之門 | 참구(參句)라 하는 것은 그대로 활구(活句) | 탁! 맥혀서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다'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먹는다'

아미타불 한마디 부른 가운데에 구백 생멸심(九百生滅心)이 그 속에 들어 있다 | 입껍데기로만 말어라 | 하근 중생은 화두밖에는 없어 | 화두가 안 들린 원인은 이 못된 중생념, 십악(十惡) | 화두가 안 되도 물러가지 아니허면 다 된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 12분 6초.

 

(2) 15분 3초.


[법문] 전강선사(No.014)—전강선사 일대기 제7호(경술1970년 12월 10일 새벽.음) (전014)

(1)------------------

“여하시(如何是)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인고? 어떤 것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인고?”
생사해탈법이 서천(西天)에서, 서역(西域)서 왔으니까 서래의를 물은 것이여. 서래, 그때는 그 인도(印度) 모도 저 서래(西來) 아닌가. 서쪽 아닌가, 여그서. 확철대오(廓徹大悟)헌 생사 없는 대해탈법이 서쪽에서 왔으니까 서래의(西來意)를 묻는 것이여.

“그 서쪽에서 온 그 뜻이 어떻습니까?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자 이빨에 털이 났느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느니라”

그 원, 세상에 그... 따지면 그 뭐 아무데나 붙일 수 있제. 수수꺼끼, 아(兒)들 수수꺼끼처럼. 뭐 수수꺼끼나 뭐 다를 것이 무엇이 있어.

수수꺼끼 그녀러 것, 그것 참 처음에 들어 보면 깜깜 알 수 없지. 그러지마는 그 따져서 모도 붙여 보면은 다 알 수 있는 것이여. 허지마는, 그 수수꺼끼 그거 천 개, 만 개를 다 알아 봤던들 그 뭣허는 것이여? 따져서 모도 아는 것이니.

이리저리 생각해 마음으로 따져서 아는 것은 소용없다 그말이여. 그걸 해석이라 그래. 모도 해석해서, 모도 생각을 붙여서, 뉘기 짜서 아는 것 가지고는 소용없어. 그러기에 지지일자(知之一字) 중화지문(衆禍之門)이여. 아는 것이라는 것은 중화(衆禍)의 문이여. 아는 걸로는 소용없어. 참선법은 그게 아니여.

‘어째서 판자 이빨, 판자 이빨에 털이 났다고 했는고?’
‘조주 스님이 그렇게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으니,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닥 했는고?’
법상(法床)에 올라올 때마다 내가 해 주지. 왜 이래? 이놈을 가지고 모도 대중이 지금 철두철미허게 정진해 나가니까, 이걸 해 줄 수밖에 없지. 제일 중요헌 것이니까.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저 나무 판자 말이여, 나무 판자. 나무로 썰어 논 판자 말이여!
‘판자 이빨에 터럭이 났다’ 어떤 것을 판자 이빨이라 하며, 판자 이빨에 뭔 털이 나? 털이 왜 거가 나? 원 당최, 세상에 거 뭔 소리냔 말이여? 무슨 뜻이여?
알 수 없구나! 알 수 없는 그 의심. 알 수 없는 걸 의심이라고 안 혀? 가령, 사람을 내가 하나 잊어버렸는디, 그 사람이 도망갔는디 ‘어디로 갔나? 어디로 갔을까?’ 간 곳을 알 수 없다.

‘응! 그 사람이 아무 디가 있을 것이다. 거그 있는가?’ ‘아무 디 찾아가면 거 있을 것이다. 아! 거그는 저, 어디 무슨 지리산 가 있을까?’ 고렇게 따지지를 말어. 그 사람이 갔는데, '어디로 갔는고?' 알 수 없구나.

‘어디로 갔는가? 금강산으로 갔는가? 태백산 속으로 들어갔는가?’ 이렇게 분석허지를 말고.
‘어디로 갔는고?’ 알 수 없어. 그저 무조건 여하약하허고 알 수 없다.

수참활구(須參活句)언정, 수참참구(須參參句)언정, 모름이 참구를 헐지언정—참구, '참구헐 참(參)' 자, '연구헐 참(參)' 자. 수참활구언정, 활구를 참상(參詳) 헐지언정. 참(參)이여, 참(參). 참의(參意)가 아니라, 참(參)이여.

참의(參意)라는 것은—참구와 참의와 달라. 참구(參句)라 하는 것은 그대로 활구(活句)여, 그것이. '살 활(活)' 자, '글귀 구(句)' 자, 활구여.
활구를 참상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상허지 말어라. 사구라 하는 것은 그건 내가 먼첨 죽고 남 죽이는 것이여, 그거. 천하에 못쓴 것이 참선에 사구다 그 말이여.
사구(死句)라 하는 것은 모도 아는 것이여. 이치도 있고, 모든 이치가 거그 들어붙고. 모도 아는 것이고, 모도 해석해서. 그것이 선(禪)이 아니여. 참선이라는 것은 그걸 선이라고 안 혀. 허니, 탁! 맥혀서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을 활구(活句)락 햐.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다’ 당장에 판대기 이빨에 털 난 도리를 알 수 없지. 그 도리를 알 수 없는 것이 조주의 뜻이니라. 조주의 뜻이여.
‘어째서 조주 스님은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고 했는고?’ 그 조주의 뜻을 찾는 것이,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는 놈을 알 수 없는 것이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난 놈이 다르고, 조주 스님의 뜻이 다르고, 요리 가서 찾고 조리 가고, 그거 못써. 그걸 참의(參意)라 햐. ‘조주 스님 뜻은 무엇이여, 판대기 이빨에 털은 무엇이며, 그건 다른가 어쩐가?’ 모도 참의여. 참구(參句)가 못 되고 참의(參意)여! 활구가 못 되고 사구여!
요것을 분간해서, 화두를 똑! 한 밥 먹을 동안을 허드래도 고렇게 야물딱지게 다루어 들어가야 혀.
화두 잘못허면은, 화두병 들어 버리면은 그만이니까. 무슨 공부여. 공부는, 무슨 공부가 그런 공부가 있나? 그건 소용없는 공부여.

이치로 모도 그 수수꺼끼 같은 거, 왜 그런 것도 처음에 들으면 꽉 맥혀 모르제. 그놈을 자꾸 상량(商量)허면은, 사량(思量)을 붙이면은 그만 알거든.

인방(寅方), “인(寅)은, 호랭이는 질고, 용단(龍短)이라. 용은 짜룹다. 그게 뭔 뜻이냐?”
아, 그놈의 것, 용은 지드란헌 지드란헌 배암 같이 생긴 진 놈이고, 호랭이는 쪼끄만헌 짜룬 것인디, 어째서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닥 했는고? 아, 그거 알 수 없거든.

그것 따져 보면 안다 그말이여. 용단(龍短)이다. 용이라 하는 것은 진방(辰方)을 용이라 햐, 진방.
동서남북에 방우가 다 있어. 열두 방우가 있지 않어? 자축인묘진사오미(子丑寅卯辰巳午未)...

진방이 거, '용 진(辰)' 자, 진방. 용(龍)이라고 헌단 말이여. 진방에서 해가 뜰 때에는 해가 자룹고, 인방(寅方)에서 해가 뜰 때에는 해가 질다 그 말이여. 그러니께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다 그 말이여. 그놈을 갖다가서 “무엇이냐?” 물으면, 따지면 알거든. 그 방우를 따지면 아는 그런 것이여.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먹는다. 그 뭔 뜻이냐?” 아, 그거 설찬히 어렵다 그 말이여. 그 생각해 보면 또 그것도, 퇴깽이는 묘방(卯方). 동방(東方)이 묘(卯)거든. 동쪽이 묘니까, 묘에서 해가 올라와 가지고, 퇴깽이 알이란 말이여.
저 유방(酉方)으로 넘어가거든. 해 넘어가는 데 유방(酉方)이니까. 유방, 닭이 집어먹는다 그 말이여.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생킨다 그 말이여. 아, 거 모도 설찬히 수수께끼라도 그렇게...

그렇게 따지는 건 절대 아니여, 선(禪)이라는 것은.

또 그러고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그대로 딱!
내가 어제 아침에, “그 꿀 먹을 때에 어떻게 했으면 살아 가겄느냐?” “달다!”

내가 도장원(都壯元)했다고 안혀? 내가 도장원했다고 안혀? 역사적으로 도장원이지! 당시에 어찌 바로 해 놨는데, 아니라고 헐 수가 있는가? 못 하지.

그, 고렇게 공안이란 게 딱! 조사관(祖師關)이란 게 백혀 있어.

조사관은 도무지, 뭔 데서 갖다와서 무슨... 어떻게 무슨 저... 뭐락 하노? 그 출처(出處)같은 거, 그런 것도 없어. 출처가 어디 그 조사관에 가 출처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고, 어록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여.
다맛 조사서래의에 딱! 답해 논 것이 ‘판치생모’여. 그 조사관 딱! 해 놓은 것이여.(9분59초~22분5초)





(2)------------------

아미타불(阿彌陀佛) 부른 사람이 ‘아미타불밖에 없으니,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은 극락세계 간다’ 이렇게 믿고는 고성염불(高聲念佛) 헌다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러고 앉었지.
그 부르면서 그 속에는 아미타불 한마디 부른 가운데에 구백 생멸심(九百生滅心)이 거그 그 속에 들어 있다. 온갖 분별심이 거 다 붙어 있네.

멸업장진언(滅業障眞言) ‘옴 아로륵계 사바하’ 업장(業障) 녹인다고 “옴 아로륵계 사바하, 옴 아로륵계 사바하”
그놈 소리, 고성염불 소리에, “아로륵계 사바하, 아로륵계 사바하” 뭔, 저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이 부르는 속에 가서 미세헌 생사념(生死念)이 꽉! 들어찼네. 이것을 알아야 혀.
그러니 “그 구피변(口皮邊)으로, 입껍데기로 헌 것이 무슨 이익이 있느냐?” 그랬거든. 그 이익이 없어.

경을 읽드래도 “여시아문(如是我聞) 일시불재사위국(一時佛在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그거 뭣이여?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니라. 네 마음 네가 한번 반조(返照)를 못허면은, 알 수 없는 놈이 반조여.

내가 나를 몰랐으니까 아지 못헌, 알 수 없는 놈을 하나 추켜들어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 거기에는 그 미세한 가리같은—가리 찌클으면 부우 허데끼—고러헌 망념(妄念)이 없어.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래야 중생념을 항복 받는 것이지, 그 이외에는 없는 것이여.
그래서 그 의단독로를, 구피변(口皮邊)을 제일 말했거든. 입껍데기로만 말어라 이 말이여.

그래서 ‘옴마니반메훔’이라든지, 정상화불수(頂上化佛手) 주문(呪文)이라든지, 팔만사천 주문 읽는 법이 거, 고성지(高聲持)가 있지. 소리 높여, '높을 고(高)' 자, '소리 성(聲)' 자, '가질 지(持)' 자, 고성지가 있고.
그다음 미성지(微聲持)가 있고, '가늘 미(微)' 자, '소리 성(聲)' 자, '가질 지(持)' 자, 미성지가 있고. 그다음에 유가지(唯加持)가 있고, '오직 유(唯)' 자, '더할 가(加)' 자, '가질 지(持)' 자, 유가지가 있고. 그다음 금강지(金剛持)가 있어, 금강지. 금강지라는 것이 그것은 뭐...

“옴마니반메훔” 그것 고성지고, 내 귀에만 들린 것 (작은 목소리로)“옴마니반메훔” 그것 미성지고, 유가지라 하는 것은 셋바닥도 동(動)치 않고, 설근(舌根)도 동치 않고 헌게 유가지고, 그다음에 금강지여.

금강지라 하는 것은, 당초에 금강지라는 것은 셋바닥이고 무슨 뭔, 동치 않고 동허고... 거그는 천성(千聖)도 불식(不識)이여! 불불(佛佛)도 불상견(不相見)이여!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여! 금강지라는 것은.
‘금강지로 들어가야 헌다’ 해 놨어. 그러니 그게 바로 곧 그 선(禪)보담도 더 혀. 그 밀(密)이여. 밀교(密敎)라는 게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여.

그래 가지고는 처억 그 관법(觀法)이 있는디, 이사무사지묘(以思無思之妙)다. 생각으로써 생각 없는 묘(妙)가 있어. 그 헐래야 못허는 것이여.
반사영염(返思靈焰)에 무궁(無窮)이다. 도리어 영염(靈焰)에 신령스런 불꽃, 영염에 무궁을 관한다. 영염무궁(靈焰無窮)을 관한다. 또 그 생각도, 사진(思盡)이 환원(還源)이다. 그 생각이 다하여 근원에 돌아가느니라.

그 근원이 어디가 근원인가? 근원이 어디인디 근원으로 돌아가는가 말이여?
생전 해야 그건 중생념으로 되지 않어! 관법과 반조법(返照法)과 다 그려. 이렇지. 어떻게 허는 것이 불... 허니, 우리 중생은 성상상주(性相常住)해서 사리불이(事理不二)헌 곳이 어느 곳인가 말이여?

그 나가상정(那伽常定)이니라. ‘나가상정에 들어온다’ 허는 게, 그것이 참으로 바로 돌아가는 귀향처인디, 구경처(究竟處)인디 어떻게 혀? 중생념으로 되아?

이 중생은 도무지 눈만 뜨면, 잠만 잘 것 같으면 제팔 뢰야식장(第八賴耶識藏)에 가 딱 잠겨서, 근본식(根本識), 근본무명(根本無明)에 가 딱! 주저앉어 잠겨 가지고는, 천지(天地) 분간(分揀) 아무것도 모르고 매(昧)해 버리는 건디.
거그서 일념이 나올 것 같으면은 그만 육식(六識)으로 벌어져, 육정(六情)으로 벌어져 육근의식이 되아 가지고는, 그 육백 생멸심이 퍼일어나 가지고는 전부 생멸심 뿐인데 어떻게 헐 거냔 말이여.

거, 그래 가지고는, 그걸 가지고는 뭐 아무리, 뭐 지성으로 해 보고 그대로 되는가?
‘옴마니반메훔’을 많이 많이 부를 것 같으면은 그만 부귀, 굉장헌 부귀를 헌다 했어. 어디 그 되나? 정상화불수(頂上化佛手)는 칠 일만 헐 것 같으면은 아, 그만 육신통(六神通)이 막 난다 했어. 그 되나?
미쳐 버리지. 중생견(衆生見)으로 되냐 그말이여? 벌써 금강지를 턱 들어가서도 그와 같은 관법이 있는디.

허니, 우리 범부선(凡夫禪)이라 하는 것은 범부는, 우리 지금 중생이라 하는 것은 그저 이 말세선, 우리도 지금 말세선이여. 이 말세선이기 따문에 말세(末世) 학자라는 건 상근이 없어. 뭐 상근(上根) · 중근(中根) · 하근(下根)이 언제는 있고 언제는 없으리오마는, 헐 수 없이 또 그놈의 말세가 있어.
말세 중생이라는 것은 너무 간혜(乾慧)가 많아. 마른 그 간혜가 너무 많여. 간혜 많은 것이, 너무 퍼떡 퍼떡 잘 아는 것이 그것이 하근(下根)이여. 상근대지(上根大智)는 분석, 따지는 게 없어! 그만 막 들어가지. 그대로.

허니, 우리 하근 중생이 어쩔 수 없어! 화두밖에는 없어.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냐?”
“판치생모(版齒生毛)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 났느니라”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그놈의 중생념 속에, 중생 그 망상 번뇌 속에서 요것 하나를 처억 그놈을 어떻게 만들아 가지고, 받아 가지고 해볼라니 되냔 말이여? 죽어도 안 되는 것이 그뿐이다.
오직해야 ‘역수탱주(逆水撑舟)니라’ 물을, 들입대 흘러가는 기맥힌 급류 중에, 급허니 흘러가는 물에 사람이 거그 발자취도 거그 뭐 대보지 못헐 만헌 그러헌 그 급류에 배를 끄집어 올린 것 같다.

그러니 왜 그렇게 안 될 꺼여? 화두가 왜 그렇게 도망가?
유구유원(悠久悠遠)이여. 더욱 멀어져. 헐라고 허면 더 멀어져. 아! 이런 화두를 끄집을라면 더 멀어지네. 이런, 이런 놈의 꼴 좀 보소!

왜 그렇게 안 된 원인이 뭐냐 이 말이여.
그렇게 화두가 안 들린 원인이라는 것은 뭐냐 허면은 이 못된 중생념—그 살생이나 하고, 도둑질이나 하고, 사음 음행질이나 하고, 거짓말이나 하고, 두 가지 양설(兩舌), 그저 악구(惡口), 고런 놈의 습기(習氣), 그저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 이 십악(十惡) 그 중죄짓는 버르쟁이, 그 마음 고놈으로써, 일어나는 마음으로써 퍼진 고놈이 전면의지(纏綿意地)해서—뜻 땅에, 내 뜻 뿌럭대기가 꽉! 솜처럼 때리 얽허져 가지고는 그놈 조금 잠복시켜 놓고 화두를 ‘어째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해도, 그놈이 그만 도로 퍼일어나.

이놈의 것은 도무지 백억천만 겁에 내 생겨난 때가 없이 오면서 지어 논 놈의, 그놈의 그만 그 번뇌 망상이 그놈이 뒤끓어 일어나니, 도모지 화두를 추켜들라면은 그렇게도 급류 중에 배 끌어올릴라 헌 것처럼 조금 이러면, 한 일 고쯤 끄집어 올려 놓으면 십 고나 물러가고, 십 고 끄집어 올려 놓으면 백 고나 물러가고, 이놈이 이렇다 그 말이여. 허지마는, 불가불 이 말세 학자가 닦을 것은 선(禪)이여.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났다 했는고?” 의심, 알 수 없는 놈만 찾어.
안 되면 또 허고, 안 되면 또 허고, 안 되도 또 해서 물러가지 말어라. 그 신심(信心)만 물러가지 아니허면, 참으로 발심해서 그 철저헌 신심만 물러가지 아니헐 것 같으면은 수불견성성불(誰不見性成佛)이냐? 누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못할 꺼냐? 허! 물러가지 아니허면 다 된단 말이여.

허니, 처음에 화두학자가 처음 들어와서, 한 사나흘이나 한...
여그 선생님도 저 봐. 아주 참, 세상에서 아주 강연도 참, 웅변대회에서 제일가신 선생님이시고, 학교 선생님도 여태까장 수십 년을 해 나오시고 또 다 저 종교계에서 근 20년 동안 종교를 참, 그렇게 도를 닦아 오셨지마는, 무척 깊으라니 연구를 많이 허셨어.

그래 가지고 저렇게 오셔서 지금 참말로 이... 그래도 참선은 아마 그렇게 몇 철을 앞두고 해 보시지는 안 했는가 어쩐가 말씀은 그러지마는, 또 많이 허셨는지도 모르제.
이렇게 오셨지마는, 마음은 그저 한 일주일에 그만 일 마치고, ‘참선법이 참말로 그와 같이 깨달은 법이 있다면은 내가 일주일 동안에, 일주일 꺼리 밖에 될 것 뭐 있나?’ 그래 가지고 한 일주일 한번 해 보신다고 어저께 오셨는디 아, 이렇게 오셔서 엊저녁부텀 무척 고생을 하셨겠지.

그같이 편안헌 방에서 잠 편안히 잘 주무셨을 것이고, 좋은 그저 참 이부자리 속에서 편안히 주무셨을 터인디, 여기에 오셔서 그만 같이 모도 한방에서 이렇게 고생허고 주무시고, 인자 앞으로 일주일 동안을 한번 저렇게 고생을 같이 해보신다고 밥도 같이 그만 그 반찬도 아무것도 없고, 또 아침부터 죽 자시고, 이것을 모도 저렇게 견뎌 가시면서 한 일주일 동안 해보신다고 하는 그러헌 용맹심(勇猛心)을 가지고 오셨는데. 무척 참, 그 용맹심 거룩헌 마음이시여.

“계시라”고. 이렇게 해놨는데.
일주일 동안에 한번 용맹심으로써 일 마칠 마음을 가지신 것이여. 허지만 일주일 동안에 못헌다고 해서 퇴타(退墮)가 있으면 안 된단 말씀이여. 또 일주일, 또 일주일, 그저 언제까지든지 일주일 일주일이 자꾸 계속되아 나가야 허신단 말씀이여. 여까장.

내 그저, 내가 그래 정성스런 마음으로써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여. 미국사람 같은 사람은 손이 오면은 반찬이 있건 없건 한 가지면 한 가지 채려 놓고 “정성껏 채렸으니 많이 잡사 주십시오” 우리 동양사람은 잔뜩 채려 놓고도 “반찬이 없지마는 많이 잡사 주십시오”
그래 동양사람 인사는 그 좀, 그 서양사람 인사만치 바르지 못혀. 그대로가 못 된다 그 말이여. 모도 꾸며대서... 내 있는 대로 헌 말씀이여. 여까장 했습니다.(38분23초~53분2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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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서천(西天) ; ①서쪽 하늘. ②서천 서역국(西天西域國 : 인도의 옛 이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지지일자(知之一字)가 중화지문(衆禍之門) ; 「‘알 지(知)’ 자 한 글자가 온갖 재앙의 문이다」
[참고 ①] 『대혜보각선사어록』 제16권 대혜보각선사보설(大慧普覺禪師普說) ‘부경간이 청한 보설(傅經幹請普說)’ (대혜종고 1089~1163 | 김태완 옮김 | 소명출판) p230~234 참고.
那箇是生而之知者 如趙州作沙彌時 同本師行脚到南泉 値南泉臥次 本師禮拜了 趙州方禮拜 南泉問云 近離甚處 州云 近離瑞像 泉云 還見瑞像麽 州云 瑞像則不見 面前只見臥如來 南泉遂起 問 爾是有主沙彌 無主沙彌 州云 是有主沙彌 泉云 那個是爾主 若是如今禪和家 便近前彈指 打箇圓相 喝一喝拍一拍 拂袖便行 放出這般惡氣息 爾看他趙州 緩緩地近前道 孟春猶寒 伏惟和尙尊候萬福 泉乃喚維那云 此沙彌別處安排

어떤 것이 태어나면서 아는 경우인가? 예컨대, 조주 스님(778~897)이 사미였을 때에 본사(本師)와 함께 행각하여 남전(南泉)에 이르렀는데, 마침 남전 스님(748~834)이 누워 있었다. 본사가 절을 하고서 조주 스님이 막 절을 하려고 하는데 남전 스님이 물었다.

‘최근 어디를 떠나왔는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서상(瑞像)을 떠나왔습니다’

남전 스님이 물었다. ‘서상을 보았는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서상은 보지 못했지만, 눈앞에서 다만 누워 있는 여래를 봅니다’

남전 스님이 이에 일어나 물었다. ‘그대는 스승이 있는 사미인가? 스승이 없는 사미인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스승이 있는 사미입니다’

남전 스님이 말했다. ‘누가 그대의 스승인가?’

만약 요즈음의 선객이라면, 곧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퉁기거나, 한 개 원상(圓相)을 그리거나, 한 번 고함을 지르거나, 박수를 한 번 치거나, 소매를 털고서 곧장 가거나 하는 등등의 더러운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그대들은 보아라. 저 조주 스님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초봄이니 아직 춥습니다. 스님에게 만복이 깃들기를 삼가 빕니다’

남전이 이에 유나(維那)를 불러 말했다. ‘이 사미를 특별히 대접하여라’

次日却來問 如何是道 南泉也不行棒 也不下喝 也不談玄 也不說妙 也不牽經 也不引論 也不擧古人公案 亦不說事 亦不說理 只實頭向他道 平常心是道 爲他趙州已理會得平常心了 便却問 還假趣向也無 泉云 擬向卽乖 州云 不擬爭知是道 泉云 道不屬知 不屬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眞達不疑之道 猶如太虛廓然蕩豁 豈可於中彊是非耶 趙州於言下千了百當

다음날 다시 와서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남전 스님은 방망이를 휘두르지도 않고, 고함을 지르지도 않고, 현묘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경론을 인용하지도 않고, 옛사람의 공안(公案)을 말하지도 않고, 사실을 말하지도 않고, 이치를 말하지도 않고, 다만 확실하게 그에게 말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

조주 스님은 이미 평상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다시 물었다. ‘향하여 다가갈 수 있습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향하여 다가가려 하면 어긋난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향하여 다가가지 않으면 어떻게 도를 압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도는 앎[知]에 속하지도 않고, 알지 못함[不知]에 속하지도 않는다. 앎은 허망하게 깨어 있는 것이고, 알지 못함은 깜깜한 무기(無記)이다. 만약 참으로 의심없이 도에 통달하면, 마치 커다란 허공과 같아서 막힘없이 텅 비었는데, 어떻게 그 속에서 억지로 옳으니 그르니 할 수 있겠느냐?’조주 스님은 그 말을 듣고서 밝게 깨달았다.

南泉道 道不屬知 不屬不知 圭峰謂之靈知 荷澤謂之 知之一字衆妙之門 黃龍死心云 知之一字衆禍之門 要見圭峰 荷澤則易 要見死心則難 到這裏須是具超方眼 說似人不得 傳與人不得 所以圜悟先師說 趙州禪只在口脣皮上 難奈他何 如善用兵者 不齎糧行 就爾水草糧食 又殺了爾

남전 스님은 ‘도는 앎에 속하지도 않고, 알지 못함에 속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지만, 규봉 스님(780~841)은 그것을 일러 ‘신령스런 앎[영지(靈知)]’이라 하였고, 하택 스님(684~758)은 그것을 일러 ‘지(知) 한 글자는 온갖 묘함의 문(門)이다’라 하였고, 황룡사심(1043~1114) 스님은 말하기를 ‘지(知) 한 글자는 온갖 재앙의 문(門)이다’라 하였으니, 규봉과 하택을 알기는 쉬우나 사심(死心)을 알기는 어렵다. 여기에 이르러선 모름지기 테두리와 격식을 벗어난 안목을 갖추어야 하니,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없고, 남에게 전해 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원오 선사(先師 1063~1135)께서는 말씀하시길 ‘조주의 선(禪)은 다만 입술 위에 있으니, 그것을 어떻게 하기는 어렵다(다른 번역 : 조주의 선이 그저 말로 되는 것이라면 무에 어려울 게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마치 용병(用兵)을 잘하는 자가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그대의 수초(水草)를 양식으로 삼아 그대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참고 ②] 『고봉화상 선요 어록』 (고봉 1238~1295 |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시중(示衆 其十四)’ p110~112 참고.
若論參禪之要 不可執蒲團爲工夫 墮於昏沈散亂中 落在輕安寂靜裏 總皆不覺不知 非唯虛喪光陰 難消施主供養 一朝眼光落地之時 畢竟將何所靠

만약 참선의 요점을 논하자면 방석에 앉는 것을 집착하여 공부를 삼아 혼침과 산란 가운데 떨어지거나, 편안하고 고요한 속에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모두 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리니 오직 세월을 허송할 뿐 아니라 시주들의 공양을 소화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루 아침에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필경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山僧昔年在衆 除二時粥飯 不曾上蒲團 只是從朝至暮 東行西行 步步不離 心心無間 如是經及三載 曾無一念懈怠心 一日驀然踏著自家底 元來寸步不曾移

산승이 옛날 대중에 있을 때 죽과 밥 먹는 두 때를 제외하고 방석 위에 올라앉지 않고 다만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걸음걸음에 여의지 않고 마음 마음이 간격이 없었다. 이와같이 3년을 지내도록 일찌기 한 생각도 게으른 마음이 없다가 하루는 문득 나의 고향[自家]을 밟고 나니 원래 한 걸음도 옮긴 것이 아니었더라.

昏沈掉擧 喜怒哀樂 卽是眞如佛性 智慧解脫 只緣不遇斯人 醍醐上味 飜成毒藥 靈利漢 假饒直下知非 全身擔荷 正好朝打三千 暮打八百 何故 豈不見道 知之一字 衆禍之門

혼침과 도거, 희로애락이 그대로 진여불성이고 지혜해탈이건만 다만 인연이 이러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제호상미가 도리어 독약이 되었다. 영리한 사람이 가령 당장에 그른 줄 알아 온 몸으로 짊어지더라도 바로 아침에 삼천 번을 때리고 저녁에 팔백 번을 때릴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어찌 '지(知)라는 한 글자가 모든 재앙의 문이다'라는 말을 알지 못하는가?

若論此事 如蚊子上鐵牛相似 更不問如何若何 便向下觜不得處 拌命一鑽 和身透入 正恁麼時 如處百千萬億香水海中 取之無盡 用之無竭 設使志不堅心不一 悠悠漾漾 東飛西飛 饒你飛到非想非非想天 依舊只是箇餓蚊子

만약 이 일을 논하자면, 모기가 쇠로 된 소에 오르는 것과 같아서 다시 이러쿵 저러쿵 묻지 않고 당장에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버리고 한 번 뚫어서 몸으로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런 때 마치 백천만억 향수해(香水海)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취(取)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고갈됨이 없지만, 설사 뜻이 견고하지 않고 마음이 한결같지 않아 아득히 출렁대며 동으로 날고 서로 날다가 설사 네가 날아서 비비상천에 이른다하더라도 여전히 다만 한 마리 굶주린 모기일 뿐이더라.

[참고 ③] 『선가귀감』 (청허휴정 1520~1604 / 1564년에 지은 책) (용화선원刊) p220~221. (가로판 p226~227)
神光이  不昧하야  萬古徽猷로다  入此門來에  莫存知解어다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밝고나。이 문 안에 들어오매 알음알이를 두지 말지어다.



 

(註解) 神光不昧者는  結上昭昭靈靈也요  萬古徽猷者는  結上本不生滅也요  莫存知解者는 結上不可守名生解也라  門者는  有凡聖出入義하니  如荷澤의  所謂知之一字가 衆妙之門也라 


 


(주해) 거룩한 빛이 어둡지 않다는 것은 첫 머리의 「밝고 신령하다」는 것을 맺는 말이요, 만고에 밝다 함은 「본래부터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맺는 말이며,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하는 것은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하는 것을 맺는 말이다。「문(門)」이란 범부와 성인이 드나든다는 뜻이 있으니, 마치 하택신회 선사가 이른바 ‘알 지(知)’자 한 자가 온갖 묘한 이치의 문이라고 한 것과 같다.

吁라  起於名狀不得하야  結於莫存知解하니  一篇葛藤을 一句都破也로다  然이나  始終*一解요  中擧萬行하니  如*世典之三義也라 知解二字는  佛法之大害故로  特擧而終之하니  荷澤神會禪師가  不得爲曹溪嫡子者는 以此也라

아! 「이름 지을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다」는 데서 시작하여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것으로 끝을 맺으니, 이 한 권에 얽힌 넌출을 한마디 말로 모두 끊어 버렸다。그리하여 처음과 끝을 일해(一解)로써 말하고, 중간에는 온갖 행동을 들어 보였으니, 마치 유교 경전의 삼의와 같다。지해(知解) 두 글자는 불법에 큰 해독이 되므로 특별히 들어서 끝을 마치니 하택신회 선사가 조계의 적자가 못 됨은 이 때문이다.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참구(參句) ; 언구(言句 화두)를 참상(參祥)하는 것.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參意)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參句)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참상(參祥) ; 참구(參究).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알음알이. 지해(知解).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질다 ; ‘길다’의 사투리.
*짜룹다 ; ‘짧다’의 사투리.
*방우 ; ‘방위(方位)‘의 사투리.
*진방(辰方) ; 이십사방위(二十四方位)의 하나. 정동(正東)에서 남으로 30도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각도 안의 방향이다. 진(辰)은 십이지(十二支)의 다섯째 지지(地支)로 용(龍)을 상징한다.
*퇴깽이 ; ‘토끼’의 사투리.
*설찬히 ; 솔찬이. 솔찬히. ‘아주 많이. 상당히. 제법’의 사투리.
*도장원(都壯元) ; 장원(壯元). ①예전에, 과거(科擧)의 갑과(甲科)에서 일등으로 급제하는 일이나 그 사람을 이르던 말. ②글을 제일 잘 지어 성적이 첫째임. 또는 그런 사람.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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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고성염불(高聲念佛) ; 크고 높은 소리로 외는 염불. 큰소리로 염불하면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그치게 하여 쉽게 삼매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참고] 『아미타경통찬소(阿彌陀經通贊疏)』 중권(中卷) (규기찬窺基撰)
高聲念佛 有十種功德 一、能排睡眠 二、天魔驚怖 三、聲遍十方 四、三塗息苦 五、外聲不入 六、心不散亂 七、勇猛精進 八、諸佛歡喜 九、三昧現前 十、往生淨土

고성염불에 열 가지 공덕이 있다. ①능히 수면(睡眠)을 쫓는다. ②천마(天魔 : 魔王 波旬)가 두려워한다. ③염불소리가 시방(十方)에 두루한다. ④삼도(三塗 :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을 쉬게 한다. ⑤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⑥마음에 산란함이 없어진다. ⑦용맹히 정진한다. ⑧모든 부처님께서 환희하신다. ⑨삼매가 나타난다. ⑩정토(淨土)에 왕생한다.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 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 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니라' ; 「십무익(十無益 : 열 가지 무익한 것)」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선사의 시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청매집(靑梅集)』 (하권)에 있는 게송. 「십무익송(十無益頌)」이라고도 한다.
①심불반조 간경무익(心不返照 看經無益) 마음을 반조치 아니하면 경을 봐도 이익이 없고
②부달성공 좌선무익(不達性空 坐禪無益) 성품의 공함을 요달치 못하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고
③경인망과 구도무익(輕因望果 求道無益) 원인을 가벼이 하고 과보를 바라면 도를 구해도 이익이 없고
④불신정법 고행무익(不信正法 苦行無益) 정법을 믿지 않으면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고
⑤부절아만 학법무익(不折我慢 學法無益) 아만을 꺾지 않으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고
⑥내무실덕 외의무익(內無實德 外儀無益) 안으로 실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위의를 세워도 이익이 없고
⑦흠인사덕 제중무익(欠人師德 濟衆無益) 스승으로서의 덕이 부족하면 중생을 제도해도 이익이 없고
⑧심비신실 교언무익(心非信實 巧言無益) 마음이 진실치 않으면 교묘한 말을 해도 이익이 없고
⑨일생괴각 처중무익(一生乖角 處衆無益) 일생을 괴각질을 하면 대중과 함께 해도 이익이 없고
⑩만복무식 교만무익(滿腹無識 憍慢無益) 뱃속에 무식만 가득하면 교만해도 이익이 없다.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 조선 중기의 스님. 호는 청매(靑梅), 자는 묵계(默契). 청허휴정(淸虛休靜 서산대사)의 제자.
명아주 지팡이에 갈포옷을 입고 금강산 · 태백산 · 지리산 · 구월산을 두루 다녔다. 이렇게 삼십여 년 지내다 묘향산에서 참선하던 중,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을 따라 승병장의 한 사람으로 3년 동안 싸워 공을 세웠다. 왜군이 물러가자 전라도의 부안 변산에 이르러 아차봉(丫嵯峰) 마천대(摩天臺) 기슭 월명암에서 지냈다.
또 그림에 능해 1617년(광해군 9) 왕명으로 벽계정심(碧溪淨心) · 벽송지엄(碧松智嚴) · 부용영관(芙蓉靈觀) · 청허휴정(淸虛休靜) · 부휴선수(浮休善修) 등 다섯 스님의 진영을 그려 조사당(祖師堂)에 모시고 제문(祭文)을 지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의 연곡사(燕谷寺)에서 1623년(인조 1) 76세에 입적하였다.
*반조(返照) ; 돌이켜 살펴보는 것.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가리 ; ‘가루[분(粉), 분말(粉末)]’의 사투리.
*찌클다 ; ‘뿌리다(곳곳에 흩어지도록 던지거나 떨어지게 하다)’의 사투리.
*망념(妄念) ; 망상(妄想).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셋바닥 ; ‘혓바닥(‘혀’를 속되게 이르는 말)’의 사투리.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 ;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하다.
*이사무사지묘(以思無思之妙) ; ’생각으로써 생각 없는 묘(妙)‘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11권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703~704 참고.
師問 如何是眞佛住處 祐曰 以思無思之妙 返思靈焰之無窮 思盡還源 性相常住 事理不二 眞佛如如」 師於言下頓悟

대사(앙산)가 물었다. “어떤 것이 참 부처가 사는 곳입니까?”
영우 선사가 말하기를 “생각하면서도 생각 없는 묘함으로써 신령한 불꽃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되,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품[性]과 모습[相]이 항상 머무르고 일[事]과 이치[理]가 둘이 아니라서 참 부처가 여여(如如)하리라” 대사가 이 말끝에 단박에 깨달았다.
*나가상정(那伽常定) ; 행주좌와(行住坐臥)의 4위의(四威儀) 어느 때에도 항상(恒常) 삼매[定]에 들어 있는 부처님의 경지를 말함. 나가(那伽)는 용 또는 코끼리。 물에서는 용이 제일 힘이 세고 육지에서는 코끼리가 제일 힘이 세기 때문에 부처와 아라한을 나가(那伽)라 한다.
*구경처(究竟處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곳·때·지위 처) ; 최후의 도달처. 주로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인 경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제팔 뢰야식장(第八賴耶識藏) ; 제팔 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참고] 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근본식(根本識) ; 본식(本識), 근식(根識) 등이라고도 한다. 근본식은 유식학파에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지칭하는 말로 주로 사용한다.
*근본무명(根本無明) ; 모든 번뇌(煩惱)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깨닫지 못하고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리킨다. 곧 진여(眞如)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한 생각으로 가장 미세하게 움직이는 마음이며, 생사윤회의 근본이 된다.
지말무명(枝末無明)의 상대어. 무시무명(無始無明), 근본혹(根本惑), 근본불각(根本不覺), 근본번뇌(根本煩惱), 원품무명(元品無明) 등과 같은 뜻이다.
*매(昧)하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모른다. 어둡다.
*육정(六情) ; 육근(六根).
*중생견(衆生見) ; 중생의 번뇌에 얽매여 전도몽상(顚倒夢想 :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한 잘못된 견해.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상근(上根 위 상/뿌리 근)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매우 뛰어난 사람.
*간혜(乾慧) : 비록 깨쳐서 지혜가 났더라도, 정(定)의 힘이 충실하지 못하면 그것은 마른 지혜라고 한다。마른 지혜는 죽고 나는 이치를 알더라도, 나고 죽는 데 마음대로 자유자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乾 = 하늘 건, 마를 간)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역수탱주(逆水撑舟 거스를 역/물 수/배를 젓다 탱/배 주) ;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다’
*십악(十惡) ;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〇몸(身)—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婬 삿된 음행).
〇말(口)—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〇뜻(意)—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⓪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전면의지(纏綿意地 얽을 전/얽힐 면/뜻 의/땅 지) ; 마음의 밭에 얽히고설켜.
[참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보조국사(普照國師)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서.
無始習熟  愛欲恚痴纏綿意地  暫伏還起  如隔日瘧  一切時中  直須用加行方便智慧之力  痛自遮護  豈可閒謾  遊談無根  虛喪天日  欲冀心宗而求出路哉.

비롯함이 없는 옛적부터 익혀 온 애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에 얽히고설켜서, 잠깐 조복 되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마치 하루 걸러 앓는 학질병과 같으니라.
어느 때에나 모름지기 바로 수행을 더하는 방편과 지혜의 힘을 써서, 간절히 스스로 막아 지켜야 하거늘, 어찌 한가하게 근거 없는 잡된 이야기를 하여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마음의 근본을 깨닫기를 바래며 생사 벗어나는 길을 구하고자 하겠는가?
* ; '공이[杵]'의 사투리.
*공이 ; 절구나 방아확에 든 물건을 찧거나 빻는 기구. 메공이, 돌공이, 쇠공이, 절굿공이, 방앗공이 따위가 있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용맹심(勇猛心) ; 두려움 없이 용감하며 기운차고 씩씩한 맹렬한 마음.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선문(禪門) ; 선종(禪宗).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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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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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