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화두드는 법)(No.377)—공부는 거문고 줄 고르듯이 해라 | 화두 드는 법 | 염불(念佛)과 예배(禮拜)의 참다운 뜻 | (게송)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 황벽선사의 예배 | 오후보림, 장양성태 | (게송)佛說一切法~.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1) 20분 37초.
(2) 4분 14초.
[법문] 송담스님(No.377)—1989년 2월 첫째일요법회(용377)(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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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이란 것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끊어져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徹見)하는 것이 참선이지, 그러한 그 선(禪)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서 해석하고 잘 안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는 이 책은 그러한 책과는 다릅니다. 어쨌든지 바르게 공부해 나가도록,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는 신심(信心)이 일어나고 분심(憤心)이 일어나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도와주는 책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용화사에서는 16판토록 이렇게 간행을 해서 법공양(法供養)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기가 쇠로 만든 소 등어리에 몸뚱이채 처박고 들어가듯이 하라, 그렇게 간절히 해라 하니까 ‘그렇다면 나도 한번 그렇게 해봐야겠다. 이거 과거에 모든 불조(佛祖)가 다 하고 모든 선지식(善知識)들이 하는데 어찌 나라고 못할 것인가?’
‘정말 신심과 분심과 의심(疑心)을 한목 발(發)해 가지고, 이것을 나도 한번 해볼 수 밖에 없다’
그래 가지고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고, 그래 가지고 이 미간(眉間)에다가 ‘내 천(川)’ 자를 아주 탁! 써 가지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내가 금생에 결정코 이놈을 기어코 아주 해결하고야만 말겠다’ ‘이뭣고?’를 막 해가지고는, ‘까짓거 뭐 난들 왜 못하냐?’
참 그런 용기와 신심을 내는 거, 그런 분심을 내는 건 대단히 좋은데, 이것이 문제가 있다 그 말이여.
이 공부를 하는 데에는 거문고 줄 고르듯이 해라. 거문고 줄을, 기타 줄도 마찬가지죠.
거문고 줄을 너무 팽팽하게 되게 갖다가 졸라매면, 까딱하면 그 줄이 끊어져버리거나 또 타다가 끊어지거나 또 끊어지지 않더라도 제 음가(音價)가 나오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팅팅 해 가지고. 또 너무 되게 매면은 또 끊어진다 해 가지고 겁을 먹고 너무 느슨하게 매면, 둥둥둥 해 가지고 또 제 음가가 안 난다 그 말이여.
너무 세게 매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매도 안 되고, 반드시 그 음가에 맞춰서 적당하니 그놈을 맞춰야 훌륭한 곡을 갖다가 연주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바른 자세,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를 떠억 하고, 허리를 쭉 펴고 턱을 갖다가 이렇게 잡아당기고 그래서 머리는 너무 뒤로 자지바지해도 안 되고 앞으로 숙여도 안 되고 또 옆으로 이렇게 기울어지지도 않게, 단정하니 하면서도 어깨의 힘도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또 눈에 힘도 빼고 단정하면서도 힘을 다 빼고 긴장을 풀어야 한다 그 말이여.
아금니는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 저 안에다 갖다가 혀를 꼬부려 오그린다.
눈은 편안하게 평상으로 뜨되, 평지에서 약 2m 지점에 눈을 떨구라. 2m 지점에 눈을 떨구되 의식적으로 어느 한 점을 응시해서는 안돼.
어떤 사람은 2m 지점에다 눈을 떨구라 하니까, 2m 지점에다가 까만 콩을 하나 갖다 놓고 참선할 땐 그놈을 갖다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 말이여. 그런 것이 아니여요.
눈을 평상으로 뜨되, 2m 지점에 떨구되, 의식적으로 본 바는 없어야 한다 그 말이여. 평상으로 뜨되 아무 것도 보는 바는 없어. 다맛 이 코 끄터리와 단전(丹田)이 일 수직(垂直) 상에 놓이도록 따악 그렇게 하고서.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단전 부위가 약간 볼록하게 느끼고 또 숨을 내쉴 때에는 배가 약간 홀쪽하게 해서, 숨을 내쉬고 들어마심에 따라서 배가 약간 볼록해졌다가 홀쪽해졌다 그것을 항상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여.
그래서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수르르~ 하니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심에 따라서 배가 약간 볼록함을 느끼고, 또 그렇게 들어마셨으면 잠깐 머물렀다가 또 내쉴 때에는 조용하게 길게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아랫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게 하되, 너무 홀쭉히 해 가지고 뱃가죽이 등어리에 가서 딱 붙으도록 얼굴이 벌게져서 숨이 가쁠 때까지 그렇게 하는 게 아녀요. 7부나 8부 쯤만 내쉬되 조용하게 편안하게 그렇게 쉬는….
이 호흡, 단전호흡이 대단히 중요하고, 건강에도 좋고 피로회복도 되고 또 피도 맑아지고 혈압도 내려가고 또 정신도 안정이 되고 여러 가지가 좋습니다.
그렇게 좋은데, 이것도 무리하게 억지로 잔뜩 배가 터지도록 들어마셔 가지고, 참으라 하니까는 아주 얼굴이 벌게지도록 맹꽁이 배처럼 해 가지고 억지로 그냥 참고, 또 천천히 길게 내쉬라 하니까 30초, 1분, 2분이 되도록 막 그냥 눈알이 튀겨져 나오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아녀요. 그렇게 했다면 참으로 큰일나는 것입니다. 병이 생겨도 큰 병이 생기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단전호흡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것을 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첫째, 무리가 없이 해야 돼요. 30분, 1시간을 해도 숨이 가쁘거나 그러한 일이 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또 다 내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하라니까, 계속해서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하는데, 처음 시작하신 분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하지만, 한 달 · 두 달 · 석 달 또는 1년 이렇게 하다보면 ‘이뭣고?’ 한 번만 들고서 숨을 몇 번을 쉬어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그 고대로 있는 그 의심을 관(觀)할지언정, 떠억 그 의심만을 이렇게 관조할지언정 자꾸 거기다, 있는 의심에다가 ‘이뭣고?’를 덮쳐서 자꾸 ‘이뭣고? 이뭣고?’ 할 필요가 없거든.
'심지'에다 불을 댕겨서 불이 딱 붙어 있으면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보호하면 그만이지, '심지'에 불이 붙었는데도 자꾸 성냥불을 켜서 자꾸 거기다가 불을 붙일라고 할 필요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여.
불이 꺼져버리면 다시 또 불을 켜듯이, 화두(話頭)가 없어졌거나 딴 망상(妄想)이 들어오면 그때 다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이뭣고?’가 고대로 있으면, 있는 그 ‘이뭣고?’를 묵묵히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그것을 갖다가 잘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돼.
덮어놓고 ‘이뭣고?’ 하라니까는 관세음보살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해 가지고 ‘오늘 내가 5만 번을 ‘이뭣고?’를 했다’ 이 참선은 그런 것이 아니여.
염불(念佛)은 하루에 5만 독(讀) 내지 10만 독씩 이렇게 정해 놓고 그렇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백일기도를 한다든지 천일기도를 한다든지 또 그런 분이 있습니다마는 정말 참다운 염불도 사실은 횟수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되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거든. 염도염궁무념처.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계신고?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이다. 마음을 부딪쳐 가지고 간절히 잊어버리지 말아라.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생각이 이르러, 생각이 생각 없는 데 이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문(六門)에 항상 자금광(紫金光)을 놓으리라. 부처님한테서 자금광이 나오거든.
부처님 몸뚱이는 자금색(紫金色) 색상이기 때문에 부처님 몸뚱이, 아미타불한테서는 항상 자금광이 빛나는데, 바로 우리가 염불을 해서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에 이르면은 바로 눈‧코‧입‧귀...육문(六門)에 자금광(紫金光)이 나오리라.
염불도 염도염궁무념처가 되도록 하는 것이지, 온갖 망상 잡담하면서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어쨌든지 십만 독만 채울려고 작정을 하거든.
또 부처님께 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천 배를 했다’, ‘나는 일주일 동안에 삼천 배.. 구천 배를 하리라’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한 자리, 두 자리, 석 자리, 넉 자리 해 가지고 그냥 앉었다 일어섰다, 앉었다 일어섰다, 앉었다 일어섰다 해 가지고, 1초 동안에 한 자리씩 해서, 1초에 한 자리면은 1분이면 육십 자리요, 한 시간이면 뭐 삼천육백 자리... 횟수로, 물론 초학자는 횟수로라도 그렇게 많이 하다보면 차츰차츰 참다운 예배의 뜻을 터득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횟수 위주로의 예배보단 그 예배(禮拜)의 참뜻을 알고 하고, 예배의 뜻은 ‘굴복무명(屈伏無明)하고 공경진성(恭敬眞性)’이거던. 무명을 굴복 받어. 무명을 굴복하고 참된 성품을 공경하는 것이 그것이 예배의 참다운 뜻인 것입니다.
황벽 선사(黃蘗禪師)라고, 육조 스님 밑에 남악회양 선사,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 밑에 마조도일(馬祖道一), 마조도일 밑에 백장회해(百丈懷海), 백장회해 밑에 황벽선사(黃蘗禪師), 아주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아주 정통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대도인이신데, 그 황벽 선사는 평생을 시간만 있으면 법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했습니다.
뭐 그분은 천 배가 되었건 삼천 배가 되었건 그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깨달음의 경지여 그것이. 깨달음의 경지에서 예배를 하고, 예배가 곧 참선이요 참선이 곧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한 그 경지, 바로 그냥 그것이 보림(保任)이고, 바로 그것이 설법이고, 그것이 중생교화여. 어떻게 평생 동안을 예배를 했던지 황벽 스님의 이마에는 주먹탱이만 혹이 붙었습니다. 여기 아주 혹이 생겼어.
그래서 예배에도, 그러한 황벽 선사가 하신 바와 같은 바로 그러한 예배를 해야 할 것이고, 염불을 하시는 분도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해서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해서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하는 그러한 염불을 하셔야 한다.
참선을 하는 사람도 정말 바른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를 간택(揀擇) 받아가지고, 정말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독로해서, 의심을 해 가고 의심을 해 와서, 들어가고 들어와.
처음에는 자꾸 반복을 해서 되풀이해서 하다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헐라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돼. 습관이 되면 그것이 체질화가 되어 가지고, 그냥 산을 봐도 ‘이뭣고?’요, 해를 봐도 ‘이뭣고?’요, 물을 봐도 ‘이뭣고?’요, 나무를 봐도 ‘이뭣고?’요, 사람을 봐도 ‘이뭣고?’요, 앉아도 ‘이뭣고?’요, 서서도...
‘이뭣고?’를 할려고 해서가 아니라 항상 화두가 독로(獨露)해서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는 거여. 순수무잡(純粹無雜)해 가지고 성성적적한 가운데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줄 몰라. 시간 가는 줄도 몰라. 그러면서도 성성적적해서 의단이 타성일편이 된다 그 말이여.
하루를 그렇게 해, 이틀을 그렇게 해.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잠을 잘 때에도 꿈속에서도 고대로, 의단이 고대로 독로해. 그 이튿날 새벽에 눈을 딱 뜨면은 새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어제 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게 된다 그 말이여. 세수를 해도 고대로 있고, 양치질을 해도 그대로 있고, 목욕을 해도 그대로 있어.
그러다가 하루 이틀 사흘 닷새 엿새 이레, 일주일을 이렇게 지내다보면, 어떠한 찰나에 문을 텅! 닫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누가 무슨 물건을 턱 내부치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자기가 걸어가다가 발을 턱! 무슨 돌뿌리에 채였다든지, 어떠한 그러한 특별한 기연(機緣)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툭! 터져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그것이 바로 타파(打破) 공안(公案)이여. 의단(疑團)을 타파하는 거여. 그렇게 깜깜하고 꽉 맥혀서 알 수 없던 화두가 환해. 이럴 때에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야 하는 거여. 자기 나름대로 환하지만 그것이 바른 것인가? 옳지 못한 것인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바른 선지식에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그러한 경지가 나타날 때에 선지식한테 가서 그것을 간택을 받아야 하는 거여.
그래서 모든 공안에 다 맥힘이 없고 그러면, 깨달은 뒤에 보림하는 법을 다시 지시를 받어 가지고 그때에 비로서 토굴(土窟)로 들어가서 토굴 살림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알뜰히 정진을 해서 이 장양성태(長養聖胎) 해 가지고, 고인(古人)의 모든 어록도 한번 보고, 또 나아가서는 유가(儒家)나 도가(道家)의 서적도 한번 보고, 제자백가지설(諸子百家之說)도 한번 훑어보고, 그래서 안팎으로 힘을 충족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밑 없는 배’를 타고 나가서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참선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어려운 것 같지마는 천하에 쉬운 것입니다. 바보, 썩은 나무둥치처럼 되어 가지고 ‘이뭣고?’ 하라고 하면은 ‘이뭣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어요.
오늘 무진년 마지막 날이요 또 새해를 맞이하는 이 즈음에, 그동안에 누누히 이런 말씀을 일러드렸지마는 오늘 좀더 간곡히 말씀을 드린 것은 정말 이번에 백일을 맞이한 최웅식 동자와 같이 우리도 그런 순일무잡하고 청정무구한 그런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새해에는 초하루 날부터서 365일을 하루와 같이 오늘 지금 이 법문을 듣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정말 간절히 그리고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할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41분3초~61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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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이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인데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나무~아미타불~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은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이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하셨는데 그것을 대장경을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합니다.
그 일체경을 설하신 것은 무슨 목적으로 설하셨느냐? 일체 마음을 제도(濟度)하시기 위해서, 나의 이 모든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일체법을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니까, 이 사람 저 사람 전부 물에 빠진 거 건져내듯이 막 건져내고, 부자되게 해 달라니까 다 부자로 맨들어 주고 그런 것이 아니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정말 참다운 뜻은 우리 중생 낱낱이, 우리 자신의 일체 마음을 건져주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일체 마음이 없으면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이면 내게 모든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공(空)해 버리면,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일체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내 마음이 온갖 생각이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와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와 팔만사천 번뇌 망상이 들끓으니까 그 팔만사천 번뇌 망상을 제도하기 위해서 팔만사천 법문(法門)을 설하셨는데, 내가 그런 마음이 딱! 끊어져 버려. 공(空)해 버렸다면 팔만대장경이 어디에 필요한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병이 있으니까 여러 가지 약이 필요한 것인데, 내가 모든 병이 다 나아버렸다면은 뭐하러 그렇게 쓰고 고약한 약을 계속 먹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참다운 불법(佛法)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믿고 어떻게 실천하고 어떻게 닦아가야 할 것인가?
이렇게 오늘 말씀을 드리고 끝을 맺고자 합니다.(61분41초~65분55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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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〇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〇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絶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絶]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〇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공안(公案, 話頭)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선(禪) ; (산스크리트어) dhyāna, (팔리어) jhāna. 선나(禪那) · 타연나(駄演那 : 馱衍那)라 음사(音寫)하고, 줄여서 선(禪)이라고 한다. 정려(靜慮 : 靜으로는 번뇌를 끊고, 慮로는 바르게 관찰한다) · 사유수(思惟修 생각하여 닦음) · 기악(棄惡 : 모든 악을 버리림) 등이라고 한역한다. 선(禪)을 원인으로 하여 지혜 · 신통 · 사무량 등의 공덕을 일으키기 때문에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도 한다. 진정한 이치를 궁리하고 생각을 안정하게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선종(禪宗)의 선(禪)은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중국으로 건너온 뒤로부터 크게 발달되어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완성되었다.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敎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서 이치나 일에 걸림이 없는 선.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조사선의 방법에 근거하여 화두(話頭)를 궁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이 대두하였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조사선이 곧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선가귀감(禪家龜鑑) ; 서산대사(휴정, 1520~1604)가 경전과 어록 중에서 수행의 지침이 될—선종(禪宗)을 중심으로—가장 요긴하고도 절실한 부분을 가려 뽑은 불교 개론서.
[참고 ❶] 송담스님(No.235)—1984년(갑자년) 법보재 법회(84.04.16)
『선가귀감』은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속에서 그 골수(骨髓)만을 뽑아서 만드신 한 권의 책입니다. 큰 책은 아니고 아주 간단한 책인데도 그 속에는 팔만대장경의 그 깊고 깊은 진리(眞理)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공부를 해 나가야 하느냐?' 하는 그 실천 상황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은 여러분의 가보(家寶)가 될 것입니다. 최상승 참선법을 닦아 가는 데 있어서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을 보시고 여법(如法)하게 수행(修行)을 해 나가시면 살아 있는 서산대사가 나오실 것이고, 살아 있는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나오실 것이고, 살아 있는 중생의 탈을 쓴 살아 있는 미륵(彌勒) 부처님이 도처(到處)에서 탄생(誕生)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참고 ❷] 송담스님(No.377)—1989년 2월 첫째일요법회.
『선가귀감』 이 책을 손에 드신 분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삼계(三界)에 떨어지지 아니하실 것이고 언제나 부처님 불법(佛法) 문중에 태어나실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이 한 권 속에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대장경과 역대조사가 깨달은 경지에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法門)의 골수(骨髓)가 이 속에 다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선가귀감』 이 책은 바르게 공부해 나가도록—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 신심(信心)이 일어나고, 분심(憤心)이 일어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도와주는 책입니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법공양(法供養)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베풂. ②불서(佛書)를 사람들에게 베풂. ③부처님의 가르침을 공경하고 찬탄함. 경전에 꽃·향 등을 바침.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모기가 쇠로 만든 소 등어리에 몸뚱이채 처박고 들어가듯이 하라’ ; 화신투입(和身透入).
*화신투입(和身透入 합칠 화/몸 신/투과할 투/들 입) ; 몸뚱이째[和身] 들어가다[透入].
[참고 ❶] 『고봉화상 선요 어록』 (고봉 1238~1295 |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시중(示衆 其十四)’ p110~112 참고.
示衆(대중에게 보임) (其一四)
若論參禪之要 不可執蒲團爲工夫 墮於昏沈散亂中 落在輕安寂靜裏 總皆不覺不知 非唯虛喪光陰 難消施主供養 一朝眼光落地之時 畢竟將何所靠
만약 참선의 요점을 논하자면 방석에 앉는 것을 집착하여 공부를 삼아 혼침과 산란 가운데 떨어지거나, 편안하고 고요한 속에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모두 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리니 오직 세월을 허송할 뿐 아니라 시주들의 공양을 소화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루 아침에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필경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山僧昔年在衆 除二時粥飯 不曾上蒲團 只是從朝至暮 東行西行 步步不離 心心無間 如是經及三載 曾無一念懈怠心 一日驀然踏著自家底 元來寸步不曾移
산승이 옛날 대중에 있을 때 죽과 밥 먹는 두 때를 제외하고 방석 위에 올라앉지 않고 다만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걸음걸음에 여의지 않고 마음 마음이 간격이 없었다. 이와같이 3년을 지내도록 일찌기 한 생각도 게으른 마음이 없다가 하루는 문득 나의 고향[自家]을 밟고 나니 원래 한 걸음도 옮긴 것이 아니었더라.
昏沈掉擧 喜怒哀樂 卽是眞如佛性 智慧解脫 只緣不遇斯人 醍醐上味 飜成毒藥 靈利漢 假饒直下知非 全身擔荷 正好朝打三千 暮打八百 何故 豈不見道 知之一字 衆禍之門
혼침과 도거, 희로애락이 그대로 진여불성이고 지혜해탈이건만 다만 인연이 이러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제호상미가 도리어 독약이 되었다. 영리한 사람이 가령 당장에 그른 줄 알아 온 몸으로 짊어지더라도 바로 아침에 삼천 번을 때리고 저녁에 팔백 번을 때릴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어찌 '지(知)라는 한 글자가 모든 재앙의 문이다'라는 말을 알지 못하는가?
若論此事 如蚊子上鐵牛相似 更不問如何若何 便向下觜不得處 拌命一鑽 和身透入 正恁麼時 如處百千萬億香水海中 取之無盡 用之無竭 設使志不堅心不一 悠悠漾漾 東飛西飛 饒你飛到非想非非想天 依舊只是箇餓蚊子
만약 이 일을 논하자면, 모기가 쇠로 된 소에 오르는 것과 같아서 다시 이러쿵 저러쿵 묻지 않고 당장에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버리고 한 번 뚫어서 몸으로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런 때 마치 백천만억 향수해(香水海)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취(取)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고갈됨이 없지만, 설사 뜻이 견고하지 않고 마음이 한결같지 않아 아득히 출렁대며 동으로 날고 서로 날다가 설사 네가 날아서 비비상천에 이른다하더라도 여전히 다만 한 마리 굶주린 모기일 뿐이더라.
[참고 ❷]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0~61 (가로판 p62~63)
(17)此事(차사)는 如蚊子(여문자)가 上鐵牛(상철우)하야 更不問如何若何(갱불문여하약하)하고 下嘴不得處(하취부득처)에 棄命一攅(기명일찬)하야 和身透入(화신투입)이니라.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들듯이, 다시 여하약하를 묻지 말고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떼어 놓고 한 번 뚫어 보면, 몸뚱이째 들어갈 때가 있으리라.
重結上意(중결상의)하야 使參活句者(사참활구자)로 不得退屈(부득퇴굴)이니 古云(고운), 參禪(참선)은 須透祖師關(수투조사관)이요 妙悟(묘오)는 要窮心路絶(요궁심로절)이라 하시니라.
위에 말한 뜻을 거듭 맺어서 활구를 참구하는 이로 하여금 뒷걸음쳐 물러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니, 옛 어른이 이르기를 「참선을 하려면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하고, 오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고 하시니라.
*불조(佛祖) : 부처님과 조사(祖師), 불(佛)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조(祖)는 역대(歷代)의 조사를 말함.
*선지식(善知識) ; (산스크리트어) kalyāņa-mitra, (팔리어) kalyāņa-mitta. 가라밀(迦羅蜜) · 가리야낭밀달라(迦里也曩蜜怛羅) 등으로 음사(音寫)하고, 지식(知識) · 선우(善友) · 친우(親友) · 승우(勝友) · 선친우(善親友) · 시우(時友) 등이라고도 한역(漢譯)한다.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음가(音價 소리 음/값 가) ; 낱자(낱字)가 지니고 있는 본바탕 소리의 측정치.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자지바지 ; 좌선(坐禪)할 때 몸에 너무 힘을 주어, 몸 전체가 긴장으로 인해 뻣뻣하게 되어 있는 모습. 좌선 할 때는 몸을 단정(端正)히 하면서도 긴장과 힘을 빼야 한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응시(凝視 엉기다·집중하다·머무르다 응/볼 시)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 번만 들고서 숨을 몇 번을 쉬어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그 고대로 있는 그 의심을 관(觀)할지언정, 떠억 그 의심만을 이렇게 관조할지언정 ; 의심관(疑心觀).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 59초)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 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 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 말이여.
[참고 ❷]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 57초)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부처님이나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게송)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
[참고] 『한가로운 도인의 길 - 나옹화상법어집』 (김달진 역주, 세계사刊).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보임(示諸念佛人/8首)’ 게송 참고. p166.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계신고?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 마음을 부딪쳐 가지고 간절히 잊어버리지 말아라.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생각이, 생각이 다해가지고 생각 없는 곳에 이르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문(六門)에 항상 자금광(紫金光)을 놓으리라.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것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육문(六門) ; 육근(六根, 안근眼根 · 이근耳根 · 비근鼻根 · 설근舌根 · 신근身根 · 의근意根)을 말한다. 육식(六識,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이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인식하는 경우, 그 입구가 되므로 문(門) 또는 뿌리[根]라 하는 것이다.
*자금광(紫金光) ; 자마금(紫磨金 : 황금 중의 최고인 자색을 띈 금) 색(色)을 띄고 있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
*예배(禮拜) ; 거룩하고 성스러운 대상에 대하여 존경하는 뜻을 가지고 절을 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 (가로판 p116)
禮拜者는 敬也며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
예배라 하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며 '굴복하는 것'이니,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니라.
(註解) 身口意가 淸淨하면 則佛出世니라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것이니라.
*무명(無明) : [산스크리트어(범어)]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황벽(黃檗) : (? – 850) 법명은 희운(希運),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민현(閩縣)에서 났다.
어려서 신동이라고 불리더니, 강서성 서주부 황벽산에 가서 출가하였다가, 백장에게서 마조의 할에 백장이 깨치던 사연을 듣고,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치고 나서 백장의 법을 이었다. 그 뒤에 배휴(裵休)의 청을 받아 여러 곳에서 교화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그 산 이름을 처음 출가하던 산 이름 그대로 황벽산이라 하였다.
그가 염관사(鹽官寺)에 있어 예불하는 자리에서 뒷날의 선종(宣宗)이 그에게 법문을 묻는데, 그가 세 번이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 뒤에 선종이 즉위하여 그에게 「추행사문(麤行沙門)」 곧 ‘행실이 거친 중’이란 법호를 주려고 하자, 배휴가 간하기를 『황벽선사가 폐하에게 세 번 손질한 것은, 폐하의 삼제(三際 곧 三世) 윤회를 끊는 뜻입니다』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의 호를 내리게 되었다.
*법맥(法脈 불법佛法 법/혈맥血脈 맥) ;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血統)을 밝히고 있듯이,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온,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통(法統)의 전승을 법맥이라 한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 원각(圓覺)의 대지(大智)가 밝게 홀로 드러나다.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한 깨달음. 진여(眞如)의 체득. 부처님의 지혜.
[참고]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보조국사 지눌1158~1210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214.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 보조국사어록』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p87, 102 참고.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 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하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간택(揀擇 가릴 간/가릴 택) ; 사물이나 사람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따위와 그 정체를 구별하거나 가려서 알아 선택함.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어떠한 찰나에 문을 텅! 닫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누가 무슨 물건을 턱 내부치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자기가 걸어가다가 발을 턱! 무슨 돌뿌리에 채였다든지, 어떠한 그러한 특별한 기연(機緣)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툭! 터져 버린 것이다’ ; 각차수질(脚蹉手跌). 수질각차(手跌脚蹉).
*각차수질(脚蹉手跌 다리 각/미끄러질·넘어질 차/손 수/거꾸러질·넘어질 질) ; (몸이 균형을 잃고) 손과 발이 미끄러지다.
[참고] 『고봉화상 선요(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50~52, 『선요』 (원순 역해 | 도서출판 법공양) p40~42 참고.
若要的實明證인댄 須開特達懷하며 發丈夫志하야 將從前惡知惡解와 奇言妙句와 禪道佛法과 盡平生眼裏所見底와 耳裏所聞底하야 莫顧危亡得失과 人我是非와 到與不到와 徹與不徹하고
만일 이 일을 적실하고 분명하게 증득하려면 특별한 포부를 품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종전의 나쁜 알음알이와 기묘한 언구(言句)와 선도(禪道)와 불법(佛法)과 평생동안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들에서 위태로움과 죽음, 얻음과 잃음, 남과 나, 옳음과 그름, 도달함과 도달치 못함, 사무침과 사무치지 못함 따위를 돌아보지 말고,
發大忿怒하며 奮金剛利刃하야 如斬一握絲에 一斬에 一切斷이라 一斷之後에 更不相續하야 直得胸次中이 空勞勞地와 虛豁豁地가 蕩蕩然 無絲毫許滯碍하야 更無一法可當情이 與初生으로 無異니라
크게 분발심을 내어 마치 금강 같은 날카로운 칼로 한줌의 실을 벨 때, 한 번 베면 모두 다 끊어져서 그 후에는 다시 이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하면, 당장 가슴속이 텅 비어 호호탕탕(浩浩蕩蕩)해서 실끝만치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으며 다시 한 법도 정식(情識)에 매이지 않음이 마치 갓난아기와 같을 것이다.
喫茶不知茶하고 喫飯不知飯하며 行不知行하고 坐不知坐하야 情識이 頓淨하고 計較都忘이 恰如箇有氣底死人相似하며 又如泥塑木雕底相似리라
到者裏하야 驀然脚蹉手跌하면 心華頓發하야 洞照十方이 如杲日麗天하고 又如明鏡當臺하야 不越一念하고 頓成正覺이라
차를 마셔도 차 마시는 줄 모르고, 밥을 먹어도 밥 먹는 줄 모르고, 다녀도 다니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몰라 정식(情識)이 단박 깨끗해지고 계교(計較)가 모두 없어지는 것이 흡사 숨만 남은 시체와 같으며 또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 같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갑자기 손과 발이 미끄러져서 마음꽃이 단박에 피어 시방세계를 훤히 비춤이 마치 밝은 해가 하늘에 뜬 것 같으며, 맑은 거울이 경대에 놓인 것 같아서 찰나에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이다.
非惟明此一大事라 從上若佛若祖의 一切差別因緣을 悉皆透頂透底하며 佛法世法을 打成一片하야 騰騰任運하고 任運騰騰하며 灑灑落落하고 乾乾淨淨하야 做一箇無爲無事出格眞道人也라 恁麼出世一番하야사 方曰 不負平生參學之志願耳니라
이 일대사만을 밝힐 뿐 아니라, 위로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온갖 차별된 인연(因緣)을 몽땅 아래 위로 꿰뚫어 알며 불법과 세간법을 한 조각으로 만들어 무심하여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며, 물 뿌린 듯 쇄락하고, 씻어 말린 듯 정결하여 하나의 격식에서 벗어나 일없는 참 도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번 세상을 뛰어나와야 비로서 ‘평생동안 참선하려는 뜻과 원력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리라.
—원문에 있는 '驀然 脚蹉手跌'은 몸의 균형을 잃고 자기도 모르게 문득 발이 미끄러지고 손이 미끄러지는 것이니, 아차! 하는 순간을 말한다. 轉身移步 懸崖撒手. (원순 스님 주)
*기연(機緣 기틀·기회·작용·때 기/인연·이유·연줄 연) ; ①시기인연(時機因緣)의 준말. 어떠한 기회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동기. ②중생의 소질이나 능력이 부처님 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인연, 조건이 되는 것. ③가르침을 주고받게 된 스승과 제자의 인연.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그것이 바로 타파(打破) 공안(公案)이여. 의단(疑團)을 타파하는 거여. 그렇게 깜깜하고 꽉 맥혀서 알 수 없던 화두가 환해. 이럴 때에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야 하는 거여. 자기 나름대로 환하지만 그것이 바른 것인가? 옳지 못한 것인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바른 선지식에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그러한 경지가 나타날 때에 선지식한테 가서 그것을 간택을 받아야 하는 거여.
그래서 모든 공안에 다 맥힘이 없고 그러면, 깨달은 뒤에 보림하는 법을 다시 지시를 받어 가지고 그때에 비로서 토굴(土窟)로 들어가서 토굴 살림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알뜰히 정진을 해서 이 장양성태(長養聖胎) 해 가지고, 고인(古人)의 모든 어록도 한번 보고, 또 나아가서는 유가(儒家)나 도가(道家)의 서적도 한번 보고, 제자백가지설(諸子百家之說)도 한번 훑어보고, 그래서 안팎으로 힘을 충족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밑 없는 배’를 타고 나가서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 오후보림(悟後保任). 보림(保任).
*오후보림(悟後保任) ; 보림(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p64~67 (가로판 p63~66)
忽然築着磕着(홀연축착합착)에 啐地絕(졸지절)하며 爆地斷(폭지단)하야 洞明自己(통명자기)하야 捉敗佛祖(착패불조)의 得人憎處(득인증처)하야든 又宜見大宗匠(우의견대종장)하야 求煅煉(구단련)하야 成大法器(성대법기)언정 不可得少爲足(불가득소위족)하리라
문득 댓돌 맞듯 맷돌 맞듯 하야 졸지절(啐地絕)하며 폭지단(爆地斷)하야 자기를 훤하게 밝혀, 불조(佛祖)가 사람에게 미움받은 곳을 옭아 잡거든, 또 마땅히 대종장을 친견하야 단련을 구하야 대법기를 이룰지언정,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함을 삼지 말지니라.
悟後(오후)에 若不見人(약불견인)하면 未免不了後事(미면불료후사)하리니 其害非一(기해비일)이니라 或於佛祖機緣上(혹어불조기연상)에 有礙處(유애처)하면 是(시)는 悟(오)가 淺(천)하야 未盡玄妙(미진현묘)하리라
깨달은 뒤에 만약 대종장을 만나지 못하면 뒷일을 요달치 못함을 면치 못하리니, 그 해(害)가 하나만이 아니니라. 만약 불조기연(機緣)상에 막힌 곳이 있으면 이는 깨달음이 옅어 현묘함을 다하지 못하리라.
旣盡玄妙(기진현묘)커든 又要退步(우요퇴보)하야 韜晦保養(도회보양)하야 力量(역량)이 全備(전비)하야 看過藏敎儒道諸書(간과장교유도제서)하야 消磨多生習氣(소마다생습기)하야 淸淨無際(청정무제)하며 圓明無礙(원명무애)라사 始可高飛遠舉(시가고비원거)하야 庶得光明(서득광명)이 盛大(성대)하야 不辱先宗(불욕선종)하리라
이미 현묘함을 다했거든, 또 다시 물러서서 이름을 감추고 자취를 감추어 보양(保養)하야 역량을 온전히 갖추어, 장경과 유교 • 도교의 서적들을 다 보아서 다생의 습기(習氣)를 녹여서, 청정하야 갓이 없으며 원명하야 걸림이 없어야, 비로소 가히 높이 날며 멀리 날아 거의 광명이 성대하야 선조사(先祖師)의 종풍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참고 ❷]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p137~140. (가로판 p133~136)
迷雲(미운)이 散盡(산진)하면 萬里靑天(만리청천)에 中秋寶月(중추보월)이 湛徹澄源(담철징원)하리니 虛空(허공)에 發焰(발염)하며 海底(해저)에 生煙(생연)하야 驀然磕着(맥연합착)에 打破重玄(타파중현)하리니 祖師公案(조사공안)을 一串(일관)에 都穿(도천)하며 諸佛妙理(제불묘리)가 無不周圓(무불주원)하리라
미혹의 구름이 다 흩어지면 만리청천(靑天)에 가을달이 깊이 맑은 근원에 사무치리니, 허공에서 불이 나며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문득 맷돌 맞듯 하야 깊은 현관(玄關)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을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으며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가 두루 원만치 않음이 없으리라.
到伊麼時(도이마시)하얀 早訪高玄(조방고현)하야 機味(기미)를 完轉(완전)하야 無正無偏(무정무편)하야 明師(명사)가 許爾(허이)어든 再入林巒(재입임만)하야 茅庵土洞(모암토동)에 苦樂(고락)을 隨緣(수연)하야 無爲蕩蕩(무위탕탕)하야 性若白蓮(성약백련)호리니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일찌감치 덕 높은 선지식을 찾아서, 기미(機味)를 완전히 돌려서 바름[正]도 치우침[偏]도 없게 하야, 밝은 스승이 허락하거든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서 띳집과 동굴에서 고락을 인연에 따르되 하염없이 탕탕(蕩蕩)하여 성품이 흰 연꽃 같게 할지니.
時至出山(시지출산)하야 駕無底船(가무저선)하야 隨流得妙(수류득묘)하야 廣度人天(광도인천)하야 俱登覺岸(구등각안)하야 同證金仙(동증금선)이니라
시절이 이르거든 산에서 나와 밑 없는 배를 타고 흐름을 따라 묘를 얻어, 널리 인천(人天)을 제도하야 함께 깨달음의 언덕에 올라 함께 부처를 증득할지니라.
*장양성태(長養聖胎 기를 장/기를 양/성인 성/태아 태) ; 성인의 태(胎)를 길러 양성함.
[참고] 보조지눌 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서.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부처[眞佛]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밑 없는 배’ ; 무저선(無底船).
*무저선(無底船 없을 무/밑·바닥 저/배·선박 선) : 밑바닥이 없는 배.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영수(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썩은 나무둥치 ; 산에 버글버글 아주 썩은 나무둥치는 아무 쓸모가 없어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수행인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러한 거짓 바보가 되어야만 일분일초도 딴 데에 정신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정진만을 할 수가 있어서 가장 도를 닦는 데 효과적이다.
>>> 위의 '썩은 나무둥치'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청정무구(淸淨無垢 맑을 청/깨끗할 정/없을 무/때·티끌 구) ; 맑고 깨끗하여 때가 없음. 맑고 깨끗하여 더럽거나 속된 데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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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 ; 『완릉록(宛陵錄)』 황벽(黃檗) 선사 말씀.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 오욕(五欲, 五慾, 五欲樂).
*오욕(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불법(佛法 부처 불/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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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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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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