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선(禪)과 교(敎)2022. 5. 21. 06:59

선(禪)과 교(敎) (No.124)—불법은 많이 아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많이 외우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다 | 완전히 썩어서 아주 흔적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 참나를 깨닫게 되아야 그 경전을 옳게 보는 것 | 깨닫고서도 깨달랐다고 하는 각견(覺見)이 없어져야 바로 깨달은 사람인 것입니다.


*선(禪)과 교(敎) ;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선(禪)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敎)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8~29, 34~35. (가로판 p29~30, 35~36)
(5)世尊 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 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주해) 三處者 多子塔前分半座 一也 靈山會上擧拈花 二也 雙樹下槨示雙趺 三也 所謂迦葉 別傳禪燈者 此也 一代者 四十九年間所說五敎也 人天敎 一也 小乘敎 二也 大乘敎 三也 頓敎 四也 圓敎 五也 所謂阿難 流通敎海者 此也.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이 세째이니, 이른바 가섭존자가 선(禪)의 등불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 이것이다.
한평생 말씀하신 것이란, 49년 동안 말씀하신 다섯 가지 교(敎)인데, 첫째는 인천교, 둘째는 소승교, 셋째는 대승교, 넷째는 돈교, 다섯째는 원교이다. 이른바 「아난존자가 교의 바다를 널리 흐르게 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然則禪敎之源者 世尊也 禪敎之派者 迦葉阿難也 以無言 至於無言者 禪也 以有言 至於無言者 敎也 乃至心是禪法也 語是敎法也 則法雖一味 見解則天地懸隔 此 辨禪敎二途.

그러므로 선(禪)과 교(敎)의 근원은 세존이시고,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니,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선(禪)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敎)이다.
또한 마음[心]은 선법(禪法)이고 말[語]은 교법(敎法)이다. 법은 비록 한맛이라도 견해는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떨어진 것이니, 이것은 선과 교의 두 길을 가려 놓은 것이다.

(6)是故 若人 失之於口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이 모두 교(敎)의 자취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禪旨)가 되리라.

(주해) 法 無名故 言不及也 法 無相故 心不及也 擬之於口者 失本心王也 失本心王則世尊拈花 迦葉微笑 盡落陳言 終是死物也 得之於心者 非但街談 善說法要 至於燕語 深談實相也 是故 寶積禪師 聞哭聲 踊悅身心 寶壽禪師 見諍拳 開豁面目者 以此也 此 明禪敎深淺.

법(法)은 이름이 없는 것이므로 말로써 미치지 못하고, 법(法)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무엇이나 말하여 보려고 한다면 벌써 본심(本心)을 잃은 것이요, 본심을 잃게 되면 부처님이 꽃을 드신 것이나 가섭존자의 미소가 모두 쓸데없는 이야깃거리만 될 것이다.
마음에서 얻은 사람은 장꾼들의 잡담이라도 훌륭한 설법이 될뿐 아니라, 새소리와 짐승의 울음까지도 진리를 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보적선사는 통곡하는 소리를 듣고 깨쳐 춤추고 뛰놀았으며, 보수선사는 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는 것을 보고 참 면목을 깨친 것이 이 까닭이다. 이는 선(禪)과 교(敎)의 깊고 옅은 것을 밝힌 것이다.

보되 한 글자도 남은 바가 없어야 하고, 글자로 된 경전을 읽으므로 해서 그 글자로 된 경전은 완전히 소화가 되어서 그것이 없어지고서 부처님께서 입을 통해서 설할 수 없는 참 진리를 자기의 마음에서 깨달라야만 그 사람은 경전을 옳게 보았다고 할 것입니다.

 

 

(9분 15초)


[법문] 송담스님(No.124)—1980년(경신년) 하안거 결제 법어(80.05.28) (용124)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몽산(蒙山) 스님이 마을에 학자로서 불법(佛法)을 심히 비방을 하든 사람이 강아지 꿈을 꾸고서 자기가 자칫했으면 강아지로 태어날 뻔 봤다고 하는 것을 확인을 하고 거기에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출가해서 대도인(大道人)이 된 인연 설화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경전 가운데에도 수없이 많은 비유의 설화와 인연의 법문이 많지만 그러한 한 토막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와 같은 그러한 비유 인과설 속에서 신심과 분심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살아 있는 법문(法門)을 바로 알아들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약이 꼭 인삼, 녹용과 같은 그러한 값비싼 약만이 우리의 병을 나수는 것이 아니고 값이 헐어디 헐은 들과 산에 나 있는 야생초 몇 뿌리를 삶아서 먹어도 병을 신효(神效)하게 낫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 하면 어려운 법문, 암만 듣고 또 읽어도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그런 어려운 경전의 말씀만이 정말 높고 깊은 진리다. 그러한 어려운 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혹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시는지.

'나는 아직 경도 한 권도 읽지 못했고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천수(千手)도 아직 못 욉니다. 그러니 불명(佛名)도 아직 탈 수가 없고 더군다나 참선(參禪)은 할 생각조차도 못 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 분을 가끔 만납니다마는,
무슨 천수(千手)를 달달 외우고, 무슨 경전을 많이 보고,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해석할 줄 알고 그러한 것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데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경전을 많이 보고 그래 가지고 알아 가지고 자기가 '참, 나는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 누가 뭐 어떠한 승려라 하더라도 감히 내 앞에 무슨 법문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법화경이고 화엄경이고 금강경이고 닥치는 대로 다 외우고 읽고 해석할 줄 안다. 나를 덮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
이러한 거사나 신도가 계신다고 하면 참 그렇게 딱하고 안될 수가 없습니다. 불법을 무슨 그런 지식으로 생각하고, 이론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불법은 많이 아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많이 외우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그러면 경은 뭐하러 부처님이 설하셨으며, 경은 뭐하러 해인사에 그렇게 경판을 오래 보관하면서 인쇄를 해서 내놓을 필요가 있느냐? 뭐 많이 봐도 소용이 없다면 한 권도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이렇게 또 생각을 하실는지 모르지만.

보되 한 글자도 남은 바가 없어야 하고, 글자로 된 경전을 읽으므로 해서 그 글자로 된 경전은 완전히 소화가 되어서 그것이 없어지고서 부처님께서 입을 통해서 설할 수 없는 참 진리를 자기의 마음에서 깨달라야만 그 사람은 경전을 옳게 보았다고 할 것입니다.

'닭똥이 거름이 된다. 또는 사람 똥이 거름이 된다. 또는 풀을 참 많이 비어서 그래 가지고 퇴비를 하면 좋다' 그러지만 닭똥을 썩히지 아니하고 푹 띄워서 완전히 발효를 시킨 거름이라야 그것을 밭에다 주고 식물에다 주어도 거기서 그 참으로 비료가 되는 것이지,
푹 썩지 아니한 발효하지 아니한 쌩똥을 갔다가 과실 과목(果木)이나 채소나 곡식에 주면 거기서 열이 나 가지고 과일 나무 뿌리가 참으로 썩어 버리고 채소고 곡식이고 하나도 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말씀도 그 경전을 읽고서 완전히 그놈이 삭아서 한 글자도 남음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거기에서 참나를 깨닫게 되아야 그 경전을 옳게 보는 것입니다.

태권도나 유도나 검도 그런 걸 처음에 배우면 그 주먹이 근실근실해 가지고 누구하고 한번 싸워 보고 싶고, 벽도 한번 차 보고 싶고, 조그만한 일에 누가 있으면 싸움하는 데만 있으면 자기가 탁! 가로막고 나서서 한번 그놈을 뽐내 보고 싶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2단 3단 4단 5단 6단 올라가면 여간해서 어디 가서 주먹을 내놓지도 않고 자기가 그러한 무술을 가지고 있는 척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푹 썩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썩어서 아주 흔적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도 해 갈수록—'내노라'하는 생각, '나는 이렇게 참선을 잘했다 잘하고 있다'는 생각, '나는 참선을 해서 한 소식을 했다' 그래 가지고 그런 것을 그러한 얻었다고 하는 생각, '깨달랐다'고 하는 생각,
'나는 참선을 깨닫지는 못했어도 30년을 했다'고 하는 그러한 밥그릇 수를 따져서 자기가 으시대고 새로 공부하는 사람을 갖다가 자기가 오래했다고 하는 그것으로써 짓이기고 욱박지르고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선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오래할수록 참으로 바르게 한 사람이라면 아무 냄새가 나지를 아니하고 더욱 겸손하고 그 마음은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하고 조용할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지어 나가는 사람은 30년을 했건 10년을 했건 또는 공부를 시작한지가 불과 1년 밖에 안 되었다 하드라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진실하게 참되게 닦아 간 사람은 그 사람이 참으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닦아 가야만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서도 깨달랐다고 하는 각견(覺見)이 없어져야 그 사람은 바로 깨달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깨달은 척하고 으시대고 뽐낸다고 해서 그것이 어디다 쓸 것이여.(19분14초~28분2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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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蒙山) : 남송과 원(元)대의 임제종 양기파 스님, (1231~?) 이름은 덕이(德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 시양 고안현(時陽高安縣)에서 났다。그 고향 시양이 당나라 때에는 균주(筠州)였기 때문에 고균(古筠) 비구라고 한 일도 있었고, 여릉도 몽산에 있었으므로 몽산 화상이라 하며,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있었으므로 전산 화상이라기도 하고, 휴휴암(休休庵)에 있었으므로 휴휴암주라기도 하였다.
고산(鼓山)의 완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의 법을 이었다。그의 교화한 시기는 원나라 세조(世祖)때이며, 우리 고려의 충렬왕 때이다。그래서 고려의 고승들과 문필의 거래가 많았고, 그의 저서 가운데 <법어약록(法語略錄)> <수심결(修心訣)>등은 이조 중엽에 있어 우리 글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몽산법어(蒙山法語) ; 원(元)나라 몽산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하였다.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 ‘몽산법어’가 있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천수(千手) ; 천수경(千手經). 관음신앙을 구체화하기 위해 엮어진 경으로, 현재 사찰에서 독송하고 있는 천수경의 구성은 천구백년 이후에 갖추어진 것이다.
천수경은 한국불교 신앙의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경전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의 공덕을 찬탄하고 그에게 귀의하여 참회하고 발원하는 글과 진언(眞言)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근실근실하다 ; 가려운 느낌이 자꾸 나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각견(覺見) ; 깨달음[覺]에 집착하는 견해. 불법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그 깨달음[覺]에 집착하여 반대로 또 하나의 속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는 용어.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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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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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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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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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