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의심(화두드는 법)'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20.02.07 의심(화두드는 법)(No.578)—수식관이 발달한 것이 지금의 단전호흡 | 가슴답답할 때는 단전호흡을 반대로 | 화두를 단전에다 두고 관(觀)하라 | 오직 이 일뿐.
  2. 2019.05.16 의심(화두드는 법) (전강선사 No.250)—'이뭣고?' 해 들어갈수록에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의심, 좋다 | 경절문(徑截門) | 죽은 날 생각해 봐라. 어떠냐? | 亦如流泉 心空境寂 快樂安然.
  3. 2018.03.06 의심(화두드는 법) (No.240)—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 | 화두를 바르게 들기가 쉽지 않다 | 법문에 국집 말고, 법문 들을 때일수록 자기 화두가 더욱 성성하게 들려져 있어야.
  4. 2017.06.11 의심(疑心) (No.627)—(게송)萬疑都就一疑團~ | 모든 의심을 전부 자기 본참공안에 대한 하나의 의단에다 몰아붙이라 | 올바르게 열심히만 하면 될 수 있다.
  5. 2017.02.21 의심(疑心) (No.539)—단전호흡은 공양을 하고 2시간 이내에는 하지 말라 | 알 수 없는 의심을 관(觀)하는 의심관(疑心觀) | 우리의 본업은 ‘이뭣고?’다.
  6. 2016.06.25 의심(疑心) (No.118)—화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의단(疑團)입니다. 의심! |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히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7. 2016.04.24 의심(疑心) (No.480)—화두(話頭)에 대한 의심, 의심이라는 게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 의심(疑心)이다.
  8. 2016.04.08 의심(疑心) (세등선원No.09)—본참공안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아니한 것, 이것이 우리 정진에 있어서 가장 큰 병이다.
  9. 2016.02.14 의심(화두드는 법) (세등선원No.46)—다만 화두(話頭)만을 거각(擧却)해 버리면, 일어났던 망상은 저절로 자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10. 2016.01.15 의심(화두드는 법) (No.422)—어째서 의심만을 일으키라고 하느냐? | 간화선(看話禪) | 누진통(漏盡通) | 불급불완(不急不緩)한 묘관(妙觀), 의심관(疑心觀).

의심(화두드는 법)(No.578)—수식관이 발달한 것이 지금의 단전호흡 | 가슴답답할 때는 단전호흡을 반대로 | 화두를 단전에다 두고 관(觀)하라 | 오직 이 일뿐.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20분 38초)

 

[법문] 송담스님(No.578)—96년(병자년) 동안거결제 법어(96.10.15) (용578)

 

수식관(數息觀)이 차츰 발달한 것이 지금의 단전호흡(丹田呼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수식관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하니 내쉬고 '하나',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고 '둘',

이렇게 해서 열까지 세어 올라갔다가 열에서 그 다음에는 열하나로 가지 말고 아홉, 여덟, 일곱... 해서 까꾸로 해서 하나로 내려오고 해서 하루 종일 호흡을 세는 거여.

 

그것이 잘되면은 하나에서 스물까지 올라갔다가 열아홉, 열여덟 내려오고 그것이 잘되면 서른, 마흔 해서 백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도록,

그런 동안에 중간에 망상이 일어나 가지고 '몇까지 세었는가?' 잊어버리면 다시 다 없었던 걸로 하고 다시 하나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이렇게 하기를 몇 날 며칠을—한 달, 두 달, 한철 내 하다보면 그것이 차츰차츰 되어간다 그말이여.

 

사실 여러분도 한번 해 보실 만한 일인데, 초학자들은 해 볼 만한 일인데,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것이 수식관인데, 지금 용화사에서 초학자(初學者)에게 수식관부터 하라고 그렇게 간곡히 권(勸)은 하고 있지 않으나,

워낙 망상이 심하고 정진이 잘 안되고 건강도 안 좋고 그러면 수식관을 한번 자기가 몇까지 세었다가 또 내려올 수가 있는가. 그것을 자기가 얼마만큼 정신 집중력이 있고 되어가는 것을 시험 삼아 한번 해 보시길 바라는데.

 

전강 조실 스님 때부터서 단전호흡을 권하게 된 동기는 여러분께서도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으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첫 철에 너무 용을 쓰고 용기를 내서 의심을 하다가 결국은 상기(上氣)가 복받쳐 올라서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고 뒤통수가 툭 툭 터져서 곪아터지고, 목구멍으로부터서는 선지피가 막 쿨쿨 넘어오고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공부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니까, 직지사에서 제산 스님께서 "그렇게 내가 시킨 대로 안 하고 네 멋대로 해 가지고 병이 나면 다 내가 너를 공부를 잘못 가르켜 가지고 그랬다고 할 것 아니냐"

 

제산 스님께서는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을 관(觀)하라.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관(觀)해라' 그렇게 참선하는 법을 일러 주셨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조실 스님께서 『서장(書狀)』을 보나, 『선요(禪要)』를 보나 보면 그렇게 공부하라는 법은 없고.

 

조주 무자(無字)를 관하시는데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라는 것을 너무 용을 쓰고 하시다가 결국은 상기병(上氣病)이 나 가지고 그렇게 하시다, 결국은 그러한 병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계속해 가지고 깨달음을 얻으시긴 얻었지만,

그 상기병으로 해서 피가 거꾸로 넘어온 그걸로 해서 참 여러 해 동안을 고생을 하시고, 만행을 하신 그런 과거를 생각하셔서 우리 후학(後學)들에게는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용을 쓰고 그렇게 하지 말고 급(急)하고 완(緩)한 것을 득기중(得其中)이여. 그 중(中)을 얻어야 한다.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너무 용을 써서 되게 몰아붙인 것도, 과도하게 몰아진 것도 못쓰고, 그렇다고 해서 매카리 없이 멍하니 그렇게 해서도 안 되지마는.

그래서 그러한 병을 미연에 방지하고 그런 상기병과 같은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아니하면서 정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단전호흡을 설하시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단전호흡을 전강 조실 스님께서 처음으로 그것을 창안하신 것이 아니고, 임제종(臨濟宗) 종사(宗師)들은 단전호흡에 대한 언급을 별로 안 하셨지만, 육조 스님 밑에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라고 조동종(曹洞宗)의 개종이신, 그 조동종에서는 단전호흡을 정식으로 다 수좌(首座)들에게 권장을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그래서 특히 이 간화선(看話禪)을 하는,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서 수행해 나가는 간화선에 있어서 폐단이 너무 간절하게 한답시고 용을 쓰고 의심을 일으키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와 같은, 약으로는 낫을 수 없는 그런 무서운 장애에 부닥치게 되기 때문에 초학자일 때부터 단전호흡을 잘 기본으로 익혀 나가는데,

 

처음에는 준비 호흡.

준비 호흡은 가뜩 가슴으로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꾸었다가 입으로 '후-'하고 다 내뿜어. 또 가뜩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물렀다 내쉬고 하기를 두서너 번 그렇게 해 가지고 허파 안에 있는 묵은 공기를 다 쓸어버리고.

 

그리고서 인자 본 호흡으로 들어가는데, 조용히 들어마시되 가슴으로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아랫배 단전(丹田)이 약간 볼록하도록 들어마셨다가 잠시 쉬었다가 조용하니 코로 내쉬되, 볼록해졌던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이렇게 해 나가는데.

 

그 호흡을 수식관처럼 '하나, 둘' 셀 필요는 없고, 계속 그렇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드는데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길게 이렇게.

다 내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그러는데,

 

이것도 잘못하면 내쉬는 숨만 있고 들어마시지를 못해.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콱! 맥혀 가지고 영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말이여.

그게, 이 단전호흡을 하는데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잘되는 게 아니라 어쩌다 하나씩은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호흡이 잘되지를 않고,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굉장히 그것 때문에 고민을 호소하는 사람을 가끔 보게 되는데, 그러헐 때는 어떻게 허느냐?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를 볼록이 하고 내쉴 때는 배를 홀쪽이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나,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체해 가지고 할 때는 그 반대로 하는 거여.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를 홀쪽이 하고, 숨을 내쉴 때는 배를 볼록하게 만들어. 반대로 하는 거여. 그렇게 하다 보면 이 가슴 답답한 것이 차츰차츰 없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가슴 답답한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호흡법과 배가 볼록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것을 반대로 얼마 동안 해도 상관이 없고, 그렇게 해서 편안하면 상당히 오래까지도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답답한 것이 없는 사람은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가 볼록하게 하되 너무 가뜩 들어마셔 가지고 배가 터질 때까지 그렇게 잔뜩 들어마셔 가지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참고 그렇게 무리하게 해서는 안 돼.

들어마시되, 준비 호흡 3번 할 때에는 가뜩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완전히 내뿜도록 다 내뿜고, 3번을 준비 호흡은 그렇게 하지만, 본 호흡으로 들어가서는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시는 거야.

 

팔부쯤만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 게 아니고, 한 3~4초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내쉬되 또 완전히 다 내뿜으려 하질 말고 편안할 만큼만 내쉬는 거여.

10분 20분 30분을 해도 숨이 가쁘거나 힘들게 하는 것은 그건 잘못한 거고, 한 시간 두 시간을 해도 조금도 무리가 없도록 자연스럽게 해야 해.

 

자기의 호흡량에 맞추어서, 자기 체질에 맞추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해야 되지 그것을 무리하게 하니까 꽉 체해 가지고, 막혀 가지고 숨도 못 쉬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야.

단전호흡을 하기는 하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해야지, 무리하게 하면 그런 부작용이 일어나서 고생을 하는 수가 있으니까 그 점을 유의를 하기를 바라고.

 

 

화두를 드는 것은 간절한 의심이라고 하니까 '이뭣고?'하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화두를 해서는 안된다 그말이여.

알 수 없는 의심을 갖되, 그 화두가 배꼽 밑에 단전에다 두고 화두를 관(觀)하는 거야. 이건 말로써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문제나 자꾸 스스로 해 보면 그 말을 알아들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들어마실 때는 배가 볼록하게 하고, 내쉴 때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한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우리의 생각이 단전에 가서 자연히 거기에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하는 그 의심이 단전에 가 있게 된다 그말이여.

 

단전에 가 있게 하는 방법이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이렇게 불어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거기가 생각이 있게 되고, 차츰차츰차츰 내쉴 때는 배가 홀쪽한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우리의 생각이 단전에 가서 머물게 된다 그말이여.

 

그 머무는 거기에서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렇게 해서 하면 단전에다가 화두를 두고 관하는 뜻이 거기서 스스로 계합(契合)을 하게 된다 그말이여.

 

그렇게 해 나가면 상기병(上氣病)이 일어날라야 일어날 수가 없어.

단전호흡을 안 하고 이 머리로만 '이뭣고? 이뭣고?'하니까 자연히 우리의 기운이 머리로 올라가 가지고 나중에는 머리가 뽀개지려고 그러고, 뒤통수가 뜨끈뜨끈하니 열이 오르고 나중에는 그렇게 해서 상기병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 화두는 그렇게 초학자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시작은 하되, 차츰차츰 화두를 드는 요령을 터득을 하게 되면 숨 쉴 때마다 화두를 새로 들 필요는 없어.

화두는 딱 단전에다 두고 알 수 없는 의심을 관하되, 숨이 다 나가면 제절로 숨을 쉬고 숨은 몇번을 쉬어도 상관이 없으되, 화두가 없어지거나 딴 생각[別念]이 들어왔을 때는 그때 화두를 한 번씩 챙기는 거여.

 

사람에 따라서는 처음에는 숨을 내쉴 때마다 들어야 하겠지만 나중에는 서너 번 할 때까지도 화두가 고대로 있으면 새로 들을 필요가 없고, 한 시간 동안에도 화두가 고대로 있으면 새로 화두를 들을 필요가 없어.

 

물론 누구를 막론하고 화두를 들고 '이뭣고?'하고 있는 동안에도 수없는 생각이 들랑날랑하지마는, 귓전에 봄바람 스쳐가듯이 스쳐가거나 말거나 내비둬 버리고 자기 할 일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생각들이 왔다갔다한 것은 그건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내버려둬 버리고는 자기는 가끔 한 번씩 화두를 챙기고 자꾸 하다보면, 그것을 반복해서 하면은 습관이 되고, 습관이 나중에는 체질화가 되어 가지고,

일구월심(日久月深)해서, 날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오래오래 하다보면 그것이 순숙(純熟)이 되어 가지고 화두를 일부러 들지 않아도 항상 들어져 갖고 있고, 놓쳤다가도 금방 척! 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우리는 본능(本能)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식(食) 본능이니, 색(色) 본능이니, 귀소(歸巢) 본능이니 그 본능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본능이 어디서 생기냐 하면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반복해서 하는 데에서 본능이 생기는 것입니다.

 

미충(微蟲), 곤충, 동물, 사람 할 것 없이 남녀 간에 성(性) 문제는 누구한테 배우지 않아도 불구자나 되면 몰라도 성한 사람이면 배우지 안 해도 다 알고 있는 거고.

애기가 막 태어나면 젖 빠는 법을 가르키지 않아도 눈도 뜨지 않은 상태에서 젖꼭지를 찾고, 대주면 쭉쭉쭉쭉 빠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으로부터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그래서 화두도 자꾸 반복해서 하면은 나중에는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져. 뭘 봐도 화두요, 들어도 화두요, 잠깐 놓쳤다가도 금방 탁! 들어지게 된다 그말이여.

들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지고, 수없는 망상(妄想)이 드나들지마는 드나들거나 말거나 그것 억지로 떼어낼라 하지도 말고, 망상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성화를 내고 진심(瞋心)을 내고 번뇌심을 낼 필요도 없어.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화두만 떡떡 챙겨 나간다 그말이여.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 먹을 때까지, 점심 먹으면서도 떠억 화두를 들고 한 숟가락 한 숟가락을 넣고는 오십 번, 백 번 요렇게 씹으면서도 화두가 고대로 있도록 훈련을 쌓아나가라 그말이여.

양치질 할 때도 화두를 들고, 화장실에 가서도 화두를 하고, 목욕탕에 가서도 화두를 하고, 빨래를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오고가면서도 화두를 하고.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이것뿐이여.

 

그밖의 모든 일은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고, 한 일을 위해서 그런 것이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지, 이 한 일 말고는 우리는 할 일이 없어.

이 한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청춘도 버렸고, 고향도 버렸고, 부모형제도 다 버리고, 세상의 모든 명예와 권리와 지위 부귀도 다 버린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니 출가 아니한 세속에서 몸을 담고 사는 거사님들이나 보살님네들도 세속일 하면서도 이것을 할려고 그 애를 쓴 분들도 많이 계시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떠한 동기에서건 간에 출가한 비구 · 비구니 · 사미 · 사미니가 됐다 그말이여.

그렇다면은 정말 이 법이 있는 줄을 몰랐을 때는 몰라도 이 정법(正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있는 줄을 안 이상에는 정말 이 한 일을 위해서 전력투구를 한번 해봐야 할 일이다 그말이여.(26분56초~47분3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수식관(數息觀) ; (산) ānāpāna-smrti (팔) ānāpāna-sati

출입하는 숨을 세어서 마음을 통일하는 것. 그것에 의해 마음의 산란을 막음. 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법. 염입출식(念入出息) · 식념관(息念觀) · 지식념(持息念) 등이라고도 한다.

 

음사어(音寫語)로 아나반나삼매(阿那般那三昧) · 아나파다념(阿那波那念) ·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 안반(安般) · 안반념(安般念) · 안반관법(安般觀法) · 안반수의(安般守意) 등이라고도 한다.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은 이 수식관을 집중적으로 설한 경전이다. 수식관에 제시된 기초적 관법은 사념처(四念處)에서 간화선(看話禪)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행법의 저변에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선지피 ; ①선지. 짐승을 잡아 죽여서 받은 피. 식어서 굳어 덩어리진 피를 말한다. ②다쳐서 선지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선요(禪要) ; 『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매카리 ; 매가리. 맥아리. 맥(脈 기운이나 힘)을 속되게 이르는 말.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육조, 청원행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조동종(曹洞宗) ; 중국의 선종은 달마(達磨)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때의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 크게 성했다. 조동종은 이 혜능 문하인 청원행사(靑原行思)의 계통으로부터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와 그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 839-901)에 의해 형성된 종파이다.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은 자신이 본래 부처의 청정한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묵묵히 좌선만 하면 저절로 그 청정한 성품이 드러난다는 묵조선(默照禪)을 선양하였다.

 

이 이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법안 문익(法眼文益)선사의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 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동」은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동이겠지만, 「조」는 동산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이 그 종지를 크게 밝혀서 완성한 때문이라 하는 말도 있다. 중국의 문법에 선후와 시종을 거꾸로 붙이는 전례가 아주 없는 바도 아니지만 제자의 이름을 스승의 이름 위에 놓은 것이 당연한 경우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송나라 이후에는 조계산(曹溪山)의 「조」로써 육조의 바른 갈래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왔다. 또한 조산 본적의 조산도 조계산을 사모하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것이다. 그 가풍은 정편 오위(正偏五位)를 세워서 아주 세밀하고 말과 행실이 서로 일치하고, 이치와 일이 무르녹게 합하여, 본래면목으로써 종지(宗旨)를 삼는다.

일본의 조동종은 도원(道元, 1200-1253)이 1223년 송나라에 들어가 중국 조동종의 선승인 여정(如淨)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계승하였다. 도원 선사는 1227년 귀국하여 일본에 조동종을 전파하였다.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팔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 15분.

(2) 11분 32초.

 

[법문] 전강선사(No.250) - 고담화상법어 2 (72.06.03.새벽)[몽산법어 부록 06](전250)

 

(1)-------------------

 

'이뭣고?'를 허는데 '이-뭣고?' 시심마(是甚麽)거든. 시심마.

'이 시(是)'자, 심(甚)자는 '무엇'이란 심(甚)자여. '무엇인고?' 그 심(甚)자여.

시심마(是甚麽), 마(麽)자는 아무 거 의미 없는 자여. '뭣이냐?' 그말이여. 뜻 밑에 그 받침이여.

 

두 자 뿐이여. 심마(甚麽)뿐이여. 심마(甚麽).

시심마(是甚麽)여. 석자 뿐이여.

 

“이”, 봐 “이” 했지.

“이”, “이” 해 놓고 보니 뭐냐? 그말이여. 뭐여?

 

다시 들어보시오. “이” 해 놓고 보니 뭐여?

그걸 못 들어? 못 들을 게 뭐여.

 

천하에 도무지 무슨 뭐, 어디 그 무슨 뭐 뭐 뭐, 어디 거다가 뭐 책보로 싸 놨나? 뭘로 뭐 뭉쳐 놓았나?

 

'이뭣고?' '이- 뭣고?'

'이- 헌 놈이 뭣고?' 할 것 없어. '이- 뭣고?'

 

'뭣고?' 허면 '이- 뭣고?'

'뭣고?' 허면 알 수 없는 놈 하나 딱! 불거진다.

알 수 없다. 알 수 없구나. 그거이 그걸 활구(活句)라 햐. 알 수 없는 걸 활구라 햐.

 

요만큼이라도 조만큼이라도 터럭끝만큼이라도 실끝만큼이라도 뭣이 붙으면, 뭐 거 따질, 분석할 것이, 해석할 것이, 아는 것이 붙으면 그걸 사(邪)라 햐. 사견(邪見)이라 햐. 그거 사견참선(邪見參禪)이여. 그것은 해석참선이고. 못써.

 

그까짓 참선은 미(迷)헌 중생이 더 미(迷)혀. 단조무명(但助無明)이여. 더 무명만 더 죄만 짓는 것이여. 참선헌다고 해 봤던들 죄만 짓는 것이여.

따져 보고, 분석해 보고, 알아보고 허면은 그만 고것이 숭악한 사선(邪禪), 삿된 선이여.

 

더 참선 되도 않고, 더 되기만 하고, 참선방 앉을래야 앉을 수도 없고, 앉으면 잠 아니면 따지고 분석허고. 천하에 못쓸 것이여.

 

'이- 뭣고?' '이-헌, 이- 뭣고?' 가만히 힘쓸 것 하나 없어. 거 힘쓸 것 하나 없어.

'이뭣고?' 그놈 인자 가만히 '뭣고?'해 놓고는 알 수 없는 놈이 하나 나오면은, 가만히 알 수 없는 그놈의 대가리를, 알 수 없는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가만히 관(觀)헌다. 관혀.

 

관(觀)은 무슨 관인고? 관이라는 것이 '볼 관(觀)'자인디 뭐 다른 것인가?

 

아! 우리집이, 지금 우리집 방안이 어떻게 생겼으며, 우리 방안에 농이 어디 놓아져 있으며, 우리 방 자리는 뭘로 깔았으며,

그 가만히 여기 있어도, 가서 직접—우리 실눈은 지금 여기 와 있고, 내 눈뜨고 보는 이 실눈은 여기 있지마는 눈 감아도 보이지 않어? 환하니. 그와 같은 관(觀)이 있어.

 

거 가서 눈으로 뚝 뜨고 내 눈깔 뚝 뜨고 보는 관(觀) 말고, 눈을 감아도 관이 있어. 그놈이 역력(歷歷)허게 나타나.

 

'이뭣고?' '이- 뭣고? 뭣고?' 의심 좋다.

그 의심, 알 수 없는 '의심 의(疑)'자거든, 알 수 없는 그 '의(疑)'자거든.

 

그게 활구참선(活句參禪)이여. 서산 스님께서 바로 또 활구참선 말씀도 해 놓으셨지마는.

수참활구(須參活句)요, 오직 학자가 활구를 헐지언정 막참사구(莫參死句)다. 사구(死句) 말아라.

사구, '죽을 사(死)'자, 사구(死句) 죽은 참선. 사구(死句)란 건 아까 사선(邪禪) 모도 삿된 거, 요리 생각해서 알고, 조리 생각해서 붙여 보고, 요것이다 조것이다.

 

응, 요거 조그만한 것이, 조그만 어린 아이가 아! 그 여러 가지를 내가 한 댓 가지나 낱낱이 해석을 허고 앉었다 그말이여.

"그 어디서 배웠느냐? 니 어디서 그래 가지고 너 왔느냐?” 물은즉, 저 어디 정혜사에서인가 어디서인가 모도 그렇게 해석해 가지고 왔대.

 

고놈 정혜사서 했다고 않지마는, 아! 고런 몇이 거그서 왔는디 다 그러거든.

아 이거 이거 참, 큰일나 버렸어. 맨 그렇거든.

 

거기에는 무슨 참선이 그런 참선이 있는고, 참 이상스러운 선(禪)이여.

그래가지고 그 우리 견성(見性)이 어디 있으며,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어디 있으며, 부처님의 정법(正法)이 거기에서 그만 모도 매장되어 버리지, 어디 있어?

그것을 그 뿌럭대기를 좀 파버리고 캐버려야 되지.

 

'이뭣고?'

해 들어갈수록에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 증대되면 그놈만 자꾸 해 나가면은 세상에 그뿐이여, 그뿐이여.

알 수 없는 놈 하나뿐이여. 단, 알 수 없는 놈 하나뿐이니 그렇게 단순하고 그렇게 그대로 응, 그대로 활구 아닌가. 얼마나 쉽냐 그말이여. 얼마나 그 참 직접이고.

 

하! 이런 내 참, 왜 거다가서 뭣 땀세 글쎄 사구(死句)를 만들아.

활구(活句)인디, 본래 활구인디 활구를 갖다 따지고 붙이면 사구가 되어 번져.

 

'참선 학자들아! 참선 허는 학자야! 활구참선을 허지 사구참선 말아라. 말아라' 부처님 말씀이 그 말뿐이여. 꼭 활구참선 하나뿐이여, 다시.

 

활구참선법이라는 건 경절문(徑截門)이여.

저 성불도(成佛圖) 놀아 보셨지? 성불도 놀아 보면은 왜 그 각 제취(諸趣)로 천취(天趣)로 모도 돌고, 저 지옥 아귀 삼악도 악취(惡趣)로 돌고 모도 그렇게 되고, 그 다음에는 오십오위(五十五位) 점차(漸次)로 올라가기도 허고, 이 도 들어가지 못허고 있지?

 

경절문은 바로 뚝딱 올라가서 대각(大覺)으로 올라가 버리는 거여.

 

참선법은 점차(漸次) 지위도 없고, 이렇게 차제(次第)도 없고, 한 계단 한 계단 뛰어서 부처 되아 가는 법도 없고.

바로 그만 내 마음, 내 마음 '이- 헌 놈 이놈, 이- 헌 놈이 뭣고? 이놈' 툭 깨달라 버리면 그만 한발에 한걸음에 오십오위니 뭔 위(位)니 없어. 그냥 저 최상 대각에 올라가 버려.

 

무슨 점차가 있으며 무슨 지위가 있어?

아! 그런 참선법, 경절문 법이란 말이여. 그렇게 활구참선을 허셔야 된다 그말이여.

 

그러니 내 마음 내가 깨닫는 걸 참선법이라고 허는디—도통법, 그것이 그 바로 도통법이여.

그 법을 내놓고, 정법을 내놓고 뭘 할 것이냐 그말이여.

 

 

이 법을, '이뭣고?'를 해 나가는데....

 

'이뭣고?'를 한번 거각(擧却)하고 또 한번 거각하고.

처음에는 대체 원 그 하도 처음이니까, 하도 내가 생겨난 때가 없건마는 역사가 없건마는, 한번도 해 본 때가 없기 땀세, 처음이기 땀세 안되아.

 

한번 해 봐도 안되고, '이뭣고?' 해 봐도 안되고, '이뭣고?' 허면 도무지 그놈의 자리가 점점 더 껌껌허기만 하고, 뭣이 '이뭣고?'만 허면 뭣이 아는 것이 푹 나올까 싶고.

별별 망상이 그만 뒤끓고, 아무 망상이니 뭣이니 없다가도 '이뭣고?'만 탁 허기만 하면은 그만 그런 놈의 망상이 더 퍼일어나고, 잠이 또 그놈만 생각하면은 그놈 마구니 잠이 들어오네.

 

그놈 참, 그러니까 좀 성가셔. 좀 처음에는 그렇게 성가셔.

 

한 철 혀. 첫 철, 한철 해 보면은 안되아. 그러지마는 안된다고 해서 퇴타(退墮)해 버리고 안 해 버리면 쓸 것인가? 무엇을 헐라고.

 

이놈을, '이뭣고?'를, 내가 나를 깨달라 놓지 못하면, 찾아 놓지 못하면 밤낮 이놈의 칠통(漆桶), 이놈의 깜깜한 중생—세상에 내 낯반대기 나를 몰랐으니 내 온 곳도 깜깜하고,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도 깜깜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건마는 깜깜해. 열 달 동안을 어머니 뱃속에서 그 감옥 생활 했지마는 깜깜혀. 나올 때까장도 깜깜혀. 두어 살 응, 서너 살 먹도록까장 깜깜혀.

아! 겨우겨우 한 너더댓 살 먹으면 인자 그 사람의 그 의식이, 사람의 그 식(識)이 뭣이 붙어서 인제 다 안다 그말이여.

 

자! 허니, 인생 문제다. 세상에 이놈의 인생 문제가 어째도 이렇게 나를 몰라 가지고 이렇게 깜깜해 가지고는 거기에서 남[生]에, 늙어서, 병이 들어서, 뒈지는 것 밖에 없으니 죽는 것 밖에 없으니,

죽으면은 몸뚱이만 죽지, 내가 죽는가? '참내'가 죽어?

 

그 내가 어째 이놈의 고(苦)뿐이 하고야, 아이고야! 고(苦)밖에는 없어.

지옥밖에 떨어질 디 없고, 짓는 것이 죄밖에는 지은 것이 없고, 그저 천사만념(千思萬念)이 깨닫지 못한 중생은 그저 이놈의 생각 일어나는 것이 맨 죄다.

 

맨 삿된 마음, 못된 마음, 살생할 마음, 넘 속일 마음, 도둑질헐 마음, 사음질헐 마음, 그저 맨 그런 못된 마음뿐이니, 마음 죄가 더 크다. 몸뚱이로 짓는 죄보담도 마음으로 짓는 죄가 더 크다.

내가 이 몸뚱이로 남을 때려 패 죽이는 것보담도 마음으로 '저놈 내가 죽여야지' 그것이 더 커. 그게 대승계(大乘戒)여. 더 크다 그말이여.

 

중생의 거족동념(擧足動念)이, 우리 인생의 거족동념이—발 한 번 옮겨 놓고, 마음 한 번 내는 것이 전부가 죄뿐이니, 이놈의 죄만 퍼지어서 저 악도(惡途), 지옥에 떨어지고 개 배때기, 말 배때기, 구렁이 배때기 속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문제냐 그말이여. 인생 문제.

 

금생에 사람 몸뚱이 요까짓 것 좀 되었다고, 똥자루 하나 짊어지고 돌아댕기는 것이지.

참선도 않고 그만 그저 동념 죄업(罪業)만, 거족동념 죄업만 퍼짓고 말 것이여?

 

이놈의 인생 문제 봐라.

인생이 이런 문제를 두고 오늘 살았으니깐 족하고, 오늘 이만 하니깐 족하고, 내 세상이야 싶지. 아이고, 참!

 

이 좀 편안하고, 이 좀 젊고, 이 좀 이만헌 요만한 기회 있을 적에 정신채려라 말이여. 참 채려라.

어찌 '이뭣고?'를 모르냐? 아! '이뭣고?' 하나를 몰라? 글쎄. '이뭣고?' 허는 법이다.

 

한 번 혀, 또 한 번 혀. 그렇게 안되지마는 퇴타하지 말아라. 안될수록에 더욱 발심(發心)을 하고 더욱 믿고 더 철저히 해야 하는 법이다.(20분24초~35분24초)

 

 

 

(2)-------------------

 

한 번 혀, 두 번 혀, 세 번 혀, 열 번 혀, 백 번 혀, 천 번 혀, 만 번 혀, 자꾸 해 봐라.

자꾸 허면은 그 모도 일어나는 망념 망상이 고놈이 그 자리에서 잦아지고, 그 자리에서 다 녹아지고, 나중에는 '이뭣고?'가 의심이 그 들입대 일어나는 바람에—잠도 고놈이 어디 온 곳이 있나? 잠도 고놈이 오도 않는다. 인자 '이뭣고?' 그놈의 의심이 턱 일어나면은 잠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오래 할 것 같으면 역여유천(亦如流泉)이다. 흐르는 저 물, 솟아 올라오는 물구녁에 물 나오듯, 그 물 항상 떨어지지 않고 나오는 물이 있지 않는가?

항상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나오는 석간수(石間水) 같은 물 같애서, 항상 물이 나오드끼 이 화두도 그 자리에서 그렇게 일어난다.

 

그 반야력(般若力)이 '이뭣고?' 생각하는, '이뭣고?', '이뭣고?' 그 참 생각하는 그 활구 의단이 의심이 그 일어나기 시작하면 없앨래야 없애지 못해아.

그 물구녁 아무리 막아 봐라. 껍닥에서 나오는 디 아무리 틀어 막아봐라. 기어니 옆을 뚫고 나온다.

 

'이뭣고?' 역시 똑같다. '이뭣고?' 역시 그렇게 나오는 거여. '이뭣고?'가 똑 새암물 솟아 나오드끼 그 '이뭣고?'가 절로 자꾸 나온다. 이것을 유천(流泉)이라 한다. 흐르는 샘에 물 나오듯 헌다 비유했어.

 

역여유천(亦如流泉)한다. 그래 가지고는 나중에 심공경적(心空境寂)이 된다.

마음이 공(空)한다, 심공(心空)이라는 것은, 마음이 공(空)했다는 것은 이놈 마음이 들어서 구백생멸심(九百生滅心)이 일어나고, 별별 망념이 구름 퍼일어나듯 헌디, 고것이 없어져 버려. 고걸 심공(心空)이라 햐.

 

일체 망념이 자진해 버려. 아! 그놈이 뭐 암만 낼라고 해도 없어. '이뭣고?'뿐이지. 하! 그것 참.

뭐 그전에 그 제대로 돌아댕김서 금방 있다가도 나도 자신도 자기도 모르게 나가 버리고 돌아댕기고 망념이, 아! 이러든 놈이 도무지 뭐 어디 간 곳 온 곳이 없다. 거 없어.

 

알 수 없는 '이뭣고?'만 나오는구나. 그 소 발자취 아닌가? 소 발자취, 거 얻은 놈 아닌가?

거 '이뭣고?'만 자꾸 새암물 솟드끼 솟는구나.

 

아! 이렇게 해 주어서 못 알아들으면은 그 어떻게 헐 것이여. 못 알아들어?

 

눈을 저렇게 뜨고 있으면 잠을 자는 것인가, 설법을 듣는 것인가? 모르겠구나.

 

우주다, 삼라만상이다, 모든 상이 마음에서 일어나서 있는 것인데, 마음이 공(空)해 버렸으니 뭐 일체 경계가 없다. 있어도 없어. 발을 딛고 걸어 댕겨도 없어. 하! 이런 꼴 좀 봐라.

마음이 공(空)해 번지고 경계(境界)가 적적(寂寂)해 번져.

 

'이뭣고?' 하나는 그만 언제거나 그대로 가만히 원 자나깨나 뜨나오나 아! 잠은 잤지마는 언제 잠잤는지 눈 뚝 떠 보면 '이뭣고?'뿐이다.

 

내가 실지로 해 봤구만. 법화경을 읽다가 글쎄 초저녁에 '이까짓 내가 경, 경(經)을 이거 읽다가 뒈지면 뭣 할 것이냐? 이거'

나이 그때 어리지마는 어릴 때 글을 읽으라고 해 쌌지마는 '경(經)만 읽다가 응, 죽으면 어찌 되아?'

 

모기 좀 뜯어먹으면 보시 좀 허지, 딱딱 소리를 내고 앉아 있어? 응.

그 무슨 짓이여 그것이? 보시도 좀 헐란지라 그 좀 배부르게 먹여 주지.

 

법화경을 읽다가 법화경 그 방편품, 그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어가서 지옥고 받는 그 대문(大文)을 읽다가 '그 세상에 이거 이것만 내가 이 설식기포(부)(說食飢夫)지, 글만 읽고 앉었으면, 참선을 해야지! 아, 내가 이뭣고?를 해야지. 이것만 해, 뭣혀 이거?'

 

원 책을 그만 내던져 버리고 싶고 하다가는 에잇! 책 딱 덮어 번지고 가만히 앉어서, 조주(趙州) 무자(無字) 해 나가는 것을 내가 배웠거든.

내가 어디서 탔든지 탔는데, 옳게 큰스님한테 가 타들 못하고 그럭저럭 탔는디, 그냥 조주 무자(無字)를 허래.

가만히 무자를.. 아! 무자(無字)가 들어와서 가슴 가운데 와서 딱! 붙었는디, 아 이것 참 기맥히데 처음인디.

 

처음에 글 읽다가 좀 해 보는디, 어떻게 독하게 한바탕 무상한 생각이 일어났든지, 경 읽다가 그 방편품 지옥고 받는 데를 보다가 발심이 되았든지 어쨌든지, 참 발심인지 뭔지 딱! 들어오더니 화두가 그만 딱 붙었네.

이놈을 관(觀)해 가지고는 어떻게 그날 밤에 그 탁! 했든지, 아 그래도 어떻게 앉어서 그럭저럭 허다 잤는디, 자고 일어났는디 새벽에 화두가 그대로 가만히 있어.

 

옳게 헌 화두인지, 글케 헌 화두인지 알도 못헐 때지마는, 고 생각헌 대로 고대로 가만히 있대, 화두가.

아따! 어떻게 참 좋은 생각이 나고 혼자 '곧 뛰겄어. 이러면 내가 곧 견성허겄구나. 이거 곧 견성헐... 내가... 아, 세상에 이러헌 참선법을 내가 가서 어서 참선을 해야지. 곧 견성을 헐 것인데 내가 경만 읽고 있어? 이까짓 놈의 경을 읽고 있어?'

 

나갈 생각이 굴뚝 같애도 내보내야지. 스님이 뭐 어떻게 안 내보내니깐 못 나간다 그말이여. 그러다가 어쩌다가 틈을 타 나오기는 나왔지마는.

 

곧 되는 것이여. 거 한 철, 두 철도 될 수 있는 것이고.

 

그거, 한 번 허다가 '아이고! 이거 안되아' 두 번 하다가 '에이고! 이놈의 것 못혀' 또 한 번 해보다가도 '아이고! 이거 좀 어디 가 좀 놀았으면, 아! 어디 가서 화투나 한번 치꺼나'

이렇게 이렇게 어떻게 그만 허다가 또 그만 뭔 별념(別念) 냈다가, 또 그만 퇴타 좀 했다가 또 해보다가, 요렇게 허면은 육억칠천만 년 미륵하생(彌勒下生)이니까, 미륵하생까지 계산해 보면 육억칠천만 년이여.

 

육억칠천만 년을 해봐. 아무 소용없어.

화두라고 헐 것도 말 것도 없고, 그건 공부라고 헐 것도 말 것도 없고, 그건 죽은 참선도 아니여.

 

참선이라는 건 그렇게 허는 법이 아니여.

그저 똑 절대 발심(發心)이고, 절대 분심(憤心)이고, 분심 가운데 의단(疑團)이 일어나 가지고는 입지여산(立志如山)을 해라. 뜻을 세우기를 산같이 해라.

 

이것 않고는 뭣을 헐 바냐? 무엇을 해?

응, 세상에서 글쎄 임금 노릇을 허면 다할 때가 있고, 백만장자가 백만 부귀가 부귀 다할 때가 있고, 인간이 아무리 별짓 다 허드래도 죽을 날이 오니, 그날을 생각해야 할 거 아니냐?

 

죽은 날 생각해 봐라. 부귀 다한 날 생각해 봐라. 지위 다 가버린 날 생각해 봐라. 어떠냐?

 

나 원, 저 이박사 야단치고 처음에 왼통 우리 대통령이라고 야단치고 그 야단 쳐 쌌더니, 이박사 죽을 때 어디서 병이 들어 가지고 와서는 고국을 생각해서 돌아오지 못하고 앓는단 말 듣고, 그 앓으면서 그 한탄 탄식헌단 말 듣고 기가 차더라.

 

지위나 권리나 부귀 명예라는 것이 다할 날이 없음사 하지마는 다할 날이 앞에 곧 닥쳐오고.

인생이라는 것은 이별밖에 없다. 다 여의고 버리고, 나 홀로 돌아서는 그때 가서 참선밖에는 없다. '이뭣고?' 밖에는 없어.

 

'이뭣고?'를 바로 깨닫지는 못하고 의심만 독로, 알 수 없이만 가드래도 염라대왕이 자귀의(自歸依)를 혀. 항복을 해 버려.

 

헌데, 이러헌 심(心), 마음이 일체 번뇌 망상이 그만 제대로 공, 그대로 공도 없어.

공(空)해 버리고, 마음이 공했으니 경계(境界)가 적적(寂寂), 경계도 아무것도 없다. 이런 때가 온다. 참말로 그때래야 화두가 하나 독로해야 쾌락안연(快樂安然)허리라. 그 쾌락하고 안연할 것이다.

 

쾌락안연을 거다가 둘 거 뭐 있나?

의단(疑團) 하나 독로(獨露)해 번지면 뭐 쾌락이니, 안연이니, 안락(安樂)이니 붙지 못해야 그놈이 참 화두지. 안연(安然)허리라.

 

화두를 '이뭣고?' '이-뭣고?' 요렇게 똑 해 나가란 말이여. 여까지 화두는 해 두고.(35분25초~46분5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단조무명(但助無明) ; '오직 무명만 도와 줄 뿐이니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용화선원刊) p82. (가로판 p86)

迷心修道하면  但助無明이니라

미욱한 마음으로 도를 닦는 것은 오직 무명만 도와 줄 뿐이니라.

 

(註解) 悟若未徹이면  修豈稱眞哉리요  悟修之義는  如膏明이  相賴하고  目足이  相資니라

철저히 깨치지 못하였다면 어찌 참되게 닦을 수 있으랴!  깨침과 닦는 것은 마치 기름과 불이 서로 따르고,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것과 같으니라.

*무명(無明) : [범]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관(觀)한다 ;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

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역력(歷歷 지낼·수를 셀·다할·두루 력) ; '뚜렷하다'는 말.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묘사이다. 사유 분별할 여지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현상을 묘사한다.

*역력명명(歷歷明明) ; 뚜렷하고 분명하다는 말. 역력과 명명은 동일한 뜻이며, 중첩하여 어감을 강하게 한다.

사유 분별할 여지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현상을 묘사한다. 어떤 조작도 없고 어떤 분별도 들어설 여지없는 본분(本分)이 드러난 경계를 나타낸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땀세 ; 땀새. ‘~땜에(~때문에)’의 사투리.

*수참활구(須參活句) 막참사구(莫參死句) ; '활구를 참구할지언정, 사구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용화선원刊) p49~50. (가로판 p50~51)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할지언정, 사구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이 아래는 특히 활구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지름길 경/끊을 절/문 문) ; 지름길문. 경절(徑截)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 교문(敎門)의 55위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성불도(成佛圖) ;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놀이 가운데 하나.

염불 · 참선 · 교학의 수행을 통해 성불의 길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108단계로 구성한 도판(그림판)과 '나무아미타불'이 적힌 3개의 주사위와 두 분의 부처님과 18분 보살님 명호가 적힌 20개의 말을 사용하여 수행을 통해 육도윤회를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게 구성된 놀이.

*오십오위(五十五位) ; 처음 건혜지(乾慧地)를 지나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사가행(四加行)·십지(十地)를 하나하나 거쳐서 올라가야 성불하게 된다는 말.

*점차(漸次) ; 시간이나 차례에 따라 조금씩.

*대각(大覺) ; 부처님의 깨달음. 정각(正覺) 대오(大悟) 등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깨닫고[自覺] 남들도 깨달음으로 인도하여[覺他] 각(覺)과 행(行)이 원만하게 갖추어졌으므로 대각이라 한다. 또는 부처님 자체를 가리키는 말.

*차제(次第) ; 차례(次例 순서 있게 구분하여 벌여 나가는 관계).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대승계(大乘戒) ; 대승의 보살이 받아 지켜야 할 계율. 보살계라고도 한다.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 · 아귀 · 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동[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罪] 행위[業 : 身口意 三業].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2)

 

*들입다 ; 세차게 마구.

*반야력(般若力) ; 반야의 힘. 참된 지혜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가 생사윤회의 원인이며, 반야는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 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심공(心空) ; ①허공과 같이 큰 마음. 마음이 본질적으로 무한히 넓고 커서 만상을 포용하는 허공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마음이 텅 빈 경계 또는 그러한 도리. 마음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 텅 비고 고요하며 어떤 상에도 걸리지 않는 경지에 들어 있다는 뜻.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적적(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 한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설식기포(설식기부 說食飢夫) ; '입으로(말로만) 밥, 밥, 해봤자 먹지 못하여 배를 곯다' '바로 참선 수행을 해야지, 경만 보는 것은 소용이 없다'


[참고] 『능엄경요해(楞嚴經要解)』 (계환戒環) 「능엄경요해서(楞嚴經要解序)」 (급남 찬 及南 撰)
〇像季已還 道術旣裂 明心之士 妄認緣塵 爲物所轉 義學之徒 虗驕多聞 不全道力 奇才茂器 皆流爲蒸砂迷客 說食飢夫

[참고] 『능엄경(楞嚴經)』 제1권, '견도분(見道分)' (일귀 역주 | 샘이 깊은 물) p79~80.
〇自我從佛 發心出家 恃佛威神 常自思惟 無勞我修 將謂如來 惠我三昧 不知身心 本不相代 失我本心 雖身出家 心不入道 譬如窮子 捨父逃逝 今日乃知 雖有多聞 若不修行 與不聞等 如人說食 終不能飽

제(아난)가 부처님을 따라 발심하여 출가한 이래로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만 믿고 항상 '제가 애써 닦지 아니하여도 여래께서 삼매(三昧)를 얻게 해 주실 것이다'고 생각했지, 몸과 마음이 본래 서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만 저의 본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마음이 아직 도(道)에 들지 못한 것이 마치 궁자(窮子)가 아버지를 피하여 도망 다니는 것과 같았습니다. 금일에야 비로소 비록 다문(多聞)했다 하더라도 만약 수행하지 아니하면 듣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이 음식을 말하는 것으로는 마침내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1분 33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 하안거 결제  백일기도 입재.(용240)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인데, 「그 찾는 그놈을 다시 되찾는다」 그것입니다.
 
이뭣고?’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하면 일상생활(日常生活)인데. 일상생활에 앉고 서고 눕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도 내고 슬퍼하기도 하고, 이것이 바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인데, 이것이일생생활이거든.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소소영령(昭昭靈靈) 놈이 있거든.
 몸뚱이를 끌고 서울도 가고, 서울에서 요리 끌고 오기도 허고,  몸뚱이를 시켜서 성도 내게도 하고, 슬퍼하게도 하고, 말도 시키기도 하고,  밥도 먹으라 그러고,  안에서 조정하는 놈이 있어.
그놈이 눈으로 볼라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수는 없는데, 분명히  몸뚱이 안에  몸뚱이를 운전하는 조종하는 놈이 있다 그말이여.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그말이여. ‘이것이 무엇이냐?’ ‘이뭣고?’
 
대관절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또는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을 허지만,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허는 이놈이 바로 무엇이냐? 이거여.
이뭣고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 ‘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 뭣고?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말이 찾는 놈을 되찾는 것이거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종일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렇게 허라는 것은 아니여.
이뭣고?’ 이렇게 허되,  속의 뜻은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말이거든.
 
그러나 실지로  때에는 자꾸 이뭣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러라는  아니여.
 
 뭣헌 분은 이뭣고?’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 육백만  하는 공덕이 있다」 그렇게 내가 말씀을 했더니,    때에 육백만 번이면  번을 허면 육천만 번이고,   번을 하면 육억 번이다.
그래가지고 내가  번이야 그까짓  1 동안에  번을 하면 10 동안이면은  번을  수가 있고 허니까, 그것을 육백에다 곱하면 이렇게 되겠다  가지고는 「이뭣고」 「이뭣고」.....「이뭣고」를 갖다가 수없이 그렇게 하는데, 그건  말을 잘못 알아들은 말이거든.
 
 번을 하되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  간절(懇切) 의심(疑心)으로 하라는 거지, 입으로 그저 횟수를 많이 채우라는 말씀은 아니거든. ‘이뭣고?’
그리고 간단(間斷)없이 하라  말도, 「그   없는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말이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말소리가 끊어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어요.
 
 참선이라 하는 건 참, 바르게 하는 방법을 가르켜 드리기도  어렵고,  그것을 방법을 바르게 배우기도  어려운  같습니다.
 
너무 쉬웁고 간단한데 실지로 해보면  화두(話頭) 바르게   알기가 그렇게 쉬운 것만도 아닌  같습니다.
3년씩 또는 10년씩 선방(禪房) 다니면서도   공부를 하셔도  진짜 화두를 올바르게 들고 있는 분이 그렇게 많지 않은  같습니다.
 
 화두 하나만 제대로 딱 들어 버린다면 견성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성불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생사해탈하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부득이(不得已)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 해야 한다 부득이 해서 견성(見性) 해야 한다 부득이해서 성불(成佛) 해야 한다 이렇게 말을 하지,
사실은 생사해탈해야  생사도 없는 것이고, 깨달라야  () 없고, () 없는 것입니다.
 
생사해탈 해야 한다하면, ‘생사해탈이란 말에 ! 국집(局執) 하고, ‘견성을 해야 한다하면  견성이라고  말에 ! 국집을 하고, ‘성불을 해야 한다하면  성불이라는 말에  국집을  가지고, 국집하는 찰나에 화두를 놓치게 되고 자기를 놓치게 되는 것이여.
 
견성성불해라, 생사해탈을 해야 한다 말은 바로 화두를 들게 하기 위해서, 바로 자기를 관조(觀照)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말에 떨어지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
 
방안에 있는 파리를 문을 닫고서 파리를 내키면  파리가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내키면은 천장에   붙고, 천장에  붙은 파리를 내키면 동쪽 벽에 붙고, 동쪽 벽에 파리를 내키면 서쪽에 가 붙고, 서쪽벽에 붙은 파리를 내키면 남쪽에 가서 붙고.
이래가지고  파리 내키면은 반드시 어디 가서  붙는다 그말이여.
 
참선을  나가는데 있어서도 어디에 가도 붙으면  되거든.
 
다맛   없는 의심만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가야지, 무엇이 좋다고 한다고 해서  좋다고 하는데 붙으면  .
 
이렇게 오늘 갑자년 4 15 하안거 결제 법요식에 사부대중이 이렇게 모이셨는데,
 법문(法門) 듣고 무엇을 많이 알기 위해서 법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법문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가 집착하고 있는  생각이 떨어진다면, 그건 좋은 생각에 집착했더라도 마찬가지고 더군다나옳지 못한 생각에 집착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집착한 마음이 떨어진다면 여기까지 오셔서 법문을 들은 공덕이 있고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무슨 법문을 들었어도  법문에 국집을 하면 좋은 약을 먹고서도  약에 중독(中毒) 된 거와 같애요.
 약을 먹은 것은 속에 병이 떨어지라고 먹는 것이지,  약을 먹고 약에 중독이 되서 부작용이 일어난다면  약을 차라리  먹은 것만도 못하거든.
 
오늘 법요식뿐만이 아니라 팔만대장경 경전도 역시 마찬가지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설하신 모든 법문이 또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법() 국집하면아주 신심 있는 이는  법에 매우 깊이 국집을 하는 수가 있는데,  국집을 한다면 부처님 법문을 옳게 가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했고 금강경(金剛經)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마는 ()이라 하는 것은 강을 건너가는 배와 같은 것이다(知我說法 如筏喩者)  배는 강을 건너는  목적이 있지, 강을 건너가지고서도 배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것입니다.
「법에 국집해도 못쓰거든 하물며  아닌 것에 있어서랴(法尙應捨 何況非法)」 금강경에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순간에도 자기의 화두를 놓아 버려서는 아니 되거든.
법문을 들을 때일수록 자기의 화두가 더욱 성성(惺惺)하게  들려져 있어야 하거든.
 
  없는 의심, 「이뭣고?」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판치생모」 화두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정전백수자」하시는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했는고?’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 해야 하거든.
 
   없는 화두가 들어져 있는 상태에서 법문을 들어보면 법문이 더욱   들리고, 비단 법문 들을 때뿐만이 아니라 생활을 면서 먹을 때에도 그렇고, 세수할 때도 그렇고, 차를  때에도 그렇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화두가 항시 들려져 있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하시도록 그렇게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21분46초~33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참선(參禪) ; ①() 수행을 하는  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부득이(不得已)하다 ; 마지못하여 할 수 없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국집(局執) ; 마음이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 사리(事理)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찰나(剎那 짧은시간 /어찌 )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내키다 ; (사람이 무엇을)공간을 넓히려고 바깥쪽으로 물리어 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대책.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 지혜를, 바라밀(波羅蜜)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 줄임말이다.
풀이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 뜻하는 것이다.
 금강경은  반야경 육백부(六百部) 중에서 五七七권에 해당되고,  내용이  3백송(三百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대략 서기 150~200년경의 대승경전 최초기에만들어진 경전이라   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 금강석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있고,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밝게 비출  있다는 금강석을 부처님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로 비유한 것이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예리하고 반짝이는 완전한 반야의 공지(空智)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하여 성불할  있다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용화선원刊) p53.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뜻입니까?,「판치에 털이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 했을까?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7분 3초)

 

[법문] 송담스님(No.627)—99 6 첫째 일요법회(99.06.06)(용627)

 

만의도취일의단(萬疑都就一疑團)하고  의거의래의자간(疑去疑來疑自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수시나룡타봉수(須是拏龍打鳳手)하야  일권권도철성관(一拳拳倒鐵城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의도취일의단(萬疑都就一疑團)이여. 만 가지 의심을 모두   의심 덩어리로  그리 몰아붙이라 이거여.

우리는 살다 보면은 여러 가지 의심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경전에 대한 의심, 공안에 대한 의심, 세속의 모든 일에 대한 의심, 정치 경제 모든 의심, 학교의 과학 학문에 대한 의심, 모든 의심이 있을 수가 있으나,  모든 의심을 전부 다 이뭣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하나의 의단(疑團)에다  몰아붙이라 이거거든.

 

의거의래의자간(疑去疑來疑自看)이여. 의심해 가고 의심해 오며, 이뭣고?’ 의심을 스스로  다시 되돌이켜 관하는 거여. ‘이뭣고?’

 

이뭣고?’ 자기의 본참화두인데, 이뭣고?’

이뭣고?’  -’  -하는 이놈이 뭣고?’ 이것이 의자간(疑自看)이여.

 

의심나는 것을 물어서, 다른 사람한테 물어 가지고 그걸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무슨 의심이 나던지 바로  의심을 즉(卽)해 가지고 자기의 본참화두 이뭣고?’ 돌아오라 이거거든.

 

수시나룡타봉수(須是拏龍打鳳手), 모름지기 용을 때려잡고 봉(鳳)을 잡는 그러한 용기와 수단을 가진 사람이라야,

일권권도철성관(一拳拳倒鐵城關)이다. 한주먹으로 철성관을 쳐서 꺼꾸러뜨릴 수가 있을 것이다. ‘쇠[鐵]로 만든 성(城)에 관문(關門)’이라 한 것은 조사관(祖師關)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조사관을 깨뜨려야 하거든.   없는  의심관, 조사관, 이놈을 !...

 

이뭣고?’ 자꾸 하다 보면 처음에는 잊어버리고 딴 생각[別念]이 들어오고 하지만 잊어버리면  이뭣고?’

딴 생각이 들어오면  생각 버리고 하려고 하지 말고 바로  자리에서 이뭣고?’ 자꾸자꾸 하다보면 나중에는 습관이 되어가지고 화두를 들려고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되거든.

 

그래가지고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까지, 점심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까지, 저녁에 누워서 이뭣고?’하면서 들고 있는 화두가 아침에 일어나면 고대로 들어져 갔고 있거든. 이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거든.

오매(寤寐)가 일여(一如)하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면 머지않아서 !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여.

 

열심히 열심히 하고, 자기 근기(根機)도 따지지 말고 아무것도 따질 것이 없어.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나가면 반드시 되는 것이 바로 이거여.

세속의 사업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여. 되기도 하고 실패하기.. 실패율이  많고. 이것은  빠르고 늦은 차이는 있어도  되고만 마는 것이 바로 이것이여. ?

 

자기가 원래 부처였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열심히만 하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이것이 만약에 거짓말이고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고 보증을 서셨어.

 

우리가 모든 인연에 따라서, 아까 조실 스님 말씀에 빠르면은 7일이요, 늦으면은 3년이요 이렇게 말씀하셨지마는,  기한은 전혀 우리가 따질 필요가 없어.

빨리 되어도, 빨리 공안을 타파해도 그것에 끝난 것이 아니고, 더디 되어도 더디 되었다고 해서 허송세월한 것이 아니어.

 

여법하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빨리 공안을 타파할 수도 그리고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부처님과 같이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원만구족(圓滿具足)하려면은 깨달은 뒤에도 계속해서 우리는 닦아 가야 하는, 닦을  없이 닦아 가야 하는 길이 있는 것이여.(46분27초~53분2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만의도취일의단~’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5) '贈蘭法師' 게송 참고.

*이뭣고(是甚 시심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왔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즉해(- ·즉시 ) ; .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순간 바로. 당장에 ).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화두(공안) 말함. 관문(關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 관문이 된다.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별념(別念) ; ‘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있으면 고인이 말한  「잡독(雜毒)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없느니라.”

 

余云別念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생각[別念]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외에는, 불법(佛法) 온갖 좋은 일이라도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 취하거나[], 버리거나[], 집착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모두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것이요,  묻는 사람이 친히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화두를 들려고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오매일여(寤寐一如 잠이  /잠잘 /하나 /같을 ) ; 자나깨나 언제나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눌  없음.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덩어리 /홀로오로지 /드러날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홀로() 드러나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화두(話頭) 대한 의심(疑心) 관조(觀照) 나가는 ,   없는 그리고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이상 의심이 커질  없고, 이상 깊을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가슴속이 가득차고,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때에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때에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항아리를  돌로 내려치면은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따를·좇을 /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 받아 계승해  대대의 조사(祖師).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이것이 만약에 거짓말이고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고 보증을 서셨어 ; 

 

[참고 ]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하권 (백운화상초록 白雲和尙抄錄) ‘승고선사(承古禪師 ? ~ O四五)’

承古禪師  常勸諸人  莫學佛法  但自無心去  利根人晝時解脫  鈍根人或三五年  遠不過十年  若不悟去  老僧  你入拔舌

 

승고선사께서 항상 여러 사람에게 권하되 불법을 배우지 말고 다만 스스로 무심하여라. 영리한 근기의 사람은 한나절에 해탈하고, 둔한 근기의 사람은 혹은 3 · 5년이며 멀어도 10년을 지나지 않는다. 만약 깨닫지 못하면 노승이 너를 대신해서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 들어가리라

 

[참고 ]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p97-99.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세상 인연을  여의며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지키고 인사(人事)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눈썹 사이에  털이 있다, 발바닥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등등.

*삼천위의(三千威儀) ; 비구(출가한 남자 스님) 일상 행동에서 지켜야  계율이 250종이어서 이를 비구 250라고 한다. 일상생활은 크게 (((() 나누기 때문에  가지에 250 곱하면 천이 된다. 이를 다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 곱하면 3천이 된다.

*팔만세행(八萬細行) ; 부처님의 모든 행동은 원만하여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다는 .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들이 전부 부처님의 위의(威儀, 훌륭한 행위)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疑心) (No.539)—단전호흡은 공양을 하고 2시간 이내에는 하지 말라 | 알  없는 의심을 관(觀)하는 의심관(疑心觀) | 우리의 본업은 이뭣고?’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7분 7초)

 

 

[법문] 송담스님(No.539)—94년(갑술년) 동안거결제 백일기도 입재(94.11.17)(용539)

 

오늘 갑술년 음력 10 15 삼동결제(三冬結制) 날인데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충분히 우리는 결제 법문을  들었습니다.

산승(山僧)이 기왕 여기에 올라왔으니 아직 화두(話頭)를 타지 않고, 참선(參禪)을 하고자 방부(房付)는 들였고  선방에는 가야겠는데 아직 화두를 안 타신 분을 위해서 간단히 화두 드는 법을 () 드리겠습니다.

 

참선은 내가 나를 찾는 방법인데 첫째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자세는 가부좌가 되면은 온가부좌(온跏趺坐)를 하고 온가부좌가  안되면 반가부좌(半跏趺坐)만 해도 됩니다.

 

가부좌는 허리를  펴고 오른발을 왼발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왼발은 오른발 위에다 올려놓고 하면은 이것이 온가부좌고, 반가부좌는  다리만을 올려놓으면 됩니다. 왼쪽 다리만 올려놓고 하거나  다리가 저리고 아프면은  다리를 바꿔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손은  발목 위에다가 오른손을 먼저 놓고  다음에 왼손을 위에다 이렇게 포개고,

 다음에 양쪽 엄지손가락  끄터리를 이렇게  마주치게 하되 너무 힘을 주어서 위로 올라가게 하지도 말고 요렇게 비끄러져서 이렇게 손장난을 해도  되고, 단정하되 너무 힘을 주지도 말고 떨어지지도 않도록. 이렇게 해서  위에다 놓되 아랫배 배꼽 앞으로 다가서 이렇게 하고.

 

어깨는 몸은 앞으로 기울지도 말고, 뒤에로 자지바지 하니 뒤로 기울어지지도 않고,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단정하니 이렇게 하되, 단정하면서도 어깨나 목에 힘을  빼는 거여. 그렇게 해서 고개는  어깨 위에 단정히 올려놓되 눈은 평상(平常)으로 .

 

눈을 너무 ! 부릅뜨지도 말고 감지도 말고 너무 가늘게 뜰라 하지도 말고 평상으로 뜨되, 자기 앉은자리로부터서  2미터나 3미터 정도가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그러되  2미터나 3미터 지점에다 특별한 무슨 콩을 갖다 놓던지, 거기에 있는 어떤  특별한 것을 놓고 그거를 응시(凝視)하라는 것이 아니고, 볼라고 하면 거기가 보일 정도로 눈을 뜨되 실지로는 아무것도  바가 없어야 한다.

 

 바가 없어야 하는데 처음 하는 사람은 자꾸 거기에 무엇이 보여 싼다 말이여. 장판이나 또는 벽에 있는 어떤 무늬나 그림이나   자죽 같은 것이 자꾸 눈에 얼씬거려 가지고 암만  볼라고 해도 자꾸 보여.

그래 가지고 사람처럼 보였다가 개처럼 보였다가 고양이처럼 보였다가 그것이 점점 가까와 왔다가 멀리 갔다가 없어졌다  생겼다, 그렇지만 일부러 볼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자꾸  화두를 드는데.

 

화두를 들되 자세를 바르게 했으면 인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데.

단전호흡이 대단히 쉬운 것인데 처음에 하는 사람은 대단히 힘이 들고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것이  그러냐 하면은 너무 무리하게 할려고 하기 때문에 힘이 들고 어렵다 그말이여.

 

조금도 무리하게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호흡을 하되 ' 호흡'을 들어가기 전에 '준비 호흡'을 먼저 해야 하거든.

 

준비 호흡은 속에 있는 가슴속에 들어있는 공기를 완전히  내뿜어요. 배를 홀쪽히 하고 가슴도 홀쪽히 하면서 완전히  내뿜고, 내뿜은 다음에는 스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되 가슴이 아주 미어지도록 들어마셔. 더이상 들어마실 없을 만큼 들어마신 상태에서  참는 거여.

얼굴이  벌거질 때까지 참았다가  입을 조금 벌리고 ~’하고 내뿜는데 가슴을 홀쪽히 하면서 조이면서 가슴속에 있는 것을 완전히  내뿜어.

 

 내뿜었으면 입은 다물고 코로  스르르르 허니 들어마셔. 가슴을 약간 드는  하면서 가뜩 들어마셔. 들어마신 호흡을  들어마셨으면 참아. 참았다가 입을 조금 벌리고  내뿜어. 이러기를   내지   정도로 하는 거여.

이렇게는 뭐   이상 허도 못하고  그렇게  필요도 없고, 2,3번 그렇게 함으로 해서 가슴속에 있는 가슴 허파 속에 구석구석에 있는 묵은 공기를 완전히  씻어 내는 방법이여.

 

그리고 오장육부 사지에 모든 혈관과 모든 신경에 새로운 긴장을 주는 것도 되어서, 이래서  준비 호흡을  다음에는 정식으로  단전호흡에 들어가는데,

 

아까 준비 호흡은 코로 들어마셨다가 입으로 내뿜었지만  호흡은 코로 들어마셨다가 코로 내쉬되 가뜩 들어마신  아니라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아까 준비 호흡은 가슴이 미어지도록 가슴으로 쉬었지만 정식 단전호흡은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단전(丹田), 배꼽 밑에 아랫배로 하는 거여.

 

스르르르 하니 조용허니 들어마시면서 배꼽 밑에 아랫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시되 가뜩 들어마신  아니라 7부나 8 정도만 들어마셔.  들어마실  있지만 가뜩하지 말고 78 정도만 들어마셨다가 잠시  상태로 정지했다가  조용하게 코로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볼록해졌던 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완전히  내뱉을라고 하지 말고 8부쯤만 내보내.

 

내보낸 상태에서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셔. 들어마시는 시간이  3, 들어마셨다가 머무르는 시간이  3, 내쉬는 시간이  4,5초. 다 내쉰 다음에  스르르르 들어마셔.

그래서 숨은 코로 들어가고 코로 나오되, 몸안에 움직이는 것은 아랫배만 볼록해졌다가 잠시 고대로 있다가  차츰차츰 홀쪽해졌다, 아랫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그런데 약 3, 3, 45초면은 한번 호흡을 하는데 10 정도 걸리는데 누구라도 그런 정도는  수가 있어. 사람에 따라서는 3초가 길면 2초도 상관이 없지만 3 정도 하면 누구라도  수가 있고.

 

이렇게 해서  ,  ,  ,   이렇게 하다보면 나중엔 5초에 들어마셔 가지고, 5 머물렀다가, 5초나 6초에 내쉬고 호흡이 차츰차츰 길어지는 법이여.

나중에  이태 삼년 하다 보면 들어마신 시간이 10, 머무르는 시간이 10, 내쉬는 시간이 10 해서, 30초에 숨을 한 번 호흡을  수가 있게 되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되어져야지, 억지로 이렇게 늘릴라고 하면 무리가 가서 얼마 못해 가지고 ~’  이렇게 헛숨을 쉬게 되는데, 무리하게 하면 부작용이 일어나요.

 

그래서 절대로 무리하게 하지 말고 자기 체질에 맞도록  시간 하고  시간을 해도 조금도 피로하거나 힘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하되, 주의할 것은 공양을 하고  시간 이내에는 하지 말어라 그말이여.

식사를 하면은 위장 속에 음식물이 들어있는데 그놈을 호흡에 따라서 배를 내밀었다 홀쪽했다 하면은 위장에 무리가  가지고 위가 늘어나면 위하수(胃下垂) 같은 병이 걸리기가 쉬우니까 절대로 공양을 하고 2시간 이내에는 단전호흡을 하지 말고 그냥 평상으로 숨을 쉬어.

 

그러다  시간쯤 지난 뒤에는 정식으로 인자 준비 호흡을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은 조금도 무리가 없이 위장병도 낫게 되고 혈압도 내려가고, 무리하게 하면 혈압이 올라갈 수가 있지만 절대로 무리하게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하는 거야.

처음부터  시간씩 할려고 하지 말고, 처음에는  10 20 30 차츰차츰 요것도 늘려나가야 하는 거다 그말이여.

 

 

그런데 화두는 언제 드느냐? 초학자(初學者)는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쉴  이뭣고~?’ 이렇게. (숨이)  나가면은 스르르르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그래서 숨을 내쉴  ‘이뭣고?’를 허라 그말이여. 나중에 차츰 익숙해지면 숨이야  번을 쉬거나 ‘이뭣고?’ 뒤끝에 남은 알  없는 의심이 있으면 계속해서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해도 상관이 없어.

 

호흡을   해도 고대로   없는 의심이 터억 있으면    없는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이뭣고?’하는 뒤끝에   없는 의심이 있잖아.  의심을 터억 관하는 거여. 그래서 그것이 의심관(疑心觀)이거든.

‘이뭣고?’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없는 의심(疑心)이 그것이 화두의 핵심이여. 그래서   없는 의심이 있으면 ‘이뭣고 자꾸 입으로 ‘이뭣고 이뭣고  해도 상관이 없는 거여.

 

 먹을 때는  먹으면서도 알  없는 의심이 터억 있고, 변소에 가서도   없는 의심이 있으면 고대로 있지,

자꾸 ‘이뭣고, 이뭣고...’—‘관세음보살 하루에   한다, 또는 아미타불을 하루에 오만 번씩 한다 그렇게 결정을 해놓고 계속 염주를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타불 타불 타불 타불...’ 이렇게 하는데, 오만 번 채운 것을 목표로 10 20 내지 평생을 하는 분도 내가 알고 있는데, 그분은 그런 대로 염불 참선이여 그저.

 

염불 하니까 그분 나쁘다고   없고, 우리가 본격적으로 참선을 할려면은 ‘이뭣고?’거든.   없는 의심을 관하는 거여.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대의지하(大疑之下) 필유대오(必有大悟) 의심이 크면 크게 깨닫는 거고, 의심이 작으면 작게 깨닫고, 의심이 없으면 깨닫지 못한 거여. 의심이 있어야!

 

의심이 점점, 처음에는 화두  때는 있다가 금방 의심이 없어지는데 자꾸 ‘이것밖에는   없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하면 화두를 들지 않아도 항상   없는 의심이 있거든.  의심을 항상 관(觀)해 나가. ‘이뭣고?’

  없는 의심이 차츰차츰 커지면은 의단(疑團)이 되는데 하늘을 봐도 ‘이뭣고?’요, 땅을 봐도 ‘이뭣고?’요, 밥을 먹을 때도 ‘이뭣고?’요, 화장실에 가도 ‘이뭣고?’, 걸어갈 때나 앉았을 때나 항상 의심이 있는 거여 그냥. 간단(間斷) 없어. 간단히 없으면 그것이 의단이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이 독로(獨露)하게 됩니다.

 

애를 쓰면  만큼, 그런데 내동 잘되어 가다 ! 변해갔고  화두가  들리는 경우도 있어. ‘이뭣고?’해도 ‘이뭣고?’뿐이지 진짜 참의심[眞疑]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그거 번뇌심(煩惱心)  필요가 없어. 서서히 단전호흡을 하면서 꾸준히 포기하지 말고 챙기고.

 

가슴이 너무 미어질라고 하고 답답하고 숨도 가슴이   가지고 호흡도  안되고 그럴 때도 있거든. 그런 때는 조용히 일어나서 법당 뒤나 한가한 데에 가서 30미터나 50미터  정해놓고 왔다갔다 하면서 서서히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를 하면 가슴 답답한 것도 없어지고 혼침(昏沈)이 오는 것도 가라앉고 머리가 쾌청해지면 다시 와서  앉아서 떠억 해서.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공부가  안된다고 번뇌심을 내고 그러지도 말고,

오직 내가  것은 이것밖에 없다’고 하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과 모든 성현들도 오직  법으로 생사해탈(生死解脫) 했다.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니 난들  해서  리가 있느냐.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있다’고 하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터억 해가라 그말이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남녀노소의 해야   직분이 있고 직업이 있으나 그것은 그것대로 허되  가운데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직업, 본업(本業)은 이뭣고?다 하는 신념을 가지고 일체처 일체시에 이것을 단속을  가시라 그말이여.(14분5초~31분1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 겨울철의  )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 음력 10 15부터 다음해 1 15일까지) 말한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방부(房付)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 참가하다.

*온가부좌(온跏趺坐 책상다리할 /책상다리할 /앉을 ) ; 결가부좌(結跏趺坐).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 발바닥을, ()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왼발을 오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오른발을 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앉는 길상좌(吉祥坐)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자지바지 ; 좌선(坐禪)  몸에 너무 힘을 주어,  전체가 긴장으로 인해 뻣뻣하게 되어 있는 모습. 좌선  때는 몸을 단정(端正) 하면서도 긴장과 힘을 빼야 한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

*응시(凝視 엉길 /보일 )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팔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 삼푼 되는 (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 () 뜻하며, '단전'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헛숨 ; 아무 까닭 없이 내쉬는 .

*위하수(胃下垂) ; ‘위 처짐(위가 정상 위치보다 처지는 증세)’ 위의 충만과 중압감, 구역질, 식욕 이상, 불면, 기억력 감퇴 따위의 증상을 보인다.

*이뭣고(是甚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뭣고·····?” 이렇게 의심을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  우주세계에 가득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나가면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화두 조금  보고, 안되면   화두   보고, 이래서는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화두 철저히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34~7822) [ ‘참선법 A’ 에서]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 하는 .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모르는 사람은 힘을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밖에는 없지만    이렇게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해도 화두가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필요는 없는 것이여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화두가 없어지고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없는 의심이 있는데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 독로(獨露)하걸랑,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 하는 거여.   없는 의심의 ()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일은   없는 의단(疑團)만을  잡드리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 () 긴완(緊緩) 득기중(得其中) 해야 . 그것이 묘한 ()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아는 사람은 바로 ()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 의심(疑心) ()’으로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관해 나가면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의심의 ()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 막론하고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나갈 줄만 알면어디를 가거나  선불장(選佛場)이요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공부처(工夫處)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 2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  ,  , 3, 5, 10년을 해도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하고, 고대로 하면서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묘한 의관(疑觀)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조정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의심관, ()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활구참선(活句參禪) 의심(疑心) 이라야 .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 서산에 지려고  ,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때에,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빨갛고 아름다운 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수가 없는데, 해가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해를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떨어져서  보일 때까지  시간 내지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때까지 관찰하고서,  다음에는 밤새  눈을 감으나 뜨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다시   관을 해서,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밤새 관하고,  이튿날 관하고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일관이라든지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 있는데,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의단(疑團)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해도  수 없는 의심이해가   봐두었던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 .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역대조사(歷代祖師)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 필유대오(必有大悟) ; ‘ 의심 끝에 반드시  깨달음이 있다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p52-53.

當於本叅公案上(당어본참공안상)  有疑(유의)호리니  大疑之下(대의지하)  必有大悟(필유대오)하리니  千疑萬疑(천의만의)  倂作一疑(병작일의)하야  於本叅上(어본참상)  取辦(취판)호리라

若不疑言句(약불의언구)  是爲大病(시위대병)이니라  仍要盡捨諸緣(잉요진사제연)하고  於四威儀內(어사위의내)  二六時中(이륙시중)  單單提箇話頭(단단제개화두)하야  廻光自看(회광자간)호리라

 

바로 모름지기 본분을 의지하야 법다이 하야사 비로소 옳으리라。 반드시 본참공안상에 의정을 두리니  의심 끝에 반드시  깨달음이 있으리니, 천의만의(千疑萬疑) 아울러  의심을 지어서 본참상에 판단할지니라.

만약 언구(言句, 화두)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병이니라。 반드시 모든 인연을  버리고 사위의(四威儀) 열두  가운데에 다만 화두를 잡아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볼지니라.

*의단(疑團 의심할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간단(間斷 ·사이 /끊을 ) ; 계속되던 것이 잠시[] 그치거나 끊어짐[].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하나 /없을 /섞일 ) ; 대상  자체가 순일(純一)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 없음[].

*내동 ; ‘일껏(모처럼 애써서)’ 사투리.

* ; (주로 ‘없다’, ‘않다’, ‘못하다’ 따위의 부정어와 함께 쓰여)아무리 애를  봐도 도무지. ②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또는 아주 심하게.

*진의(眞疑) ; 화두에 의심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을 말한다.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고원상인(蒙山和尙示古原上人)’에서.

話頭上(화두상)에  有疑不斷(유의부단)하면  是名眞疑(시명진의)니  若疑一上少時(약의일상소시)하고  又無疑者(우무의자)이면  非眞心發疑(비진심발의)라  *做作(속주작)하니라  是故(시고)로  *昏沈舉(혼침도거)가  皆入作得(개입작득)하리라

화두에 의심이 끊이지 아니하면  이름이 참의심[眞疑]이니, 만약 의심을   잠깐하고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라 주작(做作) 속하느니라。이런 연고로 혼침과 잡념이  마음에 들게 되느니라。

*주작(做作 지을 /지을 ) ;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지어서 하는 .

화두를   무상(無常) 느껴 발심(發心) 해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의심을   잠깐하고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고 억지로  것이어서 주작이라고 한다.

*혼침(昏沈 어두울 /잠길 )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 떨어진 상태.

*도거() : 혼침의 반대인데 산란(散亂)이라고도 한다. 정신을 머트럽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마음작용.

*번뇌심(煩惱心) : 망념(妄念)이라고도 하는데,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정신작용의 총칭이나, 이곳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 이외의 모든 생각을 말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 말함。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 이르기까지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본업(本業) ; ①주가 되는 직업. ②주로 하는 .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疑心) (No.118)—화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의단(疑團)입니다. 의심! |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히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어째서 () 했는고?’ 또는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 (19분 48초)

(2) (3분 26초)

 

[법문] 송담스님(No.118)—80 동안거해제 법어(80.03.01)(용118)

 

(1)------------------

 

이렇게 호흡을 익히면서 조심(調心), 마음을 어떻게 가져 나가야 하느냐?

셋째에 가서 마음을 고르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고르는 있어서는 화두를 참구를 해야 합니다.

 

화두(話頭)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들었습니다마는화두는 자기 멋대로 어떤 책에 있는 대로 거기서 배워가지고 한다든지, 자기 나름대로 무슨 화두를 하나 설정해 가지고 자기 멋대로 한다든지 이래서는 절대로 안된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냐? 책에 있는 대로 하건, 어떤 큰스님네한테 타건, 큰스님네한테 사람한테 간접적으로 듣건 처음에 시작한 데에 있어서는 비슷합니다.

차이가 없지만 , , , 1 이렇게 나가다 보면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그러한 경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상태가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것이 바른 경계냐? 또는 잘못된 경지냐? 이것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멋대로 나간 사람은 그때 물어볼 스승이 없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잘못된 경지를 갖다가! 내가 이거 공부가 잘되어 거구나이렇게 속으로 좋아하면서 신기한 경지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집착을 하고 그것을 지켜 나가다가 보면,

십상(十常) 열이면 , 삿된 데에 빠지거나, 미치거나, 외도가 되거나, 점쟁이 같은 것이 되거나, 잡신 같은 것이 붙어가지고 인간 자체가 폐인이 되는 수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는 바르게 지도할 있는 스승을 만나서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르게 지도를 받아가지고 그래 가지고 믿고 공부를 나가야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또는 시원찮은 데서 배운 사람은 나가다가 항시내가 이거 옳게 하는 것이냐? 잘못하는 것이냐?’ 자체에 대해서 망설이고 주저하고 의심하고 가지고 공부가 걸음도 나아가지를 못하고, 어떤 경지가 일어났을 때에도 중요한 고비에 가서 뒷걸음질을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을 있는 스승 자기가 믿어지는 스승을 만나 가지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법을 위해서는 몸을 잊어버리는 그러한 자세로서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일단 탔으면, 지도를 받았으면 아무리 공부가 안된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화두를 화두가 나쁘니까 다른 화두로 고쳐야겠다이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안될수록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가 안되니까 옆의 사람 보고당신은 무슨 화두를 허요?’

나는 무슨 화두를 해요가만히 사람 화두를 조금 흉내내 가지고 본다. 자기 화두를 때는 안되는데 잠깐 옆의 사람 화두를 흉내내 가지고 보니까 아주 공부가 수월하게 것같이 느껴져서 며칠을 그대로 본다.

 

마치 어렸을 , 오늘은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을 합니다마는 자기집 오곡밥은 먹어보니까 별로 맛이 없고, 다른 집에서 가져온 것은 굉장히 맛있는 것처럼 느껴진 기억이 있습니다.

 

화두도 자기 화두는 아무래도 안되는 같고, 남의 화두는 아주 좋은 화두같이 느껴져 가지고 사람 조금 보고, 사람 조금 보고 이렇게 하다가 만에 가지고,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하고 혼자 할라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 화두를 그냥 할까요? 다른 화두를 할까요?” 이렇게 물어보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 보살님네들 가운데에도 그런 분이 가끔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화두는 어떠한 화두나 천칠백 화두가 낙처(落處) 같은 것입니다. 어느 화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좋은 화두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주어진 자기의 화두가 가장 좋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화두가 안되어서 다른 화두를 보니까 잘된다. 처음에는 잘되는 같이 느껴지지만 얼마 가면 그전에 했던 화두가 자꾸 밟혀쌓고, 먼저 하던 화두를 다시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보다 저것 보다, 이러한 사람은 지조가 없는 사람이여.

 

우물을 팔라면 우물을 파야지, 파다가 물이 난다고 해서 장소를 옮겨서 파고, 한두 파다가 물이 나오면 저만큼 가서 데를 파고 이러한 사람은 맛있는 좋은 물을 만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파서 나오면 파고, 파서 나오면 , , 다섯 , 아홉 , , 스무 , 마지막에는 만나는 것이 반석(盤石) 만나게 됩니다.

인자 나는 우물 파기는 틀렸다. 자리를 잘못 잡았다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반석을 다이나마이트를 사용을 해서 폭발을 하던지 또는 정으로 쪼아내던지 이렇게 해서 반석을 뚫기만 하면 반석 밑에서는 아무리 가물거나 아무리 장마가 져도 변함이 없이 10 20 30 년을 두어도 변함없이 지하수가 풍풍 쏟아오를 것입니다.

 

하물며 무량겁으로 생사윤회를 몸이 금생에 화두를 가지고 공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금방 목마른 데에 마시듯이 그렇게 갈증이 잡히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무리한 얘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옛날부터서 크게 깨달은 도인들은 너무너무 공부가 안되어 가지고 목숨을 갖다가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을까, 자살을 할까 이러한 정도의 극한상황에까지 이르러서 거기에서도 쉬지 아니하고 마지막 목숨이 끊어질 것을 각오를 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끝에 죽음 직전에 확철대오(廓徹大悟) 예는 얼마라도 있습니다.

 

그래서 철에 공부가 안된다고 포기할 것도 아니고 다못 옳은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따름인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다섯 가지의 신심 그리고 가지의 법에 대해서 결함이 없도록 다져 나가되, 화두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의단(疑團)입니다. 의단. 의심!

 

의심(疑心)이라 하는 것은 「알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입니다. ‘아하! 이러한 것이로구나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까 이러한 것이로구나이렇게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따져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스스로 수긍하고,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엎어 보고, 분석해 보고 종합해 보고, 비교해 보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인용을 해다가 대조해 보고, 이러한 것은 활구참선(活句參禪) 아닙니다.

 

그러한 참선은 도깨비 참선이요, 여우 참선, 삿된 참선이요, 의리선(義理禪) 것입니다. 이러한 의리선, 야호선(野狐禪), 이러한 도깨비 참선을 가지고서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히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지금 이놈이 무엇인고?'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인고?

「지금 ''하고 있는,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계속 없는 데을 향해서, 없는 의심을 향해서 화두를 들고, 들어서 관조하고 이렇게 해서 조금도 옆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생각 생각을 그렇게 의단으로 몰고 나가야 .

이렇게 의심, 의심 의심, 1 1 생각도 비끌어지지 않도록 여유를 주지 아니하고, 없는 의심으로 의심으로, 의심을 밀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서 추구해 나가면, 갈수록 없을 뿐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뭣고?」하고 있는 동안에도 금방 생각[別念] 침노(侵擄) 들어오는 것입니다. 금방 백리 , 이백 밖의 또는 10 , 20 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 밖에서 들어오는지, 나의 의식이 밖으로 나가서 헤매고 있는지, 하여간 분명 화두를 든다고 들고 있는데 가지 가지 생각이 왕래를 하는 것을 참선을 사람이면 수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시간 동안에 화두 이외의 다른 생각이 번이나 들고 나갔는가를 한번 장난삼아서 세어본다면 몇천 번이 될런지, 몇만 번이 될런지, 세다가 세고 있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들고 퍼뜩 잊어버린 알면 「이뭣고?

성화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천사상(千思想) 만사량(萬思量) 퍼일어난다 하드라도 그것을 성화를 내고 짜증을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난 알면 동시에 「이뭣고? 이렇게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나가다보면 그렇게 안되던 것이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게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책없이 퍼일어났던 망상은 어느덧 차츰차츰 기승이 누그러지고 화두가 저절로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뭣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없는「이뭣고? 해도「이뭣고?」하기 전에 벌써 없는 의심이 항시 있는 것입니다.
미간(眉間) 있는지, 코끝에 있는지, 가슴 앞에 있는지, 가슴속에 있는지는 모르는데 걸어갈 때나 앉았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항시 의단이 앞에가 있거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없는 의심이 있으면 자꾸 거기다 대놓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여. 없는 의심이 있으면 없는 의심을 묵묵히 관조하는 거여.
그러다가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생각이 침노하면 그때 다시 「이뭣고? 챙기는 거여. 가끔 번씩 챙겨서 의단이 성성(惺惺)하도록 또록또록 하도록 그놈을 단속해 나가는 것이여.

 

공부가 여기에 이르르면 주변이 조금 시끄러운 것도 문제가 안되고, 누가 자기한테 뭐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로 인해서 신경질이 나거나 그렇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뭣한 분은공부가 조금 될라고 하는데 방정을 옆에서 떨어 쌓고 시끄럽게 한다 싸움을 하고 신경질을 내고 그러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공부가 제대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옆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싸움을 하거나, 어린애들이 떠들거나 그까짓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을 봐도 의심, 땅을 봐도 의심, 기차 소리가 나도 의심, 우는 소리가 나도 의심, 걸어가도 의심, 앉아서도 의심, 밥을 먹어도 의심, 똥을 누어도 의심,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가 이렇게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이렇게 현전(現前) 하게 됩니다.

 

그래도 조끔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됩니다. ‘! 이제 공부가 잘된다. 이러한 상태로 계속해서 나갔으면이러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조금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됩니다.

 

화두가 어느 정도 순일(純一)하게 되어가면 그렇게 마음이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너무 깨끗하고 편안하다 보면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불법을 만났던가이러한 희유한 마음이 나고 기쁜 마음이 나서 어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것도 같고 눈물이 하염없이 나오기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적인 생각에 잠시도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 정신을 차려가지고 다시 화두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 없는 좋은 경계(境界) 나타나고, 천하 없는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잠깐도 그러한 일에 우리의 신경을 써서는 아니됩니다.

 

다못 자세를 바르게 하고 심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 하면서 「이뭣고?

그때 가서는 「이뭣고? 소리도 필요도 없죠. 없는 의단이 나타나면 다못 그것을 묵묵히 관조(觀照) 나가는 것뿐입니다.

 

거기에 있어서 염송(拈頌)이라든지 또는 조사어록(祖師語錄)이라든지, 전등록(傳燈錄)이라든지, 무슨 경전이라든지 이러한 것을 뒤적거린다던지, 이러한 조사의 언구(言句) 속에 그런 것을 가지고 사량복탁(思量卜度) 한다든지 이러한 것은 대금물(大禁物) 것입니다.

 

한참 곡식이 자라고 (이삭을) 패기 위해서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데다가 뜨거운 물을 찌틀어버린 거와 마찬가진 것입니다.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갈수록 계속 한결같이 의단을 관조해 나갈 , 잠깐이라도 조사의 어구에 대해서 그것을 손을 대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아까 다섯 가지 믿음에 대해서조사의 언구는 하늘에 뻗쳐서 세워져 있는 칼과 같아서 옆에 가기만 하면 벌써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을 하시고, 대오(大悟)! 확철대오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허락해서는 아니됩니다.(4849~6837)

 

 

 

 

 

(2)------------------

 

차라리 ! 막혀서 없는 의단만을 관조하다가 죽을 한이 있더라도, 조그만한 어떤 소견(所見), 지견(知見) 가지고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몸을 망치고 불법을 멸망으로 이끄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조그만한 소견을 가지고 얻었다고 생각하고 만족하면 사람을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도 따라서 그러한 정도의 밖에는 이르지를 못하고, 결국을 그것을 가지고 만족을 삼으면 사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불법을 갖다가 멸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허공보다도 크고, 바다보다도 깊은 것이어서 가면 갈수록 크고 깊고 위대해서! 인제 이것이로구나. 인자 되었구나이렇게 생각할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최초에 발심(發心) , 최초에 발심할 마음가짐으로 일생을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수행을 나간다면 결정코 그런 조그만한 지견을 가지고 만족함으로서 공부가 중단한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해제가 되면 춥도 더웁지도 않는 봄철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봄철을 가장 충실하게 알차게 공부를 하시기를 다시 거듭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금생(今生)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後世)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6838~728)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십상(十常) ; ①열에서 아홉일 정도로 확률이 높다는 . '십상팔구(열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에서 .

*참구(參究 헤아릴 /궁구할 ) ; ①다못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낙처(落處) ; 안정된 . 결국의 장소. 귀착점(歸着點 최종적으로 끝을 맺을 있는 결론). 요지(要旨 핵심이 되는 중요한 내용).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 깨달음.

*의단(疑團 의심할 ,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 이런 의리선(義理禪)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야호선(野狐禪 /여우 /참선 ) ; ①진실하게 올바로 참선 수행도 하지 않고, 깨닫지도 않았는데 깨달은 것처럼 가장하여 함부로 기이한 언행을 하여 남을 속이는 사람을 들여우에 비유하여 말함.

②말이나 글로 알아 들어가고, 따지고 분석하고 비교해 보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인용해 대조해 보는 것으로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별념(別念) ; ‘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있으면 고인이 말한 「잡독(雜毒)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생각[別念]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외에는, 불법(佛法) 온갖 좋은 일이라도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심체상(心體上) 취하거나[], 버리거나[], 집착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모두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침노하다(侵擄-- 침범할 ,노략질할 ) ; (무엇이 무엇을)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거나 해치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 영령(靈靈) 함께 밝은 . 밝은 모양.

*염념불망(念念不忘) ; 생각 생각에 잊지 않음. 자꾸 생각이 나서 잊지 못함.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 이치(理致)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라고 일체의 (). ③시비(是非)•선악(善惡) 분간되는 한계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 순경(順境), 내경(內境) 외경(外境) 있다.

*염송(拈頌) ;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고려의 혜심(慧諶) 스님이 1226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송광사松廣寺)에서 화두 1125() 각각의 () 대한 짤막한 해설과 게송 등을 모아 엮은 30권의 책이다. 선문염송(禪門拈頌)이라고도 한다.

*조사어록(祖師語錄) ;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전하는 조사(禪師)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 또는 .

*전등록(傳燈錄)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30. () 법안종(法眼宗) 천태 덕소(天台德韶) 제자 영안 도원(永安道原) 경덕 원년(1004) 엮음.

과거칠불(過去七佛)에서 서천이십팔조(西天二十八祖) 동토육조(東土六祖) 거쳐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 제자에 이르기까지, 선종 다섯 종파의 52, 불법(佛法) 계속 이어 1,701명의 행적, 스승과 제자의 인연, 깨달음에 대한 문답, 어록을 집대성한 저술.

*사량복탁(思量卜度)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계교(思量計較)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리(事理)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바가 아니다라고 .

 

 

 

 

------------------(2)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게송)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〇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말을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 갈래나 되리라.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疑心) (No.480)—화두(話頭)에 대한 의심, 의심이라는 게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 의심(疑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어째서 () 했는고?’ 또는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4분 13초)

 

[법문] 송담스님(No.480)—92 9 첫째일요법회(92.09.06)(용480)

 

조실 스님께서 법문 가운데 가장 중점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의단(疑團) 독로(獨露)하는 , 화두(話頭) 대한 의심, 의심이라는 없는 바로 그것이 의심(疑心)이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 이놈이 무엇인가?’ 없는 생각,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 화두지, 없는 내놓고 의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심이라 하는 것은, 화두에 대한 의심이라 하는 것은이뭣고?’했을 앞과 뒤가 거기에서 끊어지거든. 없는 생각 이외의 다른 생각은 거기서 끊어져야 화두를 옳게 드는 것이여.

 

흔히 문헌(文獻)상에 나타난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낱낱이 그것을 사량분별(思量分別) 의리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공안을 타파한다 가지고 그러한 식의 공부는 그것을 의리선(義理禪)이라 가지고 죽은 참선이여, 사구선(死句禪)인데.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주장하신 공부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이거든. 화두를 여러 개를 하나씩 하나씩 분석하고, 따지고, 비교하고 해서 그렇게 참구를 나간 것이 아니라,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하나의 화두를 다맛 길도 끊어지고, 이치 길도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가지도 말고, 다못 앞뒤가 끊어져 없는 의심으로 () 가는 것인데.

 

화두를 들므로써 어떤 이치가 차츰차츰 나타나고, 무엇이 알아지고 드러나고, 이러면은 가는 맛도 있고 재미도 있다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천칠백 공안을 그런 식으로 날마다 따지고 날마다 분석해서 가봤자 점점 사량분별만 늘어가고 깨달음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화두를 가지고 일심으로공부가 잘되거나 안되거나, 잘된다고 생각 되건, 안된다고 생각이 되건, 때로는 혼침이 일건, 때로는 산란심이 일건 그것도 묻지를 말고,

산란심(散亂心) 일어도이뭣고?’, 혼침(昏沈) 와도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앞뒤가 끊어진 의심 하나로만 계속 잡드리를 나갈 뿐이다.

 

그렇게 나가다가 보면은 화두를 들라고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고,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때가 오고 마는 것이다.(1043~1456)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의단(疑團 의심할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 영령(靈靈) 함께 밝은 .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 의미하는 .

*문헌(文獻 글월·서적 /바칠·바치는 물건 ) ; ①특정한 연구를 참고가 되는 서적이나 문서. ②옛날의 제도나 문물을 아는 필요한 자료나 기록.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리(事理)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바가 아니다라고 .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말씀 말씀이 마치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 바란들 어찌 가히 있으랴?

 

做工夫호대 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活路] 찾는 것같이 할지니,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 마음의 . 선우(善友).

*산란(散亂 흩을 , 어지러울 ) ; 혼침(昏沈)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 마음이 어지러운 .

*혼침(昏沈 어두울 , 잠길 )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 떨어진 상태.

*잡드리 ; ‘잡도리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대책.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화두를 들려고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疑心) (세등선원No.09)—본참공안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아니한 것, 이것이 우리 정진에 있어서 가장 큰 병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어째서 () 했는고?’ 또는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5분 32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세등09)

 

정진(精進) 한마디로 말해서 본참공안(本參公案) 의심(疑心) 있어야 한다.

아무리 잠을 자고, 일종(一種) 하고, 말을 하고,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고 애를 쓴다고 해도 본참공안,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의 본참화두에 의심이 없다고 하면은 정진은 옳은 정진이 아닙니다. 자기의 본참공안에 의심이 있어야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우리는 불교의 교리 문제라든지 그밖에 천칠백 공안은 말할 것도 없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루에는 수천만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있어서 의심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의심을 허기로 하면은 보고 듣고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의심 아닌 것이 없어. 의심, 의심, 한량없는 의심을 똘똘 하나로 뭉쳐서 자기의 본참화두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듣고 그러면서 정진을 하는 것도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의 본참화두에 간절(懇切)하고 돈독(敦篤) 의심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법문을 듣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러한 법문을 들으므로 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의심이 간절히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법문을 듣는 것이다.

 

법문이 비단 녹음된 조실 스님 법문만이 법문이 아니고 오늘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이것만이 법문이 아니라,

참으로 간절히 발심을 하고 신심을 일으킨 사람은 바람 부는 소리를 들어도 거기에서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고, 일상생활 속에 보고 듣고 느끼고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건 또는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흔들어 놓는 일이건, 그러헌 일을 계기로 해서 나의 본참공안으로 돌아올 있고, 본참공안에 대한 의심을 일으킨다면은 법문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 본참공안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아니한 , 이것이 우리 정진에 있어서 가장 병이다.

모든 인연세속에 대한 인연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대중생활 나가는데 있어서 누가 잘하고 못하고, 시시비비(是是非非) 일체 인연을 놔버려. 누가 잘하건 못허건 그것에 말려들어서는 벌써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잘하는 것을 봐도 나는 화두를 들고, 못허는 것을 봐도 화두를 들고, 누가 아픈 것을 봐도 나는 화두를 들고, 일체 인연을 놔버리고서 앉았거나 누웠거나 섰거나 걸어가거나, 하루 종일 다맛 자기 화두를 들고 들고, 생각[別念] 일어난 알면 생각 버릴려 하지 말고 바로 거기에서 일어난 생각으로 화두를 ! 들면 되는 것이다.(51~1033)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부지런히 힘씀. ②불법(佛法) 깨닫기 위해 수행에 힘씀. 보살이 수행하는 바라밀(六波羅蜜) 하나.

*일종(一種) ;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끼만 먹는 .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정성스런·절박할 )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돈독하다(敦篤-- 도타울 /도타울 ) ; (인정이나 마음이)매우 도탑고 믿음성이 있고 진실하다. *도탑다 ; (정이나 사귐이)깊고 많다.

* 생각 ; 별념(別念).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p164-166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있으면 고인이 말한 「잡독(雜毒)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생각[別念]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외에는, 불법(佛法) 온갖 좋은 일이라도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 취하거나[], 버리거나[], 집착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모두 생각[別念]이니라.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화두드는 법) (세등선원No.46)—다만 화두(話頭)만을 거각(擧却)해 버리면, 일어났던 망상은 저절로 자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어째서 () 했는고?’ 또는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4분 13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46)—계해년 하안거해제 법어(1983.07.17)(세등46)

 

몸이 안정(安定) 되고, 몸이 안정이 되면 눈알이 안정이 되아야 하는 것입니다. 눈동자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눈껍데기가 깜박깜박 그러한 것은 눈이 안정이 되았다 수가 없는 것이여.

 

눈이 따악 안정이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되면 앉아서나 서서나,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일을 때나 화두가 독로(獨露)해서, 화두를 들라고 해도 터억 의심이 독로하되,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타성일편(打成一片) 되도록, 오직 그렇게만 다잽이를 해가면 망상이 일어나는 것도 걱정 것이 없고, 일어나되 억지로 보낼라고 하지도 말고 누를라고 하지도 말고, 성화를 필요가 없어.

 

다만 화두(話頭)만을 거각(擧却) 버리면, 일어났던 망상은 저절로 자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서 화두가 독로하되, 그래도 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귀로 들어오고 눈으로 뭣을 보면 모양이 눈에 들어오지만, 거기에 내가 끄달리지만 하고 화두만 들어버리면 그런 소리나 모양은 나한테 장애를 주지 아니한 자취가 없어지기 때문에,

망상(妄想)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이러한 말은 아직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여. 일어나는 망상은 조금도 성화 필요가 없거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화두만을 챙기면, 화두만을 들어버리면 그것이 가장 쉬웁게 번뇌와 망상을 처리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요하고 편안하고 맑고 깨끗한 그러한 경계가 나면, 자칫하면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그런 데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놓쳐 버리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여.

 

벌써! 고요하다, ! 깨끗하다너무너무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 경계(境界) 취해 버리면 화두를 놓치게 되는데,

화두를 들면 행여나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묘한 경계가 흩어질까 두려워서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 고요한 빠지게 되면 이것은 확철대오(廓徹大悟)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여.

 

아무리 고요하고 깨끗하고 그럴지라도 거기에서 화두(話頭) 떠억 챙겨야만 되는 것입니다.(2539~2952)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수할 /없을 /섞일 ) ; 대상 자체가 순수(純粹)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 없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타성일편(打成一片) : 참선할 자타(自他)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 경계.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

*성화(成火) ; ①일 따위가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고 속이 , 또는 그런 증세. ②몹시 귀찮게 구는 .

*성화를 대다 ; 자꾸 몹시 귀찮게 굴다.

*거각(擧却 , 어조사 ) ; 화두를 들다.

*망상(妄想 망령될 , 생각 ) ; 이치에 맞지 않는 허황된() 생각() . 또는 그런 생각.

*적적(寂寂) ; 고요하고 평온함.

*성성(惺惺) ; 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확철대오(廓徹大悟 /통할 / /깨달을 ) ; 깨달음. 내가 나를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화두드는 법) (No.422)—어째서 의심만을 일으키라고 하느냐? | 간화선(看話禪) | 누진통(漏盡通) | 불급불완(不急不緩)한 묘관(妙觀), 의심관(疑心觀).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또는어째서 () 했는고?’ 또는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0분 56초)

 

[법문] 송담스님(No.422)—90 7 첫째일요법회(90.07.01)(용422)

 

여러분 가운데에는 화엄경도 읽어 보고, 법화경도 읽고 외우고, 금강경도 외우고, 좋은 경전을 많이 읽기도 하고 외우기도 하고,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 분이 계실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공부를 할려고 하는 분이 적지 아니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어느 하나 훌륭하지 아니한 경이 있으리오마는, () 통해서 해석을 하고, 알고 외우고 그러면 내생에 머리가 좋은 총명을 얻는다고는 했습니다마는, () 중생의 사량분별로 따져서 외우고 해석한다고 해서참나 깨닫는 바른 길이라고 수가 없어.

 

과거의 모든 도인들이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그런 경전을 통달하고도 남는 그러한 대도인들이 말세의 우리 중생들도 그러한 방편설(方便說) 떨어지지 아니하고, 근기가 약한 하근기(下根機)로서도 철저히 정법을 믿고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은 누구나 깨달을 있는 방법!

그것이 바로 화두를 참구(參究)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간화선(看話禪), 활구참선인 것입니다.

 

양좌주가 마조 스님과 같은 도인을 만나지 못하고 일생 동안을 경이나 가르치고, 경이나 읽고 있었다면 어찌 확철대오를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이뭣고?’ 재미가 없고 맛이 없다 하더라도 철저하게 활구참선법을 믿고서 여하약하(如何若何) 막론(莫論)하고 따지지 말고, 자기가 무식하건, 남자 여자 , 나이가 많고 적건 그런 따지지 말고 다못이뭣고?’

앉아서도이뭣고?’ 서서도이뭣고?’ 걸어가면서도이뭣고?’ 일하면서도이뭣고?’ 누고 오줌 때도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이뭣고?’ 슬플 때도이뭣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오직 신심(信心) 분심(憤心)으로 의심(疑心)만을 일으켜 () 나간다면 어찌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어째서 의심만을 일으키라고 하느냐? 아무 것이고 하나만 생각하고 거기에 우리의 정신을 집중하면, 일심으로 집중하면 깨달을 수가 있지, 의심만 거각(擧却)해야 하느냐?’ 그러한 질문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마음을 한군데 모이서, 하나만 한군데에다가 모이고 그놈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망상도 차츰 없어지고, 차츰 마음이 고요해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기는 어려워.

깨닫는다 하는 것은 조용하게 마음을 () 자리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거 깨달은 것이 아니여.

 

신선도나 외도들은 마음을 ()하게 가지고 () 자리에 떠억 머물러 있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데, 그렇게 하면 오신통(五神通) 나는 수가 있으나 누진통(漏盡通) 얻는 거여.

누진통은 ! 깨쳐야지, 고요한 경계를 지켜 나간다고 해서 깨달라지는 것은 아니여.

 

마치 풍선은 계속해서 부는데 풍선에 바늘 구녕만한 쬐그만 구녁이 있어도 풍선은 터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냐? 족족 뚫어진 구녁으로 바람이 빠져나가.

사량분별(思量分別)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것은 마치 풍선에 구녁 뚫어진 것과 같애.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따진다든지, 또는 곳을 이렇게 그놈을 지키고 있다든지, 이런 것은 전부 구녁 뚫어진 풍선을 불고 있는 거와 같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고요한 경계만 지켜 나간 것은 불지는 않고 풍선에다 입만 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여. 그래 가지고서야 풍선이 어찌 터질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풍선은 반드시 맥혀야 ! 그러듯이 의심으로써 맥혀야지, 맥히지 않고 무엇인가 알아 들어가는 것이 있고, 따져 들어가는 이치가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고, 문해사상(聞解思想)—들어서 알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참구선(參句禪) 아니여.

 

참의구(參意句),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의리선(義理禪), 참의구(參意句) 그래 가지고,

참의구는 백천만 겁을 따져서 공안마다 그럴싸한 결론을 내려 가지고 환히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어 봤자, 그것은 흑산(黑山) 밑에 귀굴(鬼窟) 속에서 귀신 살림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지, 그래 가지고서는 미륵불(彌勒佛) 하생(下生) 때까지 해봤자 확철대오는 못하는 거여. 정각(正覺) 이룰 수가 없는 것이여.

 

아무리 재미가 없고, 무엇이 되어간 같지 않더라도 철저한 신심과 분심으로써이뭣고?’ 없는 의심, 그렇다고 해서 너무 조급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용을 쓰면서 이마에다가 ()’자를 가지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여.

이건 지나치게 용을 쓰면 이것은 깨닫기도 전에풍선이 크기도 전에 처음에 느닷없이 되게 불어 버리면 찢어져 버려.

 

그놈이 불어날 대로 때는 조심스럽게 불어야 하거든. 그래서 더이상 커질 없을 때까지 이만큼 커져 가지고 거기서도 계속 조심스럽게 불어가야 그놈이 커질 대로 커진 다음에 ! 터져야 그놈이 재미가 있지, 쬐끔 요만큼 커질라다 찢어져 . 그거 무슨 풍선 부는 맛이 있는가?

 

참선을 나갈 의심을 하는 것도 묘관(妙觀)이라야 .

불급불완(不急不緩)—너무 급하고 조급하게도 하지 말고 너무 늘어져 처지지도 말게, 불급불완한 () ()이라야 되거던. 묘관(妙觀)! 의심관(疑心觀)이거든.

 

없는 의심관을 불급불완하게 () 나갈 —‘, 옛날 사람은 칠일(七日)에도 깨달랐다 하니까 나도 칠일 안에 이것을 마쳐야겠다 가지고, 밥도 굶고 잠도 자고 그냥 이를 악물고 이레 동안을 보라 그말이여. 그런 아니여.

 

『소한(小限) 칠일(七日)이요 대한(大限) 구순(九旬)이라』 그러니까, 자기 생각해 보니 몸도 튼튼하고 이만하면 나도, ‘그까짓 고인(古人) 했는데 나라고 못할까! 칠일로 가지고 마쳐야겠다

그래 가지고 밤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이를 악물고 칠일 동안 하니까, 골치만 뽀개질라고 아퍼. 눈만 벌거니 살조개 놓은 것처럼 되어 가지고 골치만 더럭더럭 아퍼. ‘ 참선 아무짝에도 못쓴다고 안되거든.

 

그런 것이 아니여. 사소한 것도 선배의 지시를 받고 나가야 실수 없이 나가는 거고, 눈으로 보고 가는 길도 먼저 사람의 안내를 받던지, 아는 사람의 안내를 받아 가지고 그래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지.

그런데 눈으로 보일 수도 없는 마음공부를 갖다가 어거지로 그렇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이 마구잽이로 한다고 그것이 리가 있겠느냐.(2147~3243)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 받아 계승해 대대의 조사(祖師).

*방편(方便 방법·수단 /편할 )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하근기(下根機 아래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소질이나 근성, 능력이 가장 낮은 사람.

*참구(參究 헤아릴 /궁구할 ) ; ①다못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간화선(看話禪) ; () 화두(話頭) 말이다. 간화(看話)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을 본다[]’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화두를 ()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최상승법(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도 말씀하신다.

*막론하다(莫論--) ; 이것저것 따지고 가려 말하지 아니하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있다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한군데 ; 어떤 일정한 .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없는 것을 헤아림을 ()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있고 변할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94-95 참조.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 닦는 외도(外道)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 읽어도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 이런 의리선(義理禪)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흑산(黑山) : 인도의 전설에 대철위산(大鐵圍山) 소철위산 사이에 음양(陰陽) 이르지 못하는 암흑처가 있으니 이곳을 흑산이라고 하며 이곳은 악귀(惡鬼) 서식한다고 한다.

*흑산하귀굴리작활계(黑山下鬼窟裏作活計) ; 귀굴리작활계(鬼窟裏作活計). 수행자가 시끄러운 것을 피하고 고요한 것만 취해서 화두가 성성(惺惺)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혼혼(昏昏) 경계에 취해서 묵조(默照) 정식분별(情識分別) 잠겨 있는 상태를 비유한 .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 선경어(博山無異禪師 禪警語)’

做工夫(주공부)호대  不可避喧向寂(불가피훤향적)하야  瞑目合眼(명목합안)하고  坐在*鬼窟裏作活計(좌재귀굴리작활계)  古所謂(고소위)  *黑山下坐死水浸(흑산하좌사수침)이라하니  齊得甚麼邊事(재득심마변사)리요  只要在境緣上做得去(지요재경연상주득거)하야사  始是得力處(시시득력처)니라

一句話頭(일구화두)  頓起在眉睫上(돈기재미첩상)하야  行裏坐裏(행리좌리)  着衣吃飯裏(착의흘반리)  迎賓送客裏(영빈송객리)  只要明這一句話頭落處(지요명자일구화두낙처)  一朝洗面時(일조세면시)  摸着鼻孔(모착비공)하야  原來太近(원래태근)이니라

 

 공부를 짓되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향하야 눈을 감고 귀신 속에 앉아 살림살이를 하지 말지니, 고인이 말하기를 「흑산 밑에 앉아 썩은 물에 잠겼다」하니 무슨 일을 이루리오? 다만 경계와 반연 위에서 공부를 지어 가야 비로소 이것이 힘을 얻는 곳이니라.

귀절 화두를 몰록 일으켜 눈썹 위에 두고서 다닐 때와 앉을 때와 입고 먹을 때와 손님을 맞고 손님을 보내는 속에 다만 일구(一句) 화두의 낙처(落處) 밝힐지니, 하루아침에 세수하다가 콧구멍을 만지듯 원래로 너무 가까왔느니라.

*미륵불(彌勒佛) : []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呾麗耶), 매달례야(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불의 5().

*정각(正覺) ; 깨달음. 부처님의 깨달음. 바른 깨달음. 우주의 대진리를 깨닫는 .

*묘관(妙觀) ; 묘한 (). () 의심(疑心) (). 화두를 거각하여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 하는 .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모르는 사람은 힘을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밖에는 없지만, , , 이렇게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해도 화두가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 독로(獨露)하걸랑,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 하는 거여. 없는 의심의 ()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일은 없는 의단(疑團)만을 잡드리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 () 긴완(緊緩) 득기중(得其中) 해야 . 그것이 묘한 ()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아는 사람은 바로 ()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의심(疑心) ()’으로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관해 나가면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의심의 ()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 막론하고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 2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 , , 3, 5, 10년을 해도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하고, 고대로 하면서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묘한 의관(疑觀)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조정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의심관, ()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생각 없는 생각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활구참선(活句參禪)의심(疑心) 이라야 .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 서산에 지려고 ,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때에,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빨갛고 아름다운 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수가 없는데, 해가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해를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떨어져서 보일 때까지 시간 내지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때까지 관찰하고서, 다음에는 밤새 눈을 감으나 뜨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다시 관을 해서,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밤새 관하고, 이튿날 관하고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일관이라든지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 있는데, 참선도 하나의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의단(疑團)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이뭣고?’ 해도 없는 의심이해가 봐두었던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 .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역대조사(歷代祖師)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소한(小限) 칠일(七日)이요 대한(大限) 구순(九旬)이라 ; ‘공부하는 기간은 짧게 잡으면 일이요, 길게 잡아야 구십 일이다’ [선요(禪要)] (고봉원묘) ‘結制示衆(其四)’ 참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 ①예기치 못한 말이나 행동을 불쑥 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 ②갑자기 뜻밖의 일을 당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 [같은 속담] 어두운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홍두깨 ; 예전에, 옷이나 옷감 따위를 방망이로 두드려 깔깔하지 않고 윤기가 나도록 매끄럽게 하는 다듬이질을 때에 쓰는, 단단한 나무로 만든 도구(방망이).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