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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5.08 꿈(No.133)—우리 인생은 꿈이로되 현실. 꿈과 현실은 분명히 둘이지만 하나 | 삼라만상(일체법)은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 | 생사는 본래 없다.
  2. 2022.03.23 금강경 사구게((No.259))—(게송)一切有爲法~ |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그것이 모두 '유위법(有爲法)' | 다행히 우리는 정법(正法)을 닦아 나가고 있다.
  3. 2022.03.23 가피((No.259))—기도를 해서 얻어진 바는 성현의 가피로 자기에게 관리권(管理權)을 제수(除授) 받은 것이므로 유용하게 잘 써야 한다.
  4. 2022.03.23 기도((No.259))—(게송)家家門前通長安~ | 기도를 '일심, 정성으로 한다’는 것은 사심 없이 하는 것 | 참선공부야말로 가장 훌륭한 기도 | (게송)一切有爲法~.
  5. 2022.03.09 꿈(전강선사 No.012)—(게송)一枕客殘夢 空中飛過鳥 落花僧禪靜 文字是糟粕 | 내 본고향에 한번 가 봤어? | 정법을 바로 믿어라.
  6. 2022.03.08 깨달음(전강선사 No.349)—이 몸을 가지고는 도를 닦어야지 | 生死二字 釘在額上 裂轉面皮 討箇分曉 | 참다이, 철저히 하면은 깨달은 각(覺)이 반다시 곧 온다.
  7. 2021.10.26 깨달음(전강선사 No.005)—전강선사 곡성 동리산 대오 | 추천원 스님의 태안사 동리산 호랑이 이야기 | 전강선사 오도송(悟道頌).
  8. 2021.09.15 깨달음((No.472))—(게송)邪路不用行~ | '불(佛)'이란 '붓다(Buddha)'인데, 번역하면 '깨닫는다' | 일체처 일체시에 바로 그 경계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챙겨 나가자.
  9. 2021.08.16 감로수((세등51))—『논어』 | (게송)從他謗任他非~ | 누가 나를 헐뜯어도 그 말을 감로수처럼 달게 받아 마셔서 수행하라 | 바다와 같은 아량을 가지고 살아 가라.
  10. 2021.08.13 관심일법 총섭제행((세등51))—달마 조사가 전해준 직지인심, 바로 사람에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성불하는 활구참선법 |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방편설.
ㄱ/꿈2022. 5. 8. 05:36

꿈(No.133)—우리 인생은 꿈이로되 현실. 꿈과 현실은 분명히 둘이지만 하나 | 삼라만상(일체법)은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 | 불법은 생사(生死)를 버리고 열반(涅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 있는 것입니다 |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 생사를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열심히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이 한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꿈[夢] ; ①잠자는 동안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의 연속. ②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理想). ③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허무한 기대나 생각. ④현실을 떠난 듯한 즐거운 상태나 분위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⑤덧없음의 비유. 허깨비[幻]와 비슷하므로 환몽(幻夢) · 몽환(夢幻)이라고도 한다.

[불교] 잠을 자면서 꿈꾸면 좋은 꿈을 꾸었거나 나쁜 꿈을 꾸었거나, 꿈속에서는 무엇이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나 꿈 한번 꾸고 깨어나면 실지로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몸뚱이, 이 세계, 해나 달이나 별이나 지구나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반드시 어떠한 원인이 있어서 생겨났다가 그 조건이 흩어지면 그것이 또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그것이 모두가 다 '유위법(有爲法)', 함[爲]이 있는[有] 법(法)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금강경(金剛經)』에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 모든[一切]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꿈[夢]과 같은 것이며, 꼭두각시 환상(幻像)과 같은 것이며, 물거품[泡] 같은 것이며, 그림자[影]와 같은 것이다.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다. 풀끝에 이슬[露]과 같고 또 번쩍하는 번갯불[電]과 같은 것이다. 응당 이와 같이 관(觀)을 지을지니다[應作如是觀]. 이와 같이 달관(達觀)을 할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그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찾는 길, 참선(參禪)을 만났습니다.

 

(18분 11초)


[법문] 송담스님(No.133)—1981년 1월 첫째일요법회 (용133)

일생 동안을 잘 살아도 한마당 꿈에 지나지 못하고, 일생 동안을 잘 못산다 하더라도 그것도 또한 한바탕 꿈에 지나지 못한 것이여.
꿈에 주먹탱이 만한 보석을 얻어 봤댔자 꿈 깨 버리면 간 곳이 없고, 꿈에 무서운 호랭이나 독사한테 쫓겨서 진일 켜 봤댔자 눈만 딱! 떠 버리면 호랭이도 간 곳이 없고 독사도 간 곳이 없습니다.

참선(參禪)을 하기 전에는 꿈에 그런 호랭이한테 쫓긴다던지 독사한테 쫓길 때 그 무섭고 겁이 난 것이 말로 할 수 없는데, 아무리 도망갈려고 해도 발은 제자리에서만 동동거리고,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큰소리가 나지를 않고 그리하다가, 얼마 동안을 그렇게 몸부림을 치다가 겨우 눈을 떠 보면 전신이 땀이 젖어 갖고 있고 이러한 꿈을 꾸는 수가 있었는데,
참선을 한 뒤로는 그런 어려운 그런 무서운 경지를 딱 닥치면 금방 탁! 화두(話頭)를 들면서 눈이 뚝 떠져 버린다 말이여. 그래서 그런 무서운 꿈을 잘 꾸지도 않지만 혹 꾸더라도 금방 내가 '에이, 이까짓 것'하고 탁! 정신을 차려버리면 눈이 뚝 떠져 버리는 그런 경험을 가끔 하게 되는데.

우리의 인생살이가 무섭건 괴롭건, 기쁘건 행복하건 간에 엄격히 말하면 인생 칠십이라고 해 봤자 잠깐 동안 꾸는 봄꿈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이 말이여.
행복하게 산다 하더라도 눈떠 버리면 허망한 것이고, 괴롭다 하더라도 무섭다 하더라도 딱! 눈떠 버리면 무엇이 괴롭고 무엇이 무서울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우리는 인생 어피차 과거의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부모에 의탁을 해서 이 몸을 받아 낳고 일평생을 길건 짧건 좋건 궂건 일생을 살아갈 수밖에는 없습니다.
꿈은 꿈이로되 분명 현실은 또 있습니다. 눈을 떠 버리면 꿈이지만 눈을 뜨기 전까지는 분명 현실입니다. 호랭이를 만나면 무섭고 독사를 만나면 무섭고, 보석이나 금덩어리를 주으면 기쁘고 그것을 빼앗기면 아깝습니다.

눈을 떠 버리면 문제가 하나도 아니지만 눈을 뜨기 전까지는 분명 현실입니다. 인생에 명예와 권리와 지위와 부귀공명이 그것이 허망한 것이고 꿈이라 하지만, 인생으로써 살아가는 동안에는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고, 없어서도 안되고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꿈과 현실은 분명히 둘이지만 하나입니다. 현실을 내놓고 꿈이 따로 없고, 꿈을 내놓고 현실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허망한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세상은 무상한 것이요, 허망한 것이다. 다 소용없는 것이다, 다 버려라'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그 가운데 그것이 허망한 줄을 알아야지, '허망한 것이니까 다 소용없다' 이러한 방향으로 이러한 태도는 올바른 불자(佛子)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충실하다고 해서 허망한 줄을 모르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거기에 얽매이면 그 사람은 또한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허망한 줄만 알지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를 아빠로서 엄마로서 국민으로서 스승으로서 제자로서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하지 아니한다든지, 그것에 충실한답시고 거기에 완전히 얽매어 가지고 참으로 이것이 허망한 줄을 모른다던지, 이 사람은 정반대의 입장이지만 두 사람이 다 바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분명 허망한 줄 알면서 충실히 다 처리를 해야 하고, 충실히 하면서 동시에 허망한 줄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불자로서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허망한 거 내놓고 진실한 것이 없고, 실다운 것 내놓고 허망한 것이 무상(無常)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삼라만상(森羅萬像) 두두물물(頭頭物物), 찬란히 빛나는 해와 달, 별, 그리고 산과 흐르는 물, 꽃과 잎, 모든 동물,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온갖 것이 이 두두물물이—이것을 불교의 술어로는 '일체법(一切法)'이라 하는데, 제법(諸法)이라고도 하고 일체법이라 하는데, 이 삼라만상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고, 생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이것 자체가 어데서 왔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의 자성(自性)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삼라만상 두두물물을 여의고 우리의 자성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떠나서 우리의 참마음을 찾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번뇌와 망상이 우리의 진여자성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이놈을 버리고 찾아서는 우리의 자성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마치 저 출렁거리는 산더미 같은 바다에 파도, 크고 작은 파도가 물을 떠나서 파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는 물이 움직여서 파도가 된 것이기 때문에 파도가 바로 물인 것입니다. 파도를 버리고서 물을 찾는다면 우리는 물을 앞에다 두고 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속에 모든 인간 관계, 모든 현상 이것이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요, 진여불성을 뿌리로 해서 뻗어난 가지요, 잎이요, 꽃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지와 잎, 줄기를 더듬어서 뿌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 그것 때문에 우리가 윤회(輪廻)를 하고, 그것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에 웬수 같은 자식, 웬수 같은 남편, 웬수 같은 아내, 웬수 같은 형, 웬수 같은 동생, 웬수 같은 친구, 웬수 같은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어째서 훌륭한 부모, 좋은 자식, 좋은 형, 좋은 동생, 진정한 사랑할 수 있는 아내와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웬수 같은 사람을 만나서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야 하는가? 원망과 한탄으로 일생을 살아야 하는가? 온전히 이유는 그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있어.

한 번 지어 놓은 인연(因緣)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자기가 지어 놓은 인과(因果)는 면할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나, 온갖 인과에 근원을 깨달라서 체달(體達)을 하면 제절로 모든 일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자기에게 자기가 지어서 받은 인과, 윤회 생사윤회를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녹음 끊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를 버리고 열반(涅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눈에 비친 생사는 깨달은 사람에게는 고대로 열반의 도리요, 열반의 소식이요, 이 생사의 대해(大海)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마치 눈병 난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전거 구사리 같은 것이 이리저리 올라갔다 내려갔다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눈병을 깨끗이 치료를 한 뒤에 보면 아무것도 허공에는 원래로 없었던 것이여.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만 보였지 눈병이 나 있을 때나, 눈병을 나은 뒤에나 허공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보인 생사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생사해탈, 생사해탈' 말을 했지만,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어디까지나 중생의 입장에서 중생의 언어를 빌려서 그러한 표현을 방편(方便)으로 쓰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꿈에 본 독사와 같은 것이지만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무섭기가 생시(生時)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눈병을 고쳐야 하고 꿈을 깨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이 한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리가 높고, 아무리 학문이 높고, 아무리 기운이 세고,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이 참나를 깨닫는 일만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와 모든 재산과 모든 힘과 모든 학식과 자기의 생명까지라도 바쳐서 이 문제는 해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46분41초~1시간4분4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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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주먹탱이 ; 주먹(다섯 손가락을 모두 오무려 쥔 손)같이 둥글고 단단하게 한데 뭉쳐진 어떤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봄꿈 ; ①봄날에 꾸는 꿈. ②한때의 덧없는 일이나 헛된 공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체달(體達 몸 체/통달할 달) ; ①몸[體]으로 직접 통달(通達)함. 몸소 경험하여 막힘이 없이 트이다. ②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생사대해(生死大海) ; '생사의 큰 바다[大海]' 중생이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세계를 바다에 비유한 말.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중생이 생사유전하는 세계를 '큰 바다[大海]'에 비유함.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 공화(空花, 空華) ;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88~89. (가로판 p92~94)
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이  如見空花起滅이니라.

중생이 나는 것 없는[無生] 가운데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註解) 性本無生故로  無生涅也요  空本無花故로  無起滅也라  見生死者는  如見空花起也요  見涅槃者는  如見空花滅也니라  然이나  起本無起요 滅本無滅이라  於此二見에  不用窮詰이니  是故로  *思益經云, 諸佛出世가  非爲度衆生이요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라 하시니라.

(주해) 성품에는 본래 남이 없으므로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없고 허공에도 본래 꽃이 없으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생사가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타나도 나타남이 없고, 사라져도 사라짐이 없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하여서는 더 따질 것이 없다。그러므로 『사익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견해를 건지기 위해서다」라고 하시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 에서.
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안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 ‘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환(幻)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No.366)—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한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하고 그렇게 딱! 믿어 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왜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이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병이 든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이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저 더운 날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그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그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 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못 믿을 것도 없다 그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그 자성이 없다’고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시고, 성현들이 ‘없다’고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안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분명히 이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그 성현의 말씀을 안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 ‘그냥 없다’고 딱!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참 그게 그렇게, 당장 그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을 얻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구사리 ; 일본어 'くさり(쿠사리)'이며, '쇠사슬'이라는 뜻. 자전거 체인을 말한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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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ㄱ/금강경사구게2022. 3. 23. 16:42

금강경 사구게((No.259))—(게송)一切有爲法~ |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그것이 모두가 다 '유위법(有爲法)' | 다행히 우리는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찾는 길, 불법 정법(正法)을 만나 닦아 나가고 있다.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꿈과 같고, 환(幻)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풀끝에 이슬과 같고, 또 번쩍하는 번갯불과 같다. 뻑뻑이 이와 같이 관(觀)을 할지니라. <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송담스님

 

(13분 52초)


[법문] 송담스님(No.259)—1985년 신수기도 회향 (1985.01.09.음) (용259)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금강경(金剛經)』에 말씀하시기를,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요,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다'
모든 함이 있는 법은, '함이 있는 법',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무위법(無爲法)의 반대가 되는 말인데—유위법이, '함이 있는 법'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어떠한 원인이 있어서 생겨났다가 그 조건이 흩어지면 그것이 또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그것이 모두가 다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함[爲]이 있다[有].

생겨날 때는 생겨난 원인이 있고 또 없어질 때는 없어질 또 원인이 있어서, 그러면 이 몸뚱이,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는 우리의 몸뚱이도 이것이 유위법의 범주를 벗어나지를 못하고.
또 이 세계, 해나 달이나 별이나 지구나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이것도 영원성이 없는 것이여. 반드시 그 원인이 있어서 결합이 되었다가 그 결합이 될 만한 원인이 무너지면 다 다시 흩어져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덩이도 영원히 있을 것 같지만, 다 언젠가는 이것이 없어질 때가 오고 저 태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뚱이도 유위법이요, 온 세계에 모든 것이 다 유위법이요.
우리의 생각, 생주이멸(生住異滅),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가 그 생각이 어느 발전을 하다가 결국은 그 생각이 또 사그라져 없어지는데. 그 우리의 생각에 생주이멸, 끊임없는 그 생주이멸의 되풀이를 하면서 쉴 사이가 없습니다. 이것도 또한 유위법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꿈과 같은 것이며, 꼭두각시 환상과 같은 것이며, 물거품 같은 것이며,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이 꿈! 꿈이라 하는 것도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꼭 실지(實地)처럼 느껴지지만 깨 놓고 보면 간 곳이 없고, 환상도 그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실지, 실상(實相)처럼 보이지만 정신을 차려 놓고 보거나 다른 사람이 보게 되면은 그것은 실지로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또 물거품, 물에 어떠한 충격을 가하면 거기에 물거품이 생기는데, 물거품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냐 말이여. 물이 있는 곳에 잠시 물거품이 생겼다가 금방 다시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물거품 자체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참, 유위법에 지나지 못하고.

그림자라 하는 것도 어떤 물체가 있는데, 그 물체에 광선(光線)이 비추면 그 광선의 반대쪽에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그림자라 하는 것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또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물체와 광선이 만났을 때에 그 그림자라고 하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림자는 본래 있는 것도 아니요, 영원성이 있는 것도 아니여.
그래서 역시 꿈과 같은 것이요, 환상과 같은 것이요, 물거품과 같은 것이요, 또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다 허망무실(虛妄無實)한 것이다.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니, 이슬, 풀끝에 이슬과 같고 또 번쩍하는 번갯불과 같은 것이다.
이슬이 풀끝에 맺혀 있을 때 햇볕에 비치면은 찬란한 보석처럼 빛나지만 그것이 어찌 실다운 것이겠느냐 그 말이여. 바람이 불어서 풀잎이 움직이게 되면은 찰나간(刹那間)에 그렇게 찬란하게 빛났던 보석 같은 이슬 덩어리가 떨어져 없어져 버리고 말어.
응당 이와 같이 관(觀)을 지을지니다[應作如是觀]. 이와 같이 달관(達觀)을 할 것이다.

명예와 권리와 재산과 그밖에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내 마음대로 얻어지면 기가 맥히게 참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부러워하지만, 그리고 그것을 한동안 마음껏 누리고 그것을 즐길 때에는 이 세상이 온통 나를 위해서 존재한 것처럼 느껴지고,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싶으지만.
그런 것들이 잠시 반짝거리는 풀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요, 번쩍하다 말아버리는 번갯불과 같은 것이요, 그림자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환상과 같고 그리고 꿈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몸과 목숨을 바칠 만한 상대는 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몸뚱이도 또한 그렇고, 우리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미워하고 이뻐하는 그러한 모든 감정들이 또한 그렇고, 명예와 권리와 모든 재산도 또한 그렇고,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원망하는 그러한 인간 관계도 또한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허망(虛妄)하고 무상(無常)한 속에 우리는 이 몸뚱이를 받아났습니다. 받아나 가지고 그 무상한 속에서 무상한 것과 더불어 싸우며 한덩어리가 되어 가지고 끊임없이 굴러가고 또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상한 것을 마음대로, 마음먹은 만큼 얻어지기도 어려운 것이면서 얻어져봤자 끝내 나를 배반하고, 나에게 가슴 아픔만 한아름 안겨 주고서 매정하게 떠나 버릴 그러한 것들, 계속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오늘날까지 그렇게 지내왔고, 현재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입으면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또 앞으로도 한량(限量)없는 겁(劫)을 향해서 계속 몽둥이질을 당하면서 가슴을 할큄을 받으면서 계속해서 또 그놈을 따라가야만 할 그러한 어리석고 가련한 중생(衆生)들.

다행히 우리는 그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찾는 길을 만났습니다. 만났기에 우리가 그것들에 속지를 아니하고 정신 차려서 정법(正法)을 닦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숙세(宿世)에 너무 깊고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벌레가 여름밤에 촛불을 보고 그것이 좋은 줄 알고 모여들어서 그 불을 맴돌고 이리저리 날다가 결국은 그 불꽃에 나래(날개)와 다리가 타서 무수히 떨어져 죽는 것처럼, 탐진치(貪瞋癡)와 오욕락을 향해서 그칠 줄 모르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따라가다가 결국은 그것들로 인해서 일어서지 못할 만큼 무서운 뭇매를 맞고 꺼꾸러지고, 그것들로 인해서 얽혀 가지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갈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만났고, 정법(正法)을 만났기에 이렇게 신수기도를 하면서도 다른 어리석은 중생들이 그러한 것을 추구한 것과 같지를 않고, 그러한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원(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온전히 빠지지를 아니하고, 거기에서도 항시 정법을 믿는 마음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배반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공부를 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마음이 청정해지면 그 청정한 마음으로 잠깐 관(觀)만 해도, 잠깐 원(願)을 해도 그 원은 너무 빨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참으로 꼭 성취를 할 마음이 있으신 분은 어쨌든지 참선을 열심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34분34초~48분2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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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ㄱ/가피2022. 3. 23. 15:34

가피((No.259))—기도를 일심으로 하면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데, 기도를 해서 얻어진 바는 성현의 가피로 자기에게 관리권(管理權)을 제수(除授) 받은 것이므로 유용하게 잘 써야 한다.


*가피(加被 더할·베풀 가/입을·두를 피)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威神力)을 받는 것.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것. 가호(加護)와 같음.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위신력(威神力) ; 부처님이 지닌, 헤아릴 수 없는 영묘하고도 불가사의한 힘. 중생에게 미치는 강력하고 불가사의한 능력.

*불가사의(不可思議) ; 말로 나타낼 수도 없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음. 생각이 미치지 못함. 생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

 

 

(7분 35초)


[법문] 송담스님(No.259)—1985년 신수기도 회향 (1985.01.09.음) (용259) (가피)

기도를 일심으로 하면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데, 성취할 때까지는 정말 일심으로 합니다, 누구라도. 그 일심으로 하고 정성을 다해서 하는데, 그것이 일단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면 그때부터서는 사람이 달라지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서 얻어진 바는 자기의 복(福)으로 그것이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현(聖賢)의 가피(加被)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착각(錯覺)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현의 가피로 자기에게 관리권(管理權)을 제수(除授) 받은 것이므로 그것을 유용하게 잘 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자기 것인 줄 알고 딱! 오그려 쥐고 그렇게 살아가면 '너는 훌륭한 관리인이 못되는구나. 일심으로 정성을 드리고 해서 니가 쓸만한 사람인 줄 알고 너에게 관리권을 좀 주어봤더니 니가 영판 그 관리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로구나' 이렇게 인증을 받게 되면 그 관리권은 박탈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던지, 주력(呪力)을 하던지 해 가지고, 부자가 되었거나 권리를 얻은 사람은 각별히 이 점에 대해서 명심을 해 가지고—그렇다고 해서 자기는 쓰지를 말고 전부 다 흩어서 없애라는 것은 아닙니다. 삼등분(三等分) 내지 사분(四分)을 해 가지고 일부는 자기가 쓰고, 일부는 장차를 위해서 저축을 하고, 일부는 부처님이나 종교 계통에 아는 그런 사회 복지 사업 내지 교화 사업에 쓰도록 하고, 일부는 직접 불쌍한 사람이나 그런 사람에게 보시를 하고.
이렇게 해서 적절히 써 나가면 '과연 이 사람이야말로 얼마든지 더 큰 재산을 관리할 만하다' 하는 그런 인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더 큰 재산을 갖게 되고, 더 오래오래 그러한 관리의 직책을 맡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잘 관리를 한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고 '저 사람이야말로 참 오래오래 부자가 되고 오래오래 저 좋은 그런 권리를 가져줘야 되겠다' 그렇게 갖게 되기를 많은 사람들이 다 바래게 되고 그렇게 되도록 모다 음(陰)으로 양(陽)으로 협조를 하게 되는 것이고.
관리를 잘 못해서 그 권리를 남용하고, 재산 관리를 잘못해서 탐심(貪心)만 강해 가지고 남에게 베풀 줄 모르면 모두 사람들이 그 사람을 시기를 하고 모다 저주를 하고. '지가 얼마나 오래 잘산가 보자' 이래 가지고 모두 그 사람 잘사는 것을 보고 배 아파하고 빨리 망해주기를 모다 바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오래오래 부자가 되고 오래오래 그런 권리를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권리(權利)라 하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은 자기를 죽이고 자기 집안을 망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고, 사회국가를 멸망하게 하는 그러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재산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도를 정성껏 그리고 일심으로 해서 소원을 성취한 것도 대단히 어렵고 또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한 소원을 크고 작고 간에 성취를 했거든 그 성취한 뒤에 어떻게 그것을 관리해 나가고,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것은 참으로 더 중요한 것이라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관리를 잘 못하고 잘 사용을 못하면, 별로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러주지도 아니하면서 나갈 때에는 사람을 다 상(傷)해 놓고 떠나게 되는 수가 많은 것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서 없었더라면 그러한 대로, 가난하지만 그러한 대로 살아갈 터인데, 갑자기 큰 부자가 되고 큰 권리를 누려 놓으니, 그것을 관리를 잘 못하고 남용을 하고 그래 가지고 오히려 그전에 잘살기 전에 만큼도 못 살고, 그때 있었던 것까지 쏵 긁어서 다 빠져나가고.
그러한 재산과 권리만 나간 게 아니라 나를 갖다가 무서운 병을 얻게 만들고, 잘못하면 쇠고랑을 차게 해 놓고서 그러한 재산과 권리를 나로부터서 빠져나가게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권리 싫단 사람이 없고 재산이 싫다는 사람이 드물겠지만, 그것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좋은 점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무서운 나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 불자(佛子)들은 깊이 명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26분58초~34분3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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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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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ㄱ/기도2022. 3. 23. 14:42

 

 

기도((No.259))—(게송)家家門前通長安~ | 기도는 첫째, 정성(精誠)이 제일인데, 정성이라 하는 것은 한결같아야 하는 것 | 어떠한 곳, 어떠한 경우라도 지극정성으로 일심으로만 하면 바로 그것이 기도(祈禱).
'일심으로 해야 한다.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 하는 것은 사욕(私慾)이 없는 것, 사심이 없이 하는 것을 말한다 | 탐심(貪心)과 사심(私心)을 버리고 빈 마음으로 일심(一心)으로 기도를 함으로 해서, 그 마음이 빈 곳에는 최고의 공덕(功德)이 담기는 것입니다.

참선(參禪) 공부야말로 가장 훌륭한 기도 | 기도를 해서 얻어진 바는 성현(聖賢)의 가피(加被)로 자기에게 관리권(管理權)을 제수(除授)받은 것이므로 그것을 유용하게 잘 써나가야.
(게송)一切有爲法~ |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그것이 모두가 다 '유위법(有爲法)', 우리의 몸뚱이, 우리의 생각도 유위법, 온 세계에 모든 것이 다 유위법. 유위법이라 하는 것은 꿈, 꼭두각시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갯불과 같은 것

오씨(吳氏) 부인의 낙산사 기도 가피(加被) 설화(說話) | 평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덕(德)을 베풀고, 청정한 마음을 지켜 나가고 행동해 나간다면 여러분의 행주좌와 어묵동정,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시더라도 그 일들 자체가 낱낱이 다 기도가 되는 것.
따뜻한 마음에서 나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소중하다 | 기도를 열심히 하신 것도 중요하지만, 첫째, 자기 마음 다스려야 | (게송)問一歸源最的談~.


*기도(祈禱 빌·구할 기/빌·기원 도) ;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불보살의 자비)를 받들어 재앙을 피하고, 복(福)을 더하도록 빌고 구하는 것. 기원(祈願), 기청(祈請), 기념(祈念) 등과 같은 말.

 

(1/3) 34분 20초.

(2/3) 36분 31초.

(3/3) 18분 30초.


[법문] 송담스님(No.259)—1985년 신수기도 회향 (1985.01.09.음) (용259) (기도)

(1/3)----------------

가가문전통장안(家家門前通長安)허고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인유월방지정(水因有月方知淨)허고  천위무운시견고(天爲無雲始見高)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가가문전(家家門前)에 통장안(通長安)하고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다.
집집마다 문 앞에로부터, 문 앞에 있는 그 길로부터 서울 장안(長安)으로 통하고, 곳곳마다 푸른 버드나무에는 말을 맬 만하더라.
아무리 산간벽지, 시골, 해변, 도시, 어디 어느 집이라도 문밖에 나가면 그 길로부터 서울 장안으로 길이 연결이 되어 있더라 그 말이여. 그리고 곳곳에 어디에 있는 버드나무, 푸른 버드나무든지 다 타고 가던 말을 갖다가 매 둘 수가 있더라 그 말이여.

수인유월방지정(水因有月方知淨)이요, 물은 달이 비추어야 그 물이 맑은 것을 바야흐로 알 수가 있고.
천위무운시견고(天爲無雲始見高)여.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야 비로소 그 하늘 높은 것을 볼 수가 있더라 그 말인데.


오늘은 을축년 정월(正月) 초아흐레, 정초(正初) 신수기도(身數祈禱) 회향(廻向)날입니다.
그동안 초사흘에 시작해서 오늘까지 칠 일간 여러분께서는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신수기도에 참례를 하셨습니다. 저 지방이나 서울이나 먼 데서 일부러 오셔서 기도하신 분도 계시고, 또 근처에 계신 분은 매일 출퇴근을 하시면서 새벽 · 오전 · 오후 그리고 밤에까지 그렇게 열심히 정진하셨습니다.

기도는 첫째, 정성(精誠)이 제일인데, 정성이라 하는 것은 한결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심(一心)으로 해야 해. 정성으로, 일심으로 해서 이루지 못할 원(願)이 없습니다.

기도는 이러한 신수기도나 그밖에 어떤 기도, 법당에 오셔서 기도, 절에 오셔서 기도하는 것도 기도지만, 또 저 양양 낙산사(洛山寺)라든지, 남해 보리암(菩提庵)이나 강화 보문사(普門寺)나 오대산 적멸보궁(寂滅寶宮), 이런 성지(聖地)에 가셔서 3일 내지 일주일, 백일 그렇게 일심으로 기도하실 수도 있고. 또 세검정(洗劍亭) 해수관음(海水觀音) 같은 그런 데에 가서 또 백일을 다니면서, 또는 천일(千日) 만일(萬日)을 다니면서 일심으로 소원을 비는 그런 기도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등상불(等像佛)을 모셔 놓은 곳에 가서야만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할 수가 있고 직장에서도 할 수가 있고, 또 절에 오셔서도 목탁을 치면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 ·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 지장보살(地藏菩薩) 그런 성현의 명호(名號)만을 일심으로 부른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법당 소지를 계속해서 한다든지, 탁자 소지를 한다든지, 부처님께 꽃을 꽂아서 올린다든지, 향로 · 촛대를 항상 깨끗이 닦아 올린다든지, 또는 후원에서, 후원(後院)에 들어가서 채공(菜供) 일을 돕는다든지, 설거지를 돕는다든지, 또는 사중(寺中)에 이불이나 방석 같은 그러한 빨래를 한다든지, 또는 대중 스님네 무엇인가 의식주(衣食住)나 기타 약(藥)에 관한 그러한 공양을 올린다든지.
비단 부처님과 스님네와 사찰뿐만이 아니라 아들딸이 없이 외로운 그런 노인네의, 자기와 일가친척이 아니라도 그런 불쌍한 노인네를 잘 보살펴 드린다든지, 부모 없는 외로운 고아들을 잘 보살펴 준다든지, 어떠한 경우라도 지극정성으로 하면 바로 그것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만이 또 훌륭한 것이 아니라, 미꾸라지나 붕어나 자래, 자라 새끼 같은 그러한 짐승이나 또는 이 물웅뎅이에 여름에 가물어서 그 물이 말라 가지고 죽게 되는 송사리떼 같은 것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 사심이 없는, 사심(私心)이 없이 행(行)한, 사심이 없이 죽어 가는 목숨을 살릴 때에는 크고 작은 것이 상관이 없습니다.
'일심으로 해야 한다',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욕(私慾)이 없는 거, 사심이 없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 함경도서 어떤 사람이 참 글을 읽어 가지고 서울로 과거(科擧)를 보러 가는데, 아주 가난해서 좁쌀—'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소원을 빌고 과거를 떠나면은 소원을 성취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 산중(山中)에는 좁쌀이나 수수 그런 것밖에는 곡식이라고는 없기 때문에 좁쌀 한 되를 싸 가지고 절에 가서 마지(摩旨)를 지어서 딱 올리고서는,
"부처, 내 말 좀 듣게! 내가 이번에 과거를 떠나는데 이 귀한 좁쌀 한 되로 밥을 지어서 올리니, 이번에 잘 이것을 들고 내 과거만 합격만 시켜준다면 내가 원님이 되던지, 대신이 되던지 할 때는 그때는 하얀 쌀밥을 갖다가 실컷 대접을 할 모냥이니 내 말을 깊이 명심을 하고 어쨌든지 내가 이 과거에 합격만 해 주구려"

떠억, 아주 부처님 앞에 담뱃대를 꺼떡거리면서 단단히 당부를 하고서 큰 기침을 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과거를 봤는데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가만히, 떨어져 가지고 오다가 생각하니 부해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공연히 그 귀한 좁쌀 한 되만 갖다가 손해를 봤다' 생각하고, 부지런히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던 꼴로 절로 쫓아가서, "놀놀하니 앉아서 내 좁쌀만 똑 따먹고 과거도 시켜주지 안 했다"고 이러한 우스개 말이 전해옵니다마는.

여러분께서 혹시 기도를 하시되, 자기가 기도를 하는 그 정성은 그렇게 썩 정성스럽지 못하면서, 그렇게 일심(一心)으로 하지 못하면서 너무나 엄청난 공덕(功德)이 돌아오기를 바래는 그러한 분은 혹 안 계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백일 동안을 내가 아침마다 다니면서 부처님께 예배(禮拜)를 했다' 또는 '백일 동안을 부처님 앞에 매일 108배씩을 절을 했다' 그러한 절하는 횟수라든지, 절에 아침마다 다니는 날수라든지 또 자기가 무엇을 갖다가 얼마씩을 매일 보시를 했다든지.
그러한 형식적으로 나타나는 물질적인 것, 모다 그러한 것으로써 자기의 정성을 갖다가 수판(數板)을 놓아 가지고, 좁쌀 한 되를 바친 거와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치성을 드리고서 자기 남편이 벼슬을 올라가기를 바래고, 자기 아들이 명문대학에 합격되기를 바래고, 자기 아들이나 딸이 몹쓸 병에 걸린 것을 낫기를 바래고.
이래가지고 얼마 동안 해 봐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 성취를 못하면 '에잇 그것, 기도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자 마치 다른 종교에서 '자기가 믿는 데로 오면 그까짓 거 문제없이 병도 낫고 소원도 성취하고 부자도 된다' 하니까, 처음에는 반 타의(他意), 반 자의(自意)로 끌려가 가지고 말을 들어보니까 귀에 쏙 들어오고 '이것, 곧 뭣이 될 것 같으다!' 그래서 거기 가서 얼마 동안 댕기다가 또 뭐 마음먹은 만큼 성취가 안 되면은 또 저 어디 다른 데로 또 가보고 이리해서 갈팡질팡 이러한 분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댕기다가 팔이 부러진다던지, 발이 부러져 가지고 다시 찾아와 가지고 참회(懺悔)를 하는 그러한 분도 몇 사람을 봤습니다마는.

기도라 하는 것은 첫째, 사심(私心)이 없어야 돼. 나의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을 팔아서 갖다 바치라' 그런 말이 아니고, 마음을, 정성스러운 그 마음을 바란 바 없이 완전히 비워 버려야 한다.

'부처님이나 스님네께 보시를 하고, 가난한 노인이나 고아에게 보시를 하라, 물질적인 보시를 하라'고 가리키는 것은, 그런 물질적인 형식에 나타나는 보시를 허겄게 함으로 해서 자기의 탐심(貪心)과 사심(私心)을 버리는 도리(道理)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방편(方便)을 써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한 물질적인 베품과 형식적인 어떤 행동을 얼마 정도 하고서 '나는 이러이러했다' 하는 상(相)을 가지고 있으면, 그리고서 자기의 중생으로서의 오욕락(五欲樂)에 소속한 욕심을 충족하려고 한다면, 그 보시와 그 기도는 정말 함경도 좁쌀 노인과 조끔도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칠일 동안 이 신수기도에 동참(同參)하신 분은 한 분도 그러한 분이 계시지 아니할 것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정말 그 일주일 동안 사심 없이, 정말 청정한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빈 마음으로 일심(一心)으로 기도를 하셨으므로 마음이 빈 곳에는 최고에 공덕(功德)이 담기는 것입니다.
'웅덩이를 파 놓으면 너구리가 뛰어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평지에 웅덩이가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뭣 물건이 꽉 차 있다면은 아무것도 더 담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흙을 파내서 빈 곳을 만들음으로 해서 거기에는 무엇이고 담길 수가 있듯이, 우리 마음을 비워 놓으면 우리 원(願)하는 것이 거기에 담기게 될 것입니다.

3일기도 · 7일기도 · 백일기도는 일심으로 그리고 정성스럽게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비워져서 맑아지는 과정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하고,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평소에는 이 생각 저 생각, 번뇌와 망상,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으로 가뜩차 가지고 있어서, 불공(佛供)을 드려도 그 가뜩차 있는 마음으로 기도를 해도, 그런 가뜩차 있는 쓰레기통과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불공 기도를 드리고 좋은 일을 한다 해도 역시 그렇고, 보시를 한다 해도 역시 그러한 마음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그것도 되풀이해서 끊임없이 중단하지 아니하고 실천을 해 나가고 또 법문(法門)을 듣고 또 실천을 하고. 이렇게 해 가는 동안에 중단하지 않고 일심으로 한결같이 해 나가다보면 마침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마음이 비워지고 청정한 그러한 경계(境界)에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소원은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그 기도는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청정히 하고, 우리의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마음으로 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비워서 청정히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절로 이르러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시 말씀하듯이 참선(參禪) 공부야말로 가장 훌륭한 기도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문을 듣고 화두를 타서 일심으로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화두를 참구해 나가면, 처음에는 번뇌와 망상이 더 많고 화두 드는 시간은 적지만, 번뇌 망상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자꾸 화두를 들고 간절히 참구를 하고 의심(疑心)을 해 나가면, 차츰차츰 번뇌 망상은 줄어지고 화두를 드는 시간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망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망상 일어나지마는 또 화두를 들면 망상이 다시 또 꺼지기도 하고.

망상이 심(甚)히 일어나서 도저히 공부가 잘 안돼. 그러한 경지를 만난다 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화두를 참구해 나가면 결국은 화두를 들라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어서 마침내는 그 의단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하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기도도 그러한 마음, 일상생활 속에서 화두를 참구하고 정진해 나가는 사람은 그 참선 정진하는 가운데에 기도에 공덕(功德)이 다 자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평소에 참선을 열심히 하시다가 이렇게 정월, 매년 정초(正初)에 신수기도와 같은 특별한 그러한 기회에는 일주일 동안 그 정진하는 그 마음, 그 마음으로 일주일 동안을 일심(一心)으로 기도를 한번 하시는 것도 참 뜻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허망(虛妄)하기 그지없고, 내 마음대로 원한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기도 어렵지만 설사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래가지를 못하고, 또 이 세상에 제일가는 부귀(富貴)를 누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평생토록 누려지기가 어렵고 중간에 그것이 나로부터 떠나버리게 되고, 죽을 때까지 안 떠난다 하더라도 죽어갈 때는 하나도 가지고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허망한 것이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또 부귀공명(富貴功名) 그런 것이 또 없어서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필요한 만큼 재산도 있어야 하고 때로는 권리(權利)도 필요하게 되고.
오욕락이 우리를 육도윤회(六道輪廻)로 이끌어가는 쇠사슬이라고 하지만 인간 세상에 오욕락을 떠나서 또 살 수가 없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을 부당(不當)한 방법으로 얻을라고 그러고 지나치게 그것을 남용(濫用)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재앙(災殃)을 가져다주는 것이지, 올바른 방법으로 그것을 얻고 그것을 쓰되 도리(道理)에 맞도록 잘 써 나간다면 그것 또한 없어서는 아니 될 소중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불이라 하는 것이 사람이 잘못 취급하면 화상을 입히고, 화재가 일어나면은 사람이 데어서 죽기도 하고, 집이 타서 재산이 없어지기도 하고, 온 산을 다 태워 버리기도 하고, 온 도시를 다 태우기도 하고, 공장과 가게를 다 태우기도 하고 해서 무서운 재난(災難)을, 재앙이 되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적당히 잘 사용을 하면 인간 생활로부터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며, 공장에서 만약에 어떠한 형태든지 불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만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 오욕락(五欲樂)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올바르게 사용을 하고 올바르게 얻어서 나간다면 그것은 나를 이롭게 하고 또한 남에게도 큰 덕을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일심으로 하면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데, 성취할 때까지는 정말 일심으로 합니다, 누구라도. 그 일심으로 하고 정성을 다해서 하는데, 그것이 일단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면 그때부터서는 사람이 달라지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서 얻어진 바는 자기의 복(福)으로 그것이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현(聖賢)의 가피(加被)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착각(錯覺)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현의 가피로 자기에게 관리권(管理權)을 제수(除授) 받은 것이므로 그것을 유용하게 잘 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자기 것인 줄 알고 딱! 오그려 쥐고 그렇게 살아가면 '너는 훌륭한 관리인이 못되는구나. 일심으로 정성을 드리고 해서 니가 쓸만한 사람인 줄 알고 너에게 관리권을 좀 주어봤더니 니가 영판 그 관리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로구나' 이렇게 인증을 받게 되면 그 관리권은 박탈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던지, 주력(呪力)을 하던지 해 가지고, 부자가 되었거나 권리를 얻은 사람은 각별히 이 점에 대해서 명심을 해 가지고—그렇다고 해서 자기는 쓰지를 말고 전부 다 흩어서 없애라는 것은 아닙니다. 삼등분(三等分) 내지 사분(四分)을 해 가지고 일부는 자기가 쓰고, 일부는 장차를 위해서 저축을 하고, 일부는 부처님이나 종교 계통에 아는 그런 사회 복지 사업 내지 교화 사업에 쓰도록 하고, 일부는 직접 불쌍한 사람이나 그런 사람에게 보시를 하고.
이렇게 해서 적절히 써 나가면 '과연 이 사람이야말로 얼마든지 더 큰 재산을 관리할 만하다' 하는 그런 인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더 큰 재산을 갖게 되고, 더 오래오래 그러한 관리의 직책을 맡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잘 관리를 한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고 '저 사람이야말로 참 오래오래 부자가 되고 오래오래 저 좋은 그런 권리를 가져줘야 되겠다' 그렇게 갖게 되기를 많은 사람들이 다 바래게 되고 그렇게 되도록 모다 음(陰)으로 양(陽)으로 협조를 하게 되는 것이고.
관리를 잘 못해서 그 권리를 남용하고, 재산 관리를 잘못해서 탐심(貪心)만 강해 가지고 남에게 베풀 줄 모르면 모두 사람들이 그 사람을 시기를 하고 모다 저주를 하고. '지가 얼마나 오래 잘산가 보자' 이래 가지고 모두 그 사람 잘사는 것을 보고 배 아파하고 빨리 망해주기를 모다 바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오래오래 부자가 되고 오래오래 그런 권리를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권리(權利)라 하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은 자기를 죽이고 자기 집안을 망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고, 사회국가를 멸망하게 하는 그러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재산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도를 정성껏 그리고 일심으로 해서 소원을 성취한 것도 대단히 어렵고 또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한 소원을 크고 작고 간에 성취를 했거든 그 성취한 뒤에 어떻게 그것을 관리해 나가고,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것은 참으로 더 중요한 것이라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관리를 잘 못하고 잘 사용을 못하면, 별로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러주지도 아니하면서 나갈 때에는 사람을 다 상(傷)해 놓고 떠나게 되는 수가 많은 것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서 없었더라면 그러한 대로, 가난하지만 그러한 대로 살아갈 터인데, 갑자기 큰 부자가 되고 큰 권리를 누려 놓으니, 그것을 관리를 잘 못하고 남용을 하고 그래 가지고 오히려 그전에 잘살기 전에 만큼도 못 살고, 그때 있었던 것까지 쏵 긁어서 다 빠져나가고.
그러한 재산과 권리만 나간 게 아니라 나를 갖다가 무서운 병을 얻게 만들고, 잘못하면 쇠고랑을 차게 해 놓고서 그러한 재산과 권리를 나로부터서 빠져나가게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권리 싫단 사람이 없고 재산이 싫다는 사람이 드물겠지만, 그것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좋은 점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무서운 나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 불자(佛子)들은 깊이 명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처음~34분32초)




(2/3)----------------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금강경(金剛經)』에 말씀하시기를,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요,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다'
모든 함이 있는 법은, '함이 있는 법',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무위법(無爲法)의 반대가 되는 말인데—유위법이, '함이 있는 법'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어떠한 원인이 있어서 생겨났다가 그 조건이 흩어지면 그것이 또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그것이 모두가 다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함[爲]이 있다[有].

생겨날 때는 생겨난 원인이 있고 또 없어질 때는 없어질 또 원인이 있어서, 그러면 이 몸뚱이,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는 우리의 몸뚱이도 이것이 유위법의 범주를 벗어나지를 못하고.
또 이 세계, 해나 달이나 별이나 지구나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이것도 영원성이 없는 것이여. 반드시 그 원인이 있어서 결합이 되었다가 그 결합이 될 만한 원인이 무너지면 다 다시 흩어져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덩이도 영원히 있을 것 같지만, 다 언젠가는 이것이 없어질 때가 오고 저 태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뚱이도 유위법이요, 온 세계에 모든 것이 다 유위법이요.
우리의 생각, 생주이멸(生住異滅),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가 그 생각이 어느 발전을 하다가 결국은 그 생각이 또 사그라져 없어지는데. 그 우리의 생각에 생주이멸, 끊임없는 그 생주이멸의 되풀이를 하면서 쉴 사이가 없습니다. 이것도 또한 유위법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꿈과 같은 것이며, 꼭두각시 환상과 같은 것이며, 물거품 같은 것이며,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이 꿈! 꿈이라 하는 것도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꼭 실지(實地)처럼 느껴지지만 깨 놓고 보면 간 곳이 없고, 환상도 그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실지, 실상(實相)처럼 보이지만 정신을 차려 놓고 보거나 다른 사람이 보게 되면은 그것은 실지로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또 물거품, 물에 어떠한 충격을 가하면 거기에 물거품이 생기는데, 물거품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냐 말이여. 물이 있는 곳에 잠시 물거품이 생겼다가 금방 다시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물거품 자체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참, 유위법에 지나지 못하고.

그림자라 하는 것도 어떤 물체가 있는데, 그 물체에 광선(光線)이 비추면 그 광선의 반대쪽에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그림자라 하는 것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또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물체와 광선이 만났을 때에 그 그림자라고 하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림자는 본래 있는 것도 아니요, 영원성이 있는 것도 아니여.
그래서 역시 꿈과 같은 것이요, 환상과 같은 것이요, 물거품과 같은 것이요, 또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다 허망무실(虛妄無實)한 것이다.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니, 이슬, 풀끝에 이슬과 같고 또 번쩍하는 번갯불과 같은 것이다.
이슬이 풀끝에 맺혀 있을 때 햇볕에 비치면은 찬란한 보석처럼 빛나지만 그것이 어찌 실다운 것이겠느냐 그 말이여. 바람이 불어서 풀잎이 움직이게 되면은 찰나간(刹那間)에 그렇게 찬란하게 빛났던 보석 같은 이슬 덩어리가 떨어져 없어져 버리고 말어.
응당 이와 같이 관(觀)을 지을지니다[應作如是觀]. 이와 같이 달관(達觀)을 할 것이다.

명예와 권리와 재산과 그밖에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내 마음대로 얻어지면 기가 맥히게 참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부러워하지만, 그리고 그것을 한동안 마음껏 누리고 그것을 즐길 때에는 이 세상이 온통 나를 위해서 존재한 것처럼 느껴지고,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싶으지만.
그런 것들이 잠시 반짝거리는 풀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요, 번쩍하다 말아버리는 번갯불과 같은 것이요, 그림자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환상과 같고 그리고 꿈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몸과 목숨을 바칠 만한 상대는 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몸뚱이도 또한 그렇고, 우리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미워하고 이뻐하는 그러한 모든 감정들이 또한 그렇고, 명예와 권리와 모든 재산도 또한 그렇고,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원망하는 그러한 인간 관계도 또한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허망(虛妄)하고 무상(無常)한 속에 우리는 이 몸뚱이를 받아났습니다. 받아나 가지고 그 무상한 속에서 무상한 것과 더불어 싸우며 한덩어리가 되어 가지고 끊임없이 굴러가고 또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상한 것을 마음대로, 마음먹은 만큼 얻어지기도 어려운 것이면서 얻어져봤자 끝내 나를 배반하고, 나에게 가슴 아픔만 한아름 안겨 주고서 매정하게 떠나 버릴 그러한 것들, 계속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오늘날까지 그렇게 지내왔고, 현재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입으면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또 앞으로도 한량(限量)없는 겁(劫)을 향해서 계속 몽둥이질을 당하면서 가슴을 할큄을 받으면서 계속해서 또 그놈을 따라가야만 할 그러한 어리석고 가련한 중생(衆生)들.

다행히 우리는 그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찾는 길을 만났습니다. 만났기에 우리가 그것들에 속지를 아니하고 정신 차려서 정법(正法)을 닦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숙세(宿世)에 너무 깊고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벌레가 여름밤에 촛불을 보고 그것이 좋은 줄 알고 모여들어서 그 불을 맴돌고 이리저리 날다가 결국은 그 불꽃에 나래(날개)와 다리가 타서 무수히 떨어져 죽는 것처럼, 탐진치(貪瞋癡)와 오욕락을 향해서 그칠 줄 모르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따라가다가 결국은 그것들로 인해서 일어서지 못할 만큼 무서운 뭇매를 맞고 꺼꾸러지고, 그것들로 인해서 얽혀 가지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갈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만났고, 정법(正法)을 만났기에 이렇게 신수기도를 하면서도 다른 어리석은 중생들이 그러한 것을 추구한 것과 같지를 않고, 그러한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원(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온전히 빠지지를 아니하고, 거기에서도 항시 정법을 믿는 마음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배반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공부를 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마음이 청정해지면 그 청정한 마음으로 잠깐 관(觀)만 해도, 잠깐 원(願)을 해도 그 원은 너무 빨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참으로 꼭 성취를 할 마음이 있으신 분은 어쨌든지 참선을 열심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인간을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리 신심(信心)이 있고 참선을 열심히 하신다 해도 또 가정에는 필요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아들 없는 분은 아들을 구하게 되고, 재산이 없는 사람은 재산을 구하게 되고, 직장이 없는 사람은 직장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없고서는 당장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살 만큼 있으면서도 욕심에 욕심이 붙어 가지고 끝없이 탐심을 부리는 사람도 있지만,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그러한 터무니없는 탐욕으로서가 아니라, 우선 가정이 살아가야 하고 애들 교육도 해야 하고 또 사람으로서 생활을 해 나갈 만큼의 재산은 누구에게나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너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지나친 탐욕을 부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좋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구하고 적당하게 사용을 해 나가면 절대로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이고 다 살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잘살고, 한결같이 또 못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한때는 잘살다가 또 한때는 못살다가 이렇게 됩니다. 그것은 과거(過去)에 우리가 짓기를 한결같이 좋은 일만 한 사람도 없고, 한결같이 나쁜 짓만 한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때로는 나쁜 짓도 하고, 때로는 좋은 짓도 하고 이러한 생을 수없이 지내왔기 때문에, 우리가 금생(今生)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한 5년 내지 10년, 길면은 한 20년 이리 잘살다가 또 그 중간에 한 5년이나 한 10년 뭔 사업이 잘 안되고 재앙이 잇따라 일어나고, 또 그러다가 또 몇 해가 지내면은 또 서서히 또 뭔 일이 또 뜻대로 되다가, 이리 파장(波長)을 이루면서 부귀와 모든 공명이 나로부터 떨어지기도 하고 또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초년(初年)에 참 부모 밑에 호강하다가 중년(中年) 이후로는 아주 형편없이 가난한 재난(災難)을 만난 사람, 초년에는 참 피나는 고생을 하다가 중년 이후에는 잘사는 사람, 또 초년 중년은 몹시 어려운 속에서 살았지만 말년(末年)에 가서 잘사는 사람, 사람들이 모두 다 천차만별(千差萬別)인 것입니다.
이것은 음양가(陰陽家)들은 사주팔자(四柱八字)가 그렇다 하지만, 사주팔자는 무엇이냐? 전생(前生)에 내가 지은 바에 의해서 해필 그 해, 그 달, 그 날, 그 시(時)에 태어난 것입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달통한 사람들은 그러한 원리(原理)를 수학적으로 풀어 가지고 운명(運命)을 점(占)치고 있습니다마는, 음양오행이라 하는 것은 우주에 질서를 수학으로 풀어놓은 것입니다.
전적으로 무시할 것도 못되나, 전적으로 그것에 얽매어 가지고 운명론자(運命論者), 숙명론자(宿命論者)와 같은 그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설사 사주(四柱)에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실망할 것도 없고 생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올바르게 노력을 한다면 죽 먹을 사람이 밥을 먹게 되고, 밥 먹을 사람이 좀더 풍족하게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지런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노력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사람에게나 어떠한 일에나 대단히 좋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더 정신을 가다듬고 참선을 열심히 하면서 노력을 한다면, 아무리 비색(否塞)한 운(運)을 만난다 하더라도 아주 죽으란 법은 없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읊은 게송(偈頌)에 물은 달이 있음으로 해서 달빛이 비추어 주어야 그 물이 맑은 것을 알 수가 있듯이,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만나봐야 자기의 사람됨을 스스로 알 수가 있는 것이고, 자기의 그릇이 얼마만큼 된 것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일도 당해봐야, 부자가 되어봐야 그 사람이 인간성이 참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또 어려운 일을 당해봐야 그 사람의 끈기를 알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달이 비추지 아니하고 껌껌하면 그 물이 썩 맑은지 탁한지를 알 수가 없다가, 밝은 달빛이 환히 비추어 줌으로 해서 물의 청탁(淸濁)을 가려낼 수가 있고, 하늘에 구름이 꽉 차 있으면 그 하늘이 얼마만큼 넓은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늘에 구름이 한 점도 없이 쏵 없어져야 그 하늘이 얼마나 높고 푸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재산을 많이 부자가 된 뒤에 그 사람을 봐야 그 사람의 인간성을 알 수가 있고, 그러다가 그 재산이 쏵 없어져봐야 그 사람의 참다운 인격(人格)을 알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道)를 닦아 가는데 있어서도 밤낮 좋은 환경에서, 좋은 여건하에서—아주 방사(坊舍)라든지, 음식이라든지, 의복이라든지, 모든 여건이 좋은 데에서만 정진(精進)을 하면 참 공부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해서 금방 큰 도를 깨달을 거 같지만,
도(道)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좋은 환경에서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주(衣食住)가 부족하기도 하고, 주변이 시끄럽기도 하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어려운 상태에 놓여서 봐야 자기의 수행력(修行力)이 얼마나 된가를 가늠할 수가 있고, 그런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한번 정진을 해봐야 거기에서 참으로 힘 있는 정진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좋은 환경에서만 자라고, 좋은 부모 밑에서 부모덕(父母德)으로 호강만 하고 자란 사람은 커서 별 볼 일이 없습니다. 조끔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감내(堪耐)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가정에 태어나서 피나는 참 고생도 해 보고, 고통도 해 보고 그래야 어려운 사람의 사정도 알고, 그 사람이 나중에 성공하게 되면 많은 사람의 사정을 알아서 널리 덕을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고행(苦行)을 쌓으시고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 수없는 고통을 다 견디어내셨고, '손바닥만한 땅도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서 몸을 버리지 아니한 땅이 없다' 할 만큼 무수(無數)한 목숨을 중생을 위해서 보시를 하셨습니다.
그러한 한량없는 보시와 공덕을 쌓으셨기에 천백억 화신(化身)을 나투실 수가 있고,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두루 갖추어서 모든 성현(聖賢) 가운데에 최고의 성현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스승을 스승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같이 그러한 목적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데에서 신수기도, 뭐 기도? 신수기도를 왜 해? 참선만 잘하면 그만이지, 기도는 그까짓 거 기복 불교(祈福佛敎)가 아니냐? 산신기도 · 칠성기도 · 신중기도, 기도라 하는 게 다 복(福)을 빌고 한다니 그것은 기복 불교지 그것이 최상승 불교(最上乘佛敎)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혹 그러한 생각을 가지신, 기도라고 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신 분 가끔 만납니다마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우리가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심 정력(定力)으로 하면 반드시 자기의 원(願)하는 만큼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선조 대왕(宣祖大王) 때에 이응(李應)이라고 하는 아주 훌륭한 관리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해 가지고 그 당쟁(黨爭), 그 사색정당(四色政黨)에 싸움이 치열해 가지고 훌륭한 사람,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헌신적으로 하려고 하는 바른 사람들이 그 반대당에 의해서 모함을 받아 가지고 죽기도 하고, 귀양을 가기도 하고, 또 워낙 덕(德)이 있고 그런 사람은 저 제주도나 진도나 완도나, 지방 수령(守令)으로 좌천(左遷)이 되어 가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 이응이란 사람도 그 반대당의 모략으로 진도(珍島) 군수(郡守)로 좌천이 되어 갔는데—진도 군수로 있을 때 그 폭풍이 일어나 가지고 일본 사람이, 장사하는 일본 사람이 폭풍을 만나 가지고 진도, 그 섬 해변에 간신히 표류를 했습니다.

백성들의 보고를 받고 아전(衙前)들이 나가 가지고 그 사람들을 다짜고짜로 묶어서 감옥에다 때려넣고 그 배에 실은 보물을 전부 다 뺏을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이응이라고 하는 그 군수가 알고서 아전들을 갖다가 크게 꾸짖고, 그 감옥에서 그 사람들 다 포박(捕縛)을 지은 것을 풀어주고, 또 관아(官衙)에 방을 따뜻하게 불을 때서 방으로 하고, 옷도 다 갈아입히고 해 가지고 한 열흘 동안을 잘 먹이고, 그래 가지고 부서진 배도 다 수리를 하고 해 가지고 그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짐승도 내 집에 들어오면 잡아서 죽이는 법이 아닌데, 아무리 일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풍랑(風浪)을 만나서 표류(漂流)해 온 사람을 그 잘해서 돌려보내야지, 그것을 갖다가 죄 없이 포박을 지어 가지고 뚜드러패고, 싣고 온 보물을 갖다가 뺏을라고 한다면 어찌 그것이 참 훌륭한 처사(處事)라고 하겠느냐?" 그래 가지고 아전들을 꾸짖고 돌려보냈는데.

그 이응이라고 하는 사람에 손자가 이름이 '푸를 창(蒼)' 자, '바다 해(海)' 자 창해(蒼海)인데, 이창해(李蒼海)란 사람이 나중에 그 제주도 목사(牧使)가 되어 가지고 20여 명의 관속을 데리고 배를 타고서 바다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폭풍을 만나 가지고 배가 뒤집어진 바람에 다 죽고, 그 창해란 사람과 또 다른 세 사람이 간신히 뱃조각 판때기를 붙잡고는 며칠을 표류를 해 가지고 도착을 했는데, 일본에 지마도(志摩島)란 섬에 도착을 했다 그 말이여.

그러니 일본 사람들이, 그 섬사람들이 와! 나와 가지고, 이창해를 비롯한 세 사람을 갖다가 무슨 간첩이나 무슨 그러한 걸로 취급을 해 가지고는 묶어서 때려 가뒀습니다.
"대관절 뭣 하는 놈들인데 이렇게 남의 땅에 이렇게 침입해 들어왔느냐?" 한게, "제주도로 그 목사로 가다가 폭풍으로 인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잘 곧이를 안 듣고 "바른대로 대라"고 막 고문을 하고 뚜드러패는데.

그 창해(蒼海)란 사람이 워낙 인품이 좋고 점잖해서 사실대로 다 말을 하니까, "음, 니가 그렇다면 혹 그 진도 그 군수로 있던 이응(李應)이란 사람을 혹 아느냐?" 하고 물어보는데, "바로 그 사람이 우리 할아버지요" 그러니까, 그 자세히 이리저리 물어보니까 틀림이 없다 그 말이여.
그때부터서는 포박을 다 풀어주고, 그래 가지고 옷도 갈아입히고 음식도 잘 먹이고, 모다 상처도 다 하고 그런데.

그래 가지고 여러 날을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인자 빨리 한국으로 돌아와야 겠는데 이 관속(官屬)들이 다 죽어버리고 자기네들만 가봤자 별로...
그렇지 않아도 반대당의 거시기로 제주도로 이렇게 귀양 가나 다름없이 이렇게 좌천되어 가는 판인데, 한국으로 돌아가봤자 반대당으로부터 참 좋은 소리도 못 듣고, 그러니 갈 수도 없고. 또 갈라고 해봤자 배가 없으니 갈 수가 없고. 천상 그 지마도(志摩島) 도주(島主)가 배를 만들어서 태와다 주기 전에는 갈 수가 없는데, 몇 날이 되어도 보내줄 생각을 안 하고.

찬찬히 그 겪어보니까 사람이 괜찮하고, 또 도주(島主)에는 그때 참 그 당혼(當婚)한 규수가 하나, 무남독녀(無男獨女)가 있었는데, 이창해한테 '내 딸이 있으니 내 사위가 되어 달라. 내 아들이 없으니까 데릴사위를 해 가지고 나의 모든 것을 다 물려줄 터이니 내 사위가 되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참 생각해 보니, '내가 이 폭풍을 만나 가지고 간신히 죽지 않고 살아났기는 하나, 해필 왜놈에 데릴사위가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안이 벙벙해서 그랬으나 이리저리 생각해봤자 도저히 뾰족한 수는 없고, 그래서 승낙을 했습니다. 날을 받아서 융숭하게 결혼식을 했는데, 그 규수가 자기보다 한 7~8세 아래가 되는데 꽃같이 이쁜 미인(美人)이었습니다.

이 창해란 사람은 한국에 있을 때 여섯 살 때 결혼을 했는데, 자기보다 훨씬 십여 세 많은 여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늙은 처녀하고 결혼을 해 가지고 별로 재미도 없이 살다가 이렇게 폭풍을 만나서 와 가지고 자기보다 7~8세 아래 되는, 설사 왜놈에 딸이지만 그 꽃같은 계집하고 결혼을 하게 되니, '참 인생이라는 게, 참 운명이라는 게 묘(妙)하다' 그래 생각했습니다.
속담에 '마누라가 죽으면 변소에 가서 씨익 웃는다'고 그러는데, 이 사람 참 고향을 떠나서 이렇게 참 폭풍으로 이렇게 해서 왜놈 섬에 와 가지고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별로 싫지는 않고, 운우(雲雨) 정몽(情夢)을 이루어서 애기를 한 30~40년 간에 아들딸을 열두 명이나 낳았습니다.

열두 명이나 자녀를 두어 가지고 있는데, 그 장인이 인자 늙어서 그 사위한테 그 도주(島主)에—거기는 도(島)가 일본 땅이라 하지마는, 그 사백여 년 전이니까 그렇게 교통수단이 좋지 못하고 해서 이것은 바로 그 도주가 그 섬에 왕 노릇을 했습니다.
일본 본토(本土)에 별 지배도 받지 않고 자기네끼리 그렇게 사는데, 그 섬을 중심으로 해서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이 여러 개 있었는데 서로 섬끼리 싸워 가지고 그러다가, 이 창해가 그 장인으로부터 그 도주(島主)에 직책을 이어받아 가지고는 군사훈련을 시키고 해 가지고는, 그 주변 섬을 전부 정복(征服)해서 자기 영토를 만들어 가지고 아주 참 썩 재미있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고향땅에 어머니는 어떻게 계시며 동생은 어떻게 사는가?' 이 달 밝은 밤이면은 저 한국 쪽을 쳐다보면서 하염없이 시름에 빠지기도 하고, 그런 세월을 지내다가 또 그 사람이 아들을, 열둘 가운데에 큰 아들이 썩 또 인물이 좋고 기운이 세고 해서 그 사람에게 또 그 자기의 직책을 다 물려주었습니다.
그때에 이창해의 나이는 칠십 고개를 넘어서 인자는 은퇴를 해 가지고 바다로 배를 몰고 나가서 낚시질이나 하고 그렇게 참 소일(消日)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가지고는 쏜살같이 그 배가 달리고 달려가지고는 도착을 해서 잘 살펴보니까 한국에 강원도 고성(高城), 그 총석정(叢石亭) 있는 데에 도착을 했다 그 말이여.

그이가 본래 고성 사람이라, 그 강원도 뭐 십이경(十二景)인가 해 가지고 그 명승지(名勝地)를 다 두루 돌라봤기 때문에, 그러고 고향 지방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가 총석정이라 한 것을 알고서 그 인자 이...
근데 옷만 좀 젖었지 아무데도 다친 데가 없이 어떻게 그렇게 참, 이 요새 참 비행기처럼 빠른 그런 배가 달리듯이 그렇게 무사하게 동해(東海)를 건너서 총석정에 도달했다 그 말이여.(34분33초~1시간11분5초)





(3/3)----------------

그래서 기어올라 가 가지고는 '요가 내 거시기인데 여까지 왔으니...'
옛날에 자기 어머니 따라서 낙산사(洛山寺) 기도를 다니던 그 생각을 하고 '낙산사나 한번 가 보리라' 그래 가지고는 낙산사 쪽으로 인자 서서히 걸어가는데.
어떤 사람이 오는데, 와서 요리 보더니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보아 하니 당신은 일본 사람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해서 일본 사람이 여기를 왔소?" 하고, 창해 보고 물어보니까, "내 입은 옷은 일본 옷이나, 사람인즉슨은 조선(朝鮮) 사람이오"

"조선 사람이 어떻게 일본 옷을 입고 요렇게 여그를 서성거리고 있소?" 한게, 자기 얘기를 주욱 했습니다. 하니까 그 사람이, "형님!" 하면서 달라들면서 그러니께,
"여 왠 사람이 멀쩡히 남보고 형이라 그러요?" 하니까, 자기가 남양(南陽)이라고 하는, "남양입니다. 내가 남양입니다" 한게, "하! 니가 남양이냐?"

그 창해(蒼海)에게는 남양(南陽)이라고 하는 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남양이 왜 거기를 왔었냐 하면, 그 창해의 어머니가 오씨(吳氏)인데, 오씨는 평소에 불교의 신심(信心)이 돈독(敦篤)해서 항시 소원이 있으면은 그 낙산사에 와서 기도를 하고 집에서도 일심(一心)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더욱이 그 창해가 제주도 목사로 떠난 날부터서는 더 열심히 기도를 하고, 또 그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전몰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서는, 그날 그 폭풍 일어나서 배가 파손이 된 그날을 기(期)해서 꼭 낙산사에 가서 불공(佛供)을 드리고 또 천도를, 제사를 지내고 그렇게 하다가, 그 오씨는 연만(年晩)해서 작고(作故)하고, 그 둘째 아들인 남양에게 유언(遺言)을 해서 "니가 꼭 그날에는 낙산사에 가서 꼭 기도를 하고, 니 형의 제사를 지내라. 그리고서 살아 있으면 반드시 돌아오고, 죽었다면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도록 부처님께 기도를 해라. 그리고 고기를 사서 방생(放生)을 해라"

이렇게 유언을 해 가지고 그 남양이 그 어머님의 유언을 받아가지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는데, 해필 그날이 그 창해가 제주도 목사로 부임하러 떠나다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던 바로 그날이다 그 말이여. 그날 총석정에 도착해 가지고 동생과 상봉(相逢)을 하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관세음보살을 평소에 지극히 염(念)한다든지, 고왕경(高王經)을 독송(讀誦)을 한다든지, 또는 그런 성지(聖地)에 가서 기도를 한다든지, 이렇게 일 년에 한 번씩 신수기도(身數祈禱)를 정성껏 한다든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한결같은 마음, 정성(精誠)스러운 마음,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공(功)을 들이고 치성을 하고 기도를 하면 이와 같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성현의 가피(加被)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에 이와 같은, 이보다도 훨씬 더 불가사의한 가피를 입은 예는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셔서 기도하신 여러분들도 '칠일기도가 끝났으니까 인자 또 그럭저럭 지내자' 이러시지를 말고, 평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덕(德)을 베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청정한 마음을 지켜 나가고 행동해 나간다면 여러분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시더라도 그 일들 자체가 낱낱이 다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남편을 잘 뜻을 받들어서 내조(內助)를 잘하고, 또 남편은 아내의 그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와 아버지와 정든 집을 떠나서 자기 하나를 믿고 내 집에 온 사람이니, 내 집에 와서 참 이 고생 저 고생 다하면서 아들딸 낳아서 내 집에 대(代)를 이어주는 사람이니 참, 마음으로 항시 감사한 마음을 갖고.
고생을 하면 그 따뜻한 마음 말 한마디로—미안한 말이지만 여자는 말 한마디로써 그 가슴 아픈 것을 어루만질 수도 있고, 말 한마디로써 독사(毒蛇)를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 되는 사람은 좋은 선물을 사다준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평상시에 그 아내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로하고 괴로울 때, 따뜻한 눈매와 따뜻한 말 한마디로써 씻은 듯이 그 괴로움을 씻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전(經典)에 보니까 부처님께서도 '아내에게는 선물을 가끔 해라' 하셨습니다. 물론 반지라든지, 목걸이라든지, 의복이라든지, 손가방이라든지, 신발이라든지, 그 종류는 각양각색(各樣各色) 다양할 것입니다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따뜻한 말 한마디는 돈 한푼 들이지 아니하지만 효과는 백배인 것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 왜 그렇게 소중하냐 하면 따뜻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 있는 곳에 따뜻한 말이 있고 또 따뜻한 마음 있는 곳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선물도 거기에서 다 나와질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설사 썩 이쁘지 아니하고, 썩 훌륭하지 못한 아내라 할지라도 남편이 대장부(大丈夫)의 풍도(風度)를 가지고 잘 다스리고 잘 이끌어나간다면 훌륭한 아내가 되어서 내 아들딸을 잘 낳아서 잘 길러줄 것이요, 내 살림을 잘 보살피고 잘 일궈줄 것이며, 내 가문(家門)을 빛내주는 훌륭한 반려자가 될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맨 부인보고만 잘하라고 말을 하고, 남편 잘하란 말은 한 번도 안 했습니다.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맨 여자만 갖다가 막 짓밟고, 무조건하고 남편을 잘 섬기라고 그런 거 아니냐?' 나한테 와서 따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마는, 가만히 보니까 항시 '저 소리를, 남편 잘하란 말도 가끔 해야 남편이 나한테 잘 할 텐데, 죄 없는 고생하는 여자만 갖다가 자꾸 잘하라고... 불공평하다' 그러한 생각을 속으로 듣고 나를 쳐다보고 계신 것 같애서, 내가 오늘은 남자 분한테도 내가 부인한테 잘하라고 한 말을 부처님의 말을 빌려서 내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가정은 돈도 중요하고 권리도 중요하고 모든 것도 중요하지만, 첫째, 부부간에 화목을 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고기를 못 먹고 소채(蔬菜)에 밥을 먹고, 밥도 못 먹고 죽을 쒀 먹더라도 내외간(內外間)에 화목을 하고 부지런히 산다면 머지않아서 또 재산도 생기고 또 복이 돌아올 것입니다.
명예도 있고 권리도 있고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부부간에 밤낮 싸우고 입으로 싸우고 나중에는 살림을 때려 붓고, 다음에는 발길로 차고 몽둥이로 패고 해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른다면 머지않아서 그 집은 재앙이 닥쳐오고, 소유하고 있는 재산도 복도 다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한 나라도 서로 상하(上下)가 합심이 되어서 나라를 위한, 그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 국민이 단합을 한다면 아무리 작은 나라도 이웃나라에서 침범을 못하고 그 나라는 결국은 발전을 해서 참 좋은 나라가 되는데, 한 가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화목으로써 단합을 해야 복이 돌아온 것이지, 싸우고 부시고 때리고 해 가지고 무엇이 되며, 아들딸들의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기도를 열심히 하신 것도 중요하지만, 첫째, 자기 마음 다스리는 것.
우리는 무엇을 하던지 그 때를 잘 봐야 하고, 장소를 잘 알아차려야 하고 그렇게 해서 지혜롭게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소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금년 일 년 동안 또 이렇게 이 신수기도를 시초(始初)로 해 가지고 일 년을 단단히 실속 있게 알차게 보람 있게 꾸려나가야 할 것입니다.

'복을 부르느냐, 재앙을 부르느냐'는 전생(前生)에 지은 업(業)도 관계가 있습니다마는, 금생(今生)에 내가 어떻게 노력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는 그것을 완화시킬 수도 있고, 방향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를 하고, 기도의 입재(入齋)와 회향(廻向) 때 법(法)을 설하는 것은 그러한 까닭인 것입니다.
전생에 지은 대로만 받고만 만다면 우리는 아무런 기도도 할 것이 없고, 노력도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마는, 우리의 장래는 전생에 지은 바와 금생에 노력 여하가 합해져 갖고 우리의 앞에 모든 것이 전개되기 때문에 이미 전생에 지은 것은 부처님께 참회를 하려니와, 앞으로 어떻게 노력하느냐 한 문제에 대해서는 온통 우리 자신들에게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일 년 동안을 또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마음을 가다듬고, 시시때때로 그림자 없는 채찍으로 스스로를 경책(警策)하면서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한 걸음도 퇴전(退轉)함이 없이 노력을 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문일귀원최적담(問一歸源最的談)이여  작가친대칠근삼(作家親對七斤衫)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여염입수간불견(如鹽入水看不見)헌디  긱착방지자미함(喫着方知滋味鹹)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기를 "만법(萬法)이 귀일(歸一)하니 일귀하처(一歸何處)닜고?,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고 여쭈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내가 청주 땅에서 베적삼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참 동문서답(東問西答)이 되어서, 우리는 왜 '모든 법이 다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느냐?' 하고 묻는데 대해서 엉뚱하게 '내가 청주 땅에서 적삼을 하나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다'
도저히 우리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써는 종잡을 수가 없고 이빨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이것을 사량분별로 따질라고 하면은 이것은 얼토당토않고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최상승학자(最上乘學者)는, 활구참선객(活句參禪客)은 여기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할 따름인 것입니다.

여염입수간불견(如鹽入水看不見)이나, 소금을 물에다 넣으면 그 물에 녹아버린 소금을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긱착방지자미함(喫着方知滋味鹹)이다. 맛을 보면 바야흐로 짭짤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소금을 아무리 많이 타도 눈으로 봐 가지고는 도저히 맹물인지 소금물인지, 짠지 싱거운지를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정월에 간장을 모다 담으시게 되겠지만, 짜고 안 짠 것은 눈으로 봐 가지고는 알 수가 없으나, 맛을 보아야 비로소 얼마만큼 짜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못다 한 말을 주장자(柱杖子)에 부탁을 하고 내려가겠습니다.(1시간11분6초~1시간29분35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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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ㄱ/꿈2022. 3. 9. 08:49

꿈(전강선사 No.012)—(게송)一枕客殘夢 空中飛過鳥 落花僧禪靜 文字是糟粕 | 내 본고향에 한번 가 봤어? | 정법을 바로 믿어라.


*꿈[夢] ; ①잠자는 동안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의 연속. ②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理想). ③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허무한 기대나 생각. ④현실을 떠난 듯한 즐거운 상태나 분위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⑤덧없음의 비유. 허깨비[幻]와 비슷하므로 환몽(幻夢) · 몽환(夢幻)이라고도 한다.

[불교] 잠을 자면서 꿈꾸면 좋은 꿈을 꾸었거나 나쁜 꿈을 꾸었거나, 꿈속에서는 무엇이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나 꿈 한번 꾸고 깨어나면 실지로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몸뚱이, 이 세계, 해나 달이나 별이나 지구나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반드시 어떠한 원인이 있어서 생겨났다가 그 조건이 흩어지면 그것이 또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그것이 모두가 다 '유위법(有爲法)', 함[爲]이 있는[有] 법(法)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금강경(金剛經)』에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 모든[一切]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꿈[夢]과 같은 것이며, 꼭두각시 환상(幻像)과 같은 것이며, 물거품[泡] 같은 것이며, 그림자[影]와 같은 것이다.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다. 풀끝에 이슬[露]과 같고 또 번쩍하는 번갯불[電]과 같은 것이다. 응당 이와 같이 관(觀)을 지을지니다[應作如是觀]. 이와 같이 달관(達觀)을 할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그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찾는 길, 참선(參禪)을 만났습니다.

 

(8분 7초)


[법문] 전강선사(No.012)—전강선사 일대기 제5호(경술1970년 12월 8일 새벽.음) (전012)

일침객잔몽(一枕客殘夢)이다  공중비과조(空中飛過鳥)니라
나무~아미타불~
낙화승선정(落花僧禪靜)이다  문자시조박(文字是糟粕)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중이 되아 가지고 경(經)을 한 40년 동안 읽었다. 그 경, 부처님 그 49년 설법해 논 그 경을 한 40년 동안을 참 쉴 새 없이, 눈코 한번 뜰 새 없이 경만 읽었다.
읽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아, 글만 밤낮 읽고 보니 경서(經書)만 읽고 보니, 내가 해야 헐 것인디—도(道) 닦으란 말이고, 저 깨달으란 말인디, 어찌 저는 깨달지 못허고 도는 깨달지 못허고 그 부처님 일생에 그 도 닦는 문서만 가지고 밤낮 읽고 있으니, 거 참 어리석다’

여간 그 어리석은 일이 아니거든. 어찌 40년 동안을 글만 읽고 있단 말이냐. 경만 읽고 있단 말인가.

일침객잔몽(一枕客殘夢)이로구나. 한 베개를 베고 그 잠 곤(困)허게 올 때에 객몽(客夢)이여.
객(客)으로 돌아댕기다가 어디 베개 베고 잘 때가 있나. 다행히 그 객이 어디 잠자리 하나 좋은 자리 얻어 만나서 그 곤헌 객몽을 꾸는디, 그 객이라는 것이 그 인자 일침객잔몽(一枕客殘夢)이라는 것은 한 베개[一枕] 객(客)의 잔몽(殘夢)이다.

객의 쇠잔(衰殘)헌 꿈이라는 것은 우리가 시방 다 일침객잔몽이여. 한 베개 베고, 객의 잔몽을 꾸고 있어.
우리가 객 아닌가. 어디가, 우리가 우리 고향을 가 봤는가? 우리가 본고향(本故鄕) 한번 가 봤어?

고향은 아득허니 미(迷)해 버리고 지금 이렇게 삼악도(三惡途)에 도니, 삼악도에 돌고 있다가 지금 남섬부주(南贍部洲)에 와서, 요까짓 놈의 사대(四大) 색상(色相) 몸뚱이 하나 얻어 가지고는 이것이 내 보배라고.
요게 내 보배고, 요게 참말로 내 몸뚱이여? 내 본래 몸뚱이여?

어림도 없다. 내 본집에, 내 본고향에, 내 본래 몸뚱이라는 건 꿈에도 아니다. 속지 말어라!
요까짓 놈의 이 더러운 사대추신(四大醜身)을 가지고 내 몸이라고 허느냐? 객잔몽이다. 객의 잔몽(殘夢) 꾸고 있는 것이다.

공중비과조(空中飛過鳥)니라. 공중에 한번 날라간 새와 같으느니라. 우리가 지금 날라간 새여. 비조(飛鳥)여. 어디 쉬도 못헌 새여.

다행히도 화락승선정(花落僧禪靜)이로구나. 어찌 다행히도 우리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척 만났다. 정법 만난 것이 천하에 다행허다! 만고(萬古)에 경행(慶幸)허니라.

어디가 정법이 있느냐? 참 정법 만나기 어렵다. 까딱허면 사견(邪見)에 꺼꾸러져서, 내가 사견종자(邪見種子)가 되아 가지고는 사견종자를 안 심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한번 사견에 꺼꾸러지고 사도(邪道)에 엎어질 것 같으면은 나만 엎어지고 나만 꺼꾸러지는 것이 아니다. 일체 사람을 다 끌고 들어감서 누겁(累劫)을 그놈의 인연을 지어 주는 것이니, 왜 그러한 허망헌 농사를 지어 주며, 왜 그런 헛된 사도를 이루어 줄 것이냐. 그 삿된 도를 자꾸 전통해 줄 것이냐.
우리 중생을 점점 점점 더 악몽을 꾸게 맨들고, 악견(惡見)으로 들어가게 맨들고, 삼악도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냐!

어쨌든지 그 정법을 바로 믿고 바로 찾고. 그와 같은 그 정법으로 사종(邪宗)을 버려 버리고 내 믿었던 그 과거 잘못 찾았던 사종을 턱 버려 버리고 귀정(歸正)허는 것, 정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천하에 제일이니라.
우리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무여시사(無如是事)다. 이와 같은 사종에 엎어지지 말고, 사종에 꺼꾸러지지 말고, 사종에 인연 맺어 두지 말아라!

만약 거다가 인연을 두고 그 사종(邪宗) 인연을 떼지 못헐 때, 이 미래제(未來際)가 다허도록 내가 똑 그리 돌아오고, 그 사연(邪緣)이 자꾸 끌고 돌아오는 법이니, 정법이 있는 다음에는 꼭 사법(邪法)이 있어 가지고는 정법을 사법이 자꾸 치는 법이다. 고것이 마장(魔障)이다. 정법을 때려 치는 마업(魔業)이니라.

학자(學者)는 불가불신(不可不愼)이냐. 학자는 어찌 가히 삼가치 않을까보냐.
여까지 올라온 송구(頌句), 오늘 아침에 밝히고.(처음~8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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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일침객잔몽~’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 박경훈 역 | 동국대학교 역경원) ‘송암도인(松巖道人)‘ p83 참고.
*곤하다(困-- 곤하다·가난하다·기운이 빠지다 곤) ; ①기운이 없어 나른하다. ②(사람이) 잠든 상태가 매우 깊고 편안하다.
*객몽(客夢 손·손님·나그네·여행·객지 객/꿈 몽) ; 나그네가 객지(客地)에서 꾸는 꿈.
*잔몽(殘夢 남을 잔/꿈 몽) ; ①잠이 깰 무렵에 꾸는 꿈. ②잠이 깬 후에도 마음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꿈.
*쇠잔하다(衰殘-- 쇠하다·약하다 쇠/남을 잔) ; (힘이나 세력이) 차차 줄어서 매우 약해지다.
*본고향(本古鄕) ; 본향(本鄕). 고향.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섬부주(南贍部洲) ; 수미산(須彌山 :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의 사방에 있다는 사주(四洲 : 네 대륙)의 하나. 섬부(贍部)는 산스크리트어 jambu의 음사(音寫)로 잠부(jambu) 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와 같이 일컫는다.
수미산 남쪽에 있으며,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다.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고 한다. 염부제(閻浮提), 염부주(閻浮洲)와 같음.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색상(色相) ;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물질의 형상.
*사대추신(四大醜身) ; ‘네 가지 요소[四大]로 구성된 더러운[醜] 몸[身]’ 사대색신(四大色身)과 같은 말.
*사대색신(四大色身) ; 지 · 수 · 화 · 풍(地水火風) 사대로 이루어진 몸.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경행(慶幸) ; 경사스럽고 다행(多幸)한 일.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 수가 없는 것.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누겁(累劫 묶을·포갤·쌓을 누/겁·오랜 세월 겁) ; 여러 겁이 쌓여서 이루어진 기간. 곧 한없이 길고 오랜 시간.
*겁(劫) ; (산) Kalpa 음을 따라 갈랍파(羯臘波) 또는 겁파(劫波)라 하고, 다시 줄여서 겁(劫)이라고만 한다.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오랜 세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〇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〇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불법(佛法)에 위배되는 견해. 선견(善見 : 있는 그대로, 진실 그대로 보는 것. 정견正見)에 장애가 되는 견해.
*사종(邪宗) ; 외도(外道). 외도가 주장하는 삿된 종지(宗旨).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미래제(未來際 아닐·미래 미/올·미래 래/끝 제) ; 미래의 변제(邊際 : 시간이나 공간, 정도程度 따위에서, 그 이상 더는 없는 한계限界). 미래는 끝이 없으므로 미래제라는 말은 다시 말해 영원한 미래, 영원과도 같은 오랜 시간을 뜻한다.
*사연(邪緣) ; 삿된 인연. 올바르지 않고 좋지 않은 조건을 뜻하는 말로서 정연(正緣)의 대칭어이다.
*사법(邪法) ; 삿된 법. 이치에 맞지 않고 잘못된 길로 이끄는 부정한 가르침. 외도(外道)의 가르침.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어떤 일에 장애가 생기는 것. 불도(佛道) 및 선법(善法)의 수행에 장애가 생기는 것.
*마업(魔業 마구니 마/업·일·선악의 소행所行 업) ; 마구니[魔]의 행위[業]. 마구니의 직접적인 행위 뿐만 아니라, 번뇌, 게으름, 미혹 등을 포함해 불도(佛道) 및 선법(善法)의 수행을 장애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서 마업이라고 한다.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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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깨달음2022. 3. 8. 04:07

깨달음(전강선사 No.349)—이 몸을 가져 가지고는 도를 닦어야지 | 生死二字 釘在額上 裂轉面皮 討箇分曉 | 분명히, 참다이, 철저히 하면은 깨달은 각(覺)이 반다시 앞에 곧 온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참고] 『선문염송 · 염송설화』 (혜심 · 각운 지음 | 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1권 3칙 ‘오도(悟道)’
<염송설화(拈頌說話)> 大慧云 釋迦老子正覺山前 從定而起 因見明星忽然悟道 信知時節若至 其理自彰 但記悟道時節因緣而已 則世尊悟處 不在明星上 香嚴悟處 不在擊竹邊

대혜가 이르기를 “석가 노자께서 정각산 앞에서 선정에서 일어나 샛별을 보시는 순간 홀연히 도를 깨달으셨으니, 이는 시절이 이르면 그 이치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인데, 다만 도를 깨달은 시절과 인연을 기록했을 뿐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세존의 깨달음은 샛별에 있지 않고 향엄의 깨달음은 대나무를 때리는 데 있지 않다.

 

(4분 31초)


[법문] 전강선사(No.349)—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 1 (계축73.12.21) (전349)

긍께 우리가 이 몸뚱이, 신령으로 이 몸뚱이 잃어버리면은 혼이 되어 가지고는, 그 혼백이 뭐 안 들어갈라고 하는 데 없어. 그거 기가 맥히게 붙어번져. 그러니 실무(實無)지. 아무 실무가 없지. 그거 소용 있어? 이 몸뚱이를 얻어야사 이 몸뚱이를 가져야사—이 몸뚱이 가지고도 그저 망상은 도무지 뭐 분(粉) 싸라기 흩은 것처럼 일어나지마는, 그래도 이 몸 가져야사 화두(話頭)를 도(道)를 닦는다 그 말이여. 이 몸뚱이 없으면 도를 못 닦아.
그러니 이 몸뚱이를 잊어버려 되야? 될 수 있으면은 잊지 않고 도를 닦아야지. 어쨌든지 이 몸뚱이가 병이 나거들란 약도 잘해 먹고 그저 잘 조심해서 몸을 가져 가지고는 도를 닦어야지.

도 닦지 않은 몸뚱이야 그까짓 놈의 거 소용없지, 죄만 짓는 놈의 몸뚱이니까. 이놈의 몸뚱이 가지고는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모도 죄요, 거족동념(擧足動念)이 모도 죄요, 마음만 내도 죄요, 발만 들어도 죄업이요, 죄만 퍼짓는 놈의 몸뚱이거든. 도(道)가 있어야사 인자 참, 도(道)를 닦어야사 그 소중한 몸뚱이요, 참으로 이 귀중한 몸, 이 몸 가지고 도를 닦으니까.

헌디 이 몸이 사(死)가 앞에 있으니, 이 몸이 시방 사형선고를 받고 있으니, 오늘 죽을는지 내일 죽을는지 모르는 무서운 사형선고다. 죄인에 살인 강도를 하고 죄인의 사형은 아무 날 죽인다고 사형헌다고 기한이나 있건마는, 우리의 몸뚱이 사형이라는 것은 기한도 없다. 오늘이냐? 이 시간이냐? 이 뒷 시간인가? 어느 시간이고? 도무지 수유(須臾)를 뭐 앞으로 수유를 머무를 수가 없어. 잠깐 동안인들 안심할 수가 없어.

언제 죽을는지 알 수 없으니 생사이자(生死二字)를 가져라. 나왔다마는 살았다마는 죽을 것을 생각해라. 곧 사자(死字)가 앞에 있다. 금방 죽은 사람만 보고 그 사람은 금방 죽었다마는 나는 안 죽었으니까 오래 살까 싶지? 소용없어. 그 사람이나 내나 똑같어.
생사이자(生死二字)를 가져라. 정재액상(釘在額上)해라. 그 생사이자(生死二字)를 보통 가지지 말고 이 눈 사이에다 눈썹 사이에다 딱! 찍어 두어라, 도장 박듯기. 딱! 찍어라. 그 곧 죽는다.

열두 때 가운데 열전면피(裂轉面皮)해라. 열두 때 가운데 낯 껍데기를 펴지 말어라. '어째서 판치생모락 했는고?' 허면 이거 자연 낯 껍데기가 찡그러지지? 그놈을 생각하니까.
어째 그렇게 힘써서 하라는 건 아니여. '어째 판치생모락 했는고?' 이렇게 성의껏 정성껏 해라.

토개분효(討箇分曉)하야사 시득(始得)다. 확철대오해사 옳다. 공안이란 깨달은... 깨닫지 않은 게 아니다. 확철대오가 있어야 한다, 확철대오가 있어야 하니 분효(分曉)하야사 시득(始得)다. 깨달라야 옳다.
깨닫지 못하고 거가 물고만(묻고만) 있으면 뭐 할 거냐? 천년만년 그만 판치생모만 허고 말 것인가? 확철대오가 있어야 하지. 분명히 허고, 참다이 허고, 철저히 헐 것 같으면은 깨달은 각(覺)이 반다시 앞에 곧 온다(21분7초~25분3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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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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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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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ㄱ/깨달음2021. 10. 26. 10:34

깨달음(전강선사 No.005)—전강선사 곡성 동리산 대오 | 추천원 스님의 태안사(泰安寺) 동리산(桐裏山) 호랑이 이야기 | 전강선사 오도송(悟道頌).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참고] 『선문염송 · 염송설화』 (혜심 · 각운 지음 | 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1권 3칙 ‘오도(悟道)’
<염송설화(拈頌說話)> 大慧云 釋迦老子正覺山前 從定而起 因見明星忽然悟道 信知時節若至 其理自彰 但記悟道時節因緣而已 則世尊悟處 不在明星上 香嚴悟處 不在擊竹邊

대혜가 이르기를 “석가 노자께서 정각산 앞에서 선정에서 일어나 샛별을 보시는 순간 홀연히 도를 깨달으셨으니, 이는 시절이 이르면 그 이치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인데, 다만 도를 깨달은 시절과 인연을 기록했을 뿐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세존의 깨달음은 샛별에 있지 않고 향엄의 깨달음은 대나무를 때리는 데 있지 않다.

 

 

(1/3) 15분 6초.

 

(2/3) 15분 3초.

 

(3/3) 13분 47초.

 


[법문] 전강선사(No.005)—전강선사 일대기 제2호(경술1970년 11월 21일.음) (전005)

(1/3)----------------

금강산에 계시는 추천원 스님이, 추천원 스님이 곡성 동리산(桐裏山)에서 여름 산림을 허고는 해제 후에 곡성 그 태안사(泰安寺) 뒷산을 넘어오는데 산말랭이를 척 넘어오니까, 그 산말랭이가 별로 높지도 않거든. 넘어오니깐 큰 대호(大虎)란 놈이—비린내가 산에 올라오니 왈칵 난다 그 말이여.

또 오늘 아침 법문도 또 그저 이렇게 상하(上下)도 없고 아무때나 또 나온 대로 헌다 그 말이여. 뭣을 생각해 놨자 법문이 생각헌 대로 안 나와. 늙은 연고인지 웬 연고인지 이렇게 잘 나오들 않으니깐 나온 대로 허는 거여.

재를 넘어오니깐 비린내가 왈칵 나. 아이고, 웬 냄새가 이렇게 나는고 싶어서 아! 이래 사방을 살펴보니까 호랭이란 놈이 큰 황소만헌 놈이 누워서 자빠져 자.
아, 저런 큰 놈이 어째 저렇게 누워 자빠져 자는고 싶어서 그 옆에를 가만히 보니까 사람을 하나 잡아 다가서 다 먹어 버리고 머리빡하고, 손허고 다리허고 사족(四足)만 냉겨 놓고는, 머리허고 그것만 냉겨 놓고는 다 먹어 버리고는 똥창사 냉겨 놓고는 그 잔다 그 말이여.

그래 가만히 그걸 보니 참 무서운 것도 없고—추천원 스님이라고 도를 여간 닦은 이고 몸이 그렇게 큰 어른이고, 대단히 보통 담대허도 않고.
설사 도를 닦아서 어떠헌 무외(無畏), 무포외(無怖畏) 지경에 갔닥 하드래도, 포외(怖畏) 없는 지경에 갔닥 하드래도 그런 걸 보면은 포외심이 나고 안되는 것이제.
허지마는 그 어른은 무슨 뭐 대오, 확철대오해서 무외를 증(證)하도 못한 이지마는 그만큼 담대하고, 그까짓 그런 것을 보기를 뭐 그저 보통으로 보고 이런 인데.

아! 가서 그걸 보니 그 시체가 처녀여. 하도 얼굴은 깨끗하게 예쁜 처녀인디 머리채를 정연히 딴 머리채 그대로 있고, 손도 깨끗허니 해 가지고 발도 깨끗허니 딱 두고는 이놈이 먹었다 그 말이여.
아, 그것을 보니 어떻게 그만 괘씸허고, 그놈을 그냥 그 당장에서 뭣이라도 있으면 때려 모가지를 찔러 패서 죽여 버리고 싶다 그 말이여. 저런 악한 놈이 저런 짓을 했으니.
그러지마는 뭐 손에 쥔 것도 없지마는, 그런 큰 대호(大虎) 무지한 놈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그놈한테 상헐 것이고.

멀찌맥이 나와서 서서, 높은 데 서서—호랭이는 저 높은 디를 무서워 혀. 저보다 높은 걸 무서워하기 따문에 의심이 많은 놈이기 따문에 골짜구로 안 댕기고, 언제든지 봉대기로 이렇게 산봉대기로 댕기는 것인디.
역부러 그놈 벌써 호랭이 그 심리를 미리 아신 어른이고, 높은 바위 위에 올라서서 작대기 이런 놈을 하나 짚고는 서서 “너 이놈! 고약한 놈 같은 이놈! 요놈 저런 놈을 산신님이 그냥 둔단 말이냐고 저놈을 당장 죽여 달라”고 아, 고함을 냅다 친게.
아, 이놈이 대가리를 툭 털고 들고 보더니, 쳐다보더니 벌떡 일어나더니 착 보고 가더니 쳐다보고는 ‘아함!’ 그러고 입을 딱 벌림서 고함을 지름서 ‘아함!’ 그러거든.

“저놈이 어디서 저런 놈을 저놈을 당장” 고함을 지른게, 눈을 이리 슬므시 감더니 그냥 고개는 들고는 산으로 올라간단 말이여. 이래 돌아보면서 눈을 조끔도 다른 데 팔지 않고 이리 돌아보며 쓱 올라가거든.
아, 그만 기를 안 애끼고 서서 “저놈이 어디로 갈까보냐”고 호령을 헌게 아, 그놈이 산으로 올라 얼마 올라가더니 산봉대기에서 휘딱 자취를 감춰. 간데없어.

그래 거그서 얼마 내려와서 마을집에 가서—응, 거그서 그 당신의 속옷을 이리저리 모두 벗어서 웃옷을 벗어서 그 머리를 두골을 싸고, 수족을 이래 다 손은 손대로 인자 위에다 가운데 놓고, 발은 제일 밑에다 놓고. 그리고 창자는 그만 그 자리에다가 어떻게 해서 끌어 묻고는.

거두어 가지고는, 잘 싸 가지고 흔적없이 싸 가지고는 한참 그 재를 내려와서 재 밑에 와서 그 조그만한 토굴에, 저 촌사람 그 집, 산촌 산가(山家)에 들어가서 “내가 잠깐 쓸 일이 있으니 그 괭이 좀 빌려 주시겄오” 그런게,
“뭣 하실라고 그리 가시다가 노장님이 그걸 괭이를 달락 하느냐”
“예 나 잠깐 쓸 일이 있으니 좀 빌려주십시오. 내가 몰리 가져가지 않을 것이고, 내 보퉁이 여기 좀 두고 봐 주십시오. 내가 산에 뭐 좀 캘 일이 있어서 약(藥) 하나 캘라고 그럽니다”

“그렇게 하시라”고 빌려주어서 한참 올라가서 파기 좋은 데를 파서, 한 자쯤 두어 자쯤 파고는 그대로 잘 묻어서 꽉꽉 밟아서 그래 묻어 주고는 혼백을 초혼(招魂)을 불러서, “아무쪼록 그저 이고득락(離苦得樂)하라”고 “그 못된 놈한테 과보 당한 줄 알라”고 그러고서는 내려왔다고, 금강산 지장암서 우리가 여름에 지내는디 거글 와서 같이 지낼 때 그런 얘기를 해서 들었습니다.

그 천원 스님이라고 허는 분은 거짓말도 헐 줄 모르고 뭐 그대로...
그 거짓말이나 잘헌 사람 같으면은 그 말을 누가 곧이 듣겄오마는 그대로 참된 이이기 따문에 대중이 다 옳게 들었제.


내가 그 재를 넘어가는 산밑에서, 고 재를 지금 넘어가는 산밑에 노지(징검다리)가 이렇게 있어. 그 다리를 이렇게 건네. 내가 여까장 했제, 엊저녁에.

내가 두 철을 그렇게 공부를 허고.
두 철 공부라는 거, 세상에 제 공부 잘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그거 누가 인격적으로 들을 것인가. 발써 그 인격부텀 박멸헐 터이지마는 허거나 말거나 나는 그대로 말한다 그 말이여. 틀림없어.

옳게 들으면 옳게 듣고, 자기 자랑헌다고 안 들으면 안 들을 터이제, 내가 거기에 무서워서 무슨 뭐 못혀.
내가 어제 아침 법문할 때 뭐라고 했냐 그 말이여. 내 어릴 때부텀 벌써 서모 밑에서 배운 기술이 도둑질이라고 안 했어. 도둑질을 잘했으니 ‘했다’ 하제, 어떡헐 거냐 이말이여.

일곱 살 먹어서 서모 밑에 있어서 그 도둑질, 는 것이 도둑질. 그 도둑질이 무슨 내가 그렇게 넘의 쌀궤 가서 내오고 돈 내온 거 아니라, 서모 밑에서 아! 어찌 살다가 보니 그대로 그 주는 음식만 먹어도 될 턴디 어짠지 그 음식같은 것을 어따 두면은 그만 기어이 돌라먹어, 요런 거.
쌀같은 것도 다 내먹어, 요런 짓. 콩같은 것도 내가 다 구워 먹어, 요런 짓. 그래 놓고는 뒤지게 뚜드려 맞아. 안 먹을락 해도 버릇이 그리 된다 그 말이여, 그 이상햐. 그런 짓 했다 그 말이제.

아, 뭐 그렇게 천하게 커 나왔다는 거, 그것 무슨 뭐 그 무슨 감출 것이 또 뭐 있나? 그러헌 것도 내가 다 그대로 말을 했는데, 내 잘난 것을 말 안 해? 잘난 것은 더 말하고, 잘한 것은 내가 더 말하지. 안 할 게 뭐 있냐.

척 나와서 첫 철 공부를 그렇게... 내가 말했지.
그 다음에, 첫 철 공부에 그렇게 했는데 왜 그러헌 못된 병, 뱃속에서 막 그러헌 뭐 있는 대로 피가 다 넘어오게 공부를 했냐 그 말이여.

왜 내가 그때에 좀 지혜가 있었으면 그러리요마는 대번 처음 나와서 그저 그만 화두(話頭)를 허되 힘써서 허면 된 줄만 알았거든.
그만 억지로 그만 창자가 기어오르게 막 ‘어째서 무(無)’ 라고 들입대 해놓으니 육단심(肉團心)이 안 동(動)할 수가 있어야지, 생전 안 허든 놈의 공부를 갖다가 그렇게 해 놓으니까.
하나도 힘 안 들고 요만큼도 육단이 동치 않게, 피같은 거 뭐 이런 거 넘어오지 않게 그 참 잘헐 수 있는 그러헌 도 닦는 데 그러헌 묘방(妙方)이 있고, 그것을 몰랐드라 그 말이여.

아, 그 큰스님을 그때 믿고, 그 큰스님 시킨 대로만 했으면은 다시 일이 없을 터인디, 그 큰스님 제산 큰스님이 그 시킨 대로 내가 안 했다 그 말이여. 왜 그때 그 20살, 한 20살 먹은 것이 나와서 왜 그 조실 스님을 안 믿었든고.

믿을 수가 없어. 왜 믿을 수가 없나?
들어보면 알아. 암만 처음 나온 사람이라도 가르킨 것 들어보면 안다 그 말이여. 그것을 몰라?
발써 그 경중(經中) 가운데, 그 모두 그 몽산 스님의 가르키는 화두법 가운데, 「간화결의(看話決疑)」 같은 것 가운데, 그런 것 내 그때 다 보지 않았지마는 다 듣고도 알 수 있었는디.

그러면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니라. 크게 의심(疑心)헌 데서 깨달으니라. 불의언구(不疑言句)가 시위대병(是爲大病)이니라. 언구 의심 않는 것이 큰 병이니라.
그저 참선은 큰 대의지하에 큰 대오가 있다. 의심을 허라고 했지. 의심밖에는 다 못 쓰느니라.

의심 밖에 거 무슨 무중무(無中無)를 본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를 본다든지, 허무유견(虛無有見)을 본다든지, 그건 다 아무리 광명장(光明藏)을 들여다보고 아무리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을 들여다봐도 그것은 다 묵조사선(默照邪禪)이니라. 죽은 참선이니라. 묵조(默照), 묵묵히 비추는 죽은 참선이니라. 다 모도 말 안 해 놨어?

그런디 큰스님께서 화두를 가르키시되 “천지미분전을 보아라”
벌써 틀렸거든. 그 화두를 믿을 수가 있나.

허니,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다. 큰 의심 아래 깨달느니라’ 했으니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을 일으키다 보니, 척! 이놈 일으키기만 일으키제, 거기에 참 묘법(妙法)이 있는 줄을, 화두에 묘관(妙觀)이 있는 줄을 몰랐다 그 말이여. 첫 철에 나와서.

그러면 그 스님 말씀은 믿지 않고 들입대 ‘어째 무라고 했노’ 이놈만 어떻게 힘을 써 했든지 그냥 기운이 막 드리 올라와 가지고는 그 코로 입으로 피를 그리 쏟았던 것이여.
그래도 그 철에 그렇게 애를 쓰되 뭐 보통 내가 다 어제 아침 말을 했으니 더헐 것 없지.(11분58초~27분4초)





(2/3)----------------

새로 오신 법안성 보살님이 계시니 어제 아침에 했던 것을 다시 했으면 허련만 여기 다 갖춰져 있고, 본래 또 내가 말을 다 들어 알 수 없고.
법안성 어저께 말씀이 “내가 여러 간디 그 교(敎)에도 모도 들어가 봤고, 또 중간에 내가 그 어느 또 불교라도 들어가 봤고, 그런 데가 다 가르킨 디 가서 내가 들어서 다 알았습니다. 대번에 보니 모도 가르키는디 벌써 말 한마디 한마디 들어보면은 어떤 것이 사(邪)다 정(正)이다 하는 것이 분간이 나드라”고.
그러기 따문에 그렇게 분간헐 줄 알기 따문에 정법문중(正法門中)으로 바로 들어온 것이란 말씀이 틀림없거든.

내가 그 말을 들었어. 용하다 그 말씀이여. 그것이 아니면 들어온 법 없제. 그게 참말로 정견(正見) 학자거든.

그 정견 학자가 이 다음에 그 참, 혹 또 세상에 입태(入胎)에 가서 매(昧)하지 않지마는, 주태(住胎)에 가 매해 가지고 또 출태(出胎)에 가서 매하는 수가 있어. 매(昧)해, 출태에 정법학자가.
출태에 가 매하드래도 더 후래(後來)에 몸을 받아 척 나와서 대번에 벌써 아무리 제견 외도(外道)에, 사견(邪見) 외도에 가서 외도법을 가서 어떻게 배워 보고 다 알고 다시 정견으로 확 들어오는 것이여.

우리 부처님 역시 사바세계 시현(示現)으로 나오셨지마는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그 외도를 만나 가지고 벌써 들어보니 알았거든. 틀림없지. 그걸 정견 학자라고 해.

아! 또 다시 말이여. 또 다시 왜 이런 말을 안 해. 왜 이런 말을 안 헐까 보냔 말이여. 왜 감출 것이냔 말이여.
부처님 그 경전 가운데 들어와 ‘어떤 그렇게 상(相)을 내지 말어라. 보시상을 내지 말어라. 네가 보시를 했닥 하드래도 보시상이 있으면은 보시가 아니니라’ 왼갖 말씀 금강경에 다 해 놨지마는 또 보시상을 나툰 디는 또 굉장하네.

‘유기철물(鍮器鐵物)은 신견고(身堅固)요’ 왜 그런 소리를 혀.
‘불양헌답(佛糧獻畓)은 복무변(福無邊)이요. 논을 드리고 밭을 드린 건 복이 한량이 없느니라’ 얼마나 말씀을 했어.
‘창호도배(窓戶塗褙)는 면팔난(免八難)이니라’ 왼통 이렇게 다 나투어 놓고 또 그런 말씀을 했지.

보살님이 이번에 참—이것 뭐 당최, 나 일절 내가 무슨 뭐 ‘얼마 했느니 말았느니 뭘 했느니’ 내 안 했어. 헌 법 없었어, 내 입으로. 허다가 어쩌다가 은근히 그저 알았지만.

이 참 이 처음 시작할 때, 이 집이 이거 시작헐 때 기가 맥힌 집입니다.
내가 여기에 평생에 이렇게 자무반전푼(自無半錢分)으로, 내 돈 한푼 없이 입을 달고 돌아댕기는 나로써서 아, 여기에 와서 어떻게 어떻게 허다가서 아, 여기 무슨 잠깐 잠연이 있어서 있다가 어쩌다가 이 법당 하나를 지을락 할 때. 아! 이 어떻게 짓냔 말여.

보살님한테 말을 했더니 대번에 그 어떻게 해 주어서 그만 그놈을 가지고 시작해 가지고 이 집을 지었는데, 지어 놓고 나니 이 산꼭대기에 물이 있나. 또 물을 말했드니 모두 수도를 이렇게 어떻게 척 나오게 해 주셨어. 그 인연이 적지 않지.
그다음에는 이놈 땅이 넘의 땅이니 이걸 어찌해야 할까 보냐고 떡 했드니 또 그 땅 사게 되았제. 이런 시은(施恩)이 깊다.

그다음에는, 이번에는 이거 이래 놨겄당 어떻게 어떻게 허든지 이것을 재단법인(財團法人)을 좀 만들었으면 쓰겄는디, 원 재원(財源)이 그 모지라서 이걸 가지고 이사(理事)를 꾸밀 수가 없어.
어쩌고 어쩌고 했더니 아, 그 보살님께서 그 뭣이 있나? 아무것도 별것 없지마는 아, 그 무슨 토지를 좀 근근히 좀 장만해 놓은 것을 여가 작고 많은 건 불고허고 그 재단법인에다 붙여서 재단이 되도록 해 가지고,
“적어도 이 말세일수록에 우리 부처님의 정법이 유통되어야 할 터이니 내의 이 몸뚱이는 잠깐 그저 머물다 갈 몸뚱이뿐이여. 어쨌든지 그런 한 몸뚱이 재원이라도 뭘 재단을 만들어서 정법을 유통허도록 허는 것이 참 좋겠습니다”고, 아, 이렇게 저렇게 원력(願力)을 발해 가지고서는 아 그 인자 뭐 재단법인이 되도록 이렇게 떡 해놨겄다.

그런디 허나 못 허나 여기 댕김서 불명(佛名)도 받고, 불명도 지었다는 신도가 말허기를 “왜 그런 허망한 짓을 헐까 보냐”고. “왜 그렇게 애써 헌 그런 토지를 부자도 아니고 왜 거그다가 그리 다 드릴까 보냐”고. 아, 내가 그랬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어.
그러헌 디 속지 않고, 그러헌 말에 넘어가시지 않고 더욱 더 “거 아직 그 불법(佛法)을 모르는구나. 정법을 못 믿는구나” 오히려 개탄을 했다고, 그런 사람의 그 정신을 개탄을 했다고.
아, 내가 이 말씀을 듣고 참 느꼈소. 그래서 여까장 말허는 거요.

그 얼마나 호사(好事)에 다마(多魔)요. 내 할 일을 내가 했느냔 말이다.
그 내 할 일이 어떠헌 일이여?

죽백천추(竹帛千秋)에, 그래도 자 이만큼 그래도 시작해 주셨는디 여가 똑 선방이 되아서 다맛 그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20명이고 30명이고—대본산, 큰 재원이 뭉텅 있는 데도 학자 몇 데리고 지내도 못하고 빚이 있느니 뭣 허니 야단치지마는, 자 여기에 그저 몇십 명씩 와서 턱 이래 공부를 허고 계시고, 또 보살님도 이렇게 와서 떡 와서 이래 다 공부허시고, 보살님네 당신네 양식 잡순다 하지마는 아, 그 당신네 양식을 잡수드래도 이런 처소가 없으면 되아?

이렇게 불학(佛學)을 배우는 생사해탈법을 배우는 이 정법, 이 법보선원 그 어떻게 죽백천추에 이러헌 선원을 참 창건허리요. 창건해서 유통허겠냐 그 말이여. 그것을 가만히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그 보통 누가 날 것인가마는 말이제.

참으로 ‘호향차시(好向此時)하야 명자기(明自己)다. 좋다, 이때를 향해서 너를 깨달라라’ 이런 말씀도 있지마는, ‘호향차시(好向此時)하야 명작복(明作福)하라’ 이러헌 때를 당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그러헌 무루(無漏) 해탈복을 지을 수가 없다.
이거 그것 저것 조금이라도 어떻게 이렇게 안 해 준다면은 이걸 꾸며낼 수가 없고 이걸 전통헐 수가 없고, 못하거든.

여까장 어쩌다 보니 말이 나오게 되았습니다. 왔다갔다 아무때나 한다니까. 내 법문이 그렇다 그 말씀이여. 시(始)도 없고 종(終)도 없고 무시무종(無始無終).

우리 부처님은 그렇게 안 설했나? 우리 부처님의 『화엄경(華嚴經)』이 그렇게 설한 경이여.
그런데 그 경이, 화엄경이 우리 부처님 경은 그만 그대로여. 무시(無始)요, 무종(無終)이요,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거든. ‘가는[微] 티끌[塵] 수(數) 품’ 그대로 한 품도 설하지 않고 품수(品數) 그대로 딱 되겄다.

화엄경에다가 내가 내 법문을 대해서, 또 좀, 그 좀, 대단히 좀, 그 미안하요. 인격상 좀 불안하요. 허지마는 그대로 내가 설헐 수 밖에 없제.

내가 첫 철을 그렇게 한바탕 공부를 하고, 그다음 두 철에 와서 죽게 된 몸뚱이 불구허고 떡 공부를 허다가, 인자 거그 와서는 다시 인자 큰스님한테 의심난 고 화두허는 법, 의심을 다루어 나가는, 의심을 거각(擧却)해 나가는 화두를 잘 간택해 가지고 큰스님을 믿고 공부를 턱 해 나가는데.

죽거나 살거나 불구허고 그렇게 해 나가다가, 중간의 ‘견성했다’고 한번 들어가서 하! 해놓고는 그렇게 대방(大棒)을 맞고 해제를 마치고 떠나 가지고는. 산철이제, 인자 두 철 만에 산철.
죽게 되았거나 걸음도 못 걷고 그만 그 뭐 파리가 날라가도 자빠지게 됐지마는 원청 강한 신심이 백혀 있으니깐 그거 상관없드구만.

호서(湖西)를 내려가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서 저녁밥 얻어먹고, 하룻밤 자고 아침 얻어먹고 그러고 척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濶) 허고 척 나가다가, 아까 그 곡성 동리, 곡성 태안사 너머로 호랭이 사람 잡아먹은 산밑에를, 그 재를 넘어갈라고 산밑에를 가는디 물 건너는 노지(징검다리)가 있다.

그 노지를 척 아! 건네 한 발 뛰고 두 번 건네뛸라고 허는데.

자지 마시오, 자지 말어. 응, 법문 들을 때 왜 자요? 법문 들을 때 자러 왔어? 법문 들으러 왔지.

한 발때죽 뛰고 또 발때를 건너뛸라고 헐 때인디, 화두는 내 화두는 허면서도—가면서 왜 화두를 안 혀. 앉었을 때만 화두를 허고, 누울 때는 화두 못허고 그러는가? 밥 먹을 때는 화두 내버리고 먹고, 왜 똥 눌 때 화두를 내버리고 똥 누어? 이거 무슨 소리여. 화두 좀 해보란 말이여.

화두 허다, 좌선허다가 척 누워서 화두를 추켜들고 누워 봐. 그대로 화두가 온당허게 자리가 잽혀 가지고는 그거 뭐 알 수 없는 놈만 딱! 나온다. 바로 누우나 옆으로 누우나 화두는 고대로. 잠을 딱 자고 뚝! 깨봐. 잠은 자기는 잤는데 화두는 고대로 나온다.

이것 무슨 소리들이여. 화두를 그 허다 말다가, 조끔 허다가 말다가, 조끔 있다가 없고 말허다가도 없고 쫓아댕기다 없고, 똥 쌀 때는 그대로 싸고 이래 가지고는 10년 20년 미륵하생(彌勒下生)까장 해 봐라. 틀림이 있는가. 소용없는 거여.

두 발때죽을 턱 내딛으면서 처꺽 그 ‘운무중(雲霧中)에 소를 잃었으니 어떻게 해야 소를 찾겠느냐?’
‘구름 벗어지면 소 찾지’ 대방(大棒)을 내루아 버리고는 그 학자한테 '나한테 물어라'

‘운무중에 소를 잃었으니 어떻게 해 소 찾겄습니까?’
‘담 너머에 가서 외 따 오니라’
아, 그 법문이 그만 화두를 해 나가다가 훅 들어오면서 툭!

내가 그래서 법문에 언하대오(言下大悟)라고 논 것이 그거여. 그 언하(言下)에 그만 대오(大悟)를 했네. 내가 대오를 했다 그 말이여. 주제 넘게 헌 말이여 이것이. 참말로 대오인지 아닌지 알 택이 있나 말이여. 나는 대오(大悟)했으니께.

척! ‘차시(此時)에 유인(有人)이 문아서래의(問我西來意)하면, 이때에 어떤 사람이 나한테 서래의(西來意)를 묻거드면은 녹수(綠水)는 각하(脚下)에 암전거(岩前去)로구나. 흐르는 물은 내 다리 밑에, 내 발 아래에 흐르는 물은 다리 앞으로 가는구나’ 이 말 한마디 턱 일러 놓고는 곡성 그 재를 넘어갔네.

어떻게 넘어간지 모르고, 호랭이가 물어 간 재인지 뭔 이건 모르는 소리고, 내가 그 재를 지금 넘어갔기 따문에 고 얘기를 하나 해놓은 것이여. 뭐 소설도 그렇게 다 현대소설 「해왕성」 같은 거 보란 말이여. 다 그렇게 안 나왔는가.(27분5초~42분8초)





(3/3)----------------

그 재를 넘어서 태안사를 척 들어갔다. 그때 가서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놨는디 내 오도송 좀 들어봐. 오도송, 밤낮 해 논 놈, 저 내 방에 써 걸어 놨으니 다 알지, 뭐 모를 건 없으되 그놈을 내가 좀 고쳐서 지금은 해 놨지.
자칭 내가 지금 내 오도송이라 한다. 어째 오도송, 나는 도통(道通)을 했으니 오도송이지. 남이야 비웃거나 말거나 나 혼자만 견성했지, 인자 잉. 그렇게 들어 두란 말이여. 그때 처음이니까.
그래도 내가 아직 오도송, 그때 고친 놈 그 글자만 몇 떼 버렸지 그대로여.

그날 밤이여. 그 재를 넘어가서 그날 밤에 태안사를 들어가서 뜰 앞에 떡 그 앞에 누(樓)가 있고, 뜰 앞에 거닐면서 이놈을 진 것이다 그 말이여.
내가 무슨 놈의 글을 질 줄 아나. 내가 뭔 글을 얼마나 배우다가 나왔는디, 무슨 놈의 글.

일곱 살 먹어서 우리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울 아버지 계실 때에는 나도 참 참말로 그런 귀동자가 없었대. 우리 어머니가 나 첫아들 낳아 가지고, 늦게 낳는데 얼마나 그만 사랑하고 예삐 키웠든지 소문이 들썩 나버렸어.
허지마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서모 하나 들어오신 바람에 우리 서모 밑에서 그런 천둥이는 당최 만고(萬古) 천둥이는 없었다 그 말이여. 그래 그 어릴 때 그때, 그 뭐 하늘 천, 따 지, 감을 현, 누르 황, 뭐 배운 것은 그때 배웠지마는 서모 들어오면서부텀은 다시 글 한 자 뭐 배워 보지도 못했고는 서모 밑에서 어떻게 나는—서모가 그 뭐 참 괜찮다고 하지마는 그렇게 못되어지데, 사람이.

그러고 나와서는 또 뭐, 그 내가 아까 그러지 않어? 글도 얼마든지 절에 들어와 배울 턴디, 그 같은 친구 동무 아이 하나 미쳐 죽어서 화장해 버린 뒤에 그것 다 태워가지고 연기는 빙 돌아 떠버리고, 그 응해 스님 글 하나 한 귀(句)에 그만 발심(發心)이 되아버렸어.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라. 뭐 참선을 헐라매 머리터럭 희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호리신분개소년(蒿裡新墳皆少年)이다. 쑥대 속에 새 무덤이가 소년 무덤이다.
인신일실기시환(人身一失幾時還)이며, 사람의 몸뚱이 한번 잃으면 어느 때 돌아오며,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가. 지옥 때가 기니 어찌 등한히 노느냐. 지옥 한번 들어가면 때가 길다. 못 나온다. 어찌 등한히 노느냐. 하는 송구(頌句)에 그만 발심이 되아 가지고는 어릴 때, 통 글이란 건 읽을 수가 없어. 그까짓 놈의 글 배우다 죽어 버리면 뭣이냐.

또 사람이 수명 수한(壽限)이, 죽는 한(限)이 그놈이 때가 정해져 있으면은 어느 때까장 글 배우고 그 다음에는 참선허겄다마는, 20년을 산다 하면 10년 글 배우고 10년은 공부하겄다마는 조석(朝夕)에 생명을 잃어버릴 수가 있고,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쉴 때에 잃어버릴 수가 있는데 어떻게 내가 그 글을 읽고 있어. 허송(虛送), 그놈의 글 읽는다고 허송을 헐 수가 있어?
망후(亡後)를 혀. '내일 헌다, 모래 헌다' 후(後)를 기달라. 어찌 후기(後期)를 내가 만들아.

당최 못하겠어. 그래 버렸는디 뭐 소용이 있나. 뭔 놈의 그래 글 하나 못 배와 못 읽었어. 조끔 그 읽는다고 읽었자 뭐 그것 무슨 뭐, 그때 나올 때 놀이 글자 좀 알고, 한 글자 새길 수도 없어. 몰라. 그런 것이 무슨 놈의 글을 질 것인가 말이여.

허지마는 척! 가서 글이 한 수(首)가 나오는디 그 멋지게 나온다 그 말이여. 글이라는 것은 염(簾)도 보고 운(韻)도 맞추고 다 이렇게 지은 것이지마는, 염(簾)이야 운(韻)이야 그런 걸 내가 해 보지 않았는데 그건 상당한 글이 있어야 하지, 어떻게 알 것인가.
허지마는 이 글이 염도 좀 맞았네, 염도. 들어 봐. 글이 원청 될 것 같으면 염도 운도 맞는데야. 12염에는 다 안 맞는다는구만. 12번 그 염 보는 데는.

그날 다리를 건너뛰다가 인자 그 견성했다고 그날 밤에 태안사 청중에 거닐다가 떠억 허니 하나 지은 것이여.


작야삼경월만루(昨夜三更月滿樓)허고  고가창외노화추(古家窓外蘆花秋)니라
나무~아미타불~

작야삼경월만루(昨夜三更月滿樓)다. 어젯밤 삼경(三更) 달은 이 다락에 가득했구나. 내나 그 앞에다 어젯밤 삼경 달 이 다락에 가득했구나.
고가창외(古家窓外)에는 노화추(蘆花秋)로구나. 저 밑에 저 옛 고가(古家) 창밖에는 갈대꽃 가을이로구나. 갈대꽃이 모도 피어서 일렁일렁해. 대(對)도 맞았네. 명월과 갈대꽃 대도 맞았어.

벌로 듣지 말어. 무식한 내가 글 진 걸 봐! 견성했는가, 안 했는가 보라 그 말이여.
고렇게 첫 귀는 빠졌다.

어젯밤 삼경 달은 다락에 가득했는데 옛집 창밖에는 갈대꽃 가을이니라.
이것은 최초구(最初句)니, 말후구(末後句)니 붙이들 말고 봐라. 거다가 최초구니 말후구니 여하약하(如何若何)오. 강사들 모도 있은게 응, 강사 지견(知見)을 붙여보라 말이여.

고 밑의 구(句)여.


불조(佛祖)가 도차상신명(到此喪身命)이다  암하유수과교래(岩下流水過橋來)니라
나무~아미타불~

그 후구(後句)여. 불조(佛祖)가 도차상신명(到此喪身命)이니라. 부처님도 불조도 여기 이르러서 상신실명(喪身失命) 했느니라. 암하유수과교래(岩下流水過橋來)니라. 바위 아래 흐르는 물은 다리로 지내오는구나.
그게 이제 뭣이여. 거다 오도송을 거다가 붙이는 것이 방(棒) 짊어지고 했지마는, 삼세제불이 누가 방 짊어지지 않고 어디 법담(法談)허는 수가 있나?

그렇게 척 나 혼자 했다. 설향수(說向誰)오. 누구로 더불어서 말을 헐 것인고? 누구, 산이나 더불어 말할까? 뭐 청풍명월(淸風明月)로 대해서 말할까? 할 사람 누가 있나.
독보건곤(獨步乾坤)이제. 수반아(誰伴我)오. 홀로 나 혼자 한번 한 것이지, 누가 그 곁에 뭔 사람이 있나.


척 들어와서 그날 밤을 거그서 어떻게 좋은가 어쩐가, 당최 그 경계는 말할 것 없다. 절을 해도 그 경계. 그 경계는 뭐라고 내가 말해 놓지 못하고 혀. 밥을 먹어도 그 경계, 산을 봐도 그 경계, 어디 절을 해도 그 경계. 절을 해도 절헐 것도 없네. 아, 이것 봐.

날이 겨우 샜는데 아, 이놈의 대중은 인자 겨우 감원(監院)이 일어나서 일찍 일어나서 인자 뭐 갔다왔다 정중(庭中)에 허는데, 그까짓 감원이 있든지 말든지 지랄하든지 아, 그냥 뜰 앞에, 그 정중에 그만 뜰 앞에 오줌간도 아니고 거다가 오줌을 그냥 철철철철 누어 버린다. 내가. 아 이런 꼴 좀 봐라.

“아, 저런 세상에 어디서 저런 미친놈이 와서 저런 법당 뜰에다 갖다 오줌을 싸. 저런 놈이 있어?”
내가 그만 “야, 이놈의 중아. 거 오줌 눌 데를 하나 가르켜 내라.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요. 전체가 모도 불체(佛體)인디, 모도 부처님 몸뚱이 불체인디 어느 곳에다 오줌을 누란 말이냐? 말해!” 아, 이러고 대든게,

“아, 이놈의 중, 수좌놈들이라니 이런 건방져 저놈들 보소”
“아따 저런 것이 중놈으로서 저게 주인인가. 에이 녀석”
아, 그 싸워 노니까 밥도 못 얻어먹었네. 밥이나 얻어먹을 걸. 아, 이런 꼴 좀 보소. 밥을 못 얻어먹어.
인자 그때부터 나는 미쳐 버렸지. 내가 미친 사람이지, 산 사람 아니여.

그런 놈의 그런 경계가 있으니, 사람이 왜 좋게 하고 그 오줌단지 가서 오줌 누고, 상하(上下) 다 알아서 처리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분명허고 그려야 할 턴디, 왜 그러면 어째서, 해필 와 갖다가서 진대지(盡大地) 땅은 땅으로 본 것이 옳을 턴디 왜 땅을 갖다 부처로 보고, 왜 갖다가 그만 아무데나 오줌을 싸고. 그거 되아? 그 미친 놈이지, 뭣이여? 그 미친놈 아니여? 허지마는 그놈의 경계가 참 당해 놓으면 별 도리 없네.

아! 아침밥도—밥을 주어야지. 아침밥도 얻어먹지 못허고 그냥, 밥을 안 준게 어째.
“허 그놈들, 호래아들놈들. 도인을 몰라보고 밥도 안 주는구나, 이 호래아들놈들. 네 이놈들 좀 겪어 봐라 이놈들” 한바탕 냅대 고함을 지른게 나는 미친놈 되아 버렸네.

그래서 그대로 그만 밥도 못... 오히려 쫓겨나다시피 쫓겨났네. 쫓겨나와 가지고는 배도 고프지마는, 배 고픈지 뭔지 그건 소용없드구만. 그 미친 사람이 달리 어떻게 생리적으로 미쳐도 배고픈 줄 모르는가 보드구만. 참말로 나는 그 생리적으로 멀쩡하고 법(法)으로만 미친 것이여. 법광(法狂)이 되었어.

아, 그 송(頌) 진 것 좀 봐. 그 송을 오늘날까지 큰스님네가 다 찬(讚)헌 송이여. 뭐 두말할 것 없어.(42분12초~55분5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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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말랭이 ; ‘산마루(산의 등줄기의 가장 높은 곳)’의 사투리.
*무외(無畏 없을 무/두려워할 외) ; ①자신감을 가지고 가르침을 설하므로 누구에게도 두려움이 없음.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어떠한 장애도 두려움이 없음. ②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두려움도 불안도 없는 평온한 마음 상태. 무소외(無所畏)라고도 한다.
*포외(怖畏 두려워할 포/두려워할 외) ; 두렵고 무서움. 화엄경에서는 ①생활의 두려움. ②명예를 잃을 두려움. ③악도(惡道)에 떨어질 두려움. ④죽음의 두려움. ⑤대중 앞에 나섬에 대한 두려움 따위의 다섯 가지 두려움을 이른다.
*봉대기 ; ’봉우리(산봉우리)’의 사투리.
*청혼(請魂) ; 설법할 때에, 영가(靈駕 죽은 사람의 영혼)를 그 자리에 모시는 일. (같은 말)거량(擧揚).
*노디(노지) ; ‘징검다리(개울이나 물이 괸 곳에 돌이나 흙더미를 드문드문 놓아 만든 다리)’의 사투리.
*쌀궤(-櫃) ; 뒤주(쌀 따위의 곡식을 담아 두는 세간의 하나). *세간 : 집안 살림에 쓰는 온갖 물건.
*어짠지 ; ‘어쩐지(어찌 된 까닭인지)’의 사투리.
*어따 ; 어디에다. 어디에.
*돌라먹다 ; 훔쳐먹다(몰래 가져다 먹다). ‘속여먹다(속여 이익을 얻다)’의 사투리.
*뒤지다 ; ‘뒈지다(‘죽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의 사투리.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들입다 ; 세차게 마구.
*육단심(肉團心) : [범] Hrdaya  4심의 하나。 심장을 말함。 8판(瓣)의 육엽(肉葉)으로 되었다 한다。 의근(意根)이 의탁한 곳.
*묘방(妙方) ; ①기묘한 방법. ②신묘하고 효험이 뛰어난 처방(處方).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는 글’. 고려의 보조 지눌(普照知訥) 스님 지음. 화두(공안)에 대한 하나의 큰 의심을 깨트려 곧바로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간화선(看話禪)의 뛰어남을 밝힌 저술.
*대의지하(大疑之下) 필유대오(必有大悟) ;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p52-53. (가로판 P53)
當於本參公案上(당어본참공안상)에 有疑(유의)호리니  大疑之下(대의지하)에  必有大悟(필유대오)하리니  千疑萬疑(천의만의)를  倂作一疑(병작일의)하야  於本叅上(어본참상)에  取辦(취판)호리라
若不疑言句(약불의언구)가 是爲大病(시위대병)이니라  仍要盡捨諸緣(잉요진사제연)하고  於四威儀內(어사위의내)와 二六時中(이륙시중)에  單單提箇話頭(단단제개화두)하야  廻光自看(회광자간)호리라

바로 모름지기 본분을 의지하야 법다이 하야사 비로소 옳으리라。 반드시 본참공안상에 의정을 두리니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으리니, 천의만의(千疑萬疑)를 아울러 한 의심을 지어서 본참상에 판단할지니라.
만약 언구(言句,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큰 병이니라。 반드시 모든 인연을 다 버리고 사위의(四威儀)와 열두 때 가운데에 다만 화두를 잡아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볼지니라.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묵조사선(默照邪禪) ;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한 공부. 이것은 깜깜한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다.
*묘한 관(觀) ; 묘관(妙觀).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드리 ; ‘마구(아주 세차게, 매우 심하게, 앞뒤를 따지지 않고 아무렇게나 함부로)’의 옛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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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정견(正見) ; ①팔정도(八正道)의 하나. 바른 견해. 연기(緣起)와 사제(四諦)에 대한 지혜. ②있는 그대로 봄. ③바르게 자신의 참모습을 앎.
*팔정도(八正道) ;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수행의 올바른 여덟 가지 길. 정견(正見),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 팔성도(八聖道)를 이른다.
*정견 학자(正見學者)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알고 바르게 수행하는 이.
*입태(入胎) ; 모태(母胎)에 들어가는 것.
*주태(住胎) ; 모태(母胎)에 머물러 있는 것.
*출태(出胎) ; 태어나는 것.
*매(昧)하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모른다. 어둡다.
*후래(後來) ; ①뒤에 오거나 뒤져서 옴. ②장차 오게 되는 앞날.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시현(示現 보일 시/나타날 현) ; 그때마다 적절하게 몸을 나타내[現] 보이는[示] 불보살의 작용. 현시(顯示), 현현(顯現)과 같은 뜻이다.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중생의 수만큼 많은 갖가지 몸으로 변화하여 나타나는 시현의 대표적인 예는 부처님의 32상 80종호나 관세음보살의 33신 등이 있다.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유기철물(鍮器鐵物)은 신견고(身堅固)요 ; 유기(鍮器) 철물(鐵物)을 올린 시주(施主), 몸이 견고하여지이다.
*불양헌답(佛糧獻畓)은 복무변(福無邊)이요 ; 불전(佛前)의 공양 위해 논이나 밭을 올린 시주, 복이 무량하여지이다.
*창호도배(窓戶塗褙)는 면팔난(免八難)이니라 ; 창호하고 도배한 시주, 팔난(八難)을 면해지이다.
*시은(施恩) ; ①시주(施主)에게서 받은 은혜. ②은혜를 베풂.
*원력(願力) : 원(願)하는 바를 이루려는 의지. 본원력(本願力) • 숙원력(宿願力) • 대원업력(大願業力) • 서원(誓願) • 행원(行願)이라고도 한다.
*개탄(慨歎, 慨嘆 슬퍼할 개/탄식할 탄) ; 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못마땅하거나 분하게 여기어 한탄함.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백년광영전두비(百年光影轉頭非) ; ‘당장 이 때에 마음을 애써 밝히소, 백 년 세월도 순식간에 글러지느니’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61 게송 참고. (가로판 P168~169)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 법장현수(法藏賢首) 스님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보면,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龍宮)에 가서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화엄경)을 보았는데, 상본·중본·하본 3가지 본(本)이 있었다.
그 중에 상본(上本)이 십삼천대천세계미진수(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게송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었다 한다. 중본(中本)은 49만 팔천팔백 게송 천이백 품(品)이고, 하본(下本)은 10만 게송 38품이었다 한다.

용수보살이 상본과 중본은 사바세계 사람들 마음의 힘으로서 능히 가질 수 없으므로 전하지 않고, 하본(下本)을 외어 세상에 전하였고 또 그것을 간략히 한 약본(略本)이 80권 본, 60권 본이 되었다 한다.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은 ‘미진수(微塵數 셀 수 없는 무한수)’의 품(品)으로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화엄경을 이루고 있으며, 곧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로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전강선사 법문 275번 참고)

[참고] 전강선사(No.18)—전강선사 일대기 8호(경술년 12월 13일)(1971년 1월 9일)에서.
그 참선 공부, 세상에 참선 공부 같이 쉬운 것은 없어.
그렇게 쉽건마는, 낯 씻다가 코 만지기요. 얼굴 씻글 때 코 안 만져지나? 그대로 코 만져지는 것인디. 얼굴 씻글 때 코 만지는 것이여. 허! 그것 참!

천하에 그렇게 쉬웁건마는 어째도 그렇게 모도 안 된다고 야단들이고, 망상 따문에 못 허겄다고 야단이고,
망상 그놈 따문에 참선을 하는 것이고, 망상 따문에 화두가 그놈이 있는 것이지, 망상 없으면 무슨 화두가 있나? 화두가 없어. 망상 그놈 따문에 화두가 딱 그놈이 인자 있지.

그래서 화두 그놈은 망상을 다루는 놈이여. 망상을 잡드리하는 놈이여. 화두 그놈이 아니면은 망(妄)을 대체 주체할 수가 없어. 일어나는 전체가 망이니까.
깨달지 못했으니 망(妄)이지. 깨달랐으면 전부 그놈이 각(覺)인디. 깨달으면은 망이 없는 것이 아니여. 망(妄) 그놈이 각(覺)이여 그만!
낱낱이 각(覺)이지, 조끔도 뭐 여읠 것도 없고—망상을 여의고 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 자체가 각이여! 그대로가 각(覺)이여.

수은(水銀)을 한 뭉치 내던졌다. 이놈이 천 쪼가리—그놈이 조그만한 덩어리가 모도 갈라져서 만 덩어리가 되고 몇만 덩어리가 되아. 쓸어 모으면은 한 덩이여.

망(妄) 역시 그 깨달지 못해 중생 때에는 전부 망(妄)이더니, 깨달라 놓고 보니 그놈이 낱낱이 다 각(覺)이다. 그러니깐 미진수(微塵數) 법계(法界)지. 가는 티끌 수 법계라.
화엄경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지! 화엄경 품수(品數)가 일사천하미진수품이여. 화엄이란 화엄도리는 다 각인데... 낱낱이 각이여.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방(棒) ; 몽둥이. 또는 주장자(柱杖子). ‘방망이 봉’ 자이지만 불교에서는 덕산방(德山棒) 등의 용례에 따라 ‘방’으로 읽는다.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柱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산철(散철) ; 본철(本철 - 하안거,동안거)가 아닌 시기.
*원청 ; 원청강(워낙, 두드러지게 몹시).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濶) ; 높은 산 깊은 물도 꺼리지 않고. 憚(꺼릴 탄). 濶(넓을 활).
*미륵(彌勒) : 대승보살. 번역하여 자씨(慈氏).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운무중(雲霧中 구름 운/안개 무/가운데 중) ; 구름[雲]과 안개[霧]의 속[中].
*언하(言下) ; [주로 ‘언하에’의 꼴로 쓰여]말이 떨어진 바로 그때. 또는 말을 하는 그 즉시.
*서래의(西來意) ;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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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송(悟道頌) ; 불도(佛道)의 진리를 깨닫고 그 경지 또는 그 기쁨을 나타낸 게송.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천둥이(賤둥이) ; ①‘천더기(賤-- : 업신여김과 푸대접을 받는 사람)’의 사투리. ②’천한 둥이’의 준말. 조실부모(早失父母)한 고아나 남의 손에 길러진 아이를 일컫는다.
*만고(萬古 일만·클 만/옛날·예 고) ; ①매우 먼 옛날. ②아주 오랜 세월 동안. ③세상에 비길 데가 없음.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수행막대빈모반~ ; 『치문경훈(緇門警訓)』 '잡록(雜錄)'에서 '굉지선사시중(宏智禪師示衆)'
宏智禪師示衆(굉지 선사가 대중에게 보임)
蒿里新墳盡少年  修行莫待鬢毛斑  死生事大宜須覺  地獄時長豈等閒
道業未成何所賴  人身一失幾時還  前程黑暗路頭險  十二時中自着奸

쑥대밭에 새 무덤이 다 소년의 무덤이니, 수행(修行)하는데 귀밑을 희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모름지기 깨달아야 하니, 지옥 고통 길고 기니 어찌 등한히 하겠는가.
도업(道業)을 못 이루면 그 무엇에 의지하며, 사람 몸 한 번 잃고 언제 다시 돌아오리. 앞길이 캄캄하고 가야 할 길 험하구나. 하루 어느 때나 마음을 다잡아 도(道)를 구하여라.
*수한(壽限 목숨 수/한정 한) ; 타고난 수명(壽命 생물이 살아 있는 연한)의 한도(限度). 타고난 목숨의 한도.
*후기(後期 뒤 후/기약하다·약속하다·기간 기) ; ①어떤 기간을 둘, 또는 셋으로 나누었을 때, 맨 나중의 시기. ②뒷날의 기약.
*염(簾) ; 한시(漢詩)를 지을 때, 글자의 음의 높낮이를 맞추는 방법. 형식이 여러 가지인데, 가새염이 가장 보편화되었다.
*운(韻) ; ①소리와 음조가 비슷한 시행(詩行)의 끝부분. ②한시(漢詩)에 운(韻)으로 다는 글자.
*여하약하(如何若何) ; 이러쿵저러쿵. 이러하다는 둥 저러하다는 둥 자꾸 말을 늘어놓는 모양.
*상신실명(喪身失命) ; ‘몸 죽고 목숨 잃다’ '생명을 잃다' 단순히 죽는다는 뜻 이상으로 본분(本分)의 핵심을 상실했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 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법담(法談 부처의 가르침 법/말씀·말할 담) ; 불교의 도리에 관하여 나누는 이야기. 또는 그러한 설법(說法). 선사(禪師)들이 본분(本分 : 근본 깨달음本覺)에 대하여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 법화(法話)와 같은 말.
*독보건곤(獨步乾坤) ; 건곤(乾坤)에, 천지에 홀로 걸어가는 것. 도리(道理)를 증득하여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을 나타내는 말.
[참고①] 『무문관(無門關)』 ‘무문혜개(無門慧開) 스님의 서문’에서.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대도에 문이 없다. 천 갈래 길은 있으니 이 관문을 꿰뚫으면 천지에서 홀로 걸으리.

[참고②] 『태고집(太古集)』 (雪栖 편, 김달진 역주 | 세계사) p228. 229. ‘석가 출산상(釋迦出山相)‘ 참고.
巍巍落落兮赤洒洒 密密恢恢兮淨裸裸 春風爛漫水悠悠 獨步乾坤誰伴我 若也山中逢子期 豈將黃葉下山下

높고 높음이여 아무것도 없고, 넓고 깊음이여 있는 그대로네. 봄바람은 난만하고 물은 흘러가는데, 건곤에 우뚝하여 누가 나를 짝하랴. 만일 산중에서 종자기(種子期)를 만났던들, 어찌 누른 잎 갖고 산을 내려왔으랴.

*감원(監院) ; 한 절의 사무를 총괄적으로 감독하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비로자나(毘盧遮那) ;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 遍一切處)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이르는 말. 비로자나는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 ; 전신(全身)은 '본질 그대로' '여래진신(如來眞身)'의 뜻으로 ‘비로자나 전신체’는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조실스님 법문 275번 참고)
*해필(奚必 어찌 해/반드시 필) ; 하필(何必 : 다른 방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꼭).
*진대지(盡大地 모든·전부의 진/클 대/땅 지) ; 모든 대지. 이 땅 전체를 가리키는 말.
*호래아들 ; 호래자식(배운 데 없이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냅대 ; 냅다(몹시 빠르고 세차게. 또는 그런 모양으로).
*법광(法狂) ; 수행의 과정에서 어떤 경계가 나타나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언행의 절제가 사라져 미친 것과 같은 상태. 식광(識狂)이라고도 한다.
*송(頌) ; 게송(偈頌).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찬(讚)하다 ; (...을) 칭찬하거나 찬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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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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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ㄱ/깨달음2021. 9. 15. 12:25

깨달음((No.472))—(게송)邪路不用行~ | '불(佛)'이란 말이 인도 말로 '붓다(Buddha)'인데, 번역하면 '깨닫는다' | 일체처 일체시에 그 경계(境界)에 팔려가지 말고, 바로 그 경계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챙겨 나가자.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참고] 『선문염송 · 염송설화』 (혜심 · 각운 지음 | 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1권 3칙 ‘오도(悟道)’
<염송설화(拈頌說話)> 大慧云 釋迦老子正覺山前 從定而起 因見明星忽然悟道 信知時節若至 其理自彰 但記悟道時節因緣而已 則世尊悟處 不在明星上 香嚴悟處 不在擊竹邊

대혜가 이르기를 “석가 노자께서 정각산 앞에서 선정에서 일어나 샛별을 보시는 순간 홀연히 도를 깨달으셨으니, 이는 시절이 이르면 그 이치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인데, 다만 도를 깨달은 시절과 인연을 기록했을 뿐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세존의 깨달음은 샛별에 있지 않고 향엄의 깨달음은 대나무를 때리는 데 있지 않다.

 

 

(7분 23초)

 


[법문] 송담스님(No.472)—1992년 5월 첫째일요법회(92.05.03) (용472)

사로불용행(邪路不用行)하라  행지왕신고(行之枉辛苦)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요구불과(不要求佛果)하라  식취심왕주(識取心王主)니라
나무~아미타불~

한산(寒山), 습득(拾得), '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 화현(化現)이고,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 화신(化身)이다' 하는데, 지금 산승(山僧)이 읊은 게송은 문수보살의 화현이신 한산의 게송입니다.

사로불용행(邪路不用行)이라, 삿된 길은 가지를 말아라.
행지왕신고(行之枉辛苦)니라, 삿된 길을 가면은 쓸데없이 쓰라림과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를 하는데, 자꾸 옆에서,
"이뭣고를 해 봤자 하근기(下根機)는 깨닫지도 못하고, 밤낮 해봤자 맛도 없고 아무것도 되는 것도 없고, 어쨌든지 지장경을 읽어라. 금강경을 읽어라. 무슨 주력을 해라. 아미타불을 불러라. 아미타불은 부르다가 마지막 죽을 때 열 번만 부르면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반야용선을 가지고 데리러 오는데 그걸 하면은 돈도 안 들고, 참 고생할 것도 없고.
이뭣고 해 봤자 결제(結制)하러 가면은 돈 내야 하고 또 잠도 마음대로 못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죽비(竹篦) 치고 시간 맞춰서 앉으려면 허리 아프고 그러니 그까짓 거 뭐하러 그걸 하려고 하냐? 이것을 해라. 이거 읽으면 참 좋다는데 이것을 하지, 그거 참선은 다 최상근기를 타고 나야 그 사람이 닦지, 지금 참선한다고 해 봤자 누구 견성한 사람 봤어? 하지 말고 요렇게 이거하라"고 자꾸 옆에서 속삭속삭하면,

'대체 며칠 가서 해 봤지마는 별로 얻은 것도 없고, 누구는 꿈에 무엇을 나타나고 무엇을 했다는데 나는 별로 보인 것도 없고' 솔깃하니. 그래도 와서 법문 들어보면 '참선을 해야 한다'고 그러고, 또 그 옆에 말을 들어보면은 또 그것이 좋을 것 같고 갈팡질팡 갈팡질팡해.
그러지 말고 '굿을, 아무개가 굿을 잘하는데 굿을 하면은 어쩌고저쩌고 한다'
또 '굿을 할까?' 갈팡질팡하면 그 사람이 무엇이 되냐 그 말이여.

불요구불과(不要求佛果)여.
부처님이 탄생하신 뒤에 부처님 법에 의지해서 도 닦은 스님네나 청신사 청신녀가 수백만 명이지만, 부처님 같은 사람 한 번이나 나왔냐 이거거든. '그러니까 그거 다 소용없고 어쨌든지 아미타불 불러 갖고 극락세계 가는 것이 제일이다' 들어보면 그럴싸하거든.

참선을 하는데, 부처님과 같은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불과(佛果)를 구하지 말아라 이거여.

식취심왕주(識取心王主)니라.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나의 주인공을 탁! 알아버려라 그 말이여. 그것을 깨달아 버려야지, 거기다가 목표를 둬야지—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야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놈이 다 있거든. 바로 그놈을 탁! 식취(識取)하라 그 말이여. 딱! 알아차리라 그거거든.

성날 때, '이뭣고?'
탁! 이 성난 놈, 그놈을 챙기는 거거든.

뭘 볼 때, 탁! 볼 줄 아는 '이뭣고?' 탁! 챙겨라.
그렇게 챙겨 나갈 때 찰나찰나에 깨달음을 향해서 가는 거여, 그게.
그놈 내놓고 무엇을 깨닫느냐 그 말이여. 그것을 깨닫는 것이 '불(佛)'이여.

'불(佛)'이란 말이 인도(印度) 말인데 '붓다(Buddha)'인데, 번역하면 '깨닫는다' 말이거든.
실달 태자(悉達太子)가 출가해 가지고 구담(瞿曇) 사문(沙門)이 되었는데 견성, 그걸 깨달았거든.

별을 보고 깨달으셨는데, 깨달은 뒤에 32상(三十二相)을 갖추고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것이 아니어. 내나 깨닫기 전에 그 모습을 가지고 계셨어.

우리는 32상도 갖추지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하고, 배고프면 밥 생각나고, 때리면 아프고, 욕하면 성내니까 흉악한 박지범부(博地凡夫)지만,
성날 때 '이뭣고?' 하고, 슬플 때 '이뭣고?' 하고, 속상할 때 '이뭣고?' 하고, 원망스러울 때 탁!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하면 '이뭣고?' 한 그 찰나찰나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놈 내놓고 절대로 부처가 따로 없는 것이여.

우리는 그렇게 믿고, 부지런히 일체처 일체시에 그 경계(境界)에 팔려가지 말고, 바로 그 경계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챙겨 나가자.
그것밖에 정법이 따로 없고, 그것밖에 활구참선이 따로 없고, 그것밖에 견성성불의 길도 없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1시간11분13초~1시간18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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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ㄱ/감로수2021. 8. 16. 08:30

감로수((세등51))—『논어(論語)』,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 (게송)從他謗任他非~ | 누가 나를 그렇게 헐고 뜯고 해도 그 말을 감로수(甘露水)처럼 달게 받아 마셔서 수행해 나가는 데 밑거름을 삼아라 | 불자(佛子)라면 바다와 같은, 하해(河海)와 같은 아량을 가지고 살아 가라.


*감로수(甘露水 달다·맛 좋다 감/이슬·진액津液 로/물·액체 수) ; 감로(甘露). 산스크리트어 amṛta 팔리어 amata


①신들(諸天)이 상용하는 음료. 이것을 마시면 불로불사(不老不死)가 된다고 한다. 신약(神藥). 불사의 영약. 도리천(忉利天)에 있다는 감미로운 영액(靈液). 장수하고 죽은 이를 환생시킨다고 함. 최고의 자미(滋味)에 비유함.
②맛은 달고, 마시면 죽지 않는다라고 일컬어지던 것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번 믿으면 끝없는 공덕과 이익을 얻는다는 뜻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디단 이슬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③불사(不死). 영원의 생(生)을 의미.
④최대의 경지. 깨달음. 열반(nirvana)과 같은 뜻.
⑤정갈하고 감미로운 물.

 

 

 

(12분 8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51)—1984(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어(84.07.17) (세등51)

유교 경전에 『논어(論語)』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 사서(四書) 중에 하나인데, 그 논어의 첫마디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즉 기쁘지 아니한가'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별로 뭐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지 아니한데, 깊은 뜻이 있지 아니하면 왜 논어에 첫마디에 그것이 있을까 보냐?  무슨 경전이든지 첫마디에 있는 법문이 그 경전에 최고에 깊은 진리를 표현했다고 보면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 하는 것은 무슨 글공부를 글을 배워 갖고 그것을 자꾸 읽어 쌓으면 기쁘지 아니하냐. 그러한 피상적인 뜻이 아니라, 도(道)를 얘기한 것입니다.

선지식으로부터—우리 불교, 이 선학(禪學) 이 종문(宗門) 중에다가 비유를 한다면,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 가지고 도 닦는 법을 배워 가지고 시시때때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면 얼마나 기쁘냐 그 말이여. 기쁘지 않겠느냐?
아 공부를 하면 '참 내가 어쩌다가 이런 좋은 최상승법을 만났는가? 내가 어쩌다가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이런 좋은 법을 만났는가?' 밥 먹다가 생각해도 너무너무 기쁘고, 중생들의 그 고해(苦海)에 빠져서 그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허덕이는 것을 보면은 불쌍하면서 가엾으면서, 내 자신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참 행복하고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 말이여.

그다음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서 오면—막걸리 친구나 뭐 동창생이 찾아오면 얼마나 기쁘냐? 그러한 말이 아닙니다. 같이 발심(發心)을 해서 도를 닦은 도반이 내가 공부를 참 잘한다는 말을 듣고 나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온다면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그 말이여. 내가 출가해 가지고 별로 훌륭하지를 못하고 도를 잘 못 닦고...(녹음 끊김)

성내지 아니하면 이것이 군자(君子)가 아니냐?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수행인이 아니냐 그 말이여.
자기가 조금 뭣 좀 한다고 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래고 그것을 자랑하고, 내가 제일이라 하는 생각을 갖고 남을 헐뜯고 한다면은 이것을 어찌 참다운 수행인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유교에 있어서 군자(君子)란 말은 불교에 있어서 '진실한 수행인이다. 또는 보살이다' 이러한 정도에 뜻과 같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살 십중대계(十重大戒) 가운데에 하나에, 불자찬훼타(不自讚毁他)라고 하는 조항이 있는데,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고 하는 것은 보살이 지켜야 할 십중대계에 하나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답지 못한 사람이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을까 보냐 그 말이여.
세속에 선비도 조금 어지간한 사람은 그러한 법이 없거늘, 하물며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을 결별해 버리고 생사를 바쳐서 최상승법을 닦아 가는 수행인이고서야 더욱 말할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종타방임타비(從他謗任他非)여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니라
나무~아미타불~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하고  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니라
나무~아미타불~

종타방임타비(從他謗任他非)여, 남이 나를 비방하면 비방하는 대로 맽겨둬 버리고, 나를 헐고 뜯으면 헐고 뜯는 대로 그 사람한테 그 맡겨둬. 맘대로 하라고.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니라. 횃불을 들고 허공을 불사르려고 하는 것 같애서 저만 피로하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횃불을 들고, 아무리 훨훨 타는 큰 횃불을 가지고 이 하늘을 불사를라고 막 해봐라 그 말이여. 허공이 타는가? 그러다가 저만 피로해 가지고 지쳐 쓰러지거나 잘못하면 불똥이 튀겨서 지 몸이 타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나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하면, 나는 누가 나를 그렇게 헐고 뜯고 해도, 그 헐고 뜯고 비방하는 그 말을 감로수(甘露水)처럼 달게 받아서 마시면—내가 잘못해서 나의 단점을 누가 헐고 뜯는다면은 그 말을 감사하게 듣고 자기를 반성하고 고칠 것이고, 나는 실지로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모략 중상을 한다면 그렇더라도 그 말을 '아 내가 그래도 전생에라도 뭣을 잘못한 점이 있거나, 나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지마는 나에게 그런 잘못이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말을 감사하게 듣고, 감로수처럼 받아서 먹어서 잘 소화를 시켜버리면,
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하리라.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비방하고 헐고 뜯고 한 그것이 소화가 되어 가지고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는 선지식이 되고 불보살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감로수를 마시고. 이것이 바로 진실로 발심한 수행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조금 뭐라고 한다고 파르르르르 신경질을 내고 속으로 감정를 품고, 꽁하니 미운 생각을 속으로 품고, '언젠가 저년을 갖다가 내가 한바탕 봐주리라' 이러한 소인(小人)의 근성을 가져서 쓸 것인가 이 말이여.
부모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도를 닦은 사람이 어찌 감로수처럼 받어 마셔야지, 그러한 말을 듣고 감정을 품고 언젠가는 봐줄려고 하는 꽁한 복수심을 갖는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냐.

아 그말을 감로수처럼 받아 마시고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누가 나 안 듣는 데서 욕을 하거나, 듣는 데서 욕을 하거나,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면 어찌 나에 대해서 말을 할까보냐 그 말이여.
성현의 말씀에도 나를 칭찬해 준 사람은 도적이요, 나의 단점을 지적해 주는 사람은 스승이요 은인이다 그랬어. 하물며 출가인 분상에 그만한 것을 이해를 못하고, 소화를 시키고 거기에서 살아가지를 못하고 죽음의 무덤을 판대서야 말로 할 수가 없거든.

이만한 정신을 가지고 대중방에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만한 정신 자세가 되어 있지 아니해 가지고 선방에 나갈 자격이 있는가? 선방에 나간다면 강원의 학인도 그러지 못하고, 선방에 나가서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쯤은 되어야 해. 이쯤되어 가지고 나가 보라 그 말이여.
무슨 시비가 나한테 상관이 있어? 칭찬을 해도 좋아할 것도 없고, 오히려 미안하고 부끄러울뿐이여. 나를 헐고 뜯는다 하더라도 그 그렇게 속상할 것이 없어. 거기서 터억 너그러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여서 더욱 수행해 나가는 데 밑거름을 삼는다면 그 사람은 일장월취(日將月就)여. 나날이 발전하고 다달이 승화되어 갈 것이다 그 말이여.

스님네뿐만이 아니라 세속에 계시는 청신사 청신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자(佛子)라면 응당 이만한 정신을 가지고 이만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바다와 같은 하해(河海)와 같은 아량을 가지고 살아 가신다면은 바로 그이가 보살(菩薩)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보살, 여자 신도를 보살(菩薩)이라고 부르는데 그만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 나가셔야 한다 그 말이여.(42분2초~54분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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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관심일법 총섭제행((세등51))—달마 조사가 직지인심(直指人心), 바로 사람에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케 하는 이 활구참선법을 전해 주셨다 |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떻게 닦아 가느냐?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여 | 부처님께서 설하신 49년 동안에 법(法)이 바로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방편설에 떨어져 있다면 어리석고 가엽다.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

[참고] 『선문촬요(禪門撮要)』 (경허선사 編) ‘달마대사 관심론(達摩大師觀心論)’에서.
慧可問曰  若有人 志求佛道 當修何法 最爲省要 師答曰 唯觀心一法 摠攝諸行 名爲省要
問曰 云何一法 摠攝諸行 師答曰 心者 萬法之根本也  一切諸法 唯心所生  若能了心 萬行俱備 猶如大樹 所有枝條 及諸花菓 皆悉因根 栽樹者 存根而始生 伐樹者 去根而必死
若了心修道則 省功而易成 若不了心而修道 乃費功而無益 故知一切善惡 皆由自心 心外別求 終無是處

혜가(慧可)가 여쭈었다. “불도(佛道)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겠습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였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하나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어찌하여 한 법이 모든 행을 다포섭한다고 하십니까?”
“마음이란 온갖 법의 근본이요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만행(萬行)을 다 갖추게 된다. 이를테면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 등이 모두 뿌리로 말미암아 있으니, 나무를 가꾸려면 뿌리를 북돋우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베려면 뿌리를 없애야 반드시 죽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을 알아서 도를 닦으면 노력은 적게 들어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만약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모든 선과 악은 다 자기 마음에서 생겼으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끝내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51)—1984(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어(84.07.17) (세등51)

 

 

 

(7분 54초)

 

 


우리가 해야 할 나아갈 일은—달마 스님! 우리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敎主)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시지만, 우리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이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부처님으로부터 28번째 법등(法燈)을 전수하신 달마 조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 조사가 140세의 고령으로 인도를 떠나서 중국으로 오셔 가지고 이 직지인심(直指人心), 바로 사람에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케 하는 이 활구참선법을 전해 주시지 안 했다면, 우리는 계율이나 지키고 경전이나 연구하는 그러한 불법에 빠져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그러한 묘(妙)한 문(門)이 있는 것을 모르고 말았을런지도 모릅니다.

달마 스님을 인해서 우리는 참으로 부처님이 위대하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달마 스님의 법(法)은 선정, 선정(禪定)을 닦아서 신통을 얻고 그러한 불법이 아닙니다. 물론 참선하는 데에 계율도 지켜야 하고, 선정도 닦아야 하고, 교리에도 밝으면 좋고, 불법에 한 법도 버릴 법은 없으나, 그 근원 그 핵심이 무엇인가를 바로 파악을 해 가지고 그 중심을 바로잡아서 수행을 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가뜩이 근기(根機)는 약해서 자기 몸 하나도 추단해 나가기 어려운 그러한 처지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잔뜩 좋다고 하는 것은 다 해 보고 싶어 한다면, 까딱하면 근본은 잊어버리고 지엽(枝葉)에 걸려서 평생을 그르치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출가 수행인이 계율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여. 당연히 계율을 또 지켜야 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지 말라는 것이 아니여. 당연히 육바라밀을 닦어야 하고. 팔만세행(八萬細行)을 다 갖추어야 하고. 그러나 계율을 지키기 위한 계율을 지키고, 육바라밀을 지키기 위한 육바라밀을 지키고, 팔만세행을 갖추기 위한 팔만세행을 갖추어서는 그것은 이 몸을 가지고 해낼 도리가 없는 것이여.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떻게 닦아 가느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마음을 관하는 한 법! 화두를 참구(參究)해서 생각생각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한 경계에 들어가면 계행(戒行)을 지키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계행이 지켜져 있고, 육바라밀을 닦을려고 안 해도 바로 행하는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행하고, 생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제절로 육바라밀이 지켜지 버리게 된다. 팔만세행도 역시 일부러 갖추려고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의단이 독로해서 화두가 순일한 사람이 어찌 살생을 할 마음을 내며, 어찌 도둑질할 마음을 내며, 어찌 간음을 할 생각을 낼 것이냐 그 말이여. 한 마음 단속해서 화두가 순일하게 나아가면 일체 행(行)이 바로 거기에 다 제절로 갖추어지는 거여. 이것이 바로 달마 스님께서 주창하신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오계(五戒)와 팔만사천 법문이 낱낱이 다 묘한 문이어서 어느 문으로 들어가도 마침내는 깨달음에 이르러 다 문이 열려져 있는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지만, 그 묘한 법을 잘못 이해하고 그 방편문(方便門)에 국집(局執)해서 얽매이게 되면, 그것은 마치 달 가르키는 손가락을 잘못 이해를 해 가지고, 그 손가락을 인해서 하늘에 있는 달을 봐야지, 달은 보지 아니하고 그 손가락만 국집해서 들여다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 달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겨우 돌이 지내갈락말락한 어린아이에게 '저 하늘에 달을 보라' 하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어린아이는 그 손가락을 통해서 하늘에 달을 보지 아니하고, 손가락만 자꾸 쳐다보고 있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49년 동안에 팔만장경이, 법(法)이 바로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경(經)에는 온갖 방편설이 있지만 그런 방편설에 떨어져 가지고, 바로 가리키는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본자성(本自性)을 보지 않고서 방편에만 떨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어리석고 가엽기가 그지없는 것입니다.(15분13초~23분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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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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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