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고봉스님(선요禪要)'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24.12.19 『선요』 법문(전강선사 No.108)—到者裏 驀然脚蹉手跌 心華頓發 ~~ 騰騰任運 任運騰騰 灑灑落落 乾乾淨淨 做一箇無爲無事出格眞道人也 恁麼出世一番 方曰 不負平生參學之志願耳.
  2. 2024.07.21 『선요』 법문(전강선사 No.018)—若論此事 如大火聚 烈焰亘天 曾無少間 世間所有之物 悉皆投至 猶如片雪 點着便消 爭容毫末 若能恁麽提持 剋日之功 萬不失一 儻不然者 縱經塵劫 徒受勞矣.
  3. 2024.01.06 『선요』 법문(No.217)—일대사인연의 근원 | 본분작가(本分作家)를 만나야 | 현중현 도리에 나아가야 생사를 당적(當敵)할 수 있다 | 구경(究竟)의 깨달음.
  4. 2021.07.10 『선요』 법문((No.245))—공부는 「마치 깊은 우물에 눈을 져다가 자꾸 부어 그 우물을 메울려고 하듯 해라」 | 이 공부는 '기어코 되고야만 만다'고 확신을 가져야.
  5. 2021.07.08 『선요』 법문((No.650))— '打殺萬萬千千 有甚麽罪過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모두 때려죽인들 무슨 죄가 되랴’
  6. 2019.10.05 고봉스님 수행담(No.201)—고봉스님의 3년 사한(死限) 수행 | 고황병을 낫는 약(藥 : 丹) | (게송)頭指天兮脚踏地~.
  7. 2019.09.10 고봉스님의 수행 (No.537)—어떠한 경우에도 자기의 본참공안에 몰입해야 | 중국 천목산 고봉(高峰) 스님의 수행 (『선요禪要』 28. 通仰山老和尙疑嗣書)]

『선요』 법문(전강선사 No.108)—到者裏 驀然脚蹉手跌 心華頓發 ~~ 騰騰任運 任運騰騰 灑灑落落 乾乾淨淨 做一箇無爲無事出格眞道人也 恁麼出世一番 方曰 不負平生參學之志願耳.


*선요(禪要) ; 『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고봉화상 선요(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51~52, 『선요』 (원순 역해 | 도서출판 법공양) p41~42 참고.
恰如箇有氣底死人相似하며  又如泥塑木雕底相似리라  到者裏하야  驀然脚蹉手跌하면  心華頓發하야  洞照十方이  如杲日麗天하고  又如明鏡當臺하야  不越一念하고  頓成正覺이라

흡사 숨만 남은 시체와 같으며 또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 같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갑자기 손과 발이 미끄러져서 마음꽃이 단박에 피어 시방세계를 훤히 비춤이 마치 밝은 해가 하늘에 뜬 것 같으며, 맑은 거울이 경대에 놓인 것 같아서 찰나에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이다.
 
非惟明此一大事라  從上若佛若祖의  一切差別因緣을  悉皆透頂透底하며  佛法世法을  打成一片하야  騰騰任運하고  任運騰騰하며  灑灑落落하고  乾乾淨淨하야  做一箇無爲無事出格眞道人也라  恁麼出世一番하야사  方曰  不負平生參學之志願耳니라

이 일대사만을 밝힐 뿐 아니라, 위로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온갖 차별된 인연(因緣)을 몽땅 아래 위로 꿰뚫어 알며 불법과 세간법을 한 조각으로 만들어 무심하여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며, 물 뿌린 듯 쇄락하고, 씻어 말린 듯 정결하여 하나의 격식에서 벗어나 일없는 참 도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번 세상을 뛰어나와야 비로서 ‘평생동안 참선하려는 뜻과 원력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리라.


이 참선법을 어디 가서 배울 것이냔 말씀이여. 참선법을 아무 때나 배울 데가 있는 줄 알으셔?
그런데 이런 참선법에 인연이 없으면 온 법도 없어. 와서 들을라고도 허지 않어. 과거 다생겁 중에 한량없이 인연을 모도 심어 놨기 땀세 이렇게 와서 이 참선을 척 배우는 대학자(大學者)지.

 

(13분 18초)


[법문] 전강선사(No.108)—이뭣고 화두법, 월봉외도, 선요, 자경(임자72.01.09.새벽) (전108)(고봉선요)

또 공부를 지어 들어가다가 화두(話頭)가 인자 오래오래 해서 화두가 한이 차면 ‘구구(久久)하면 필유입처(必有入處)다’ 오래오래 하면 반드시 들어갈 구녁이 나와!
퇴타(退墮)하지 말고, 안된다고 내던지지 말고, 그저 앉아서 무덤덤하게 ‘이뭣고?’ 해도 그저 더 안되고 더 까깝하고 허드래도 ‘이뭣고?’만 자꾸자꾸 해서 물러가지 마라. 참으로 네 물러갈 곳이 어디냐? 옳게 들어왔다. 왔으니 물러가지 말지니라.

춘래의구초자청(春來依舊草自靑)이요. 봄이 오면 제절로 풀이 나는 법이고, 추지임타황엽락(秋至任他黃葉落)이니라. 가을이 오면은 황엽이, 이파리가 누래져서 떨어진 때가 온다. 화두 참선도 인제 그럴 때가 들어와.

오래오래 순숙(純熟)하게 해 들어갈 것 같으면은 유기저사인상사(有氣底死人相似)다. 몸뚱이는 부들부들하니 기운은 있는디, 딸싹딸싹 헌디 죽은 사람 같다. 등신(等神) 같고, 어리석은 사람 같고.
화두가 그만 꽉 ‘이뭣고?’ 알 수 없는 놈이 내외(內外)가 그만 내 마음 안이나 마음 밖에나 전체가 알 수 없는 한 일념(一念)이 싸져 버렸으니, 일(一) 의심(疑心)이 딱! 그만 쩔어져 버렸으니 콱! 몸뚱이에 백혀 쩔어져 버렸으니 똑 죽은 사람 같다. 그래도 죽은 사람이 아니여.

우여목조저상사(又如木雕底相似)다. 냉기(나무)로 저렇게 깎아 놓은 부처님, 저 등상(等像)으로 맨들어 놨거든. 거 어디 그 무슨 그 가만히 등상으로 앉었지마는 눈도 있고 코도 있고 귀도 있고 입도 있고 가만히 앉었다 그 말이여. 고러헌 등상같이 맨들어 놓은 지경이 온다.

도자리(到者裡)해야, 이러헌 때에는, 인제 이런 때가 와서는 맥연각차수질(驀然脚蹉手跌)이다. 문득 다리를 한번 뭘 삐딱하던지, 손을 한번 뭐 잡다가 삐딱하던지, 무슨 경계가 와 가지고는 밥을 먹다가 숟그락 딱! 소리가 나던지, 물을 마시다가 후르르르 소리가 나던지, 아! 이런 무슨 그 수질(手跌) 그런 지경에서 각차수질(脚蹉手跌) 그때에 심화(心華)가 돈발(頓發)이다. 그 마음에 알 수 없는 의심이 그만 툭 터진다. 확! 터져 버린다 이 말이여.

통조시방(洞照十方)이라. 시방세계를 통조(洞照)한다. 시방세계는 어디 어디 뭔 저 타관(他官) 어디 뭐, 멀고 가까운 데 뭐, 저 하늘 속 땅 밑 뭐, 금강 지하 뭐, 비비상천(非非想天) 소용없어. 정(頂)도 저 꼭대기 꼭대기 마지막 꼭대기 이마빡까장 마지막 저 밑에 금강저까장 투정투저(透頂透底)다. 정(頂)을 뚫어 버리고 저(底)를 뚫어 버린다. 위에를 뚫어 버리고 밑에를 뚫어 버린다.
그러니 횡(橫)은 어쩔 거여, 횡은? 수(垂)를 다 뚫어 버리고 횡을 다 쳐부숴 버리고 안 미쳐 버리는 곳이 없네. 이러헌 그만 지경이 있다 그 말이여.

이건 이무애(理無碍) 지경에도 있지마는 이 이무애(理無碍)를 증득(證得)해 버리면 사무애(事無碍)가 이런 지경이 있어. 사사(事事)가.
참, 우리 마음속에 그러헌 보배 각(覺)이 있네. 우리 마음이지 그놈이 그 각(覺)이라 그 말이여. 이런 각이 있어. 그러면 그 깨달은 경계다.

여고일(如杲日)이 여천(麗天)이다. 저 동쪽에서 떠올라 온 해가, 동천(東天)에서 턱! 솟아올라 온 해가 하늘에 떠억 한복판에 떠서 비쳤다. 복판에 한낮쯤 된 일광 같다. 확철이 다 비쳐 버린 것이.
우여명경당대(又如明鏡當臺)다. 또 그 밝은 법(法)이, 그 당처(當處) 자리가 명경(明鏡)으로 명경 비춘 것 같다. 뭐 다른 거 아녀. 명경으로 명경을 비추니 그놈의 것 어디 무슨 어디가 안 나타난 것이 있나?

불월일념(不越一念)허고, ‘내’ 한 『이뭣고?』 생각을 넘치지 않고, 내 일념(一念)을 조금도 어디 버리고 넘치고 내버리지 않고, 그대로 일념 가지고 돈성정각(頓成正覺)이로구나. 몰록 정각을 이뤄버렸구나. 바로 깨달랐구나.

바로 깨달아 놓고 보라 그 말이여. 깨달아 놓고 봐야지. 쪼끔 뭔 하다가 무슨 빼꼼하니 생각난다고 한마디 푹 일러 놓고. 도리어 그만 내나 그 도리 갖다가 도로 물으면 꽉 맥혀서. 고것이 참선법이여? 고것이?

일관도천(一串都穿)에 정각을 이뤄버릴 것 같으면 벌써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이 그대로 척척 볼 것도 말 것도 없지.
낱낱 해 논 것이 그대로 툭 하나 터지면 또 하나 나중에 맥히고 그려? 그놈 왜(倭)놈의 참선인가 보다. 하루에 하나씩 깨닫게. 그런 법 아니여. 터억 깨 번지면은 하나도 어디 가서 어떤 놈이 걸리며 어떤 놈이 맥혀?

그래 가지고 고것 생사가—아! 생각해 보면 알지. 그 생사 면할 건가? 그것 가지고?
그런 놈의 지견을 가지고 와서는 뭐라고, 벌써 보면 알지. 코똥 한번 픽 뀌어버릴 일이지. 그것참 나.

실개정각(悉皆正覺)하리라. 탁! 깨달아 버릴 것이다.
비유명차일대사(非惟明此一大事)라. 오직 이 일대사(一大事)만 밝히는 거 아니다. 내 생사대사(生死大事)만 밝힌 거 아니여. 내 생사대사, 죽고 사는 생사대사만 면하는 게 아니다.

종상약불약조(從上若佛若祖)에, 저 위로 좇아서 과거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오면서, 위 좇아 부처와 조사—그 과거에는 부처가 없었으며 조사가 없었나? 언제든지 있었는디.
부처와 조사와 일체차별인연(一切差別因緣)을, 차별인연까지 실개투정투저(悉皆透頂透底)다. 다 정(頂)을 통하고, 정을 뚫고 밑을 뚫는다. 이마빡을 다, 이마빡이 없이 저 위까장 다 뚫어 버리고 밑구녁까장 다 터져 버린다. 저절로 터져 버려.

아 이러헌, 세상에 참선법인데, 이렇게 무위법(無爲法)인데, 이 무위법에 퇴타할 수가 있나? 학자(學者)야, 어떻게 퇴타를 하느냐? 믿고 들어오기만 해도 벌써 겁(劫) 중에, 한량없는 겁 중에 인연을 지어온 것이니라.

불법세법(佛法世法)을 타성일편(打成一片)이다. 불법(佛法)이고 세법(世法)이고, 쳐서 한덩어리 이루어서 다 깨달아 버렸다.
그러니 어떻게 좋던지, 인자 그만 좋을 것뿐인가? 일 마쳤으니 좋기도 허고 슬프기도 허고, 자비심도 더헐 수 없고, 원융심도 더헐 수 없고, 참 이와 같은 경계가 어디 있겠나?

나 깨달아 가지고 보니 좋으니까 한바탕 여그서 노래를 부른단 말이여. 이 노래여. 이것 또 고인(古人) 노래. 확 깨달아 가지고 다 통해서 보림(保任)해서 증(證)해 버려 놓으니,

등등임운(騰騰任運)이요  임운등등(任運騰騰)이요.  쇄쇄낙낙(灑灑落落)이요  건건정정(乾乾淨淨)이니라.  주일개무사출격진도인야(做一箇無事出格眞道人也)니라
나무~아미타불~

이래 가지고는 등등임운(騰騰任運)하며 ‘날 등(騰)’ 자여. 날고 난다. 임운(任運)한다. 마음대로다. 등등(騰騰)이 임운(任運)이다.
또 그 밑에는 임운(任運)이 등등(騰騰)이다. 임의(任意)대로 한 것이 등등이로구나. ‘날 등(騰)’ 자를 응, 이렇게 등등임운이요, 날고 나는 것을 임의대로. 또 임운을 등등이다, 임운을 또 날고 난다.

쇄쇄낙낙(灑灑落落)이다. 그 깨끗허고 깨끗허고 깨끗허고 깨끗허다. 오직해야 넉 자를 놨을까. 건건정정(乾乾淨淨)이다. 높고 높고 또 깨끗허고 깨끗허다.
하! 이거 뭐 생사(生死)가 있어야지, 뭐 거가서는 인자 무슨 뭣이 있어? 하나도 일도 없고, 뭐 할 일이 없다. 생사 하나 깨달아 놓고, 생사 하나 없애버리고 보니 아무 일도 없다, 당최.

이놈의 생사 따문에 중생사(衆生事)가 이렇게 남의 걸 뺏을라 하고, 도둑질할라 하고, 사기 협잡하고, 그저 남의 나라 쳐서 뺏을라 하고 맨 요따위뿐인데. 턱꺽 깨달아 놓으니 아, 세상에는 뭔 일이 있나?
하나도 일이 없어서 무사출격인(無事出格人)이다. 일이 없어서 격(格) 밖에 뛰어난 사람이다. 출격진도인(出格眞道人)이다. 격 밖에 뛰어난 참 진짜 도인이다.

임마출세일번(恁麽出世一番)하야사, 이렇게 인생 문제를 깨달아 버리고 이렇게 터억 되아사,
방왈불부평생참학지지원이(方曰不負平生參學之志願耳)니라. 방(方)야로 평생 참학(參學)의 지원(志願)을 버리지 않는 것이요, 네가 네 몸뚱이 얻은 목적을 달성헌 것이요, 너는 참, 인자 참... 뭐 뭔 말을 할 것이냐?

이것이 우리 참선법(參禪法)이여. 이 참선법을 어디 가서 배울 것이냔 말씀이여. 참선법을 아무 때나 배울 데가 있는 줄 알으셔?
그런데 이런 참선법에 인연이 없으면 온 법도 없어. 와서 들을라고도 허지 않어. 과거 다생겁 중에 한량없이 인연을 모도 심어 놨기 땀세 이렇게 와서 이 참선을 척 배우는 대학자(大學者)지. 참선법 여까장 조꼼 설해 놓고.(13분51초~27분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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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까깝하다 ; ‘답답하다(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후련하지 않아 애가 타고 갑갑하다)’의 사투리.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등신(等神 등급·같다 등/귀신·신령 신) ; ①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 ②나무, 돌, 흙, 쇠 따위로 만든 사람의 형상.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등상(等像) ; 나무, 돌, 흙 등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
*각차수질(脚蹉手跌 다리 각/미끄러질·넘어질 차/손 수/거꾸러질·넘어질 질) ; (몸이 균형을 잃고) 손과 발이 미끄러지다.
[참고] 『고봉화상 선요(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50~52, 『선요』 (원순 역해 | 도서출판 법공양) p40~42 참고.
若要的實明證인댄  須開特達懷하며  發丈夫志하야  將從前惡知惡解와  奇言妙句와  禪道佛法과  盡平生眼裏所見底와  耳裏所聞底하야  莫顧危亡得失과  人我是非와  到與不到와  徹與不徹하고

만일 이 일을 적실하고 분명하게 증득하려면 특별한 포부를 품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종전의 나쁜 알음알이와 기묘한 언구(言句)와 선도(禪道)와 불법(佛法)과 평생동안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들에서 위태로움과 죽음, 얻음과 잃음, 남과 나, 옳음과 그름, 도달함과 도달치 못함, 사무침과 사무치지 못함 따위를 돌아보지 말고,

發大忿怒하며  奮金剛利刃하야  如斬一握絲에  一斬에  一切斷이라  一斷之後에  更不相續하야  直得胸次中이  空勞勞地와  虛豁豁地가  蕩蕩然 無絲毫許滯碍하야  更無一法可當情이  與初生으로  無異니라

크게 분발심을 내어 마치 금강 같은 날카로운 칼로 한줌의 실을 벨 때, 한 번 베면 모두 다 끊어져서 그 후에는 다시 이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하면, 당장 가슴속이 텅 비어 호호탕탕(浩浩蕩蕩)해서 실끝만치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으며 다시 한 법도 정식(情識)에 매이지 않음이 마치 갓난아기와 같을 것이다.

喫茶不知茶하고  喫飯不知飯하며  行不知行하고  坐不知坐하야  情識이  頓淨하고  計較都忘이  恰如箇有氣底死人相似하며  又如泥塑木雕底相似리라
到者裏하야  驀然脚蹉手跌하면  心華頓發하야  洞照十方이  如杲日麗天하고  又如明鏡當臺하야  不越一念하고  頓成正覺이라

차를 마셔도 차 마시는 줄 모르고, 밥을 먹어도 밥 먹는 줄 모르고, 다녀도 다니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몰라 정식(情識)이 단박 깨끗해지고 계교(計較)가 모두 없어지는 것이 흡사 숨만 남은 시체와 같으며 또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 같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갑자기 손과 발이 미끄러져서 마음꽃이 단박에 피어 시방세계를 훤히 비춤이 마치 밝은 해가 하늘에 뜬 것 같으며, 맑은 거울이 경대에 놓인 것 같아서 찰나에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이다.

非惟明此一大事라  從上若佛若祖의  一切差別因緣을  悉皆透頂透底하며  佛法世法을  打成一片하야  騰騰任運하고  任運騰騰하며  灑灑落落하고  乾乾淨淨하야  做一箇無爲無事出格眞道人也라  恁麼出世一番하야사  方曰  不負平生參學之志願耳니라

이 일대사만을 밝힐 뿐 아니라, 위로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온갖 차별된 인연(因緣)을 몽땅 아래 위로 꿰뚫어 알며 불법과 세간법을 한 조각으로 만들어 무심하여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며, 물 뿌린 듯 쇄락하고, 씻어 말린 듯 정결하여 하나의 격식에서 벗어나 일없는 참 도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번 세상을 뛰어나와야 비로서 ‘평생동안 참선하려는 뜻과 원력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리라.
—원문에 있는 '驀然 脚蹉手跌'은 몸의 균형을 잃고 자기도 모르게 문득 발이 미끄러지고 손이 미끄러지는 것이니, 아차! 하는 순간을 말한다. 轉身移步 懸崖撒手. (원순 스님 주)

*이무애(理無碍) ; 이치(理致)에 걸림이 없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의 경지(境地).
*증득(證得) ; 산스크리트어 adhigama 또는 adhisajbodha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는 것 또는 깨치는 것을 말한다. 증오(證悟) 또는 줄여서 증(證). 수행한 결과로 얻는 과보를 증과(證果)라고 하며, 최종의 증과는 성불(成佛: 부처가 됨)이다.
*사무애(事無碍) ; 사물(事物)에 걸림이 없는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경지.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修德寺 能仁禪院) 「법훈(法訓)」 '나를 찾는 법—참선법(參禪法)' p262. p264~265.
공부의 과정(課程)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 •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理無碍) • 사무애(事無碍)하게 되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나니라.

*지무생사(知無生死) ; 생사 없음을 아는 것.
*계무생사(契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에 계합하는 것.
*체무생사(體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체달함.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이무애(理無碍) ; 이치(理致)에 걸림이 없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의 경지(境地).
*사무애(事無碍) ; 사물(事物)에 걸림이 없는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경지.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 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참고 ❸] 전강선사(No.026)—전강선사 일대기 제13호(경술1970년 12월 22일 새벽.음) (1971년 1월 18일 새벽)(1분57초)
체중현(體中玄)은 고대로—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무일물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로 체중현이라 헌다든지, 모도 그러헌 그 법견(法見)을 가지고 체중현이라 햐.
왜 향상(向上)도 그 체중현일 것이고 뭐 그렇지 그 뭐여?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도 그 체중현 밖에 더 되아?

귀로 들을 수 있고, 뜻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헐 수 있고. 고러헌 것 가지고는, 체중현 가지고는...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경(經)부텀 들으면 아는 것이여. 들어가지고 아는 것이 체중현이여.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구중현(句中玄)이여. 구중현이라는 것은 처컥 들으면 벌써 그만 그 체중현 해(解)는 벗거져.
'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는디, 한 물건도 없는 그 가운데에 역무일물(亦無一物)이, 또한 일물지해(一物之解)도 없다' 요렇게 해서 고 지견(知見)까장 벗거질 수가 있지마는, 고것도 인천위사(人天爲師)는 되아. 인천의 스승은 된다 했어.

그러나 이 현중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되어야지.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척, 그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인자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그 말이여.(32분56초~34분55초)

*각(覺) ; 깨달음.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당처(當處) ; ①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 그곳. 또는 이곳. ②그대로. 지금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곳에서.
*빼꼼 ; 작은 구멍이나 틈 사이로 아주 조금만 보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일관도천(一串都穿 한 일/꼬챙이 관/모두 도/꿰뚫을 천) ;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刊) p137~138. (가로판 p133~134)
迷雲이  散盡하면  萬里靑天에  中秋寶月이  湛徹澄源하리니 虛空에  發焰하며  海底에  生煙하야  驀然磕着에  打破重玄하리니 祖師公案을  一串에  都穿하며  諸佛妙理가  無不周圓하리라

미혹의 구름이 다 흩어지면 만리청천(靑天)에 가을달이 깊이 맑은 근원에 사무치리니, 허공에서 불이 나며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문득 맷돌 맞듯 하야 깊은 현관(玄關)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을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으며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가 두루 원만치 않음이 없으리라.

*허공발염해저생연(虛空發焰海底生煙) : 확철대오(廓徹大悟)하기 직전에 정신혁명이 일어나는 경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
*합착(磕着) : 맷돌 위•아래짝이 서로 꽉 들어맞듯이 수행자가 애를 쓰다가 어느 때 홀연히 진리에 계합하는 것을 비유함. 「축착합착(築着磕着)」 합해서 쓰임.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코똥 ; ‘콧방귀(코로 나오는 숨을 막았다가 갑자기 터뜨리면서 ‘흥’하고 불어 내는 소리)’의 사투리.
*‘코똥 한번 픽 뀌어버릴 일이지’ ; ‘콧방귀를 뀌다’
*콧방귀(를) 뀌다[날리다] ; 남의 말을 가소롭게 여겨 들은 체 만 체 말대꾸를 하지 않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생사대사(生死大事) ; 생사사대(生死事大).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가장 중요한 일[一大事].
*생사사대(生死事大) 무상신속(無常迅速) ; 생사의 일은 크고, 무상(無常)은 신속하다(매우 빠르다).
*무상신속(無常迅速 없을 무/영원할·항상 상/빠를 신/빠를 속) ; '무상은 매우 빠르다'
*무상(無常) ; 모든 사물 ·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참고 ❶]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 德異本) (심재열 역주 | 불국선원) '제6 참청기연(參請機緣 청법의 기연)'에서. p252~253.
현각 : 생사의 일이 크며 무상이 신속합니다.[生死事大 無常迅速]
육조 :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사무쳐 깨닫지 않으며 신속한 무상이 없음을 요달하지 않는가?[何不體取無生 了無速乎]
현각 : 사무쳐 깨달으면 남(生)이 없고, 요달함에 본래로 빠름이 없나이다.[體卽無生 了本無速]
육조 : 그렇도다.[如是如是]

[참고 ❷]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제18권 대혜보각선사보설」 '정성충이 청한 보설(鄭成忠請普說)'에서.
無常迅速 生死事大 彈指便是來生到來 但虛却心 子細推窮 窮來窮去 善念旣相續 惡念自然不生 但如實修行 時節因緣到來 自然悟去

무상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은 크다.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곧 내생(來生)이 도래 하니, 다만 마음을 비우고 자세하게 궁구하라. 궁구하면서 오고 궁구하면서 가다 보면 좋은 생각이 이어지고 나쁜 생각은 자연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맛 여실하게 수행하다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참고 ❸]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宋 온문蘊聞 編) 제19권 ‘示妙證居士(묘증거사에게 보임)(聶寺丞)’에서.
無常迅速 生死事大 衆生界中順生死底事 如麻似粟 撥整了一番 又一番到來 若不把生死兩字貼在鼻尖兒上作對治 則直待臘月三十日 手忙脚亂 如落湯螃蟹時 方始知悔則遲也 若要直截 請從而今便截斷

무상(無常)은 매우 빠르고 생사(生死)의 일은 큽니다. 중생계 속에서 생사에 따르는 일은 삼대나 좁쌀처럼 많아서, 한번 마치고 나면 또 한 차례 닥쳐옵니다.
만약 생사(生死) 이 두 글자를 잡아 코 끝에 붙여놓고 번뇌를 끊지[對治] 않는다면, 곧 납월삼십일 죽음을 맞이해서는 손발을 어지럽고 분주히 떠는 것이 마치 끓는 물에 게를 집어넣을 때와 같으니, 비로소 후회해야 이미 늦은 것입니다. 만약 곧장 끊고자 한다면, 청컨대 지금 곧 절단하십시오.

[참고 ❹]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시진선인(示眞禪人)'
汝旣出家 須立丈夫之志 發勇猛心 深信無常迅速 生死事大 行住坐臥 一切時中 單單不昧此事 切切參詳 如人墮在千尺井中 千思萬想 只是箇單單求出之心 不日內必有相應分 如是用功 若未成辦 佛法無靈驗矣

그대는 이미 출가하였으니 반드시 대장부의 뜻을 세우고 용맹하게 정진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무상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이 큰 것을 깊이 믿고, 행주좌와 모든 때에 오로지 이 일을 잊지 말고 절실하게 참상(참구)하여야 한다. 마치 천 길 깊이의 우물에 떨어진 사람이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오로지 빠져나갈 마음만 가진다면 멀지 않은 날에 반드시 그 생각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공을 들이고도 이루지 못한다면 불법에 영험함이 없는 것이리라.

*다겁생래(多劫生來) ; 매우 오랜 세월동안[多劫] 세상에 태어난[生] 이래(以來)로.
*부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音寫語)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위법(無爲法) ; (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dharma) 무위법은 무위의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원래 무위 혹은 무위법은 열반(涅槃)의 다른 명칭.
*무위(無爲) ; ①(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 팔리어: asavkhata) 무위(無爲)는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 없는 것으로 유위의 대(對)가 되며, 조작되지 않은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 즉 생멸변화를 떠난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②온갖 분별이 끊어진 마음 상태. 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마음 상태.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 상태.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의 삼독(三毒)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 · 수도(修道)의 성자. ②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불법(佛法 부처 불/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세법(世法) ; 세제(世諦 세속의 도리)의 법. 세간법(世間法 산스크리트어 loka-dharma)이라고도 하며 인연으로 발생하여 덧없는 모든 법을 말한다. 혹업(惑業 미혹에 바탕을 둔 행위)의 인연으로부터 발생하여 번뇌를 촉발하는 삼계의 모든 법. 불법(佛法)과 대칭한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刊) p137~139. (가로판 p133~135)
迷雲이  散盡하면  萬里靑天에  中秋寶月이  湛徹澄源하리니 虛空에  發焰하며  海底에  生煙하야  驀然磕着에  打破重玄하리니 祖師公案을  一串에  都穿하며  諸佛妙理가  無不周圓하리라

미혹의 구름이 다 흩어지면 만리청천(靑天)에 가을달이 깊이 맑은 근원에 사무치리니, 허공에서 불이 나며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문득 맷돌 맞듯 하야 깊은 현관(玄關)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을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으며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가 두루 원만치 않음이 없으리라.

到伊麼時하얀  早訪高玄하야  機味를  完轉하야  無正無偏하야  明師가  許爾어든  再入林巒하야  茅庵土洞에 苦樂을  隨緣하야  無爲蕩蕩하야  性若白蓮호리니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일찌감치 덕 높은 선지식을 찾아서, 기미(機味)를 완전히 돌려서 바름[正]도 치우침[偏]도 없게 하야, 밝은 스승이 허락하거든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서 띳집과 동굴에서 고락을 인연에 따르되 하염없이 탕탕(蕩蕩)하여 성품이 흰 연꽃 같게 할지니.

*증(證) ; ①산스크리트어 adhigama 또는 adhisajbodha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는 것 또는 깨치는 것을 말한다. 증오(證悟) 또는 증득(證得). 수행한 결과로 얻는 과보를 증과(證果)라고 하며, 최종의 증과는 성불(成佛: 부처가 됨)이다.
②증(證)은, 《대승의장》 제 10권에 따르면, 지득계회(知得契會) 즉 앎 · 증득 · 계합 · 깨침을 뜻하는데, 마음이 실성(實性)에 그윽히 잠겨서[冥] 분별을 잊고 실성(實性)에 계합하고 실성(實性)을 깨쳐서 실성(實性)과 평등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등등임운(騰騰任運) ; 임운등등(任運騰騰). 무심(無心)하여 걸림이 없이 자유로움. 무심하여 자적(自適 사람이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편안하게 즐김)한 모습.
*등등(騰騰 오를·날·비울 등) ; 무심하고 무사(無事)한 모습.
*임운(任運 맡길·마음대로 할 임/옮길·움직일·운수 운) ;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일어남. 아무런 조작이나 인위적인 힘을 첨가하지 않고, 법이(法爾), 여연(如然), 자연(自然), 으레히라는 뜻.
*임의(任意 맡길·마음대로 할 임/뜻 의) ; ①어떤 일정한 제한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하는 것. ②얽매이는 것이 없어 자유롭다.
*당최 ; 도무지(아무리 해도,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아주). 영.
*땀세 ; 땀새. ‘~땜에(~때문에)’의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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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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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선요』 법문(전강선사 No.018)—若論此事 如大火聚 烈焰亘天 曾無少間 世間所有之物 悉皆投至 猶如片雪 點着便消 爭容毫末 若能恁麽提持 剋日之功 萬不失一 儻不然者 縱經塵劫 徒受勞矣.


*선요(禪要) ; 『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고봉선요(高峰禪要)』 ‘시중(示衆 其五)’ (고봉 화상 |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p69~70, 72.
若論此事인댄 如大火聚 烈焰亘天하야 曾無少間이라 世間所有之物을 悉皆投至라도 猶如片雪 點着便消어니 爭容毫末이리오. 若能恁麽提持하면 剋日之功을 萬不失一이어니와 儻不然者인댄 縱經塵劫이라도 徒受勞矣리라

만일 이 일[此事]을 말하자면 마치 큰 불무더기의 맹렬한 불길이 하늘까지 뻗쳐서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는데, 세간의 온갖 물건을 무엇이나 집어 던져도 한 조각의 눈[雪]이 닿자마자 곧 녹아버리는 것과 같나니 어찌 털끝만치인들 딴 생각이 용납되겠는가. 만일 이렇게 화두를 잡드리해 나가면 기한내에 성취하는 공(功)을 만(萬)에 하나도 잃지 않겠지만 만일 그렇게 못한다면 비록 오랜 세월을 경과하여도 고생만 할 뿐이리라.

 

(1) 16분 17초.

 

(2) 11분 17초.


[법문] 전강선사(No.018)—전강선사 일대기 제8호(경술1970년 12월 13일 음) (전018)

(1)------------------

조금 화두 허는 경계나 내가 한마디 얘기허고 내려갈까? 여까장 해두고 잉.
기운 없어 못허겄고. 법문이 고함지르기 시작허먼 법문 못해야. 뱃속에서 안 나오니깐 고함을 지르거든.

약론차사(若論此事)인댄, 이 일을 의논할진대. 이 일은 무엇인고? 참선법, 화두법이여.
여대화취(如大火聚)다. 큰 불무더기 같다. 불무더기가 조그만헌 불무더기가 아니라 큰 불무더기다.

어째 큰 불무더기냐? 집채라도 큰 집채에 불이 타면 클 것이고, 적은 집에 불타면 적은 불무더기일 것이다. 불무더기라 하는 것은 나무가 많이 쟁여져 있어야, 거그 불이 붙어야 큰불이다. 나무 없으면은 불이 붙을 수가 있나? 나무가 가뜩 쟁여져 가지고 그 불붙어야사 큰 불무더기니라.

그런 참선법도 여차(如此)하다. 망상(妄想)이 잔뜩 있는 사람, 습기(習氣)도 많고 망상도 많고 그렇게 그만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그뜩 괴어 차 있는 사람일수록에 그 사람이 공부를 허는 것이여. 처음에는 그렇게 해도 안 되지마는, 그 사람이 공부를 해야사 공부가 인자 된다 그 말이여.
그렇게 많이 구원겁(久遠劫) 중으로 오면서 그 많이 탐진치를 익혀 왔고, 그 망상! 망상이 무엇인가, 모도 그 습기 망상이지. 살생 · 도둑질 · 거짓말 그저 모도 이런 망상, 그거 모도 그런 것으로써 습기 지어서 그 망상이지.
그러니 그런 망상이 많이 있는 사람이래야 화두가 떠억 되는 것이여. 큰 불무더기가 냉기가 많이 있으면 불이 잘 타데끼—불은 화두인디, 나무는 그놈이 번뇌 망념인디, 나무 그놈을 막 들입대 큰불이 태워 버린다 그 말이여.

처음에는 마침 화두를 배워 놓으니, ‘판치생모(板齒生毛), 어째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이놈을 배워 놓으니, 잔뜩 불 땐 굴뚝에 연기 뻥뻥 나오는데 들여다보는 것 같지. 그 들여다볼 수 있나? 막 연기가 눈으로 푹 대들고, 코로 입으로 막 대든디 들여다볼 수 있어? 그와 같혀.
그와 같기도 허고, 문자상철우상사(蚊子上鐵牛相似)여. 모구(모기)란 놈이 쐬소, 쐬로 된 소 뚫는 것 같여. 그 모구 부드러운 주뎅이, 고것으로 쐬소를 뚫으니 되아? 그렇게, 안 들어가. 되도 안 혀. 그렇다 그 말이여. 그러지마는 화두라 하는 것은 그러헌 사람이 해야 혀.

젠장! 영리해서 말, 법문 잘 알아듣고 이치를 딱딱 분석해서 알고, 그 사람 못혀. 고 영리한(靈利漢)은, 날카로운 영리헌 사람은 이치길을 자꾸 만들아, 이치를 모두 뭘 만들아서 그래서 못혀.
망상이 꽉 찬 사람이 척 들어와서 화두를 배워 보면 깜깜 칠통(漆桶)이여. 무슨 어떻게 헌 지도 몰라. 그래도 그만 그대로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이렇게 그만 무식허게 대들어야 혀. 영리허게 요리조리 주박성(湊泊性)으로 대들면 못써. 상량선(商量禪)으로 대들면 아무짝에도 못써.

확 대들어서 알 수 없는 놈을 하나 추켜들고는 자꾸 이놈을 챙긴다. ‘어째서 판자 이빨에 털이 났다 했는고?’ 그놈 없어지기 전에 어서 또 끄집어 일받고 일받고 허면은 그놈의 망상이 어디 틈, 비집을 틈을 어디 얻어서 나올 수가 없어. 못 나와.
그까짓 거 나오거나 말거나 판대기 이빨에 털만 자꾸 ‘어째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아! 요놈만 자꾸 거각(擧却)하는데, 어디 망상이 어디서 불거져?

그까짓 염(念), 일어나는 망상 두려워허지 말어라. 자꾸 화두만 이놈 이렇게 자꾸 챙겨라. 그러면 맹렬헌 불이 낭기 태우데끼, 일체 망상이 판치생모 생각하는 디 당최 어리대도 못헌다. 그와 같여.

그러헌 더운 불꽃[烈焰]이 큰 불무더기가 긍천(亘天)이다. 하늘까장 뻐질렀다. 원청 큰 불무더기이기 따문에 증무소간(曾無少間)이다. 그 불무더기가 원청 냉기가 하도 많이 쟁여져 있으니까, 그 큰 불무더기가 타도 ‘일찍이 조금도 사이가 없다’ 어떻게 많이 드리 타는지.(43분1초)

그러니 망상 번뇌가 많이 있는 그 사람은 화두 그놈이 점점점점 불무더기 타데끼 자꾸 커지제. 망상이 있을수록에 화두가 점점 커져!
소유지물(所有之物)을—비단 냉기만 태우는 것이 아니라, 일체 도모지 모냥 있는 물건은 다 태운다. 옥석(玉石)도 태우고 쐬도 녹아 버리고 무슨 물건이든지 다 태와 버린다.

실개투지(悉皆投至)면은, 거다가 집어넣어 봐라. 뭣이 안 타는가? 유여편설(猶如片雪)이다. 그 큰 불무더기가 불이 많이 크게 탈수록에 더 열이 많고 굉장한 강해서 여간 천하없는 무슨 못 태울 물건이라도 거그 들어가면은 봄눈같이 녹아져 버린다.
이 비유인디, 화두를 이와 같이 다루어라. 화두만 자꾸 챙기면은,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 턱 챙기면은 의심 그놈이 불인디 뭐가 안 녹아지겄나? 무슨 망상이 거 와 붙겠나? 자꾸 화두 의심만 길러라! 알 수 없는 놈만 키워 길러 나가거라.

세상에! 이 법같이 쉬운 참선법이 없는데, 더군다나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인데 어째서 안된다고 하냐 그 말이여. 그저 바람 쐬다가도 또 한번썩 생각하고, 들어가 또 좌(座)에 앉어서 생각허고.

알 수 없는 화두 의심을 그놈을 자꾸 생각해야제, 고것 의심 없이 지해(知解) 상량(商量)으로 들어가 봐. 요리 알고 저리 알고, 무슨 이치고, 뭐 요따구 놈의 선(禪) 해봐, 무엇이여? 그런 선은 그건... 무슨 그러니 그러기 따문에 뭐 신선도도 못 되제. 그것이 무엇이여?

점착변소(點着便消)다. 그 불무더기에는 그저 집어넣기 전에 다 탄다. 어디 뭐, 거그 부닥쳐서 타나? 더도 들어오도 못혀.
화두가 일념이, 이렇게 의심이 성대(盛大)헐 것 같으면은 큰 불무더기와 같애서 참! 만무일실(萬無一失)이다. 만(萬)이 참선허는데 하나도 잃은 법이 없어. 하나도 안된 법이 없어.

쟁용호말(爭容毫末)이냐? 호말(毫末)같은 거, 터럭겉은 걸 집어넣어 봐라. 거가 어디 어리댈 수나 있나?
화두 의심이 돈발(頓發)되면은 그깥은 무슨 세상, 무슨 번뇌 망상이 무슨 소용이 있어? 번뇌 망상 그까짓 걱정헐 게 뭐여? 또 잠이 그것이 어디서 와? 잠! 잠이 그것이 뭐 근본이 있는 것인가, 그것이? 근본도 없는 것이 공연히 들어와서 심월(心月)을 어둡게 만들지.

약능임마제지(若能恁麼提持)를 해 봐라. 활구참선허는 사람이 만약 능히 이와 같이 화두를 제지(提持)해 봐라. 똑 날로 날로 다루어 해봐라.
다맛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판치생모? 어째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요놈에서, 알 수 없는 요놈 거각한 디서, 망념이 무엇이 생겨날 디가 없어! 아, 해보면 알제.

헐똥말똥 좀 허다 말다 “아이고, 이놈의 것! 안 되니 그만 말아 버릴까 어쩔까” 요렇게 헌 놈의 참선이래야 안 되지. 괘명(掛命)허고, 목숨을 한번 그까짓 것 죽고 사는 걸 불고(不顧)해 버리고 한번 해보아라, 안 되는가? 죽도 않느니라, 그래도.

안 허고 어떻게 헐 꺼여? 이렇게 한바탕해서 내가 나를 깨달라 놓고 봐야지, 그 요따구로 살다 말아? 요따구로 살다 죽고 말아? 어디 가 처백힐 것이며, 그놈의 곳 참! 궁금혀. 어디가 처백힐 것인가?
참, 이놈 안 갈 수 없다. 가는 길이로구나. 돌아오지 못헐 놈의 길을 간다. 다시는 못 와. 요까짓 몸뚱이 가지고 어떻게 오나? 요 몸뚱이 내버리고 어디를 와? 한번, 부모 처자 권속이라도 작별허고 이별해 버리면 그만이다. 다시는 그건 못 만나는 것이여.

그까짓 영(靈), 그것 뭐 이 몸뚱이 안에 있든 거, 누가 보기나 알기나 허간디? 그놈의 처백힐 곳을 한번 생각해 보아라.

지금 말세(末世)다. 지금 가장 말세인데, 이번에는 만약에 한번 처백혀 버리면은 참말로 못 나온다. 그놈의 처백힌 곳이 무간지옥인가, 아비지옥인가, 소 배때기인가, 말 배때기인가, 귀신 배때기인가 알 수는 없다마는, 한번 처백히면은 다시는 나올 수가 없다. 요몸이나따나, 인신(人身) 몸뚱이 얻기 과연 어렵다.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쉽지 못하다.

누가 저번에 질문허기를 “지금 이렇게 사람이 많이 생겨 나오는디 참, 사람 때문에 주체 못허겄는디, 그렇게 사람 몸뚱이가 나기 어렵다고 그래 놨답니까? 그 가뜩 사람 땜에 못 살겠는디” 이러드구만.
“야, 그것도 설찬히 질문도 헐 만한 말이다마는, 그게 어리석느니라” 내가 그랬어.

“그놈이 모도 그 이 몸뚱이 있는 물건, 몸뚱이로 모도 생명 붙어 있는—사람 몸뚱이 말고—짐승 몸뚱이, 벌거지 몸뚱이, 날라댕기는 연비(蜎飛) 몸뚱이, 바다 가운데 있는 몸뚱이, 큰 놈 작은 놈 다 모도 한량도 없는 놈 다 그놈 숫자를 좀 쳐 보고, 땅속에 파묻혀 있는 개구락지니 꺼갱이니, 뭐 또 저 물속에서 모도 그 해치깡에서 생겨난 그런 충이니, 박테리아 충이니, 공중 드리 전부 수륙공해(水陸空海) 전부를 다 쳐서, 사람 인명허고 그놈 비교 좀 해 보자.

부처님 말씀에 영(靈)은 마찬가지라고 했으니 돼지 영이나, 소 영이나, 사람 영이나, 개 영이나 똑같다 했으니 또 뭐 벌레 몸뚱이는 달라? 준동함령(蠢動含靈)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요, 다 불성(佛性)이 있다. 불성은 똑같은 거 아닌가.
부처 되는 불성이 있다 했으니—그놈이, 대구 같은 놈 저런 놈이, 그 큰 놈이 알 낳아 놓으면은 처음에 나올 때는 찌끄만 눈만 생겨 가지고, 허다가 그놈이 차츰차츰 이물성대(以物盛大), 뭘 많이 먹고 크면 이만큼 커지고. 그렇제, 어디 본래 그놈이 무슨 뭐 불성(佛性)이 적고 큰가?
허니, 그렇게 한번 따져 보아라. 짐승취에 들어가거나, 공계에 일체 중음신(中陰身 ), 귀신 배때기에 들어가던지 이렇게 허제, 이 사람 몸뚱이 그렇게 쉽게 들어오겄나? 허니 그 어리석은 말이다” 내가 그랬어.

이 몸뚱이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다 이 몸뚱이 내던져 버리고 턱 가서 얼른 장만해 오면 거 괜찮허제. 허지마는, 그렇게 못 되아. 과약(果若) 참, 어렵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인신난득(人身難得)이라. 사람 몸뚱이 다시 장만허기가 그렇게 어려우니라. 그거, 허니 난조지상(難遭之想)을 한번 생각해 봐라. 몸뚱이 다시 얻기 어려운 생각을 한번 지어라. 지어서 금생에 미루지를 말고 결정코 화두 성불을 해라.(57분41초~1시간13분57초)





(2)------------------

지금이 말세다. 지금 이 말세가 어떤 말세인고? 우리 석가모니불 나오신 이 사바세계 출세(出世)—백 세에 출세허셨는데, 인자 백 년 지나가면 일 년씩 감해져서 천 년 지나가면 십 년 감해져서 육천 년만 지나갈 것 같으면 십 세 정명(定命)이 온다.
십 세 정명 올 것 같으면은 인자 거기에서 도병겁(刀兵劫) 일어나, 무슨 질병겁은 뭐, 도병겁, 도창겁이 막 일어나 가지고는 다 거그서 몸뚱이 생긴 것들 다 뿌어져 버리고 다 모가지 잃어버리고 중음신(中陰身)으로 되는디, 중음신으로 삼재(三災) 속에 들어가서 그놈의 속에서 이 육신 몸뚱이는 없지마는, 중음신 몸뚱이라는 것이 꿈에 있는 몸뚱이 같은 거, 몽혼신(夢魂身)도 아니지, 이것은 아주 꿈도 없제. 업신(業身)이지.

업신이 그 중에 들어서 무수(無數) 대고(大苦)를 받네! 그놈의 고(苦)라는 것은, 중음신의 고라는 것은 일구난설(一口難說)이여. 그렇게 얼마를 고(苦)를 받고 있을 터이니, 거그 한번 빠져 놓으면 6억 7천만년 후에도 미륵회상(彌勒會上)을 못 참여혀. 언제 그것들이 나와서 미륵존불 회상에 참여헐 것이여?
지금 잘 닦아야, 잘 닦아서 견성을 했다고 하드래도 견성해 가지고 입태(入胎), 태에 들어갈 때도 안 매(昧)하고, 주태(住胎), 태에 들어가서도 안 매하고, 출태(出胎), 태어날 때도 안 매할 정도가 되어야사 허느니라. 미륵회상에 참여하니라. 우리가 그때 어디 가 있을 거여? 다시 사바세계 나오드래도 그래 깨달라 가지고 나와야사 환허제.

이렇게 이렇게 미(迷)해 가지고 이렇게 멍청해 가지고 오늘 이 목숨 잊어버리면은 향하처거(向何處去)오? 요 지경, 요 따위 되아 가지고서는 그만 이 숭악한 말세, 이 삼재(三災)에 들어가 버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여그서 이렇게 해 놓은 거 무언 줄 아시요? 뭔 줄 알아?

여다가 딱! 예불(禮佛)은 고대로 하고, 예불은 각 사찰에서 허는 대로 고대로 예불 내가 딱 해 놓고는, 거다가서 우리 참선 학자들, 우리 선학자들 부처님께 축원(祝願) 하나, ‘그저 정법문중(正法門中)에 퇴타(退墮) 않고 속성대각(速成大覺)해서, 나도 깨달라서 일체중생 제도해 줍소사’
아, 그러면은 거그에 수명 부귀 장수가 거그 다 들었고. 수명 부귀 장수가 무엇이여, 정법문에 물러가지 않고 확철대오허면은 천하에 그만이 아닌가!

이렇게 축원 딱 해 번지고는, 고 밑에 가서는 떠억 십악참(十惡懺)을 허거든. 십악참이라 하는 것이 그 십중대계(十重大戒)여. 그 범망경(梵網經)에서 나온 것이여.
십중대계를 딱, 그 심지법문(心地法門)이거든. 견성(見性)해야사, 견성헌 이야 법(法)을 설혀. 견성해야 대승계(大乘戒)를 설혀.

멋대가리도 없이 그깟... 비구계(比丘戒), 내가 그걸 비방하는 게 아니여. 비구계 이백오십 계, 비구니계(比丘尼戒) 오백 계, 받아 놓았자 그 당장에 잊어버리는 거, 계상(戒相)도 모르는 거. 내가 설허는 것 안 됐다고 혀?

십중대계는 그대로 환해서, 참선 화두학자면 그대로 가지게 되아. 다 십중대계 딸렸거든. 그러면 계행(戒行)도—살생도 않는디, 또 살생도 않지만 파(破)할 것이 어디 있어? 가지고 범허는 것이 없으니 계상(戒相)까장 다 없어, 화두를 해 나가니까.

화두 학자가 십선(十善)을 봉행(奉行)해야 되아. 십악(十惡)을 이렇게 참회(懺悔)하고 십선봉행을 해야사 대번에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으로 간다 했거든. 십중봉행만 하면은, 십중봉행만 하면은, 십선봉행만 하면은 그대로 도솔천 내원궁으로 간다 그 말이여. 도솔천 내원궁으로 갈 것 같으면 불과(佛果) 증(證)해 가지고 내려오지, 그냥 범부(凡夫)로 내려오는 법은 없어.

허니까, 똑 이렇게 예불허고, 아침에는 십중대계 그 참회를 따악 십악참회를 허면은—십악을 안 하면은, 내가 십악 죄를 안 지으면은 십선봉행(十善奉行)이여. 지악위선(止惡爲善)이니까. 꼭 십선봉행을 해야사, 십선봉행허고 화두를 참선 화두를 해야사 도솔천 내원궁으로 가느니라.
인자는 도솔천 내원궁으로 가서 우리가 피난해 가지고 내려와야지, 성불(成佛)해 가지고 내려와야지, 사바세계 어름어름허다가는 안 되아. 응! 그 말 잘 듣겠소? 그걸 잘 알아, 잘 알아들어야 되아.

그러니 여그서 이렇게 예불 똑 하고, 그 십악참 허는 거 고것 알고, 화두 딱 배운 보살님네 고렇게 해서 아침이라도 일어나시거들랑 방에서 딱 고렇게 예불 젓수고.
일어나서—모도 잠자고 그런디, 모도 뿌시럭뿌시럭 일어나서 잠 못 자게 그러지 말고, 가만히 혼자 일어나서 심배(心拜)라도, 마음으로라도 따악 이렇게 앉어서 도솔천 내원궁을 향해서 저! 제오천 도솔천인게.
극락세계(極樂世界) 가 버리면은, 극락세계 가서 넨장! 몇천만 겁을 나오도 않고 말 것이여 고대로? 속히 또 나와서 사바세계 우리 모도 인연(因緣) 중생을 제도(濟度)해야지. 고렇게 똑 해 주십시오.

내가 여다가 이렇게 해 놓고—다른 데야 허든 말든, 내 여그서 딱 작정을 해 놨습니다. 작정해 가지고는 고대로 꼭 해 나가니까. 그래 가지고 나, 또 용주사도 중앙선원이라 해서 거그도 “그렇게 해라!” 거그도 그렇게 합니다. 나! 다른 디야, 내가 관계없는 디야 내가 뭣 헐라고 내 말 비방허고 안 들을 턴디 뭣 헐라고 그렇게 헐 것이여. 안 혀.
여, 장삼(長衫)도 이렇게 맨들아서, 예복 장삼 간단허게 맨들아서 이렇게 떡 입고. 여그서만 내 입지, 다른 데 나가서 입으라고 안 허거든. 여그 딱 대중이 걸어 놨다가 요렇게 똑 허고 그럽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안 가르켜 논 짓을 내가 혀? 거, 외도(外道)라고?

부처님 꼭 고대로 해논 대로 내가 딱 해 논 것입니다.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 하생경(下生經) 보시란 말씀이여. 거기에 어떻게 해 놨는가. 십선봉행을 허면은 도솔천 내원궁으로 가는 것과 도솔천 내원궁에 불과(佛果) 증(證)해 가지고 미륵회상에 오는 것과. 환혀!
그런디 요새 모도 사교(邪敎)라는 것은 ‘곧 미륵님이 나오신다. 명년에 나오신다, 우명년(又明年)에 나오신다’ 요렇게 잡아 꾀이여. 어디 그건가?

이거 이대로, 부처님께서 미래불(未來佛) 그대로 다 설해서 수기(受記) 주어서 해 놓은 미륵회상을 내가, 다 미륵상생 하생경을 보고 내가 이렇게 딱 했지, 벌로 내가 이렇게 해 논 줄 아십니까? 꼭 우리 화두학자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 사상사(事象事) 그까짓 소용 있나? 참선허면 그만이제” 그러지 말란 말씀이여. 그래서는 안 됩니다.

화두, 화두... 여까장 내가 그랬는데. 되아서 그만허고 내려가야써.

이렇게만 화두를 잡드리헐 것 같으면 극일지공(剋日之功)이, 날로 허는 공(功)이 만무일실(萬無一失)이다. 조금도 실(失)이 없다. 잃어진 법이 없어. 꼭! 화두 의심만 찾어라.

의심이 아니면은 그 모든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을 태워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일체 번뇌 망상을 화두가 태워 버리는 법이고, 일체 티끌 우주 삼라만상, 초목 총림 다 태우는 건 불이 태우는 것인데, 불 그놈이 일체 냉기 초목 총림 산하대지를 막 다 태워 버린 뒤에는 불도 없네. 불 자체도 없어.
그놈으로 인해서 불이 있다가 냉기 다 타 버리면 불도 없네. 그걸 연소화멸(煙消火滅)이라 그려. 연소(煙消), 연기도 없어지고 불도 멸해 버리고 냉기 다 타 버리고 없어.

우리 화두도 화두 고놈이 일체 번뇌 망상을 다 태와 버려. 모도 집어생켜 버려! 찌깽이도 없이 다 먹어 버려! 판치생모(板齒生毛), 알 수 없는 의심이! 다 씹어 쌔그라 돌려 없애 버린 뒤에는 화두도 없어. 화두 없어. 번뇌 망상 꽉 맥힌 놈이 화두인디, 화두도 없어.
아! 화두도 없고 번뇌 망상도 없네! 그 지경을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이라 햐. 사람도 없어져 버리고 경계도 없어진 곳이여. 거그서 그대로 근쳐 버리면은 될 것인가?

확철대오허는 공안이, 그걸 깨닫는 공안이 거그 있어! 그래야사 인자 거그에 생사 없는 곳까장 다 봐 버리지.(1시간13분58초~1시간25분13초) (일대기 8호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습기(習氣 익히다·익숙하다·습관 습/기운·기세·힘 기)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구원겁(久遠劫) ; 아득하게 멀고 오랜 옛날.
*냉기 ; ‘나무’의 사투리.
*들입대 ; 들입다. 세차게 마구.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문자상철우상사(蚊子上鐵牛相似) ; ‘모기가 쇠로 된 소에 오르는 것과 같아서’
[참고] 『고봉화상 선요 어록』 (고봉 1238~1295 |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시중(示衆 其十四)’ p112.
若論此事 如蚊子上鐵牛相似 更不問如何若何 便向下觜不得處 拌命一鑽 和身透入 正恁麼時 如處百千萬億香水海中 取之無盡 用之無竭 設使志不堅心不一 悠悠漾漾 東飛西飛 饒你飛到非想非非想天 依舊只是箇餓蚊子

만약 이 일을 논하자면, 모기가 쇠로 된 소에 오르는 것과 같아서 다시 이러쿵 저러쿵 묻지 않고 당장에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버리고 한 번 뚫어서 몸으로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런 때 마치 백천만억 향수해(香水海)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취(取)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고갈됨이 없지만, 설사 뜻이 견고하지 않고 마음이 한결같지 않아 아득히 출렁대며 동으로 날고 서로 날다가 설사 네가 날아서 비비상천에 이른다하더라도 여전히 다만 한 마리 굶주린 모기일 뿐이더라
*영리한(靈利漢) ; 명석한 이해력을 지닌, 두뇌가 민첩한. 또는 그러한 사람. 영리(靈利). 영리(伶利)라고도 한다. 분별에 치우쳐 불도(佛道)로 가는 길에 장애가 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주박(湊泊 모일·항구 주/머무르다·배를 대다 박) ; ‘배가 정박한다’는 뜻. 머뭇거리다. 머무르다.
*상량선(商量禪 헤아릴 상/헤아릴 량/좌선 선) ;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상량(商量 : 알음알이, 知解)이다.
*일받다 ; ‘일으키다’의 사투리.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해(知解) ; 상량(商量). 알음알이.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심월(心月) ; 마음의 달. 밤의 어둠을 비추는 달처럼 밝고 깨끗하게 닦인 마음으로 실상을 밝게 아는 ‘지혜’를 비유한다. 대상을 비추어보는 마음 자체를 나타내보이기도 한다.
*괘명(掛命 걸다 괘/목숨 명) ; ‘목숨 걸고’
*불고(不顧 아니 불/돌아볼 고) ; 돌아보지 않음.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요몸이나따나, 인신(人身) 몸뚱이 얻기 과연 어렵다.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쉽지 못하다 ; 인신난득(人身難得).
*인신난득(人身難得) ;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참고 ❶] 『잡아함경(雜阿含經) 406』 (제15권) ‘맹구경(盲龜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堂  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海  有一盲龜  壽無量劫  百年一出其頭  海中有浮木  止有一孔  漂流海浪  隨風東西  盲龜百年 一出其頭  當得遇此孔不  阿難白佛  不能世尊  所以者何  此盲龜  若至海東  浮木隨風  或至海西  南北四維圍遶亦爾  不必相得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佛告阿難  盲龜浮木  雖復差違  或復相得  愚癡凡夫  漂流五趣  暫復人身  甚難於彼  所以者何  彼諸衆生  不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  展轉殺害  強者陵弱  造無量惡故  是故比丘  於四聖諦  當未無間等者  當勤方便起增上欲  學無間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참고 ❷] 『잡아함경(雜阿含經) 442』 (제16권) ‘조갑경(爪甲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  告諸比丘  於意云何  我爪甲上土爲多  此大地土多  諸比丘白佛言  世尊甲上土甚少少耳  此大地土甚多無量  乃至算數譬類不可爲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佛告比丘  如甲上土者  若諸衆生  形可見者  亦復如是  其形微細  不可見者  如大地土  是故比丘  於四聖諦未無間等者  當勤方便  學無間等  佛說是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如陸地  如是水性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  人道者  亦復如是  如大地土  如是非人亦爾  ......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육지처럼 물의 성질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이렇게 사람 세계[人道]의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그렇게 사람이 아닌[非人]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을 설명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甲上土  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畜生  餓鬼亦如是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설찬히 ; 솔찬이. 솔찬히. ‘아주 많이. 상당히. 제법’의 사투리.
*벌거지 ; ‘벌레’의 사투리.
*연비(蜎飛 장구벌레 연/날 비) ; 날아다니는 작은 벌레.
*꺼갱이 ; ‘지렁이’의 사투리.
*해치깡 ; ‘수채, 시궁창, 늪, 진흙, 해감’의 사투리. 해초, 해초깡, 해치 등도 같은 뜻의 사투리이다.
*수륙공해(水陸空海) ; 물[水]과 육지(陸地)와 바다와 같은 하늘[空海]을 아울러 이르는 말.
*‘준동함령(蠢動含靈)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요, 다 불성(佛性)이 있다. 불성은 똑같은 거 아닌가’ ;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모든 중생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고 있다’.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涅槃經)』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역 北涼 天竺三藏 曇無讖 譯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제7권, 4.여래성품(如來性品)④.
佛說中道 一切衆生悉有佛性 煩惱覆故 不知不見 是故應當勤修方便 斷壞煩惱

부처님께서 중도를 말씀하실 때에 「온갖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지만 번뇌가 가려서 알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서 번뇌를 끊어야 한다」
*준동함령(蠢動含靈 꿈틀거릴 준/움직일 동/머금을·품을 함/신령·신령할 령) ; 꿈지럭거리며 움직이는 함령(含靈, 심령心靈을 가지고 있는 것). 모든 생물. 중생(衆生).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짐승취 ; 축생취(畜生趣).
*육취(六趣) ; 육도(六途, 六道)와 동일.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취(地獄趣), 아귀취(餓鬼趣), 축생취(畜生趣), 아수라취(阿修羅趣), 인간취(人間趣), 천상취(天上趣)가 있다.
*취(趣) ; 중생이 번뇌로 말미암아 지은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세계를 말한다.
*중음신(中陰身) ; 이 생(生)을 끝내고 다음 생(生)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 상태. 중유(中有) · 중온(中蘊)이라고도 한다. 중음신은 뜻으로 생기고 뜻으로 이루어진 의생신(意生身) 또는 의성신(意成身)이라고도 한다.
중유 또는 중음신의 기간은 불교 부파마다 다르게 설명하지만 보통 49일 동안 중음신의 상태로 머문다고 하여, 절에서 행해지고 있는 사십구재(四十九齋)[또는 칠칠재(7·7재, 七七齋)]는 이 중음신의 기간에서 비롯되었다.

*사유(四有) ; 산스크리트어 catvāro bhavāh. 사유(死有) · 중유(中有) · 생유(生有) · 본유(本有) 등 한 번의 윤회 과정을 넷으로 나눈 것. 유(有)는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 바바(bhava)의 한역어(漢譯語)로 유정중생(有情衆生)의 생존을 뜻한다.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유정중생은 모두 사유(四有)를 갖춘다. 사유 중에서 생유(生有)와 사유(死有)의 기간은 아주 짧은 찰나이지만 중유(中有)와 본유(本有)의 기간은 일정하지 않다.

①사유(死有) : 죽는 찰나를 말한다.
②중유(中有) : 죽어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으로 사유(死有)에서 생유(生有)에 이르는 기간이니 중음(中陰)이라고도 한다.
③생유(生有) : 태어나는 순간, 즉 모태에 탁태(托胎) · 결생(結生)하는 찰나이다.
④본유(本有) : 본시유(本時有) · 전시유(前時有) 등이라고도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으로 생유(生有)로부터 사유(死有)에 이르는 기간이다.
*과약(果若) ; 과연(果然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알고 보니 정말로.
*난조지상(難遭之想 어려울 난/만날 조/갈 지/생각 상) ;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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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정명(定命) ; ①날 때부터 정하여진 운명. ②전생의 인연에 의하여 정하여진 목숨. 증겁(增劫)과 감겁(減劫)에 의하여 수명에 차이가 있는데, 나이가 팔만 살부터 100년마다 한 살씩 줄어 열 살 까지 줄었다가[減劫], 다시 100년마다 한 살 씩 늘어 팔만 살까지 이른다[增劫]고 한다.
*도병겁(刀兵劫) ; 중겁(中劫) 말기에 일어나는 소삼재(小三災)의 하나. 분노로 말미암아 서로 해치려는 마음에서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마다 무기가 되어 서로를 해치고 죽이는 재난이다. 도병겁은 칠일 밤낮 동안 계속되며 인구가 만 여명으로 줄어들어서야 비로소 자비심을 일으켜 끝이 나고 다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도병재(刀兵災) · 도재(刀災) · 도병중간겁(刀兵中間劫)이라고도 한다.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앉은삼재),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삼재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삼재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혼(夢魂) ; 꿈속의 넋.
*업신(業身) ; 업(業)의 몸[身]. 육식(六識)—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이 무량겁으로 모든 업을 능히 짓기도 하며, 모든 업을 능히 받기도 하므로 이름을 업신(業身)이라 한다.
[참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편찬 | 수덕사 능인선원)
사람에게 세 가지 몸이 있으니 첫째는 법신(法身)이요, 둘째는 업신(業身)이요, 셋째는 육신(肉身)이로다. 법신은 불신(佛身)이요, 업신은 곧 귀신(鬼身)이요, 육신은 곧 사람의 색신(色身)이로다.
색신 가운데 업신과 법신이 구족(具足)하여 서로 여의지 않건마는 중생의 업보(業報)가 중하여 다못 업신이 구원겁을 드나들며 사생(四生) 육취(六趣)의 육신(肉身)으로 인하여 모든 악업을 짓도다.(p231)

사람에게 법신(法身) · 업신(業身) · 육신(肉身), 세 가지 몸이 있다 하니 어떠한 것이 육신인고?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다. 지(地)는 살이요, 수(水)는 눈물 · 콧물 · 대소변이요, 화(火)는 따뜻한 기운이요, 풍(風)은 콧김 · 입김 · 동정(動靜)이니 이 네 가지를 부모에게서 얻어 육신을 지었다가 명(命)이 다하여 임종을 하매 지(地)는 땅으로 돌아가고, 수(水)는 물로 돌아가고, 화(火)는 불로 돌아가고, 풍(風)은 바람으로 돌아가 사대가 흩어지니 허황(虛荒)하기 일장춘몽(一場春夢)이요, 장마에 두엄 버섯이니라.

어떠한 것이 업신(業身)인고?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이 여섯 가지 식심(識心)이로다.
눈으로 일체 만물을 보아 탐하여 모든 업을 지으며, 귀로 일체 소리를 들어 좋고 언짢은 소견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코로 모든 냄새를 맡아 좋고 언짢은 소견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혀로 모든 음식을 맛보아 좋고 언짢은 소견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몸으로 춥고 더운 분별망상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뜻으로 밉고 어여쁘고 좋고 나쁜 일체 망상(妄想)을 내어 모든 업을 지어, 이 여섯 놈이 무량겁(無量劫)으로 드나들며 모든 업을 능히 짓기도 하며, 모든 업을 능히 받기도 하니, 이러므로 이름을 업신(業身)이라 함이로다.

어떠한 것이 법신(法身)인고?
일찌기 발심하여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여 다생죄업(多生罪業)을 참회하고, 옛 성현의 친절언구(親切言句) 천칠백 화두(話頭) 가운데 자기에게 합당한 화두를 분명히 결택(決擇)하여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중에 모든 망상(妄想)이 적적(寂寂)한 가운데 화두가 성성(惺惺)하여, 들지 아니하되 화두가 스스로 들림이 샘물 흘러가듯 간단(間斷)이 없이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에 이르러,
홀연히 망상 구름이 흩어지고 마음달이 홀로 드러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비추어 그 밝은 빛이 하늘과 땅이 궤멸(潰滅)하여도 이 광명(光明)이 길이 멸하지 아니하며, 이것을 이름하되 불생불멸지도(不生不滅之道)라 하나니라.

이같은 이치를 통달한 사람을 선지식이라 이름하며, 혹 도사(導師)라 이름하며, 혹 보살(菩薩)이라 이름하며, 혹 부처라 이름하나니, 천당(天堂) · 불찰(佛刹)에 임의 자재하여 천상(天上)에 가서 나매 천상 사람을 제도하며, 인간에 나매 인간을 제도함에 이르므로 인천(人天)에 스승이 되며, 사생(四生)에 자비로운 부모가 되는 고로 이 사람의 이름이 조어장부(調御丈夫) · 천인사(天人師) · 불(佛) · 세존(世尊)이로다.(p233~236)

누구든지 육신(肉身) · 업신(業身) · 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現像) 그대로가 곧 생사 없는 자리이니라.(p247)

꿈이라 하는 것은 업신(業身)의 동작인데, 깨어 있을 때는 생각만으로 헤매다가 잘 때 업신이 제 몸을 나투어 가지고 육신이 하던 행동을 짓는 것이니라.(p257)

인생은 자기 업신(自己業身)의 반영(反映)인 이 몽환(夢幻) 세계를 실상(實相)으로 알고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마치 은행나무가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이성(異性)으로 감응(感應)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같으니라.(p266)

우리가 느끼는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의 육식(六識)은 장소에 따라 변하고, 때에 따라 흩어지나니,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천류(遷流)하는 육식으로 어찌 인생이 근본 정신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p270)
*일구난설(一口難說 한 일/입 구/어려울 난/말씀 설) ; 내용이 복잡하거나 길어서 한[一] 입[口]으로는 다 설명(說明)하기 어려움[難].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 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매하다(昧-- 어두울 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모른다. 어둡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축원(祝願)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십악참회(十惡懺悔) ;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10가지 죄—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욕(貪慾), 진에(瞋恚), 사견(邪見)—를 지은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십중대계(十重大戒) ; 대승 불교에서, 보살이 범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열 가지 계율.
①살생, ②도둑질, ③간음, ④거짓말, ⑤술의 구입 및 판매, ⑥보살 및 비구나 비구니의 죄과를 들추어 말함, ⑦자기를 높이고 타인을 비방함, ⑧베푸는 데 인색함, ⑨화내어 타인의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음, ⑩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를 비방함 등을 금하고 있다.
*범망경(梵網經) : 이 경은 범어나 파리어(巴利語 pali)로 된 것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기록대로 본다면 본래 61품, 백이십 권 되는 원문을 구마라습이 번역하면서, 그 중 열째 권인 「노사나불이 말씀하신 보살의 심지 계품(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만을 번역하여 상•하 두 권으로 만들었다. 상권에는 심지 법문(心地法門)을 말하였고, 하권에는 보살의 십중대계(十重大戒)와 48 경구죄(輕垢罪)를 말하였는데, 경구죄란 것은 중대한 죄악은 아니나 깨끗하지 못한 허물이 된다는 뜻이다.
보살계는 심지 법문을 주장하는 대승계이며 성계(性戒)이다. 그러므로 이 경은 율부(律部)에 속하지 않고 <화엄경>과 같은 부류에 들게 된다.
이 경을 해석한 글이 많지마는 신라의 대현(大賢)이 지은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 3권과 원효(元曉)의 <사기(私記)> 2권과 의적(義寂)의 <범망경보살계본소(梵網經菩薩戒本疏)> 상•하권 같은 것들이 가장 유명하다.
*심지법문(心地法門) ; 마음바탕, 근본 마음자리 법문.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 법문.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어] dharma [팔리어]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 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 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대승계(大乘戒) ; 대승의 보살이 받아 지켜야 할 계율. 보살계라고도 한다.
「범망경」에서 설하는 십중금계(十重禁戒) ·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와 「선계경(善戒經)」에서 설하는 삼취정계(三聚淨戒)등을 말함.  이 삼취정계 안에는 율의계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대승계 속에는 소승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취정계란 ①부처님이 정한 규율을 지킴으로써 악행을 막는 섭률의계(攝律儀戒), ②한걸음 더 나아가 선행을 하는 섭선법계(攝善法戒), ③중생을 교화하고 그 이익을 위해 힘을 다하는 섭중생계(攝衆生戒)를 말한다.
*계상(戒相) ; 계(戒)의 상(相). 계율에 대한 생각. 그 계상(戒相)의 청정성, 집착의 여부는 그것을 일으키는 주체에 따라 달라진다.
[참고] 『화엄경』 60권본 권10 제14 명법품(明法品)(대정장9. p.460c)
不生持戒相故  於戒無著  是名淸淨尸波羅蜜

계를 지킨다는 상(相)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계에 집착함이 없다. 이것을 청정시바라밀이라 한다.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십선(十善) ; 십악(十惡)을 행하지 않는 일.
*십악(十惡) ; 나쁜 과보(果報)를 가져오는 열 가지 악(惡)한 행위. 몸[身]과 말[口]과 생각[뜻, 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십악업(十惡業) · 십불선업(十不善業) · 십악업도(十惡業道) · 십흑악(十黑惡) 등이라고도 한다.

몸[身]으로 짓는 세 가지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淫 삿된 음행. 邪行).
말[口]로 짓는 네 가지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생각[뜻, 意]으로 짓는 세 가지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또는 치암(癡暗 어리석음).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불과(佛果) ; 불인(佛因, 부처님이 되기 위한 인因. 즉 모든 선근공덕善根功德)의 대응어. 불도수행의 결과. 불위(佛位). 부처라고 하는 궁극의 결과. 결과로서 부처로 된 상태. 깨달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어름어름하다 ; ①말이나 행동을 똑똑하게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자꾸 우물쭈물하다. ②일을 대충하고 눈을 속여 넘기다.
*젓수다 ; ①궁중에서 ‘잡수다’를 이르던 말. 잡수다-->‘먹다’의 높임말. ②신과 부처님께 소원같은 것을 비는 것. ③(사람이 제사를)차려 올리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장삼(長衫) ; 스님의 웃옷.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를 넓게 만든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 ; 본이름은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 1권. 유송(劉宋)의 저거경성(沮渠京聲) 번역. 세존이 미륵보살에게 12년 뒤에 목숨을 마치면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도솔천의 정경을 묘사한 다음, 도솔천에 왕생하여 미륵보살을 만나기 위한 수행법을 설함.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 1권.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 번역.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 미래에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 후 세 번의 법회에서 설법하여 수많은 중생을 구제한다고 설함.
*사교(邪敎 간사할 사/가르칠 교) ; ①부정한 가르침. 외도(外道)의 가르침. ②사회에 해를 끼치는 나쁜 짓을 가르치는 종교.
*미래불(未來佛) ; ①미래에 나타날 부처님. 특히 미래에 나타날 미륵불(彌勒佛)은 현재 미륵보살로 도솔천에 머물면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계시며,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 후 세 번의 법회에서 설법하여 수많은 중생을 구제한다고 예정되어 있다.
②미래세에 성불(成佛)할 가능성을 가진 중생을 일컫는 말. 일체 중생은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기 때문애, 여러 가지 수행을 통해 미래세에 성불할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중생을 미래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기(受記, 授記) ; 부처가 그 제자들에게 수행하여 얻은 깨달음의 결과로서 언제 어디서 부처가 되리라고 예언함. 또는 그 교설(敎說).
*벌로 ; ‘건성으로. 함부로. 멋대로’의 사투리.
*사상(事象 일 사/모양 상) ; 관찰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여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물(事物)과 현상(現象).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극일지공(剋日之功 해내다·이루어내다 극/날·해·기한 일/~에·~에 있어서 지/공·공로·공적 공) ; 기한[日] 내에[之] 성취하는[剋] 공(功).

*만불실일(萬不失一 일만 만/아니다·아니하다·없다 불/잃다·잘못하다·그르치다·어긋나다 실/한 일) ; 만(萬)에 하나도 그르치지[失 잃지·잘못하지·어긋나지] 아니하다[不]. 만(萬)에 하나도 그르침[失]이 없다[不]. ①조금도 틀림이 없다. ②실수(失手)가 한 번도 없음.

[참고] 『고봉선요(高峰禪要)』 ‘시중(示衆 其五)’ (고봉 화상 |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p69~70, 72.

若論此事인댄 如大火聚 烈焰亘天하야 曾無少間이라 世間所有之物을 悉皆投至라도 猶如片雪 點着便消어니 爭容毫末이리오. 若能恁麽提持하면 剋日之功을 萬不失一이어니와 儻不然者인댄 縱經塵劫이라도 徒受勞矣리라

 

만일 이 일[此事]을 말하자면 마치 큰 불무더기의 맹렬한 불길이 하늘까지 뻗쳐서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는데, 세간의 온갖 물건을 무엇이나 집어 던져도 한 조각의 눈[雪]이 닿자마자 곧 녹아버리는 것과 같나니 어찌 털끝만치인들 딴 생각이 용납되겠는가. 만일 이렇게 화두를 잡드리해 나가면 기한내에 성취하는 공(功)을 만(萬)에 하나도 잃지 않겠지만 만일 그렇게 못한다면 비록 오랜 세월을 경과하여도 고생만 할 뿐이리라.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찌깽이 ; ‘찌꺼기’의 사투리.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 ;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 임제(臨濟)가 세운 네 가지의 학자 제접법인 사료간(四料揀)의 하나.
*사료간(四料揀) : 임제(臨濟)가 세운 네 가지의 학자 제접법. 인(人)은 주체로서의 자기(自己). 경(境)은 객관(客觀). 탈(奪)은 부정하는 것.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08. 212.
四料揀(사료간)
奪人不奪境(탈인불탈경)은  待下根(대하근)이요  奪境不奪人(탈경불탈인)은  待中根(대중근)이요  人境兩俱奪(인경양구탈)은  待上根(대상근)이요  人境俱不奪(인경구불탈)은  待出格人(대출격인)이라.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은 하등 근기들을 다루는 법이고,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은 중등 근기들을 다루는 법이며,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은 상등 근기를 다루는 법이고,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지 않는 것은 ‘격 밖의 사람[出格人]’을 다루는 법이다.

*‘생사 없는 곳까장’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산스크리트어]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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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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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선요』 법문(No.217)—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 |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이 정진해야 |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여야 |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없다.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나아가야 | 구경(究竟)의 깨달음.


*선요(禪要) ; 『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고봉선요(高峰禪要)』 ‘시중(示衆 其二十)’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p129~131, 134~135.
若論此一段奇特之事인댄 人人本具요 箇箇圓成이라 如握拳展掌에 渾不犯絲毫之力이언마는 祗爲心猿 擾擾하고 意馬 喧喧하야 恣縱三毒無明하야 妄執人我等相이 如水澆氷에 愈加濃厚하야 障却自己靈光하야 決定無由得現하나니

만일 이 한 가지 기특한 일을 말하자면 사람마다 본래 갖추었고 제각기 원만히 이루었나니, 마치 주먹을 쥐었다가 손바닥을 펴는 것과 같아서 실끝만한 힘도 전혀 들지 않는다. 다만 마음의 원숭이[心猿]가 흔들리고 의식의 말[意馬]이 시끄러워 삼독(三毒) 무명(無明)을 방자하게 놓아두며 아상, 인상 등을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이 얼음에 물을 뿌리면 더욱 더 두꺼워지듯 자기의 신령스러운 광명을 장애하여 결코 나타날 수 없게 된 것이다.

若是生鐵鑄就底漢子 的實要明인댄 亦非造次니 直須發大志立大願하야 殺却心猿意馬하며 斷除妄想塵勞하고 如在急水灘頭泊舟相似하야 不顧危亡得失과 人我是非하고 忘寢忘餐하며 絶思絶慮하야 晝三夜三에 心心相次하며 念念相續하야 剳定脚頭하고 咬定牙關하고 牢牢把定繩頭하야 更不容絲毫走作이니라 假使有人이 取你頭하며 除你手足하며 剜你心肝하야 乃至命終이라도 誠不可捨니 到者裡하야사 方有少分做工夫氣味하리라

만일 생철(生鐵)로 부어 만든 놈이 적실(的實)히 밝혀내려고 하면 또한 경솔히 할 게 아니니 당장에 큰 뜻을 내고 큰 원(願)을 세워 마음 원숭이[心猿]와 의식의 말[意馬]을 죽이고 번뇌 망상을 끊어야 한다. 또한 물살이 거센 여울에 배를 대려하는 것과 같아서 위태로움 · 죽음, 얻음 · 잃음, 아상 · 인상, 옳음 · 그름 등을 돌아보지 말고, 잠도 끼니도 잊고 생각도 걱정도 끊고서 온종일 밤새도록 마음마음이 간단이 없고 생각생각이 계속하여 다리를 딱 버티고 어금니를 악물고 화두[繩頭]를 단단히 잡고서 다시 털끝만치도 딴생각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설령 어떤 사람이 그대들의 머리를 베어 가고 손과 발을 자르고 심장과 간장을 오려내어 목숨이 떨어지는데 이를지라도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조그만치 공부한 기미가 있을 것이다.

嗟乎라 末法에 去聖時遙하야 多有一等泛泛之流 竟不信有悟門하고 但只向者邊穿鑿하며 那邊計較하나니 直饒計較得成하며 穿鑿得就라도 眼光落地時에 還用得着也無아 若用得着인댄 世尊은 雪山六年하시고 達摩는 少林九載하시고 長慶은 坐破七箇蒲團하시고 香林은 四十年에 方成一片하시고 趙州는 三十年에 不雜用心하시니 何須討許多生受喫이리오

아! 슬프다. 말법에 성현과의 시대가 멀어져서 한결같이 범범한 무리들이 많이 있어 깨달음의 문(門)이 있는 것을 끝내 믿지 않는구나. 여기에서 천착(穿鑿)하고 저기에서 계교(計較)하니 설령 계교하여 이루게 되고 천착하여 성취되었더라도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소용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이 설산(雪山)에서 6년 고행하시고, 달마대사가 소림굴(少林窟)에서 9년 면벽하시고, 장경(長慶) 스님이 앉아서 방석이 일곱 개나 헤지도록 좌선하시고, 향림(香林) 스님이 40년만에 비로소 일념을 이루시고, 조주(趙州) 스님이 30년 동안 잡되게 마음을 쓰지 않으시면서, 허다한 고생을 하였겠는가!

更有一等漢子 成十年二十年토록 用工하되 不曾有箇入處者는 只爲他宿無靈骨하야 志不堅固하고 半信半疑하며 或起或倒하야 弄來弄去에 世情은 轉轉純熟하고 道念은 漸漸生踈하야 十二時中에 難有一箇時辰도 把捉得定하야 打成一片이니 似者般底는 直饒弄到彌勒下生인들 也有甚麽交涉이리오

또 어떤 무리들은 10년, 20년이 되도록 공부를 하였으되 깨달은 것이 없는 것은, 그가 전생에 선근이 없기 때문에 뜻이 견고하지 않고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며 혹은 일어나고 혹은 거꾸러져 희롱해 오고 희롱해 감에 세상의 정(情)은 더욱 순숙해지고 도(道)에 대한 생각은 점점 생소해져서 24시간 중에 한 시간도 선정에 들어 일념을 이루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놈들은 설령 희롱하여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함에 이르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若是眞正本色行脚高士인댄 不肯胡亂하고 打頭에 便要尋箇作家하야 纔聞擧着一言半句하면 更不擬議하고 直下에 便恁麽信得及作得主把得定하야 孤逈逈峭巍巍하며 淨裸裸赤灑灑하야 更不問危亡得失하고 只恁麽捱將去라가 驀然繩斷喫攧하면 絶後再甦하야 看他本地風光하리니 何處에 更覓佛矣리오

만일 진정한 본분 행각승[本分行脚高士]이라면 함부로 어지럽게 하지 않고, 당초에 어느 선지식을 찾아가 한마디 말씀이나 반구절 설해 주는 것을 듣자마자 더 망설이지 않고 당장 이렇게 믿으며 주관이 확립되고 안정되어, 외롭게 뛰어나고 빼어나 드높으며, 발가벗은 듯하고 맑아 씻은 듯할 것이다. 다시는 위태로움과 죽음과 얻음과 잃음을 묻지 않고 다만 이렇게 정진해 나가면 문득 밧줄이 끊어져 곤두박질을 하고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볼 것이니 어느 곳에서 다시 부처[佛]를 찾겠는가.

 

(1) 12분 40초.

 

(2) 11분 14초.



[법문] 송담스님(No.217)—1983년(계해년) 추계산철 해제 법회(83.09.30.음) (용217)

(1)------------------

만약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일대사인연의 근원을 살펴볼 거 같으면 사람 사람이 본래 다 갖춰져 있는 것이여. 본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낱낱이 다 원만(圓滿)하게 다 이루어져 있는 것이여.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닦지 않고 깨닫기 이전에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주먹을 피어서 손바닥을 만들고, 그 손바닥을 다시 쥐어서 주먹을 만들고 한 것처럼 조끔도 힘을 들일 것이 없어.

따라서 눈으로 보는 것은 전부가 다 『화엄경』이요, 귀로 듣는 것은 전부가 다 법문(法門)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작위(作爲)하는 모든 행동은 다 그것이 불사(佛事)요.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행하고 느끼고 하는 그리고 말하고 냄새 맡고 하는 주관적인 것이나 객관적인 것이 전부가 다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의 불사요, 설법이요, 경전이요.

그래서 부처와 조사(祖師)가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하시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을 해서 닦아 가지고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에 부처와 조사의 허물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고 새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건마는, 우리는 심(心), 마음이, 마음의 원숭이[心猿]가 나부대고, 뜻의 말[意馬]이 날뛰는 바람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종이 되어 가지고 망령되이 인아상(人我相)을 내고, 일어나는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그럴 때마다 얼음 위에다가 물을 찌뜨린 거와 같애서 점점 얼음덩어리는 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그래 가지고 한 생 한 생 거듭될 때마다 업(業)은 점점 더 깊어지고 얽히고설켜서 자기의 영광(靈光), 자기의 신령스러운 빛은 그 업(業)으로 인해서 가리워져 가지고 캄캄한 칠통(漆桶) 칠야삼경(漆夜三更)처럼 되어 가서 영원히 헤어날 길이 없는 까닭은 무엇이냐?

사람을 만나지 못한 탓으로, 첫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자신, 자기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를 못했고, 둘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길을 가리켜 줄 수 있는 본분작가(本分作家)를 만나지 못한 탓으로 우리는 이렇게 본래 불보살(佛菩薩) 불조(佛祖)와 조끔도 차등이 없는 그러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대사(一大事)를 요달치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무량겁을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 빠져서 와서, 금생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또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생사의 윤회는 끄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쇠로 지어 붓은 그러한 굳은 결심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이것입니다.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이 생사윤회를 계속 치성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의 마음속에 원숭이와 뜻 속에 말, 그 원숭이와 망아지를 때려잡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 일이 얼마만큼 어려우냐 하면, 급히 흘러가는 그 급수(急水),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애.
물결이 세지 아니한 데 배를 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물살이 센 데다가는 물살 따라서 배도 따라서 흘러 내려갈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배를 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위태로운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인아(人我) 시비(是非)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밥 먹고 옷 입은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잠깐도 한눈팔 겨를이 없이 발에다가 힘을 주고 버티면서 그 배를 대는 데, 잠깐 사이도 딴생각을 낼 겨를이 없다.
어떠한 사람이 머리를 내 머리를 짤라 가고, 손발을 짤라 가고, 심장과 간장을 도려내서 죽음에 이르른다 할지라도 이 배를 기어코 댈려고 하는 그 마음을 쉬지 아니한 것처럼, 이러한 정도로 정진을 지어가지 아니한다면 어찌 공부를 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말법에 이르러서 성현 가신 때가 멀어.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이 정법(正法)을 믿는 마음이 철저하지를 못해 가지고,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다 할지라도 이리저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고, 보고 듣고 알고 그러한 마음속에 그러한 것으로써 살림을 삼아 가지고, 금년도 이럭저럭 또 내년도 이럭저럭 한 철 한 철, 철은 지나가지만, 정진 속에 사량계교(思量計較)와 천착(穿鑿)으로써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수행은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때에 참으로 그것을 그러한 정진력을 써먹을 수가 있느냐?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있다면 세존(世尊)은 무엇 때문에 6년 동안에 설산(雪山) 고행을 하셨으며, 달마대사는 소림(少林)에서 9년 동안을 왜 묵무언(默無言) 하셨으며, 장경(長慶)선사는 7개 포단(七個蒲團)을 앉아서 뚫었으며, 향림(香林)은 왜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으며, 조주(趙州)는 30년에사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한 필요가 있겠느냐.(11분50초~24분30초)





(2)------------------

이 참선은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이 사량분별이 끊어지고 번뇌 망상이 없어지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마저도 잊어버려. 그래 가지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밥 먹되 밥맛을 모르고,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 어떠한 공안을 보나 하나도 맥힘이 없어, 자기 나름대로. 조주 무자(無字)도 맥힐 것이 없고, 판치생모(板齒生毛)도 맥힐 것이 없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들어봐도 하나도 의심이 안 간다 그 말이여.
부처라고 하나 중생이라고 하나, 된장이라고 하나 똥이라고 하나, 천상천하 두두물물이 무엇을 봐도 그것이 다 바로 그것이 자기요, 자기와 부처와 이 법계가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이 도리는 이게 체중현 도리여. 공리(空理)라 그 말이여.

여기에 이르러서 만약에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점검을 받지 못하면 자기도 '초견성이다, 한소식했다' 해 가지고, 그러한 그 체중현의 경지에서 보면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의심이 없고 맥힐 것이 없으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가서는 이빨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그 체중현 도리로써 자기의 살림을 삼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일대사 문제를 요달했다고 생각을 하게 되지만, 현중현 도리에 나아가서는 그것 가지고는 되지를 안 혀.

더군다나 후배, 다른 사람이 공부를 해 가지고 자기에게 왔을 때에 '그 사람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냐, 안 얻었느냐?' 그것을 점검하는 데에 나아가서 자기의 경지와 같으니까 '옳다'고 일러줄 수밖에는 없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에 자기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게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기 때문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지만, 바르게 닦지를 못하고 바르게 깨닫지를 못하면 저 망하고 남 망하게 하고 마침내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는 그런 중대한 죄과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산철 두 달 동안에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어떻게 수행을 해 가야 하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지어 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정말 차라리 안 하려면 몰라도 일단 이 문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고 정진을 해 나가는 마당에는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마한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써 작은 견처를 가지고 만족을 삼지를 말고, 고조사(古祖師)에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진대는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자기의 견처(見處)를 용감하게 부정을 해 버리고 언제나 처음 발심(發心)할 때의 그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견처(見處)와 견지(見地)에 이르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견처를 부정해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발심 수행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좋은 병에다가 악지악각(惡知惡覺), 악한 알음 악한 깨달음—마치 우리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어떠한 견처도 스스로 그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좋은 병에다가 썩은 변질한 고약한 음식을 담은 거와 같애서 그 병 속에는 아무것도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는다 하더라도 그 병 속에 담어져 있는 변질된 고약한 악취가 나는 음식 때문에 새로 담은 음식까지도 먹지 못하게 되는 데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 병 속에 좋은 음식을 담으려면 먼저 그 병 속에 들어 있는 변질된 물질을 까꾸로 다 쏟아 버리고, 열 번 스무 번 완전히 그 속에서 그 냄새가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씻고 또 씻고 소독을 해서 그래도 또 냄새가 나면 그것을 삶고 해 가지고라도 기어코 그 병을 깨끗이 해야, 완전 소독을 해야 그런 연후에라사 거기에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아도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 어떠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가지고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자기 속에 조그마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러한 견처로 인해서 어떠한 좋은 법(法)도 들어갈 수가 없고, 좋은 법문을 들어도 바로 자기식(自己式)으로 변질이 되어서 올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그러한  불견(佛見), 법견(法見), 어떠한 경전에 있는 말씀이고, 어떠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도 깨끗이 버려 버리고 언제나 초심(初心)! 초심인으로써의 마음가짐과 지조를 가지고 정진을 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른 깨달음을 얻었어도 그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을 가져서는 아니 되거든, 바른 깨달음 아닌 그러한 견처를 가지고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24분38초~35분5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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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 ①깨달음과 중생제도의 중대한 부처님의 임무. ②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인연. ③부처님이 정도,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여러가지 방편으로 이끌어, 모두 구한다고 하는 중대한 인연. 일단인연(一段因緣)이라고도 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진묵겁(塵墨劫) ; 티끌[塵]이 쌓여 먹[墨]이 될 만큼의 오랜 시간[劫].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 · 탱화 · 불구(佛具) · 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심원의마(心猿意馬) ; 마음[心]이라는 원숭이[猿]와 생각[意]이라는 말[馬]. 의마심원(意馬心猿).
마음과 생각이 제멋대로 대상(對象)을 향해 항상 동요하고 고요하지 못한 모양이 질주하여 달리는 말[馬]과 쉼 없이 움직이고 조잘대는 원숭이[猿]와 흡사하기 때문에 생긴 비유이다. 일정하지 않게 예측불허로 변화하는 생각을 나타낸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인아상(人我相) ; 나와 남을 갈라놓고,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남을 경시하는 마음.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영광(靈光) ; 영묘불가사의(靈妙不可思議)한 광명을 놓는 것. 즉 중생 본구(本具)의 불성을 가리킨다.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야삼경(漆夜三更 옻·검다 칠/한밤중 야/석 삼/밤 시각 경) ; 캄캄하게 어두운 한밤중.
*삼경(三更 석 삼/밤 시각 경)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이다.
*본분작가(本分作家) ; 인간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부처의 성품[佛性]을 체득한 사람.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 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불조(佛祖) : 부처님과 조사(祖師), 불(佛)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조(祖)는 역대(歷代)의 조사를 말함.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 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생사고해(生死苦海) ; 생사윤회하는 고통의 바다.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윤회의 고통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미래제(未來際 아닐·미래 미/올·미래 래/끝 제) ; 미래의 변제(邊際 : 시간이나 공간, 정도程度 따위에서, 그 이상 더는 없는 한계限界). 미래는 끝이 없으므로 미래제라는 말은 다시 말해 영원한 미래, 영원과도 같은 오랜 시간을 뜻한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여울물 ; 여울을 흐르는 물.
*여울 ; 강이나 바다에서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말법(末法 끝 말/부처님의 가르침 법) ; 말법시대(末法時代).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교법(敎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을 시기별로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으로 분류하는데 정법이 쇠퇴한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처음 정법시대는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를 얻게 되지마는, 그 다음 상법시대는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그 다음 말법시대는 곧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만 남아 있어 수행하고 증득하는 자가 없는 시기이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사염주(四念住)를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될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곧 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 다 반드시 견성성불한다』 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 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사학(邪學)과 외도(外道)가 번성한 이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뿐 아니라 정법은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 입멸 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때에’ ; 안광낙지시(眼光落地時). '눈빛[眼光]이 땅[地]에 떨어질[落] 때[時]'라는 말로 '죽을 때'를 말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7. (가로판 p70)
工夫가  若打成一片하면  則縱今生에  透不得이라도 眼光落地之時에  不爲惡業所牽하리라

공부가 만일 한 조각을 이룬다면 비록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감을 적에 악업에 끌리지 아니하리라.

註解(주해) 業者는  無明也요  禪者는  般若也라  明暗不相敵은  理固然也니라

업(業)이란 무명이요, 선(禪)은 지혜다. 밝은 것[明]과 어두운 것[暗]이 서로 맞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 • 句中玄 • 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가로판 p215, p219)
[三玄] 삼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삼현 ; 보조국사의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참고 ❶]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보조지눌 1158~1210 |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176~180. p200~20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542~546.

問 向來所說 旣聞命矣 古今禪門達者 見性成佛 豈非一分性淨之體 不具相用耶

또 물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잘 들었다. 그러나 고금 선문(禪門)의 통달한 사람이 견성하여 성불한 것이 어찌 일부분 성정(性淨)의 체성이 모양[相]과 작용[用]을 갖추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答 不然 汝豈不聞 永嘉眞覺大師 一宿曹溪 開悟本心作歌 其略 曰 心鏡明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萬像森羅影現中 一顆圓光 非內外 一性 圓通一切性 一法 遍含一切法 一月 普現一切水 一切水月 一月攝 諸佛法身 入我性 我性 還共如來合

나는 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왜 듣지 않았던가? 영가 진각(眞覺) 대사는 조계(曹溪)에서 하룻밤을 묵다가 본심을 깨치고 노래를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마음 거울이 밝아 걸림이 없음이여. 탁 트이고 밝게 사무쳐 사계(沙界)를 두루했다. 삼라만상의 그림자가 그 가운데 나타나니, 한 덩이 뚜렷한 광명은 안팎이 없다. 한 성품이 일체의 성품에 뚜렷이 통하고 한 법이 일체의 법을 모두 머금고 있다. 한 달이 일체의 물에 두루 나타나매, 일체의 물의 달이 한 달에 포섭된다. 모든 부처의 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오매, 내 성품이 여래와 하나로 합한다’ 하였다.

又英邵武 開悟本心作偈 其略 曰 十方齊現一毛端 華藏重重帝網寒
又大慧禪師 秉拂云 欲識佛性義 當觀時節因緣 時節 若至 其理自彰 乃至須知微塵諸佛出世 降王宮坐道場 轉法輪降魔軍 度衆生入涅槃 摠不出這箇時節 諸人 若信得及 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

또 영소무(英邵武)도 본심을 깨치고 게송을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시방 세계가 한 털끝에 한꺼번에 나타나매, 화장세계(華藏世界)가 중중하여 제망(帝網)이 차다[寒]’
또 대혜(大慧) 선사는 불자(拂子)를 들고 ‘불성(佛性)의 뜻을 알고자 하면 시절인연을 관찰해야 하나니, 시절이 오면 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티끌수 같이 많은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와 왕궁에 태어나 도량에 앉고, 법륜을 굴려 마군을 항복하게 하고 중생을 구제하신 뒤에 열반에 들되, 그 모두가 이 시절을 벗어나지 않은 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런 줄을 믿으면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이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古今)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 하였다.

如是等開悟本心 得見自心鏡內 帝網重重無盡法界者 禪門傳記中 不可勝數 昧者 不知其源 不覽禪錄 亦不見華嚴大論之旨故 纔聞禪者 說卽心卽佛 以謂不過性淨佛也 是大愚惑
非謂華嚴敎門 說理未盡 但學者 滯在言敎義理分際 未能忘義了心 速證菩提 所以達摩西來 欲令知月不在指 法是我心故 不立文字 以心傳心耳

본심을 깨치고 제 마음 거울 속에 제망(帝網)처럼 중중한 무진법계(無盡法界)를 본 이런 일들은 선문의 기록 가운데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있다. 그런데 우매한 사람들은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선문의 기록도 보지 못하고, 또 화엄대론(華嚴大論)의 뜻도 보지 못하였으므로 참선하는 이들의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것은 성정(性淨)의 부처에 지나지 않는다 하니, 매우 어리석고 미혹한 일이다.
화엄교문에서 이치를 다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학자들이 말로 표시된 의리(義理 사상이나 내용)의 한계에 걸리어, 능히 뜻을 잊고 마음을 깨달아 보리를 빨리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와 달은 손가락에 있지 않듯이, 법이 곧 내 마음임을 알게 하려 하셨기 때문에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마음을 마음에 전한 것이다[以心傳心].

是以禪門 只貴破執現宗 不貴繁辭義理施設 故 所有破執言句 近於一分理性 離言絶慮之義 昧者 不知其義 每將相似語例 便謂同於頓敎 是大不然 設於華嚴無盡法界重玄法門 生於法愛 解分 未忘 亦爲所破也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다만 집착을 부수고 종지(宗旨)를 나타내는 것을 귀히 여기고, 번거로운 말로 뜻을 나열해 놓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을 타파한 여러 가지 언구(言句)가 일부분 말을 여의고 생각이 끊어진 이성(理性)의 뜻에 어느 정도 가깝지마는, 우매한 사람들은 그 뜻를 알지 못하고 매양 비슷한 말의 예(例)를 가져 돈교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설사 「화엄경」의 다함없는 법계의 매우 심오한 법문에 대해서도 그 법에 애착하여 지해(知解)를 버리지 못하면 그것도 타파해야 할 것이다.

台敎 亦云 圓門生着 尙爲初敎 所破 但性海果分 是法界證處 不可預談 亦不是心思意解 所及 故 淸凉祖師 亦云 圓音 非扣而常演 果海 離念而心傳 又云 佛證離言
是知禪門 離念相傳 是頓證法界處也 決非頓敎中 不說法相 唯見眞性 一念不生 卽名爲佛也

천태교(天台敎)에서도 ‘원문(圓門)이라도 집착하는 마음을 내면 초교(初敎)와 같이 타파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다만 성해(性海)의 과분(果分)은 법계를 증득한 곳이라, 미리 말할 수도 없고 또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뜻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량 조사는 ‘원음(圓音)은 묻지 않아도 항상 연설하시고, 과해(果海)는 생각을 여의고 마음으로 전한다’ 하고, 또 ‘부처님은 말을 여의었음을 증득하셨다’ 하였다.
이로써 선문에서는 생각을 여의고 서로 전한 것이 법계를 단박 증득한 곳이요, 결코 돈교에서와 같이 법상(法相)을 설하지 않고 오직 진성만 보아 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곧 ‘부처’인 것은 아닌 줄을 알아야 한다.

何以知其然 禪有三玄門 一 體中玄 二 句中玄 三 玄中玄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선문에는 삼현문(三玄門)이 있다. 첫째는 체중현(體中玄 체 가운데 현)이요, 둘째는 구중현(句中玄 구 가운데 현)이며, 셋째는 현중현(玄中玄 현 가운데 현)이다.

初體中玄門 引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等事事無碍法門 以爲初機悟入之門
此亦是言敎中 解分 未忘故 以句中玄無跡平常灑落言句 令其破執 頓忘佛法知解也 此亦有灑落知見 灑落言句故 以玄中玄良久默然棒喝作用 鍛鍊
當此之時 頓忘前來第二玄門灑落知見 灑落言句 故 云 得意忘言道易親 是謂頓證法界處也(此中三玄 雖非臨濟本意 且順古師之意 明之)

첫째의 체중현의 문에서는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자기와 타인은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는 등의 일일이 서로 걸리지 않는[事事無碍] 법문을 인용하여, 첫 근기의 깨쳐 들어가는 문을 삼았다.
그러나 이것도 언교(言敎)에 대해 지해(知解)와 분별을 버리지 못했으므로, 구중현의 자취 없고 평상(平常)한 쇄락(灑落 산뜻한)한 언구(言句)로 그 집착을 부수어 불법의 지해를 단박 잊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쇄락한 지견과 쇄락한 언구가 있기 때문에, 현중현의 양구(良久)와 방할(棒喝) 등의 작용으로 단련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앞의 둘째 현문의 쇄락 지견과 쇄락 언구를 잊기 때문에 ‘뜻을 얻고 말을 잊으매 도와 친하기 쉽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법계를 단박 증득하는 곳이다.(이 가운데 비록 삼현三玄이 임제臨濟의 본의가 아니나 옛 스님의 뜻을 따라 밝힌 것이다)

禪門 亦有爲初機下劣人 指示隨流妄染中 有性淨妙心 令其易解信入 信入然後 忘其解分 方爲親證
若不忘解分 坐在解脫深坑 不能於萬行緣起門中 轉身無滯故也

선문에도 처음 들어온 사람이나 하열한 근기를 위해 흐름을 따르는 허망과 더러움[妄染] 속에도 성품이 깨끗한 묘한 마음[性淨妙心]이 있다고 가리켜 보여, 그들로 하여금 쉽게 알고 믿어 들어가게 하였다. 믿어 들어간 뒤에 그 지해와 분별을 잊어야 비로소 몸소 증득하였다 할 수 있다.
만약 지해와 분별을 잊지 못하면,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 속에 앉아 있을 것이니, 그것은 온갖 행의 연기문 가운데서 몸을 돌려 걸림이 없이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고 ❷]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는 글)’ p210~211. P216~217. P229. P23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p564~565. P571.

禪門亦有爲密付難堪 借敎悟宗之者 說眞性緣起 事事無碍之法 如三玄門 初機得入 體中玄所明云 無邊刹境自他 不隔於毫端 十世古今始終 不離於當念 又云 一句明明該萬像等 是也

선문에도 은밀히 부촉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교문을 빌어, 종지를 깨닫는 자를 위하여 진성(眞性)이 연기(緣起)하는 사사무애 법을 설하는 경우도 있으니, 삼현문(三玄門)에서 처음 근기[初機]가 들어갈 수 있는 체중현(體中玄)에서 밝힌 것과 같다. 거기에 “가없는 세계 경계[刹境]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하고, 또한 “한 글귀가 밝고 밝아 온갖 현상을 거두어 들인다”한 등등이 이것이다.

禪門中 此等圓頓信解 如實言敎 如河沙數 謂之死句 以令人生解碍故 竝是爲初心學者 於徑截門活句 未能參詳 故 示以稱性圓談 令其信解不退轉故 若是上根之士 堪任密傳脫略窠臼者 纔聞俓截門 無味之談 不滯知解之病 便知落處 是謂一聞千悟 得大摠持者也

선문 가운데도 이런 원돈(圓頓) 신해(信解)하는 진실한 말씀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지만, 이것을 사구(死句)라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해의 장애를 내게 하기 때문이며, 아울러 초심 학자는 경절문(徑截門)의 활구(活句)를 아직 참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품에 부합하는 원만한 말씀을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여 퇴전치 않게 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상근기로서 은밀히 전한 뜻을 감당하여 기존의 격식[窠臼]을 벗어날 수 있는 이라면, 경절문의 맛없는 말을 조금 듣기만 하고도 알음알이[知解]의 병통에 걸리지 않고 곧 속뜻[落處]을 아니, 이 이를 ‘하나를 듣고 천을 깨달아 대총지(大摠持)를 얻은 자’라 한다.

禪門亦有多種根機 入門稍異 或有依唯心唯識道理 入體中玄 此初玄門 有圓敎事事無碍之詮也 然 此人 長有佛法知見在心 不得脫灑 或有依本分事祇對灑落知見 入句中玄 破初玄門佛法知見 此玄 有徑截門 庭前栢樹子麻三斤等話頭

선문에도 또한 여러 가지 근기가 있어서 들어가는 문이 다소 다르다. 어떤 이는 유심(唯心)과 유식(唯識)의 도리에 의하여 체중현(體中玄)에 들어가기도 하니 이는 처음 현문[初玄門]인데, 원교의 사사무애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항상 불법의 지견(知見)이 마음에 남아있어서 이를 벗어나 깨끗함을 얻지 못한다.
어떤 이는 본분사에 의지하여 쇄락한 지견에만 대하여 구중현(句中玄)에 들어가 초현문(初玄門)의 불법 지견을 타파한다. 이 현문(玄門)에 경절문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와 마삼근(麻三斤) 등의 화두가 있다.

然 立此三玄門古禪師之意 以本分事祇對話頭 爲破病之語 故 置於第二玄 然 未亡灑落知見言句 猶於生死界 不得自在 故 立第三玄中玄 良久默然棒喝作用等 破前灑落知見 所以云 三玄施設 本由遣病 若望上祖初宗 卽未可

그러나 이 삼현문을 세운 것은 옛 선사의 뜻인데, 본분사에 상응하는 화두로 병을 타파한다는 말을 삼기 때문에 제이현(第二玄)에 둔 것이다. 그러나 쇄락한 지견이라는 언구를 잊지 못하여 오히려 생사에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삼(第三) 현중현(玄中玄)의 양구, 묵연, 방, 할의 작용 등을 세워서 앞의 쇄락한 지견을 타파한다.
그러므로 “삼현문을 시설한 것은 본래 병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 만일 옛 조사의 처음 종지에서 보면 그것도 옳지 않다”

*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2분 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한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19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2분 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2분 26초)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어떤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가려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2분 36초)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❺]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반기이파) (4분 18초)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참고 ❻] 전강선사(No.026)—전강선사 일대기 제13호(경술1970년 12월 22일 새벽.음) (1971년 1월 18일 새벽)(1분 57초)
체중현(體中玄)은 고대로—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무일물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로 체중현이라 헌다든지, 모도 그러헌 그 법견(法見)을 가지고 체중현이라 햐.
왜 향상(向上)도 그 체중현일 것이고 뭐 그렇지 그 뭐여?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도 그 체중현 밖에 더 되아?

귀로 들을 수 있고, 뜻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헐 수 있고. 고러헌 것 가지고는, 체중현 가지고는...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경(經)부텀 들으면 아는 것이여. 들어가지고 아는 것이 체중현이여.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구중현(句中玄)이여. 구중현이라는 것은 처컥 들으면 벌써 그만 그 체중현 해(解)는 벗거져.
'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는디, 한 물건도 없는 그 가운데에 역무일물(亦無一物)이, 또한 일물지해(一物之解)도 없다' 요렇게 해서 고 지견(知見)까장 벗거질 수가 있지마는, 고것도 인천위사(人天爲師)는 되아. 인천의 스승은 된다 했어.

그러나 이 현중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되어야지.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척, 그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인자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그 말이여.(32분56초~34분55초)

*당적(當敵 막다·지킴 당/원수·적·상대 적) ; 대적(對敵)해 능히 감당(堪當)함.
*세존(世尊) : [범] Bhagavat ; Lokanatha ; Lokajyestha의 음역(音譯)으로 바가범(婆伽梵) · 로가나타(路迦那他) · 로가야슬타(路伽惹瑟吒)라 하며 부처님 십호(十號)의 하나, 부처님은 원만한 공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시므로, 이렇게 부르며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소림(少林) : 중국 하남성(河南省) 숭산 소실봉(嵩山少室峰) 아래에 있는 소림사(少林寺)를 말한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達摩大師)가 9년 동안 이 절 석굴속에서 면벽(面壁)하고 있다가,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하여 중국에 선법(禪法)이 퍼지게 되었다.
*장경(長慶) 스님 ; (856-932) 설봉의존(雪峰義存)의 제자. 속성은 손(孫)씨, 법명은 혜릉(慧陵) 법호는 장경, 시호는 초각(超覺)대사.
*포단(蒲團 부들 포/둥글 단) : ①좌선할 때 깔고 앉는 방석(方席). ②부들풀로 만든 둥근 방석. 근래에는 이 포단 대신 '좌복(坐服)'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향림(香林) 스님 ; (870-949) 청원(靑原)하 제6세인 운문문언(雲門文偃)의 제자. 속성은 상관(上官), 법명은 징원(澄遠), 법호는 향림.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조주(趙州) : (778 – 897) 이름은 종심(從諗)이고 속성은 학(郝)씨인데, 산동성(山東省) 조주부(曹州府)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南泉) 보원선사(普願禪師)의 법을 받고, 그 문하에서 20년 동안 있었다. 80세까지 각처로 돌아다니다가[行脚] 비로소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서 학자들을 제접(提接)하기 40년. 당나라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 120세에 입적하였다. <어록(語錄)> 3권이 남았고, 그의 교화가 참으로 커서 「조주 고불(趙州古佛)」이라고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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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421칙. 「백수(栢樹)」 『선문염송 · 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51~252.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僧云和尙莫將境示人 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조주(趙州)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선사가 말하였다. "나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노라"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두두물물(頭頭物物) ; 온갖 사물과 현상. ‘두(頭)‘는 사물이나 사람의 단위. ‘각각의 존재[頭頭]와 모든 사물[物物]’이라는 말. 곧 모든 것을 가리킨다.
*공리(空理) ; 공이라고 하는 도리. 모든 것을 공으로 보는 것. 공견(空見).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전혀 없다'는 허무론적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공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는 부정된다.
인과의 도리를 지워 없애는 삿된 견해이니 모든 지견(知見) 중에서 공견의 과실(過失)이 가장 무거움.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제7 참청기연품(參請機緣品) 지황(智隍)선사.
但心如虛空 不著空見 應用無礙 動靜無心 凡聖情忘 能所俱泯 性相如如 無不定時

다만 마음을 허공처럼 하되 공견에 집착하지 않으면 응용에 걸림이 없으며, 움직임과 고요함에 무심하며,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을 잊고 주관[能]과 객관[所]이 다 없어져 성품과 형상이 여여하여 정(定)이 아닌 때가 없으리라.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 • 선우(善友) • 친우(親友) • 선친우(善親友) • 승우(勝友)라고도 함.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중현(玄中玄) ;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전강대종사 법어집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가 있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득소위족(得少爲足) ;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을 삼는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견처(見處) ; ①(틀린) 견해가 생긴 곳이라는 뜻. 집견(執見, 자신의 마음속에서 고집하는 견해. 여러 종류의 망견妄見)이 일어나는 장소. 유루법(有漏法)의 다른 이름. ②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견(見)은 견해, 세계관이라는 뜻. 특수한 세계관의 입장.
*견지(見地) ; 견처(見處). 안목(眼目). 사물, 현상 따위를 관찰하거나 판단하는 입장.
*악지악각(惡知惡覺) ; 잘못된 앎과 그릇된 생각. 그릇된 지각. 조사선(祖師禪), 간화선(看話禪)에서 주로 쓰는 용어. 악지악해(惡知惡解)라고도 한다.
모든 종류의 분별과 비축된 지식이나 정보 또는 거기서 나오는 온갖 활용이 본분(本分)의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하는 공부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통괄하여 악지악각이라 규정한다. 경론이나 조사(祖師)의 금언(金言)도 이것에 속한다.

[참고 ❶]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제23권. 「시묘명거사(示妙明居土)」
若常存此心 則有趣向分 若半進半退 半信半不信 不如三家村裏無智愚夫 何以故 爲渠百不知百不解 却無許多惡知惡覺作障礙 一味守愚而已 古德有言 硏窮至理以悟爲則

만약 언제나 이렇게 본분을 지향하는 마음을 남겨두고 있다면 목표에 도달할 여지가 있겠지만, 나가는 듯 물러서는 듯 믿는 듯 마는 듯 미적지근하게 한다면 시골 구석의 무지한 사내만 못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전혀 알지 못하고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기에 도리어 허다하게 잘못된 앎과 그릇된 생각이 장애가 될 일도 없어 오로지 어리석은 그 상태를 지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潙山)은 이러한 말씀을 전합니다.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려면 깨달음만 기준으로 삼아라’

[참고 ❷] 『천여유칙어록(天如惟則語錄)』 2권. (善遇 編)
將自己胸中 妄想妄念 惡知惡覺 盡底掀翻 一刀兩段 直得淨躶躶赤洒洒 孤逈逈峭巍巍地 然後 將祖師一箇公案 猛提提起

자기 흉중의 망상과 망념 그리고 악지악각(惡知惡覺)을 모조리 뒤집어엎어 한 칼에 두 토막 내듯이 물리치고,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에 깨끗이 씻은 알몸으로 우뚝 빛나고 높이 치솟은 듯이 되어라. 그런 다음에 조사(祖師)의 공안(公案) 하나를 맹렬하게 붙들고 놓치지 말고 의심하라.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연후에라사 ; 연후에라야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불견(佛見) ; ①부처님의 견해.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여 생기는 진정한 견해. 곧 모든 법의 실상을 관조하여 아는 지견을 말한다. 불지견(佛知見)과 같은 말이다.
②부처에 집착하는 견해. 부처에 대한 견해나 법에 대한 견해[法見]는 모두 집착을 촉발하는 근거가 되므로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
*법견(法見) ; 법에 대한 견해. 법에 집착하는 견해 또는 법이라는 관념에 집착하는 것은 정견(正見)이 아니며, 법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견해라야 정견이라 한다.
불법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그 법에 집착하여 반대로 또 하나의 속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는 용어로 쓰인다. 부처님의 경지에 집착하는 견해인 불견(佛見)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다.
*초심(初心) ; 초발심(初發心). 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을 처음으로 일으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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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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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선요』 법문((No.245))—공부를 할진대는 「마치 저 깊은 우물 속에다가 눈을 져다가 자꾸 부어 가지고 그 우물을 메울려고 하듯 해라」 | 이 공부는 '자기가 자기를 찾아서 자기를 깨닫는 법'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열심히 하면 '기어코 되고야만 만다'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주머니에 있는 물건, 항아리 속에 있는 자라와 같아서, 내게 있는 나를 찾는 것이어서 찾으려고 하면 바로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이다.


*담설전정(擔雪塡井 멜 담/눈 설/메울 전/우물 정) ; '눈[雪]을 져다가 우물을 메우다' 눈[雪]으로 우물을 메우겠다는 확고한 신념.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인 『선요(禪要)』에 나오는 문구이다.

눈[雪]으로 우물을 메우려고 우물에 부어 봤자, 눈[雪]은 물에 닿으면 녹아 버려 우물이 차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백천만 겁이 지나도 차고 안 차고 하는 것도 따지지 않고 계속 눈[雪]을 퍼다 부어 우물을 메우겠다는 그러한 확고한 믿음과 끈기를 가지고 해 나가는 것과 같이 큰 뜻[志]과 원(願)을 세워 정진해야 정해 놓은 기한 안에 깨달을 수 있음을 밝혔다.

[참고] 『고봉선요(高峰禪要)』 ‘시중(示衆 其二二)’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p144, 146 참고.
若論剋期取證인댄 如人이 擔雪塡井하야 不憚寒暑하며 不分晝夜하고 橫也擔竪也擔하며 是也擔非也擔하야 擔來擔去에 縱使經年越歲하야 以至萬劫千生이라도 於其中間에 信得及踏得穩하며 把得定作得主하야 曾無一念厭離心하며 曾無一念懈怠心하며 曾無一念狐疑心하며 曾無一念求滿心이니

기한 전에 증득하는 법을 말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눈[雪]을 져다가 우물을 메우는 것과 같아서 춥고 더움을 꺼리지 않고, 밤낮을 분간하지 않고, 가로로도 지고 세로로도 지고, 옳게도 지고 그르게도 져서 오면서도 지고 가면서도 지기를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어 만겁 천생에 이르더라도 그 중간에 믿어 확신하고 밟아 편안함을 얻고, 잡아 고정시키고[把得定] 지어 주재를 얻어[作得主] 한 생각도 싫어하거나 여의려는 마음이 없으며, 한 생각도 해태한 마음이 없으며, 한 생각도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며, 한 생각도 만족을 구하는 생각이 없다.

果能有恁麼時節하며 果能具恁麼氣槪인댄 到者裡하야 管取人法雙忘하고 心識俱泯하야 形如枯木朽株하며 志若嬰兒赤子하야 驀然擔子 卒地斷爆地折하리라

과연 그러한 시절이 있으며 그러한 강한 의기[氣槪]를 갖추었다면 여기에 이르러 사람과 경계를 동시에 잊고 마음과 의식이 함께 없어져, 형상은 마른 나무와 썩은 나무둥치 같으며 뜻은 어린애와 갓난아기같이 되면 문득 짊어진 것이 졸지에 끊어지고 탁! 하고 꺾어질 것이다.

*선요(禪要) ; 『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10분 45초)

 


[법문] 송담스님(No.245)—1984년(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회(84.08.11) (용245)

오늘은 7월 15일 여름 안거(安居)의 해제날입니다. 이 해제날에는 석 달 동안 참선 수행하던 모다 스님네들이 해제를 하고, 또 걸망을 지고서 스승을 찾아가기도 하고 도반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러는 날입니다.

결제 동안에는 출입 왕래를 금하고 다 한군데 모여서 규칙을 지키면서 겨울 석 달, 여름 석 달을 발을 묶어 놓고 그리고서 정진을 하다가 해제를 맞이하면 걸망을 지고 팔방 사방으로 나가는데, 원래 이 결제법(結制法)이라 하는 것은, 안거법(安居法)이라 하는 것은 인도에는 우기(雨期), 비가 많이 오늘 계절이 있어서 그 비를 피하기 위해서 부득불 기원정사(祇園精舍)나 죽림정사(竹林精舍)나 이런 절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서 절에서 모두 모여 가지고 정진하다가, 우기(雨期)가 지나면 다시 그 절에서 떠나 가지고 숲속에 들어가서 숲속에서 자고 또 탁발해서 공양을 하고 숲속에서 밤새 정진을 하고, 그렇게 수도 생활을 하기 때문에 결제 · 해제라고 하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참선(參禪)을 해서 빠른 시일 내에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고자 할진대는—오늘 해제를 하고서 걸망을 지고 어디를 가시건 간에 가시는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 그게 바로 선방(禪房)입니다.
결제 동안에는 죽비를 치고 정진을 하고, 해제 하면 여기저기 걸망을 지고 다니니까 참선을 등한히 해도 되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공부! 왕래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활 속에서 가다듬고 정진하는 그 참선이야말로 힘이 있고 살아 있는 공부라 할 것입니다.

공부를 할진대는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마치 저 깊은 우물 속에다가 눈을 져다가 자꾸 부어 가지고 그 우물을 메울려고 하듯 해라」

우물에다가 눈을 한 짐 져다가 붓고 또 한 짐 져다가 붓고, 수십 짐을 져다 부어도 물에 들어가면 눈이 녹아 버리고 녹아 버리고 해 가지고, 암만 수백 짐을 져다 부어도 우물이 차오르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눈을 긁어서 뭉쳐서 져다가 붓고 또 져다가 붓고 그러기를 몇백 짐을 하는데, 그러다 보니 땀이 나고 그렇지만 춥고 더웁고 한 것도 상관없이 계속해서 져다 부어.
하루 종일 져다 붓고, 해가 져도 져다 붓고, 밤새도록 밤잠을 안 자고 져다 붓고, 그저 동쪽에서 져다 붓고 서쪽에서 져다 붓고, 그저 이리 져다 붓고 저리 져다 붓고, 속이 상해도 져다 붓고, 기분이 좋아도 져다 붓고, 그저 배가 불러도 져다 붓고, 배가 고파도 져다 붓고. 이리 해 가지고 1년이 넘어가, 이태가 넘어가, 백 세, 천 세가 되어 가지고 몸을 바꾸어 가면서 져다 부어.

마지막까지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단 한 시간도 등한히 지낸 일이 없이, 자나깨나 그저 눈을 어쨌든지 많이 져다가 부어서, 기어코 그 우물을 갖다가 눈으로써 가득 메울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져다 붓다가 보면, 어느 땐가는 자기가 눈을 퍼다 붓는다고 하는 생각도 없고, 우물 속에 눈이 올라왔나 안 올라왔나 한 것에도 그런 생각도 없고, 인제 지쳤다는 생각도 없고, 그만할려는 생각도 없고, 그저 인자 완전히 거의 아주 열중(熱中)을 하다 하다 못해 가지고 무심(無心)에 들어가 버린다 그 말이여.

조끔 몇 짐 져다 붓고 ‘인제 좀 찼나?’ 또 들여다 보고, 조끔 져다 붓고 ‘인제는 조금 더 올라왔나?’ 이런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올라오고 안 오고가 문제가 없어.
그저 죽을 둥 살 둥 눈이 무겁고 가벼운 것도 따지지 말고, 차고 안 찬 것도 따지지 말고, 계속 져다 부은다 그 말이여. 이러한 정도에 열성(熱誠)을 가지고 참선을 해야만 된다 그 말이여.

겨우 첫 철에 와서 남 흉내 좀 내고 앉아서 해 보면 처음에는 망상이 들입대 일어나더니, 나중에 망상이 조금 잠잠하니까 또 잠이 퍼 오고, 잠이 좀 깰만 하면 망상이 일어나고, 그렇게 조금 해 보고서 ‘아이고, 암만 참선을 해도 안 됩니다. 저는 인연이 없는 갑습니다. 옛날에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부를 때는 잠도 잘 안 오고 참 좋더니, 참선이 좋다고 해서 해 보니까 맨 잠만 퍼오고 망상만 더 일어나고 아무 재미가 없습니다’ 이러거든.

그렇게 한 철 두 철 그나마도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순일무잡하게’—한두 철 해 보고서 ‘그렇게 안된다’고 피렴심(疲厭心)을 내고, 자기는 인연이 없느니, 근기가 약하느니, 이래 가지고 스스로 자포자기를 할 마음을 낸다면, 어떻게 그런 사람이 도업을 성취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 깊은 우물에다가 눈 몇 짐 퍼다 붓고서 ‘눈이 차오르지 않는다’고, 그 허부렁한 눈 퍼다 부어 봤자 물에 닿자마자 금방 녹아 버리고 녹아 버리고 하니, 그것이 무슨 놈의 차오를 것이냐 그 말이여.

깊은 우물에 눈 퍼다 붓듯이, 해가 넘고 백천만 겁이 지내도 차고 안 차고 하는 것도 따지지 말고 계속 퍼다 부을만한 그러한 끈기를 가지고 해 나간다면 어찌 안 될 것이냐 그 말이여.
마침내는 져다 붓는 놈이나, 우물이나, 눈이나가 전부가 다 하나가 되어서 홀연(忽然)히 어떠한 계제(階梯)를 만나면은 툭! 터져 가지고, 결국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 공부는 '자기가 자기를 찾아서 자기를 깨닫는 법'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문제지, '기어코 되고야만 만다'고 하는 것을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보증(保證)을 서셨고, 다 맹세를 하셨습니다. 기어코 되는 것이라고 보증을 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인데, 그것이 안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은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고, 항아리 속에 자라를 넣어 놓은 거와 같아서, 그 자라란 놈이 아무리 버르적거려 봤자, 밤에 가봐도 그 항아리 속에 들어 있고, 낮에 가 봐도 항아리 속에 들어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나를 찾는 것이여.
오히려 보지 아니할려고 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일지언정, 찾을려고 하면 바로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44분40초~55분2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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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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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선요』 법문((No.650))—‘타살만만천천(打殺萬萬千千)인들 유심마죄과(有甚麽罪過)리오.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모두 때려죽인들 무슨 죄가 되랴’


*‘타살만만천천(打殺萬萬千千)인들 유심마죄과(有甚麽罪過)리오’ ;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모두 때려죽인들 무슨 죄가 되랴’

[참고] 『고봉선요(高峰禪要)』 ‘시중(示衆 其二)’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p52, 58 참고.
若是此念이 輕微하야 志不猛利하야 [毯-炎+畏][毯-炎+畏][毯-炎+崔][毯-炎+崔]하며 魍魍魎魎하야 今日也恁麽하고 明日也恁麽인댄 說使三十年二十年用功이라도 一如水浸石頭相似하야 看看逗到臘月三十日하면 十箇有五雙이 懡㦬而去하야 致令晚學初機로 不生敬慕하리니 似者般底漢이 到高峰門下인댄 打殺萬萬千千인들 有甚麽罪過리오

만일 이 생각(참선하려는 뜻과 소원)이 흐지부지하여 시원찮고, 뜻이 맹렬하고 날카롭지 못하여 조는 개처럼 멍하거나 도깨비처럼 산란하여 오늘도 그럭저럭 내일도 그럭저럭 지낸다면 설령 20년 30년을 공부하더라도 마치 물이 돌의 표면만 적시는 것 같아서,
어느덧 섣달 그믐이 되면 열에 다섯 쌍이 모두 창피한 꼴이 되어 늦게 배우는 이와 처음 출가한 이들에게 존경심을 내지 않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놈이 고봉의 문하에 온다면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모두 때려죽인들 무슨 죄가 되랴.

*선요(禪要) ; 『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14분 6초)

 


[법문] 송담스님(No.650)—2001년 동안거해제 및 백일기도 회향(01.02.07) (용650)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중국의 천목산 고봉(高峰) 스님의 「선요(禪要)」에 있는 법문에 잠깐 언급을 하셨습니다마는,

죽비(竹篦)를 치면 형식적으로 입선(入禪)을 하고, 입선 중에는 혼침(昏沈)에 빠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산란심(散亂心)에 그렇게 지내다가, 방선(放禪) 죽비를 치면 금방 머리를 모아서 한화잡담(閑話雜談)을 하고, 온갖 시비를 하고 그러다가 또 입선 시간이 되면 입선을 하고, 또 죽비 치면 방선하고.
혼침과 산란과 잡담과 시비로써 그럭저럭 그렇게 지낸다면 만만천천(萬萬千千)을 타살(打殺)을 한들 무슨 죄가 있겠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과연 혼침, 산란에 시달리지 아니하고 한화잡담과 시비쟁론을 하지 아니하고, 일 초 일 분을 헛되이 지내지 아니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본참공안 하나만을 거각하면서 한결같이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열흘을 그렇게 지내고, 한 달을 그렇게 지내고, 석 달, 백일을 그렇게 지내면서 일념(一念)이 만년(萬年)토록 그렇게 지낸 분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는가?

그럭저럭 한화잡담으로 형식적으로 정진하고 지낸다면 그건 참 공양주(供養主) ・ 채공(菜供)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원주(院主)와 별좌(別座) 스님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시주 단월(檀越)들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스승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도량 신장(神將)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삼세제불께도 부끄러울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자가 먹고 입고 살고 있는 모든 시설과 재산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사십 년 동안 수용하실 그 유산을 우리 말세(末世)의 제자들에게 남겨 놓으신 그 덕으로 우리는 걱정없이 먹고 입고 이렇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재산은 목숨 바쳐서 정진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남겨주신 재산이지, 그럭저럭 한가하게 그럭저럭 먹고 편안히 놀고 한화잡담하고 지내면서 살으라고 남겨주신 유산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소떼가 지내가니까 ‘저 소떼들을 아느냐? 당면에 철저하게 수행을 하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도를 닦지 아니하고 그럭저럭 지낸 그러한 중들이 저 소가 되었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국수면 국수, 찰밥이면 찰밥, 그날 그때 나온 대로 경건한 마음으로 공양을 하고 공양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입선 중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방선 중에도 또 운력(運力)을 할 때에도, 소지(掃地)를 하고 화장실에 갈 때도, 포행(布行)을 할 때도 한결같이 화두를 거각하고 한 생각을 단속해서 정진한 사람은 설사 금생에 확철대오을 못하고 그랬다 하더라도 그렇게 지낸 사람은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동쪽으로 기울어진 나무는 언제 넘어져도 동쪽으로 넘어질 것이고, 불법을 믿고 올바르게 정진을 한 사람은 언제 깨달아도 확철대오를 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에 닦아온 것과 금생에 닦은 그러한 것이 복합적으로 해서 칠 일만에 깨닫기도 하고, 석 달만에 깨닫기도 하고, 삼십 년만에 깨닫기도 하고 또 그렇게 애써서 정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생에 확철대오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바르게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도(道)를 닦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누가 먼저 깨달았느냐 그것은 크게 문제 삼을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 닦았으면 우리는 후회할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수원 용주사 중앙선원 선객(禪客)들, 그리고 대전 세등선원, 전주 위봉사 비구니 스님들 또 남원 승련사 또 의정부 회룡사, 각처에서 공부하다가 토굴(土窟)에서 공부하던 그런 납자(衲子)들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용화사 법보선원, 인제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정진하신 도반(道伴)들도 이 자리에 다 모이셨습니다. 그리고 각 선원에서 공부한 청신사(清信士) ・ 청신녀(清信女)들도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열심히 정진하다가 오신 그 증거가 여기 둘러보니, 그 역력히 가행정진 용맹정진 알뜰하게 정진하신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리고 더 정확한 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석 달 동안을 과연 내가 어떻게 정진을 해 왔는가 잘 검토를 해보면 더 잘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 공부는 공연히 육체만을 들볶는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것은 올바른 정진이 아니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건강도 지혜롭게 관리하고, 정진도 지혜롭게 정진을 해야 중간에 퇴타(退墮) 인연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생사 진로(塵勞)를 멀리 벗어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어.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꽉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정진을 해야 한다.

한번 그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않는다면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겨울에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피어야 그 매화꽃 향기가 유난히 진동을 한다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겨울에 이상 난동으로 날이 뜨뜻한 뒤끝에 매화꽃이 피면 별로 향기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할 일은 오직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알뜰히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는 일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산과 들에는 허옇게 눈이 남아 있습니다. 입춘이 지나고 또 우수가 돌아오는데 여기서 저기서 매화꽃이 필 때가 왔습니다. 다니시다가 매화꽃을 보시거든 그 향내가 얼마나 좋은가 한번 맡아보시고, 과연 자신도 향내 나는 매화꽃처럼 열심히 정진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석 달 동안 정진하시느라고 애쓰고 또 그 외호(外護)하느라고 원주, 별좌, 공양주, 채공 그러신 분들 모두 그런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께 원장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또 이다음 철에 건강한 모습으로 또 만나서 정진하기를 기약을 하고, 이 법당에서 일어나시더라고 항상 결제(結制) · 해제(解制) 상관 말고, 입선 · 방선 상관 말고 알뜰히 정진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18분5초~32분1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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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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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고봉스님 수행담(No.201)—고봉스님의 3년 사한(死限) 수행 | 고황병을 낫는 약(藥 : 丹) | (게송)頭指天兮脚踏地~.

 

*고봉(高峰) ; (1238~1295) 송대 말기 원대 초기의 임제종 스님. 법명은 원묘(原妙), 법호는 고봉(高峰), 속성은 서(徐)씨. 강소성(江蘇省) 오강(吳江) 출신. 15세에 부모에게 출가할 것을 간청하여 가화(嘉禾) 밀인사(密印寺)의 법주(法住) 스님에게 귀의하여 은사로 삼고 16세에 삭발하여 17세에 구족계를 받아 18세에는 천태교학을 익히다가 20세에 선문(禪門)으로 공부를 바꾸어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단교묘륜(斷橋妙倫 1201~1261)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22세에 3년 사한(死限)을 정하고 참선에 들어가 단교묘륜 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약정했던 3년의 기한이 다가왔을 때 태주(台州)의 정(淨) 사형의 권유로 설암조흠(雪巖祖欽 1215~1287) 선사께 가르침을 청해 지도를 받아 수행하였다. 1271년 임안(臨安 : 浙江省 杭州) 용수사(龍鬚寺)에서 어느날 잠에서 깨어 화두를 의심하던 차에 함께 잠자던 도반이 목침을 밀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설암 선사의 법을 이었다.

 

1274년 무강(武康 : 浙江省 湖州) 쌍계봉(雙髻峰)에 주석하였다. 1279년 항주(杭州) 천목산(天目山)으로 가서 서봉(西峰)의 위쪽에 있는 사자암에서 지내다가, 사자암 서편 바위 동굴에다가 작은 토굴을 지어 사관(死關)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입적할 때까지 15년 동안 지냈다. 수백 명의 제자를 길렀으며, 수계자는 수만에 이르렀다. 1295년 세수 58, 법랍 43세로 입적하였다.

『고봉대사어록』 상하 2권과 고봉대사어록 上下권 중 법어 · 서신을 수록한 상권에서 발췌한 『선요(禪要)』가 전한다.

 

(21분 37초)

 

[법문] 송담스님(No.201)—1983년(계해년) 춘계산철 해제 법회 (용201)

 

(중국) 천목산 고봉(高峰) 스님의 법문 한 구절을 같이 살핌으로써 법회를 삼고자 합니다. 이건 고봉 스님 자신의 경험담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선요禪要』 2.시중示衆)

 

출가해 가지고 계(戒)를 받고 또 그래 가지고 경(經)도 보고, 율원에 가서 율(律)도 배우고 그래 가지고 선원(禪院)에 들어가서, 스스로 마음으로 다지기를 '3년 동안을 철저하게 정진을 해 가지고 3년을 해도 깨닫지를 못하면 자살을 하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고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실컷 이 망상 저 망상이 일어나다가 망상이 좀 가라앉을 만하면 졸음이 와 가지고 혼침(昏沈)에 빠지고, 혼침이 오면 앉아서 졸을 수가 없으니까 일어서서 밖에 나가 가지고 동서(東西)로 왔다갔다하면서 포행(布行)을 했어.

그래서 졸음이 좀 깨면은 또 자리에 가서 앉어. 앉아서 조금 있으면은 금방 또 혼침이 와.

혼침이 와서 일어나면 또 포행. 포행을 하고 들어가서 하면은 망상.

 

이 망상과 혼침이 두 가지로 범벅이 되어가지고 거의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리에 정식으로 앉아서 정진을 할 수가 없어. 어떻게 졸음이 퍼오던지.

 

 

내가 이 몸뚱이를 받아가지고 24년 간을 항시 병(病) 가운데 있어서, 의사를 만나가지고 약을 먹어서 (병을 치료하는데) 만 가지 고통을 다 겪었다 그말이여.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만 가지 약을 먹으면서 해도 그 병이 좀해 낫지를 않고 그 병 중에 신음을 했는데, 약으로서는 낫을 수 없는 고황병(膏肓病)에 걸려 있음을 어찌 알았겠느냐.

 

그러다가 쌍경사(雙徑寺)에 이르러서 꿈 가운데에 단교 화상(斷橋和尙)으로부터서 약(丹藥)을 받았어. 무슨 약을 받았나 하면은 ‘일만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가?’

이 일귀하처, ‘만법일귀하처(萬法一歸何處)’의 그 화두(話頭)를 꿈속에서 단교 스님한테 받아가지고 그날부터서 6일 동안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망상을 안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다 끊어졌어.

 

하루를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밥을 먹되 밥맛도 모르고, 산을 보되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아침부터 저녁, 저녁부터 아침까지 온전히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렸다.

 

그렇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입으로만 들지, 드는 그 순간만 들어져 있지 1초만 지나가버리면은 화두는 간 곳이 없고 망상. 그렇게 애를 먹어도 안 되었던 그 화두가 꿈속에 단교 스님한테 ‘만법귀일’ 화두를 타가지고는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졌어.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사흘을 그렇게 지내고 그렇게 해서 6일 만에, 그날이 마치 달마 스님의 제사날인데, 달마 스님의 추모재를 지내기 위해서 삼탑(三塔)에 탑전에 올라가가지고 인자 그 제사에 참석을 했는데,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의 진영(眞影)이 거기 모셔져 있었는데, 법연 화상의 진영에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다. 영찬(影讚)이 ‘백년 삼만육천일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는 놈이 원래로 이놈이로구나’한 영찬을 보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버렸어.

 

 

처음에 앙산(仰山 : 雪巖祖欽) 노화상을 모시고 공부를 하는데 '날마다 한 번씩 내 방에 와서 점검을 받아라' 그래서 앙산 조실 스님 방에 들어가서 문을 열고 막 절을 할라고 하면 ‘이 송장덩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이냐’하면서 고함을 치면서 몽둥이로 한 대를 패 가지고는 밖으로 내쫓아 버려.

 

매일 그렇게 들어가서 매일 그렇게 혼나가지고 쫓겨나고, 또 그래 가지고는 한 대씩 얻어맞고 나와서 그 분심과 신심으로 정진을 과거에 그렇게 했었는데, 이 꿈에 단교 화상의 화두를 타가지고 6일 만에 확철대오를 했다 그 말이예요.

그렇게 확철대오를 하고 보니 그 사대(四大) 육신이 편안하기를 일백이십 근이나 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가 그놈을 부려버린 것처럼 그렇게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했더라.

 

그 꿈에 단교 화상한테 받은 그 약(藥 : 丹), 그 약을 한 번 먹고서 3년 동안 낫으지 못한 그 무서운 병을 낫었는데 그 약을 오늘 대중에게 노나주겠다.

 

너희들 대중이 이 약을 먹을라면은 먼저—보통 사회에서 어떤 약을 먹더라도 그 약을 먹을라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 ‘개고기나 닭고기를 먹지 말아라’ ‘두부, 콩을 먹지 말아라’ 그리고 뭘 조심을 해라, 여러가지 금기가 있는데.

이 고봉 스님께서 대중한테, 한 번 그 약을 먹으면 무량겁 업장(業障)이 녹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약을 대중에게 노나 주시면서, 이 약을 먹을라고 할진대는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면,

 

‘육정(六情) · 육식(六識)과 사대(四大) · 오온(五蘊)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만상삼라(萬象森羅)를 가져 가지고 총(總)히 녹여서 한덩어리의 의심(疑心)을 만들어서 몰록 눈앞에다가 떠억 놓으면 한 창(鎗), 한 깃발[旗]도 사용하지 아니하고 천하를 평정(平定)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정(六情) · 육식(六識)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생각으로 모든 것을 알고 하는 육식 · 육정 그것과 사대(四大) · 오온(五蘊), 사대(四大)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구성하고 있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가지 원소, 오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색(色)은 육체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우리의 정신작용이여.

 

그러니까 한 말로 말해서 이 육체와 정신 또 산하대지, 산이나 물이나 이 온 땅, 만상삼라 삼라만상 모든 것.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우리의 몸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하나로 뭉쳐서 녹여 가지고 그놈을 가지고 의심을 만들어라.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疑心)을 만들어라 그말이여.

 

그러니까 그 의심 밖에는 자기 몸뚱이도 잊어버리고, 자기의 희로애락 정신작용도 다 잊어버리고, 눈앞에 벌어진 모든 해나 달이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밥이 맛이 있거나 없거나, 반찬이 좋거나 나쁘거나, 수용(受用)이 좋거나 나쁘거나, 누가 나를 잘한다고 하거나 못한다고 하거나, 일체 선악을 완전히 그것에 아주 관심을 놔버려라.

그리고 그런 것들은 전부 뚤뚤 뭉쳐가지고 자기의 본참공안상에 의심으로 모든 것을 다 쏟아라 그말이여.

 

그렇게 나간다면 내가 오늘 대중에게 노나주는 이 약을 먹을 자격이 비로소 있다 그말이여.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약을 먹어봤자 약이 발효가 안돼.

 

귀한 약을 먹을 때에는 의사가 지시한 대로 ‘술을 먹지 말아라’하면 술을 먹지 말아야 하고, ‘비리고 기름기 있는 것을 먹지 말아라’하면 안 먹어야 하고, ‘콩이나 두부를 먹지 말아라’ 그러면 안 먹어야지,

그 귀하고 비싼 약을 먹으면서 개고기 닭고기 뭐 마구잡이 닥치는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술 막 먹고 그래 가지고 어떻게 그 약의 효과가 나타나기를 바랄 수가 있느냐 이 말이여.

 

육정 · 육식과 사대 · 오온과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을 녹여서 한덩어리 의심을 만들지 않고서는, 아무리 춘하추동 사계절, 1년 365일을 참선한다고 결제(結制)를 하고 안거(安居)를 한들 도저히 확철대오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말이여.

온갖 시비(是非)에 다 참견하고, 자기의 모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고대로 놓아 먹이면서 할 짓 다 하고, 생각할 것 다 생각하고, 시비할 것 다 시비하고, 그러면서 형식적으로 죽비(竹篦)를 치고 돌아 앉었다가 죽비를 치면 일어났다가 그래 가지고 어떻게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할 수가 있을 것이냐.

 

걸어갈 때도 오직 이 의심뿐이요, 앉았을 때도 요 의심뿐이요, 밥을 먹고 옷을 입을 때에도 요 의심뿐이요, 똥을 누고 오줌을 눌 때도 이 의심뿐이여. 보고 듣고 뭣을 감각하고 알고 하는 데에도 오직 의심뿐이여.

의심해 가고 의심해 오며,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하게 될 때 이것이 득력(得力)이라 그랬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화두가 의심이 돈발(頓發)해 가지고 항시 의심이 고대로 있어. 그래서 의심이 한덩어리여. 어제 하던 의심이나, 오늘 하는 의심이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노상 그 한 의심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기 때문에 의심이 한덩어리여.

그 속에는 아무것도 섞여 있지를 안 하고 온전히 의심만이 한덩어리가 되었어. 조금도 그 이음새가 없어, 틈이 없다 그말이여.

 

아무리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아무리 쫓아도 가지를 안 해. 소소영령(昭昭靈靈)해서 항상 눈앞에 의심이 나타나.

마치 흐르는 물에 배를 띄우고 노를 젖지 아니해도 저절로 배가 술술술술 미끄러져 흘러간 거와 같애. 조금도 손을 쓸 필요가 없어. 이것을 가리켜서 ‘득력시절(得力時節)’이라 하는 것이여.

 

죽음을 각오하고 3년을, 법답게 여법(如法)하게 3년을 해서 안 되면, 내가 확철대오를 못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 했기 때문에 마지막 기한 날을 며칠 두지 아니하고 이러한 수승한 경계가 나타난 것이다 그말이여.

 

과연 여기에 참석한 대중이 지난 2달 동안을 이렇게 정진을 했던가?

산승(山僧)이 보기에는 정말 2달 동안을 그렇게 열심히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했지만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앞으로 계속해서 또 그렇게 해 나가시면 반드시 이러한 경계가 돈발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두지천혜각답지(頭指天兮脚踏地)하고  기즉긱반곤즉수(饑則喫飯困則睡)로다

나무~아미타불~

처처원정변시년(處處元正便是年)이요  남북동서지자시(南北東西秖者是)니라

나무~아미타불~

 

두지천혜각답지(頭指天兮脚踏地)하고, 머리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리로는 땅을 밟았어.

기즉긱반곤즉수(饑則喫飯困則睡)라.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한바탕 자.

 

우리가 지금 딱 서 있을 때, 머리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섰으면 발로는 땅을 밟지, 어떻게 머리로 땅을 가리키고 발로 하늘을 디딜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곤하면 조는 것이여. 하나도 기특할 것이 없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죠.

 

정월 초하루 날은 호남에도 그날은 정월 초하루고, 서울도 정월 초하루고, 도처가 원정(元正)이요 바로 계해년이다 그말이여. 동쪽으로 가나 서쪽으로 가나 어디를 가던지 계해년 정월 초하루여.

 

고봉 스님이 주신 이 환약을 먹고 그렇게 정진을 하면 바로 그러한 시절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9분25초~30분5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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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좀해 ; 좀처럼(여간하여서는).

*고황병(膏肓病) ; 고황(膏肓) · 고황지병(膏肓之病)이라고도 한다. 고황에 들어 고치기 어려운 병.

고황은 심장과 횡격막의 사이에 있는 부분으로 이 사이에 병이 생기면 낫기 어렵다고 한다. 고(膏)는 심장의 아랫부분이고, 황(肓)은 횡격막의 윗부분.

고황에 병이 들었다는 의미는 병이나 못된 버릇이 고칠 수 없도록 심하여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가벼운 것이 아닌 불치의 병, 중병 등을 말한다.

*단교 묘륜(斷橋妙倫) ; (1201~1261) 남송(南宋) 임제종 양기파(楊岐派) 스님. 절강성(浙江省) 황암현(黃巖縣) 송산(松山) 출신. 속성은 서(徐)씨. 18세에 스님이 된 뒤 처음에는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들었고, 그 뒤 설두산(雪竇山)으로 가서 무준사범(無準師範) 문하에서 공부하고 그의 법을 이었다.

1241년 대주(臺州) 기원사(祇園寺)에 주석하다가 다음에는 서암의 정토선사(淨土禪寺) 천태산 국청사(國淸寺) 임안 정자사(淨慈寺) 등 여러 절에 두루 주석하였다. 1261년, 세수 61세로 입적하였다. 시자 문보(文寶) 선정(善靖) 등이 『단교화상어록』 2권을 엮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조주는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 장삼을 하나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僧問 萬法歸一一歸何所 師云 老僧在靑州作得一領布衫重七斤 『전등록(傳燈錄)』 제10권. 조주선사.

僧問趙州 '萬法歸一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作一領布衫重七斤' 『벽암록(碧巖錄)』 제45칙.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진영(眞影) ; 주로 얼굴을 그린 초상화(肖像畫) 또는 얼굴을 찍은 사진.

*영찬(影讚) ; 어떤 사람의 초상화를 보고 찬양하여 지은 글.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설암조흠(雪巖祖欽) ; (1215~1287) 임제종 양기파(楊岐派) 가운데 파암파(破庵派) 스님. 절강성 무주(婺州) 출신으로 5세 때에 출가하여 16세 때 삭발하고 18세부터 유행(遊行)하였다. 무준사범(無準師範)의 법을 이었다. 원(元) 세조(世祖) 지원(至元) 24년(1287) 73세에 입적하였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만상삼라(萬象森羅) ; 삼라만상(森羅萬象).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오온(五蘊) : 온(蘊)은 무더기•모임•집합•더미를 뜻함.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의 무더기.

①색온(色蘊) : 몸이라는 무더기. 몸의 감각 무더기.

②수온(受蘊) : 괴로움이나 즐거움등, 느낌의 무더기.

③상온(想蘊) :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어내는 생각•관념의 무더기.

④행온(行蘊) :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의지•충동•의욕의 무더기.

⑤식온(識蘊) : 식별하고 판단하는 인식의 무더기.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평정(平定 편안할·평정할 평/다스릴·평정할·편안할·안정시킬 정) ; ①반란이나 소요를 큰 어려움 없이 평온(平穩)하게 진정(鎭定)시킴. ②적을 쳐서 자기에게 예속되게 함.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수용(受用) ; (물건을 남에게) 받아 씀.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시절인연(時節因緣) ; 시절이 도래(到來)하고 인연이 합쳐지는 기회.

[참고] 시절(時節) : 어떤 시기나 때. 도래(到來)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기회(機會) : 어떠한 일, 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

*(게송) ‘두지천혜각답지~’ ; 『금강경오가해』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야부 게송 참고.

*兮(혜)어조사 *脚(각)다리 *踏(답)밟다 *饑(기)주리다,굶주림 *喫(끽,긱)먹다,마시다 *困(곤)곤하다,기운이 빠지다 *睡(수)졸다,잠 *飯(반)밥,밥을 먹다 *便(변)곧,문득,바로 *秖(지)다만,마침

*원정(元正 으뜸·처음·첫째 원/처음·정월 정) ; 설날. 정월 초하룻날.

 

Posted by 닥공닥정

고봉스님의 수행 (No.537)—어떠한 경우에도 자기의 본참공안에 몰입해야 | 중국 천목산 고봉(高峰) 스님의 수행 (『선요禪要』 28. 通仰山老和尙疑嗣書)]

 

*고봉(高峰) ; (1238~1295) 송대 말기 원대 초기의 임제종 스님. 법명은 원묘(原妙), 법호는 고봉(高峰), 속성은 서(徐)씨. 강소성(江蘇省) 오강(吳江) 출신. 15세에 부모에게 출가할 것을 간청하여 가화(嘉禾) 밀인사(密印寺)의 법주(法住) 스님에게 귀의하여 은사로 삼고 16세에 삭발하여 17세에 구족계를 받아 18세에는 천태교학을 익히다가 20세에 선문(禪門)으로 공부를 바꾸어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단교묘륜(斷橋妙倫 1201~1261)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22세에 3년 사한(死限)을 정하고 참선에 들어가 단교묘륜 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약정했던 3년의 기한이 다가왔을 때 태주(台州)의 정(淨) 사형의 권유로 설암조흠(雪巖祖欽 1215~1287) 선사께 가르침을 청해 지도를 받아 수행하였다. 1271년 임안(臨安 : 浙江省 杭州) 용수사(龍鬚寺)에서 어느날 잠에서 깨어 화두를 의심하던 차에 함께 잠자던 도반이 목침을 밀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설암 선사의 법을 이었다.

 

1274년 무강(武康 : 浙江省 湖州) 쌍계봉(雙髻峰)에 주석하였다. 1279년 항주(杭州) 천목산(天目山)으로 가서 서봉(西峰)의 위쪽에 있는 사자암에서 지내다가, 사자암 서편 바위 동굴에다가 작은 토굴을 지어 사관(死關)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입적할 때까지 15년 동안 지냈다. 수백 명의 제자를 길렀으며, 수계자는 수만에 이르렀다. 1295년 세수 58, 법랍 43세로 입적하였다.

『고봉대사어록』 상하 2권과 고봉대사어록 上下권 중 법어 · 서신을 수록한 상권에서 발췌한 『선요(禪要)』가 전한다.

 

[참고] 고봉스님의 수행에 대한 법문송담스님(No.201)(『선요禪要』 2. 시중示衆)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9분 21초)

 

[법문] 송담스님(No.537)—1994년 10월 첫째일요법회.(용537)

 

참선(參禪)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이것이 옳게 하고 있나? 내가 잘못하고 있나?' 항상 그런 의심이 날 수가 있고, 그래서 법문(法門)을 자주 들어야 하고.

실지로 살아 계신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기가 쉽지 아니하면 큰스님네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라도 자주 들어서 자기 공부해 나가는 데 잘못된 것을 교정해 가면서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수좌(首座)가 몽중(夢中)에 화두가 일여(一如)한 것에 대해서 몹시 궁금하고, 깨달은 뒤에도 몽중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 이렇게 몸을 바꿀 때, 이승을 살다가 입태(入胎)하고 또 태중에 주태(住胎)하고 또 태중에서 나올 때에도 매(昧)하지 않으냐? 이게 모두 그러한 것이 몹시 궁금한 모양이고.

또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을 발원하는 것과 도솔천 내원궁에 왕생하기를 발원한 것이 같은 것이냐? 어떤 것이 나은 것이냐? 그런 것도 궁금하게 생각이 된 모양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참선 하다 보면 영판 여러 가지가 궁금한 생각이 나가지고 경을 떠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나기도 하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뒤져보고 싶은 생각이 나기도 하고 또는 요새 무슨 서양철학, 동양철학이다, 모다 그런 것에 대해서도 참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데.

무슨 의심이 나던지—불법에 관해서 의심이 나던지, 참선에 관해서 의심이 나던지 또는 다른 공안에 대해서 의심이 나던지 또 어떤 선지식의 법문을 듣게 되면은 어떤 공안을 거량(擧揚)을 해 가지고 '일르라'고 이렇게 핍박을 당하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발심(發心)한 수행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몰입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참공안을 놔버리고 잠깐이라도 다른 것에 한 눈을 팔고, 다른 것을 다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생각을 다른 데로 발산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 정진(精進)에 대해서 손해가 막심한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의심이 나더라도 진정으로 그것을 알고 싶으면 책을 통해서 알려고 하지 말고, 누구한테 물어서 알려고 하지 말고, 자기의 본참공안에 박차를 가해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은 후일에 자연히 그러한 의심이 얼음 녹듯이 녹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설명을 듣는다 해도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 깨달음에는 아무 보탬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한 분 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을 위해서 중국 천목산에 고봉(高峰) 스님이 어떻게 정진을 했는가, 어떻게 해서 깨달았는가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드리면 유익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고봉 선사는 16세에 출가를 해 가지고 20세에 참선을 하기 위해서 선방에 나왔습니다.

'3년을, 3년 동안 공부를 해 가지고 만약에 내가 확철대오를 못하면 자살을 하리라' 그래 가지고 3년을 사한(死限)을 해 가지고 단교 화상(斷橋和尙)을 찾아갔습니다.

 

가서 화두를 탔는데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어디서 어디로부터 내가 이 세상에 왔으며, 죽으면 어느 곳으로 가느냐?' 그 화두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생각이 두 갈래로 갈라져. 그래가지고 암만 분심을 내 가지고 열심히 하려고 해도 생각이 가지런해지지 않고, 마치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처럼 그럭저럭 3년이 그렇게 지내왔다 그말이여.

 

그러자 설암 화상(雪巖和尙)이라고 하는 큰 선지식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그 선지식을 찾아갔어. 가니까 다짜고짜로 주먹으로 대갈통을 얻어맞았어. 그래가지고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딱 잠가 버렸네.

그래가지고 그 이튿날 또 찾아가서 정식으로 '무자(無字)' 화두를 받았어. '무자(無字)' 화두를 받아 가지고 떠억 정진을 해 보니까 어두운 밤중에 등불을 얻은 것 같이 화두가 잘 들리는데 기가 막히다 그말이여.

 

그런데 "매일 길을 가는 거와 같아서 오늘 하루를 올바르게 왔는가? 그것을 점검할 필요가 있듯이 네가 공부를 하룻동안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 그것을 점검을 할 필요가 있으니 매일 한 번씩 내 방에 들어오너라" 그런 명령을 받았어.

그래서 매일 문을 열고 떠억 들어가는데, "이 죽은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인고?"

뭐라고 입을 벌릴려고 하기도 전에 주먹으로 대골통을 두드려 패서 쫓겨나.

 

매일 그렇게 지내다, 그렇게 그러한 참 엄청난 특별한 배려로 그렇게 정진을 쭉 하다가,

꿈속에서—맨 처음에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화두를 주신 단교 화상을 친견을 해 가지고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일만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느냐?'하는 화두를, 그 공안을 단교 스님한테 질문을 받았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깨고 보니 꿈이여.

 

그러니 '무자(無字)' 화두도 어디로 가버렸고,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도 어디로 가버렸고,

'만법귀일 일귀하처'의 의단(疑團)이 들라고 안 해도—원래 화두는 이 화두를 들었다, 저 화두를 갔다 그런 법이 아닌데—'만법귀일 일귀하처'가 저절로 독로(獨露)를 해 가지고 밥을 먹으나, 화장실을 가나 그냥 화두가 일여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었어. 밥 먹을 줄도 잊어버리고, 잠자는 중도 잊어버리고 시간 가는 중을 몰라.

 

그러자 그러한 상태에서, 몽중에서도 꿈을 깨도 그러고, 일체처 일체시에 순일무잡해서 타성일편이 되어서 '뭐 이 화두를 들자, 저 화두를...' 일부러 들라고 드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들어져 버렸다.

그래가지고 엿새가 그렇게 지냈는데, 어느 날 삼탑(三塔)—달마(達摩) 스님,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 또 세 조사 스님을 모신 영각에, 그날이 달마 스님의 열반하신 날이라 대중이 전체가 합동으로 그 진영각(眞影閣)에 가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어.

예배를 드리다가 얼굴을 이렇게 떠억 쳐드는데 오조법연 화상의 진영에,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에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백년삼만육천 아침에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다,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한 놈이 원래로 이 놈이로구나'하는 그 게송 한 구절 떡! 보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렸어.

 

전날 설암 스님께서 '이 죽은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냐?'하는 공안, 확! 뭐 아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그렇게 되었어.

 

그래 가지고 그렇게 깨닫게 된 동기를 전부 다 이 설암 스님께 낱낱이 다 말씀을 드리고, 그동안에 매일 공안에 대해서 단련을 받고, 사람에게 속임을 받지 않게 되었어.

그런데 입을 열라고 하면 마음이 내려앉아 가지고 마치 무슨 빚진 사람처럼 일용 중에 자유를 얻지 못해. 그런 상태로 28세가 되도록 항상 그런 세월을 보냈는데.

 

그 설암 스님과 어디를 여행하면서 "일간호호시(日間浩浩時)에 환작득주마(還作得主麼), 도리어 주를 짓느냐?"

"예. 주인을 짓습니다"

 

"수몽중(睡夢中)에도 작득주마(作得主麼)"

"예. 수몽중에서도 주인을 작득합니다"

 

"그러면 정수착시(正睡着時)에 무몽무상(無夢無想) 무견무문(無見無聞),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는 바도 없고 들은 바가 없을 때 주인은 어느 곳에 있느냐?"

이렇게 물으시는 데 뭐라고 입을 벌려서 말을 할 수가 없어. 콱! 막혔어.

 

그래 가지고 말을 못하고 있으니까 설암 화상께서 간곡히 부촉을 하시기를,

"오늘날로부터 부처를 배우려고 하고 법을 배우려고 하는 생각도 하지 말고, 옛[古]을 궁구(窮究)하고 이제[今]를 궁구하려고 하는 그런 것도 하지 말고, 다못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잠을 자다가 문득 눈을 뚝 뜨면 번쩍 정신을 차려 가지고 '나의 이 일각 주인공(一覺主人公)이 필경에 어느 곳에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하는고' 그렇게 해 나가거라"

 

그 말씀을 듣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나의 일생을 다 버리고 일생의 모든 것을 다 버려 버리고, 완전히 바보 천치가 되어서 오직 이 일착자(一着子), 일각 주인공이 필경에 어느 곳에 안신입명을 하는가? 이것을 밝히리라'하고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지내기를 5년 간을 지냈어. 5년 간을 하루와 같이 그렇게 지냈다 그말이여.

그러다가 어느 날 어느 암자에서 자는데, 문득 밤중에 눈이 떠져서 떠억 일어나서 그 화두를 들고 떠억 앉았는데, 옆에 같이 자던 도반이 목침을 갖다가 툭 떨궈 가지고 머리빡이 땅에 툭 떨어졌다 말이여. 그 소리에 정말 타파의단(打破疑團)을 했어.

 

「필경에 일각 주인공이 어느 곳에 안신입명 하느냐?」의 공안이 확, 공안을 완전히 타파했다 그말이여.

 

그때의 경계가 어떠냐 하면은 마치 그물에 갇혀 있다가 뛰쳐나온 것처럼, 전날 의심하던 불조(佛祖)의 공안, 고금의 차별인연(差別因緣)에 대해서 마치 사주(泗州)에 대성(大聖)을 친견한 거와 같고, 먼 객지로 떠돌다가 고향에 돌아온 거와 같아서 원래로 다못 이 옛 때의 사람이더라 그말이여.

 

그동안에 지내온 옛 때의 행리처(行履處)를 고치지 아니하고 그냥 그대로 안반정국(安邦定國)이여. 나라를 편안히 하고 나라를 평정해서 천하가 태평해.

한 생각 함이 없이, 일념무위(一念無爲)여. 한 생각 무위(無爲)로 시방(十方)을 좌단(坐斷)해. 시방세계를 앉아서 끊는다 그말이여.

 

이렇게 해서 천목산에 고봉 스님은 설암 화상의 법(法)을 잇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야 하느냐? 깨달은 뒤에도 몽중에 화두가 일여해야만 입태, 출태에 매(昧)하지 않으냐? 극락세계와 도솔천내원궁이 같은 것이냐? 도솔천 내원궁에 가서도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서 성불 할 수가 있느냐?'

이러한 의심들이 고봉 스님처럼 이렇게 여법하게 정진함으로써 그런 의심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에 무자(無字)를 가지고 공부를 하시던 분,

'이뭣고?'를 이렇게 산승이 권장한다고 해서 이미 다른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하신 분은 고대로 무자(無字)나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자기의 본참공안을 가지고 열심히 정진하기를 바랍니다.(37분50초~57분1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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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찰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입태(入胎) ; 모태(母胎)에 들어가는 것.

*주태(住胎) ; 모태(母胎)에 머물러 있는 것.

*매하다(昧-- 어두울 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모른다. 어둡다.

*조사어록(祖師語錄) ;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거량(擧揚 들 거/나타낼•밝힐 량) ; 법거량(法擧揚).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禪) 수행자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정진(精進) : [범] Vi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단교 묘륜(斷橋妙倫) ; (1201~1261) 남송(南宋) 임제종 양기파(楊岐派) 스님. 절강성(浙江省) 황암현(黃巖縣) 송산(松山) 출신. 속성은 서(徐)씨. 18세에 스님이 된 뒤 처음에는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들었고, 그 뒤 설두산(雪竇山)으로 가서 무준 사범(無準師範) 문하에서 공부하고 그의 법을 이었다.
1241년 대주(臺州) 기원사(祇園寺)에 주석하다가 다음에는 서암의 정토선사(淨土禪寺) 천태산 국청사(國淸寺) 임안 정자사(淨慈寺) 등 여러 절에 두루 주석하였다. 1261년, 세수 61세로 입적하였다. 시자 문보(文寶) 선정(善靖) 등이 『단교화상어록』 2권을 엮었다.
*설암 조흠(雪巖祖欽) ; (1215~1287) 임제종 양기파(楊岐派) 가운데 파암파(破庵派) 스님. 절강성 무주(婺州) 출신으로 5세 때에 출가하여 16세 때 삭발하고 18세부터 유행(遊行)하였다. 무준 사범(無準師範)의 법을 이었다. 원(元) 세조(世祖) 지원(至元) 24년(1287) 73세에 입적하였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오조 법연(五祖法演) : (? – 1104) 속성은 등(鄧)씨。사천성 면주부(綿州府) 파서(巴西)에서 났다。35세에 출가하여, 처음엔 강당에서 <백법(百法)> <유식론(唯識論)> 같은 것을 공부하였다.
뒤에 백운 수단(白雲守端)선사의 회상에 가서 있을 때, 어떤 스님이 남전(南泉) 화상의 「마니주 화두」에 대하여 묻는데, 백운선사가 크게 꾸짖는 것을 듣고 곧 깨치어 온 몸에 땀을 흘리면서 아래와 같은 게송을 지어 바쳤다.

『저 산 밑에 한뙈기 묵은 밭, 왜 즐기노 노인에게 물었더니, 몇 번 팔고 또 산건, 대숲과 소나무에 맑은 바람 온다고(山前一片閑田地 叉手叮嚀問祖翁 幾度賣來還自買 爲隣松竹引淸風)』
이에 백운선사의 인가를 받고, 그의 법을 이어서 서주(舒州) 사면산(四面山)에서 출세하였다.

다시 백운산, 그 다음에는 태평산(太平山), 마지막으로 기주(蘄州) 오조산 동선사(五祖山東禪寺)에서 크게 교화하여 많은 제자가 있었다。그 가운데서도 불안 청원(佛眼清遠) • 태평 혜근(太平慧懃) • 원오 극근(圜悟克勤)은 오조 문하의 세 부처라고 하였다。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에 80여 세로써 입적하였다.

마니주(摩尼珠) 화두란, 사조(師祖)라 하는 이가 영가(永嘉)의 <증도가(證道歌)>에 있는 「摩尼珠人不識 如來藏裡親收得」의 귀절을 끌어다가 남전에게 묻기를 『마니주를 세상에서 모르는데, 여래장 속에서 찾아 냈구나 하였으니, 어떤 것이 여래장이오니까?』
남전이 대답하기를 『내가 너하고 같이 다니는 것이다』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은?』
『그도 또한 그것이지』

『마니주는 어떤 것이오니까?』
『가거라! 네가 내 말을 모른다』하는 데서 사조가 깨쳤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일각 주인공(一覺主人公) ; '한결같이 깨닫는 주인공'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안신입명(安身立命) ; 몸을 편안히 하고 명(命)을 세우다. 몸을 편안히 하고 목숨을 보존하다.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말. 생사를 벗어나 심신(心身)이 편안해졌음을 표현한 말이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사주(泗州)에 대성(大聖)' ; 사주(泗州)에있는 보광사(普光寺) 승가대사(僧伽大士)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분의 신통력을 보아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이라고 한다. 회수(淮水)에서 신통력으로 도둑들이 훔친 물건을 좋은 마음으로 시주하게 하여 그들의 죄를 감해 주고 옥살이를 면하게 해 주었다고 한다. [참고] 『선요(禪要)』 (고봉원묘 지음 | 원순 역해 | 도서출판 법공양) p170. 각주(脚註) 참고.

*행리처(行履處 가다·행하다 행/밟다·행하다 리/곳 처) ; 행리는 직접 몸으로 실천, 실행하고 살아온 과정을 의미하는 말. 곧 행주좌와 어묵동정 등의 일상 생활, 일상의 행동거지(行動擧止 몸을 움직여 하는 모든 짓)를 말한다.

*시방좌단(十方坐斷) ; '시방세계를 앉아서 끊는다' 시방 전체에 눌러앉는다는 말. 시방(十方)은 여기서는 모든 속박 · 집착을 의미한다. 모든 속박 · 집착을 끊어버리고 활달한 경지에 이르는 것.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