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24.01.29 평상화(No.109)—(게송)山月投窓白~ | 물의 습성 | 망념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를 드는 것이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 | 방편과 경절문(徑截門).
  2. 2023.01.09 진여불성(No.109)—(게송)山月投窓白~ | 평상화(平常話) | 망념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를 드는 것이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 | 방편과 경절문(徑截門). 1
  3. 2022.05.18 조사서래의(No.109)—(게송)山月投窓白~ | 진여자성을 물의 습성에 비유 | 망념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를 드는 것이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 | 방편과 경절문(徑截門).
  4. 2019.09.28 도솔천내원궁 (No.109)—한 생각 탁! 깨달으면 깨달은 바로 그 본각 자리가 도솔천내원궁 | 득력(得力)은 생력(省力), 힘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힘을 더는 것.
  5. 2019.07.26 한 생각(일념) 단속 (No.109)—한 생각 탁! 깨달으면 깨달은 바로 그 본각 자리가 도솔천내원궁 / 득력(得力)은 생력(省力) | 오늘 하루 결제 | 但盡凡情 別無聖解.
  6. 2019.07.24 포교(布敎) (No.109)—참나 깨닫기 위한 진실한 수행이 자리(自利) 이타(利他)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이것이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의 수행법이며, 생활이며 포교.
  7. 2019.07.23 기도(祈禱) (No.109)—우리가 한 생각 간절한 마음으로 불보살(佛菩薩)의 명호(名號)를 염(念)할 때 그곳에는 언제라도 불보살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8. 2019.07.22 활구참선 (No.109)—(게송)山月投窓白~ | 진여자성을 물의 습성에 비유 | 망념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를 드는 것이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 | 방편과 경절문(徑截門).
ㅍ/평상화2024. 1. 29. 20:57

평상화(No.109)—(게송)山月投窓白~ | 평상화(平常話) 도리 | 진여자성을 물의 습성에 비유 | 망념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를 드는 것이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 |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 | 방편과 경절문(徑截門).


*평상화(平常話) ; ①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②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이야기[話]. 일상생활 이야기. 일상생활.

[참고]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12.22)
참선(參禪)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10분2초~11분29초)

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지도하에 열심히 생활 속에서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픈 일 속에서, 괴로운 일을 당하면 괴로운 일을 당한 바로 거기에서 괴로운 것을 띠어 버릴려고 하지 말고, 슬픈 것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 슬픔 속에 젖어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속에서 '이 뭣고?' 이렇게 한 생각을 돌이킨다면 그 슬픈 그 상황이 바로 선방(禪房)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처님 회상(會上)인 것입니다.

 

(17분 32초)


[법문] 송담스님(No.109)—1979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2.4) (용109)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에 산위에 뜬 달이 창에 비추어서 환하구나. 그리고 시냇물 소리는 문안에까지 들려온다.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라.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묵무언(默無言) 하신 뜻을 알고자 할진댄, 그 말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알고자 할진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모름지기 이 가운데를 향해서 밝힐지니라.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그 도리를 알고자 할진댄, 산 달이 창에 비추어서 희고 시냇물 소리가 방안에까지 들려온다. 이 속을 향해서 밝힐지니라[須向此中明].


오늘 기미년 10월 15일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격외선(格外禪) 도리, 내가 나를 깨닫는 도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도리는 깨닫지 못한 분상(分上)에서는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무슨 뜻인지 요량을 할 수가 없지마는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고 깊고 깊어서 그래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산 달이 창에 비추어서 환하니 희고, 방안에 앉아서도 시냇물 소리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농부가 쟁기를 짊어지고 논으로 가고, 밥을 먹을 때 숟갈로 밥을 떠서 입에다 넣으면 저분은 반찬 그릇으로 간다.

바로 이 평상화(平常話)—우리 일상 생활에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한숨 자고, 부르면 대답하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봄이 오면 풀은 파릇파릇 풀이 돋아오고, 가을이 오면 단풍이 져서 떨어지는 이 도리,
이 도리를 내놓고는 최상승 활구법, 격외선 도리, 도솔천 내원궁,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寂滅宮)을 장엄(莊嚴)하는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가장 빨리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발로 걸어 다니고, 손으로 일하고 글씨 쓰고, 입으로 말하고 하는 중생으로서 육체적인 모든 동작, 정신적인 모든 작용, 일상 생활을 떠나서 이것을 찾을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 그때 거기서 생각 생각이 일어나는 그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중생의 망념 그놈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도리, 오직 여기에서만 바로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모든 우리의 중생념, 중생심(衆生心), 번뇌 망상을 버리고 따로 찾는다면 그 사람은 무량겁을 닦아도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을 버리고서 물의 습성(濕性)을 찾아서는 영원히 그 사람은 습성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중생심을 물에다가 비유한다면 물은 온도에 따라서 때로는 흐를 수 있는 액체로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영하로 내려가면 얼어서 고체가 되기도 하고, 섭씨 백 도가 되면 끓어서 증기로 기체로 변하기도 합니다.
기체도 되었다, 액체도 되었다, 고체도 되었다,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물도 되었다, 얼음도 되었다, 김으로도 되었다 또는 눈도 되었다, 서리도 되었다, 우박도 되었다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변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모양으로 있던지 간에 변함이 없는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습성(濕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습한 성질. 물의 습성이라 하는 것은 그 모양의 여하에 따라서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자성(眞如自性), 참나, 나는 성불(成佛)을 해서 부처님으로 계실 때나, 죄를 짓고 지옥에 가서 있거나, 우리 중생으로서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건 간에 우리의 진여불성에는 조금도 늘거나 줄거나 새로 생겨나거나 죽거나, 때가 묻거나 깨끗하거나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함이 없으면서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천 가지 만 가지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로 모습을 나투면서도 원래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에 있어서의 습성에다가 비유해서 말씀을 드렸지마는 이것은 하나의 비유에 지내지 못하고 '참나'라고 하는 것은 오직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參禪)을 함으로서만이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드린 것은 우리 모두가 올바르게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이 몸으로, 이 죄 많은 몸으로, 이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으로 가득찬 이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반드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여러분에게 증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대보살님들도, 모든 성현들도 깨닫기 전에는 우리 범부(凡夫)와 똑같은 것입니다. 깨달으면 그것을 '깨달은 분'이라 해서 '붓다(Buddha)'라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범부인 것입니다.

범부와 성현과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부처님 경전에 말씀에는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은 참 말씀이요, 진실한 말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중생심(衆生心)을 여의고 불성(佛性)이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심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부처님이 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설사 그것이 얼음이 되었건, 우박이 되었건, 눈이 되었건, 물의 변화체에 어떠한 변화된 상태에 있건 간에 거기에는 반드시 습성(濕性)이 있는 거와 같이, 모든 중생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중생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서,
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지도하에 열심히 생활 속에서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픈 일 속에서, 괴로운 일을 당하면 괴로운 일을 당한 바로 거기에서 괴로운 것을 띠어 버릴려고 하지 말고, 슬픈 것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 슬픔 속에 젖어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속에서 '이 뭣고?' 이렇게 한 생각을 돌이킨다면 그 슬픈 그 상황이 바로 선방(禪房)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처님 회상(會上)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 하는 방법이며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넓고 범위가 넓고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그러한 좋은 길인 것이며 또한 어떠한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하건, 죄가 많건, 몸이 아프건 그런 것, 오히려 그러한 역경계(逆境界) 속에서 더욱 간절해질 수 있는,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는 그래 가지고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미묘하고도 고마운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절로 절로 다니시면서 기도를 주로 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주로 염불이나 경을 읽으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수(千手)를 열심히 하시거나, 여러 가지 그러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도 다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정법(正法)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부처님과 성현들이 설허신 다 미묘한 방편(方便)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마는, 우리는 방편을 통해서 그것을 징검다리로 해서 바로 구경(究竟)의 길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지, 방편에 오래 집착해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동안 용화사에서 누누이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과 저의 말씀을 통해서 어떠한 것이 방편이고, 어떠한 것이 바로 직접적으로 설해 드리는 경절문(徑截門), 바로 가깝고 바른 길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처음~17분3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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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산월투창백~’ ; 『소요당집(逍遙堂集)』 소요 태능(逍遙太能)의 ‘무제(無題)’ 게송 참고.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묵무언(默無言) 하신' ; 면벽구년(面壁九年).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했던 고사(故事)를 가리킨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양 무제(武帝)를 만나 문답하였으나 무제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마침내 물러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의 낙양으로 가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을 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말하지 않고 벽을 향하여 좌선하기 9년을 지냈다. 이를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뒤부터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벽을 향하여 좌선하게 되었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격외선(格外禪) ; 언어 · 문자로 의론할 수 있는 격식을 초월한 선법. 조사선(祖師禪)에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는 선을 말한다.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평상화(平常話) ; ①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②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이야기[話]. 일상생활 이야기. 일상생활.

[참고 ❶]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참선(參禪)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10분2초~11분29초)

 


[참고 ❷]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4분58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요 소리가 더 크게 안되나? 정전 되았어? 응.)

군금욕심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처음~5분6초)
*적멸궁(寂滅宮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집·대궐·절·마음 궁) ; 적멸의 궁전은 적멸을 형상화한 말로서,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欲)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장엄(莊嚴 엄숙할·삼가할·꾸밀 장/엄할·공경할·꾸밈 엄) ; ①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님께 올려 장식하는 일. ②건립하는 것. 건립. 훌륭히 배치, 배열되어 있는 것. ③장식. 물건을 장식하는 것. 아름답게 장식함. 훌륭한 것. 엄숙하게 장식된 모양, 모습. 장식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진여자성(眞如自性)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부처님 경전에 말씀에는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나타낸 말.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❶]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❷]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❸]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근본 성품, 각성(覺性), 자성(自性).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❶]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❷]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하열(下劣 아래 하/못할·낮을 렬) ; (행동이나 생각이) 남보다 뒤떨어짐. 수준이 낮음.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천수(千手) ;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 「천수경(千手經)」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를 말함. 82구(句)의 주문(呪文). 천수관음의 공덕을 말한 것으로, 이것을 외면 모든 죄업이 없어진다고 한다.
대비주(大悲呪), 천수주(千手呪), 천수천안대비심다라니(千手千眼大悲心陀羅尼)라고도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칠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경절문(徑截門 지름길 경/끊을 절/문 문) ; 지름길문. 경절(徑截)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 교문(敎門)의 55위 점차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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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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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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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ㅈ/진여불성2023. 1. 9. 08:39

진여불성(No.109)—(게송)山月投窓白~ | 평상화(平常話) 도리 | 진여자성을 물의 습성에 비유 | 망념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를 드는 것이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 |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 | 방편과 경절문(徑截門).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지도하에 열심히 생활 속에서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픈 일 속에서, 괴로운 일을 당하면 괴로운 일을 당한 바로 거기에서 괴로운 것을 띠어 버릴려고 하지 말고, 슬픈 것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 슬픔 속에 젖어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속에서 '이 뭣고?' 이렇게 한 생각을 돌이킨다면 그 슬픈 그 상황이 바로 선방(禪房)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처님 회상(會上)인 것입니다.

 

(17분 32초)

 


[법문] 송담스님(No.109)—1979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2.4) (용109)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에 산위에 뜬 달이 창에 비추어서 환하구나. 그리고 시냇물 소리는 문안에까지 들려온다.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라.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묵무언(默無言) 하신 뜻을 알고자 할진댄, 그 말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알고자 할진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모름지기 이 가운데를 향해서 밝힐지니라.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그 도리를 알고자 할진댄, 산 달이 창에 비추어서 희고 시냇물 소리가 방안에까지 들려온다. 이 속을 향해서 밝힐지니라[須向此中明].


오늘 기미년 10월 15일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격외선(格外禪) 도리, 내가 나를 깨닫는 도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도리는 깨닫지 못한 분상(分上)에서는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무슨 뜻인지 요량을 할 수가 없지마는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고 깊고 깊어서 그래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산 달이 창에 비추어서 환하니 희고, 방안에 앉아서도 시냇물 소리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농부가 쟁기를 짊어지고 논으로 가고, 밥을 먹을 때 숟갈로 밥을 떠서 입에다 넣으면 저분은 반찬 그릇으로 간다.

바로 이 평상화(平常話)—우리 일상 생활에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한숨 자고, 부르면 대답하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봄이 오면 풀은 파릇파릇 풀이 돋아오고, 가을이 오면 단풍이 져서 떨어지는 이 도리,
이 도리를 내놓고는 최상승 활구법, 격외선 도리, 도솔천 내원궁,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寂滅宮)을 장엄(莊嚴)하는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가장 빨리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발로 걸어 다니고, 손으로 일하고 글씨 쓰고, 입으로 말하고 하는 중생으로서 육체적인 모든 동작, 정신적인 모든 작용, 일상 생활을 떠나서 이것을 찾을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 그때 거기서 생각 생각이 일어나는 그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중생의 망념 그놈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도리, 오직 여기에서만 바로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모든 우리의 중생념, 중생심(衆生心), 번뇌 망상을 버리고 따로 찾는다면 그 사람은 무량겁을 닦아도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을 버리고서 물의 습성(濕性)을 찾아서는 영원히 그 사람은 습성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중생심을 물에다가 비유한다면 물은 온도에 따라서 때로는 흐를 수 있는 액체로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영하로 내려가면 얼어서 고체가 되기도 하고, 섭씨 백 도가 되면 끓어서 증기로 기체로 변하기도 합니다.
기체도 되었다, 액체도 되었다, 고체도 되었다,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물도 되었다, 얼음도 되었다, 김으로도 되었다 또는 눈도 되었다, 서리도 되었다, 우박도 되었다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변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모양으로 있던지 간에 변함이 없는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습성(濕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습한 성질. 물의 습성이라 하는 것은 그 모양의 여하에 따라서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자성(眞如自性), 참나, 나는 성불(成佛)을 해서 부처님으로 계실 때나, 죄를 짓고 지옥에 가서 있거나, 우리 중생으로서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건 간에 우리의 진여불성에는 조금도 늘거나 줄거나 새로 생겨나거나 죽거나, 때가 묻거나 깨끗하거나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함이 없으면서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천 가지 만 가지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로 모습을 나투면서도 원래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에 있어서의 습성에다가 비유해서 말씀을 드렸지마는 이것은 하나의 비유에 지내지 못하고 '참나'라고 하는 것은 오직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參禪)을 함으로서만이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드린 것은 우리 모두가 올바르게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이 몸으로, 이 죄 많은 몸으로, 이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으로 가득찬 이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반드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여러분에게 증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대보살님들도, 모든 성현들도 깨닫기 전에는 우리 범부(凡夫)와 똑같은 것입니다. 깨달으면 그것을 '깨달은 분'이라 해서 '붓다(Buddha)'라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범부인 것입니다.

범부와 성현과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부처님 경전에 말씀에는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은 참 말씀이요, 진실한 말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중생심(衆生心)을 여의고 불성(佛性)이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심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부처님이 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설사 그것이 얼음이 되었건, 우박이 되었건, 눈이 되었건, 물의 변화체에 어떠한 변화된 상태에 있건 간에 거기에는 반드시 습성(濕性)이 있는 거와 같이, 모든 중생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중생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서,
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지도하에 열심히 생활 속에서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픈 일 속에서, 괴로운 일을 당하면 괴로운 일을 당한 바로 거기에서 괴로운 것을 띠어 버릴려고 하지 말고, 슬픈 것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 슬픔 속에 젖어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속에서 '이 뭣고?' 이렇게 한 생각을 돌이킨다면 그 슬픈 그 상황이 바로 선방(禪房)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처님 회상(會上)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 하는 방법이며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넓고 범위가 넓고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그러한 좋은 길인 것이며 또한 어떠한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하건, 죄가 많건, 몸이 아프건 그런 것, 오히려 그러한 역경계(逆境界) 속에서 더욱 간절해질 수 있는,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는 그래 가지고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미묘하고도 고마운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절로 절로 다니시면서 기도를 주로 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주로 염불이나 경을 읽으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수(千手)를 열심히 하시거나, 여러 가지 그러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도 다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정법(正法)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부처님과 성현들이 설허신 다 미묘한 방편(方便)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마는, 우리는 방편을 통해서 그것을 징검다리로 해서 바로 구경(究竟)의 길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지, 방편에 오래 집착해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동안 용화사에서 누누이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과 저의 말씀을 통해서 어떠한 것이 방편이고, 어떠한 것이 바로 직접적으로 설해 드리는 경절문(徑截門), 바로 가깝고 바른 길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처음~17분3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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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산월투창백~’ ; 『소요당집(逍遙堂集)』 소요 태능(逍遙太能)의 ‘무제(無題)’ 게송 참고.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묵무언(默無言) 하신' ; 면벽구년(面壁九年).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했던 고사(故事)를 가리킨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양 무제(武帝)를 만나 문답하였으나 무제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마침내 물러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의 낙양으로 가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을 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말하지 않고 벽을 향하여 좌선하기 9년을 지냈다. 이를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뒤부터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벽을 향하여 좌선하게 되었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격외선(格外禪) ; 언어 · 문자로 의론할 수 있는 격식을 초월한 선법. 조사선(祖師禪)에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는 선을 말한다.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평상화(平常話) ; ①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②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이야기[話]. 일상생활 이야기. 일상생활.
[참고 ❶]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참선(參禪)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10분2초~11분29초)

[참고 ❷]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요 소리가 더 크게 안되나? 정전 되았어? 응.)군금욕심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처음~5분6초)
*적멸궁(寂滅宮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집·대궐·절·마음 궁) ; 적멸의 궁전은 적멸을 형상화한 말로서,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欲)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장엄(莊嚴 엄숙할·삼가할·꾸밀 장/엄할·공경할·꾸밈 엄) ; ①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님께 올려 장식하는 일. ②건립하는 것. 건립. 훌륭히 배치, 배열되어 있는 것. ③장식. 물건을 장식하는 것. 아름답게 장식함. 훌륭한 것. 엄숙하게 장식된 모양, 모습. 장식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진여자성(眞如自性)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부처님 경전에 말씀에는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근본 성품, 각성(覺性), 자성(自性).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하열(下劣 아래 하/못할·낮을 렬) ; (행동이나 생각이) 남보다 뒤떨어짐. 수준이 낮음.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천수(千手) ;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 「천수경(千手經)」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를 말함. 82구(句)의 주문(呪文). 천수관음의 공덕을 말한 것으로, 이것을 외면 모든 죄업이 없어진다고 한다.
대비주(大悲呪), 천수주(千手呪), 천수천안대비심다라니(千手千眼大悲心陀羅尼)라고도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칠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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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절문(徑截門 지름길 경/끊을 절/문 문) ; 지름길문. 경절(徑截)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 교문(敎門)의 55위 점차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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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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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ㅈ/조사서래의2022. 5. 18. 16:15

조사서래의(No.109)—(게송)山月投窓白~ | 평상화(平常話) 도리 | 진여자성을 물의 습성에 비유 | 망념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를 드는 것이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 |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 | 방편과 경절문(徑截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17분 32초)


[법문] 송담스님(No.109)—1979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2.4) (용109)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에 산위에 뜬 달이 창에 비추어서 환하구나. 그리고 시냇물 소리는 문안에까지 들려온다.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라.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묵무언(默無言) 하신 뜻을 알고자 할진댄, 그 말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알고자 할진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모름지기 이 가운데를 향해서 밝힐지니라.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그 도리를 알고자 할진댄, 산 달이 창에 비추어서 희고 시냇물 소리가 방안에까지 들려온다. 이 속을 향해서 밝힐지니라[須向此中明].


오늘 기미년 10월 15일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격외선(格外禪) 도리, 내가 나를 깨닫는 도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도리는 깨닫지 못한 분상(分上)에서는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무슨 뜻인지 요량을 할 수가 없지마는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고 깊고 깊어서 그래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산 달이 창에 비추어서 환하니 희고, 방안에 앉아서도 시냇물 소리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농부가 쟁기를 짊어지고 논으로 가고, 밥을 먹을 때 숟갈로 밥을 떠서 입에다 넣으면 저분은 반찬 그릇으로 간다.

바로 이 평상화(平常話)—우리 일상 생활에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한숨 자고, 부르면 대답하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봄이 오면 풀은 파릇파릇 풀이 돋아오고, 가을이 오면 단풍이 져서 떨어지는 이 도리,
이 도리를 내놓고는 최상승 활구법, 격외선 도리, 도솔천 내원궁,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寂滅宮)을 장엄(莊嚴)하는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가장 빨리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발로 걸어 다니고, 손으로 일하고 글씨 쓰고, 입으로 말하고 하는 중생으로서 육체적인 모든 동작, 정신적인 모든 작용, 일상 생활을 떠나서 이것을 찾을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 그때 거기서 생각 생각이 일어나는 그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중생의 망념 그놈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도리, 오직 여기에서만 바로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모든 우리의 중생념, 중생심(衆生心), 번뇌 망상을 버리고 따로 찾는다면 그 사람은 무량겁을 닦아도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을 버리고서 물의 습성(濕性)을 찾아서는 영원히 그 사람은 습성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중생심을 물에다가 비유한다면 물은 온도에 따라서 때로는 흐를 수 있는 액체로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영하로 내려가면 얼어서 고체가 되기도 하고, 섭씨 백 도가 되면 끓어서 증기로 기체로 변하기도 합니다.
기체도 되었다, 액체도 되었다, 고체도 되었다,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물도 되었다, 얼음도 되었다, 김으로도 되었다 또는 눈도 되었다, 서리도 되었다, 우박도 되었다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변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모양으로 있던지 간에 변함이 없는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습성(濕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습한 성질. 물의 습성이라 하는 것은 그 모양의 여하에 따라서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자성(眞如自性), 참나, 나는 성불(成佛)을 해서 부처님으로 계실 때나, 죄를 짓고 지옥에 가서 있거나, 우리 중생으로서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건 간에 우리의 진여불성에는 조금도 늘거나 줄거나 새로 생겨나거나 죽거나, 때가 묻거나 깨끗하거나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함이 없으면서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천 가지 만 가지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로 모습을 나투면서도 원래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에 있어서의 습성에다가 비유해서 말씀을 드렸지마는 이것은 하나의 비유에 지내지 못하고 '참나'라고 하는 것은 오직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參禪)을 함으로서만이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드린 것은 우리 모두가 올바르게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이 몸으로, 이 죄 많은 몸으로, 이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으로 가득찬 이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반드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여러분에게 증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대보살님들도, 모든 성현들도 깨닫기 전에는 우리 범부(凡夫)와 똑같은 것입니다. 깨달으면 그것을 '깨달은 분'이라 해서 '붓다(Buddha)'라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범부인 것입니다.

범부와 성현과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부처님 경전에 말씀에는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은 참 말씀이요, 진실한 말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중생심(衆生心)을 여의고 불성(佛性)이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심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부처님이 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설사 그것이 얼음이 되었건, 우박이 되었건, 눈이 되었건, 물의 변화체에 어떠한 변화된 상태에 있건 간에 거기에는 반드시 습성(濕性)이 있는 거와 같이, 모든 중생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중생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서,
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지도하에 열심히 생활 속에서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픈 일 속에서, 괴로운 일을 당하면 괴로운 일을 당한 바로 거기에서 괴로운 것을 띠어 버릴려고 하지 말고, 슬픈 것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 슬픔 속에 젖어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속에서 '이 뭣고?' 이렇게 한 생각을 돌이킨다면 그 슬픈 그 상황이 바로 선방(禪房)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처님 회상(會上)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 하는 방법이며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넓고 범위가 넓고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그러한 좋은 길인 것이며 또한 어떠한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하건, 죄가 많건, 몸이 아프건 그런 것, 오히려 그러한 역경계(逆境界) 속에서 더욱 간절해질 수 있는,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는 그래 가지고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미묘하고도 고마운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절로 절로 다니시면서 기도를 주로 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주로 염불이나 경을 읽으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수(千手)를 열심히 하시거나, 여러 가지 그러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도 다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정법(正法)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부처님과 성현들이 설허신 다 미묘한 방편(方便)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마는, 우리는 방편을 통해서 그것을 징검다리로 해서 바로 구경(究竟)의 길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지, 방편에 오래 집착해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동안 용화사에서 누누이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과 저의 말씀을 통해서 어떠한 것이 방편이고, 어떠한 것이 바로 직접적으로 설해 드리는 경절문(徑截門), 바로 가깝고 바른 길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처음~17분3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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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산월투창백~’ ; 『소요당집(逍遙堂集)』 소요 태능(逍遙太能)의 ‘무제(無題)’ 게송 참고.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묵무언(默無言) 하신' ; 면벽구년(面壁九年).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했던 고사(故事)를 가리킨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양 무제(武帝)를 만나 문답하였으나 무제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마침내 물러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의 낙양으로 가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을 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말하지 않고 벽을 향하여 좌선하기 9년을 지냈다. 이를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뒤부터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벽을 향하여 좌선하게 되었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격외선(格外禪) ; 언어 · 문자로 의론할 수 있는 격식을 초월한 선법. 조사선(祖師禪)에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는 선을 말한다.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평상화(平常話) ; ①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②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이야기[話]. 일상생활 이야기. 일상생활.

[참고 ❶]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참선(參禪)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10분2초~11분29초)

 


[참고 ❷]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요 소리가 더 크게 안되나? 정전 되았어? 응.)



 

군금욕심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처음~5분6초)
*적멸궁(寂滅宮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집·대궐·절·마음 궁) ; 적멸의 궁전은 적멸을 형상화한 말로서,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欲)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장엄(莊嚴 엄숙할·삼가할·꾸밀 장/엄할·공경할·꾸밈 엄) ; ①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님께 올려 장식하는 일. ②건립하는 것. 건립. 훌륭히 배치, 배열되어 있는 것. ③장식. 물건을 장식하는 것. 아름답게 장식함. 훌륭한 것. 엄숙하게 장식된 모양, 모습. 장식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진여자성(眞如自性)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부처님 경전에 말씀에는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근본 성품, 각성(覺性), 자성(自性).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하열(下劣 아래 하/못할·낮을 렬) ; (행동이나 생각이) 남보다 뒤떨어짐. 수준이 낮음.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천수(千手) ;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 「천수경(千手經)」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를 말함. 82구(句)의 주문(呪文). 천수관음의 공덕을 말한 것으로, 이것을 외면 모든 죄업이 없어진다고 한다.
대비주(大悲呪), 천수주(千手呪), 천수천안대비심다라니(千手千眼大悲心陀羅尼)라고도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칠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경절문(徑截門 지름길 경/끊을 절/문 문) ; 지름길문. 경절(徑截)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 교문(敎門)의 55위 점차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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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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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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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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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ㄷ/도솔천내원궁2019. 9. 28. 19:01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6분 42초)

 

[법문] 송담스님(No.109)—1979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2.4) (용109)

 

아까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대한 말씀이 계셨지마는 도솔천 내원궁은 불과 물 그런 삼재(三災)의 겁풍(劫風)이 도달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외원궁까지도 불과 물에 겁풍(劫風)이 도달하지만 내원궁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솔천 내원궁은 모든 부처님께서 출현(出現)하시기 위해서 지금 대기하고 계신 곳이 바로 도솔천 내원궁입니다.

 

도솔천 내원궁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와 조금도 차등이 없을 만큼 그렇게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성현들이 도솔천 내원궁에 환생(還生)하시기를, 거기에 왕생(往生)하시기를 발원을 하셨습니다.

지금 앞으로 56억 7천만년 뒤에 출현하실 하강(下降)하실 미륵 부처님, 미륵불(彌勒佛)도 지금 도솔천 내원궁에 대기하고 계십니다.

 

그 도솔천 내원궁이 저 하늘나라 높은 데에 있다고 생각하시지를 말고 도솔천 내원궁은 우리의 자성(自性) 본궁이다. 내가 한 생각 탁! 깨달으면 깨달은 바로 그 본각(本覺) 자리가 도솔천 내원궁이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그러한 뜻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것은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입각해서 볼 때에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죽어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기를 발원하기보다는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실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길을 열심히 한다면 살아서 가는 사람이 죽어서 못 갈까 걱정할 것은 하등에 없는 것입니다.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법이 바로 우리의 중생의 일념(一念), 그 한 생각이 슬픈 생각이건 또는 어떠한 노여운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어떠한 생각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떠한 고약한 욕심스런 생각이건, 누구를 해롭게 헐랴고 하는 그러한 나쁜 생각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때일수록 그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숨을 깊이 들어마셔서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돌이켜서 단속해 나가면, 그러한 노도(怒濤)와 같이 일어나는 어떠한 중생에 번뇌(煩惱) 망상(妄想)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스르르르르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다 보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한 달 일 년 이렇게 일구월심(日久月深),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서 점점 그것이, 생각 돌려서 화두(話頭) 드는 것이 습관이 되고 또 나아가서는 그것이 체질화가 되어서 그렇게 할려고 안 해도 제절로 그렇게 되어진다면, 언제나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일여(一如)하게 그렇게 공부가 되어간다면 바로 그것이 득력(得力)을 하는 것이여.

 

'득력(得力)은 생력(省力)이다, 힘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힘을 더는 것이다'

애를 써도 처음에는 잘 안되고 깜박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서 못하고 그러다가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공부를 함으로써 할려고 안 해도 무심(無心) 속에 저절로 그렇게 공부가 되어 가면 그것이 바로 힘을 더는 것인데, 그 힘을 더는 것이 바로 득력하는 것이다, 힘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질 때 스스로 가만히 자기 자신을 반성을 해 보면, 완연히 내가 이 참선(參禪) 공부를 하기 전의 자기와 참선을 해 가지고 벌써 오늘에 이르러서와 스스로 냉정하게 반성을 해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진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어쩌다가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났던가?' 스스로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참 보람을 느끼고 스스로 참 이 행복함을 느끼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이 정법(正法)에서 물러나지 않겠다' 이러한 결심이 서게 될 것이며, '내가 금생에 이 몸 있을 때 기어코 대도(大道)를 성취하겠다'고 하는 이런 신심이 돈발(頓發)하게 될 것입니다.(33분23초~40분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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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왕생(往生) ; 죽어서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어서 정토에 태어남.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서 극락에 태어남.

*'도솔천 내원궁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와 조금도 차등이 없을 만큼 그렇게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성현들이 도솔천 내원궁에 환생(還生)하시기를, 거기에 왕생(往生)하시기를 발원을 하셨습니다' ; 『경허집(鏡虛集)』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함께 정혜를 닦아 함께 도솔천에 나서 함께 불과를 이루는 계사를 결성하는 글)'에서.

 

余去己卯冬 在鷄龍山東鶴祖堂 參祖門活句 忽有得意處

有與同志共之之思 時風痾未痊 心志且劣 遂以優遊停蓄 放曠於漁村酒肆 憩歇于幽澗邃林 適然自忘矣 以後干戈相屬 世路紛紜 念藏身之不暇 豈有施及於他耶

 

내가 지난 기묘년(一八七九) 겨울에 계룡산 동학사 조사당에 있으면서 조사활구(祖師活句)를 참구하다가 홀연히 뜻을 얻은 곳이 있었다.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공부할 생각이 있었으나 그때에 유행병이 그치지 않았고 마음의 의지도 또한 굳세지 못하여 한가로이 지내면서 속에만 쌓아두고 어촌과 주막으로 방광(放曠)하고 또는 그윽한 시냇물과 깊은 숲을 찾아 쉬며 스스로 잊고 있었다. 그 뒤 소요사태가 잇달아 일어났으며 세상일이 어지러워 이 몸조차 감출 겨를이 없거니 어찌 다른 데 생각이 미치겠는가.

 

荏苒不覺星霜累換 于今二十年於此矣 自念佛恩之莫大 而欲奉塵刹之萬一 橫擔一條楖標(木+栗) 試訪到陜州海印 時適修禪精舍新搆 與諸禪德同寒際 做黃楊木禪

一日火爐邊團圝頭語 及於古人之結社辦道 則諸公皆如忘忽憶 其志願信力 水湧山出 恨其會遇之晩也

卽欲議結社同盟 推余爲盟主 余念及於曩日所懷佛恩之莫大 不顧其材之庸陋 性之不撿 道之未充也 不施一辭而輒許之也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성상(星霜)이 여러번 바뀌어 20여년이 지났다. 스스로 부처님의 은혜가 막대함을 생각하고 진찰(塵刹 이 세상, 무량중생)에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여 질률주장자를 가로 메고 합천 해인사로 갔다. 마침 선방을 새로 건축하여 여러 선덕들과 겨울 한 철을 나며 황양목선(黃楊木禪:진취가 없는 공부)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화롯가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고인(古人)들이 결사(結社)하여 수도하던 일에 말이 미치니, 여러 선덕들은 모두가 잊었던 것을 문득 생각해 낸듯 그 지원(志願)과 신심이 물이 샘솟고 산이 솟아 나오는듯 일어나 서로 만남이 늦음을 한탄하였다.

곧 결사를 동맹하기를 의논하여 나를 맹주(盟主)로 추대하였다. 내 생각이 지난날 부처님 은혜가 막대하다고 품었던 바에 미치니 그 재주의 용렬함과 성품의 단정하지 못함과 도에 충실하지 못함을 돌아보지 않고 한마디 사양함도 없이 문득 허락하였다.

 

其所以同盟之約何也 以同修定慧 同生兜率 世世同爲道伴 究竟同成正覺 如有道力先成者 誓引其未逮 不違所盟者也

若有同見同行之人 不問僧俗男女老少賢愚貴賤 亦不問親踈離合遠近先後 皆許參入

 

그 동맹의 약속은 무엇인가. 다 함께 정혜를 닦고 함께 도솔천에 나며 세세생생 함께 도반이 되어 구경에는 함께 정각을 이루며, 도력을 먼저 성취하는 이가 있으면 맹세코 아직 따라오지 못한 이를 이끌어서 이러한 동맹한 바를 어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견해가 같고 수행을 같이하려는 이가 있으면 승속과 남녀노소와 현우귀천을 묻지 않으며 또한 친소(親踈)와 이합(離合), 원근과 선후를 묻지 않고 모두 동참하기를 허락하였다.

 

所以然者 人人皆有無量寶藏 與佛無殊 秪是歷劫不逢善友開示 匍匐三界 奔汨四生 不啻如演若之迷頭 窮子之離鄕 輪廻飄梗 備受許多艱辛 至於一日夜萬生死 每一念之 痛裂心腑 不覺短嘆長吁 豈可例之茶飯不求出離哉 詳悉如此情事 普願同臻壽域也樂邦也

 

왜 그런가 하면 사람마다 한량없는 보배 창고가 있어서 부처님과 다름없거늘 다만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선지식의 바른 지도를 만나지 못하여 삼계에 벗어나지 못하고 사생(四生)에 부침(浮沈)하는 것이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잃고, 궁(窮)한 아이가 고향을 떠난 것에 그치지 않고, 윤회하여 떠다니며 숱한 고생을 겪으며 심지어 하루밤에도 만 번이나 나고 죽으니, 이를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저도 모르게 짧은 탄식과 긴 한숨이 나오니 어찌 다반사로 여겨 벗어나기를 구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사정을 상세히 알아서 다 같이 수역(壽域)과 낙토(樂土, 극락정토)에 가고자 함께 발원하는 것이다.

 

且古人云 趣異也覿面楚越 道契則霄壤共處 以共處也 故萬象雖布 空性無虧 衆水同奔 海量不添 幸望策發勇猛心 照明虛妄無常之業行 悟修寂滅法界之性地 忘其見解所知 超證正法眼藏涅槃妙心也 夫如是 其誰曰不可也哉 不願樂也哉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취미가 다르면 얼굴을 대하고 있어도 초나라 월나라요, 도가 계합한즉 하늘과 땅이 같은 곳이다”하였으니, 같은 곳이기에 만상이 비록 펼쳐졌으나 공한 성품은 이지러짐이 없고, 온갖 물이 함께 흘러 들어가도 바닷물은 불지 않나니, 다행히 바라건대 용맹심을 분발하여 허망하고 무상한 인생살이[業行]를 밝게 관찰해서 적멸한 법계의 성품을 깨달아 닦으며, 그 견해와 아는 바를 잊어버리고 정법안장과 열반묘심을 몰록 증득할지어다.

대저 이와같이 하면 그 누가 불가능하다고 하며 누구인들 이 즐거움을 원하지 않으랴.

 

因行經云 釋迦世尊 於過去世 爲善慧仙人 布髮於燃燈佛 隨喜讚嘆 百萬天人之衆 因其種緣 同會靈山成道 千佛因緣經云 賢劫千佛 於過去寶燈焰王如來像法之中 爲學堂中童子 聞三寶名 禮拜佛像 發弘誓願 發阿耨菩提 以後共成千佛 其他諸佛菩薩之同發願成道者 無經無之

至于近古慧遠之社廬山 樂天之社香山 牧牛子之社公山者 皆以此意者也

 

『인행경(因行經)』에 “석가세존이 과거세에 선혜선인(善慧仙人)으로 있을 때 연등불(燃燈佛)께서 가시는 길에 머리털을 땅에 깔았으므로 백만 인천 대중이 기뻐하고 찬탄하였는데 그때 심은 인연으로 다 함께 영산회상에 모여 도를 이루었다”하였으며, 『천불인연경(千佛因緣經)』에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이 과거 보등염왕여래(寶燈焰王如來)의 상법(像法) 시대에 학당의 동자로 있을 때 삼보(三寶)의 이름을 듣고 불상에 예배하며 큰 서원을 세우고 최상의 보리심을 발해서 이후에 다 함께 천불이 되었다” 하였다. 이 밖에 모든 불보살이 함께 발원하고 도를 이루었다는 것이 경(經)에 없는 데가 없다.

가까운 예전에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에서 결사하고, 백낙천(白樂天)은 향산(香山)에서 결사하고, 목우자(牧牛子)는 팔공산(八公山)에서 결사한 것이 모두 이러한 뜻이다.

 

玄奘法師云 西域之人 皆作上生兜率業 盖爲同是欲界之內 聲氣相合 其行易成 故大小乘師 皆許此法

彌陀淨土 恐凡鄙穢脩行難成 故如新舊譯經論皆云 十地已上菩薩 隨分得見報佛淨土 豈容下品凡夫 卽得往生 所以大乘許之 小乘不許也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이르기를 “서역(西域) 사람들은 모두 도솔천에 상생(上生)하는 업을 짓는다"하니, 대개 도솔천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욕계(欲界) 안이라 성기(聲氣 마음과 뜻)가 서로 잘 맞아 그 행이 이루기 쉬우므로 대소승 법사들이 모두 이 도솔천에 나는 법을 인정하였다.

미타정토는 비루한 범부가 사바세계에서 수행하여 행업을 성취하기 어려운 때문에 신구역(新舊譯) 경론에서 모두 “십지 이상의 보살은 분수에 따라 보신불(報身佛)의 정토를 볼 수 있다” 하였으니 어찌 하품의 범부로서 곧바로 미타정토에 왕생을 할 수 있으리오. 그래서 미타정토에 왕생하는 법은 대승에서는 인정하고 소승에서는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故玄奘法師 一生以來 常作兜率業 臨命終時 發願上生見彌勒佛 請大衆說偈云 南無彌勒如來應正等覺 願與含識 速奉慈顔 南無彌勒如來所居內衆 願捨命已 必生其中

盖玄奘法師 識法上士 必不是自悞賺人 況古今傳記上生兜率者 何可勝記 而如無着與天親菩薩者 亦同願上生兜率 今但取法焉

 

그래서 현장법사는 일생 동안 항상 도솔천에 왕생할 행업을 지었고 임종할 때에는 상생하여 미륵부처님을 친견하기를 발원하고 대중에게 청하여 '미륵여래 응정등각(應正等覺)께 귀의하옵나니 바라옵건댄 모든 중생들과 함께 속히 자비스런 모습을 뵙고자 하옵니다. 미륵여래와 함께 거처하는 대중에게 귀의하옵나니 바라옵건댄 목숨을 다한 뒤에 반드시 그 가운데 왕생하고자 하옵니다'라는 게송을 외게 하였다.

현장법사는 법을 아는 큰 스님이라 반드시 스스로 그르치거나 남을 속이지 않는다. 하물며 고금전기에 실린 도솔천에 상생한 사람을 어찌 다 기록하겠는가. 무착(無着)스님, 천친보살(天親菩薩) 같은 이들도 또한 모두 도솔천에 상생하기를 원하였으니 이제는 다만 그 법을 취할 뿐이다.

 

雖然如是 其淨土與兜率也 隨其修行人之暫時志願有異 豈有上生兜率者 不願親見彌陀如來 往生淨土者 不願承事彌勒尊佛 譬夫白璧黃金 各爲眞寶 春蘭秋菊 共傳淸香 幸勿以優劣難易諍起是非人我之見也

 

비록 그러하나 정토와 도솔이 그 수행하는 사람의 잠시 동안의 뜻과 발원에 따라 다름이 있으니, 어찌 도솔에 상생하려는 이가 미타여래를 친견하기를 원치 않으며, 정토에 왕생하려는 이가 미륵존불을 받들어 섬기길 원하지 않으리오. 마치 백옥과 황금이 각기 참된 보배이며 봄 난초와 가을 국화가 함께 맑은 향기를 풍기는 것과 같으니 아무쪼록 어느 쪽이 낫고 어느 쪽이 못하며, 어느 쪽이 쉽고 어느 쪽이 어렵다고 다투어 옳으니 그르니 너와 나의 견해를 일으키지 말라.

 

今稧內先入者 有如是上生行願 追後參社者 亦同其心口 設有道力未成者 乘斯願力 上生兜率內院 參聽彌勒尊佛無上玄音 速證大覺 還度衆生 豈不暢哉快哉

願諸道者 幸勿以重古輕今 發願同參而深結善緣也 其餘日用散行 具載黃卷 可效可師 不必條分縷折

古人云 萬行備修 唯以無念爲宗 修行之要 定在斯焉 幸無至有失於偏倚過不及之地也

 

이 계(稧) 안에 먼저 들어온 이도 이와 같은 상생의 행원(行願)이 있으며 뒤에 결사에 참가하는 이들도 또한 그 마음과 말이 같아야 한다. 설사 도의 힘을 이루지 못한 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원력에 의지하여 도솔천 내원궁에 상생하여 미륵존불의 최상의 현묘한 법문을 들어 속히 대각을 증득하고 돌아와 중생을 제도하면 어찌 유쾌하고 즐겁지 않겠는가.

원컨댄 모든 수행자들은 아무쪼록 옛일은 중히 여기면서 지금 것은 가벼히 여기지 말고 발원하고 동참하여 좋은 인연을 깊이 맺을지어다. 그 밖의 일상생활의 여러 행동은 경전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스승으로 삼아 본받으면 되겠기에 조목조목 분석하지 않는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행을 갖추어 닦더라도 오직 무념(無念)으로써 종(宗)을 삼는다” 하였으니 수행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치우치거나 과불급(過不及)의 실수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

 

嗟夫 一失人身 萬劫難復 自昔英雄而今安在 故古德自誡頌云 不求名利不求榮 只麼隨緣度此生 三寸氣消誰是主 百年身後漫虛名 衣裳破處重重補 粮食無時旋旋營 一箇幻軀能幾日 爲他閑事長無明

又古德歎世詩云 細推今舊事堪愁 貴賤同歸一古邱 漢武玉堂塵已沒 石崇金谷水空流 光陰乍曉仍還夕 草木纔春卽到秋 在世若無毫末善 死將何物答冥侯

 

슬프다!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다시 얻기 어렵나니 옛날의 영웅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그래서 고덕이 스스로 경계한 게송에 이르기를 “거룩하다는 이름도 구하지 말고 재물도 구하지 말고 영화스러움도 구하지 말고 그럭저럭 인연따라 한 세상 보내리라. 세치 기운 떨어지면 누가 주인이며 백 년 뒤에 이 몸은 헛된 이름 뿐이로세. 옷이 헤어지면 누덕누덕 기워 입고 양식이 떨어지면 그때마다 얻어먹세. 한낱 헛된 몸 며칠이나 살겠다고 쓸데없는 일 하느라고 무명만 키우는가” 하였고.

 

또 고덕이 세상을 탄식한 시에 이르기를 “자세히 이제와 옛일 생각하니 근심이 그지없네. 귀한 이든 친한 이든 함께 한줌 흙이로세. 한무제의 옥당은 이미 티끌에 묻혔고 석숭의 금곡에는 물만 속절없이 흐르누나. 광음은 새벽인듯 어느새 저녁이요 초목은 봄이러니 잠깐 뒤 가을일세. 살았을 때 만약 털끝만한 착한 일 없으면 죽은 뒤 무엇으로 염라대왕에 대답하랴”

 

又古德勸修文云 一息不回 便是來生 縱使妻兒相惜 無計留君 假饒骨肉滿前 有誰替汝 催促付一堆野火 斷送埋萬里荒山 荒草畔漫留石碑 綠楊中空掛紙錢 淚雨洒時空寂寂 悲風動處冷颼颼 下梢頭難免如斯 到這裡 怎生不惺 佛言不言 何言可信 人道不修 他道難修 實爲可歎惜者哉

 

또 고덕의 수행을 권하는 글에 이르기를 “들어갔던 숨이 나오지 않으면 문득 내생이니, 설령 처자식이 아무리 애석히 여겨도 그대를 잡아둘 수 없고 비록 친척이 가득한들 누가 너를 대신하랴. 재촉하여 한 무더기 불더미에 태우거나 만리 밖 거친 산에 묻어 버리니, 우거진 풀숲 곁에 비석만 남았고 푸른 버들가지에는 공연히 종이돈만 걸려 있네. 눈물을 뿌릴 때 속절없이 적적하고 슬픈 바람 이는 곳에 찬 기운만 쓸쓸하다. 끝내, 죽을 때를 당하여 이러함을 면하기 어렵나니 이에 이르러 어찌 각성하지 않으리오.

부처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어떤 말을 믿으리오. 인도(人道)에 태어나서 도를 닦지 않으면 타도(他道)에는 도를 닦기 어려우니 실로 한스럽고 애석하도다” 하였다.

 

 

應是此稧社文 三復披究 銘箴心腑 精進也如救頭燃 莫使此生空過也 至於若見聞如此切懇規戒 而視之尋常 如隔靴搔痒 越視秦瘠 小無觀感興起之心者 如病不求藥 飢不取食 吾實末如之何也已矣

若有眞實欲行此綱領淵源之道 發上生兜率內院之心者 切須勤參知識 文短智淺 書不能盡其言意

 

마땅히 이 결사문을 재삼 읽고 생각하여 마음에 새겨 두고 정진하여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하여 이 생애를 헛되이 보내지 말지어다. 만약 이와 같은 간절한 규계(規戒)를 보고 듣고도 심상히 여겨서 가려움에 신발 위를 긁듯 하거나, 월나라가 진나라를 보듯 하여 조금도 감동이나 발심이 없다면 병든 이가 약을 구하지 않거나, 굶주림에도 밥을 먹지 않음과 같으니 나도 참으로 어찌 할 수 없을 뿐이로다.

만일 진실로 이 강령과 연원의 도를 행하여 도솔천 내원궁에 상생하기를 발원하는 이는 부지런히 간절하게 선지식을 찾을지어다. 글은 짧고 지혜는 옅어서 말과 뜻을 글로써 능히 다 표현하지 못하였도다.

 

謹此仗此勝緣 仰祝皇帝陛下聖壽萬歲 次願歲稔時和 烟塵永絕 正法流通於無窮 法界含識 同證妙覺

結社比丘惺牛等 歸依一代敎主釋迦牟尼佛 歸依當來敎主彌勒尊佛 歸依十方三世常遍常住佛法僧 仰仗憐愍加被之力 使我等所願勿浪失速成就 伏祝

大韓 光武 三年 十一月 一日 結社盟主 比丘 惺牛 焚香再拜 謹識

 

삼가 이 수승한 인연으로 우러러 축원하노니 황제 폐하 성수 만세하며, 다음 발원은 해마다 풍년 들어 시절이 평화스러우며 전란은 영영 없어지며 정법이 유통되어 저 무궁한 법계의 중생들이 다 함께 묘각을 이루어지이다.

결사 비구 성우(惺牛) 등은 일대교주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오며, 당래교주 미륵 부처님께 귀의하오며, 시방삼세 항상 두루하고 항상 머무시는 불법승께 귀의합니다. 우러러 엎드려 청하옵나니 연민의 가피력으로 하여금 우리들의 소원이 헛되지 않게 하고 속히 성취되기를 엎드려 축원합니다.

대한 광무 3년 11월 1일 결사맹주(結社盟主) 비구 성우는 향 사르고 재배하고 삼가 쓰노라.

 

 

〇定慧稧社規例(정혜 계사 규례)

一. 當念無常迅速 生死事大 勤修定慧 若不勤修定慧而求佛果者 如却行求前 適越北轅 切勿執着有爲幻法以誤平生事事.

 

1. 마땅히 무상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이 중대함을 생각하여 정혜를 부지런히 닦아야 할 것이니 만약 정혜를 부지런히 닦지 않고 불과(佛果)를 구하고자 함은 뒷걸음질치면서 앞으로 가기를 바람이며, 남쪽 월나라로 가려고 하면서 북쪽으로 수레를 모는 것과 같도다. 부디 저 헛된 유위법에 집착해서 평생의 일을 그르치지 말지니라.

 

一. 若勤修定慧 能決擇行業而後 不枉用功 應須參尋知識事.

 

1. 정혜를 부지런히 닦고 공부길이 잘 결택되었으면 힘을 허비하지 말고 응당 모름지기 선지식을 찾아 참구해야 한다.

 

一. 自古成佛作菩薩 必具行業 然後得辦 所以行定慧 願上生兜率內院 同成佛果事.

 

1. 예로부터 부처를 이루고 보살이 되려면 반드시 행업(行業)을 갖춘 뒤에 될 수 있다. 그래서 정혜를 닦는 까닭은 도솔천 내원궁에 상생하여 다 함께 불과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一. 旣參稧社者 以定慧爲急務 不可但願上生兜率也 有願無行 則其願歸虛事.

 

1. 이미 결사에 참예한 이는 정혜를 위해 급히 힘을 쓸지언정 도솔천에 상생하기만을 원하지 말라. 발원만 있고 정혜를 닦지 않으면 곧 그 원은 헛일이 되고 말 것이다.

 

一. 能眞修定慧者 不願生兜率 亦許參社 能眞修定慧者 願往生極樂 亦參社事.

 

1. 능히 참으로 정혜를 닦는 이는 도솔천에 나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이 계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하며, 참으로 정혜를 닦는 이는 극락에 왕생하기를 원하더라도 역시 이 계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본각(本覺) :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일여(一如)하다 ; 내가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Posted by 닥공닥정
ㅇ/일념(한생각)단속2019. 7. 26. 07:05

한 생각(일념) 단속 (No.109)—한 생각 탁! 깨달으면 깨달은 바로 그 본각 자리가 도솔천내원궁 / 득력(得力)은 생력(省力) | 오늘 하루 결제 | 但盡凡情 別無聖解.

 

*한 생각 단속 ; 일념단속(一念團束).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8분 6초)

 

[법문] 송담스님(No.109)—1979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2.4)(용109)

 

오늘은 기도 입재(入齋)요, 결제(結制)로써 우리는 물론 이 용화사 선원에 결제에 방부(房付)를 들인 분도 계시고, 또 결제에는 들지 아니하지만 백일기도에 참석하신 분도 계시고 그러겠습니다.

 

어떻든 간에 '한 생각' 간절하게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드는 곳에 백일기도는 거기에서 소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여물어 가는 것이 되는 것이고, 한 생각,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고 간에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드는 곳에 성불(成佛)을 향해서 스스로 향상되어 가는 것입니다.

 

백일기도는 한 생각 단속으로,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백일기도를 성취하느냐 못하느냐에 기로가 거기에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단속하지 아니하고 방치한 곳에는 마구니가 들어올 수 있는 문을, 틈을 거기에서 열어주는 것이 되는 것이고, 모든 재앙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을 터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량겁(無量劫)이 바로 이 한 생각, 일념지간(一念之間)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한다면 무량겁 업도 소멸이 되고, 무량겁 생사를 끊는 길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는 한 생각이 바로 무량겁(無量劫)인 것입니다. 한 생각을 떠나서 무량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도 그러려니와 이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자리를 여의고서 육도윤회(六途輪廻)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솔천, 아까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대한 말씀이 계셨지마는 도솔천 내원궁은 불과 물 그런 삼재(三災)의 겁풍(劫風)이 도달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외원궁까지도 불과 물에 겁풍(劫風)이 도달하지만 내원궁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솔천 내원궁은 모든 부처님께서 출현(出現)하시기 위해서 지금 대기하고 계신 곳이 바로 도솔천 내원궁입니다.

 

도솔천 내원궁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와 조금도 차등이 없을 만큼 그렇게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성현들이 도솔천 내원궁에 환생(還生)하시기를, 거기에 왕생(往生)하시기를 발원을 하셨습니다.

지금 앞으로 56억 7천만년 뒤에 출현하실 하강(下降)하실 미륵 부처님, 미륵불도 지금 도솔천 내원궁에 대기하고 계십니다.

 

그 도솔천 내원궁이 저 하늘나라 높은 데에 있다고 생각하시지를 말고 도솔천 내원궁은 우리의 자성(自性) 본궁이다. 내가 한 생각 탁! 깨달으면 깨달은 바로 그 본각(本覺) 자리가 도솔천 내원궁이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그러한 뜻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것은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볼 때에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죽어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기를 발원하기보다는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실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길을 열심히 한다면 살아서 가는 사람이 죽어서 못 갈까 걱정할 것은 하등에 없는 것입니다.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법이 바로 우리의 중생의 일념, 그 한 생각이 슬픈 생각이건 또는 어떠한

노여운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어떠한 생각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떠한 고약한 욕심스런 생각이건, 누구를 해롭게 헐랴고 하는 그러한 나쁜 생각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때일수록 그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숨을 깊이 들어마셔서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돌이켜서 단속해 나가면, 그러한 노도(怒濤)와 같이 일어나는 어떠한 중생에 번뇌 망상에 마음이라 할지라도 스르르르르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다 보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한 달 일 년 이렇게 일구월심(日久月深),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서 점점 그것이, 생각 돌려서 화두 드는 것이 습관이 되고 또 나아가서는 그것이 체질화가 되어서 그렇게 할려고 안 해도 제절로 그렇게 되어진다면, 언제나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일여(一如)하게 그렇게 공부가 되어간다면 바로 그것이 득력(得力)을 하는 것이여.

 

'득력(得力)은 생력(省力)이다, 힘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힘을 더는 것이다'

애를 써도 처음에는 잘 안되고 깜박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서 못하고 그러다가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공부를 함으로써 할랴고 안 해도 무심(無心) 속에 저절로 그렇게 공부가 되어 가면 그것이 바로 힘을 더는 것인데, 그 힘을 더는 것이 바로 득력하는 것이다, 힘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질 때 스스로 가만히 자기 자신을 반성을 해 보면, 완연히 내가 이 참선(參禪) 공부를 하기 전의 자기와 참선을 해 가지고 벌써 오늘에 이르러서와 스스로 냉정하게 반성을 해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진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어쩌다가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났던가?' 스스로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참 보람을 느끼고 스스로 참 이 행복함을 느끼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이 정법(正法)에서 물러나지 않겠다' 이러한 결심이 서게 될 것이며, '내가 금생에 이 몸 있을 때 기어코 대도를 성취하겠다'고 하는 이런 신심이 돈발(頓發)하게 될 것입니다.

 

 

결제가 석 달 동안, 내년 보름까지 석 달입니다마는 하루 하루씩을, 「오늘 하루 결제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루를 딱! 작정을 하고서 알뜰하게 하루를 지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선방에 계신 스님네와 보살님 또 가정에 계신 보살님네나 거사님들, 하루씩을 딱 결정을 하셔요.

「하루 결제다」 이리 생각하고,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가벼운 운동도 하고 그래가지고 좌선(坐禪)을 떠억 해서 30분이건 한 시간이건 이렇게 딱! 하고서 새벽부터서 하루 결제가 시작하는 것입니다.

 

직장에 가실 때, 직장에서 모든 사람을 만날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건 간에 하루 결제를 아주 알뜰하게 하셔서 그날 저녁에 침대에 들기 전에 또 30분 내지 1시간을 터억~ 좌선을 하시고,

자리에 누워서 '내가 오늘 하루는 얼마만큼 알뜰히 공부를 했나? 이러이러한 일은 내가 이때 내가 잠깐 화두를 놓쳤었구나. 내일은 더 알뜰히 해야겄다' 이렇게 반성을 하고서 눈을 딱 감은 채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숨을 스르르르 들여마셔 가지고 잠깐 머물렀다 내쉬면서 '이뭣고?'

 

눈을 감고 자리에서 잠을 청하지를 말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생각 생각에 화두를 거각(擧却)하면은 언제 잠이 오는 줄 모르게 잠이 스르르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이튿날 자기가 필요할 때 저절로 눈이 딱! 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딱! 뜨자마자 새로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잠자리에 누워서 들던 그 화두가 고대로 딱 들어져 있는 것을 느끼게 될 날이 있습니다.

 

시간을 보면은 대여섯 시간이 지내갔는데, 실지 자기 생각에는 한두 시간 잠깐 눈 붙인 거 같이 그렇게 잠을 별로 안 잔 거 같이 느껴지지만 그렇게 몸이 가볍고 정신이 깨끗하고, 그러지만 너무 깊이 너무 맛있게 달게 잤기 때문에 대여섯 시간을 잤어도 그렇게 짧은 시간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눈을 감고 자는 상태에서도 고대로 화두가 들려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공부가 무르익어 가면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는 것입니다. 잠을 잘 때나 눈을 떴을 때나 언제라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가 될 때까지 한 생각 한 생각을 꾸준히 들고 열심히 해 나가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할까 염려할 것도 없고, 빨리 깨닫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일여하게 되어 간다면 버려야 할 망상도 없고, 해탈해야 할 생사도 없고, 깨달라 증득해야 할 열반(涅槃)도 따로 바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생사가 없는데 증득해야 할 열반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祖師)가 말씀하시기를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니라. 다못 범부(凡夫)에 정(情)이 다할지언정 별무성해다. 따로 성스러운 알음알이를 내지 말아라」

 

간절한 마음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묵묵히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곳에 일체 범정(凡情), 범부의 망상 번뇌는 거기에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 범부에 번뇌 망상이 바로 보리심(菩提心)으로 바꿔지는 곳인 것입니다.

보리심으로 바꿔졌는데 무슨 성인의 성스러운 알음알이를 새로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해(聖解)를 새로 짓는 곳에 망상의 물결이 치게 되는 것입니다.

 

'(법문 끊김) 그것 때문에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었습니다마는.

저에게가 오늘 말씀드린 말을 잘 이해를 하신다면 번뇌가 일어난다고 짜증을 낼 것도 없고, 화두가 잘 안 들린다고 짜증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바쁘다고 핑계댈 것도 없고 몸이 아프다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몸이 아프건 바쁘건, 가정에 어떤 근심 걱정이 될 만한 일이 있건 없건, 그럴수록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서 오직 이 하나를 위해서 모든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성이 똘똘 뭉쳐서 일념 단속하는 데에 회향(廻向)이 된다면 바로 거기에서 모든 재앙(災殃)과 액난(厄難)은 거기에서 소멸이 되고, 재앙과 액난 없으면 소원은 성취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결제와 백일기도 입재를 기해서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께 간곡히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욕식불조회광처(欲識佛祖廻光處)인댄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약 부처와 조사의 회광처(廻光處)를 알고자 할진대는 다못 그 뜻을 허공과 같이 할지니라.

일부로 마음을 비워서 허공과 같이 헐랴고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로서 가장 빨리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될려면 우리로서는 화두를 거각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것입니다.(31분5초~49분1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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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入齋) ; 재(齋)를 시작하는 일. 또는 그 의식.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본각(本覺) :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일여(一如)하다 ; 내가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좌선(坐禪) ; 단정히 앉아서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선(禪) 수행을 하는 것.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오매일여(寤寐一如 잠이 깰 오/잠잘 매/하나 일/같을 여) ; 자나깨나 언제나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눌 수 없음.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단진범정(但盡凡情) 별무성해(別無聖解) ; ‘다만 범부의 생각이 다할지언정,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니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83. (가로판 p87)

修行之要는  但盡凡情이언정  別無聖解니라

수행의 요결은 다만 범부의 생각이 다할지언정,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니라.

 

(註解) 病盡藥除하면  還是本人이니라

병이 없어지고 약까지 쓰지 않는다면, 앓기 전 그 사람이니라.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범정(凡情 무릇·보통 범/뜻 정) ; 범부(凡夫 번뇌에 얽매여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의 생각. 또는 범부의 망상분별을 말한다. 깨닫지 못한 이들이 근거 없이 범상한 알음알이로 헤아리는 것. 범심(凡心)과 같은 말.

*보리심(菩提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재앙(災殃 재앙 재/재앙 앙) ;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게송) '욕식불조회광처(欲識佛祖廻光處)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 '부처님과 조사님의 회광처(廻光處 깨치신 도리)를 알고자 하거든, 마땅히 그 뜻을 허공처럼 맑히어라'

[참고]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역. 제50권 제37의 1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보현보살(普賢菩薩) 송(頌)

약유욕지불경계(若有欲知佛境界)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取)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礙)

만약 어떤 이가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하거든, 마땅히 그 뜻을 허공처럼 맑히어라. 망상과 모든 집착 멀리 여의면 그 마음 향하는 바 걸림이 없으리라.

 

Posted by 닥공닥정
ㅍ/포교2019. 7. 24. 06:43

포교(布敎) (No.109)—참나 깨닫기 위한 진실한 수행이 자리(自利) 이타(利他)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이것이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의 수행법이며, 생활이며 포교.

 

*포교(布敎 널리 알리다 포/가르침 교) ; 불교의 교법(敎法)을 널리 세상에 알리는 일. 홍교(弘敎), 선교(宣敎), 전교(傳敎)라고도 한다.

 

(10분 16초)

 

[법문] 송담스님(No.109)—1979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2.4)(용109)

 

언젠가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옴마니반메훔'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다 좋은 염불이요 주문이지만 '이 무엇고?' 한번 거각(擧却)하는 것이 '관세음보살, 옴마니반메훔' 육백만 번하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드는 곳에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면 그것은 바로 팔만대장경을 다 읽고 그것을 바로 실천에 옮긴 것과 똑같은 이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많은 경을 읽으신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아무리 많은 대소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을 다 읽으신다 하더라도 올바르게 읽으신다면 결국은 '이뭣고?' 참선을 할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읽지 아니하고도 이 말씀을 정말 뼛속 깊게 믿고 느끼고 그리고 실천을 하신다면 더욱 좋은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하라고 권고를 하면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경전도 읽어보지를 못했고 절에도 별로 다니질 안 해서 뭘 좀 알아야 하지, 아무것도 몰라가지고 무슨 참선을 하겠습니까?'

그래 가지고 무슨 읽을 책을 좀 구해달라고 이러한 부탁을 하시는 분들 가끔 만납니다.

 

많이 알아 가지고, 불교에 교리에 대해서 모다 많이 알아야만 참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저것을 많이 알아가지고 참선을 잘 못한 그런 분도 많이 있습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경도 별로 읽어 보지를 못하고 다못 시키는 대로만 고지식하게 진실하게 하는 분이 오히려 더 공부를 잘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많이 읽고 생각하고 알고 그래 가지고 교리에 대해서 '뭐?'하면 줄줄줄줄 줄줄줄 아주 거 잘 해설을 하고 말을 하고 그리고 그것으로써 스스로도 흐뭇하게 생각하고, 많이 불교에 대해서 자기가 참 공부를 많이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있습니다.

 

물론 불교에 대해서 후배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불교는 좋다고 하는 것을 얘기함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불법을 믿겄게 하는 데에는 하나의 좋은 재료가 될 수가 있고 방편(方便)이 될 수가 있지마는, 자기 스스로의 공부를 위해서는 그러한 것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공부를 잘한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공부에 장애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물론 불법은 자기 한 사람만 좋으면 그만인 게 아니고—자기만 옳게 믿고 닦으면 그만이다, 그것이 아니라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이러한 좋은 불법을 믿고 실천하게 하도록 해 주기 위해서 손을 이끌어 주고 권고하고 이렇게 하는 것도 큰 복을 짓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도 좋고 남도 이롭게 하는 대승불교요,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여러분들께서도 한 사람이라도 더 이 불법을 믿고 정법을 믿어서 참선을 하도록 서로 이끌고 권고하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자기가 공양미(供養米)라든지 성금을 갔다가 부처님께 올리고 불공(佛供)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그런 것보다도 한 사람이라도 더 이 불법을 믿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그 공덕이 몇십 배 더 수승하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 밥을 주고 돈을 주고 옷을 준 그런 물질적인 공덕 짓는 것은 한정이 있어. 언젠가는 거기에 해당한 복을 받고 나면 그것으로써 끝이지만,

말로써건, 자기의 마음으로써건 또는 행동으로써 남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어 가지고 자기를 인연해서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도록 해 준다면 그것은 영원한 무루(無漏)의 복(福)을 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공부를, 자기 마음 닦는 화두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계속 동분서주, 그런 복을 짓기 위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동시에 이루어질랴면 오면서 가면서, 일을 하면서 차를 타면서 화두를 들고 가고, 화두를 들고 오고 이렇게 해서 자기 생활이 완전히 화두를 중심으로 해서 화두 관조(觀照)하는 것을 여의지 아니하면서 생활을 하게 되면 자기도 나날이 향상되어 가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향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에 모든 재앙과 장애와 업(業)은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지어서 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정법으로 돌려서, 참나 깨닫기 위한 진실한 수행이 바로 생활이 될 때에 그 생활은 한 걸음 내디디고 한 손 올렸다 내린 모든 자기의 동작, 눈 한번 감았다 뜨고 입으로 말하고 밥 먹는 모든 동작이 고대로 참된 수행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같이 생활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 그러한 행동, 그러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들은 다른 사람에게 많은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수행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는 조금도 옛날보다 더 향상되는 것이 없이 입으로만 '참선을 해라, 정법을 믿으라' 아무리 권고해 봤자 별로 그렇게 그 사람이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내 먼저 철저히 정법(正法)을 믿고 일상 생활 속에서 아주 진실하게 수행을 함으로써 '그분의 말과 마음가짐과 모든 행동이 그 전보다 더 모든 점에 있어서 향상이 되고 개선이 되야 한다'고.

나아가서는 그 사람 몸에서는 코로 맡을 수 없는 미묘한 향내가 풍기게 될 때에 주변 사람들은, 더욱이 가정에 모든 사람들 이웃에 모든 사람들은 자연히 그 사람을 따르게 되고 믿게 되고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순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의 수행법이며, 생활이며 포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20분46초~31분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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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 ; 십이부경(十二部經)은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그 경문의 서술 형식 또는 내용을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팔만사천법문.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승교(大乘敎) : [범] Mahayana 대승(大乘)이란 큰 수레를 뜻한다。큰 원(願)과 큰 뜻을 세워서 나를 희생하여 모든 중생을 즐겁고 편안하게 건져 주겠다는 보살심(菩薩心) 있는 이들을 위하여, 육도(六度)와 만행(萬行)을 닦아 가도록 깊은 이치를 말씀하신 법문이다。그 대표적인 경전은 <반야경(般若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능가경(楞伽經)> <기신론(起信論)> <범망경(梵網經)> 같은 것들이다.

이 법문을 요약하여 말하면, 이 세상에 온갖 물질과 일(森羅萬象)이 벌어져 있으나, 낱낱이 현상(現象) 그대로 비어 없는 것이며, 모든 차별된 것이 그대로 다 평등하여 열반인 것이다。따라서 무엇에나 걸릴 것이 없는 것이다。소승의 열반이 소극적이며 작고 옅은 것이라면 대승의 열반은 적극적이며 크고 참된 것이다。한 중생도 남음이 없이 모두 제도한 뒤에야, 자기가 성불하겠다는 소원이야말로 대승의 보살심인 것이다.

*공양미(供養米) ; 공양에 쓰는 쌀. 공양으로 바치는 쌀.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무루(無漏 없을 무/샐·구멍·번뇌 루) ; 유루(有漏)의 대칭어.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번뇌에서 벗어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음 상태. 번뇌가 사라진 경지.

누(漏)는 누설(漏泄, 漏洩 흘러나온다)의 뜻으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곧 육근(六根)과 아홉 구멍(九孔)에서는 항상 부정한 것이 흘러나오므로 누(漏)라 한다. 혹은 누란 누락(漏落)의 뜻으로 중생을 삼악도(三惡途 :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이러한 누(漏)를 동반한 법을 유루, 그렇지 않은 법을 무루라 한다.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Posted by 닥공닥정
ㄱ/기도2019. 7. 23. 06:53

*기도(祈禱 빌·구할 기/빌·기원 도) ;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불보살의 자비)를 받들어 재앙을 피하고, 복(福)을 더하도록 빌고 구하는 것. 기원(祈願), 기청(祈請), 기념(祈念) 등과 같은 말.

 

(3분 3초)

 

[법문] 송담스님(No.109)—1979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2.4)(용109)

 

오늘은 동안거 결제(結制)일인 동시에 백일기도 입재(入齋)일입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 오대산이라든지 남해 보리암이라든지 강화 보문, 낙산사 이런 성지(聖地)로 가서 기도를 하시는 것도 좋습니다마는 참 기도는 때와 장소가 따로 없어야만 정말 참다운 기도가 된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부처님은 꼭 오대산만 가야 거기에 계신 것이 아니고 바닷가만 가야 거기에 관세음보살이 꼭 계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편의상 보다 더 철저한 마음으로 일주일이나 사흘 간을 철저하게 기도를 하기 위해서 그러한 성지를 찾아가는 것도 또한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마는 우리는 노상 그런 성지만 찾아가야만 기도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한 생각 간절한 마음으로 불보살(佛菩薩)의 명호(名號)를 염(念)할 때 그곳에는 언제라도 불보살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먼 데서 오셔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생각 정성스럽고 간절할 때에는 언제나 거기에 불보살이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 특별히 기회를 내서 성지에 가는 것도 뜻은 있다고는 하지마는, 우리는 꼭 그때만을 기도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 가정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차중에서,

더군다나 이 절에 오시고 가시고 할 때 또 절에 와 계실 때 언제 어디라도 바로 그 자리가 법당이요, 성현이 계시고 기도 도량으로 알고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신다면 그분이야말로 정말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17분40초~20분4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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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입재(入齋) ; 재(齋)를 시작하는 일. 또는 그 의식.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 관세음(觀世音)은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의 번역,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세간(世間)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 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왼쪽 보처(補處).

또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 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한다. 또 광세음(光世音)·관세음(觀世音)·관세자재(觀世自在)·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쓰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의 주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다.

한국에서는 동해에 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가 관음 도량으로 유명하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명호(名號) ; 명자(名字), 명(名)이라고도 함. 이름. 주로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이기에 존호(尊號), 가호(嘉號) 등이라고도 한다. 이 명호(名號)를 듣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는 것에 커다란 작용이 있다고 여기고, 여기에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등의 행(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 (No.109)—(게송)山月投窓白~ | 진여자성을 물의 습성에 비유 | 망념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를 드는 것이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 | 방편과 경절문(徑截門).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17분 32초)

 

[법문] 송담스님(No.109)—1979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2.4)(용109)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에 산위에 뜬 달이 창에 비추어서 환하구나. 그리고 시냇물 소리는 문안에까지 들려온다.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라.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묵무언(默無言) 하신 뜻을 알고자 할진댄, 그 말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알고자 할진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모름지기 이 가운데를 향해서 밝힐지니라.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그 도리를 알고자 할진댄, 산 달이 창에 비추어서 희고 시냇물 소리가 방안에까지 들려온다. 이 속을 향해서 밝힐지니라[須向此中明].

 

 

오늘 기미년 10월 15일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격외선(格外禪) 도리, 내가 나를 깨닫는 도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도리는 깨닫지 못한 분상(分上)에서는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무슨 뜻인지 요량을 할 수가 없지마는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고 깊고 깊어서 그래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산 달이 창에 비추어서 환하니 희고, 방안에 앉아서도 시냇물 소리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농부가 쟁기를 짊어지고 논으로 가고, 밥을 먹을 때 숟갈로 밥을 떠서 입에다 넣으면 저분은 반찬 그릇으로 간다.

 

바로 이 평상화(平常話)—우리 일상 생활에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한숨 자고, 부르면 대답하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봄이 오면 풀은 파릇파릇 풀이 돋아오고, 가을이 오면 단풍이 져서 떨어지는 이 도리,

이 도리를 내놓고는 최상승 활구법, 격외선 도리, 도솔천 내원궁,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寂滅宮)을 장엄하는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가장 빨리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발로 걸어 다니고, 손으로 일하고 글씨 쓰고, 입으로 말하고 하는 중생으로서 육체적인 모든 동작, 정신적인 모든 작용, 일상 생활을 떠나서 이것을 찾을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 그때 거기서 생각 생각이 일어나는 그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중생의 망념 그놈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도리, 오직 여기에서만 바로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모든 우리의 중생념, 중생심(衆生心), 번뇌 망상을 버리고 따로 찾는다면 그 사람은 무량겁을 닦아도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을 버리고서 물의 습성(濕性)을 찾아서는 영원히 그 사람은 습성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중생심을 물에다가 비유한다면 물은 온도에 따라서 때로는 흐를 수 있는 액체로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영하로 내려가면 얼어서 고체가 되기도 하고, 섭씨 백 도가 되면 끓어서 증기로 기체로 변하기도 합니다.

기체도 되었다, 액체도 되었다, 고체도 되었다,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물도 되었다, 얼음도 되었다, 김으로도 되었다 또는 눈도 되었다, 서리도 되었다, 우박도 되었다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변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모양으로 있던지 간에 변함이 없는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습성(濕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습한 성질. 물의 습성이라 하는 것은 그 모양의 여하에 따라서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자성(眞如自性), 참나, 나는 성불(成佛)을 해서 부처님으로 계실 때나, 죄를 짓고 지옥에 가서 있거나, 우리 중생으로서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건 간에 우리의 진여불성에는 조금도 늘거나 줄거나 새로 생겨나거나 죽거나, 때가 묻거나 깨끗하거나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함이 없으면서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천 가지 만 가지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로 모습을 나투면서도 원래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에 있어서의 습성에다가 비유해서 말씀을 드렸지마는 이것은 하나의 비유에 지내지 못하고 '참나'라고 하는 것은 오직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參禪)을 함으로서만이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드린 것은 우리 모두가 올바르게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이 몸으로, 이 죄 많은 몸으로, 이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으로 가득찬 이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반드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여러분에게 증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대보살님들도, 모든 성현들도 깨닫기 전에는 우리 범부(凡夫)와 똑같은 것입니다. 깨달으면 그것을 '깨달은 분'이라 해서 '붓다(Buddha)'라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범부인 것입니다.

 

범부와 성현과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부처님 경전에 말씀에는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은 참 말씀이요, 진실한 말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중생심(衆生心)을 여의고 불성(佛性)이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심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부처님이 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설사 그것이 얼음이 되었건, 우박이 되었건, 눈이 되었건, 물의 변화체에 어떠한 변화된 상태에 있건 간에 거기에는 반드시 습성(濕性)이 있는 거와 같이, 모든 중생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중생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서,

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지도하에 열심히 생활 속에서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픈 일 속에서, 괴로운 일을 당하면 괴로운 일을 당한 바로 거기에서 괴로운 것을 띠어 버릴려고 하지 말고, 슬픈 것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 슬픔 속에 젖어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속에서 '이 뭣고?' 이렇게 한 생각을 돌이킨다면 그 슬픈 그 상황이 바로 선방(禪房)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처님 회상(會上)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 하는 방법이며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넓고 범위가 넓고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그러한 좋은 길인 것이며 또한 어떠한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하건, 죄가 많건, 몸이 아프건 그런 것, 오히려 그러한 역경계(逆境界) 속에서 더욱 간절해질 수 있는,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는 그래 가지고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미묘하고도 고마운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절로 절로 다니시면서 기도를 주로 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주로 염불이나 경을 읽으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수(千手)를 열심히 하시거나, 여러 가지 그러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도 다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정법(正法)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부처님과 성현들이 설허신 다 미묘한 방편(方便)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마는, 우리는 방편을 통해서 그것을 징검다리로 해서 바로 구경(究竟)의 길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지, 방편에 오래 집착해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동안 용화사에서 누누이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과 저의 말씀을 통해서 어떠한 것이 방편이고, 어떠한 것이 바로 직접적으로 설해 드리는 경절문(徑截門), 바로 가깝고 바른 길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처음~17분3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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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산월투창백~’ ; 『소요당집(逍遙堂集)』 소요 태능(逍遙太能)의 ‘무제(無題)’ 게송 참고.

*달마대사(達摩大師)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https://emokko.tistory.com/55

*면벽구년(面壁九年) ;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했던 고사를 가리킨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양 무제(武帝)를 만나 문답하였으나 무제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마침내 물러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의 낙양으로 가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을 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말하지 않고 벽을 향하여 좌선하기 9년을 지냈다. 이를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뒤부터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벽을 향하여 좌선하게 되었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격외선(格外禪) ; 언어 · 문자로 의론할 수 있는 격식을 초월한 선법. 조사선(祖師禪)에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는 선을 말한다.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평상화(平常話) ; 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적멸궁(寂滅宮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집·대궐·절·마음 궁) ; 적멸의 궁전은 적멸을 형상화한 말로서,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欲)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장엄(莊嚴 엄숙할·삼가할·꾸밀 장/엄할·공경할·꾸밈 엄) ; ①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님께 올려 장식하는 일. ②건립하는 것. 건립. 훌륭히 배치, 배열되어 있는 것. ③장식. 물건을 장식하는 것. 아름답게 장식함. 훌륭한 것. 엄숙하게 장식된 모양, 모습. 장식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진여자성(眞如自性)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부처님 경전에 말씀에는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근본 성품, 각성(覺性), 자성(自性).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〇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〇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하열(下劣 아래 하/못할·낮을 렬) ; (행동이나 생각이) 남보다 뒤떨어짐. 수준이 낮음.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천수(千手) ;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 「천수경(千手經)」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를 말함. 82구(句)의 주문(呪文). 천수관음의 공덕을 말한 것으로, 이것을 외면 모든 죄업이 없어진다고 한다.

대비주(大悲呪), 천수주(千手呪), 천수천안대비심다라니(千手千眼大悲心陀羅尼)라고도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경절문(徑截門 지름길 경/끊을 절/문 문) ; 지름길문. 경절(徑截)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 교문(敎門)의 55위 점차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