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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2.17 공안(No.119)—전강 스님께서는 매양 ‘소식(消息)을 얻었다’고 하는 학자를 대할 때 마조원상 공안을 많이 물으셨습니다 | 경봉 스님과의 법거량 | 참선은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
  2. 2022.11.13 공안(전강선사 No.013)—안수정등 기능장구(岸樹井藤 豈能長久) | 안수정등의 공안에 전강 조실 스님의 답 "달다"
  3. 2022.07.22 화두(전강선사 No.014)—아는 걸로는 소용없어. 知之一字 衆禍之門 | 탁! 맥혀서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이 활구(活句) |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다'
  4. 2021.11.30 화두((No.479))—(게송)見色非干色~ | 팔풍(八風)이 휘몰아치는 오탁악세(五濁惡世)에 팔만사천 마구니를 퇴치할 수 있는 좋은 무기는 '이뭣고?'.
  5. 2021.09.03 화두((No.472))—(게송)男兒大丈夫~ | 발심한 사람이 바로 대장부 | 운전 초보와 능숙자 비유 |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으로 하면 소임 속에서 공부가 된다.
  6. 2020.10.09 화두(세등24)—화두는 이론 교리적으로 따져서 해결할 수 없는 것, 따져서 알아맞추는 참선은 죽은 참선 | 공부가 안될 때 | 이 공부는 한 생각 단속의 문제.
  7. 2020.05.18 화두(No.445)—진짜 화두 | 포구발심 | '이뭣고?'는 가장 최초, 가장 근원적인 화두 | 화두 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화두를 안 들기가 더 어렵다.
  8. 2020.05.14 화두(No.058)—참선, 깨달음은 일상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다 | 선지식의 지도 | 공안은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요, 나침반 | 물속에서 "물이 어디가 있느냐?"
  9. 2020.03.10 화두(No.345)—(게송)因能生所所生能 ~ / 한마디 화두 속에 팔만대장경이 들어있고,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설법을 하고 계신 것 / (게송)塵勞逈脫事非常~.
  10. 2019.08.29 공안(公案) (No.122)—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비슷한 것 | 유리병 속 오리 화두 |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
ㅎ/화두 공안2024. 2. 17. 09:32

공안(No.119)—전강 스님께서는 매양 ‘소식(消息)을 얻었다’고 하는 학자를 대할 때 마조원상 공안을 많이 물으셨습니다 | 경봉 스님과의 법거량 | 참선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
‘나를 깨닫는 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급하고 요긴하다 | 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를 여법(如法)하게 거각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참선(死句參禪)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마조원상 공안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를 다 받고, 만공(滿空) 스님 회상에 가서 만공 스님의 너무나도 밝고 밝으신 지혜의 눈과 철두철미한 종사(宗師)의 수단 아래 무릎을 꿇고 다시 정신을 차려서 정진을 하셔 가지고, 다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공안이기 때문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매양 ‘소식(消息)을 얻었다’고 하는 학자(學者)를 대할 때 이 공안을 많이 물으셨습니다.

참선(參禪)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참선은 명예와 이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과 수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19분 13초)


[법문] 송담스님(No.119)—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용119)

방금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마조원상(馬祖圓相) 법문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조(馬祖) 스님은 중국의 육조(六祖) 스님의 제자, 회양(懷讓) 스님의 제자로서 ‘마구답살천하인(馬駒踏殺天下人)이라.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하는 달마 스님께서 그렇게 예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후대에 가서 마조라고 하는 대도인(大道人)이 나와 가지고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 정법을 천하에 선양한다’고 하는 뜻으로 예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마조 스님께서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원상,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이 속에 들어가도 치고, 이 속에 이 둥그라미 안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겠다” 이렇게 어떤 승려, 도를 배우는 승려 앞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 승려는 그 원상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딱 앉았습니다. 마조 스님은 주장자로 그 승려를 한 대 후려팼습니다. 그 승려는 탁! 마조 스님을 쳐다보면서 “스님은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은 입을 딱 다물고서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이 공안(公案)은 마조원상(馬祖圓相)이라 해서 종문(宗門) 중에 공안 가운데에 최고 가는 공안으로 천년을 두고 선종(禪宗) 문중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공안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를 다 받고, 만공(滿空) 스님 회상에 가서 만공 스님의 너무나도 밝고 밝으신 지혜의 눈과 철두철미한 종사(宗師)의 수단 아래 무릎을 꿇고 다시 정신을 차려서 정진을 하셔 가지고, 다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공안이기 때문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매양 ‘소식(消息)을 얻었다’고 하는 학자(學者)를 대할 때 이 공안을 많이 물으셨습니다.

경봉 스님께서, 지금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로 계신 경봉(鏡峰) 큰스님께서 처음에 깨달으셨을 때, 바로 마치 그때 거기에 당도하신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경봉 스님보다는 훨씬 연세가 아래였었지마는 바로 이 마조원상의 공안을 경봉 스님께 물어 가지고, 처음에는 경봉 스님께서 그 원상을 손으로 이리 뭉켔습니다. 거기에서 전강 조실 스님은 “당장 이 송장을 끌어 묻으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거기에서 한참 눈을 웅큼하게 해 가지고 계시다가 다시 경봉 스님께서 “이제 알았다. 다시 물어라” 이렇게 해서 그때 보시니 아까의 경계와 판연히 달라서 경봉 스님을 산골짜구니로 끌고가 가지고 이 공안을 다시 물으니까 여지없이 경봉 스님께서 일르셨다고 한 말씀을 금방 법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각 선원에서 공부를 하고 오신 납자(衲子) 스님네도 여러분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신도 보살님 여러분들도, 우리 용화사에서 지내신 분 또 다른 선방에서 공부를 하시고 오신 보살님네들도 여러분이 계십니다. 그동안 석 달 동안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시고 오신 분들입니다.
해제(解制)가 되면 으레이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회상(會上)으로 모여 가지고 그동안에 공부했던 것을 탁마(琢磨)하고, 잘 못했던 것을 대중 앞에 참회(懺悔)하고, 그렇게 해서 한철 동안 지낸 공부를 총결산하고 반성하고 참회해서 다시 새로운 정신을 가다듬어서 공부를 해 왔었습니다.

이 가운데 참여하신 청신사 청신녀 그리고 비구 비구니 여러분들, 과연 지난 삼동(三冬) 안거 동안 정진을 하셔서 투철히 깨치신 바가 있으면 이 마조원상(馬祖圓相), 원상을 그려 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니 한번 자신 있게 일러보시기를 바랍니다. 조실 스님을 대신해서 수응(酬應)을 해 드리겠습니다.

“스님께 못 이르겠습니다”
“환귀본처(還歸本處)하라. 이르지 못할 것을 뭐하러 나왔느냐”

이 공안은 벌써 이를라고 생각을 움직이면 그르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사자(獅子)는 교인(咬人)하고 한로(韓獹)는 축괴(逐塊)’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한테 돌멩이를 던지면 그 개는 그 돌멩이가 무슨 명태 대가리나, 고기 덤뱅이인 줄 알고 그 돌멩이를 물으러 우르르르 쫓아가는 법이고, 사자는 돌멩이를 던지면 돌멩이는 쫓아가지 아니하고 돌멩이를 던진 그 사람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참선은 명예와 이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과 수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첫째, 내가 나를 깨닫지 못하고 남을 제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능히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헤엄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답시고 물에 풍덩 뛰어들어가면 빠진 사람을 건지기커녕 자기까지 빠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생을 제도할 원대한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깨닫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나를 깨닫는 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우선(優先)해서 중요하고,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급하고 요긴한 것입니다. 밥을 먹는 일도 급하고, 잠을 자는 일도 급하고, 세속에 우리가 맡은 모든 일들이 하나도 버려서는 안되겠지만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우선 나부터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는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망각하고 오직 자식 생각만을 하시지만, 그렇기는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는 우선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끄고 자식 불을 끌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효자라 하더라도—그 효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부모만을 위하는 하늘에서 낸 효자라 할지라도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끌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 발등의 불을 쪼끔 오래 놔둔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잠시 뜨겁다가 마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 발의 불부터 끄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參禪)은 금생에 사람 몸 받을 때 하지 아니하면—이것은 영원히 다시 사람 몸을 받을지, 다시 또 이 불법을 만나게 될지, 정말 막연하고 막연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도 우선해서 참선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이고, 권리를 많이 누리고, 명예를 하늘 닿도록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들은 나의 죽음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죽을 때 한 톨도 한 치도 그것을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죽어갈 때에는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명예를 얻느라고 얻은 죄업(罪業), 재산을 얻느라고 지은 죄업, 권리를 누리느라고 지은 죄만을 산더미처럼 지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통곡을 하고 뉘우치고 눈물을 흘려도 아무도 받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살고 있을 때, 그리고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루하루를 정말 알뜰하고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과거의 무량겁에 지어 놓은 모든 죄도 소멸을 할 수가 있고, 이 공부에 철저하면서 세속적인 또는 인간적인 책임을 충실히 한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며, 앞으로도 진리를 깨닫는 목적을 향해서 걸어가므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어코 기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길, 이러한 지혜로운 길, 인간으로서 최고의 길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불법(佛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지금 마조원상(馬祖圓相) 법문을 전강 조실 스님을 대신해서 여러분 앞에 물었습니다마는 이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내가 오늘 이르지를 못했으니 당장 집에 가서 경전을 뒤적거리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뒤적거려서라도 기어이 이것을 어떻게 찾아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신다면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사 공안이 적혀 있는 『염송(拈頌)』이나 『무문관(無門關)』이나 그 밖의 『벽암록(碧巖錄)』 같은 어떠한 어록을 뒤적거린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바로 보지를 못했다면 찰나간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이 가장 지혜 있고 바른 수행인인 것입니다.

공안은, 화두는 절대로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더듬어서 알아맞출 수도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결론을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 결론을 얻었다든지 사량심으로 알아졌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이요, 중생의 번뇌 망상으로 얻어진 것이라, 망상에 결국은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보기 좋게 생긴 사람을 만들어 놨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사람이 아니고 흙이나 석고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것을 아무리 이쁘게 조각을 해 놨어도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를 여법(如法)하게 거각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억울할 때나 우리의 마음에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건, 그 생각 그 감정 하나하나를 헛되이 놔 보내지 말고, 바로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순박하게, 이렇게 진실하게, 이렇게 바보처럼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간다면 결정코 우리는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11분48초~31분)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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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5권 165칙 ‘원상(圓相)’ 공안.
馬祖因見僧參  畫一圓相云  入也打不入也打  僧便入  師便打  僧云和尙打某甲不得  師靠却拄杖  休去.

마조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와서 뵙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하고 물으시니, 그 스님이 원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 대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마조(馬祖) 스님은 중국의 육조(六祖) 스님의 제자, 회양(懷讓) 스님의 제자로서 ‘마구답살천하인(馬駒踏殺天下人)이라.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하는 달마 스님께서 그렇게 예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 ‘마구답살천하인(馬駒踏殺天下人), 망아지[馬駒]가 천하 사람[天下人]을 밟아 죽인다[踏殺]’는 뜻으로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나옴.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 참청기연품(參請機緣品)에서. (남악회양 선사南嶽懷讓禪師)
懷讓禪師  金州杜氏子也  初謁嵩山安國師  安發之曹溪參扣  讓至禮拜 師曰 甚處來  曰 嵩山  師曰 什麼物 恁麼來  曰 說似一物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曰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회양 선사는 금주 두씨의 아들이다. 처음 숭산의 혜안 국사를 뵈니 혜안 국사는 조계로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회양 스님이 찾아뵙고 예배하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육조) “어디에서 왔느냐?[甚處來]”
(회양) “숭산에서 왔습니다[嵩山]”

(육조)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什麼物 恁麼來]”
(회양)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

(육조) “도리어 닦아 증득할 수 있느냐?[還可修證否]”
(회양) “닦아 증득함은 없지 없지 않으나 오염은 없습니다[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師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西天般若多羅 讖汝足下出一馬駒 踏殺天下人 應在汝心 不須速說  讓豁然契會 遂執侍左右一十五載 日臻玄奥 後往南嶽 大闡禪宗

(육조) “다만 오염되지 않는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호념(護念)하는 바이라 네가 이미 이와 같고 나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서천의 반야다라 존자가 '너의 발 아래 한 망아지가 나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예언을 하셨으니 네 마음속에 두고 모름지기 함부로 말하지 말라.
회양이 훤칠하게 깨우치고는 육조 스님을 15년 동안 모시면서 날이 갈수록 공부가 깊어졌다. 뒷날 남악으로 가서 선종(禪宗)을 크게 떨쳤다.
*답살(踏殺 밟을 답/죽일 살) ; 짓밟아 죽임.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주장자(柱杖子 기둥·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이 갖는 긴 지팡이. 설법(說法)할 때나, 외출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주장자(拄杖子)와 같음.
*공안(公案) : 화두(話頭).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참선(死句參禪)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종문(宗門) ; ①선종. 선문(禪門). 선종에서는 선문(禪門)이 불교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함. ②종파. 종지(宗旨). 자기가 속해 있는 종파.
*선종(禪宗) ;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육대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다 받고, 만공 스님 회상에 가서 만공 스님의 너무나도 밝고 밝으신 지혜의 눈과 철두철미한 종사(宗師)의 수단 아래 무릎을 꿇고 다시 정신을 차려서 정진을 하셔 가지고, 다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공안이기 때문에 ; 위에 해당하는 법문 ---> ①전강스님 법문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②송담스님 법문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 ; 전강 조실 스님이 수행하시던 1920년대 당시 유명한 혜월 · 혜봉 · 한암 · 용성 · 보월 · 만공 선사를 말씀하신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만공월면(滿空月面) ; (1871~1946) 법명은 월면(月面), 호는 만공(滿空), 속명은 송도암(宋道岩).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1871년(신미년) 3월 7일 출생하였다. 1884년(갑신년) 14세에 태허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로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계속 천장암에서 지내다, 어른 시봉(侍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5년(을미년)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하룻밤을 지나 새벽 종송(鐘頌)을 할때,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그 후 마곡사 근처 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스님 나이 26세 때, 1896년(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 선사가 오시니, 선사께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였다.
경허 선사가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 하나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스님의 대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선사가 ‘네가 일찌기 다비문(茶毘文)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경허 선사가 다시 묻기를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선사가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 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 하고,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으라.’ 하고 떠났다.

그 후 정진하던 중 경허 선사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1898년 7월에 선사가 계신 서산(瑞山)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지내다가, 경남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 선사께 청첩장이 와서 선사를 모시고 계명선원에 가서 하안거를 마치고, 선사와 배별(拜別)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31세 때(1901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며 지내다가, 34세 때(1904년 7월 15일)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른 경허 선사를 뵙고, 그동안 공부를 지은 것을 아뢰니, 선사가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운월계산처처동(雲月溪山處處同)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대가풍(叟山禪子大家風)  수산선자(叟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은근분부무문인(慇懃分付無文印)  은근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일단기권활안중(一段機權活眼中)  한조각 권세 기틀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1905년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한 초암을 짓고 지내고, 그 뒤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마하연(摩訶衍)에 가서 3년을 지내고,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한 한칸 띳집을 짓고 지내다, 1946년(병술년) 10월 20일에 목욕 단좌(端坐)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 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入寂) 하였다.
나이 76, 법랍(法臘) 62. 제자들이 스님의 법어를 모은 「만공법어(滿空法語)」가 있다.
[참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종사(宗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조사(祖師)와 같다.
*대각(大覺) ; 부처님의 깨달음. 정각(正覺) 대오(大悟) 등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깨닫고[自覺] 남들도 깨달음으로 인도하여[覺他] 각(覺)과 행(行)이 원만하게 갖추어졌으므로 대각이라 한다. 또는 부처님 자체를 가리키는 말.
*소식(消息 줄어들다·사라지다·없애다 소/불어나다·살다·번식하다·호흡하다 식) ;  산스크리트어 vārttā. 소장(消長) · 증감(增減) · 성쇠(盛衰) 등의 변화. 때에 따라 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변화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경우에 따라서는 증가하는 측면만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참고]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제20권. 당(唐) 청량산(淸涼山) 대화엄사(大華嚴寺) 사문(沙門) 징관(澄觀) 술(述).
言傳授之者 善消息之者 易豐卦云 天地盈虛 與時消息 釋云 消者盡也 息者生也 謂可加則加 可減則減 可出則出 可沒則沒 故言消息

전수(傳授)란 증감의 변화를 잘 하는 것이다. 『역(易)』 「풍괘(豐卦)」에 '천지의 만물이 차고 비며 반복하는 현상도 때와 더불어 일어나는 증감의 변화이다'라고 하였다. 다음과 같이 푼다. '소(消)란 다하여 사라짐이고, 식(息)이란 발생하는 것이다. 증가할 만하면 증가하고 감소할 만하면 감소하며, 나타날 만하면 나타나고 사라질 만하면 사라지므로 소식(消息)이라 한다.
일상의 기거(起居). 안부. 살아가는 내용.
원기를 회복시키는 것. 살아나게 만드는 것.
[참고] 『불설아난사사경(佛說阿難四事經)』
人民富有盈穀 孤獨鰥寡 衣食不充 疾病困篤 無以自濟 當給醫藥 糜粥消息 令其得愈 命不橫盡

제왕이나 인민은 부유하여 가득한 곡식을 고아나 외로운 늙은이나 홀아비나 과부나 의식이 충분하지 못한 이나 병이 매우 심하여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는 이에게 약을 주고 미음과 죽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병이 낫고 횡액에 죽지 않게 하여야 하니라.
깨달음의 결정적인 단서. 깨달음으로 이끄는 갖가지 실마리. 또는 깨달은 경계 자체.
[참고]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26. 「시중(示衆)」에서
若論實參實悟 正如八十翁翁 向逆風逆水裏 牽一隻無底鐵船相似 不問上與不上 徹與不徹 直須心心無間 念念無虧 一步一步 盡平生伎倆睚將去 睚到著脚 不得處 筋斷骨折時 驀然水轉風回 卽是到家消息 卽今莫有到家底麼 (卓柱杖一下 云) 十萬八千

만일 실답게 정진을 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말하자면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배를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함과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묻지 말고, 곧 마음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평생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밀어서 다리를 붙일 수 없는(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과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 이르르면 별안간 물살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집에 이르른 소식(消息)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이가 있느냐? (주장자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십만(十萬) 팔천리(八千里)로다.
조짐. 단서. 기미. 분별할 실마리가 전혀 없는 경계를 단소식(斷消息) · 무소식(無消息) 등이라 한다.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경봉 스님께서, 지금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로 계신 경봉(鏡峰) 큰스님께서 처음에 깨달으셨을 때, 바로 마치 그때 거기에 당도하신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경봉 스님보다는 훨씬 연세가 아래였었지마는 바로 이 마조원상의 공안을 경봉 스님께 물어 가지고, 처음에는 경봉 스님께서 그 원상을 손으로 이리 뭉켔습니다. 거기에서 조실 스님은 “당장 이 송장을 끌어 묻으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거기에서 한참 눈을 웅큼하게 해 가지고 계시다가 다시 경봉 스님께서 “이제 알았다. 다시 물어라” 이렇게 해서 그때 보시니 아까의 경계와 판연히 달라서 경봉 스님을 산골짜구니로 끌고가 가지고 이 공안을 다시 물으니까 여지없이 경봉 스님께서 일르셨다고 한 말씀을 금방 법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 전강 스님과 경봉 스님의 법거량 법문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 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 영역.
*판연히(判然- 판가름할·구별할 판/그러할 연) ; 드러난 것이 아주 뚜렷하게.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으레이 ; ‘으레’의 사투리.
*으레 ; ①거의 틀림없이 언제나. ②두말할 것 없이 마땅히.
*부처님 ; 석가모니(釋迦牟尼).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대중(大衆)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mahā-samgha, mahā-sabhā. 음역하면 마하승가(摩訶僧伽)이다. 많은 사람의 모임이란 뜻으로 참선 수도하는 스님들의 모임 또는 일반적으로 법문을 청하여 듣는 사부대중(四部大衆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을 일컫는다.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청신사(淸信士)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자 신도, 곧 우바새(優婆塞).
*청신녀(淸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삼동안거(三冬安居)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수응(酬應 응대할 수/응할 응) ; 남의 요구에 응함.
*사자(獅子)는 교인(咬人)하고 한로(韓獹)는 축괴(逐塊) ; ‘사자는 사람을 물고 개는 흙덩이를 쫓느니라’
*咬(교)물다. 깨물다. *獹(로)개 이름. 전국시대 한(韓)나라 좋은 개 이름. *逐(축)쫓다. *塊(괴)흙덩이.
[참고] ①『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1권 ‘양주 왕경초 상시(襄州王敬初常侍)’에 '師子齩人  韓獹逐塊'
②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獅子咬人  韓獹逐塊'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9, 47에서)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參禪)은 금생에 사람 몸 받을 때 하지 아니하면—이것은 영원히 다시 사람 몸을 받을지, 다시 또 이 불법을 만나게 될지, 정말 막연하고 막연할 따름인 것입니다 ;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
[참고 ❶] 『선관책진(禪關策進)』 「제1 제조법어절요(諸祖法語節要 : 여러 조사의 법어 중에서 오직 공부 지어 가는 데에 요긴한 대목만을 뽑아 요약함)」 '황룡사심신선사소참(黃龍死心新禪師小參)' 참고.
諸上座 人身難得 佛法難聞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상좌들이여!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듣기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참고 ❷] 『서장(書狀)』 '답탕승상(答湯丞相)' 참고.
人身難得 佛法難逢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인신난득(人身難得) ;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참고 ❶] 『잡아함경(雜阿含經) 406.』 (제15권) ‘맹구경(盲龜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堂 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海 有一盲龜 壽無量劫 百年一出其頭 海中有浮木 止有一孔 漂流海浪 隨風東西 盲龜百年 一出其頭 當得遇此孔不 阿難白佛 不能世尊 所以者何 此盲龜 若至海東 浮木隨風 或至海西 南北四維圍遶亦爾 不必相得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佛告阿難 盲龜浮木 雖復差違 或復相得 愚癡凡夫 漂流五趣 暫復人身 甚難於彼 所以者何 彼諸衆生 不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 展轉殺害 強者陵弱 造無量惡故 是故比丘 於四聖諦 當未無間等者 當勤方便起增上欲 學無間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참고 ❷] 『잡아함경(雜阿含經) 442.』 (제16권) ‘조갑경(爪甲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 告諸比丘 於意云何 我爪甲上土爲多 此大地土多 諸比丘白佛言 世尊甲上土甚少少耳 此大地土甚多無量 乃至算數譬類不可爲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佛告比丘 如甲上土者 若諸衆生 形可見者 亦復如是 其形微細 不可見者 如大地土 是故比丘 於四聖諦未無間等者 當勤方便 學無間等 佛說是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如陸地 如是水性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 人道者 亦復如是 如大地土 如是非人亦爾 ......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육지처럼 물의 성질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이렇게 사람 세계[人道]의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그렇게 사람이 아닌[非人]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을 설명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甲上土 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畜生 餓鬼亦如是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동[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罪] 행위[業 : 身口意 三業].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사어록(祖師語錄) ;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염송(拈頌) ; 선문염송(禪門拈頌).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고려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제자 진각국사 혜심(慧諶) 스님이 1226년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송광사松廣寺)에서 화두 1125칙(則)과 각각의 칙(則)에 대한 짤막한 해설과 게송 등을 모아 엮은 30권의 책이다. 염송(拈頌)이라고도 한다.
*무문관(無門關) ; 1권. 남송(南宋)의 무문 혜개(無門慧開)가 1228년에 48개의 고칙(古則)을 선별하여 각각에 해설과 게송을 붙인 것을 미연 종소(彌衍宗紹)가 엮은 책.
*벽암록(碧巖錄) ; 선종의 대표적인 공안평창집(公案評唱集). 10권. 본이름은 『불과원오선사벽암록(佛果圜悟禪師碧巖錄)』. 또는 벽암집(碧巖集)이라고도 한다. 송나라 때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이 지음.
이 책은 원래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이 경덕전등록 · 조주록 · 운문록 등에서 백 개의 고칙(古則 ; 공안)을 선별하여 각각의 게송을 붙인 『설두송고백칙(雪竇頌古百則)』을 그 뒤 원오극근이 제자들의 청에 의해서 1102년 성도의 소각사, 협산의 영천원, 상서의 도림사등에 머물면서 『송고백칙(頌古百則)』을 강의했다.

이  『송고백칙(頌古百則)』의 각 칙에 대한 서론 형식의 '수시(垂示)'와 본칙과 송에 대한 해설·비판·선양의 '평창(評唱)' 그리고 본칙의 각 구절과 송의 각 구절을 평가하는 형식의 '착어(著語)' 등을 붙였는데, 제자들은 스승의 강의를 1105년경부터 모아 기록하기 시작하여 1125년에는 이미 『벽암록』 필사본이 나왔다고 한다. 『벽암록』의 간행은 1128년(남송 건염 2년) 원오극근의 제자 보조(普照)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원오극근의 제자인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당시의 학인들 중 이 책의 선화(禪話)를 익혀 알음알이를 늘리기만 하고 실제적인 수행을 게을리 하는 자가 많은 폐단을 보고, 근본 뜻을 다시 세우고자 벽암록 판각과 책들을 모두 한 데 모아 대중 앞에서 불태워버려(1156년 또는 1163년 무렵) 총림에서 사라졌었다.
그러다가 원나라 때인 대덕년간(1297~1307)에 장명원(張明遠)이 여러 절에 비장되어 있던 것을 모아서 중간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유통되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공안은, 화두는 절대로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더듬어서 알아맞출 수도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결론을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 (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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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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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22. 11. 13. 13:33

공안(전강선사 No.013)—안수정등(岸樹井藤) 이야기는 우리 사는 이 고해(苦海), 지금 살고 있는 오탁악세(五濁惡世), 이 험악헌 세상에 지금 걸려 있는 것을 비유한 것 | 안수정등의 죽을 지경에 떨어지는 꿀을 받아 먹고 있을 때 '어떻게 했으면 살아가겄느냐?'의 물음[岸樹井藤 豈能長久]에 대한 여러 선지식들의 답 | 전강 조실 스님의 답 "달다" | 부중선사도덕(不重先師道德) 불위아설파(不爲我說破).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참고] 『치문경훈(緇門警訓)』 「위산대원선사경책(潙山大圓禪師警策)」에서.
夫業繫受身 未免形累  稟父母之遺體 假衆緣而共成 雖乃四大扶持 常相違背 無常老病 不與人期  朝存夕亡 刹那異世 譬如春霜曉露 倏忽卽無 岸樹井藤 豈能長久 念念迅速  一刹那間 轉息 卽是來生 何乃晏然空過

대저 업(業)에 얽매여 받은 이 몸은 형상과 근심을 면치 못한다. 부모가 내려주신 유체(遺體, 父精母血)를 받아 여러 인연을 임시로 빌려 함께 이루었다.
비록 다만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견디어내나 항상 서로 어기고 등져 무상(無常)하게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이 사람으로 더불어 때를 정하여 약속하지 않아서,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어 찰나에 세상을 달리하게 된다.
비유하면 봄날의 서리 새벽이슬과 같아 갑자기 없어지니,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순간 순간 빠르고 빨라서 일찰나 사이에 숨이 떨어지면 곧 내생이니, 어찌 편안히 헛되게 지내리요.

*안수정등(岸樹井藤) ; 언덕[岸 낭떠러지, 바다나 강에 잇닿은 곳] 위의 나무[樹]와 우물[井]가의 등나무[藤].
①나무 · 우물 · 등나무 등은 생사 · 목숨 · 몸 등을 비유하고, 이것들은 무상(無常)하여 전혀 의탁할 수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②강기슭의 나무[岸樹]는 폭풍을 만나면 틀림없이 뒤집어져 물에 떨어지고, 우물가의 등나무[井藤]는 검은 쥐와 흰 쥐가 갉아 끊으려 한다. 견고하지 못하고, 무상하여 의존할 수 없다는 비유로 쓰인다.

 

 

(40분 17초)


[법문] 전강선사(No.013)—전강선사 일대기 제6호(경술1970년 12월 9일 음) (전013)

그러면 용성 스님한테 가서 이렇게 여러 그 법문 모도 물어서 내가 답헌 것도 있고, 또 내가 모도 다 해 논 법문을 듣고 묻는 것도 있고 헌 가운데, 지금 요리 늘 헌 법문, 저 고승집(高僧集)이고 늘 헐 때 모도 헌 법문, 그 법문 원인을 또 아침에 얘기...

그 용성 스님께 물어서 내가 또 답헌 것이 있으니깐, 그거 늘 그 전부 몇 번 들은 거지마는 오늘 아침에 인자 이놈을 이 불가불 이번 이 일대기(一代記)에는—뭐 일대기인가, 원 내 역사기인가, 거다가 넣어 달락 하니 이놈을 안 넣을 수가 없어서 원인부텀 얘기를 허는 것이여. 원인도 천 번 들어도 또 듣는 것이여.
이게 우리 불가(佛家)에도 있는 법문이지마는 유가에도 있고, 저 천주교에도 있고, 예수교에도 있고, 다 있어, 이 비유가. 우리 불가에만 있는 것이면 허지만, 전부 다 있어. 공자 공문(孔門)에도 있고.

그러니 뭐, 허지만 오늘 아침에 또 이놈을 또 처음부텀 우리 불가에 갖다 맨들아 논 원인부텀 말을 허게 되니 잘 들어야겄어.


사미과(沙彌科)에, 우리 중 되면은 인자 사미과에 있는 건디, 『치문(緇門)』에.
부업계수신(夫業繫受身)은, 업으로써 이 몸을 받는 것이다. 지은 대로. 금생에 지으면 지은 놈 가지고 내생에 받아 나온다. 금생에 받은 몸뚱이는 전생에 지어서 받아 온 것이다.
여자 될 몸을 지었으니, 여자 될 업(業)을 지었으니 여자 되아 온 것이고, 남자 몸 받을 업을 지었으니 남자 몸 받아 온 것이고, 축생 몸 받을 업을 지었으니 축생 몸 받아 오고, 아귀 될 업을 지었으니 아귀 몸이 되아 오고, 지옥 업을 지었으니 지옥죄 몸을 받아 오고, 전부가 이것은 원인이 업계수신(業繫受身)이다. 업으로써 받아 온 우리 몸뚱이니라.

그러니 업이 다 똑같이 짓지를 못허고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명이면 만 명, 다 달러. 똑같이는 못 짓거든. 그러니 똑같이 못 나와.
업으로 대체 받은 몸뚱이기 따문에 명(命)도 질게 받아 온 사람도 있고, 짜룹게 받아 온 사람도 있고, 하루 있다 죽는 사람도 있고, 한 시간에 죽는 놈도 있고, 뱃속에서 내 버리는 놈, 맨 그 업이니라. 왜 그러헌 그 차별이 있는 업을 모도 지었길래 업으로써 이 몸뚱이를 받았느니라.

미면형루(未免形累)니라. 업으로 또 받은 몸뚱이기 따문에 업도 다 달라서 명한(命限)도 다 그렇게 고르지 못허지마는 얼굴조차 모도 생김 생김이 전체가 다 달라. 구랭이 된 놈이 있고, 그저 소 된 놈이...
똑같은 자리인디. 그 주인공 영(靈) 자리는 똑같은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똑같은 것인데, 아! 이렇게 그 짓는 업보(業報) 그놈이 달라.
그래서 얼굴이 진 놈도 있고 짜룬 놈도 있고, 큰 놈도 있고 적은 놈도 있고, 모도 못쓰게 된 것도 있고 잘된 것도 있고, 몸뚱이라도, 사람 몸뚱이라도 그저 그만 문둥이 출추신(出醜身)도 있고, 그걸 형루(形累)락 햐. 형루를 면치 못허느니라. 똑같이 좋은 몸을 가지고 오들 못혀, 업 따문에.

품부모지유체(稟父母之遺體)로구나. 부모의, 허나 못허나 그런 몸뚱이라도 또 부모한테 가서 그 유체(遺體)를 받아. 어머니 아버지한테 가서 그러헌 몸뚱이를 받아 온다 그 말이여.
가중연이공성(假衆緣而共成)이로구나. 여러 인연이 또 가자(假藉)해 된다. 이 몸 하나 얻을 때 인연(因緣)이, 몇 인연이 들어? 아버지 인연이 있어, 어머니 인연이 있어, 내 혼백 그놈이 마침 적당헌 어머니 아버지한테 가서 어떻게 의탁(依託)혀야 되아.

아! 이놈 그 인연이라는 것이 아버지여, 어머니여, 내여.
또 그런 '때' 인연이 있어. 꼭 적당헌 때에 이 몸을 가서 어떻게 얻어야 되는디, 그놈이 그 인연이라는 게 여러 가지 인연이 들어간다. 중연(衆緣)이 아니면 이 몸을 받들 못혀. 그래서 받아 왔는데.
솔찬히 그 어려와. 이 몸뚱아리, 그 추헌 몸뚱이이나따나 받아 오기가 쉽지 못혀. 균일치 못혀. 어렵단 말이여.

수내사대부지(雖乃四大扶持)로구나. 그러나저러나 그 가운데에 그 몸뚱이, 한량없는 몸뚱이 가운데에 사람 몸뚱이, 사대색신(四大色身) 몸뚱이 받아 온 것이 무척 또 다행하다. 보통 문제 아니다.

받아오기는 왔다마는 상상위배(常相違背)다. 어긴다.
이놈 몸뚱이가 사대(四大) 가운데 물이 많아도—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된 몸뚱이인디 물, 또 그 화(火) 기운, 또 바람 기운, 그 땅 기운, 그 네 가지로 되았는데, 이 몸뚱이에 물, 수대(水大)만 물이 너무 많아도 습기가 많아 못쓰고, 화기가 너무 많아도 홧병 따문에 못쓰고, 그놈 그 토(土)성만 너무 많아도 비대해서 아주 그만 숭악해 메주 단지처럼 못쓰고, 바람 많아도 풍(風)이 막 들입대 풍증이 있어서 못쓰고. 아! 이놈이 모두 이런 어긴 것이 있다.
그래 가지고는 그놈의 몸뚱이는 무상(無常)헌 병이 그만 들어오기 시작할 것 같으면은 몸뚱이는 어떻게 어떻게 이리저리 받아 왔다마는, 그놈 여러 가지가 서로 어겨서 병이 모도 이놈이 몸뚱이 모도 얽히게 된다 그 말이여.

조존석망(朝存夕亡)이로구나.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기도 허고, 밤에 있다가 새벽에 죽기도 허고, 이놈의 몸뚱이 생사라는 것은 누가 알 수가 있나. 참 믿을 수 없는 것이로구나.
찰나이세(刹那異世)니라. 잠깐 동안에 이 세상이 그만 죽어버린 뒷세상이 된다. 후세(後世)가 와 버려. 이 몸 가지고 있을 때에는 금생이더니 이놈 턱 내버리면 후생(後生)이 된다. 아! 이런 꼴이 있나.
변시내생(便是來生)이여 찰나이세(刹那異世)다. 찰나, 잠깐 동안 이 몸뚱이 그만 이별해 버리고는 내생이 오는데, 그때 가서는 인자 몸뚱이는 내던져 버렸으니 혼만, 영혼만 내생 떠억 되아 가지고 나타난다.

비여춘상효로(譬如春霜曉露)로구나. 비유컨댄 봄에 서리가 와 가지고 볕 나면 녹아 버리는 것이나 같구나. 새벽 이슬 끝에 맺혀 있는 풀 끝에 달려 있는 이슬같구나. 이 몸을 얻어 와 가지고 이 몸을 내 버린 그 무상한 것이 여차(如此)허다.
숙홀즉무(倏忽卽無)로구나. 금방 이 몸을 받아 왔다마는 금방 그만 내버리게 되는구나. 그만 그거 이거 참, 이 몸을 믿다니. 요거 요까짓 것을 믿다니. 숙홀즉무다.

안수정등기능장구(岸樹井藤豈能長久)냐? 새암(샘) 언덕에 칡이 어찌 오랠 수가 있나?
‘새암 언덕에 등칠기(등나무) 줄이 하나 있는디, 그 등칠기 줄이 얼마나 오래 되겠나?’ 헌, 그 등칠기 줄을 가지고 인자 요거 얘기인디.

웬 사람이 탄탄대로(坦坦大路) 길을 가는데—요거 자세히 이렇게 알어야 되아—뒤에서 뭐가 쫓아온다.
돌아보니까 엄청나게 큰—지금 서울에 그 쾨코리(코끼리)란 놈 키우제 왜, 동물원에—그런 큰 놈이 입을 떡 벌리고 오는디, 입을 떡 벌리고 그 진(긴) 코를 가지고 쫓아오는디, 아 그놈이 그 엄청나게 큰 놈이 그 힘센 놈이 쫓아오는디, 사람이 그놈한테 안 잡혀 먹을 수가 있나.

헐 수 없이 잡혀 먹게 되아서, 잡히게 되아서 급허기는 허고 도저히 전주(戰走)헐 달아날 근력도 없고, 그때 마침 보니 짚은(깊은) 못이 하나, 샘이 하나가 있는데, 몇백 질 가량 되는 샘이 있는디, 아 새암가에서 등칠기 하나가 써억 거그서 뻗어 새암으로 들어갔다.

그 새암으로 들어간 칠기를 딱! 잡고는 딱 달어 매여 있다. 달려 있다. 아! 이놈 쾨코리란 놈이, 그 미련헌 놈이 칠기를 이렇게 코로 잡아댕겨도 그까짓, 콧심이 약간 세니까 사람 하나 달려 올릴만 하지마는, 그런 꾀가 없어. 허니까, 올라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허니, 사람이 거그 일시에 위급헌 지경을 피해서 있지마는 오래 어떻게 달려 있을 수가 있나? 팔이 그만 달려 있는 팔 힘이 차츰차츰 그만 그 적어져, 힘이 빠져 그 등칠기 줄을 오래 못 잡고 있게 될만 하다. 그 몸뚱이 달려 있으니까.

그러나 못 밑으로 보니 백 질이나 되는 놈의 못 밑에는 독사가 있고, 독룡이 있고, 그 악어가 있고. 사람 꼭 잡아먹는 것, 무서운 그런 모도 물건들이 있다 그 말이여.
그놈들도 그저 사람이 달려 있으니깐 이놈들이 어서 떨어지면 먹을라고, 서로 다 따먹을라고 야단들이지. 독룡, 악어, 다 독헌 놈들이 아! 서로 잡어먹을라고 뛰고 있는데, 그 밑에 들어갈 수는 없지. 올라올라니 쾨코리란 놈이 입을 벌리고 있제, 먹을라고. 하! 이거 사람 죽는다.

그때에 마침 못가에 냉기 하나가 나 가지고 그 천년 고목이 있는데, 고목 냉기에다가서 속 빈 고목 냉기에다가 꿀을 잔뜩 실어 놨는디, 벌이란 놈이 꿀을 실어 놨는디, 꿀이 뭉텅뭉텅 떨어진다. 꿀이 떨어지되 그 방울 수가 다섯 방울이 떨어진다. 오적(五滴)이!
한 방울 먹어. 또 한 방울 먹어. 다섯 방울을 받아 먹고 나니 그 배가 불러서 기운이 새삼스럽게 나고, 그래 그만 등칠기를 더욱 붙잡을 만헌 힘도 있고. 족(足)허제.

그러나 흰 쥐 검은 쥐, 두 마리는 나와서 그 칠기를 썰고 있어. 톱으로 썰데끼 아! 이놈을 툭툭 입으로 막 쪼사 떼고 있으니 잠시인들 있을 수가 있나. 그놈만 안 끊으면 좀 어느 지경까장 있겠는데 그놈을 썰고 있으니까 도리 없다.

“그 지경 되아 있을 적에 어떻게 했으면은 살아가겄느냐?” 요렇게 물었어.

그것이 무엇인고?
갓없는 너른 들에 시방 사람이 가다 그랬거든. 갓없는 너른 들은 생사광야(生死曠野)에다가 비유했고, 사람이 났다가 죽었다가 하는 생사광야에다가 비유했어.
우리가 어디 그 생사가 어디 한 번인가? 한 번 나왔다 한 번 살다 죽으면 그만인가? 몇 몇억만 번을 했을까? 고걸 좀 생각해봐.

잠, 눈을 좀 뚝 뜨고 들어! 눈 지긋이 감고 자올지 말고!

도문(道門)에서 도학자(道學者)라고 해 가지고, 뭘 할라고 법문 들어! 법석(法席)에서 눈 지긋이 감고 꾸뿌덕 꾸뿌덕 허면서 자올고 있어.
어느 지경에 있는 걸 좀 알어야지. 사형 무대에서 칼로 탁! 쳐 가는 지경이여 이것이.

요까짓 몸뚱이 요걸 믿고 앉어서. 그렇게 업이 중해 가지고, 무거워 가지고 무슨 도를 닦고 있으며, 법문 들어 뭣 혀.
원! 해도 너무허지. 내가 다 보고, 가만히 여그서 다 보이니까 깜박헌 거 다 안다 그 말이여.

‘또 본심을 탁 뜨고 그 내 법문 듣고 고대로 똑 닦아야겄구나’ 하고는, 법문 딱! 듣고는 잘 이대로 똑 예불(禮佛) 젓수고, 이대로 똑 닦아 나가야사 도솔내원궁(兜率內院宮)에 가 피난했다가 내려오는 것이여. 지금 당초에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다시 났다가는 큰일나니까.


갓없는 너른 들은 생사광야다. 죽었다가 살았다가 이 중생(衆生)이, 우리 미(迷)헌 이 깨달지 못허고 이 미헌 우리가... 우리, 시방 우리여. 우리를 비유헌 거여.

전생에 어디서 또 살다 또 죽어서 금생에 왔다. 무변광야(無邊曠野)는 생사광야에 비유했고, 쾨코리는 우리를 잡으러 오는 무상살귀(無常殺鬼) 귀신에다 비유했어. 우리 뒤에 시방 이렇게 잡으러 쫓아와.
그 새암이는 삼악도 지옥이여. 지옥에 들어가면은 지옥고(地獄苦) 받는 형상이여. 나찰(羅刹) 귀신이 모도 칼로 찔러다가서 불에 집어넣고, 쇳물에 집어넣고 태우고 찔르고 헌 거다가 비유했어. 독룡 · 독사는 나찰 귀신, 지옥 귀졸(鬼卒)들한테 비유했어. 거그 빠진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새암(샘) 언덕에서 등칠기(등나무)가 나서 그 지옥으로 뻗어 들어간 놈은 그건 우리 생명이여. 우리 명(命)줄. 우리가 지금 며칠이나 살란지, 몇 해나 살런지, 고 등칠기 줄이 우리 명줄에 비유헌 것이여.
그 냉기(나무)에서 꿀 다섯 방울 떨어진 것이 오욕(五慾)이여. 부부지간, 아들, 돈, 명예, 여그다 비유했어.

얼마나 묘허게 비유해 놨어. 우리 인생의 우리 사는 이 고해(苦海)에 지금 살고 있는 오탁악세(五濁惡世), 악헌 이 세상에서 이렇게 험악헌 데 지금 걸려 있는 것을 그것 비유헌 것이여. 우리가 그런 악몽을 꾸고 그런 악경(惡境)에 처해 있는 것을 비유해서 말해 놓은 것인데.
딴말 아니여, 이것이! 다! 시방 이렇게 되아 있어. 누구나 막론허고 이렇게 되아 있어.

그러면 그 오욕, 다섯 가지 그 좋은... 꿀이 오직 단가! 부부지간이 좀 좋은가! 아들, 손자, 며느리, 돈, 쌀, 명예가 좀 좋은가!
요놈에 딱 얽혀져서 애착되아 가지고 도(道) 한번 닦지 못헌, 도 못 닦고 무간아비지옥(無間阿鼻地獄)에 이렇게 있다 뚝 떨어져 버리고마는 우리 인생을 비유해서 헌 말이여. 얼마나, 누구 뭐 따로 헌 줄 알어, 이것이?

그러면 그 꿀 딱! 받아먹고 있을 적에 “어떻게 했으면 살아가겄느냐?”

오욕에 꽉 애착된 그 경계를 한번 떼 버리고, 한번 부수어 버리고 애착이 없이 툭! 뛰어 나서 처자고 자식이고 무엇이고 그 불고(不顧)해 버리고. 정반왕궁(淨飯王宮) 모후(母后)니, 뭐, 정반왕궁 아버지니, 정반왕궁 노비 권속이니, 재산, 무슨 싹 한번 내버리고 성(城)을 넘어 설산(雪山)에 들어간 것이, 그것이 모도 애착 애욕을 때려 부수어 버리고 도 닦으러 들어간 장면.
참선(參禪) 하나 척! 해서 대도(大道)를 통해야사만 면(免)허는 것 아닌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만 생사를 면허는 것인데. 성을 넘어 가거나 말거나, 왕궁을 떠나거나 말거나 이것은 거기에는 관계없어.

그 꼭, 꿀 먹고 있을 적에 그렇게 위태로운, 매달려 있는 그 사람이 곧 우리인데. “어떻게 했으면은 살아가겄느냐? 해탈허겄느냐?”
그것이 공안(公案), 그 공안 하나 탁! 깨달라 버리면은, 생사 없는 지경을 툭! 깨버리면은 툭 뛰어 나는 경계 아닌가. 그러니 거기에 붙어 있는 공안이여, 그것이.

꽉 매달려 있는데 “어떻게 했으면 살아가겄느냐?” 물으니깐. 응? 그, 공안 아니여?
그 공안에서 그래, “말키 참선허는 선객(禪客)들은 한마디씩 일러라” 용성 스님이 전국에다 그 공안을 펴 놨어.

그 등칠기 줄에 매달려 있을 적에 올라가도 쾨코리란 놈이 잡아먹고, 가만히 있어도 흰 쥐 검은 쥐가 그놈 끊고. 흰 쥐, 검은 쥐는 일월(日月)이여. 밤 가면 낮 오고, 낮 가면 밤 가고. 그 그렇게 몇 해 가다 인자 뚝 떨어지면 죽는 것 아닌가. 명한(命限). 말키 이렇게 비유해 놨는디, 그보담도 더 위험헌 지경(地境)이 없다 그 말이여.
우리 인생이 얼마나 위험헌 지경인가! 이 지경이. 거그서 뭣을 헐 것인가, 생사를 두고! 이러헌 무서운 생사, 죽음을 앞두고 뭘 헐 것이냐 그 말이여.

잠깐, 살인 강도가 그만 죄는 지었다. 그만 붙잽혀 가지고 사형 무대로 죽으러 가는 길이 우리도 똑같어! 더 무서운 우리 사형선고(死刑宣告)여, 이것은 기한(期限)도 없다. 그건 어느 때 죽는다는 기한이나 있지마는 우리의 사형선고 기한이란, 기한도 없다.
참으로 때없이... 아주 오늘 내일이 있고, 금년 내년이... 아주 그 세월을 다 살 줄 아는구나!

딱! 달려 매여 있을 적에, 꿀 딱! 받아먹을 적에, “어떻게 했으면 살아가겄느냐?”
공안이 거그 있지 않는가. 그 공안 아닌가. ‘어떻게 했으면 살아가겄느냐’는 공안이 거그 들어 있어. 그런데 아! 거그서 대체 모도 큰스님네가 다 답 안 했어?

만공 큰스님은 “꿈이니라” 그 다 이(理)와 사(事)가 딱딱 들어맞어야 되니까, 답이라는 게.
“꿈이니라. 꿈에 그런 지경이 있제, 생시(生時)야 어디 있느냐” 그 평상화(平常話)제. 이렇게 답해.
좀 잘허셨제. 답이야 아, 그 이상 더 어떻게 해. “꿈이니라. 작야몽사(昨夜夢事)니라”

또 보월 큰스님께서는 “하시(何時)에 입정(入井)가? 언제 누가 새암에 들어갔나?” 새암에 아직 안 들어간, 본래 생사 없는 경계를 답헌 것이여.

다 잘허셨제, 못했어?

고봉 스님은 거그 달려서 그대로 받는 것이다 그 말이여.
“아야, 아야!” 그놈 뭔, 뚝 떨어지면 지옥 귀신이 집어 먹는 경계를 그대로 써 버렸다 그 말이여.

그거 무슨, 시법(是法)이 주법위(住法位)해서, 이 법이 법위(法位)에 주해서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헌 도리가 그대로 법인디, 중생의 “아이고! 대고!” “아야! 아야!” 생노병사, 중생 환화(幻化)가 개시묘체(皆是妙體)인디, 개시해탈법(皆是解脫法)인디, 뭐 어디가 걸리고 안 걸릴 것이 있나?
달인분상(達人分上)에, 깬 분상에는, 깨달은 분상에는 소도 역득(亦得)이고 개도 역득이고,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이면 무우역무희(無憂亦無喜)인디, 뭔 걸림 있어? “아야! 아야!” 해탈경계 그대로 써버렸제. 좀 잘 일렀어!

이 법문을 들었다고, ‘밤낮 들은 법문이니깐 또 들어?’ 그런 소리 말어! 그러헌 그 푸딱진 용이심(容易心) 붙이지 말어!
그런게 모도 들은 것 또 헌다 싶어서 용이심이 나고 푸딱진 마음이 나니까, ‘그까짓 것’ 허는 마음이 나니까 그만 자올고 그러지. 업이 꽉 차 가지고 그놈의 업에 무량겁을 생사고(生死苦)만 받고 와 가지고 법석에서도 졸고 앉었지.

그 얼마나 다행하고 얼마나 만행(萬幸)한가. 척! 집을 여의고 들어와서 이러헌 참, 떠억 그 법보선원에 들어와서 도 닦고 있는 이 지경이 얼마나 다행하고 만행헌 것이여!


자, 그다음에 왼통 뭐 뭐 한국 혜봉 큰스님으로 훌륭헌 큰스님인데, 그 큰스님은 답을 허시되 “불불능갱작불(佛不能更作佛)이다”

아! 불(佛)이 무슨 다시 부처 되나? 본래 부처가 어떻게 부처가 또 되아? 뭔, 부처가 부처가 되아?
부처도, 본래 부처라 해도 그 패궐(敗闕)이 불소(不少)인디, 거다 또 부처 되아? 그 뭐, 거다 뭘 이를 게 있어? 본래 부처가 어디 무슨, 생사가 무슨 하관(何關)고? 뭐, 어찌 살아 나가는 도리가 무슨 소용이여.
떡! 본분불(本分佛)로 딱 대답을, 본각불(本覺佛)로 딱 대답해. 다, 그 이상 더 이를 수 없어.

용성 큰스님은 그냥 격외(格外), 격외. “표화(瓢花)가 천리출(穿籬出) 와재마전상(臥在麻田上)이니라” 바가지 그 박꽃을, 박씨를 울타리 밑에 심어 놨는디, “그 박이 나 가지고 울타리로 뀌고 울타리 밖에 나가서, 저 밖에 나가 삼밭에 박이 열어 가지고 누웠느니라”
그랬은게 그건 그대로 격외,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도리로 격외 딱 한마디 일러 버려.

다 초월생사여. 생사도 없어! 거그 뭐 죽고 사는 그—안 맞는다는 게 아니여! 다 잘 일르셨어. 그 이상 더 이를 수 없어.

허지마는 나는, 그 쬐끄만헌 내가, 이 용잔허고 조잔헌 그 그때 어린, 아! 내가 말이여,
“큰스님네가 다 이른 법문이 거 용 대가리를 베 버리고 배암 대가리를 이어 붙였고, 용 꼬랑댕이를 모도 베고서는 거다가 모도 딴 꼬랭이를 모도 붙였고, 발을 모도 오리발을 베 버리고 닭발을 이었고, 암만 천하없이 공안이라는 것은 딱딱 그대로 붙어 있는 공안을 그대로 찾어다가 딱 일러야 하는 것이지, 엉뚱헌 놈 갖다가 척척 일러 놔 봤던들 그것이, 아무래도 그것이 큰스님네가 다 암만 잘 일르셨지마는 아닙니다!” 이랬네 내가. 내까짓 것이 이랬단 말이여.

그때 그 법문, 시대 법문해 논 거를 내가 딱 다 했기 따문에 여그 올라와 이런 법문을 허는 거제, 없는 법을 내가 지어서 이렇게 말헐 수가 있나. 생각해 보지. 그건 절대로 못허는 법이여!
그 얼마나 내가 해 논 것이 역사적으로 전통해 왔는디, 내가 여그서 무슨 뭐 변명을 헐 것인가, 뭣헐 것인가. 그때 헌 놈인데.

“그러면 어디 영신(永信), 신수좌(信首座)는 어떻게 헐텐가?” 내가 그때 영신이니깐.

그래 글쎄, 그렇게 미쳐 가지고 글쎄 옳은 견성인가 그른 견성인가, 글쎄 곡성 동리재 넘어가다가 그 호랭이가 사람 잡아먹은 그놈의 재를 내가—재는 별로 높으지 않는디, 아! 그놈의 재를 바라보고 물 건너 노디를 뛰어 가다가 그만, “담 너머에 외 따 오니라”

“운무중(雲霧中)에 소를 잃었으니 어떻게 했으면 소를 찾겄는냐?”
그만 그놈이 느닷없이, 내 화두 간 곳 없이 그놈이 들어와 가지고 툭! 그만 무슨 그 견성 경계가 나오는데, 참말로 그 지경을 설향수(說向誰)오. 누구한테다 말헐 꺼여.

그래 가지고는 “이때에 조주의(趙州意)를 묻거드면은...” 무자(無字)를 돌아보니까... 무자에 걸음을 노디를 뛰는디,
“이때에 유인(有人)이 문아서래의(問我西來意)하면, 어떠헌 사람이 나한테 이때 서래의(西來意)를 묻거드면, 각하(脚下)에 녹수(綠水)는 암전거(岩前去)로구나. 내 다리 발밑에 흐르는 물은 다리로 지내가는구나”

아, 이놈을 하나 해 놓고는 그날 그 재를 넘어가서—호랭이, 사람 처녀 먹은 재를 내가 넘어가서 동리산 가서, 태안사 들어가서 그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고 내가 그렇지 않아 저번 다 얘기했지. 저번에 다 헌 놈이제.


“다 아무리 큰스님네가 이렇게 일렀지마는, 거기에 옳은 공안을 이르들 못했습니다”

얼마나 내가 그 견성(見性)을 내가 그때 했다고 했으니, 옳은 견성인지 그른 견성인지 내가 견성했다고 그랬지, 언제 뭐 내 견성(見性)이 진짜로 했다는 거 아니여!

그래 가지고 혜봉 스님한테 찾아가서 탁마(琢磨)했고, 여지없이 인가 받았고.
인가를 받았는디, 그 끝에 가서 그것 참!

“거년(去年) 가난은 비(非)가난인데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 가난은 참말로 가난해서 송곳조차 없구나”
세상에! 여기서 “능각(菱角)이 첨첨(尖尖)이나 불사타(不似他)입니다” 아! 이러니 인가해 준다 그 말이여. 인가해 주어! “능각(菱角)이 첨첨(尖尖)이나 타(他)와 같지를 않습니다” 인가를 해.

아니여! 절대 아니라 그 말이여! 아, 그런 밝은 어른이 나를 왜 인가해 주었든고 몰라. 그것!
내가 그 뒤에사 아닌 줄을 발견했거든. 아니란 말이여!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조차 없어졌구나. 여래선(如來禪)이라고 여래선밖에는 못되니, 여래선 경계밖에는 안되니, 어떤 게 조사선(祖師禪)이냐?” 아! 묻는디,
내가 그래, “능각(菱角)이 첨첨(尖尖)허지마는 타(他)와 같지는 않습니다” 아! 옳다고, 내가 여지없이 인가를 받았네!

그것 아니라. 거, 아닌 도리인디 ‘거기에서 시방 바로 한마디 일러라’
이것은 내가 이를 수가 없어.

학자(學者)를 위해서 안 일른 공안이 내가 무척 있어.
초당파(燒堂婆 소당파) 법문 내가 죽어도 안 이르고, 이것도 내가 안 일러주고, 원상(圓相) 법문에 답을 했으되 그 안 일러주고. 못 혀.

부중선사(不重先師)의 도덕(道德)이요. 선사(先師)의 도덕을 내가 중히 여기지 않고, 불위아설파(不爲我說破)다. 나를 위해 설파치 맙소사. 이러헌 법이여. 설파(說破)해 버리면 법이 아니여.

이것도 지금 큰스님네 답헌 게 다 나왔기 따문에 헐 수 없어 내가 일렀제, 이거 안 일르는 공안이여. 나, 이른 놈은 다 기히 듣고 다 아는 거.
다 용 대가리를 떼 버리고, 왜 배암 대가리를 이어 놔? 왜 용 꼬랑댕이를 떼고, 무슨 뭔 닭 꼬랑댕이같은 걸 붙여 놔? 오리발을 베고 닭발을 붙여 놓고. 그렇게 공안이란 된 법이 아니여.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냐?”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 났느니라”

깨달라 보아! 그거 어떤 공안이 나왔는가 보라.
그 꼭 조사의(祖師意)에 들어맞는 게 딴 디는 안되아. 조사서래의에 꼭 들어맞어.

조사가 누구인가? 그래 거그 송(頌)에 뭐라고 나왔냐 허면, ‘구세소림자허엄(九歲少林自虛淹), 아홉 해 소림에서 허엄했다’
그 아홉 해 소림은 누가 했어? 그 다 가르쳐 논 말이여. 기여니 딴 놈 갖다가 해 논 법 없어.


나는, 자! 큰스님네가 다 법이 잘못됐다는 게 아녀. ‘잘못했다’ 이 말은 “그 공안을 그대로 찾아 거다 일러야제, 된 법 없습니다”

“어떻게 허겄는가?”
“달다!”

그 뭔 말이여? ‘달다’
“달다!” 아! 꿀 먹어, 꿀 빨아 먹은게 달제. 꿀.
“달다!” 오욕에 꽉 취헌 사람이, 오욕락(五慾樂)에 꽉 취헌 사람이, 꿀 빨아 먹는 놈이 그 “달다!” 

‘달다’ 무슨 도리인가? 응? 공안이 그 어떻게 된 도리인가?

그놈 뚝 떨어지자, 제방(諸方) 벌써 선지식(善知識) 스님네가 다 벌써 이렇게 쫙 돔서—아, 수좌(首座) 집안에 잠깐이면 전 주소에 빽 돌아 버리는데—“정영신이가 ‘달다’고 일렀다”
인가 나와. 누가 거기에 큰스님네 누가 ‘잘못 일렀다’는 소리 없어.

“옳다!” 한목 인가여. 육대 선지식이고 그때 당시의 수백 명 도 닦는 학자들도 들으면 몰라?
“달다!” 헌 데 가서 한목 인가여! 그 통해 버린 것이여.

금봉 스님은 돌아가시드락까장 “그 참말로!” 그때는 인자 ‘전강(田岡)’ 때인게, “전강, 그 ‘달다’는 법문 참, 기가 맥혀!”
아, 늘 평생에 그 “내가 합천 해인사 가서 조실로 가는 것은 똑 전강, 조실 내가 시킬라고 간다!” 이 말 다 했고. 평생 그랬지.

그 공안, 내가 용성 스님이 물어서 용성 스님 묻는 공안을 내가 답했으니까, 여다가 이놈을 넣어 놓아야 허거든, 또. 기위 이거 뭐 내 뭘러도 넣어서, 뭔 책을 하나 만든다니까 여다가 다 넣을 밖에 없어.

아직 멀었나? 어떤 거여? (한 10분, 한 15분 남았습니다)

그놈 내가 그 답해서, 그 뭐 턱! 그만 육대 선지식한테 한목 인가 다 받아 버렸으니 다시 무슨 내가 어디 뭐 조금이라도 무슨 내가 어디 딴 디 가서, 어디 가서 다시 무슨 법 탁마허고, 뭐 인가 탁마허고 헐 것이 없다 그 말이여.(5분15초~45분5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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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정등(岸樹井藤) ; 언덕[岸 낭떠러지, 바다나 강에 잇닿은 곳] 위의 나무[樹]와 우물[井]가의 등나무[藤].
①나무 · 우물 · 등나무 등은 생사 · 목숨 · 몸 등을 비유하고, 이것들은 무상(無常)하여 전혀 의탁할 수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②강기슭의 나무[岸樹]는 폭풍을 만나면 틀림없이 뒤집어져 물에 떨어지고, 우물가의 등나무[井藤]는 검은 쥐와 흰 쥐가 갉아 끊으려 한다. 견고하지 못하고, 무상하여 의존할 수 없다는 비유로 쓰인다.

[참고 ❶]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서.
如是我聞 一時薄伽梵 在室羅伐城逝多林給孤獨園 爾時世尊於大衆中 告勝光王曰 大王 我今爲王略說譬喩 諸有生死味著過患 王今諦聽 善思念之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박가범(薄伽梵, 세존世尊, 부처님)께서는 실라벌성(室羅伐城, 사위성舍衛城)의 서다림급고독원(逝多林給孤獨園,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셨다. 이때에 세존께서는 대중 가운데서 승광왕(勝光王)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나는 지금 대왕을 위하여 간략히 비유를 들어 모든 생사에 있어 오욕(五欲)의 맛에 탐착하는 허물을 말하고자 하니, 왕은 이제 자세히 듣고 잘 깊이 생각하시오.

乃往過去 於無量劫 時有一人 游於曠野 爲惡象所逐 怖走無依 見一空井 傍有樹根 卽尋根下 潛身井中 有黑白二鼠 互齧樹根 於井四邊有四毒蛇 欲螫其人 下有毒龍 心畏龍蛇恐樹根斷 樹根蜂蜜 五滴墮口 樹搖蜂散 下螫斯人 野火復來 燒然此樹

과거 무량겁 전에 한 사람이 광야를 걷다가 험악한 코끼리에 쫓겨 두려워 달아나면서 의지할 데가 없었소. 그러다가 어느 빈 우물과 그 옆에 나무 뿌리가 있는 것을 보았소. 그는 곧 그 나무 뿌리를 잡고 내려가 우물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소.
그때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나무 뿌리를 번갈아 갉고 있고, 우물 안 사방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그를 물려 하고, 우물 밑에는 독룡이 있었소. 독룡과 독사가 두려웠고 나무 뿌리가 끊어질까 무서워하였소. 그런데 나무 뿌리에서 벌꿀이 다섯 방울 입에 떨어지고, 나무가 흔들리자 벌들이 흩어져 내려와 그 사람을 쏘았으며, 들에서는 불이 일어나 이 나무를 태우고 있었소”

王曰 是人云何 受無量苦 貪彼少味
爾時世尊告言 大王 曠野者喩於無明長夜曠遠 言彼人者 喩於異生 象喩無常 井喩生死 險岸樹根喩命 黑白二鼠以喩晝夜 齧樹根者 喩念念滅 其四毒蛇 喩於四大 蜜喩五欲 蜂喩邪思 火喩老病 毒龍喩死 是故大王 當知生老病死 甚可怖畏 常應思念 勿被五欲之所呑迫

왕은 말하였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그 보잘것없는 맛을 탐합니까?”
그때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광야(曠野)란 끝없는 무명(無明)의 긴 밤에 비유한 것이요, 그 사람은 중생에 비유한 것이며, 코끼리는 무상(無常)에 비유한 것이요, 우물은 생사에 비유한 것이며, 그 험한 언덕의 나무 뿌리는 목숨에 비유한 것이요,
검은 쥐, 흰 쥐 두 마리는 밤과 낮에 비유한 것이며, 나무 뿌리를 갉는 것은 찰나 찰나로 목숨이 줄어드는 데 비유한 것이요, 네 마리의 독사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에 비유한 것이며, 벌꿀은 오욕(五欲)에 비유한 것이요, 벌은 삿된 소견에 비유한 것이며, 불은 늙음과 병에 비유한 것이요, 독룡은 죽음에 비유한 것이오. 그러므로 대왕은 마땅히 생노병사는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알아야 하니, 늘 응당 명심하고 오욕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오”

爾時世尊重說頌曰
曠野無明路  人走喩凡夫  大象比無常  井喩生死岸  樹根喩於命 二鼠晝夜同  齧根念念衰  四蛇同四大  蜜滴喩五欲  蜂螫比邪思 火同於老病  毒龍方死苦  智者觀斯事  象可厭生津  五欲心無著 方名解脫人  鎭處無明海  常爲死王驅  寧知戀聲色  不樂離凡夫

그리고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넓은 들판(曠野)은 무명의 길(無明路)요, 달리는 사람은 범부의 비유며, 큰 코끼리는 무상의 비유요, 우물은 생사의 비유니라. 나무 뿌리는 목숨의 비유요, 두 마리 쥐는 밤과 낮의 비유며, 뿌리를 갉는 것은 찰나찰나 목숨이 줄어드는 것이요, 네 마리의 뱀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이다. 꿀방울은 오욕의 비유요, 벌이 쏘는 것은 삿된 생각의 비유며, 불은 늙음과 병과 같고, 독룡은 바야흐로 괴로운 죽음이다.
지혜로운 이는 이 일을 자세히 살펴 생사를 싫어하니 오욕에 집착 없으면 바야흐로 해탈한 사람이라 한다. 무명의 바다에 편한 듯 있으면서 항상 죽음의 왕에 휘몰리니, 여전히 소리와 빛깔을 잊지 못하면 범부의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爾時勝光大王聞佛爲說生死過患 得未曾有 深生厭離 合掌恭敬 一心瞻仰 白佛言 世尊 如來大慈 爲說如是微妙法義 我今頂戴 佛言 善哉善哉 大王 當如說行 勿爲放逸 時勝光王及諸大衆 皆悉歡喜 信受奉行

그때에 승광대왕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사의 근심스러움을 듣자, 일찍이 알지 못했던 일이라 생사를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합장하고 공경하며 한마음으로 우러러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큰 자비로 저를 위해 이처럼 미묘한 법의 이치를 말씀하셨으니, 저는 지금 우러러 받들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오. 대왕이여, 마땅히 그 말대로 실행하고 방일(放逸)하지 마시오” 승광대왕과 모든 대중은 다 매우 기뻐하고 믿고 지녀 받들어 행하였다.

--大正藏 제4冊 No.217 『佛說譬喩經』 (大唐三藏法師義淨譯)

[참고 ❷] 『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賓頭盧突羅闍爲優陀延王說法經, 빈두로돌라사 존자가 우타연왕을 위해 설법한 경)』에서.
尊者言 大王 我今爲王略說譬喩 諸有生死 著味過患 王至心聽 昔日有人 行在曠路 逢大惡象 爲象所逐 狂懼走突 無所依怙 見一丘井 卽尋樹根 入井中藏

존자가 말하였다. “대왕이시여, 제가 지금 왕을 위하여 간략히 비유를 들어 모든 생사에 있어 오욕(五欲)의 맛에 탐착하는 허물을 말하고자 하니, 왕께서는 지극한 마음으로 잘 들으십시오.
지난날 어떤 사람이 넓은 길을 가다가 크고 험악한 코끼리를 만났습니다. 코끼리에 쫓겨 두려움에 미친 듯이 달렸으나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언덕에 있는 한 우물을 보고 곧 나무뿌리를 잡고 들어가 우물 안으로 몸을 감추었습니다.

有白黑鼠 牙齧樹根 此井四邊 有四毒蛇 欲螫其人 而此井下 有大毒龍 傍畏四蛇 下畏毒龍 所攀之樹 其根動搖 樹上有蜜三渧 墮其口中 于時動樹撑壞蜂窠 衆蜂散飛 唼螫其人 有野火起 復來燒樹 大王當知 彼人苦惱 不可稱計

그런데 흰 쥐와 검은 쥐가 이빨로 나무뿌리를 갉고 있고, 우물의 사면으로 네 마리의 독사가 그를 물려고 하고, 우물 아래에는 큰 독룡이 있었습니다. 옆의 네 마리의 독사가 무섭고, 아래에 있는 독룡이 두려운데 그가 붙잡고 있는 나무뿌리가 흔들리자 나무 위에 있던 꿀이 세 방울 그의 입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때 나무가 흔들려 벌집이 부서지니 벌들이 흩어져 날아 그 사람을 쏘아댔습니다. 또한 들에는 불이 일어나 그 나무를 태울 지경에 왔습니다. 대왕이시여, 저 사람의 고뇌는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王愁憂厭惡而言 彼人得味甚少 苦患甚多 其所味者 如牛跡水 其所苦患猶如大海 味如芥子 苦如須彌 味如螢火 苦如日月 如藕根孔比於太虛 亦如蚊子比金翅鳥 其味苦惱多少如是

왕은 근심, 걱정, 싫고 미워하는 마음이 나서 말하였다. “그 사람에게 오욕락은 매우 적고, 괴로운 근심은 매우 많습니다. 즐거움의 맛이 소 발자국에 괸 물이라면, 그 괴로운 근심 고통은 큰 바닷물과 같습니다. 즐거움의 맛이 겨자씨 같다면, 괴로운 고통은 수미산과 같습니다. 즐거움의 맛이 반딧불이라면, 고통은 해와 달 같습니다. 연뿌리에 난 구멍을 태허(太虛)와 비교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모기를 금시조(金翅鳥)와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그 즐거움의 맛과 괴로운 고통의 많고 적음이 이와 같습니다”

尊者言 大王 曠野者 喩於生死 彼男子者 喩於凡夫 象喩無常 丘井喩於人身 樹根喩人命 白黑鼠者 喩晝夜 齧樹根者 喩念念滅 四毒蛇喩四大 蜜者喩五欲 衆蜂喩惡覺觀 野火燒者喩老 下毒龍者喩死
是故當知 欲味甚少 苦患甚多 生老病死 於一切人 皆得自在 世間之人 身心勞苦 無歸依處 衆苦所逼 輕疾如電 是可憂愁 不應愛著 大王 今我語王 言雖麁惡 實是利益

존자가 말하였다. “대왕이시여, 광야(曠野)는 생사를 비유한 것이고, 그 남자는 범부(凡夫)를 비유한 것이며,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언덕의 우물은 사람 몸을 비유한 것이고, 나무뿌리는 사람의 목숨을, 흰 쥐와 검은 쥐는 밤과 낮을 비유한 것이며, 나무뿌리를 갉는다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멸(滅)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네 마리의 독사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를 비유한 것이고, 꿀은 오욕(五欲)을 비유한 것이고, 벌떼는 악한 각관(覺觀 사유, 고찰하는 마음 작용)을 비유한 것이며, 들불이 태운다는 것은 늙음을 비유한 것이고, 우물 아래 독룡은 죽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욕락은 매우 적고, 괴로운 근심은 매우 많다는 것을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생로병사가 모든 사람들에게 걸림이 없이 만나니, 세간의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고달프고 괴로우며 의탁할 곳이 없고, 온갖 고통의 핍박함이 재빠른 것이 번개와 같습니다. 이는 과연 고통과 근심이니 응당 오욕에 애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왕이시여, 지금 제가 왕에게 하는 이야기는 말은 비록 거칠고 험악하더라도 진실로 이익이 될 것입니다”

--大正藏 제32冊 No.1690 『賓頭盧突羅闍爲優陀延王說法經』(宋天竺三藏求那跋陀羅譯)

[참고 ❸]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 (卷5) '제53 증수비유편(增數譬喩篇)'에서.
故大集云 昔有一人 避二醉象(生死) 緣藤(命根)入井(無常) 有黑白二鼠(日月) 囓藤將斷 旁有四蛇欲螫(四大) 下有三龍吐火張爪拒之(三毒) 其人仰望二象已臨井上 憂惱無托 忽有蜂過遺蜜滴入口(五欲) 是人唼蜜 全亡危懼

대집경에서 “옛날 어떤 사람이 두 마리의 술취한 코끼리(생사)를 피해서 등나무(목숨)를 의지하여 우물(무상)에 들어갔으나 검은 쥐와 흰 쥐(달과 해) 두 마리가 갉아 끊으려 하고, 옆으로는 네 마리의 뱀(사대)이 물려고 하며, 아래에는 세 마리 용(三毒)이 불을 뿜으며 움켜 잡으려 하였다.
그 사람이 위를 쳐다보니 두 마리 코끼리는 이미 우물 위에 지키고 있어 의탁할 곳이 없어 근심 걱정하고 있는데, 문득 지나가는 벌이 꿀방울(五欲)을 떨어뜨려 입에 들어와서 꿀을 맛보자 두려움을 모두 잊었다.

--大正藏 제54冊 No.2131 『飜譯名義集』 (姑蘇景德寺普潤大師法雲編)
--『번역명의집』은 중국 남송(南宋) 법운(法雲 1088-1158)이 불교경전에 보이는 범음(梵音)으로 한역된 단어를 유별로 정리하여 해설한 일종의 불교용어 사전. 전체 약 2천여 단어를 수록하고 있다.

[참고 ❹] 『치문경훈(緇門警訓)』 「위산대원선사경책(潙山大圓禪師警策)」에서.
夫業繫受身 未免形累  稟父母之遺體 假衆緣而共成 雖乃四大扶持 常相違背 無常老病 不與人期  朝存夕亡 刹那異世 譬如春霜曉露 倏忽卽無 岸樹井藤 豈能長久 念念迅速  一刹那間 轉息 卽是來生 何乃晏然空過

대저 업(業)에 얽매여 받은 이 몸은 형상과 근심을 면치 못한다. 부모가 내려주신 유체(遺體, 父精母血)를 받아 여러 인연을 임시로 빌려 함께 이루었다.
비록 다만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견디어내나 항상 서로 어기고 등져 무상(無常)하게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이 사람으로 더불어 때를 정하여 약속하지 않아서,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어 찰나에 세상을 달리하게 된다.
비유하면 봄날의 서리 · 새벽이슬과 같아 갑자기 없어지니,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순간 순간 빠르고 빨라서 일찰나 사이에 숨이 떨어지면 곧 내생이니, 어찌 편안히 헛되게 지내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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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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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22. 7. 22. 05:31

화두(전강선사 No.014)—아는 걸로는 소용없어. 知之一字 衆禍之門 | 참구(參句)라 하는 것은 그대로 활구(活句) | 탁! 맥혀서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다'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먹는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12분 6초)



[법문] 전강선사(No.014)—전강선사 일대기 제7호(경술1970년 12월 10일 새벽.음) (전014)

“여하시(如何是)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인고? 어떤 것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인고?”
생사해탈법이 서천(西天)에서, 서역(西域)서 왔으니까 서래의를 물은 것이여. 서래, 그때는 그 인도(印度) 모도 저 서래(西來) 아닌가. 서쪽 아닌가, 여그서. 확철대오(廓徹大悟)헌 생사 없는 대해탈법이 서쪽에서 왔으니까 서래의(西來意)를 묻는 것이여.

“그 서쪽에서 온 그 뜻이 어떻습니까?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자 이빨에 털이 났느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느니라”

그 원, 세상에 그... 따지면 그 뭐 아무데나 붙일 수 있제. 수수꺼끼, 아(兒)들 수수꺼끼처럼. 뭐 수수꺼끼나 뭐 다를 것이 무엇이 있어.
수수꺼끼 그녀러 것, 그것 참 처음에 들어 보면 깜깜 알 수 없지. 그러지마는 그 따져서 모도 붙여 보면은 다 알 수 있는 것이여. 허지마는, 그 수수꺼끼 그거 천 개, 만 개를 다 알아 봤던들 그 뭣허는 것이여? 따져서 모도 아는 것이니.

이리저리 생각해 마음으로 따져서 아는 것은 소용없다 그말이여. 그걸 해석이라 그래. 모도 해석해서, 모도 생각을 붙여서, 뉘기 짜서 아는 것 가지고는 소용없어. 그러기에 지지일자(知之一字) 중화지문(衆禍之門)이여. 아는 것이라는 것은 중화(衆禍)의 문이여. 아는 걸로는 소용없어. 참선법은 그게 아니여.

‘어째서 판자 이빨, 판자 이빨에 털이 났다고 했는고?’
‘조주 스님이 그렇게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으니,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닥 했는고?’

법상(法床)에 올라올 때마다 내가 해 주지. 왜 이래?
이놈을 가지고 모도 대중이 지금 철두철미허게 정진해 나가니까, 이걸 해 줄 수밖에 없지. 제일 중요헌 것이니까.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저 나무 판자 말이여, 나무 판자. 나무로 썰어 논 판자 말이여!
‘판자 이빨에 터럭이 났다’ 어떤 것을 판자 이빨이라 하며, 판자 이빨에 뭔 털이 나? 털이 왜 거가 나?

원 당최, 세상에 거 뭔 소리냔 말이여? 무슨 뜻이여? 알 수 없구나! 알 수 없는 그 의심. 알 수 없는 걸 의심(疑心)이라고 안 혀? 가령, 사람을 내가 하나 잊어버렸는디, 그 사람이 도망갔는디 ‘어디로 갔나? 어디로 갔을까?’ 간 곳을 알 수 없다.

‘응! 그 사람이 아무 디가 있을 것이다. 거그 있는가?’ ‘아무 디 찾아가면 거 있을 것이다. 아! 거그는 저, 어디 무슨 지리산 가 있을까?’ 고렇게 따지지를 말어.
그 사람이 갔는데, 어디로 갔는고? 알 수 없구나.

‘어디로 갔는가? 금강산으로 갔는가? 태백산 속으로 들어갔는가?’ 이렇게 분석허지를 말고.
‘어디로 갔는고?’ 알 수 없어. 그저 무조건 여하약하허고 알 수 없다.

수참활구(須參活句)언정, 수참참구(須參參句)언정, 모름이 참구를 헐지언정—참구, '참구헐 참(參)' 자, '연구헐 참(參)' 자.
수참활구언정, 활구를 참상(參詳) 헐지언정. 참(參)이여, 참(參). 참의(參意)가 아니라, 참(參)이여.

참의(參意)라는 것은—참구와 참의와 달라. 참구(參句)라 하는 것은 그대로 활구(活句)여, 그것이. '살 활(活)' 자, '글귀 구(句)' 자, 활구여.
활구를 참상(參祥)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상허지 말어라. 사구라 하는 것은 그건 내가 먼첨 죽고 남 죽이는 것이여, 그거. 천하에 못쓴 것이 참선에 사구다 그 말이여.
사구(死句)라 하는 것은 모도 아는 것이여. 이치도 있고, 모든 이치가 거그 들어붙고. 모도 아는 것이고, 모도 해석해서. 그것이 선(禪)이 아니여. 참선이라는 것은 그걸 선이라고 안 혀.

허니, 탁! 맥혀서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을 활구(活句)락 햐.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다’ 당장에 판대기 이빨에 털 난 도리를 알 수 없지. 그 도리를 알 수 없는 것이 조주의 뜻이니라. 조주의 뜻이여.
‘어째서 조주 스님은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고 했는고?’ 그 조주의 뜻을 찾는 것이,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는 놈을 알 수 없는 것이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난 놈이 다르고, 조주 스님의 뜻이 다르고, 요리 가서 찾고 조리 가고, 그거 못써. 그걸 참의(參意)라 햐. ‘조주 스님 뜻은 무엇이여, 판대기 이빨에 털은 무엇이며, 그건 다른가 어쩐가?’ 모도 참의여. 참구(參句)가 못 되고 참의(參意)여! 활구가 못 되고 사구여!

요것을 분간해서, 화두를 똑! 한 밥 먹을 동안을 허드래도 고렇게 야물딱지게 다루어 들어가야 혀.
화두 잘못허면은, 화두병 들어 버리면은 그만이니까. 무슨 공부여. 공부는, 무슨 공부가 그런 공부가 있나? 그건 소용없는 공부여.

이치로 모도 그 수수꺼끼 같은 거, 왜 그런 것도 처음에 들으면 꽉 맥혀 모르제. 그놈을 자꾸 상량(商量)허면은, 사량(思量)을 붙이면은 그만 알거든.

인방(寅方), “호랭이는 질고, 용단(龍短)이라. 용은 짜룹다. 그게 뭔 뜻이냐?”
아, 그놈의 것, 용은 지드란헌 지드란헌 배암 같이 생긴 진 놈이고, 호랭이는 쪼끄만헌 짜룬 것인디, 어째서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닥 했는고? 아, 그거 알 수 없거든.

그것 따져 보면 안다 그말이여. 용단(龍短)이다. 용이라 하는 것은 진방(辰方)을 용이라 햐, 진방.
동서남북에 방우가 다 있어. 열두 방우가 있지 않어? 자축인묘진사오미(子丑寅卯辰巳午未)...

진방이 거, '용 진(辰)' 자, 진방. 용(龍)이라고 헌단 말이여. 진방에서 해가 뜰 때에는 해가 자룹고, 인방(寅方)에서 해가 뜰 때에는 해가 질다 그 말이여. 그러니께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다 그 말이여. 그놈을 갖다가서 “무엇이냐?” 물으면, 따지면 알거든. 그 방우를 따지면 아는 그런 것이여.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먹는다. 그 뭔 뜻이냐?” 아, 그거 설찬히 어렵다 그 말이여. 그 생각해보면 또 그것도, 퇴깽이는 묘방(卯方). 동방(東方)이 묘(卯)거든. 동쪽이 묘니까, 묘에서 해가 올라와 가지고, 퇴깽이 알이란 말이여.
저 유방(酉方)으로 넘어가거든. 해 넘어가는 데 유방(酉方)이니까. 유방, 닭이 집어먹는다 그 말이여.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생킨다 그 말이여. 아, 거 모도 설찬히 수수께끼라도 그렇게...

그렇게 따지는 건 절대 아니여, 선(禪)이라는 것은.

또 그러고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그대로 딱!
내가 어제 아침에, “그 꿀 먹을 때에 어떻게 했으면 살아 가겄느냐?”
“달다!”

내가 도장원(都壯元)했다고 안혀? 내가 도장원했다고 안혀? 역사적으로 도장원이지! 당시에 어찌 바로 해 놨는데, 아니라고 헐 수가 있는가? 못 하지.

그, 고렇게 공안이란 게 딱! 조사관(祖師關)이란 게 백혀 있어.

조사관은 도무지, 뭔 데서 갖다와서 무슨... 어떻게 무슨 저... 뭐락 하노? 그 출처(出處)같은 거, 그런 것도 없어. 출처가 어디 그 조사관에 가 출처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고, 어록(語錄)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여.
다맛 조사서래의에 딱! 답해 논 것이 ‘판치생모’여. 그 조사관 딱! 해 놓은 것이여.(9분59초~22분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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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천(西天) ; ①서쪽 하늘. ②서천 서역국(西天西域國 : 인도의 옛 이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지지일자(知之一字)가 중화지문(衆禍之門) ; 「‘알 지(知)‘ 자 한 글자가 온갖 재앙의 문이다」
[참고 ①] 『대혜보각선사어록』 제16권 대혜보각선사보설(大慧普覺禪師普說) ‘부경간이 청한 보설(傅經幹請普說)‘ (대혜종고 1089~1163 | 김태완 옮김 | 소명출판) p230~234 참고.
那箇是生而之知者 如趙州作沙彌時 同本師行脚到南泉 値南泉臥次 本師禮拜了 趙州方禮拜 南泉問云 近離甚處 州云 近離瑞像 泉云 還見瑞像麽 州云 瑞像則不見 面前只見臥如來 南泉遂起 問 爾是有主沙彌 無主沙彌 州云 是有主沙彌 泉云 那個是爾主 若是如今禪和家 便近前彈指 打箇圓相 喝一喝拍一拍 拂袖便行 放出這般惡氣息 爾看他趙州 緩緩地近前道 孟春猶寒 伏惟和尙尊候萬福 泉乃喚維那云 此沙彌別處安排

어떤 것이 태어나면서 아는 경우인가? 예컨대, 조주 스님(778~897)이 사미였을 때에 본사(本師)와 함께 행각하여 남전(南泉)에 이르렀는데, 마침 남전 스님(748~834)이 누워 있었다. 본사가 절을 하고서 조주 스님이 막 절을 하려고 하는데 남전 스님이 물었다.

‘최근 어디를 떠나왔는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서상(瑞像)을 떠나왔습니다’

남전 스님이 물었다. ‘서상을 보았는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서상은 보지 못했지만, 눈앞에서 다만 누워 있는 여래를 봅니다’

남전 스님이 이에 일어나 물었다. ‘그대는 스승이 있는 사미인가? 스승이 없는 사미인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스승이 있는 사미입니다’

남전 스님이 말했다. ‘누가 그대의 스승인가?’

만약 요즈음의 선객이라면, 곧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퉁기거나, 한 개 원상(圓相)을 그리거나, 한 번 고함을 지르거나, 박수를 한 번 치거나, 소매를 털고서 곧장 가거나 하는 등등의 더러운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그대들은 보아라. 저 조주 스님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초봄이니 아직 춥습니다. 스님에게 만복이 깃들기를 삼가 빕니다’

남전이 이에 유나(維那)를 불러 말했다. ‘이 사미를 특별히 대접하여라’

次日却來問 如何是道 南泉也不行棒 也不下喝 也不談玄 也不說妙 也不牽經 也不引論 也不擧古人公案 亦不說事 亦不說理 只實頭向他道 平常心是道 爲他趙州已理會得平常心了 便却問 還假趣向也無 泉云 擬向卽乖 州云 不擬爭知是道 泉云 道不屬知 不屬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眞達不疑之道 猶如太虛廓然蕩豁 豈可於中彊是非耶 趙州於言下千了百當

다음날 다시 와서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남전 스님은 방망이를 휘두르지도 않고, 고함을 지르지도 않고, 현묘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경론을 인용하지도 않고, 옛사람의 공안(公案)을 말하지도 않고, 사실을 말하지도 않고, 이치를 말하지도 않고, 다만 확실하게 그에게 말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

조주 스님은 이미 평상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다시 물었다. ‘향하여 다가갈 수 있습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향하여 다가가려 하면 어긋난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향하여 다가가지 않으면 어떻게 도를 압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도는 앎[知]에 속하지도 않고, 알지 못함[不知]에 속하지도 않는다. 앎은 허망하게 깨어 있는 것이고, 알지 못함은 깜깜한 무기(無記)이다. 만약 참으로 의심없이 도에 통달하면, 마치 커다란 허공과 같아서 막힘없이 텅 비었는데, 어떻게 그 속에서 억지로 옳으니 그르니 할 수 있겠느냐?’

조주 스님은 그 말을 듣고서 밝게 깨달았다.

南泉道 道不屬知 不屬不知 圭峰謂之靈知 荷澤謂之 知之一字衆妙之門 黃龍死心云 知之一字衆禍之門 要見圭峰 荷澤則易 要見死心則難 到這裏須是具超方眼 說似人不得 傳與人不得 所以圜悟先師說 趙州禪只在口脣皮上 難奈他何 如善用兵者 不齎糧行 就爾水草糧食 又殺了爾

남전 스님은 ‘도는 앎에 속하지도 않고, 알지 못함에 속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지만, 규봉 스님(780~841)은 그것을 일러 ‘신령스런 앎[영지(靈知)]’이라 하였고, 하택 스님(684~758)은 그것을 일러 ‘지(知) 한 글자는 온갖 묘함의 문(門)이다’라 하였고, 황룡사심(1043~1114) 스님은 말하기를 ‘지(知) 한 글자는 온갖 재앙의 문(門)이다’라 하였으니, 규봉과 하택을 알기는 쉬우나 사심(死心)을 알기는 어렵다. 여기에 이르러선 모름지기 테두리와 격식을 벗어난 안목을 갖추어야 하니,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없고, 남에게 전해 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원오 선사(先師 1063~1135)께서는 말씀하시길 ‘조주의 선(禪)은 다만 입술 위에 있으니, 그것을 어떻게 하기는 어렵다(다른 번역 : 조주의 선이 그저 말로 되는 것이라면 무에 어려울 게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마치 용병(用兵)을 잘하는 자가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그대의 수초(水草)를 양식으로 삼아 그대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참고 ②] 『고봉화상 선요 어록』 (고봉 1238~1295 |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시중(示衆 其十四)’ p110~112 참고.
若論參禪之要 不可執蒲團爲工夫 墮於昏沈散亂中 落在輕安寂靜裏 總皆不覺不知 非唯虛喪光陰 難消施主供養 一朝眼光落地之時 畢竟將何所靠

만약 참선의 요점을 논하자면 방석에 앉는 것을 집착하여 공부를 삼아 혼침과 산란 가운데 떨어지거나, 편안하고 고요한 속에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모두 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리니 오직 세월을 허송할 뿐 아니라 시주들의 공양을 소화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루 아침에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필경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山僧昔年在衆 除二時粥飯 不曾上蒲團 只是從朝至暮 東行西行 步步不離 心心無間 如是經及三載 曾無一念懈怠心 一日驀然踏著自家底 元來寸步不曾移

산승이 옛날 대중에 있을 때 죽과 밥 먹는 두 때를 제외하고 방석 위에 올라앉지 않고 다만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걸음걸음에 여의지 않고 마음 마음이 간격이 없었다. 이와같이 3년을 지내도록 일찌기 한 생각도 게으른 마음이 없다가 하루는 문득 나의 고향[自家]을 밟고 나니 원래 한 걸음도 옮긴 것이 아니었더라.

昏沈掉擧 喜怒哀樂 卽是眞如佛性 智慧解脫 只緣不遇斯人 醍醐上味 飜成毒藥 靈利漢 假饒直下知非 全身擔荷 正好朝打三千 暮打八百 何故 豈不見道 知之一字 衆禍之門

혼침과 도거, 희로애락이 그대로 진여불성이고 지혜해탈이건만 다만 인연이 이러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제호상미가 도리어 독약이 되었다. 영리한 사람이 가령 당장에 그른 줄 알아 온 몸으로 짊어지더라도 바로 아침에 삼천 번을 때리고 저녁에 팔백 번을 때릴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어찌 '지(知)라는 한 글자가 모든 재앙의 문이다'라는 말을 알지 못하는가?

若論此事 如蚊子上鐵牛相似 更不問如何若何 便向下觜不得處 拌命一鑽 和身透入 正恁麼時 如處百千萬億香水海中 取之無盡 用之無竭 設使志不堅心不一 悠悠漾漾 東飛西飛 饒你飛到非想非非想天 依舊只是箇餓蚊子

만약 이 일을 논하자면, 모기가 쇠로 된 소에 오르는 것과 같아서 다시 이러쿵 저러쿵 묻지 않고 당장에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버리고 한 번 뚫어서 몸으로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런 때 마치 백천만억 향수해(香水海)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취(取)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고갈됨이 없지만, 설사 뜻이 견고하지 않고 마음이 한결같지 않아 아득히 출렁대며 동으로 날고 서로 날다가 설사 네가 날아서 비비상천에 이른다하더라도 여전히 다만 한 마리 굶주린 모기일 뿐이더라.


[참고 ③] 『선가귀감』 (청허휴정 1520~1604 / 1564년에 지은 책) (용화선원刊) p220~221.
神光이  不昧하야  萬古徽猷로다  入此門來에  莫存知解어다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밝고나。이 문 안에 들어오매 알음알이를 두지 말지어다.

(註解) 神光不昧者는  結上昭昭靈靈也요  萬古徽猷者는  結上本不生滅也요  莫存知解者는 結上不可守名生解也라  門者는  有凡聖出入義하니  如荷澤의  所謂知之一字가 衆妙之門也라 
 
(주해) 거룩한 빛이 어둡지 않다는 것은 첫 머리의 「밝고 신령하다」는 것을 맺는 말이요, 만고에 밝다 함은 「본래부터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맺는 말이며,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하는 것은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하는 것을 맺는 말이다。「문(門)」이란 범부와 성인이 드나든다는 뜻이 있으니, 마치 하택신회 선사가 이른바 ‘알 지(知)’ 자 한 자가 온갖 묘한 이치의 문이라고 한 것과 같다.

吁라  起於名狀不得하야  結於莫存知解하니  一篇葛藤을 一句都破也로다  然이나  始終*一解요  中擧萬行하니  如*世典之三義也라 知解二字는  佛法之大害故로  特擧而終之하니  荷澤神會禪師가  不得爲曹溪嫡子者는 以此也라

아! 「이름 지을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다」는 데서 시작하여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것으로 끝을 맺으니, 이 한 권에 얽힌 넌출을 한마디 말로 모두 끊어 버렸다。그리하여 처음과 끝을 일해(一解)로써 말하고, 중간에는 온갖 행동을 들어 보였으니, 마치 유교 경전의 삼의와 같다。지해(知解) 두 글자는 불법에 큰 해독이 되므로 특별히 들어서 끝을 마치니 하택신회 선사가 조계의 적자가 못 됨은 이 때문이다.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구(參句) ; 언구(言句 화두)를 참상(參祥)하는 것.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參意)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參句)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참상(參祥) ; 참구(參究).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알음알이. 지해(知解).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질다 ; ‘길다’의 사투리.
*짜룹다 ; ‘짧다’의 사투리.
*방우 ; ‘방위(方位)‘의 사투리.
*진방(辰方) ; 이십사방위(二十四方位)의 하나. 정동(正東)에서 남으로 30도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각도 안의 방향이다. 진(辰)은 십이지(十二支)의 다섯째 지지(地支)로 용(龍)을 상징한다.
*퇴깽이 ; ‘토끼’의 사투리.
*설찬히 ; 솔찬이. 솔찬히. ‘아주 많이. 상당히. 제법’의 사투리.
*내가 어제 아침에, “그 꿀 먹을 때에 어떻게 했으면 살아 가겄느냐?” “달다!” ; "달다"는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의 물음에 대한 전강 스님의 답.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20~22.
그러면 여기서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하여 보자.
한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그 사람을 잡아 먹으려고 무서운 코끼리가 쫓아 따라오고 있다. 생사가 박두하여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등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하나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우물 밑바닥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고 또 우물 중턱의 사방을 돌아보니 네 마리의 뱀이 입을 벌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고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으니 두 팔은 아파서 빠질려고 하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고 있다.
만일 등나무 넝쿨을 쥐가 쏠아서 끊어질 때라든지, 또 두 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룡에게 잡혀 먹히는 수밖에 없다.

그때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이렇게 떨어져서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사람은 꿀을 받아 먹는 동안에 자기의 위태로운 경계도 모두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이것은 비유 설화인데 ‘한 사람’이란 생사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말한 것이요, ‘망망한 광야’는 생사광야인 육도윤회이고, ‘쫓아오는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요, ‘우물’은 이 세상이고 ‘독룡’은 지옥이다. ‘네 마리 뱀’은 이 몸을 이룬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요, ‘등나무’는 무명수(無明樹)이고, ‘등나무 넝쿨’은 사람의 생명줄이다.
‘흰 쥐와 검은 쥐’는 일월이 교체하는 낮과 밤이요, ‘벌집의 꿀’은 소위 눈앞의 오욕락이란 것이니 재물과 색과 음식과 수면과 명예욕이다.

이것이 바로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비유하여 말한 설화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 꿀방울에 애착하여 무상하고 위태로운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뛰어나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안수정등’이라는 공안이다.

지금부터 약 45년 전 도봉산 망월사에 용성 스님이 조실로 계시었다. 그때 용성 스님께서는 제방선원에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하고 물었다.

만공 스님의 답은 “어젯밤 꿈 속의 일이니라(昨夜夢中事)”

혜봉 스님의 답은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佛不能更作佛)”

혜월 스님의 답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잡아 얻음이 분명(拈得分明)하니라”

용성 스님의 자답은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 삼밭에 누었느니라.(瓢花穿籬出 臥在麻田上)”

보월 스님의 답은 “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何時入井)”

고봉 스님의 답은 “아야, 아야” 하셨는데,

나, 전강은 답하되 “달다!” 하였으니 언하에 대오할지어다.

*도장원(都壯元) ; 장원(壯元). ①예전에, 과거(科擧)의 갑과(甲科)에서 일등으로 급제하는 일이나 그 사람을 이르던 말. ②글을 제일 잘 지어 성적이 첫째임. 또는 그런 사람.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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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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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21. 11. 30. 09:44

화두((No.479))—(게송)見色非干色~ | 팔풍(八風)이 휘몰아치는 오탁악세(五濁惡世)에 팔만사천 마구니,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 있는 좋은 무기는 '이뭣고?'
마구니는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15분 16초)

 


[법문] 송담스님(No.479)—1992년 하안거 해제(92.08.13) (용479)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성색불애처(聲色不礙處)가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색(色)을 보되 색(色)에 관계치 아니하고, 관여(關與)하지 아니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다.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어.

우리는 눈을 통해서 온갖 색상(色相)을 보는데, 그 색상이 눈에 들어오면 들어오자마자 그것에 관여를 하게 됩니다. '빨갛다 노랗다 파랗다', '크다 적다', '좋다 나쁘다' 그것이 바로 색에 관여하는 것이거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여. 무슨 소리든지 귀로 들으면, '아, 저건 자동차 소리다. 비행기 소리다. 저건 애기 소리다. 저것은 개 짖는 소리다' 거기에서만 끝나지 아니하고, '저것은 나를 해롭게 하는 소리다. 나한테 욕하는 소리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다' 온갖 사람의 말을 듣고서 그렇게 관여를 하고, 거기에서 싫어하는 생각을 내고, 미워하는 생각을 내고, 다투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고, 원한심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色相). '저 사람은 이쁘다. 미웁게 생겼다. 뵈기 싫게 생겼다. 입맛 떨어지게 생겼다' '저 아무 점께 나한테 저렇게 욕한 인간이 또 오는구나'
하루 종일 · 날마다 · 달마다 · 일 년 내내 · 일생 동안을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을 보고 그렇게 시비(是非)를 일으키고 업심(業心)이 발동(發動)을 하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를 통해서 시비를 일으키고 업이 발동을 해서, 얼굴에 그 표현(表現)이 되고 행동으로 표현이 돼.
그래서 한량(限量)없는 업(業)을 짓고 업 위에 다시 또 업을 지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데.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에,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거나 눈에 무슨 색상이 들어오거나, 처음에는 관여를 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들어오거나 말거나 거기에 걸리지를 안 해.
눈에 보이면 보인 대로 맺겨 두고,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면은—내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거나, 나를 비방(誹謗)하는 소리를 듣거나 그냥 그런대로 놔두는 거여.
귀를 막고 안 들을려고 할 것도 없고, 눈을 감고 안 보려고 할 것도 없어. 보이면 보인 대로 놔두고 들으면 들린 대로 흘려보내는 거여.

부처님께서 어느 외도(外道)를 만나셨는데, 그 외도가 입에 못 담을 비방(誹謗)을 해. 온갖 비방을, 부처님 비방을 한다. 부처님 제자들에 관한 비방, 부처님에 관한 비방, 다 얼토당토않는 소리로 갖은 고약한 소리를 해 가지고 부처님 앞에 욕을 하고 비방을 하는데, 부처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소리를 그만하라는 말도 않고 다 들으셨다 그말이여.

다 듣고 난 다음에, "이제 말이 끝났습니까?"
"네, 끝났다"고.

"응, 그러면 내가 한마디 묻겠는데, 내 집에 참 손님이 오셔서 그 주인이 참 갖은 음식을 많이 차려서 내놓고 손님한테 내놨는데, 손님이 그 음식을 안 먹고 가면 그 음식은 누가 먹어야 겠습니까?"

"그 손님이 안 먹으면 주인이 먹어야죠"
"그러면 되었다"고. 그리고서 부처님이 거기서 떠나셨습니다.

내게 당치않는 행동이나, 내게 당치않는 말로써 나를 비방을 하거나 욕을 하거나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것을 취(取)하지 아니하면, 그것에 관여(關與)하지 아니하면, 그 욕과 악한 비방은 한 사람이 다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공연한 사람을 흔들어 놓을 흔들려고 그러고, 공연한 사람을 비방을 하고 욕하고 했으면, 상대방이 그놈을 받아들이면 그리 건너가겠지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무심(無心)으로 상대(相對)해.
화두(話頭)를 떠억—그럴수록에 당치않는 소리를 하면 얼굴 하나 찌푸릴 것도 없이 화두를 떠억 들고 '이 뭣고?' 그러면 구태여 안 들을라고 할 것도 없어.

그냥 열심히 들은 것처럼 눈을 따악 뜨고 잘 들은 척하고, 들으면서 그냥 '이뭣고?'를 떠억 하란 말이여. 그러면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는 한 사람 입으로 도로 들어가는 거여.
그놈 지가 토해 낸 독(毒)을 잔뜩 들어마시고, 그 사람은 그 지은 죄업(罪業)으로 삼악도(三惡道)에 가서 고(苦)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도, 그 (욕하는) 말을 들으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뭣고?'를 하고, '판치생모'를 하고, '정전백수자'를 하고, '무자' 화두를 했기 때문에 그 공덕(功德)으로—(욕한 사람은) 한량없는 삼악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다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그 (욕한) 사람이 불법(佛法)을 믿게 될 것이다 이거거든.
같이 싸우고 그랬으면 다 같이 지옥에 떨어질 텐데, 내가 거기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시비(是非)에 말려들지 아니하고, 떠억 정심(正心)으로 상대를 하고 나는 화두를 들고 최상승법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욕한) 사람이 지은 죄 만큼은 받어야 되는 거고,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그래도 그놈을 받고 나서는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했을 때에는 불법(佛法)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그 인과법(因果法)이 역연(歷然)하고.
또 내가—그렇게 비방을 하고 욕을 한 데도—동심(動心)이 안 되고 떠억 화두를 들 수 있게끔 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많은 부처님과 많은 선지식에게 공양(供養)을 하고 선근(善根)을 심어 온 그 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나를 비방하고 욕한 데 마음이 동요가 안 되고 화두를 거각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들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이미 잘 길렀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단적으로 한 그런 예를 들었거려니와,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데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겠습니까. 팔풍(八風) 경계, 여덟 가지 종류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러한 오탁악세(五濁惡世)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가 부닥치는 많은 일들, 정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많할 것입니다마는, 이 예(例)와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를 무장(武裝)하고 그러한 '이뭣고?'에 철갑과 투구로써 무장을 하고 나간다면 그 앞에 이기지, 당해낼 수 있는...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천하 간단한 무기(武器)의 하나지마는 팔만사천 마구니를 퇴치(退治)할 수 있고, 팔만사천의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에 그러한 좋은 무기를 우리는 지닐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선지식(善知識)과 여러 도반들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 팔만사천 마구니를 우리가 그것으로 이겨 낼 수가 있느냐 하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거든.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팔만사천 번뇌(煩惱)가, 그놈이 자라고 자라 가지고 팔만사천 마구니가 되어서 자기(自己)에게 다시 핍박(逼迫)해 들어온 것이거든.
그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여. 저 타방세계(他方世界)에서 만들어져 가지고 침범(侵犯)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거든. 자기가 심은 씨가 그러한 열매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이 뭣고?' 하나만 탁! 챙기면 천하 없이 무서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권속도 그 앞에는 무릎을 꿇 수밖에 없고, 결국은 그것들이 나를 보호하고 나로 하여금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깨달라서 성불(成佛)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호위병(護衛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도반들은 앞으로 어데서 어떠한 일을 만나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항상 정심(正心)으로 화두(話頭)를 드는 그 정진력(精進力)으로 나아간다면 어디를 가거나 무장무애(無障無礙)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을 만나고 역경계(逆境界)에 처(處)하더라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화두(話頭)를 들고 나아간다면 무장무애하게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에 더 분심(憤心)이 나고,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23분20초~38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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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21. 9. 3. 20:29

화두((No.472))—(게송)男兒大丈夫~ | 정법을 믿고 발심한 사람이 바로 남아대장부 | 운전 초보와 능숙자 비유 |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으로 하면 소임 속에서 공부가 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13분 6초)

 


[법문] 송담스님(No.472)—1992년 5월 첫째일요법회(92.05.03) (용472)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가  작사막망로(作事莫莽鹵)니라
나무~아미타불~
경정철석심(勁挺鐵石心)으로  직취보리로(直取菩提路)니라
나무~아미타불~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가  작사막망로(作事莫莽鹵)라.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는 육체상으로 남성(男性)을 받아 난 사람만을 여기서는 남아대장부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육체상으로 여자의 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오욕락(五欲樂)이 무상(無常)한 줄 알고 발심(發心)해서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이 사람은 남아대장부입니다.

설사 고추가 달렸어도 정법을 믿지 않고 오욕락에 빠져서 그렇게 산 사람은 그거 대장부라 할 수가 없어. 미련하기가 한이 없고 어리석기가 한이 없어.
정말 몸뚱이야 어떻게 생겼건, 정법을 믿고 발심한 사람이면 그게 바로 남아대장부다 그 말이여.

그런 발심을 한 남아대장부는 작사막망로(作事莫莽鹵)여.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향해서 나아가는 데 그럭저럭하고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그말이여. 한번 시작했으면, 정말 부처님이 왕궁의 부귀를 버리고 설산에 들어갔으면 거기에 그럭저럭하실 수가 있었겠느냐 그 말이여.
우리도 그 장부(丈夫)를 본받아서 발심을 한 이상 어찌 그럭저럭 등한히 하고 사소한 일에 진심을 내고, 사소한 일에 우리의 아까운 시간과 생각을 빼앗기고 흔들릴 수가 있겠느냐 그거거든.

경정철석심(勁挺鐵石心)으로, 굳고 굳은 쇠와 돌같은 마음으로 직취보리로(直取菩提路)니라. 바로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을지니라.  한산, 한산(寒山) 습득(拾得)의 한산 성현의 게송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지은, 참 숙세에 지은 공덕으로 원력으로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한국에 태어났고 또 불법을 만났고 정법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정말 남아대장부로서 또 참선을 시작했다면 철저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배산에 일단 들어갔으면 기어코 보배를 캐내야만 말아야지, 그럭저럭 끌적끌적하다가 돌아올 수야 있겠느냐 이거거든.

참선은 '지금 열심히 해가지고 장차 기어코 견성성불(見性成佛)하리라' 이러한 게 아닙니다.
참선은 '이뭣고?' 이외의 어떠한 일에도 집착심을 가져선 안 돼. 어지간한 일이면은 인연 따라서 수용하고, 오직 한 생각 철석같은 마음으로 '이뭣고?' 하나만을 단속해 나가야 돼.

우리는 상근기(上根機)도 아니고, 중근기(中根機)도 아니고, 하근기(下根機)거든.
하근기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가 없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것에도 정신을 쓰고 저것에도 정신 쓸 겨를이 없어.

그렇다고 해서 자기 소임도 안 보고 아무것도 안 하고 어디 가서 혼자 '이뭣고?'만 하고 백가지 일을 다 버리라는 게 아니야.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하되 그 속에서 화두 하나를 잡드리해 나가는데 전심전력을 다하라 이거거든.

"어떻게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서 공양주(供養主)를 열심히 하냐?"
"'이뭣고?'만 열심히 하다 보면 밥이 어떻게 되겠느냐? 밥할 때에는 밥을 정성을 쏟아야지 '이뭣고?'만 하고 있으면 밥이 죽이 되는지, 떡이 되는지, 되겠느냐?"
참, 어떤 수행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대단히 중요한 문제거든.

공양을 짓는데 전 정성을 거기다 쏟다보면 화두가 달아나 버리고, 화두를 열심히 들다 보면 밥이 다 타 버리거나 죽이 되거나 한다 그 말이여. 틀림없이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채소밭에 매는데 '요것이 채소냐, 요것이 잡초냐'를 봐 가지고 가려서 뽑아야지 '이뭣고?'만 열심히 하다 보면 뽑는 것이 채소는 뽑아 버리고 남는 것은 잡초만 남고 그렇다는 것이지.

설사 그런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 화두를 놓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화두 잘해서 확철대오하기 위해서 채소도 가꾸고 밥도 짓는데.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는 '밥이 타는 한이 있더라도 화두를 열심히 들어야 하냐?' '그렇더라도 화두는 조금 등한히 들더라도 밥할 때는 밥할 때 정신을 쏟아야 하지 않냐?'
이것은 그 사람 사람의 견해에 따라서 이것을 옳다고 주장할 수가 있고, 저것을 옳다고 주장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 내가 지금 여기에 사부대중이 다 모이셨는데 '밥이 타더라도 화두를 열심히 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분 손 한번 들어 보세요. 내리세요.
'화두는 좀 등한히 들더라도 밥을 잘해야지' 그렇게 생각하신 분 손들어 보세요.

그러면 이래도 손도 안 들고, 저래도 손도 안 들면 뭐여?(웃음)
그건 아마 '두 가지가 다 일리가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뭐라고 주장할 수가 없다' 그래서 손을 안 드신 분은 손 들어 봐요. 내리세요.

그런데 내가 한 예를 들겠는데, 자동차 운전을 하면 눈으로는 앞을 봐야 하고 또 앞에 걸린 거울로는 뒤를 봐야 하고, 양쪽 거울을 통해서 끊임없이 뒤도 살피고 앞도 봐야 하고,
손으로는 운전을 하고, 발로는 브레이크도 밟았다 악셀레이터도 밟았다 클러치도 밟았다 하고, 손은 요새는 뭐 노클러치가 있어서 아주 편리하게 어지간하면 다 달릴 수가 있는데.

두 손, 두 발, 눈, 그리고 귀도 항상 열어놓고 초비상으로 살펴야 하고, 코로도 이상한 냄새가 나면 그것도 '엔진에 무슨 문제가 있냐?' 코도 있어야 하고, 이목구비와 사지백체를 다 적절하게 다 활용을 해야지, 앞만 보고 가도 안 되고 뒤만 봐도 안 되고. 앞 보면서 뒤를 봐야지, 뒤 보면서 앞을 안 봐도 안 되거든. 그러니 이론상으로는 도저히 운전을 못 해 먹을 노릇이다 그 말이여.
그래도 처음에는 앞을 보면서 뒷이 잘 안 보여도 자꾸 연습을 하다 보면, 앞 보면서도 뒤도 보고 옆에 사람과 이야기하면서도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듣고, 할 것 다 하고, 한다 그 말이여.

그것을 입각해서 생각해 보면 화두 들면서도 밥을 잘 지을 수가 있어요. 또 밥을 잘 지으면서도 화두를 들을 수가 있는 거여.
처음에는 좀 어려울는지 모르지만 자꾸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신심과 분심으로 열심히 해 나가면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거여.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고.

밥도 자꾸 열심히 하다 보면—처음에는 자꾸 뚜껑을 열어 보고 싶거든. 밥이 다 퍼졌나 안 퍼졌나, 물이 아직도 있냐 없냐, 자꾸 열어 봐. 두 번 세 번 열어 보면 그 밥은 맛이 없어.
자꾸 하면 거기서 나오는 김이 위에로 올라오냐, 옆으로 피식 하고 나오느냐, 그 김 나오는 것만 봐도 물이 다 되었다, 아직도 물이 있다, 그걸 알 수 있는 거여.

문제는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이 문제지, 해보지도 않고 겉할뜨기로 이론만 가지고 될 것이냐? 안 될 것이냐? 그것 따지다 시간 다 가는 거여.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열심히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들면서도 한눈팔지 않고 정성으로 공양주를 하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열흘, 한 달, 두 달 하다 보면 밥도 잘되면서 화두도 터억 들리게 된 때가 오는 것이다 그 말이여.

해보지도 않고 조금 해보고서 주둥이만 까 가지고 이렇구 저렇구 따져 싸면 그거 안 되는 거거든.(30분54초~43분5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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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20. 10. 9. 20:03

화두(세등24)—화두는 이론으로써 교리적으로 따져서 해결할 수 없는 것 |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맞추는 참선은 죽은 참선이요, 의리선(義理禪)이요, 삿된 참선 | 공부가 안될 때가 한 걸음 공부가 나아가기 위한 중대한 지점에 도달한 것 | 이 공부는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문제.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7분 16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 (세등24)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 가운데에도 화두(話頭)를 어떻게 들어야 하느냐?

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 오직 그 한 점에 도업(道業)을 성취하고, 하지 못하고 한 관건(關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화두는 이론으로써 교리적으로 따져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는 아무리 따져봤자 결론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자기 나름대로 어떤 결론이 얻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 분별심으로 얻어진 것이라 아무리 묘한 답이 얻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욱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妄想)만 치성(熾盛)하게 만든 결과일 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따져서 알아맞추는 그러한 참선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참선이요, 의리선(義理禪)이요, 그것은 삿된 참선인 것입니다.

차라리 그러한 참선을 할 바에는 관세음보살 또는 아미타불을 열심히 염송(念誦)하는 것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뭣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판치생모(板齒生毛),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판치생모 화두를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를 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계신 분 가운데에는 조실 스님으로부터 판치생모 화두를 받으신 분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그분은 천하없는 누가 뭐라 해도 끝까지 그 판치생모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하셔야 할 것이고,

또 시삼마(是甚麽) ‘이 무엇고?’ 시삼마 화두를 하신 분은 시삼마 화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신 분은 정전백수자, 조주의 무자(無字) 화두를 하신 분은 조주 무자, 어느 화두를 하던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무자 화두가 더 좋고, 판치생모가 더 좋고, 시삼마가 더 좋고, 그 공안 자체에 있어서 더 좋고 나쁘고 한 것은 없습니다.

 

다못 문제는 자기가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철저히 믿어지는 선지식(善知識), 바로 깨달라서 선지식의 인가(印可)를 받은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그 화두를 받기만 했다면 천칠백 화두(千七百話頭) 가운데의 어느 화두를 타 가지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화두건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 들리는 화두는 없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잘 들린 듯하다가 얼마 안 가서 그렇게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애를 먹고 그러다가 그 고비를 잘 넘기면서 공부를 지어가면 또 한결 수월하게 되다가,

그렇게 수월하게 계속 잘되어 갔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얼마동안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고, 몸이 뒤틀리고 시간이 지루하고 도저히 앉어서 참을 수가 없고, 공부가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수 없을 만큼 그러한 역경계(逆境界)가 나타나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부에 마장(魔障)이 붙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분이 있지만, 대혜(大慧) 『서장(書狀)』에 보면 이러한 어려운 경계가 마장이 붙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한고비 올라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경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다가 그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머리가 멍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앉았을 수도 없고 섰을 수도 없고, 화두를 놓을 수도 없고 들 수도 없고, 이렇게 답답하고 어려운 경계에 도달하거든, 조금도 걱정을 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자포자기를 하지 말고,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내가 한 걸음 공부가 나아가기 위한 그러한 중대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고,

 

그런 때에는 가만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20미터나 30미터,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놓고서 왔다갔다 한 5분 내지 10분을 하면 저절로 머리가 시원해지고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또 자리에 가만히 와서 앉아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서 성성하게 그리고 적적(寂寂)하게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잘 그 마음을 써 가지고 지혜롭게 그 고비를 넘기면 그 다음에는 한결 공부가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없고, 오직 한 생각—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한—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오직 그 한 가지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13분31초~20분4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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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관건(關鍵 빗장 관/열쇠 건) ; 어떤 일의 성패나 추이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나 요인.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치성(熾盛 성할 치/성할 성) ; 불길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성하게 일어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염송(念誦 생각 염/욀 송) ;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불경(佛經)이나 진언(眞言) 등을 외움.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천칠백 화두 ;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 헤살 : 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대혜(大慧) 스님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 · 『대혜서(大慧書)』 · 『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한고비 ; 어떤 일의 진행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어려운 단계나 국면.

*'공부를 하다가 그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머리가 멍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앉았을 수도 없고 섰을 수도 없고, 화두를 놓을 수도 없고 들 수도 없고, 이렇게 답답하고 어려운 경계에 도달하거든, 조금도 걱정을 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자포자기를 하지 말고,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내가 한 걸음 공부가 나아가기 위한 그러한 중대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고' '공부가 안될 때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고비’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한 생각 단속 ; 일념단속(一念團束).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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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20. 5. 18. 19:11

화두(No.445)—세상이 온통 공안으로 가득차 있다 | 진짜 화두에서 대발심 | 전강 스님의 포구발심 | 이뭣고?(是甚麼)는 가장 최초의 화두, 가장 근원적인 화두 | 화두 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화두를 안 들기가 더 어렵다 | 참선은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과 「바르게 화두 드는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12분 4초)

 

[법문] 송담스님(No.445)—1991년 5월 첫째 일요법회 (용445)

 

앞으로 초파일이 지나고 또 4월 15일이 되면 하안거(夏安居), 여름 결제(結制)가 시작이 됩니다.

새로 계(戒)를 받을 행자(行者)나 또 앞으로 선방(禪房)에 가고자 하는 수좌(首座)들이 '화두(話頭)를 받어 가지고 그래가지고 선방에 가야겠다'

이런 분들이 있어서 법상(法床)에 올라온 기회를 타서, 선방에 여름 결제에 방부(房付)를 들이고자 한 보살님이나 또 선방에 가서 방부를 들이고자 한 스님네를 위해서 이 화두 드는 것에 대해서 간략히 설하고자 합니다.

 

이 화두(話頭)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화두요, 더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이 세상이 온통 공안(公案)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여.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냄새 맡을 때, 혀로 맛볼 때, 몸으로 차웁고 더운 것을 느낄 때 우리가 닥치는 모든 경계(境界)와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하나하나가 공안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처 일체시에서 낱낱이 그 자체가 공안 도리를 설하고 있는 것이어서, 새로 화두를 탄다고 하는 것은 부득이해서 방편(方便)으로 설하는 것이지,

정말 진짜 화두는 중생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닥치는 일—정든 가족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거기서 진짜 화두를 얻게 되며, 진짜 거기서 대발심(大發心)을 하게 되며, 거기서 대분심(大憤心)이 일어나게 되며, 거기서 대의단(大疑團)이 돈발(頓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 화두는 매(昧)할래야 매할 수가 없고, 잃어버릴라야 잃어버릴 수가 없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저절로 발심이요, 저절로 분심이요,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는 것이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그 어리신 나이에 다정한, 같이 글 배우고 같이 뛰어놀던 친구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바로 그것을 보고 발심을 하셨고,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꿈속에서 지옥고(地獄苦) 받는 광경을 보시고서 정말 포구발심(怖懼發心)을 하셔.

 

그 지옥고 받는 무서운, 인간의 그 생사고(生死苦)라고 하는 것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느끼시고 그래 가지고 출가하셔서, 누가 ‘선방 규칙을 잘 지켜라’ ‘묵언을 해라’ ‘말을 많이 하지 말어라’ 뭐 어째라 저째라 하는 그러한 자자꾸레한 그런 말이 전혀 필요가 없어. 저절로 대분발(大奮發)해 가지고 젊으신 나이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변에도 그만큼 발심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이웃에서, 우리나라 안에서, 나라 밖에서 날이면 날마다 무수한 사건들이 연거퍼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 건너 불처럼 ‘직접 내 일이 아니다’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 뭐 무심히 지나쳐 버리고, 내 일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지나쳐서 그렇지 사실은 알고 보면 참 기가 막힐 일이죠.

 

시삼마(是甚麼).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아버지의 피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 한 방울이 만나 가지고 이 몸을 받아 낳는데, 이 몸은 머지않아서 병들어서 늙어서 결국은 또 버리게 되는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이 있거든.

 

그놈이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성도 낼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욕심도 낼 줄도 알고, 착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고, 한 생각 돌이켜서 착하게 먹으면은 찰나간(刹那間)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같이 되기도 하고 천사와 같이 되기도 하는데,

한 생각 비뚤어지면은 찰나간에 악마가 될 수도 있어. 나찰(羅刹) 귀신이 될 수도 있고, 독사가 될 수도 있고. 한 생각 잘못 먹으면 음흉하기가 구렁이보다도 더 고약하게 될 수도 있다 그말이여.

 

그러한 놈을 우리가 낱낱이 다 가지고 있어. 대관절 그놈이 무엇인가?

이거 화두가 무엇인 줄도 모르고, 불법(佛法)이 무엇인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가만히 자기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거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시삼마 화두는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여. 화두를 새로 타기 전에 모두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참공안(本參公案)이여.

 

의심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거든. 이건 화두를 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화두를 안 들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그말이여.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몰랐으니 의심이 없을 수가 없고, 다못 올바르게 참구(參究)해 나가는 법만 몰랐지 이 시삼마 본참공안은 사람 사람이 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어.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그 참구하는 방법을 바로 알고 하면 공부하다가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고, 이걸 바르게 참구를 안 하면 이거 하다가 정신이 샐쭉해지기도 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착각을 하는 수가 있고, 이걸 참구를 잘못하면 상기병(上氣病)이 올라서 골이 뽀개질라 그러고 눈알이 빠질라 그러고 잘 안돼.

 

그래서 바르게 이 화두를 들어가는 법을 알고 공부를 해야 한다 그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대발심을 하시고 대분심이 나고 대의단이 한목 일어나 가지고 어떻게 무섭게 하셨던지, 다못 거문고 줄 고를 때에 너무 팽팽하게 해도 안되고 너무 느슨하게 해도 안되는 것인데, 어릴적 그 순수한 마음으로 너무 긴(緊)하게 급(急)하게 하셨기 때문에 상기병이 일어나셨다 그말이여.

그래서 눈알이 뻘겋게 충혈이 되고, 머리에 부스럼이 일어나 가지고 툭툭 터지고, 코에서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을 해나가는 데에는 앉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또 그런 상기병이라든지 그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아무리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더라도 상기병과 같은 그런 무서운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 호흡법,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 알아서 하고.

 

그런 가운데에 올바르게 화두를 잡드리해 나가는,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과 「화두를 바르게 들어가는」 이 세 가지를 잘 알아서 해나가는 것은 우리가 도업(道業)을 바르게 빠르게 그리고 크게 성취하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17분39초~29분4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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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열가지 병이 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매(昧)하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포구발심(怖懼發心 두려워할 포/두려워할 구/일어날 발/마음 심) : 끝없이 되풀이 되는 육도윤회(六途輪廻)에서 받을 생사(生死)가 정말 무섭구나. 그 생사의 고통을 매우 두려워[怖懼]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분발(奮發 떨칠 분/꽃이 핌·이룰 발) ; 마음과 힘을 다하여 기운을 내어 떨쳐 일어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세간(世間 : 이 세상, 미혹한 세계)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보살. 자비의 화신.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이 사용된다.

*요료법(尿療法) ; 요료법은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1분 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20. 5. 14. 18:44

화두(No.058)—참선, 깨달음은 일상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다 | 선지식의 지도 없이는 깨닫지 못한다 | 공안은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요, 나침반 | 물속에서 "물이 어디가 있느냐?"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21분 24초)

 

[법문]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용058)

 

오늘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는 동지에 대한 말씀과 또 참선, 참선법에 대한 말씀 그리고 불공(佛供)을 드리는 법에 관한 말씀, 그리고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印可) 받을 때에 법담(法談)하신 내용, 그리고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의 고양이 문답 법문,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정말 실참실오(實參實悟), 실다웁게 닦아서 실다웁게 깨달라야만 생사(生死)를 당적(當敵)하는 것이지 간혜(乾慧), 영리해서 이리저리 발라 맞추고 따져서 말 잘하고 그러한 재주 기운 가지고 생사는 면(免)할 수 없다고 하는 말씀으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참선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은 탁자(卓子) 위에 모셔 놓은 부처님, 또는 삼천년 전에 정반왕에 탄생하셨다가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신 싯다르타(siddhartha), 석가모니 그 부처님만이 부처님인 줄 알고.

바로 지금 산승(山僧)은 말을 하고 있고, 여러분은 지금 산승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듣고 있는 그놈, 그놈을 여의고는 '참 부처님'은 안 계신 것입니다. 그놈을 항시 놓치지 말고 그놈에서 자기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놈이 있길래 눈을 통해서 볼 수 있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입을 통해서 말하고 음식을 먹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문을 열매 뜰에는 나무가 섰다. 그 나무를 봄으로 해서 그 나무를 통해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그것이 견성(見性)이라' 하셨습니다.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하 없는 모든 일은 다 할 수가 있어도 한 가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나의 몸으로부터서 부처님을 밖으로 내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만 번 뛰었다 엎쳤다 온갖 짓을 다하고 한다 하더라도 나로부터서 나의 부처님을 밖으로 내몰 수가 없어요.

 

오히려 그 부처님을 안 볼려고 하고 내몰려고 할수록 나의 부처님은 더욱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나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너무 분명하고 가깝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가 아닌 줄 알고 그놈을 내놓고 찾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나의 자성(自性)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뜰 앞에 있는 나무, 누가 못 보는 것입니까?

누구라도 장님이 아닌 도막에는 문을 열면은 뜰 앞에 있는, 뜰에 있는 나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무만 보고, 나무(나)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너무 평범한 것은 우리는 그것이 위대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국왕의 은혜, 국가 민족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다 우리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갚을려고 해도 갚기가 어렵지마는 정말 고마운 것은 공기(空氣)라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무의식중(無意識中)에도 언제라도 우리는 제절로 이 공기가 우리 코를 통해서 드나들고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탄광, 장성에서 탄광에 화재가 나가지고 이번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마는, 그러한 일을 당해 봐야 공기가 맑은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없을 때에는 공기가 얼마나 우리에게 고마움을 주고 있는가를 아무도 느끼지를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 것—언제나 나의 부처, 나의 성품, 나의 마음자리는 이 몸으로부터 조금도 떠나 있지를 않습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입으로 말하고 음식을 먹을 때, 발로 걸어 다닐 때, 울고 웃고 성낼 때 바로 그곳에 '나'가 있건만, 어째서 내가 나를 보지를 못해?

이것은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설명을 들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만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이 무엇이냐?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그동안에 책을 보거나 법문을 듣거나 해서 알고 있는 불교의 모든 지식, 상식, 교리 그러한 것을 고대로 놔버리고 다못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 「이 무엇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각기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그 화두가 같은 분도 있고 다른 분도 계시겠지마는, 다른 분이야 무슨 화두를 받았건 말았건 자기가 받은 그 화두 그것을 이론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저 바보처럼,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는 사람은 길이 빠른 것이고,

영리하고 똑똑해서 자꾸 이리저리 그것을 사량복탁(思量卜度), 중생심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파고들고 비교하고 이러는 동안에 점점 시간만 굴러가고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나쁜 버릇만 자꾸 생겨 가지고 길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동이 소를 끌어다가 맑은 시냇물에다가 끌고 가서 대주면 그저 소는 꿀꺽꿀꺽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듯이 선지식이 '이렇게 하라'하면은 그렇게만 바보처럼 고지식하게 계속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한결같이 그렇게 들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바보처럼 그렇게 하는 사람은 빨리 그리고 크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고, 그 말을 믿지 못해서 그 말이 아무래도 곧이가 들리지 않아서 이 책도 떠들어 보고 저 책도 떠들어 보고, 이리도 따져 보고 저리도 따져 보고 갈팡질팡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뭐 좋은 말이라도 한마디 더 듣고 싶어서 갈팡질팡하면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10년 20년 세월이 속절없이 지내가고 남는 것은 지해(知解), 사량심(思量心)만 더해 가지고 생사를 면하기는 썩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세지총명(世智總眀)은 득도(得道)하기가 어렵다'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말한 영리하고 지능지수가 높고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은 이 정법,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하기가 썩 어렵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선지식들도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서 불보살(佛菩薩)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해도 깨닫자 생각지도 아니하고, 나찰귀신이 와서 죽인다고 해도 두려워할 줄도 모른, 콱! 맥힌 아주 쑥맥 바보가 된다면은 내가 이 자리에서 당장 너에게 생사해탈(生死解脫) 했다고 인가를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도 계시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은 이론을 통해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내고 슬퍼하고 걸어 다니고 하는 이놈. 분명히 눈으로 볼 줄도 알고 귀로 들을 줄도 알건마는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찾아보면 간 곳이 없어. 「이놈이 대관절 무엇인고?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걸어갈 때에도 「이뭣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뭣고?」

기쁜 일을 당했을 때도 「이뭣고?」

산을 보아도 「이뭣고?」

기차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다못 그렇게 일념 일념을 단속해 나가. 1초 1초를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면 결국은 「이뭣고?」를 할려고 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시 눈앞에 나타나게.

이렇게 해서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못 가서 반드시 확철대오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 "깨닫기 전에도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하에 화두를 타서 정진을 해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서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지도를 또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스승 없이 독학할 수도 있고 자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참선은 여러 가지 경전을 사다 놓고, 조사어록을 사다 놓고, 참선에 관한 일본 서적 · 한국 서적 · 중국 서적을 사다 놓고 혼자 이 책 저 책을 읽어 가면서 혼자 자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 명 만 명 속에도 제대로 공부가 되질 못하는 것이고, 만 명 가운데 한 사람도 깨달은 사람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는 몰라도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 없이 깨달은 사람은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위음왕불은 부처님 가운데에 최초의 부처님이십니다.

땅속에서 땅을 파 가지고 금을 찾는다든지, 바닷속을 뒤져 가지고 보석을 찾는다든지 하는 것은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혹 눈에 띄기도 하겠지마는,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은 것은 스승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언제나 나와 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찾으면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것은 화두를 항시 의심을 해서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이지마는, 정말 바로 말하자면 찾음으로 해서 자기를 잃게 되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되 선지식의 지도에 의해서 찾아야만, 찾음으로써 잃어버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떠억 앉아서 물을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물속에 풍덩 주저앉아 가지고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는 거와 같은 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 공안은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요, 천칠백 화두라 합니다마는 그 공안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열쇠요, 나침반입니다.

그러나 무슨 소견이 났을 때에는 그 공안은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냐?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냐?'를 시험해 보기 위한 좋은 시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랐다'할 때에 그 사람에게 공안을 하나 턱 물어보면은 그 공안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떠한 표정을 짓느냐?

입 벌리기 전에 벌써 '저 사람은 바로 본 사람이다. 바로 못 본 사람이다.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하는 것을 입 벌리기 전에 선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마는 짐짓 입을 벌리게 해 보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 봤자, 입 벌리기 전에 알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물속에—묻는 사람도 물속에 떠억 앉았고, 깨달랐다고 온 사람도 물속에 같이 들어앉아서 "어떤 것이 물이냐? 물이 어디가 있느냐?"하고 물어본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앉은 줄을 모르고 물을 찾기 위해서 위로 아래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벌써 그 사람 '아! 이 사람이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일체 공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벌써 찾으면 저 죽는 것이고, 찾으면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깨닫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물쇠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하는 것을 깊이 인식을 하시고,

화두를 공부하다가 조금 잘 들리지 아니하고, 의심이 잘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화두가 나빠서 그런가 보다'해 가지고 이 화두, 저 화두 이렇게 화두를 바꿀려고 쌌거나 그래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곧 그렇게 하면은 곧 잘될 것 같지마는 얼마 해 가다 보면은 아무리 해도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마음의 눈 박을 곳을 얻지를 못한 채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몸이 뒤틀리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영 이것이 공부가 되는 것인지 안되는 것인지 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다못 무조건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 해 나감으로 해서 언젠가는 차츰차츰 번뇌와 망상은 이 알 수 없는 의심 앞에 굴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 줄어지면서 화두 들어지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좋아하지도 말고, 또 화두가 잘 안 들린다고 해서 짜증을 내거나 번뇌심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심한 분은 '아휴, 내가 참선은 내가 인연이 없나 보다' '나는 나이가 먹고, 여자고, 말세중생이라 참선은 안되나 보다' 이래 해 가지고 다시 염불을 한다든지.

'내가 업장(業障)이 많으니까 기도를 해 갖고 업장을 소멸한 다음에 해야겠다' 이래 가지고 선방에서 몇 철씩 하다가도 기도하러 돌아다니고 이런 분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공부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 보다는 영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잘 안될 때, 그때가 한 계단 공부가 올라서려는 그러한 고비에서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잘 고비를 넘겨야만,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잘 넘겨야만 공부가 한층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8분52초~30분1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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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 ; 전강 조실 스님이 수행하시던 1920년대 당시 유명한 혜월 · 혜봉 · 한암 · 용성 · 보월 · 만공 선사를 말씀하신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법담(法談 부처의 가르침 법/말씀·말할 담) ; 불교의 도리에 관하여 나누는 이야기. 또는 그러한 설법(說法). 선사(禪師)들이 본분(本分 : 근본 깨달음 本覺)에 대하여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 법화(法話)와 같은 말.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의 고양이 문답 법문' ; 남전참묘(南泉斬猫) 공안.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207칙. 「참묘(斬猫)」 『선문염송 · 염송설화 7』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

(古則) 南泉一日因東西堂 爭猫兒 師遂提起云 大衆 道得則救取 道不得卽斬却也 衆無對 師斬爲兩段 復擧前話 問趙州 州便脫草鞋 於頭上戴出 師云子若在 恰救得猫兒

 

남전(南泉)이 어느 날,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에서 고양이 때문에 싸우자, 고양이를 번쩍 쳐들고는 말하였다. "대중들이여, 말하면 살릴 것이요, 말하지 못하면 베리라"

그러자 대중에서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에 선사가 두 동강 내었다.

 

나중에 이 일을 들어 조주(趙州)에게 물으니, 조주가 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니,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실참실오(實參實悟)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깨달음.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실참(實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무잡(純一無雜)할 수가 없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참고]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서답(書答)」 ‘답노상서(答盧尙書 노상서에게 답함)’에서.

所以古德云 路途之樂 終未到家 見解入微 不名見道 參須實參 悟須實悟 閰羅大王 不怕多語 若要實參實悟 須是從前坐禪處得底 經敎上得底 古人語錄上得底 宗師口頭下得底 有滋味寶悟處 一時掃向他方世界 好字細看

 

그러므로 옛 스님은 ‘길의 즐거움은 종내 집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보고 알아 미세한 데 들어가는 것은 도를 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참구는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염라대왕은 많은 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알차게 참구하여 진실로 깨달고자 하면, 종전에 좌선(坐禪)해서 얻은 것과 경전에서 얻은 것과 고인의 어록에서 얻은 것과 종사의 입을 통해 얻은 것 등에서 자미(滋味)있고 소중히 여긴 깨달았던 경계를, 한꺼번에 다른 세계에 쓸어 버리고 자세하게 살펴야 좋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참고]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상권 ‘흥성사입원소설(興聖寺入院小說)’에서.

若也眞實參學者 參須實參 悟須實悟 始得 且作麽生是實參實悟耶 於二六時中 四威儀內 以生死大事爲念 離心意識 參出凡聖路 學以無心無爲 綿密養之 常常無念 常常不昧 了無依倚 到冥然地 自然合道 不見古人云 無心方見本來人

 

만약 진실한 참학자(參學者)라면 참구는 반드시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한 참구이며 진실한 깨달음인가?

하루 열두 시간과 사위의(四威儀) 가운데서 생사의 큰 일을 생각하되, 심의식(心意識)을 떠나 참구하여 범성(凡聖)의 길을 벗어나고 무심(無心)과 무위(無爲)를 배우고 그것을 면밀히 길러 언제나 무념(無念)하고 항상 어둡지 않아, 마침내 기댈 곳이 다 사라지고 명연(冥然)한 자리에 이르면 자연히 도에 합할 것이다. 고인이 ‘무심(無心)이어야 비로소 본래인(本來人)을 본다’라는 말을 모르는가?

 

*당적(當敵 막다·지킴 당/원수·적·상대 적) ; 대적(對敵)해 능히 감당(堪當)함.

*간혜(乾慧) : 비록 깨쳐서 지혜가 났더라도, 정(定)의 힘이 충실하지 못하면 그것은 마른 지혜라고 한다. 마른 지혜는 죽고 나는 이치를 알더라도, 나고 죽는 데 마음대로 자유자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乾 = 하늘 건, 마를 간)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평상화(平常話) ; ①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②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이야기[話]. 일상생활 이야기. 일상생활.

[참고 ❶]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참선(參禪)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10분2초~11분29초)

 

[참고 ❷]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군금욕심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처음~5분6초)

 

*소지 ; '소제(掃除, 청소淸掃)'의 사투리.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일찰나(一刹那) ; 극히 짧은 순간.

*탁자(卓子) ; ①물건을 올려놓기 위하여 책상 모양으로 만든 가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 ②불상(佛像) 앞에 붙박이로 만들어 두고, 공양물(供養物) · 다기(茶器) 따위를 차려 놓는 상.

*싯다르타(siddhartha) ;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출가하기 전 태자(太子) 때의 이름. 실다(悉多) · 실달다(悉達多) · 실달(悉達)이라고도 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 Śākya-muni (팔리어) 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문을 열매 뜰에는 나무가 섰다. 그 나무를 봄으로 해서 그 나무를 통해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그것이 견성(見性)이라' 하셨습니다.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421칙. 「백수(栢樹)」 『선문염송 · 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51~252.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僧云和尙莫將境示人 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조주(趙州)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선사가 말하였다. "나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노라"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부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도막 ; ①짧고 작은 동강. ②'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사량복탁(思量卜度)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해(知解) ; 상량(商量). 알음알이.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쑥맥 ; '숙맥(菽麥)'의 비표준어.

*숙맥(菽麥 콩 숙/보리 맥) ; ①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의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나온 말로 사리 분별을 못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이르는 말. ②콩과 보리.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소치(所致 것·바 소/이르다·도달하다 치) ; (주로 '~의 소치'의 구성으로 쓰여) 어떠한 까닭으로 일어난[致] 바[所]. 어떤 까닭으로 생긴 일.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사실은 공부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보다는 영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잘 안될 때, 그때가 한 계단 공부가 올라서려는 그러한 고비에서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잘 고비를 넘겨야만,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잘 넘겨야만 공부가 한층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 '공부가 안될 때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고비’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20. 3. 10. 11:26

화두(No.345)—(게송)因能生所所生能 ~ / 한마디 화두 속에 팔만대장경이 들어있고,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설법을 하고 계신 것 / (게송)塵勞逈脫事非常~.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12분 57초)

 

[법문] 송담스님(No.345)—1988년 1월 첫째일요법회(88.01.03) (용345)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하고  능소구망생불생(能所俱忘生不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노방흡진경해수(老蚌吸盡鯨海水)여  산호지상월삼경(珊瑚枝上月三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이다. 능(能)을 인연해서 소(所)가 생겨나. 능(能)은 주관을 말한 것이고, 소(所)는 객관을 말한 것이여. 주관으로 인해서 모든 객관이 생겨난 것이여.

소생능(所生能)이다. 또 그 객관으로 인해서 또 능(能)이 주관이 움직이게 된다. 능(能)과 소(所)는 서로 상관관계에 있어.

 

능소구망(能所俱忘)에 생불생(生不生)이다. 능(能)과 소(所), 주관과 객관이 함께 주관과 객관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것이 없어지게 되면 생불생(生不生)이다. 생(生)하되 생(生)이 아니다.

 

화두(話頭)를 들어서 처음에부터 잘되는 사람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무량겁을 두고 우리가 익혀온 것이 주관과 객관 속에 서로 굴림을 받고 얽히고설켜서 육도(六途)를 돌고 돌아온 것인데, 어떻게 처음부터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꾸 한곳을 향해서 끈질기게 도전을 하면, 계속해서 또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안될수록에 더욱 열심히 하고, 되어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 내지 말고, 안되아도 안된다고 짜증을 내지 말고서 더욱 신심(信心)을 내고 더욱 인내심과 지혜심으로써, 신심으로부터서 신심으로 계속해서 해 나가면 어느 날 그렇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들어지지 않던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턱! 들리게 된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망상(妄想)을 물리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끊어지고,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와. 그것이 능소(能所)가 구망(俱忘)이거든.

그러면 생불생(生不生)이여. 눈으로 하늘을 보되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산을 보되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땅을 보되 땅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은 바가 없어. 밥 맛을 몰라. 밥이 된지 진지, 반찬이 짠지 싱거운지도 모르고, 그렇게 순일무잡하게 공부가 되아 가는 것입니다.

 

노방흡진경해수(老蚌吸盡鯨海水)여. 늙은 조개가 저 고래가 살고 있는 그 넓고 넓은 바다의 물을 다 둘러 마셔.

마셔 버리면은 산호지상(珊瑚枝上)에 월삼경(月三更)이다. 저 바다 밑바닥에 있던 그 산호가 빠알간 산호 가지에 휘황찬 삼경(三更) 달이 찬란히 빛날 것이다.

 

오늘 조개! 조개가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다가 작대기에 꽂혀서 죽어 가지고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가 한량없는 복을 받다가, 자기가 복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러 내려와서 그리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수다원과(須陀洹果), 소승사과(小乘四果)에 첫째 번 과(果)가 바로 이 수다원과인데, 이 성과(聖果)를 받은 설화를 했습니다마는.

 

이 늙은 조개가 상식적으로 어떻게 그 넓고 넓은 그 깊은 바닷물을 다 둘러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이 '이뭣고?'

천하에 맛도 없고 뜻도 없는 이 재미도 없는 이 한마디 화두가 무량겁 쌓이고 쌓인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벌어진 그 많은 업(業)을 다 소멸을 하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끊어 버리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 소견으로는 까마득하게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이뭣고?' 한마디는—'이뭣고?' 한마디 속에 바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바로 이 한마디 화두 속에 살아 계셔서 설법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어떠한 재난과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이 한마디 화두를 턱! 거각할 때에 바로 삼세제불을 거기에서 친견(親見)하고 역대조사를 거기에서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큰 소원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지장보살을 불러라, 아미타불을 불러라' 또는 '고왕경을 읽어라' 또는 '금강경을 읽어라' 이러한 방편(方便)을 설해 드리기도 합니다마는,

그러한 혹 하고 많은 방편이 다 뭉친들 다 합한들 어찌 이 한마디의 화두! 공안에다 댈 수야 있겠습니까?

 

어쨌든지 이 한마디에 목숨을 걸고 우리가 목숨 다할 때까지 가능하면 금생에 결정코, 금생 아니라 무량겁을 두고도 이 한마디로써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리라.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은 내가 문제삼을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오직 목숨 바쳐서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이것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외골수로 나가고,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듯이 외골수로 오직 이것 하나만을 향해서 전부를 바칠 때에 우리는 그 늙은 조개가 그 대해수(大海水)를 둘러 마시듯이 우리는 결정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적은 일이 아니여.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긴히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바탕 그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강추위 한 뒤끝에 매화가 피어야만 그 매화꽃 향기가 진동하는 법입니다.

정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말 알뜰히 정진해야만 고인전지(古人田地), 고인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60분47초~1시간13분4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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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인능생소구생능~’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境由能境 能由境能’ p110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삼경(三更 석 삼/밤 시각 경)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이다.

*'오늘 조개! 조개가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다가 작대기에 꽂혀서 죽어 가지고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가 한량없는 복을 받다가, 자기가 복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러 내려와서 그리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수다원과(須陀洹果), 소승사과(小乘四果)에 첫째 번 과(果)가 바로 이 수다원과인데, 이 성과(聖果)를 받은 설화를 했습니다마는'

[참고]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제4권.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 한역(漢譯) | 동국역경원.

 

물었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하늘과 사람들만의 스승이요, 축생의 스승은 아닙니까? 옛날 여래가 세상에 계시면서도 축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하늘과 사람들만의 스승이라 합니까?"

 

수다라경(修多羅經)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부처님은 첨파국(瞻婆國)에 계시면서 가라(迦羅) 못가에서 첨파국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는데 이때 못 안에 무명조개[蛤 대합조개] 하나가 부처님의 설법하신 소리를 듣고는 기뻐하여 곧 못에서 나와 풀뿌리 아래에 들어갔습니다.

 

이때에 어떤 한 소를 치는 사람[牧牛人]은 대중들이 둘러서서 부처님 설법을 듣고 있음을 보고는 부처님에게 가서 법을 들으려고 하여 지팡이로 땅을 찌른 것이 무명조개 머리에 잘못 닿았습니다. 무명조개는 곧 목숨이 끊어져서 도리천에 나아 도리천왕이 되었으니, 그 복의 과보 때문이었습니다. 궁전의 세로와 너비는 바로 12유순이었습니다.

이에 무명조개 천인은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기녀들의 오락 소리를 보고 깨달은 뒤에 곧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앞서 축생이었는데 무슨 인연 때문에 이 하늘 궁전에 태어났을까?'

곧 하늘 눈[天眼]으로 자세히 살피니, 앞서 못가에 부처님 설법을 들은 이 공덕 때문에 이 과보를 얻었기에 무명조개 천인은 곧 궁전을 타고 부처님에게 가서 닿아 땅에 엎드려 발아래 예배하였습니다.

 

問曰 佛何以獨爲天人師 不爲畜生師耶 昔如來在世亦爲畜生說法 何以獨稱爲天人師

修多羅經說 爾時佛在瞻婆國 於迦羅池邊 爲瞻婆人說法 是時池中有一蛤 聞佛說法聲歡喜 卽從池出入草根下 是時有一牧牛人 見大衆圍遶聽佛說法 卽往到佛所 欲聞法故以杖刺地 誤著蛤頭 蛤卽命終生忉利天 爲忉利天王 以其福報故 宮殿縱廣正十二由旬

於是蛤天人 霍然而悟 見諸妓女娛樂音聲 悟已尋卽思惟 我先爲畜生 何因緣故生此天宮 卽以天眼觀 先於池邊聽佛說法 以此功德得此果報 蛤天人卽乘宮殿 往至佛所頭頂禮足

 

부처님은 아시면서 일부러 '너는 어떤 사람인데 갑자기 나의 발에 예배하고 신통ㆍ광명ㆍ상호가 견줄 데 없이 여기를 환히 비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무명조개 천인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옛날에 무명조개 몸이 되어

물속에서 먹이를 찾다가

부처님의 설법하신 소리 듣고

나와서 풀뿌리 밑에 있었습니다.

 

어떤 소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팡이를 가져와서 법을 듣다가

지팡이로 저의 머리를 찔렀으므로

목숨을 마쳐서 천상에 났습니다.

 

부처님은 무명조개 천인이 말한 게송으로 사부대중을 위하여 설법하셨습니다. 이때에 대중 가운데 팔만사천 인은 다 불도의 자취를 얻었고, 무명조개 천인은 수다원 과위를 얻었습니다. 이에 무명조개 천인이 도의 과위를 얻고 기뻐하며 웃음을 머금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천인사라 합니다.

 

佛知故問 汝是何人 忽禮我足 神通光明相好無比 照徹此間

蛤天人以偈而答 往昔爲蛤身 於水中覓食 聞佛說法聲 出至草根下 有一牧牛人 持杖來聽法 杖攙刺我頭 命終生天上

佛以蛤天人所說偈 爲四衆說法 是時衆中八萬四千人 皆得道跡 蛤天人得須陀洹果 於是蛤天人得道果已 歡喜含笑而去 故稱爲天人師

 

[참고] 『법원주림(法苑珠林)』 제17권 「제7 경법편(敬法篇)」 ’제3 청법부(聽法部)‘ 서명사(西明寺) 사문(沙門) 석도세(釋道世) 지음 | 동국역경원.

 

『선견율론(善見律論)』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첨바라국(瞻婆羅國)의 가라못[迦羅池] 가에 가서 대중을 위해 설법하셨다. 그때 못에 있던 대합조개 한 마리가 부처님께서 못가에서 설법하시는 소리를 듣고 못에서 나와 풀 속으로 들어가 법을 듣고 있었다.

그때 또 어떤 사람이 지팡이를 들고 소를 놓아 먹이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께서 앉아 대중을 위해 설법하시는 것을 보고 곧 부처님에게로 나아가 설법을 들으려고 지팡이를 땅에 꽂다가 잘못해 조개의 머리를 찔렀다. 조개는 곧 그 자리에서 죽어 도리천에 났다. 그 복의 과보로 그 궁전의 가로 세로가 12유순이 되었다. 그는 여러 천녀들과 향락하다가, 곧 궁전을 타고 부처님께로 가서 부처님 발에 예배했다.

 

善見律論云 昔佛在世時 到瞻婆羅國迦羅池邊 爲衆說法 時彼池中有其一蛤 聞佛池邊說法之聲 卽從池出 入草根下 聽佛說法 時有一人持杖放牛 見佛在坐爲衆說法 卽往佛所 欲聞法故 以杖刺地誤著蛤頭 卽便命終 生忉利天 以福報故 宮殿縱廣十二由旬 與諸天女 娛樂受樂 卽乘宮殿 往至佛所 頭頂禮足

 

부처님께서는 아시면서 짐짓 물으셨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갑자기 와서 내 발에 예배하며 신통과 광명과 상호가 비할 데 없어 이 세간을 환히 비추느냐?"

조개였던 하늘 사람은 게송으로 대답했다.

 

저는 지난 세상에 대합조개로서

물 속에서 먹이 찾고 살다가

부처님 설법하는 소리를 듣고

못에서 나와 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를 먹이는 어떤 사람이

지팡이 들고 법을 들었는데

지팡이 꽂다 저의 머리 찔러

저는 죽어서 천상에 났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조개였던 하늘 사람의 게송으로 사중(四衆)을 위해 설법하셨다. 그때 대중 가운데 팔만사천 인은 다 도의 자취를 보았으며, 그 조개였던 하늘 사람은 수다원과(須陁洹果)를 얻어 합장하고 떠났다.

 

佛知故問 汝是何人 忽禮我足 神通光明相好無比照徹此間

蛤天人以偈而答 往昔爲蛤身 於水中覓食 聞佛說法聲 出至草根下 有一牧牛人 持杖來聽法 杖劖刺我頭 命終生天上

佛以蛤天人所說偈 爲四衆說法 是時衆中八萬四千人 皆得道跡 蛤天人得須陀洹果 合掌而去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도리천(忉利天) ; 욕계에 있는 육욕천(六欲天)의 하나. 도리(忉利)는 33이라는 뜻, 천(天)은 신(神)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 33신(神)들이 사는 곳.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이 수미산인데, 이 수미산 정상에 있으며, 중앙에 왕인 제석(帝釋)이 있고 사방의 봉우리에 각각 8신(神)이 있어 33신.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수다원(須陀洹) ; 산스크리트어 srota-āpanna 팔리어 sota-āpanna의 음사(音寫). 예류(預流) · 입류(入流)라고 번역.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은 성자. 깨달음의 길을 하천의 흐름에 비유하여 그 흐름—처음으로 성자의 계열에 들었으므로 예류 · 입류라고 함.

이 경지를 수다원과(須陀洹果) · 예류과(預流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수다원향(須陀洹向) · 예류향(預流向)이라 함.

초기불교에서 - 성문(聲聞)으로서 - 해탈하는 길은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하여,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陀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의 4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견혹(見惑) ; ①사제(四諦)를 명료하게 주시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 번뇌에는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견(見取見) · 계급취견(戒禁取見) · 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가 있음. 

② 유식설에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그릇된 지식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 곧 분별기(分別起)를 말함.

*소승사과(小乘四果) ; 성문사과(聲門四果).

*사향사과(四向四果) ;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 네 단계의 수행목표[向]와 그 도달경지[果]를 가리키는 말.

수다원(須陀洹 : 預流), 사다함(斯陀含 : 一來), 아나함(阿那含 : 不還), 아라한(阿羅漢 : 無學道)의 넷에 각각 향(向)과 과(果)를 배정하여 「수다원향 · 수다원과」 「사다함향 · 사다함과」 「아나함향 · 아나함과」 「아라한향 · 아라한과」의 여덟이 된다.

 

수다원향은 일체의 견혹(見惑 : 이론적인 번뇌)을 끊으며, 사다함향 · 아나함향에 의해 일체의 욕계(欲界)의 사혹(思惑 : 情意에 의한 습관적 번뇌)을 끊고, 아라한향에서는 삼계(三界 : 欲界 ·色界 ·無色界)의 사혹을 끊는다. 따라서 삼계의 일체의 견혹 · 사혹의 번뇌가 모두 끊어지면, 이 때에 아라한과(阿羅漢果)가 달성된다.

 

아라한과는 이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도(無學道 아라한)라고도 하며, 그 이전의 일곱은 아직도 상위(上位)가 있어서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경지이므로 칠종유학(七種有學)이라고 한다.

예류(預流 수다원)에서 불환(不還 아나함)까지는 개울의 흐름이나 외갈래길로 상정(想定)하여, 흐름을 타고 있는 자가 예류(預流 수다원), 한 번 뒤로 돌아갈 상태에 있는 자가 일래(一來 사다함), 다시 되돌아가는 일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상태를 불환(不還 아나함)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과(聖果) ; 성자(聖者)의 지위. 성인(聖人)의 도달경지[果].

성자, 성인이란 무루혜(無漏慧, 번뇌를 끊어내는[無漏] 지혜[慧])의 일부를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도(聖道, 성스러운 길, 성인의 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말한다.

수도(修道), 성도(聖道)는 부파불교의 사향사과(四向四果), 대승불교의 보살십지(菩薩十地)를 말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외골수 ; 외곬. ①단 한곳으로만 트인 길. ②단 한 가지의 방법이나 방향.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고인전지(古人田地) ; 고인의 경지(境地). 고인의 깨달음.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19. 8. 29. 16:13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1) 16분 42초.

(2) 8분 34초.

 

[법문] 송담스님(No.122)—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용122)

 

(1)------------------

 

그리고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공안 · 화두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안(公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이 가운데에는 처음 나오신 분도 있고 학생들도 있고 그래서 이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공안은 화두라고도 하는데, 공안이라 하는 것은 공립학교라 해서 공(公)자 하고, 안건이라서 안(案)자인데, 공안이라 한 말은 '관가의 법률'이라 이런 말입니다.

관청에서는 모든 것을 그 법규에 따라서 모든 사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문제가 일어나면 즉각 그 법규에 비추어 봐가지고 그 법규에 있는 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도,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이 공안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 것입니다.

 

우리의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그 공안을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그 공안을 참구(參究)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공안(公案) ·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일종에 수수께끼와 비슷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수수께끼라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온갖 상식 · 지식 이걸 총동원해 가지고 그 수수께끼를 이리 풀어보고, 저리 풀어 보고 그래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 보고 해 가지고 '아! 이것이다'하고 알아맞추는 것이 바로 이 수수께끼입니다.

 

수수께끼, 우리가 일반적으로 친구끼리 모이면 수수께끼를 하는 수수께끼도 그 자못 아주 쉬운 것으로부터 재미있는 것 그리고 깊은 뜻을 담은 그런 수수께끼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수수께끼는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인데.

 

유리병이 하나가 있는데, 유리병 주둥이는 좁고, 밑으로 내려가면서 툭 퍼져가지고 퍼진 그러한 병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오리를 새끼 때 그 병 주둥이를 통해서 병 속에다 담았습니다.

새끼 때는 몸집이 작으니까 그 좁은 주둥이로 오리 새끼를 넣을 수가 있었는데, 넣어 가지고 매일 먹을 것을 먹이를 주었습니다. 물도 주고 먹이를 주어서 그 오리가 차츰차츰 자라 가지고 그 큰 병에서 애미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오리를, 오리도 상하지 아니하고 또 그 병도 깨뜨리지 않고서 그 오리를 밖으로 꺼낼 수가 있느냐? 이것도 공안 가운데에 하나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도 이것을 두고두고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병도 깨지 아니하고 오리도 다치지 않게, 터럭 하나도 상하지 않게 그 오리를 병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걸 꺼낼 수가 있을꼬?' 걸어가면서도 그것을 참구하고, 앉어서도 그것을 참구하고, 차를 타고 갈 때도 그것을 참구하고, 여러 가지로 참구를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병을 무슨 열을 높여 가지고 그 유리병이 물렁물렁하게 만들아서 주둥이를 넓혀 가지고 꺼낸다든지, 그러한 생각들은 벌써 이론을 사용한 것이여. 이론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이론을 사용한 동안에는 바른 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론을 사용하지 말고 '다못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올 수가 있을까? 아! 저렇게 하면 나올 수가 있을까? 무슨 기합술로 탁 뻐개서 얼른 꺼낸 다음에 딱 붙일 수가 없을까?'

그러한 생각들을 가지고는 아무리 해 봤자 오리는 꺼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론을 사용했다 하면 절대로 꺼낼 수가 없습니다.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한 방법으로 참구를 해야 해.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꼬?' 다못 이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야만,

오늘도 그렇게 참구하고, 내일도 그렇게 참구하고, 모레도 그렇게 참구하고, 앉어서도 그렇게 참구하고, 속이 상할 때도—어른한테 걱정을 들어가지고 확! 속이 상할 때도 딱! 그 생각을 돌려서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일체처 일체시,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이렇게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처음에는 깜박 무엇을 보는 순간에 이 공안에 대한 참구를 잊어버리고, 또 무엇을 들은 순간에 깜빡 잊어버리지만, 잊어버렸다 하면 퍼뜩 돌이켜서 '어떻게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돌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잊어버리는 시간이 많다가, 차츰차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잊어버린 시간은 차츰차츰 줄어지고 이 화두를 참구하는 시간은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하려고 안 해도 항시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꼬?' 이렇게 저절로 참구가 되어지게 된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부가 익숙해진 증거인 것입니다.

 

수수께끼,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 바로 이것이 화두라 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이 무엇고? 시삼마(是甚麼)?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뭐꼬?'

 

자동차에는 운전사가 있어서 자동차를 운전을 하면 앞으로도 갔다 뒤로도 갔다, 왼쪽으로도 돌리고 오른쪽으로 돌리고, 빨리도 가고 천천히도 가고 또 정지도 하고 자유자재로 합니다.

그건 겉에서 보기에는 차가 그렇게 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지로 속을 알면 차가 지멋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 운전사의 조종에 의해서 차는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뚱이, 이 육체도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입으로 말하고 밥을 먹는 것, 손으로 움직여서 일하고 발로 걸어 다니는 것, 앉고 서고 눕고 하는 것이 이것이 몸뚱이가 지멋대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몸뚱이를 조종하는 운전사가 우리의 몸 안에 있습니다. 그 운전사의 조종에 의해서 이 몸뚱이는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에 오셨지만 여러분의 발이 지멋대로 여기를 오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운전하고 있는 주인공이 '오늘은 용화사에 가자' 거기서 결정을 내려가지고 명령을 하기 때문에 이 몸뚱이는 차도 타고 발로 걷기도 하고 해서 여기를 오시게 된 것입니다.

 

'아니여,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고 아내가 자꾸 가자고 해싸서 내가 따라왔다. 그것은 아내가 그러면 나의 주인공이냐?' 그러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지만, 아내가 백번을 졸랐다 하더라도 결국은 최종 결재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아내가 별소리 해 봤자 자기의 주인이 결재를 아니하면 여기는 오시지를 않고 어디 등산하실 수도 있고, 낚시터에 가실 수도 있고, 친구와 술을 마시러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몸뚱이의 주인은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대관절 그놈이 무엇이냐?

보통 '그게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그런 정도는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마는.

 

마음, 마음, 다 마음이란 말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마음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들은 풍월로 들은 대로 그저 마음이란 단어를 자기 나름대로 쓰고 있는 것뿐이지, 실지로 그 마음의 참모습에 대해서는 본 사람이 없고 그 마음의 참 실상에 대해서는 본 사람이,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가 없고, 소리가 없기 때문에 귀로 들을 수가 없고, 형단(形段)이 없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건마는 그놈이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듣고, 손이나 발을 통해서 온갖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있다면 눈에 보여야 하고 손으로 잡을 수가 있어야 할 텐데, 왜 있으면서 볼 수 없고 잡을 수가 없느냐?

대관절 그놈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슨 모냥 무슨 빛깔을 하고 있으며, 대관절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밥통 속에가 있느냐? 간 속에가 있느냐? 심장 속에가 있느냐? 머리 두골 속에가 들어 있느냐?

그것이 밥통 속에가 들어있다면 똥을 누면 변소간으로 빠질 것이고, 그런데 창자 속에가 있는지 어디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데, 그것을 갖다가 왜 있다면 왜 볼 수가 없느냐?

 

온갖 것을 그놈은 다 보고 듣고 하는데, 왜 우리는 그것을 볼 수가 없느냐?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이 안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그저 의식주(衣食住)가 인생에 전부인줄만 알고, 그저 배만 부르면 그저 아무 근심이 없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이 불법(佛法)이 무엇인줄도 알기 전에 「대관절 이 인생이라는 게 무엇이냐? 대관절 이 '내'라는 게 무엇이냐? 어데서 와서 뭣 하러 왔으며 또한 한평생을 살다 가는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생에 대한 근본 문제에 대해서 다 자기 나름대로 궁금증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참선법(參禪法)은 인생이 스스로 자연적으로 품게 되어 있는 그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疑心), 그것을 체계화해서 그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방법을 갖다가 만들어, 방법이 그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참선법에 공안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 공안은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한다고 그랬습니다마는 실지는 자기 자신이 이미 그 공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바쳐서 풀어야만할 그 문제를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안고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의식주, 오욕락(五欲樂) 때문에 그 중요한 문제를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놔둔 채 방황을 하고 몸부림을 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우리들인 것입니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은 이 문제를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서 (녹음 끊김)... 아니하고 우리 중생들을 위해서 더 연마하고 더욱 연구를 해서 우리에게, 우리 말세(末世)에 태어난 근기(根機)가 약한 업보 중생(業報衆生)들도 공부가 할 수 있도록 개발해 놓은 방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인 것입니다.

 

'이뭣고?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또는 '이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이 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났는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는 부모가 나를 낳아주신 것이 아니여.

그 참나는 부모로 인해서—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받아 났지만,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는 부모한테 받은 것이 아니여.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긴 때가 없이 존재해 온 것이여.

 

이 몸뚱이는 늙어서 병들어 죽지만,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의 주인공, 참나는 태어난 때가 없기 때문에 또한 죽는 것도 아닌 것이여.

죽고 사는 것이 아니요,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이여.

 

'이뭣고?' '이뭣고?'(30분43초~47분24초)

 

 

 

(2)------------------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는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판치생모라고 하는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공안은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 하면 조주 스님께 어떤 스님이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사서래의,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달마 스님이 무엇하러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셨습니까?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근본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불교의 근본 진리가 무엇입니까?」 내나 표현은 다르지만 근본은 있어서는 같은 뜻인 것입니다.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판치생모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참선법을 가르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하기 위해서 달마 스님이 오셨다' 이렇게 대답할 것 같은데, 그러한 대답을 하시지 아니하고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판치에 털이나?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자 이빨 위에 털이 났다고 했는고?'

이것이 또한 우리의 의심거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개나 됩니다. 천칠백이 넘는 것입니다.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은 수없이 많고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이나 되는데, 그러면 그 많은 공안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 것이냐?

 

일본에서는 의리선(義理禪)이라 해가지고 이 공안을 하나씩 스승으로부터 받아가지고 그 하나를 며칠 동안에 걸쳐서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해서 온갖 방법, 지식과 이론을 총동원해 가지고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가지고 그 스승한테 가서 딱 이릅니다. 이르면 '되었다' 그러면 그다음에 또 하나의 공안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백 개 이상의 공안을 통과를 하면 '너는 조실이 될 자격이 있다. 너의 제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하고 자격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중국에서부터서 쭉 내려오는 정통적인 활구참선법에 있어서는 공안을 애당초부터 이론을 사용하지 말도록 지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을 가지고 따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하고 이리 해가지고 어떠한 결론을 얻은 것은 설사 그 결론이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말씀과 상통하는 그럴싸한 결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공안에 바른 답이 아니요,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이론, 우리가 아무리 체계 있는 이론을 세웠다 해도 깨달음 앞에서는 일종에 분별심(分別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가르켜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태여 10년 20년을 세월을 시간을 낭비하면서 그것을 애쓸 필요가 없이 그 공안에 대한 답을 다 가르켜서 알겄게만 하면 되는 것을 뭐하러 그것을 애를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이 말씀이여.

 

분별심으로 이르지 못한 곳이 바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은 차라리 분별심을 놔 버린 데에서 오히려 깨달음에 들어갈 분(分)이 있는 것이지, 분별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서는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분별심을 가지고 공안을 천착(穿鑿)을 하지를 말아라. 따지고 분석하지 말아라.

 

분별심을 가지고 하는 것은 이것을 바로 '죽을 사(死)'자, '글귀 구(句)'자,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하는 것이여.

 

분별심을 버리고 일체 이론과 일체 말 길과 일체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버릇을 버리고서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꽉 맥힌 생각으로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무엇인고?' 또는 '어떻게 하면 병도 깨지 않고 오리도 다치지 않고 그 오리를 병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다못 그렇게만 다구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살 활(活)'자, '글귀 구(句)'자, 활구참선(活句參禪), 사구참선의 반대 활구참선.

 

활구참선! 이 활구참선을 해야만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이 말이여.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불법(佛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흐뭇해 할 줄 알고, 자기 뜻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은 근심 걱정하고 성을 내고 하는, 바로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도 잡히지 아니하면서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듣고, 온갖 일을 하는 그 신기하고도 묘한 대관절 그놈, 그놈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47분25초~55분5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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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公案) ; 화두(話頭),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가자(假藉 임시·일시/깔다·빌리다 자) ; 임시로 빌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형단(形段 모양 형/구분 단) ; ①형태. 형태로 나타나서 보이는 것. ②모양. 외양.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 자기 본분의 소식, 궁극적인 진실을 가리키는 선종의 화두이다. 부모미생전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미생면목(父母未生面目)이라고도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2)

 

*달마(達摩)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분별(分別)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