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3분 17초)
[법문] 송담스님(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78.08.27)(용086)
(전강 선사께서)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으실 때에는 전부 다 공안을 통해서, 공안 문답을 통해서 점검을 받게 됩니다. 이 공안, 화두라고 하기도 합니다마는 이 ‘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진리의 수수께끼’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수수께끼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을 통해서 갖은 방법을 통해서 이것을 파고 분석하고 연구를 해서 결국은 밝혀내야 할 것이겠지마는, 이것은 보통 수수께끼가 아니라 ‘진리의 수수께끼다’
진리는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실(實)다웁게 닦고, 참다웁게 깨달라서, 깨달라서 내 몸에 체달(體達)하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갈 수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가르쳐서 알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이 참선(參禪) 공부는 어떠한 학자라도, 어떠한 강사라도 팔만대장경을 종횡으로 걸림이 없이 다 해명을 하고, 다 해설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힘으로 공안을 타파(打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지식이 오히려 참선하는 데에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교(敎)를 버리고 선(禪)에 들어간다’고 하는 고인의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가 배운 모든 지식, 모든 이론을 깨끗이 버려버리고 백지(白紙) 상태가 되어서 완전히 바보가 되어서 선지식(善知識)의 지시에 따라야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철저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빨리 도(道)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많은 고인들이 그러한 교, 이론, 지식 이러한 것들이 속에 가뜩차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도를 얻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던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가 보고 듣고 생각해서 얻은 바는 빨리 버릴수록 도(道)에는 유익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20분10초~23분26초)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 ; 전강 조실 스님이 수행하시던 1920년대 당시 유명한 혜월 · 혜봉 · 한암 · 용성 · 보월 · 만공 선사를 말씀하신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실(實)답다 ; 꾸밈이 없고 참되고 미덥다(믿음성이 있다. 신뢰성이 있다).
*체달(體達 몸 체/통달할 달) ; ①몸[體]으로 직접 통달(通達)함. 몸소 경험하여 막힘이 없이 트이다. ②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선가(禪家)의 수행관(修行觀)의 하나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法門)인 교(敎)는 올바르게 공부하고 이해하면 참선을 철저히 할 마음이 날 수밖에는 없고,
진리는 실(實)답게 닦고, 참답게 깨달아서 체달(體達)하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갈 수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가르쳐서 알게 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교(敎)에서 닦은 뒤에는 그것을 몽땅 내버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인 선(禪)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수행관이다.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설하신 부처님 법문인 교(敎)는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공부하면 참선을 철저히 할 마음이 날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참선을 올바르게 하면 교(敎)가 하나도 버릴 말씀이 없습니다. 교(敎)와 선(禪)은 둘이라 할 수가 없고, 전부가 다 소중하고도 훌륭한 법문(法門)입니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8분 12초)
[법문] 송담스님(No.394)—89년 7월 첫째일요법회.(용394)
방금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법에 대한 간곡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 그 한 대목만 들으면 다시 오늘 무슨 더한 법문을 들으실 것이 없을 것입니다.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참선(參禪)이 제일 수승한 법이고, 참선 가운데에도 활구참선이야말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 가장 지름길이다 그말이여.
활구참선을 해 나가는 데는 화두(話頭),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 가지고 공안을 타파(打破)해 버려. 의단(疑團)을 타파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기의 마음자리를 깨달라 버리는 것인데.
화두 하나만을 제대로 참구할 줄 알면 그것이 바로 참선을 바르게 하는 길이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그 화두를 참구하는 법에 대해서 항상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이론이나 지식이나 분별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여.
그러기 때문에 화두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슨 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또는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교리로 온갖 지식과 상식을 동원을 해서 이렇게도 따져 보고 저렇게 따져 보고 그래 가지고서는 깨달음, 참다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여. 공안을 타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사용하지 않고 그 공안을 참구해.
그것이 참 아까 조실 스님 말씀과 같이 천하에 간단하고도 쉬운데, 실지로 해 나가는 것을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분별을 하고 있고 따지고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무슨 그럴싸한 해답을 얻으면 '이것이 바로 깨달은 것이 아닌가' 스스로 착각을 하고 그러한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 공부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기본자세,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죽비(竹篦)를 치고서 입선(入禪)을 들이고 떠억 결제 때에는 선방에서 그렇게 정진을 하지만, 참선이 꼭 죽비 치고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여.
물론 그것은 기본자세라 시간이 있을 때마다 따악 가부좌를 하고, 반가부좌를 하고 하는 것이 참 좋기는 좋지만,
꼭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의자에 걸터앉아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일하면서도 하고, 차 타고 가면서도 하고, 심지어는 진심(瞋心), 속이 상할 때도 하고, 슬플 때도 하고, 기쁠 때도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색성불의처(色聲不疑處)고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온갖 울긋불긋한 온갖 색상을 보되 그 색(色)에 간여하지 아니해. 간섭하지 아니하고. 그 색에 집착하거나 그 색상으로 인해서 분별심을 내지 않는다.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다. 온갖 소리를 듣되—기차 소리, 자동차 소리, 비행기 소리, 공장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 이웃에서 모다 떠들고 잡담하는 소리, 어린아이들이 소리소리 지르는 소리, 음악 소리, 새 우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온갖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여. 그 소리에도 끄달리지 않는다 그말이여.
색성불의처(色聲不疑處)에, 온갖 색성(色聲), 색상과 온갖 소리에 의심 없는 곳이면 바로 그것이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다. 법왕(法王)이 계신 궁성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 중생은 눈으로 온갖 색상을 보면 거기에 끄달려 끌려가서 온갖 분별심이 거기서 일어나고 번뇌 망상이 일어나거든.
무슨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로 인해서—칭찬하는 소리, 욕하는 소리, 새소리, 음악 소리, 차 소리, 시끄러운 소리, 그 소리로 인해서 온갖 분별심을 내고 짜증을 내고, 때로는 기쁜 마음을 내고 슬픈 마음을 낸다 그말이여.
참선하는 사람은, 수행하는 사람은 색상을 보되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이뭣고?’ 온갖 소리를 듣되 거기에 분별심을 내거나 집착하지 말고 바로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뭣고?’ 화두를 거각(擧却)한다.(4분57초~13분11초)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게송) '견색비간색~' ; 『금강경오가해』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야부 게송 참고.
*법왕(法王) : [범] dharmarāja 부처님은 진리, 곧 법을 가장 밝게 깨치시고, 법을 걸림 없이 쓰시고 법을 널리 가르쳐서 법에 있어 제일 높은 어른이므로, 「법의 임금」이라고 존칭한 말이다。또한 모든 세속 임금들에게도 큰 스승이 되고, 온갖 성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므로 법왕이라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19분 59초)
[법문] 송담스님(No.401)—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용401)
기래끽반냉첨의(饑來喫飯冷添衣)헌데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니라
나무~아미타불~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요
나무~아미타불~
기래끽반냉첨의(饑來喫飯冷添衣). 배고픔이 오면 밥을 먹고 추워지면 옷을 껴입어.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다. 이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함께 아는 바다 그말이여.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더운 옷을 껴입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일이니,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 이 한 개의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역력(歷歷)하게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요. 어떻게 눈을 뜨고서 어리석고 어리석은 방자(放恣)의 우치(愚癡)에 빠질 것인가?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추우면 더운 옷을 껴입을 줄 아는 이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라 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정법(正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헐랴고 하는 여기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추우면은 더운 옷을 껴입을 줄 아는 바로 거기에 있거든.
배고프면 밥 먹을 줄도 모르고 추워도 옷을 껴입을 줄도 모른 정도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공부해 봤자 소용이 없어.
‘그것을 누가 모르겠느냐?’하는데,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이 정법(正法)을 믿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다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증거거든, 이게.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추울 때는 더운 옷을 껴입을 줄 알기만 하면, 바로 거기에 바른 공부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이뭣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안 사람이면 어찌 「이뭣고?」를 못해. 「이뭣고?」
정법을 안 믿고 화두를 타서 공부를 아니한 사람은 배고프면 맛있는 것을 생각하고, 무엇을 먹어야 맛있을까? 어떻게 무엇을 먹어야 배가 부를까? 어떻게 먹어야 영양을 섭취할까? 잘했다 못했다 짜다 싱겁다 그러다가 말아 버린다 그말이여.
그런데 공부하는 사람은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생각날 때, 밥 먹으면서 「이뭣고?」거든.
우리는 이 공부를 일상 생활과 띠어서 생각해서는 안 돼.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 때, 바로 배고프다 할 때 「이뭣고?」거든. 춥다 할 때 「이뭣고?」거든.
「이뭣고?」부터 탁 챙기면서 옷을 껴입고, 배고프면 즉각 「이뭣고?」를 탁 추켜들면서 밥을 먹어.
하물며 그 밖에 성이 날 때, 슬플 때, 괴로울 때, 속상할 때, 억울할 때, 원망스러울 때, 미울 때, 아까 증애심에 대한 말씀을 했지마는 사람이니까 이쁜 사람도 있고 또 미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쁜 생각이 나자마자 「이뭣고?」를 들고, 미운 생각이 들자마자 「이뭣고?」를 든다면, 이뻐하고 미운 것으로 인해서 큰 업(業)을 짓지 아니하고, 그 이쁜 생각 · 미운 생각나자마자 「이뭣고?」를 척 든다면 그 이쁜 생각 · 미운 생각이 바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미운 사람을 보고도 나는 「이뭣고?」를 드니까, 미운 사람은 웬수가 아니라 바로 잠깐 내 앞에 나타난 불보살(佛菩薩)일 것이고,
이쁜 사람을 보고 이쁜 생각을 내고 그것으로 인해서 음심(淫心)을 내고, 그것으로 인해서 업연(業緣)을 맺게 되면 그 사람은 바로 나를 마왕(魔王)으로 끌고 가는 올개미가 될 것입니다마는,
발심(發心)해서 도 닦는 사람은 이쁜 사람을 보고도 이쁜 생각이 나자마자 찰나에 「이뭣고?」하고 화두를 든다면, 그 사람은 불보살이 잠시 나로 하여금 화두를 들어서 깨달음에 나아가기 위해서 화현신(化現身)으로 나타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나와 인연 있는 사람은 미운 사람이나 이쁜 사람이나 다 발심(發心)한 사람에게는 다 불보살 화현이여.
발심을 못하고 정법을 믿지 아니하고 공부를 아니한 사람은 사랑만 했다면은 머지않아서 그 사람 하고는 웬수가 되고, 다생원채(多生怨債)가 기어친(起於親)이거든.
다생에 웬수 빚이 다 친한 데에서 일어나. 친했다 하면은 사랑하게 되고, 사랑했다 하면은 머지않아서 웬수로 변하거든. 중생세계,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야.
발심을 해서 정법을 닦는 사람은 이 사바세계처럼 공부하기 좋은 곳은 없고, 깨달음에 나아가는데 가장 적절한 데가 없다 이거거든.
일개화두(一箇話頭)가 명역력(明歷歷)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요. 어떻게 눈을 뜨고서 어리석은 마음을 방자히 할 수가 있으리요.
화두(話頭) 하나로써 사바세계의 탐진치(貪瞋癡)를 극복을 하고, 이 화두라고 하는 이 무서운 무기로써—이 무기는 총보다도 더 무섭고, 칼보다도 무섭고, 원자탄보다도 무섭고, 또 그 밖에 어떤 화학무기보다도 더 무서운 무기가 바로 이 화두인 것입니다.
아무리 화학무기가 무섭고, 원자탄이 무섭고, 수소탄이 무섭고, 총칼이 무섭다 해도 이 화두 하나 보다는 덜 무서워. 왜 그러냐?
이 화두는 간단한 한마디고 참 평범한 한마디지만 혁범성성(革凡成聖)이거든. 범부(凡夫)를 고쳐서 성현을 맨드는 그러한 무서운 무기거든.
원자탄 백 개를 던진들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수소탄 천 개를 던진들, 사람과 모든 것을 파괴할 것뿐이지, 그걸 가지고 이 세계를 평화롭게 맨들 수도 없는 것이고, 한때 잠시 두려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영원한 평화는 가져오지 못하거든.
1945년에 원자탄을 일본에 나가사끼, 히로시마에 던져서 2차대전(大戰)이 종식은 되었지만, 그래봤자 몇 해 안 가서 다시 중생심(衆生心)은 계속해서 발동을 해 가지고 온 세계는 이렇게 평화를 향해서 잘되아 가는 기미는 보이지 아니하고 언제 어떻게 해서 또 그와 같은 무서운 싸움이 일어날는지 모르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정법에 귀의해서 「이뭣고?」 이 활구참선을 해 가지고, 온 세계가 멸망해 버릴지도 모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나 자신을 구제하고, 가족을 구제하고, 국가 민족을 구제하고, 세계 인류를 구제하고, 이 자연계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이 정법밖에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
‘온 세계가 왜 이것이 존재하냐’하면은, 나 각자 나의 마음의 표현이 세계거든. 내 몸 밖에 세계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으므로 해서 세계가 있어.
내게 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식(識)이 밖으로 나타나서 표현된 것이 우주법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야.
그래서 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면 온 세계가 다 좋게 보이고, 내 마음 하나가 슬프고 괴로우면 온 세계가 다 뵈기 싫어.
아름다운 꽃이 피었거나 휘황찬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어도 내 마음이 슬프면 꽃도 슬프고 하늘에 밝은 달도 슬퍼. 내 마음이 기쁘면 내 마음에 행복이 있으면 저 밝은 달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그 이쁘게 핀 꽃도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그말이여.
그러니 온 세계의 모든 것도 내가 좋아야 세계가 좋아. 친구도 내가 좋아야 친구를 보면 반갑지, 내가 불행하면 친구도 반가운 줄도 모르고 이 세상에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어.
그러니 세계가 곧 나요, 내가 곧 세계거든. 그러기 때문에 세계의 평화를 이룩할라면은 내 마음이 행복해져야 해.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행복하게 허냐?
세상 사람들은 많은 재산을 모으고 높은 벼슬을 하고 그러면은 행복할 것 같지마는, 그렇게 생각해서 밖에서 그런 것을 얻을랴고 아우성을 치지만 그거 얻는다고 해서 정말 행복해지들 안해.
그런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면 잠시 참 좋다는 생각이 들고 기뻐하지만 그 얼마 안 가요. 얼마 안 가면 또 재산이 없어지기도 하고 벼슬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그말이여.
그래서 진정한 행복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야. 자기 마음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이 한 철을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하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들이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들이나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하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 하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하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祖師)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立繩)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39분45초~59분45초)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방자(放恣) ; 방자하다. 어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없이 무례하고 건방지다.
*우치(愚癡) ; ①삼독(三毒)의 하나. 사상에 의혹되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이른다. ②매우 어리석고 못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음심(淫心 음란할 음/마음 심) ; 주로 남녀 사이의 성적인 일과 관계되어 마음먹은, 음란(淫亂)하고 방탕(放蕩)한 짓을 즐기는 바르지 않은 마음.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의 인연을 부른다.
*마왕(魔王)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올개미 ; '올가미'의 사투리. 노끈이나 철선 따위로, 잡아당겨도 매듭이 풀어지지 않도록 한 가닥을 고리처럼 만들어 짐승을 잡는 기구.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다생원채기어친(多生怨債起於親) 막약다생불식인(莫若多生不識人) ; '다생, 무량겁 원수 빚이 친한 데에서 일어나니, 다생에 사람 알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다'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식(識) ; 산스크리트어 vijñāna 팔리어 viññāṇa
대상을 식별하고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인식 작용. 인식 주관.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8식설(八識說)·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8식설(八識說)은 유식설(唯識說)에서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〇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〇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지척(咫尺) ; '한 자의 거리'라는 뜻으로, 아주 가까운 거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법성게(法性偈) ; 통일 신라 시대에, 의상(義湘 六二五~七0二) 스님이 중국에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 경의 핵심을 추려서 지은 7언 30구(210자)의 게송. 210자를 54개의 각(角 굴절)이 있는 도인(圖印)에 합쳐서 만든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의 게송을 말한다.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12분 11초)
[법문] 송담스님(No.287)—1986년 2월 첫째일요법회(86.02.02)(용287)
어떤 사람이 그 집안에 어떻게 쥐가 많이 들끓든지, 그 쥐를 갖다가 없애기 위해서 별별 약을 다 놓기도 하고, 고양이를 다 갖다 놓기도 하고 그러되,
오히려 더 약을 놓아 가지고 몇십 마리 잡아봤자 며칠 안 있으면은 더 쥐가 성해 가지고 더 야단을 치고 더 번성을 하고 하는 것을 보았고, 고양이를 갖다 놔봤자 몇 마리 잡아서 찢어발겨 놓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렇게 쥐가 없어지지를 않고.
오히려 더 부엌이나 창고나 다락이나 천정이나 수채구녁 할 것 없이 뭐 집안에 있는 걸 잡아도 이웃집에서 오고 또 산중에서 내려오고 들에서 오고 이렇게 해서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연구한 끝에.
쥐를 갖다가 잡아서, 새끼 때 그 쥐구녁을 파 가지고 그 새끼를 잡아 가지고는 살살 그 쥐를 꽁댕이를 잘라버리고서 그 쥐를 갖다가 키웠는데.
주로 무엇을 먹여서 키우냐 하면은 쥐를 덫을 놓아서 잡아 가지고, 쥐 고기를 썰어 가지고 새끼 때부터 먹였던 것입니다.
쥐의 고기를 먹여서 차츰차츰 크면서, 쥐를 잡아서 큰 쥐도 넣어주면 배가 고프니까 그 쥐를 막 깨물라 먹고 해서, 인자 그 육식을 하니까 쥐가 굉장히 빨리 잘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쥐가 쥐 고기를 참 잘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쥐를 풀어놓으니까 그 쥐란 놈이 천장이고 부엌이고 쥐구녕이고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쥐란 쥐는 다 잡아먹었습니다.
고양이를 시켜봤자 쥐구녕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한나절씩 쥐구녁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오면 잡아먹을지언정 쥐구녁에 딱 들어가 갖고 안 나오면 잡아먹지를 못하는데,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내 놓으니까 구녁구녁이 다 드나들면서 싹 다 잡아먹어.
그런 다음에 마지막에 그 쥐는 사람에게 잘 길이 들어져서, 저를 갖다 마지막에 그놈을 잡어가지고 ‘니가 그동안에 모든 쥐를 잘 잡은 공로를 크게 치하를 하고, 그러나 미안하지마는 너도 너 갈 데를 가거라’ 이렇게 해서 처단을 했다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쥐 때문에 곡식을 많이 먹고 모든 물건을 다 쏠고 그래서 그렇게 쥐 때문에 피해가 많은, 미국이나 서양이나 한국이나 쥐가 1년에 먹는 양곡이 수십만 수백만 석이라 그럼니다.
그래서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쥐를 잡게 하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드는데, 여러분은 그러한 일은 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이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것이, 이 화두! 이론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 가지고 어떠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라 하는 것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 하신 바와 같이 ‘알 수 없는 의심,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하는 바로 이놈이 뭣고~?’ 다맛 그렇게만 참구하는 것이지,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경에 있는 부처님 말씀과도 비교해서 ‘하!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따진다든지, 조사의 어록이나 다른 공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 보고 이렇게 해서 어떠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도 꽉 막히고 뒤도 막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관, ‘이뭣고~?’
또 판치생모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이거든.
다른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하나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하나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글귀나, 어떠한 물건이나, 어떠한 일을 갖다가 그것만 밤낮 생각해 가지고 생각이 다른 데에 가지 못하고 그 생각만 하도록, 그러면은 애인을 이별한 사람이 밤낮 애인 사진만 놓고 애인만 들여다보고 애인 생각만 하면 그것이 참선이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죽은 자식을 생각해 가지고 밤낮 죽은 자식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나깨나 생각 안 할라고 아무리 떨쳐 버릴려고 해도 그 자식 얼굴이 환히 나타나면서 자식 생각만 한다면, 그러면 꿈에서도 자식 꿈을 꾸고, 눈을 떠도 자식 생각, 누구 청년 학생들을 봐도 자식 생각하면 그 사람이 그러면 참선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왜 아니냐 하면, 그 한 일에 생각이 집중된다고 한 점에서는 그 점 하나는 혹 공통점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참선이라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화두!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하는 이 참선은 알 수 없는 의심! 의심으로 그것을 관(觀)하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를 하되 의심이 없이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밤낮 ‘이뭣고’ 고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뭣고’를 해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의심이 아니기 때문에.
의심관이라야 하는데, 의심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한 것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뭣고?’를 하라니까, ‘이뭣고?’ 소리를 잊어버리고서 ‘이웃집 영감, 이웃집 영감’ 며칠을 하다가 와서 ‘이웃집 영감’을 많이 찾아도 잘 안된다고 그런 소리를 하고.
또 어떤 노인은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화두를 타고 법문을 듣고 집에 가서는 자나깨나 큰소리를 지르면서 ‘전강 스님! 전강 스님!’ 자꾸 전강 스님을 불러싸서,
그 며느님과 손녀가 그 할머니를 모시고 와 가지고 ‘원장 스님이 전강 스님을 자꾸 부르라고 했다’고, '그래서 밤낮으로 전강 스님을 불러싸니 정말 원장 스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느냐?'
나는 ‘이뭣고?’ 이렇게 하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 할머니가 잘못 알아듣고 가서 밤새도록 전강 스님만 불러싼다고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잘 타일러 드려가지고 얼마 동안을 그 노보살님이 잘 하시다가 지금은 인자 저승으로 가셔서 극락세계를 가셨거나 다시 몸 바꿔 나셨지 않은가 그리 생각이 됩니다마는.
이 한 자리에서 같이 들어도 듣는 사람마다 다 각기 달리 듣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엉뚱하게 이해를 해 가지고 그러기 때문에 법회 때마다 이 참선 하는 법,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것은 새로 오신 분도 있고 또 오신 지가 얼마 안되어서 정말 가끔 한 번씩 ‘이뭣고?’소리는 듣지만 '대관절 이뭣고?라는 것이 무엇이냐?' 전혀 감을 잡지 못한 그러한 분들도 있고,
또 자기 나름대로 여러 해를 다니면서 한다는 것이 결국은 '전강 스님'을 불러싸코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법회 때마다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 올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할 줄만 알면 공부는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세도 바라지고 또 단전호흡을 함으로써 피로회복도 되고 또 좋지 못한 성격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잘 골라지고, 그러면서 이 참선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체 생활 속에서 자꾸 단속을 해 나가면 언젠가는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입니다.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직장에서나 언제라도 그 의단이 독로해서, 일이 있을 때에는 일하는 가운데에도 화두가 떠나지를 않고, 화두 드는 가운데에 모든 사람을 접견할 수도 있고, 일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해서 주변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때가 기어코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20분19초~32분35초)
〇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5분 59초)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5분 57초)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관(觀)한다(관하다) ;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한다.
〇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20분 42초)
[법문] 송담스님(No.264)—1985년 4월 첫째 일요법회(용264)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이 화두라 하는 것은 어떠헌 공부해 나갈 때에 우리의 정신을 갖다가 집중하는데 필요한 어떤 문제라고, 과제라고 이렇게 쉽게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막연허게 이렇게 앉았을 수가 없으니까 무엇인가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 생각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러헌 이 화두라 하는 것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개나 되는데, 이 천칠백 가운데에 가장 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한 문제를 말씀을 하겠습니다.
유리병이 있는데 그 유리병이 주둥이는 조그만하고 몸뚱이는 툭 퍼져서 크게 되어 있는 그런 유리병이 있는데, 그 유리병 속에다가 오리 새끼 한 마리를 집어넣었습니다.
오리 새끼가 조그만하니까 그 주둥이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다 물도 넣어 주고 먹이도 넣어 주고 해서 그 오리를 길렀는데, 그 오리가 제법 그 안에서 잘 먹고 잘 커서 애미가 되았습니다.
그런데 그 오리를 꺼내야겠는데, ‘유리병도 깨지 아니하고 오리도 조금도 상하지 않고서 어떻게 했으면 그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느냐?’ 이러헌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헌 문제면 이것이 어릴 때 하는 수수께끼와 비슷헌 건데.
‘어떻게 허면은 꺼낼 수가 있을 것인가?’ ‘어떻게 허면은 유리병도 깨지 아니하고 오리도 다치지 않게 아주 통채 그 오리를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 것인가?'
처음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는 이 문제를 해답을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병을 깨지 아니하면 오리를 몸을 쪼가리 쪼가리 띠어 내거나, 억지로 철사로 올개미를 넣어 가지고 목아지를 걸어서 잡어당긴다면 몸뚱이가 푹 퍼졌으니 목아지가 떨어져 불 것이고.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 봤자, 그 유리를 갖다가 불에다 녹여서 주둥이를 키워 갖고 낸다면 이미 병은 다친 것이 되기 때문에 안 맞을 것이고.
자기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렇게 해서 한 달을 연구허고 1년을 생각해 봤자 상식적으로는 이 문제는 해결이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허다허다 못해서 지치니까 나중에는 '어떻게 꺼낼 수가 있을까?' 오직 이제는 단순허게 그러헌 의심(疑心)만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앉아서도 '어떻게 허면 꺼낼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까?'
밥을 먹을 때도 그렇게 생각하고, 똥을 눌 때도 그렇게 생각하고, 차를 탈 때에도 '어떻게 허면 오리를 꺼낼 수가 있을까?'
일을 할 때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중에는 잠을 잘 때 꿈에도 그것을 생각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허다가 한 달을 그렇게 생각하고, 두 달을 그렇게 생각하고, 일 년을 그렇게 생각하고, 이태를 생각하다 보면, 나중에는 일부러 그것을 생각헐라고 안 해도 제절로 그냥 그 생각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그 생각이 떠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걸 생각하다가도 뭐 다른 일을 보거나 듣거나 하다가 깜박 잊어버리고, 뭘 다른 일 생각하다 잊어버리고, 그런데 나중에는 잊어버렸다 하면 또 퍼뜩 챙겨서 '어떻게 허면 오리를 꺼낼 수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허고 또 챙기고 또 챙기고 허다 보면 나중에는 챙길라고 안 해도 항시 자나깨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허거나 오직 그 생각 뿐이 될 것입니다.
그 생각만이 되기를 어떻게 되냐 하면은, 칠십 먹은 할머니가 외아들이 여행을 나가 가지고 돌아온다는 날짜가 여러 날이 지냈는데도 돌아오지 아니했을 때에 생각 생각이 아들 생각허듯이 오직 '어떻게 허면은 이 오리를 꺼낼 수가 있을 것인가?'
‘이 문제를 석 달 이내에 해결허지 못하면은 너를 사형 언도를 허겠다’ 또는 ‘1년 이내에 이 문제를 해답을 얻어 오지 못하면 너를 갖다가 귀양을 보내겠다’한, 임금님한테 이런 문제가 나와 가지고 생명을 갖다가 걸고서 허게 된다고 헐 때에 얼마만큼 골똘하게 이 문제를 생각하겠습니까?
이 유리병 속에 들어 있는 오리를 꺼내는 이런 문제는 흡사 이것도 공안이지만, 마치 어린이들한테 수수께끼 문제와 같은 그러헌 종류의 공안이지만, 이건 어른들도 한번 생각해 볼만한 일인데,
여러분에게 그동안에 허던 ‘이 무엇고?’ 화두라든지 또는 ‘무자(無字)’ 화두라든지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毛)'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같은, 이미 들고 있는 화두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이제부터서는 유리병 속에 오리 꺼내는 화두로 해야겄다, 이러라는 것이 아닙니다.
혹 ‘그 참! 재미있다’해 가지고 ‘에잇! 오늘부터서 그것을 해야겄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가 없고, 처음 오신 분을 위해서 그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이 어떠헌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 해드리기 위해서 내가 그 재미있는 화두를 하나 말씀을 드린 것 뿐이지, 절대로 이 화두를 가지고 오늘부터서 허시면 아니됩니다.
이것이 수수께끼와 같은 재미있는 화두지만, 사량분별(思量分別)로 해결헐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으니까, 수수께끼 풀듯이 이것을 이렇게 따져 보고 저렇게 따져 보고 허는 것은 헛수고에 지내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아시고.
그런데 흔히 화두 하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이뭣고?’를 많이 말씀을 허게 됩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말은 임제(臨濟) 스님 이후로 임제종에서 이 화두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 이전에 육조(六祖) 스님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는 땅을 떠받치며, 밝기로는 해보다 더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항상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허는 가운데에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터억 앞에 나와서, ‘그것은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이 하택신회에, 저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불성이니 제불의 본원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 되겠다. 불교 학자밖에는 못 되겠다’
이 불교(佛敎)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부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너는, 앞으로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해도 지해종자(知解種子)밖에는 못 되겄다’ 이렇게 점검을 허셨습니다.
그러자 남악회양(南嶽懷讓)이 왔습니다. 와서 터억 절을 허니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하! 그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헌 물음에 대해서 꽉! 맥혀서 뭐라고 대답헐 수가 없어 몸을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택신회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무슨 하택신회의 불성이니 이렇게 즉각 그 대답을 했는데, 남악회양은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허고 묻는데 대해서 앞이 꽉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라. 그 뒤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앉아서도 그 생각, 서서도 그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 일을 허면서도 그 생각, 똥을 누면서도 그 생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이렇게 허기를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헐 것이 있느냐?’허니까,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헐 것이 없들 않지마는 오렴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가(印可)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참선법, 활구참선법은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더듬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악회양 선사처럼 대뜸 처음부터서 꽉! 맥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캄캄하니 갑자기 걸어가다가 기둥이나 벼람박에 이마빡을 부딪쳤을 때 그때 상황이 어떻습니까?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꽉 맥혀서 앞뒷이 끊어져야 그 공부를 옳게 해 나가는 것이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 이론, 무슨 철학, 불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 그것을 갖다가 아는 대로 끌어다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종합을 하고, 비교를 하고, 적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허는 것이 아닙니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도 그렇고, 마삼근(麻三斤)도 그렇고, 무자(無字) 화두도 그렇고, 시삼마(是甚麼)도 그렇고, 무슨 화두(話頭)를 어느 큰스님한테 탔든지 간에 한번 탔으면 그 화두,
공부가 잘되거나 못되거나, 못될수록에 그 화두 하나에 전력을 쏟을 것이고, 잘된다 하드라도 기쁘다 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무자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지어갈 따름인 것입니다.
꽉 맥혀서 답답허고 알 수가 없지만 조금도 조급한 생각을 낼 것이 없고, 또 그렇게 해 가다 보면 화두가 순일하게 들려서 의심(疑心)이 순일(純一)하게 들린다 하드라도, 화두가 독로(獨露)한다 하드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기쁜 마음을 내면 이미 화두는 달아나 버리고, 기쁜 마음의 마구니가 벌써 침입해 들어온 것이고,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면 이미 번뇌의 마구니가 내 마음에 침입해 들어온 것이라. 그래서 이 공부는 잘된다고 해서 기쁜 마음도 내서는 아니되고, 잘 안된다고 해서 짜증낼 일도 아닌 것입니다.
다못 단전호흡을 허면서 숨을 쑤욱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약 3초 동안 딱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허면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러면 숨이 다~ 나가면 배가 홀쪽해지죠. 그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시면은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딱 정지헌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숨을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고... 허지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됩니다.
들었던 화두 ‘이뭣고?’헌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냥 화두는 더 들지 않고, 그 있는 의심을 묵묵히 반조(返照)를 허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는 한번 들고서 숨은 3번, 4번, 5번 내지 10번을 쉬어도 그 화두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않다가, 화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거나 딴 생각이 일어났다허면 그때 가서 또 화두를 떠억 한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해 가면, 처음에는 그렇게 들랴고 해도 깜빡한 사이에 달아나 버리고 들면 또 달아나 버리고 하는데, 나중에는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상 들어져 있게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갖다가 공부가 많이 익숙해진 증거인 것입니다.
힘을 쓰지 아니해도 저절로 공부가 되어가니까 힘을 덜게 된다. ‘힘 덜게 되는 것을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라’ 이렇게 고인(古人)네들은 표현을 했습니다.
이 공부에 제일 주의헐 것은 사량분별로 따지지 말 것이며, 설사 공부가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순일허게 잘 들리고 의단이 독로헌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 환희심(歡喜心)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순일허게 잘되어 갈 때에 ‘빨리 깨달랐으면, 이럴 때 누가 나로 하여금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헌 생각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그렇게 순일하게 잘되어 가게 되면은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떠한 그 신기한 경계(境界)가—혹 환한 빛을 광명을 본다던지, 꿈에 부처님을 친견하고 꿈에 어떤 깨달은 꿈을 꾼다든지, 또는 여러 가지 뭣이 알아진다든지, 그런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환상(幻相)이다’ 생각하고. ‘이거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닌가?’ 그러헌 그 외람(猥濫)되고 잘못된 생각을 내지 말고.
어떠한 신기한 불보살이 나타나고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허상(虛像)이요, 환상(幻相)이라 하는 것을 미리부터 잘 이해를 허시고,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 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스승을 바로 만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옳게 해 나가는 것인가’를 잘 모르는 사람은 공부허다가 이런 허상과 환상과 마경(魔境)이 나타나면 이것이 도통(道通)헌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것에 기쁜 마음을 내고 그것에 집착을 하고 신경을 써 가지고 영영 사도(邪道)에 빠지고, 까딱하면 정신병자가 되고 하는 예도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시작할 때부터서 바르게 시작을 해야 하고, 중간에도 바르게 해 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53분33초~1시간14분15초)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〇‘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임제, 육조, 하택신회, 남악회향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06) - 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〇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지해종사(知解宗師)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를 말한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벼람박 ; ‘바람벽(--壁, 집의 둘레 또는 방의 칸막이를 하기 위해 만든 벽)’의 사투리.
*마삼근 (麻三斤) : 화두의 하나。『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대답하기를 『마 삼근(삼 서근)이니라』하였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반조(返照) ; 돌이켜 살펴보는 것.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환상(幻相) ; 실체가 없는 무상한 형상.
*외람되다(猥濫-- 함부로·외람할 외/함부로·넘치다 람) ; (언행이나 생각이)분에 넘치는 데가 있다.
*마경(魔境) ; 마(魔)의 경계(境界).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번뇌를 말한다. 마(魔)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고인(古人)은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한 공안(公案)을—공안(公案)이라고도 하고 화두(話頭)라고도 합니다마는,
이 공안 하나를 가지고 거기에다가 일심 정력을 쏟아서 밤낮도 가리지 아니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도 가리지 아니하고 어묵동정(語默動靜)도 가리지 아니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건 간에 이 한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을 참구(參究)했습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묻기를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인도에서 오신 뜻입니까?’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데 대해서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달마 스님이 왜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셨느냐?’하고 묻는 데에 대해서, ‘참선법을 설하기 위해서 오셨다’ ‘내가 내 마음을 깨달라서 견성성불을 하는 법을 가르키기 위해서 왔다’ 우리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렇게 대답험즉 한데.
또 ‘달마 스님은 부처님으로부터 가섭존자, 가섭존자로부터 아난존자, 아난존자로부터 상나화수, 이렇게 해서 달마 스님까지 28대를 법(法)을 전해 왔는데, 그 28대 조사인 달마 대사가 그 부처님으로부터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내려오는 그 최상승법, 정법을 중국에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 이렇게 대답험즉 한데.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아! 이렇게 대답을 해.
‘대관절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꼬~?’
이것이 바로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이고, 화두(話頭)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여.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에는, 그동안에 자기가 배우고 알고 한 모든 지식이 여기에 동원되야서는 아니 되고, 모든 이론이 여기에 동원이 되어서는 아니 되어.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앉아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걸어가면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밥을 먹으면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억울한 소리를 듣고 울화통이 치밀어서 속이 상할 때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법당에 계신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 사부대중이 ‘이뭣고?’,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시는 분이 많으실 줄 생각을 합니다마는,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에도 ‘이뭣고~?’
다못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무조건하고 그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다가 그걸로 이리저리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분석해 보고, 그런 것이 아니여. 이 참선 공부에는 일체 철학이나 일체 과학이나 모든 이론이 여기에는 인용되어서는 아니 되고. 여기에 그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서도 아니 되고.
그래서 옛날에 이 공부는 ‘무얼 많이 알고 배우고 하면은 오히려 이 공부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경을 알고, 학교를 많이 다니고 해서 지식이 풍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여기에다가 끌어들여서 그것을 동원하지만 아니하면, 뭐 하등(何等)에 해로울 것도 없지만,
중생의 습기(習氣)라 하는 것이 그렇기가 어려워서 뭘 많이 알면 아는 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놈을 갖다가 끌어들여 가지고 그놈으로 이리저리 분석도 하고, 적용도 해 보고, 종합도 해 보고, 그렇게 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내려 보고도 싶고 이럴 수가 있어서 하는 말이지, 꼭 많이 알면 못 쓴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도 상관이 없고,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고,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첫째는 큰 신심(信心).
‘내가 본래 부처다. 나도 부처님이다. 그러니 어찌 내라고 해서 이 공부를 못할 것이 있는가? 나도 열심히 하면 결정코 성불을 할 수 있다’고 하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신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태산(泰山)을 끼고 바다를 건너뛸려고 하는 것은 할 수가 없는 일이여.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내게 본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을 찾는 거와 같고,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자래를 잡은 거와 같아서 손만 넣으면 잡히게 되어 있는 것이여.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하면 바로 거기에 나의 본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라, 올바른 방법으로 참구만 하면 누구라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큰 분심(憤心)을 가져야 하는데, 무슨 분심이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와 모든 선지식들은 진즉 이 문제를 결판을 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 받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육도 속에서 이렇게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가.
그 점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을 가져야 해. 분심을 가져야 용맹심이 나고, 용맹심을 내야 퇴태(退怠)를 안 하게 되는 것이여.
분심이 없고 용맹심이 없으면 공부에 아무 매카리가 없어 가지고, 어제도 그럭저럭 오늘도 그럭저럭, 공부를 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여간해서 이 공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을 요달(了達)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손수 머리를 깎어 버리고 6년, 어떤 경전에는 12년이라고 되어있는 데도 있습니다마는, 그 무서운 고행을 하셨고.
달마대사도 소림굴에 들어가서 9년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셨고, 장경(長慶) 스님이라 하는 분은 포단(蒲團)을, 방석을 7개를 뚫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좌선을 지극정성으로 했으면, 궁뎅이로 방석이 뚫어져서 못 쓰게 되면은 또 다른 방석을 가지고 또 정진을 하고, 1년 이태 이렇게 한 방석을 가지고 한결같이 앉아서 정진을 하고 용맹정진을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다 보니까 멀쩡한 방석이 닳고 닳아서 구녁이 뚫어져. 이렇게 하기를 7개 포단을 뚫었다 이거여.
향림(香林) 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어.
타성일편이라 하는 것은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이 독로해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해. 그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했다.
조주(趙州) 스님은 소년 시절에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확철대오해서 견성(見性)을 한 그러한 고불화현(古佛化現)이라고 할 만큼 그런 큰스님인데, 30년에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했어. 잡되게 마음을 쓰지를 안 했다.
이 공부는 이만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이지만 이만한 끈기와 정성과 용기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조금 해 보고 ‘아이고, 그놈의 것 못 해 먹을 지서리다’, ‘인연이 없나 보다’, ‘내가 근기가 약한가 보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고인(古人)은 하루해가 넘으면 ‘오늘도 이렇게 깨닫지를 못하고 하루해가 넘어갔구나’ 이래가지고 발을 뻗고 통곡을 한 스님도 있다고 합니다.
밤에 잘 때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졸음을 깨면서 정진을 한 그런 스님도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습니다.
저녁에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 무거운 돌덩어리를 지고서 지리산을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밤새 다니면서 정진을 한 그런 스님도 있습니다. 그 돌이 지금 지리산 쌍계사 육조 스님 정골탑 앞에 그 돌이 지금도 놓여 있습니다마는.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그렇게 목숨 바쳐서 정성을 들이지 않고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우리는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이고!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일찌감치 그만두고 아미타불(阿彌陀佛) 10번만 불러도 극락세계로 갈 수가 있다는데, 우리 같은 여자가, 더군다나 속가에 있으면서 그 참선은 감히 생각지도 못헐 일이다. 그저 염불(念佛)이나 해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가야겠다'
혹 그렇게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분이 있으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려운 면으로 보자면 그렇고.
쉬운 면으로 보자면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다' 그랬습니다. 세수를 하다 보면 코를 만지지 않을라고 해도 저절로 코가 만져지는 것이여. 내가 나를 찾는 공부가 쉽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운 것이다 그말이여.
밥 먹을 때, 옷 입을 때, 걸어갈 때, 말할 때,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무엇을 들을 때, 바로 거기에 있거든.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찾을라고 함으로 해서 달아나버리고 놓쳐버리는 것이지, 찾을라고 하지 아니하면 언제나 거기에 있거든. 그러니 그것이 쉽다고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찾을라고 하면, 이렇게 시청언동(示聽言動), 눈 · 코 · 입 · 귀를 통해서 보고 듣고 맛보고 말하고, 바로 거기에 있건마는 과연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놈이 무엇인가?’하고 찾어보면 간 곳이 없다 그말이여.
이렇게 눈을 통해서 온갖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듣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다 가려내고, 몸뚱이를 통해서 차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그렇게 판별할 줄 아는 이렇게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잠시도 나와 더불어 일분일초(一分一秒)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살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이렇게 생활을 하고 있건마는, 그렇게 소소영령하고 분명한데 아! 찾어보면 간 곳이 없다 그말이여.
그러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찾어도 볼 수가 없고, 일분일초도 나와 떨어진 적이 없이 노상 같이 있고,
가깝기로 말하면 한 걸음도 여의지 않고 1초도 여의지 않는 것이고, 멀기로 말하면은 삼천대천세계를 찾어도 없으니 이 기기(奇奇)하고 묘묘(妙妙)한 이 도리를 어떻게 말로 가르켜 주고 생각으로 알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그래서 지혜와 자비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부처님과 역대조사는 어떠한 중생이라도 아무리 근기가 하열(下劣)한 중생이라도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어서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을 해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화두(話頭)라 하는 것이여, 화두(話頭).
‘이뭣고~?’
말을 할 때에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에도 ‘이뭣고?’
배가 고플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해 갈수록 꽉 막혔어. 앞도 없고 뒤도 없어.
‘이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처음에는 입으로 ‘이뭣고?’해도 속으로는 금방 딴 생각이 일어나고, 앉았을 때 ‘이뭣고?’했는데 일어서다가 잊어버리고, 금방 ‘이뭣고?’하다가 무슨 소리가 나면은 그 소리 듣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그렇게 잊어버린 때가 많다 그말이여.
보다가 잊어버리고, 듣다가 잊어버리고, 냄새 맡다가 잊어버리고, 먹다가 잊어버리고, 생각하다가 잊어버리고, 그렇게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린 것 걱정하지 말고, 딴 번뇌 망상 일어나는 것도 걱정하지 말고, 그저 부지런히 챙기기만 하면 되는 거여. ‘이뭣고~?’
경(經) 공부를 한다든지 다른 무슨 공부를 하면 무엇이 알아진 것도 있고, 하루 하면 하루 한 만큼 무엇이 얻어진 바가 있고, 이틀 하면 이틀 한 만큼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진 바가 있는데, 이 공부는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꽉 맥히고 답답하기만 하다 그말이여.
그러나 이 알 수가 없고 답답한 거, 이것이 정말 견성성불 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대목이다 그말이여.(22분19초~42분46초)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매카리 ; 매가리. '매가리'는 '맥(脈, 기운이나 힘)'을 속되게 이르는 말.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요달(了達 마칠·완전히 료/통달할 달) ; 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면벽관심(面壁觀心) ; 벽(壁)을 향하여[面] 앉아 자신의 마음[心]을 관[觀]하여 그 본성을 밝히는 것. 좌선(坐禪)의 다른 이름.
*면벽(面壁) ; 좌선(坐禪)의 다른 이름. 벽을 향하여 좌선하는 것.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양 무제(武帝)를 만나 문답하였으나 무제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마침내 물러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의 낙양으로 가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을 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말하지 않고 벽을 향하여 좌선하기 9년을 지냈다. 이를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뒤부터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벽을 향하여 좌선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면벽은 단순히 좌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론 등 문자에 의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관하여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수행법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일분일초(一分一秒) ; '1분과 1초'로 아주 짧은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이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함.
*기기묘묘하다(奇奇妙妙--) ; 몹시 기이(奇異)하고 묘(妙)하다(일이나 이야기의 내용 따위가 기이하여 표현하거나 규정하기 어렵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18분 24초)
[법문] 송담스님(No.030)—77년 입춘법회(77.02.04)(용030)
무엇이 화두냐?
우리는 하루 종일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고 음식을 먹고, 손으로는 만지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몸뚱이로는 춥고 더운 것을 알고 그럽니다.
그런데 눈이 본다고 하면은 금방 죽은 사람도 눈이 있지마는 아직 몸이 뜨뜻하고 눈이 아직 멀쩡한데 보이지 않습니다. 또 귀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듣는 것이 아니라, 금방 죽은 사람은 귀가 분명히 아직 세포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은 듣지를 못합니다.
또 눈으로 무엇을 골똘히 보고 있을 때에는 옆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무슨 말을 해도 잘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또는 귀로 무엇을 아주 골똘히 무엇을 듣고 있을 때에는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면은 귀로 듣는 놈이나, 눈으로 보는 놈이나, 코로 냄새를 맡은 놈이나 전부가 다, 눈 자체가 보는 것이 아니고, 귀 자체가 듣는 것이 아니고, 입 자체가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놈, 듣는 놈, 맛보는 놈, 만지는 놈, 걸어가는 놈은 별도로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맛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입을 통해서 말을 할 뿐이지, 입 자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눈 자체가 보는 것이 아니고, 귀 자체가 듣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들어서 볼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들을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성낼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웃을 줄도 알며, 밥 먹을 줄도 아는가?
여러분들은 ‘그것은 마음일 것이다’ 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마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들어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지 ‘그 마음 자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인(古人)들이 편의상 ‘마음’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 놓았을 뿐이지, 그 자체는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이다, 성품이다, 자성이다’ 여러 가지 이름은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에 지내지 못해!
사람도 ‘갑돌이다, 갑순이다’ 이름은 뭐라고도 붙일 수가 있습니다. 또 ‘갑돌이’를 ‘을돌이’라고 이름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뭐라고 붙였거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 자체!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름만 알아 가지고는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관절 무엇을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였는가? 대관절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것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생겼는가?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보는 사람이 없고, 확인을 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대관절 무엇인가?
그놈이 들어서 볼 줄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뭘 좋은 걸 주면은 기뻐할 줄도 알고, 아프면은 신음할 줄도 알고, 슬퍼한 일을 당하면 울 줄도 알고, 여기 앉아서도 서울 일을 생각하기도 하고, 미국을 생각할 수도 있고, 지금 오늘 이 시간에 10년 전, 30년 전, 40년 전 일도 생각할라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대관절 그놈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이기에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無窮無盡)한 것인가?
우리가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아오는 동안 그놈의 명령에 의해서, 그놈의 조종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지금 이 몸뚱이를 끌고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금생뿐만이 아니라 전생(前生), 저 전생,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그놈이 여기서 태어났다, 저기서 태어났다 하면서 사람도 되었다 짐승도 되었다, 천상에도 갔다 지옥에도 갔다, 부자도 되었다 가난뱅이도 되었다, 선량한 사람도 되었다 악한 사람도 되었다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 자리에까지 오신 것입니다.
그놈을 잠시도 떠나서는 우리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도 떠날 수 없이 같이 살아오면서 왜 우리는 그놈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을까요?
그것을 분명히 우리가 보아 깨닫는다고 하면은 그것이 부처님인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붓다(Buddha)’라고 한 말을 중국에서 ‘불타(佛陀)’라고 음사(音寫)를 해서, 그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오면서 ‘부텨, 부텨’로 되었다가 지금은 ‘부처’ 이렇게 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라고 하는 것은 인도 말로 ‘붓다(Buddha)’가 삼천 년을 내려오면서 ‘부처’로 그렇게 전해 변해졌다.
그러면 인도 말로 ‘붓다’라 하는 말은 무엇이냐? ‘깨달음’ 또는 ‘깨달은 분’ 이러한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 가르침’ ‘깨닫는 길’ 이렇게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요새 학자들이 연구해서 어떠한 이치를 궁리해 가지고 알아 들어가고 자꾸 따져 들어가 가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해서 어떠한 결론이 내려지면 그것을 사물에다가 적용을 시켜보고, 그래 가지고 잘 적용이 되면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으로써 성립을 시키고 해서 이렇게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는 그래서 아는 것,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사량분별심을 떠나서—사량분별심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과 아는 것과의 차이는 사량분별을 사용을 해서 얻어지는 결론은 ‘아는 것’이고 지식이고, 사량분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생사 없는 이치를 보는 것을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굉장히 우리의 중생으로서는 전연(全然) 인연이 없는 아주 저 어디 극락세계나 가야 그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고, 우리로부터서 먼 데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겠지마는,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데 있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심을 가지고 알려고 하기 때문에 깨달음은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을 놓을 때 깨달음은 저절로 우리에게 딱! 붙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하는 데 있어서 몸을 바르게 가지고, 그다음에 호흡을 고르게 한 다음에는 화두를 생각을 해라.
화두를 생각하는 것은 사량분별이 아니냐?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화두를 의심(疑心)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 엄격히 말하면 생각이 아닌 것은 아니지마는, 이리저리 자꾸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서 따져 들어간다고 하면은 그것은 분명 사량(思量)이지마는.
따져 들어가지 말고, 무조건하고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놈이 무엇인고?’ 이렇게만 의심을 하신다고 하면은 이것은 사량이면서 사량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하는 데는 제일 해롭고 금지된 것이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버릇, 이것을 제일 엄격히 단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이놈이 뭣고?’
성이 날 때도 ‘이뭣고?’ 무엇이 들어서 이렇게 성낼 줄을 아느냐?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도 ‘이뭣고?’
우리의 생각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어떠헌 생각, 또 그놈을 바로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한다면은—일어나는 생각이 번져 가지고 삼재가 되고, 사백사병(四百四病)이 되는데,
일어나는 생각이 퍼지기 전에 그놈으로 ‘이뭣고?’ 이렇게 한다고 하면은 일어나는 그 생각은 나로 하여금 생사해탈(生死解脫)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법문(法門)이요, 발판이요, 나의 호위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말씀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듣고, 이 자리에서부터 이 공부를 충실히—생각, 생각 헛되이 날려보내지 말고, 일어나는 생각을 바로 되돌려서 ‘이뭣고?’
첫째, 몸을 단정히 하고, 깊은 그리고 조용한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차 타고 가면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앉아서도 하고, 밥 먹으면서도 하고, 똥 누면서도 하고, 소지(掃地)하면서도 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뭣고?’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한다” 그러한 말씀은 아직 참선을 할 줄 모르는 말씀이여.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바로 그놈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그놈으로 ‘이뭣고?’를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쥐를 잡을려면 고양이로 쥐를 보통 잡습니다마는, 그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쥐를 잡는 데에는 쥐를 동원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쥐를 잡아 가지고 항아리 속에다 넣어 놓고는 소고기도 조금—며칠을 굶긴 다음에 소고기를 사다가 조금씩 떼어서 먹입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조금씩 먹여서 안 죽을 만큼씩만 먹여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하되 계속 배가 고프게 만든 다음에 다른 쥐를 한 마리를 잡아서 넣어 줍니다. 그러면은 그놈이 어떻게 배가 고프던지, 그 쥐를 기어코 잡어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얼마 있다 또 쥐 한 마리를 넣어 줍니다. 또 쥐를 잡어먹습니다. 그래서 쥐가 쥐 잡어먹는데 아주 선수가 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완전히 쥐를 잘 잡어먹게 될 때에 그 쥐를 풀어서 놔두면은 쥐구멍으로 자유자재로 다니면서 모든 쥐를 다 잡어먹게 되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뭄뚱이가 커서 쥐구멍에는 들어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구멍 속에 들어가 버린 뒤에는 쥐가 나오기 전에는 잡어먹을 수가 없지마는, 이 쥐는 마음대로 쥐구멍으로 드나들면서 잡어먹는데.
고양이 소리만 나도 쥐는 벌써 알고서 다시는 나오지를 않지마는, 쥐가 다니는 데에는 아무도 그 쥐를 경계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나오게 됩니다. 나오는 쪽쪽 잡어먹고, 안 나오면 구녁으로 들어가서 잡어먹고 해서, 한 쥐가 모든 쥐를 다 소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농담같은 얘기지마는, 화두라고 하는 것은 모든 쥐를 잡어먹는 쥐라고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화두도 분명 우리의 중생의 사리상량으로 처음에 시작을 하지마는, 옳은 방법으로 자꾸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화두를 들고 화두를 참구하고 해 나가다 보면은 사리상량이 사리상량 아닌 사리상량으로 되어 가지고,
일체 번뇌망상, 무량겁으로 지어온 모든 업(業)을 이놈이 다 주워 삼키게 되고, 다 주워 삼킨 다음에 배가 툭! 터져서 죽어 나동그라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화두 참선법은 달마 스님이 천삼백여 년 전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셔 가지고 달마 스님 밑에 2조(二祖) 혜가 대사,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선사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뭣고?’라고 하는 화두를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하택 신회선사에게 ‘이 무슨 물건이냐?’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괴우고 아래로는 땅을 괴우며,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하고 물었습니다.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전연(全然 온전할 전/그러할 연) ; 주로 부정어와 함께 쓰여 ‘조금도’, ‘아주’, ‘완전히’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그 내용의 정도를 가장 높은 수준으로 강조할 때 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사백사병(四百四病) ; 인체에 일어나는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사대(四大)—지(地)·수(水)·화(火)·풍(風)의 부조화로 각 요소에 대해서 101가지 병이 있다고 한다.
지(地)와 화(火)에서 일어나는 열병(熱病)이 202가지, 수(水)와 풍(風)에서 일어나는 냉병(冷病)이 202가지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경전에 그들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일정하지 않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소지(掃地 쓸 소/땅 지) ; ①마당(땅)을 쓺.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 ②청소.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
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육조(六祖) : (638 ~ 713)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스물 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麈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麈埃)」라고 지었다。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18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칠십육 세로써 입적하였다。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지해종사(知解宗師)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知解]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를 말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이화두는문헌상에오른것만해도천칠백공안인데그것을다의리(義理)로따져서안들그것했다고해서어디취직을해가지고밥벌이가되는것도아니고,그것몇백개통과했다고해서 생사해탈하는것도아니요, 그거 했다고 해서불조의혜명(慧命)을이어받은것도아니고,지옥에가봤자그것몇개알았다고해서염라대왕이알아줄바도아닌것입니다.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〇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 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〇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