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ㅊ'에 해당되는 글 95건

  1. 2025.01.20 찾다가 저 죽는다(No.151)—참선은 제일 높은 수행 방법이면서 제일 쉽다 |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다 | 믿으면 말 한마디에 언하대오(言下大悟).
  2. 2024.11.01 참선법(전강선사 No.011)—내가 나를 찾는 참선법이 우리 사는 이 남섬부주(南贍部洲)에 있다 | 부처님이 불과(佛果)를 이룰 것 같으면은 당장에 중생교화를 하는 것이다 | 참선법밖에는 생사를 해탈하는 법이 없다.
  3. 2024.10.07 참선(No.119)—참선은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급하고 요긴하다.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
  4. 2024.08.10 참선의 공덕(효과)(No.210)—참선을 하면 업이 소멸되어 소원성취한다 | 한 생각 돌이켜 ‘이뭣고?’ 하면 거기에서 법신불을 친견하는 것 | 용화사는 부처님을 깨닫게 하는 길을 가르치는 도량.
  5. 2024.07.14 참선은 쉽다(전강선사 No.018)—참선 공부는 얼굴 씻글 때 코 만지기 | 깨달지 못했으니 망(妄), 깨달랐으면 전부 망상 자체가 각(覺) | 수은 비유. 미진수(微塵數) 법계(法界).
  6. 2024.05.19 현중현(No.217)—일대사인연의 근원 | 본분작가(本分作家)를 만나야 | 현중현 도리에 나아가야 생사를 당적(當敵)할 수 있다 | 구경(究竟)의 깨달음.
  7. 2024.05.18 천도 법문(No.257)—(게송)人生百年情何許 永別悠悠更對床 遙指白雲歸去路 遠山點點天蒼蒼.
  8. 2024.04.27 찬불게(No.227)—(게송)天上天下無如佛~ | 불법(佛法)의 위대성은 죄 많은 중생도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목숨 바쳐서 수행하면 영원한 진리의 참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9. 2024.04.06 불법(참선)은 쉽다(No.114)—장사를 하는 형제 설화 | 번뇌망상이 진여불성에서 일어나므로 그놈 나온 곳을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 적멸궁에 들어갈 수 있다 | (게송)塵勞逈脫事非常~.
  10. 2024.04.02 참선(No.114)—관심일법(觀心一法)은 참선 | 불법은 참나를 깨닫는 게 목적 | 아무것도 얻을 것, 내놓을 것 없는 것이 바로 ‘얻은 것’ | 무량겁 쌓아 놓은 업(業)의 종자를 녹여 없애는 참선법. 1
ㅊ/찾다가 저 죽는다2025. 1. 20. 07:18

찾다가 저 죽는다(찾다가 그르친다) (No.151)—참선은 제일 높은 수행 방법이면서 제일 쉽다 |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다 |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 언하(言下)에 대오(大悟).


*‘찾다가 저 죽는다(찾다가 그르친다)’ ; 우리는 진묵겁(盡墨劫) 전에 이미 깨달음, 부처님과 조끔도 차별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도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족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한 생각 딱 돌이키면—어디서 깨달음이 오는 것도 아니요, 누가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곳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원만구족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너무나도 간결하고 송곳으로 찌르듯 하는 그러헌 법문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진묵겁 전부터서 원만구족해 있으면서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냐?
육도법계(六道法界)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시기 때문에 육도(六道)를 여의고 적광토(寂光土)는 따로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뭣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요긴한 길은 오직 이 한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할 때, 불이 펄펄 타오르는 지옥으로 느껴졌던 것이, 한 생각 돌이킨 곳에 바로 그것이 천당이 되고, 극락이 되는 그 묘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 활구참선법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송담스님(No.111) 1979년 동지 법회에서 정리]

[참고 ❶] 영가(永嘉) 스님의 『증도가(證道歌)』 구절.
불리당처상담연(不離當處常湛然) 멱즉지군불가견(覓卽知君不可見)

당처(當處)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湛然]하나, 찾은 즉은 알거라 그대가 보지 못할 것이라.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국사 지눌) 「진심소재(眞心所在)」
或曰息妄心而眞心現矣라 하니 然則眞心體用이 今在何處오
曰眞心妙體가 遍一切處니 永嘉云 不離當處常湛然이나 覓卽知君不可見이라 하며 經云 虛空性故며 常不動故며 如來藏中에 無起滅故라 하시며 大法眼云 處處菩提路요 頭頭功德林이라 하시니 此卽是體所在也니라

혹 말하길, “망심(妄心)을 쉬면 진심(眞心)이 나타난다니, 그렇다면 진심의 체(體)와 용(用)이 이제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하길, “진심묘체(眞心妙體)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다. 영가(永嘉) 스님이 이르시길, ‘당처(當處)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湛然]하나, 찾은 즉은 알거라 그대가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경에 이르시길, ‘허공의 성품인 연고며, 항상 동(動)하지 아니한 연고며, 여래장(如來藏) 중에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연고라’ 하며, 대법안[大法眼文益] 스님이 이르시길, ‘처처가 정각[菩提]의 길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공덕의 총림이라’ 하시니, 이것이 곧 이 마음의 체(體)가 있는 곳이니라.

眞心妙用은 隨感隨現홈이 如谷應聲이니라 法燈云 今古에 應無墜하야 分明在目前이로다 片雲은 生晩谷하고 孤鶴은 下遙天이라 하니 所以로 魏府元華嚴云 佛法이 在日用處하며 在行住坐臥處하며 喫茶喫飯處하며 語言相問處하며 所作所爲하나 擧心動念하면 又却不是也라 하시니

참마음[眞心]의 미묘한 작용은 감(感)을 따라 나타남이 산골짜기 소리를 응(應)하여 메아리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법등태흠(法燈泰欽) 스님이 이르시길, ‘고금에 마땅히 떨어짐이 없어 분명히 목전(目前)에 있다. 조각구름은 날 저문 골짜기에서 나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에서 내려옴이라’ 하니, 그런 까닭으로 위부(魏府)의 원화엄(元華嚴) 장로가 이르시길, ‘불법(佛法)이 날마다 작용하는 곳[日用處]에 있고, 행주좌와하는 곳[行住坐臥處]에 있으며, 차 마시고 밥 먹는 곳에 있고, 말하고 서로 묻는 곳에 있으며, 짓고 행위를 하나 마음을 들어 생각을 동(動)하면 또 옳지 못하니라‘

故知하라 體則遍一切處하야 悉能起用이나 但因緣有無不定일새 故로 妙用不定耳이어니와 非無妙用也이니라 修心之人이 欲入無爲海하야 度諸生死인댄 莫迷眞心體用所在也어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의 본체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여 다 능히 작용을 일으키나니, 다만 인연의 유무(有無)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용(妙用)도 또한 일정하지 않거니와 묘용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마음 닦는 사람은 무위(無爲)의 바다에 들어가 모든 생사를 건너려고 한다면 진심(眞心)의 체(體)와 용(用)이 있는 곳을 미혹하지 말지어다”


이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의 종교가 된 원인인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과 똑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데에 그 특수성이 있는 것입니다.

 '나도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 그것이 서면 공부는 절반은 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꼭! 성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

 

(17분 5초)


[법문]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여. 이 공부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은 누구라도 하면 되는 것이고, 또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 '참선, 참선' 요새 굉장히 그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불법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이 참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참선이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그러면 참선을 내가 직접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에 가서 참선을 지도를 받을 것인가? 어떻게 참선을 해야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 부딪히면 망연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와서 책을 사 봐도 잘 모르겠고, 어떤 스님을 만나서 물어봐도 확실하지를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앉아서 몇 달, 몇 해씩을 해 봤지만, 이것이 옳게 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참선은 참 어려운 것이다. 여간해서는 참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 결론에 도달해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 그런 거사님이나 보살님도 더러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참선은 제일, 불법 가운데에 제일 높은 수행 방법이면서 제일 쉬운 것입니다.
실지로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 가서 배워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사실 내용에 있어서는 가장 쉬운 것이고 간단한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법(佛法)에 이 참선(參禪)이 없으면 쌀에 알맹이를 빼내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광석 속에 금덩어리를 빼내 버린 광석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에 있어서 참선이라고 하는 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이 없다면 불교는 한낱 다른 종교와 별로 특수하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의 종교가 된 원인인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종교라 하기보다는 사람으로서 참사람이 되는 바른길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유교나 그밖에 종교에 있어서 '착한 일을 해라, 윤리 도덕을 지켜라, 바르게 살아라' 그러한 내용의 교리가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역시 다 그런 내용에 말씀도 참 많지만, 다맛 그런 것에 그쳐 버린다면 불교에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과 똑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데에 그 특수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인은 "그러면 석가여래 부처님은 사람이냐? 뭣이냐?"
"아, 그 사람이다"

"아하! 그러면 부처라 하는 것이 별로 별것이 아니로군요"
"왜 그리야?"

"깨달라 봤자 사람이라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느냐"고, 이렇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 성현 가운데에 성현이 되셨다. 진리와 하나가 되셨다' 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더 부처님을 존경하게 되는데.
우리도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부처님께서 전(傳)하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면, 목숨 바쳐서 도를 닦으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 불자(佛子)가 맨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말세(末世)에 태어난 죄 많은 중생이 머리도 나쁘고, 지식도 없고, 몸도 건강틀 못하고, 여자로 태어났고, 우리 같은 사람이 참선을 한들 무슨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겠는가? 그저 금생에는 참선이 좋다 그러고, 선방 토방에 신발만 벗어 놔도 그 공덕으로 지옥에는 안 떨어진다고 그러니 금생에는 인연이나 맺으리라' 이러한 지나치게 겸손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최상승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대뜸 처음부터 '나도 견성성불할 수 있다,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나도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 데부터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고 대든 것하고, 벌써 처음부터서 안 될 줄 알고 하는 것과는 그 결과적으로 결과에 나타난 것은 하늘과 땅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참선법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할 때에도 '된다'고 믿고, 된다고 믿어지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안 될 줄 알고, 실패할 줄 알고, 심심풀이로 시험 삼아서 해 갖고 그 일이 백(百)에 하나도 성공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범부(凡夫)를 고쳐서 성현(聖賢)을 맨드는 이 공부를 목숨을 바쳐서 해도 어려웁고 어려울 텐데. 처음부터 안 될 것을 알고, 안 될 폭을 대고, 미리서부터서 넘어질 자리부터 보고 씨름을 하려고 하는 사람과 같애서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나도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 그것이 서면 공부는 절반은 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꼭! 성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떠한 보물이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을려고 할 때에는 혹 찾어지기도 하고, 혹 안 찾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마치 내 호주머니 속에 있는 어떤 물건을 찾은 거와 같애서 그 호주머니 속에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믿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성취를 할 수가 있다고 단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 '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의 마음, 사람 사람이 다 '마음' 소리를 다 하고, '마음'이라는 것을 다 그 말을 알고 있지만, 사실 그 마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을 본격적으로 그 마음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은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단 일 초 동안도 우리로부터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이지만,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은 모냥이 없는 것이고, 형상이 없는 것이라 분명히 거기 있는데 찾으면 알 길이 없는 것이고, 보이지를 아니하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두 손을 이리저리 내저어서 더듬어 봤자 그 마음은 잡히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지만, 모든 것을 보는 그 자체를 볼려고 하면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눈을 통해서 볼 때 거기에 있었는데, 그 보는 그놈을 돌이켜서 다시 볼려고 하면 자취가 없습니다. 여기에 깨닫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웁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한 말을 과거에도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건 깨달음을 100프로 숨김없이 다 표현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지식, 도인(道人)들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선지식 말 한마디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린 분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냐? 여지없이 믿어 버렸기 때문에, 믿으면 말 한마디에 끝나는 까닭인 것입니다.

설사 한마디 말 한마디에 깨닫지를 못한다 하더라도 화두(話頭) 한마디를 받아 가지고, 여지없이 앞도 생각하지 않고, 뒤도 생각하지 않고, 옆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그 한마디 화두만을 의심(疑心), 의관(疑觀) 참구(參究)해 가면 조끔도 깨달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오직 이 한마디 의심뿐인 것입니다.

이 한마디의 의심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해 버리고, '부처님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깨닫게 해 준다' 해도 솔깃하지 아니하고, '염라대왕이 와서 끌어간다' 해도 조끔도 두려운 생각도 없고, 다못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한 앞에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염라대왕이 쇠사슬을 가지고 옥졸이 와서 묶어간다 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되어 버린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최상승법이 어려웁고도 쉬웁고, 쉬우면서 어려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판치생모' 화두뿐만이 아니라 '무자(無字)‘ 화두를 한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시삼마(是甚麼) '이뭣고?' 화두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차를 탈 때도, 속이 상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다못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16분5초~33분1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사(居士) ; ①고대 인도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던 부호. ②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자 신도. 출가하지 않고 법명(法名)을 받은 재가(在家)의 남자.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 • 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釋迦)에 대한 존칭.
여래(如來)는 부처님 10호(十號)의 하나로 범어 Tathagata(다타가타)의 역(譯)이다.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토방(土房) ; 방에 들어가는 문 앞에다 약간 높고 편평하게 다져 놓은 흙바닥. 여기에 쪽마루를 놓기도 한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폭을 대다 ; 놓이게 된 형편이나 처지를[폭을] 생각하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 

 


[참고 ❶]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1979.12.22) (7분1초)
우리는 진묵겁(盡墨劫) 전에 이미 깨달음,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부처님과 조끔도 차별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도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족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한 생각 딱 돌이키면—어디서 깨달음이 오는 것도 아니요, 누가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곳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원만구족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너무나도 간결하고 송곳으로 찌르듯 하는 그러헌 법문을 해 주신 것입니다.

다못 알 수 없는 꽉 맥힌 의심, ‘이 무엇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앉았거나 누웠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죄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괴롭거나 쓰리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프다고 가려 내놓고, 바쁘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잠잘 때라고 가려 내놓고, 속상헌다고 가려 내놓고, 기쁘다고 가려 내놓고, 이리저리 다 가려 내놓으면 언제 공부를 해야 할 때냐?
중생은 단 한 생각 동안이라도 생각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생각 없는 편안하고 고요하고 그러헌 때를 찾어서 공부를 할려고 하면 일생 동안 공부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는 보아야 하고, 귀를 통해서는 들어야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아야 하고, 숨쉬어야 하고, 입을 통해서 맛보고 말을 해야 하고, 손과 몸을 통해서는 따뜻하고 차웁고 딱딱하고 부드러운 거 그런 것을 다 감각을 해야 합니다. 잠시도 육근(六根)을 쉬고 일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나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활동하는 시간을 없이 하고 참선을 헐랴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토록 그 사람이 생각하는 참선은 헐 기약이 없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고 영특해서,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언제나 어디에나 두루하지 아니헌 곳이 없습니다.
그 표현이 바로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요.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진여불성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눈으로 볼 수 없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없고, 손을 통해서 잡을 수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는 깨달라야 합니다.

왜 눈으로 코로 귀로 육식(六識)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진여불성의 표현인데, 어째서 눈으로 볼랴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귀로 들을랴고 하면은 들리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을랴고 하면은 잡히지를 않는 것이냐?
우리는 목숨 바쳐서,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라도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고 법신불(法身佛) 아닌 것이 없건만, 왜 볼려고 허면 볼 수가 없고, 들을려고 허면 들을 수가 없느냐? 우리 모두에게 진묵겁 전부터서 원만구족해 있으면서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냐?

육도법계(六道法界)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시기 때문에 육도(六道)를 여의고 적광토(寂光土)는 따로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뭣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요긴한 길은 오직 이 한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할 때, 불이 펄펄 타오르는 지옥으로 느껴졌던 것이, 한 생각 돌이킨 곳에 바로 그것이 천당이 되고, 극락이 되는 그 묘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 활구참선법 ‘이 무엇고?’ 뿐인 것입니다.(12분14초~19분14초)

[참고 ❷] 영가(永嘉) 스님의 『증도가(證道歌)』 구절.
불리당처상담연(不離當處常湛然) 멱즉지군불가견(覓卽知君不可見)

당처(當處)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湛然]하나, 찾은 즉은 알거라 그대가 보지 못할 것이라.

[참고 ❸]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국사 지눌) 「진심소재(眞心所在)」
或曰息妄心而眞心現矣라 하니 然則眞心體用이 今在何處오
曰眞心妙體가 遍一切處니 永嘉云 不離當處常湛然이나 覓卽知君不可見이라 하며 經云 虛空性故며 常不動故며 如來藏中에 無起滅故라 하시며 大法眼云 處處菩提路요 頭頭功德林이라 하시니 此卽是體所在也니라

혹 말하길, “망심(妄心)을 쉬면 진심(眞心)이 나타난다니, 그렇다면 진심의 체(體)와 용(用)이 이제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하길, “진심묘체(眞心妙體)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다. 영가(永嘉) 스님이 이르시길, ‘당처(當處)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湛然]하나, 찾은 즉은 알거라 그대가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경에 이르시길, ‘허공의 성품인 연고며, 항상 동(動)하지 아니한 연고며, 여래장(如來藏) 중에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연고라’ 하며, 대법안[大法眼文益] 스님이 이르시길, ‘처처가 정각[菩提]의 길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공덕의 총림이라’ 하시니, 이것이 곧 이 마음의 체(體)가 있는 곳이니라.

眞心妙用은 隨感隨現홈이 如谷應聲이니라 法燈云 今古에 應無墜하야 分明在目前이로다 片雲은 生晩谷하고 孤鶴은 下遙天이라 하니 所以로 魏府元華嚴云 佛法이 在日用處하며 在行住坐臥處하며 喫茶喫飯處하며 語言相問處하며 所作所爲하나 擧心動念하면 又却不是也라 하시니

참마음[眞心]의 미묘한 작용은 감(感)을 따라 나타남이 산골짜기 소리를 응(應)하여 메아리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법등태흠(法燈泰欽) 스님이 이르시길, ‘고금에 마땅히 떨어짐이 없어 분명히 목전(目前)에 있다. 조각구름은 날 저문 골짜기에서 나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에서 내려옴이라’ 하니, 그런 까닭으로 위부(魏府)의 원화엄(元華嚴) 장로가 이르시길, ‘불법(佛法)이 날마다 작용하는 곳[日用處]에 있고, 행주좌와하는 곳[行住坐臥處]에 있으며, 차 마시고 밥 먹는 곳에 있고, 말하고 서로 묻는 곳에 있으며, 짓고 행위를 하나 마음을 들어 생각을 동(動)하면 또 옳지 못하니라‘

故知하라 體則遍一切處하야 悉能起用이나 但因緣有無不定일새 故로 妙用不定耳이어니와 非無妙用也이니라 修心之人이 欲入無爲海하야 度諸生死인댄 莫迷眞心體用所在也어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의 본체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여 다 능히 작용을 일으키나니, 다만 인연의 유무(有無)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용(妙用)도 또한 일정하지 않거니와 묘용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마음 닦는 사람은 무위(無爲)의 바다에 들어가 모든 생사를 건너려고 한다면 진심(眞心)의 체(體)와 용(用)이 있는 곳을 미혹하지 말지어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언하대오(言下大悟) ; 말 아래에 크게 깨닫는다. 말(법문) 듣다 깨닫는다. '직하흔번(直下掀飜 바로 뒤집다)'도 같은 뜻의 말이다.
*언하(言下) ; [주로 ‘언하에’의 꼴로 쓰여] 말이 떨어진 바로 그때. 또는 말을 하는 그 즉시.
[참고] 송담스님(No.157)—전강 조실스님 7주기 추모재(81.12.02.음)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상(平常)에 법문하시기를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말 아래 크게 깨달으라” 하셨습니다.
말은, 꼭 ‘선지식이다’라고 널리 알려진 그분의 말씀만이 말씀이 아니고 바람소리, 차 소리, 새 우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우리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가 불보살의 법문이요 선지식의 법문인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도 불보살의 모습이요, 법문이요, 진리의 표현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얼마만큼 간절히 그리고 철저하게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을 내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 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 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 말이여.


[참고 ❷]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 ; 대오선(待悟禪).
*대오선(待悟禪 기다릴 대/깨달을 오/고요할 선) ; 참선하는 데 있어서 깨닫기[悟]를 기다리는 것[待].
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데 10가지 병(病)의 하나로, 수행자는 이런 생각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참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 법문에서.(2분20초)
참선하는 데 있어서 제일 몹쓸 병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오선(待悟禪), 「어서 깨달랐으면...」
깨닫기를 바래는 그것이 설사 밤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해서 화두가 제법 일여(一如)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찰나간이라도 「어서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와서 탁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애써서 99%까지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저 천길만길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바래는 마음, 「어서 속히 어떠한 목적을 성취했으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 공부가 잘 되어갈수록 「이 무엇고?」
조끔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또 잘 안된다고 번뇌심이나 짜증도 내지를 말고, 오직 한 생각 한 생각, 산을 보든지, 물소리를 듣던지, 새소리를 듣던지, 기차 소리를 듣던지, 애 우는 소리를 듣던지, 문닫는 소리를 듣던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하는 것입니다.(8분32초~10분51초)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ㅊ/참선(의 목적)2024. 11. 1. 18:15

참선법(전강선사 No.011)—내가 나를 찾는 참선법이 우리 사는 이 남섬부주에 있다 | 불과(佛果)를 이룰 것 같으면은 당장에 중생교화하는 것이다 | 참선법밖에는 생사를 해탈하는 법이 없다.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5분 43초)



[법문] 전강선사(No.011)—전강선사 일대기 제4호(경술1970년 12월 3일 새벽.음) (전011)

참, 이 이상 더, 천상천하에 어디 무슨 뭐 별별 세계에 다 없는 참선법(參禪法)이 우리 사는 이 남섬부주(南贍部洲), 이 세계에 있단 말여. 남섬세계에 가서 남부세계에 가서 있거든.
세상에 이 세계는, 그저 인생이 나면 죄만 퍼 짓고, 그저 인생이 나오면은 살래야 살 수 없고, 그저 나오다가 죽기도 허고, 이것 좀 살다가 죽기도 허고, 맨 놈의 남섬부주 죄짓는 세상인디, 아! 이 세계에 와서 있다. 이 참선법이. 생사 없는 법이!

그 세상에 다 있제. ‘나’는 다 있고. 누가 주인공이 없어?
‘나’는 다 있고. 주인공은 다 있지마는 어째 남섬부주에 꼭 난 사람이래야 꼭 주인공, 내가 나를 찾는 이 참선법이 있어. 그거 묘하다!
사바세계(娑婆世界)를 여의고는 없거든. 그러허니 불불(佛佛)이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는 이 사바세계를 오신단 말이여. 사바세계에 내려오셔서 사바세계 중생을 제도헐려고 내려오신다 그 말이여. 그러니 부처님이 대도(大道)를 이루어 가지고는, 불과(佛果)를 증(證)해 가지고는 오실 디가, 출세(出世)헐 디가 여그밖에 없어.

부처가 되아 가지고 불과(佛果)를 증해 가지고는 가만히 중생교화(衆生敎化)도 않고 있을 수가 있나. 제일 큰 일이 중생교화인디, 중생을 교화 안 헐 것 같으면은 어찌 될 것이냐 말이여. 뭐가 될 것인가 말이여. 이 중생은 전부 생사고(生死苦)만 받고 있게.

부처님도 석일(昔日)에 우리와 같은 동아(同我), 똑같은 범부(凡夫)인데 그렇게 생사고를 같이 받아 오시다가 먼첨 성불을 했으니 어서 속히 중생을 위해야 헐 것 아닌가. 중생 때, 불과(佛果) 증허기 전 중생 때 부처님도 우리와 같이 생사고를 받았으며, 모도 미(迷)헌 우리 중생 사바세계에서 같이 부모형제가 되았으며, 그 인연 깊은 인연을 천만 겁 중에 같이 해 나왔는데 모도가 부모형제인데, 그 사바세계에서 생사고를 받고 있는 그 중생을 제도(濟度) 안 허고 무엇을 헐 것인가? 부처님이 불과를 이룰 것 같으면은 곧 당장에 그만 사바세계에 인자 하강(下降)허셔 가지고는 중생교화를 허는 것이여.

참선법! 참선법밖에는 생사를 해탈허는 법이 없는데, 무엇을 헐 것이여!

약문하자시(若問何者是)냐? 그럼 묻노니 어떤 것이 옳느냐?

세상에 상량(商量)도 귀신굴이요, 문자(文字)도 고인조박(古人糟粕)밖에는 안 되아. 짜 먹어 버리고 내버린 찌꺼리밖에 안 된다. 약문(若問)허노니, 내가 돌이켜 묻노니 하시(何是), 시(是)냐? 어떤 것이 그러면 참선법, 옳은 선법이냐?
방행여우적(棒行如雨滴)이다. 방맹이를 때리되, 방맹이로 막 치되 방맹이가 하나가 아니라 우적(雨滴)이니라. 빗방울이니라 했다. 그러니 어디 어떤 것이 참선이라고, 어떤 게 옳은 것이냐고 참선 도리를 묻거드면은 방맹이로 빗방울처럼 막 뚜드려 팬다 그 말이여.

그러니 어디 어디 그 뭔 이치를 가르켜 놓았어? ‘참선이 요런 것이다’ 가르켜 놓았어? ‘참선 이치가 요런 것이다’ 딱! 가르켜 놓을 것 같으면은 그것은 선(禪)이 아니여. 무엇이라고 딱 손가락처럼 착 나오면은 그거 참선법도 아니고 상견(相見)도 아니고 그거 아무것도 아니여. 그렇게 허들 못혀.(9분25초~15분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남섬부주(南贍部洲) ; 수미산(須彌山 :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의 사방에 있다는 사주(四洲 : 네 대륙)의 하나. 섬부(贍部)는 산스크리트어 jambu의 음사(音寫)로 잠부(jambu) 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와 같이 일컫는다.
수미산 남쪽에 있으며,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다.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고 한다. 염부제(閻浮提), 염부주(閻浮洲)와 같음.
*‘생사 없는 법이!’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불과(佛果) ; 불인(佛因, 부처님이 되기 위한 인因. 즉 모든 선근공덕善根功德)의 대응어. 불도수행의 결과. 불위(佛位). 부처라고 하는 궁극의 결과. 결과로서 부처로 된 상태. 깨달음.
*증(證) ; ①깨달음. ②깨달은 바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체화(體化)함.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석일(昔日 옛날 석/날 일) ; 옛적(이미 많은 세월이 지난 오래전 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알음알이. 지해(知解).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고인조박(古人糟粕 예 고/사람 인/술지게미 조/술지게미 박) ;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인들의 저서와 말은 모두 찌꺼기란 뜻으로, 무릇 참된 도는 말과 글로 전달될 수 없으므로 현재 전하는 모든 것은 술지게미에 불과하다는 뜻.
*상견(相見) ; 상(相)이 있다는 견해.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ㅊ/참선(의 목적)2024. 10. 7. 11:02

참선(No.119)—참선은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 ‘나를 깨닫는 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급하고 요긴하다 | 인간으로서 최고의 길이 바로 이 참선법.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6분 12초)



[법문] 송담스님(No.119)—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용119)

참선(參禪)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참선은 명예와 이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과 수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첫째, 내가 나를 깨닫지 못하고 남을 제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능히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헤엄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답시고 물에 풍덩 뛰어들어가면 빠진 사람을 건지기커녕 자기까지 빠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생을 제도할 원대한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깨닫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나를 깨닫는 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우선(優先)해서 중요하고,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급하고 요긴한 것입니다. 밥을 먹는 일도 급하고, 잠을 자는 일도 급하고, 세속에 우리가 맡은 모든 일들이 하나도 버려서는 안되겠지만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우선 나부터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는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망각하고 오직 자식 생각만을 하시지만, 그렇기는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는 우선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끄고 자식 불을 끌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효자라 하더라도—그 효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부모만을 위하는 하늘에서 낸 효자라 할지라도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끌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 발등의 불을 쪼끔 오래 놔둔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잠시 뜨겁다가 마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 발의 불부터 끄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參禪)은 금생에 사람 몸 받을 때 하지 아니하면—이것은 영원히 다시 사람 몸을 받을지, 다시 또 이 불법을 만나게 될지, 정말 막연하고 막연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도 우선해서 참선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이고, 권리를 많이 누리고, 명예를 하늘 닿도록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들은 나의 죽음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죽을 때 한 톨도 한 치도 그것을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죽어갈 때에는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명예를 얻느라고 얻은 죄업(罪業), 재산을 얻느라고 지은 죄업, 권리를 누리느라고 지은 죄만을 산더미처럼 지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통곡을 하고 뉘우치고 눈물을 흘려도 아무도 받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살고 있을 때, 그리고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루하루를 정말 알뜰하고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과거의 무량겁에 지어 놓은 모든 죄도 소멸을 할 수가 있고, 이 공부에 철저하면서 세속적인 또는 인간적인 책임을 충실히 한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며, 앞으로도 진리를 깨닫는 목적을 향해서 걸어가므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어코 기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길, 이러한 지혜로운 길, 인간으로서 최고의 길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21분27초~27분3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參禪)은 금생에 사람 몸 받을 때 하지 아니하면—이것은 영원히 다시 사람 몸을 받을지, 다시 또 이 불법을 만나게 될지, 정말 막연하고 막연할 따름인 것입니다’ ;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
[참고 ❶] 『선관책진(禪關策進)』 「제1 제조법어절요(諸祖法語節要 : 여러 조사의 법어 중에서 오직 공부 지어 가는 데에 요긴한 대목만을 뽑아 요약함)」 '황룡사심신선사소참(黃龍死心新禪師小參)' 참고.
諸上座 人身難得 佛法難聞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상좌들이여!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듣기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참고 ❷] 『서장(書狀)』 '답탕승상(答湯丞相)' 참고.
人身難得 佛法難逢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인신난득(人身難得) ;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참고 ❶] 『잡아함경(雜阿含經) 406.』 (제15권) ‘맹구경(盲龜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堂 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海 有一盲龜 壽無量劫 百年一出其頭 海中有浮木 止有一孔 漂流海浪 隨風東西 盲龜百年 一出其頭 當得遇此孔不 阿難白佛 不能世尊 所以者何 此盲龜 若至海東 浮木隨風 或至海西 南北四維圍遶亦爾 不必相得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佛告阿難 盲龜浮木 雖復差違 或復相得 愚癡凡夫 漂流五趣 暫復人身 甚難於彼 所以者何 彼諸衆生 不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 展轉殺害 強者陵弱 造無量惡故 是故比丘 於四聖諦 當未無間等者 當勤方便起增上欲 學無間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참고 ❷] 『잡아함경(雜阿含經) 442.』 (제16권) ‘조갑경(爪甲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 告諸比丘 於意云何 我爪甲上土爲多 此大地土多 諸比丘白佛言 世尊甲上土甚少少耳 此大地土甚多無量 乃至算數譬類不可爲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佛告比丘 如甲上土者 若諸衆生 形可見者 亦復如是 其形微細 不可見者 如大地土 是故比丘 於四聖諦未無間等者 當勤方便 學無間等 佛說是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如陸地 如是水性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 人道者 亦復如是 如大地土 如是非人亦爾 ......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육지처럼 물의 성질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이렇게 사람 세계[人道]의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그렇게 사람이 아닌[非人]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을 설명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甲上土 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畜生 餓鬼亦如是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동[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罪] 행위[業 : 身口意 三業].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ㅊ/참선공덕(효과)2024. 8. 10. 15:59

참선의 공덕(효과)(No.210)—참선을 열심히 하면 업(業)이 소멸이 되어서, 그 청정한 마음으로 한 생각 원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돌이켜 ‘이뭣고?’ 하면 거기에서 법신불(法身佛)을 친견하는 것 | 용화사는 여러분에게 부처님을 깨닫게 하는 길을 가르켜 드리는 도량(道場).


*참선의 공덕(효과) ; ‘내가 나를 깨달아서 이 생사(生死)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自由自在)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참선의 근본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이전에도 어떠한 공덕이 있느냐 하면, 참선법을 믿고 날마다 여법(如法)하게 노력을 해 가다 보면—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과 아울러 화두를 잘 관조해 나가면 우선 피가 맑아지고, 피로가 풀리고, 정신이 안정이 되고, 정신이 통일이 됩니다. 그래서 생활하면서 일어나는 온갖 짜증도 쉽게 풀어져서 언제나 경건한 마음, 환희의 마음으로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自信)이 없고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 정신이 안정이 되고 집중력이 생기고 스스로 자기의 중심이 잡히니까, 모든 일을 당했을 때 의지력이 강해집니다. 그리고 정신 집중력이 생기고 또 창조력이 생기고, 지적 기능이 개발이 되니까 ‘머리도 좋아진다’ 그런 면도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앞에 말한 여러 가지 점이 차츰차츰 좋아지니까 마음이 느긋하고 여유있고 편안하고 원만해져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인격자(人格者)가 될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면 저절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던 모든 업(業)이 소멸(消滅)이 되기 때문에 업이 소멸이 되어서 청정한 마음으로 한 생각 원하면, 인간 세상에 제일 큰 원(願)이 천자(天子)가 되는 원이라면 천자도 가능하거든 그밖에 조그마한 원(願)이야 물어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7분 36초)


[법문] 송담스님(No.210)—1983년 칠석법회(83.08.15) (용210)

여러분은 칠석날을 맞이해서 우리집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고, 우리 남편이 승진하기를 바라고, 우리 아들과 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혼기를 맞이한 우리 딸이 좋은 신랑감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금 간절하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러한 소원은 인간 세상에 있어서의 조그마한 너무너무 작은 일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의 세상은, 사람이 사람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그것도 또한 중대한 일일시 분명합니다.

그러한 원(願)을 성취하려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콩을 많이 수확한 사람이 바늘에다 그 콩을 꿰어가지고 등잔불에 구워 먹고, 계란을 많이 구해 가지고 계란 알맹이는 쏟아 버리고 그 계란 속에다가 쌀 한 숟갈을 씻어서 넣고, 그래 가지고 그 계란을 젖은 종이로 싸 가지고 부엌 불속에다 넣어서 계란밥을 해 먹는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릴 적을 추억을 하실 것입니다마는, 농사지어 가지고 바늘에다 콩을 구워 먹고, 양계(養鷄)를 해 가지고 알맹이는 쏟아 버리고 거기다 계란밥을 해 먹기 위해서, 그래 양계를 하고 콩 농사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은 우스운 일일 것입니다.

불법을 믿으면서, 정말 불법(佛法)의 근본 목표인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로 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수행을 해 나가면 높은 벼슬을 하고, 재수(財數) 대통(大通)하고, 아들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러한 일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 저절로 이루어지냐 하면 참선을 열심히 하면 저절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던 모든 업(業)이 소멸(消滅)이 되기 때문에 업이 소멸이 되어서 청정한 마음으로 한 생각 원하면, 인간 세상에 제일 큰 원(願)이 천자(天子)가 되는 원이라면 천자도 가능하거든 그밖에 조그마한 원(願)이야 물어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칠성불공을 하고 산신기도를 하고, 좋다는 데는 강화 보문으로, 양양 낙산사로, 남해 보리암으로 발이 닳아지도록 쫓아다녀도 여간 소원이 잘 성취가 안 되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 과거에 지은 업(業)이 꽉 쩔어 가지고 그놈이 장애가 되어가지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말이여.

그 원(願)을 성취하려면 그러한 성지(聖地)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나, 그보다도 더 빠르고 더 요긴한 방법은 강화까지 안 가고 자기 있는 가정에서 일하면서, 밥 지으면서, 빨래하면서, 차를 타면서, 절에 오면서, 절에 가면서, 법회날은 절에 오면서, 절에 와서 또 법문을 다 듣고 가면서,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돌이켜, 무엇을 볼 때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도 ‘이뭣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이뭣고?’

빨래하면서 ‘이뭣고?’
속상하면서 ‘이뭣고?’
슬퍼하면서 ‘이뭣고?’
기뻐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이 계신 법당(法堂)이요, 강화 보문이요, 양양 낙산사요, 오대산 적멸궁이요, 남해 보리암이다 이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만약에 오대산 적멸궁에만 계시고, 양양 낙산사에만 관세음보살이 계시고, 남해 보리암에만 관세음보살이 계시고,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불법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성지(聖地)를 마련한 것은 거기에 정성스럽게 감으로써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신심을 내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절이 필요한 것이지,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날 때 바로 거기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무슨 파란 나무나 빨간 꽃 한 송이를 볼 때 거기에서 바로 법신불을 친견할 줄을 알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화사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부처님을 깨닫게 하는 길을 가르켜 드리는 도량(道場)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러한 최상승법을 듣고 한 생각도 옮기지 아니하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불법을 깨닫고 부처님을 친견(親見)할 길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틀림없이 여러분의 소원이 성취될 것을 나는 자신 있게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은 대도(大道)도 틀림없이 성취하시고, 인간 세상의 크고 작은 소원도 반드시 성취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보증을 하는 바입니다.(48분44초~56분1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칠석(七夕) ; 매년 음력 7월7일 칠석날이 되면 칠성의 주존불이자 북극성을 뜻하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여래(七星如來)와 칠원성군(七元星君)에게 공양을 올리고 가족의 수명장수와 복덕구족을 위해 칠석기도를 올리며 법회를 거행한다.
용화사는 최상승법을 믿고 닦아가는 도량으로써 오직 비로자나 법신불 한 분만을 모셨다. 이 부처님 한 분 속에 치성광여래도 계시고, 칠성여래도 계시고, 일월광보살도 계시고, 이 한 부처님 속에 팔만대장경도 그 속에 다 들어 계신다.
 
*칠성신앙(七星信仰) ; 중국 도교의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불교화한 것. 절에서 치성광여래는 조각상으로 꾸민 예는 없고, 후불탱화 형식으로 칠성탱화를 모신다. 치성광여래가 주불이며, 좌우 보처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주위에 일곱여래와 칠원성군 등이 도열되어 있다.
칠성신앙의 대상은 칠여래(七如來)의 화현(化現)인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칠여래의 증명을 거친 칠성신(七星神 칠원성군을 인격화한 신)이다. 따라서 칠성탱화를 그릴 때에는 칠여래와 함께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반드시 묘사하게 된다.
칠원성군은 인간의 장애 재난 소멸, 소원성취, 복덕구족, 수명장수를 관장한다고 하여 예로부터 민간에서 가족의 수명장수와 복덕구족을 위해 많이 믿었다.
*원(願) ; 소원(所願). 바라고 원함. 또는 바라고 원하는 일. 숭고한 뜻을 성취하려는 결의.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 karma [팔리어]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 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천자(天子) ;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제국의 군주를 이르는 말. 우리나라에서는 임금 또는 왕(王)이라고 하였다.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 · 등(燈) · 꽃 · 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산신(山神) ; 산신령(山神靈). 산을 수호하는 신령(神靈).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친견(親見 가까이하다·몸소·친히 친/보다·뵙다·만나다 견) ; 몸소 가까이서 뵙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ㅊ/참선은 쉽다2024. 7. 14. 10:44

참선은 쉽다(전강선사 No.018)—참선 공부는 쉽다. 얼굴 씻글 때 코 만지는 것 | 망상 그놈 때문에 참선을 허는 것 | 깨달지 못했으니 망(妄)이지, 깨달랐으면 전부 망상 자체가 각(覺) | 수은(水銀)의 비유. 미진수(微塵數) 법계(法界) | 화엄경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깨달으면은 망이 없는 것이 아니여. 망(妄) 그놈이 각(覺)이여 그만! 낱낱이 각(覺)이지, 조금도 뭐 여읠 것도 없고. 망상을 여의고 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 자체가 각이여! 그대로가 각이여.

 

(3분 24초)


[법문] 전강선사(No.018)—전강선사 일대기 제8호(경술1970년 12월 13일 음) (전018)

그 참선 공부, 세상에 참선 공부 같이 쉬운 것은 없어.
그렇게 쉽건마는, 낯 씻다가 코 만지기요. 얼굴 씻글 때 코 안 만져지나? 그대로 코 만져지는 것인디. 얼굴 씻글 때 코 만지는 것이여. 허! 그것 참!

천하에 그렇게 쉬웁건마는 어째도 그렇게 모도 안 된다고 야단들이고, 망상 따문에 못 허겄다고 야단이고.
망상 그놈 따문에 참선을 하는 것이고, 망상 따문에 화두가 그놈이 있는 것이지, 망상 없으면 무슨 화두가 있나? 화두가 없어. 망상 그놈 따문에 화두가 따악 그놈이 인자 있지.

그래서 화두 그놈은 망상을 다루는 놈이여. 망상을 잡드리하는 놈이여.
화두 그놈이 아니면은 망(妄)을 대체 주체할 수가 없어. 일어나는 전체가 망이니까.
깨달지 못했으니 망(妄)이지. 깨달랐으면 전부 그놈이 각(覺)인디.

깨달으면은 망이 없는 것이 아니여, 망(妄) 그놈이 각(覺)이여 그만! 낱낱이 각(覺)이지, 조끔도 뭐 여읠 것도 없고.
망상을 여의고 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 자체가 각이여! 그대로가 각(覺)이여.

수은(水銀)을 한 뭉치 내던졌다. 이놈이 천 쪼가리, 그놈이 조그만한 덩어리가 모도 갈라져서 만 덩어리가 되고 몇만 덩어리가 되아. 쓸어 모으면은 한 덩이여.

망(妄) 역시 그 깨달지 못해 중생 때에는 전부 망(妄)이더니, 깨달라 놓고 보니 그놈이 낱낱이 다 각(覺)이다, 하나도. 그러니깐 미진수(微塵數) 법계(法界)지. 가는 티끌 수 법계라.
화엄경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지! 화엄경 품수(品數)가 일사천하미진수품이여. 화엄이란 화엄도리는 다 각인데, 낱낱이 각이여.(2분2초~5분2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참선(參禪) 공부, 세상에 참선 공부겉이 쉬운 것은 없어' ; 이 내용의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각(覺) ; 깨달음.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수은(水銀)을 한 뭉치 내던졌다. 이놈이 천 쪼가리, 그놈이 조그만헌 덩어리가 모도 갈라져서 만 덩어리가 되고 몇만 덩어리가 되아. 쓸어 모으면은 한 덩이여' ; 
[참고] 황벽(黃檗) 스님의 『완릉록(宛陵錄)』에서.
問 : 本旣是佛 那得更有四生六道種種形貌不同

배휴가 여쭈었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고 한다면 어째서 4생(四生) 6도(六道)가 있어 여러 모습들이 같지 않습니까?

師云 : 諸佛體圓 更無增減 流入六道 處處皆圓 萬類之中 箇箇是佛 譬如一團水銀 分散諸處 顆顆皆圓 若不分時 祇是一塊 此一卽一切 一切卽一 種種形貌 喩如屋舍 捨驢屋入人屋 捨人身至天身 乃至聲聞緣覺菩薩佛屋 皆是汝取捨處 所以有別 本源之性 何得有別

황벽선사가 대답했다. "모든 부처는 그 본체가 원만하여 거기에 또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다. 육도(六道)에 흘러든다 할지라도 그 어느 곳에서나 원만하다. 이와 같이 모든 종류의 중생들도 하나하나가 부처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한 덩어리의 수은(水銀)이 사방으로 나누어 흩어질지라도 그 한 방울 한 방울은 모두 둥근 것과 같다. 나뉘지 않았을 때에도 다만 한 덩어리일 뿐이니, 이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이다.
여러 가지 모습들은 비유하자면 집과 같은 것이다. 즉 나귀의 집을 버리고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또 사람의 몸[人身]을 버리고 하늘의 몸[天身]에 이르며, 내지 성문 · 연각 · 보살 · 부처의 집은 모두 너 자신이 어디에 들어가서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집의 차별이 있는 것이지만 본래 근원의 성품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미진수(微塵數 작을 미/티끌 진/셀·수 수) ; 세세하게 부수어진 것 같이 수많음. 셀 수 없는 무한의 수.

*미진(微塵) : 물질을 분석하여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극소 단위.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 법장현수(法藏賢首) 스님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보면,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龍宮)에 가서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화엄경)을 보았는데, 상본·중본·하본 3가지 본(本)이 있었다.
그 중에 상본(上本)이 십삼천대천세계미진수(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게송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었다 한다. 중본(中本)은 49만 8800게송 1200품(品)이고, 하본(下本)은 10만 게송 38품이었다 한다.
용수보살이 상본과 중본은 사바세계 사람들 마음의 힘으로서 능히 가질 수 없으므로 전하지 않고, 하본(下本)을 외어 세상에 전하였고 또 그것을 간략히 한 약본(略本)이 80권 본, 60권 본이 되었다 한다.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은 ‘미진수(微塵數 셀 수 없는 무한수)’의 품(品)으로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 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화엄경을 이루고 있으며, 곧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로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전강선사 법문 275번 참고)

사천하(四天下) ; 고대인도의 세계관 및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 주위를 일곱 개의 산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둘러싸고 있으며, 일곱 번째 산의 바깥에 있는 큰 바다에 사방으로 네 개의 대륙이 있는데, 이 네 개의 대륙을 사천하라 한다. 사주(四洲) · 사대주(四大洲) · 사대부주(四大部洲) · 수미산주(須彌山洲)라고도 한다.

 


[참고 ❶] 전강선사(No.018)—전강선사 일대기 8호(경술년 12월 13일)(1971년 1월 9일)(13분50초)
직지사에서 며칠 쉬고서는, 동래온천이나 가서 온천을 좀 허고—이렇게 피는 올라와서, 여가서 뭉쳐 있으니깐 ‘온천이 좋다’ 하고. 간뎅이 같은 것이 푹푹 올라오면 비린내가 나 쌓고 살 수가 있나. 그래 인자 동래 온천을 내려갔지. 가서, 금정사를 들어갔더니 기인벽이가 그 사람이 유담인데, 유담이 반가와 혀. 아주 반가와험서 오! 참 반가와 혀.
사방서 선지식 스님, 큰스님 찾아다니면서 인가 다 맞고 만공 큰스님한테까장 다 돌아서 왔다는 것 다 알고. 뭐 그러니깐 뭐, 대접헐 건 사실이지 뭐. 오히려 그 조실 큰스님네 오신 것보담도 더 반갑지. 새로 그렇게 인자 참, 학자로써서 아! 그렇게 모도 인가 맞고, 아! 그랬다고 인자 사방 가면 그 대접허는 것이 너무 과했제.

그런디 이번에 금정사에 들어가서는 너무 지나쳤지.
척 들어가니까 유담이 그때 감원(監院)을 허고 있는데, 그 만찬을 해 가지고는 적을 굽고 다시마를 잘 모도 굽고 그래 잘해서, 부꾸미 떡도 부치고 뭐 혀 가지고는 좋은 술을, 참! 좋은 술 일등주를 받아 가지고 와서, “아! 신 수좌(信首座)님, 참 내 뜻대로 내가 한번 이런 걸 차렸으니 잘 잡솨 주십시오. 내 어떻게 했으면 더 잘 좀 대접헐까 싶고, 얼마나 내가 좀더 잘 만족스럽게 헐까 싶고, 정성이 부족합니다. 좀 많이 잡솨 주십시오” 아! 출출헌 판에 참 좋드구만.

뭐, 그때쯤 인자는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 보니 무약가요(無藥可療)여!
“약으로 낫을 수 없으니 자연치료를 해라” 자연치료를 허라고 떡 허니 의사가 그래 주어.

“그 어떻게 헌 것이 자연치료입니까?”
“뭐든지 그저 먹고 싶은 건 마음대로 먹고, 그저 어디 가서 놀고 싶으면 마음대로 놀고. 내 마음을 활발스럽게 펴놓고, 그저 임산임수(臨山臨水)에 물을 대하나 산을 대하나 어떠헌 그 노는 경계를 대허나 구김살이 없이 활발스럽게 아주 이렇게 놀고 그러면은, 그 마음이 활발발(活潑潑)허면은 병이 나을 수 있으니” 아! 그러고는 ‘약으로는 못 낫우겄다’고 나를 갖다가 턱 퇴병(退病)을 혀.

그래서 그 말을 듣고는, 인자 대체 그렇게 되었어. 공부허다가 나온 놈의 피가 그것이 어디 그쳐져야제. 인자는 하도 나오다 나올 것이 없으니까 목구녁 가슴속에 가서 간뎅이처럼, 묵 어리데끼 어렸어. 그려 가지고 콱 뱉으면은 뎅이 하나씩 나와. 인자 줄줄 흘리든 않고. 그러면은 그만 비린내가 들입대 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제.
그래 그만 인자는 뭐, 인자 이렇게 좀 돌아댕기는데, 여그도 갔다 저그 돌아댕기는데 속마음으로는 인자 자연생활을 헐 판이여. 자연치료를 헐 판이여.

인자는 욕을 먹던지 누가 찬성을 허던지 그런 데 얽힐 것 없고, 중옷을 입고 돌아댕김서 막행막식헐 수 없고. 첫째, 고기를 얻어먹어야 허겄으니, 고기도 맘대로 먹고, 술도 맘대로 그저 먹고, 춤출 디 있으면 내 멋대로 춤도 좀 춰 보고 이렇게 활발스럽게 인자 지낼 판인디, 속으로는 딱 작정해 놨지마는 그동안에 선방에 댕기면서 지낸 숙습(熟習)이 있어서, 그렇게 어떻게 당장에 태도를 행동을 고칠 수는 없고. 그래도 인자 어디 가면 대접헌다고, 날 대접헌다고 허면은 받아먹지, 뭐 어쩌?
아직 그때는 안 헐 때인디, 아! 안 헐 때고 잘 그저 옷 입고 그러고 거그를 들어갔는데, 인벽 수좌가—요런 놈 다 넣어야제. 거 넣어서 허제, 별수 있나?—대접헌다고 그래 내놨네.

뭘 빼고 좋은 것만 넣으면 쓸 수가 있나? 그런 것 저런 것 다 넣어야지. 술도 먹었다고 허면은 거, 술 먹은 중이라고 허면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계를 파(破)헌 중이라고 하지마는 안 넣을 수가 있나? 넣을 건 넣어 버려야지.

술을 따라 주는데, 안주 좀 먹고 술을 한잔 척 받아서 막 부을라 하니까, 병에 붓떼끼 때려 부을라 하니까—경명 스님이 일대 강사(講師)여! 강사라도 이만저만헌 강사여. 그만 저 안에 선방에 계시다가, 어째 누가 일렀는가 어쨌는가, 이짝 방에서—저짝 방은 선방이고, 내가 선방에 들어가서는 안 먹고 이짝 방에서, 주지실에서 먹는디.

누가 일렀든고 일러, “저 수좌가 와서, 정영신(鄭永信)이가 와서 막 술을 먹는디, 잔뜩 뭐 채려놓고 술 먹는디 거, 스님께서 좀 혼을 내시요” 인자, 수좌가 어째 그랬든가 부여.
그러니 쫓아 나왔어. 와서는 착 들어오더니 “여그가 어디라고 술을 먹어! 에이! 술이 뭐여? 에이!” 아, 이러면서 그만 노장이 입이 그냥 덜덜 떨면서 고함을 지르면서 들어와.

그것 참! 나보담 나이 많으시고—나이 그 어른은 근 오십 되고, 나는 인자 뭐 스물서너 살 인자 되았는데. 아! 이거 참, 죄송도 허고, 일대 강사고. 아, 그것 참 ‘이놈의 술잔을 내던지고 그냥 나올까, 달아나 버릴까? 그냥 빌어먹을 먹어 버릴까?’ 쳐다 보고는. 그러다가는 ‘에이 이놈의 것’

“내가 기이 든 술잔입니다. 좀 가라앉히시고, 심로(心勞)허시고 들어 보십시오” 술잔 들고.
“화엄경이, 상본(上本) 화엄경이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니” 상본, 중본, 하본, 약본(略本) 그렇거든, 화엄경이.
“화엄경이, 상본 화엄이 일사천하(一四天下)에 미진수품(微塵數品)이라고 했으니, 이 술잔 이건 화엄 몇째 품입니까?” 이거 법, 무서운 법이여. 보살님들 다 알란 말이여. 여 술값 내는 것이여.

“이거, 화엄경 몇째 품입니까? 이거 좀, 한마디 일러주십시오!” 고함을 내, 더 크게 질러 버렸어. “화엄 몇째 품입니까?”
아! 일사천하미진수품이니, 뭔 안 든 것 있나? 중생(衆生) 환화(幻化)가 다 들었지. 추어망담(醜語妄談)도 다 들었지.

아! 그러니깐 경봉 스님도 물 대다가, 논에 물 대다가 막 견성했다고 해 가지고 들어와서는 그만, 막 들입대 그만 이러고 앉어서 그만—거그 그 인자 참, 한번 봐 노니까 아마 그러든 것이지. 그만 이래 가지고는.
양산서, 언양서, 여자가 모도 올라왔다 그 말이여. 경봉 스님 견성했다고 헌게 모도 와서 친견을 허고 절을 허니께, 이러고 앉어서 “네, 이년들! 응!” 아! 욕을 냅대 퍼붓고. “이게 화엄 도리지! 이게 화엄경이지!”(21분23초)

욕을 해도 이만저만헌 욕을 해 놨어. 내, 그 욕은 안 혀!
뭐 욕이, 그 욕이 화엄 도리라고 헌 것이여, 그게. 일대 강사인디 또 견성을 해 가지고 보니깐 틀림없거든! 추어망담(醜語妄談)이, 추헌 말과 거짓말이 어디 무슨 하나나 무슨 뭐, 어디 어김이 있나? 십삼천대천세계(十三千大千世界)에 두두물물(頭頭物物), 화화촉촉이 다 딱딱 들어맞는 거여, 법에.

그러나 그 법은 그건 체중현(體中玄) 법밖에는 안 되는 것이여! 조사 공안은 안 되아. 공안이라는 것은 그런 법 없어! 공안이라 하는 것은 그건 안 될 말이고.
그래 그만 들입대 욕을 막 드리 퍼붓고는 “이게 화엄경이야, 화엄경이여!” 아! 이러고 있었어. 그러니 뭐, 무엇이 도무지 무슨 뭐 일사천하미진수품 속에 안 들어갔어?

“이 술은 화엄경 몇째 품이냐?” 고함을 지르며 “몇째 품입니까?” 묻는디, 입이 딱 붙어 버렸네, 입이. 응! 아, 그렇게 고함을 질러 “술을 먹느냐?”고 허더니 입이 그냥... 어림도 없네. 내가 참, 기운이 나대! 아, 이런 놈의 것.

그래 가지고 대듬서, 여기를 잡고 막 대듬서 멱살이나 쥐고 “나가라 이놈!” 허면 큰일날 텐디, 그냥 거기 쩔려 가지고. 강사는 강사인디, 화엄경 바로 분명히 있거든! 그런게 뭐 꼭 물을 말이지, 뭐.
‘몇째 품이냐?’고 묻는데, 딸싹 못했네. 허! 그것 참. 아무리 글을 잘해도 글 가지고는 못혀.

그만 암말도 않고 이리 쳐다보고 있는디, 술을 들고는 쭈욱 마셨어. 쭉 들어마시고서는, 안주 턱 한 점 먹고 입을 싹 닦고는,

니우(泥牛)는 입해성룡거(入海成龍去)헌디  파별의전입망라(破鼈依前入網羅)니라
나무~아미타불~

니우(泥牛)는 입해(入海)하야 성룡거(成龍去)헌디, 진흙소는 바다에 들어가 용이 되아 갔는데,
파별의전입망라(破鼈依前入網羅)로구나. 다리 뿌러진 자라는 앞을 의지해서 그물에 들어갔구나.
아, 이렇게 점검을 탕! 해 버렸제. 딸싹 혀?

술 잘 먹고, 그 잘 채려 논 놈 배(아주) 그거 잘 먹고, 나 그러고 오래 안 있었구만. 또 그러고 그냥 나오제 뭐 그렇게, 처억 한번 나온 일이 있고.(33분13초~47분2초)

 


[참고 ❷] 전강선사(No.275)—임자년 동안거결제(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72.10.15)(5분25초)
**아래 송담스님 법문은 전강선사 법문 중간에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하신 법문입니다.

<송담스님 법문>

부처님 49년 설(說)을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아함경을 12년 동안 설하시고 방등경 8년, 그리고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21년 동안을 반야경을 설하시고,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 마지막에 법화경을 8년 동안을 설하셔서 그걸 합하면은 49년이 됩니다.

그런데 그 49년 동안 설하신 것이 팔만대장경인데 그 49년 동안에 왜 아함경 12년부터서 말을 하고, 맨 처음에 그렇게 많은 법문을 설하신 화엄경(華嚴經)은 그 49년 동안에 빼놓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함경 설하시기 전에 21일 동안에 걸쳐서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설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49년 속에 계산을 넣지 않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은 이 화엄경은 그 화엄세계의 교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교주(敎主)로 계시는데 그 비로자나불은 입을 열지 않고, 한마디도 비로자나불의 법문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보살들이 각기 자기가 느끼고 깨달고 보는 바를 그렇게 각기 많은 보살들이 번갈라가면서 설해 놓은 것이 모아 놓은 것이 그게 화엄경이예요.
결국은 그 보살들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네들 말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비로자나불의 뒷받침에 의해서 설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로자나불의 법문을 많은 보살들의 입을 통해서 설해졌다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은 그 많은 화엄경을 하나의 큰 교향악(交響樂)으로 비유해서 본다면은 그 많은 위대한 대교향악의 총지휘자는 바로 비로자나불이고, 그 대관혁악의 악단은 그 화엄경에 나타난 많은 불보살들이 전부 그 교향악단의 악사라고 말할 수가 있고, 아울러서 그 화엄경이 우리가 보는 그 책으로 된 그것만이 화엄경이 아니라,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다시 말해서 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위대한 화엄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유정(有情) 무정(無情)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낱낱이 우리도 그 대관현악(大管絃樂)의 한 단원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서 일생을 살다가 죽어가는 것, 그 가운데 자기가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눈 한번 깜짝이고 손 한번 움직이고 발 한번 움직이고 웃고 울고 한 것 그것들이 그 대관현악의 악단으로서 연주하는 음악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그 악단을 지휘하는 비로자나불 바로 그분이 청정법신(淸淨法身)이십니다.
그러면은 이렇게 말하면은 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떠한 상호(相好)를 가지고 또 계신 걸로 착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사실은 그 비로자나불은 지금 산승이 말하는 말을 듣고 계신 여러분이 낱낱 여러분 가운데 바로 그 비로자나불이 계신 겁니다.

들을 줄 알고, 볼 줄 알고, 배고픈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아는 그 속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계신 것을 그것을 믿는 것이 신심(信心)입니다.

부처님 앞에 돈과 쌀과 모다 그 떡과 그런 것을 많이 차려놓고 절만 많이 하고 그런다고 그것이 신심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성낼 줄 알고 욕할 줄 알고, 탐심 낼 줄 알고 진심 낼 줄 아는 그 우리 중생심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선지식의 적절한 지도 아래 그것을 개발해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 것, 나도 반드시 바른 지도를 받아서 노력을 한다면 나도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신심입니다.(8분4초~13분29초)

 


[참고 ❸] 전강선사(No.275)—임자년 동안거결제(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72.10.15) (3분10초)
아까 그 송담 스님이, 여기 원장(院長) 스님이 또 올라와서 설법할 때—아 그 비로자나가 설법을 했는데, 입 하나 뗀 법이 없이 설법했는데 보살들이 백만 천만 억만 보살들이 설했자 설할 수가 없어. 만년을 설했자 역사를 넣을 수 없어. 그러니 49년 설법에 보탤 수가 없다 그말이여.

그 본인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비로자나 전신체(全身體)다 그 말이여.
어디 우리의 본래면목, 그 언제든지 가르쳐 줄 스승은 있지마는, 옳은 스승을 만나야만 깨닫지마는, 오(悟)는 자기가 깨닫지 부처가 깨달아 주지 못해. 그 비로자나 전신체, 생사 없는 몸뚱이.

그러고 화엄경은 그렇게 81권이니, 81권 뿐이여? 81권이 화엄경이여?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 화엄경인데.
미진수품(微塵數品) 화엄경이 그것이 내 본래면목, 비로자나 전신체, 그 비로자나 전신체가 내 마음인데 내 본래면목인데, 그 본래면목이 별별 놈의 소리를 다허고, 별별 놈의 못할 소리가 없고, 뭐 말 한마디를 가지고 천만 가지를 맨들수 있고, 이것이 비로자나불이여.

이 비로자나불이 이렇게도 별말 다하지마는 그 근본 자체, 비로자나불 근본면목 속에 들어가서 사견(邪見)도 없고 상견(相見)도 없고 유(有)도 무(無)도 비유(非有)도 비무(非無)도 없는데, 무엇으로 뭣을 나투어서 거기서 무엇을 만들어놔? 못혀. 입 뿐이지. 입으로만 뿐이지, 허덜 못혀.

필경에는 내가 나를 깨달지. 부처가 깨달라 주지 못혀. 그걸 비로자나 전신체라.
진대지(盡大地)가 비로자나 전신체여, 그러기 때문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여.
아까 그 설법이여.

설법을 허되 첫 설법에 올라가서 우세나 하고 보월 스님 울고 내려오데끼 그럴 줄 알았더니 그 대의(大意)가 참 분명허단 말이여. 꼭 그렇지.(27분45초~30분55초)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ㅊ/체중현 현중현2024. 5. 19. 19:52

현중현(No.217)—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 |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이 정진해야 |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여야 |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없다.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나아가야 | 구경(究竟)의 깨달음.


*현중현(玄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 • 句中玄 • 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가로판 p215, p219)
[三玄]삼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이치상으로만 본다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천칠백 공안(公案)을 하나도 맥힘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事)에도 맞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이여. 현중현을,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들은 그 사람을 '옳게 보았다'고 인가(印可)를 하셨습니다.

 

(1) 12분 40초.

 

(2) 11분 14초.


[법문] 송담스님(No.217)—1983년(계해년) 추계산철 해제 법회(83.09.30.음) (용217)

(1)------------------

만약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일대사인연의 근원을 살펴볼 거 같으면 사람 사람이 본래 다 갖춰져 있는 것이여. 본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낱낱이 다 원만(圓滿)하게 다 이루어져 있는 것이여.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닦지 않고 깨닫기 이전에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주먹을 피어서 손바닥을 만들고, 그 손바닥을 다시 쥐어서 주먹을 만들고 한 것처럼 조끔도 힘을 들일 것이 없어.

따라서 눈으로 보는 것은 전부가 다 『화엄경』이요, 귀로 듣는 것은 전부가 다 법문(法門)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작위(作爲)하는 모든 행동은 다 그것이 불사(佛事)요.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행하고 느끼고 하는 그리고 말하고 냄새 맡고 하는 주관적인 것이나 객관적인 것이 전부가 다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의 불사요, 설법이요, 경전이요.

그래서 부처와 조사(祖師)가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하시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을 해서 닦아 가지고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에 부처와 조사의 허물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고 새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건마는, 우리는 심(心), 마음이, 마음의 원숭이[心猿]가 나부대고, 뜻의 말[意馬]이 날뛰는 바람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종이 되어 가지고 망령되이 인아상(人我相)을 내고, 일어나는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그럴 때마다 얼음 위에다가 물을 찌뜨린 거와 같애서 점점 얼음덩어리는 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그래 가지고 한 생 한 생 거듭될 때마다 업(業)은 점점 더 깊어지고 얽히고설켜서 자기의 영광(靈光), 자기의 신령스러운 빛은 그 업(業)으로 인해서 가리워져 가지고 캄캄한 칠통(漆桶) 칠야삼경(漆夜三更)처럼 되어 가서 영원히 헤어날 길이 없는 까닭은 무엇이냐?

사람을 만나지 못한 탓으로, 첫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자신, 자기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를 못했고, 둘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길을 가리켜 줄 수 있는 본분작가(本分作家)를 만나지 못한 탓으로 우리는 이렇게 본래 불보살(佛菩薩) 불조(佛祖)와 조끔도 차등이 없는 그러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대사(一大事)를 요달치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무량겁을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 빠져서 와서, 금생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또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생사의 윤회는 끄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쇠로 지어 붓은 그러한 굳은 결심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이것입니다.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이 생사윤회를 계속 치성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의 마음속에 원숭이와 뜻 속에 말, 그 원숭이와 망아지를 때려잡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 일이 얼마만큼 어려우냐 하면, 급히 흘러가는 그 급수(急水),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애.
물결이 세지 아니한 데 배를 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물살이 센 데다가는 물살 따라서 배도 따라서 흘러 내려갈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배를 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위태로운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인아(人我) 시비(是非)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밥 먹고 옷 입은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잠깐도 한눈팔 겨를이 없이 발에다가 힘을 주고 버티면서 그 배를 대는 데, 잠깐 사이도 딴생각을 낼 겨를이 없다.
어떠한 사람이 머리를 내 머리를 짤라 가고, 손발을 짤라 가고, 심장과 간장을 도려내서 죽음에 이르른다 할지라도 이 배를 기어코 댈려고 하는 그 마음을 쉬지 아니한 것처럼, 이러한 정도로 정진을 지어가지 아니한다면 어찌 공부를 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말법에 이르러서 성현 가신 때가 멀어.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이 정법(正法)을 믿는 마음이 철저하지를 못해 가지고,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다 할지라도 이리저리 사량분별로 따지고, 보고 듣고 알고 그러한 마음속에 그러한 것으로써 살림을 삼아 가지고, 금년도 이럭저럭 또 내년도 이럭저럭 한 철 한 철, 철은 지나가지만, 정진 속에 사량계교(思量計較)와 천착(穿鑿)으로써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수행은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때에 참으로 그것을 그러한 정진력을 써먹을 수가 있느냐?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있다면 세존(世尊)은 무엇 때문에 6년 동안에 설산(雪山) 고행을 하셨으며, 달마대사는 소림(少林)에서 9년 동안을 왜 묵무언(默無言) 하셨으며, 장경(長慶)선사는 7개 포단(七個蒲團)을 앉아서 뚫었으며, 향림(香林)은 왜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으며, 조주(趙州)는 30년에사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한 필요가 있겠느냐.(11분50초~24분30초)





(2)------------------

이 참선은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이 사량분별이 끊어지고 번뇌 망상이 없어지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마저도 잊어버려. 그래 가지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밥 먹되 밥맛을 모르고,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 어떠한 공안을 보나 하나도 맥힘이 없어, 자기 나름대로. 조주 무자(無字)도 맥힐 것이 없고, 판치생모(板齒生毛)도 맥힐 것이 없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들어봐도 하나도 의심이 안 간다 그 말이여.
부처라고 하나 중생이라고 하나, 된장이라고 하나 똥이라고 하나, 천상천하 두두물물이 무엇을 봐도 그것이 다 바로 그것이 자기요, 자기와 부처와 이 법계가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이 도리는 이게 체중현 도리여. 공리(空理)라 그 말이여.

여기에 이르러서 만약에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점검을 받지 못하면 자기도 '초견성이다, 한소식했다' 해 가지고, 그러한 그 체중현의 경지에서 보면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의심이 없고 맥힐 것이 없으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가서는 이빨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그 체중현 도리로써 자기의 살림을 삼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일대사 문제를 요달했다고 생각을 하게 되지만, 현중현 도리에 나아가서는 그것 가지고는 되지를 안 혀.

더군다나 후배, 다른 사람이 공부를 해 가지고 자기에게 왔을 때에 '그 사람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냐, 안 얻었느냐?' 그것을 점검하는 데에 나아가서 자기의 경지와 같으니까 '옳다'고 일러줄 수밖에는 없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에 자기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게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기 때문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지만, 바르게 닦지를 못하고 바르게 깨닫지를 못하면 저 망하고 남 망하게 하고 마침내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는 그런 중대한 죄과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산철 두 달 동안에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어떻게 수행을 해 가야 하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지어 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정말 차라리 안 하려면 몰라도 일단 이 문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고 정진을 해 나가는 마당에는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마한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써 작은 견처를 가지고 만족을 삼지를 말고, 고조사(古祖師)에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진대는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자기의 견처(見處)를 용감하게 부정을 해 버리고 언제나 처음 발심(發心)할 때의 그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견처(見處)와 견지(見地)에 이르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견처를 부정해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발심 수행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좋은 병에다가 악지(惡知) 악각(惡覺), 악한 알음 악한 깨달음—마치 우리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어떠한 견처도 스스로 그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좋은 병에다가 썩은 변질한 고약한 음식을 담은 거와 같애서 그 병 속에는 아무것도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는다 하더라도 그 병 속에 담어져 있는 변질된 고약한 악취가 나는 음식 때문에 새로 담은 음식까지도 먹지 못하게 되는 데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 병 속에 좋은 음식을 담으려면 먼저 그 병 속에 들어 있는 변질된 물질을 까꾸로 다 쏟아 버리고, 열 번 스무 번 완전히 그 속에서 그 냄새가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씻고 또 씻고 소독을 해서 그래도 또 냄새가 나면 그것을 삶고 해 가지고라도 기어코 그 병을 깨끗이 해야, 완전 소독을 해야 그런 연후에 라사 거기에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아도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 어떠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가지고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자기 속에 조그마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러한 견처로 인해서 어떠한 좋은 법(法)도 들어갈 수가 없고, 좋은 법문을 들어도 바로 자기식(自己式)으로 변질이 되어서 올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그러한  불견(佛見), 법견(法見), 어떠한 경전에 있는 말씀이고, 어떠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도 깨끗이 버려 버리고 언제나 초심(初心)! 초심인으로써의 마음가짐과 지조를 가지고 정진을 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른 깨달음을 얻었어도 그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을 가져서는 아니 되거든, 바른 깨달음 아닌 그러한 견처를 가지고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24분38초~35분5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 ①깨달음과 중생제도의 중대한 부처님의 임무. ②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인연. ③부처님이 정도,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여러가지 방편으로 이끌어, 모두 구한다고 하는 중대한 인연. 일단인연(一段因緣)이라고도 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진묵겁(塵墨劫) ; 티끌[塵]이 쌓여 먹[墨]이 될 만큼의 오랜 시간[劫].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 · 탱화 · 불구(佛具) · 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심원의마(心猿意馬) ; 마음[心]이라는 원숭이[猿]와 생각[意]이라는 말[馬]. 의마심원(意馬心猿).
마음과 생각이 제멋대로 대상(對象)을 향해 항상 동요하고 고요하지 못한 모양이 질주하여 달리는 말[馬]과 쉼 없이 움직이고 조잘대는 원숭이[猿]와 흡사하기 때문에 생긴 비유이다. 일정하지 않게 예측불허로 변화하는 생각을 나타낸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인아상(人我相) ; 나와 남을 갈라놓고,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남을 경시하는 마음.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 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영광(靈光) ; 영묘불가사의(靈妙不可思議)한 광명을 놓는 것. 즉 중생 본구(本具)의 불성을 가리킨다.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야삼경(漆夜三更 옻·검다 칠/한밤중 야/석 삼/밤 시각 경) ; 캄캄하게 어두운 한밤중.
*삼경(三更 석 삼/밤 시각 경)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이다.
*본분작가(本分作家) ; 인간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부처의 성품[佛性]을 체득한 사람.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 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불조(佛祖) : 부처님과 조사(祖師), 불(佛)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조(祖)는 역대(歷代)의 조사를 말함.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 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생사고해(生死苦海) ; 생사윤회하는 고통의 바다.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윤회의 고통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미래제(未來際 아닐·미래 미/올·미래 래/끝 제) ; 미래의 변제(邊際 : 시간이나 공간, 정도程度 따위에서, 그 이상 더는 없는 한계限界). 미래는 끝이 없으므로 미래제라는 말은 다시 말해 영원한 미래, 영원과도 같은 오랜 시간을 뜻한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여울물 ; 여울을 흐르는 물.
*여울 ; 강이나 바다에서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말법(末法 끝 말/부처님의 가르침 법) ; 말법시대(末法時代).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교법(敎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을 시기별로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으로 분류하는데 정법이 쇠퇴한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처음 정법시대는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를 얻게 되지마는, 그 다음 상법시대는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그 다음 말법시대는 곧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만 남아 있어 수행하고 증득하는 자가 없는 시기이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사염주(四念住)를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될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곧 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 다 반드시 견성성불한다』 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 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사학(邪學)과 외도(外道)가 번성한 이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뿐 아니라 정법은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 입멸 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때에’ ; 안광낙지시(眼光落地時). '눈빛[眼光]이 땅[地]에 떨어질[落] 때[時]'라는 말로 '죽을 때'를 말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7. (가로판 p70)
工夫가  若打成一片하면  則縱今生에  透不得이라도 眼光落地之時에  不爲惡業所牽하리라

공부가 만일 한 조각을 이룬다면 비록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감을 적에 악업에 끌리지 아니하리라.

註解(주해) 業者는  無明也요  禪者는  般若也라  明暗不相敵은  理固然也니라

업(業)이란 무명이요, 선(禪)은 지혜다. 밝은 것[明]과 어두운 것[暗]이 서로 맞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 • 句中玄 • 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가로판 p215, p219)
[三玄] 삼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삼현 ; 보조국사의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참고 ❶]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보조지눌 1158~1210 |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176~180. p200~20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542~546.

問 向來所說 旣聞命矣 古今禪門達者 見性成佛 豈非一分性淨之體 不具相用耶

또 물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잘 들었다. 그러나 고금 선문(禪門)의 통달한 사람이 견성하여 성불한 것이 어찌 일부분 성정(性淨)의 체성이 모양[相]과 작용[用]을 갖추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答 不然 汝豈不聞 永嘉眞覺大師 一宿曹溪 開悟本心作歌 其略 曰 心鏡明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萬像森羅影現中 一顆圓光 非內外 一性 圓通一切性 一法 遍含一切法 一月 普現一切水 一切水月 一月攝 諸佛法身 入我性 我性 還共如來合

나는 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왜 듣지 않았던가? 영가 진각(眞覺) 대사는 조계(曹溪)에서 하룻밤을 묵다가 본심을 깨치고 노래를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마음 거울이 밝아 걸림이 없음이여. 탁 트이고 밝게 사무쳐 사계(沙界)를 두루했다. 삼라만상의 그림자가 그 가운데 나타나니, 한 덩이 뚜렷한 광명은 안팎이 없다. 한 성품이 일체의 성품에 뚜렷이 통하고 한 법이 일체의 법을 모두 머금고 있다. 한 달이 일체의 물에 두루 나타나매, 일체의 물의 달이 한 달에 포섭된다. 모든 부처의 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오매, 내 성품이 여래와 하나로 합한다’ 하였다.

又英邵武 開悟本心作偈 其略 曰 十方齊現一毛端 華藏重重帝網寒
又大慧禪師 秉拂云 欲識佛性義 當觀時節因緣 時節 若至 其理自彰 乃至須知微塵諸佛出世 降王宮坐道場 轉法輪降魔軍 度衆生入涅槃 摠不出這箇時節 諸人 若信得及 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

또 영소무(英邵武)도 본심을 깨치고 게송을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시방 세계가 한 털끝에 한꺼번에 나타나매, 화장세계(華藏世界)가 중중하여 제망(帝網)이 차다[寒]’
또 대혜(大慧) 선사는 불자(拂子)를 들고 ‘불성(佛性)의 뜻을 알고자 하면 시절인연을 관찰해야 하나니, 시절이 오면 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티끌수 같이 많은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와 왕궁에 태어나 도량에 앉고, 법륜을 굴려 마군을 항복하게 하고 중생을 구제하신 뒤에 열반에 들되, 그 모두가 이 시절을 벗어나지 않은 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런 줄을 믿으면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이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古今)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 하였다.

如是等開悟本心 得見自心鏡內 帝網重重無盡法界者 禪門傳記中 不可勝數 昧者 不知其源 不覽禪錄 亦不見華嚴大論之旨故 纔聞禪者 說卽心卽佛 以謂不過性淨佛也 是大愚惑
非謂華嚴敎門 說理未盡 但學者 滯在言敎義理分際 未能忘義了心 速證菩提 所以達摩西來 欲令知月不在指 法是我心故 不立文字 以心傳心耳

본심을 깨치고 제 마음 거울 속에 제망(帝網)처럼 중중한 무진법계(無盡法界)를 본 이런 일들은 선문의 기록 가운데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있다. 그런데 우매한 사람들은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선문의 기록도 보지 못하고, 또 화엄대론(華嚴大論)의 뜻도 보지 못하였으므로 참선하는 이들의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것은 성정(性淨)의 부처에 지나지 않는다 하니, 매우 어리석고 미혹한 일이다.
화엄교문에서 이치를 다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학자들이 말로 표시된 의리(義理 사상이나 내용)의 한계에 걸리어, 능히 뜻을 잊고 마음을 깨달아 보리를 빨리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와 달은 손가락에 있지 않듯이, 법이 곧 내 마음임을 알게 하려 하셨기 때문에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마음을 마음에 전한 것이다[以心傳心].

是以禪門 只貴破執現宗 不貴繁辭義理施設 故 所有破執言句 近於一分理性 離言絶慮之義 昧者 不知其義 每將相似語例 便謂同於頓敎 是大不然 設於華嚴無盡法界重玄法門 生於法愛 解分 未忘 亦爲所破也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다만 집착을 부수고 종지(宗旨)를 나타내는 것을 귀히 여기고, 번거로운 말로 뜻을 나열해 놓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을 타파한 여러 가지 언구(言句)가 일부분 말을 여의고 생각이 끊어진 이성(理性)의 뜻에 어느 정도 가깝지마는, 우매한 사람들은 그 뜻를 알지 못하고 매양 비슷한 말의 예(例)를 가져 돈교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설사 「화엄경」의 다함없는 법계의 매우 심오한 법문에 대해서도 그 법에 애착하여 지해(知解)를 버리지 못하면 그것도 타파해야 할 것이다.

台敎 亦云 圓門生着 尙爲初敎 所破 但性海果分 是法界證處 不可預談 亦不是心思意解 所及 故 淸凉祖師 亦云 圓音 非扣而常演 果海 離念而心傳 又云 佛證離言
是知禪門 離念相傳 是頓證法界處也 決非頓敎中 不說法相 唯見眞性 一念不生 卽名爲佛也

천태교(天台敎)에서도 ‘원문(圓門)이라도 집착하는 마음을 내면 초교(初敎)와 같이 타파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다만 성해(性海)의 과분(果分)은 법계를 증득한 곳이라, 미리 말할 수도 없고 또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뜻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량 조사는 ‘원음(圓音)은 묻지 않아도 항상 연설하시고, 과해(果海)는 생각을 여의고 마음으로 전한다’ 하고, 또 ‘부처님은 말을 여의었음을 증득하셨다’ 하였다.
이로써 선문에서는 생각을 여의고 서로 전한 것이 법계를 단박 증득한 곳이요, 결코 돈교에서와 같이 법상(法相)을 설하지 않고 오직 진성만 보아 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곧 ‘부처’인 것은 아닌 줄을 알아야 한다.

何以知其然 禪有三玄門 一 體中玄 二 句中玄 三 玄中玄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선문에는 삼현문(三玄門)이 있다. 첫째는 체중현(體中玄 체 가운데 현)이요, 둘째는 구중현(句中玄 구 가운데 현)이며, 셋째는 현중현(玄中玄 현 가운데 현)이다.

初體中玄門 引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等事事無碍法門 以爲初機悟入之門
此亦是言敎中 解分 未忘故 以句中玄無跡平常灑落言句 令其破執 頓忘佛法知解也 此亦有灑落知見 灑落言句故 以玄中玄良久默然棒喝作用 鍛鍊
當此之時 頓忘前來第二玄門灑落知見 灑落言句 故 云 得意忘言道易親 是謂頓證法界處也(此中三玄 雖非臨濟本意 且順古師之意 明之)

첫째의 체중현의 문에서는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자기와 타인은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는 등의 일일이 서로 걸리지 않는[事事無碍] 법문을 인용하여, 첫 근기의 깨쳐 들어가는 문을 삼았다.
그러나 이것도 언교(言敎)에 대해 지해(知解)와 분별을 버리지 못했으므로, 구중현의 자취 없고 평상(平常)한 쇄락(灑落 산뜻한)한 언구(言句)로 그 집착을 부수어 불법의 지해를 단박 잊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쇄락한 지견과 쇄락한 언구가 있기 때문에, 현중현의 양구(良久)와 방할(棒喝) 등의 작용으로 단련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앞의 둘째 현문의 쇄락 지견과 쇄락 언구를 잊기 때문에 ‘뜻을 얻고 말을 잊으매 도와 친하기 쉽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법계를 단박 증득하는 곳이다.(이 가운데 비록 삼현三玄이 임제臨濟의 본의가 아니나 옛 스님의 뜻을 따라 밝힌 것이다)

禪門 亦有爲初機下劣人 指示隨流妄染中 有性淨妙心 令其易解信入 信入然後 忘其解分 方爲親證
若不忘解分 坐在解脫深坑 不能於萬行緣起門中 轉身無滯故也

선문에도 처음 들어온 사람이나 하열한 근기를 위해 흐름을 따르는 허망과 더러움[妄染] 속에도 성품이 깨끗한 묘한 마음[性淨妙心]이 있다고 가리켜 보여, 그들로 하여금 쉽게 알고 믿어 들어가게 하였다. 믿어 들어간 뒤에 그 지해와 분별을 잊어야 비로소 몸소 증득하였다 할 수 있다.
만약 지해와 분별을 잊지 못하면,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 속에 앉아 있을 것이니, 그것은 온갖 행의 연기문 가운데서 몸을 돌려 걸림이 없이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고 ❷]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는 글)’ p210~211. P216~217. P229. P23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p564~565. P571.

禪門亦有爲密付難堪 借敎悟宗之者 說眞性緣起 事事無碍之法 如三玄門 初機得入 體中玄所明云 無邊刹境自他 不隔於毫端 十世古今始終 不離於當念 又云 一句明明該萬像等 是也

선문에도 은밀히 부촉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교문을 빌어, 종지를 깨닫는 자를 위하여 진성(眞性)이 연기(緣起)하는 사사무애 법을 설하는 경우도 있으니, 삼현문(三玄門)에서 처음 근기[初機]가 들어갈 수 있는 체중현(體中玄)에서 밝힌 것과 같다. 거기에 “가없는 세계 경계[刹境]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하고, 또한 “한 글귀가 밝고 밝아 온갖 현상을 거두어 들인다”한 등등이 이것이다.

禪門中 此等圓頓信解 如實言敎 如河沙數 謂之死句 以令人生解碍故 竝是爲初心學者 於徑截門活句 未能參詳 故 示以稱性圓談 令其信解不退轉故 若是上根之士 堪任密傳脫略窠臼者 纔聞俓截門 無味之談 不滯知解之病 便知落處 是謂一聞千悟 得大摠持者也

선문 가운데도 이런 원돈(圓頓) 신해(信解)하는 진실한 말씀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지만, 이것을 사구(死句)라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해의 장애를 내게 하기 때문이며, 아울러 초심 학자는 경절문(徑截門)의 활구(活句)를 아직 참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품에 부합하는 원만한 말씀을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여 퇴전치 않게 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상근기로서 은밀히 전한 뜻을 감당하여 기존의 격식[窠臼]을 벗어날 수 있는 이라면, 경절문의 맛없는 말을 조금 듣기만 하고도 알음알이[知解]의 병통에 걸리지 않고 곧 속뜻[落處]을 아니, 이 이를 ‘하나를 듣고 천을 깨달아 대총지(大摠持)를 얻은 자’라 한다.

禪門亦有多種根機 入門稍異 或有依唯心唯識道理 入體中玄 此初玄門 有圓敎事事無碍之詮也 然 此人 長有佛法知見在心 不得脫灑 或有依本分事祇對灑落知見 入句中玄 破初玄門佛法知見 此玄 有徑截門 庭前栢樹子麻三斤等話頭

선문에도 또한 여러 가지 근기가 있어서 들어가는 문이 다소 다르다. 어떤 이는 유심(唯心)과 유식(唯識)의 도리에 의하여 체중현(體中玄)에 들어가기도 하니 이는 처음 현문[初玄門]인데, 원교의 사사무애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항상 불법의 지견(知見)이 마음에 남아있어서 이를 벗어나 깨끗함을 얻지 못한다.
어떤 이는 본분사에 의지하여 쇄락한 지견에만 대하여 구중현(句中玄)에 들어가 초현문(初玄門)의 불법 지견을 타파한다. 이 현문(玄門)에 경절문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와 마삼근(麻三斤) 등의 화두가 있다.

然 立此三玄門古禪師之意 以本分事祇對話頭 爲破病之語 故 置於第二玄 然 未亡灑落知見言句 猶於生死界 不得自在 故 立第三玄中玄 良久默然棒喝作用等 破前灑落知見 所以云 三玄施設 本由遣病 若望上祖初宗 卽未可

그러나 이 삼현문을 세운 것은 옛 선사의 뜻인데, 본분사에 상응하는 화두로 병을 타파한다는 말을 삼기 때문에 제이현(第二玄)에 둔 것이다. 그러나 쇄락한 지견이라는 언구를 잊지 못하여 오히려 생사에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삼(第三) 현중현(玄中玄)의 양구, 묵연, 방, 할의 작용 등을 세워서 앞의 쇄락한 지견을 타파한다.
그러므로 “삼현문을 시설한 것은 본래 병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 만일 옛 조사의 처음 종지에서 보면 그것도 옳지 않다”

*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2분 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한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19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2분 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2분 26초)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어떤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가려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2분 36초)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❺]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반기이파) (4분 18초)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참고 ❻] 전강선사(No.026)—전강선사 일대기 제13호(경술1970년 12월 22일 새벽.음) (1971년 1월 18일 새벽)(1분57초)
체중현(體中玄)은 고대로—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무일물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로 체중현이라 헌다든지, 모도 그러헌 그 법견(法見)을 가지고 체중현이라 햐.
왜 향상(向上)도 그 체중현일 것이고 뭐 그렇지 그 뭐여?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도 그 체중현 밖에 더 되아?

귀로 들을 수 있고, 뜻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헐 수 있고. 고러헌 것 가지고는, 체중현 가지고는...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경(經)부텀 들으면 아는 것이여. 들어가지고 아는 것이 체중현이여.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구중현(句中玄)이여. 구중현이라는 것은 처컥 들으면 벌써 그만 그 체중현 해(解)는 벗거져.
'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는디, 한 물건도 없는 그 가운데에 역무일물(亦無一物)이, 또한 일물지해(一物之解)도 없다' 요렇게 해서 고 지견(知見)까장 벗거질 수가 있지마는, 고것도 인천위사(人天爲師)는 되아. 인천의 스승은 된다 했어.

그러나 이 현중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되어야지.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척, 그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인자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그 말이여.(32분56초~34분55초)

*당적(當敵 막다·지킴 당/원수·적·상대 적) ; 대적(對敵)해 능히 감당(堪當)함.
*세존(世尊) : [산스크리트어] Bhagavat ; Lokanatha ; Lokajyestha의 음역(音譯)으로 바가범(婆伽梵) · 로가나타(路迦那他) · 로가야슬타(路伽惹瑟吒)라 하며 부처님 십호(十號)의 하나, 부처님은 원만한 공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시므로, 이렇게 부르며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산스크리트어]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소림(少林) : 중국 하남성(河南省) 숭산 소실봉(嵩山少室峰) 아래에 있는 소림사(少林寺)를 말한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達摩大師)가 9년 동안 이 절 석굴속에서 면벽(面壁)하고 있다가,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하여 중국에 선법(禪法)이 퍼지게 되었다.
*장경(長慶) 스님 ; (856-932) 설봉의존(雪峰義存)의 제자. 속성은 손(孫)씨, 법명은 혜릉(慧陵) 법호는 장경, 시호는 초각(超覺)대사.
*포단(蒲團 부들 포/둥글 단) : ①좌선할 때 깔고 앉는 방석(方席). ②부들풀로 만든 둥근 방석. 근래에는 이 포단 대신 '좌복(坐服)'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향림(香林) 스님 ; (870-949) 청원(靑原)하 제6세인 운문문언(雲門文偃)의 제자. 속성은 상관(上官), 법명은 징원(澄遠), 법호는 향림.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조주(趙州) : (778 – 897) 이름은 종심(從諗)이고 속성은 학(郝)씨인데, 산동성(山東省) 조주부(曹州府)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南泉) 보원선사(普願禪師)의 법을 받고, 그 문하에서 20년 동안 있었다. 80세까지 각처로 돌아다니다가[行脚] 비로소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서 학자들을 제접(提接)하기 40년. 당나라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 120세에 입적하였다. <어록(語錄)> 3권이 남았고, 그의 교화가 참으로 커서 「조주 고불(趙州古佛)」이라고 일컬었다.





------------------(2)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421칙. 「백수(栢樹)」 『선문염송 · 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51~252.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僧云和尙莫將境示人 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조주(趙州)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선사가 말하였다. "나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노라"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두두물물(頭頭物物) ; 온갖 사물과 현상. ‘두(頭)‘는 사물이나 사람의 단위. ‘각각의 존재[頭頭]와 모든 사물[物物]’이라는 말. 곧 모든 것을 가리킨다.
*공리(空理) ; 공이라고 하는 도리. 모든 것을 공으로 보는 것. 공견(空見).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전혀 없다'는 허무론적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공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는 부정된다.
인과의 도리를 지워 없애는 삿된 견해이니 모든 지견(知見) 중에서 공견의 과실(過失)이 가장 무거움.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제7 참청기연품(參請機緣品) 지황(智隍)선사.
但心如虛空 不著空見 應用無礙 動靜無心 凡聖情忘 能所俱泯 性相如如 無不定時

다만 마음을 허공처럼 하되 공견에 집착하지 않으면 응용에 걸림이 없으며, 움직임과 고요함에 무심하며,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을 잊고 주관[能]과 객관[所]이 다 없어져 성품과 형상이 여여하여 정(定)이 아닌 때가 없으리라.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 • 선우(善友) • 친우(親友) • 선친우(善親友) • 승우(勝友)라고도 함.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중현(玄中玄) ;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전강대종사 법어집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가 있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득소위족(得少爲足) ;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을 삼는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견처(見處) ; ①(틀린) 견해가 생긴 곳이라는 뜻. 집견(執見, 자신의 마음속에서 고집하는 견해. 여러 종류의 망견妄見)이 일어나는 장소. 유루법(有漏法)의 다른 이름. ②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견(見)은 견해, 세계관이라는 뜻. 특수한 세계관의 입장.
*견지(見地) ; 견처(見處). 안목(眼目). 사물, 현상 따위를 관찰하거나 판단하는 입장.
*악지악각(惡知惡覺) ; 잘못된 앎과 그릇된 생각. 그릇된 지각. 조사선(祖師禪), 간화선(看話禪)에서 주로 쓰는 용어. 악지악해(惡知惡解)라고도 한다.
모든 종류의 분별과 비축된 지식이나 정보 또는 거기서 나오는 온갖 활용이 본분(本分)의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하는 공부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통괄하여 악지악각이라 규정한다. 경론이나 조사(祖師)의 금언(金言)도 이것에 속한다.

[참고 ❶]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제23권. 「시묘명거사(示妙明居土)」
若常存此心 則有趣向分 若半進半退 半信半不信 不如三家村裏無智愚夫 何以故 爲渠百不知百不解 却無許多惡知惡覺作障礙 一味守愚而已 古德有言 硏窮至理以悟爲則

만약 언제나 이렇게 본분을 지향하는 마음을 남겨두고 있다면 목표에 도달할 여지가 있겠지만, 나가는 듯 물러서는 듯 믿는 듯 마는 듯 미적지근하게 한다면 시골 구석의 무지한 사내만 못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전혀 알지 못하고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기에 도리어 허다하게 잘못된 앎과 그릇된 생각이 장애가 될 일도 없어 오로지 어리석은 그 상태를 지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潙山)은 이러한 말씀을 전합니다.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려면 깨달음만 기준으로 삼아라’

[참고 ❷] 『천여유칙어록(天如惟則語錄)』 2권. (善遇 編)
將自己胸中 妄想妄念 惡知惡覺 盡底掀翻 一刀兩段 直得淨躶躶赤洒洒 孤逈逈峭巍巍地 然後 將祖師一箇公案 猛提提起

자기 흉중의 망상과 망념 그리고 악지악각(惡知惡覺)을 모조리 뒤집어엎어 한 칼에 두 토막 내듯이 물리치고,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에 깨끗이 씻은 알몸으로 우뚝 빛나고 높이 치솟은 듯이 되어라. 그런 다음에 조사(祖師)의 공안(公案) 하나를 맹렬하게 붙들고 놓치지 말고 의심하라.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연후에라사 ; 연후에라야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불견(佛見) ; ①부처님의 견해.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여 생기는 진정한 견해. 곧 모든 법의 실상을 관조하여 아는 지견을 말한다. 불지견(佛知見)과 같은 말이다.
②부처에 집착하는 견해. 부처에 대한 견해나 법에 대한 견해[法見]는 모두 집착을 촉발하는 근거가 되므로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
*법견(法見) ; 법에 대한 견해. 법에 집착하는 견해 또는 법이라는 관념에 집착하는 것은 정견(正見)이 아니며, 법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견해라야 정견이라 한다.
불법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그 법에 집착하여 반대로 또 하나의 속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는 용어로 쓰인다. 부처님의 경지에 집착하는 견해인 불견(佛見)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다.
*초심(初心) ; 초발심(初發心). 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을 처음으로 일으킴.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ㅊ/천도재(영가천도)2024. 5. 18. 11:18

천도 법문(No.257)—(게송)人生百年情何許 永別悠悠更對床 遙指白雲歸去路 遠山點點天蒼蒼.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 · 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5분 27초)


[법문] 송담스님(No.257)—1985년 입춘법회(85.02.04) (용257)

인생백년정하허(人生百年情何許)인고  영별유유갱대상(永別悠悠更對床)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요지백운귀거로(遙指白雲歸去路)에  원산점점천창창(遠山點點天蒼蒼)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생 백년이 그 정(情)이 얼마나 되는가?
영별유유갱대상(永別悠悠更對床)이다. 영원히 이별한—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이별을 하는 이 광경, 다시 또 이렇게 서로 상(床)을 앞에 대하게 된다.

요지백운귀거로(遙指白雲歸去路)에, 저 아스라니 가리키는 흰구름 돌아가는 길에, 먼산은 점점(點點)하고 하늘은 푸르르구나.

월송거사 양준호 영가. 잠시 인간 세상에 태어났다가 24세를 일기로 홀연히 떠나갔는데, 잠시 와서 그 부모와 가족들에게 무상(無常)의 도리를 일깨워 주고, 일가친척과 모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이 몸뚱이는 허망한 것이고, 인생은 허망한 것이고, 부귀와 공명도 한낱 뜬구름과 같다고 하는 것을 역력히 보여주고,
그리고 다시 인연 따라서 극락세계나 도솔천 내원궁에 태어나기를 바라며, 다행히 이 사바세계에 인연이 있어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한다면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다 같이 도를 닦는 도반(道伴)이 되어줄 것을 기약하고 다짐하노라.

오늘 입춘일을 맞이해서 이 법회에 참석하신 신남신녀 여러분, 함께 이 법석(法席)을 같이 하는 인연으로 과거 무량세에 지었던 모든 죄업은 봄눈 녹듯이 소멸하시고, 앞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이 뜻대로 이루어지시기를 간절히 부처님께 축원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점심공양은 월송거사 양준호 영가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서 공양(供養)을 올리게 됩니다. 영가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맛있게 공양을 해 주시고, 일 년 내내 건강하시고, 삼재가 드신 분도 아무 탈이 없이, 오히려 모든 일이 더욱 뜻대로 이루어지시기를 축원(祝願)합니다.(56분43초~62분20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인생백년정하허(人生百年情何許)~’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著, 박경훈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181 ‘贈別圓上人—원상인(圓上人)을 이별하며 드림’ 게송 참고.
*점점하다(點點-- 점·점찍다 점) ; (사물이 어떤 곳에) 여기저기 점을 찍은 듯이 흩어져 있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 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항상 법(法)을 전하여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어 법(法)을 듣기 어려운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도솔천 아래로는 사천왕천(四天王天)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게으름과 욕정(欲情)이 남아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고요한 선정에 들어 있어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이 부족한데,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도솔천에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기(受記)를 받아 미래에 부처님이 될 미륵보살은 부처님 생존시에 아일다(阿逸多, Ajita)가 도를 열심히 닦아 도솔천에 왕생하여 이 보살의 위치에 올랐다. 석가모니도 태어나기 전에 호명(護明)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이 보살의 위치에 올라 도솔천 내원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인도환생(人道還生 사람 인/길·세계 도/돌아오다·다시·또 환/날 생)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도(道) ; 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입춘(入春) ;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들며, 이때부터 봄이 시작된다고 한다. 양력으로는 2월 4일경이다.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법석(法席) ; 대중이 둘러앉아서 설법, 독경, 강경(講經), 법화(法話) 따위를 행하는 자리.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동[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罪] 행위[業 : 身口意 三業].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앉은삼재),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삼재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삼재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축원(祝願 빌·기원할 축/원할·바랄 원)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ㅊ/찬불게2024. 4. 27. 10:27

찬불게(No.227)—(게송)天上天下無如佛~ | 불법(佛法)의 위대성, 불법의 세계성, 불법의 우주성은 우리 죄 많은 중생, 업(業)이 두터운 중생도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하면 우리도 영원한 진리의 참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찬불게(讚佛偈) ;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4권) '初品中菩薩釋論第八' 참고. 『전등록 2』 (동국역경원) p133 참고.
『본생경(本生經)』에서 말하기를, 아주 먼 과거에 저사(底沙)라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때 두 사람의 보살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석가(釋迦) 보살이라 했고 또한 한 사람은 미륵(彌勒) 보살이라 했다.

어느날 저사불께서 두 보살을 관찰해 보시니, 지혜의 면에서는 미륵 보살이 앞서 있으나 중생 교화의 면에서는 석가 보살이 앞서 있어서, 저사불은 석가 보살로 하여금 속히 부처를 이루게[成佛] 하기 위하여 설산에 올라가 보굴(寶窟) 속에서 화광삼매(火光三昧, 火定)에 드셨다.

이때 석가 보살이 산에 올라가 약을 캐고 있었는데, 저사불께서 보굴 속에 앉아 화광삼매에 들어 밝은 광명을 내뿜는 것을 보자, 그 거룩한 모습에 어찌 할 수 없어 들었던 발을 내려놓고 또 다른 발을 들어서 걸어가지를 못하고 한 발을 들은 채로 합장하고, 환희하며 믿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여 일심으로 우러러 뵙되 잠시도 눈을 깜박이지 않고 7일 낮과 7일 밤을 있었다.
여기에서 그 칠일칠야(七日七夜) 시일이 지나가면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에 부처님 같으신 이 없으시고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서도 견줄 이 없도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상에 존재하는 것, 내 모두 보았으나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그 어느 것도 부처님에 비할 바 아니네.

이 게송을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이다해서 찬불게(讚佛偈)라 하는데, 7일 7야 동안 세존(世尊)을 자세히 관하되[諦觀] 조금도 눈을 깜박이지 않으시니, 이로 인해 아홉 겁(九劫)을 뛰어넘어 91겁 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를 얻으셨다.

 

 

(4분 36초)


[법문] 송담스님(No.227)—1983년(계해년) 성도재 법회(82.12.08.음) (용227)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요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하니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라.
천상천하(天上天下), 하늘 위 하늘 아래 부처님 같은 분이 없어.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라. 시방세계를 두루 보아도 부처님과 견줄 사람이 없더라.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간에 있는 바를 내가 다 보아도, 모든 것이 부처님과 같은 분이 없더라.(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은 저 창공에 수천만 개의 별 속에 휘황찬 밝은 달과 같은 존재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 달은 어떠한 별과도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크고 뚜렷하고 밝듯이, 부처님의 존재는 하늘 가운데에 가장 위대한 하늘이며, 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이며, 왕 가운데에 가장 위대한 왕이라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들은 그 다행하고 고마움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는 바탕을 우리 자신도 갖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실다웁게 믿고, 실다웁게 닦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성현(聖賢)이 될 수 있습니다.

불법(佛法)의 위대성, 불법의 세계성, 불법의 우주성은 우리 중생, 죄 많은 중생, 업(業)이 두터운 중생도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하면 우리도 영원한 진리의 참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46분39초~51분1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 찬불게(讚佛偈).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4권) '初品中菩薩釋論第八' 참고. 『전등록 2』 (동국역경원) p133 참고.
『본생경(本生經)』에서 말하기를, 아주 먼 과거에 저사(底沙)라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때 두 사람의 보살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석가(釋迦) 보살이라 했고 또한 한 사람은 미륵(彌勒) 보살이라 했다.

어느날 저사불께서 두 보살을 관찰해 보시니, 지혜의 면에서는 미륵 보살이 앞서 있으나 중생 교화의 면에서는 석가 보살이 앞서 있어서, 저사불은 석가 보살로 하여금 속히 부처를 이루게[成佛] 하기 위하여 설산에 올라가 보굴(寶窟) 속에서 화광삼매(火光三昧, 火定)에 드셨다.


이때 석가 보살이 산에 올라가 약을 캐고 있었는데, 저사불께서 보굴 속에 앉아 화광삼매에 들어 밝은 광명을 내뿜는 것을 보자, 그 거룩한 모습에 어찌 할 수 없어 들었던 발을 내려놓고 또 다른 발을 들어서 걸어가지를 못하고 한 발을 들은 채로 합장하고, 환희하며 믿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여 일심으로 우러러 뵙되 잠시도 눈을 깜박이지 않고 7일 낮과 7일 밤을 있었다.
여기에서 그 칠일칠야(七日七夜) 시일이 지나가면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에 부처님 같으신 이 없으시고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서도 견줄 이 없도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상에 존재하는 것, 내 모두 보았으나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그 어느 것도 부처님에 비할 바 아니네.

이 게송을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이다해서 찬불게(讚佛偈)라 하는데, 7일 7야 동안 세존(世尊)을 자세히 관하되[諦觀] 조금도 눈을 깜박이지 않으시니, 이로 인해 아홉 겁(九劫)을 뛰어넘어 91겁 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를 얻으셨다.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세간(世間) ; (산스크리트어 loka) 세(世)는 파괴·변화·흐른다는 시간의 뜻이 있고, 간(間)은 가운데·간격·틈새라는 공간의 뜻이 있다.
① 변하면서 흘러가는 현상계. ② 생물들의 세계. ③ 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 곧 산하대지. ④ 세상. 이 세상. 세속. ⑤ 산스크리트어 saṃsāra 미혹한 세계. ⑥ 육내입처(六內入處), 또는 십이처(十二處)를 말함.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는 바탕을 우리 자신도 갖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모든 중생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고 있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 ‘모든 중생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뜻.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涅槃經)』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역 北涼 天竺三藏 曇無讖 譯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제7권, 4.여래성품(如來性品)④.
佛說中道 一切衆生悉有佛性 煩惱覆故 不知不見 是故應當勤修方便 斷壞煩惱

부처님께서 중도를 말씀하실 때에 「온갖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지만 번뇌가 가려서 알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서 번뇌를 끊어야 한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우리도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실다웁게 믿고, 실다웁게 닦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 실참실오(實參實悟).
*실참실오(實參實悟)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깨달음.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실참(實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무잡(純一無雜)할 수가 없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참고 ❶]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서답(書答)」 ‘답노상서(答盧尙書 노상서에게 답함)’에서.
所以古德云 路途之樂 終未到家 見解入微 不名見道 參須實參 悟須實悟 閰羅大王 不怕多語 若要實參實悟 須是從前坐禪處得底 經敎上得底 古人語錄上得底 宗師口頭下得底 有滋味寶悟處 一時掃向他方世界 好字細看

그러므로 옛 스님은 ‘길의 즐거움은 종내 집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보고 알아 미세한 데 들어가는 것은 도를 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참구는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염라대왕은 많은 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알차게 참구하여 진실로 깨달고자 하면, 종전에 좌선(坐禪)해서 얻은 것과 경전에서 얻은 것과 고인의 어록에서 얻은 것과 종사의 입을 통해 얻은 것 등에서 자미(滋味)있고 소중히 여긴 깨달았던 경계를, 한꺼번에 다른 세계에 쓸어 버리고 자세하게 살펴야 좋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참고 ❷]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26. 「시중(示衆)」에서.
若論實參實悟 正如八十公(翁?)公 向逆風逆水裏 牽一隻無底鐵船相似 不問上與不上 徹與不徹 直須心心無間 念念無虧 一步一步 盡平生伎倆睚(厓?)將去 睚到著脚 不得處 筋斷骨折時 驀然水轉風回 卽是到家消息 卽今莫有到家底麼 (卓柱杖一下 云) 十萬八千

만일 실답게 정진을 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말하자면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배를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함과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묻지 말고, 곧 마음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평생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밀어서 다리를 붙일 수 없는(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과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 이르르면 별안간 물살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집에 이르른 소식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이가 있느냐? (주장자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십만(十萬) 팔천리(八千里)로다.

[참고 ❸]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상권 ‘흥성사입원소설(興聖寺入院小說)’에서.
若也眞實參學者 參須實參 悟須實悟 始得 且作麽生是實參實悟耶 於二六時中 四威儀內 以生死大事爲念 離心意識 參出凡聖路 學以無心無爲 綿密養之 常常無念 常常不昧 了無依倚 到冥然地 自然合道 不見古人云 無心方見本來人

만약 진실한 참학자(參學者)라면 참구는 반드시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한 참구이며 진실한 깨달음인가?
하루 열두 시간과 사위의(四威儀) 가운데서 생사의 큰 일을 생각하되, 심의식(心意識)을 떠나 참구하여 범성(凡聖)의 길을 벗어나고 무심(無心)과 무위(無爲)를 배우고 그것을 면밀히 길러 언제나 무념(無念)하고 항상 어둡지 않아, 마침내 기댈 곳이 다 사라지고 명연(冥然)한 자리에 이르면 자연히 도에 합할 것이다. 고인이 ‘무심(無心)이어야 비로소 본래인(本來人)을 본다’라는 말을 모르는가?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중생(衆生) ; ①생존하는 것. 목숨이 있는 것. 산것. 살아있는 것. 특히 인간. 사람들. 세상 사람. 유정(有情)이라고도 함. ②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③부처가 될 수 있는 요소. 본질.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ㅊ/참선은 쉽다2024. 4. 6. 08:58

불법(참선)은 쉽다(No.114)—부처님 당시에 왕사성(王舍城)에 장사를 하는 형제 설화 | 번뇌·망상이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번뇌 망상 그놈 나온 곳을 ‘이뭣고?’ 이렇게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진여적멸궁(眞如寂滅宮)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다. 이것이 정법이요, 참선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아니한 영원한 부적이다 | (게송)塵勞逈脫事非常~.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어렵다, 어렵다. 팔만대장경 그렇게 많은 것을 어떻게 다 읽으며, 읽어봤자 아지도 못하고, 한문이 어려워서 아지도 못하고, 알아봤자 그 많은 것을 다 읽을 수가 없다. 아! 불법은 어려워서 못한다' 이러한 분들을 가끔 많이 만남니다마는 불법(佛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아직 정법(正法)을 만나지를 못했기 때문에 불법은 막연하게 어렵고 깊고 그렇게 겁을 내서 생각하는 것이지, 참으로 이 참선법(參禪法)을 믿고 행할 줄만 알면 불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19분 29초)


[법문] 송담스님(No.114)—1980년(경신년) 입춘법회(음 1979.12.19/양 1980.02.05)(용114)

부처님 당시에 왕사성(王舍城)에 장사를 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아주 그 형제는 대단히 합심을 해서 장사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한마을에 사는 아주 가문이 좋은 부자집 따님이요 아주 인물이 좋은 규수(閨秀)하고 눈이 맞아 가지고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혼을 해 놓고 장사일로 해서 수백 리 멀리 떨어진 도시로 떠났습니다. 가 가지고 그 사업 관계로 해서 여러 해를 고향으로 돌아오질 못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통신이 있어서 편지도 할 수가 있고 전화도 할 수가 있었지만, 삼천년 전에는 그러한 통신수단이 없어서 그리고 너무 사업에 몰두하고 복잡했기 때문에 연락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근데 그 규수 댁(宅)에서는 아! 신랑이 먼 데로 가 가지고 소식이 없으니 딸은 자꾸 나이만 먹고 너무너무 기다리다가 병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규수의 부모는 '차라리 그 형이 소식이 없으니까 동생을 갖다가 사위로 맞이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냈습니다. '동생이 인물도 더 좋고 성격도 좋고 그러니 차라리 그 동생을 사위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리 생각을 하고 동생한테 사위가 되어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 동생이 말하기를 "그럴 수가 있습니까? 형님이 멀리 가셨다가 지금 사업상으로 못 오시는데 어떻게 제가 형수 될 분하고 결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건 당치않합니다. 지금 형님이 살아계시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고 아주 딱 끊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 참! 그 동생이 하는 말 들어보니 또 말은 옳은 말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또 며칠을 두고 연구를 한 결과, 어떤 그 장사하는 사람을 시켜 가지고 돈을 주어서 '그 형이 거기서 그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실패가 되어 가지고 병이 나서 죽었다' ... (녹음 끊김. 8초간 묵음) ...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그 규수의 부모가 동생을 찾아가서 "아! 인자 당신 형이 병들어서 죽었으니 인제는 내 사위가 되어줘도 되지 않겠느냐?" 찝찝하니 생각하고 응하지를 않다가 몇 달이 지내갔습니다.
계속해서 사위를 삼기 위해서 정성을 들이고 간곡히 교제를 해 가지고 결국은 그 동생이 형수 될 그 규수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해 가지고 포태(胞胎)를 했습니다. 포태를 했는데 갑자기 그 형이 돌아온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것 참 큰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산파를 시켜서 배를 이리저리 만져 가지고 그 포태된 애기를 갖다가 유산을 시켰습니다.

그래놓고 있는데 그 형이 과연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맨 처음에 그 아내가 될 규수를 찾았는데, 벌써 그때는 형이 근처에 와서 ‘그 규수가 자기 동생하고 결혼을 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당장 그 동생과 그 자기 아내가 될 여자를 갖다가 한칼로 요절을 내서 죽일라고 칼을 가지고 왔는데, 벌써 그런 소문을 듣고 동생은 이웃나라로 피해 갔습니다.

피해 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무슨 형수 될 규수가 욕심이 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형님이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참 형님하고 약혼만 해놓고 결혼도 못하고 병이 나서 죽게 된 규수가 딱하고, 동생으로서의 그 형이 저지른 일을 수습해야겠다고 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명감에서 그 규수하고 결혼을 한 것이, 아! 이렇게 형님이 살아오고 보니 참 변명할 길도 없고 무슨 사과할 수도 없고, 죽인다고 칼을 가지고 찾으러 다니니 그거 기가 맥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웃나라로 피신을 우선 해 가지고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되었는데, 그래 가지고 이 스님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출가를 했기 때문에 정말 생명을 바쳐서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식음(食飮)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계속해서 그 동생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런 결과 이웃나라에 부처님 제자가 되어 가지고 어느 산에서 도(道)를 닦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활을 잘 쏘는 포수를 갖다가 매수(買收)를 해 가지고 차마 형으로서 동생을 갖다가 더군다나 출가한 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가 없어서 그 포수로 하여금 그 동생을 죽이면 후한 상을 준다고 이렇게 해 가지고, 그 포수하고 둘이 가 가지고 '포수는 저만큼 숨어 있으라'고 그러고, 자기는 동생한테 찾아갔습니다.

동생은 반가워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인간적으로 대단히 딱한 그런 상황이었지마는, 이미 도를 얻은 스님이라 자기의 죄를 억지로 피할라고 하지도 않고 또 웬수로 상대해 가지고 형을 갖다가 상대하지도 않고 순수한 평범한 마음으로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아주 그 속의 마음을 감추고 반가운 듯이 인사를 하고 "그동안에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난 처음에는 너를 원망을 했지만 너를 사실은 만나고 싶었다" 이런 얘기 등등 하고 있을 때 약속을 했던 그 포수가 그 동생을 겨냥해 가지고 활을 쐈습니다.
아! 그 활 잘 쏘는 사람이 활을 쐈는데 그 활이 빗나가 가지고 형 모가지에 맞어 가지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런 그 동생은 그 형을 시체를 거두어서 잘 장례를 지내주고 천도(薦度)를 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원한을 깊이 먹었던지 그 형은 죽어 가지고 독사(毒蛇)가 되었습니다. 독사가 되어 가지고 그 동생의 공부하고 있는 그 토굴에 문턱 밑에 가서 가만히 숨어서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언젠가 몸에 독(毒)이 오를 때를 기다려서 독이 몸에 잔뜩 어리면은 그 동생이 문으로 나올 때 탁 물어 버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그 좀에 문에 치여 가지고 독사가 깨져서 죽었습니다.
아! 그 복수를 할려고 그랬던 것이 그 문에 치여 가지고 참 본의 아니게 죽게 되니까 더욱 독이 나 가지고 독거미가 되어 가지고 천장에 가서 붙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컸습니다. 커 가지고 아주 독이 올랐을 때 천장에서 내려와 가지고 그 공부하고 있는 동생을 갖다가 물어서 죽게 했습니다.

그 뒤에도 또 그 동생은 어떻게 되고 형은 어떻게 되고 한 얘기가 장황이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해서 친구 간에 웬수가 되고, 형제와 부자 간에 웬수가 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웬수가 되고, 일가친척과 웬수가 되어서, 금생에는 내가 저 사람을 죽이면 내생에는 저 사람은 나를 죽이고 이렇게 해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으면 그다음에는 그 쥐는 고양이가 되고 그래 가지고 엎치락뒤치락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점점 더 약이 올라가기 때문에 처음에 바늘 가지고 싸움을 하다가, 다음에는 칼 가지고 싸움을 하다, 다음에는 도끼 가지고 싸움을 하다가, 다음에는 총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일을 잘못 처리해 가지고 큰 재앙을 맞아들이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참선한 사람은 작은 일로 해서 큰일로 나아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 작은 일을 발판으로 해서 큰 깨달음에 이르를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황금을 갖다가 똥처럼 쓰고, 지혜로운 사람은 똥을 갖다가 황금처럼 쓴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똥은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지만 농부가 그것을 잘 발효를 시켜서 퇴비를 만들어 가지고 비료로 사용하면은 농사를 잘 지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우리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妄想)은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입니다—그러한 번뇌 망상을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면, 그 번뇌 망상이 완전히 승화(昇華)해 가지고 보리심, 깨달음을 증득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어렵다, 어렵다. 팔만대장경 그렇게 많은 것을 어떻게 다 읽으며, 읽어봤자 아지도 못하고, 한문이 어려워서 아지도 못하고, 알아봤자 그 많은 것을 다 읽을 수가 없다. 아! 불법은 어려워서 못한다' 이러한 분들을 가끔 많이 만남니다마는 불법(佛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아직 정법(正法)을 만나지를 못했기 때문에 불법은 막연하게 어렵고 깊고 그렇게 겁을 내서 생각하는 것이지, 참으로 이 참선법(參禪法)을 믿고 행할 줄만 알면 불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번뇌 망상은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 번뇌 망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거든.
우리 중생, 업(業)이 아무리 많은 중생이라도 낱낱이 다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자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자리에서 수없이 한없이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 그 말이여.
그 번뇌 망상이 저 어디 지옥의 변소간 같은 데서 끌어온 것이 아니라, 바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계시는 진여불성에서 나온 것이거든. 그래서 그놈 나온 곳을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진여적멸궁(眞如寂滅宮)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성이 나면 그 성이 딴 데서 나온 게 아니라 적멸궁(寂滅宮)에서 나온 소식이거든. 그래서 그놈을 없앨려고 하지도 말고,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누를려고 하지도 말고, 일어나는 그 성내는 마음 그놈으로 '이 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나가는 것이 바로 이것이 정법이요, 참선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아니한 영원한 부적이다 이 말씀이여.

오늘은 입춘날이라 여러분에게 부적을 노놔 드렸습니다. 다 받으셨습니까?
신도 : "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여러분은 금방 받으신 그 부적으로 어떠한 재앙을 만나더라도 그 부적을 내세우십시오. 팔만사천 마구니도 그 부적 앞에는 꼼짝을 못하고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며, 항복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어줄 것입니다.(58분30초~1시간18분6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왕사성(王舍城) ; 산스크리트어 rājagrha 팔리어 rājagaha 중인도의 동부, 지금의 비하르(Bihar)의 남쪽 지역에 있던 BC 6~BC 5세기의 석가모니 시대에 마가다국(magadha國)의 도읍지. 지금의 파트나(Patna) 남쪽에 있는 라즈기르(Rajgir)에 해당함.
*규수(閨秀 안방·부녀자 규/빼어나다·훌륭하다·아름답다·꽃 수) ; ①혼기에 이른 남의 집 처녀를 점잖게 이르는 말. ②학문과 재주가 뛰어난 여자.
*포태(胞胎 배·태보胎褓·자궁 포/아이를 배다·태아 태) ; 아이나 새끼를 뱀.
*산파(產婆 낳을 산/할머니·늙은 여자 파) ; ①아이를 낳는 것을 돕고 임산부와 신생아의 보건과 양호 지도 등의 일을 하는 사람. ②어떤 일을 잘 주선해서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존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유산(流產 흐를 유/낳을 산) ; ①뱃속의 아기가 산달이 차기 전에 죽어서 나옴. 자연 유산과 인공 유산이 있다. ②계획 또는 추진하던 일이 중지되거나 실패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한칼 ; 한 번 휘둘러서 베는 칼질.
*주야불철(晝夜不撤 낮 주/밤 야/아닐 불/거둘·철수할·그만둘 철) ; 불철주야(不撤晝夜). ①어떤 일을 함에 있어 밤낮[晝夜]을 가리지[撤] 않음[不]. ②밤낮없이.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송담스님(No.306)—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회]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64분6초~66분26초) [ 참선법 A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를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이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큰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큰 메겡이로 메쳐서 그 간장독이 쩍!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佛祖)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송담스님(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승화(昇華 오를 승/빛날 화) ; 어떤 현상이 한 단계 더 높은 영역으로 발전함.
*보리심(菩提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①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②고려 고종23년(1236)부터 38년(1251)에 걸쳐, 16년만에 불경(佛經)과 장소(章疏)를 집대성하여 목판에 새겨 인간(印刊)한 대장경.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만든 경판(經板)의 수가 8만 1258판에 이른다.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다.
고려 현종(1009~1031 재위)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판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고종19년(1232) 몽골족의 침입으로 불타자 다시 불력(佛力)의 가호를 빌기 위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 한다.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 · 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태양처럼 일체법을 비추어 관조하는 광대무변한 지혜를 지닌 부처님.
한역어로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法身)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적멸궁(寂滅宮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집·대궐·절·마음 궁) ; 적멸의 궁전은 적멸을 형상화한 말로서,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欲)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 ;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

생사해탈이 보통일이 아니니 긴히 승두[화두]를 잡고 한바탕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추위가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ㅊ/참선(의 목적)2024. 4. 2. 07:21

참선(No.114)—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무량겁 업의 종자(種子)를 녹여 없애는 참선법 | ‘마음을 관하는 한 법[觀心一法]’이라는 게 바로 참선(參禪) 공부, 내가 나를 찾는 공부 | 불법(佛法)은 참나를 깨닫는 데에 목적 |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

 

(1) 19분 23초.

 

(2) 17분 23초.

 

(3) 13분 19초.


[법문] 송담스님(No.114)—1980년(경신년) 입춘법회(음 1979.12.19/양 1980.02.05)(용114)

(1/3)------------------

그런데 모든 재앙은 사실 과거(過去)에 우리가 어떻게 지었느냐? 그리고 또 현재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우리의 장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금으로부터 1초 전이 전부가 과거에 들어갑니다마는, 그 과거에 우리가 지은 그리고 현재 우리가 생각 생각이 짓고 있는 그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의 팔식(八識) 가운데에 그 지은 업(業)의 종자(種子)가 다 저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팔식(第八識) 속에,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우리가 지은 업의 종자가 인연(因緣)을 만나면 그 종자에서 싹이 터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전개되는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팔자(八字)인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서, 그 원인을 ‘어떻게 해서 나에게 이러한 팔자가, 운명이 전개되는가?’를 그 원인을 모르고서, 당장 그것을 없이 하기만을 바래고, 그걸 없이 하기 위해서 점(占)을 친다던지, 갖은 푸닥거리를 한다든지, 또는 돈을 많이 주고 무당한테 그 부적 같은 것을 사 가지고 몸에 지닌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소멸하지 아니하고서는 그것이 소멸 당하지 않기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내게 그 비린내 나는 생선을 엮던 그 새끼토막 같은 것을 몸에다 두르고 다니면서, 몸에서 비린내 안 나기를 소원해 봤자 그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첫째, 몸에 비린내가 안 나게 할려면 생선을 묶었던 그 새끼를 몸으로부터 풀어서 버리고 그리고 몸을 깨끗이 닦음으로 해서 비린내는 내 몸에서부터서 안 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나의 마음속에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갖다가 정화(淨化)하고 승화(昇華)시키는 그러한 노력이 없이는 우리의 앞날에 좋은 팔자와 운로(運路)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 업장을 소멸하는 법이 십선법(十善法)을 닦는다던지 또는 사성제(四聖諦)법을 닦는다던지 12인연법 · 육바라밀(六波羅蜜)법 · 염불(念佛) · 독경(讀經) · 기도, 얼마든지 우리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팔만사천 가지의 그러한 묘한 법이 있습니다.
어느 법(法)이고 하나도 버릴 법이 없고, 어느 법이고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닦는다고 하면은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법(法)을 다 닦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아, 어느 법이 그 가운데 좋고 나쁘고 해야 그것을 하지, 다 좋은 법인데 어떻게 어느 법만을 추려서 하고 어느 법은 안 할 수가 있겠는가?'
한 번 두 번 해보고 별 효과가 없으면, 기대할 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또 그걸 버리고 또 다른 방법을 좀 해보고, 그걸 좀 얼마 동안 해보았지만 별로 신통치 아니하면 또 그걸 버리고 또 다른 법을 좀 해보고, 이렇게 해서 많은 세월 동안을 그런 식으로 갈팡질팡을 하면서 혹 뜻대로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고, 되면 좋아하고 안 되면 낙담(落膽)을 하고 비관(悲觀)을 하고 그러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온 분이 적지 아니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용화선원에서는 부적(符籍)도 드리지도 않고, 언제나 다른 법회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일러드리는 말은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이, 다 그것을 한데 모아서 녹여 가지고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골수(骨髓) 법문을 추출을 해 낸다면, 그것이 바로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法)이 모든 행(行)을 다 포섭(包攝)을 한다’ 이겁니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觀心一法]’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입니다. 참선은 '이 무엇고?' 내가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사람들은 밖에서 무엇을 찾는 데에는 익숙합니다. 물질적인 것이건 무엇이건 밖에서 찾는 데에는 어릴 때부터서 여태까지 무량겁을 두고 밖에서 무엇을 찾아 가지고 자기의 소유를 만들고, 자기의 욕심을 충족을 시키고, 자기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이러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구한 것은 언젠가는 인연이 도래(到來)하면 나로부터서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근데 이 참선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무엇을 구하느냐?
내가 나를 찾는 공부여.

‘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 정말 그것은 여러분들이 납득할 만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밖에도 있지 아니하고, 안에도 있지 아니하고, 그 중간에도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다’고 말하는 그 말에도 어폐(語弊)를 면치 못합니다마는 부득이해서 그러한 말을 빌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나, ‘나’라고 하는 것, 중생들은 ‘나’라고 하면 이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사지(四肢)가 있는 이 육체를 가지고 '내 몸이다, 나다' 이리 생각합니다마는,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가지고 그래 가지고 이 육체를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져서 없어지고 맙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때리면 아픈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이놈이 바로 이 ‘나’입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몸을 받아난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사실 이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받아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겨난 역사가 없이 존재해 있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기 때문에 멸(滅)하는 때도 없습니다. 그러한 ‘한 물건’이 이 몸뚱이를 주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아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육체의 관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심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한다’ ‘재앙을 소멸을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을 바로 알아야만 그 업장을 소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굿을 하고—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말씀이 계셨습니다마는, 부적을 몸에 많이 지니고 굿을 하고 푸닥거리를 한다고 해봤자, 우리의 업장(業障)이 그러한 방법으로써 소멸(消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할 경우 일시적으로는 우선한 것 같이 느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얼마 시일이 지나면 다시 또 일어나고, 또 많은 돈을 들여 가지고 또 푸닥거리를 하면 조금 우선함을 느끼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점점점점 깊이 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그러한 삿된 믿음에 빠져 들어간 사람이면 백이면 백, 다 집안에 재앙이 끊일 날이 없고 잡귀가 득실거리고, 그래 가지고 정신까지도 점점 해를 거듭할수록 삿된 소견에 빠져 가지고 헤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고 싶어도 무서운 협박과 엄포 때문에 겁이 나서 발을 빼지를 못한 사람이 상당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정법(正法)은 그 근원을 바르게 다스려서 영원히 그러한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나무를 가꾸고자 할 때 그 뿌리에 좋은 흙과 좋은 비료와 기타 수분이라든지 그 충분히 잘 공급을 함으로써 그 나무는 줄기와 가지와 잎이 무성해져서 결국은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뿌리에는 좋은 토양이 아니고 또 좋은 적당한 비료를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수분도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그리고 뿌리는 다 밖으로 드러나다시피 하는 상태에서 가지와 잎에만 아무리 정성을 쏟아 봤자 그 나무는 시일이 가면 갈수록 시들고 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근본을 다스리면은 가지와 잎과 열매는 저절로 열리는 것이고, 근본을 버리고 지엽만을 붙잡고 아무리 늘어져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우리의 ‘참나’를 찾아서 그걸 닦고 깨닫는다면, 우리의 육체와 우리 주변의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 저절로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라든지, 부부간에 문제라든지, 형제간에 또는 자식 자녀의 문제라든지, 친구나 일가친척에 관한 건이라든지, 재산이나 명예나 권리에 관한 모든 문제가 그 근원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내가 내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업(業)의 종자(種子)를 갖다가 정화(淨化)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아무리 부모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부부 형제간의 관계, 일가친척의 문제를 바로잡을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봤자 그리고 원망을 해봤자 그리고 한탄을 해봤자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 우리는 ‘마음’이라는 말을 어릴적부터서 듣고 그리고 그 말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라 하면은 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마음’을 바로 본 사람, 바로 안 사람, 바로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닙니다. 그 이름만을 알고 쓰고 있을 뿐 그 실상(實相),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루,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언제나 그놈이 그놈을 가지고 그놈으로 그놈이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면서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놈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단 일분일초도 떠날 수가 없고, 언제나 같이 살고 있으면서 그놈을 알 수가 없는 것인가?
눈을 통해서 모든 빛깔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를 듣고 분간하며, 코를 통해서 모든 냄새를 맡고 숨을 쉬고,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맛을 보고 그리고 말을 합니다. 손과 발, 육체를 가지고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다 식별을 합니다.

그런데 대관절 ‘눈을 통해서 보는 놈이 무엇인가?’ 찾어보면 자취가 없습니다.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면서, 왜 보는 그놈을 다시 볼려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알 수가 없는 것이냐?
여기에 우리가 마음을 닦는다, 도를 닦는다, 불법을 믿는다고 해도, 1년 2년 3년 10년을 절에를 다니고 법문을 듣고 또 참선을 해도 마냥 제자리걸음이요 답답하기가 그지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보면서, 보는 그놈을 찾으면 자취가 없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그놈을 찾으라고 법상(法床)에서 큰스님네는 법문하실 때마다 ‘그놈을 찾으라’고는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는 아니하고.(8분16초~27분39초)





(2/3)------------------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

무슨 공부를 해서 차츰차츰 성과가 눈에 보이고, 이만큼 하면은 그만큼 한 결과가 나타나서 스스로도 흐뭇하고 남에게 이만큼 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면 더욱 신명이 나고 재미가 있을 텐데 석 달씩,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 집안을 갖다가 떠나서 선방에 가서 석 달씩 그렇게 공부를 하고 와도 영감님 앞에, 또는 아들이나 며느리 앞에, 손자들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가서 공부를 해 가지고 아무것도 내놓을 것도 없으면서, 그리고 그다음 철에는 또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만큼 공부를 했다'고 내놓을 것이 있으면 아들 딸 며느리 영감이 모두가 다 ‘참, 그 좋다’고 이해를 하고 더욱 가시도록 협조를 하고 이해를 하시고, 또 그분네들도 보람을 느끼고 또 그분들도 할려고 하시고 그럴 텐데, 만날 절에만 다니고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절로만 다니시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마당에야 그 참 딱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한철 내 공부를 하고도 내놓을 수 없는 데에 이 참선에, 이 정법(正法)에 묘미(妙味)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루법(有漏法)이요, 유위법(有爲法)이라 그것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또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타관(他官)에 가서 고생을 해 가지고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 가지고 와 봤자 그것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며 도둑을 맞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 써버리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석 달 내 자고 싶은 잠도 다 못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못 먹고, 그 고생을 하면서 공부를 해서 아무것도 내놓을 것은 없지마는, 그분이 정말 정법을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을 하셨다면, 설사 아무것도 내놓을 것은 없지마는 그분은 영원한 것을 마음속에서 잘 닦아서 얻을 것...(녹음 끊김)...은 얻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해서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으면 그거 해서 뭐하느냐?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제팔식(第八識)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업의 종자를, 그것을 갖다가 순화하고 승화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을 속에다 많이 따아 담은 것이 아니라, 제팔식(第八識) 속에 쌓여져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소멸을 하고 업의 종자를 승화(昇華)를 시켜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하게 하는 거름으로 사용을 했다 이겁니다. 있는 것을 녹여 없앴으니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그 말이여.

여기에 한 빈 자루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무엇을 가지고 밤도 줏어 담고 과자도 줏어 담고 해서, 많이 줏어 담아 가지고 왔으면 그 자루 속에서 그 담아진 것을 꺼내서 보여줄 것이 있겠지만,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는 업(業)의 자루 속에 담아져 있는, 무량겁을 통해서 그 쌓아 담은 업의 종자를 참선을 함으로써 그것을 녹여 없앴습니다.
그러니 가서 내보일 것은 확 뒤집어 보여 봤자 빈 자루입니다. 빈 자루를 내보였으니 거기엔 아무것도 내보일 것이 없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석 달 동안 공부를 하고 집에를 가서, '할머니, 가서 공부를 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빈 자루라도 있으면 탁! 까뒤집어 보이는데,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루가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루인데, 우주법계를 그 속에다 다 담아도 그 자루에는 다 차지도 않습니다. 허공을 그 속에다 다 집어넣어도 그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자루는 차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자루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루를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루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짓고 지은 선업(善業) · 악업(惡業) · 무기업(無記業) 이 세 가지 종류에 업으로써 지은, 수확한 종자(種子)를 그 속에 탁 가뜩 담어 가지고 다닌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자기 종자에 해당되는 인연을 만나면 그 많은 종자 속에 어떤 종자가 거기서 싹이 터 나옵니다. 수수나 조나 모든 종자(種子)가 습기와 적당한 열을 온도를 만나면 눈이 터 나오듯이, 우리의 아뢰야식 속에 쌓아져 있는 선업(善業) · 악업(惡業) · 무기업(無記業) 종자가 그때그때 터져 나온 것입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냄새 맡을 때, 혀로 맛볼 때, 손과 발 몸으로 감촉할 때, 생각으로 무엇을 생각할 때, 이러한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만나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불능[三不能]이 있는데, (첫째)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濟度)하지 못한다. 아무리 부처님이 삼계(三界)의 대성현이시고, 신통(神通)이 구족(具足)하신 그러한 대성현이시지만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가 없다.

둘째는 중생계를 다하지 못한다. ‘중생계를 다하지 못한다’는 말은 중생이 하나도 없도록 중생을 없앨 수는 없다.
중생은 그 한량이 없는 큰 그 아뢰야식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그 업의 종자가 가뜩차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계속 거기에서는 싹이 터 나옵니다.

좁쌀도 나왔다가, 보리쌀도 나왔다가, 수수쌀도 나왔다가, 그때그때 싹이 트기에 적당한 인연을 만나면, 조건을 만나면 거기에 있는 많은 종자 가운데에 그 중에 어느 하나가 나오게 되고, 그다음에 또 나오게 되고 하는데, 계속 다 싹이 터서 다 발아(發芽)를 해 가지고 다 나가버리면 언젠가는 그 종자(種子)가 동이 날 텐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싹이 터 나오면서 새로운 종자를 동시에 갖다가 또 저장하게 됩니다. 업장(業藏) 속에 있는 종자가 싹이 터 나온 것을 현행(現行)이라고 합니다. 현행—'나타날 현(現)' 자, '행할 행(行)' 자. 종자가 밖에 어떠한 적당한 조건을 만나면은 현행(現行)을 합니다. 싹이 터 나옵니다.
싹이 터 나오면서 거기에서 속에 있는 어떠한 종자를 갖다가 훈(薰)을 합니다. 그 종자를 갖다가 이 또 찜질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자가 싹이 터 나오면서 다시 또 새로운 종자를 갖다가 저축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보거나, 귀를 통해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뜻으로 무엇을 생각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현행(現行)이면서 그때 느꼈던 것이 고대로 아뢰야식 속에 또 녹음이 됩니다. '녹음이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종자를 갖다가 수확을 해서 저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리해서 우리의 업의 종자가 한없이 터져 나오고 한없이 저장이 되기를 무량겁을 해왔고, 앞으로도 무량겁을 두고 그러한 작업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도(六道)의 윤회(輪廻)가 끊일 날이 없습니다.

지은 복(福)이 있으면 천당에 가고, 그놈이 다하면 다시 인간에 떨어지기도 하고, 축생으로도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죄(罪)를 지은 바가 많으면 또 지옥에 가기도 하고. 육도윤회를 끊임없이 계속하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또 앞으로 무량겁을 두고 윤회, 생사윤회가 또 계속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러한 도력(道力)과 신통력(神通力)과 법력(法力)으로도 그것을 갖다가 다 없앨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 방법이 바로 이 불법(佛法)이요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무량겁 쌓아 놓은 업(業)의 종자(種子)를 녹여 없애는 참선법>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다. 빨간 꽃을 보았다. 지금 이 탁자 위에도 노란 국화가 화병에 꽂혀 있습니다.
그것을 본 찰나, '아! 국화로구나. 이 겨울에도 국화가 피었구나. 좋은 향내가 나겠지. 어떻게 저것을 겨울에 피웠나? 온실에서 재배를 했겠지?'

이런 것을, 국화 하나를 봄으로써 우리는 끝없이 생각이 그렇게 번져 나갑니다. 그러다가 과거에 어떠한 국화에 관련된, 자기와 국화에 관련된 어떠한 일에 우리의 상념(想念)이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혹 눈물바람을 하기도 하고 혹 과거에 어떤 때를 갖다가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의 국화를 보았다. ‘노랗다. 아름답다’ 그러한 두 번째 생각으로 건너가기 전에 국화가 눈에 딱! 띄었을 때, 그때 바로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이뭣고?’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국화를 보고 ‘노랗다. 아름답다. 송이가 크다 작다’ 이렇게 둘째 생각, 셋째 생각, 넷째 생각 그렇게 번져 나갈 것이 아니라 국화가 눈에 탁! 들어온 그 찰나에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이전에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그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국화를 봤을 때 뿐만이 아니라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새소리를 들었건, 차 소리를 들었건, 개 짖는 소리를 들었건, 들은 그 찰나에 '이뭣고?' '이뭣고?'

어떤 생각이 일어났다, 친구 생각이 났다, 그 친구와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다 보면, 과거에 그 친구가 자기에게 섭섭히 한 일까지 생각해 가지고 공연히 심사(心思)가 사나와지고 그 끝에 아들이나 손자나 며느리가 옆에서 뭐라고 하면 거기에까지 신경질을 부리게까지 됩니다. 참선한 사람은 그게 아니라 '친구 생각이 났다' 두 번째 생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무엇을 맛을 보거나, 차웁고 더운 것을 느끼거나, 지나간 일이 생각이 나거나,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을 두고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미 업의 종자를 보리심(菩提心)으로 승화를 시켰기 때문에 업의 종자는 '소멸이 되었다'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소멸이라기보다는 '승화를 시켰다'고 표현한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알기 쉽게 '소멸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27분40초~45분1초)





(3/3)------------------

하루를 그렇게 살고, 이틀을 그렇게... (녹음 끊김, 4초 묵음. 중복)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 하루를 그렇게 살고, 이틀을 그렇게 살고, 한 달을 그렇게 살고, 1년을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사실 아까 말씀드리기를 석 달을 해봤자 아들딸 · 손자 · 영감님께 아무것도 보일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마는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가고 하루하루를 다져 나가고 한 달 한 달을 다져 나가면, 자기 스스로 생각할 때 또는 주위 사람들이 볼 때 모든 점에 있어서 사람이 개선되어 가고 개조되어 가고 승화되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오직 깨달음을 향해서 목적을 하고 닦아가는 것이지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생활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빨리 얻어지는 효과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까짓 나쁜 성격이 원만해지고, 옹졸했던 성격이 관대해지고, 이러한 것이 참선의 목적은 아니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 나가면, 구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러한 인간에 있어서 존경받을 수 있고, 평온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성격이 개선되어 간다면 그것도 또한 대단히 소중한 수확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옹졸한 성격, 비열한 성격,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얼마를 자기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가치 없는 인간을 만들고,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그러한 일이 우리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를 우리는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시부모로서, 며느리로서, 동생으로서, 형으로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뭣고?' '이뭣고?'로써 생각을 돌려나가는 길을 행하지를 못하고, 사소한 일로 해서 두 번째 생각 세 번째 생각으로 계속 올바르지 못한 중생심을 갖다가 방자히 해 가지고, 자기 스스로도 불행하고 남까지 언짢게 만드는 사례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우리는 생활을 통해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이 법회가 끝나자마자 부적(符籍)을 사러 가실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정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면 부적을 몇 장을 사서 가지셔도 괜찮습니다만, 그러나 이 공부를 철저히 하면 그러한 부적을 한 장도 갖지 않더라도 모든 재앙은 소멸이 되고, 있는 재앙을 소멸하는데 끄친 것이 아니라, 소멸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재앙이 속에서 나오는지 밖에서 다가오는지 그걸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마는, 어떤 부정적인 사건을 만났을 때, 먼 데서 가까이에서 만났을 때 그것이 물질적인 문제가 되었건, 정신적인 문제가 되었던, 인간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그러한 조건을 만났을 때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보다 더 행복한 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 한 번 함으로써 재앙을 뒤집어서 복(福)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 업식(業識)을 돌려서 보리심(菩提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1원 1원이 모여 가지고 백 원이 되고, 1원 1원이 많이 모이면 천 원도 되고 백만 원도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 가지고 무량겁이 되고, 1초 1초가 모여 가지고 한 달 · 1년 · 백 년 · 무량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잔돈을 애낀다’고 한 속담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십 원짜리 백 원짜리를 돈으로 알지 않고 막 풀풀풀풀 막 함부로 합니다마는, 참으로 부자는 큰돈은 갖다가 유용하게 몇천 만원씩 탁! 참 희사(喜捨)도 하고 기부도 하고 그렇게 쓰면서 10원 20원 굉장히 피 나오게 애끼는 것을 나는 봤습니다.

정말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면서 별별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내싸두고 삽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서 하루가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가고, 1년이 지나갑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여. 참선은 꼭 절에만 가야만 되는 것이고, 머리만 깎아야만 되는 것이고, 깊은 산중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차를 타건, 버스를 타건, 걸어가건, 댁에 돌아가셔서 방을 닦건, 밥을 지으시건 빨래를 하건, 앉었건 누었건, 이야기를 하건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간에 그때그때 한 생각,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남편이 속상한 소리를 해도 '이뭣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어도 '이뭣고?'
자식이 불효한 짓을 해도 '이뭣고?'
'이뭣고?' 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해서 모든 생활을 지어나가라 이것입니다.

근본이 다 '이뭣고?'로써 중심이 딱! 잡힌 가운데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일을 하고, 음식을 먹고, 발로 걸어가고, 이렇게 된 사람은 뿌리가 제대로 박힌 나무와 같아서 그 나무는 싱싱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하지 아니하고 밤낮 눈으로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듣는 데에 끄달리고, 이 생각 저 생각 자기 딴은 가정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도록 애를 쓰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이뭣고?'를 아니한 사람은 뿌리는 방치해 버리고, 그 가지에 이파리에 벌레를 떼어주고 소독을 치고 물을 뿌리고 온갖 노력을 다 해봤자, 뿌리가 드러나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나무는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고, 일도 안 하고, 착한 일도 안 하고 그래도 괜찮으냐?'
그게 아닙니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이겁니다.

참선을 함으로써 우리 근본 마음을 바로잡고 바로 닦아 나간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집안에 가면 집안에서 부모에게 할 일, 남편에게 할 일, 자녀들에게 할 일, 해야 할 살림, 자기 자신을 위한 일, 얼마든지 있습니다. 절에 왔어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근본이 서 있는 상태에서는 모든 일이 다 불사(佛事) 아닌 것이 없고, 모든 일이 다 좋은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근본이 서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한 것이 제대로 되어지지를 않습니다. 죽도록 한다고 하는 것이 헛일만 하게 되고, 죽도록 애써서 한다는 것이 속상할 일만 하게 되고, 후회할 일만 하게 되고, 한탄해야 할 일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참선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마음속에 업(業)의 원인을 해결을 해 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은 내가 지어 가지고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도록 지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속에 원인을 잘 다스려 놓으면, 영락없이 재앙으로 나한테 다가져 올 수밖에 없었던 그것이 나에 가까이에 오면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 미묘한 그 법을 스스로 느끼고 정법의 고마움과 신기하고 묘한 것을 뼛속에 사무치도록 느끼신 분이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45분2초~58분2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3)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제팔식(第八識) ;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참고] 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 · 저장 · 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팔자(八字) ; 사람의 한평생의 운수. 사주팔자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이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간을 간지(干支)로 나타내면 여덟 글자가 되는데, 이 속에 일생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본다.
*정화(淨化) ;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함.
*승화(昇華) ; 어떤 현상이 한 단계 더 높은 영역으로 발전함.
*운로(運路) ; 운길(운이 트인다는 길).
*십선(十善) ; 몸[身]과 말[口]과 생각[뜻, 意]으로 짓는 10가지 죄—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탐욕(貪慾), 진에(瞋恚), 사견(邪見)를 짓지 않는 일.
*십악(十惡) ; 나쁜 과보(果報)를 가져오는 열 가지 악(惡)한 행위. 몸[身]과 말[口]과 생각[뜻, 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십악업(十惡業) · 십불선업(十不善業) · 십악업도(十惡業道) · 십흑악(十黑惡) 등이라고도 한다.
몸[身]으로 짓는 3가지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淫 삿된 음행. 邪行).
말[口]로 짓는 4가지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생각[뜻, 意]으로 짓는 3가지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또는 치암(癡暗 어리석음).

*사성제(四聖諦) ; 사제(四諦). 제(諦)는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를 뜻함. 고(苦, 괴로움)를 소멸시켜 열반에 이르는 네 가지 진리.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도 함.
①고제(苦諦, 苦聖諦) : ‘고(苦, 괴로움)’라는 성스러운 진리. “태어남이 고다. 노쇠가 고다. 죽음이 고다. 슬픔•비탄•괴로움•근심•절망이 고다. 즐거운 것과 갈라짐이 고요, 싫은 것과 같이 함이 또한 고다. 요컨대 집착과 연관된, 존재의 다섯 쌓임(五取蘊)이 고다”(상응부)
②집제(集諦, 集聖諦) : ‘고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몹시 탐내어 집착하는 갈애(渴愛)가 고(苦)가 일어나는 원인이라는 진리.
③멸제(滅諦, 滅聖諦) : ‘고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됨으로써 고(苦, 괴로움)가 소멸되어 고의 끝남, 열반에 이른다는 진리.
④도제(道諦, 道聖諦) :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팔정도(八正道)—정견(正見, 바른 이해) ·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 정어(正語, 바른 말) · 정업(正業, 바른 행위) · 정명(正命, 바른 생계) ·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 · 정념(正念, 바른 마음챙김) · 정정(正定, 바른 집중)—는 갈애를 소멸시켜,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 ;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
[참고] 『선문촬요(禪門撮要)』 (경허선사 編) ‘달마대사 관심론(達摩大師觀心論)’에서.
慧可問曰  若有人 志求佛道 當修何法 最爲省要  師答曰 唯觀心一法 摠攝諸行 名爲省要

혜가(慧可)가 여쭈었다. “불도(佛道)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겠습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였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하나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問曰 云何一法 摠攝諸行  師答曰 心者 萬法之根本也  一切諸法 唯心所生  若能了心 萬行俱備 猶如大樹 所有枝條 及諸花菓 皆悉因根 栽樹者 存根而始生 伐樹者 去根而必死 若了心修道則 省功而易成 若不了心而修道 乃費功而無益 故知一切善惡 皆由自心 心外別求 終無是處

“어찌하여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고 하십니까?”
“마음이란 온갖 법의 근본이요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만행(萬行)을 다 갖추게 된다. 이를테면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 등이 모두 뿌리로 말미암아 있으니, 나무를 가꾸려면 뿌리를 북돋우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베려면 뿌리를 없애야 반드시 죽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을 알아서 도를 닦으면 노력은 적게 들어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만약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모든 선과 악은 다 자기 마음에서 생겼으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끝내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도래(到來 이를 도/올 래)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説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2/3)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유루(有漏) ; ①샘[漏]이 있는[有].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는. ②누(漏)는 마음에서 더러움이 새어 나온다(漏泄 누설)는 뜻으로 '번뇌'를 말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든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차별이나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③생존에 집착하는 번뇌.
*유위법(有爲法) ; 산스크리트어: saṃskrta, 팔리어: savkhata
위(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고, 유위(有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을 가지는 것.
①여러 인연(因緣)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또는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 및 존재(사물).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현상계의 일체의 사물. 인과 관계 위에 있는 존재.
②온갖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형성된 현상.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의식 작용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차별 현상. 인식 주관의 망념으로 조작한 차별 현상.

유위법(有爲法)은 인연에 의하여 화합생성된 것이므로 생(生)도 있고 멸(滅)도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하고, 무위법(無爲法)은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절대적인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타관(他官 다르다·다른 곳 타/마을 관) ; 제가 나서 자란 곳이 아닌 다른 지역이나 고장.
*보리과(菩提果) ; 깨달음.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 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 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과(果 열매·결과 과) ; ①열매를 맺음. 또는 그 열매. 원인으로부터 생긴 결말의 상태. ②원인으로 인하여 생기는 일체의 법(결과).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선업(善業) ; ①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착한 일. ②탐진치(貪瞋癡)를 감소시켜 없애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
*선(善) ; [산스크리트어] kuśala  올바르고 청정하여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름.
*악업(惡業) ; 나쁜 결과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 또는 전생(前生)의 나쁜 행위.
*악(惡) ; [산스크리트어] pāpa  올바르지도 청정하지도 않아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르지 않음.
*무기업(無記業) ; 삼성업(三性業)의 하나. 선업(善業)에도 악업(惡業)에도 속하지 않으며, 선악 중의 어떠한 과보(果報)도 받지 않는 업을 이른다.
*무기(無記) : [산스크리트어] Avyaksita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세가지 불능’ ; 삼불능(三不能). 당나라 숭악(崇嶽)의 원규(元珪 : 六四四~七一六) 선사가 말씀하신 부처님의 3능(三能)과 3불능(三不能).
(1) 3능(三能) - 부처님의 3가지 능한 것.
①일체 상(相)이 공(空)함을 깨달아서 만법의 지혜를 이루시는 것. ②모든 중생의 성품을 다 아시고, 억겁(億劫)의 모든 일을 다 아시는 것. ③한량없는 중생(무량중생)을 제도하시는 것.
(2) 3불능(三不能) - 부처님의 3가지 능치 못한 것.
①결정된 업[定業]은 즉시 멸하지 못함. ②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하지 못함. ③중생계를 다 제도하지 못함.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4권. '숭악 원규 선사'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83~284.
佛能空一切相 成萬法智 而不能卽滅定業 佛能知群有性 窮億劫事 而不能化導無緣 佛能度無量有情 而不能盡衆生界 是謂三不能也
부처님께서는 온갖 형상의 공(空)함을 깨달아서 만법의 지혜를 이루셨으나 결정된 업[定業]을 즉시 없애지는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뭇 중생의 성품을 다 아시고 억만 겁의 일을 기억하시나 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는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유정(有情)을 제도하시나 중생 세계를 다하게 하지는 못하나니, 이것을 세 가지 능하지 못함[三不能]이라고 말한다.

定業亦不牢久 無緣亦謂一期 衆生界本無增減 更無一人能主有法 有法無主是謂無法 無法無主是謂無心 如我解佛亦無神通也 但能以無心通達一切法爾
결정된 업[定業]이라도 영원한 것은 아니고, 인연이 없다 함도 일기(一期)를 말한 것이고, 중생 세계도 본래 증감(增減)이 없는 것이라서 한 사람도 유법(有法)을 능히 주재하는 자가 없다. 유법에 주재자가 없는 것을 무법(無法)이라 하고, 무법에 주재자가 없는 것을 무심(無心)이라 한다. 가령 내가 이해하기로는 부처님은 본래 신통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무심으로써 온갖 법을 통달했을 뿐이다.

*삼계(三界) ; [산스크리트어] trayo-dhātavah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신통(神通) ; 육신통(六神通).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훈(熏 연기낄 훈) ; 훈습(熏習 , 薰習)
① 어떤 성질에 물듦. 어떤 기운이 배어 듦.
② 산스크리트어 vāsanā 마치 향 냄새가 옷에 스며들 듯, 몸과 말과 뜻으로 일으킨 행위의 기운과 생각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잠재력으로 이식되는 현상.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신통력(神通力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힘 력) : 수행을 통하여 도달하는 걸림없는[通] 초인간적인[神] 능력[力].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눈물바람 ; 눈물을 많이 흘리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보리심(菩提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





----------------(3/3)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업식(業識) ; ①과거에 저지른 미혹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의 과보로 현재에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작용. ②오의(五意)의 하나.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 작용.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희사(喜捨 기쁠 희/버릴·베풀 사) ; ①보상을 구하지 않고, 기쁘게 재보(財寶)를 베푸는 것. 정사(淨捨 : 깨끗하게 내놓는 것), 정시(淨施 : 깨끗하게 베푸는 것)라고도 함. ②기껍게 자기의 의견, 생각을 버리는 일.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버리는 일.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 『치문경훈(緇門警訓)』에 있는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의 ‘팔일성해탈문(八溢聖解脫門)’에 나오는 구절.
實際理地, 不受一塵, 佛事門中, 不捨一法.

實際理地는(眞如자리는) 한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으나,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전화위복(轉禍爲福 회전하다·바꾸다 전/재앙 화/되다·이루어지다 위/복·행복 복) ; 재앙[禍]이 바뀌어[轉] 오히려 복(福)이 된다[爲]는 뜻으로, 좋지 않은 일이 계기가 되어 오히려 좋은 일이 생김을 이르는 말.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