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서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오늘은 갑자(甲子)년 가을 산철 결제날입니다. 산(散)철 결제(結制)라는 말이 최근에 생긴 말이어서 매우 생소하게 들리는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
원래 결제(結制)라 하면, 음력 4월 15일에 결제를 해서 석 달 뒤인 7월 15일에 해제(解制)를 해. 이것을 하안거(夏安居)라 그리고. 겨울은 음력 10월 15일에 결제를 해 가지고, 이듬해 정월 15일에 해제를 하는데, 그 겨울 석 달 동안을 동안거(冬安居)라 그럽니다.
원래 안거(安居)라 하는 것은 인도에서부터 생겨난 것인데, 인도는 일 년 중 비가 많이 와서 장마가 계속되기 때문에, 스님들이 숲속의 나무 밑에서 모두 그런 데서 정진을 하시는데,
장마철에는 그런 숲속에서 정진을 할 수가 없어서 기원정사(祇園精舍)나 죽림정사(竹林精舍)나, 이런 장자(長者)나 또는 신도들이 지어서 바친 그런 수도원에 모여서 그 비 오는 계절을 지내는 기간입니다. 그것을 안거라 그러는데.
중국 · 한국 · 일본은 여름에 비 오고 더울 때 석 달과 겨울에 눈이 오고 매우 추울 때 석 달, 1년에 두 번씩을 안거를 하는데, 근자에는 '산철 결제'라 하는 것이 봄 산철 두 달, 가을 산철 두 달, 산철 결제라 하는 것이 생겼다.
왜 생겼냐 하면, 7월 15일에 여름 해제를 하고 10월 15일 겨울 결제 할 때까지 석 달 동안 마땅히 머물러 있을 만한 곳이 없어. 정진은 계속해서 하고 싶은데, 일정한 데에 자리를 잡고 정진을 할 만한 데가 마땅치를 못해서 그 석 달 동안을 이리 가도 편틀 못하고 저리 가도 편틀 못하고.
그러한 그 정진은 하고 싶으나 자리가 마땅치 않은 그 산철 동안을 계속해서 정진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산철 결제'라 하는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산철 결제를 하고 보니, 그 석 달 동안을 장소가 마땅치 안 해서 그 방황을 하던 선객(禪客) 스님들이 그 두 달 동안을 착실히 정진을 하니까 매우 정진에 유익하더라 그말이여.
그래서 용화사 선원이나 봉암사 선원이나 기타 다른 선원에서도 이렇게 산철 결제를 몇 군데 하게 되았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정진을 간단없이 한결같이 할 수 있을까?
이 정진이라 하는 것은 꼭 여름 결제 동안만 하고 또 겨울 결제 동안만 하고, 그 나머지는 안 해도 괜찮은 것임사 구태여 산철 결제를 할 것이 없지만, 결제 · 해제에 상관이 없이 정진은 한결같이 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산철 결제를 하는 것이 퍽 효과적인 일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5분21초~10분26초)
*기원정사(祇園精舍) ;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정사의 약어(略語). 중인도 코살라국(國)의 수도 사위성(舍衛城:슈라바스티) 남쪽 1.6 km 지점에 있던 기타태자(祇陀太子) 소유의 동산에 지은 절.
이는 ‘기타태자의 동산에 수달(須達:給孤獨長者)이 지은 승원’이라는 뜻인데,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란 ‘고독한 이들에게 보시를 많이 한 부자’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 ; 마가다국(magadha國)의 왕사성(王舍城) 부근에 있던 불교 최초의 사원.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왕사성을 찾았을 때, 칼란다(kalanda) 장자(長者)가 붓다에게 기증한 죽림 동산에 빔비사라(bimbisāra) 왕이 지어 붓다에게 바친 정사.
*장자(長者) ; ①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 ②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말.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1) 18분 49초.
(2) 9분 29초.
[법문]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용582)
(1)------------------
그러면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범어(梵語)로 ‘붓다(Buddha)’인데, ‘붓다’라고 하는 뜻이 ‘깨달음 또는 깨달은 사람’을 갖다가 ‘붓다’라고 그런 거다 말이여.
그래서 탄생하셔서 열반(涅槃)하실 때까지의 모든 것이 깨달음이 핵심이요, 전부가 깨달음이여.
깨달음을 위한 것이고, 깨달음에 의한 것이고, 바로 깨달음에 의해서 일생을 사신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불교학자들은 '과연 갑인년 납월팔일(臘月八日)에 밝은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셨느냐?'
학자들은 그 많은 경전을 샅샅이 뒤져서 대관절 그 깨달으신 내용이 무엇이냐? 무슨 도리(道理)를 깨달으셨느냐? 학자마다 거기에다 초점을 맞추고 많이 연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현대 학자들은 '십이인연(十二因緣) 법을 깨달으셨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중심사상이고, 그래서 십이인연의 진리를 연기법(緣起法)을 깨달으셨을 것이다' 이렇게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논문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산승(山僧)은 그렇게 보는 것은 학자로서의 소견(所見)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의 아무리 그이가 머리가 좋은 세계적인 석학이라 하더라도 중생 소견으로 깨달음의 내용의 대해서 '이것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깨달으셨다면은 이러한 것을 깨달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코끼리를 장님이 만져 보고—배를 만져 보고는 '벼람박 같다' 그러고, 코를 만져 보고는 '구렁이 같다' 그러고, 코끼리 다리를 만져 본 장님은 '코끼리라는 게 기둥과 같이 생긴 거다' 이렇게 말한 거와 같으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을 깨달은가에 대해서는 산승도 역시 '이러한 이치를 깨달으셨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각자(各自)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 의해서, 조사(祖師)들이 개발해 내놓은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여법(如法)하게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해 가지고 스스로 깨달아 보기 전에는 알 수도 없고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이라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라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 한 등(燈)에 불을 밝히면은 그 한 등의 심지로 인해서 백 등, 천 등, 만 등의 수없는 등에 그 등불을 붙여서, 수천만 등의 불을 붙여서 온 세상을 다 밝힐 수가 있을 것이다.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여. 그 한 등(燈)이라 하는 것은 한 부처님의 깨달음의 등(燈)인데, 한 부처님이 깨달음으로 해서 많은 제자들, 많은 중생들에 그 깨달음에 이르는 법문(法門)을 설해 가지고 그 법문에 의해서 수행을 해 가지고 각자가 자기 마음속에 깨달음의 등불을 밝힌 것에다가 빗대서 읊은 게송인데.
그 마음에, 심인(心印)에 등불이 환히 한 사람 사람마다 다 밝혀서 온 세상에 밝혀진다면 불법(佛法)의 법령(法令)이 온 세상에 가득할 것이다 그말이여.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여. 그래 가지고 그 등불이 온 세상에, 등불에 또 등불에 의해서 다른 등불에 밝히고, 한 등불이 수천 수만 등에 밝히니 그 수천 수만 등이 다시 또 수천 수만 등에 밝혀 가지고 온 세계가, 삼계(三界)가 깨달음의 등불로 가득 차게 된다면,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이다. 그 깨달은 진리는 아무리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그 깨달음을 어떤 등불에 등불을 붙이듯이 각자 이렇게 붙여 주기는 어려운 거고, 깨달음에 나아가도록 법을 설하셔.
진짜 깨닫기는 자기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여. 그래서 이 ‘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전할 수가 없는 것이여. 천성(千聖)도 전할 수 없는 이 진리의 등불은 아무리 폭풍이 불어도 영원히 꺼지지 아니할 것이다.
‘이 깨달음의 진리를 전할 수가 없다’고, 전할 수 있고 말로 할 수 있다면은 ‘참 진리’가 아니고 ‘참 법’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을 설하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도 다 수없는 설법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르켜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켜 가지고 되는 것이라면 진즉 우리가 다 성불(成佛)했을 것이고,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마는, 가르킨다고 되는 것은 아니여.
가르킨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을 인도 천지를 다니시면서 제자들과 같이 걸식(乞食)을 하시면서 그 많은 설법을 하셨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주안, 이 염전 갯벌 가에다가 용화선원을 창설을 해 가지고 77세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오늘 아침에 법문 가운데에도 뭘 공양을 잘 못 잡수셔서 새벽에 허기가 진 상태에서도 그런 사자후(獅子吼) 법문을 하셨습니다.
법문 가운데도 ‘먹은 것이 없어 기운이 없어서 말을 못하겠어 그만 마친다’는 이런 가슴 아픈 말씀이 나왔습니다마는.
말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하고 가르켜야 합니다.
배워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이여!
강사는 강사대로 인연 있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일생 동안 공부한 부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켜야 하고, 불교학자는 학자대로 일생 동안 공부한 것을 학생들에게 교리를 강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상 이 ‘내가 나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가르킬 수도 없고 배워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직접 깨달으시고 그 깨달으신 경험에 의해서 지도하시는 그 방법에 의지해서 우리도 열심히 해야만 되고,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여.
그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인 것입니다.
무엇이 최상승법이냐?
내가 나를 찾는 공부여.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그런 많은 대승 경전이 있고, 소승 경전이 있습니다마는 학자들이 ‘이것은 대승(大乘) 불교다, 이것은 소승(小乘) 불교다’ 학자들이 연구상 편의상 그렇게 갈라놓은 것이지 부처님의 설법에 어찌 분명하게 콩과 팥을 가르듯이 소승, 대승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학자들이 말하는 소승법을 설한다 해도 소승 속에 바로 최상승법이 들어 있는 거고, 대승을 설하시되 대승 경전 속에서도 얼마든지 소승 불교 교리가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집착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마는.
이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언어 · 문자로 연구해서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이여.
학술적으로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따져서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그래서 이것을 불립문자라 그러는데, 내가 나를 찾는 것이여.
‘내’라는 게 무엇이냐?
사람들은 ‘내’라, ‘나’다 하면은 이 사지백체(四肢百體), 안이비설신의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갖춘 이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나’다 그러고.
호적도 역시 아무 날 아무 시에 아무 아버지와 아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 그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거기다가 이름과 생년월일을 해서 호적에 올리고, '그 사람' 하면 바로 그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말하는 것이나, 어찌 그것이 ‘나’일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고 하는 것은 육체, 그 육체 속에 들어 있는 나의 주인공이 있어. 이런 말도 분명히 말하면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지만, 우리는 부득이해서 이러한 방편으로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육체는 이 주인공(主人公)이 입고 있는 한 벌의 옷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주인공이 이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주인공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이 육체다. 우리는 그 육체 위에 다시 또 여러 가지 옷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참나, 우리의 주인공이 이 몸뚱이 속에 들어 있어. 이 옷을 벗으면 우리 육체가 있듯이 육체 속에는 우리의 주인공이 들어 있는데 해부를 해 봤자 오장육부를 샅샅이 뒤져도 그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지는 않으지만 분명히 이 주인공이 들어 있기 때문에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도 알고, 가만히 앉어서도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왔다갔다해.
10년 전,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어릴 적 일도 생각하면 환하거든. 몸은 여기 있으면서도 '서울역' 하면 서울역이 환하고, 여러분의 집안을 생각하면 집에도 왔다갔다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천만리 멀고 가까운 곳이 상관이 없고, 시간적으로도 과거 미래 맘대로 왔다갔다해.
그러한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이, 우리 모두 낱낱이 다 주인공이 있다 그말이여.
그걸 마음이라 하기도 하고, 성품이라 하기도 하고, 진여라 하기도 하고, 불성이라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경전마다 법계니 진여니 불성이니 여여니, 여러 가지 경전에도 경전마다 이름이 다 다르고 세계 각국에 다 나라마다 말이 다 다르지만, 이름이야 일법천명(一法千名)이여, 한 법에 천 가지 이름이 있어서 그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볼래야 볼 수도 없고,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지마는 분명히 이 소소영령한 놈이 있다 그말이여. 이 육안(肉眼)으로 볼 수는 없어.
그것을 방법에 의해서 활구참선법에 의해서 그것을 찾는 것이다. 어떻게 찾느냐?
종파(宗派)에 따라서 찾는 방법이 그 조사들의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 법이 있지만, 그 법 가운데에 우리 한국에서는 한국의 선지식(善知識)들은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하는 방법,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함으로써 화두를 타파(打破)해 가지고 자기의 ‘참나’를,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도록 하셨다 그말이여.(18분18초~37분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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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종파가 자기 종파의 방법이 좋다고 다른 종파의 방법을 서로 비난하고 헐뜯고 과거의 역사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런 것에 관여할 필요가 없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자기가 믿는 선지식으로부터 지정을 받아 가지고—화두가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화두(千七百話頭)가 있고, 문헌상에 오르지 아니한 화두는 이 우주법계에 가득찬 것이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화두 아닌 것이 없고 공안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멋대로 아무거나 하나 선택해 가지고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 화두를 선택하면 하다가 좀 잘 안되면 언제라도 자기 멋대로 버리게 되고 또 다른 화두를 가지고 하고. 이러한 폐단이 있습니다.
우물을 팔 때 조금 파봐서 안 나온다고 또 장소를 옮겨서 또 파고 또 파고. 몇십 군데를 파봤자 금방 나서 나온 물은 그건 건수(乾水)지 참으로 좋은 물이 아닙니다. 장마 때는 꿀꿀 나오다가 가물 때는 끊어져 버리는 그러한 물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열 길, 스무 길, 서른 길, 백 미터, 이백 미터를 파고 들어가서 암반이 나오면 그 암반을 뚫고 그 암반 밑에서 나온 물이라야 사시절 가뭄과 장마에 상관없이 변함없이 좋은 물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뜨신 물이 꿀꿀 솟아나올 것입니다.
화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믿는 선지식한테 화두를 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멋대로 자꾸 화두를 바꿔 싸면 그 사람은 정말 큰 깨달음을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화두를 하나 가장, 그 선지식이 보아 가지고 이 사람에게는 이런 화두가 적당하겠다. 그 화두를 딱 지정을 해 주면 잘되거나 안 되거나 정말 이 법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을 바칠 생각을 해 가지고,
잘된다고 해서 잘된 데에 빠지지도 말고, 잘 안된다고 해서 번민하고 ‘이 화두가 안 좋아서 그러나? 화두가 나한테 안 맞아서 그러나?’해 가지고 화두를 제멋대로 바꿔 가지고 이 화두로 좀 껄적껄적 해 보다 안 되면 저 화두를 해 보고, 평생을 해 봤자 진정 참 깨달음에는 이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고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하는데 처음부터서 잘 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리 숙세에 선근(善根)이 있어서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툭 터지는 그런 사람일 경우는 몰라도 대부분이 우리가 다 중근기 · 하근기인데,
처음에는 다 어렵지마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참선법(參禪法)을 믿기 때문에, 최상승법을 믿기 때문에, 이 정법을 믿기 때문에, 그 선지식을 믿기 때문에 한 화두를 가지고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이 한 화두를 가지고 목숨을 거기다가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심마(是甚麽)인데,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그러는데, 경상도 말로는 ‘이뭣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그러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놈.
볼래야 볼 수도 없고 알래야 알 수 없지만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이거여.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야지, 해 가다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교리로 따지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동서의 철학적으로 따져서, 따져 가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종합해 가지고 적용을 해보고야 ‘아하, 바로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게 아니야.
그것은 그럴싸한 결론을 자기 나름대로 얻었다 해도 그것은 안 것이지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말이여.
이론적으로 따져서 결론을 내려서 ‘이런 것이다’하고 할 수 있는 거라면 그거야 가르킬 수가 있는 것이고 배울 수가 있는 것이지 무엇이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부처님도 가르켜 줄 수가 없거든.
가르켜서 되는 거라면 무엇이 어려우며 문제가 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가르켜서 되는 게 아니야.
이건 깨달라야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 갈수록 맥혀야지, 꽉 막혀서 알 수가 없어야 그런 상태로 밀고 나가야 하는 거야.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는 그 시간에도 별별 생각이 오락가락하지만, 오락가락하는 망상은 그냥 고대로 나둬. 그거 쫓아내려 하지도 말고 막으려 하지도 말고 그냥 놔둔 채 숨을 들여마셨다 내쉬면서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자꾸 거기다 할 필요는 없어.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따~악 관(觀)하거든. 2분도 그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2분, 5분 동안도 그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5분, 1시간 해도 그 의심이 안 없어지면은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이뭣고?’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가 볼록하게 느끼면서 숨을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그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숨을 내쉬는 거여.
그러면서 ‘그 알 수 없는 의심은 아랫배에다 따악 거기다 두고 관한다’ 그 말도 알아듣기가 좀 어렵지만,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배가 불렀다 줄었다 하는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하면은 화두가 바로 아래 가서 자연히 거기 있게 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이 나중에는 의단(疑團)이 되어.
1시간을 해도 그 의단이 흩어지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서 든 화두가 아침 먹을 때까지 있고, 아침 먹을 때 든 화두가 점심때까지 있고, 점심 먹을 때 든 화두가 저녁까지 있고, 저녁에 잘 때 들은 화두가 꿈 속에서도 고대로 화두가 있다면 이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요, 오매(寤寐)가 일여(一如)한 건데,
그렇게 타성일편이 되어서 순수무잡해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게 되면 어느 날 어느 때 통 밑구녁 빠지듯이 팡! 터진다 말이여. 툭 터져서, 알 수 없던 공안(公案)을 타파해 가지고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는 거여.
이론적으로 따져서 이것이로구나! 그게 아니여. 그런 것은 백 번 그런 식으로 알아봤자 소용이 없는 거고.
바르게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놓고 보면 ‘기네, 아니네’가 소용이 없는 거여.(37분8초~46분36초)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明星]이 뜰 무렵 별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하고, 성도회(成道會) · 성도절(成道節) · 성도재일(成道齋日) 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밝은 별' ; 명성(明星).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새벽별, 샛별, 태백성(太白星), 계명성(啓明星), 장경성(長庚星) 등이라고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십이인연(十二因緣) ; 십이연기(十二緣起).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한 무명(無明)을 근본 원인으로 하여 중생으로서의 인간의 괴로운 생존이 12가지 요소의 순차적인 상관관계에 의한 것임을 설명한 것.
☆ 무명(無明)이 사라지면 의도적인 행위와 업을 구성하는 형성(行)이 사라지고, 형성(行)이 사라지면 의식(識)이 사라지고........마침내 태어남(生)이 없으면 늙고 죽음(老死)가 사라진다.
*연기(緣起) ;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일어남을 이르는 말.
「만약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고(若有此則有彼) 만약 이것이 생겨나면 곧 저것이 생겨난다(若生此則生彼).
만약 이것이 없으면 곧 저것이 없어지고(若無此則無彼) 만약 이것이 소멸하면 곧 저것이 소멸한다(若滅此則滅彼)」 (중아함경)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벼람박 ; ‘바람벽(--壁, 집의 둘레 또는 방의 칸막이를 하기 위해 만든 벽)’의 사투리.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게송) ‘일등능속백천등~’ ; 『금강경오가해』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종경스님 게송 참고.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심인(心印) ; 선종에서 언어나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깨달음. 심지(心地) · 불심인(佛心印)이라고도 한다. 심(心)은 불심(佛心)을 뜻하고 인(印)은 인가(印可) · 인증(印證)을 말한다.
*삼계(三界) : [범] trayo-dhatavah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amadha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upadha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arupadha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걸식(乞食 빌·구할·청할 걸/밥·음식 식) ; ①빌어서 얻어먹음. ②수행자가 수행을 위해 육신을 지탱하고자 일정한 법도에 따라 남에게 음식을 받는 것.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 ; 진리는 문자로 표현 할 수 없는, 개념으로 규정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 선종에서 법(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以心傳心) 것이므로, 따로 언어•문자를 세워 말하지 않는데 참 뜻이 있다고 하는 것.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사지백체(四肢百體) ; 몸의 전체.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 · 마조(馬祖) · 백장(百丈) · 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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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건수(乾水 마를 건/물 수) ; 평상시에는 물이 고여 있지 않다가, 장마 때 땅속으로 스몄던 빗물이 잠시 솟아나서 괴는 샘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주삼야삼(晝三夜三) ; 밤낮. 밤이나 낮이나.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1분 32초)
〇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오매일여(寤寐一如 잠이 깰 오/잠잘 매/하나 일/같을 여) ; 자나깨나 언제나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눌 수 없음.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 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6분 41초)
[법문]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용524)
참선(參禪)을 하는데 자꾸 이상스런 어떤 경계(境界)가 나타난다 하면 그 경계가 좋은 경계가 되었건, 무슨 신비한 경계가 되었건 거기에 집착(執着)을 하면 안 돼. 그것은 그대로 놔둬 버리고 정신을 딱! 챙겨 가지고 화두(話頭)를 계속해서 화두를 들어 나가야 돼.
천하 없는 신비하고도 묘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따라가고 거기에 집착하면 그건 공부가 아냐. 그냥 고대로 물리치려고 하지도 말고 그대로 놔둔 채 똑바른 정신으로 화두만 떠억 들고 나가면 계속 그러면 결국은 그 경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여.
공부하는 가운데 환상이 나타나거나, 부처님이 나타나거나,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거나 별별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참 경계가 아니야.
그리고 참선하고 있으면 집에서 뭔 일 일어나는 것이 나타나서 미리 알게 되고, ‘집에 누가 죽었다’하면 가서 보면 죽어 갖고 있고, ‘누가 올 거다’하면—참선 중에 그것이 그냥 자연히 알아져서, 가서 보면 누가 와 있기도 하고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식(識)이 맑아지니까, 그 맑아진 식의 능력으로 그것이 알아지는 수도 있고 또 어떠한 잡신(雜神)이 이런 것을 와서 일러주기도 하고 그런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식(識)이 맑아져서 알아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도(道)를 통한 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환히 알아지니까 ‘내가 도통(道通)을 했구나’ 그렇게 착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식(識)이 맑아지면 그런 것이 알아지는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도(道), 내가 나를 깨달아서 견성성불(見成成佛) 하는 것과는 영판 길이 다릅니다 그게.
그것은 공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고 거기에 집착하면 정말 사도(邪道)로 빠지게 되는 것이니까 집착하지 말고, 그냥 고대로—그걸 사용하려고 하지도 말고, 좋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없었던 걸로 놔 버려야 합니다.
놔 버리고 자꾸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으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꾸준히 들고 나가면 그런 것이 있다고 해서 해로울 것도 없습니다.
화두를 놔 버리고 그런 데에 집착을 하고 그런 데에 빠져 가지고, 그런 거 아는 소리를 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정도(正道) 하고는 멀어져 버리는 것이고, 잘되어 봤자 점쟁이 같은 것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니까,
모처럼 이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그러한, 말해서 초능력이라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은—뭣한 사람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무척 노력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건 정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또 예불(禮佛)을 하러 올라가고 내려가고 또는 밤에 정진할 때, 환히 아주 백 촉짜리 불을 켠 것처럼 환히 모든 것이 비쳐.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데 자기 눈에는 환히 그렇게 광명(光明)이 보이는 수가 있어.
그런 것도 역시 그런 거를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머지않아서 내가 도통하려고 이런가 보다’ 그러한 생각도 하지 말어. 집착하지 아니하면 아무 상관이 없어.
그것이 꼭 '나쁜 것이다. 좋은 것이다' 말할 것도 아니고, 문제는 거기에 집착하면 그것이 나쁜 것으로 변하는 거고, 집착하지 않고 놔둬 버리고 올바르게 정진을 해 나가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여. 그렇게 아시기 바라고.
그리고 ‘정진하다 보면 코로 향내가 난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향내가 날 수도 있고.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는 그런 것이 없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향내가 정상적으로 나는 향내라면 다른 사람 코에도 다 그 향내가 나야 할 텐데 자기에만 느끼는 것이거든.
그러니까 자기가 그동안에 어떻게 어떠한 공부를 해 왔느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해 왔느냐? 과거에 어떠한 업을 지었느냐? 그런 것에 따라서 그렇게 향내가 날 수도 있고, 캄캄한 밤에도 환히 모든 것이 다 보일 수도 있고, 여기서 수백 리 떨어진 데에서 하는 소리를 여기서 들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경계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50가지의 그런 여러 가지 경계에 대해서 소상(昭詳)하니 말씀을 해 놓으신 것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도(道)와는 별개의 것이여.
그런 경계가 나타났을 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우리 정법을 수행해 나가는 사람의 주의해야 할 마음가짐이다.
그런 신기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가 일어나면, 그것에 집착을 했다 하면 거기서부터 정도(正道)에서는 멀어져 버리는 것이다 하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시기를 바라고.(40분27초~47분7초)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집착(執着, 執著 잡을 집/붙을 착) ;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 사물이나 도리를 고집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 한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정도(正道) ; ①올바른 도. 올바른 실천법. ②팔정도(八正道)의 약칭.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참선 자세 ; 단정(端正)하게 몸을 가지면서도 어깨나 목이나 몸에 힘을 빼는 것입니다. ‘단정히 한 것’과 ‘긴장을 해서 몸에다 힘을 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온 몸에 힘을 다 빼고 지극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자세가 참선을 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11분 24초)
[법문]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용524)
편안히 앉으십시오.
계유년 동안거가 종말에 가까워 왔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의 신심과 원력으로 큰 탈없이 이렇게 정진(精進)을 해 오신 것에 대해서 치하(致賀)를 드립니다.
여러분들 낱낱이 다 개별적으로 만나면 나름대로 다 이야기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겠지만, 여러 가지 형편상 그러지를 못해서 이렇게 서면(書面)상으로 질문을 받아서 요약을 해서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질문을 했어도 잘 들어 두시면 여러 가지로 정진하는 데 참작이 될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앉아 있을 때는 화두(話頭)가 잘 들리고 그러다가, 그런데 서서 돌아다니거나 일을 하면 앉았을 때 보단 산만해져서 화두가 순일하게 안되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앉아서 정진을 하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초학자(初學者)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고, 설사 구참(久參)도 시간 있는 대로 앉아서 정진하신 것은 여러 가지로 효과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활해 나가는 데에는 종일토록 앉아 있을 수는 없는 거고, 설 때도 있고 돌아다닐 때도 있고, 말할 때도 있고 무슨 일을 할 때도 있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 화두를 아주 놔 버리고 그럭저럭 지내면 정진이 순일하게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서서 다니더라도 앉았을 때 같이 순일한 경계가 흩어지지 않느냐?
그것은 자기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 경계(境界)에 팔려 나가면은 화두를 놓치게 되는 거고.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바로 그때그때 화두를 챙기면은 나갈 뻔하다가 다시 자기로 돌아온 것이니까, 자기가 정성스럽게 챙기는 도리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섰을 때나 걸어갈 때도 항상 자세를 바르게 하고.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앉았을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서서도 항상 단전(丹田)에다가 가볍게 힘을 주고서 걷기도 하고 일도 하고, 또 말을 할 때에도 그 단전을 중심으로 해서 거기다가 가볍게—힘을 너무 세게 주면 못쓰는 거고, 가볍게 단전에다 힘을 주어야 하는데, 가볍게 단전에다 힘을 줄라면 몸을 쭈욱 펴야 하는 것입니다. 펴면 자연히 단전에 힘이 들어가는 거고.
허리가 탁 꼬부라져 버리면 단전에 힘을 줄 수도 없고 그냥 경계에 팔리게 되는 것이니까, 행주좌와(行住坐臥) 간에 항상 화두가 흩어지지 않게 할라면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아랫배에다 가볍게 힘을 주도록 그렇게 한번 시도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참선을 하다 보면 답답하고 벽처럼 딱딱해지고 굳어지는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은 단정히 한답시고 너무 긴장을 해 가지고 등에다가, 어깨에다, 목에다가 너무 힘을 주면 그렇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단정(端正)하게 몸을 가지면서도 어깨의 힘도 빼고, 목의 힘도 빼고. 그게 대단히 자세를 바르게 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단정히 한 것’과 ‘긴장을 해서 몸에다 힘을 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단정하게 몸을 가지면서도 어깨나 목이나 몸에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러면서 단전호흡을 자연스럽게 하면 갑갑하고 벽처럼 딱딱해지고 굳어지는 그러한 것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 입술이 퉁퉁 붓는 것도 입에다 너무 세게 힘을 주기 때문에 그런 거여.
그래서 온 몸에 힘을 다 빼고 지극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자세가 참선을 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 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와.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데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그다음에, 화두가 훨씬 그전 때보다도 잘 들리고, 잘되어 가는 그런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야! 공부가 잘되어서 좋다’ 그런 생각도 내지 말고, ‘이렇게 공부가 잘되어 가면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내지 말고.
벌써 정진이 잘된다고 기쁜 마음을 내면은 환희의 마구니가 거기에 붙게 되는 거고, 정진이 잘 안된다고 번뇌심을 내면 번뇌(煩惱)의 마구니가 거기에 붙게 되는 거여.
그래서 안된다고 해서 너무 짜증을 내고 그러지도 말고, 정진이 잘되어서 화두가 순숙(純熟)해서 잘된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도 내지를 말아라.
잘되고 못되고 그건 그냥 그대로 놔둔 채, 자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꾸준히 해 나가면 그것이 정진을 올바르게 해 나가는 법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안되면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고, 또 조금 잘되면 잘된다고 좋은 생각을 내 가지고, 그 좋은 경계를 흩어버리게 되는 거다 말이여. 그것을 잘 이해를 하셔야 하고.
좌선 중에 주먹을 이렇게 딱! 쥐고서 양 무릎에다 놓고 하는—이게 금강권(金剛拳)이라 그러는 건데, 혼침(昏沈)이 오거나 생각이 너무 무력해져 가지고, 그럴 때에는 주먹을 이렇게 딱 쥐고 허리를 쭉 펴고서 이렇게 해서 그런 자세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잘되면 다시 근본자세로 이렇게 해서—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개고, 양 엄지손가락 끝을 살짝 맞대 가지고 배꼽 앞에다 따악 놓고, 이렇게 해 나가고.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힘이 빠지고 혼침이 오고 무력해졌을 때는 또 금강권을 쥐고 이렇게 해서 타악 정신을 차려서 해 나가고.
노상 처음부터서 이렇게 해서 잘되어 가고 그렇게 해서 아무 불편이 없다면 그렇게 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 금강권은 혼침이 와서 그러거나, 힘이 없어서 무력해지거나 할 때는 누구라도 이렇게 해서 허리를 주욱 펴고 이렇게 해서, 그 경계를 갖다 벗어나도록 그렇게 활용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처음~11분2초)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부지런히 힘씀. ②불법(佛法)을 깨닫기 위해 수행에 힘씀.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구참(久參 오랠 구/참구할·참여할 참) ; 오랫동안에 걸쳐서 수행한 것. 오랫동안 선(禪)을 닦은 것. 또는 그런 사람. 불법(佛法)에 귀의한지 오래 되는 것. 초학(初學)의 상대어.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 걷기, 머물기, 앉기, 눕기 등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움직임.
*단정하다(端正-- 바를 단/바를 정) ; 옷차림새나 몸가짐 따위가 얌전하고 바르다.
*회광반조(廻光返照) : 회광자간(廻光自看).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〇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이치(理致)에따라서자신이부딪히게되는생활상의모든일들,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희로애락,시비이해,삼독오욕,춘하추동,동서남북등이모두경계에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 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마구니(마군 魔軍)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〇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육근문두(六根門頭) ;육근(六根:眼耳鼻舌身意)의문앞.육근과의경계.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법도(法度 법 법/법도 도) ; 법칙(法則)과 제도(制度). 법규(法規)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규칙이나 의례를 가리키는 말이다.
*거울 법문 ; 거울이라는 것은 그 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비추는 것이어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눈을 통해서 보는 모든 것이 다 이 거울에 나타나는 자기 모습입니다. 거울만 거울이 아니라 이 삼천대천세계, 끝없는 허공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거울입니다.
이 허공의 거울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상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모든 것도 그 허공의 거울에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허공으로 된 거울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바로 자기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저사람의허물은내허물의그림자다.저 사람잘못한것은바로내허물이그사람이라고하는거울을통해서나타나는것이다. 그사람뿐만이아닙니다.그회사나,그사회나,그국가나,그세계에모든것들이다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무엇을볼때나,무엇을들을때나,무엇을맡을때나,무엇을먹을때나,무슨생각이나거나바로그찰나찰나가자기가자기의모습을보고서그잘못된곳을반성하고고쳐 나갈수있는,그리고자기를아름답게할수있는거울로잘사용을해나간다면우리는나날이아름다워지고나날이향상이될것이며,나아가서는‘참나’로돌아오는공부를열심히 한다면진정코참다운자기 모습을볼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