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이뭣고? 화두2019. 11. 19. 18:55

이뭣고(是甚麼) (No.537)—이 송담(松潭)은 모든 화두에 근원적이고 최초의 화두인 '이뭣고?'를 주로 많이 권장하고 있습니다 | (게송)허비광음진가석~.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16분 56초)

 

[법문] 송담스님(No.537)—1994년 10월 첫째일요법회 (용537)

 

대승십선대계를 받고, 참회진언을 외우면서 연비를 마쳤습니다.

이 연비(燃臂) 하는 뜻은 알게 모르게 무량겁 이래로 금생에 이르기까지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를 참회(懺悔)하고,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부처님께 서원(誓願)하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참석한 법보제자는 과거의 죄를 참회했으므로 몸과 마음이 깨끗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 악업을 다 참회하고 새로운 마음을 가졌으므로 오늘 새로 태어남과 같은 것입니다.

새로 불명을 받고 그리고 십선대계를 받고, 나아가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기 위해서 화두까지 타게 되니 부처님 아들, 부처님 딸로 오늘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화두와 계첩(戒牒)은 이 법회가 끝난 다음에 순서 있게 다 노나 드릴 것입니다.

 

오늘 일요법회 날에 산승(山僧)이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십선대계를 받았으니 어떻게 하면 그 계를 잘 지키면서 불자(佛子)로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공부를 해 갈 것인가? 계율만 잘 지키면 그것으로써 부처님 제자로서 할 일을 다했다고 할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십계를 받고 참회를 하고 연비를 받았지만, 숙세에 무량겁을 두고 익혀 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일어나는 생각—수없는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그 생각이 일어나면 그다음 생각으로 또 전개되어서 그것이 말로 표현이 되고, 그것이 얼굴로 표현이 되고 행동으로 옮겨져서 본의 아니게 크고 작은 업(業)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지는 모든 행동과 언행의 근본인 우리의 생각을 다스려 나갈 것인가? 그 생각을 다스리지 못하면 본의 아니게 계율에 어긋나는 말이 튀겨져 나오고, 계율에 어긋나는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행동과 말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으로 인해서 발전이 되는 것이므로 그 우리의 생각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저절로 말로 짓는 죄, 몸으로 짓는 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참는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참아야 하겠지만 참는 것보단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최상승법에 의해서 그때그때 잘 돌려서 깨달음으로 향해 나가도록 스스로를 단속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활구참선법인 것입니다.

 

활구참선하면 굉장히 어려운 것 같이 느껴지겠지만 이 세상에 제일 쉽고, 제일 간단한 것입니다.

 

큰 화재가 조그마한 성냥불로 인해서 일어나고 담뱃불로 인해서 일어나 가지고 엄청난 산림을 다 태우듯이,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단속을 못하면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손상하는 엄청난 큰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것은 화두(話頭)이고, 공안(公案)인 것입니다.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 있지만, 문헌에 오르지 않은 공안은 숫자로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습니다. 그러나 그 천칠백 공안 중에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최초에 나온 화두가 '이뭣고?'입니다.

시삼마. 시심마(是甚麼), 시삼마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뭣고?'가 모든 공안 중에 가장 좋다, 그러니 누구라도 참선을 하려면은 '이뭣고?' 화두를 가지고 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어떤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해 가지고 '무자(無字)' 화두를 탔거나, '마삼근(麻三斤)'을 탔거나 또는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탔거나,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을 탔거나 무슨 화두를 탔던지 일단 탔으면 그 화두 하나로써, 자꾸 화두를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고 하지 말고, 한 화두를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때까지 한결같이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송담(松潭)은 모든 화두에 근원적이고 최초의 화두인 그리고 누구나 하기가 쉽고,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저절로 되어지는.

불법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화두가 무엇인 중도 모르고, 참선이 무엇인가도 모르는 사람도 태어나면서부터 태어나서 철이 들면서부터 저절로 하고 있는 「대관절 이 ‘내’라는 게 무엇이냐? 인생이라는 게 무엇이냐?」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저절로 되어 지는 화두가 바로 이 '시삼마' 화두요, '이뭣고?'인 것입니다.

 

그래서 산승은 '이뭣고?'를 주로 많이 권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화두를 하고 있는 분은 계속해서 그 화두를 가지고 열심히 바르게 참구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단 말이여.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다 그말이여.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참나는 대관절 무엇이냐?' 이거거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사람이 미웁거나 원망스러울 때도 계속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점점 스스로 괴롭고 어떤 행동을 저질을 줄 모른다 그말이여.

정법을 믿고 이 최상승법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그러한 지경에서도 냉큼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참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면 할수록 괴로움만 더하고, 원한심만 더 일어나고.

그런데 이 활구참선 하는 사람은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즉각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자꾸 되풀이해서 샘에서 물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듯이, 향로에서 향불 연기가 끊임없이 일어나듯이, 면면밀밀(綿綿密密)하고 밀밀면면하게 자꾸 참구,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찾는 거여.

 

무슨 어려운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무슨 그런 어려운 책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깊은 철학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다못 가만히 있어도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나거든. 좋은 생각도 일어나고 나쁜 생각도 일어나고, 걷잡을 수 없는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는데, 일어나자마자 '이뭣고?' 이렇게 돌리는 것이여.

 

무슨 힘이 크게 드는 것도 아니고, 무슨 높은 학식이 있는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어.

일자무식도 상관이 없어. 불경을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상관이 없어.

 

「다못 이 소소영령한 이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이것이 나의 주인공이고, 그것이 바로 자성불(自性佛)이고, 우주의 주인이다」 한 것만을 믿고 그것을 스스로 참구하되, 주의할 것은 지식이나 무슨 이론적으로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그것을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해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어, 이것은.

 

무조건하고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 하고 있는 바로 이놈이 뭐냐?' 이거거든.

'이뭣고?'할 때는 앞뒤 생각이 딱 끊어져 버리는 거여.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는 것이 있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있고, '아하,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그런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여. 그건 참선을 잘 못하는 것이고.

10년, 20년 내지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사량분별로 따져서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여.

 

'이뭣고?' 해 갈수록 알 수 없어야 하고, 꽉! 막힌 의심으로 관조해 나가야 하는 거여.

빨리 깨달으려고 성급한 생각을 내지도 말고, 다못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을 거각(擧却)해서 그것을 관조해 나가는 의관(疑觀)이거든.

 

 

허비광음진가석(虛費光陰眞可惜)인데  세간인로시비중(世間人老是非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여단좌포단상(不如端坐蒲團上)에  근주공부계조풍(勤做工夫繼祖風)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허비광음진가석(虛費光陰眞可惜)이여. 광음(光陰), 세월, 시간을 허비한 것이 참으로 가석(可惜)다 그말이여.

일분일초, 한 생각 한 생각이 바로 우리는 죽음의 문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데, 세간(世間) 사람은 '옳다 그르다. 네가 그르고 내가 옳다' 그런 시비 속에서 그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고 죽음을 향해서 늙어가고 있구나 그거거든.

 

명예와 권리와 재산을 모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직접 간접으로 남을 해롭게 하면서 그것을 획득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어찌 포단상(蒲團上)에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화두를 해 가지고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아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이 조사(祖師)의 가풍을 계승하는 것만 같을 것이냐.(20분52초~37분4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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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서원(誓願 맹세할 서/원할 원) ; 원(願)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고자 맹세하는 일.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계첩(戒牒 삼가할 계/증명서 첩) ; 계(戒)를 받았다는 증명서.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빈틈없이 빽빽하게 죽 잇따라 들어차 있다'는 말. 끊이지 않고 빈틈없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면면(綿綿 솜·이어질·연속할 면) ;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계속 이어지는 것.

*밀밀(密密 빽빽할·촘촘할 밀) ; 빈틈없이 빽빽히 들어찬 것.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게송) '허비광음진가석~' ; 『부휴당대사집(浮休堂大師集)』 권4, '경세(警世)' 참고.

*세간(世間) ; (산스크리트어 loka) 세(世)는 파괴·변화·흐른다는 시간의 뜻이 있고, 간(間)은 가운데·간격·틈새라는 공간의 뜻이 있다.

①변하면서 흘러가는 현상계. ②생물들의 세계. ③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 곧 산하대지. ④세상. 이 세상. 세속. ⑤산스크리트어 saṃsāra 미혹한 세계. ⑥육내입처(六內入處), 또는 십이처(十二處)를 말함.

*포단(蒲團) : ①좌선할 때 깔고 앉는 방석(方席). ②부들풀로 만든 둥근 방석. 근래에는 이 포단 대신 '좌복(坐服)'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