ㅊ/천도재(영가천도)2021. 4. 18. 14:20

 

 

천도재 법문(전강선사 No.035)—生也是 死也是 頭頭毘盧 物物華藏 | '시(是)'는 '본래 생사가 없다'는 말 | 진리(眞理)는 영존(永存)이다 | 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沈眠日已斜.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10분 7초)

 


[법문] 전강선사(No.035)—무자십절목2, 생야시 사야시(신해71.01.01) (전035)

생야시(生也是)요  사야시(死也是)니라
두두비로(頭頭毘盧)요  물물화장(物物華藏)이니라

그거 그렇게만 해 놓으면 그 무슨 도리(道理)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영가(靈駕)께서는 뭐라고 말씀을 허던지 내가 관(觀)만 해 가지고 허면은 다 알아듣지마는, 아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들도 다 알아들어야 할 것 아니여?

『생야시(生也是)요』 그 말은, 우리가 이 몸뚱이 받아 가지고 이 사대(四大) 육신 몸뚱이를 가지고, 이 영(靈)이—우리 말하는 영가(靈駕), 영(靈)이 몸뚱이 속에서 이 사대색신(四大色身) 몸뚱이를 끌고 댕기는 그것을 생(生)이라 하니까.
몸뚱이 하나 어머니 뱃속에서 얻어 가지고 나온 것을 생(生)이라 하니까, 『생(生)도 시(是)다』 그 말이여.

생(生)도 시(是)라는 것은 당장 이렇게 이 몸뚱이 얻어 나온 이것도 시(是)다.
그 시(是)라는 것은 ‘이 시(是)’ 자 인데, ‘이 시(是)’ 자는 ‘옳을 시(是)’ 자 인데, '옳다'는 시(是)자 인데, ‘이것이다, 옳다’ 그 말은 『본래 생사가 없다』 그 말이여. 알아듣겄죠?

『사야시(死也是)』다. 이 몸뚱이를 가지고 이렇게 갔다 왔다 성숙시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이 송장 몸뚱이 가지고 이런다마는, 그래 가지고 있다 이 몸뚱이는 죽는다. 그! 그놈 몸뚱이 내던질라면 그놈의 죽는 고(苦) 무섭지!
이 죽는 것도 시(是)니라. ‘이 시(是)’ 자, ‘옳을 시(是)’ 자.

죽는 거, 몸뚱이 고녀러 것이 이놈이 죽지, 이 몸뚱이 끌고 댕기는 주인공(主人公)은 거기 죽는 것도 없고, 죽는 때도 묻지 않고, 송장한테 뭐 상관도 없이, 그대로 독로(獨露)한 그 영(靈) 자리는 그놈이 시(是)니라. 그 ‘생사 없다’ 그 말이여.

나온, 생(生)도 시(是)요, 사(死)도 시(是)니라. 고렇게 헌 말이여.

『두두(頭頭)가 비로(毘盧)다. 머리 머리가 비로(毘盧)니라』 그 말은—그 술어가 어려워서 알기 어렵지, 말해 주어서 몰라서야, 뭐여?

두두(頭頭)가 비로(毘盧)라는 것은 모도 여러 가지 이 세상에 모도 물질—꽃이던지, 냉기(나무)던지, 무슨 학 대갈빡(대가리)이던지,
뭔 그저 세상에 두두(頭頭), 머리 머리—일체 꽃 머리, 솔 머리, 그저 까치 까마구 대가리 머리, 배암 대가리 머리, 일체 두두 모두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그 체두(體頭)가 다 시(是)다 그 말이여.

‘이 시(是)’ 자여. ‘이 시(是)’ 자.
‘다 옳다. 다 생사 없는 도리다’ 그 말이여. ‘다 진리니라’ 그 말이여.
진리여, 그게 참다운 이치여.

'산이다, 물이다, 돌이다, 솔냉기(소나무)다, 밤냉기(밤나무)다, 감냉기(감나무)다' 고런 것이 우리 사람의 분별식(分別識)으로 망상 그걸 때려 붙여서 솔냉기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고, 밤냉기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고, 까마구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고, 뱀이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지,
그 자체에 들어가서는 뱀이 뱀이라는 것도 없고, 솔냉기가 “내가 솔냉기다”는 것도 없고, 솔냉기라는 거 없기 때문에 푸른 상(相)도 없고, 솔냉기는 뭐 크다 적다, 일체 제상(諸相)이 거기 없느니라. 본래 그 생사(生死) 없는 진리다.

진리(眞理)는 영존(永存)이다. 그 진리라는 건 영존이여. ‘있다 없다’ 헌 법이 없어.
일체 물질도 불생불멸(不生不滅)인데, 일체 물질도 원소불변(元素不變)이여. 원소가 변한 법이 없고 항상 그대로여. 진리는 영존하는 그 자리여.

본래 생사가 없고 본래 죄업(罪業)이 없건마는, 그 진리 하나를 깨닫지 못허고, 그 진리 하나를 내가 바로 얻지 못했기 따문에, 번뇌 망상 속에 휩싸여서 ‘죄 지었다’ 하면은 죄상(罪相)에 휩싸여서, 그만 미(迷)해 가지고는 죄를 받느니라. 허니 그 진리영존(眞理永存) 자리로 돌아가자.

생(生)도 시(是)요, 사(死)도 시(是)요, 두두(頭頭)도 시(是)요, 일체가 다 시(是)이니, 왜 미(迷)했나?
『돌(咄)!』 척 “돌” 한번 해 놓고서는.

거그다가서 또 진리 하나, 시(是) 하나, 그 시(是) 진리. 그놈이 진리영존(眞理永存) 자리다.
거가서 또 처백힐 것 같으면은 응...? 웬일이여. 『돌(咄)!』


회수간산취류하(回首看山醉流霞)요  의수침면일이사(倚樹沈眠日已斜)니라
나무~아미타불~

아! 그런 그 모도 그 번뇌 망상, 깨달지 못허면 인생이라는 것은 처처(處處) 착(着)이니라.
깨닫지 못한 인생이라는 것은 그저 죄에 착(着)하고, 그저 잘못헌 디 착(着)하고, 그저 일체처(一切處)에 착(着)하고, 두두(頭頭)에 모도 애착(愛着) 착(着)해 가지고는 그만 맨 놈의 죄업만 지으니,

그 진리영존(眞理永存) 자리를 보덜 못허고 찾덜 못허고 이 지경이 되아서, 미왈(迷曰) 중생이여, 미(迷)하면 깨닫지 못허면 중생이기 따문에 그런 때꼽재기가 모도 생사 때꼽재기가 끼어 있어서 밤낮 그놈으로써 위체(爲體)다.
중생은 미(迷)헌 그 고통으로써 그만 근본 체(體)가 되아 가지고는 진리는 꿈에도 보지 못했기 따문에 죄업이 항상 있어서, 본래 없는 죄업이 항상 있어서, 그놈의 죄끼리만 죄만 받으러 따라댕기는 것이 그것이 중생이다.

왜 이러냐?
돼지는 어째서 돼지 몸뚱이 받아 가지고 그 숭악한 찌께기나 먹고 키워 살쪄 키워 가지고는 몸뚱이로 바칠 때, 점점이 포(脯) 떠낼 때, 그 죽을 지경 당하는 것이 왜 이러냐?
애착고(愛着苦)니라. 미(迷)해서 그 모도 중생업(衆生業)에 애착(愛着)이 되어 그러하느니라.

척! 한번 걷어 버리고, 그 진리영존(眞理永存) 자리 턱 깨달라 증(證)해 번지면은 일체업(一切業)이 무슨 구타부득(狗他不得)이다. 일체 죄업이 어디가 붙느냐?
그러니 모도 시(是), 진리영존(眞理永存) 자리 시(是), 확철대오(廓徹大悟) 허는 그 근본 시(是), 근본 도리.

마침 『회수간산취류하(回首看山醉流霞)』다. 머리를 돌이켜 산을 보니 흐르는 안개에 취한다.
아 그 흐르는 안개, 저 산에 흐르는 안개 츠르르르 내려오는 대자연이로구나. 그것도 대자연이지, 거가 무엇이 붙어 있나?

해가 넘어가는데 냉기(나무)에 비껴(기대) 졸음에 잔다(倚樹沈眠日已斜).
그 졸음에 잠깐 들어 조는 거나 마찬가지지 무슨 생사냐 그것이. 죽고 사는 생사가 어디 붙어 있느냐? 그것이 모도 생사 없는 해탈묘용(解脫妙用)이 아니냐! (45분13초~55분7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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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사대색신(四大色身)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중국에서 금(金) • 목(木) • 수(水) • 화(火) • 토 (土)의 오행(五行)을 말하듯 인도에서는 옛날부터 땅(地) • 물(水) • 불(火) • 바람(風)의 사대(四大)로써 자연계(自然界)의 온갖 것에 대한 구성요소(構成要素)로 말하였다.
*생(生)도 시(是)라는 것은 당장 이렇게 이 몸뚱이 얻어 나온 이것도 시(是)다. 그 시(是)라는 것은 ‘이 시(是)’ 자 인데, ‘이 시(是)’ 자는 ‘옳을 시(是)’ 자 인데, '옳다'는 시(是)자 인데, ‘이것이다, 옳다’ 그 말은 『본래 생사가 없다』 그 말이여. 알아듣겄죠?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비로(毘盧) ;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약칭.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의인화하여 형상화한 부처님.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로, 해석하면 변일체처(遍一切處), 광명변조(光明遍照),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 모든 곳에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

진리는 어떤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므로, 진리가 곧 부처라고 하는 비로자나불의 관점에 서면 일체 모든 것이 부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두두(頭頭)가 비로(毘盧)다”는 말은 삼라만상 일체가 다 부처 아님이 없고 진리 아님이 없다는 말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분별식(分別識) ; 팔식(八識) 가운데 제6 의식(意識)을 말한다. 이 의식은 차별하여 사유하고 판단하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상(相) ; ①모습, 형태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 행위.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돌(咄) ; ①탄식하는 소리. 놀람을 나타내는 소리. 쯧쯧! 어허! ②꾸짖는 소리. 호통치는 소리. 떽! 어흠!

*(게송) ‘회수간산취류하(回首看山醉流霞) 의수침면일이사(倚樹沈眠日已斜)’ ; ‘머리를 돌이켜 산을 보니 흐르는 안개에 취한다. 해가 넘어가는데 나무에 기대 졸음에 잔다’

[참고] 『용성선사어록(龍城禪師語錄)』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 문인(門人) 동산 혜일(東山慧日) 찬집(撰集) | 금천今天 옮김) 제1장 선지식 참문(參問知識章).

還歸海印寺할새 頌曰

伽倻名價高靑丘, 明心道師幾往來. 矗矗奇巖疊鱗高, 密密柏樹相連靑. 無限白雲滿洞鎻, 洪鐘轟轟碧空衝. 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沉眠日已斜.

 

해인사로 다시 돌아오셔서,

“가야산의 명성과 평판이 청구靑丘에 높으니 마음 밝힌 도사들이 얼마나 왕래하였던가!

우뚝 솟은 기암은 비늘처럼 포개어져 있고 빽빽한 잣나무는 서로 이어져 푸르구나.

무한한 흰 구름은 골짜기마다 가득하고 크게 울리는 범종 소리는 푸른 하늘에 사무친다.

고개 돌려 산을 보다가 저녁노을에 취해서 나무에 기대어 깊이 졸다 보니 해는 벌써 기울었네!”

라고 게송을 읊으셨다.

 

*(게송) ‘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沈眠日已斜’ ; 『전당시(全唐詩)』 540권 이상은(李商隱)의 시 ‘화하취(花下醉)’ 참고. ‘尋芳不覺醉流霞 倚樹沈眠日已斜 客散酒醒深夜後 更持紅燭賞殘花’


*때꼽재기 ; 때가 여러 겹으로 엉겨붙은 조각이나 부스러기.
*애착(愛着) ; 사랑하여 집착함. 애집(愛執).
*증(證) ; ①깨달음. ②깨달은 바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체화(體化)함.
*구타부득(狗他不得) ; 그[他]를 구속(狗束)하지 못한다[不得].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묘용(妙用) ; 신묘한 진리의 작용. 뛰어난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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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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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