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ㅊ/천도재(영가천도)'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22.03.31 재(전강선사 No.002)—부처님을 무주상으로 믿어야 | 生也如是 死也如是 頭頭毘盧 物物華藏 | 여시(如是)는 ‘생사 없는 도리’ | (게송)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沈眠日已斜.
  2. 2022.03.29 천도 법문((No.217))—일대사인연 | 심원(心猿)과 의마(意馬) | 생사를 당적하려면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나아가야 | (게송)此身誠苦聚~ | (게송)千古無人聞~.
  3. 2021.07.15 천도재 법문(No.034)—생사가 본래 없다. 모든 있는 것들은 고대로 열반, 적멸이다 | 나를 깨달으면 생사윤회에서 해탈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
  4. 2021.07.14 천도재 법문(No.180)—(게송)百年三萬六千日~ | 활구참선을 하면 '함이 없는[無爲] 업', '샘이 없는[無漏] 업'을 닦는 것이다 | (게송)不是物兮早騈拇~.
  5. 2021.07.13 천도재 법문(No.176)—(게송)萬事悠悠此百年~ | 인생은 여행 | 일점영명(一點靈明) | 생사는 뜬구름 · 공화(空花)와 같다 | (게송)萬朶靑山圍梵刹~.
  6. 2021.07.12 천도재 법문(No.173)—(게송)若人欲識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 (게송) 佛面猶如淨滿月 亦如千日放光明 | (게송) 滿目靑山無寸樹 懸崖撒手大丈夫.
  7. 2021.07.11 천도재 법문(No.464)—(게송)歷歷離賓主~ | (게송)可貴天然物~ | 오직 홀로 짝이 없는 이 ‘한 물건’을 찾는 최고의 방법이 참선법 | (게송)促之在方寸~.
  8. 2021.06.08 천도재 법문(No.395)—(게송)身與白雲來幻界~ |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 | (게송)四大誠苦聚~ | 유족들은 이 슬픔을 발판으로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아야.
  9. 2021.06.07 천도재 법문(No.463)—(게송)人生百年情何許~ |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 공화(空花) | (게송)法界盡是毘盧歸~ | 부처님 아닌 사람이 없어 | 불사.
  10. 2021.05.29 천도재 법문(No.393)—(게송)來時歡喜去時悲~ | '생사는 본래 없다'는 도리를 비록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 (게송)心隨萬境轉~. 1
ㅊ/천도재(영가천도)2022. 3. 31. 06:42

재(전강선사 No.002)—부처님을 믿어도 참말로 무주상(無住相)으로 정직하게 믿어야 | 生也如是 死也如是 頭頭毘盧 物物華藏 | 여시(如是)라는 것은 ‘생사 없는 도리’ | (게송)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沈眠日已斜.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 (산스트리트어) trīni-karmāni  (팔리어) tīni-kammāi 일체업(一切業)을 신(身) · 구(口) · 의(意) 삼업으로 나눈 것.
①신업(身業) : 몸의 행위로 짓는 모든 업.
②구업(口業) : 입을 통해 나오는 언어로 짓는 모든 업. 어업(語業)이라고도 한다.
③의업(意業) : 마음으로 짓는 모든 업. 사업(思業)이라고도 한다.
의업(意業)이 발동한 다음 그 생각으로 여타의 업이 만들어지기[思所作] 때문에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사이업(思已業)이라 한다.

계학(戒學)의 관점으로 '신삼(身三) 구사(口四) 의삼(意三)‘이라고 하여 십선십악(十善十惡)을 삼업에 배대하여 십선은 널리 실천하고 십악을 짓지 말라 하였다.

십악(十惡)은 ①몸[身]으로 짓는 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 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 사음(邪淫 삿된 음행) 세 가지.
②입[口]으로 짓는 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 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 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 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네 가지.
③생각[意]으로 짓는 탐욕(貪欲, 貪心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 진에(瞋恚, 瞋心 성냄) · 사견(邪見, 痴心 그릇된 견해) 세 가지가 있다.

십악(十惡)을 행하지 않으면 십선(十善)이 된다.
십선(十善)은 ①몸[身]으로 짓는 불살생(不殺生) · 불투도(不偸盜) · 불사음(不邪淫) 세 가지.
②입[口]으로 짓는 불망어(不妄語) · 불기어(不綺語) · 불양설(不兩舌) · 불악구(不惡口) 네 가지.
③생각[意]으로 짓는 불탐욕(不貪欲) · 불진에(不瞋恚) · 불사견(不邪見) 세 가지가 있다.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14분 12초)


[법문] 전강선사(No.002)—전강선사 일대기 제1호(경술1970년 11월 20일.음) (전002) (천도재)

참, 또 오늘은 마침 재(齋)가 이렇게 들어왔으되 정각행 보살님이 이렇게 오셨어.
나는 정각행 보살님을 불명(佛名)까장은 드렸지마는 이렇게도 몰랐더니, 저 내가 무주(茂朱) 스물댓 살 먹어서 있을 적에 그때에 보살님이 거그서 아마 나 스물댓 살 먹었을 적에 한 열 살도 못 잡쉈는 것 같애. 고때에 거그 계셨어. 그 김군수댁이라고 내가 잘 아는 댁이여. 그 어른이 내가 불명 드린 불명이 아마 대법성인가? 어름은 해도 내가 분명히 드렸거든.

그 진선녀댁이라고 그려. 진선녀댁. 진선녀댁 그 같이 모도 댕겼고. 진선녀댁은 중간에까장 내가 봤고. 인자 그다음에 진골댁인데 그이는 정각심이라고 내가 주었고.
이렇게 모두 줄 때인디 그때에 보살님께서 거그서 소학교를 댕겼던 것이여. 군수댁 딸로 그러고 댕긴 아, 그런 어른이란 말이여.

헌디 그때 그 김군수댁에서 나를 또 어떻게 그 젊은 청춘시대라고 그렇게 고맙게 나를 대접하고 모도 그때 귀엽게 보고, 내 설법을 듣고 모도 믿고 산성 30리나 된 디를 그렇게 올라 댕기시고 아, 이런 모도 인연이 있어.
그런디 나는 그것 저것도 여그 와서 모르고 불명(佛名)만 드렸더니 그 어째 어찌 그렇게 나와 인연이 중헌고 했더니 참 중혀. 그 중헌 인연을 내가 말허다 보니 요런 말을 허지, 이런 말을 내가 할 필요가 이건 없지마는 뭐 지내간 역사 가운데에 이런 것이 다 법이지.

아, 먼첨도 그 참 한참 여그 일해 나가는 가운데에 도무지 당최 어쩔 수 없는 그 지경인데, 돈 10만원이나 갖다 주면서—아무 별 연고도 없고 별로 내가 알아보지도—아무 말씀도 여하튼 없고 그저 갖다 주어. 아! 이런. 나도 무심코 받았지. 그때 종각(鐘閣) 헐 때인데, 종각에다 넣었지.

그거 참 속으로 무척 감사하다. 으째 감사한고?
상(相)이 없고. 10만원이나 주었으면 ‘내가 어따했다. 어째서 냈다. 어떻게 뭐...’ 이런 말 저런 말씀도 없고, 내가 ‘달라’ 소리도 한 말 없는디 그냥 주시지, 갖다가 그대로.

아, 그러고 나서는 그만 모도 그만 일이 척척척척 되드라 그 말이여.
그러더니 그다음에는 보살님께서 그 불사(佛事)헌다고 모두 그 원, 재 지낸다고 어쩌고어쩌고 우리 예수재(預修齋) 지낸다고 허는디 ‘나도 책 하나 달라’고 어쩌고 하더니,
아! 가시더니 그만 뭉청 화주(化主)를, 어째 그래 덕이 있는고, 화주를 참 해놔. 여그 참 보살님네 두 분이 그냥 한 오십여 만 원, 육십여 만 원이나 했든가 이렇게 해서. 아! 뭉청 가져와서 불사를 원만히 치르고. 그래도 저래도 뭐 도모지 상(相)이라고는 일무(一無)제.

아, 내가 그래서 먼첨 작년에 언제 아 그래 내가... ‘아! 어디 병환이 나 돌아가신다’
‘아이고, 그래 쓸 것이냐’고 내가 뜻으로 작법(作法) 축원을 내가 했다 그 말이여.

‘내가 작법 축원을 해드렸기 따문에 그때 그 병이 저렇게 낫었다’ 내가 이런 마음이 참말로 속으로는 있지마는 나도 그런 뭐 상(相)을 뵈서 쓸 것이냐고 싶어서 내가 안 했지마는.
속에도 시방이라도 ‘아! 우리 보살님께서 저렇게 건강해지신 것은 내가 그때 축원(祝願)해 줘서 안 그랬는가’ 그래서 그랬을까마는 그런 마음이 난다 그 말씀이여.

그것은 그것 내가 작법 축원해 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 그것만 내가 인자—‘그건 그렇다’는 말만 내가 인자 한번 그저 거그에다가서 풍담(風談)처럼 한마디헌 게지마는.
보살님께서 그렇게 부처님을 믿어도 참말로 상(相)없이 정직허게 믿고, 화주를 허셔도 그렇게 ‘했다’는 무슨 그런 야단스러운 상(相)이 없이 무얼 갖다 돈을 주어도 그렇게도 무주상(無住相)으로 턱 해 나가신다 그 말씀이여.

참 그래서 무척 정직허다고 믿고 있는디 아, 이번 재(齋)만 하더래도 이번 재에도 당신이 다 사 가지고 뜩 와서는 쏵, 당신이 올려놓아. 내 역부러 더 놓을 것도 있지만 한 가지도 더 안 놓았구만. 당신이 사온 대로 고대로 갖다 딱 올려버렸제.
그러고는 돈을 구천 원을 또 갖다주네. 다른 재에 어디 그런 일이 있어. 오천 원만 해도 거그 막 드리 채려놓아야 하는디. 구천 원 갖다주고.

나, 돈 구천 원, 대번 그 자리에서 우리 부처님께 쌀질 함지가 모두 없다고 네 개를 척 사왔는데, 어제 등등 네 개 사온 놈 고놈 돈 주어버려. 대번 고놈부텀 주어버려. 항상 부처님께 올리는 그릇을 얼른.
돈 육천 원이 남았는디, 아! 육천 원은 마침 똑 저 우리 곳간이 막 확 날라가 버려서 대번에 나무 사다가서 거다가 딱 못 박아서 착 해놓았는데, 고놈을 외상으로 했는데 ‘달라’고, 고놈 턱 인자 오늘 날만 새면은 드릴 것이다.

아! 그러헌 중수(重修), 아 그러헌 절에다 그렇게 도 닦는 이 부처님 집안에 도인(道人)들이 있는데 아! 그러헌 그 우세 모도 허고, 그 절 모도 중수허고 아! 그 모도 부처님께 올리는 그러헌 쌀진 함지 사고, 그것이 참말로 그 재(齋) 아닌가.
그렇게 허는 재를 그걸 알지를 못 허고는 갖다가 무슨 발라 놓고 야단스럽게 해놓고 뭐 떡이나 야단스럽게 뭐 지져 놓고, 귀신이 와서 먹는 줄 알고 야단치고. ‘적게 해놨다, 떡 안 해놨다, 뭣 안 해놨다’ 이렇게 야단을 치는 한국 불교. 그 뭣이냔 말이여. 그게 불교여? 그것이 뭣이여?

나는 이렇게 똑 해 나간다 그 말씀이여.

그 어른이 정직치 못할 것 같으면은 ‘어째 구천 원이나 돈을 갖다 드렸는데, 내 사 온 과실에다가 아무것도 사 논 것 아무것도 없고, 거다가서 무슨 뭐 찌지고 볶고 해논 것도 아무것도 없고, 밥같은 거 뭣 떡같은 거 해논 것도 아무것도 없고 그 돈 어쨌는고?’ 이럴 것이단 말씀이여.

당장 그저께 재(齋) 온 사람 “당장 밥도 안 허고 뭣도 안 허고 이래 놓았다”고.
“아, 여보시요. 밥도 여그는 안 올리고 반찬 뭐 그런 적(炙)같은 것도 안 올리고, 과실이나 올리고 경 읽어 준다고 안 협뎌. 내가 그 이외에 더해 달라하면은 여그서 못 해준다고 내가 안 했어?”
그러니 상주(喪主)가 있다가 “예! 그랬습니다” 그러니께 옆에 따라온 사람이 그런 모두 야단치다가는 뚝 끊어 버리고는 밥 한 숟갈 떠먹고 도망가 버렸네.

여그서 이렇게 우리 부처님의 정법(正法)에 해 나가는 전체를 꼭! 내가 이대로 해 나가는 거여. 뭐 두말할 것이 없어.

내가 여그서 만약에 그렇게 저렇게 들어온 돈이라도 한푼이라도 부정허게 썼다면은 이 집 요렇게 짓고 여그다가 또 저 채 짓고, 담 저놈 쌓고, 이 땅 사고, 사백만 원 만들아서 오천 몇백 원, 저 이천 평 또 사고 내가 그랬을 리가 만무해.
참말이여. 내가 이거 무슨 뭐 변명헌 것 같고, 내 깨끗헌 자랑헌 것 같고, 내가 뭐 이렇게 했다는 것을 나도 무슨 유주상(有住相)으로 헌 것 같소마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허다보니 내가 여까장 말헌 것이란 말씀이여.

내가 정각행 보살님이 하두 이렇게 모도 그동안에 정직헌 것을 내가 이 자리에서 말허는 것 똑 마침 대인(對人) 찬(讚) 같지마는, 대인 찬(讚)헐 것은 또 해야 허는 것이지, 부처님이 뭐라고 했소.
부처님께서 그 찬탄헐 일은 기가 맥히게 찬탄허고, 그 부처님 제자들이 모도 나와서 ‘천하에 우리 부처님은 세계에 없고 천상천하에 없고 우리 부처님이다’ 왜 그런 것 모두 그랬어?
찬은 찬해야 허는 것이지, 상벌이 다 있는 것이고. 그 내가 그래서 여까장 말씀한 것이니 그 뭐 대인 찬으로 알으시지 마시고.

그런 가운데에 참말로 보살님께서 ‘어떻게 해야사, 참 이 정법 기관이요 둘도 없는 기관이요, 용화사에다가서 내가 우리 부모도 이렇게 갖다가 모도 영위(靈位)를 모셔놓고 자! 여가 참으로 어따가 비유헐 수 없는 등이 없는 무등등(無等等)헌 그러헌 법보선원(法寶禪院)을 이렇게 해 놓았으니 앞으로라도 어떻게 잘해 영원히 부흥토록 역사 없이 전통해 나갈꼬’ 허는 원력(願力)이 말씀허는 가운데에도 말말이 허신 것을 보고는 그런 것이 나타날 때마다 감사합니다. 이 말씀으로써 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연속해서 영가께 한 말씀으로써 마치겠습니다.

항상 영가(靈駕) 법문, 내가 두고 허는 법문이여.

생야여시(生也如是)요 사야여시(死也如是)요, 두두비로(頭頭毘盧)요 물물화장(物物華藏)이니라.
거 뭔 말이여? 생(生)도 여시(如是)라니.

생도 사(死)와 사는 생(生), 부모한테서 이 몸 받아 나온 생, ‘날 생(生)’ 자 또 ‘사는 생(生)’ 자, 나와서 그저 사는 것도 여시(如是)다.
여시(如是)라는 것이 그것이 ‘생사 없는 도리’여. 그 무슨 생사가 거 붙어 있나? 여시여. 이같다.

화엄경도 여시(如是)요. 그다음에는 그저 법화경도 여시요. 원각경도 여시요. 다 여시(如是)제.
생(生)도 여시, 사(死)도 여시제. 어디 가서 본래 생사(生死)가 있어? 생사가 본래 없거늘 무슨 생사여?

왜 이 중생이 나서 늙어 병들어 죽는 생사고(生死苦)가 있는고?
그게 본래 없는 것인데, 무슨 생사여?

두두비로(頭頭毘盧)요, 머리 머리가 일체 머리가, 두두(頭頭)라는 건 다 들어가. 일체 두두가 여시(如是)여. 다 여시지. 두두여시(頭頭如是)여.
물물화장(物物華藏)이다. 모도 물건 물건이 다 화장(華藏), 그 화장이 여시여. 화장(華藏)도 생사 없는 화장. 아무 거기에 무슨 뭐 생사가 어디 있나? 화장이 여시(如是).

그 여시(如是)?
그 여시는 심마(甚麼)오? 이와 같은 도리는 그 무슨 도리인고?
억!

회수간산취류하(回首看山醉流霞)허고  의수침면일이사(倚樹沈眠日已斜)니라
나무~아미타불~
(2시간2분2초~2시간5분3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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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齋 재계齋戒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어름 ; ‘어림(대강 짐작으로 헤아림)’의 사투리.
*먼첨 ; ‘먼저’의 사투리.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예수재(預修齋) ; 살아 있는 동안에 미리 재(齋)를 올려 죽은 후에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의식.
*화주(化主) ; ①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주(主). 부처님를 말함. ②신도들의 집을 돌며 절에 필요한 양식·물건·비용 등의 시물(施物)을 얻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축원(祝願)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풍담(風談) ; 풍류(風流 : 풍치風致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 또는 그러한 생활이나 태도)에 관한 이야기.
*풍치(風致) ; ①고상(高尙 : 품위나 몸가짐의 수준이 높고 훌륭하다)하고 훌륭한 운치(韻致 : 고상하고 우아한 멋)나 경치. ②격(格 :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에 맞는 멋.
*무주상(無住相) ; 집착함이 없는 모습. 집착함이 없는 상태.
*중수(重修 거듭 중/고칠 수) ;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다시 거듭하여[重] 손질하며 고침[修].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적(炙 구울 적) ; 양념한 생선이나 고기를 대꼬챙이에 꿰어서 불에 굽거나 번철(燔鐵)에 지진 음식.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찬(讚)하다 ; (...을) 칭찬하거나 찬양하다.
*영위(靈位 신령 령/자리 위) ; ①혼백[靈]의 자리[位]. ②신위(神位). 또는 위패(位牌).
*원력(願力) : 원(願)하는 바를 이루려는 의지. 본원력(本願力) · 숙원력(宿願力) · 대원업력(大願業力) · 서원(誓願) · 행원(行願)이라고도 한다.
*본원(本願) : 근본서원(根本誓願)의 준말. 모든 불보살님들이 지난 세상에서 일으킨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결정코 이루려는 맹세(서원). 본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다.
①총원(總願)--모든 불보살님들의 공통원, 사홍서원(四弘誓願).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 가없는 중생을 맹세코 다 건지리이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 끝없는 번뇌를 맹세코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 한없는 법문을 맹세코 다 배우리이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다 이루리이다.
②별원(別願)--불보살님마다 중생제도의 인연에 따라 세운 원(아미타불48원, 약사여래12원 등등). 별원은 사홍서원의 구체적 표현.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두두물물(頭頭物物) ; ‘두(頭)‘는 사물이나 사람의 단위. ‘각각의 존재[頭頭]와 모든 사물[物物]’이라는 말. 곧 모든 것을 가리킨다.
*비로(毘盧) ;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약칭.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의인화하여 형상화한 부처님.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로, 해석하면 변일체처(遍一切處), 광명변조(光明遍照),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 모든 곳에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
진리는 어떤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므로, 진리가 곧 부처라고 하는 비로자나불의 관점에 서면 일체 모든 것이 부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두두(頭頭)가 비로(毘盧)다”는 말은 삼라만상 일체가 다 부처 아님이 없고 진리 아님이 없다는 말이다.
*화장(華藏) ; 화장세계(華藏世界).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연꽃으로 장엄한 세계. 화엄경에서 설하는 비로자나불의 세계.
*'생도 사(死)와 사는 생(生), 부모한테서 이 몸 받아 나온 생, ‘날 생(生)’ 자 또 ‘사는 생(生)’ 자, 나와서 그저 사는 것도 여시(如是)다. 여시(如是)라는 것이 그것이 ‘생사 없는 도리’여. 그 무슨 생사가 거 붙어 있나? 여시여. 이같다.
화엄경도 여시(如是)요. 그다음에는 그저 법화경도 여시요. 원각경도 여시요. 다 여시(如是)제. 생(生)도 여시, 사(死)도 여시제. 어디 가서 본래 생사(生死)가 있어? 생사가 본래 없거늘 무슨 생사여?
왜 이 중생이 나서 늙어 병들어 죽는 생사고(生死苦)가 있는고? 그게 본래 없는 것인데, 무슨 생사여?'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게송) ‘회수간산취류하(回首看山醉流霞) 의수침면일이사(倚樹沈眠日已斜)’ ; ‘머리를 돌이켜 산을 보니 흐르는 안개에 취한다. 해가 넘어가는데 나무에 기대 졸음에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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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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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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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ㅊ/천도재(영가천도)2022. 3. 29. 07:21

천도 법문((No.217))—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해라 |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 |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생사윤회를 하느냐?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이 정진해야 |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없다.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나아가야 | 구경(究竟)의 깨달음.

(게송)此身誠苦聚~ | 삼계(三界)가 화택(火宅) | 무기(武器)가 순 그게 불덩어리 |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셈 치고 목숨을 바쳐서 해야만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는 해결이 나는 것 | (게송)千古無人聞~.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재(齋 재계齋戒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39분 43초)


[법문] 송담스님(No.217)—1983년(계해년) 추계산철 해제 법회(83.09.30.음) (용217)

오늘은 계해년 가을 산철 해제일을 맞이했습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수행 납자(衲子)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너무 감격스럽게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용화사 선방대중과 또 도봉산 원효암 대중 그리고 여러 용화사 모다 돈독히 조실 스님의 법을 믿고 정진하는 신도 여러분도 참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특히 5재 천도식을 맞이한 민병태 영가를 위해서 좋은 법문을 설해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이 용화사 법보선원 이 법요식에는 사부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만년위패 법보제자 영가들도 동시에 청혼(請魂)을 해서 이 법요식에 법문을 듣도록 마련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특히 이 5재를 맞이한 민병태 영가는 이 해제 법문을 잘 듣고, 과거 무량겁에 지은 선(善) · 악(惡) · 무기(無記)에 업연(業緣)이 봄눈 녹듯이 녹고, 온갖 원한을 다 풀어 버리고 도솔천내원궁이나 또는 극락세계에 왕생을 하고,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인연이 있어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게 되면 다시 불법문중(佛法門中)에 귀의해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 일대사인연, 일대사인연의 근원을 살펴볼 거 같으면 사람 사람이 본래 다 갖춰져 있는 것이여. 본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낱낱이 다 원만(圓滿)하게 다 이루어져 있는 것이여.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닦지 않고 깨닫기 이전에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주먹을 피어서 손바닥을 만들고, 그 손바닥을 다시 쥐어서 주먹을 만들고 한 것처럼 조끔도 힘을 들일 것이 없어.

따라서 눈으로 보는 것은 전부가 다 『화엄경』이요, 귀로 듣는 것은 전부가 다 법문(法門)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작위(作爲)하는 모든 행동은 다 그것이 불사(佛事)요.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행하고 느끼고 하는 그리고 말하고 냄새 맡고 하는 주관적인 것이나 객관적인 것이 전부가 다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의 불사요, 설법이요, 경전이요.

그래서 부처와 조사(祖師)가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하시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을 해서 닦아 가지고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에 부처와 조사의 허물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고 새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건마는, 우리는 심(心), 마음이, 마음의 원숭이[心猿]가 나부대고, 뜻의 말[意馬]이 날뛰는 바람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종이 되어 가지고 망령되이 인아상(人我相)을 내고, 일어나는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그럴 때마다 얼음 위에다가 물을 찌뜨린 거와 같애서 점점 얼음덩어리는 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그래 가지고 한 생 한 생 거듭될 때마다 업(業)은 점점 더 깊어지고 얽히고설켜서 자기의 영광(靈光), 자기의 신령스러운 빛은 그 업(業)으로 인해서 가리워져 가지고 캄캄한 칠통(漆桶) 칠야삼경(漆夜三更)처럼 되어 가서 영원히 헤어날 길이 없는 까닭은 무엇이냐?

사람을 만나지 못한 탓으로, 첫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자신, 자기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를 못했고, 둘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길을 가리켜 줄 수 있는 본분작가(本分作家)를 만나지 못한 탓으로 우리는 이렇게 본래 불보살(佛菩薩) 불조(佛祖)와 조끔도 차등이 없는 그러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대사(一大事)를 요달치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무량겁을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 빠져서 와서, 금생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또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생사의 윤회는 끄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쇠로 지어 붓은 그러한 굳은 결심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이것입니다.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이 생사윤회를 계속 치성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의 마음속에 원숭이와 뜻 속에 말, 그 원숭이와 망아지를 때려잡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 일이 얼마만큼 어려우냐 하면, 급히 흘러가는 그 급수(急水),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애.
물결이 세지 아니한 데 배를 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물살이 센 데다가는 물살 따라서 배도 따라서 흘러 내려갈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배를 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위태로운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인아(人我) 시비(是非)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밥 먹고 옷 입은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잠깐도 한눈팔 겨를이 없이 발에다가 힘을 주고 버티면서 그 배를 대는 데, 잠깐 사이도 딴생각을 낼 겨를이 없다.
어떠한 사람이 머리를 내 머리를 짤라 가고, 손발을 짤라 가고, 심장과 간장을 도려내서 죽음에 이르른다 할지라도 이 배를 기어코 댈려고 하는 그 마음을 쉬지 아니한 것처럼, 이러한 정도로 정진을 지어가지 아니한다면 어찌 공부를 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말법에 이르러서 성현 가신 때가 멀어.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이 정법(正法)을 믿는 마음이 철저하지를 못해 가지고,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다 할지라도 이리저리 사량분별로 따지고, 보고 듣고 알고 그러한 마음속에 그러한 것으로써 살림을 삼아 가지고, 금년도 이럭저럭 또 내년도 이럭저럭 한 철 한 철, 철은 지나가지만, 정진 속에 사량계교(思量計較)와 천착(穿鑿)으로써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수행은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때에 참으로 그것을 그러한 정진력을 써먹을 수가 있느냐?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있다면 세존(世尊)은 무엇 때문에 6년 동안에 설산(雪山) 고행을 하셨으며, 달마대사는 소림(少林)에서 9년 동안을 왜 묵무언(默無言) 하셨으며, 장경(長慶)선사는 7개 포단(七個蒲團)을 앉아서 뚫었으며, 향림(香林)은 왜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으며, 조주(趙州)는 30년에사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한 필요가 있겠느냐.

이 참선은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이 사량분별이 끊어지고 번뇌 망상이 없어지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마저도 잊어버려. 그래 가지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밥 먹되 밥맛을 모르고,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 어떠한 공안을 보나 하나도 맥힘이 없어, 자기 나름대로. 조주 무자(無字)도 맥힐 것이 없고, 판치생모(板齒生毛)도 맥힐 것이 없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들어봐도 하나도 의심이 안 간다 그 말이여.
부처라고 하나 중생이라고 하나, 된장이라고 하나 똥이라고 하나, 천상천하 두두물물이 무엇을 봐도 그것이 다 바로 그것이 자기요, 자기와 부처와 이 법계가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이 도리는 이게 체중현 도리여. 공리(空理)라 그 말이여.

여기에 이르러서 만약에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점검을 받지 못하면 자기도 '초견성이다, 한소식했다' 해 가지고, 그러한 그 체중현의 경지에서 보면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의심이 없고 맥힐 것이 없으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가서는 이빨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그 체중현 도리로써 자기의 살림을 삼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일대사 문제를 요달했다고 생각을 하게 되지만, 현중현 도리에 나아가서는 그것 가지고는 되지를 안 혀.

더군다나 후배, 다른 사람이 공부를 해 가지고 자기에게 왔을 때에 '그 사람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냐, 안 얻었느냐?' 그것을 점검하는 데에 나아가서 자기의 경지와 같으니까 '옳다'고 일러줄 수밖에는 없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에 자기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게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기 때문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지만, 바르게 닦지를 못하고 바르게 깨닫지를 못하면 저 망하고 남 망하게 하고 마침내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는 그런 중대한 죄과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산철 두 달 동안에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어떻게 수행을 해 가야 하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지어 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정말 차라리 안 하려면 몰라도 일단 이 문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고 정진을 해 나가는 마당에는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마한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써 작은 견처를 가지고 만족을 삼지를 말고, 고조사(古祖師)에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진대는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자기의 견처(見處)를 용감하게 부정을 해 버리고 언제나 처음 발심(發心)할 때의 그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견처(見處)와 견지(見地)에 이르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견처를 부정해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발심 수행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좋은 병에다가 악지(惡知) 악각(惡覺), 악한 알음 악한 깨달음—마치 우리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어떠한 견처도 스스로 그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좋은 병에다가 썩은 변질한 고약한 음식을 담은 거와 같애서 그 병 속에는 아무것도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는다 하더라도 그 병 속에 담어져 있는 변질된 고약한 악취가 나는 음식 때문에 새로 담은 음식까지도 먹지 못하게 되는 데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 병 속에 좋은 음식을 담으려면 먼저 그 병 속에 들어 있는 변질된 물질을 까꾸로 다 쏟아 버리고, 열 번 스무 번 완전히 그 속에서 그 냄새가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씻고 또 씻고 소독을 해서 그래도 또 냄새가 나면 그것을 삶고 해 가지고라도 기어코 그 병을 깨끗이 해야, 완전 소독을 해야 그런 연후에 라사 거기에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아도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 어떠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가지고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자기 속에 조그마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러한 견처로 인해서 어떠한 좋은 법(法)도 들어갈 수가 없고, 좋은 법문을 들어도 바로 자기식(自己式)으로 변질이 되어서 올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그러한 불견(佛見), 법견(法見), 어떠한 경전에 있는 말씀이고, 어떠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도 깨끗이 버려 버리고 언제나 초심(初心)! 초심인으로써의 마음가짐과 지조를 가지고 정진을 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른 깨달음을 얻었어도 그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을 가져서는 아니 되거든, 바른 깨달음 아닌 그러한 견처를 가지고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차신성고취(此身誠苦聚)허고  삼계진화택(三界眞火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여아구출몰(汝我俱出沒)헌디  겁해종난측(劫海終難測)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차신(此身)은 성고취(誠苦聚)요. 이 몸뚱이는 정말 이 괴로움의 뭉텅이다 그 말이여. 온갖 괴로움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말이여.
몸뚱이도 그렇고 우리의 마음도 그렇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 여가 안 아프면 저가 아프고, 저가 안 아프면 여가 아프고, 오장육부가 다 그렇고.
우리의 마음도 이 걱정 아니면 저 근심, 저 근심 아니면 이 걱정, 내 일신(一身)뿐만 아니라 부모 걱정 · 자식 걱정 · 남편 걱정 · 사업 걱정 · 가정 걱정, 전체가 이 고통 고민의 뭉텅이다 그 말이여.

그리고 온 이 세계는 참으로 불집[火宅]이여. 불집! 불이 훨훨훨훨 불이 타고 있는 불집이여.
옛날 부처님께서 '이 삼계(三界)가 화택(火宅)이다' 그러셨는데, 정말 이 말세가 되고 보니 저 온 세계가 만드느니 무기만 만들어. 무기가 순 그게 불인데, 불덩어리인데, 맨 새로 만들지 안 해도 이 삼계가 고대로 화택인데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머리 좋은 천재만을 골라 가지고 그 사람들을 시켜서 만드느니 원자탄 · 수소탄 · 레이저 무기, 그러한 무서운 불로써 온 세계를 갖다가 찰나간에 잿더미를 만들어 버리는 그러한 무서운 무기만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만들고 또 상대방을 그 태워 죽임으로써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 무기를 만드는데, 결국에 가서는 그 무서운 무기로 인해서 상대방도 타 죽고 나도 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에 귀의해서 상대방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을 찾아야만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이르를 텐데, 상대방을 죽이고 나만 살려고 나를 지킬려고 만드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나도 죽고 남도 죽게 하는 결과가 올 것이 빤합니다.
10년 후에 올 지, 20년 후에 올 지, 백 년 후에 올 지 그것은 알 수가 없지만, 현재 세계 정세의 되어 가는 껄세로 보아서는 그 시간이 점점 가속도가 붙어서 언제 올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연 추측을 불허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과거에 얼마나 깊은 복(福)과 인연(因緣)을 지었음인지 이 최상승법을 믿고 또 그것을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다행스럽고 감사하고 경행한 일이나, 이 문제는 범범한 생각을 가지고서는 결판이 나기가 어렵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셈 치고 목숨을 바쳐서 해야만 이 문제는 해결이 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불보살이 다 그러셨고, 과거에 모든 고조사(古祖師)들도 역시 다 그러셨습니다. 더군다나 이 말세에 태어난 우리 근기가 약한 우리들은 과거에 불보살과 고조사에 몇십 배, 몇백 배를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제를 맞이해서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러한 뜻에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온 세계와 인류, 다시 우리에게 가까이 눈을 돌려보면 우리 조계종 종단 그리고 우리 자신, 멀리 생각하나 가까이 생각하나 우리는 시간을 아껴서 일분일초를 아껴서 정말 이를 악물고 다시 우리 정진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입니다.


천고무인문(千古無人聞)헌디  만산공두견(萬山空杜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목동일성적(牧童一聲笛)헌디  기우과석양(騎牛過夕陽)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고(千古)에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 만산(萬山)에는 공연히 두견새만 울고 있구나.
밤새도록 두견이는 울고 있는데, 아무도 그 두견새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목동일성적(牧童一聲笛)에  기우과석양(騎牛過夕陽)이라.
목동이는 한 소리 젓대를 불면서 소를 타고 석양을 지내가는구나.

전강 조실 스님께서 생존 시에 즐겨 읊으시던 게송이었습니다.

법보단에 모셔 있는 만년위패 법보제자 모든 영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오늘 5재를 맞이한 민병태 영가는 이 법문을 들은 인연으로 속성정각(速成正覺)하시기를 바랍니다. (8분29초~48분1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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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ㅊ/천도재(영가천도)2021. 7. 15. 11:17

 

 

천도재 법문(No.034)—부처님께서는 ‘생사는 없는 것이다. 모든 법이 항상 스스로 적멸(寂滅)한 상(相)이다’ |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사를 없애려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든 있는 것들은 고대로 열반(涅槃)이요, 적멸(寂滅)이다 | 활구참선에 의해서 나를 깨달라야 버리면은 영원히 생사(生死)의 윤회에서 해탈(解脫)하는 것이며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17분 4초)

 


[법문] 송담스님(No.034)—이영호 비구니 4재 법문(77.03.01) (용034)

오늘 4재를 당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정성스럽게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한 영가(靈駕)는 영호 스님이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입니다.
이 스님은 일찍이 도봉산 원효사 벽산 노장님의 상좌가 되어 가지고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강원(講院)에서 경을 다 배우고, 그래 가지고 전강 조실 스님을 믿고 오랫동안 참선(參禪) 수행을 잘하다가 제주도 지방에 인연이 있어서 제주도에 절을 짓고, 거기서 제주도의 많은 신도를 교화하고 불사(佛事)를 잘하다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 인연이 다해서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에 이승을 하직하셨습니다.

그 제자의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오늘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4재 천도((薦度) 법요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정법(正法)의 인연이 있어서 이 청정도량에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듣고 또 대중스님네가 독송한 금강경 그리고 정성스럽게 거행한 법요식으로써, 이 공덕(功德)으로.
또 영가가 평소에 출가해서 도를 잘 닦고 불사를 많이 경행하고, 많은 신도를 정법으로 인도하고 그러한 공덕으로 틀림없이—설사 과거 무량겁래(無量劫來)로 내려오면서 많은 숙업(宿業)이 있다 하더라도 춘설(春雪)같이 그 업장(業障)이 다 소멸되어서 본인의 원에 따라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도솔천 내원궁에 왕생(往生)할 것이 틀림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본인이 다시 이 사바세계에 인연이 있어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한다면은 반드시 좋은 가문에 출생해서 다시 출가해 가지고 이 정법문중(正法門中)에 귀의해 가지고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것입니다.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생사는 없는 것이다. 모든 법이 항상 스스로 적멸(寂滅)한 상(相)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부처님입니다. 일체 중생과 삼라만상이 고대로 더 닦을 것도 없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할 것도 없이 원래로 원만(圓滿)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죽지 아니한 사람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빨리 죽은 사람은 부모의 뱃속에서 죽어 가지고 나오기도 하고, 나오다가 죽기도 하고, 일 년 만에 죽기도 하고, 십 년 만에 죽기도 하고, 오래 산 사람은 칠십 팔십까지도 사는 사람이 있지마는 결국은 이승을 하직하고 맙니다.

그 짧은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아침 이슬과 같고, 풀끝에 맺힌 한 방울의 이슬과 같고, 꿈과 같으며,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그렇게 허망하고 보잘것없는 그러한 인생을 단 하루도 사는가 싶이, 산다 싶이 살지를 못하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희로애락(喜怒哀樂), 오욕락(五慾樂) 속에서 울다가 웃다가 몸부림치다가 이승을 하직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생사가 본래 없다’고 하셨건만 어째서 우리 중생에게는 한(恨) 많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 말씀에는 생사는 없는 것이지마는 중생이 생사고해(生死苦海) 속에서 헤매이는 것은 마치 눈에 병이 난 사람이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건마는 공화(空花)가 이글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아서, 눈병만 낫고 보면은 허공 속에 이글이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꽃송오리 같은 것은 눈병 낫자마자 찰나간(刹那間)에 없어지는 것이다.

눈병이 발생을 했을 때나, 눈병이 완전히 치료되었을 때나, 공화(空花)는 본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깨달으면 깨달은 눈으로는 생사가 없는 것이고, 깨닫기 전에는 생사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에나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분명히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소승(小乘)들은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괴롭다. 그러니 그 괴로운 것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이냐? 탐진치 삼독의 불이 속에서 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모든 괴로움은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은 그 괴로운 불을 꺼야겠는데 그 불을 끄려면은 도(道)를 닦아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녹야원(鹿野苑)에서 최초로 설하신 사제법(四諦法)입니다. 이 사제법에 의해서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도를 닦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성문(聲聞)들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근기(根機)가 차츰 성숙해진 뒤에 보살(菩薩)들에게 설하신 법문은 ‘이 세상에 모든 것은 괴로운 것이다’고 설하신 것이 아니고, ‘이 괴로운 것을 없애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사를 없애려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든 있는 것들은 고대로 열반(涅槃)이요, 적멸(寂滅)이다’
이 사바세계가 생로병사로 얽혀져 있는 괴로운 곳이 아니라 언제나 생사가 없는 극락세계요, 적광토(寂光土)요, 열반의 세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나중에 설하신 대승법(大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거기에 의지해서 나 자신을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첫째,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고서 부처님이나 우리나 조금도 차별 없이, 설사 이 몸뚱이는 생로병사가 있을망정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 참나는 이 세계가 생겨나기 이전부터서 무량겁을 두고 남[生]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하는 것을 깊이 믿고서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에 의해서 나를 깨닫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은 이미 이 최상승 활구참선법을 깊이 믿고 수행하신, 수행을 해 오고 계신 분들이라 구태여 중언부언(重言復言) 말씀드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영가가 오늘 이 자리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창건하신 이 최상승 활구참선 도량에서 4재를 거행하게 된 그 인연과 공덕을 기리는 뜻에서 간단히 참선(參禪)은 왜 해야 하는 것이며,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참선한 결과 우리에게는 어떠한 열매를 수확하게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참선은 내가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 참나를 찾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그 참주인, 참나에 의해서 조종이 되고 운영이 되고 있지마는, 한 번도 그 주인공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찾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 없는 집이 살림이 잘될 까닭이 없으며, 왕이 없는 나라에 그 나라 정치가 잘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의 주인, 이 몸뚱이의 주인을 발견을 해서 그 주인을 잘 주인노릇을 잘할 수 있도록 잘 수련을 시켜놔야 금생 일생 동안에도 이 몸뚱이를 가지고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이 자유자재하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무량겁을 두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생사윤회를 할 그 괴로움의 바다에서도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한 그러한 성현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방법으로는—'나'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발로 걸어 다니는 가운데에 있지, 그밖에 저 딴 데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눈으로 볼 때나, 귀로 들을 때나, 먹을 때나, 말할 때나, 걸어갈 때나, 그 가운데에서 나를 찾을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생활 속에서 떠나가지고 저 산에 가서 찾는다든지, 바다에 가서 찾는다든지, 무슨 책, 경책(經冊) 속에서 찾을려고 한다면은 찾을려고 할수록 점점 멀어져버릴 뿐인 것입니다.

언제나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가운데 있으므로, 그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그 가운데서 그 속에서 그놈으로 되돌려 찾는다고 한다면은 우리는 가장 빠른 시간에, 찾는 그 순간에 거기에 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천년을 두고 「내가 나를 찾는 방법」을 역대조사(歷代祖師)가—부처님에 의해서 가섭존자가 배우고, 가섭존자에 의해서 아란존자가 깨닫고 해 가지고, 등등상속(燈燈相續)해 가지고,
한 등불에서 또 그다음 등불에 불을 붙여 주고, 그 등불에서 그다음 등불에 불을 붙여 주고 해 가지고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 가운데에 세련되고 연구되고 실천하고 그래서 다시 개발한 방법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입니다.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자나깨나 이놈을 찾고 또 찾고 함으로써, 처음에는 입으로만 ‘이뭣고?’ 하되 속으로는 이미 밖으로 밖으로 달아나 버리고, 달아난 줄 알면 또 찾고 이렇게 해서 그것이 습관화가 되고, 습관화가 됨으로써 다시 그것이 체질화가 되어서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항시 이 화두가 우리 앞에 현전(現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놈이 언제나 우리 앞에 현전해서 그놈이 독로(獨露)가 될 때에는 일체 번뇌(煩惱) 망상(妄想)은 저절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밖에 어떠한 마구니도 나를 침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을 열심히 열심히 해 감으로써 반드시 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깨달라 버리면은 영원히 생사(生死)의 윤회(輪廻)에서 해탈(解脫)하는 것이며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4재를 맞이한 영가도 이 공부를 위해서 출가를 했고, 오십 평생을 이 공부를 하다가 이승을 하직을 했습니다. 정법에 인연이 있으므로 다시 금방 몸 바꿔 나서 다시 우리와 더불어 또 이 법을 닦을 것을 의심해 마지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법보제자 여러분께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영호 영가께서 과거의 모든 업장을 소멸하고 다시 인도환생해서 정법을 닦을 것을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법요식에 참석을 해주신 걸로 믿습니다. 이상으로써 오늘 말씀을 끝맺겠습니다. (처음~17분7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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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일대시교(一代時敎)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이 한 생애에 걸쳐 설한 일체의 가르침. 일대교(一代敎)와 같다.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 · 탱화 · 불구(佛具) · 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공덕(功德) ; ①복, 복덕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숙업(宿業) ; 숙세(宿世), 즉 과거세(過去世), 전생(前生)에 지은 선악의 행업(行業 : 고락苦樂의 과보果報를 받을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 현세에 그 과보를 초래하는 업을 말하며, 숙작업(宿作業) · 선업(先業)이라고도 한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왕생(往生) ; 죽어서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어서 정토에 태어남.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서 극락에 태어남.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희로애락(喜怒哀樂 기쁠 희/성낼 노/슬플 애/즐거울 락) ;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네 가지 감정. 곧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공화(空花, 空華) ;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 에서.
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안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 ‘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환(幻)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참고] 송담스님(No.366)—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한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 하고 그렇게 딱! 믿어 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왜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이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병이 든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이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저 더운 날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그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그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그말이여.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 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못 믿을 것도 없다 그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그 자성이 없다’고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시고, 성현들이 ‘없다’고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안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분명히 이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그 성현의 말씀을 안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 ‘그냥 없다’고 딱!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참 그게 그렇게, 당장 그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을 얻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말.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곧 부파 불교(部派佛敎)를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 · 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④열등한 능력이나 소질을 갖춘 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녹야원(鹿野苑)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붓다 buddha)이 35세에 성도(成道)한 후 최초로 설법을 개시한 곳이며, 이때 교진여(僑陳如) 등 5명의 비구(比丘)를 제도(濟度)하였다.
갠지스 강 중류, 지금의 바라나시(Varanasi, 베나레스 Benares)에서 북동쪽 약 7㎞ 지점에 있는 사르나트(Sarnath)의 유적이 곧 녹야원의 터. 사슴동산(녹야원), 즉 사르나트(Sarnath)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슴의 왕’을 뜻하는 ‘사란가나타(Saranganatha)’가 줄어든 말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붓다가야(buddhagayā)에서 녹야원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2백 ㎞가 된다. 탄생(誕生:룸비니) · 성도(成道:붓다가야) · 입멸(入滅:쿠시나가라)하신 곳과 더불어 불교(佛敎) 4대 성지의 하나.
*사제(四諦) ; 사성제(四聖諦). 제(諦)는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를 뜻함. 고(苦, 괴로움)를 소멸시켜 열반에 이르는 네 가지 진리.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도 함.
①고제(苦諦, 苦聖諦) : ‘고(苦, 괴로움)’라는 성스러운 진리. “태어남이 고다. 노쇠가 고다. 죽음이 고다. 슬픔•비탄•괴로움•근심•절망이 고다. 즐거운 것과 갈라짐이 고요, 싫은 것과 같이 함이 또한 고다. 요컨대 집착과 연관된, 존재의 다섯 쌓임(五取蘊)이 고다”(상응부)
②집제(集諦, 集聖諦) : ‘고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몹시 탐내어 집착하는 갈애(渴愛)가 고(苦)가 일어나는 원인이라는 진리.
③멸제(滅諦, 滅聖諦) : ‘고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됨으로써 고(苦, 괴로움)가 소멸되어 고의 끝남, 열반에 이른다는 진리.
④도제(道諦, 道聖諦) :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팔정도(八正道)—정견(正見, 바른 이해) ·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 정어(正語, 바른 말) · 정업(正業, 바른 행위) · 정명(正命, 바른 생계) ·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 · 정념(正念, 바른 마음챙김) · 정정(正定, 바른 집중)—는 갈애를 소멸시켜,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다.
*성문(聲聞) : [범] sravaka [파] savaka  모든 중생을 널리 다 건지겠다는 큰 원을 세우지 않고, 자기의 공부만을 힘쓰는 가운데 부처님이나 다른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소승의 사제법(四諦法)을 깨쳐서 번뇌 망상을 끊고, 나(我)가 없어져서 열반에 들게는 되지마는, 그 열반은 얕고 작은 ‘나머지 있는 열반(有餘涅槃)’ 곧 아직 덜된 열반에 들어 있는 이를 이름이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보살(菩薩) :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각유정(覺有情) • 개사(開士) • 대사(大士)등으로 번역.
①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②대승교에 귀의, 사홍서원을 발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며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자리 · 이타(自利 · 利他)의 행을 닦으며 51위의 수행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이.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항상[常] 변하지 않는[寂] 광명[光]의 세계[土]. 부처님의 거처나 빛나는 마음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대승교(大乘敎) : 대승(大乘)이란 큰 수레를 뜻한다。큰 원(願)과 큰 뜻을 세워서 나를 희생하여 모든 중생을 즐겁고 편안하게 건져 주겠다는 보살심(菩薩心) 있는 이들을 위하여, 육도(六度)와 만행(萬行)을 닦아 가도록 깊은 이치를 말씀하신 법문이다。그 대표적인 경전은 <반야경(般若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능가경(楞伽經)> <기신론(起信論)> <범망경(梵網經)> 같은 것들이다.
이 법문을 요약하여 말하면, 이 세상에 온갖 물질과 일(森羅萬象)이 벌어져 있으나, 낱낱이 현상(現象) 그대로 비어 없는 것이며, 모든 차별된 것이 그대로 다 평등하여 열반인 것이다。따라서 무엇에나 걸릴 것이 없는 것이다.
소승의 열반이 소극적이며 작고 옅은 것이라면 대승의 열반은 적극적이며 크고 참된 것이다。한 중생도 남음이 없이 모두 제도한 뒤에야, 자기가 성불하겠다는 소원이야말로 대승의 보살심인 것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가섭존자아란존자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Posted by 닥공닥정
ㅊ/천도재(영가천도)2021. 7. 14. 10:50

 

 

천도재 법문(No.180)—(게송)百年三萬六千日~ | 최상승법 활구참선을 실천하면 바로 '함이 없는[無爲] 업', '샘이 없는[無漏] 업'을 닦는 것이다 | ‘이뭣고?’로써 필경(畢竟)에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에 계합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게송)不是物兮早騈拇~.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법문] 송담스님(No.180)—유관호 영가 100재, 임성철 영가 49재(82.08.19) (용180)

 

 

(1) 11분 59초.

 

 

(2) 11분 58초.

 


(1)------------------

백년삼만육천일(百年三萬六千日)에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〇〇〇 영가(靈駕) 49재(四十九齋) 천도(薦度)일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으로 생사 없는 도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하신 그 법문(法門)으로 영가는 무량 억천만 겁에 모든 죄업(罪業)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져 없어졌고. 그 생사 없는 도리에, 영각성(靈覺性)을 깨달아서 바로 그 생사 없는 도리에 계합(契合)을 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인생이 이생에 태어날 때 어데서 왔으며, 무엇을 하기 위해서 왔으며, 또 한평생 살다가 가면 어디를 향해서 가는가?

부처님으로부터 33대, 법(法)을 이어받으신 육조(六祖) 스님께서—‘육조 스님은 바로 생불 화현(生佛化現)이다. 보살 화현(菩薩化現)이다’ 이렇게 추앙을 받는 대도인이신데,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육조 스님 앞에 와서 떠억 절을 했습니다.

“십마물(什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시니까, 남악회양 선사는 망지소조(罔知所措)여, 몸 둘 바를 몰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하고 묻는 데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런지 아주 꽉! 맥혀버렸어. 콱! 맥혀 가지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는, 육조 스님께서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괴고 아래로는 땅을 괴는데, 밝기는 해와 같고 검기는 칠(漆)과 같다.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그러니 이게 무슨 물건이냐?” 하고 묻는데,
하택신회 선사는 대답하기를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의 근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금방 말하기를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했거늘, 어찌 제불의 본원이니, 신회의 불성이니 하고 왜 이름을 붙이는고? 네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어떠한 지경에 이른다 하더라도 너는 지해종도(知解宗徒)밖에는 못 되겠구나” 이렇게 점검을 하셨습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에 이론적으로 본다면 틀림없이 모든 부처의 본원이며, 신회의 불성이라 한 말이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고 너무나도 분명하게 일렀건만, 어째서 육조 스님께서는 “네가 앞으로 어떤 지견을 얻는다 하더라도 너는 지해종도, 이론적으로 따지는 사량분별(思量分別)로 교리를 따지는 그런 강사 그러한 것밖에는 못 되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냐 이 말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따져서 알아지는 것은 아무리 그럴싸한 해답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사량분별심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에 사량분별심으로 따지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은 알음알이라, 이것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아니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아니여.

남악회양 선사는 “십마물(什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하고 묻는데, 꽉 맥혀서 뭐라고 입을 벌릴 수가 없고, 몸 둘 바를 몰라.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 활구참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말이여.

벌써 사견 종자(邪見種子), 지해 종자는 그 마음가짐이라 할까? 그 종자(種子)가 다르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안을, 화두를 꺼떡하면 분별심으로 따져서 알아맞추려 그러고, 분별심으로 공안을 더듬어서 비교하고, 이러한 식의 참구(參究)는 벌써 이것은 사견(邪見) 종자의 하는 지서리다 그말이여.

8년 동안을 꽉 맥혀서 알 수가 없고, 이렇게 콱! 맥힌 상태에서 참구를 해야 거기에 확철대오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말이여. 확철대오할 수 있는 길은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지, 이리저리 따져서 알아들어가고 더듬어서 짐작을 하고 비교하고 이러한 식의 공부가 아니다.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남악회양 선사가 갔습니다.
“제가 깨달았습니다”

“깨달았으면 깨달은 도리를 일러봐라”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남악회양 선사가 대답하기를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할 것이 없지는 않지만 오렴은 얻들 못합니다. 오렴은 없습니다”

“여역여시(汝亦如是)하고 오역여시(吾亦如是)여.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인가(印可)를 하셨습니다.(처음~12분12초)





(2)------------------

〇〇〇 영가는 금년 나이 21살, 대학을 졸업하고 펄펄 뛰는 청년이 친구와 더불어 호수에 헤엄을 치러 갔다가, 물에 풍덩 뛰어들자 가라앉아서 허망하게도 이승을 하직을 했습니다.

어떻게 펄펄 뛰는 유능한 청년이 그렇게 허망하게도 물에 들어가서 풍덩 뛰어들자마자 가라앉아 가지고 숨을 거두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살다가 갈 것을 뭣하러 이 세상에 왔느냐 그 말이여. 차라리 오지나 말았으면 부모형제와 일가친척에 피눈물이 나오지 않게나 할 것을. 무엇하러 그렇게 갈 것을 왔을까 이 말이여.
누가 그렇게 가고 싶어서 왔겠습니까마는, 전생에부터 지은 업(業)이—부모와의 관계, 형제간과의 관계, 자기가 전생에 지은 그러한 여러 가지의 업이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갈 수밖에는 없었다 이 말이여. 그래서 사람은 기왕 업(業)을 지을 바에는 바르게 업을 지어야 해. 좋은 업을 지어야 한다 그 말이여.

악한 업이나 좋은 업이나 업을 짓지 아니한 것만은 못하지만, 기왕 사람이 태어나서 업을 지을 바에는 좋은 업을 지어야 하고, 바른 업을 지어야 하고, 좋은 업보다도 더 ‘함이 없는[無爲] 업’을 지어야 한다 그 말이여.
함이 없는 업, 무루업(無漏業), 샘[漏]이 없는 업을 지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최상승법을 실천하면 바로 '함이 없는[無爲] 업', '샘이 없는[無漏] 업'을 닦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도 이 49재에 이 정법도량에 와서 49재 천도 법요를 갖게 된 인연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불법(佛法)에 숙세의 인연이 있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비록 금생에는 그렇게 허망하게 이승을 하직했지만, 이 인연 공덕으로 전강 조실 스님의 최상승 법문을 듣고 또 이 청정한 대중스님네의 천도 법요식을 통해서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 법보제자로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셔서 동참(同參)을 하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새로 새 몸을 받아 날 때까지 이 법보전(法寶殿 대웅전)에서 청정대중으로서 법문을 듣고 참선(參禪)을 해서 머지않은 장래에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거나, 극락세계나 또는 도솔천내원궁에 왕생(往生)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와서, 〇〇〇 영가는 무슨 인연으로 이생에 와서 채 꽃이 활짝 피기도 전, 21세의 꽃봉우리로써 이승을 그렇게 허망하게 하직을 하게 되었느냐?

“대관절 무슨 물건이냐?” “십마물(什麽物)이냐?” 이 한마디는 40억 인구는 말할 것도 없고, 육도법계(六途法界)에 가득차 있는 모든 인비인(人非人), 축생,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가 타파해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부터 이 49재를 맞이한 영가와 여기에 초청받은 육도법계의 모든 영혼 불자들도 ‘십마물(什麽物)이요?’ ‘이뭣고?’ 이 공안으로써 필경(畢竟)에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에 계합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시물혜조병모(不是物兮早騈拇)요  허다명상부하위(許多名相復何爲)인고
나무~아미타불~
관간첩장연하리(慣看疊嶂烟霞裏)에  무수호손도상수(無鬚猢猻倒上樹)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십마물(什麽物)고?
불시물혜조병모(不是物兮早騈拇)여. ‘이 한 물건도 아니다.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다’ 해도 벌써 군더더기다 그 말이여. 조병모(早騈拇), 병모(騈拇)는 육손이. 사람마다 다섯 손가락이 있는데 손가락 하나가 군더더기로 더 붙어 있는 거다 그 말이여.
허다명상부하위(許多名相復何爲)냐. 허다한 명상(名相) 그 밖에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는데, 그 밖에 뭐라고 이름을 붙이고, 뭐라고 모양을 그려댄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말이여.

관간첩장연하리(慣看疊嶂烟霞裏)에, 언제나 첩첩산중에 안개와 연기가 자욱한 속에서, 수염 없는 원숭이가 나무를 거꾸로 올라가는구나.(無鬚猢猻倒上樹) (12분13초~24분10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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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百年三萬六千日 返覆元來是這漢’ ; ‘백 년 삼만육천 일에 반복하는 놈이,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왔다갔다하는 이 반복하는 놈이 원래로 이놈이다’ 『고봉화상 선요(高峰和尙 禪要)』 법문에 나오는,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의 진영(眞影) 찬(讚) 끝에 있는 두 글귀.

[참고] 『고봉화상 선요(高峰和尙 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通仰山老和尙疑嗣書(其二八)—앙산 노화상께 사법(嗣法) 의심함을 풀어주는 글’ p168~169. p173~174 참고.
忽於次月十六夜夢中에 忽憶斷橋和尙이 室中所擧萬法歸一一歸何處話하니 自此疑情頓發하야 打成一片하야 直得東西不辨하며 寢食俱忘이라

어느덧 다음 달 16일 밤이었습니다. 꿈속에서 홀연히 단교화상이 방장실(方丈室)에서 일러 주신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하는 화두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로부터 의심이 단박 생겨 일념을 이루어서 동과 서를 잊었으며, 잠자는 것도 밥먹는 것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至第六日하야 辰巳間에 在廊下行이라가 見衆僧堂內出하고 不覺에 輥於隊中하야 至三塔閣上하야 諷經이라가 擡頭忽睹五祖演和尙의 眞讚末後兩句에 云 百年三萬六千朝 返覆元來是這漢하고 日前被老和尙의 所問拖死屍句子를 驀然打破하니 直得魂飛膽喪하야 絶後再甦이라 何啻如放下百二十斤擔子리잇고 乃是辛酉三月廿二少林忌日也러이다 其年이 恰廿四歲요

그러한지 6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진시(辰時)에서 사시(巳時) 사이에 행랑(行廊) 아래서 거닐다가 대중 스님들이 승당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대열에 섞여 삼탑각에 올라갔습니다. 경을 외우면서 머리를 들어 문득 오조법연 화상의 진찬(眞讚)의 끝 두 글귀에 “백년 3만 6천 일을 반복(返覆)하는 것이 원래 이놈이다” 한 것을 보자, 전에 스님께서 다그쳐 물으시던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라는 화두를 확연히 깨달으니 곧 혼이 나가고 담이 없어진 듯하고 죽었다가 다시 소생한 듯하였습니다. 어찌 백이십 근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것과 같을 뿐이었겠습니까.
그때가 바로 신유(辛酉)년 3월 22일 달마 대사 기일(忌日)이었고 제 나이 24세가 되었습니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사십구재(49재, 四十九齋) ; 사십구일재(49일재, 四十九日齋) 또는 칠칠재(7 · 7재, 七七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면서 또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 한 생각 돌려 무상을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행하는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에서는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과보를 받을 다음 생이 결정되므로,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 영가가 죄업을 참회하고 지혜의 눈을 밝혀 해탈의 길을 가도록 이 재(齋)을 지냄.
특히,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7회째의 재(齋)를 중요시함.

불경(佛經)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 ②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③사유(死有: 죽는 그 순간) ④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 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영각(靈覺) ; 영각성(靈覺性). 모든 중생에게 갖추어진 영묘(靈妙)하게 알아차리는 성품.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부처님 ; 불(佛)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buddha의 음사.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육조 스님남악회향선사하택신회선사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생불(生佛) ; ‘현실로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는 의미로, 부처님과 같이 덕이 높은 사람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로 고승(高僧 행동이나 덕이 높은 스님)을 찬미하는 호칭이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보살(菩薩) :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각유정(覺有情), 개사(開士), 대사(大士)등으로 번역.
①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②대승교에 귀의, 사홍서원을 발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며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자리 • 이타(自利 • 利他)의 행을 닦으며 51위의 수행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이.
*망지소조(罔知所措 그물·근심할·없을 망/알 지/ 바·방법 소/둘·처리할·조처할 조) ; 너무 당황하거나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 11~13.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 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 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説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칠(漆 옻나무·옻나무 진·옻칠할·검다 칠) ; 옻칠(옻나무에서 나오는 진津으로 가구나 나무 그릇 따위에 썩는 것을 막고, 아름답게 꾸미고 윤을 내기 위하여 옻을 바르는 일).
*지해종도(知解宗徒)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사람.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지서리 ; ‘짓거리('짓'을 낮잡아 이르는 말)’의 사투리.

* : 몸이나 몸의 일부를 놀려 움직이는 행동이나 행위를 나타내는 말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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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무위(無爲) ; ①(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 팔리어: asavkhata) 무위(無爲)는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 없는 것으로 유위의 대(對)가 되며, 조작되지 않은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 즉 생멸변화를 떠난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②온갖 분별이 끊어진 마음 상태. 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마음 상태.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 상태.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의 삼독(三毒)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
*무루업(無漏業 없을 무/샐·구멍·번뇌 루/선악의 소행所行 업) ; 번뇌없는 청정한 업. 오염된 과보도 청정한 과보도 초래하지 않는 업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조건이다. '무루'란 번뇌가 없거나 더이상 번뇌를 증장시키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유루업과 대칭된다.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曇無讖 譯) 권37 ‘迦葉菩薩品 第十二之五’
迦葉菩薩白佛言 世尊 是無漏業 非是黑法 何因緣故 不名爲白 善男子 無有報故 不名爲白 對治黑故 故名爲白 我今乃說 受果報者 名之爲白 是無漏業 不受報故 不名爲白 名爲寂靜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이 무루업은 삿되고 더러운 흑법(黑法)이 아닌데, 어떤 인연으로 청정하고 선한 백법(白法)이라 하지 않습니까?’
‘선남자여, 과보가 없다고 하여 청정하다[白]고 하지 않으며, 삿되고 더러운 것[黑]을 대치하므로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과보를 받는 자를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무루업은 과보를 받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지 않고 고요하다[寂靜]고 한다’

*천도 법요식(薦度 法要式) ; 천도재(薦度齋).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법보전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전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왕생(往生) ; 죽어서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어서 정토에 태어남.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서 극락에 태어남.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인비인(人非人) ; ①인(人)은 사람, 비인(非人)은 팔부중(八部衆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여덟 신神—천,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 · 귀신 · 축생 등을 말함. ②긴나라(緊那羅) : 의인(疑人) · 인비인(人非人)이라 번역.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 노래하고 춤추는 신神으로 형상은 사람인지 아닌지 애매하다고 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필경(畢竟 마칠·끝낼 필/마칠·마침내 경) ; 끝장에 이르러. 결국에는.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오늘부터 이 49재를 맞이한 영가와 여기에 초청받은 육도법계의 모든 영혼 불자들도 ‘십마물(什麽物)이요?’ ‘이뭣고?’ 이 공안으로써 필경(畢竟)에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에 계합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게송) ‘불시물혜조병무~’ ; 『경허집(鏡虛集)』 (명정 역 | 극락호국선원) ‘題智異山靈源寺(지리산 영원사)’ p226 참고.
*兮(혜)어조사,어조사(語助辭)로 윗말을 완화(緩和)하고 아래의 말을 강조(强調)하는 뜻으로 쓰임. *騈(병) 나란히 하다, 쓸모 없는 것 *拇(무)엄지손가락,엄지발가락
[참고] 騈拇枝指(병무지지)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이 붙어버린 병무(騈拇)나 손가락이 여섯인 육손이(枝指), 쓸모 없는 것, 군더더기란 뜻.
*慣(관)익숙하다,익숙해지다 *疊(첩)거듭,연속하다 *嶂(장)산봉우리 *疊嶂(첩장) 중첩되어 있는 산봉우리. *蘿(라,나)소나무겨우살이,담쟁이덩굴 *鬚(수)수염 *猢(호)원숭이 *猻(손)원숭이 *猢猻(호손)원숭이 *倒(도)넘어지다,거꾸로.

Posted by 닥공닥정
ㅊ/천도재(영가천도)2021. 7. 13. 03:59

 

 

천도재 법문(No.176)—(게송)萬事悠悠此百年~ | 백년 인생살이 마치 여행을 하는 거와 같다 | 일점영명(一點靈明) | 생사(生死)는 뜬구름 · 공화(空花)와 같은 것, 무엇을 원망하며 무엇을 애착을 가질 것이 있느냐.
(게송)萬朶靑山圍梵刹~ | 분명 생사가 없지마는, 현실에 있어서는 면할 수 없는 생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 의지해서 닦아야 하고, 이렇게 천도 법요식을 갖게 되는 것.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법문] 송담스님(No.176)—민대법화 영가 3재(82.07.10)

 

 

(1) 13분 21초.

 

 

(2) 9분 46초.

 


(1)------------------

만사유유차백년(萬事悠悠此百年)한데  환여역려잠류련(還如逆旅暫留連)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별천애구시객(一別天涯俱是客)인데  부운유수석양변(浮雲流水夕陽邊)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사유유차백년(萬事悠悠此百年)한데  환여역려잠류련(還如逆旅暫留連)이로구나.
만사(萬事)가 유유(悠悠)한 이 백 년(百年), 사람이 나서 한평생을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백 년인데, 그 백 년 동안 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을 울다가 웃다가, 슬퍼하다가 성내다가 기뻐하다가 이럭저럭하면서 백 년 동안 인생살이가 마치 뭣과 같으냐 하면 여행을 하는 거와 같다.

여행을 하는데, 출발해 가지고 목적지에까지 도달하는데 때로는 날씨가 좋았다가, 때로는 비가 왔다가, 때로는 바람이 불었다가, 겨울이면 눈이 왔다가, 먹구름이 끼다가, 평지를 가다가 또는 물을 건너기도 하고 또는 산을 오르기도 하고 산을 내리기도 하고, 인생 일생사가 마치 긴 여행을 하는 거와 같다.

일별천애구시객(一別天涯俱是客)인데  부운유수석양변(浮雲流水夕陽邊)이로구나.
한 번 저 하늘갓으로 떠나버리면, 이별을 해서 뚝 떠나버리면 떠나는 사람도 손[客]이요, 전송을 하는 사람도 손이더라.
나도 여행을 하고 저 사람도 여행을 하는데, 여행하는 도중에 두 사람이 만나서 잠시 한 여관에 들어서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을 자다가 날이 새면 한 사람은 동쪽으로 떠나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떠나는 그러한 경우에 동쪽으로 떠나는 사람도 손이요, 서쪽으로 떠나는 사람도 객(客)이더라.

전송(餞送)을 하면서 또 전송을 받으니까 두 사람이 다 손인데, 부운유수석양변(浮雲流水夕陽邊)이여. 구름은 하늘에서, 떠있는 구름은 바람 따라서 저 하늘갓으로 날아가고, 흐르는 물은 높은 데서 낮차운 데로, 낮차운 데로 흘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떠나는 사람이 뜬구름같이 떠났다면 서쪽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 내려가고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부모를 의지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때로는 남자로 태어나고 또 어떤 경우는 여자로 태어났어. 태어난 사람이 서로 결혼을 해서 아들딸 낳고 돈 벌고 이리 살다가 한 사람이 먼저 떠나고 또 한 사람은 나중에 떠나는데,
뜬구름이 하늘에서 바람 따라서 날아갔다고 해서 슬퍼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흐르는 물이 지세(地勢) 따라서 흐르고 흘러서 바다로 내려갔다고 해서 그것을 슬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여행 중에 두 사람이 만나 가지고 여관에서 하룻밤 같이 이야기하고 지내다가 그 이튿날 이별할 때에 조금 섭섭은... 아주 다정한 경우에는 좀 섭섭한 생각은 있을 수가 있겠지만, 그걸 다리를 뻗고 땅을 치고 통곡하고 그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가족을 이루다가 한 사람이 먼저 가고 뒷사람이 뒤에 간다고 해서 그렇게 통곡을 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그럴 것도 사실은 없는데, 정(情)으로 얽힌 존재들이라 기왕이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같이 해로(偕老)를 하고 자기의 명(命)을 다했으면 좋겠지만, 생사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라, 이렇게 젊은 나이로 이승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민 대법화 영가. 오늘 3재를 맞이해서 숙세의 인연이 있어서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대웅전)에서 3재 천도 법요식(薦度 法要式)을 갖게 됐습니다.
이미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최상승(最上乘) 법문에 의해서 무량겁 업장(業障)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버렸고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아서 다시 거기에다가 더 설할 법이 없지만, 재자(齋者)의 간청으로 산승(山僧)이 잠깐 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뜬구름 같은 인생이요, 흐르는 물과 같은 인생이라.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 몸뚱이가 이루어졌지만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일점영명(一點靈明)은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지수화풍 사대가 무너져서 이 육신은 버렸지만 이 일점영명은 무너진 것이 아니여.

생사(生死)라 하는 것은 ‘낳다’고 해서 새로 태어난 것이 없고 ‘죽었다’고 해서 없어질 것도 없을 바에는—마치 허공에 꽃이 눈병 걸린 사람의 눈에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원래 공화(空花)는 없는 것이여.
눈병 걸린 사람에게 있어서 허공에 공화(空花)가 피었다고 해서 그 공화 자체가 피어 있는 것이 아니고, 눈병이 나아 버린 뒤에는 공화(空花)가 그 찰나에 없어진다고 해서 원래 없어졌던 공화가 새롭게 무엇이 없어질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공화(空花) 자체는 눈병이 난 뒤에나, 눈병이 치료가 된 뒤에나 원래 공화는 없었던 것이여. 중생의 생사(生死)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없는 생사에 무엇을 슬퍼할 것이 있고, 무엇을 천도(薦度)할 것이 또한 있느냐 이 말씀이여.

생사(生死)는 뜬구름 · 공화(空花)와 같은 것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로 원망하고 친숙하고 한 것도 또한 무엇을 원망하며 무엇을 애착을 가질 것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처음~13분22초)





(2)------------------

만타청산위범찰(萬朶靑山圍梵刹)한데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하고  가가문외통장안(家家門外通長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타청산위범찰(萬朶靑山圍梵刹)인데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라.
만 송이 울긋불긋한 꽃과 잎이 우거진 청산에 둘러싸인 절이여. 절은 만 송이의 청산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고.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라. 한 장대 길이만큼 높이 뜬 붉은 해는 영대(靈臺)를 비추더라. 영대는, 우리의 몸뚱이를 끌고 다니던 주인공 그 영대(靈臺)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이 빛나고.

지금 우리 용화사 법당 주변의 산이 천산만산(千山萬山)이 위요(圍繞)하고 있고, 붉은 꽃과 푸른 숲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는데.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요, 곳곳이 푸른 버드나무에는 가히 말을 매둘 만하다. 말을 버드나무에다가 말을 매놓듯이, 영가(靈駕)가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데 말을 타고 가는데, 그 말을 쉬는데 있어서 어디라도 그 있는 버드나무에 묶어 맬 수가 있고.
가가문외통장안(家家門外通長安)이라. 어느 집이든지 문밖에 나가면 방향을 잡어가면은 결국은 서울에 도달할 수가 있더라. 모든 길은 다 서울로 통하고 있더라.

생사(生死)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일정한 모양과 일정한 국집(局執)된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뜨면 해와 달이요, 땅으로 내려오면 산이요 물이요 나무요.

인연 따라서, 인연 따라서 천당도 좋고 극락도 좋습니다. 새로운 몸을 받아 날 때까지는 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 여러 도반들과 더불어 법문을 듣고 삼매에 들었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좋은 곳에 태어나서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아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생사(生死)가 없는데 무엇을 도(道)를 닦으며, 본래 생사가 없는데 무슨 중생을 제도하리요마는, 생사 없는 곳을 향해서 해탈(解脫)을 해야 하고, 설할 바 없는 법(法)을 향해서 법을 설해야 하고, 닦을 바 없는 곳을 향해서 닦아야 하고, 한 중생도 제도 받을 바가 없는 곳을 향해서 제도를 하는 것이 바로 이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분명 생사가 없지마는, 태어났다가 한평생을 살다가 또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치에 있어서는 분명 생사가 없지마는, 현실에 있어서는 면할 수 없는 생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이 출현을 하셔야 하고, 우리는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 의지해서 닦아야 하고, 이렇게 또 천도 법요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인생에 있어서 짧은 생애를 가졌지만, 본래 어질고 착하고, 불법에 깊은 인연을 맺었고 그러한 공덕으로 인해서 이 정법도량(正法道場)에서 천도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한(恨)이 있다 하더라도, 못다 푼 한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 이 시간을 기해서 깨끗이 다 잊어버리고, 다 풀어버리고, 실상(實相)의 자리에 안주하시기를 바랍니다.(13분25초~23분9초) (끝)





------------------(1)

*(게송) ‘만사유유차백년~’ ; 1, 2, 3구는 『경허집(鏡虛集)』 (경허성우 스님) ‘和映湖堂(영호당에게 화답하다)’ 4구는 ‘別友人(벗을 작별하며)’.
*만사(萬事) ; ①여러 가지 온갖 일. ②집착으로 가득 찬 마음의 모든 것.
*유유하다(悠悠-- 멀·아득할·한가할 유) ; ①움직임이 한가하고 여유가 있고 느리다. ②아득하게 멀거나 오래되다.
*한평생(한平生) ; 살아 있는 동안. 일평생(一平生). 평생. 필생(畢生).
*하늘갓 ; 하늘가(하늘의 끝). 천애(天涯 : 하늘의 끝.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 손님. 객(客). ①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 ②남의 집을 방문한 사람. 남의 집이나 여관 따위에 묵고 있는 사람. ③지나가다 잠시 들른 사람.
*전송(餞送 전별할·보낼 전/보낼·전송할 송) ; 떠나는 사람을 따라 나가 작별 인사를 하여 보냄.
*뜬구름 ; ①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②덧없는 세상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해로(偕老 함께 해/늙을 로) ; 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며 늙음.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천도 법요식(薦度 法要式) ; 천도재(薦度齋).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 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재자(齋者) ; 절에 재(齋)를 올리거나 불공(佛供)하러 온 사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사대(四大) ; ①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을 말함. 대(大)란 원소란 뜻.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네(四) 가지 원소[大].
(1)지대(地大) : 굳고 단단한[堅] 것을 성(性)으로 하고, 만물을 실을 수[負載] 있고, 또 질애(質礙)하는 바탕. 질애(質礙)란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여 다른 존재와 서로 융화하지 못한다는 뜻.
(2)수대(水大) : 습윤(濕潤)을 성으로 하고, 모든 물(物)을 포용(包容)하는 바탕.
(3)화대(火大) : 난(煖)을 성으로 하고, 물(物)을 성숙(成熟)시키는 바탕.
(4)풍대(風大) : 동(動)을 성으로 하고 물(物)을 성장케 하는 바탕.
②신체를 말함. 원래, 신체는 지•수•화•풍의 4대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함.
*일점영명(一點靈明) ; 일점영광(一點靈光). 한 점의 신령한 밝음. 우리 본래 마음. 불성을 가리킨다.
*공화(空花, 空華) ;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 에서.
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안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 ‘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환(幻)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참고] 송담스님(No.366)—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문에서.(3분 44초)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한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하고 그렇게 딱! 믿어 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왜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이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병이 든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이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저 더운 날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그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그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그말이여.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 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못 믿을 것도 없다 그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그 자성이 없다’고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시고, 성현들이 ‘없다’고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안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분명히 이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그 성현의 말씀을 안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 ‘그냥 없다’고 딱!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참 그게 그렇게, 당장 그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을 얻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공화(空花) 자체는 눈병이 난 뒤에나, 눈병이 치료가 된 뒤에나 원래 공화는 없었던 것이여. 중생의 생사(生死)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없는 생사에 무엇을 슬퍼할 것이 있고, 무엇을 천도(薦度)할 것이 또한 있느냐 이 말씀이여.
생사(生死)는 뜬구름 · 공화(空花)와 같은 것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로 원망하고 친숙하고 한 것도 또한 무엇을 원망하며 무엇을 애착을 가질 것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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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萬朶靑山圍梵刹 一竿紅日照靈臺’ ; 불교 장의(葬儀) 의식 「시다림(尸陀林) : 죽은 이를 위해 설법하는 의식」 ‘염습(殮襲)’ 안좌게(安坐偈) 참고.
*(게송) ‘處處綠楊堪繫馬 家家門外通長安’ ; 불교 장의(葬儀) 의식 「시다림(尸陀林) : 죽은 이를 위해 설법하는 의식」 ‘발인(發靷)’ 기감(起龕) 참고.
*영대(靈臺 신령할 영/대·받침대 대) ;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뜻으로 마음을 이르는 말.
*위요(圍繞 둘레·에워쌀 위/두를·에워쌀 요) ; 어떤 지역이나 현상을 둘러쌈.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Posted by 닥공닥정
ㅊ/천도재(영가천도)2021. 7. 12. 08:27

 

 

천도재 법문(No.173)—(게송)若人欲識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遠離妄想及諸趣 令心所向皆無碍 | (게송) 佛面猶如淨滿月 亦如千日放光明 | (게송) 滿目靑山無寸樹 懸崖撒手大丈夫.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8분 9초)

 


[법문] 송담스님(No.173)—김필녀 영가 49재(82.06.23) (용173)

약인욕식불경계(若人欲識佛境界)인댄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趣)하고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碍)니라
나무~아미타불~

약인욕식불경계(若人欲識佛境界)인댄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이니라.
만약 사람이 부처님 경계를 알고자 할진 대는 마땅히 그 뜻을 허공과 같이 할지니라.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趣)하야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碍)라.
망상(妄想)과 및 제취(諸趣)를 멀리 여의어 가지고, 마음으로 하여금 향한 바에 다 걸림이 없게 할지니라.

〇〇〇 영가, 도리어 그 뜻을 마땅히 허공과 같이 했느냐, 말았느냐?
혹 허공과 같이 하지 못했을진댄 다시 주각(註脚)을 들을지니라.

이 정각지성(正覺之性)은 위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 육범(六凡)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당당(堂堂)하며 낱낱이 구족(具足)해서, 티끌마다 위로 통하고 물건마다 위에로 나타나서 닦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요요명명(了了明明)함을 이루나니라.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도리어 이 주장자(柱杖子)를 보느냐?
(주장자를 법상에 내리시고, 쿵!) 도리어 이 주장자 내리는 소리를 들었느냐?

이미 요요(了了)하게 보고 이미 역력(歷歷)하게 들었을진댄 필경에 '이 무엇인고?'
요요하게 볼 줄 알고 역력하게 들을 줄 아는 이놈은 과연 무엇인고?


불면유여정만월(佛面猶如淨滿月)하고  역여천일방광명(亦如千日放光明)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불면(佛面)은 유여정만월(猶如淨滿月)하고, 부처님 얼굴은 오히려 그 깨끗하기가 보름달과 같고 또한 일천(一千) 해가 방광(放光)을 놓는 거와 같이 밝으니라.

〇〇〇 영가여, 이제 모든 망상과 티끌 때를 다 씻어버리고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을 얻었으니, 청정법신(淸淨法身)은 안과 밖이 없고, 가고 오고 나고 죽고 하는 것이 한 진상(眞常)이니라.


만목청산무촌수(滿目靑山無寸樹)헌데  현애살수대장부(懸崖撒手大丈夫)니라
나무~아미타불~

만목청산무촌수(滿目靑山無寸樹)한데, 눈에 가득한 청산에는 한 마디의 나무도 없는데,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니라. 천길만길 낭떠러지 절벽에서 손을 탁! 놔 버려야만 대장부(大丈夫)가 되느니라.

〇〇〇 영가의 천도 법어를 마칩니다. (처음~8분32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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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약인욕식불경계~’ ; 『화엄경』 (실차난타 역) ‘여래출현품(제37의 1)’ 참고.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제취(諸趣) ; 모든 취향(趣向).
*취(趣) ; 취향(趣向). 하고 싶은 마음이나 욕구 따위가 쏠리는 방향.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주각(註脚 注낼·뜻을 풀어 밝힘 주/다리 각) ; 자세한 설명. 각주(脚註). 본문의 어떤 부분의 뜻을 보충하거나 자세히 설명한 글을 따로 본문 사이나 아래에 단 것. 註와 注는 동자.
*정각지성(正覺之性) ; 정각(正覺)의 성품(性品). 정각의 본성(本性).
*정각(正覺) ; (산스크리트어)sambodhi. 삼보리(三菩提)라 음역. ①깨달음. 부처님의 깨달음. 바른 깨달음. 진리를 깨닫는 것. ②부처님. 여래(如來). 진리를 깨달은 사람. 정등각(正等覺). 등정각(等正覺). 정등보리(正等菩提).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육범(六凡) ; 범부(凡夫 : 煩惱에 얽매여 진리를 증득하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의 여섯[六] 세계.
불교에서는 세계를 미(迷), 오(悟) 양계(兩界)의 경지를 다시 세분해 열 가지로—불계(佛界), 보살계(菩薩界), 연각계(緣覺界), 성문계(聲聞界)(이상은 오계悟界), 천상(天上界), 인간계(人間界), 수라계(修羅界), 축생계(畜生界), 아귀계(餓鬼界), 지옥계(地獄界)(이상은 미계迷界)—세분한다.
천상계 이하의 여섯 세계는 미망의 경계로서 범부(凡夫)의 세계이므로 이를 육범(六凡)이라고 하고, 성문계 이상의 네 세계는 증오(證悟)의 세계, 즉 성자의 세계이므로 이를 사성(四聖)이라고 한다.
*당당하다(堂堂-- 집·당당할 당) ; ①(모습이나 태도가)남 앞에서 내세울 만큼 떳떳하다. ②(형세가) 위엄 있고 훌륭하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빠짐없이 두루 갖춤.
*요요(了了 마칠·깨달을·분명할 요) ; 뚜렷하게. 분명하게. 분명하게 알고 있거나 뚜렷이 드러나는 경계를 수식하는 말이다.
*명명(明明) ; 환히 드러난 모양. 분명한 모양.
*주장자(柱杖子 기둥·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이 갖는 긴 지팡이. 설법(說法)할 때나, 외출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주장자(拄杖子)와 같음.
*역력(歷歷 지낼·수를 셀·다할·두루 력) ; '뚜렷하다'는 말.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묘사이다. 사유 분별할 여지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현상을 묘사한다.
*(게송) ‘佛面猶如淨滿月 亦如千日放光明’ ;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제6권) ‘사천왕호국품제십이(四天王護國品第十二)’에서 사천왕(四天王)이 부처님의 공덕[佛功德]을 기리는 게송 참고.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 ; 금강처럼 견고하여 파괴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몸. 곧 불보살의 몸을 금강에 비유한 표현이다.
*청정법신(淸淨法身) ;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법신,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곧 비로자나불을 말함.
*진상(眞常) ; 진여상주(眞如常住)라는 뜻으로, 깨달음(열반)의 경지라는 뜻.
*천길만길(千길萬길) ; 매우 깊거나 높은 모양을 이르는 말.
*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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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천도재(영가천도)2021. 7. 11. 10:59

 

 

천도재 법문(No.464)—(게송)歷歷離賓主~ | (게송)可貴天然物~ | 오직 홀로 짝이 없는 이 ‘한 물건’을 찾는 최고의 방법이 참선법이다 | 이 무상한 속에서 영원한 참나를 찾는 데 노력을 하신 것이 영가의 명복을 비는 가장 좋은 방법 | (게송)促之在方寸~.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 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18분 52초)

 


[법문] 송담스님(No.464)—일송 거사 영가 49재(89.09.05)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허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목전근기취(目前勤記取)하라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역력(歷歷)해. 또렷또렷해서 주(主)와 객(客)을 떠났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다. 고요하고 고요해서 색(色)과 공(空)을 끊었더라. 색과 공이 끊어졌더라.

목전근기취(目前勤記取)하라. 목전에 부지런히 분명하게 살펴라.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산이 백운(白雲) 가운데 우뚝 서 있느니라.


오늘 일송 거사 영가 외 118위 영가의 천도재를 맞이해서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경청을 했습니다. 조실 스님의 사자후(獅子吼)와 같은 한 할(喝) 속에 금일 영가를 위시한 우주법계에 무량 무수한 영가들도 일시에 봄눈 녹듯이 무량겁 죄업이 다 녹아 진리와 하나가 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산천초목이 봄 여름에는 그렇게 모다 다투어 푸르르고 그러다가 가을이 되어서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면은 다 시들어 떨어져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세속에 명예나 권리나 부귀영화 그런 것들은 잠시 전생(前生)에 지은 복과 금생(今生)에 자기가 지은 노력과 그때의 모든 인연에 따라서 그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으나, 그것은 서리가 내리면은 다 시들어버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은 전부 다 내 몸으로부터 다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몸뚱이도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잠시 인연으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여. 부모로부터 받아났지마는 백년 미만에 다 버리게 됩니다. 병으로 죽고, 사고로 죽고 결국은 천하 없는 사람도 한번 태어난 사람은 그 몸뚱이를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기를 무량겁을 두고 몸을 받았다 버리고, 받았다 버리고, 자기가 지은 과보(果報)에 따라서 혹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혹 인간에 태어나기도 하고, 축생이 되기도 하고, 지옥 · 축생 · 아수라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업(業)에 따라서 그런 몸뚱이는 받아나되, 그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은 더헐 것도 없고 덜헐 것도 없고,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 아닌 것이여.


가귀천연물(可貴天然物)이여  독일무반려(獨一無伴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멱타불가견(覓他不可見)하고  출입무문호(出入無門戶)로구나
나무~아마타불~

가귀천연물(可貴天然物)이여  독일무반려(獨一無伴侶)로구나.
이 세상에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은 생겨났다가 결국은 없어져. 사람이고 짐승이고, 해고 달이고, 이 지구덩이고, 산천초목 두두물물이 생겨날 때가 있고 그것이 차츰차츰 변화해 가지고 결국은 없어져 버리는데.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주인공은 언제 만들어진 때도 없고, 언제 없어진 때가 없어. 그것을 천연물(天然物), 천연물이라 하는 것인데.

오직 홀로 이 ‘한 물건’은 짝이 없어.
다 음(陰)과 양(陽)이 있고, 선(善)과 악(惡)이 있고, 흑(黑)과 백(白)이 있고, 부(富)와 귀(貴)가 있고, 빈부귀천이 다 상대가 있는데, 이 소소영령한 이놈은 상대가 없어.
다그쳐 조이면은 우리의 방촌(方寸) 가운데 있지마는, 터억 펴놓으면은 우주법계 일체처에 편만(遍滿)해 다 있는 거여.

이 한 물건은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어.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듣고, 생각을 마음을 통해서 일체를 다 분별하고, 하되 찾아보면 알 수가 없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하늘도 올라가고, 지옥도 가고, 미국도 가고, 소련도 가고, 한 생각 잘 돌리면은 천사가 되기도 하고, 한 생각 잘못하면은 찰나간에 악마가 되는 거여.
그러한 이 천연물을 사람마다 다 지니고 있건만, 바로 그 천연물은 부처님이나 공자님이나 우리 범부(凡夫)나 축생이나 미물의 벌레에 이르기까지 차등이 없어. 다맛 인연 따라서 오고가되, 오고간 바가 없단 말이여.

그것을 찾는 것이 불법(佛法)이고, 그것을 찾는 최고의 방법이 참선법(參禪法)이다 그 말이거든. 바른 법을 알아서 항상 그놈을 찾으면은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이여. ‘이뭣고?’

이 도리를 깨달으면은 생사 속에서 생사를 초월하는 해탈(解脫)하는 것이고, 이 도리를 깨닫지 못하면은 천자가 되고 왕이 되고, 장관이 되고 장군이 되어서 천하를 호령한다 해도 이것이 다 꿈속에서 잠시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 뿐이여.

꿈속에 금은보화 칠보(七寶)가 엄청난 칠보가 있는 창고를 발견해서 자기 소유를 만들어. 그리고서 청난(靑鸞)새라고 하는 봉황새보다도 훨씬 더 크고 훌륭한 새가 있는데, 그 청난새를 떠억 타고서 저 천상 옥경(玉京)을 올라갔다 말이여. 거기서 주야(晝夜)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천상의 낙을 누렸어.

실컷 누리다가 그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 잠을 깨고 보니 꿈이었다 이거여. 그 엄청난 보배와 그 좋은 옷, 그 청난새를 타고 천상에 올라가서 그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깨고 나니 간 곳이 없어.
천상도 간 곳이 없고, 청난새도 어디로 날아갔는지 없고, 그 엄청난 금은보화 황금보장(黃金寶藏)도 간 곳이 없어. 그 호화찬란하게 입었던 칠보로 장엄한 옷도 간 곳이 없고 그냥 자기가 입고 있는 그 옷이요, 그 집이요, 자기더라 그거거든.

세상의 어리석은 범부는 세상에 오욕락(五欲樂)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탐착(貪着)하고, 그 명예와 권리와 지위, 재산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패당(牌黨)을 지어서 서로 싸우고 헐뜯고 쇠고랑을 차고, 그게 다 꿈속에 황금보장이요, 꿈속에 청난새요, 꿈속에 천당이여.
그런 줄 확실히 믿고 깨달라서 이 똥주머니, 피, 이 가죽푸대 속에 들어 있는 영원히 쓰고 써도 끝이 없는 이 참나를 깨닫는 것 외에는 이 목숨 바칠 곳이 없느니라.


영가(靈駕)는 66세의 연세로 이 세상을 하직했으나 반드시 좋은 곳에 가서 태어나실 것이고, 또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인연이 있으면 금방 몸을 바꾸어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실 것입니다.
유족들께서는 집안에 어른을 잃으신 것에 대해서 너무너무 가슴이 아프시고 슬픔이 극에 도달하셨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잠시 인연 따라서 헌옷 벗어버리고 새 옷 입듯이 다시 또 태어나는 것이니까.

생사는 무상한 것이고,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니 이 일송 거사의 그 죽음을 보고서 ‘정말 인생이라 하는 것은 무상(無常)한 것이로구나’ 무상을 철저히 깨닫고 너무 재산이니, 지위니, 부귀니, 공명이니, 권리니 그런 것에 탐착하지 말고, 정말 발심(發心)을 해서 이 몸속에 있는 참나,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찾는 데에 발심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도 정말 이 영가와 오늘 118영가에 명복을 간곡히 빌으신다면 어쨌든지 이 무상한 속에서 영원한 참나를 찾는 데 노력을 하신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촉지재방촌(促之在方寸)이요  연지일체처(延之一切處)니라
나무~아미타불~
여약불신수(汝若不信受)하면  상봉불상우(相逢不相遇)니라
나무~아미타불~

보고 듣고, 부르면 대답하고, 성낼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하는 그럴 줄 아는 놈이 '참나'요.
바로 번뇌(煩惱) 망상(妄想) 그놈, 어디서 그 번뇌 망상이 일어났냐? 그 뿌리를 찾아야 하거든. '이뭣고?'

이 도리를 믿지 아니하면 영원한 참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만나지를 못하는 거고, 항상 '이뭣고?'를 하면은 거기에서 자기를 찾을 수 있는 계기가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처음~19분3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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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역력이빈주~’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著) ‘도능선자(道能禪子)에게’ 참고.
*역력(歷歷 지낼·수를 셀·다할·두루 력) ; '뚜렷하다'는 말.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묘사이다. 사유 분별할 여지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현상을 묘사한다.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할(喝) ; 선종(禪宗)에서 진리를 문답하는데 쓰는 독특한 수단이다. 선종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진리를 나타낼 때, 또는 수행자를 꾸짖거나 호통칠 때 토하는 큰 소리.
큰 소리로 『엑 !』하고 꾸짖는 형세를 보임이니, 이것을 처음 쓰기는 마조(馬祖)가 한 번 할했는데 백장(百丈)이 사흘이나 귀먹고 눈이 캄캄하였다는 것이 첫 기록이다. 그 뒤로부터 흔히 쓰는데, 임제(臨濟)가 가장 많이 썼다. 보통 속음(俗音)의 「갈」로는 발음하지 않는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 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 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게송) ‘가귀천연물~’ ; 『한산자시(寒山子詩)』에서 한산(寒山)의 시.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방촌(方寸 모·방위 방/마디·마음·조금 방) ; ①‘사방(四方) 한 치[寸]의 넓이’라는 뜻으로 좁은 땅을 이르는 말. ②사람의 마음은 가슴속의 한 치 사방의 넓이에 깃들어 있다는 뜻으로 ‘마음’을 달리 이르는 말.
*편만하다(遍滿-- 두루 편/찰 만) ; 두루[遍] 가득차다[滿].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해탈(解脫) : [범] Vimoks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칠보(七寶) : [범] Sapta - ranta 일곱 가지의 보배。즉 금(金), 은(銀), 유리(琉璃), 파려(玻瓈), 또는 매괴(玫瑰), 차거(硨磲), 산호(珊瑚), 마노(瑪瑙) 등을 말한다.
*난(鸞 난새 란[난]) ; 난새. 난조(鸞鳥).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 모양은 닭과 비슷하나 깃은 붉은빛에 다섯 가지 색채가 섞여 있으며, 소리는 오음(五音)과 같다고 한다.
*천상(天上) : 욕계의 육욕천(六欲天)과 색계 • 무색계의 여러 천(天)을 통틀어 일컬음. 신(神)들이 사는 곳. 신(神)의 세계.
*옥경(玉京) ; 하늘 위에 옥황상제가 산다고 하는 가상적인 서울.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탐착(貪着) ; ①만족할 줄 모르고 탐하고 집착함. 탐하고 구하는 것. 욕심부려 집착하는 것. 집착하는 것. 욕심부리는 것. 욕심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대상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 ②깊이 마음에 두는 것. 갈애(渴愛), 애착(愛著 愛着), 염착(染著), 집착(執着), 탐애(貪愛), 탐욕(貪欲)이라고도 한다.
*패당(牌黨 패·방·명찰 패/무리 당) ; 패(牌). 서로 어울려 다니는 사람의 무리.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진여자성(眞如自性)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게송) ‘촉지재방촌~’ ; 『한산자시(寒山子詩)』에서 한산(寒山)의 시.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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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재 법문(No.395)—(게송)身與白雲來幻界 心隨明月向何方 生來死去惟雲月 雲自散兮月自明 | 대승보살은 인연 따라서 주어진 대로 최선을 다하되 거기에 집착함이 없다.
(게송)法法本來無所住 無所住處絶追尋 陽烏昨夜沈西嶺 今日依然上曉林 |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 | (게송)四大誠苦聚 三界眞火宅 汝我俱出沒 劫海終難測 | 유족들은 이 슬픔을 발판으로 발심해서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아야.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1) 18분 48초.

 

(2) 5분 7초.

 


[법문] 송담스님(No.395)—송파 영가 49재(89.07.30)

(1)------------------

신여백운래환계(身與白雲來幻界)하고  심수명월향하방(心隨明月向何方)고
나무~아미타불~
생래사거유운월(生來死去惟雲月)인데  운자산혜월자명(雲自散兮月自明)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인생 송파 〇〇〇 거사는 52세를 일기로 이승을 하직한 지 벌써 49일이 되었습니다. 영가는 이승에 와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신심이 돈독해서 불사(佛事)도 많이 하고, 그러한 공덕으로 이 용화사 법보전에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을 모시고 전강 조실 스님의 활구법문을 통해서, 조실 스님의 사자후와 같은 그 대(大) 할(喝) 법문으로 무량겁 업(業)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 없어지고 도솔천 내원궁 미륵보살님이 계신 회상에 왕생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그 한 할(喝)에 더이상 영가(靈駕)를 위해서 무슨 설할 법(法)이 있으리오마는 이 법상에 올라왔기에 게송을 읊었습니다.

신여백운래환계(身與白雲來幻界)요. 몸은 구름과 더불어 이 환상(幻相)의 세계,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왔고,
심수명월향하방(心隨明月向何方)고. 마음은 명월을 따라서, 밝은 달을 따라서 어느 곳을 향해서 갔는가?

어째서 '이 몸뚱이는 구름과 함께 이 세상에 왔다'고 하느냐 하면은, 저 구름은 우리 눈에 하얀 솜덩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시꺼먼 구름도 있을 수가 있고—구름의 모양을 보면 소같이 생긴 구름도 있고, 토끼같이 생긴 구름도 있고, 집같이 생긴 구름, 사람같이 생긴 구름, 코끼리같이 생긴 구름, 가지가지 구름 모양이 떠 있지마는, 잠깐 그러다가 바람이 불면 다시 다른 모양으로 변해서 또 바람에 따라서 저 다른 데로 또 날아가 없어진다 그 말이여.

마치 사람 몸뚱이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루어진 이 몸뚱이를 부모님의 은혜로 잠시 이승에 이 세상에 왔지마는, 길고 짧은 한평생을 꿈결같이 살다가 인연이 다하면 구름 사라지듯이 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는 백운(白雲)과 더불어 이 세상에 왔다. 흰구름처럼 이 세상에 왔다가 또 이승을 떠난다'

'마음은 밝은 달을 따라서 또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몸뚱이 속에, 몸뚱이를 의지해서 이승에 있던 이 우리의 영혼이 몸뚱이가 구름 흩어지듯이 흩어져 버린 뒤에는 이 영혼은 달처럼 또 저 서쪽 하늘로 져 버리고 만다 그 말이여.
이 몸뚱이는 땅에다 묻거나, 화장을 하거나 장례를 지내면 언젠가는 한 줌의 흙이 되고 말아 버려. 그러니 구름이 흩어진 것처럼 결국은 언젠가는 영영 없어지고 마는데, 우리의 영혼은 달이 졌다고 해서 그 영혼이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거든. 달이 져도 다시 또 그 다음날 저녁에 또 뜨고, 이 달의 달이 지더라도 다음 달이 또 돌아오면은 또다시 달이 떠오른다 그 말이여.

이 몸뚱이 인연이 다해서 이 몸뚱이를 버린다 하더라도 그 영혼은 자기가 지은 선업(善業), 악업(惡業), 여러 가지 자기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도 하고, 또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기도 하고, 많은 죄업을 지으면은 지옥 · 아귀 · 축생에도 떨어지는 것이다. 또 자기가 지은 만큼 다 받으면 다시 또 다른 세계에 또 태어나는 것이여.

그러니 우리의 영혼은 달처럼 또 어느 세계를 향해서 가는가?

생래사거유운월(生來死去惟雲月)이여.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마치 구름과 달이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늘에 떴다가 다시 지듯 그와 같다 그 말이여.
운자산혜월자명(雲自散兮月自明)이다. 구름 흩어진 뒤에 오히려 구름 속에 가리워졌던 그 달이 휘황창 밝듯이, 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 속에 우리의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마음자리, 영혼자리가 가리워져 있다가 이 지수화풍 사대로 뭉쳐진 이 몸뚱이를 버려버린 뒤에는 오히려 그 소소영령한 신령스러운 그 영혼이 더 찬란히 휘황창 영혼이 뚜렷하게 나타나더라 그 말이여.

지금 이 49재 법요식이 거행된 이 법보전 안에 우리 중생들의 눈에는 송파 거사, 그 영가를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마는 그 영가는 그 육체를 갖지 아니할 때보다도 더 뚜렷하고 밝게 지금 이 법문을 듣고 계실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회자(會者)는 정리(定離)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하셨습니다. 『만난 사람은 반드시 이별하게 되고,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주법계의 진리요 섭리입니다.

어떠한 인연(因緣)에 의해서 생겨난 것은 인연이 다할 때 다시 그것은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다맛 인연 따라서 나타나고 인연 따라서 모습이 없어질지언정 그 자체가 지닌 본바탕은 생겨날 때도 생겨난 것이 아니고, 우리 눈에 안 보이게 되더라도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환상(幻相), 환(幻)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범부(凡夫)는 모든 유위법(有爲法)이 환(幻)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처처(處處) 곳곳마다 그 환의 업(業)에 끄달리고, 성문(聲聞)은 그 환(幻)의 경계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빨리 적멸(寂滅)에 들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러나 대승보살(大乘菩薩)은 분명히 그것이 환(幻) 경계인 줄 알기 때문에 '생(生)이다, 사(死)다, 열반(涅槃)이다, 빈부귀천이다, 흥망성쇠다' 그런 환의 경계, 그러한 경계에 구애(狗礙) 받지를 않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주어진 대로 최선을 다하되 거기에 집착함이 없고, 집착함이 없으되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이것이 바로 대승보살의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하니  무소주처절추심(無所住處絶追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터니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여. 모든 법(法)이—이 세상 삼라만상 두두물물 모든 법이 본래무소주(本來無所住)여. 본래 주(住)한 바가 없어. 고정불변(固定不變)한 것이 아니여.
무소주처절추심(無所住處絶追尋)이다. 주(住)한 바 없는 곳을 향해서 더듬어서 찾을려고 하지를 말아라.

생(生)이 생(生)이 아니요, 죽음이 죽음이 아니여. 흥한 것이 흥한 것이 아니요, 망한 것이 망한 것이 아니여. 다맛 인연 따라서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단풍이 지고, 겨울이 되면 눈이 올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엇이 새로 생겨나고 무엇이 없어질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이여. 해는 어젯밤에 서쪽 서산 너머로 지더니,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다. 오늘 아침에 저 새벽, 옛을 의지해서 저 동산에 떠오르는구나.

유족들은 영가(靈駕), 송파 거사가 돌아가셨다고 슬퍼하지마는 사실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여. 잠깐 인연 따라서 헌옷 벗어 버리고 새 좋은 옷을 입고 또 좋은 곳에 가서 태어나고,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더라도 더 좋은, 건강하고 더 여러 가지 좋은 점을 구비해 가지고 태어나기 위해서 잠시 헌옷 좀 벗어버린 것뿐이지, 돌아가시기는 무엇을 돌아가셔?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고 하는 말씀을 철저히 믿어버려야 돼.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에 선생님이 계시는데, 학교에 가면은 다 학문 지식으로써 입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가르켜. 또 태권도나 무술을 가르키는 데는 몸뚱이를 가지고 가르키고. 그런데 이 송파 거사는 무엇을 가지고 우리 모두에게, 유족들을 비롯해서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가르켰느냐?
지수화풍 사대로 뭉쳐진 그 몸뚱이를 버리면서 죽음을 통해서 유족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법을 가르켜 주었습니다. ‘이 사람의 몸뚱이는 허망한 것이다’고 하는 것을 가르켜 주었고, 인간의 재산이나 명예나 권리나 모든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믿을 것이 못되고 허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또 우리에게 가르켜 주었습니다.

이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는 것이, 밖에서 얻어지는 모든 그 유위법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허망하다고 하는 것이여. 정말 이 몸뚱이도 허망한 것이요, 사람의 목숨이라 하는 것도 허망하고 무상(無常)하다고 한 것을 그렇게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켜 주고 가신 것입니다.

유족들을 비롯한 우리 모두는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뼛속에 사무치도록 가르켜 준 그 교훈을 거울삼고 스승 삼아서 정말 철저하게 무상을 깨닫고 진실로 발심(發心)을 해서 정법(正法)을 믿고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라야겠습니다.
그렇다면은 송파 거사의 그 죽음은 정말 값진 것이며, 보람찬 죽음이고, 그 공덕으로 영가는 좋은 곳에 가 태어나실 것입니다.(처음~18분47초)





(2)------------------

사대성고취(四大誠苦聚)여  삼계진화택(三界眞火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여아구출몰(汝我俱出沒)하니  겁해종난측(劫海終難測)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사대(四大)는 성고취(誠苦聚)여. 이 몸뚱이는 정말 괴로운 뭉텅이여, 고통의 뭉텅이다 그 말이여.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수화금목토(水火金木土) 오행(五行) 기운으로 뭉쳐진 것이여.
그것이 서로 균형이 잡히면은 건강할 텐데, 이 세상에 아무도 정말 균형 잡히기가 어려운 거여. 불이 많거나, 물이 많거나, 흙이 많거나, 이래 가지고 여가 낫으면 저가 아프고, 저가 낫으면 여가 아프고, 이 고통의 뭉텅이다 그 말이여.

욕계 · 색계 · 무색계, 이 삼계(三界)는 진화택(眞火宅)이여. 참으로 이 불집이여. 불이 훨훨 타고 있는 불집이다 그 말이여.

여아구출몰(汝我俱出沒)이여. 이 지수화풍 사대, 고통으로 뭉쳐진 이 몸뚱이로 이 불집에서 삼계의 불집에서 여기서 태어났다 저기서 죽고, 저기서 태어났다 여기서 죽고.
너나 할 것이 없어. 동서고금에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이 태어났다 죽고 태어났다 죽고 하기를 무량겁을 계속해 오고 있고 앞으로 무량겁을 향해서 계속할 것인데, 그 한량없는 생사의 겁해(劫海)에서 그냥 우리가 그 고통을 다 받으면서 영원히 이러고 있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오늘을 계기로 해서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운 발심을 가지고 이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우리 위대한 스승이신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부귀도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출가를 하셨고,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그 많은 대보살과 역대(歷代) 도인들도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출현하신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 그리고 특히 유가족 여러분들은 이 슬픔을 발판으로 해서 새로운 발심을 해서 대도(大道) 성취해서 영원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〇〇〇 영가는 소소영령한 그 영혼의 위치에서 이 법문을 잘 들었을 것입니다.
그 공덕(功德)으로 무량겁을 통해서 오면서 영가와 맺은 선(善)의 인연, 악(惡)의 인연, 선악(善惡)도 아닌 무기(無記)의 인연까지라도, 그 조그만하게 맺은 모든 인연 있는 모든 사람들도 일시에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생사 없는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시게 될 것입니다.

진정코 하고 싶은 한마디를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고 주장자(柱杖子)에게 맡기고 내려갑니다. (18분53초~24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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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신여백운래환계~’ ; 『천경집(天鏡集)』 (하권) ‘행적(行蹟)’에 있는 함월 해원(涵月 海源) 스님의 임종게(臨終偈).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할(喝) ; 선종(禪宗)에서 진리를 문답하는데 쓰는 독특한 수단이다. 선종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진리를 나타낼 때, 또는 수행자를 꾸짖거나 호통칠 때 토하는 큰 소리.
큰 소리로 『엑 !』하고 꾸짖는 형세를 보임이니, 이것을 처음 쓰기는 마조(馬祖)가 한 번 할했는데 백장(百丈)이 사흘이나 귀먹고 눈이 캄캄하였다는 것이 첫 기록이다. 그 뒤로부터 흔히 쓰는데, 임제(臨濟)가 가장 많이 썼다. 보통 속음(俗音)의 「갈」로는 발음하지 않는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미륵(彌勒) : 대승보살. [범] Maitreya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 등이라고 음사하고, 한역하여 자씨(慈氏).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부처님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현재는 보살이기 때문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이라고도 하고, 미래에 성불할 것이 예정된 보살이기 때문에 미륵불(彌勒佛)이라고도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왕생(往生) ; 죽어서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어서 정토에 태어남.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서 극락에 태어남.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환상(幻相) ; 실체가 없는 무상한 형상.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이승 ;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세계나 일생 동안을 이르는 말.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사십구재(49재, 四十九齋) ; 사십구일재(49일재, 四十九日齋) 또는 칠칠재(7 · 7재, 七七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면서 또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 한 생각 돌려 무상을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행하는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에서는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生)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과보를 받을 다음 생(生)이 결정되므로,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 영가가 죄업을 참회하고 지혜의 눈을 밝혀 해탈의 길을 가도록 이 재(齋)을 지냄.
특히,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7회째의 재(齋)를 중요시함.

불경(佛經)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 ②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③사유(死有: 죽는 그 순간) ④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환(幻) : 또는 눈꽃(空眼花 • 空華)。근본 무명(根本無明)이 언제 일어났는지 그 시초를 알길 없으므로 ‘본래부터(從本已來)’라기도 하고, ‘시작도 없음(無始)’이라고도 한다.
무명이 일어나는 곳도 없고, 또한 그 실상 자체(實相自體)도 없는 것이므로 곡두(환상)같다고도 하고, 눈이 어리어서 허공에서 아물거리는 눈꽃 같다고도 하는 것이다。이처럼 허환된 무명에서 나온 바 온갖 것이 또한 모두 환상이며 공화(空華)인 것이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유위(有爲) ; 산스크리트어: saṃskrta, 팔리어: savkhata  위(爲)는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으로, 유위는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것,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또는 이렇게 하여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세계,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한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성문(聲聞) ; 부처님의 음성(聲)을 들은(聞) 사람이라는 뜻. 산스크리트어 śrāvaka, 팔리어 sāvaka. ①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사제(四諦)의 이치를 깨달아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자. ②자신의 깨달음만을 위해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자.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대승보살(大乘菩薩) ; 보살(菩薩).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하므로 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뜻.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각유정(覺有情) 등으로도 불린다.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행하는 자.
*(게송) ‘법법본래무소주~’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p93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고정불변(固定不變) ; 고정(固定)되어 변하지 아니하다.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고 하는 말씀을 철저히 믿어버려야 돼'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거울삼다 ; (사람이 어떤 일을)본받거나 경계(警戒)할 만한 것으로 여기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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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사대성고취~'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대사) (1권) '寄應禪子兼示神秀沙彌—응선자(應禪子)에게 주면서 신수사미(神秀沙彌)에게도 보임' 참고.
*오행(五行) ;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를 이른다.
*삼계(三界) : [범] trayo-dhātavah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들이 왕래하고 살고 있는 미혹한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겁해(劫海) ;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세월[劫]을 바다[海]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겁(劫) ; (산) Kalpa 음을 따라 갈랍파(羯臘波) 또는 겁파(劫波)라 하고, 다시 줄여서 겁(劫)이라고만 한다.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오랜 세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증득(證得) ;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함.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삼성(三性) ; 모든 현상의 성질을 윤리적 측면에서 선(善), 악(惡), 무기(無記)로 나눈 것.
①선(善) ; [산스크리트어] kuśala 올바르고 청정하여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름.
②악(惡) ; [산스크리트어] pāpa 올바르지도 청정하지도 않아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르지 않음.
③무기(無記) ; [산스크리트어] avyākṛta 선도 악도 아닌 것. 또는 그러한 마음 상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주장자(柱杖子 기둥·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이 갖는 긴 지팡이. 설법(說法)할 때나, 외출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주장자(拄杖子)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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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재 법문(No.463)—(게송)人生百年情何許~ |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 공화(空花) | (게송)法界盡是毘盧歸~ | 우주법계가 모두가 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계시는 곳이다. 비로자나불 법신이다 | 부처님 아닌 사람이 없어 | 지혜와 자비로써 행하는 일은 모두가 다 거룩한 불사.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 · 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17분 9초)

 


[법문] 송담스님(No.463)—이재원영가 49재 천도 법어(92.02.02) (용463)

인생백년정하허(人生百年情何許)오  영별유유갱대상(永別悠悠更對床)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요지백운귀거로(遙指白雲歸去路)하니  원산점점천창창(遠山點點天蒼蒼)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생 백년이 그 정(情)이 얼마만큼인가?
영별유유갱대상(永別悠悠更對床)이다. 한번 눈을 감고 영원히 이별하고 보니, 다맛 이렇게 눈으로 볼 수 없는 영가(靈駕)와 살아 있는 사람과의 말없이 서로 마주 대할 뿐이로구나.

요지백운귀거로(遙指白雲歸去路)하니, 저 멀리 흰구름 밖에 돌아갈 길을 바라보니,
원산점점천창창(遠山點點天蒼蒼)이다. 먼산은 아득하고 하늘은 푸르고 푸를 뿐이로구나.

오늘 〇〇〇 영가의 49재 천도(薦度) 법요식(法要式)을 맞이해서, 그리고 여러 영가들, 오늘 같이 이 천도 법요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단(靈壇)에 모셔진 영가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무량겁으로부터 내려오는 한량없는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가와 법계(法界)에 모든 유주무주(有主無主)의 고혼(孤魂)까지도 이 법요식에 법(法)으로 초혼(招魂)이 되었습니다.

그 영가들은 전강 조실 스님의 최상승 법어을 듣고 일시에 ‘생사(生死) 없는 진리’를 깨달아서 영원히 고통 없는 세계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왜 조실 스님의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듣고 그 영가들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게 되느냐? 반드시 그 까닭이 있습니다.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사가 본래 있는 것이고 보면, 어떻게 해서 그 생사해탈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사는 본래 없는데 중생의 어리석은 무명(無明)으로 인해서 있는 것처럼 착각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전강 조실 스님의 그 생사 없는 진리의 법어를 통해서 잠깐 미(迷)했던, 눈을 가리었던 그것만 딱 벗겨져 버리면은 생사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되기 때문인 그런 것입니다.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안질(眼疾)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공중에 무슨 꽃이 피어서 이리저리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 허공에 꼭 꽃이 피어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안 보이게 된다 그 말이여.
그러면 눈병이 생겼을 때나, 눈병이 나은 뒤에나 허공에는 본래 꽃이 피어 있는 것이 아니었어. 다만 눈병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여졌다가 눈병 낫고 보니 허공에 꽃이 어디에 보일 까닭이 있느냐.

그와 같이 생사(生死)도 본래 없는 것이여.
다맛 인연 따라서 이 몸을 받아 났을 뿐이지, 몸뚱이를 새로 받아 났다고 해서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마음자리가 새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인연 따라서 이 몸뚱이를 버렸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자리가 그때 죽은 것도 아니다 그 말이여.
생사(生死)는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옷 한 벌, 새로 부모로부터 옷 한 벌 받아서 입었다가 그 옷이 낡아지면 그 옷 벗어 버리는 것뿐이다 그 말이여. 그 옷 벗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고, 헌옷을 벗으므로 해서 다시 또 좋은 새 옷을 갈아입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오늘 〇〇〇 영가는 금생에 태어나서 54년간을 이 사바세계에 머물렀습니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리고 사업을 크게 하다가, 사업을 하는 가운데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많은 사람에게 해택을 주고 마음씨가 어질고 착해서, 아무리 마음씨가 어질고 착하고 좋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금생에 인연이 다하면 또 가는 것이여.
동서고금에 모든 성현들도, 모든 위인들도, 모든 영웅달사들도 이승에 왔다가 자기의 할 일을 하고 그리고 또 인연이 다하면 또 다시 몸을 바꾸는 것이여. 인연 따라서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인간에 태어나기도 하고,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도 하고, 인연 따라서 왔다갔다하는 것이여.
계절 따라서 꽃이 피었다가 열매를 맺고 다시 낙엽이 지고, 그다음 새봄이 돌아오면 또 다시 잎이 피고 꽃이 피는 거와 같은 것이여.

따라서 오늘 천도를 맞이한 모든 영가들도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하는 부처님의 말씀을 철저히 믿고, 가시는 길에 모든 금생에 못다 푼 한(恨)을 다 풀어버리고 좋은 곳에 태어나시게 될 것입니다.

내생에 다시 사람 몸을 받더라도 그때는 건강한 몸으로 좋은 조건하에 태어나서 금생에 못다 한 일을 다시 또 잘 하신다면 그것도 좋고,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셔서 아미타불을 위시(爲始)한 여러 불보살과 더불어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진리와 더불어 사시는 것도 또한 좋을 것입니다.
도솔천 내원궁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모시고 같이 법문을 듣고 정진을 하다가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서 널리 중생을 제도하게 되어도 그것도 또한 좋을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부처님의 진리에 입각해서 도를 닦아서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된다면 천 번, 만 번을 몸을 받아서 태어난들 무슨 슬픔이 있고, 무슨 고통이 거기에 있겠습니까.
우주법계에 한 중생도 고통을 받는 중생이 없어질 때까지 영원히 모든 불보살과 더불어 중생교화에 힘을 쓴다면 그것도 또한 얼마나 멋이 있고 보람 있는 일이겠습니까.


법계진시비로귀(法界盡是毘盧歸)인데  수도현우귀여천(誰道賢愚貴與賤)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애경노유개여불(愛敬老幼皆如佛)하면  상상엄식적광전(常常嚴飾寂光殿)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법계진시비로귀(法界盡是毘盧歸)요. 법계, 우주법계—동서사방 시방세계 끝없이 넓고 넓은 이 우주법계가 모두가 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계시는 곳이다 그 말이여. 비로자나불 법신(法身)이다 그 말이여.
수도현우귀여천(誰道賢愚貴與賤)이리요. 누가 ‘누구는 어질고, 누구는 어리석고, 누구는 귀하고, 누구는 천하다’고 할 것이냐 그 말이여.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심지어 저 축생과 산천초목과 일월성진, 길바닥에 구르고 있는 조그마한 조약돌과 해변에 수많은 모래알까지라도 전부가 다 한결같은 비로자나 법신체더라.

그러니 오늘 영가의 유족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은 돌아가신 어른을, 참으로 돌아가신 어른의 죽음을 슬퍼하고 돌아가신 어른의 왕생을 명복(冥福)을 빈다면, 비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살아계신 할머니 할아버지, 살아계신 부모님, 살아계신 모든 늙으신 어른들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고.
나이 많은 어른뿐만이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다 부처님이여. 그 어린아이의 몸뚱이 속에도 부처님이 들어 있기 때문에 다 고대로 부처님이고. 나보다 무식한 사람이나,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나, 나보다 천한 보잘것없는 불쌍한 그런 사람들도 다 부처님 아닌 사람이 없어.

그래서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부처님처럼 존중히 여기고, 돌보아 주고 아껴주고 사랑으로써 거둔다면,(愛敬老幼皆如佛)
그것이 바로 항상 상상엄식적광전(常常嚴飾寂光殿)이여.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계신 법당을 잘 건설한 것이요, 건설한 법당에 단청(丹靑)하는 것이요, 또 그 법당 안에 계신 부처님을 새로 모시는 것이요, 그 부처님께 개금(改金)을 해 드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러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법당 짓고 부처님 모신 것만이 불사(佛事)인 줄 알지마는, 참으로 이러한 불법의 진리를 알고 보면 옳은 일, 지혜와 자비로써 행하는 일은 모두가 다 거룩한 불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영가를 위한, 영가의 명복을 비는 천도재(薦度齋)요, 영가의 명복을 비는 불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불사를 평생 동안 행한다면 우리는 그 공덕(功德)으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삼악도(三惡途)를 면할 것이요, 세세생생에 부처님 나라에 태어날 것이요, 세세생생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불사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처음~17분29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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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인생백년정하허~’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著, 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181 ‘贈別圓上人—원상인(圓上人)을 이별하며 드림’ 게송 참고.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천도 법요식(薦度 法要式) ; 천도재(薦度齋).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영단(靈壇) ; 영가의 위패를 두는 단(壇).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유주무주(有主無主) ; ①주인(영가를 인도해 줄만한 인연있는 사람)이 있거나 없는. ②제주(祭主)가 있거나 없는.
*고혼(孤魂) ; 문상(問喪)할 사람이 없는 외로운 넋.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초혼(招魂) ; 죽은 사람의 혼을 부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무명(無明) : [범]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안질(眼疾)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공중에 무슨 꽃이 피어서 이리저리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 허공에 꼭 꽃이 피어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안 보이게 된다 그 말이여.
그러면 눈병이 생겼을 때나, 눈병이 나은 뒤에나 허공에는 본래 꽃이 피어 있는 것이 아니었어. 다만 눈병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여졌다가 눈병 낫고 보니 허공에 꽃이 어디에 보일 까닭이 있느냐. 그와 같이 생사(生死)도 본래 없는 것이여' ; 공화(空花, 空華)—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88~89. (가로판 p92~94)
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이  如見空花起滅이니라.

중생이 나는 것 없는[無生] 가운데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註解) 性本無生故로  無生涅也요  空本無花故로  無起滅也라  見生死者는  如見空花起也요  見涅槃者는  如見空花滅也니라  然이나  起本無起요 滅本無滅이라  於此二見에  不用窮詰이니  是故로  *思益經云, 諸佛出世가  非爲度衆生이요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라 하시니라.

(주해) 성품에는 본래 남이 없으므로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없고 허공에도 본래 꽃이 없으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생사가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타나도 나타남이 없고, 사라져도 사라짐이 없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하여서는 더 따질 것이 없다。그러므로 『사익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견해를 건지기 위해서다」라고 하시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 에서.
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안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 ‘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환(幻)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No.366)—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문에서.(3분 44초)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한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하고 그렇게 딱! 믿어 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왜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이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병이 든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이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저 더운 날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그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그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 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못 믿을 것도 없다 그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그 자성이 없다’고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시고, 성현들이 ‘없다’고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안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분명히 이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그 성현의 말씀을 안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 ‘그냥 없다’고 딱!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참 그게 그렇게, 당장 그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을 얻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안질(眼疾 눈 안/병 질) ; 눈병(눈病). 눈에 생긴 병.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왕생(往生) ; 죽어서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어서 정토에 태어남.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서 극락에 태어남.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위시하다(爲始--) ; (주로 ‘위시하여’, ‘위시한’의 꼴로 쓰여)여럿 중에서 어떤 대상을 첫자리 또는 대표적인 존재로 삼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게송) ‘법계진시비로귀~’ ; 성철스님 ‘납자십게(衲子十偈)’—‘하심(下心)’ 게송 참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 모든 곳에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 遍一切處, 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명복(冥福 저승 명/복 복) ; ①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 ②(불교)죽은 뒤에 받는 복덕.
*보잘것없다 ; ①가치가 없고 하찮다(그다지 훌륭하지 않다. 대수롭지 않다). ②볼품이 없다.
*단청(丹靑) ; 다섯 가지 색(청, 적, 황, 백, 흑색)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건축물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놓는 것을 말한다. 절에서 단청을 하는 이유는 불전(佛殿)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조성하고, 또한 목조 건물에는 보존을 위한 뜻이 있다.
*개금(改金) ; 불상(佛像)에 새로 금칠을 하는 것.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공덕(功德) ; ①복, 복덕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Posted by 닥공닥정
ㅊ/천도재(영가천도)2021. 5. 29. 12:17

 

 

천도재 법문(No.393)—(게송)來時歡喜去時悲~ | 불자(佛子)는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그 도리를 비록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게송)心隨萬境轉~ | 생사는 헌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 |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면 생사 속에서 자유, 생로병사 속에서 영원한 열반(涅槃)의 즐거움을 터득한다.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진정으로 우리의 몸뚱이에 생로병사,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에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단속을 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여. ‘이뭣고?’

 

 

(17분 16초)

 


[법문] 송담스님(No.393)—송파 거사 영가 3재 및 남운송 영가 49재(89.07.01)

내시환희거시비(來時歡喜去時悲)하고  공재인간주일회(空在人間走一回)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여불래역불거(不如不來亦不去)인댄  야무환희야무비(也無歡喜也無悲)러라
나무~아미타불~

내시환희거시비(來時歡喜去時悲)요. 사람이 이 세상에 올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모두가 다 슬퍼한다 그 말이여.
공재인간주일회(空在人間走一回)라. 공연히 인간에 왔다가 흥망성쇠와 희로애락 생로병사 속에서 공연히 바쁜 것 없이 바삐 한평생을 살다가 가더라 그거거든.

차라리 불여불래역불거(不如不來亦不去)여. 차라리 오지도 말 것이며, 오지 안 했던들 갈 것도 없을 것인데,
야무환희야무비(也無歡喜也無悲)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면은 기뻐할 것도 없고 슬퍼할 것도 없을 것이다.
고인(古人)의 시(詩)를 게송(偈頌)으로 읊었습니다.


오늘 기사년 7월 1일,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운송 영가, 또 52세를 일기로 이승을 하직한 송파 거사 3재 천도재를 맞이하고 또 아울러서 여러 인연 있는 동참재자(同參齋者)들의 그 천도 법요식(薦度 法要式)을 맞이해서.

이 62세를 일기로 오늘 49재 천도재를 맞이한 남운송 거사는 기차 기관사를 하면서, 불명(佛名)을 타고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기차 운전을 하면서 항상 참선(參禪)을 했어. 그 일 속에서 정진을 하고 또 그 보살로 하여금 선방에 가서 공부하도록, 자기가 살림을 돌볼지라도 아내로 하여금 선방에 가서 공부하도록 그렇게 참 정법을 신(信)하고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한 거사(居士)여.
그리고 오늘 3재를 맞이한 송파 거사도 법관으로 있으면서 그렇게 철저히 불법을 믿고 온 가정이 불법을 믿고 실천을 한 가정이여. 법관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내가 그런 권리를 가졌다 하는 상(相)이 없이 비록 몸은 세속에 담아 있고 법에 의해서 모든 일을 처리하되 마치 선방(禪房)에서 수행하는 납자(衲子)처럼 사(私)가 없는 그러한 생활을 한 사람이여.

두 거사(居士) 다 나에게 불명을 타고 화두를 타고, 비록 몸은 세속에 있으면서도 내가 보기에는 꼭 전생에 같이 도 닦던 그러한 도반(道伴)과 같이 느껴지고 또 금생에도 내 동지 간, 내 사제(師弟)처럼 그러한 생각으로 그렇게 내가 마음에 느껴지는 그러한 거사들이었어.
좀 더 오래오래 이 세상에 머무르면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또 수행도 더 철저히 하고, 말년에는 선방에 들어와서 같이 수행을 해야 할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되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좋은 사람들은 또 다른 세계에서 기다리고 있는 데가 있었던지 너무 빨리 이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참 도반을 잃어버린 거와 같은 그러한 허전한 감을 내가 느낍니다마는,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여. 다맛 인연 따라서 오고가고 할지언정 그 본성(本性)자리에 있어서는 생사는 없는 것이여.
그렇게 나는 믿고 그렇게 보기 때문에, 한 생각 돌이켜서 생사 없는 도리에서 관찰한다면 생사가 어디가 있어? 죽음이 어디에 있으며 새로 태어날 것이 또 무엇이여?

우리는, 불자(佛子)는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그 도리를 비록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렇게 믿어야 혀! 확실히 그것을 믿어야 혀!
믿고서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세속에서도 그렇게 믿고 살고, 출가해서도 그렇게 믿고 산다면 생사에 휘둘림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허고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니라
나무~아미타불~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하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니라
나무~아미타불~

마음은 일만 경계를 따라서 굴러가.(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다, 굴르는 곳마다 실로 능히 그윽해.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하면, 그 흐름을 따라서 그 성품을 봐 버리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다, 기뻐할 것도 없고 또한 슬퍼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근심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오늘 49재를 맞이한 남운송 영가에 유족들, 일가친척들 그리고 오늘 3재를 맞이한 송파 영가에 유족과 그 친지, 그리고 오늘 동참천도재(同參薦度齋)에 동참한 여러 영가들의 유족과 친지들, 그리고 만년위패에 모신 법보영가들, 이 자리에 초청한 우주법계에 모든 유주무주(有主無主)에 영가들은 본래 생사 없는 도리, 생사 없는 진리를 설하신 전강 대종사에 최상승 법문을 듣고, 바로 생사 없는 진리에 계합(契合)을 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유족들께서도 ‘영원히 아주 돌아가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없이 슬픔이 일어나겠지만, 돌아가신 것이 아니여. 다맛 인연 따라서 새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헌옷을 벗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새 옷을 갈아입으려면 누구든지 입고 있던 헌옷은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헌옷을 벗었다고 해서 그것을 아까워할 것이야 없고 섭섭해할 것이 없어. 헌옷을 벗는 것은 새 옷을 입기 위해서 헌옷을 벗는 것이라, 그렇다면 무엇이 슬퍼할 것이 또 있느냐 그 말이여.

그리고 진리에 있어서는 생사(生死)가 없는 것이지만, 인연 따라서 헌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이 몸뚱이를 이 세상에 받아 난 사람은 인연 따라서 다시 또 이 몸뚱이를 벗어버리고 새 몸을 또 받아나게 되는 것이여. 이러한 진리라고 할까, 풍류라고 할까?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역시 일단 몸뚱이를 받아 난 이상에는 인연 따라서 또 그 몸을 벗고, 또 새 몸을 받아 나고. 역대조사(歷代祖師)도 역시 그렇고.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인간, 모든 생명체도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

봄이 왔다가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간 뒤에 다시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난 뒤에 다시 봄이 오듯이, 세계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의 몸뚱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어.

우리의 마음에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잠시 머물러 있다가, 다른 생각으로 발전을 했다가, 또 그 생각이 없어지면 또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고.
우리의 마음에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영원히 계속되는 한 우리의 몸뚱이에 생로병사도 또한 영원히 끊일 날이 없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몸뚱이에 생로병사,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에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단속을 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여.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이뭣고?’를 챙기고, ‘이뭣고?’로써 슬픔도 대처해 나가고, 괴로움도 그놈으로써 극복해 나간다면 결정코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생사 속에서 자유를 얻게 되어. 생로병사 속에서 영원한 열반(涅槃)의 즐거움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부탁하노니, 유족들은 돌아가신 이의 슬픔을 발판으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결정코 금생에 깨닫도록 그것을 목적으로 해서 열심히 정진을 하신다면, 영가(靈駕)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설한 불보살(佛菩薩)의 법문(法門)을 몸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될 것입니다. (처음~17분21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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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내시환희거시비(來時歡喜去時悲)~' ; ‘순치황제(順治皇帝) 출가시(出家詩)’ 참고.
*동참재자(同參齋者) ; 한 법회에 함께[同] 참여(參與)하여 헌공(獻供), 예배하며 정업(淨業)을 닦는 사람.
*정업(淨業) ; ①깨끗한 행동. ②선한 행동. ③청정한 선업(善業).
*선업(善業) ; ①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착한 일. ②탐진치(貪瞋癡)를 감소시켜 없애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
*천도 법요식(薦度 法要式) ; 천도재(薦度齋).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사(居士) ; ①고대 인도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던 부호. ②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자 신도. 출가하지 않고 법명(法名)을 받은 재가(在家)의 남자.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사제(師弟) ; ①한 스승의 제자로서 자기보다 나중에 계(戒)를 받은 스님을 일컫는 말. 법제(法弟), 제제자(弟弟子)라고도 한다. ②스승과 제자. 사자(師資)와 같은 말이다.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여. 다맛 인연 따라서 오고가고 할지언정 그 본성(本性)자리에 있어서는 생사는 없는 것이여'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게송)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 『직지(直指)』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 (白雲和尙 抄錄 |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참고.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유주무주(有主無主) ; ①주인(영가를 인도해 줄만한 인연있는 사람)이 있거나 없는. ②제주(祭主)가 있거나 없는.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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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