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에 해당되는 글 89건

  1. 2020.05.15 활구참선(No.388)—(게송)득지재심응재수~ / 잘못하는 수행의 위험(집장범지) / 활구참선법이 가장 수승한 관법 / 대혜종고 선사에 의해 간화선의 완성.
  2. 2020.05.14 화두(No.058)—참선, 깨달음은 일상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다 | 선지식의 지도 | 공안은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요, 나침반 | 물속에서 "물이 어디가 있느냐?"
  3. 2020.04.20 하심(No.685)—선방에 들어와서는 어떠한 문제에 관해서던지 똑똑한 체하지 말고, 항상 하심을 하고, 남을 존경하고 자비심으로 대해야 | 得道者出.
  4. 2020.03.20 활구참선(No.332)—한국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경허선사 | 육조 스님의 '이뭣고?' 화두, 하택신회와 남악회양 | 한국의 활구참선은 조사선.
  5. 2020.03.10 화두(No.345)—(게송)因能生所所生能 ~ / 한마디 화두 속에 팔만대장경이 들어있고,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설법을 하고 계신 것 / (게송)塵勞逈脫事非常~.
  6. 2020.03.04 활구참선(No.345)—(게송)共知光影因燈現 ~ | 부처님 법 가운데에 최고의 법이 활구참선 | 수행인은 썩은 나무둥치처럼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야 한다.
  7. 2019.12.26 활구참선(No.685)—(게송)爲他爲己雖微善~ | 무루 조사선인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해야 영원히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8. 2019.12.21 최상승법(No.428)—의단독로하여 사량분별이 끊어져 깨달음에 나아감, 三無差別 | 義理禪 | 나귀 뒷발질 |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먹은 이야기.
  9. 2019.12.14 혼침, 산란(No.475)—회광반조(廻光返照) | 수질각차(手跌脚蹉) | 신심 분심 의심으로 일구월심 면면밀밀 정진하면 확철대오 한다.
  10. 2019.11.16 활구참선(No.122)—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비슷 | 유리병 속 오리 화두 | 불교는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 | 상(相)없이 | 관심일법총섭제행.

 

 

활구참선(No.388)—(게송)득지재심응재수~ / 잘못하는 수행의 위험(집장범지) / 활구참선법이 가장 수승한 관법 / 대혜종고 선사에 의해 간화선의 완성.

 

*활구참선(活句參禪)=간화선(看話禪)=최상승법(最上乘法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바른 자세, 바른 호흡을 하면서 일체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자꾸 하다보면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여.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다.

'이뭣고?' 한마디 속에 앞에 말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라든지 천태삼관이나, 화엄경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훌륭한 수행법이여.

 

(1/4) 약 19분.

(2/4) 약 19분.

(3/4) 약 18분.

(4/4) 약 13분.

 

[법문] 송담스님(No.388)—1989년 5월 첫째일요법회(89.05.07) (용388)

 

(1/4)----------------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면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한디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이것을 마음에 얻으면 뻑뻑이 손에 응하게 된다.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해.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다. 겨울에는 눈이 휘날리는 날 밤, 달이 휘황찬 밝고, 봄에면 봄바람이 불면 꽃이 휘날려. 그러기를 하늘과 땅이 오래되었다. 무량억겁(無量億劫) 전 이전부터서 무량억겁 미래를 향해서 생겨난 때가 없고 없어진 때가 없을 것이다.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고, 아침 아침마다 닭은 오경에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다. 봄이 오면 곳곳마다 산에 꽃이 아름답게 피더라.

 

 

방금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경청을 했습니다. 활구참선 법문을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시고 40여 년간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나 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여러 가지 방편(方便)을 통해서 중생의 지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온갖 방편법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고 한 말씀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고 금쪽보다도 더 소중한 말씀들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 때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존자(阿難尊者), 그 아난존자는 조달(調達)이의 동생이며 또 부처님의 사촌동생입니다.

출가해 가지고 주욱 부처님을 시봉을 했는데 스승으로서 정말 여법(如法)하게 목숨 바쳐서 시봉을 하면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을 한마디, 한 구절도 놓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조옥 고대로 기억을 해서,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결집(結集)을 할 때에 아난존자가 법상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외워서 오백 성승(聖僧)이 증명함으로써 제1회 결집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 아난존자가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얼마나 비통하던지 몸을 들어서 통곡을 했다.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리는 느낌, 캄캄한 밤에 등불을 놓쳐 버린 데다가 비교를 할까—보통 세속에 자식이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그 사랑하고 존경하고 의지하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호천망극(昊天罔極)이라 이렇게 슬픔을 표현을 하지만.

여러 제자 가운데에서도 유독히 아난존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셨을 때—앉었다 섰다, 이마를 땅에다 부딪쳤다, 고대로 놔뒀다가는 아주 그냥 죽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몹시도 슬퍼했습니다.

 

그때 그 곁에 있던 한 구참(久參) 제자가 아난존자를 달래서 "지금 부처님께서는 곧 아주 열반에 드실 텐데 그렇게 슬퍼하기만 해서 되겠느냐? 곧 아주 열반에 드시기 전에 꼭 여쭈어보아야 할 일에 대해서 여쭈어 봐라"

첫째는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차익(車匿)이를 어떻게 처치를 해야겠습니까?"

 

차익(車匿 Chandaka 찬다카)이란 사람은 부처님 처음에 출가하실 때에 마부(馬夫)였습니다. 말고삐를 잡고 부처님을 모시던 마부여.

상전(上典)이 출가를 하시니까 저도 따라서 출가할 원을 세워서 출가를 했는데, '부처님 최초에 출가하실 때 자기가 말고삐를 잡고 출가했다' 그것을 아주 코에다 걸고서 아주 행패가 심했습니다.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대중의 법규도 지키지 않고, 겨우 부처님만 조금 무서워하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누구도 무서워하지를 않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했어. 대단히 처치 곤란한 존재였었던 것입니다.

 

그래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그 차익(車匿)이를 어떻게 할까요?" 그걸 여쭈어봤어.

"묵빈대처(默擯對處)를 해라"

 

묵빈대처(默擯對處)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하는 거여. 잘하거나 못하거나 무슨 짓을 하거나 일체 상관하지 않는 거여. 대중 전체가 그 사람하고는 첫째, 말을 주고받고 하지 않고, 일체 잘잘못을 얘기하지 않고, 없는 것이나 있는 것이나 상관 말고 내버려둬 버리는 거여.

그것이 묵빈대처(默擯對處)라고 해서 대중생활 속에서는 대단히 엄중한 대치법(對治法)인 것입니다.

 

그다음에 둘째 번에는 무슨 말씀을 여쭈어봤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그것을 여쭈어봐라. 그래서 그것을 여쭈어봤습니다.

"계(戒)를 스승으로 삼아라" 계(戒)—5계, 10계, 비구 250계, 비구니 오백계, 또 보살십중대계, 48경계, 이러한 계를 스승으로 삼아서 그 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라.

 

세 번째 질문은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저희들은 어디에 머무를까요? 저희들의 마음을 어디에다가 머무를까요?" 그것을 여쭈어봤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념주, 4념주(四念住)에 마음을 머물러라"

 

머무르는 것이 주로 어떠한 장소에 대해서—형식적으로는 두 번째 질문은 '어떠한 부처님 제자 가운데 제일 훌륭한 어느 제자에게 의지할까요?' 이렇게 아난존자가 형식상으로는 그렇게 질문한 것 같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어느 특별한 제자를 지칭하시지 않고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어디에 머무를까요?" 어떠한 특수한 도 닦기에 가장 좋은 어떤 장소에 대해서 여쭈어본 것 같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어느 장소를 지적을 하시지 않고 "사념처관(四念處觀), 사념주관(四念住觀)에 머물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러면 사념주(四念住), 사념처(四念處)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 가지 마음에 머물러라.

네 가지 마음이 무엇이냐? '네 가지 곳이라는 생각을 머무르는 곳'이 무엇이냐 하면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이여.

 

(첫 번째) 이 몸뚱이에 관한 것.

그다음에 우리가 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어떠한 경계에 부딪쳤을 때에 최초에 탁! 감수작용, 그 감수(感受)하는 작용.

 

세 번째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잠시 머물렀다가 그 생각이 변해가지고 또 없어지고, 없어지자마자 또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 가지고 잠시 머물렀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변해가지고 또 없어지고, 이 생주이멸(生住異滅), 끊임없는 이 정신의 그 생주이멸, 이 마음.

 

네 번째는 법(法), 일체법.

삼라만상 두두물물—앞에 말한 몸뚱이에 관한 거, 그다음에 감수작용에 관한 거, 우리의 마음에 관한 거, 그 세 가지를 제외한 이 세상에 모든 것,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두두물물이요, 불교 술어로는 일체법(一切法)이라 그러는 거여. 그 일체법에 관한 거.

 

 

그러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몸뚱이는 더럽고 추접한 것이다' 그렇게 관(觀)을 해.

 

'왜 몸뚱이가 부정하냐?'하면은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피와 고름과 오줌과 똥이 가득차 있으니까 그것은 부정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고. 아홉 구멍에서는 나오느니 더러운 것만 꾸역꾸역 기어나온다. 아무리 날이면 날마다 씻어도 계속 기어나와.

그러니 속에 더러운 것이 가득 들었으니 구녁구녁이 나오는 것은 더러운 것밖에 더 나올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다. 더럽고 추접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라 이거거든.

 

두 번째 수(受), 감수작용(感受作用). '감수작용은 괴로운 것이다'

 

눈으로 무엇을 척! 본다든지, 귀로 무슨 소리를 척 듣고 받아들인다든지,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뚱이로 느끼고, 생각으로 어떤 것을 탁! 받아들이는 그것 자체는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결국 생각이 일어나서 받아들임으로 해서 그것이 온갖 고통으로 연결이 되고,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벌어지기 때문에 '감수작용은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것이여.

 

세 번째 '우리의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라는 거여.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났다 하면 그 생각이 고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금방 딴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없어지고, 또 없어지자마자 생각이 일어나면 또 그 생각이 이리저리 변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또 없어지고. 그러니 '우리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거여.

 

마지막에 그 법, '일체법(一切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 산이나 강이나, 돌이나 풀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하늘에 태양이나 별이나 달이나, '일체가 다 자성이 없는 것이다.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거여.

 

그래서 신수심법(身受心法),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요' '수(受)는 괴로운 것이요'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일체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항상 거기에다가 마음을 머무르는 거여.

 

그래 그것이 잘되면 그다음 단계에 가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은—요 네 가지를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싸잡아서, '신수심법은 부정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해 나가는 거여.

 

그래 부처님 생존시에도 많은 제자들이 이 사념주관에 의해서 수행을 하도록 지도를 하셨습니다.(처음~18분57초)

 

 

 

 

(2/4)----------------

 

물론 이것은 삼현위(三賢位)에 있어서 오정심관(五停心觀) 다음으로 닦아가는 수행과정이지만, 그 제자의 근기(根機)와 현재 공부해 나가는 단계에 따라서 백골관(白骨觀)을 관하게 하기도 하고, 수식관(數息觀)을 하게 하기도 하고, 이 사념주관(四念住觀)을 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십신(十信) ·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 · 십지(十地), 55위(位) 점차(漸次)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관해 나가는 관법이 다 단계적으로 차제(次第)가 있지마는 그래도 그 많은 여러 가지 관(觀) 가운데 이 사념주관은 관(觀)의 아주 중요한 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이 사념주관에 머물러라'고 하신 데에 큰 뜻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어느 경전이든지, 이 관법(觀法)에 관한 그 근본을 알고 보면 전부 이 관법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태삼관(天台三觀)이 있고, 또 화엄경에는 법계삼관(法界三觀)이 있고, 원각경에는 원각삼관(圓覺三觀)이 있고, 또 유식삼관(唯識三觀)이 있습니다.

 

그래 옛 조사의 말씀에도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다'

마음을 반조(返照)해서 관(觀)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팔만대장경을 다 종으로 횡으로 육두로 외우고 해석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觀)도 이렇게 여러 가지 관(觀)이 있지만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어떠한 관법을 해 간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 사념주관(四念住觀) '아!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 모든 감수작용(感受作用)은 괴로운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일체 삼라만상 모든 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계속 그것을 열심히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고,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대관절 우리가 살아야 할 목적이 무엇이냐? 이렇게 더러운 거를 가지고 살아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렇게 괴로운 것을 가지고 괴로운데 살려고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렇게 무상하고 허망한데 우리가 살아서 뭐할 것인가?'

이래 가지고 바른 정관(正觀)을 버리고서 점점 삿된 데로 치우쳐 생각이 쏠리기 시작했던 것이여.

 

그래 가지고 집장범지(執杖梵志)라고—목련존자를 패서 죽인 그 집장범지, 그 외도(外道)가 있었는데—이 사념주관을 닦던 부처님 제자들이 그 범지 외도를 찾아가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바리때와 모다 그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가서 그 범지 외도한테다 바치고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 빌었습니다.

 

"제발 바라문이시여. 위대한 바라문이시여. 이거 내가 가지고 있는 총재산을 다 드릴 테니까 자비로써 나를 때려 죽여주시오" 막 사정을 해 가지고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집장외도가—집장외도는 작대기, 주장자 가지고 다닌다 해서 집장외도인데—그 몽둥이로써 여지없이 쳐 죽이고 쳐 죽이고 했습니다.

 

아! 그런데 한 해 여름에 60명 대중이 없어졌어.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 이렇게 어찌 대중이 이렇게 많이 비었느냐?” 물어보시니까 “집장외도한테 가서 모다 맞아 죽었습니다"

한 해 여름에 60명이 이 사념주관(四念住觀)을 하다가 집장범지한테 가서 자진해서 맞아죽었다 이거거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잠시 그러한 아직 사념주관에 대한 바른 법을 닦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수식관(數息觀)을 가르키셨던 것이여.

 

그러면 이 사념주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여.

하는 사람이 잘못하면—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사념주(四念住)에 머물러라. 사념주관에 머물러라고 하실 정도로 그렇게 우리의 불자들의 의지처가 될만한 이런 성스러운 수행 방법이지만, 잘못하면 얼토당토않은 그런 사견(邪見)에 얽매여서 사견에 빠져서 정도(正道)를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도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여러 가지 관법이 많은 도인들, 조사(祖師)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관법이 자꾸 개발이 되고 발전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천태삼관(天台三觀)이라든지, 화엄 법계삼관(法界三觀)이든지, 남산 율종에 삼관이든지, 원각경에 원각삼관(圓覺三觀)이나, 유식삼관(唯識三觀), 다 그 나름대로 훌륭한 관법(觀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법을 전부 다 합해서, 그것을 합해서 한 가마솥에다 넣어 가지고 푹 고아 가지고 탁! 그 골수를 추출해 놓은 것, 추출해 가지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발전시킨 관법(觀法)이 무엇이냐 하면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면 어떤 점에서 앞에 든 여러 가지 관법(觀法)보다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이 그렇게 수승하냐 하면은 앞에 말한 사념주관이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이 전부 이로(理路) 말길이 있고, 이치길이 있고, 문해사상(聞解思想)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어.

 

지금 내가 여기서 그러한 여러 가지 경에 나타난 관법에 대해서 낱낱이 설명할 시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 좋은 관법이고, 소중한 관법이여.

어떠한 근기에 따라서는 그러한 관법을 올바르게 지도하는 스승이 계시다면, 그 관법을 통해서 견성성불한 대도사가 계시다면 그 관법을 해서 나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법을 통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은 분의 지도가 없이 자기 나름대로 경을 보고 그런 관법을 한 번 해 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한 해 여름에 60명이라는 사람이 그런 참 엄청난 본의 아닌 길에 빠졌거든, 하물며 오늘날 우리가 함부로 관법 한답시고 이런 관법도 해 보고, 저런 관법 해 보고,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왜 오늘 일요법회에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냐 하면은 근자에 와서 많은 사람이 산승한테 와서 그 관법에 대한 질문을 해 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 남방에 세일론이라든지, 버마라든지, 태국이라든지 모다 그런 데 남방에서는 아직도 그러한 관법을 통해서 많은 스님네들이 수행을 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유학을 온 스님네에 의해서 이 관법이 사람들에게 그 선전이 된 모양입니다.

그 관법 자체가 나쁘다고 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관법은 꼭 할려면 반드시 바른 스승에 의지해서 해야 할 것이고.

 

이미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에 입문을 해 가지고 활구참선을 하신 이 법보재자는 그러한 관법보단, 그러한 관법의 골수가 다 이 활구참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발전시킨—무어로(無語路)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길이 끊어지고, 듣고 알고 생각하는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끊어진 이 경절문(徑截門) 활구참선,

일단 이 문중(門中)에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가 가지고 다른 관법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참 너무너무 가련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말 있음으로 시작해 가지고 차츰차츰 말 없는 데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말과 이치를 떠난 방법으로 해서 말 없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득이해서 알라야 알 수도 없고, 도저히 무슨 뜻인 줄도 알 수 없는 이러한 맛없는 한마디 말을 주어서 참구(參究)하되, 말길 이치길 어떠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하고 거두절미하고 '이뭣고~?' 이렇게 해라 이거거든.

 

'이뭣고?' 한마디에 거기에서 말길이 끊어져 버리고, 이치길이 끊어져 버리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끊어져 버리고, 일체 번뇌와 망상,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이 거기서 다 끊어져 버리는 거여. '부처다, 중생이다, 마음이다'하는 것도 다 거기서 다 끊어져 버려.

 

'이뭣고?'

그래서 이것을 경절문(徑截門)이라, 그리고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 이 법은 숙세(宿世)에 선근(善根), 이 정법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있는 인연도 가질 수가 없고, 이것을 듣고 할려고 하는 마음 내기는 더욱 어렵고, 시작해 가지고 끝까지 중단하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가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참선, 이 활구참선은 육조 스님, 육조 스님께서 '이뭣고?'

'한 물건이 있는데 밝기는 해보다도 더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더 검고,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이냐?'

 

벌써 그게 시심마(是甚麽) 화두거든.

화두라는 이름은 붙이지 안했지만 제자들에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벌써 화두를 주셨어.

 

그 제자이신 신수(신회)대사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육조 스님께서 "뭐라고 이름 붙일라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가 없다고 했는데 왜 불성이니, 본원이니 그런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일가를 이룬다 해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되겠구나" 이론으로 교리를 분석하고 따지는 그런 불교학자밖에는 못되겠구나.

 

나중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와서 절을 하니까 "십마물(什麽物)이 이마래(伊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 말에 남악회양 선사는 콱!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랐어. 그길로 물러나와 가지고 8년 동안을 '무슨 물건인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육조 스님을 찾아가 가지고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염(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할 것은 없지는 않지마는 오염(汚染)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역여시(汝亦如是)하고 아역여시(我亦如是)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쾌히 인가(印可)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에 와서 활구참선이 언하대오, 확철대오 구체화된 한 장면인 것이여.(18분58초~37분40초)

 

 

 

 

(3/4)----------------

 

그뒤로 육조 스님 밑에 5대 법손(法孫)—육조 스님 밑에가 남악회양 선사, 그 밑에가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 그 밑에가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 그 밑에가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고, 그 황벽희운 선사 밑에 임제의현(臨濟義玄) 스님인데.

 

육조 스님은 서기 638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713년에 열반하셨고. 그러니까 그때가 8세기 경이고.

임제 스님은 태어나신 연조는 잘 모르고 열반하신 해는 867년이니까 9세기 중엽에 열반하셨는데, 그 임제의현 선사 때 와서 이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을 해 가도록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제창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당송(唐宋)시대에 이 활구참선이 대단히 중국 천지에 널리 선양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경산종고(徑山宗杲) 선사—임제 스님의 11세 법손이신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는 서기 1087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1163년에 열반하셨는데, 12세기 경에 이 경산 대혜종고 선사에 의해서 활구참선이 완성을 보았습니다. 활구참선의 완성을 보았어.

 

간화선(看話禪)!

그 당시 조동종(曹洞宗)에서는 묵조선(默照禪), 묵조선을 아주 적극 선양을 하고, 임제종(臨濟宗)에서는 이 간화선을 제창을 해서 조동종에 묵조선과 임제종에 이 간화선이 그 종사끼리 대단히 서로 공박을 하고, 힐난한 비평을 하고 그랬었습니다마는.

 

이 간화선은 조동종에서 비방한 거와 같은 '사량분별로 공안을 따져 가지고 그것을 빨리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니 그것은 삿된 참선이다'하고 조동종에서는 이 간화선을 비방을 하고.

임제종에서는 조동종의 묵조선을 흑산하귀굴리(黑山下鬼窟裏), 흑산 밑에 귀신 굴속에서 작활계(作活計)라. 거기서 살림살이를 하는. 캄캄한 데 앉아 가지고 이 묵조사선(默照邪禪)을 하고 있다고 힐난하게 비난을 했습니다마는.

 

조동종에서는 이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은 아니지만 거기에도 역시 육조 스님의 제자이신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 밑으로 많은 도인들이 배출이 되었습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도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이 있습니다마는,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참선하는 법은 우리 말세 우리 중생들에게 상근기(上根機)는 말할 것도 없고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라도 올바르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어떻게 아무 생각도 없이,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해라'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라' 묵조선에 조동종에서는 그렇게 가르키는데,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라' 어떻게 생각한 것이 그런 거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초학자가 어떻게 거기다가 발을 내디뎌야 할 것인지 참 어렵거든.

 

그런데 이 간화선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보라 하면 아! 국민학교 학생도 그렇게 할 수가 있고, 중학교 학생도 할 수가 있고, 대학생도 할 수가 있고, 일반 사회에 남녀노소가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바른 자세로 바른 호흡을 하면서 일체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해라. 그렇게만 자꾸 하다보면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여.

이러한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에도 있고, 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속에 앞에 말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라든지 천태삼관이나, 화엄경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훌륭한 수행법이여.

 

해 봐야 알아.

 

자꾸 하다보면 그 속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이 알라야 알 수 없고, 볼라야 볼 수 없는 이 알 수 없는 '이뭣고?' 이 한마디 속에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일체 팔만대장경에 있는 모든 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이거거든. 일체 관법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좋기로서니 팔만대장경을 죽을 때까지 다 읽어서 거기에 그 속에 쓰여 있는 요점을 추려서 그것을 실천할려고 해 보십시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거여.

불보살 화현(化現)이신 육조 스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들, 다 그러한 조사들에 의해서 개발된 이 활구참선을 우리는 무조건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철저하게 단속을 해 갈뿐인 것입니다.

 

 

관법, 관법하는데 그 관(觀)이라는 게 대관절 무엇이냐?

관(觀)이라는 게 우리 생각 일어나는 그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거든. 관조(觀照)하는 것이거든.

 

중생 생각, 중생이 가만히 앉아서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났다 하면은 그것은 망념(妄念)이여. 그 망념 일어나는 그 뿌리는 진리요, 진여(眞如)인 그 본체에서 나오지만 이미 거기서 한 생각 폭 일어났다 하면 그것은 망념인 거여.

천하 없이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은 망념이여. 부처님 경전 속에 쓰여 있는 생각이 일어났다 해도 중생의 생각에서 나오는 생각은 그것이 망념인 거여.

 

그 망념을 탁! 관조해 가지고 그 망념이 일어난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관(觀)'이라 이거거든.

'관심(觀心)'이라고도 하고 '관법(觀法)'이라고도 하고 그렇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에 즉(卽)해서 마음을 관(觀)한다' 그러는데 마음이 무엇인 줄을 알아야지, 우리가.

 

'마음, 마음' 그렇게 누구나 말하지만,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망념은 우리가 알 수가 있지만, 그 망념이 일어난 그 마음, 망념의 그 본체는 우리 생각으로 알 수가 없고,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고, 우리 손으로 붙잡을 수가 없어.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 그것을 바로 보는 방법이 '이뭣고?'거든.

 

사량분별한 망념 자꾸 일어나 가지고 우리 모든 생사(生死)도 거기서 일어나고, 모든 죄도 거기서 일어나고 그런데,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그놈을 알려고 한다고 보여질 것이냐 그말이여.

 

마치 물은 때로는 얼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그 기후와 그 상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물 형태는 변하지마는 그 변하지 않는 그 본체는, 본성은 무엇이냐 하면은 습성(濕性)이라 하는 거여.

그것 습성(濕性), 얼음으로 있을 때도 습성은 변함이 없고, 기체로 김 기체로 있을 때도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액체인 물로 있을 때에도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눈으로 되었거나 우박으로 되었거나 폭포수로 되었거나 어떠한 형태로 있어도 그 물의 습성(濕性)은 변함이 없는 거여.

 

그런데 그 습성(濕性)은 우리가 볼 수가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아무리 헤집고 봐도 습성은 보이지 아니하고, 얼음을 아무리 가루로 부숴도 그 물 가지고 있는 그 본성은 볼 수가 없는 거여.

어떠한 형태로 있어도 그 본체는 거기에 있으며 변함이 없지마는 중생의 소견으로는 볼 수가 없는 거여.

 

그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이뭣고?'

'이뭣고?'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없는 의심, 의단(疑團)뿐이어야 해. 그래야 그것이 옳게 되어 가는 거여.

 

처음에는 자꾸 하면 잊어버리고 '이뭣고?'해도 망상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망상이 일어나도 따라가지 아니하면 그만인 거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도 '따라 주지를 말어' 무슨 망상이 일어나면 그놈을 따라가지 말어. 따라가다 보면은 안 되는 거여.

따라가지 말고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냥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좋은 생각이 나도 '이뭣고?'

슬픈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뿐인 거여.

 

그래서 '이뭣고?' 한마디는 바로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공덕이 그 속에 다 들어있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이 화두 한 번 들은 속에 다 들어 있다.

 

 

활구참선법, 활구참선법은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이 용궁에 다 보관이 되어 있는데 그 용궁에도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든지,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라든지,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이러한 것은 없다. 고조사(古祖師)는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은 이 활구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것이다.

 

염화미소(拈花微笑)와 곽시쌍부(槨示雙趺)와 다자탑전에 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이게 다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말합니다마는 교(敎) 밖에 따로 전한,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마음자리를 가리켜서 견성성불케 하는 최상승법이다 이거거든.

 

이 최상승법의 법문을 듣고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경을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나, 경을 때에 따라서 금강경을 읽을 수도 있고 고왕경을 읽을 수도 있고, 반야심경을 읽을 수도 있고,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읽을 수도 있어. 또 때로는 '아미타불'을 부를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있어.

 

그러나 활구참선 속에는 그러한 여러 가지 방편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그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그 깊은 신심은 흔들려서는 아니돼.

 

뭔 말 들으면 그리 확! 쏠리고, 저가서 무슨 다른 말을 들으면 그리 확 쏠리고.

'염불 아미타불을 불러야 극락세계에 가지, 말세 중생은 죄가 많고 근기가 하열해서 참선 화두 해봤자 되지도 않어. 관법을 해야 한다. 염불을 해야 한다. 법화경을 읽어야 한다' 그런 소리를 듣고 중심이 흔들려서 이것 조금 해보다 그것도 또 잘 안되면 저기 가서 저것 좀 해보고.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거거든.

 

활구참선이 말세 중생에 맞지 않고 하근기(下根機)에 맞지 아니하면 무엇 때문에 역대조사가 그렇게 열렬하게 강경하게 이 법을 강조를 하셨겠느냐 그말이여.

'열심히 믿고 철저한 신심(信心)과 큰 분심(憤心)과 큰 의심(疑心)을 가지고 해 나가면 그렇게 알뜰히 3년을 해서 아니되면 내가 여러 대중을 위해서 대신 지옥에 가겠다'

오조(五祖) 스님도 대중한테 그런 서약을 하셨고, 몽산 화상도 대중 앞에 그러한 맹세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조사들이 다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이뭣고~?'(37분41초~55분39초)

 

 

 

 

(4/4)----------------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하고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우리 낱낱이 모든 사람 앞에는 얼굴 앞에는 밝은 달이 희고,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다. 사람사람이 다리 아래는 청풍이 불더라. 지금 봄이 되어서 밤이 되면 환히 달이 밝고, 우리 다리 밑에는 맑은 바람이 분다 이거거든.

 

누구라고 해서 특별히 그 사람 앞에만 달빛이 비치고, 특별한 사람 앞에만 청풍이 불어주는 것이 아니여.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선악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달빛은 한결같이 비치고, 맑은 바람은 한결같이 불어오더라 이거거든.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거울, 거울을 타파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으면. 그 거울은 무슨 거울이냐?

흰 것이 오면 흰 것이 나타나고,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이 나타나고, 사람이 오면 사람이 나타나고, 짐승이 오면 짐승이 나타나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 거울 앞에 오면은 다 조금도 숨김없이 있는 고대로 그 거울 앞에 나타난다 그말이여.

 

그 거울 앞에 나타나는 것에 따라서 우리 중생은 '희다, 검다, 누르다' 온갖 분별 망상을 일으키고, 분별 망상을 일으켜 가지고 거기에서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의 마음이 동요되어 가지고 삼세육추(三細六麤)의 번뇌 망상이 벌어져 가지고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윤회를 하게 되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비추는 그 거울을 갖다가 때려 부셔 버려.

그래 가지고 거울 속에 나타나는 그림자도 없어져 버리고, 그 거울 자체도 자취가 없도록 다 없애버리면, 일성제조(一聲啼鳥)가 상화지(上花枝)더라.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올라가더라.

 

우리가 깨달랐거나 안 깨달랐거나 생겨난 때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나 고대로 있는 거여.

우리 자체 내에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도 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 속에도 다 있어. 티끌, 조그만한 먼지 털 속에도 다 들어 있어.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그 속에도 한량없는 중생이 티끌 속에도 한량없는 무수 중생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티끌 속에도 다 계셔서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고 계신 거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태양계, 우주법계 이 세계만이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세계가 아니고, 그 세계 속에 있는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또 들어 있고, 삼세제불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그 속에도 끊임없는 육도윤회의 세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가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이뭣고?' 이 얼마나 간단하고 간결하고 누구나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 방법이냐 그말이여.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무조건 하고 '이뭣고?'여.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일 하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어떤 분이 산승(山僧)에게 "『선가귀감』이나 그밖에 어떤 그 어록(語錄)이나 경서(經書)를 의지해서 차례차례 설교를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한 일정한 그 경책이나 어록이나 그런 거를 의지하지 않고 올라와서 내키는 대로 말을 하니까 밤낮 한 얘기 도로 하고, 도로 하고 해서 그러니 그거 보단 어느 한 경책에 의지해서 주욱 하면 중복되지 않고 좋지 않겠느냐?" 그러한 충고를 간접적으로 해 왔습니다.

 

대단히 고맙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산승이 이 법상에 올라와서 설해야 할 어떠한 법이 있어서 설한 것이 아니여.

법(法)은 우리 법보선원에 조실(祖室) 스님이신 전강(田岡) 대선사의 법문 한 편 들으면 그 이상 더 법문 들을 것이 없고, 그 이상 더 설할 법이 없습니다.

 

산승은 "원장(院長)으로서 조실 스님 법문을 여러분과 같이 듣고 마음 깊이 감동된 바를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서 여러분과 같이 더 큰 신심(信心)을 내고, 더 큰 분심(憤心)을 내고, 더 큰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올바른 방법으로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까지 이르자" 그러한 말씀을 해 드릴 뿐인 것입니다.

그 말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나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간혹 조사어록이나 경전 속에 있는 어떤 설화나 그런 것을 가끔 인용하기는 하지만, 듣고 보면 내나 '이뭣고? 열심히 하라' 그 말이거든.

 

'에이, 그 백번 가야 그 소리할 바에는 가지 말자' 그래 갖고 오지 않고 여행 가고, 골프 치러 가고, 수영장에 가고, 등산에 가고, 철철이 기후 따라서 해수욕 가고, 그런 분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산승은 다 알고 있습니다.

'가봤자 밤낮 한 생각 단속하고 밤낮 이뭣고? 하라는 거, 그 소리는 용화사까지 이 교통지옥 속에 어렵게 갈 것이 없이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그냥 있으면 되는 거, 뭐하러 또 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신다면 또 안 오셔도 또한 무방할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추우나 더우나 그 어려운 교통 혼잡 속에서 이른 아침부터서 쉬지 않고 이렇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시고, 이 서울 인천뿐만이 아니라 저 지방에서도 이렇게 오시고.

그 괴로운 것을 무릅쓰고 오시는 그 신심, 그 신심 속에 그분은 반드시 대도(大道)를 성취할 아주 그 씨를 심었다고 할까, 아주 그 표(票)를 이미 끊어 놓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신심을 가진 분이 '이뭣고?'를 열심히 아니할 수가 없고, 그래도 와서 조실 스님 법문 듣고 또 산승의 말도 들어보면 그래도 한마디쯤은 마음에 와서 닿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리해서 또 한 달 동안을 그 힘으로 또 열심히 공부를 해 나가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과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같이 또 법문을 듣고 또 산승의 경책해 드리는 말씀을 듣고, 같이 부처님께 삼정례(三頂禮)를 올리고 또 발원을 하고, 이리함으로써 자칫하면 풀어지고 해태하려다가도 그놈을 채찍을 가하는 좋은 계기를 삼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다달이 법회를 여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분인들 어찌 산이나 바다나 그밖에 재미있게 놀고, 푹 일요일을 쉬고 싶은 생각이 왜 없으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오시는 그 뜻은 부처님께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고행하신 뜻, 삼세제불과 팔만사천의 모든 보살과 역대조사들이 인생에 오욕락(五慾樂)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출가하신 거룩한 뜻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수일 전에 입하(入夏)가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날씨가 차츰 더워지겠습니다.

몸조심하시면서 그 더위와 이 나의 신심과 정면으로 맞부딪쳐 나가면서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55분47초~69분12초)(끝)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20. 5. 14. 18:44

화두(No.058)—참선, 깨달음은 일상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다 | 선지식의 지도 없이는 깨닫지 못한다 | 공안은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요, 나침반 | 물속에서 "물이 어디가 있느냐?"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21분 24초)

 

[법문]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용058)

 

오늘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는 동지에 대한 말씀과 또 참선, 참선법에 대한 말씀 그리고 불공(佛供)을 드리는 법에 관한 말씀, 그리고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印可) 받을 때에 법담(法談)하신 내용, 그리고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의 고양이 문답 법문,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정말 실참실오(實參實悟), 실다웁게 닦아서 실다웁게 깨달라야만 생사(生死)를 당적(當敵)하는 것이지 간혜(乾慧), 영리해서 이리저리 발라 맞추고 따져서 말 잘하고 그러한 재주 기운 가지고 생사는 면(免)할 수 없다고 하는 말씀으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참선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은 탁자(卓子) 위에 모셔 놓은 부처님, 또는 삼천년 전에 정반왕에 탄생하셨다가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신 싯다르타(siddhartha), 석가모니 그 부처님만이 부처님인 줄 알고.

바로 지금 산승(山僧)은 말을 하고 있고, 여러분은 지금 산승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듣고 있는 그놈, 그놈을 여의고는 '참 부처님'은 안 계신 것입니다. 그놈을 항시 놓치지 말고 그놈에서 자기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놈이 있길래 눈을 통해서 볼 수 있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입을 통해서 말하고 음식을 먹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문을 열매 뜰에는 나무가 섰다. 그 나무를 봄으로 해서 그 나무를 통해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그것이 견성(見性)이라' 하셨습니다.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하 없는 모든 일은 다 할 수가 있어도 한 가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나의 몸으로부터서 부처님을 밖으로 내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만 번 뛰었다 엎쳤다 온갖 짓을 다하고 한다 하더라도 나로부터서 나의 부처님을 밖으로 내몰 수가 없어요.

 

오히려 그 부처님을 안 볼려고 하고 내몰려고 할수록 나의 부처님은 더욱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나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너무 분명하고 가깝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가 아닌 줄 알고 그놈을 내놓고 찾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나의 자성(自性)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뜰 앞에 있는 나무, 누가 못 보는 것입니까?

누구라도 장님이 아닌 도막에는 문을 열면은 뜰 앞에 있는, 뜰에 있는 나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무만 보고, 나무(나)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너무 평범한 것은 우리는 그것이 위대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국왕의 은혜, 국가 민족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다 우리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갚을려고 해도 갚기가 어렵지마는 정말 고마운 것은 공기(空氣)라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무의식중(無意識中)에도 언제라도 우리는 제절로 이 공기가 우리 코를 통해서 드나들고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탄광, 장성에서 탄광에 화재가 나가지고 이번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마는, 그러한 일을 당해 봐야 공기가 맑은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없을 때에는 공기가 얼마나 우리에게 고마움을 주고 있는가를 아무도 느끼지를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 것—언제나 나의 부처, 나의 성품, 나의 마음자리는 이 몸으로부터 조금도 떠나 있지를 않습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입으로 말하고 음식을 먹을 때, 발로 걸어 다닐 때, 울고 웃고 성낼 때 바로 그곳에 '나'가 있건만, 어째서 내가 나를 보지를 못해?

이것은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설명을 들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만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이 무엇이냐?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그동안에 책을 보거나 법문을 듣거나 해서 알고 있는 불교의 모든 지식, 상식, 교리 그러한 것을 고대로 놔버리고 다못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 「이 무엇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각기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그 화두가 같은 분도 있고 다른 분도 계시겠지마는, 다른 분이야 무슨 화두를 받았건 말았건 자기가 받은 그 화두 그것을 이론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저 바보처럼,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는 사람은 길이 빠른 것이고,

영리하고 똑똑해서 자꾸 이리저리 그것을 사량복탁(思量卜度), 중생심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파고들고 비교하고 이러는 동안에 점점 시간만 굴러가고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나쁜 버릇만 자꾸 생겨 가지고 길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동이 소를 끌어다가 맑은 시냇물에다가 끌고 가서 대주면 그저 소는 꿀꺽꿀꺽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듯이 선지식이 '이렇게 하라'하면은 그렇게만 바보처럼 고지식하게 계속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한결같이 그렇게 들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바보처럼 그렇게 하는 사람은 빨리 그리고 크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고, 그 말을 믿지 못해서 그 말이 아무래도 곧이가 들리지 않아서 이 책도 떠들어 보고 저 책도 떠들어 보고, 이리도 따져 보고 저리도 따져 보고 갈팡질팡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뭐 좋은 말이라도 한마디 더 듣고 싶어서 갈팡질팡하면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10년 20년 세월이 속절없이 지내가고 남는 것은 지해(知解), 사량심(思量心)만 더해 가지고 생사를 면하기는 썩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세지총명(世智總眀)은 득도(得道)하기가 어렵다'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말한 영리하고 지능지수가 높고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은 이 정법,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하기가 썩 어렵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선지식들도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서 불보살(佛菩薩)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해도 깨닫자 생각지도 아니하고, 나찰귀신이 와서 죽인다고 해도 두려워할 줄도 모른, 콱! 맥힌 아주 쑥맥 바보가 된다면은 내가 이 자리에서 당장 너에게 생사해탈(生死解脫) 했다고 인가를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도 계시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은 이론을 통해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내고 슬퍼하고 걸어 다니고 하는 이놈. 분명히 눈으로 볼 줄도 알고 귀로 들을 줄도 알건마는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찾아보면 간 곳이 없어. 「이놈이 대관절 무엇인고?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걸어갈 때에도 「이뭣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뭣고?」

기쁜 일을 당했을 때도 「이뭣고?」

산을 보아도 「이뭣고?」

기차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다못 그렇게 일념 일념을 단속해 나가. 1초 1초를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면 결국은 「이뭣고?」를 할려고 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시 눈앞에 나타나게.

이렇게 해서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못 가서 반드시 확철대오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 "깨닫기 전에도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하에 화두를 타서 정진을 해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서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지도를 또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스승 없이 독학할 수도 있고 자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참선은 여러 가지 경전을 사다 놓고, 조사어록을 사다 놓고, 참선에 관한 일본 서적 · 한국 서적 · 중국 서적을 사다 놓고 혼자 이 책 저 책을 읽어 가면서 혼자 자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 명 만 명 속에도 제대로 공부가 되질 못하는 것이고, 만 명 가운데 한 사람도 깨달은 사람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는 몰라도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 없이 깨달은 사람은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위음왕불은 부처님 가운데에 최초의 부처님이십니다.

땅속에서 땅을 파 가지고 금을 찾는다든지, 바닷속을 뒤져 가지고 보석을 찾는다든지 하는 것은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혹 눈에 띄기도 하겠지마는,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은 것은 스승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언제나 나와 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찾으면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것은 화두를 항시 의심을 해서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이지마는, 정말 바로 말하자면 찾음으로 해서 자기를 잃게 되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되 선지식의 지도에 의해서 찾아야만, 찾음으로써 잃어버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떠억 앉아서 물을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물속에 풍덩 주저앉아 가지고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는 거와 같은 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 공안은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요, 천칠백 화두라 합니다마는 그 공안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열쇠요, 나침반입니다.

그러나 무슨 소견이 났을 때에는 그 공안은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냐?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냐?'를 시험해 보기 위한 좋은 시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랐다'할 때에 그 사람에게 공안을 하나 턱 물어보면은 그 공안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떠한 표정을 짓느냐?

입 벌리기 전에 벌써 '저 사람은 바로 본 사람이다. 바로 못 본 사람이다.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하는 것을 입 벌리기 전에 선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마는 짐짓 입을 벌리게 해 보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 봤자, 입 벌리기 전에 알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물속에—묻는 사람도 물속에 떠억 앉았고, 깨달랐다고 온 사람도 물속에 같이 들어앉아서 "어떤 것이 물이냐? 물이 어디가 있느냐?"하고 물어본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앉은 줄을 모르고 물을 찾기 위해서 위로 아래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벌써 그 사람 '아! 이 사람이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일체 공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벌써 찾으면 저 죽는 것이고, 찾으면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깨닫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물쇠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하는 것을 깊이 인식을 하시고,

화두를 공부하다가 조금 잘 들리지 아니하고, 의심이 잘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화두가 나빠서 그런가 보다'해 가지고 이 화두, 저 화두 이렇게 화두를 바꿀려고 쌌거나 그래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곧 그렇게 하면은 곧 잘될 것 같지마는 얼마 해 가다 보면은 아무리 해도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마음의 눈 박을 곳을 얻지를 못한 채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몸이 뒤틀리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영 이것이 공부가 되는 것인지 안되는 것인지 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다못 무조건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 해 나감으로 해서 언젠가는 차츰차츰 번뇌와 망상은 이 알 수 없는 의심 앞에 굴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 줄어지면서 화두 들어지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좋아하지도 말고, 또 화두가 잘 안 들린다고 해서 짜증을 내거나 번뇌심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심한 분은 '아휴, 내가 참선은 내가 인연이 없나 보다' '나는 나이가 먹고, 여자고, 말세중생이라 참선은 안되나 보다' 이래 해 가지고 다시 염불을 한다든지.

'내가 업장(業障)이 많으니까 기도를 해 갖고 업장을 소멸한 다음에 해야겠다' 이래 가지고 선방에서 몇 철씩 하다가도 기도하러 돌아다니고 이런 분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공부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 보다는 영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잘 안될 때, 그때가 한 계단 공부가 올라서려는 그러한 고비에서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잘 고비를 넘겨야만,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잘 넘겨야만 공부가 한층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8분52초~30분1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 ; 전강 조실 스님이 수행하시던 1920년대 당시 유명한 혜월 · 혜봉 · 한암 · 용성 · 보월 · 만공 선사를 말씀하신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법담(法談 부처의 가르침 법/말씀·말할 담) ; 불교의 도리에 관하여 나누는 이야기. 또는 그러한 설법(說法). 선사(禪師)들이 본분(本分 : 근본 깨달음 本覺)에 대하여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 법화(法話)와 같은 말.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의 고양이 문답 법문' ; 남전참묘(南泉斬猫) 공안.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207칙. 「참묘(斬猫)」 『선문염송 · 염송설화 7』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

(古則) 南泉一日因東西堂 爭猫兒 師遂提起云 大衆 道得則救取 道不得卽斬却也 衆無對 師斬爲兩段 復擧前話 問趙州 州便脫草鞋 於頭上戴出 師云子若在 恰救得猫兒

 

남전(南泉)이 어느 날,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에서 고양이 때문에 싸우자, 고양이를 번쩍 쳐들고는 말하였다. "대중들이여, 말하면 살릴 것이요, 말하지 못하면 베리라"

그러자 대중에서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에 선사가 두 동강 내었다.

 

나중에 이 일을 들어 조주(趙州)에게 물으니, 조주가 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니,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실참실오(實參實悟)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깨달음.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실참(實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무잡(純一無雜)할 수가 없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참고]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서답(書答)」 ‘답노상서(答盧尙書 노상서에게 답함)’에서.

所以古德云 路途之樂 終未到家 見解入微 不名見道 參須實參 悟須實悟 閰羅大王 不怕多語 若要實參實悟 須是從前坐禪處得底 經敎上得底 古人語錄上得底 宗師口頭下得底 有滋味寶悟處 一時掃向他方世界 好字細看

 

그러므로 옛 스님은 ‘길의 즐거움은 종내 집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보고 알아 미세한 데 들어가는 것은 도를 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참구는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염라대왕은 많은 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알차게 참구하여 진실로 깨달고자 하면, 종전에 좌선(坐禪)해서 얻은 것과 경전에서 얻은 것과 고인의 어록에서 얻은 것과 종사의 입을 통해 얻은 것 등에서 자미(滋味)있고 소중히 여긴 깨달았던 경계를, 한꺼번에 다른 세계에 쓸어 버리고 자세하게 살펴야 좋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참고]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상권 ‘흥성사입원소설(興聖寺入院小說)’에서.

若也眞實參學者 參須實參 悟須實悟 始得 且作麽生是實參實悟耶 於二六時中 四威儀內 以生死大事爲念 離心意識 參出凡聖路 學以無心無爲 綿密養之 常常無念 常常不昧 了無依倚 到冥然地 自然合道 不見古人云 無心方見本來人

 

만약 진실한 참학자(參學者)라면 참구는 반드시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한 참구이며 진실한 깨달음인가?

하루 열두 시간과 사위의(四威儀) 가운데서 생사의 큰 일을 생각하되, 심의식(心意識)을 떠나 참구하여 범성(凡聖)의 길을 벗어나고 무심(無心)과 무위(無爲)를 배우고 그것을 면밀히 길러 언제나 무념(無念)하고 항상 어둡지 않아, 마침내 기댈 곳이 다 사라지고 명연(冥然)한 자리에 이르면 자연히 도에 합할 것이다. 고인이 ‘무심(無心)이어야 비로소 본래인(本來人)을 본다’라는 말을 모르는가?

 

*당적(當敵 막다·지킴 당/원수·적·상대 적) ; 대적(對敵)해 능히 감당(堪當)함.

*간혜(乾慧) : 비록 깨쳐서 지혜가 났더라도, 정(定)의 힘이 충실하지 못하면 그것은 마른 지혜라고 한다. 마른 지혜는 죽고 나는 이치를 알더라도, 나고 죽는 데 마음대로 자유자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乾 = 하늘 건, 마를 간)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평상화(平常話) ; ①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②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이야기[話]. 일상생활 이야기. 일상생활.

[참고 ❶]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참선(參禪)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10분2초~11분29초)

 

[참고 ❷]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군금욕심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처음~5분6초)

 

*소지 ; '소제(掃除, 청소淸掃)'의 사투리.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일찰나(一刹那) ; 극히 짧은 순간.

*탁자(卓子) ; ①물건을 올려놓기 위하여 책상 모양으로 만든 가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 ②불상(佛像) 앞에 붙박이로 만들어 두고, 공양물(供養物) · 다기(茶器) 따위를 차려 놓는 상.

*싯다르타(siddhartha) ;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출가하기 전 태자(太子) 때의 이름. 실다(悉多) · 실달다(悉達多) · 실달(悉達)이라고도 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 Śākya-muni (팔리어) 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문을 열매 뜰에는 나무가 섰다. 그 나무를 봄으로 해서 그 나무를 통해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그것이 견성(見性)이라' 하셨습니다.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421칙. 「백수(栢樹)」 『선문염송 · 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51~252.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僧云和尙莫將境示人 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조주(趙州)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선사가 말하였다. "나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노라"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부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도막 ; ①짧고 작은 동강. ②'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사량복탁(思量卜度)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해(知解) ; 상량(商量). 알음알이.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쑥맥 ; '숙맥(菽麥)'의 비표준어.

*숙맥(菽麥 콩 숙/보리 맥) ; ①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의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나온 말로 사리 분별을 못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이르는 말. ②콩과 보리.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소치(所致 것·바 소/이르다·도달하다 치) ; (주로 '~의 소치'의 구성으로 쓰여) 어떠한 까닭으로 일어난[致] 바[所]. 어떤 까닭으로 생긴 일.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사실은 공부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보다는 영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잘 안될 때, 그때가 한 계단 공부가 올라서려는 그러한 고비에서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잘 고비를 넘겨야만,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잘 넘겨야만 공부가 한층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 '공부가 안될 때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고비’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ㅎ/하심2020. 4. 20. 06:59

하심(No.685)—선방에 들어와서는 어떠한 문제에 관해서던지 똑똑한 체하지 말고, 항상 하심을 하고, 남을 존경하고 자비심으로 대해야 | 得道者出.

 

*하심(下心) ;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겸손하게 갖는 것.

 

(8분 19초)

 

[법문] 송담스님(No.685)—2004년 하안거결제 법문(04.06.02) (용685)

 

이 선방(禪房)에 들어와서는 어떠한 문제에 관해서던지 똑똑한 체해서는 참 그것은 안 됩니다.

 

자기가 잘난 체하고 똑똑한 체해서는 왜 안 되냐 하면은, 세속에서는 대통령을 살거나 장관을 살거나 국회의원을 살거나 지방 뭐 장관을 살거나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가 똑똑한 체해야 먹고삽니다.

사실은 인격적으로 보면은 참 우스울 일이나 세속에서는 잘 살라면 바보처럼 가만히 있으면 밤낮 봉만 잡히고 짓밟히고 살 수가 없으니까 뭣이든 똑똑한 체하고 자기 자랑을 하고 그래야 국회의원도 되고 당선이 되니까 선거 때 되면은 한 사람도 제대로 인격을 갖춘 사람을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자랑하고 남은 어쨌든지 흠집을 내가지고 짓밟고 그래야 뭣이 당선이 되기 때문에 그럽니다마는, 앞으로는 그런 사람 뽑아서는 안 되아 나라꼴이 될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마는. 우선 그런 상황인데.

 

선방에 와서 그런 속세(俗世)의 추잡한 언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절에서는 항상 하심을 하고, 남을 존경하고 자비심으로 해야 다른 스님네가 그분을 존경하게 됩니다.

말로써는 안 해도 마음속으로 '참 저분은 수행을 제대로 하신 분이로구나!' 그 스님을 보면 제대로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나도 앞으로 저렇게 되어야겠다' 이렇게 될 것입니다.

절에 와선 똑똑한 체해 갖곤 점수가 올라가기커녕은 점점 떨어지고 아무도 그 사람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특히 시민선방(市民禪房)이나 보살선방(菩薩禪房)에, 집안에 계시면은 다 대접받고 큰소리칠 수 있는 그런 분들이 고생을 사서 하기 위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오십, 육십, 칠십, 팔십이 되어도 기를 쓰고 방부를 들이고 와서 정진을, 고생을 하고 계십니다. 참! 감사할 수밖에 없고 참 눈물겹도록 감사하고 소중한 분들이지요.

 

개중에는 그런데 큰소리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그런 분들이 가끔 있다 이 말씀이여. 이번 철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라고, 하심하고 대중법규를 자진해서 지키고 혹 다른 분이 안 지키는 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입승(立繩)이나 그 소임을 가지신 분이 적절히 처리하실 것이니까 다른 분은 전혀 눈에 혹 보이더라도 '아, 나는 저렇게 안 해야겠구나' 그런 정도로만 생각하고 냉큼 화두(話頭)만을 들으시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 잘못하면 시비하고 하다보면 거기서 시비가 일어나기 때문에 일절 보고도 못 본 체, 들어도 못 들은 체, 여기 법당에 들어온 계단 머리에 원숭이 세 마리가 한 마리는 입을 가리고, 한 마리는 눈을 가리고, 한 마리는 귀를 가리고 그런 석상(石像)이 있습니다마는 우리 정진하는데 그런 모습이 필요하기 때문에 들어오시면서 그것을 보시라 이것입니다.

 

선방에는 옛날에 「입차문래(入此門來)인댄 막존지해(莫存知解)다」 이런 글귀도 써 붙이고 또 뭣한 데는 「득도자출(得道者出)이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득도자출(得道者出)이다. 도를 얻은 자는 나가라' 이것입니다. 견성(見性)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했으면 나가서 중생 교화를 해야지,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이것입니다.

 

아마 뭣인가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거나, 속칭 뭐 초견성을 했느니, 한소식을 했느니 그런 생각을 속에다 품고 있어 가지고, 선방에 있어 가지고 꺼떡하면 무슨 아는 소리 하고, 꺼떡하면 무슨 법담(法談)을 한답시고 하다가 수틀리면 목침으로 머리빡을 깨기도 하고 발길로 차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걸망 싸 짊어지고 나가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하고 그런 일이 옛날부터서 가끔 있어 왔습니다마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용화사 법보선원 대중이나 용주사 중앙선원 대중이나 승련사 대중, 위봉사 대중 또 이 세등선원 대중, 복전선원 대중, 이 자리에 모이신 선방 스님네는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는 걸로 알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믿습니다마는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이런 말씀을 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해서 받아들이시길 부탁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머리를 깎고 출가한 여러 도반 스님네, 선배나 동료 후배 스님네 다 같이 금년 여름은 몸도 건강하고, 건전한 신심과 철저한 정법(正法)을 믿는 그러한 마음으로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정말 정말 알뜰하게 정진한 그런 한 철이 되도록 노력을 해 주시고.

또 보살선방이나 시민선방 또는 선방에 방부를 안 들이셔도 가정에서 정진을 하신 보살님네들도 또 거사님네들도 방부 들인 스님네, 방부 들인 보살님네 못지않게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이 정진(精進)은 정말 자기를 위하는 수행이고 그것이 바로 정법으로 연결이 되고, 그것이 바로 이 영원한 행복과 연결이 되고, 세계평화의 근본이 되는 그러한 것이라고 깊이 명심을 하시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하시고 일초일초를 알뜰히 단속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25분19초~33분3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속세(俗世) ; 세속(世俗). 불가(佛家)에서 일반 사회를 이르는 말.

*시민선방(市民禪房) ; 시민선원(市民禪院). 직장인, 학생, 주부 등과 같은 하루 종일 시간을 낼 수 없는 분들이 언제든지 시간 나는 대로 와서 정진할 수 있도록 용화선원에 개설되어 있는 신도 선원.

*보살선방(菩薩禪房) ; 보살선원(菩薩禪院). 스님이 수행하는 선원과 같은 기간과 방식으로 보살님(신도)들이 정진 할 수 있는 선원. 용화선원에는 스님선원, 보살선원이 있고 또 매일 언제든지 와서 정진할 수 있는 시민선원이 있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 ; 이 문 안에 들어오매 알음알이[知解]를 두지 말지어다.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220. (가로판 p227)

神光(신광)이  不昧(불매)하야  萬古徽猷(만고휘유)로다  入此門來(입차문래)에  莫存知解(막존지해)어다.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밝고나. 이 문 안에 들어오매 알음알이를 두지 말지어다.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9 천태평전보안선사(天台平田普岸禪師)의 말씀.

天台平田普岸禪師洪州人也  於百丈門下得旨  後聞天台勝槪聖賢間出  思欲高蹈方外遠追遐躅  乃結茅薙草宴寂林下  日居月諸爲四衆所知  創建精藍號平田禪院焉  有時謂衆曰  神光不昧萬古徽猷  入此門來莫存知解

 

천태산 평전보안 선사는 홍주 사람이다. 백장의 문하에서 종지를 얻은 뒤에 천태산의 수승한 경치에서 성현이 가끔 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한번 가보고자 하여 멀리 찾아가서 띠집을 짓고는 숲 밑에서 조용히 참선을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부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어 큰 절을 짓고 평전선원이라 하였다.

어느 때 대중에게 말했다. “신령한 광명이 어둡지 않아서 만고에 빛나니, 이 문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전등록 1」 동국역경원, 김월운 옮김. p575-576)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담(法談 부처의 가르침 법/말씀·말할 담) ; 불교의 도리에 관하여 나누는 이야기. 또는 그러한 설법(說法). 선사(禪師)들이 본분(本分 : 근본 깨달음本覺)에 대하여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 법화(法話)와 같은 말.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무장무애(無障無碍) ; 일이나 행동을 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 · 방해가 없음.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No.332)—한국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경허선사 | 육조 스님의 '이뭣고?' 화두, 하택신회와 남악회양 | 한국의 활구참선은 조사선.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법문]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 (용332)

 

(1) 15분 12초.

(2) 8분 5초.

 

(1)------------------

 

오늘 정묘년(丁卯年) 6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방금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많은 신남신녀와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부처님으로부터 오늘까지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부처님 정법(正法)이 전해 내려왔습니다.

 

이조에 와서, 이조 말엽에 와서 이 불법(佛法)이, 이 참선법(參禪法)이 잠시 침체했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백여 년 전에 경허성우(鏡虛惺牛) 선사께서 출현을 하셔가지고 처음에 동학사 강원(講院)에서 경(經)을 배우시고, 어떻게 참 두뇌가 명석하시고 또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공부를 하셨던지 일찌감치 그 전강(傳講)을 받아가지고 대강사(大講師)가 되어서 천하에 학인(學人)을 모다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무서운 전염병(傳染病)에 무데기로 죽어가는 광경을 보시고, '경(經)을 아무리 종횡으로 맥힘이 없이 알고 설(說)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아니다. 확철대오(廓徹大悟)가 아니다' 한 것을 깨달으시고서 학인을 다 흩어버리고 이래가지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셨습니다.

 

그리해서 확철대오를 하셔가지고 침체(沈滯)한 한국의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을 하셔서 경허 큰스님 밑에 만공(滿空) 스님, 혜월(慧月) 스님, 수월(水月) 스님, 여러 도인(道人)들이 나오셨습니다.

 

그래가지고 한국에 선풍이 크게 융성을 해가지고 만공 스님 밑에 고봉(高峰) 스님, 전강(田岡) 스님, 보월(寶月) 스님, 또 여러 도인들이 나오셔서 오늘날 한국에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도처에 선방(禪房)이 있어서 많은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정진(精進)을 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정법이 오늘날 한국에 이렇게 전통해 내려온 것은 오직 경허 스님께서 대강사로 발심(發心)을 해가지고 확철대오해서 선풍을 진작한 그 공덕(功德)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이 참선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좋은 경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녹음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참선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오종가풍(五宗家風)이 있고 그 종파(宗派)에 따라서 가풍이 모다 다르고, 현재도 일본에는 일본식 참선이 전해 내려와서 그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서구에 참선이 소개 되어서 서구 사람들이 많은 일본 참선에 대해서 모다 듣고 배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 한국에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하고는 하늘과 땅에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모두가 다 참선이고 다 좋은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참선법은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털끝만큼만 차이가 있어도 그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되어.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은, 한 말로 말해서 의리선(義理禪)입니다. 공안(公案)을 의리(義理)로, 의리로 따져서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한 화두(話頭)를 받어가지고 며칠 이마를 찡그리고 애써서 이리저리 천착(穿鑿)을 하다 보면 그럴싸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가지고 그 조실 스님한테 가서 자기 본 바를 말하면 "옳다!" 그러고 또 다른 공안을 또 줍니다.

 

또 새로 공안을 하나, 화두를 타가지고 또 며칠간 끙끙 앓으면서 그래가지고 뭐라고 그럴싸한 답을 하면, 안 맞으면 "안 맞다! 또 다시 더해라"

또 며칠 애써서 가서 뭐라고 대답하면 "되았다!" 그러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그래서 영리한 사람은 금방 이르기도 하고, 이삼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사오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또 오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대체적으로 백 개 이상의 화두를 통과하면 조실(祖室) 자격을 준다. 이런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한국에 참선(參禪)은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화두(話頭) 하나를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으면,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무슨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일체 그러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닙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그러한 이론을 여기에 동원을 해서도 안 되고,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도 이 화두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이 화두를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육조(六祖) 스님께서,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항상 우리 일상생활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하되 그 속에서 그놈을 찾어보면 알 수가 없으니 이놈은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어. 그러니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뭣고?' 화두가 바로 이 육조 스님의 이 "심마물(甚麽物)이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그렇게 물으신 이 공안(公案)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니까, 그때에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에 근원(根源)이며 이 하택 저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고, 일찍이 생겨난 때도 없고 없어진 때도 없으며,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어. 머리도 없고 꽁무니도 없으니 대관절 이게 무슨 물건이냐?"

"모든 부처님에 근원이며 이 신회의 불성입니다"

아, 그럴싸하니 대답을 하지 안했습니까. 이론적으로 말할 때 뭐이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그 맞는 말이지.

 

육조 스님께서 크게 꾸지람을 하시기를,

"내가 내동 말하기를,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다고 그러는데 너는 어찌 '모든 부처님에 본원(本源)'이니, '하택신회의 불성(佛性)'이니 하고 왜 이름을 붙이는고? 너는 나중에 애써서 공부를 해가지고 일가(一家)를 이룬다 해도 너는 얼자(孼子)가 되고,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되겄구나"

 

지해종사(知解宗師)라 하는 것은 이론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강사(講師)같은 거,

참으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 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만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하는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교리적으로 연구하는 그러한 지해종사 밖에는 못되겄구나' 이렇게 평을 하셨습니다.

 

얼마 있다가 남악회양(南嶽懷讓)이라고 하는 수좌가 왔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물으셨습니다.

아! 남악회양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데 대해서 망지소조(罔知所措)여, 무어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어. 꽈악 맥힌 체 물러나와 가지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 8년 동안 '무슨 물건인고?... 무슨 물건인고?...' 도저히 꽉 맥혀서 입을 벌릴 수가 없어.

그러한 그 콰악 맥혀서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으로, 그 의단(疑團)으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육조 스님의 법(法)을 이어받았습니다.

 

한국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바로 이 육조 스님과 남악회향 선사와의 사이에서 전해진 이 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고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5분16초~20분29초)

 

 

 

 

(2)------------------

 

의리선(義理禪), 일본 사람들이 화두를 뭐 백 개를 통과(通過)하고, 오백 개를 통과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며칠 동안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가지고 "이것이 아닙니까!"그러면 "옳다"하고 또 하고,

천칠백 공안을 다 통과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사선이 아니고 활구참선이 아니고 이것은 정법(正法)이 아닌 것입니다.

 

백 개를 통과해봤자 중생심(衆生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지, 이것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지식(知識)을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화두를 몇 개 통과했는가? 많이 통과했다고 해서 무슨 명예(名譽)를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닌 바에는 확철대오를 하고, 안 하고 한 것은 놔두고 '바르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한 공부는 한 만큼 그것이 깨달음으로 향해 가는 공부지만, 바르게 하지 못한 공부는 벌써 방향을 잘못 잡고 가는 길이라 서울을 간다며, 저 호남에서 서울을 간다면서 북쪽을 향해서 가지 아니하고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으로 향해 가는 거와 같애서, 바르지 못한 길을 아무리 쉬지 않고 열심히 간다고 해도 바르게 목적지에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살부살모(殺父殺母)하는 죄(罪)는 불전참회(佛前懺悔)어니와, 부모를 죽인 죄는 부처님 앞에 참회를 하거니와, 미득(未得)을 위증(謂證)하고 미증(未證)을 위증(謂證)하는 죄는 참회무로(懺悔無路)다, 참회할 길이 없다"하셨습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죽인 죄를 어디 가서 참회를 해.

 

정법(正法)을 설(說)하고 또 그 정법을 의지해서 수행(修行)을 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이 아닌 의리선(義理禪), 사구선(死句禪).

이 의리선을 의리로 이론으로 이렇게 따져서 들어가고, 더듬어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분석해 들어가는 이런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죽은 구(句)의 참선이다, 죽은 참선이다’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하는데.

 

왜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그러고, 요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허냐하면,

아까 남악회양 선사가 하는 그러한 참선(參禪)—알 수 없는,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공부를 해 나가면, 우선 답답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고 아무 재미도 없고 그렇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의단으로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마침내는 툭! 터져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으로 따져서, 교리적으로 따지고 철학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또는 종합하고 이래가지고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데, 해 갈수록 점점 중생(衆生)의 생사심(生死心), 생사심을 더욱 치성(熾盛)하게 맨드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사심(生死心)을 조장을 시키고 치성하게 맨들면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구렁탱이로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 의리선(義理禪)으로 참선을 하면 그것이 이미 바르지 못한 수행이기 때문에 바른 깨달음이 있을 수가 없고, 어떠한 그 나름대로 의리선도 열심히 하다보면 무엇인가 스스로 느낀 바가 있고 그 어떤 경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른 깨달음이 아니여.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을 스스로 그것이 바른 깨달음인줄 착각을 하고, 많은 사람에게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는 그런 삿된 참선을 지도하고.

또 그런 삿된 참선을 배워가지고 그 사람이 또 그런 삿된 수행을 해가지고 또 삿된 어떤 것을 깨달라 가지고 그걸 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전하고 해서 영영 부처님의 정법은 다 믿는 사람이 없고 실천한 사람이 없어지고 삿된 참선만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가득차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불법이, 정법(正法)이 멸망(滅亡)한 때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다른 종교나 어떠한 국법(國法)으로 불법(佛法)이 멸망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탄압을 하고 아무리 파괴를 한다 하더라도, 겉으로 나타난 어떠한 그러한 것은 탄압을 할 수가 있고 그 파괴를 할 수가 있겠지만—사찰(寺刹)이라든지 또는 불상(佛像)이라든지 경전(經典)이라든지 그런 상(相)이 있는 그러한 것들은 파괴할 수가 있겠지마는, 정법(正法)은 그것으로서 멸망이 되지 않습니다.

 

정법은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불제자들이 우리 불법을 삿되게 믿고 삿되게 행할 때에 정법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20분31초~28분3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경허선사(鏡虛禪師) ; (1849-1912) 성(姓)은 송(宋)씨이고 법명은 성우(惺牛), 이름은 동욱(東旭)이요 호(號)는 경허(鏡虛)이며 여산(礪山) 사람이다.

헌종 15년 기유(己酉)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송두옥(宋斗玉)이요 어머니는 밀양(密陽) 박(朴)씨였다. 태어난 뒤 사흘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을 시키자 아기 소리를 내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경기도 광주군 청계사(淸溪寺)에 가서 계허(桂虛)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뜻은 컸으며 비록 고달픈 환경이라도 피곤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이 나무하고 물긷고 밥을 지으며 은사스님을 모셨다.

 

14세가 되도록 글을 배울 겨를이 없었는데 어느 날 한 선비가 절에 와서 여름을 지낼 때에 그 선비가 소일꺼리로 곁에 불러 앉히고 천자문·통사(通史) 등의 글을 가르쳐 보니 눈에 스치면 배우고 듣는대로 외우고 문리를 해석할만큼 크게 진보가 있으니 선비가 크게 감탄하였다.

얼마되지 않아서 은사인 계허스님이 환속(還俗)을 하며 스님의 공부를 크게 성취시키지 못함을 애석히 여겨 편지를 써서 계룡산 동학사 만화화상(萬化和尙)에게 추천하였다. 화상은 그 당대에 큰 강사였다.

 

만화강백(萬化講伯) 처소에서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수료하였다. 공부를 하는데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 해도 남보다 열배 백배 앞섰으며 영호(嶺湖)의 강원에 두루 참석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되고 널리 내외전(內外典)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이름이 팔도에 떨치었다.

23세 때에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하니 교의(敎意)를 논(論)하매 큰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사방에서 학인들이 몰려왔다.

 

31세 때 하루는 전날 은사 계허스님이 보살펴 아껴주던 정이 생각나서 한번 찾아뵙고자 대중에게 고하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도중에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급히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려 하자 주인이 내쫓았다.

그 동네 수십 집을 찾아갔지만 집집마다 다 쫓기를 매우 급히 하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지금 이곳에는 전염병(콜레라)이 크게 돌아 걸리기만 하면 서있던 사람도 죽는 판인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사지(死地)에 들어왔는가!”하였다.

스님이 그 말을 듣자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하고 마음이 떨리며 마치 죽음의 벼랑에 다다른 것 같으며, 목숨이 참으로 호흡하는 사이에 있어서 일체 세상 일이 도무지 꿈 밖의 청산 같았다.

 

이에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되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文字)에 구속되지 않고 조사(祖師)의 가르침을 찾아 삼계(三界)를 벗어나리라”하고 발원을 마치고 평소의 읽은 바 공안(公案)을 생각해보니, 이리저리 의해(義解)로 배우던 습성이 있어서 지해(知解)로 따져지므로 의심으로 참구(參究)할 분(分)이 없으나,

오직 영운선사(靈雲禪師)의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라는 화두(話頭)는 해석도 되지 않고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듯하여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참구하였다.

 

산에 돌아온 뒤에 대중들을 흩어 보내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연따라 잘들 가게나. 내가 뜻을 두어 원하는 것은 이에 있지 않다네”하고 문을 폐쇄하고 단정히 앉아 전심(專心)으로 참구(參究)하는데, 밤으로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혹은 칼을 갈아 턱에 괴며 이와같이 3개월을 화두를 들고 정진하였다.

 

한 사미(沙彌)스님이 옆에서 시중을 드는데 속성(俗姓)은 이(李)씨라, 그의 아버지가 좌선을 여러 해 동안 하여 스스로 깨달은 곳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 이처사(李處士)라고 부르는데, 사미의 스승이 마침 그 집에 가서 처사와 이야기를 하는데,

처사가 말하기를 “중이 필경에는 소가 된다”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중이 되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다만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서 그 시주의 은혜를 갚게 된다”고 했다.

 

처사가 꾸짖어 이르기를 “소위 사문(沙門, 스님)의 대답이 이렇게 도리에 맞지 않습니까”하니까,

그 스님이 이르기를 “나는 선지(禪旨)를 잘 알지 못하여서 그러하오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하니 처사가 이르기를 “어찌 소가 되기는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이르지 않는고?”

 

그 스님이 묵묵히 돌아가서 사미에게 이르기를 “너의 아버지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하니,

사미가 말하길 “지금 주실(籌室) 화상이 참선(參禪)을 매우 간절히 하여 잠자는 것도 밥먹는 것도 잊을 지경으로 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 이치를 알 것이니 사부(師傅)께서는 가서 물으소서”

 

그 스님이 흔연(欣然)히 가서 절하고 앉아서 이처사(李處士)의 말을 전하는데 ‘소가 콧구멍이 없다(牛無鼻孔處)’는 말에 이르러 화상의 안목(眼目)이 정(定)히 움직여 ‘옛부처 나기전 소식(古佛未生前消息)’이 활연히 앞에 나타나고, 대지가 꺼지고 물질과 나를 함께 잊으니 곧 고인(古人)의 ‘크게 쉬고 쉬는 경지(大休歇之地)’에 도달한지라, 백천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기와가 깨어지듯 하니, 때는 고종 16년 기묘(己卯 1879) 동짓달 보름께였다.

 

그날 이후 스님은 방에 누워 사람들의 출입을 상관하지 않았다. 만화강사가 들어와서 보아도 또한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강사가 이르기를 “무엇때문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고?”하니, “일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無事之人 本來如是)”고 하였다.

스님은 그 이듬해인 경진년 봄에 어머니와 형 태허스님이 계신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오후보림(悟後保任)하였다.

 

게송으로 그 깨달아 증득한 곳을 이르기를,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巖山下路)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

 

홀연히 콧구멍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삼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 길에,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천장암에 머물면서 하루는 대중에게 설법할 적에 특히 전등(傳燈)의 연원(淵源)을 밝히는데 스님의 법은 용암화상(龍巖和尙)에게 이었으니 청허(淸虛)의 12세손이 되며 환성(喚惺)의 7세손이 된다 하였다.

그 뒤로 호서(湖西)에 20여 년 간 오래 주석하니 천장암과 서산의 개심사와 부석사, 마곡사·칠갑산 장곡사·아산 봉곡사·금산 태고사·계룡산 갑사·동학사·신원사·속리산 법주사 등지로 왕래하며 때로는 마음을 고요히 묵상하며 때로는 사람을 위하여 설교하면서 호서에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었다.

 

51세 때 기해년(1899) 가을에 합천 해인사 조실로 초대받고 가니 때마침 칙명으로 대장경을 인출하는 불사와 수선사(修禪社)를 설치하는 사업이 있었는데 대중이 스님을 추대하여 법주로 모셨다.

영축산 통도사·표충사·대승사·동화사·파계사와 금정산 범어사와 호남의 화엄사·실상사·쌍계사·송광사·태안사는 모두 화상께서 유력(遊歷)하던 곳이다. 이로부터 사방에서 선원(禪院)을 다투어 차리고 발심한 납자 또한 구름 일 듯하니, 이 기간처럼 부처님 광명이 다시 빛나 사람의 안목을 열게 함이 이와같이 성(盛)함이 없었다.

 

임인년(1902) 범어사에서 「선문촬요(禪門撮要)」 편찬 불사. 가을 동래 범어사의 금강암과 마하사 나한 개분불사(改粉佛事) 때 증명법사를 하였다.

56세 때 갑진년(1904) 2월 11일에 천장암에서 만공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내리고 불조의 혜명을 이어가도록 부촉하였다. 봄에 오대산과 금강산을 거쳐서 안변 석왕사에 이르러 오백나한 개분불사의 증명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로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선비 박난주(朴蘭洲), 또는 유발거사(有髮居士) 박진사(朴進士)라 하고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차림을 하고 갑산·강계 등지로 내왕하며 시골 서당에서 훈장도 하며 만행두타(萬行頭陀)로써 진흙에도 들고 물에도 들어가서 인연따라 교화하였다.

 

64세 때 임자년(1912) 4월 25일 갑산(甲山) 웅이방(態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入寂)하니 법랍 56세였다. 입적 소식을 듣고 만공(滿空)·혜월(慧月)선사가 곧 그곳에 가서 난덕산(難德山)으로 운구하여 다비(茶毘)를 하고 임종게(臨終偈)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심월고원(心月孤圓)  광탄만상(光呑萬像)  광경구망(光境俱忘)  부시하물(復是何物)

마음달이 외로이 둥글게 빛나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만공선사 주재, 한용운 스님의 편찬으로 스님의 법어를 모은 「경허집(鏡虛集)」이 있다.

[참고] 『경허집(鏡虛集)』 (석명정 역 | 극락선원), 『경허법어(鏡虛法語)』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 | 김진성 역 | 인물연구소)

 

*강원(講院) ; 사찰에 설치되어 있는, 불전(佛典)을 공부하는 교육 기관. 사미과(沙彌科) · 사집과(四集科) · 사교과(四敎科) · 대교과(大敎科)의 네 과정으로 편성되어 있다.

*일심불란(一心不亂) : ①두 생각이 없이, 딴 생각이 없이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 ②마음을 흩어지지 않게 함.

*전강(傳講) ;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온,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통(法統)의 전승을 법맥(法脈)이라 한다.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전(佛典)을 통해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는 방식을 강맥(講脈)이라 하는데, 이 강맥을 전수하는 것을 전강(傳講)이라 한다.

*강사(講師) ; 경론(經論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經과 그 가르침을 주석·연구·정리·요약한 논論)을 가르치는 스님.

*학인(學人) ;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만공월면(滿空月面) ; (1871~1946) 법명은 월면(月面), 호는 만공(滿空), 속명은 송도암(宋道岩).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1871년(신미년) 3월 7일 출생하였다. 1884년(갑신년) 14세에 태허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로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계속 천장암에서 지내다, 어른 시봉(侍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5년(을미년)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하룻밤을 지나 새벽 종송(鐘頌)을 할때,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그 후 마곡사 근처 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스님 나이 26세 때, 1896년(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 선사가 오시니, 선사께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였다.

경허 선사가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 하나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스님의 대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선사가 ‘네가 일찌기 다비문(茶毘文)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경허 선사가 다시 묻기를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선사가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 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하고,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으라.’하고 떠났다.

 

그 후 정진하던 중 경허 선사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1898년 7월에 선사가 계신 서산(瑞山)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지내다가, 경남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 선사께 청첩장이 와서 선사를 모시고 계명선원에 가서 하안거를 마치고, 선사와 배별(拜別)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31세 때(1901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며 지내다가, 34세 때(1904년 7월 15일)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른 경허 선사를 뵙고, 그동안 공부를 지은 것을 아뢰니, 선사가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운월계산처처동(雲月溪山處處同)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대가풍(叟山禪子大家風)  수산선자(叟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은근분부무문인(慇懃分付無文印)  은근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일단기권활안중(一段機權活眼中)  한조각 권세 기틀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1905년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한 초암을 짓고 지내고, 그 뒤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마하연(摩訶衍)에 가서 3년을 지내고,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한 한칸 띳집을 짓고 지내다,

1946년(병술년) 10월 20일에 목욕 단좌(端坐)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入寂) 하였다.

나이 76, 법랍(法臘) 62. 제자들이 스님의 법어를 모은 「만공법어(滿空法語)」가 있다.

[참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운수납자(雲水衲子) ; 여러 곳으로 스승을 찾아 도(道)를 묻거나 수행을 하러 여러 곳으로 다니는 스님[衲子]을 머무름이 없는 구름[雲]과 물[水]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오종가풍(五宗家風) ; 중국의 선종은 달마(達磨)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때의 제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 크게 성했다. 이 혜능 문하인 청원행사(靑原行思) 및 남악회양(南嶽懷讓)의 계통으로부터 일어난 선문오종(禪門五宗, 禪門五家)의 가풍(家風, 전통적인 독자적인 가르침의 방식, 지도의 방법)을 말한다.

 

오가(五家) 가운데 제일 먼저 일어난 종은 위앙종(潙仰宗)으로 남악회양 아래 제2세 백장회해(百丈懷海)의 제자 위산(潙山靈祐)에서 일어났고,

임제종(臨濟宗)은 백장회해의 제자 황벽희운(黃檗希運)의 법을 받은 임제의현(臨濟義玄)에서 일어났다.

다음으로 조동종(曹洞宗)은 청원행사 아래 제3세 운암담성(雲巖曇晟)의 제자 동산양개(洞山良价)에서 일어났고,

운문종(雲門宗)은 청원행사 아래 제5세 설봉의존(雪峰義存)의 제자 운문문언(雲門文偃)에서 일어났으며,

법안종(法眼宗)은 청원행사 아래 제7세 나한계심(羅漢桂琛)의 제자 법안문익(法眼文益)에서 일어났다.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201~206 참고. (가로판 p208~213)

[ 臨 濟 家 風 ]  赤手單刀로  殺佛殺祖로다  辨古今於玄要하고  驗龍蛇於主賓이라  操金剛寶劒하야  掃除竹木精靈하며  奮獅子全威하야  震裂狐狸心膽이로다  要識臨濟宗麼아  靑天轟霹靂이요  平地起波濤로다

 

임제가풍 : 맨손에 한 칼 들고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임이로다。예와 이제를 삼현(三玄) 삼요(三要)로써 판단하고, 용과 뱀을 빈주구(賓主句)로 알아 낸다。금강의 보검으로 도깨비를 쓸어 내고, 사자의 위엄을 떨쳐 여우와 너구리의 넋을 찢네。임제종을 알려는가? 푸른 하늘에 벼락치고 평지에 파도가 이는도다。

 

[ 曹 洞 家 風 ]  權開五位하야  善接三根하며  橫抽寶劍하야  斬諸見稠林하며  妙協弘通하야  截萬機穿鑿이로다  威音那畔에  滿目煙光이요  空劫已前에  一壺風月이로다  要識曹洞宗麼아  佛祖未生空劫外에  正偏不落有無機로다

 

조동가풍 : 권도(權道)로 오위(五位)를 열어 세 가지 근기를 잘 다루며, 보검을 빼어 들고 모든 사견의 숲을 베어 내며, 널리 통하는 길 묘하게도 맞추어서 모든 기틀의 천착(穿鑿)을 끊음이로다

위음왕불 나시기 전 눈에 가득한 풍경이요, 공겁 이전 별(別) 세계 경치로다。조동종을 알려는가? 부처님과 조사도 안 나시고 아무 것도 없던 그 전, 정편(正偏)이 유무(有無) 기틀에 떨어지지 않음이로다。

 

[ 雲 門 家 風 ]  劒鋒有路하고  鐵壁無門이라  掀翻露布葛藤하고  剪却常情見解하니  迅電은  不及思量이요  烈焰에  寧容湊泊이리요  要識雲門宗麼아  柱杖子跋跳上天하고  盞子裡에  諸佛이  說法이로다

 

운문가풍 : 칼날에는 길이 있고 철벽에는 문이 없다。온 천하의 갈등을 둘러엎고, 못된 소견을 잘라 내 버리니, 번쩍 하는 번갯불은 사량으로 미칠 수 없거니, 활활 타는 불꽃 속에 어찌 머무를 수 있으리요。운문종을 알려는가? 주장자가 날아 하늘 높이 오르고, 잔속에서 모든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도다。

 

[ 潙 仰 家 風 ]  師資唱和하며  父子一家로다  脇下書字하니  頭角이  崢嶸이요  室中驗人에  獅子腰折이로다  離四句絶百非를  一搥粉碎하니  有兩口無一舌이여  九曲珠通이로다  要識潙仰宗麼아  斷碑는  橫古路하고  鐵牛는  眠少室이로다

 

위앙가풍 : 스승과 제자가 부르면 화답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에 살고 있네。옆구리에 글자 쓰고 머리 위에 뿔이 뾰족하구나。방 안에서 사람들을 시험하니 사자 허리 부러지다。

이사구절백비(離四句絶百非)를 한 망치로 부수었네。입은 둘이 있으나 혀는 하나도 없는 것이 구곡주를 꿰뚫었다。위앙종을 알려는가? 부러진 비석 옛 길에 쓰러져 있고 무쇠 소는 작은 집에 잠을 자네。

 

[ 法 眼 家 風 ]  言中有響하고  句裡藏鋒이라  髑髏는  常干世界하고  鼻孔은  磨觸家風이라  風柯月渚는  顯露眞心하고  翠竹黃花는  宣明妙法이로다  要識法眼宗麼아  風送斷雲歸嶺去하고  月和流水過橋來로다

 

법안가풍 : 말 가운데 메아리가 있고 글 속에 칼날이 숨었구나。해골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콧구멍은 어느 때나 그 가풍을 불어내네。

바람 부는 나뭇가지와 달 비치는 물가에는 참 마음이 드러나고, 푸른 대와 누른 꽃은 묘한 법을 환히 밝혀 주네。법안종을 알려는가? 맑은 바람 구름을 산마루로 보내 주고, 밝은 달 물에 떠서 다리 지나 흘러오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참고] 송담스님(No.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 (2분 10초)

공안(화두)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뭣고?'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 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

 

요새 일본식 참선이 수입이 돼 가지고 화두 하나를 이리저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다른 화두를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를 해결 지어 놓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해서, 10개 20개······, 화두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그러한 참선이 지금 일본으로부터서 수입이 되어가지고 많은 지성인들이 그러한 참선을 하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런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쪼끔 생각 있는 사람이면 능히 알고도 남을 상식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안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를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합니다. 활구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77분41초~79분50초)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육조(六祖) : (638 ~ 713)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스물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麈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麈埃)」라고 지었다.

 

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십팔 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칠십육 세로써 입적하였다。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説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얼자(孽子 서자·첩의 소생 얼/아들 자) ; 본부인이 아닌 첩이나 다른 여자에게서 난 아들. 서자(庶子).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망지소조(罔知所措 그물·근심할·없을 망/알 지/ 바·방법 소/둘·처리할·조처할 조) ; 너무 당황하거나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서 이치나 일에 걸림이 없는 선.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조사선이 곧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송담스님 No.685에서)

 

 

 

 

------------------(2)

 

*미득위득(未得謂得) 미증위증(未證謂證) ; 얻음[得]이 없는데 얻었다고 말하고, 증(證)한 것이 아닌데 증했다 말하는 것.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생사(生死), 생멸심(生滅心)도 같은 뜻의 말.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정리.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송담스님(No.475)—92년 6월 첫째 일요법회(92.06.07) 법문에서. (3분 16초)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 나가는 데 관해 요긴한 법문을 간곡히 해 주셨는데,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생사의 고해 속에서 무량겁을 이렇게 오고, 또 앞으로 무량겁을 생사고해 속에서 몸부림을 쳐야 할 그 근원이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하는 우리의 생사심(生死心).

눈으로 보고 생각이 일어나고, 귀로 듣고 중생의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이것이 바로 생사심(生死心)인데, 그 생사심을 결국은 그놈을 깨뜨려 버려야 하는데, 억지로 그놈을 깨뜨리려고자 한다고 해서 깨뜨려지는 것이 아니거든.

 

그 생사심을 깨뜨릴라면은 결국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단속을 해라. 화두,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를 들고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것이 생사심을 깨뜨리고, 그 마음길을 끊어버리는 가장 중요하고도 요긴하고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여.

 

생사심(生死心)을 억지로 그놈을 누를려고 한다든지, 억지로 끊을라고 한다든지, 억지로 참으려고 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더 일어나는 것이여. 무슨 생사심, 무슨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즉각 ‘이뭣고?’ 또 일어나면 또 ‘이뭣고?’

자꾸 ‘이뭣고?’ 간절한 의심으로 ‘이뭣고?’를 거각(擧却)해 나가면 결국은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화두가 들리게 되고,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터억! 독로하게 된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그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조사관(祖師關)을 뚫게 되고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13분1초~16분17초)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20. 3. 10. 11:26

화두(No.345)—(게송)因能生所所生能 ~ / 한마디 화두 속에 팔만대장경이 들어있고,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설법을 하고 계신 것 / (게송)塵勞逈脫事非常~.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12분 57초)

 

[법문] 송담스님(No.345)—1988년 1월 첫째일요법회(88.01.03) (용345)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하고  능소구망생불생(能所俱忘生不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노방흡진경해수(老蚌吸盡鯨海水)여  산호지상월삼경(珊瑚枝上月三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이다. 능(能)을 인연해서 소(所)가 생겨나. 능(能)은 주관을 말한 것이고, 소(所)는 객관을 말한 것이여. 주관으로 인해서 모든 객관이 생겨난 것이여.

소생능(所生能)이다. 또 그 객관으로 인해서 또 능(能)이 주관이 움직이게 된다. 능(能)과 소(所)는 서로 상관관계에 있어.

 

능소구망(能所俱忘)에 생불생(生不生)이다. 능(能)과 소(所), 주관과 객관이 함께 주관과 객관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것이 없어지게 되면 생불생(生不生)이다. 생(生)하되 생(生)이 아니다.

 

화두(話頭)를 들어서 처음에부터 잘되는 사람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무량겁을 두고 우리가 익혀온 것이 주관과 객관 속에 서로 굴림을 받고 얽히고설켜서 육도(六途)를 돌고 돌아온 것인데, 어떻게 처음부터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꾸 한곳을 향해서 끈질기게 도전을 하면, 계속해서 또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안될수록에 더욱 열심히 하고, 되어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 내지 말고, 안되아도 안된다고 짜증을 내지 말고서 더욱 신심(信心)을 내고 더욱 인내심과 지혜심으로써, 신심으로부터서 신심으로 계속해서 해 나가면 어느 날 그렇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들어지지 않던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턱! 들리게 된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망상(妄想)을 물리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끊어지고,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와. 그것이 능소(能所)가 구망(俱忘)이거든.

그러면 생불생(生不生)이여. 눈으로 하늘을 보되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산을 보되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땅을 보되 땅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은 바가 없어. 밥 맛을 몰라. 밥이 된지 진지, 반찬이 짠지 싱거운지도 모르고, 그렇게 순일무잡하게 공부가 되아 가는 것입니다.

 

노방흡진경해수(老蚌吸盡鯨海水)여. 늙은 조개가 저 고래가 살고 있는 그 넓고 넓은 바다의 물을 다 둘러 마셔.

마셔 버리면은 산호지상(珊瑚枝上)에 월삼경(月三更)이다. 저 바다 밑바닥에 있던 그 산호가 빠알간 산호 가지에 휘황찬 삼경(三更) 달이 찬란히 빛날 것이다.

 

오늘 조개! 조개가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다가 작대기에 꽂혀서 죽어 가지고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가 한량없는 복을 받다가, 자기가 복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러 내려와서 그리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수다원과(須陀洹果), 소승사과(小乘四果)에 첫째 번 과(果)가 바로 이 수다원과인데, 이 성과(聖果)를 받은 설화를 했습니다마는.

 

이 늙은 조개가 상식적으로 어떻게 그 넓고 넓은 그 깊은 바닷물을 다 둘러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이 '이뭣고?'

천하에 맛도 없고 뜻도 없는 이 재미도 없는 이 한마디 화두가 무량겁 쌓이고 쌓인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벌어진 그 많은 업(業)을 다 소멸을 하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끊어 버리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 소견으로는 까마득하게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이뭣고?' 한마디는—'이뭣고?' 한마디 속에 바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바로 이 한마디 화두 속에 살아 계셔서 설법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어떠한 재난과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이 한마디 화두를 턱! 거각할 때에 바로 삼세제불을 거기에서 친견(親見)하고 역대조사를 거기에서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큰 소원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지장보살을 불러라, 아미타불을 불러라' 또는 '고왕경을 읽어라' 또는 '금강경을 읽어라' 이러한 방편(方便)을 설해 드리기도 합니다마는,

그러한 혹 하고 많은 방편이 다 뭉친들 다 합한들 어찌 이 한마디의 화두! 공안에다 댈 수야 있겠습니까?

 

어쨌든지 이 한마디에 목숨을 걸고 우리가 목숨 다할 때까지 가능하면 금생에 결정코, 금생 아니라 무량겁을 두고도 이 한마디로써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리라.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은 내가 문제삼을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오직 목숨 바쳐서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이것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외골수로 나가고,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듯이 외골수로 오직 이것 하나만을 향해서 전부를 바칠 때에 우리는 그 늙은 조개가 그 대해수(大海水)를 둘러 마시듯이 우리는 결정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적은 일이 아니여.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긴히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바탕 그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강추위 한 뒤끝에 매화가 피어야만 그 매화꽃 향기가 진동하는 법입니다.

정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말 알뜰히 정진해야만 고인전지(古人田地), 고인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60분47초~1시간13분4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인능생소구생능~’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境由能境 能由境能’ p110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삼경(三更 석 삼/밤 시각 경)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이다.

*'오늘 조개! 조개가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다가 작대기에 꽂혀서 죽어 가지고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가 한량없는 복을 받다가, 자기가 복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러 내려와서 그리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수다원과(須陀洹果), 소승사과(小乘四果)에 첫째 번 과(果)가 바로 이 수다원과인데, 이 성과(聖果)를 받은 설화를 했습니다마는'

[참고]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제4권.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 한역(漢譯) | 동국역경원.

 

물었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하늘과 사람들만의 스승이요, 축생의 스승은 아닙니까? 옛날 여래가 세상에 계시면서도 축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하늘과 사람들만의 스승이라 합니까?"

 

수다라경(修多羅經)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부처님은 첨파국(瞻婆國)에 계시면서 가라(迦羅) 못가에서 첨파국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는데 이때 못 안에 무명조개[蛤 대합조개] 하나가 부처님의 설법하신 소리를 듣고는 기뻐하여 곧 못에서 나와 풀뿌리 아래에 들어갔습니다.

 

이때에 어떤 한 소를 치는 사람[牧牛人]은 대중들이 둘러서서 부처님 설법을 듣고 있음을 보고는 부처님에게 가서 법을 들으려고 하여 지팡이로 땅을 찌른 것이 무명조개 머리에 잘못 닿았습니다. 무명조개는 곧 목숨이 끊어져서 도리천에 나아 도리천왕이 되었으니, 그 복의 과보 때문이었습니다. 궁전의 세로와 너비는 바로 12유순이었습니다.

이에 무명조개 천인은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기녀들의 오락 소리를 보고 깨달은 뒤에 곧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앞서 축생이었는데 무슨 인연 때문에 이 하늘 궁전에 태어났을까?'

곧 하늘 눈[天眼]으로 자세히 살피니, 앞서 못가에 부처님 설법을 들은 이 공덕 때문에 이 과보를 얻었기에 무명조개 천인은 곧 궁전을 타고 부처님에게 가서 닿아 땅에 엎드려 발아래 예배하였습니다.

 

問曰 佛何以獨爲天人師 不爲畜生師耶 昔如來在世亦爲畜生說法 何以獨稱爲天人師

修多羅經說 爾時佛在瞻婆國 於迦羅池邊 爲瞻婆人說法 是時池中有一蛤 聞佛說法聲歡喜 卽從池出入草根下 是時有一牧牛人 見大衆圍遶聽佛說法 卽往到佛所 欲聞法故以杖刺地 誤著蛤頭 蛤卽命終生忉利天 爲忉利天王 以其福報故 宮殿縱廣正十二由旬

於是蛤天人 霍然而悟 見諸妓女娛樂音聲 悟已尋卽思惟 我先爲畜生 何因緣故生此天宮 卽以天眼觀 先於池邊聽佛說法 以此功德得此果報 蛤天人卽乘宮殿 往至佛所頭頂禮足

 

부처님은 아시면서 일부러 '너는 어떤 사람인데 갑자기 나의 발에 예배하고 신통ㆍ광명ㆍ상호가 견줄 데 없이 여기를 환히 비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무명조개 천인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옛날에 무명조개 몸이 되어

물속에서 먹이를 찾다가

부처님의 설법하신 소리 듣고

나와서 풀뿌리 밑에 있었습니다.

 

어떤 소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팡이를 가져와서 법을 듣다가

지팡이로 저의 머리를 찔렀으므로

목숨을 마쳐서 천상에 났습니다.

 

부처님은 무명조개 천인이 말한 게송으로 사부대중을 위하여 설법하셨습니다. 이때에 대중 가운데 팔만사천 인은 다 불도의 자취를 얻었고, 무명조개 천인은 수다원 과위를 얻었습니다. 이에 무명조개 천인이 도의 과위를 얻고 기뻐하며 웃음을 머금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천인사라 합니다.

 

佛知故問 汝是何人 忽禮我足 神通光明相好無比 照徹此間

蛤天人以偈而答 往昔爲蛤身 於水中覓食 聞佛說法聲 出至草根下 有一牧牛人 持杖來聽法 杖攙刺我頭 命終生天上

佛以蛤天人所說偈 爲四衆說法 是時衆中八萬四千人 皆得道跡 蛤天人得須陀洹果 於是蛤天人得道果已 歡喜含笑而去 故稱爲天人師

 

[참고] 『법원주림(法苑珠林)』 제17권 「제7 경법편(敬法篇)」 ’제3 청법부(聽法部)‘ 서명사(西明寺) 사문(沙門) 석도세(釋道世) 지음 | 동국역경원.

 

『선견율론(善見律論)』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첨바라국(瞻婆羅國)의 가라못[迦羅池] 가에 가서 대중을 위해 설법하셨다. 그때 못에 있던 대합조개 한 마리가 부처님께서 못가에서 설법하시는 소리를 듣고 못에서 나와 풀 속으로 들어가 법을 듣고 있었다.

그때 또 어떤 사람이 지팡이를 들고 소를 놓아 먹이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께서 앉아 대중을 위해 설법하시는 것을 보고 곧 부처님에게로 나아가 설법을 들으려고 지팡이를 땅에 꽂다가 잘못해 조개의 머리를 찔렀다. 조개는 곧 그 자리에서 죽어 도리천에 났다. 그 복의 과보로 그 궁전의 가로 세로가 12유순이 되었다. 그는 여러 천녀들과 향락하다가, 곧 궁전을 타고 부처님께로 가서 부처님 발에 예배했다.

 

善見律論云 昔佛在世時 到瞻婆羅國迦羅池邊 爲衆說法 時彼池中有其一蛤 聞佛池邊說法之聲 卽從池出 入草根下 聽佛說法 時有一人持杖放牛 見佛在坐爲衆說法 卽往佛所 欲聞法故 以杖刺地誤著蛤頭 卽便命終 生忉利天 以福報故 宮殿縱廣十二由旬 與諸天女 娛樂受樂 卽乘宮殿 往至佛所 頭頂禮足

 

부처님께서는 아시면서 짐짓 물으셨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갑자기 와서 내 발에 예배하며 신통과 광명과 상호가 비할 데 없어 이 세간을 환히 비추느냐?"

조개였던 하늘 사람은 게송으로 대답했다.

 

저는 지난 세상에 대합조개로서

물 속에서 먹이 찾고 살다가

부처님 설법하는 소리를 듣고

못에서 나와 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를 먹이는 어떤 사람이

지팡이 들고 법을 들었는데

지팡이 꽂다 저의 머리 찔러

저는 죽어서 천상에 났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조개였던 하늘 사람의 게송으로 사중(四衆)을 위해 설법하셨다. 그때 대중 가운데 팔만사천 인은 다 도의 자취를 보았으며, 그 조개였던 하늘 사람은 수다원과(須陁洹果)를 얻어 합장하고 떠났다.

 

佛知故問 汝是何人 忽禮我足 神通光明相好無比照徹此間

蛤天人以偈而答 往昔爲蛤身 於水中覓食 聞佛說法聲 出至草根下 有一牧牛人 持杖來聽法 杖劖刺我頭 命終生天上

佛以蛤天人所說偈 爲四衆說法 是時衆中八萬四千人 皆得道跡 蛤天人得須陀洹果 合掌而去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도리천(忉利天) ; 욕계에 있는 육욕천(六欲天)의 하나. 도리(忉利)는 33이라는 뜻, 천(天)은 신(神)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 33신(神)들이 사는 곳.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이 수미산인데, 이 수미산 정상에 있으며, 중앙에 왕인 제석(帝釋)이 있고 사방의 봉우리에 각각 8신(神)이 있어 33신.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수다원(須陀洹) ; 산스크리트어 srota-āpanna 팔리어 sota-āpanna의 음사(音寫). 예류(預流) · 입류(入流)라고 번역.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은 성자. 깨달음의 길을 하천의 흐름에 비유하여 그 흐름—처음으로 성자의 계열에 들었으므로 예류 · 입류라고 함.

이 경지를 수다원과(須陀洹果) · 예류과(預流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수다원향(須陀洹向) · 예류향(預流向)이라 함.

초기불교에서 - 성문(聲聞)으로서 - 해탈하는 길은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하여,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陀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의 4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견혹(見惑) ; ①사제(四諦)를 명료하게 주시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 번뇌에는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견(見取見) · 계급취견(戒禁取見) · 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가 있음. 

② 유식설에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그릇된 지식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 곧 분별기(分別起)를 말함.

*소승사과(小乘四果) ; 성문사과(聲門四果).

*사향사과(四向四果) ;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 네 단계의 수행목표[向]와 그 도달경지[果]를 가리키는 말.

수다원(須陀洹 : 預流), 사다함(斯陀含 : 一來), 아나함(阿那含 : 不還), 아라한(阿羅漢 : 無學道)의 넷에 각각 향(向)과 과(果)를 배정하여 「수다원향 · 수다원과」 「사다함향 · 사다함과」 「아나함향 · 아나함과」 「아라한향 · 아라한과」의 여덟이 된다.

 

수다원향은 일체의 견혹(見惑 : 이론적인 번뇌)을 끊으며, 사다함향 · 아나함향에 의해 일체의 욕계(欲界)의 사혹(思惑 : 情意에 의한 습관적 번뇌)을 끊고, 아라한향에서는 삼계(三界 : 欲界 ·色界 ·無色界)의 사혹을 끊는다. 따라서 삼계의 일체의 견혹 · 사혹의 번뇌가 모두 끊어지면, 이 때에 아라한과(阿羅漢果)가 달성된다.

 

아라한과는 이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도(無學道 아라한)라고도 하며, 그 이전의 일곱은 아직도 상위(上位)가 있어서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경지이므로 칠종유학(七種有學)이라고 한다.

예류(預流 수다원)에서 불환(不還 아나함)까지는 개울의 흐름이나 외갈래길로 상정(想定)하여, 흐름을 타고 있는 자가 예류(預流 수다원), 한 번 뒤로 돌아갈 상태에 있는 자가 일래(一來 사다함), 다시 되돌아가는 일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상태를 불환(不還 아나함)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과(聖果) ; 성자(聖者)의 지위. 성인(聖人)의 도달경지[果].

성자, 성인이란 무루혜(無漏慧, 번뇌를 끊어내는[無漏] 지혜[慧])의 일부를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도(聖道, 성스러운 길, 성인의 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말한다.

수도(修道), 성도(聖道)는 부파불교의 사향사과(四向四果), 대승불교의 보살십지(菩薩十地)를 말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외골수 ; 외곬. ①단 한곳으로만 트인 길. ②단 한 가지의 방법이나 방향.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고인전지(古人田地) ; 고인의 경지(境地). 고인의 깨달음.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No.345)—(게송)共知光影因燈現 ~ | 부처님 법 가운데에 최고의 법이 활구참선 | 수행인은 썩은 나무둥치처럼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야 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15분 17초)

 

[법문] 송담스님(No.345)—1988년 1월 첫째일요법회(88.01.03) (용345)

 

공지광영인등현(共知光影因燈現)하고  함위파도장수흥(咸謂波濤仗水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등멸수침파영진(燈滅水沈波影盡)하면  정감문외긱오등(政堪門外喫烏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공지광영인등현(共知光影因燈現)이요. 빛과 그림자는 등불로 인해서 나타난다. 등불을 켬으로써 밝은 광명도 나오고 밝은 광명이 있음으로 해서 또 그림자도 나타난다 그말이여.

함위파도장수흥(咸謂波濤仗水興)이다. 파도는 물을 의지해서 일어나지, 물 없는 곳에는 파도도 일어나지를 않는다. 이러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바요, 다 말하는 바다 이것입니다.

 

등멸수침파영진(燈滅水沈波影盡)이요. 등불이 꺼지고 물이 잠잠해지면 그림자도 없어지고 또 파도도 없어진다.

등불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있고 물이 있기 때문에 파도가 일어나는데, 등불이 꺼져버리고 물이 없은다면은 그림자도 파도도 없어질 것이다.

 

정감문외긱오등(政堪門外喫烏藤)이다. 그래야사 감히 문밖에 오등(烏藤)을 먹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등이라 하는 것은 참 향기로운 약초인데.

 

'내'라고 하는 아상(我相) · 아만(我慢) · 아애(我愛) · 아치(我癡) 이러한 것이 내게 있기 때문에 모든 거기에서 탐진치(貪瞋癡)가 일어나고, 삼악도(三惡途)가 일어나고, 육도윤회(六途輪廻)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공(空)해 버린다면, 능(能), 주관이 공한다면 객관은 따라서 공해지는 것입니다. 주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이 속담에 「잘되는 것은 지가 잘나서 잘되고, 못되는 것은 다 조상 탓」이라고 그러는데, 그런 속담이 있는데.

잘되고 못되고 한 것이 전부 다른 사람한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등불을 계속 켜 놓고 '그림자가 나타난다'고 한탄을 하고. 물을 놔두고서, 물이 있는데 물은 그냥 놔두고서 '물결 일어난다'고 탓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더군다나 이 말세(末世)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인데, 항상 남을 원망하고 남을 미워하고 또 남을 이뻐하고 집착을 하고 이래가지고 그 서로 은혜가 있고 서로 사랑하고 이뻐하면은 그것이 또 이후에 미움과 원망으로 또 바뀌는 것입니다.

 

원래 원수는 다 친한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여.

다생원채(多生怨債)가 기어친(起於親)이여. 다생(多生)에 원수 빚이 다 친한 데로부터 인연해서 일어나는 것이여. 막약다생(莫若多生)에 불식인(不識人)이다. 원수가 없을라면은 다생에 사람을 아지 못한 것만 같지 못하다.

 

사람을 알게 되면은 친해지고, 친해지면 그것이 원수가 거기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원수가 없고자 하면은 사람과 친하지를 말아라' 이런 뜻인데.

 

이 사바세계, 우리가 다생에 온갖 인연(因緣)으로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숙세에 심은 맺은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부모자식으로 형제간으로 부부간으로 친구 간으로 이웃으로 이렇게 태어나고,

전생에 지은 공업(共業)으로 해서 한 나라의 국민으로도 태어나고 또 인류로 이렇게 태어나서 그래가지고 흥망성쇠와 희로애락과 빈부귀천으로 우리가 이렇게 솜털 얽히듯이 이렇게 얽혀서 살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나는 일체 사람을 사귀지 말으리라. 일체 원수 맺기가 싫으니까 누구하고도 친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해서 사람을 피하고 산중 굴속으로 들어가서 혼자 그렇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맺어진 인연, 이미 내가 진 빚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갚아야만 되고, 갚지 않으면은 그 빚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따라다니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자(佛子)로서 올바르게 이 한 생을 살고, 올바르게 해탈로를 가기 위해서는 아는 사람을 끊어버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도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고, 있는 고대로 놔두고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지혜롭게 단속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자기를 단속한다'고 하는 것은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팔만사천(八萬四千) 방편(方便)이 있습니다마는 그 팔만사천 법문이 낱낱이 다 훌륭하고 좋은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인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을 한데 뭉쳐서 그놈을 완전히 아주 고아가지고 그래가지고 가장 아주 이 간결하고도 요긴한 법으로 추출한 것이 바로 참선법이다.

 

이 참선법 속에는 팔만사천에 묘법(妙法), 묘(妙)한 방편이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경(經)도 갖추어져 있고, 염불(念佛)도 갖추어져 있고, 주력(呪力)도 갖추어져 있고, 육바라밀(六波羅蜜)도 그 속에 갖추어 있고, 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도 그 속에 갖추어져 있고,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도 다 갖추어져 있고, 법이란 법은 이 활구참선법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온갖 종류의 풀을 모두 뜯어서 그래가지고 한데 싸 가지고 그놈을 쌓아서 놓으면은 그놈이 거기서 열이 나가지고 푹 썩으면 본래 그 풀이 가지고 있던 그 모양은 다 분해가 되어 가지고 보이지 않지만, 그 여러 가지 풀이 쌓여서 거기서 썩어서 없어짐으로 해서 거기에서 다른 곡식을 잘 자라게 할 수 있는 비료성분이 거기서 조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낱낱이 그 풀의 모양이 썩지 않고 생으로 그냥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훌륭한 퇴비가 아닌 것입니다. 썩지 아니한 풀을 갖다가 곡식 뿌리 가까이 묻어 놓으면 그 곡식은 결국은 뿌리가 썩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을 본 사람이나 또는 어떠한 주력을 했거나 염불을 했거나 기도를 했거나 자기가 10년 20년 열심히 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얻은 바가 있다하더라도 그러한 것들을 완전히 다 썩쿼서 그것을 갖다가 그 상(相)이 썩어서 없어져 버려야 진정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나아갈 수가 있고 최상승법을 닦고 실천해 나가는 데에 좋은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주력이나 또는 어떤 기도 같은 것을 열심히 하면 무슨 오신통(五神通)—남의 마음을 환히 안다던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사에 대해서 알게 된다든지,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다든지 또 남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든지,

그러한 신통력(神通力), 그런 그 초능력을 한 가지 내지 몇 가지를 얻었다 할 때에, 그런 것을 자기가 얻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은 이 최상승법 정법을 닦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로 해서 장애가 되어 가지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갖 종류의 풀이 자기의 모양을 고대로 유지하는 동안에는 곡식을 위한 참으로 훌륭한 비료가 거름이 될 수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지식이나 학식이나 또는 권력이나 명예나 또는 자기가 부귀 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기술이라든지 힘이라든지 심지어는 신통력까지라도 그러한 것을 속에 지니고 거기에 집착해 가지고서는 정법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공부하는 사람은 다 놔 버리고 백지(白紙) 상태가 되어야 해.

그래서 만공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참선하는 사람은 완전히 썩은 나무둥치처럼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야 한다. 또 바보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무가 바르고, 곧고 좋은 나무는 목수들이 집을 짓기 위해서 다 비어 가는 것이고, 요새는 이리저리 이상하게 생긴 나무 뿌럭지는 모다 조각하는 사람들이 다 캐 가고, 또 비뚤어진 나무는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기 위해서 다 비어 가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썩은 나무둥치, 몇십 년 되어 가지고 그놈이 버글버글하니 썩은 나무둥치는 목수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나무꾼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무슨 조각하는 사람도 돌아다보지를 않는다. 그러한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정말 몸과 목숨을 이 정법에 바쳐서 활구참선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가 있다.(24분17초~39분3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공지광영인등현~’ ; 『신심명(信心銘)』(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能隨境滅 境逐能沈’ p107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①오온(五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형성된 아(我)를 실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 ②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타자와 구분짓는 자의식 또는 그것을 형성하는 온갖 관념의 집합.

*아만(我慢 나 아/거만할·게으를 만) ; ①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아(我)를 실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우열의 관점에서 남과 나를 차별하여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아관.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애(我愛) ; 아(我)에 대한 깊은 애착심. 아탐(我貪).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치(我癡) ; 아(我)에 대한 무지(無知).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여 일으키는 번뇌. 네 가지 근본번뇌(四根本煩惱, 四惑) 중 나머지 세 가지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이다.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공(空) ; ①모든 존재는 여러 인연으로 생겨남으로 항상 독자적으로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 자성이 없음(無自性).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가 불교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공은 전혀 없다는 무(無)나, 결국 사라져 덧없다는 허무(虛無)가 아니다. 또 공(空)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실체 · 본질이 아니라, 존재의 무실체성 · 무자성 등을 자각함으로써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표이다.

공을 허무나 실체로 보는 것은 공에 대한 집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참된 공[眞空]이 아니라 무기공(無記空) · 편공(偏空) · 악취공(惡取空) 등이라고 한다. 이러한 공의 병[空病]에 대한 약으로 '공도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②차별과 분별로써 인식된 대상은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 가치나 감정이 부여된 인식 대상은 인식 주관이 조작한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대상은 허구라는 뜻.

③잇달아 일어나는 분별과 망상이 끊어진 상태. 번뇌와 분별이 소멸된 상태. 분별과 차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투쟁견고(鬪諍堅固 싸움 투/다툴 쟁/굳을 견/굳을 고) ;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이천오백 년을 불법(佛法)의 성쇠(盛衰)에 따라 나눈 다섯 시기 가운데 다섯 번째 시기. 수행승들이 자기 주장만 옳다고 싸워 불법이 자취를 감추는 시기이다.

*다생원채기어친(多生怨債起於親) 막약다생불식인(莫若多生不識人) ; '다생, 무량겁 원수 빚이 친한 데에서 일어나니, 다생에 사람 알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다'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預修十王生七齋儀纂要)』 (大愚集述) 제13 소청명부편(召請冥府篇) 게송 참고(한국불교전서 제11권).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공업(共業) ; 모든 중생에게 공통(共通)되는 업(業)이라는 뜻. 모든 중생에게 공통된, 중생에게 한 가지로 나타나는 업. 공동(共同) 으로 고락의 과보를 받는 원인이 되는 선악의 행위. 모든 중생이 함께 사용하는 기세간(器世間 중생이 의지하고 있는 세간, 산하대지 등의 세계)의 과(果)에 감응하는 원인이 되는 것.

예를 들면, 같은 공간에 있는 행(行)은 공업(共業)으로 있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각각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별업(別業)이라 한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만공월면(滿空月面) ; (1871~1946) 법명은 월면(月面), 호는 만공(滿空), 속명은 송도암(宋道岩).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1871년(신미년) 3월 7일 출생하였다. 1884년(갑신년) 14세에 태허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로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계속 천장암에서 지내다, 어른 시봉(侍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5년(을미년)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하룻밤을 지나 새벽 종송(鐘頌)을 할때,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그 후 마곡사 근처 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스님 나이 26세 때, 1896년(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 선사가 오시니, 선사께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였다.

경허 선사가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 하나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스님의 대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선사가 ‘네가 일찌기 다비문(茶毘文)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경허 선사가 다시 묻기를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선사가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 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하고,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으라.’하고 떠났다.

 

그 후 정진하던 중 경허 선사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1898년 7월에 선사가 계신 서산(瑞山)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지내다가, 경남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 선사께 청첩장이 와서 선사를 모시고 계명선원에 가서 하안거를 마치고, 선사와 배별(拜別)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31세 때(1901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며 지내다가, 34세 때(1904년 7월 15일)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른 경허 선사를 뵙고, 그동안 공부를 지은 것을 아뢰니, 선사가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운월계산처처동(雲月溪山處處同)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대가풍(叟山禪子大家風)  수산선자(叟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은근분부무문인(慇懃分付無文印)  은근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일단기권활안중(一段機權活眼中)  한조각 권세 기틀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1905년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한 초암을 짓고 지내고, 그 뒤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마하연(摩訶衍)에 가서 3년을 지내고,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한 한칸 띳집을 짓고 지내다, 1946년(병술년) 10월 20일에 목욕 단좌(端坐)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入寂) 하였다.

나이 76, 법랍(法臘) 62. 제자들이 스님의 법어를 모은 「만공법어(滿空法語)」가 있다.

[참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무용지물(無用之物 없을 무/쓸 용/어조사 지/물건·만물·사물·일·사람 물) ; 아무짝에도 쓸데[用]없는[無] 물건이나 사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No.685)—(게송)爲他爲己雖微善~ | 무루 조사선인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해야 영원히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4분 18초)

 

[법문] 송담스님(No.685)—2004년 하안거결제 법문(04.06.02) (용685)

 

위타위기수미선(爲他爲己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위타위기(爲他爲己)는 수미선(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거, 비록 그것이 선(善)이 아닌 것은 아니야. 틀림없이, 남에게 보시를 한다든지 자원봉사를 한다든지 다 그것이 선(善)이기는 선이나 그것이 조그만한 선(善)이다 그말이지. 그러나 이것이 다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는 원인밖에는 안 된다 그거죠.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해 가지고 상(相)을 내고, 자랑을 하고, 그러면 그것이 선을 지은 만큼 복을 받기도 하고 또 천당에 가기도 하고 하나 영원성이 없어.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쏘면 아무리 큰 장사(壯士)가 화살을 쏘았다 하더라도 그 올라간 만큼 올라갔다 다시 또 땅으로 떨어지듯이 좋은 일을 해서 복을 받는데, 큰 복을 받는 사람도 있고 작은 복을 받기도 하나, 크나 작으나 복 받을 만큼 받으면 다시 또 타락을 하게 되니까 그것이 영원성이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영원성이 있느냐?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원컨대 솔바람 불고 칡덩쿨 사이로 달이 비치는 그런 데에 가서 길이 무루(無漏)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고자 한다.

 

무루 조사선이라는 게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활구참선(活句參禪)이여.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이 말씀입니다.(처음~4분3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위타위기수미선(爲他爲己雖微善)~'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무루(無漏 없을 무/샐·구멍·번뇌 루) ; 유루(有漏)의 대칭어.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번뇌에서 벗어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음 상태. 번뇌가 사라진 경지.

누(漏)는 누설(漏泄, 漏洩 흘러나온다)의 뜻으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곧 육근(六根)과 아홉 구멍(九孔)에서는 항상 부정한 것이 흘러나오므로 누(漏)라 한다. 혹은 누(漏)란 누락(漏落)의 뜻으로 중생을 삼악도(三惡途 :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이러한 누(漏)를 동반한 법을 유루, 그렇지 않은 법을 무루라 한다.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서 이치나 일에 걸림이 없는 선.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조사선이 곧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전강 조실 스님 ;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

최상승법(No.428)—의단독로하여 사량분별이 끊어져 깨달음에 나아감, 三無差別 | 義理禪 | 나귀 뒷발질 |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먹은 이야기.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1) 17분 29초.

(2) 10분 17초.

 

[법문] 송담스님(No.428) - 1990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용428)

 

(1)------------------

 

부처님, 우리는 '부처님, 부처님'하고 몹시 참 공경하고 또 사모하고 떠받듭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말은 부처님인데 그분이 믿고 있는 부처님의 내용에는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경을 많이 본 사람 또 경 가운데에도 무슨 경—화엄경을 많이 봤느냐, 법화경을 많이 봤느냐, 원각경을 많이 봤느냐, 또는 금강경을 많이 봤느냐, 어느 경을 많이 봤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마음속에 공경하고 그리워하는 임의 모습이 다를 것입니다.

또 경을 전혀 보지 않고 아미타불만을 열심히 부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 나름대로의 거룩한 부처님이 있을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을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또 그 사람 나름대로의 거룩한 부처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엄경에는 ‘부처님과, 우리 중생의 마음과, 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모든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왜 그러냐? 삼계(三界)는 오직 한마음 뿐이고, 마음밖에는 별(別) 법(法)이 없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은 이 세 가지가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해나 달이나 별이나, 산이나 들이나 돌맹이 그 조그만한 모래알 하나도 우리의 마음의 나타남이여.

우리가 마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그것은 모래도 아니고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모래이고 모래가 존재하는 것이여. 그래서 태양도 역시 마찬가지요, 달도 역시 마찬가지여.

 

달은 저 홀로 창공에 떠서 휘황창 밝아 있지만, 보는 사람이 슬픈 눈으로 보면 그 달은 슬프고, 기쁜 마음으로 그 달을 보면 그 달은 기뻐. 그 달 자체는 '내가 슬픈 달이다, 기쁜 달이다'하는 것이 없거든. 보는 사람이 슬픈 달도 만들고 기쁜 달도 만드는 거여.

봄에 아름답게 피는 향그러운 꽃도 기쁜 사람이 볼 때 아름다운 것이지, 슬픈 사람이 보면 조금도 아름답지를 안 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해(苦海)다, 말세(末世)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다,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부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바세계나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다 같은 적광토(寂光土)여.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보니까 이 세계가 고해지,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십팔천(二十八天)이나 삼십팔천이나 극락세계나 여기나 똑같은 곳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왜 부처님께서 말세니, 부처님께서 고해니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중생의 입장이 되어서 그렇게 중생이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發心)하게 하기 위해서 중생의 말을 빌려서 하신 것이지, 부처님 스스로에게는 모두가 극락세계요, 모두가 깨달음의 세계요, 모두가 부처님의 몸뚱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불자(佛子)는 슬픈 생각이 나거나, 기쁜 생각이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누가 원망스럽거나 야속하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화두만(話頭)을 거각(擧却)하면 되는 것이여.

 

화두는 무엇이냐?

 

중생의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해결 되는 것이 아니여.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 ‘이뭣고?’,

‘이뭣고?’ 한번 터억 거각할 때 슬픔도 거기에서는 끊어져 버리고 기쁨도 끊어지고 원망도 끊어지고, 괴로움도 끊어지며 즐거움도 끊어지고 선(善)도 끊어지고 악(惡)도 끊어져. 그럴 때에 우리는 해탈(解脫)로 한 걸음 나아가는 거여.

 

찰나(刹那) 동안 ‘이뭣고?’를 하면 찰나 동안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1분 동안 ‘이뭣고?’를 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함으로써 사량이 끊어지면 1분 동안 내 마음과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거여.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거든.

 

그러기 때문에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일부러 사량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을 없앨려고 할 것도 없어. ‘이뭣고?’ 콱 막혀 나가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거든.

 

하물며 교리나 경전에 있는 여러 가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을 해 가지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이리저리 분석하고 따지고 비교해서 ‘아! 이것이 이 말이로구나’ 이렇게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 가지고 그것이 깨달음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자기 본참공안도 그러려니와 문헌에 있는 공안이 천칠백 공안이라 그러는데 그러한 공안을 그러한 식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래 가지고 '아! 이것이로구나' 그러한 걸 의리선(義理禪)이라 그러는데 그러한 식으로 해서 이백 개, 삼백 개 내지 오백 개, 천 개의 공안을 알아맞춘들 그럴싸한 해결을 답을 얻어낸들 그것이 참 깨달음과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렇게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날마다 공안을 따져서 분석하는 무슨 법회를 열어 가지고 계속 날마다 공안을 풀어서 아르켜주면 그까짓 것 1년 걸려서 천칠백 공안을 따지기로 한다면 그거 못할 거 없는데, 그냥 도인(道人)이 막 쏟아져 나올 것 같지만 그렇게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말이여.

 

 

<천주교 신부의 의리선(義理禪)>

 

봄엔가 인도 사람인데, 천주교 신부인데 참선을 하기 위해서 일본에 와 가지고 5년인가를 지금 선원에 있다고 그래.

그런데 그이가 말하기를 자기는 오백 개의 공안을 통과했기 때문에 천 개를 통과해야 로시, 로시는 노사(老師) '늙을 로'자, '스승 사'자—한국에서는 조실(祖室) 스님이라 그러는데 일본에서는 노사라 그래. 일본 발음으로 로시라 그러는데.

천 개를 맞추면 로시가 될텐데 자기는 아직 5백 개 밖에는 못해서 로시 자격은 못 따고 그냥 참선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만 받았다고.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참선을 안 하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다고 그래서 그 활구참선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서 왔다 그래.

그런 사람이 있어서 한국에 어느 수도원에 수녀 몇 분과 그 인도 신부 분이 특별히 이리저리 사람을 넣어서 여러 차례 교섭을 해와서 안 만날라야 안 만날 수가 없어서 만났더니 그런 말을 하더라 그말이여.

한국에도 일본에 그러한 의리선이 서적도 많이 들어오고 또 거기서 그런 참선을 하다가 온 거사님네들도 있고 그래 가지고 상당히 이 일본의 의리선(義理禪)이 지금 자꾸 번져가고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학식이 많은 분들은 꽉! 맥히는 화두 하나만을 가지고 계속 ‘이뭣고?’를 하라 하니 별로 재미가 없고, 와서 법회에 참석해 봤자 별로 재미있는 소리도 없고 밤낮 꽉 맥혀서 '이뭣고?'만 하라 하니 별 재미가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의리선 일본책을 읽어보니까 아! 곧 재미가 있고, 몇 개를 읽어보니까 자기도 무슨 공안을 들어보면 자기 나름대로 가늠이 가고, 그 참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학자 · 교수 그런 분들이 그러한 참선을 모다 해 가고 있는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거 해 가지고 오백 개 내지 천 개를 통과해서 로시 자격을 받으면 일본 가서는 혹 밥이라도 빌어 먹을란가 모르지마는 한국에서는 그런 참선은 소용이 없어.

설사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이 독로한 채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고 숨을 거두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한 참선을 해 가지고 무엇을 할려고 그런 참선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그런 참선 해서 공안을 열 개 내지 백 개 그것 통과하기도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닌 모양이야. 나 그것 통과 안 해 봐서 잘 모르지마는.

그것도 참 자기 나름대로 밤잠을 안 자고 몇번 골이 터질라다 말아야 무엇이 하나씩 터진다고 그래. 그래서 하루저녁에 한 개씩 터진 사람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하고 나면은 아주 골이 아파서 못 견딘다고 그러는데.

 

 

<중국 검주땅 나귀란 놈 뒷발질 이야기>

 

옛날에 중국에 검주란 곳에는, 검주가 지금에 무슨 성(省)에 있는가는 모르겠는데 검주에는 나귀가 없었어.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귀를 타고 검주 땅에를 떠억 들어갔어.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그게 무슨 짐승인지 전혀 모른다 그말이여.

 

아, 그런데 호랑이가 그 나귀를 보고 검주에는 그 나귀란 짐승이 없기 때문에 전혀 무엇인 줄 몰라. 사람들도 모다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모다 수근수근 해쌋고, 호랭이도 보니까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라 그말이여. 그래서 참 겁을 집어먹고.

그 산중에서는 호랑이가 왕이라 그러는데, 아 호랑이도 처음 봐나서 영 겁을 집어먹고 있는데. 그래서 살살 이렇게 피하면서 있는데.

 

나귀란 놈이 모두 자기를 보고 무서워하고 그러니까 신바람이 났던지, 턱! 호랭이가 가까이 오니까 발길질을 했다 그말이여.

그 호랭이가 한번 채이고 보니 별로 그 뭐, 나귀한테 채였다고 호랭이가 죽것습니까? 별로 큰 충격을 안 받았어.

 

'오! 니놈이 별놈인 줄 알았더니 한번 채여 보니 너 별놈 아니로구나. 니가 가진 재주는 겨우 뒷발질하는 거밖에 없구나. 요자식 맛 좀 봐라' 손톱으로 그냥 콰악 배아지를 갖다가 찍어서 쭉 훌터 버리니까 창시가 툭 불거져 버려.

 

공안 몇 개, 의리선으로 따져서 알아 가지고 어디 가서 자기도 한소식 한 것처럼 뽐내 봤자, 전혀 그런 거 모르는 사람한테는 가서 그것이 통할란지 모르지만, 환히 알고 보고 있는 사람 앞에 가서 나귀란 놈 검주땅에 가서 뒷발질하듯이 한바탕 차 봤자 제 살림만 드러나거든.

어디 가서 밥 빌어먹을 짓이 없어서 의리선으로, 의리로 공안 몇 개 따져서 그것 해 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뽐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23분8초~40분 38초)

 

 

 

(2)------------------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먹은 이야기>

 

어떤 마을에서 생전 우유를—거기는 또 소가 없었던지, 젖 짜는 소가 없어 우유를 맛을 몰랐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우유를 먹으면, 암소를 키우면 그 젖을 먹으면 여러 사람이 먹고 영양을 섭취할 수 있고 달고 맛이 있다고 자랑을 하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의논을 해 가지고 돈을 모아서 구장과 몇 사람 대표를 뽑아 가지고 젖 짜는 소를 사오라고 보냈어.

 

여기저기 돌아다녀봤자 이 사람 보고 물어봐도 모르고 저 사람 보고 물어봐도 모르고. 어떤 사기꾼을 만났던지 젖 짜는 소를 물으니까, 마치 그 사기꾼한테 숫나귀가 한 마리 있었어.

 

"아, 그너냐! 나한테 그 젖 짜는 소가 있는데 참 젖이 많이 나온다"고. "돈을 얼마나 가져 왔냐?"고.

"삼백 냥을 가져 왔다"고.

 

"그래, 삼백 냥 갖고는 도저히 안 되지만 그렇게 멀리서 왔다니, 그럼 삼백 냥만 받고 팔테니 그러면 우리 소를 가져가라"고. "처음에는 좀 짭짤하지만 오래 먹으면 참 구수하고 좋으니까, 가지고 가서 잘 먹으라"고.

그래서 숫나귀를 삼백 냥을 주고 떠억 사 가지고 왔다. 오니까 온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구경할려고 모여 들었는데, '저놈한테서 그렇게 맛있는 젖이 나온다 말이냐'고.

 

그래 가지고 쭈물떡 쭈물떡 하니까 팔뚝만한 놈이 나오는데, 한참 있으니까 쏟아지는데 몇 바깨스가 나왔다 말이야. 그놈을 온 마을 사람들이 아주 한 방울도 땅에 떨어질까 조심하면서 그놈을 먹으니까, 아 참 짭짤한 것이 생전 처음 먹어 보니 '이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란 말이냐'고.

그래 가지고 날마다 곡식에다가 잔뜩 먹여 놓으니까, 이놈이 또 물을 갖다주면 몇 바께스씩 들이키고 눈 것이 오줌만 나와.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우유가 무엇인 줄을 모르니까,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여러 달 동안을 먹었다 그말이여.

 

그 집 마을에 딸을 여워서 사돈네가 왔는데, 사돈네가 왔다고 특별히 집안 식구 안 먹고 우유를 대접을 했는데 그 되게 자랑을 했어.

"우리 마을에는 이런 좋은 것이 있다"고. "사돈이 오시니 일부러 대접을 하니 좀 잡숴보라"고.

 

맛을 보니까 고약하거든. "어디 그 소 좀 구경할 수가 없느냐?"고.

"이거 함부로 구경 못 시키는데 사돈이 오셨으니까 내가 특별히 구경을 시킨다"고. "절대 잡인을 금지 한다"고.

 

가서 보니까 나귀를 갖다 놓고 그러거든. "이것은 소가 아니라고. 이건 나귀라고 하는 것이라"고.

곧이를 안 들어. "사돈이 아직 소를 구경을 못 하셔서 그러실 거라"고. "이건 흔한 것이 아니라"고. "참 수백 냥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것인데 사돈이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상대를 안 해 버려.

 

서울 구경 안 한 사람이 서울 구경한 사람보다 더.... 서울 구경한 사람이 진다고.

'남대문 문턱이 있느냐, 없느냐?' 아마 여러분 가운데에도 남대문 문턱이 있는가 없는가, 확실히 아시는 분이 아마 적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울에 사셔도.

 

시골 사람은 다 알고 있어. 서울에 안 와 본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 서울에서 몇십 년을 살아도 서울 남대문 문턱이 있는가 없는가 그걸 모르거든.

소젖을 먹어 보지 아니한 사람은, 이미 사기꾼한테 나귀의 오줌이 소젖이라고 한번 깊이 선입관(先入觀)이 들어버리면 실지 소젖 먹은 사람 말을 안 듣거든.

 

아마 불법(佛法)도 최상승법(最上乘法), 정법(正法)을 만나기 전에 자기 나름대로 소승법 중승법에 설하신 방편법(方便法)에 이미 깊이 물들어버리면 최상승법 일러 주어도 잘 믿지 않습니다. 여간해서 이 최상승법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설사 ‘법문 들으러 가자’고, ‘최상승법을 믿어야지 그런 방편설에 떨어져서 그래서는 안된다’고. 마지 못해서 친구나 사돈에 끌려서 와서 들어보면, 오늘은 내가 특별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만 별로 들어봤자 별 재미있는 소리 안 하거든요.

와서 한 번 두 번 들어보고 잠만 오고 그러니까는 ‘아이고, 나 바쁘다’고 핑계대고 안 와 버린다 그말이여.

 

'이런 말이 설마 경전에 있을까? 아마 송담 스님이 지어내서 저런 얘기를 하지 않은가?'하실는지 모르지만 『백유경(百喩經)』에 분명히 이 설화가 들어있거든요.

여러분은 다행히 이 최상승법을 믿고 이 법당 가득히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어. 아마 그전에 언젠가도 내 이 설화를 말씀드린 기억이 있지만 오늘은 내가 특별히 다시 한번 말씀을 드렸어.

 

최상승법을 믿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렵고 또 그것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실천을 하기는 더욱 어렵고.

 

듣기도 어렵지마는 듣고 또 믿기 어려운데 믿었다 하더라도 조금 해 보다가 별 재미가 없으면은 중단해 버린 사람이 있거든.

중단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해 나간 분이라면 그분은 이미 보통 분이 아니여. 숙세(宿世)로부터 이 최상승법에 깊이 인연을 심고 심어서 삼생(三生) 이내에—금생에 인연이 성숙한 분은 금생에 깨달을 수도 있고, 아무리 늦어도 삼생 안에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리라고 나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삼생은 꼭 이 몸뚱이가 죽었다가 또 태어나고, 또 한평생 살다가 공부하다가 죽어서 또 태어나고 한 그런 삼생도 포함되지만, 한 생각 한 생각을 한 죽음으로 생각하고 새로 태어남으로 생각한다면은 삼생은 그렇게 먼 것이 아닙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요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다.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고, 무량원겁이 곧 이 ‘한 생각’이거든.

그래서 일초즉입여래지(一超卽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들어간다.(40분46초~51분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님(임) ; 사모하는 사람. ‘님’은 ‘임’의 옛말.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화엄경에는 ‘부처님과, 우리 중생의 마음과, 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모든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나타낸 말.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별(別) ; [주로 ‘없다’, ‘아니다’ 따위의 부정어나 부정적인 의미의 명사 등과 함께 쓰여]보통과 다르게 별나거나 특별한.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투쟁견고(鬪諍堅固 싸움 투/다툴 쟁/굳을 견/굳을 고) ;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이천오백 년을 불법(佛法)의 성쇠(盛衰)에 따라 나눈 다섯 시기 가운데 다섯 번째 시기. 수행승들이 자기 주장만 옳다고 싸워 불법이 자취를 감추는 시기이다.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상적광(常寂光). 법신불(法身佛)이 머무르는[住] 정토(淨土).

상적광토는 이상(理想)과 현실(現實), 정(靜:寂)과 동(動:光)의 본래(本來:常) 일체(一體)인 세계로 그것은 여기와 저기,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넘어 체득되는 참된 절대계(絕對界)이고, 상주(常住)의 정토(淨土)이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이십팔천(二十八天) ; 삼계제천(三界諸天)을 통틀어 이르는 말. 곧, 욕계(慾界)의 육천(六天)과 색계(色界)의 십팔천(十八天)에 무색계(無色界)의 사천(四天)을 합친 스물여덟 개의 하늘이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열가지 병이 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참고] 송담스님(No.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 (2분 10초)

공안(화두)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 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

 

요새 일본식 참선이 수입이 돼 가지고 화두 하나를 이리저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다른 화두를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를 해결 지어 놓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해서, 10개 20개······, 화두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며 참선을 하는 지성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런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쪼끔 생각 있는 사람이면 능히 알고도 남을 상식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안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를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합니다. 활구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중국 검주땅 나귀란 놈 뒷발질 이야기> ; 검려지기(黔驢之技 검을 검/나귀 려/갈 지/재주 기) ; 검주(黔州)에 사는 당나귀[驢]의 재주[技]. ①보잘것없는 재주와 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자신이 솜씨와 힘이 없음을 모르고 뽐내다가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것을 비유한 말.

당송8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유하동집(柳河東集)』 제19권 '삼계편(三戒篇)'의 우화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검려(黔驢), 검려기궁(黔驢技窮)도 같은 뜻의 말이다.

 

[참고] 『유하동집(柳河東集)』 제19권 「삼계편(三戒篇)」 '검지려(黔之驢)'

黔無驢 有好事者船載以入 至則無可用 放之山下 虎見之 龐然大物也 以爲神 蔽林間窺之 稍出近之 憖憖然莫相知 他日 驢一鳴 虎大駭遠遁 以爲且噬已也 甚恐 然往來視之 覺無異能者 益習其聲 又近出前後 終不敢搏

 

검주(黔州)에는 당나귀가 없었다. 호기심이 많은 어떤 사람이 당나귀 한 마리를 배로 실어 왔다가 쓸모가 없자 산 아래 풀어 놓았다. 호랑이가 이 당나귀의 큼직한 모습을 보고 신수(神獸)라고 생각하고 숲속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펴보았다. 얼마 후 숲에서 나와 당나귀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날 당나귀가 울어 대자 호랑이는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줄로 생각하고 크게 놀라 멀리 도망쳤다. 하지만 왔다갔다하면서 보는 사이 특별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 소리에도 익숙해져 다시 앞뒤로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만 끝내 건드려 보지는 못했다.

 

稍近益狎 蕩倚衝冒 驢不勝怒 蹄之 虎因喜 計之曰 技止此耳 因跳踉大㘚 斷其喉 盡其肉 乃去 噫 形之龐也類有德 聲之宏也類有能 向不出其技 虎雖猛 疑畏 卒不敢取 今若是焉 悲夫

 

점차 가까이하여 익숙해짐에 따라 이리저리 건드려 보면서 덤벼들어 보았더니 당나귀가 화를 참지 못하고 발길질을 해 댔다. 호랑이는 기뻐하며 이를 헤아려 말하기를 “재주라곤 이것뿐이로구나”하며, 크게 으르렁거리며 뛰어올라 목줄을 끊고 그 고기를 다 먹어 버리고 떠나갔다.

아, 몸집이 큰 것이 덕이 있는 듯하고, 소리가 크기로는 재능이 있는 듯하나, 애당초 그 기량을 내보이지 않았다면 호랑이가 비록 사납더라도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끝내 감히 취하지 못했을 것을, 지금 이와 같으니 안타깝도다.

 

 

 

------------------(2)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먹은 이야기> ; 『백유경(百喩經)』 (제4권) (존자 승가사나 찬집 尊者僧伽斯那撰, 소제 천축삼장 구나비지 한역 蕭齊天竺三藏求那毘地譯 | 한글대장경) '구려유유(搆驢乳喩)'

 

77. 나귀의 젖을 알지 못하는 비유(搆驢乳喩)

昔邊國人不識於驢 聞他說言驢乳甚美 都無識者 爾時諸人得一父驢 欲搆其乳 諍共捉之 其中有捉頭者 有捉耳者 有捉尾者 有捉腳者 復有捉器者 各欲先得於前飮之

 

옛날 변방의 어떤 나라 사람들은 나귀를 알지 못하고 다만 다른 사람들이 ‘나귀의 젖은 매우 맛나다’는 말만 들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수나귀 한 마리를 얻어 그 젖을 짜려고 서로 다투어 붙잡았다. 그중에 어떤 이는 머리를 붙잡고 어떤 이는 귀를 붙잡고 어떤 이는 꼬리를 붙잡고 어떤 이는 다리를 붙잡고 또 어떤 이는 생식기를 붙잡고서 제각기 먼저 젖을 짜 마시려고 하였다.

 

中捉驢根謂呼是乳 卽便搆之望得其乳 衆人疲厭都無所得 徒自勞苦空無所獲 爲一切世人之所蚩笑

 

그중에 나귀의 생식기를 붙잡은 사람이 외쳤다. “이것이 젖이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그것을 짜면서 젖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지치기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고 한낱 헛수고만 하였다. 그렇게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모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外道凡夫亦復如是 聞說於道不應求處 妄生想念 起種種邪見 裸形自餓投巖赴火 以是邪見墮於惡道 如彼愚人妄求於乳

 

외도(外道)의 범부들도 이와 같아서 도(道)라는 말을 듣고는 꼭 구할 수 있는 곳에서 구하지 않고, 망령되게 잡생각[想念]을 내고 갖가지 삿된 견해[邪見]를 일으켜 벌거벗고 나다니기도 하고, 스스로 굶기도 하며 혹은 높은 바위에 올라가 몸을 던지기도 하고, 불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삿된 견해 때문에 나쁜 세계[惡道]에 떨어지니, 마치 어리석은 사람들이 망령되이 젖을 구하는 것과 같다.

 

*바께스 ; 영어 'bucket'의 일본어 발음. 양동이(洋-- 한 손으로 들 수 있도록 손잡이를 단 들통).

*선입관(先入觀 먼저 선/들 입/볼 관) ;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의나 주장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형성된 고정 관념이나 견해.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백유경(satavadana-sutra, 百喩經 일백 백/비유할 유/말씀 경) ; 일반 대중들에게 불교적 깨우침을 주고자 짤막한 교훈적 우화(寓話)들을 모아서 5세기 인도의 상가세나(Saṅghasena 僧伽斯那)스님이 편찬한 작품. 그의 제자 구나브리디(Guṇavṛddhi 求那毘地)가 492년에 한문으로 번역했다.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 ‘한 생각이 바로 무량겁’

통일 신라 시대에,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 경의 핵심을 추려서 7언 30구(210자)의 게송으로 지은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 또는 <법성게 法性偈>에 나오는 구절.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한량없는 오랜 세월이 한 생각 찰나요,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시간이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간다’

[참고] 『증도가(證道歌)』 (영가永嘉 스님)에서.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住相布施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깨닫고 나면 공(功)을 베풀지 않으니 일체 유위법(有爲法)과 같지 않다.

상(相)에 머문 보시는 천상에 나는 복이나, 마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니, 내생(來生)에 뜻과 같지 않음을 초래하게 되리라.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但得本莫愁末  如淨琉璃貪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어찌 무위(無爲)의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것만 하겠는가.

다만 근본을 얻을지언정 지엽은 근심하지 말라. 마치 깨끗한 유리구슬 안에 보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네.

내, 이제 여의주를 아나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함에 마침내 다함이 없도다.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十號)의 하나。 범어 Tatha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Posted by 닥공닥정
ㅎ/혼침(수마) 산란2019. 12. 14. 16:10

혼침, 산란(No.475)—회광반조(廻光返照) | 수질각차(手跌脚蹉) | 신심 분심 의심으로 일구월심 면면밀밀 정진하면 확철대오 한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11분 3초)

 

[법문] 송담스님(No.475)—92년 6월 첫째 일요법회(92.06.07) (용475)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난 그 뿌리를 다시 관조하고 이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거든. 끝없는 회광반조를 되풀이해야 하거든. 그래 가지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돼.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은 자꾸 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자꾸 그럴 것이 아니라 ‘이뭣고?’한 그놈을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그놈을 떠억! 관조(觀照)를 하거든.

 

그렇게 해 나가다보면 차츰 조용해지고, 조용해지면은 자기도 몰래 또 꾸벅꾸벅 혼침(昏沈)이 올 수가 있고. 혼침, 탁! 정신을 차리다보면 또 끝없는 망상(忘想)이 일어나.

졸지 아니하면 망상, 망상이 아니면 졸음, 참선 할려고만 열심히 하다보면은 혼침과 산란심(散亂心)이 번갈아가면서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만 없으면 썩 공부를 잘할 것 같은데. 좀 조용해지면 혼침이 오고, 혼침이 깨면은 산란심이 일어나고.

 

그래서 다생(多生)에 도 닦아 나가는 데 장애물로써 수마(睡魔)가 막대(莫大)하다. 이 졸음이 오는 이 마구니란 놈이 굉장히 우리 도업(道業) 성취에 장애요소가 된다고 고인(古人)네들도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다고 해서 결국은 그놈한테 내가 져 버릴 수도 없고, 졸림이 온다고 해서 실컷 다리 뻗고 잘 수도 없고. 혼침 산란이 도 닦아 나가는 데에는 멀리 할 수도 없고, 가까이 할 수도 없는 이상야릇한 도반(道伴)이여. 도반은 도반이되 친근히 할 수도 없고, 그놈을 멀리하고 싶어도 끈질기게 따라 붙어.

 

구참(久參)일수록에 혼침은 더 잘해. 이놈이 속이 떠억 망상이 가라앉으니까 그러니까 조용하다보면은 꾸벅꾸벅. 십 년 참선해서 얻은 것이 앉아서 조는 법을 배웠다고 어떤 분이 그러는데.

앉아서 졸면 10분 20분은 금방 가고, 입선(入禪)하고 죽비하고 5분도 못 되어서 졸기 시작해 가지고 방선(放禪)할 때사 눈을 뜨거든. 그래서 입승(入繩) 스님이 자비가 있으면 가끔 돌면서 그 졸음을 깨주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혼침이 올 때에는 허리를 쭈욱 펴고 심호흡을 하면서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고, 혼자 정진할 때라면 가만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좀 하고 그래서 정신이 좀 맑아지면 다시 와서 정진하고 그러면 참 좋은데,

대중이 같이 한 방에서 입선할 때는 졸음이 온다고 밤낮 들랑날랑하기도 옆에 다른 도반들에게 미안하고, 앉아서 억지로 그놈을 쫓을라고 하면은 굉장히 용을 쓰고 꼬집어 뜯고 이를 악물고 해도 영판 여름에 더울 때 잘 안 도망간다 그말이여.

 

어쨌든지 힘을 다해서 채찍을 가해 가지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화두(話頭)를 들고 또 화두를 들어서, 그렇게 해 나가다보면 결국은 그 끈질기고 고약한 혼침과 산란도 결국은 나의 금강지(金剛志)와 끈질긴 정진력(精進力)으로 그놈이 항복을 하고, 혼침도 달아나고 산란심도 달아나서 그래서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릴 때가 오는 것이여. 순일무잡(純一無雜)해.

 

그래 가지고 또 그렇게 잘 정진이 되어가다가 또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머리가 띵하기도 하고, 온몸이 그렇게 이상하게 뒤틀리면서 영 또 정진이 잘 안된 때가 온다 그말이여. 그러더라도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信心)을 내서 지혜롭게 알뜰하게 단속을 해 나가면 훨씬 공부가 수월하게 잘되어진다.

 

잘되다가 안 되다가, 안 되다가 잘되다가 끝없는 고비 고비를 넘겨서 그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 해 나가면, 일구월심 면면밀밀하게 잘 해 나가면 결국은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게 되고.

풍풍풍풍 솟아나는 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가듯이 마음도 공(空)하고, 경계(境界)도 적적(寂寂)해져서 그래 가지고 몸도 마음도 쾌락안연(快樂安然)한 경계에 이르게 된다 그말이여. 한 시간 두 시간 앉았어도 조금도 몸이 괴롭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고 시간이 어떻게 간 줄을 몰라.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럴 때에 그 너무도 고요하고 너무도 편안하고 너무나 깨끗한 그런 경지가 오면 화두를 드는 것도 귀찮고, 오히려 화두 드는 것이 그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를 흐트러지게 할까, 그런 생각도 있어서 화두를 들지 아니한 채 그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잊어버릴 수가 있다 그말이여.

아무리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더라도 항상 그 화두, 알 수 없는 의단을 잊지 말고 잘 거각(擧却)해 나가야 한다. 잘 관조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 나가면, 그렇게 하루를 지내고 이틀을 지내고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어떠한 수질각차(手跌脚蹉) 하는—손발을 끕! 접질린다던지 헛디딘다던지 어떤 그런 찰나에 확철대오 (廓徹大悟)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모든 선지식(善知識)들이, 모든 도인(道人)들이 그렇게 애를 써서 그런 과정을 다 경험을 하신 바여.

 

우리라고 해서 그렇게 알뜰히 단속해 나가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법이 없어.

우리의 교주(敎主)이신 삼계 대도사(三界大導師)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도 과거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이셨고, 모든 선지식들도 과거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였었지만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정진을 함으로써 결국은 그런 확철대오해서 대도사가 되신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한 과정과 그러한 결과를 믿고 우리도 그렇게 해 나가는 것 이외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고, 할 것이 없어. 다행히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법을 믿게 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경행(慶幸)한 일이고 행복한 일이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19분3초~30분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회광반조(廻光返照 방향을 바꾸다·돌리다 회/빛 광/돌이키다 반/비칠 조) : 회광자간(廻光自看).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자신의 본성을 조견(照見)하는 것. 언어 문자에 의하지 않고 바로 자기 본래의 면목(面目)을 보는 것.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빈틈없이 빽빽하게 죽 잇따라 들어차 있다'는 말. 끊이지 않고 빈틈없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면면(綿綿 솜·이어질·연속할 면) ;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계속 이어지는 것.

*밀밀(密密 빽빽할·촘촘할 밀) ; 빈틈없이 빽빽히 들어찬 것.

*관조(觀照) ; ①참된 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수마(睡魔) ; 참선할 때 어느새 잠이 와 졸음이 쏟아지면 정신 차려 정진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졸음, 잠(睡)을 수마(睡魔)로 일컫는다.

*막대(莫大)하다 ; 더할 수 없을 만큼 많거나 크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구참(久參 오랠 구/참구할·참여할 참) ; 오랫동안에 걸쳐서 수행한 것. 오랫동안 선(禪)을 닦은 것. 또는 그런 사람. 불법(佛法)에 귀의한지 오래 되는 것. 초학(初學)의 상대어.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금강지(金剛志) : 금강석과 같이 견고한 뜻。 일체 번뇌를 쳐부술 수 있는 굳센 의지.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 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쾌락안연(快樂安然) ; 쾌락하고 편안하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수질각차(手跌脚蹉 손 수/거꾸러질·넘어질 질/다리 각/미끄러질·넘어질 차) ; 각차수질(脚蹉手跌). (몸이 균형을 잃고) 손과 발이 미끄러지다.

[참고] 『고봉화상 선요(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50~52, 『선요』 (원순 역해 | 도서출판 법공양) p40~42 참고.

若要的實明證인댄  須開特達懷하며  發丈夫志하야 將從前惡知惡解와  奇言妙句와  禪道佛法과  盡平生眼裏所見底와  耳裏所聞底하야  莫顧危亡得失과  人我是非와  到與不到와  徹與不徹하고

 

만일 이 일을 적실하고 분명하게 증득하려면 특별한 포부를 품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종전의 나쁜 알음알이와 기묘한 언구(言句)와 선도(禪道)와 불법(佛法)과 평생동안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들에서 위태로움과 죽음, 얻음과 잃음, 남과 나, 옳음과 그름, 도달함과 도달치 못함, 사무침과 사무치지 못함 따위를 돌아보지 말고,

 

發大忿怒하며  奮金剛利刃하야  如斬一握絲에  一斬에  一切斷이라  一斷之後에  更不相續하야  直得胸次中이  空勞勞地와  虛豁豁地가  蕩蕩然 無絲毫許滯碍하야  更無一法可當情이  與初生으로  無異니라

 

크게 분발심을 내어 마치 금강 같은 날카로운 칼로 한줌의 실을 벨 때, 한 번 베면 모두 다 끊어져서 그 후에는 다시 이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하면, 당장 가슴속이 텅 비어 호호탕탕(浩浩蕩蕩)해서 실끝만치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으며 다시 한 법도 정식(情識)에 매이지 않음이 마치 갓난아기와 같을 것이다.

 

喫茶不知茶하고  喫飯不知飯하며  行不知行하고  坐不知坐하야  情識이  頓淨하고  計較都忘이  恰如箇有氣底死人相似하며  又如泥塑木雕底相似리라

到者裏하야  驀然脚蹉手跌하면  心華頓發하야  洞照十方이  如杲日麗天하고  又如明鏡當臺하야  不越一念하고  頓成正覺이라

 

차를 마셔도 차 마시는 줄 모르고, 밥을 먹어도 밥 먹는 줄 모르고, 다녀도 다니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몰라 정식(情識)이 단박 깨끗해지고 계교(計較)가 모두 없어지는 것이 흡사 숨만 남은 시체와 같으며 또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 같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갑자기 손과 발이 미끄러져서 마음꽃이 단박에 피어 시방세계를 훤히 비춤이 마치 밝은 해가 하늘에 뜬 것 같으며, 맑은 거울이 경대에 놓인 것 같아서 찰나에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이다.

 

非惟明此一大事라  從上若佛若祖의  一切差別因緣을  悉皆透頂透底하며  佛法世法을  打成一片하야  騰騰任運하고  任運騰騰하며  灑灑落落하고  乾乾淨淨하야  做一箇無爲無事出格眞道人也라

恁麼出世一番하야사  方曰  不負平生參學之志願耳니라

 

이 일대사만을 밝힐 뿐 아니라, 위로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온갖 차별된 인연(因緣)을 몽땅 아래 위로 꿰뚫어 알며 불법과 세간법을 한 조각으로 만들어 무심하여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며, 물 뿌린 듯 쇄락하고, 씻어 말린 듯 정결하여 하나의 격식에서 벗어나 일없는 참 도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번 세상을 뛰어나와야 비로서 ‘평생동안 참선하려는 뜻과 원력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리라.

—원문에 있는 '驀然 脚蹉手跌'은 몸의 균형을 잃고 자기도 모르게 문득 발이 미끄러지고 손이 미끄러지는 것이니, 아차! 하는 순간을 말한다. 轉身移步 懸崖撒手. (원순 스님 주)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교주(敎主) ; 석가세존(釋迦世尊).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높여 이르는 말.

*삼계(三界) : [범] trayo-dhatavah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amadha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upadha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arupadha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삼계도사(三界導師) : 삼계(三界)의 중생을 열반(涅槃)로 인도(引導)하는 위대한 사람. 부처님을 말함.

*석가모니(釋迦牟尼) : sakya-muni의 음역. 샤카족의 성자(聖者)•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경행(慶幸) ; 경사스럽고 다행(多幸)한 일.

 

Posted by 닥공닥정

<핸드폰에서, 아래 법문은 위 유튜브에서 31분 35초부터 시작됩니다>

 

 

활구참선(No.122)—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비슷 | 유리병 속 오리 화두 | 불교는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 | 상(相)없이 | 관심일법총섭제행.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1) 21분 37초.

 

(2) 21분 19초.

 

[법문] 송담스님(No.122)—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 (용122)

 

(1)------------------

 

그리고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공안 · 화두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안(公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이 가운데에는 처음 나오신 분도 있고 학생들도 있고 그래서 이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공안은 화두라고도 하는데, 공안이라 하는 것은 공립학교라 해서 공(公)자 하고, 안건이라서 안(案)자인데, 공안이라 한 말은 '관가의 법률'이라 이런 말입니다.

관청에서는 모든 것을 그 법규에 따라서 모든 사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문제가 일어나면 즉각 그 법규에 비추어 봐가지고 그 법규에 있는 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도,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이 공안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 것입니다.

 

우리의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그 공안을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그 공안을 참구(參究)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공안(公案) ·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일종에 수수께끼와 비슷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수수께끼라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온갖 상식 · 지식 이걸 총동원해 가지고 그 수수께끼를 이리 풀어보고, 저리 풀어 보고 그래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 보고 해 가지고 '아! 이것이다'하고 알아맞추는 것이 바로 이 수수께끼입니다.

 

수수께끼, 우리가 일반적으로 친구끼리 모이면 수수께끼를 하는 수수께끼도 그 자못 아주 쉬운 것으로부터 재미있는 것 그리고 깊은 뜻을 담은 그런 수수께끼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수수께끼는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인데.

 

유리병이 하나가 있는데, 유리병 주둥이는 좁고, 밑으로 내려가면서 툭 퍼져가지고 퍼진 그러한 병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오리를 새끼 때 그 병 주둥이를 통해서 병 속에다 담았습니다.

새끼 때는 몸집이 작으니까 그 좁은 주둥이로 오리 새끼를 넣을 수가 있었는데, 넣어 가지고 매일 먹을 것을 먹이를 주었습니다. 물도 주고 먹이를 주어서 그 오리가 차츰차츰 자라 가지고 그 큰 병에서 애미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오리를, 오리도 상하지 아니하고 또 그 병도 깨뜨리지 않고서 그 오리를 밖으로 꺼낼 수가 있느냐? 이것도 공안 가운데에 하나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도 이것을 두고두고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병도 깨지 아니하고 오리도 다치지 않게, 터럭 하나도 상하지 않게 그 오리를 병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걸 꺼낼 수가 있을꼬?' 걸어가면서도 그것을 참구하고, 앉어서도 그것을 참구하고, 차를 타고 갈 때도 그것을 참구하고, 여러 가지로 참구를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병을 무슨 열을 높여 가지고 그 유리병이 물렁물렁하게 만들아서 주둥이를 넓혀 가지고 꺼낸다든지, 그러한 생각들은 벌써 이론을 사용한 것이여. 이론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이론을 사용한 동안에는 바른 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론을 사용하지 말고 '다못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올 수가 있을까? 아! 저렇게 하면 나올 수가 있을까? 무슨 기합술로 탁 뻐개서 얼른 꺼낸 다음에 딱 붙일 수가 없을까?'

그러한 생각들을 가지고는 아무리 해 봤자 오리는 꺼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론을 사용했다 하면 절대로 꺼낼 수가 없습니다.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한 방법으로 참구를 해야 해.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꼬?' 다못 이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야만,

오늘도 그렇게 참구하고, 내일도 그렇게 참구하고, 모레도 그렇게 참구하고, 앉어서도 그렇게 참구하고, 속이 상할 때도—어른한테 걱정을 들어가지고 확! 속이 상할 때도 딱! 그 생각을 돌려서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일체처 일체시,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이렇게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처음에는 깜박 무엇을 보는 순간에 이 공안에 대한 참구를 잊어버리고, 또 무엇을 들은 순간에 깜빡 잊어버리지만, 잊어버렸다 하면 퍼뜩 돌이켜서 '어떻게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돌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잊어버리는 시간이 많다가, 차츰차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잊어버린 시간은 차츰차츰 줄어지고 이 화두를 참구하는 시간은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하려고 안 해도 항시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꼬?' 이렇게 저절로 참구가 되어지게 된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부가 익숙해진 증거인 것입니다.

 

수수께끼,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 바로 이것이 화두라 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이 무엇고? 시삼마(是甚麼)?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뭐꼬?'

 

자동차에는 운전사가 있어서 자동차를 운전을 하면 앞으로도 갔다 뒤로도 갔다, 왼쪽으로도 돌리고 오른쪽으로 돌리고, 빨리도 가고 천천히도 가고 또 정지도 하고 자유자재로 합니다.

그건 겉에서 보기에는 차가 그렇게 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지로 속을 알면 차가 지멋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 운전사의 조종에 의해서 차는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뚱이, 이 육체도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입으로 말하고 밥을 먹는 것, 손으로 움직여서 일하고 발로 걸어 다니는 것, 앉고 서고 눕고 하는 것이 이것이 몸뚱이가 지멋대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몸뚱이를 조종하는 운전사가 우리의 몸 안에 있습니다. 그 운전사의 조종에 의해서 이 몸뚱이는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에 오셨지만 여러분의 발이 지멋대로 여기를 오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운전하고 있는 주인공이 '오늘은 용화사에 가자' 거기서 결정을 내려가지고 명령을 하기 때문에 이 몸뚱이는 차도 타고 발로 걷기도 하고 해서 여기를 오시게 된 것입니다.

 

'아니여,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고 아내가 자꾸 가자고 해싸서 내가 따라왔다. 그것은 아내가 그러면 나의 주인공이냐?' 그러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지만, 아내가 백번을 졸랐다 하더라도 결국은 최종 결재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아내가 별소리 해 봤자 자기의 주인이 결재를 아니하면 여기는 오시지를 않고 어디 등산하실 수도 있고, 낚시터에 가실 수도 있고, 친구와 술을 마시러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몸뚱이의 주인은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대관절 그놈이 무엇이냐?

보통 '그게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그런 정도는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마는.

 

마음, 마음, 다 마음이란 말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마음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들은 풍월로 들은 대로 그저 마음이란 단어를 자기 나름대로 쓰고 있는 것뿐이지, 실지로 그 마음의 참모습에 대해서는 본 사람이 없고 그 마음의 참 실상에 대해서는 본 사람이,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가 없고, 소리가 없기 때문에 귀로 들을 수가 없고, 형단(形段)이 없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건마는 그놈이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듣고, 손이나 발을 통해서 온갖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있다면 눈에 보여야 하고 손으로 잡을 수가 있어야 할 텐데, 왜 있으면서 볼 수 없고 잡을 수가 없느냐?

대관절 그놈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슨 모냥 무슨 빛깔을 하고 있으며, 대관절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밥통 속에가 있느냐? 간 속에가 있느냐? 심장 속에가 있느냐? 머리 두골 속에가 들어 있느냐?

그것이 밥통 속에가 들어있다면 똥을 누면 변소간으로 빠질 것이고, 그런데 창자 속에가 있는지 어디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데, 그것을 갖다가 왜 있다면 왜 볼 수가 없느냐?

 

온갖 것을 그놈은 다 보고 듣고 하는데, 왜 우리는 그것을 볼 수가 없느냐?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이 안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그저 의식주(衣食住)가 인생에 전부인줄만 알고, 그저 배만 부르면 그저 아무 근심이 없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이 불법(佛法)이 무엇인줄도 알기 전에 「대관절 이 인생이라는 게 무엇이냐? 대관절 이 '내'라는 게 무엇이냐? 어데서 와서 뭣 하러 왔으며 또한 한평생을 살다 가는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생에 대한 근본 문제에 대해서 다 자기 나름대로 궁금증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참선법(參禪法)은 인생이 스스로 자연적으로 품게 되어 있는 그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疑心), 그것을 체계화해서 그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방법을 갖다가 만들어, 방법이 그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참선법에 공안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 공안은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한다고 그랬습니다마는 실지는 자기 자신이 이미 그 공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바쳐서 풀어야만할 그 문제를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안고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의식주, 오욕락(五欲樂) 때문에 그 중요한 문제를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놔둔 채 방황을 하고 몸부림을 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우리들인 것입니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은 이 문제를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서 (녹음 끊김)... 아니하고 우리 중생들을 위해서 더 연마하고 더욱 연구를 해서 우리에게, 우리 말세(末世)에 태어난 근기(根機)가 약한 업보 중생(業報衆生)들도 공부가 할 수 있도록 개발해 놓은 방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인 것입니다.

 

'이뭣고?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또는 '이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이 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났는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는 부모가 나를 낳아주신 것이 아니여.

그 참나는 부모로 인해서—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받아 났지만,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는 부모한테 받은 것이 아니여.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긴 때가 없이 존재해 온 것이여.

 

이 몸뚱이는 늙어서 병들어 죽지만,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의 주인공, 참나는 태어난 때가 없기 때문에 또한 죽는 것도 아닌 것이여.

죽고 사는 것이 아니요,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이여.

 

'이뭣고?' '이뭣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는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판치생모라고 하는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공안은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 하면 조주 스님께 어떤 스님이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사서래의,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달마 스님이 무엇하러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셨습니까?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근본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불교의 근본 진리가 무엇입니까?」 내나 표현은 다르지만 근본은 있어서는 같은 뜻인 것입니다.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판치생모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참선법을 가르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하기 위해서 달마 스님이 오셨다' 이렇게 대답할 것 같은데, 그러한 대답을 하시지 아니하고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판치에 털이나?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자 이빨 위에 털이 났다고 했는고?'

이것이 또한 우리의 의심거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개나 됩니다. 천칠백이 넘는 것입니다.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은 수없이 많고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이나 되는데, 그러면 그 많은 공안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 것이냐?

 

일본에서는 의리선(義理禪)이라 해가지고 이 공안을 하나씩 스승으로부터 받아가지고 그 하나를 며칠 동안에 걸쳐서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해서 온갖 방법, 지식과 이론을 총동원해 가지고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가지고 그 스승한테 가서 딱 이릅니다. 이르면 '되었다' 그러면 그다음에 또 하나의 공안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백 개 이상의 공안을 통과를 하면 '너는 조실이 될 자격이 있다. 너의 제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하고 자격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중국에서부터서 쭉 내려오는 정통적인 활구참선법에 있어서는 공안을 애당초부터 이론을 사용하지 말도록 지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을 가지고 따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하고 이리 해가지고 어떠한 결론을 얻은 것은 설사 그 결론이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말씀과 상통하는 그럴싸한 결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공안에 바른 답이 아니요,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이론, 우리가 아무리 체계 있는 이론을 세웠다 해도 깨달음 앞에서는 일종에 분별심(分別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가르켜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태여 10년 20년을 세월을 시간을 낭비하면서 그것을 애쓸 필요가 없이 그 공안에 대한 답을 다 가르켜서 알겄게만 하면 되는 것을 뭐하러 그것을 애를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이 말씀이여.

 

분별심으로 이르지 못한 곳이 바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은 차라리 분별심을 놔 버린 데에서 오히려 깨달음에 들어갈 분(分)이 있는 것이지, 분별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서는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분별심을 가지고 공안을 천착(穿鑿)을 하지를 말아라. 따지고 분석하지 말아라.(30분43초~52분20초)

 

 

 

(2)------------------

 

분별심을 가지고 하는 것은 이것을 바로 '죽을 사(死)'자, '글귀 구(句)'자,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하는 것이여.

 

분별심을 버리고 일체 이론과 일체 말 길과 일체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버릇을 버리고서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꽉 맥힌 생각으로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무엇인고?' 또는 '어떻게 하면 병도 깨지 않고 오리도 다치지 않고 그 오리를 병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다못 그렇게만 다구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살 활(活)'자, '글귀 구(句)'자, 활구참선(活句參禪), 사구참선의 반대 활구참선.

 

활구참선! 이 활구참선을 해야만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이 말이여.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불법(佛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흐뭇해 할 줄 알고, 자기 뜻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은 근심 걱정하고 성을 내고 하는, 바로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도 잡히지 아니하면서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듣고, 온갖 일을 하는 그 신기하고도 묘한 대관절 그놈, 그놈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

 

 

수수께끼 하나를 여러분에게 하겠습니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데 많이 먹으면 죽는다. 그런데 안 먹을래야 안 먹을 수가 없다.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공기다, 물이다' 별별 소리 합니다마는 다 맞지 않는 소리고, 그것은 '나이'라 하는 것입니다. 나이는 아무리 먹어봤자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이 먹으면 지가 안 죽고 못 배깁니다.

그런데 그건, 다른 것은 안 먹을라면 안 먹을 수가 있는데 나이는 아무리 안 먹을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떡국을 보지도 않고 되돌아서도 나이는 먹어지는 것입니다.

 

또 수수께끼 하나를 말하겠습니다.

「눈은 희고 배는 둥근 것이 무엇이냐?」

 

'눈은 희어? 눈은 희고... 그래 사람 눈이 희지. 흰창이 희니까. 사람, 배는 둥글어? 아닌데. 사람 눈이 희다고만 할 수가 없고 가운데 검은창이 있어서 그게 안 맞다'

아무리 생각해봤자 도저히 분별심으로 따져 갖고는 알게 되아 있지를 않습니다. 이건 수수께끼는 수수께낀데 따질수록에 점점 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눈이 희고 배는 둥근 거... 북극에 가면 흰곰이 있다는데 흰곰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봤자 그건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안이 아니고 수수께끼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설파(說破)를 해 드리는데,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학자(學者)에게, 참선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 공안을 설파해 주면 이 세상에 제일 큰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안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힘으로 타파(打破)를 해야지, 이론을 통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스스로 타파를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지, 이 공안을 갖다가 요리조리 힌트를 줘가지고 알것께 맨든 것은 이것이 바로 사구선(死句禪)이 되아서 그것은 그럴싸하니 답을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깨달을 분(分)을 없게 맨들아 주는 것이 되는 것이여.

 

참선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병을 앓고 신음을 하던 사람이 겨우 인자 그 병을, 병근(病根)을 끊고 일어서려고 하는 그러한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공안을 갖다가 설파를 해주면 겨우 일어설라고 몸부림친 놈을 여지없이 몽둥이로 쳐서 꺼구러뜨려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어가지고 일어설라 말라 하는데 몽둥이로 쳐서 꺼꾸러뜨려 버리니 인자는 그 사람은 틀린 것입니다, 일어나기가. 공안을 설파해 준 것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설파를 한다고 한 것은 공안이 아니라 수수께낀데 쪼끔 이상한 수수께끼여. 「눈은 희고 배는 둥근 것이 무엇이냐?」 '하늘에서 내린 눈은 희고, 우리가 먹는 과일 배는 둥글다' 이 말이예요.

이것을 갖다가 눈과 배를 결부(結付)를, 한 몸뚱이에다 붙여놓고 그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동물을 아무리 생각해봤자 알 수가 없거든. '하늘에서 내린 눈은 희고 깎아 먹는 배는 둥글다' 이렇게 볼 때에는 여지없이 이거 들어맞거든.

 

화두를 그런 식으로 '판치생모?' 판치(板齒)와 생모(生毛)를 함께 붙이니까 모르니까, 둘로 띄어 갖고 '그럼 판치가 무엇이냐? 생모가 무엇이냐?'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이것은 그렇게 알아맞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를 따져서 알아맞춘 것이 아니고 '조주가, 조주 스님이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느냐?' 그 조주, 판치생모라고 한 그 뜻을 우리는 참구(參究)를 해야 하는 것이여.

 

그것도 이론을 가지고 따져서 알아맞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그 「어째서」에다가 우리의 의심(疑心)의 눈을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왜? 왜 조주는 판치생모라 했는고?'

 

'판치생모가 무엇인고'가 아니에요.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조주가 판치생모라고 한 그 조주의 뜻을 우리는 참구를 해야 하는 거여.

 

참구를 한다고는 하되 이론적으로 따져서 '이러이러해서 그랬는가? 저래저래해서 그랬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어째서」에다가 우리의 의심의 눈을 박아야 한다 그말이여.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법이여. 활구참선을 하는 요령이여.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만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고, 그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을 우리는 만나기는 틀림없이 만났는데, 그것을 올바르게 지어 가야 공부를 다져 나가야 되는 것이여.

 

 

아무리 절에를 다니고, 용화선원을 한번도 법회에 빠지지 않고 다니셨다하더라도 이 화두를 드는데 있어서 올바르게 화두를 들어 나가야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내동 이렇게 공부를 하라고 가르켜 드렸는데, 당신 집에 가서는 낮이나 밤중이나 그 노보살님은 "전강스님, 전강스님" 그렇게 가끔 그렇게 외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며느님이 들어가서 "어머니, 왜 전강스님은 그렇게, 돌아가신 전강스님을 불러싸십니까?"

"송담 스님이 그러는데 이뭣고를 하지 말고 전강스님을 부르라고 했다"

 

"세상에, 나도 어머님을 모시고 가서 법문을 들어봤는데 절대로 그러시지 않았는데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네가 잘못 들었다. 내가 분명히 들었는데 전강스님을 그렇게 부르라고 그러더라"

 

아, 그런다고 하루는 그 병환으로 잘 보행을 못하시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절에를 나오셔서 딱 앉혀놓고 '정말 그 전강스님을 부르라고 하셨습니까?' 나한테 그거 따지러 왔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잘 납득을 해 드렸는데 그 뒤로 가서 정말 '이뭣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셔서 돌아가실 때 편안하게 마지막 숨이 딸그닥 끊어질 그때까지도 '이뭣고?'하면서 딱! 숨을 거두셨다 그말입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좋은 곳으로 환생을 하셨을 줄 생각을 합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셨거나 다시 이 사바세계가 인연이 있었으면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셔서 지금 어느 곳에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것이 틀림이 없고,

철이 나서 또 불문(佛門)으로 와서 용화선원으로 또 법문을 들으러 오셔서 금생에는 일찌감치 혹 그분이 출가를 하셔서 스님이 될는지도 모르고 또는 청신사(淸信士)나 청신녀(淸信女)가 될 줄 모릅니다마는 일찌감치 이 정법(正法)에 들어와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시게 될 것을 나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깨닫는 법'이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불법에는 권법(權法)과 실법(實法)이 있습니다.

권법이라 하는 것은 방편법(方便法)이라 이말이여. 방편법. 실법은 실다운 법이여. 불법에 참으로 여실(如實)히 그 실다웁게 설하신 법이에요.

 

이 권법, 방편법은 중생 근기(根機)가 미약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 실상(實相)을 설해 가지고는 이해를 못하고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물러서 버리고, 헐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방편법을 설해서 중생들로 하여금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재미를 붙이고 허겄게 맨들게 하기 위해서 이 방편법을 설하신 것이 팔만사천(八萬四千) 가지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편이라 하는 것은 일정 기간 동안 필요한 것이고, 일정 기간에 그 목적을 달성하면 바로 그 방편은 버리고 새로운 단계로 옮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강을 건너는데 배를 타야 하는데 강을 건너고서는 그 배를 버리고 저쪽 언덕으로 걸어가야지, 그 배를 가지고 강을 건넌 뒤에도 그 배를 버리지 아니하고 그놈을 짊어지고 끌고 육지로 돌아다닌다면 그 사람은 아무 일도 못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염불이라든지, 주력이라든지, 경을 읽는 거라든지, 무슨 무슨 십재(十齋) 재일(齋日)을 지킨다든지, 무슨 방생을 한다든지, 보시를 한다든지, 오후불식(午後不食) · 일종(一種)을 한다, 이런 것이 다 방편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방편은 그렇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꼭 필요한 것이고, 그 방편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진취를 가져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 지장보살 부르신 분도 있고, 옴마니반메훔이나 또는 무슨 그밖에 주력이나 또는 기도를 하신 분도 있고, 그밖에 무슨 좋은 선행을 닦으신 분도 많으실 줄 압니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다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을 하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집착을 해서는 아니 되겠다.

집착을 한 사람은 마치 배를 짊어지고 돌아다니고 그 무거운 배를 끌고 다니는 사람과 같애서 그것을 집착을 하지를 말고 한 단계를 넘어섰으면 빨리 이 실법 · 정법 ·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법 '이뭣고?' 이것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뭣고?'한 사람은 선행도 하지를 말고 일종도 하지를 말고 또는 무슨 불공(佛供)도 드리지 말고 기도도 하지 말라 하냐, 그러면 그게 아닙니다.

상(相)이 없이, 집착함이 없이 온갖 선법(善法)을 다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닦으면서 거기에 집착이 없어야 하고, 집착 없는 가운데에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을 옳게 믿고 옳게 실천하는 것이라, 반드시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복과 지혜를 동시에 닦아 가는 것입니다. 복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것, 그래야만 복과 지혜를 함께 구족(具足)하게 되는 것입니다.

 

귀의불(歸依佛) 양족존(兩足尊), 두 가지가 구족하신 부처님께 귀의(歸依)합니다.

그 두 가지가 구족하다 하는 것은 바로 그 복(福)과 지혜(智慧), 두 가지가 구족하신 어른이 부처님이시에요.

 

참선 한답시고 보시도 안 하고, 참선 한답시고 선행도 하지 아니하고, 참선 한답시고 일체 선법을 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참선을 하되 일체 선법을 닦음이 없이 닦아라. 상(相)이 없이 닦아라.

참선을 할수록에 오히려 그러한 것을 집착 없는 마음으로 더욱 행해라.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동시에 행해라 이것이여.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일을 끊임없이 행할 때 우리는 복과 지혜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불법은 무궁무진해서 높기로 말하면 하늘보다도 더 높고, 깊기로 말하면 바다보다도 더 깊어서 말로써는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높고 깊고 크고 위대한 불법인데, 우리가 그것을 체달(體達)을 하고 확철대오 하는 길은 지극히 간단하고 극히 가까운 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 말을 듣고 있는 그놈, '대관절 이 듣고 있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 그것을 참구하는 거여. '이뭣고?'

 

가장 자기에게 친한 것이 부모냐 하면 부모보다도 더 친한 것이 있어. 그것이 바로 자기여.

자기를 끌고 다니는 이 나, 참나, 나의 주인공 그것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거든. 그것을 찾는 것이여.

 

먼 데 있는 것을 찾는 것이, 경책(經冊)도 오히려 멉니다. 경책도 몸에 지니고 있어도 자기 몸과 따로 떨어져 있거든.

 

자기를 끌고 다니는 지금 듣고 있는 놈, 이 말하고 있는 놈, 이놈. 성이 날 때는 그 성내는 놈, 슬퍼할 때는 그 슬퍼하는 놈. 자기와 잠시도 떨어져 있지를 않아. 언제나 자기와 더불어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일하고, 그놈을 찾는 거여.

사실은 그것이 찾는다고 하면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에요. 언제나 있는데 무얼 찾어? 찾기는.

 

그런데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찾다가 잃어버리는 거여.

그러나 찾아야 되어요. 찾고 또 찾고, 찾고 또 찾다가 바로 그놈을 깨달라야 되는 거여. 그놈을 봐야 되는 거여.

 

이 관심일법(觀心一法), 내가 내 마음을 관하는, 내가 나의 마음을 찾는 이 한 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일체법을 다 그 가운데 다 갖추게 되는 거여. '이뭣고?'

'이뭣고?' 하나를 하게 되면 계율은 제절로 지켜질 것이여. '이뭣고?'한 사람이 무슨 사람을 죽이며, '이뭣고?'한 사람이 무슨 남의 물건을 훔칠 까닭이 있으며, '이뭣고?'한 사람이 무슨 거짓말을 하며, 무슨 죄를 지을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이뭣고?'를 한 사람은 제절로 계율을 지키게 되고, 제절로 일체 선법을 닦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이것을 가르켜서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이뭣고?'

과거에 지은 죄가 산과 같이 높고, 바다와 같이 깊다하더라도 '이뭣고?' 앞에에는 봄눈처럼 녹아지는 것이여. '이뭣고?'를 한 사람은 새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여.

 

죄의 구렁텅이 속에서 그 죄에 물들지 아니한 법이 바로 '이뭣고?'요.

 

중생은 아무리 자기 나름대로 착한 일을 한답시고 한 것이 죄를 짓고 있는 것이여. 업(業)을 짓고 있는 것이여.

그런데 '이뭣고?'를 한 사람은 죄 속에서 죄에 물들지 아니하고, 죄 속에서 죄를 짓지 아니하고, 그러한 묘법(妙法)이 바로 이 최상승법이여. '이뭣고?'(52분22초~1시간13분4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공안(公案) ; 화두(話頭),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가자(假藉 임시·일시/깔다·빌리다 자) ; 임시로 빌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형단(形段 모양 형/구분 단) ; ①형태. 형태로 나타나서 보이는 것. ②모양. 외양.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 자기 본분의 소식, 궁극적인 진실을 가리키는 선종의 화두이다. 부모미생전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미생면목(父母未生面目)이라고도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달마(達摩)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분별(分別)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2)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흰창 ; '흰자위(눈알의 흰 부분)'의 사투리.

*검은창 ; '검은자위(눈알의 검은 부분)'의 사투리.

*설파(說破) ;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사구선(死句禪) ; 사구참선(死句參禪).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병근(病根 병 병/뿌리 근) ; 병(病)이 생겨난 뿌리[根], 근본적(根本的)인 원인.

*결부(結付 맺을·묶을 결/붙일·의지할 부) ; 일정한 사물이나 현상을 서로 연관시켜[結] 붙임[付].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만났고' ; 인신난득(人身難得).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참고] 『잡아함경(雜阿含經) 406.』 (제15권) ‘맹구경(盲龜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堂 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海 有一盲龜 壽無量劫 百年一出其頭 海中有浮木 止有一孔 漂流海浪 隨風東西 盲龜百年 一出其頭 當得遇此孔不 阿難白佛 不能世尊 所以者何 此盲龜 若至海東 浮木隨風 或至海西 南北四維圍遶亦爾 不必相得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佛告阿難 盲龜浮木 雖復差違 或復相得 愚癡凡夫 漂流五趣 暫復人身 甚難於彼 所以者何 彼諸衆生 不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 展轉殺害 強者陵弱 造無量惡故 是故比丘 於四聖諦 當未無間等者 當勤方便起增上欲 學無間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참고] 『잡아함경(雜阿含經) 442.』 (제16권) ‘조갑경(爪甲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 告諸比丘 於意云何 我爪甲上土爲多 此大地土多 諸比丘白佛言 世尊甲上土甚少少耳 此大地土甚多無量 乃至算數譬類不可爲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佛告比丘 如甲上土者 若諸衆生 形可見者 亦復如是 其形微細 不可見者 如大地土 是故比丘 於四聖諦未無間等者 當勤方便 學無間等 佛說是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如陸地 如是水性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 人道者 亦復如是 如大地土 如是非人亦爾 ......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육지처럼 물의 성질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이렇게 사람 세계[人道]의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그렇게 사람이 아닌[非人]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을 설명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甲上土 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畜生 餓鬼亦如是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청신사(淸信士)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자 신도, 곧 우바새(優婆塞).

*청신녀(淸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권법(權法) ; 권교(權敎). 임시로 대승의 가르침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서 부처님이 설한 임시 가르침. 사람의 근기와 소질에 맞게 임시로 설하신 가르침. 임시 가르침. 실교(實敎)의 반대. 진실의 가르침에 이르면 버려야 함. 궁극의 취지에서는 ‘권실불이(權實不二)’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실제는 하나라고 본다.

*실법(實法) ; ①진여(眞如). 진실의 모습. 변화가 없는 것. ②실교(實敎). 진실의 가르침.

*여실(如實)히 ; 사실과 꼭 같게.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십재(十齋) 재일(齋日) ; 십재일(十齋日). 매월 초하루 · 8 · 14 ·15 · 18 · 23 · 24 · 28 · 29 · 30일의 10일은 불보살의 명호를 지니고, 심신을 조심하고 깨끗하게 유지하고, 스스로 행위를 반성하며 8재계(八齋戒)를 지키며 선한 일을 행하여 복을 빌고 죄를 소멸한다. 십재(十齋)라고도 한다.

*팔재계(八齋戒) ; 재가(在家)의 신도가 몸과 마음을 깨끗히 하고 육재일(六齋日), 곧 음력 매월 8 · 14 · 15 · 23 · 29 · 30일에 하루 낮 하룻밤 동안 지키는 8가지 계율.

①이살생(離殺生).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음.

②이불여취(離不與取).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음.

③이비범행(離非梵行). 청정하지 않은 행위를 하지 않음.

④이허광어(離虛誑語). 헛된 말을 하지 않음.

⑤이음제주(離飮諸酒). 모든 술을 마시지 않음.

⑥이면좌고광엄려상좌(離眠坐高廣嚴麗牀座). 높고 넓고 화려한 평상에 앉지 않음.

⑦이도식향만이무가관청(離塗飾香鬘離舞歌觀聽). 향유(香油)를 바르거나 머리를 꾸미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않음.

⑧이식비시식(離食非時食). 비시식(非時食 : 정오를 지나서 먹는 것)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 오전중에만 식사하는 것.

*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일종(一種) ;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상(相)이 없이' ; 무주상(無住相). 집착함이 없는 모습. 집착함이 없는 상태.

*선법(善法, 산스크리트어: kuśalā dharmāh, 팔리어: kusala dhamma) ; 선법(착한 법)은 '선한 교법'의 줄임말로, 5계(五戒) · 10선(十善) · 3혜(三慧) · 4혜(四慧) · 4성제(四聖諦) · 3학(三學) · 5온설(五蘊說) · 12연기설(十二緣起說) · 8정도(八正道) · 37도품(三十七道品) · 6바라밀(六波羅蜜) 등 이치에 맞고, 자신과 세상을 이익되게 하는 법(法), 즉 도리와 방편, 즉 가르침 또는 선한 행위와 수행법을 말한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자리이타(自利利他) ;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남도 이롭게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의 법이야말로 이것이 바로 대승법이요,

새에 두 날개가 있는 거와 같고, 수레에 두 수레바퀴가 있는 거와 같아서, 새가 날개 하나만 가지고서는 도저히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레바퀴 하나만 가지고서는 굴러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리이타, 이 세등선원을 짓는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하기 위해서 짓는 것이요,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여러 신남신녀가 시주(施主)를 하고 화주(化主)를 하는 것도 이것 또한 자리이타를 하는 것이여.

 

부처님 출현하신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여. 부처님 경지에 있어서야 원래 생사 없는 본각(本覺)자리에 계시는데 무엇이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실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렇지마는 중생을 위해서 대자비심을 일으켜 가지고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것이다.

 

한 글자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팔만사천(八萬四千) 법을 설하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다.

한 글귀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역대 조사(祖師)가 많은 어록(語錄)을 남기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한 자비심에서 나오신 소식이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참고] 『순정리론』 권32(대정장29, p.525c21)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는 말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완비되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대보적경』 권60(대정장11, p.346c3)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체달(體達 몸 체/통달할 달) ; ①몸[體]으로 직접 통달(通達)함. 몸소 경험하여 막힘이 없이 트이다. ②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

[참고] 『선문촬요(禪門撮要)』 (경허선사 編) ‘달마대사 관심론(達摩大師觀心論)’에서.

慧可問曰  若有人 志求佛道 當修何法 最爲省要 師答曰 唯觀心一法 摠攝諸行 名爲省要

問曰 云何一法 摠攝諸行

師答曰 心者 萬法之根本也  一切諸法 唯心所生  若能了心 萬行俱備 猶如大樹 所有枝條 及諸花菓 皆悉因根 栽樹者 存根而始生 伐樹者 去根而必死

若了心修道則 省功而易成 若不了心而修道 乃費功而無益 故知一切善惡 皆由自心 心外別求 終無是處

 

혜가(慧可)가 여쭈었다. “불도(佛道)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겠습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였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하나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어찌하여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고 하십니까?”

“마음이란 온갖 법의 근본이요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만행(萬行)을 다 갖추게 된다. 이를테면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 등이 모두 뿌리로 말미암아 있으니, 나무를 가꾸려면 뿌리를 북돋우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베려면 뿌리를 없애야 반드시 죽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을 알아서 도를 닦으면 노력은 적게 들어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만약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모든 선과 악은 다 자기 마음에서 생겼으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끝내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