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삼륜공적2018. 4. 7. 22:19

*삼륜공적(三輪空寂 석 삼/굴릴·전할 륜/빌 공/고요할 적) ; 보시의 3가지 요소, 보시하는 사람[施者] · 보시 받는 사람[受者] · 보시한 물건[施物]의 실체가 공적(空寂)하다는 이치. 이 이치를 깨달아서 어떠한 상(相)도 없이 하는 이상적인 보시가 실현된다. 삼륜체공(三輪體空),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고도 한다.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상(相)에 머뭄[住]이 없는[無] 보시인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와 통한다.

 

(12분 40초)

 

[법문] 송담스님(No.232)—84년 동안거해제 법어(84.02.16)(용232)

 

경전에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서 오십오위(五十五位) 점차(漸次)를 거쳐서 등각(等覺), 묘각(妙覺)을 갖다가 성취를 한다’ 그러는데,

삼아승지겁이라고 하는 것은 일아승지겁만 해도 몇억만 년인데, 삼아승지겁이면 얼마나 많은 천문학적 숫자로도 비유할 수가 없는 그런 긴 세월인데,

 

무엇을 삼아승지겁에다 비유했냐 하면 우리 그 중생심, 중생의 끊임없이—육진(六塵) · 육근(六根) · 육식(六識), 이 십팔계라고도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중생의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의 생멸식이 그 고비 고비가 바로 삼아승지겁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단속(團束)을 하고, 또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단속을 하고, 단속하면은 그 단속하는 그 생각에서 또 생각이 일어나고,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그렇고,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고,

수 없는 생각, 하루에면 몇천만 가지 생각이 일어나는데, 한 생각 속에 그놈을 더 미세하게 관찰을 하면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있다 그말이여.

 

그러니 일생 동안에 우리의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멸심(生滅心)을 무슨 전산기나 무슨 특별장치를 해서 그것을 갖다가 기록을 해서 그놈을 확대해 놓고 보면 정말 삼아승지겁이라고 표현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들을 단속을 하지 아니하고 방치해 두고, 또 일어나는 그 생각 따라서 자기도 같이 장단을 치고 춤을 추고, 생각으로 입으로 몸으로 놀아나서 업(業)을 짓게 되면 그것이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되는데.

 

무량겁을 육도윤회를 하면서 생사윤회를 하는데—천당에 갔다 지옥에 갔다, 축생이 되었다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되어도 빈부귀천 남녀노소로, 쪼끔 좋았다 나빴다, 울었다 슬펐다, 성냈다 풀어졌다, 괴로웠다 즐거웠다, 그 많은 생사유전(生死流轉), 그것이 무량겁으로 연속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그렇게 해 왔습니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 갈 것입니다. 다행이 우리는 불법을 만났고, 이 최상승법을 만났기 때문에...

 

그 아무 힘 안 들이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근원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왜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가도 모르고—그 일어나는 그 생각에 자기도 덩달아서 휩쓸려서 넘어가면서 고락(苦樂) 속에서 곤두박질을 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온전히 자기한테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전부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轉嫁)를 시킵니다.

그래 가지고 크나 작으나 남을 원망합니다. 남에게 그 허물을 뒤집어씌우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웬수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잘해 주어도 웬수가 되고, 더군다나 못해 주면 더 큰 웬수가 되고.

잘해 주면 은인이 되어야 할 텐데, 잘해 주면 반드시 그 사람이 결국은 웬수가 됩니다. 못해 주면 당장 그 자리에서 웬수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잘해 주는데 왜 웬수가 되느냐 그말이여?

처음에는 좀 ‘고맙다’ 그러지만, 결국은 그렇게 해서 맺어진 인연이 나중에는 웬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웬수는 친한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그만한 은혜도 남이 나한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은 아무리 조그만한 것이라도 평생 동안 잊지 말고, 아무리 큰 웬수라도 즉시 잊어 버려라’ 이렇게 고인은 말씀하신 바도 있지만,

 

남이 나한테 은혜를 베풀어 주되 나는 화두(話頭)를 들고, 화두를 듦으로써 그 사람의 은혜를 갚아야 하고,

남이 나에게 섭섭하게 하고, 남이 나에게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화두를 듦으로써 그 사람이 나한테 해롭게 한 보답으로 삼는다면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가장 현명한 길인 것입니다.

 

그 말은 어찌 생각해 보면 현실에 맞지 않는 말같이 생각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왜 남이 나한테 잘못하면 즉각 방어를 해야 하고 대처를 해서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고, 또 남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면 그 고마운 보답으로 물심양면으로 그 은혜를 갚으면서 살아야지,

어찌 남이 나를 해친다고 해서 화두만 들고 가만히 그것을 다 당할 수가 있으며, 또 남이 나에게 물심양면으로 은혜를 베풀었을 때에는 그것을 반드시 보답을 해야지, 화두만 들고 다 똑똑 따먹고 있을 수가 있느냐? 이건 현실적으로 안 맞는 소리다’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도를 닦는 스님네라면 삼륜(三輪)이 공적(空寂)해서—보시하는 것이나, 보시하는 물건이나, 받는 사람이 모두가 공적(空寂), 무심(無心)해 버리면 그것이 바로 청정(淸淨)한 것인데,

스님네는 혹 그럴 수가 있다 하지만, 세속에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화두만 들고 그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이 볼 때 미쳤다고 하거나 모자란다고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영 똑똑 따먹고 다시는 보답하는 법이 없으면은 그 사람은 아주 숭악한 욕심쟁이라고 할 것이 아니겠느냐?’

 

또 현실적으로 보면 그런 점도 있습니다.

있으나, 화두를 드는 마음으로 또 물질적으로 보답을 할 때는 하고, 또 상대방이 나를 해(害)를 치면 지혜롭게 방어를 하되, 웬수의 마음을 가지고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으로 대처를 하지 말고, 그 상대방이 나를 해를 가하되, 퍼뜩 화두를 들고서 먼저 이성에 입각해서 대처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놓쳐 버리면 감정에 떨어져 버리니까,

화두를 한 번 탁! 챙길 수 있는 여유만 있어도 우선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자기의 중심을 찾고서 모든 사리를 판단하게 되고 처리하게 되니까, 그리만 되어도 얼마나 훌륭한 일이며, 얼마나 지성인다우며, 얼마나 부처님 제자다우냐 이것입니다.

 

말은 쑥떡같이 해도 듣기를 참! 진수성찬으로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옳게 일러 주어도 사사건건이 삐뚤어지게 받아들이고 이상하게 해석을 붙이면 그건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질문을 하되 현명한 답을 하게 되고, 어리석은 사람은 현명한 질문을 하되 어리석게 답을 하게 됩니다.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또 이 산승이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듣기를 잘 들으셔야 합니다. 듣기를 잘 들어야 그것이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도를 닦아 가는데 좋은 채찍이 되고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 들으면, 이것이 자기의 분별심과 번뇌의 불에 섶을 얹히는, 가하는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36분38초~49분18초)

 

 

 

 

 

[참고] 『금강삼매경통종기(金剛三昧經通宗記)』 (제3권) (無相法品第二之下)

如人修施 以能施所施 及受施者 爲三輪 此三輪空寂 名無相無爲 是到彼岸 若三輪不空 則因果不忘 如輪之迴轉 是世間有爲法矣

 

어떤 사람이 보시를 닦을 때, 보시하는 주체와 보시물 그리고 보시를 받는 사람 등을 삼륜(三輪)이라 하고, 이 삼륜이 공적한 이치를 무상(無相) · 무위(無爲)라 하며 이것이 ‘피안에 도달한다[到彼岸]’는 뜻이다.

만일 삼륜이 공적하지 않다면 보시의 인과관계를 잊지 못하여 마치 바퀴가 회전하듯이 이어질 것이니, 이는 세간의 유위법(有爲法)이다.

 

[참고]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 (제75권) (初分淨道品第二十一之一)

若菩薩摩訶薩行布施時三輪淸淨 一者 不執我爲施者 二者 不執彼爲受者 三者 不著施及施果 是爲菩薩摩訶薩行布施時三輪淸淨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 삼륜이 청정해야 한다. 첫째, 보시를 하는 주체로서의 내가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둘째, 보시를 받는 사람으로서의 상대방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셋째, 보시하는 물건과 보시의 과보에 대해 집착하지 말아야 하니, 이것을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 삼륜이 청정한 것이라 한다.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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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 ; 보살(菩薩)이 발심(發心)한 뒤 수행을 완성하여 부처가 될 때까지의 수행의 기간. 이 수행의 기간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이라 한다. 삼(三)+아승지(阿僧祇)+겁(劫).

아승지(阿僧祇)는 산스크리트어 asanga, asaṃkhya를 음역(音譯)한 말. 무수(無數) · 무량수(無量數) · 무앙수(無央數)로 한역(漢譯)하고, ‘헤아릴 수 없는 큰 수’를 의미. 겁(劫)은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 단위. 무한히 긴 시간.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말함.

 

세 부분으로 나눈 수행의 기간은 경론(經論)마다 설이 일정하지 않다. 보살의 50계위를 3기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나누기도 한다.

①제1아승지겁 : 10신(信) · 10주(住) · 10행(行) · 10회향(回向)의 40위(位).

②제2아승지겁 : 10지(地) 가운데 초지(初地 환희지)부터 7지(地)까지.

③제3아승지겁 : 8지(地 부동지)부터 10지(地 법운지)까지.

*오십오위(五十五位) ; 처음 건혜지(乾慧地)를 지나 십신(十信) ·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 · 사가행(四加行) · 십지(十地)를 하나하나 거쳐서 올라가야 성불하게 된다는 말.

*점차(漸次) ; 시간이나 차례에 따라 조금씩.

*등각(等覺) ; ①등정각(等正覺), 금강심(金剛心), 일생보처(一生補處), 유상사(有上士). 보살의 지극한 지위이지만 지금부터 묘각(妙覺)의 불과(佛果)를 얻으려는 지위.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는 지위. 부처님의 깨달음과 거의 같은 깨달음이라는 뜻.

②부처의 다른 이름.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이 평등하다는 뜻. 평등각(平等覺).

*묘각(妙覺) ; ①부처님의 불가사의 무상(無上)의 깨달음. 절묘한 깨달음. 깨달음 그 자체. 구경각(究竟覺).

②보살이 십지(十地), 등각(等覺)의 수행을 마치고 마침내 부처님의 과위(果位)를 얻는 것. 스스로의 깨달음과 남을 깨닫게 하는 자각(自覺)과 각타(覺他)의 각행(覺行)이 원만하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을 말한다.

*삼성(三性) ; 모든 현상의 성질을 윤리적 측면에서 선(善), 악(惡), 무기(無記)로 나눈 것.

①선(善) ; 산스크리트어 kuśala 올바르고 청정하여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름.

②악(惡) ; 산스크리트어 pāpa 올바르지도 청정하지도 않아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르지 않음.

③무기(無記) ; 산스크리트어 avyākṛta 선도 악도 아닌 것. 또는 그러한 마음 상태.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생멸심(生滅心) ; 변화 동요하여 그치지 않는 마음.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유전(生死流轉) ; 중생이 불교의 근본 원리에 통달하지 못하여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일.

*전가(轉嫁 돌릴 전/떠넘길 가) ; 잘못이나 책임 등을 남에게 떠넘겨 덮어씌움.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무심(無心) ; ①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이 없음. ②세속적인 욕망이나 가치 판단에서 벗어난 마음 상태.

*청정(清淨 맑을 청, 깨끗할 정) ; 허물이나 번뇌가 없이 깨끗함.

*숭악하다 ; ‘속이 응큼하다(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엉뚱한 욕심을 품고 있거나 음흉陰凶하다)’ ‘흉악凶惡하다(성격, 언행이 모질고 악랄하다)’의 사투리.

* ; 잎이 붙어 있는 땔나무나 잡목의 잔가지, 잡풀 따위를 말린 땔나무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

Posted by 닥공닥정
ㅅ/삼아승지겁2018. 4. 7. 14:48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 ; 보살(菩薩)이 발심(發心)한 뒤 수행을 완성하여 부처가 될 때까지의 수행의 기간. 이 수행의 기간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이라 한다. 삼(三)+아승지(阿僧祇)+겁(劫).

아승지(阿僧祇)는 산스크리트어 asanga, asaṃkhya를 음역(音譯)한 말. 무수(無數) · 무량수(無量數) · 무앙수(無央數)로 한역(漢譯)하고, ‘헤아릴 수 없는 큰 수’를 의미. 겁(劫)은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 단위. 무한히 긴 시간.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말함.

 

세 부분으로 나눈 수행의 기간은 경론(經論)마다 설이 일정하지 않다. 보살의 50계위를 3기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나누기도 한다.

①제1아승지겁 : 10신(信) · 10주(住) · 10행(行) · 10회향(回向)의 40위(位).

②제2아승지겁 : 10지(地) 가운데 초지(初地 환희지)부터 7지(地)까지.

③제3아승지겁 : 8지(地 부동지)부터 10지(地 법운지)까지.

 

(10분 27초)

 

[법문] 송담스님(No.232)—84년 동안거해제 법어(84.02.16)(용232)

 

공부는 ‘자기가 하는 것’이고 또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하는 것’이라, 다른 사람을 위하고 다른 사람이 해줄 수가 없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공부가 잘되고 안되고를 따질 것이 없이 화두(話頭)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잘 들리게 되면 그럴수록에 더 알뜰하게 잘 단속을 해 나가야 할 것이고,

영 화두가 산만해서 집중력이 없이 잘 안 들리고,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영 정진이 잡히지를 않는다 할지라도 그럴수록에 지혜롭게 그 고비를 단속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가 순일해서 잘 들릴 때도 대단히 그러한 경계를 잘 유지해 나가도록 주의를 해 나가야 되겠지만,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답답하고 먹먹하고 영 애를 먹고 그럴 때에, 정말 그럴 때일수록 그 고비를 지혜롭게 잘 넘겨야만 되는 것입니다.

 

대혜 스님의 『서장(書狀)』에 보면, 그 공부가 잘 안되고 지루하고 답답하고 뒤틀리고 먹먹하고, 영 애를 먹을 때 그때가 가장 중요한 때라고 여러 차례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중요하다고 하냐 하면, 그게 공부가 잘 못 되어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그동안 공부해 가지고 한 고비 넘어갈려고 할 때에 그러한 경계를 만나게 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흔히 그렇게 되면은, 그런 경계를 만나면 “하! 내가 이 업장(業障)이 두터워 가지고 영 공부가 안 되고, 이거.... ” 그래 가지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고 한탄을 하고 그러는데,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인제 내가 이 고비를 잘 넘김으로써 공부가 한 계단 더 높이 올라간다. 그러한 중요할 때를 만났다’ 이렇게 생각을 함직하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경계를 만나면 절대로 짜증을 낼 일이 아니라 지혜롭게 그것을 대처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그것을 대처를 하는 것이 되느냐?

 

첫째, 짜증을 내지를 말 것이고, 둘째는 그러헐 때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해서 그 고비를 넘기고,

또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때에는 조용하게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 가지고 일직선으로 한 50미터나 30미터쯤 이렇게 직선으로 적당한 장소를 딱 정해 가지고 꼭 그 직선상으로만 왔다갔다하면서, 한 10분 이렇게 왔다갔다하면서 그 가운데에 화두를 들도록.

 

그러면 혼침도 없어지고 또 가슴이 그렇게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그런 것도 다 없어지고 그래서 상쾌해지면 다시 또 자기 자리에 와서 정진을 하고, 또 정진을 하되 한 얼마 동안 괜찮으면 괜찮을 때까지 고대로 쪽 정진을 하고.

 

또 답답하고 못 견디면 또 단전호흡을 해서 얼마 동안 그놈을 단속을 해서 고비를 넘기다가, 그래도 영 답답하고 골이 아프고 먹먹하고 지루하고 해서 잘 안되면, 또 가만히 또 나와서 포행(布行)을 하고.

이렇게 해서 그 고비를 넘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하다 보면 다시 깨끗하게 성성적적하게 화두가 현전(現前)하고, 순일하게 정진이 되어 가는데, 그전에 보단 훨씬 공부가 수월하게, 화두를 들려고 애를 쓰지 아니해도 화두가 일상생활 속에서 순일하게 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한한 공력을 들이고, 무던히 끈기 있게 이 고비를 넘기기를 수없이 이렇게 닦아 가는 것입니다.

 

경전에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서 오십오위(五十五位) 점차(漸次)를 거쳐서 등각(等覺), 묘각(妙覺)을 갖다가 성취를 한다’ 그러는데,

삼아승지겁이라고 하는 것은 일아승지겁만 해도 몇억만 년인데, 삼아승지겁이면 얼마나 많은 천문학적 숫자로도 비유할 수가 없는 그런 긴 세월인데,

 

무엇을 삼아승지겁에다 비유했냐 하면 우리 그 중생심, 중생의 끊임없이—육진(六塵) · 육근(六根) · 육식(六識), 이 십팔계라고도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중생의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의 생멸식이 그 고비 고비가 바로 삼아승지겁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단속(團束)을 하고, 또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단속을 하고, 단속하면은 그 단속하는 그 생각에서 또 생각이 일어나고,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그렇고,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고,

수 없는 생각, 하루에면 몇천만 가지 생각이 일어나는데, 한 생각 속에 그놈을 더 미세하게 관찰을 하면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있다 그말이여.

 

그러니 일생 동안에 우리의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멸심(生滅心)을 무슨 전산기나 무슨 특별장치를 해서 그것을 갖다가 기록을 해서 그놈을 확대해 놓고 보면 정말 삼아승지겁이라고 표현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들을 단속을 하지 아니하고 방치해 두고, 또 일어나는 그 생각 따라서 자기도 같이 장단을 치고 춤을 추고, 생각으로 입으로 몸으로 놀아나서 업(業)을 짓게 되면 그것이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되는데.

 

무량겁을 육도윤회를 하면서 생사윤회를 하는데—천당에 갔다 지옥에 갔다, 축생이 되었다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되어도 빈부귀천 남녀노소로, 쪼끔 좋았다 나빴다, 울었다 슬펐다, 성냈다 풀어졌다, 괴로웠다 즐거웠다, 그 많은 생사유전(生死流轉), 그것이 무량겁으로 연속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그렇게 해 왔습니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 갈 것입니다. 다행이 우리는 불법을 만났고, 이 최상승법을 만났기 때문에...(30분9초~40분3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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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 ; ①(주로 ‘없다’, ‘않다’, ‘못하다’ 따위의 부정어와 함께 쓰여)아무리 애를 써 봐도 도무지. ②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 또는 아주 심하게.

*대혜종고(大慧宗杲) : (1089 – 1163) 경산 종고(徑山宗杲). 법명은 종고, 자는 대혜(大慧), 법호는 묘희(妙喜)이며, 속성은 해(奚)씨. 안휘성(安徽省) 선주(宣州) 영국현(寧國縣)에서 났다.

17세에 출가하여 선주의 명교(明敎)선사에게 가서, 깨친 바가 있은 뒤, 조동종의 장로들께 많이 찾아다니다가 변경(汴京)의 천녕사(天寧寺)에 가서 원오선사의 법을 받아 가지고, 경산의 능인사(能仁寺)에서 크게 교화하였다.

 

그 때 나라의 정사를 비평하였다는 혐의로, 형주(衡州)에 귀양갔다가 또 얼마 뒤에 매주(梅州)로 옮기게 되었다. 그를 따라갔던 백여 명의 제자 가운데 반수 이상이 그 지방의 풍토병으로 죽었다.

17년 만에 석방되어 다시 경산과 아육왕산 광리사(阿育王山廣利寺)와 전당(錢塘)의 영지사(靈芝寺), 건강(建康)의 보령사(保寧寺) 같은 여러 곳에 있다가, 송나라 효종(孝宗) 융흥(隆興) 1년에 75세로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정법안장(正法眼藏)> 6권, <대혜어록(大慧語錄)> 30권, <법어(法語)> 3권, <대혜보각 선사보설(大慧普覺禪師普說)> 5권, <종문무고(宗門武庫)> 1권, <서장(書狀)> 2권 등이 있고, 법을 이은 제자가 90여 명이 있었다.

그가 교화한 가운데 특히 애쓴 것은 천동 정각(天童正覺)이 주장한 묵조선(默照禪)을 부수어 버리고 활구(活句) 참선을 강조한 것이다.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오십오위(五十五位) ; 처음 건혜지(乾慧地)를 지나 십신(十信) ·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 · 사가행(四加行) · 십지(十地)를 하나하나 거쳐서 올라가야 성불하게 된다는 말.

*점차(漸次) ; 시간이나 차례에 따라 조금씩.

*등각(等覺) ; ①등정각(等正覺), 금강심(金剛心), 일생보처(一生補處), 유상사(有上士). 보살의 지극한 지위이지만 지금부터 묘각(妙覺)의 불과(佛果)를 얻으려는 지위.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는 지위. 부처님의 깨달음과 거의 같은 깨달음이라는 뜻.

②부처의 다른 이름.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이 평등하다는 뜻. 평등각(平等覺).

*묘각(妙覺) ; ①부처님의 불가사의 무상(無上)의 깨달음. 절묘한 깨달음. 깨달음 그 자체. 구경각(究竟覺).

②보살이 십지(十地), 등각(等覺)의 수행을 마치고 마침내 부처님의 과위(果位)를 얻는 것. 스스로의 깨달음과 남을 깨닫게 하는 자각(自覺)과 각타(覺他)의 각행(覺行)이 원만하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을 말한다.

*삼성(三性) ; 모든 현상의 성질을 윤리적 측면에서 선(善), 악(惡), 무기(無記)로 나눈 것.

①선(善) ; 산스크리트어 kuśala 올바르고 청정하여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름.

②악(惡) ; 산스크리트어 pāpa 올바르지도 청정하지도 않아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르지 않음.

③무기(無記) ; 산스크리트어 avyākṛta 선도 악도 아닌 것. 또는 그러한 마음 상태.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생멸심(生滅心) ; 변화 동요하여 그치지 않는 마음.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유전(生死流轉) ; 중생이 불교의 근본 원리에 통달하지 못하여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일.

 

Posted by 닥공닥정
ㅍ/파정 방하2018. 4. 7. 05:43

*파정(把定) ; ①잡아 쥠. 장악하다. ②죽비를 치고 입선(入禪) · 입정(入定)을 하는 것.

*방하(放下) ; ①내려놓다. ②죽비를 치고 방선(放禪)을 하는 것.

 

(1) (17분 49초).

(2) (7분 42초).

 

[법문] 송담스님(No.232)—84년 동안거해제 법어(84.02.16)(용232)

 

(1)------------------

 

화소산전설천기(花笑山前泄天機)하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요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화소산전(花笑山前)에 설루기(洩漏機)요, 꽃은 산 앞에서 웃어 가지고 천기(天機)를 누설(漏泄)하고 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새는 수풀 밖에 노래해 가지고 무생(無生)을 말하고 있드라.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는, 머리마다, 낱낱이 꽃이 웃는 것이나 새가 노래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스스로 한없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로구나. 그 뜻을 깨달아 버리면, 그 한없는 뜻을 얻어 오면 그 근원을 만나지 아니하는 곳이 없어.

 

 

오늘은 계해년 10월 15일에 결제(結制)를 해 가지고 구십 일이 지내서 갑자년 정월 15일에 해제(解制)를 맞게 되었습니다. 삼동안거(三冬安居)에 해제인 동시에 백일기도 회향날이기도 합니다.

지난 겨울 동안 유독 날씨가 춥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그랬습니다마는, 대중스님네와 보살선방 보살님네들이 모두가 그러한 추위와 바람과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다 극복을 하시고 이렇게 아무 장애 없이 삼동안거를 마치고 오늘 이렇게 해제를 맞이했습니다.

 

 

파정(把定)하면 구름이 골짜기 어귀에 가로 놓였고, 방하(放下)하면 달이 차운 못에 떨어진다.

파정(把定)은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하는 거, 입정(入定)을 하는 것이고, 방하(放下)는 죽비를 치고 방선(放禪)을 하는 것인데,

 

안거를 시작하면, 결제를 하면 ‘죽비를 친다’고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精進)을 하고, 또 ‘방선을 했다’고 해서 화두를 놓아 버리고 잡담하고 그럭저럭 지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죽비 치고 입선하고, 죽비 치고 방선한 것은 많은 대중이 모여서 규칙 생활을 하기 위해서 부득이 시간 맞추어서 죽비를 치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들고 안 들고 또는 정진을 하고 안 하고 하는 데에는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여.

 

비단 90일 동안, 석 달 동안 이렇게 안거를 하고 정진할 때만 해당된 것이 아니고, 오늘 이렇게 해제를 한 뒤에도 설사 여러분이 가정에 돌아가시거나, 해제를 하고 떠억 걸망을 지고 행각(行脚)을 나서시건 간에,

해제 동안에 행각을 하면서 도중에서 죽비 누가 쳐 줄 사람도 없고 칠 필요도 없겠지만, 그러면 죽비를 안 치니까 참선을 안 하고 화두를 안 드느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석 달 동안 대중이 모여서 시간을 짜 가지고 그 시간대로 규칙 생활을 하면서 정진을 하는 것은 해제 동안에 일정한 규칙 없이 자유롭게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정진이 여일(如一)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한 특별한 기간 동안 특별한 시간을 짜서 규칙 하에 대중이 정진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결제(結制)는 인도에서 장마철에 비가 너무너무 연속해서 비가 내리니까 숲속에서 정진을 할 수가 없어서,

부득이 비가 많이 오는 계절에는 국왕이나 또는 장자(長者)나 그밖에 신심 있는 분이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을 위해서 기원정사라든지 죽림정사라든지 그러한 선방을 지어드린 그 선방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서 그 선방에 들어가서 대중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우기(雨期)가 끝나면은 각기 이리저리 흩어져서 숲속에서 자고, 숲속에서 정진하고, 인연 따라서 설법하고, 공양은 다 탁발(托鉢)을 해서, 발우(鉢盂)를 들고 하루 한 끼씩 얻어 자시고 그러면서 정진을 한 것이 그것이 결제 안거(安居)의 유래인데.

중국, 한국, 일본, 이 북방으로 오면 여름에 장마철뿐만이 아니라, 겨울이 돌아오면 또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해서 날씨가 차우니까, 또 자유롭게 다니면서 정진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서 그래서 이 북방으로 와서는 겨울 석 달 동안 안거를 또 하게 된 것입니다.

 

죽비를 치고 대중이 모여서 규칙 생활을 하고, 입방선을 할 때는 여럿이 같이 살고 법도에 맞춰서 하니까 특별한 생각을 내지 안 해도 저절로 대중 따라서 정진을 할 수밖에는 없고, 정진이 되어질 것입니다마는,

해제를 하게 되면 그런 엄격한 규칙이 없이 동서남북으로 행각을 하면서 자유롭게 지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입승(立繩)이 되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 주지(住持)가 되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 원주(院主)가 되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 모든 소임을 한 몸에 다 가지고 소임을 하면서 정진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제 기간 보다 훨씬 더 해제 기간 동안에 자기를 단속을 엄격히 하고, 스스로 자기에게 채찍질을 호되게 가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내야만 되는 그러한 계절인 것입니다.

 

계절인즉슨은 앞으로 석 달 봄철 동안 참 더웁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가장 정진하기에 좋은 계절이 돌아옵니다.

그런 좋은 계절을 참! 알뜰히 단속을 하신다면, 결제 동안에 그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하기보단 또 여름 결제 그 더웁고 땀나는 그 기간 동안보단 이 봄철 산철 동안과 가을철 산철 동안 그 기간에 박차를 가해서 충분히 정진을 한다면 정진에 큰 향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해제 기간 동안에 득력(得力)을 하시고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깨닫는 그러한 예를 볼 수가 있습니다.

 

 

파정(把定)하면, 마음을 가다듬고 정(定)에 들면 구름이 골짜기 곡구(谷口)에 가로 놓이고, 방하(放下)를 하면, 방선(放禪)을 하면 달이 한담(寒潭)에 떨어지더라.

 

유변(有邊)에 움직인 바가 되지 아니하면 근경법(根境法) 중에 그림자, 자취가 없고—근경법이라 하는 것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 육경(六境)—이 육근과 육진의 그 세계에 그림자와 자취가 끊어지는 것이고,

 

무변(無邊)에 적적(寂寂)한 바가 되지 아니하면—무변에도 집착을 하지 아니하면, 빠지지 아니하면, 자변나변(這邊那邊)에 응하는데 이그러짐이 없어.

형이상학적으로나 형이하학적으로나 조금도 이그러짐이 없이 응할 수가 있다.

 

그러면 ‘자변나변에 응해 가지고 이그러짐이 없다’한 도리는 어떠하냐 하면 달이 한담(寒潭)에 떨어진 것이고, ‘근경법 가운데에 그림자와 자취가 끊어졌다’하는 것은 바로 구름이 곡구(谷口)에 가로 놓인 것이다. 이렇게 바꾸어서 표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해제 동안에 조용한 곳을 만나도 그 조용한 데에 집착하지를 말고, 시끄럽고 복잡한 그러한 환경을 만나더라도 거기에 휘말려 들어가지를 말고서, 고요한 데에서도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해야 하고, 아무리 복잡하고 시끄러운 그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더라도 거기에서 화두가 성성적적해서,

고요한 가운데에서나 또는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나 한결같이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물샐틈없이 단속해 나간다면 이것이 바로 고요한 데에 처백히는 일도 없고, 시끄러운 데에 동요됨이 없을 것입니다.(처음~17분49초)

 

 

 

(2)------------------

 

아까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 가운데에도 정진하는 데에 나아가서,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법문이 계셨지만,

우리는 죽은 사람이 아니요, 목석(木石)이 아니기 때문에 눈으로는 무엇인가 눈을 뜨면 보이게 되고, 귀로는 무슨 소리인가 듣게 되고, 생각으로는 무슨 일이건 간에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가라앉었다 하게 됩니다.

 

그러나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생각에 좋은 생각이나 궂은 생각이나, 지내간 과거 생각이나 미래 생각이나,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든지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바로 화두를 돌이켜 거각을 해 나가면 보였던 것이 보되 본 바가 없고, 듣되 들은 바가 없고, 먹되 먹은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되 껍데기로만 들고 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계속해서 파동을 치고, 속이 상할 때도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기는 들지만 화두는 들면서도 그 속상한 생각은 여전히 훨훨 타오르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계속해서 화두를 들면 차츰차츰 그 화두를 관(觀)하는 힘이 강해지면, 한 생각 턱! 돌이키면 여지없이 앞 생각은 끊어져 버리고 오직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몰록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단속을 해 가면 나중에는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어지면서,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의단이 독로(獨露)하면서, 무슨 생각이 떠올라 와도 내가 그것을 상관을 안 하고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아니하고, 눈에 무슨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내가 생각을 주지 아니하고, 귀로 무슨 좋은 소리나 궂은 소리가 들려도 내가 거기에 신경을 써 주지 아니하고,

떠억 화두만을 갖다가 관(觀)해 나가면 그러한 밖의 경계나 일어나는 생각이 그냥 나한테는 아무 충격도 주지 아니하고 별 영향을 주지 아니하고서 그냥 스쳐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귓전으로 새소리가 스쳐 지나가고, 봄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꽃에서 나는 향내가 스쳐 지나간다 해서 그것 때문에 공부를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 나가면 설사 누가 속상하는 소리를 계속 내 앞에서 해 가지고 나의 오장을 계획적으로 뒤집어 놓기 위해서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하더라도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마음을 가다듬고 화두를 들고서 무심으로 상대하면,

상대방은 자기가 계속 그렇게 수작을 걸어오되 요쪽에서도 골을 내야 재미가 나서 더 달라붙을 텐데, 내가 화두를 떡 들고서 무심(無心)해 버리고 조금도 반응이 없으면 재미가 없으니까 그냥 입이 아퍼서 그만두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진하는 사람, 참선하는 사람이 근경법(根境法) 가운데에 그림자와 자취가 끊어지는 것이고, 자변나변(這邊那邊)에 응하되 이그러짐이 없는 데에 들어가는 최초의 단계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진을 알뜰히 단속해 나가게 되면 선방에 앉았거나, 도량에 나가거나 또는 여기저기 행각을 하더라도, 바로 그때 그 자리가 결제 중에 선방(禪房)에서 입방선(入放禪)을 하면서 지낸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정진이 성성(惺惺)하게 잘되어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17분51초~25분3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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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화소산전설천기~’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함허득통 설의(說誼) 게송 참고.

*설루(洩漏 샐·비밀이 흘러나오다 설/샐 루) ; [같은 말]누설(漏泄 샐 루/샐 설 : 비밀이 새어 나감).

*천기(天機) ; ①매우 중대한 기밀. ②만물을 주관하는 하늘이나 대자연의 비밀. 또는 신비.

*누설하다(漏泄-- 샐 루/샐 설) ; 은밀히 알리다.

*수풀 ; ①풀이나 작은 나무, 넝쿨 따위가 한데 엉킨 곳. ②나무가 울창하게 가득 들어찬 곳.

*무생(無生) ; ①생겨남[生]이 없는 것[無]. 일체법이 생겨나고 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것도 자성적 실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생겨나거나 멸하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

②성문사과(聲聞四果)의 하나인 아라한(阿羅漢 arhat)의 한역어. 삼계의 번뇌를 여의어 다시 삼계에 목숨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에서 무생이라고 한다.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삼동안거(三冬安居)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부지런히 힘씀. ②불법(佛法)을 깨닫기 위해 수행에 힘씀.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걸망 ; 물건을 담아서 등에 질 수 있도록 만든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

*행각(行脚) : ①수행자가 일정한 주소를 갖지 않고 스승이나 벗을 구하여, 자기의 수행이나 교화를 위해 곳곳을 편력하는 것.

②스승의 슬하(膝下)를 떠나서 선(禪) 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좋은 벗을 구하여, 마치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과 같이 발길 닿는 대로 여러 곳을 편력하는 것。 이것을 행하는 자를 행각승(行脚僧) 또는 운수(雲水)라고 함.

*여일(如一)하다 ; (사람의 언행이)처음부터 끝까지 꼭 같거나 변하지 아니하다.

*장자(長者) ; ①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 ②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말.

*우기(雨期) ; 일 년 중에 장마가 지거나 하여 비가 많이 오는 시기.

*탁발(托鉢 맡길 탁/바리때 발) ; 도를 닦는 스님이 경문(經文)을 외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보시를 받음.

수행자의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을 없애고, 동시에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 주는 공덕이 있다고 하여 부처님 생존 당시부터 행하였다.

*발우(鉢盂) ; 발(鉢)은 (산)patra의 음역어인 발다라(鉢多羅)의 준말로 식기, 우(盂)는 그릇을 뜻함. 음역어와 번역어의 합성어로, 수행승들의 식기를 일컬음.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주지(住持) ; 절이 잘 유지(維持)되도록 모든 일을 총괄적으로 책임지고 관리하는 소임.

*원주(院主) ; 후원(後院, 절에서 부엌을 일컫는 말)을 책임지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계절인즉슨 ; 계절로 말할 것 같으면.

*인즉슨 ;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의 뒤에 붙어, ‘~로 말할 것 같으면’의 뜻을 힘주어 나타내는 보조사.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파정(把定)하면... 방하(放下)하면... 구름이 곡구(谷口)에 가로 놓인 것이다 ;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9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에서.

(금강경 본문)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 야부 송(冶父 頌) : 把定則 雲橫谷口 放下也 月落寒潭

- 함허 설의(涵虛 說誼) : 不爲有邊所動 根境法中 無影迹 不爲無邊所寂 這邊那邊 應無虧 應無虧 月落寒潭 無影迹 雲橫谷口 把定 是 放行 是 把定放行 俱不是 一掃掃向三千外

*설의(說誼) ; 설의(說義). 의리(義理, 이유·도리)를 말함.

*자변나변(這邊那邊) ; 이쪽 저쪽.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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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700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목석(木石) ; 나무나 돌과 같이 감정이 없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단전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오장을 뒤집다 ; ‘오장(五臟)을 긁다’, ‘오장을 건드리다’와 같은 표현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비위를 건드려서 기분 나쁘게 하다’라는 뜻.

*무심(無心) ; ①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이 없음. ②세속적인 욕망이나 가치 판단에서 벗어난 마음 상태.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선실(禪室)과 같은 말. ②‘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Posted by 닥공닥정
ㅎ/화두 공안2018. 4. 4. 08:42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 : 공안(公案)。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18분 24초)

 

[법문] 송담스님(No.030)—77년 입춘법회(77.02.04)(용030)

 

무엇이 화두냐?

 

우리는 하루 종일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고 음식을 먹고, 손으로는 만지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몸뚱이로는 춥고 더운 것을 알고 그럽니다.

그런데 눈이 본다고 하면은 금방 죽은 사람도 눈이 있지마는 아직 몸이 뜨뜻하고 눈이 아직 멀쩡한데 보이지 않습니다. 또 귀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듣는 것이 아니라, 금방 죽은 사람은 귀가 분명히 아직 세포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은 듣지를 못합니다.

 

또 눈으로 무엇을 골똘히 보고 있을 때에는 옆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무슨 말을 해도 잘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또는 귀로 무엇을 아주 골똘히 무엇을 듣고 있을 때에는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면은 귀로 듣는 놈이나, 눈으로 보는 놈이나, 코로 냄새를 맡은 놈이나 전부가 다, 눈 자체가 보는 것이 아니고, 귀 자체가 듣는 것이 아니고, 입 자체가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놈, 듣는 놈, 맛보는 놈, 만지는 놈, 걸어가는 놈은 별도로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맛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입을 통해서 말을 할 뿐이지, 입 자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눈 자체가 보는 것이 아니고, 귀 자체가 듣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들어서 볼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들을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성낼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웃을 줄도 알며, 밥 먹을 줄도 아는가?

여러분들은 ‘그것은 마음일 것이다’ 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마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들어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지 ‘그 마음 자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인(古人)들이 편의상 ‘마음’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 놓았을 뿐이지, 그 자체는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이다, 성품이다, 자성이다’ 여러 가지 이름은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에 지내지 못해!

사람도 ‘갑돌이다, 갑순이다’ 이름은 뭐라고도 붙일 수가 있습니다. 또 ‘갑돌이’를 ‘을돌이’라고 이름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뭐라고 붙였거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 자체!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름만 알아 가지고는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관절 무엇을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였는가? 대관절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것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생겼는가?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보는 사람이 없고, 확인을 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대관절 무엇인가?

 

그놈이 들어서 볼 줄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뭘 좋은 걸 주면은 기뻐할 줄도 알고, 아프면은 신음할 줄도 알고, 슬퍼한 일을 당하면 울 줄도 알고, 여기 앉아서도 서울 일을 생각하기도 하고, 미국을 생각할 수도 있고, 지금 오늘 이 시간에 10년 전, 30년 전, 40년 전 일도 생각할라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대관절 그놈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이기에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無窮無盡)한 것인가?

 

우리가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아오는 동안 그놈의 명령에 의해서, 그놈의 조종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지금 이 몸뚱이를 끌고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금생뿐만이 아니라 전생(前生), 저 전생,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그놈이 여기서 태어났다, 저기서 태어났다 하면서 사람도 되었다 짐승도 되었다, 천상에도 갔다 지옥에도 갔다, 부자도 되었다 가난뱅이도 되었다, 선량한 사람도 되었다 악한 사람도 되었다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 자리에까지 오신 것입니다.

 

그놈을 잠시도 떠나서는 우리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도 떠날 수 없이 같이 살아오면서 왜 우리는 그놈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을까요?

 

그것을 분명히 우리가 보아 깨닫는다고 하면은 그것이 부처님인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붓다(Buddha)’라고 한 말을 중국에서 ‘불타(佛陀)’라고 음사(音寫)를 해서, 그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오면서 ‘부텨, 부텨’로 되었다가 지금은 ‘부처’ 이렇게 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라고 하는 것은 인도 말로 ‘붓다(Buddha)’가 삼천 년을 내려오면서 ‘부처’로 그렇게 전해 변해졌다.

 

그러면 인도 말로 ‘붓다’라 하는 말은 무엇이냐? ‘깨달음’ 또는 ‘깨달은 분’ 이러한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 가르침’ ‘깨닫는 길’ 이렇게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요새 학자들이 연구해서 어떠한 이치를 궁리해 가지고 알아 들어가고 자꾸 따져 들어가 가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해서 어떠한 결론이 내려지면 그것을 사물에다가 적용을 시켜보고, 그래 가지고 잘 적용이 되면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으로써 성립을 시키고 해서 이렇게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는 그래서 아는 것,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사량분별심을 떠나서—사량분별심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과 아는 것과의 차이는 사량분별을 사용을 해서 얻어지는 결론은 ‘아는 것’이고 지식이고, 사량분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생사 없는 이치를 보는 것을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굉장히 우리의 중생으로서는 전연(全然) 인연이 없는 아주 저 어디 극락세계나 가야 그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고, 우리로부터서 먼 데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겠지마는,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데 있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심을 가지고 알려고 하기 때문에 깨달음은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을 놓을 때 깨달음은 저절로 우리에게 딱! 붙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하는 데 있어서 몸을 바르게 가지고, 그다음에 호흡을 고르게 한 다음에는 화두를 생각을 해라.

 

화두를 생각하는 것은 사량분별이 아니냐?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화두를 의심(疑心)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 엄격히 말하면 생각이 아닌 것은 아니지마는, 이리저리 자꾸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서 따져 들어간다고 하면은 그것은 분명 사량(思量)이지마는.

따져 들어가지 말고, 무조건하고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놈이 무엇인고?’ 이렇게만 의심을 하신다고 하면은 이것은 사량이면서 사량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하는 데는 제일 해롭고 금지된 것이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버릇, 이것을 제일 엄격히 단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이놈이 뭣고?’

 

성이 날 때도 ‘이뭣고?’ 무엇이 들어서 이렇게 성낼 줄을 아느냐?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도 ‘이뭣고?’

 

우리의 생각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어떠헌 생각, 또 그놈을 바로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한다면은—일어나는 생각이 번져 가지고 삼재가 되고, 사백사병(四百四病)이 되는데,

일어나는 생각이 퍼지기 전에 그놈으로 ‘이뭣고?’ 이렇게 한다고 하면은 일어나는 그 생각은 나로 하여금 생사해탈(生死解脫)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법문(法門)이요, 발판이요, 나의 호위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말씀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듣고, 이 자리에서부터 이 공부를 충실히—생각, 생각 헛되이 날려보내지 말고, 일어나는 생각을 바로 되돌려서 ‘이뭣고?’

 

첫째, 몸을 단정히 하고, 깊은 그리고 조용한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차 타고 가면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앉아서도 하고, 밥 먹으면서도 하고, 똥 누면서도 하고, 소지(掃地)하면서도 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뭣고?’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한다” 그러한 말씀은 아직 참선을 할 줄 모르는 말씀이여.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바로 그놈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그놈으로 ‘이뭣고?’를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쥐를 잡을려면 고양이로 쥐를 보통 잡습니다마는, 그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쥐를 잡는 데에는 쥐를 동원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쥐를 잡아 가지고 항아리 속에다 넣어 놓고는 소고기도 조금—며칠을 굶긴 다음에 소고기를 사다가 조금씩 떼어서 먹입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조금씩 먹여서 안 죽을 만큼씩만 먹여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하되 계속 배가 고프게 만든 다음에 다른 쥐를 한 마리를 잡아서 넣어 줍니다. 그러면은 그놈이 어떻게 배가 고프던지, 그 쥐를 기어코 잡어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얼마 있다 또 쥐 한 마리를 넣어 줍니다. 또 쥐를 잡어먹습니다. 그래서 쥐가 쥐 잡어먹는데 아주 선수가 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완전히 쥐를 잘 잡어먹게 될 때에 그 쥐를 풀어서 놔두면은 쥐구멍으로 자유자재로 다니면서 모든 쥐를 다 잡어먹게 되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뭄뚱이가 커서 쥐구멍에는 들어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구멍 속에 들어가 버린 뒤에는 쥐가 나오기 전에는 잡어먹을 수가 없지마는, 이 쥐는 마음대로 쥐구멍으로 드나들면서 잡어먹는데.

고양이 소리만 나도 쥐는 벌써 알고서 다시는 나오지를 않지마는, 쥐가 다니는 데에는 아무도 그 쥐를 경계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나오게 됩니다. 나오는 쪽쪽 잡어먹고, 안 나오면 구녁으로 들어가서 잡어먹고 해서, 한 쥐가 모든 쥐를 다 소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농담같은 얘기지마는, 화두라고 하는 것은 모든 쥐를 잡어먹는 쥐라고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화두도 분명 우리의 중생의 사리상량으로 처음에 시작을 하지마는, 옳은 방법으로 자꾸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화두를 들고 화두를 참구하고 해 나가다 보면은 사리상량이 사리상량 아닌 사리상량으로 되어 가지고,

일체 번뇌망상, 무량겁으로 지어온 모든 업(業)을 이놈이 다 주워 삼키게 되고, 다 주워 삼킨 다음에 배가 툭! 터져서 죽어 나동그라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화두 참선법은 달마 스님이 천삼백여 년 전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셔 가지고 달마 스님 밑에 2조(二祖) 혜가 대사,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선사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뭣고?’라고 하는 화두를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하택 신회선사에게 ‘이 무슨 물건이냐?’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괴우고 아래로는 땅을 괴우며,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하고 물었습니다.

하택 신회선사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요, 하택 저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六祖)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앞으로 공부를 많이 해 가지고 크게 되어 보았자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되겠다, 강사밖에는 못되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룻날 남악 회양선사가 어려서 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남악 회양선사는 육조 스님이 물으신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 데 대해서 콱! 맥혀 가지고 뭐라고 말씀을 해야 좋을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길로 “대관절 무슨 물건이냐? 무슨 물건이냐?” 콱! 맥힌 상태에서 8년이 지내갔습니다. 그때는 화두라고 하는 그런 말도 없었을 때입니다.

대관절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 데 대해서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꽉 맥혀 가지고 8년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참선은 콱! 맥혀야만 되는 것입니다. 알 수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머리가 영리해 가지고 퍼뜩하면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배우고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맺으려고 하고 알아 들어가고, 이것은 참선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한다고 해도 이것은 생사해탈과는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생사(生死)의 업(業)을 조장하는 데에 그치는 것입니다.(26분37초~45분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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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무진(無窮無盡 없을 무/다할 궁/없을 무/다할 진) ; ①수량이 끝도 없고 다함도 없을 정도로 많다. ②끝도 없고 다함도 없음.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〇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〇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전연(全然 온전할 전/그러할 연) ; 주로 부정어와 함께 쓰여 ‘조금도’, ‘아주’, ‘완전히’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그 내용의 정도를 가장 높은 수준으로 강조할 때 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사백사병(四百四病) ; 인체에 일어나는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사대(四大)—지(地)·수(水)·화(火)·풍(風)의 부조화로 각 요소에 대해서 101가지 병이 있다고 한다.

지(地)와 화(火)에서 일어나는 열병(熱病)이 202가지, 수(水)와 풍(風)에서 일어나는 냉병(冷病)이 202가지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경전에 그들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일정하지 않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소지(掃地 쓸 소/땅 지) ; ①마당(땅)을 쓺.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 ②청소.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

 

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육조(六祖) : (638 ~ 713)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스물 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麈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麈埃)」라고 지었다。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18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칠십육 세로써 입적하였다。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지해종사(知解宗師)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知解]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를 말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Posted by 닥공닥정
ㅅ/삼재2018. 4. 4. 05:28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앉은삼재),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삼재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삼재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3분 13초)

 

[법문] 송담스님(No.030)—77년 입춘법회(77.02.04)(용030)

 

입춘 법회를 맞이해서, 금방 갑인년 입춘날에 설하신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었습니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말씀이 계셨지마는, 다른 절에서는 입춘날에는 입춘이 몇 시에 들었나 그것을 봐 가지고 새벽에 들었으면은 그 전날 저녁부터서 그 절에서 자고 그 시간을 맞추어서 불공(佛供)을 드리고, 그러한 절도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입춘날에는 그 시간을 맞추어서 모다 독불공(獨佛供)을 하고, 기도를 하고 모다 그러는데,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그 시간이 새벽에 들었거나, 저녁에 들었거나, 또는 낮에 들었거나, 언제 들었건 간에 입춘 불공은 조실 스님 법문 듣는 것이 그것이 입춘 불공이고.

 

또 다른 절에서는 입춘날에는 삼재(三災)에 든 사람에게는 부작(符作)을 모다 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법보선원에서는 어떠한 부작을 드리느냐? 우리 법보선원에서도 입춘 불공도 하고, 부작도 노놔 드릴려고 합니다.

 

우리 법보선원 부작은 무슨 부작이냐?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를 물리쳐 항복 받는 화두(話頭)가 우리 법보선원의 부작입니다.

조실 스님의 법문이 입춘 삼재를 소멸하는 불공이고, 조실 스님이 설하신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한 판치생모가 바로 삼재를 소멸하는 부작입니다.

 

노랑 종이에다가 경면주사(鏡面朱砂)로 그린 알 수 없는 부작은, 그것이 참으로 삼재를 소멸하냐? 또는 소멸할 수 없느냐? 그것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법보선원에서 노나 드리는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화두의 부작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전강 조실 스님과 소승(小僧)이 자신 있게 보장을 해 드립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종이에다가 경면주사로 쓴 부작을 가지고 다녀도 교통사고를 당하는 사람도 있고,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사람도 있고, 부작을 몸에다가 꼭꼭 싸서 잘 간직하고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재앙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사고가 나서 몸을 뒤져 보니까 몸에 부작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종종 신문에도 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작이 전혀 영험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옛날부터서 그 부작을 가지는 그러한 풍속이 내려와서 혹은 전혀 효험이 없지도 않기 때문에 옛날부터서 그런 것을 가졌지 않느냐?’ 이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전적으로 보장은 할 수가 없습니다.

 

 

삼재(三災)라고 하는 것이 대관절 무엇이냐?

 

금년에는 돼지띠, 또 토끼띠, 염소띠, 해묘미생(亥卯未生)이 그 삼재가 들게 됩니다. 삼재가 금년부터서 3년 동안 들게 되는데, 대관절 그 삼재란 것이 무엇이냐?

삼재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어떻게 생긴 고약한 놈이기에 그렇게 사람을 삼 년 동안을 달달 볶다가, 3년 만에 한 번씩 사람을 바꾸어 가지고 또 달달 볶아서 못살게 구느냐?

 

이 삼재는 여러분이 아무리 시력이 좋아서 눈을 비비고 보아도 그놈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뒤를 따라가 봐도 꼬리가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삼재는 저 하늘, 허공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솟아오른 것도 아닙니다.

 

삼재는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이 몸뚱이가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 저 전생, 전생 수수 백억 생 이전에, 이 우주와 태양, 하늘 아래 별들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부터서 우리의 마음자리는 있어 왔습니다.

 

그놈이 생겨난 때가 없을 때부터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면서 몸뚱이[身]로 지은 죄, 입[口]으로 지은 죄, 마음[意]으로 지은 죄, 이 몸뚱이와 입과 마음으로 지은 죄가 우리의 마음속에는 낱낱이 다 그 흔적이 녹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놈이 어떠한 인연을 만나게 되면은 그놈이 싹이 터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어 가지고, 내가 지은 그 원인으로 해서 그 결과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또 내생, 저 내생에까지도 무량겁을 두고 그놈이 계속 싹이 터서 가지고 뻗고, 그러다가 또 몸을 바꿔 가지고 또 그러고.

그러면은 과거에 지은 것만 받으면 그만이냐 하면은 그놈을 받으면서 계속 앞으로 자기가 받아야 할 재앙을 지금 또 짓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원인의 결과를 금생에 받으면서 금생에는 또 내생에 받을, 장래에 받을 업(業)을 또 짓고 있는 것입니다.

 

지으면서 받고, 받으면서 짓고, 이것이 잠시도 쉴 사이 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언젠가는 이 몸뚱이를 버려야 되고, 버림으로써 그것이 끝난다고 하면은 그만이겠지마는 이 몸을 버리자마자 또 새로운 몸을 또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몇억만 년을 오늘 현재 이 시간까지 왔고, 앞으로도 무량겁을 두고 그것이 계속된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정말 무섭고, 두렵고, 몸서리쳐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그 문제를 몸소 모범을 보이시면서 설산(雪山)에 들어가셔 가지고 수행을 하시고, 그래 가지고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다음 일생을 앉을자리 더워질 겨를이 없이 중생들에게 그 업을 소멸을 하고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진리를 설하셨던 것입니다.

 

몸으로 지은 죄와, 입으로 지은 죄와, 마음으로 지은 죄, 이 삼재를 소멸하는 방법은 참선(參禪)하는 법이 가장 빠르고도 쉽고도 간단하고 요긴한 것입니다.

 

삼재는 비단 앞으로 3년간 돼지띠와 토끼띠와 염소띠 가진 사람에 한해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묘미생 밖에, 사유축생이라든지, 신자진생이라든지, 인오술생 다른 모든 생(生)도 언제라도 우리에게는 삼재가 우리를 침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재는 밖에서 우리한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안에서 나오면서 나를 괴롭히고, 나와 가지고 다시 나에게 되돌아와서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고 손에도 만져지지 않건마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문(六門)을 통해서 언제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한 생각 동했다고 하면은 그것을 그 틈을 타서 삼재의 마구니는 우리를 침범하려고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38선(三八線) 너머에서 공산당이 우리를 침범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은 약과(藥果)입니다. 그것은 무력증강하고, 국민이 단합을 해서 잘 해 나가면 그것은 얼마든지 막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눈으로 보이는 적이기 때문에 막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나 이 삼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그림자 없는 그러한 도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정말 이 삼재를 막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어렵지마는, 막는 방법이 참선법이라고 하는 것을 아신다고 하면은 몸에 종이로 찍은 부작을 가지신 것보다는, 입춘 시간을 맞추어서 독불공을 하신 것보다는,

일어나는 생각 생각, 그때 그때 화두를 돌이켜서 나간다고 하면은 그 마귀가 고개를 들 겨를도 없이 잠깐도 여유를 주지 않는다고 하면은 마침내 그 마귀들은 맥을 추리지 못하고, 나를 보호하고 나를 받드는 선량한 부하가 될 것이고, 나로 하여금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선신(善神)이 되고, 나의 호위병이 되어 줄 것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참선법이야말로 삼재를 소멸하는, 금년 일 년 동안의 삼재만을 면할 것이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생사해탈하는 그러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고 하는 것을 그러한 요지의 말씀이 계셨습니다마는, 우리 법보선원 법보제자(法寶弟子)는 이렇게 믿고, 이렇게 실다웁게 실천을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처음~13분1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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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 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모다 ; ‘모두, 전부’의 옛말.

*독불공(獨佛供 홀로 독/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스님이 개개인에게 드려주는 불공.

*부작(符作) ; ‘부적(符籍)’의 변한 말.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살자(殺者)•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경면주사(鏡面朱砂) ; 적색 계통의 광물성 안료. 수정과 같은 결정구조를 가지는 육방정계에 속하는 천연광물로 주성분은 황화수은(HgS)이다. 진사(辰砂), 주사(朱砂), 단사(丹砂), 광명사(光明砂)라고도 한다. 색깔은 주홍색 또는 적갈색이며 조흔색(條痕色 : 광물이 가루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색)은 심홍색(深紅色 : 아주 짙은 밝은 빨강색)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소승(小僧) ; ①나이가 어린 스님. ②수행이 부족한 스님. 또는 하찮은 스님 또는 조무래기 스님이라는 뜻으로 경멸하는 말. ③스님이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부르는 말. 산승(山僧), 빈도(貧道), 소아사(小阿師), 소사(小師) 등과 같은 말이다.

*삼업(三業) :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동 전체를 말한다。몸으로 짓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3가지와,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4가지와, 뜻으로 짓는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의 3가지가 있다. 이것이 삼업이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 뜻이다. 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38선(三八線) ;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1945년 8월15일 맥아더가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에 의해 한반도의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의 일본군의 항복은 미국이 접수한, 미·소 양국의 한반도 분할점령 군사분계선.

38선은 1953년 6 · 25 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현재의 군사분계선과 다르지만, 현재까지도 흔히 군사분계선을 삼팔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약과(藥果) ; ①과줄(꿀과 기름을 섞은 밀가루 반죽을 판에 박아서 모양을 낸 후 기름에 튀긴 과자. ②약과는 달고 맛있어서 먹기에 쉽듯이 어떤 일을 하기가 아주 수월하다는 뜻으로,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님’을 이르는 말.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선신(善神) ; 불법(佛法)과 그것을 믿는 이들을 보호하는 신.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여기 (용화선원 대웅전 법보단)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대웅전 법보단, 舊 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