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찾지 말라(No.151)—바른 스승을 만나려면 자기 자신이 정말 바른 신심(信心)을 가져야 |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 번뇌망상을 발판으로 해서 화두를 챙기면 그것이 공부를 바로 해 들어가는 것.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오직 의심(疑心)만을 관(觀)해 나가라.
*밖에서 찾지 말라 ;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열심히만 참선 정진해 가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니까,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루 속에 든 자라, 자기가 아무리 종일토록 버르적거려도 구덕 속에 들어있는 자라는 거기에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아무개야!” “예”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놈을 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거든.(송담스님 No.577—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❶] 『선문촬요(禪門撮要)』 (경허선사 編) ‘달마대사 관심론(達摩大師觀心論)’에서.
慧可問曰 若有人 志求佛道 當修何法 最爲省要 師答曰 唯觀心一法 摠攝諸行 名爲省要
혜가(慧可)가 여쭈었다. “불도(佛道)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겠습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였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하나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問曰 云何一法 摠攝諸行 師答曰 心者 萬法之根本也 一切諸法 唯心所生 若能了心 萬行俱備 猶如大樹 所有枝條 及諸花菓 皆悉因根 栽樹者 存根而始生 伐樹者 去根而必死 若了心修道則 省功而易成 若不了心而修道 乃費功而無益 故知一切善惡 皆由自心 心外別求 終無是處
“어찌하여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고 하십니까?”
“마음이란 온갖 법의 근본이요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만행(萬行)을 다 갖추게 된다. 이를테면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 등이 모두 뿌리로 말미암아 있으니, 나무를 가꾸려면 뿌리를 북돋우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베려면 뿌리를 없애야 반드시 죽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을 알아서 도를 닦으면 노력은 적게 들어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만약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모든 선과 악은 다 자기 마음에서 생겼으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끝내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참고 ❷]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 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참고 ❸]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 지눌 스님)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 離此心外 無佛可成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 하여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幻化, 幻과 같은 變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부터 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법(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 있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님이다.
(2분 57초)
[법문]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바른 스승이, 어떠한 사람이 과연 바른 스승이냐?
'바른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했고, 바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그것이 바른 스승이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려면 자기 자신이 정말 바른 신심(信心)을 가지면 묘(妙)하게 불보살(佛菩薩)의 지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화현(化現)은 이 사바세계에 육도법계(六途法界)에 가뜩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불보살의 화현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도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도 그렇거든 하물며 이 무루법(無漏法), 최상승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서—나, 참나를 찾아야 되는데, 참나는 번뇌 망상, 번뇌 망상을 버리고 찾지 말고, 중생의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癡心) · 오욕락(五欲樂) · 번뇌(煩惱) · 망상(妄想) 바로 거기에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거기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화두를 떠억 챙기면 그것이 공부를 바로 해 들어가는 것이여.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오직 의심(疑心)만을 관(觀)해 나가는 것이여. 망상이 일어나도 그 망상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바로 거기서 '이뭣고?'
이것이 바로 망상을 다스리는 공부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굴복 받는 길이요, 일체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길이여.(52분48초~55분4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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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도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
[참고 ❶] 『선문촬요(禪門撮要)』 (경허선사 編) ‘달마대사 관심론(達摩大師觀心論)’에서.
慧可問曰 若有人 志求佛道 當修何法 最爲省要 師答曰 唯觀心一法 摠攝諸行 名爲省要
혜가(慧可)가 여쭈었다. “불도(佛道)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겠습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였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하나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問曰 云何一法 摠攝諸行 師答曰 心者 萬法之根本也 一切諸法 唯心所生 若能了心 萬行俱備 猶如大樹 所有枝條 及諸花菓 皆悉因根 栽樹者 存根而始生 伐樹者 去根而必死 若了心修道則 省功而易成 若不了心而修道 乃費功而無益 故知一切善惡 皆由自心 心外別求 終無是處
“어찌하여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고 하십니까?”
“마음이란 온갖 법의 근본이요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만행(萬行)을 다 갖추게 된다. 이를테면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 등이 모두 뿌리로 말미암아 있으니, 나무를 가꾸려면 뿌리를 북돋우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베려면 뿌리를 없애야 반드시 죽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을 알아서 도를 닦으면 노력은 적게 들어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만약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모든 선과 악은 다 자기 마음에서 생겼으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끝내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참고 ❷]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 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참고 ❸]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 지눌 스님)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 離此心外 無佛可成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 하여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幻化, 幻과 같은 變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부터 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법(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 있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님이다.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 부귀영화 · 명예 · 권리 ·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 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 (4분53초)
〇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루법(無漏法) ; 번뇌를 끝낸 것. 누(漏)는 누설(漏泄)의 준말로 번뇌를 뜻한다.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 상태. 사제(四諦) 가운데 깨달음의 결과인 멸제(滅諦)와 그 원인인 도제(道諦)에 해당하는 모든 현상.
범부의 지혜를 유루지(有漏智)라 하는 데 비하여 도를 이룬 성자의 지혜를 무루지라 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오직 의심(疑心)만을 관(觀)해 나가는 것이여’ ; 의심관(疑心觀).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 59초)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 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 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 말이여.
[참고 ❷]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 57초)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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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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