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밖에서찾지말라2020. 5. 2. 09:06

밖에서 찾지 말라(복전암No.22)—마조 스님과 혜해 스님의 법문답, 자가보장(自家寶藏) | (게송)白雲雲裏靑山重~ | 여래장(如來藏)이 나가서 전개된 것이 이 우주법계(宇宙法界)다. 법계를 거두면은 바로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주관과 객관이 별개(別個)의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여.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바로 ‘이뭣고?’로 돌아와야.

 

*밖에서 찾지 말라 ;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열심히만 참선 정진해 가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니까,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루 속에 든 자라는, 자기가 아무리 종일토록 버르적거려도 자루 속에 들어있는 자라는 거기에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아무개야!” “예”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놈을 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거든.(송담스님 No.577—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 지눌 스님)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 離此心外 無佛可成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 하여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幻化, 幻과 같은 變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부터 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법(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 있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님이다.

 

(17분 24초)

 

[법문] 송담스님(복전암No.22)—1990년 관음칠성회 기도회향 법문(90.10.07) (복전암22)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내 마음을 찾는 방법이여.

 

불법(佛法)은 '내가 내 마음을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내 마음,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이라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마조(馬祖) 스님의 제자인 혜해(慧海) 스님의 지으신 법문이여.

그런데 그 스님은 중국에 월주(越州) 땅에 있는 대운사(大雲寺) 스님이었었는데, 마조 스님이라고 한 큰 도인(道人)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그 마조(馬祖)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떠억 절을 하니까 마조 스님이 묻기를, "어디서 왔는고?"하고 물으니까, "저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에서 왔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구하러 왔는고?"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자기집 보배 창고는 놓아두고서 뭣 하러 사방을 이렇게 돌아다니는고? 나한테는 아무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나한테 구하러 왔단 말인가?"

그러니까 그 혜해 스님이 일어서서 떠억 절을 하고서 묻기를, "어떤 것이 혜해의 자기집 보배 창고입니까?" 그렇게 여쭈었어.

 

 

오늘 십선대계도 받고 불명도 받고 화두도 받지마는, 진짜 이 산승(山僧)이 여러분께 꼭 간절히 일러드리고 싶은 말을 할라고 마음을 먹고 있으니까 전기가 딱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만큼 신심(信心)이 돈독(敦篤)해서 진짜 마음에 보배를 찾아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갈 표를, 진짜 표를 타게 될 이 순간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인연(因緣)과 복(福)을 가지셨기 때문에 이 시간 맞춰서 전기가 들어온 것입니다.

 

"어떤 것이 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自家寶藏)입니까?"하고 여쭈어봤어.

 

마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끔 내게 묻는, '어떤 것이 이 혜해의 자가보장입니까?'하고 묻는 바로 그놈이 너의 자가보장(自家寶藏)이니라. 바로 그 보장(寶藏) 속에는 일체가 다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으며 조끔도 부족함이 없으며, 영원히 써도 써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보장을 가지고 있으니 그 보장을 놔두고 어찌 밖에서 그 보장을 찾는단 말인고?"

 

그 말 한말씀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이것을 ‘언하대오(言下大悟)’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혜해 스님은 지적 이론(知的理論)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부처님과 똑같이 확철대오를 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여. 안 것과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도 언하에 대오한 사람이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설사 이 찰나 동안에 언하대오를 못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이 법문을 들은 그 인연으로 여러분은 반드시 확철대오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때, 금생(今生)에 못하면은 내생(來生)에라도 하게 되겠지만, 같은 값이면 금생에 이 몸뚱이 있을 때 확철대오 한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지끔 이 법문을 듣고 있는—그 듣는 것이 귀가 듣는 것이 아니어요. 듣는 놈은 속에 있고 다못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거든.

그 귀를 통해서 듣는 놈, 그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가?' 항상 그 의심(疑心)을 관(觀)해.

 

속이 상할 때도, 불끈 속에서 속상하는 놈이 요렇게 주먹탱이 같은 놈이 일어날 때, 바로 '이 일어난 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슬플 때 '이 슬퍼할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괴로울 때 '괴로워 할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가끔씩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플 때도 '이 아플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속이 상할 때마다, 원망스러울 때 괴로울 때, 그 찰나 찰나가 바로 확철대오 할 수 있는 바로 그 기회(機會)다.

 

 

백운운리청산중(白雲雲裏靑山重)하고  청산산중백운다(靑山山中白雲多)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여운산장작반(日與雲山長作伴)하면  안신무처불위가(安身無處不爲家)니라

나무~아미타불~

 

백운운리청산중(白雲雲裏靑山重)이요  청산산중백운다(靑山山中白雲多)로구나.

흰구름 뭉게뭉게 속에 청산(靑山)이 중중(重重)하고, 청산 산 가운데에 백운(白雲)이 많구나.

 

일여운산장작반(日與雲山長作伴)하면, 날이면 날마다 첩첩산중에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곳에 청산이 첩첩한, 구름과 그 청산을 길이길이 도반(道伴)을 삼고 살아갈 때에,

안신무처불위가(安身無處不爲家)로구나. 구름 뭉게뭉게 일어나는 곳, 청산이 첩첩한 바로 그곳이 내 몸 편안히 할 나의 집 아닌 곳이 없구나.

 

이건, 구름은 객관 세계(客觀世界)를 비유한 것이고, 청산은 주관(主觀)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객관(客觀)은, 주관(主觀)은 무엇이냐?

내가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를 듣고, 코를 통해서 온갖 내음을 맡고, 입을 통해서 온갖 맛을 보고, 몸을 통해서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이 육근을 통해서 모든 것을 느끼는 이 육근(六根), 느낄 줄 아는 놈이 그것이 주관(主觀)이고.

 

육경(六境),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모든 빛깔과 모냥, 모든 형형색색의 소리, 모든 냄새, 모든 맛, 몸뚱이를 통해서 느끼는 모든 색진(色塵), 촉(觸), 그리고 우리의 생각으로 하는 모든 법(法)이 다 그것이 객관 세계(客觀世界)인데,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이것이 객관(客觀)이여.

 

그런데, 모든 객관은 주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이 인식(認識)되는 것이고, 또 모든 객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관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여.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그 육진(六塵, 육경六境)이 없으면,

우리에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식(識)이, 육근(六根)을 통해서 식(識)이 일어나는 것이여.

 

그래서 육진(六塵, 육경六境)과 육근(六根)과 육식(六識)은 항상 이것이 삼위가 연관이 되어서 우리가 생활을 하고 온 세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여.

 

그래서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은 우리의 제팔(第八) 아뢰야식(阿賴耶識), 우리에게 그 여래장(如來藏)이 있기 때문에 그 여래장이 나가서 전개(展開)된 것이 요 삼라만상 두두물물 우주법계(宇宙法界)다.

우주법계가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여래장(如來藏)이 나가서 벌어져 있는 것이 바로 요 법계(法界). 법계를 거두면은 바로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여.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 두 개가 따로따로 별개(別個)의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여.

그래서 우리 참선(參禪) 하는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바로 ‘이뭣고?’로 돌아올 줄 아는 것이여. 귀로 무슨 소리를, 그 소리가 좋은 소리가 되었건 나쁜 소리가 되었건, 법문이 되었건 개 짖는 소리가 되었건, 무슨 소리든지 듣자마자 '이뭣고?'로 돌아와야 해.

 

이 법을 믿는 사람이 세계 60억 가운데 몇 사람이 되나 그말이여.

최상승, 불법(佛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법문(法門)을 듣고 믿는 사람만이 이 공부를 할 수가 있는 거여.

 

이 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밤낮 육진 세계(六塵世界), 외부 세계(外部世界)에만 팔려서 사는 거여.

그것을 비유해서 말하기를, 고향을 떠나서 타관(他官) 객지(客地)로 떠돌아다니면서 그 자기 딴은 참 좀 잘살아 볼려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나그네 신세(身世), 방랑객 신세로 일생을, 무량겁(無量劫)을 그렇게 살아가는 거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법문을 듣고 믿는 사람은 바로 자기의 쓰고 쓰고 써도 다함이 없는 보배창고에 보배가 가득—실컷 쓰고, 온 사람들한테 다 노놔 주어도 끝이 없는, 편히 살 수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밖에서 그 보물을 찾고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지마는, 지혜(智慧) 있는 사람은 내게서 찾어야 하는 거여.

 

만석꾼이가 되아도, 실제로 만석꾼이 갑부도 정법(正法)을 안 믿는 사람은 천하에 불쌍한 가난뱅이인 것이고, 별로 큰 재산이 없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최상승법을 믿고 내 마음 속에서 영원을 찾는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어.

보리밥에 나물밥을 먹고 살아도, 된장찌개 하나로 먹고 살아도 조끔도 부족함이 없는 거여.

 

자기가 지은 대로 잘살면 잘사는 대로 좋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좋고,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함이 없이 부러운 것 없이 충족(充足)하다 그말이여.(21분5초~38분2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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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마조(馬祖) : (709 – 788) 법명은 도일(道一), 속성은 마(馬)씨。사천성(四川省) 성도부(成都府) 십방(什放)에서 나서 어려서 출가하였다.

남악(南嶽)에 가서 좌선(坐禪)하고 있는데 회양선사(懷讓禪師)가 묻기를,

『무엇하고 있는가?』

『좌선합니다』

 

『좌선은 해서 무엇하려는가?』

『부처 되려고 좌선하지요』

 

그 이튿날 회양선사가 도일의 앞에 가서 벽돌을 돌에 갈고 있었다.

도일이 묻기를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하렵니까?』

『거울을 만들려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읍니까?』

『앉아 있어서 부처가 될줄 아는가?』

 

『......그러면 어찌 하오리까?』

『우차가 가지 않을 때에 수레를 때려야 되겠는가,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선은 앉거나 눕는 데 상관없는 것이며, 부처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집착이 없고 취사(取捨)가 없는 것이 선이다!』하는 말 끝에 크게 깨쳤다.

 

그의 법을 받아 가지고, 강서성 남강(南康)의 공공산(龔公山)과 강서성 남창부(南昌府) 종릉(鍾陵) 개원사(開元寺)에서 교화하니, 그의 법을 받은 제자가 139인이나 되었다.

 

그의 제자 남전 보원(南泉普願)에게서 신라의 도균(道均)선사와 철감(哲鑑)국사가 나왔고, 염관 제안(鹽官齊安)에게서 범일(梵日) • 진감(眞鑑)의 두 국사가, 귀종 지상(歸宗知常)에게서 대모(大茅)화상이, 대매 법상(大梅法常)에게서 가지(迦智)선사와 충언(忠彥)선사가, 마곡 보철(麻谷寶徹)에게서 무염(無染)국사가, 서당 지장(西堂智藏)에게서 도의(道義)국사와 혜철(惠哲)국사와 홍척(洪陟)선사가, 장경 회운(章敬懷暉)에게서 현욱(玄昱)국사와 각체(覺體)선사 같은 신라의 큰스님들이 나왔다.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4년에 80세로써 입적하였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자가보장(自家寶藏) ; '자기집[自家] 보배 창고[寶藏]' 중생이 각자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가리킴.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참고]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32권 「辯緣起品 第三之十二」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는 말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완비되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대보적경(大寶積經)』 제60권 「文殊師利授記會 第十五之三」

文殊師利言 善男子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문수사리가 말했다. 선남자야,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지끔 이 법문을 듣고 있는—그 듣는 것이 귀가 듣는 것이 아니어요. 듣는 놈은 속에 있고 다못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거든. 그 귀를 통해서 듣는 놈, 그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가?' 항상 그 의심(疑心)을 관(觀)해'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게송) '백운운리청산중(白雲雲裏靑山重)~'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운산(雲山)'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경(六境) ;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아뢰야식(阿賴耶識) ;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참고] 〇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여래장(如來藏) ; 산스크리트어 tathāgata-garbha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여래가 될 가능성. 중생의 마음 속에 저절로 갈무리되어 있는 여래의 청정한 씨앗. 중생이 모두 갖추고 있으나 번뇌에 가려져 있는 여래의 성품. 모태(母胎)의 태아(胎兒)처럼, 중생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부처의 성품.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