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대중생활2024. 1. 16. 13:11

대중생활(No.151)—법회 때, 그리고 법당에서의 예절.


*대중생활(大衆生活) ; 대중이 함께 수행하는 생활. 많은 수행자가 함께 생활하면서 그 조직과 수행에 필요한 수도 규칙[청규淸規]이 그 시대와 상황에 맞게 만들어졌다.

*대중(大衆)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mahā-samgha, mahā-sabhā. 음역하면 마하승가(摩訶僧伽)이다. 많은 사람의 모임이란 뜻으로 참선 수도하는 스님들의 모임 또는 일반적으로 법문을 청하여 듣는 사부대중(四部大衆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을 일컫는다.

*입중오법(入衆五法) ; 대중 생활을 하면서 명심하고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목. ①하의(下意), 하심(下心). ②자비심(慈悲心). ③공경(恭敬). ④지차제(知次第). ⑤불설여사(不說餘事).

[참고] 『미사색부화혜오분율(彌沙塞部和醯五分律)』 제19권 第三分之四 ‘자자법(自恣法)' (동국역경원)
優波離問佛 若比丘入僧中 應以幾法 佛言 應以五法 一下意 二慈心 三恭敬 四知次第坐處 五不論說餘事 復有五法 不應反抄衣 不應左右反抄衣 不應扠腰 不應覆頭 應恭敬僧

우파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비구가 승가에 들어가려면 몇 가지 법으로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법으로 해야 하느니라. 하나는 뜻을 낮추는 것이고, 둘은 자비심을 내는 것이고, 셋은 공경하는 것이고, 넷은 차례대로 앉는 자리를 아는 것이고, 다섯은 다른 일을 논하지 않는 것이니라.
또 다섯 가지 법이 있느니라. 옷을 걷어붙이지 않아야 하고, 좌우로 옷을 걷어붙이지 않아야 하고, 뒷짐을 지지 않아야 하고, 머리를 덮지 않아야 하고, 승가를 공경해야 하느니라"

(6분 19초)


[법문]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원래 이 일요법회는 설법하는 시간보다도 다 같이 죽비(竹篦)를 치고 참선을 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그렇게 생각을 해 오고 있습니다.

목탁을 치고 입선(入禪)을 해.
(목탁)


정진(精進).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법당을 나가셔서 댁으로 돌아가시는 걸음걸음 사이에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시고, 댁에 가셔서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생활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이다음 법회 때에 언제라도 여기에 떠억 법당에 들어오시면 부처님께 참배(參拜)를 하시고, 그리고서 자리에 앞에부터 차례차례 적당한 자리에 따악 앉으시면, 앉자마자 따악 반가부좌(半跏趺坐) 따악 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서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을 하십시요. 다음 그 바로 법회가 시작할 그 시간까지.

들어오신 대로 차곡차곡 차곡차곡 그렇게 해서 열 분, 스무 분, 백 분, 이백 분, 오백 명, 칠백 명 이렇게 들어오셨더라도 한 분도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조용하게 정진을 하시는 가운데에 법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시도록.
여기는 극장도 아니고, 무슨 다른 그런 연회석상도 아니고, 이 법당 안에 들어오셨으면 오직 그 경건한 마음으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떠억 들고서 5분이면 5분, 10분이면 10분, 30분이면 30분, 일찍 오신 분은 한 시간이라도 정진을 하시면 그 시간이 얼마나 참 귀중한 시간이 되겠습니까.

옆에 분하고 주거니 받거니 수근수근수근 잡담을 하면 여기에 오신 본의(本意)도 아니고 또 그 한 분, 여그서 떠들면 저그서 떠들고 해 가지고 이 법당 안이 도대체 너무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여기에 오신 분 가운데에는 또 그렇게 제가 말씀을 안 드려도 또 그렇게 정진하시고 있는 분도 계시는데, 그 정진하시는 분에게 방해도 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자기도 열심히 공부하면 남도 공부 잘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되는 것인데, 자기도 공부를 아니하면서 남의 공부하는 것을 방해를 치는 것은 수행인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용화사 선원은 처음 오신 분도 들어오자마자 탁! 스스로 엄숙해지고 경건해지도록 그러한 이 법보선원이 되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참배를 할 때 혹 향을 가지고 오시던지 초를 가지고 오셨을 때, 불이 안 켜졌으면 가지고 오신 촛불을 켜시면 좋고, 또 향불이 안 타고 있으면 또 당신이 가지고 오신 향을 사롸서 꽂고 절을 하시면 좋지만, 이미 촛불이 켜져 있거나 향이 꽂아 있으면 자기가 가지고 오신 것은 탁자 위에 가지론히 딱 놔놓고 그리고서 경건하게 예배만 올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촛불이 켜져 있는데, 그놈을 탁! 내려서 끄고 당신이 가져온 것을 꽂고, 향이 이미 꽂아 있는데 거기다 또 두 개 세 개 네 개를 잔뜩 꽂아 놓으면 그 연기가 너무 법당 안에 자욱해 가지고 목이 아프고 또 법당이 또 시커멓게 끄실리게 되면 그것도 안 좋은 것이고.

이 법당에 들어서면 은은한 향기가 감돌아야지, 너무 향을 많이 꽂아 가지고 공장 굴뚝같이 되어 가지고서는 존엄성도 없어지는 것이고 위생상으로도 안 좋은 것이고.
하도 부처님이 연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다고 그래서 유리로 문을 해 닫았습니다. 부처님은 문을 해 닫아 드려서 아무 말씀이 없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향을 피는 거, 촛불을 켜는 것을 꼭 그렇게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절대로 향을 많이 꽂는다고 해서 부처님이 복을 많이 주시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갖다 놓으시기만 해도 부처님은 다 아시니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 말을 했습니다마는 제가 정말 여러분께 하고자 한 말을 못다 했습니다.(59분59초~66분14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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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 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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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ㅊ/참선(의 목적)2024. 1. 15. 15:47

참선(No.151)—참선 공부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라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 |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하는 법이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의 종교.
최상승법은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 데부터서 시작을 해야 |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의 길로 돌아서는 것.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 생사해탈 묘법(妙法) | 사바세계라 하는 것은 원래가 믿지 못할 곳. 즐거운 것, 건강한 것도 잠시.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중생 | 참선법은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 |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 | (게송)山光水色裡~.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 17분 5초.

 

(2) 12분 34초.

 

(3) 14분 4초.


[법문]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1/3)----------------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여. 이 공부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은 누구라도 하면 되는 것이고, 또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 '참선, 참선' 요새 굉장히 그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불법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이 참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참선이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그러면 참선을 내가 직접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에 가서 참선을 지도를 받을 것인가? 어떻게 참선을 해야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 부딪히면 망연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와서 책을 사 봐도 잘 모르겠고, 어떤 스님을 만나서 물어봐도 확실하지를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앉아서 몇 달, 몇 해씩을 해 봤지만, 이것이 옳게 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참선은 참 어려운 것이다. 여간해서는 참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 결론에 도달해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 그런 거사님이나 보살님도 더러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참선은 제일, 불법 가운데에 제일 높은 수행 방법이면서 제일 쉬운 것입니다.
실지로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 가서 배워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사실 내용에 있어서는 가장 쉬운 것이고 간단한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법(佛法)에 이 참선(參禪)이 없으면 쌀에 알맹이를 빼내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광석 속에 금덩어리를 빼내 버린 광석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에 있어서 참선이라고 하는 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이 없다면 불교는 한낱 다른 종교와 별로 특수하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의 종교가 된 원인인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종교라 하기보다는 사람으로서 참사람이 되는 바른길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유교나 그밖에 종교에 있어서 '착한 일을 해라, 윤리 도덕을 지켜라, 바르게 살아라' 그러한 내용의 교리가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역시 다 그런 내용에 말씀도 참 많지만, 다맛 그런 것에 그쳐 버린다면 불교에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과 똑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데에 그 특수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인은 "그러면 석가여래 부처님은 사람이냐? 뭣이냐?"
"아, 그 사람이다"

"아하! 그러면 부처라 하는 것이 별로 별것이 아니로군요"
"왜 그리야?"

"깨달라 봤자 사람이라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느냐"고, 이렇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 성현 가운데에 성현이 되셨다. 진리와 하나가 되셨다' 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더 부처님을 존경하게 되는데.
우리도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부처님께서 전(傳)하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면, 목숨 바쳐서 도를 닦으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 불자(佛子)가 맨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말세(末世)에 태어난 죄 많은 중생이 머리도 나쁘고, 지식도 없고, 몸도 건강틀 못하고, 여자로 태어났고, 우리 같은 사람이 참선을 한들 무슨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겠는가? 그저 금생에는 참선이 좋다 그러고, 선방 토방에 신발만 벗어 놔도 그 공덕으로 지옥에는 안 떨어진다고 그러니 금생에는 인연이나 맺으리라' 이러한 지나치게 겸손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최상승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대뜸 처음부터 '나도 견성성불할 수 있다,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나도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 데부터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고 대든 것하고, 벌써 처음부터서 안 될 줄 알고 하는 것과는 그 결과적으로 결과에 나타난 것은 하늘과 땅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참선법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할 때에도 '된다'고 믿고, 된다고 믿어지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안 될 줄 알고, 실패할 줄 알고, 심심풀이로 시험 삼아서 해 갖고 그 일이 백(百)에 하나도 성공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범부(凡夫)를 고쳐서 성현(聖賢)을 맨드는 이 공부를 목숨을 바쳐서 해도 어려웁고 어려울 텐데. 처음부터 안 될 것을 알고, 안 될 폭을 대고, 미리서부터서 넘어질 자리부터 보고 씨름을 하려고 하는 사람과 같애서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나도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 그것이 서면 공부는 절반은 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꼭! 성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떠한 보물이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을려고 할 때에는 혹 찾어지기도 하고, 혹 안 찾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마치 내 호주머니 속에 있는 어떤 물건을 찾은 거와 같애서 그 호주머니 속에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믿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성취를 할 수가 있다고 단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 '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의 마음, 사람 사람이 다 '마음' 소리를 다 하고, '마음'이라는 것을 다 그 말을 알고 있지만, 사실 그 마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을 본격적으로 그 마음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은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단 일 초 동안도 우리로부터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이지만,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은 모냥이 없는 것이고, 형상이 없는 것이라 분명히 거기 있는데 찾으면 알 길이 없는 것이고, 보이지를 아니하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두 손을 이리저리 내저어서 더듬어 봤자 그 마음은 잡히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지만, 모든 것을 보는 그 자체를 볼려고 하면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눈을 통해서 볼 때 거기에 있었는데, 그 보는 그놈을 돌이켜서 다시 볼려고 하면 자취가 없습니다. 여기에 깨닫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웁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한 말을 과거에도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건 깨달음을 100프로 숨김없이 다 표현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지식, 도인(道人)들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선지식 말 한마디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린 분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냐? 여지없이 믿어 버렸기 때문에, 믿으면 말 한마디에 끝나는 까닭인 것입니다.

설사 한마디 말 한마디에 깨닫지를 못한다 하더라도 화두(話頭) 한마디를 받아 가지고, 여지없이 앞도 생각하지 않고, 뒤도 생각하지 않고, 옆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그 한마디 화두만을 의심(疑心), 의관(疑觀) 참구(參究)해 가면 조끔도 깨달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오직 이 한마디 의심뿐인 것입니다.

이 한마디의 의심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해 버리고, '부처님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깨닫게 해 준다' 해도 솔깃하지 아니하고, '염라대왕이 와서 끌어간다' 해도 조끔도 두려운 생각도 없고, 다못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한 앞에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염라대왕이 쇠사슬을 가지고 옥졸이 와서 묶어간다 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되어 버린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최상승법이 어려웁고도 쉬웁고, 쉬우면서 어려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판치생모' 화두뿐만이 아니라 '무자(無字)‘ 화두를 한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시삼마(是甚麼) '이뭣고?' 화두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차를 탈 때도, 속이 상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다못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16분5초~33분10초)




(2/3)----------------

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잠시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한 때가 없습니다. 눈으로 볼 때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일어나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일어나고, 혀로 음식을 맛볼 때 일어나고, 말할 때 일어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에 잠시도 생각이 안 일어날 때가 없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이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원인이 되는 것이여.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話頭)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고,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이여.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을 조끔도 성화 댈 필요가 없어. 무슨 망상이건 상관이 없어. 일어났다 하면 퍼뜩 '이뭣고?'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천 번 일어나면 천 번.

백정(白丁)이 소를 때려잡을려고 도끼를 쳐들다가도 '이뭣고?'해 가지고 확철대오한 광액도아(廣額屠兒)라고 하는 도사가 있습니다.
백정이 소를 때려잡기 위해서 도끼를 쳐들 그 찰나에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 그밖에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이 많으니까 공부를 못한다. 복잡해서 공부를 못한다. 장사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으로 핑계 대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은 기본자세가 있어서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떠억 정진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자세고, 그럴만한 시간이 있고, 그럴만한 장소가 있으면 기본자세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시간과 장소가 없다고 해서 시간이 흘러가지 아니한 것이 아니고, 생사가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고 기달려 주는 것이 아닐 바에는, 우리는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할 수는 없는 것이여.
일이 바빠서 참선을 안 하다가 지옥에 왔다고 해서 염라대왕이 조끔도 사정을 봐주지는 않습니다.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이 다 그것이 내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업(罪業)으로 인해서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는데, 그러한 상황을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하면 내생에는 더 고약한 환경에 태어날 것이요, 까딱하면 사람으로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축생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 뻔한데,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일수록에 더 발심(發心)을 해야 하고, 더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 놓여진 사람은 우선 아무 고통이 없으니까, '참선이 무슨, 불법이 뭐, 나한테는 상관이 없다. 그냥 이대로 나쁜 짓 안 하고 살아가면 되었지 무슨 불교가 필요하냐? 뭐 참선 이까짓 것 필요...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심심하면 텔레비젼도 보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서 테니스도 치고, 등산도 하고, 아 이렇게 살면 족하지. 뭐 그렇게 앉어서 무릎 아프고, 허리 아프게 앉어서 무슨 참선을 하고...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런 부질없는 지서리를 할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참선을 하라'고 하면 '쯧, 스님네들이나 하시지' 삐긋이 웃고 남의 일—자기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아주 자신이 만만한 그러한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그분도 역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사람이라 다행히 전생에 조끔 복 지은 것이 있어서 그놈 꽂감 빼 먹듯이 빼 먹느라고 별걱정이 없지만, 그 꽂감 몇 접 사다 논 것이 있기로서니 한 개 두 개 빼 먹다 보면 줄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놈이 바닥이 나면 몸이 아프게 되기도 하고, 엊그제까지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간경화증, 동맥경화증, 무슨 암, 무슨 당뇨병, 그러한 진단만 나왔다 하면, 어제의 그 쟁쟁 당당하던 그 용기가 간 곳이 없고, 그 많은 재산도 싫고, 명예 권리도 싫고, 아무 정황이 없다 그 말이여.
사업이 잘되어 갈 때는 큰소리치다가 사업이 벌써 기울어져 가지고 여기서 부도가 툭! 터지고, 저그 터지고 하면 아무 정황이 없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 죽게 되거나 하면 또 정신을 못 채려.

이 사바세계라 하는 것은 원래가 그렇게 믿지 못할 곳인 것입니다.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일 초 일 초가 지내서 한 시간이 지내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내서 하루가 지내고, 하루하루가 지내서 일 년이 지내고, 일 년 일 년이 지내다 보면 벌써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아프고.
그래도 잘 타고난 사람은 환갑도 넘기고 칠십도 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뱃속에서도 죽고, 낳다가도 죽고, 두 살 세 살에도 죽고, 10살 20살에도 죽고, 30~40에 막 재미있게 살 만하다가 턱 꺼꾸러지고. '인생이 무상(無常)하다' 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죽은 것은 보고 '무상하다'고 하면서, 자기 앞에 무상함이 돌아 닥쳐오고 있다고 하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 이것이 바로 '어리석다'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탓으로 해서 우리는 윤회(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이것을 '지혜(智慧)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여.

지혜, 부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지혜(智慧)의 눈을 뜬 범부(凡夫)이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과 부처님의 차이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의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신다면, 그동안에 참선을 하신 분은 정말 오늘부터서는 단 일 초 동안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정말 착실하게 정진을 하시게 될 것이고, 그동안에 참선을 본격적으로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고 '차츰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집이라도 하나 장만해 놓고 그때부터서 하리라. 나이 좀 먹거든 하리라' 이러한 뒤로 미루신 그런 분도 오늘부터서는 착실히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특별한 의식이 있고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의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여.
불경(佛經) 책을 많이 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여, 아직 불경을 한 권도 읽지 아니했어도 상관이 없어. '나모라 다나다라' 염불(念佛) 한마디도 외우지 못해도 그것도 상관이 없어.

다못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 되는 거여.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서 올바르게 이해를 했다면 바로 '이뭣고? 해야겄다. 이뭣고? 해라' 그 말 한마디로 요약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경을 수십 권을 다 읽었어도 '이뭣고?'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경 잘못 읽은 사람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법을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소승법이 있고, 대승법이 있고, 그 위에 최상승법이 있는데, 이 참선법이 바로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33분11초~45분4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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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최상승법은 날마다 해 가지고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법이여.
'저는 참선을 한 지가 3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정말... (녹음 끊김) 뭣헌 사람은 "공부를 하면 뭣이 흰옷 입은 것이 휙 지내가고 무슨.. 뭣이 부처님이 나와서 뭣을 주어서 받으려고 하니까 없어져 버리고 그랬다"고. 아주 자기가 공부를 잘한 것처럼 또 "부처님이 뭣을 줘서 그놈을 먹으니까 시원하니 아주 배창시까지 아주 얼음을 먹은 거 같이 그렇게 시원하고 좋더라"고, "이거 내가 도통한 거 아니냐"
그 말을 앉은 자리마다 이 새로 들어온 신도들한테 얘기를 해 가지고 자기는 아주 공부를 잘한 것처럼 으시대고 "이 소리는 누구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가지고는 그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뭣이, 뭐이 나와 가지고 무슨 뭘 줄까 하고, 밤낮 눈을 감고 몸부림을 쳐도 아무도 안 준다"고, "내가 공부를 잘못한 것이 아니냐"
"아니 그 소리를 어디서 들었냐?" 헌께 "자기가 그랬단 말 하지 말라고 하드라"고.

세상에 그분이 퍽 점잖은 분이고, 불교를 아주—소시(少時) 때부터 과부가 되어 가지고, 소시 때부터 삼사십 년간을 참선을 한 분인데, 세상에 그러한 요물 같은, 요사스런 삿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여.
그 틈틈이 경을 읽어 가지고 설법을, 뭐 부처님 경에 있는 얘기를 하는데 어떻게 잘하는지 몰라. 그러다 내가 들어가면 딱! 입이 붙어버려.

참선이라 하는 것은 뭘 아는 것이 아니고, 뭣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여. 무슨 부처님이 나타나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나고 그런 것이 아녀.
혹 참선을 하다 보면 혼침(昏沈)이 들어서 비몽사몽간에 뭣이 혹 보이기도 하고, 그리 아니한 것은 아니나, 그것이 까빡할 동안에 헛것이 보인 것이지, 어찌 그것이 견성(見性)이요 도통(道通)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런 것은 얘기할 거리도 못 되는 것이고, '하아, 내가 이거 도통하려고 이런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도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여.

참선은 '성성(惺惺)하다' 하는 것은 혼침(昏沈)에 떨어지지 아니한 것을 성성하다 그런 거여. 성성하면서도 적적해야 하는 거여. '적적(寂寂)하다'는 것은 산란심(散亂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여.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하면서도 성성한 가운데에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터억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의단(疑團)이, 의심(疑心)이 산을 봐도 '이뭣고?'
구름을 봐도 '이뭣고?'
흘러가는 강물을 봐도 '이뭣고?'

마치 칠십 먹은 노인이 과부가 외아들이 저 타관(他官)에 가서 온다고 하는 날짜가 되어도 오지 아니하고 한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두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일 년이 되어도 일자(一字) 서신(書信) 한마디 없이 소식 없을 때,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먼 산에 구름을 봐도 아들 생각, 날아가는 새를 봐도 아들 생각, 떡을 봐도 아들 생각, 밥을 봐도 아들 생각, 맛있는 음식을 봐도 아들 생각, 어떤 청년을 봐도 아들 생각, 자나깨나 아들 생각하듯이 '이뭣고?' 자나깨나 '이뭣고?'

처음에는 잊어버리는 시간이 많지만, 자꾸 챙기고 또 챙기고 하면 그것도 길이 들어서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이 걸어갈 때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밥을 먹을 때도, 차를 탈 때도, 누가 나에게 억울한 소리를 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이렇게 되어 진 때가 꼭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것을 조끔 공부에 공부 길에 들어섰다. 조끔 득력(得力)을 했다. 혹 이렇게는..

그런 것도 '아, 내가 인자 공부가 아주 잘된다' 그것도 뽐낼 것도 되지도 안 혀. 인자 그렇게 되어 가야 인자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되어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고 한결같이 공부를 더 잘 지어 갈뿐이지, 그것도 어디다 뭘 자랑할 것, 그것도 내놓을 것이 아니여.

삿된 소견, 삿된 경계 나타나는 걸 가지고 자랑을 하고, 그렇게 더군다나 또 그런 소리를 듣고 자기도 빨리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앉았다면 어찌 그것을 최상승 학자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하는 공부는 백이면 백하나까지 못쓰게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바른 스승 없이 하면 열심히 할수록 빨리 미치거나, 삿된 지경에 경계에 빠지거나 하는 것이여. 하다 말다 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열심히 할수록 빨리 못쓰게 되는 것이 이 공부여.
그래서 이 공부가 최상승이요, 반드시 해야 하고, 하면 꼭 되는 것이지만 첫째,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바른 스승이, 어떠한 사람이 과연 바른 스승이냐?

'바른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했고, 바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그것이 바른 스승이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려면 자기 자신이 정말 바른 신심(信心)을 가지면 묘(妙)하게 불보살(佛菩薩)의 지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화현(化現)은 이 사바세계에 육도법계(六途法界)에 가뜩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불보살의 화현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도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도 그렇거든 하물며 이 무루법(無漏法), 최상승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서—나, 참나를 찾아야 되는데, 참나는 번뇌 망상, 번뇌 망상을 버리고 찾지 말고, 중생의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癡心) · 오욕락(五欲樂) · 번뇌(煩惱) · 망상(妄想) 바로 거기에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거기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화두를 떠억 챙기면 그것이 공부를 바로 해 들어가는 것이여.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오직 의심(疑心)만을 관(觀)해 나가는 것이여. 망상이 일어나도 그 망상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바로 거기서 '이뭣고?'
이것이 바로 망상을 다스리는 공부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굴복 받는 길이요, 일체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길이여.


산광수색리(山光水色裡)여  면목자단적(面目自端的)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욕식개중의(欲識箇中意)인댄  팔냥시반근(八兩是半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광수색리(山光水色裡)에, 저 산에 푸르른 경치, 햇볕에 반짝거리는 물결, 그 모습이 면목자단적(面目自端的)이여. 면목이 그 면목(面目)의 단적(端的)을 갖다가 나타낸 것이다. 산은 푸르르고 흐르는 물이 반짝이는 그 모습이 바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의 한 모습이다.

욕식개중의(欲識箇中意)인댄, 이 낱 가운데에 참뜻을 알고자 할진대는,
팔냥(八兩)이 시반근(是半斤)이라. 여덟 냥(兩)이 이 반 근(斤)이다.
열엿 냥(兩)이 한 근(斤)인데, 여덟 냥이 반 근이다. 여덟 냥이 반 근?

여기에 이르러서 중생이 사량분별심으로 '아하!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털끝 하나에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겨울 결제까지 두 달 남짓, 춥도 더웁지도 않는 좋은 계절입니다.
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최상승법을 닦는, 참선을 하는 우리 도반(道伴)들은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는,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책(經冊)을 열심히 읽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45분46초~59분5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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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사(居士) ; ①고대 인도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던 부호. ②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자 신도. 출가하지 않고 법명(法名)을 받은 재가(在家)의 남자.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 • 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釋迦)에 대한 존칭.
여래(如來)는 부처님 10호(十號)의 하나로 범어 Tathagata(다타가타)의 역(譯)이다.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토방(土房) ; 방에 들어가는 문 앞에다 약간 높고 편평하게 다져 놓은 흙바닥. 여기에 쪽마루를 놓기도 한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폭을 대다 ; 놓이게 된 형편이나 처지를[폭을] 생각하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 

 


[참고 ❶]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1979.12.22) (7분1초)
우리는 진묵겁(盡墨劫) 전에 이미 깨달음,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부처님과 조끔도 차별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도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족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한 생각 딱 돌이키면—어디서 깨달음이 오는 것도 아니요, 누가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곳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원만구족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너무나도 간결하고 송곳으로 찌르듯 하는 그러헌 법문을 해 주신 것입니다.

다못 알 수 없는 꽉 맥힌 의심, ‘이 무엇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앉았거나 누웠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죄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괴롭거나 쓰리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프다고 가려 내놓고, 바쁘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잠잘 때라고 가려 내놓고, 속상헌다고 가려 내놓고, 기쁘다고 가려 내놓고, 이리저리 다 가려 내놓으면 언제 공부를 해야 할 때냐?
중생은 단 한 생각 동안이라도 생각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생각 없는 편안하고 고요하고 그러헌 때를 찾어서 공부를 할려고 하면 일생 동안 공부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는 보아야 하고, 귀를 통해서는 들어야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아야 하고, 숨쉬어야 하고, 입을 통해서 맛보고 말을 해야 하고, 손과 몸을 통해서는 따뜻하고 차웁고 딱딱하고 부드러운 거 그런 것을 다 감각을 해야 합니다. 잠시도 육근(六根)을 쉬고 일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나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활동하는 시간을 없이 하고 참선을 헐랴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토록 그 사람이 생각하는 참선은 헐 기약이 없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고 영특해서,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언제나 어디에나 두루하지 아니헌 곳이 없습니다.
그 표현이 바로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요.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진여불성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눈으로 볼 수 없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없고, 손을 통해서 잡을 수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는 깨달라야 합니다.

왜 눈으로 코로 귀로 육식(六識)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진여불성의 표현인데, 어째서 눈으로 볼랴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귀로 들을랴고 하면은 들리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을랴고 하면은 잡히지를 않는 것이냐?
우리는 목숨 바쳐서,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라도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고 법신불(法身佛) 아닌 것이 없건만, 왜 볼려고 허면 볼 수가 없고, 들을려고 허면 들을 수가 없느냐? 우리 모두에게 진묵겁 전부터서 원만구족해 있으면서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냐?

육도법계(六道法界)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시기 때문에 육도(六道)를 여의고 적광토(寂光土)는 따로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뭣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요긴한 길은 오직 이 한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할 때, 불이 펄펄 타오르는 지옥으로 느껴졌던 것이, 한 생각 돌이킨 곳에 바로 그것이 천당이 되고, 극락이 되는 그 묘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 활구참선법 ‘이 무엇고?’ 뿐인 것입니다.(12분14초~19분14초)

[참고 ❷] 영가(永嘉) 스님의 『증도가(證道歌)』 구절.
불리당처상담연(不離當處常湛然) 멱즉지군불가견(覓卽知君不可見)

당처(當處)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湛然]하나, 찾은 즉은 알거라 그대가 보지 못할 것이라.

[참고 ❸]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국사 지눌) 「진심소재(眞心所在)」
或曰息妄心而眞心現矣라 하니 然則眞心體用이 今在何處오
曰眞心妙體가 遍一切處니 永嘉云 不離當處常湛然이나 覓卽知君不可見이라 하며 經云 虛空性故며 常不動故며 如來藏中에 無起滅故라 하시며 大法眼云 處處菩提路요 頭頭功德林이라 하시니 此卽是體所在也니라

혹 말하길, “망심(妄心)을 쉬면 진심(眞心)이 나타난다니, 그렇다면 진심의 체(體)와 용(用)이 이제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하길, “진심묘체(眞心妙體)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다. 영가(永嘉) 스님이 이르시길, ‘당처(當處)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湛然]하나, 찾은 즉은 알거라 그대가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경에 이르시길, ‘허공의 성품인 연고며, 항상 동(動)하지 아니한 연고며, 여래장(如來藏) 중에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연고라’ 하며, 대법안[大法眼文益] 스님이 이르시길, ‘처처가 정각[菩提]의 길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공덕의 총림이라’ 하시니, 이것이 곧 이 마음의 체(體)가 있는 곳이니라.

眞心妙用은 隨感隨現홈이 如谷應聲이니라 法燈云 今古에 應無墜하야 分明在目前이로다 片雲은 生晩谷하고 孤鶴은 下遙天이라 하니 所以로 魏府元華嚴云 佛法이 在日用處하며 在行住坐臥處하며 喫茶喫飯處하며 語言相問處하며 所作所爲하나 擧心動念하면 又却不是也라 하시니

참마음[眞心]의 미묘한 작용은 감(感)을 따라 나타남이 산골짜기 소리를 응(應)하여 메아리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법등태흠(法燈泰欽) 스님이 이르시길, ‘고금에 마땅히 떨어짐이 없어 분명히 목전(目前)에 있다. 조각구름은 날 저문 골짜기에서 나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에서 내려옴이라’ 하니, 그런 까닭으로 위부(魏府)의 원화엄(元華嚴) 장로가 이르시길, ‘불법(佛法)이 날마다 작용하는 곳[日用處]에 있고, 행주좌와하는 곳[行住坐臥處]에 있으며, 차 마시고 밥 먹는 곳에 있고, 말하고 서로 묻는 곳에 있으며, 짓고 행위를 하나 마음을 들어 생각을 동(動)하면 또 옳지 못하니라‘

故知하라 體則遍一切處하야 悉能起用이나 但因緣有無不定일새 故로 妙用不定耳이어니와 非無妙用也이니라 修心之人이 欲入無爲海하야 度諸生死인댄 莫迷眞心體用所在也어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의 본체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여 다 능히 작용을 일으키나니, 다만 인연의 유무(有無)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용(妙用)도 또한 일정하지 않거니와 묘용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마음 닦는 사람은 무위(無爲)의 바다에 들어가 모든 생사를 건너려고 한다면 진심(眞心)의 체(體)와 용(用)이 있는 곳을 미혹하지 말지어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언하대오(言下大悟) ; 말 아래에 크게 깨닫는다. 말(법문) 듣다 깨닫는다. '직하흔번(直下掀飜 바로 뒤집다)'도 같은 뜻의 말이다.
*언하(言下) ; [주로 ‘언하에’의 꼴로 쓰여] 말이 떨어진 바로 그때. 또는 말을 하는 그 즉시.
[참고] 송담스님(No.157)—전강 조실스님 7주기 추모재(81.12.02.음)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상(平常)에 법문하시기를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말 아래 크게 깨달으라” 하셨습니다.
말은, 꼭 ‘선지식이다’라고 널리 알려진 그분의 말씀만이 말씀이 아니고 바람소리, 차 소리, 새 우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우리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가 불보살의 법문이요 선지식의 법문인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도 불보살의 모습이요, 법문이요, 진리의 표현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얼마만큼 간절히 그리고 철저하게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을 내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 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 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 말이여.


[참고 ❷]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 ; 대오선(待悟禪).
*대오선(待悟禪 기다릴 대/깨달을 오/고요할 선) ; 참선하는 데 있어서 깨닫기[悟]를 기다리는 것[待].
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데 10가지 병(病)의 하나로, 수행자는 이런 생각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참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 법문에서.(2분20초)
참선하는 데 있어서 제일 몹쓸 병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오선(待悟禪), 「어서 깨달랐으면...」
깨닫기를 바래는 그것이 설사 밤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해서 화두가 제법 일여(一如)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찰나간이라도 「어서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와서 탁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애써서 99%까지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저 천길만길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바래는 마음, 「어서 속히 어떠한 목적을 성취했으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 공부가 잘 되어갈수록 「이 무엇고?」
조끔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또 잘 안된다고 번뇌심이나 짜증도 내지를 말고, 오직 한 생각 한 생각, 산을 보든지, 물소리를 듣던지, 새소리를 듣던지, 기차 소리를 듣던지, 애 우는 소리를 듣던지, 문닫는 소리를 듣던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하는 것입니다.(8분32초~10분5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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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윤회(生死輪廻).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동[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罪] 행위[業 : 身口意 三業].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지서리 ; ‘짓거리('짓'을 낮잡아 이르는 말)’의 사투리.
* : 몸이나 몸의 일부를 놀려 움직이는 행동이나 행위를 이르는 말.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다맛 ; ‘다만(다른 조건이나 상황과는 관계없이 단지)’의 사투리.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나타낸 말.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❶]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❷]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❸]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말.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곧 부파 불교(部派佛敎)를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④열등한 능력이나 소질을 갖춘 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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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시 ; ‘창자’의 사투리.
*소시(少時 젊을 소/때 시) ; 젊었을 때.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관(他官 다르다·다른 곳 타/마을 관) ; 제가 나서 자란 곳이 아닌 다른 지역이나 고장.
*일자(一字) ; ①한 글자라는 뜻으로, 아주 적은 지식을 이르는 말. ②한마디의 글.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도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 
[참고 ❶] 송담스님(No.577)—19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열심히만 참선 정진해 가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니까,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루 속에 든 자라, 자기가 아무리 종일토록 버르적거려도 구덕 속에 들어있는 자라는 거기에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아무개야!” “예”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놈을 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거든.

[참고 ❷]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 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참고 ❸]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 지눌 스님)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 離此心外 無佛可成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 하여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幻化, 幻과 같은 變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부터 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법(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 있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님이다.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 (4분42초)
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루법(無漏法) ; 번뇌를 끝낸 것. 누(漏)는 누설(漏泄)의 준말로 번뇌를 뜻한다.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 상태. 사제(四諦) 가운데 깨달음의 결과인 멸제(滅諦)와 그 원인인 도제(道諦)에 해당하는 모든 현상.
범부의 지혜를 유루지(有漏智)라 하는 데 비하여 도를 이룬 성자의 지혜를 무루지라 한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 (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게송) ‘산광수색리(山光水色裡)~ ; 『경허집(鏡虛集)』 ‘우음(偶吟 우연히 읊다) 게송 참고.
*단적(端的 바를 단/과녁·확실할 적) ; ①(명사)곧바르고(기울거나 굽지 아니하고 곧고 바르다) 명백한 것. ②(관형사)곧바르고 명백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 모든 곳에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개중(箇中) ; ①이 낱 가운데 · 이 가운데 · 낱낱 · 하나 하나 · 각각 등의 뜻. 차중(此中) · 개리(箇裏) · 저리(這裏) 등과 같다. '불법(佛法) 중에서' 또는 '이 도리 속에서'라는 뜻이기도 하다.
②개중의(箇中意) · 개중사(箇中事) · 개중소식(箇中消息) 등으로 쓰인다.
③개중인(箇中人)이라고 하면 '저간의 사정 · 도리를 알고 있는 사람' 또는 '불법에 정통한 사람'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말한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 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벌어진다’
[참고] 『신심명(信心銘)』 (삼조三祖 승찬대사僧璨大師)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毫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네. 오직 간택함을 혐의(嫌疑)하니.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없으면 툭 트이어 명백하리라.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벌어지니 도(道)가 현전하기를 바라거든 따름[順]과 거슬림[逆]을 두지 말라.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참선을 하는 우리 도반들은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는,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책(經冊)을 열심히 읽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 
[참고] 『운수단가사(雲水壇謌詞)』 (서산대사) 부록(附錄) '거량(擧揚)'에 있는 게송.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내게 한 권의 경(經)이 있으니 종이나 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펴보면 한 글자도 없건만 항상 큰 광명을 놓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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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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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ㅈ/정진2024. 1. 11. 14:35

정진(No.151)—『논어(論語)』 첫머리에 대한 법문 | 법희선열(法喜禪悅) | 도반(道伴)을 만나는 기쁨 | 정법을 믿는 사람이 모여서 최상승법을 닦는 그 자리는 바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항시 계신 곳이기 때문에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7분 43초)


[법문]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금년도 벌써 여름이 지나고 제방(諸方) 선방(禪房)에서 모다 참선(參禪)을 하시고 해제를 한 뒤에 여러 납자(衲子) 스님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공자님께서 그 『논어(論語)』 첫머리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안 해도 그것을 성내지 아니하면 이것이 군자가 아니냐' 이런 말씀이 있는데.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 한 말은 '글을 배워 가지고 때때로 익힌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 닦는 공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가(佛家)에 말하면 화두(話頭)를 타고 참선하는 방법을 배워 가지고 그것을 밤낮으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심(一心)으로 그 공부를 해 나가면 이것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정진을 알뜰히 해 가면 처음에는 아무 맛도 없고 재미도 없고, 공부가 되어 가는지 안되어 가는지 도대체 멍멍하니 그러지만, 자꾸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고 해서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질 때가 오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법(法)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가운데 화두가 일여(一如)하게 들리게 되면 그 싱그럽고 편안하고 가볍고 혼침(昏沈)도 안 오고 망상(妄想)도 없이, 그 즐겁다고 할 것인가?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한목 자동적으로 일어나는데 그 법(法)에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하는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서 '배워서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이렇게 공자님은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두 번째 가서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나를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느냐'
그 말은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친구라든지 또는 그동안에 막걸리 친구로 사귄 그런 친구가 찾아온 거, 무슨 동창생이 찾아오고 그러한 의미에 벗을 가리키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닦는 도반(道伴)이 저 먼 데에서 그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정진을 하고 해제를, 우리 불가에서 같으면 해제를 하고 그 먼 데에서 그 도반을 찾어간다던지, 선배를 찾어간다던지, 그러한 의미에서 자기와 같이 한 목적을 향해서 도를 닦은 도반이 찾아오는 거.
선배가 되었던지, 후배가 되었던지, 또는 연갑(年甲)시 되었던지,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모든 선지식(善知識)도 도반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 말하자면 부처님도 우리에 선우(善友)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도(道)를 닦는 도반(道伴)이 먼 데로부터서 찾아오게 되면 또한 그것이 즐겁지 않느냐. 속가에 부모형제가 찾아온다던지, 무슨 자기와 그런 평소에 아는 사람이 찾아온 거, 그러한 것에다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선방에서건, 어느 토굴에서건 그 실다웁게 도를 닦고 그리고 해제(解制)하고서 찾어온다던지, 내가 찾아간다던지, 그러다가 만나게 될 때에 그 반갑고 기쁜 뜻을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이 신유년 하안거를 마치고, 제방에서 여러 도반들이 이렇게 많이 오셨는데 참 아무리 이 시국이 험난하고 세상이 말세가 되어서 도처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고, 모든 면에서 참 불안하고 그러한 때지만, 이 정법을 믿고 실천하는 우리 도반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이 자리는 정말 이 사바세계에 이루어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 표현을 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이 모여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는 그 자리는 바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항시 계신 곳이기 때문에 바로 영산회상이라고 말해도 조끔도 어폐(語弊)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해가 저문 빈 절에 무릎을 안고 졸다가, 소슬히 부는 바람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서리 맞은 단풍잎이 뜰에 가득히 딩굴고 있다」 한 경허 스님의 그 게송을 음미해 보면,
앞으로 가을철이 다가왔습니다. 이 가을철에 지나간 여름 동안 못다 한 공부를 알뜰히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8분1초~15분4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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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방(諸方) ; ①모든 지방. ②모든 종파의 스님.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심(一心) ; ①대립이나 차별을 떠난 평등한 마음. ②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마음. 통일된 마음. ③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마음. ④아뢰야식(阿賴耶識).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목 ; 한 번에 모두. 한꺼번에 몰아서 함.
*법희선열(法喜禪悅) ;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듣고 따르는 기쁨[喜]과 선정(禪定)에 드는 기쁨[悅].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연갑(年甲) ; 서로 비슷한 나이. 또는 그런 사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부처님도 우리에 선우(善友)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참고]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65. 4권.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波斯匿王於閑靜處 作是思惟 佛所敎法 極有義利 能得現報 無有熱惱 不待時節 能將於人到于善處 語諸人言 汝等來 善示汝妙法 夫爲智者 自身取證 深得解達 須善友 須善同伴 恒應親友如是善友 不向惡友幷惡知識 遠離惡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였다. 바사닉왕이 조용한 곳[靜處]에서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법은 지극한 뜻[義]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을 수 있고, 심한 번뇌를 없애고, 때에 구애받지 않게 하고, 사람들을 이끌어서 좋은 곳에 이르게 하시며, 여러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오너라. 너희들에게 미묘한 법을 보여 주겠다고 하시니, 슬기로운 이는 몸소 증득해서 깊이 이해하고 통달한다. 그리고 착한 벗[善友]과 착한 동반자[善同伴]를 구해서 그와 같은 착한 벗[善友]을 항상 친근케 하며, 악한 벗[惡友]과 악한 지식[惡知識]에게 향하지 않게 하고 나쁜 도반[惡伴]을 멀리하게 하시는구나'

思惟是已 從坐處起 往詣佛所 在一面坐 白佛言 世尊 我於閑處 作是思惟 佛所敎法 有大義利 能招現報 無諸熱惱 不待時節 乃至不與惡友交遊 佛告王曰 實爾 實爾 佛所敎法 有大義利 能招現報 乃至不與惡伴交遊

이렇게 생각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조용한 곳[閑處]에서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법은 큰 뜻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을 수 있으며, 심한 번뇌를 없애고, 때에 구애받지 않게 하고, 나아가 나쁜 벗[惡友]과 사귀지 못하게 하신다'"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실로 그렇고 그렇소이다. 부처가 가르치는 법은 큰 뜻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게 하며, 나아가 나쁜 벗[惡伴]과 사귀지 못하게 하오"

我於往時 在王舍城耆梨跋提林 爾時 阿難比丘獨在靜處 作是思惟 善知識者 梵行半體 阿難起已 來至我所 頂禮我已 而作是言 善知識者 梵行半體 非惡知識 惡伴 惡友

내가 옛날 왕사성 기리발제(耆梨跋提) 숲 속에 있었을 때, 아난(阿難) 비구가 혼자 고요한 곳[靜處]에 있으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였소. '선지식(善知識)이란 존재는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절반의 힘은 되겠다(善知識者 梵行半體)'
그러고 나서 아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처소로 와서 나에게 예배하고 이러한 말을 하였소. '선지식(善知識)이란 존재는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절반의 힘은 되오니 그는 나쁜 지식[惡知識], 나쁜 도반[惡伴], 나쁜 벗[惡友]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我告阿難 止 止 莫作是語 所以者何 夫善知識 善友 善伴 乃是梵行全體 又善友伴者 不與惡知識 惡友 惡伴而爲徒黨 何以故 我以善知識故 脫於生死 是故當知 善知識者 梵行全體 如是之事 應分別知 佛所說法 有大義利 能招現報 乃至不與惡友惡伴惡知識等而爲伴黨

나는 아난에게 이렇게 말했소.
"그만 그만,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 왜냐 하면 선지식(善知識)과 착한 벗[善友], 착한 도반[善伴]은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전체적인 힘이 되기 때문이다. 또 착한 벗과 착한 도반은 나쁜 지식[惡知識]과 나쁜 벗[惡友] 나쁜 도반[惡伴]과 무리를 짓지 않으니 왜냐 하면 나 역시 선지식(善知識) 때문에 생사를 해탈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란 존재는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전체적인 힘이 된다는 걸 반드시 알아야 하며 그러한 일을 잘 분별해서 알아야 한다. 부처가 말한 법은 큰 뜻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나쁜 벗[惡友]과 나쁜 도반[惡伴] 나쁜 지식[惡知識]들과 무리를 짓지 않게 하오"

爾時 世尊卽說偈言 於諸善法中 不放逸最勝 若當放逸者 賢聖所譏嫌 若不放逸者 獲於天帝位 於諸天中勝 於作無作中 不放逸最勝 若不放逸者 坐禪盡諸漏 逮得於勝果 佛說是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그러고 나서 세존께서는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착한 법[善法] 중에서 '방일하지 않는 것[不放逸]이 으뜸이니 만약 방일한 짓을 하면 성현들이 싫어하시네. 만일 방일한 짓 아니하면 천제(天帝)의 지위를 얻으며 모든 천(天) 중에서도 뛰어나리라. 짓고 짓지 않는 일 중에서 방일하지 않음[不放逸]이 가장 훌륭하나니, 만약 방일하지 않는 자라면 좌선할 때 모든 번뇌 없애서 수승한 과위를 얻게 되리라”
부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속가(俗家) ; ①스님이 되기 전에 속했던 가정(집). ②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집.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영산회상(靈山會上) ; ①석가모니께서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때의 모임. 또는 그곳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때의 모임. ②선종의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하나로 부처님과 가섭이 이심전심으로 주고받은 염화미소(拈花微笑)의 회좌(會座).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삼보(三寶) ;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집단[僧寶]의 3가지를 보배에 비유한 말. 이것은 불교를 구성하는 3가지의 중요한 요소임.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임.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해가 저문 빈 절에, 무릎을 안고 졸다가, 소슬히 부는 바람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서리 맞은 단풍잎이 뜰에 가득히 딩굴고 있다」 ; 『경허집(鏡虛集)』 ‘우음(偶吟 우연히 읊다)‘ 게송, ‘斜陽空寺裏 抱膝打閑眠 蕭蕭驚覺了 霜葉滿階前’
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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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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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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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ㄱ/경허선사2024. 1. 10. 11:25

경허선사(No.151)—(게송)斜陽空寺裏 抱膝打閑眠 蕭蕭驚覺了 霜葉滿階前 | 한국 참선의 중흥조 경허선사 | 경허 스님—만공 스님—전강 스님.


*경허선사(鏡虛禪師) ; (1849-1912) 성(姓)은 송(宋)씨이고 법명은 성우(惺牛), 이름은 동욱(東旭)이요 호(號)는 경허(鏡虛)이며 여산(礪山) 사람이다.
헌종 15년 기유(己酉)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송두옥(宋斗玉)이요 어머니는 밀양(密陽) 박(朴)씨였다. 태어난 뒤 사흘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을 시키자 아기 소리를 내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경기도 광주군 청계사(淸溪寺)에 가서 계허(桂虛)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뜻은 컸으며 비록 고달픈 환경이라도 피곤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이 나무하고 물긷고 밥을 지으며 은사스님을 모셨다.

14세가 되도록 글을 배울 겨를이 없었는데 어느 날 한 선비가 절에 와서 여름을 지낼 때에 그 선비가 소일꺼리로 곁에 불러 앉히고 천자문·통사(通史) 등의 글을 가르쳐 보니 눈에 스치면 배우고 듣는대로 외우고 문리를 해석할만큼 크게 진보가 있으니 선비가 크게 감탄하였다.
얼마되지 않아서 은사인 계허스님이 환속(還俗)을 하며 스님의 공부를 크게 성취시키지 못함을 애석히 여겨 편지를 써서 계룡산 동학사 만화화상(萬化和尙)에게 추천하였다. 화상은 그 당대에 큰 강사였다.

만화강백(萬化講伯) 처소에서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수료하였다. 공부를 하는데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 해도 남보다 열배 백배 앞섰으며 영호(嶺湖)의 강원에 두루 참석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되고 널리 내외전(內外典)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이름이 팔도에 떨치었다.
23세 때에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하니 교의(敎意)를 논(論)하매 큰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사방에서 학인들이 몰려왔다.

31세 때 하루는 전날 은사 계허스님이 보살펴 아껴주던 정이 생각나서 한번 찾아뵙고자 대중에게 고하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도중에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급히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려 하자 주인이 내쫓았다.
그 동네 수십 집을 찾아갔지만 집집마다 다 쫓기를 매우 급히 하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지금 이곳에는 전염병(콜레라)이 크게 돌아 걸리기만 하면 서있던 사람도 죽는 판인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사지(死地)에 들어왔는가!”하였다.
스님이 그 말을 듣자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하고 마음이 떨리며 마치 죽음의 벼랑에 다다른 것 같으며, 목숨이 참으로 호흡하는 사이에 있어서 일체 세상 일이 도무지 꿈 밖의 청산 같았다.

이에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되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文字)에 구속되지 않고 조사(祖師)의 가르침을 찾아 삼계(三界)를 벗어나리라”하고 발원을 마치고 평소의 읽은 바 공안(公案)을 생각해보니, 이리저리 의해(義解)로 배우던 습성이 있어서 지해(知解)로 따져지므로 의심으로 참구(參究)할 분(分)이 없으나,
오직 영운선사(靈雲禪師)의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라는 화두(話頭)는 해석도 되지 않고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듯하여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참구하였다.

산에 돌아온 뒤에 대중들을 흩어 보내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연따라 잘들 가게나. 내가 뜻을 두어 원하는 것은 이에 있지 않다네”하고 문을 폐쇄하고 단정히 앉아 전심(專心)으로 참구(參究)하는데, 밤으로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혹은 칼을 갈아 턱에 괴며 이와같이 3개월을 화두를 들고 정진하였다.

한 사미(沙彌)스님이 옆에서 시중을 드는데 속성(俗姓)은 이(李)씨라, 그의 아버지가 좌선을 여러 해 동안 하여 스스로 깨달은 곳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 이처사(李處士)라고 부르는데, 사미의 스승이 마침 그 집에 가서 처사와 이야기를 하는데,
처사가 말하기를 “중이 필경에는 소가 된다”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중이 되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다만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서 그 시주의 은혜를 갚게 된다”고 했다.

처사가 꾸짖어 이르기를 “소위 사문(沙門, 스님)의 대답이 이렇게 도리에 맞지 않습니까”하니까,
그 스님이 이르기를 “나는 선지(禪旨)를 잘 알지 못하여서 그러하오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하니 처사가 이르기를 “어찌 소가 되기는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이르지 않는고?”

그 스님이 묵묵히 돌아가서 사미에게 이르기를 “너의 아버지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하니,
사미가 말하길 “지금 주실(籌室) 화상이 참선(參禪)을 매우 간절히 하여 잠자는 것도 밥먹는 것도 잊을 지경으로 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 이치를 알 것이니 사부(師傅)께서는 가서 물으소서”

그 스님이 흔연(欣然)히 가서 절하고 앉아서 이처사(李處士)의 말을 전하는데 ‘소가 콧구멍이 없다(牛無鼻孔處)’는 말에 이르러 화상의 안목(眼目)이 정(定)히 움직여 ‘옛부처 나기전 소식(古佛未生前消息)’이 활연히 앞에 나타나고, 대지가 꺼지고 물질과 나를 함께 잊으니 곧 고인(古人)의 ‘크게 쉬고 쉬는 경지(大休歇之地)’에 도달한지라, 백천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기와가 깨어지듯 하니, 때는 고종 16년 기묘(己卯 1879) 동짓달 보름께였다.

그날 이후 스님은 방에 누워 사람들의 출입을 상관하지 않았다. 만화강사가 들어와서 보아도 또한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강사가 이르기를 “무엇때문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고?”하니, “일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無事之人 本來如是)”고 하였다.
스님은 그 이듬해인 경진년 봄에 어머니와 형 태허스님이 계신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오후보림(悟後保任)하였다.

게송으로 그 깨달아 증득한 곳을 이르기를,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巖山下路)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

홀연히 콧구멍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삼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 길에,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천장암에 머물면서 하루는 대중에게 설법할 적에 특히 전등(傳燈)의 연원(淵源)을 밝히는데 스님의 법은 용암화상(龍巖和尙)에게 이었으니 청허(淸虛)의 12세손이 되며 환성(喚惺)의 7세손이 된다 하였다.
그 뒤로 호서(湖西)에 20여 년 간 오래 주석하니 천장암과 서산의 개심사와 부석사, 마곡사·칠갑산 장곡사·아산 봉곡사·금산 태고사·계룡산 갑사·동학사·신원사·속리산 법주사 등지로 왕래하며 때로는 마음을 고요히 묵상하며 때로는 사람을 위하여 설교하면서 호서에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었다.

51세 때 기해년(1899) 가을에 합천 해인사 조실로 초대받고 가니 때마침 칙명으로 대장경을 인출하는 불사와 수선사(修禪社)를 설치하는 사업이 있었는데 대중이 스님을 추대하여 법주로 모셨다.
영축산 통도사·표충사·대승사·동화사·파계사와 금정산 범어사와 호남의 화엄사·실상사·쌍계사·송광사·태안사는 모두 화상께서 유력(遊歷)하던 곳이다. 이로부터 사방에서 선원(禪院)을 다투어 차리고 발심한 납자 또한 구름 일 듯하니, 이 기간처럼 부처님 광명이 다시 빛나 사람의 안목을 열게 함이 이와같이 성(盛)함이 없었다.

임인년(1902) 범어사에서 「선문촬요(禪門撮要)」 편찬 불사. 가을 동래 범어사의 금강암과 마하사 나한 개분불사(改粉佛事) 때 증명법사를 하였다.
56세 때 갑진년(1904) 2월 11일에 천장암에서 만공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내리고 불조의 혜명을 이어가도록 부촉하였다. 봄에 오대산과 금강산을 거쳐서 안변 석왕사에 이르러 오백나한 개분불사의 증명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로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선비 박난주(朴蘭洲), 또는 유발거사(有髮居士) 박진사(朴進士)라 하고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차림을 하고 갑산·강계 등지로 내왕하며 시골 서당에서 훈장도 하며 만행두타(萬行頭陀)로써 진흙에도 들고 물에도 들어가서 인연따라 교화하였다.

64세 때 임자년(1912) 4월 25일 갑산(甲山) 웅이방(態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入寂)하니 법랍 56세였다. 입적 소식을 듣고 만공(滿空)·혜월(慧月)선사가 곧 그곳에 가서 난덕산(難德山)으로 운구하여 다비(茶毘)를 하고 임종게(臨終偈)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심월고원(心月孤圓)  광탄만상(光呑萬像)  광경구망(光境俱忘)  부시하물(復是何物)
마음달이 외로이 둥글게 빛나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만공선사 주재, 한용운 스님의 편찬으로 스님의 법어를 모은 「경허집(鏡虛集)」이 있다.
[참고] 『경허집(鏡虛集)』 (석명정 역 | 극락선원), 『경허법어(鏡虛法語)』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 | 김진성 역 | 인물연구소)

경허 스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 가운데 한 분이 만공(滿空) 큰스님이시고 또 그 만공 큰스님 밑에 박고봉 스님, 박금봉 스님, 정전강 스님 또 그밖에 여러 도인들이 계시지만 그 만공 스님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 가운데 한 분이신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이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셔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을 선양을 하시다가 지끔부터 8년 전에 열반하셨습니다.

 

(7분 57초)


[법문]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사양공사리(斜陽空寺裏)에  포슬타한면(抱膝打閑眠)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소소경각료(蕭蕭驚覺了)허니  상엽만계전(霜葉滿階前)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사양공사리(斜陽空寺裏)에,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진 빈 절 속에,
포슬타한면(抱膝打閑眠)이라, 무릎을 안고 꾸뻑꾸뻑 졸고 있었다 그 말이여.

소소경각료(蕭蕭驚覺了)하니  상엽(霜葉)이 만계전(滿階前)이라.
소슬한 바람에 가을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진 그 소리에 놀래서 깨 보니, 서리 친, 서리 맞은 낙엽이 뜨락에 가득하니 뒹굴고 있구나. 이것은 경허(鏡虛) 스님의 게송입니다.

경허 스님께서는 지끔으로부터 백 년 전에 이 한국에 침체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중흥시키신 큰스님이십니다. 이 경허 스님 밑에 만공 스님. 혜월 스님. 혜봉 스님. 오대산 방한암 스님 또 수월 스님. 이러한 대도인(大道人)들이 그 경허 큰스님 밑에 배출이 되셔서 그래 가지고 이 한국 방방곡곡에 선풍(禪風)을 진작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 경허 스님이 백 년 전에 이 한국에 출세하시지 안 했다면 우리가 참선(參禪)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지끔 참선 법문(法門)도 들을 수도 없고,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어도 어디 가서 물어볼 데도 없고, 그럴 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허 스님은 대강사요, 대선사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신 생불(生佛)과 같은 그러한 대도인이신 것입니다.

그 경허 스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善知識) 가운데 한 분이 만공(滿空) 큰스님이시고 또 그 만공 큰스님 밑에 박고봉 스님, 박금봉 스님, 정전강 스님 또 그밖에 여러 도인들이 계시지만 그 만공 스님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 가운데 한 분이신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이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셔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을 선양을 하시다가 지끔부터 8년 전에 열반하셨습니다.
그 전강 큰스님께서 이 주안 갯벌 가에 이 법보선원을 창설을 하시지 안 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모여서 이 최상승법을 선양(宣揚)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부처님 열반하신 뒤, 56억 7천만 년 뒤에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의 다음 부처님으로 미륵존불(彌勒尊佛)께서 염부제(閻浮提)에 하강(下降)을 하시게 되겠지만, 그 사이에 종종 불보살(佛菩薩)의 화신(化身)이 이 땅에 몸을 나투셔 가지고 정법(正法)을 선양(宣揚)을 하셔서 목마르는 중생들에게 정법에 감로(甘露)의 비를 내리셔 가지고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어린 양들을 자기의 갈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전생에 깊은 숙연(宿緣)이 있어서 이 도량에 우리가 모여서 같이 이 최상승법(最上乘)을 공부를 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너무 행복하고 다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처음~7분5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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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사양공사리(斜陽空寺裏)~’ ; 『경허집(鏡虛集)』 ‘우음(偶吟 우연히 읊다)‘ 게송 참고.
*소슬하다(蕭瑟-- 쓸쓸할 소/엄숙하다·쓸쓸하다 소) ; ①(기온이나 바람이) 서늘하고 으스스하다. ②(마음이나 분위기가) 고요하고 쓸쓸하다.
*경허선사(鏡虛禪師) ; (1849-1912) 성(姓)은 송(宋)씨이고 법명은 성우(惺牛), 이름은 동욱(東旭)이요 호(號)는 경허(鏡虛)이며 여산(礪山) 사람이다.
헌종 15년 기유(己酉)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송두옥(宋斗玉)이요 어머니는 밀양(密陽) 박(朴)씨였다. 태어난 뒤 사흘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을 시키자 아기 소리를 내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경기도 광주군 청계사(淸溪寺)에 가서 계허(桂虛)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뜻은 컸으며 비록 고달픈 환경이라도 피곤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이 나무하고 물긷고 밥을 지으며 은사스님을 모셨다.

14세가 되도록 글을 배울 겨를이 없었는데 어느 날 한 선비가 절에 와서 여름을 지낼 때에 그 선비가 소일꺼리로 곁에 불러 앉히고 천자문·통사(通史) 등의 글을 가르쳐 보니 눈에 스치면 배우고 듣는대로 외우고 문리를 해석할만큼 크게 진보가 있으니 선비가 크게 감탄하였다.
얼마되지 않아서 은사인 계허스님이 환속(還俗)을 하며 스님의 공부를 크게 성취시키지 못함을 애석히 여겨 편지를 써서 계룡산 동학사 만화화상(萬化和尙)에게 추천하였다. 화상은 그 당대에 큰 강사였다.

만화강백(萬化講伯) 처소에서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수료하였다. 공부를 하는데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 해도 남보다 열배 백배 앞섰으며 영호(嶺湖)의 강원에 두루 참석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되고 널리 내외전(內外典)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이름이 팔도에 떨치었다.
23세 때에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하니 교의(敎意)를 논(論)하매 큰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사방에서 학인들이 몰려왔다.

31세 때 하루는 전날 은사 계허스님이 보살펴 아껴주던 정이 생각나서 한번 찾아뵙고자 대중에게 고하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도중에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급히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려 하자 주인이 내쫓았다.
그 동네 수십 집을 찾아갔지만 집집마다 다 쫓기를 매우 급히 하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지금 이곳에는 전염병(콜레라)이 크게 돌아 걸리기만 하면 서있던 사람도 죽는 판인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사지(死地)에 들어왔는가!”하였다.
스님이 그 말을 듣자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하고 마음이 떨리며 마치 죽음의 벼랑에 다다른 것 같으며, 목숨이 참으로 호흡하는 사이에 있어서 일체 세상 일이 도무지 꿈 밖의 청산 같았다.

이에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되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文字)에 구속되지 않고 조사(祖師)의 가르침을 찾아 삼계(三界)를 벗어나리라”하고 발원을 마치고 평소의 읽은 바 공안(公案)을 생각해보니, 이리저리 의해(義解)로 배우던 습성이 있어서 지해(知解)로 따져지므로 의심으로 참구(參究)할 분(分)이 없으나,
오직 영운선사(靈雲禪師)의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라는 화두(話頭)는 해석도 되지 않고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듯하여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참구하였다.

산에 돌아온 뒤에 대중들을 흩어 보내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연따라 잘들 가게나. 내가 뜻을 두어 원하는 것은 이에 있지 않다네”하고 문을 폐쇄하고 단정히 앉아 전심(專心)으로 참구(參究)하는데, 밤으로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혹은 칼을 갈아 턱에 괴며 이와같이 3개월을 화두를 들고 정진하였다.

한 사미(沙彌)스님이 옆에서 시중을 드는데 속성(俗姓)은 이(李)씨라, 그의 아버지가 좌선을 여러 해 동안 하여 스스로 깨달은 곳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 이처사(李處士)라고 부르는데, 사미의 스승이 마침 그 집에 가서 처사와 이야기를 하는데,
처사가 말하기를 “중이 필경에는 소가 된다”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중이 되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다만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서 그 시주의 은혜를 갚게 된다”고 했다.

처사가 꾸짖어 이르기를 “소위 사문(沙門, 스님)의 대답이 이렇게 도리에 맞지 않습니까”하니까,
그 스님이 이르기를 “나는 선지(禪旨)를 잘 알지 못하여서 그러하오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하니 처사가 이르기를 “어찌 소가 되기는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이르지 않는고?”

그 스님이 묵묵히 돌아가서 사미에게 이르기를 “너의 아버지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하니,
사미가 말하길 “지금 주실(籌室) 화상이 참선(參禪)을 매우 간절히 하여 잠자는 것도 밥먹는 것도 잊을 지경으로 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 이치를 알 것이니 사부(師傅)께서는 가서 물으소서”

그 스님이 흔연(欣然)히 가서 절하고 앉아서 이처사(李處士)의 말을 전하는데 ‘소가 콧구멍이 없다(牛無鼻孔處)’는 말에 이르러 화상의 안목(眼目)이 정(定)히 움직여 ‘옛부처 나기전 소식(古佛未生前消息)’이 활연히 앞에 나타나고, 대지가 꺼지고 물질과 나를 함께 잊으니 곧 고인(古人)의 ‘크게 쉬고 쉬는 경지(大休歇之地)’에 도달한지라, 백천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기와가 깨어지듯 하니, 때는 고종 16년 기묘(己卯 1879) 동짓달 보름께였다.

그날 이후 스님은 방에 누워 사람들의 출입을 상관하지 않았다. 만화강사가 들어와서 보아도 또한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강사가 이르기를 “무엇때문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고?”하니, “일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無事之人 本來如是)”고 하였다.
스님은 그 이듬해인 경진년 봄에 어머니와 형 태허스님이 계신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오후보림(悟後保任)하였다.

게송으로 그 깨달아 증득한 곳을 이르기를,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巖山下路)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

홀연히 콧구멍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삼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 길에,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천장암에 머물면서 하루는 대중에게 설법할 적에 특히 전등(傳燈)의 연원(淵源)을 밝히는데 스님의 법은 용암화상(龍巖和尙)에게 이었으니 청허(淸虛)의 12세손이 되며 환성(喚惺)의 7세손이 된다 하였다.
그 뒤로 호서(湖西)에 20여 년 간 오래 주석하니 천장암과 서산의 개심사와 부석사, 마곡사·칠갑산 장곡사·아산 봉곡사·금산 태고사·계룡산 갑사·동학사·신원사·속리산 법주사 등지로 왕래하며 때로는 마음을 고요히 묵상하며 때로는 사람을 위하여 설교하면서 호서에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었다.

51세 때 기해년(1899) 가을에 합천 해인사 조실로 초대받고 가니 때마침 칙명으로 대장경을 인출하는 불사와 수선사(修禪社)를 설치하는 사업이 있었는데 대중이 스님을 추대하여 법주로 모셨다.
영축산 통도사·표충사·대승사·동화사·파계사와 금정산 범어사와 호남의 화엄사·실상사·쌍계사·송광사·태안사는 모두 화상께서 유력(遊歷)하던 곳이다. 이로부터 사방에서 선원(禪院)을 다투어 차리고 발심한 납자 또한 구름 일 듯하니, 이 기간처럼 부처님 광명이 다시 빛나 사람의 안목을 열게 함이 이와같이 성(盛)함이 없었다.

임인년(1902) 범어사에서 「선문촬요(禪門撮要)」 편찬 불사. 가을 동래 범어사의 금강암과 마하사 나한 개분불사(改粉佛事) 때 증명법사를 하였다.
56세 때 갑진년(1904) 2월 11일에 천장암에서 만공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내리고 불조의 혜명을 이어가도록 부촉하였다. 봄에 오대산과 금강산을 거쳐서 안변 석왕사에 이르러 오백나한 개분불사의 증명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로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선비 박난주(朴蘭洲), 또는 유발거사(有髮居士) 박진사(朴進士)라 하고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차림을 하고 갑산·강계 등지로 내왕하며 시골 서당에서 훈장도 하며 만행두타(萬行頭陀)로써 진흙에도 들고 물에도 들어가서 인연따라 교화하였다.

64세 때 임자년(1912) 4월 25일 갑산(甲山) 웅이방(態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入寂)하니 법랍 56세였다. 입적 소식을 듣고 만공(滿空)·혜월(慧月)선사가 곧 그곳에 가서 난덕산(難德山)으로 운구하여 다비(茶毘)를 하고 임종게(臨終偈)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심월고원(心月孤圓)  광탄만상(光呑萬像)  광경구망(光境俱忘)  부시하물(復是何物)
마음달이 외로이 둥글게 빛나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만공선사 주재, 한용운 스님의 편찬으로 스님의 법어를 모은 「경허집(鏡虛集)」이 있다.
[참고] 『경허집(鏡虛集)』 (석명정 역 | 극락선원), 『경허법어(鏡虛法語)』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 | 김진성 역 | 인물연구소)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만공월면(滿空月面) ; (1871~1946) 법명은 월면(月面), 호는 만공(滿空), 속명은 송도암(宋道岩).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1871년(신미년) 3월 7일 출생하였다. 1884년(갑신년) 14세에 태허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로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계속 천장암에서 지내다, 어른 시봉(侍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5년(을미년)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하룻밤을 지나 새벽 종송(鐘頌)을 할때,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그 후 마곡사 근처 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스님 나이 26세 때, 1896년(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 선사가 오시니, 선사께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였다.
경허 선사가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 하나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스님의 대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선사가 ‘네가 일찌기 다비문(茶毘文)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경허 선사가 다시 묻기를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선사가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 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하고,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으라.’하고 떠났다.

그 후 정진하던 중 경허 선사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1898년 7월에 선사가 계신 서산(瑞山)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지내다가, 경남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 선사께 청첩장이 와서 선사를 모시고 계명선원에 가서 하안거를 마치고, 선사와 배별(拜別)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31세 때(1901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며 지내다가, 34세 때(1904년 7월 15일)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른 경허 선사를 뵙고, 그동안 공부를 지은 것을 아뢰니, 선사가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운월계산처처동(雲月溪山處處同)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대가풍(叟山禪子大家風)  수산선자(叟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은근분부무문인(慇懃分付無文印)  은근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일단기권활안중(一段機權活眼中)  한조각 권세 기틀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1905년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한 초암을 짓고 지내고, 그 뒤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마하연(摩訶衍)에 가서 3년을 지내고,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한 한칸 띳집을 짓고 지내다, 1946년(병술년) 10월 20일에 목욕 단좌(端坐)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入寂) 하였다.
나이 76, 법랍(法臘) 62. 제자들이 스님의 법어를 모은 「만공법어(滿空法語)」가 있다.
[참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선풍(禪風 선·선종·좌선 선/바람·기세氣勢·바람이 불다 풍) ; ①선(禪)의 기세[風]. 선의 바람이 불다. 선이 왕성하게 일어나 널리 퍼지는 것을 바람 부는 것에 비유한 말. ②한 선승(禪僧)이나 그 문하의 독자적인 가르침이나 수행 방법.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불(生佛) ; ‘현실로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는 의미로, 부처님과 같이 덕이 높은 사람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로 고승(高僧 행동이나 덕이 높은 스님)을 찬미하는 호칭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정전강(鄭田岡) ; 전강선사. 속성(俗姓)은 정씨(鄭氏), 전강(田岡)은 법호(法號). 법명은 영신(永信).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전강대종사 법어집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가 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법보선원(法寶禪院) ; 인천시 미추홀구 주염로 43에 있는 용화선원(龍華禪院)에 있는 스님 선방(禪房)의 이름.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미륵존불(彌勒尊佛) ; 미륵불(彌勒佛).
*미륵불(彌勒佛) : [산스크리트어] Maitreya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 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 무승(無勝) ·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염부제(閻浮提) ; 염부(閻浮). 남염부제(南閻浮提). 섬부주(贍部洲). 남섬부주(南贍部洲).
산스크리트어 jambu-dvīpa 염부(閻浮), 섬부(贍部)는 jambu의 음역어이며, 제(提)와 주(洲)는 dvipa의 각각 음역어 및 의역어이다. jambu는 나무 이름.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네 대륙(四洲)이 있는데, '염부'라는 이름은 여기에 자란다는 점부(jambu)에 유래하며, 남방에 있기 때문에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 함. 불전(佛典)에서는 ‘인간세계의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화신(化身) ; 화현(化現)한 몸[身]. 변화된 신체. 화신불(nirmaka-kaya 化身佛). 부처의 삼신(三身 : 法身 · 報身 · 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응화신(應化身) · 변화신(變化身) ·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감로(甘露) ; 감로수(甘露水). 산스크리트어 amṛta 팔리어 amata
①신들(諸天)이 상용하는 음료. 이것을 마시면 불로불사(不老不死)가 된다고 한다. 신약(神藥). 불사의 영약. 도리천(忉利天)에 있다는 감미로운 영액(靈液). 장수하고 죽은 이를 환생시킨다고 함. 최고의 자미(滋味)에 비유함.
②‘맛은 달고, 마시면 죽지 않는다’라고 일컬어지던 것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번 믿으면 끝없는 공덕과 이익을 얻는다는 뜻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디단 이슬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③불사(不死). 영원의 생(生)을 의미. ④최대의 경지. 깨달음. 열반(nirvana)와 동일. ⑤정갈하고 감미로운 물.
*숙연(宿緣 오래 되다 숙/인연 연) ; ①오래 묵은 인연. ②전생(前生)의 인연.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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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