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경계(는 내게 있다)'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24.04.23 경계(No.227)—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 따라서 끝없이 방황하고, 깨달은 사람은 맑은 거울 같아서 일체 경계가 거울에 비추되, 거울 자체는 아무 변동이 없다 | (게송)心隨萬境轉~.
  2. 2021.07.22 경계((No.645))—어떤 근기라도 깨달을 수 있는 최고의 법이 참선법. 참선법 가운데에도 '이뭣고?' | 구경각을 얻을 때까지는 항상 초학자의 마음으로.
  3. 2021.04.24 경계(No.198)—(게송)得之在心應在手~ | 공부 요점, 모든 경계 위에서 화두를 들어라 | 사바세계가 도닦기 좋다 | 대신통(大神通)과 소신통(小神通).
  4. 2020.12.22 경계(No.445)—타성일편이 되면 악업(惡業)에 안 끌려간다 | 구경(究竟)의 깨달음 | 팔만사천 마구니 | 참선 수행인은 ‘한 생각’ 단속이 중요.
  5. 2019.11.12 경계(境界) (No.321)—어떠한 경계에도 바로 화두를 들어 자기로 돌아오면 흥망성쇠, 희로애락 한 장면 한 장면이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 되는 것입니다.
  6. 2019.08.31 경계 (No.122)—경계에 속지 마라 | 정법을 닦아 과거에 지은 업을 수월하게 받아넘겨라 | 방편에 떨어지지 마라 | 절에는 법(法)의 밥을 잡수러 오시는 것.
  7. 2019.07.06 경계(境界) (No.124)—(비유)나무에 못을 박을 때 처음에 정확하게 박어야 | 공부하는 사람은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어서 올바르게 닦아야만 바른 깨달음에 도달한다.
  8. 2018.09.16 경계(境界) (No.524)—어떤 경계(境界)가 나타나건 그것은 그대로 내비두고 정신을 딱! 챙겨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으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꾸준히 들고 나가야.
  9. 2018.05.24 경계(境界) (No.240)—답답하고 지루할 때가 한 고비 올라서려는 중요한 고비 | 경계에 속지 마라.
  10. 2017.06.26 경계(境界) (세등선원No.59)—(게송)路從平處險~ | 변화무쌍한 복잡한 경계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더 성성(惺惺)하고, 이렇게 공부가 되어 가도록 우리는 공부를 익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경계(No.227)—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끝없이 방황을 하고, 깨달은 사람은 맑게 닦아 놓은 거울과 같아서 일체 경계가 여지없이 그 거울에 비추되, 거울 자체는 아무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 (게송)心隨萬境轉~.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 희로애락 · 빈부귀천 · 시비이해 · 삼독오욕 · 부모형제 · 춘하추동 ·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 · 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3분 14초)


[법문] 송담스님(No.227)—1983년(계해년) 성도재 법회(82.12.08.음) (용227)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모든 현상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境界)를 쫓아서 쉴 사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발심(發心)을 해서 진정한 수행에 들어간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그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함으로써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끝없이 방황을 하고, 깨달은 사람은 맑게 닦아 놓은 거울과 같아서 일체 경계가 여지없이 그 거울에 비추되, 거울 자체는 아무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빨간 것이 오면 빨간 상(像)이 거울 속에 비추고, 노란 것이 나타나면 노란 것이 그 거울 속에 비추되 거울 자체는 아무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여지없이 청황적백(靑黃赤白)이 나타나건만 거울 자체가 빨개지는 것도 아니고, 한번 노란 것이 거기에 비추어졌다고 해서 거울 자체가 노란 거울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어느 전법게(傳法偈)에도, 『경계 따라서 마음이 전(轉)하지만[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다. 그 굴르는 곳에 실로 그윽하다. 일체 경계를 만나되, 바로 거기에서 성품을 인득(認得)한다면[隨流認得性], 기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는 것이다[無喜亦無憂]』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러한 소식(消息)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39분28초~42분4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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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당처(當處) ; ①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 그곳. 또는 이곳. ②그대로. 지금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곳에서.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❶]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❷]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전법게(傳法偈) ; 선가(禪家)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法)을 전(傳)하는 내용의 시[偈].
*경계 따라서 마음이 전(轉)하지만[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다. 그 굴르는 곳에 실로 그윽하다. 일체 경계를 만나되, 바로 거기에서 성품을 인득(認得)한다면[隨流認得性], 기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는 것이다[無喜亦無憂] ; 『직지(直指)』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 (白雲和尙 抄錄 |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


[참고] 송담스님(참선법C)(No.184)—1982년 10월 첫째일요법회(82.10.03)(15분3초)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헌데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하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니라
나무~아미타불~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요, 마음은 모든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는데,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라, 일어나는 곳마다 바로 거기서 능히 그윽해 버린다.

중생은 경계(境界)에 따라서 마음이 일어나는데, 한 생각 일어나면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점점 생각이 벌어져 가지고 가지가 쳐서 그 생각이 점점 발전을 해 가지고, 그 생각이 얼굴에 표현이 되고 나아가서는 행동으로 나타나 가지고 큰일을 저지르게 돼.
그래 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슬픔의 구렁에 빠지기도 하고, 노여움의 불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지옥의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그러는데, 물론 우리가 살아있으니까 무슨 소리를 듣던지 무슨 색상을 보던지 어떠한 경계를 닥치면 그 경계에 따라서 생각이—저것이 차 소리라든지, 비행기 소리라든지, 또는 어린애 소리라든지, 저건 꽃이다, 붉다 검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경계에 따라서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데,
그 일어나는 그때에, 그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능히 경계에 휩싸여 끌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본성(本性)을 인득(認得)해 버린다. 일어나는 바로 그 경계를 발판으로 해서 자기의 본성(本性) 자리로 돌아와 버린다. 이것이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이여.

수류인득성! 수류인득성을 해 버리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라. 기뻐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그것이 바로 생사심(生死心)인데, 이 세상에 나왔다가 한평생 살다가 죽어가고, 죽었다가 다시 또 자기의 업(業)에 따라서 어느 곳에 태어나면 또 한평생 살다가 또 죽고 하기를 무량 억천만 겁을 그렇게 윤회를 하면서 금생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육도윤회(六途輪廻)의 근본이 무엇이냐 하면 「한 생각」 때문에 그런 거여.
‘한 생각 일어나는 것’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천당에도 올라가고, 지옥에도 떨어지고, 축생도 되고, 또는 사람도 되고, 귀신도 되고 그런 것이여.

그런데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團束)을 하느냐?’ 여기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고, 축생이 될 것을 미리 방지할 수도 있고, 그러기 때문에 천당에 가고 싶으면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고 싶으면 지옥에 가고, 독사가 되고 싶으면 독사가 되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자유자재로 할 수가 있는 그러한 능력을 우리는 낱낱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여.

그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을 못해 가지고 원치도 아니한 지옥에도 떨어지고 독사도 되고 귀신도 되고 수라(修羅)도 되고 이러하지, 참으로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할 방법만을 분명히 알아서 실천을 해 나가면 우리는 지옥에 갈 필요가 없어.
천당에도 가고 싶으면 가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서 자기도 훌륭한 인격을 이루고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을 갖다가 제도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여.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인데, 참선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하는 방법」이다.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슬픈 일을 당하든지 또는 속상한 일을 당하든지, 괴로운 일을 당하던지, 또는 기쁜 일을 당하던지, 어디에서 언제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이뭣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금방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이 바로 가장 빨리 어떠한 근기(根機)라 하더라도, 남자가 되었건 여자가 되었건, 나이가 많건 적건, 지식이 있고 없건, 또는 성질이 급해서 성을 잘 내건,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부처님과 차등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그 생각만 두 번째 생각으로 벌어지기 전에,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동시에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자기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한다면 거기에서 육도윤회는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는데 그 죄 많은 사람이 참선을 한들 어떻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며, 그 뭐 「이뭣고?」 좀 했다고 해서 어떻게 내가 그러한 무서운 많은 죄를 지었는데 지옥에 안 떨어질 수가 있는가?’ 이러한 생각을 먹고 미리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도업(道業)을 닦아서 이루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불보살(佛菩薩)께서는 그러한 죄 많은 사람을 위해서, 업(業)이 두터운 중생을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을 하셔서 그 많은 법을 설하셨고, 삼천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그 부처님만이 아니라 그렇게 정식으로 부처님으로 출현하시는 부처님뿐만이 아니고, 온 법계(法界)에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형형색색으로 부처님과 보살님과 또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한 그러한 성현들이 수없이 천백억 화신(化身)을 나투면서 우리의 중생 앞에 출현을 해 계시는 것입니다.

죄도 없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죄 많은 사람일수록에 업이 두터운 사람일수록에, 그런 불보살과 성현은 백 배 더 불쌍한 마음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이 중생을 제도할까?’ 그 중생에 알맞는 방편(方便)을 써서 제도하시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 업이 두터운 우리 보잘 것 없는 중생도 아들과 딸을 많이 두면, 공부 잘하고 착하고 좋은 아들은 마음으로 흐믓하고 기쁘고 그렇지만, 그 공부를 잘 못한다든지, 몸이 어디가 불구자라 한다든지, 마음이 바르지를 못해서 못된 일을 많이 한다던지 하는 그러한 자식에 대해서는 부모는 밤잠을 못 주무시는 것입니다. 몇백 배, 몇천 배 그 자식에게 더 마음이 더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자식을 바로잡아 줄까? 어떻게 해야 이 병신을 갖다가 이 바로잡아 줄 수가 있을까?’ 자나깨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뜨거운 사랑과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미루어보면 불보살과 성현들께서 우리 중생, 죄 많은 중생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이 중생을 제도하고 바른길로 이끌고 생사 없는 해탈도를 증득하게 해 줄 수가 있을까?’ 얼마나 그 생각을 뜨겁게 가지고 계실 것인가를 우리는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처음~15분15초)

*소식(消息 줄어들다·사라지다·없애다 소/불어나다·살다·번식하다·호흡하다 식) ; 깨달음의 결정적인 단서. 깨달음으로 이끄는 갖가지 실마리. 또는 깨달은 경계 자체.
[참고]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26. 「시중(示衆)」에서
若論實參實悟 正如八十翁翁 向逆風逆水裏 牽一隻無底鐵船相似 不問上與不上 徹與不徹 直須心心無間 念念無虧 一步一步 盡平生伎倆睚將去 睚到著脚 不得處 筋斷骨折時 驀然水轉風回 卽是到家消息 卽今莫有到家底麼 (卓柱杖一下 云) 十萬八千

만일 실답게 정진을 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말하자면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배를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함과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묻지 말고, 곧 마음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평생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밀어서 다리를 붙일 수 없는(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과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 이르르면 별안간 물살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집에 이르른 소식(消息)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이가 있느냐? (주장자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십만(十萬) 팔천리(八千里)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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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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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경계((No.645))—조사스님네들이 팔만대장경에 있는 진리를 어떠한 근기(根機)의 중생이라도 깨달을 수 있도록 개척해서 남겨주신 최고의 훌륭한 법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법 가운데에도 '이뭣고?'
공부하다 어떤 소견(所見)이나 경계가 일어났을 때 집착하지 말고 깨끗이 없었던 걸로 해 버리고 다시 본참공안을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면 된다 | 구경각(究竟覺)을 얻을 때까지는 항상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그러한 겸허한 마음으로 여법하게 수행해 나가야.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 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 영역.

 


정말 삼명육통(三明六通)과 팔해탈(八解脫)을 다 얻어서 부처님과 조사와 같은 그런 경지에서 오무생사(悟無生死)하고 증무생사(證無生死)해서 용무생사(用無生死)할 지경에 이르지 아니했으면,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조금 무슨 지견 난 걸 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그런 생각을 속에 품고 있다면은 불조(佛祖)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도반들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신도 단월(檀越)네에게도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10분 12초)

 


[법문] 송담스님(No.645)—2000년 하안거 해제, 백일기도 회향, 백종법회 (용645)

부처님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왕림하셔 가지고 왕궁의 부귀도 버리시고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지마는 그 법문이 문자화 된 것이 우리나라 해인사에도 팔만대장경 장경각에 목각(木刻)을 해서 잘 봉안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팔만대장경의 법문이 그걸 다 읽기도 어려운 일이고, 다 해석해서 다 알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 고인네들은, 조사스님네들은 그 안에 있는 요점만을 뽑고 또 뽑아서 어떠한 근기(根機)의 중생이라도 그렇게만 해 나가면 팔만대장경에 있는 진리를 내가 깨달을 수 있도록 그 길을 개척을 해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이 몇 가지가 있지마는, 그 중에 최고의 훌륭한 법—간단하면서도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무엇이냐 하면은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법 가운데에도 ‘이 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그것이 별 재미도 없고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닌데, 정말 무상(無常)함을 철저히 깨닫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다 보면 해 갈수록 뭣이 알아지는 것은 없어. 알아지는 것은 없지마는 해 갈수록 신심이 더욱 나오고, 더 무상을 철저히 느끼게 되고, 일분일초 시간을 아껴서 이 한 일에 철저하게 정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정진을 하다 보면은 '사람의 근기와 어떻게 정진을 해 가느냐'의 그런 차이로 해서 능엄경(楞嚴經) 50상(相) 변마장(辨魔障)에 나오는 거와 같은 그러한 여러 가지 형상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꼭 다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정진을 하면 다 나타나는 것은 아니나 그런 가지가지의 형상이 나타날 수가 있는데, 나타난다고 해서 꼭 좋을 것도 없고. 그러나 그런 것이 나타나는 수가 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경지가 나타나면 그것을 ‘아, 내가 이것이 견성(見性)한 것인가 보다’ ‘이것이 바로 도통(道通)한 것인가 보다’ ‘이것이 앞으로 좋은 징조인가 보다’ 이렇게 착각을 하고 거기에 집착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른 경지냐, 올바르지 못한 경지냐' 그것은 본인이 평소에 선지식(善知識)의 법문(法門)을 많이 들어본 사람이면 스스로도 그것을 점검을 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법문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여태까지 보이지 않는, 느껴보지 못한 현상이 일어나니까 신기하고 묘해서 그것을 무슨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하고 좋아하고 집착을 할 수가 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런 경지를 여기서 50여 가지의 경계(境界)를 낱낱이 얘기할 시간은 없고 대별(大別)을 하면,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서 업장(業障)이 소멸되어서 그래 가지고 식(識)이 맑아졌다 하면은 그것을 꼭 나쁜 쪽으로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업장소멸(業障消滅)하고 공부가 앞으로 잘 되어가기 위해서 일어나는 경우라면 거기에 집착을 아니하고 그런 것을 좋아할 겨를도 없고, 깨끗이 없었던 걸로 해 버리고 다시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것에 집착을 하고 좋다는 생각을 하고, 이것이 뭣이 알아진 것이 있고—무슨 조사의 어구(語句)나 『전등(傳燈)』 · 『염송(拈頌)』이나 경전을 보면 옛날에는 잘 몰랐었는데 자기 나름대로 가늠이 가고 그런 수도 있으니까 그걸 보고 ‘아, 내가 한소식 했다’ 이렇게 착각을 하고 한다면 그 공부는 거기서 중단이 되고 말 것이고,
조금 더 보태서 시(詩)를 짓는다던지, 게송(偈頌)을 짓는다던지, 함부로 ‘자기가 한소식 했다’고 떠벌리고 과시를 한다던지, 또 막행막식을 하고 횡설수설해 가지고 많은 사람한테 자기가 도를 통한 것처럼 선전을 하고 과시를 하고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도 망하는 거고, 불법도 그 사람으로 인해서 망하게 되는 거고, 많은 신도들도 그런 것을 보고 마음에 혼란심을 일으켜서 잘못된 데로 빠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행이라 하는 것이 꼭 해야 하는 것이고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소견(所見)이 나거나 경계가 일어났을 때, 철저하게 선지식을 믿거나 선지식의 법문을 의지하지 아니한 사람은 까딱하면 잘못된 지경에 말려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니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그런 점에 대해서 각별히 주의를 하시고,
자기가 조금 평소에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어떤 지견이 났다 하더라도 '이것이 구경각(究竟覺)이냐 아니냐'—정말 삼명육통(三明六通)과 팔해탈(八解脫)을 다 얻어서 부처님과 조사와 같은 그런 경지에서 오무생사(悟無生死)하고 증무생사(證無生死)해서 용무생사(用無生死)할 지경에 이르지 아니했으면,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조금 무슨 지견 난 걸 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그런 생각을 속에 품고 있다면은 불조(佛祖)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도반들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신도 단월(檀越)네에게도 부끄러운 일일 것이고 그럴 것입니다.

무엇을 해먹을 짓이 없어서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고, 미증(未證)을 위증(謂證)하고 미득(未得)을 위득(謂得)해 가지고 대접을 받을라고 하는 그러한 짓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를 반성해서 자기의 잘못된 점을 반성을 하고 참괴심(慙愧心)을 가지고, 구경각(究竟覺)을 얻을 때까지는 항상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그러한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여법하게 수행해 나가는 그러한 수행자가 되야 한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 자리에 모이신 도반 여러분들은 전부 그러한 도반들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20분9초~30분2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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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과정(課程)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 •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理無碍) • 사무애(事無碍)하게 되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나니라. 『만공법어 滿空法語』 (修德寺 能仁禪院) p262에.

*지무생사(知無生死) ; 생사 없음을 아는 것.
*계무생사(契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에 계합하는 것.
*체무생사(體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체달함.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이무애(理無碍) ; 이치(理致)에 걸림이 없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의 경지(境地).
*사무애(事無碍) ; 사물(事物)에 걸림이 없는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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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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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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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No.198)—(게송)得之在心應在手~ | 부처님과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 공부 요점 -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지 마라 | 모든 경계 위에서 화두를 들어라.
발심할 수 있는 사바세계에 태어나야만 도를 이룰 수가 있다 | 대신통(大神通)과 소신통(小神通).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 희로애락 · 빈부귀천 · 시비이해 · 삼독오욕 · 부모형제 · 춘하추동 ·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 · 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1) 15분27초.

 

(2) 11분 40초.

 


[법문] 송담스님(No.198)—1983년 4월 첫째 일요법회(83.04.03) (용198)

(1)-----------------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한데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4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이것을 마음에 얻어. 이것을 얻되, 마음에 있어서 이것을 얻는다. 그리고 응재수(應在手)라. 응하는 데에는 손으로 응(應)을 한다 그말이여.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눈달, 겨울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그 눈이 쏟아지는 속에 달이 뜨며, 봄이 돌아오면 그 봄바람 속에 꽃이 피어.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눈 내리는 속에 달이 뜨며, 봄이 돌아오면은 동풍이 부는데 그 동풍이 부는 속에 꽃이 피어난다 그말이여.

우리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진(六塵)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졌을 때 그게 '마음에 얻는다'
마음에 그러한 육진(六塵)이 비추어지면 그것을 상대하게 될 때에는 손으로 글씨를 쓰게 될 때는 글씨를 쓰고, 일을 하게 될 때에는 일을 하고, 그것이 응할 때에는 손으로 그것을 응하게 된다 그말이여.

우리 일신상(一身上)에는 그러려니와 우주법계에 자연계에 있어서는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가을에는 휘황창 달이 밝고, 봄이 오면 동풍이 불고 꽃이 피는 것이여. 이렇게 하기를 몇억만 겁(劫)을 그렇게 해 내려왔다 그말이여.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는데, 새벽이 돌아오면 아침마다 닭은 오경(五更)이 되면은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봄이 돌아오면은 곳곳마다, 산이나 들이나 집이나 골짜구니마다 울긋불긋 꽃이 피더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나,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우리가 부처님보단 우리의 본성(本性), 자성(自性) 자리에 있어서 모자라거나, 부처님이 우리 중생보다 더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뜻을, 내가 나를 깨닫지를 못해서 오직 그 하나 때문에 우리는 중생의 탈을 벗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달이 법회를 열고 무슨 말을 할 말이 있느냐? 무슨 기특하고 재미있는 얘기 거리가 있는 것이냐?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법상에 올라오며, 무엇을 듣기 위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이렇게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이렇게 모이시는 것이냐?
왜 과거에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성현들은 이 문제를 해결을 했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동서 사방으로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인가?

천 번 만 번 법문을 듣고 서울로 지방으로 법회를 법문을 들으러 다녀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냥 마찬가지여. 법문을 들을 때에는 가슴이 좀 후련하고 무엇인가 얻은 바가 있는 것 같다가, 한 시간 두 시간 지내고 하루 이틀이 지내면 도로 답답하고 방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말이여.

공부해 나가는 그 근본 뜻을 바로 알아버리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정진(精進)이요, 수도(修道)요, 공부를 해가는 것인데, 그 공부해 나가는 그 요점을 바로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행여나 무슨 좋은 말씀을 들을까?’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법문을 들을까?’ 밤낮 들어봐도 들을 때 뿐이고 공부는 조금도 나아가는 것이 없다 그말이여.

일용 생활,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세수하고, 오줌 누고, 똥 누고, 걸어 다니고, 차 타고, 하는 이러한 일상생활,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는다면 이것은 영원히 찾아도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여.
여의고 그놈을 떠나서—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무엇을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잡고, 발로 걸어 다니고,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놈을 버리고, 그놈을 떠나서 나의 자성(自性) 자리가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그놈을 버리고 찾겠지만, 그놈을 떠나서는 세상없이도 없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놈을 버리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하는 뜻을 모르는 사람은 항시 마음만 급하고 마음만 바뻐. ‘내가 이렇게 공부를 안 해서 어떻게 하나!’ ‘오늘도 이렇게 그럭저럭 하루가 지냈구나!’ ‘이러한 모다 그 이런 복잡한 일 때문에 내가 공부를 못한다’
남편 때문에 못하고, 자식 때문에 못하고, 살림살이 때문에 못하고, 병 때문에 못하고, 그러한 것 때문에 못한다고 핑계를 대고 마음만 조급하다 그말이여.
마음이 조급하니까 짜증만 내고 신경질만 내고 일체 생활에 안정을 잃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평과 불만이 가뜩차 있어. 그러니 무슨 일을 한들 그 일이 제대로 되며, 무슨 공부가 될 것이냐 그말이여.

「공부하는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은 모든 기회(機會)와 경계(境界) 위에서 잡아가지고 쓸 수가 있다 그말이여.
기회,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기회와 경계상에 그놈을 여의지 않고,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턱! 잡어서 써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는 바로 거기서 잡아 낚아채야 하고, 귀로 무엇을 소리를 들을 때에는 듣는 그 찰나에 퍼뜩 잡아서 써야 해.

속담에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번갯불 번쩍하는 그 번갯불에다가 콩을 구워 먹어.
번갯불 번쩍할 때 바로 그때를 이용해서 바늘귀를, 바늘에다 실을 폭 뀌듯이, 그 찰나를 잘 잡아 쓸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공부하는 바른 길을 터득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여.(처음~15분3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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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에 3년, 10년, 20년, 30년을 다녀도 그러한 기회와 경계를 여의고 따로 공부를 지어 나가려고 그러고, 그놈을 여의고 공부를 할려고 한 사람은 아무리 애써봤자 공부에 진취가 있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쪼끔 시끄러우면 파르르 신경질을 내고, 쪼끔 복잡하면 도망할 궁리를 하고, 경계와 기회를 피하고 도피해 가지고 따로 공부를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맞는 일, 내 마음에 맞는 사람, 내 마음에 맞는 장소, 모든 일이 내 마음과 내 마음에 순(順)하는, 내 마음대로 되는, 조끔도 내 마음을 거슬리지 아니한 그러한 곳은 저 천상에, 하늘나라 천당에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천당에 가면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고, 모든 즐겁고 기쁘고 편안하기는 하지만, 거기서는 도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도(道)를 이루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신 것입니다.

천당(天堂)은 좋고 기쁘고 편안한 일만 있어서 그러한 상태에서는 발심(發心)을 할 수가 없어. 축생(畜生)이나 지옥(地獄)은 모든 일이 괴로움만 있어서 괴로움이 지나치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우리의 근기(根機)로 그것을 이겨 나갈 수가 없어.
오직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이 사바세계는 내 마음에 합당한 일도 있고, 기쁘고 편안한 일도 있으려니와 슬프고 괴롭고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도 있어서 우리가 분심(憤心), 발심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야만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일부러 무상(無上)의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위해서, 대도를 성취해서 영원한 해탈도를 증득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 사바세계에도 오셨는데, 우리는 과거에 무슨 수승한 인연이 있어서 다행히 금생에 이 사바세계에 왔습니다.
이 '사바세계가 좋다'고 하는 것은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여져 있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가 좋다는 것이여.

그런데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피하고 슬픈 일은 피하고 기쁜 일만을 찾고, 괴로운 일을 피하고 즐거운 일만을 찾고, 시끄러운 것을 피해서 조용한 것만을 찾고, 벌써 시끄러운 것을 버릴려고 할 때에 그르쳐 버렸고, 다시 편안하고 즐거운 곳을 찾을 때에 두 번째 어긋나 버리는 것입니다. 계속 어긋나고 그르치기만 해 가지고 언제 바른길을 한 걸음이라도 갈 수가 있느냐 이말이여.

공부하는, 참으로 발심을 해서 진정으로 대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경계—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괴로운 일이나 즐거운 일이나, 어떠한 순경계(順境界)나 역경계(逆境界)를 만났을지라도 바로 그 기회와 그 경계를 단 일분일초라도 놓치지 말고 바로 되잡아 써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지어간다면 우리가 있는 장소는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그 시간이 어느 시간이 되었건, 어떠한 일을 만나건, 어떠한 사람을 상대하건, 우리는 곳곳마다 최상의 선방(禪房)이요, 바로 부처님 회상(會上)이요, 닥치는 일마다 부처님이요, 불보살을 친견한 것이요,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면 모든 소리는—나를 칭찬하는 소리나,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나, 새가 우는 소리나, 닭이 우는 소리나, 개가 짓는 소리나, 자동차 소리나, 모든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소리요, 부처님의 법문(法門)이 될 것이며,
내가 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은—저 해와 달은 말할 것도 없고 흘러가는 구름과 물, 겨울에 내리는 눈이나, 봄에 피는 꽃이나,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나,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나, 모든 것이 다 불색(佛色), 부처님의 몸이, 불신(佛身)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접촉하는, 상대하게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되고, 바로 그것이 최상의 육신통(六神通)으로 되는 것입니다.

소신통(小神通)은 내일 일을 알고, 여기서 서울 일을 알고, 앞으로 다가올 10년 20년 뒷일을 알고, 여기서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서울도 왔다갔다 축지법을 하고, 이러한 것은 소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조그마한 신통이라 하는 것이고.
참으로 최상의 대신통(大神通)이라 하는 것은, 부르면 대답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대간하면 한숨 자고, 이것이 바로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삿된 사람은 소신통이 대신통인 줄 착각을 하는 거고, 참으로 불법(佛法)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옳게 인식한 사람은 바로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바로 이것이 신통 중에 최고로 크고 높은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대신통을 착각을 해 가지고 소신통을 추구한 사람은 공부해 나가다가 사견(邪見)에 빠지기가 쉽고, 마구니의 권속으로 끌려가서 미치거나 삿된 경계에 빠지는 것이고.
소신통에 집착을 하지 아니하고 참으로 대신통의 위대함에 눈뜬 사람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시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고 항시 부처님에 설법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못하겠습니까.(15분40초~27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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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득지재심응재수~'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대도사(大導師 큰 대/길·인도하다·이끌다 도/스승 사) ; 불(佛) · 보살(菩薩)의 존칭. '크신[大] 길 인도하는[導] 스승[師]'이라는 말.
도(導)는 「길[道] · 인도(引導)하다 · 이끌다」의 뜻으로, 대도사는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길로 인도하는 큰 스승이라는 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度] 하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대도사(大度師)와 같은 뜻이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 삼무차별(三無差別 :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불원천리(不遠千里)하다 ; 천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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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천당(天堂) ; ①천상(天上)에 있다는 신(神)의 전당(殿堂), 하늘의 세계.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을 통칭하는 말. ②정토교(淨土敎)의 극락세계(極樂世界).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일분일초(一分一秒) ; '1분과 1초'로 아주 짧은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부처님 회상(會上) ; 불회상(佛會上). 부처님[佛]의 회상(會上). 부처님 계시는 곳.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불색(佛色) ; 불색신(佛色身). 형체를 갖춘 부처님의 몸을 일컫는 말. 상대어는 법신(法身)으로 진리를 인격화한 부처님을 가리킨다.
*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도(度)·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여섯 가지 수행의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대간하다 ; ‘고단하다(지쳐서 피곤하다)’의 사투리.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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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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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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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경계(No.445)—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설사 확철대오를 못해도 악업(惡業)에 끌려가지 않는다 | 구경(究竟)의 깨달음이어야 한다 | 팔만사천 마구니 | 참선 수행인은 ‘한 생각’ 단속하는 것이 기가 막히게 중요한 것이다.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10분 21초)

 

[법문] 송담스님(No.445)—1991년 5월 첫째 일요법회 (용445)

 

아까 전강(田岡) 조실 스님 법문에 ‘이 화두(話頭)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설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해도 악업(惡業)에 끌려가지 않는다’

 

왜 그러냐? 이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참선법(參禪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기 때문에 최상승법에 의해서 타성일편이 된 사람은 부처를 구하지도 않고, 깨달음을 구하지도 않고, 누가 나를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래지도 않아. 천당도 갈려고 하지 않고, 지옥도 피할려고 하지를 안 해.

천당 지옥이며 일체 그러한 바깥 경계나 안 경계에 대해서 끄달리지를 않기 때문에 두려워할 지옥도 없는 것이고, 뭐 현혹될 천당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거든.

 

마지막 숨이 딱! 끊어질 때까지도 떠억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하는 것이 그것이 활구 참선객이요,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의 지조(志操)가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한 지조와 그러한 요지부동(搖之不動)한 수행력이 쌓인 사람이 지옥에 갈 까닭도 없고, 그 사람은 이미 확철대오 안 했어도, 확철대오를 바래지 않아도, 확철대오 할 수밖에는 없는 사람이여, 그 사람은.

 

숨 거둘 때 부처님이 나타나신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숨을 거둘 때에 염라대왕(閻羅大王)의 사자(使者)가 온다해도 두려워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말이거든.

이 세상에 흥망성쇠에 동요가 되지도 않고, 화두에 대한 의단이 독로함으로 해서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도 다 물리쳐 버렸고, 오욕락(五欲樂)도 다 물리쳐 버린 상태에서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현혹하고 좋아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거든.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에 의해서 수행을 해가는 사람은 부처님과 같은, 고조사(古祖師)와 같은 그러한 견지(見地)에 이르기 전에는 어떤 소견(所見)이 좀 나고 공안에 대해서 무슨 소견이 좀 난 거, 그러한 것에 착각을 해 가지고 방황하고 그런 것이 아니여.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스스로 그까짓 것을 없는 것으로 해 버려야 되거든.

 

또 그러한 공안이나 불법(佛法)에 대해서 어떤 소견 난 것 그런 것도 그렇지만, 계행(戒行)을 철저히 지키면서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하다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식(識)이 맑아져 가지고 무엇이 보이는 수가 있거든.

사람을 보면 ‘전생(前生)에 저 사람이 소가 사람이 되었다’ ‘전생에 저 사람이 개가 사람이 되었다’ ‘저 사람은 전생에 천상에서 왔다’ 그런 것이 볼라고 안 해도 이렇게 보이는 사람이 더러 있어.

 

그거 좋은 것도 아니고 그런 경계(境界)가 나타나면 공부에 참 큰 방해가 되는 것이지마는 자기가 알라고 해서 아는 게 아니라 우연히 식(識)이 맑아지니까 그런 것이 보인 것이라,

바른 법문(法門)을 듣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무슨 숙명통(宿命通)이 열리고, 그것이 무슨 도인(道人)이나 다 된 것처럼 착각을 해 가지고 어디가서 그런 아는 소리나 풀풀하고.

 

그래 가지고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 저 스님이 뭣을 훤히 잘 아는 스님이다. ‘저 스님은 도통했다’ ‘저 스님은 도인이다’ 해 가지고 여기서 저기서 떠받들고 막 갖다가 도인으로 대접을 하고 그러니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도인인 척 하고 아주, 그래 가지고 외도(外道)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이 가끔 있거든.

 

그건 자기 신세 망치고 불법 망해 먹고, 그래 가지고 남 점쳐 주고 해 가지고 그거 어디다 쓸 것이냐 그말이여. 우리 수행하는 이 최상승법을 믿는 학자는 참! 그런 데에 떨어져서는 아니된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이 돼. 그렇게 되면 식이 맑아진 것은 사실이여. 그럴 때에 반드시 팔만사천 마구니가 육근문두(六根門頭)에서 엿보고 있어.

어떠한 틈만 있으면 그 틈을 타서 들어와 가지고 ‘아주 도(道)를 이루지 못하게 하리라’ 아주 그 팔만사천 마구니가 육근문두에 기다리고 있는 것인데, 그걸 모르거든.

 

어떠한 경우에도 단속을 철저히 해서 화두 의단독로하도록만 거기에다가만 온 정성과 신경을 거기다가 두고 해 나가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이중 삼중으로 둘러싸고 엿보고 있은들, 지가 어떻게 할 것이냐 그말이여.

내가 한 생각 삐끗 딴생각[別念]을 낸 그 좀을 타서 들어온 것이지, 한 생각을 동(動)하지 않는다면야 지가 어떻게 할 것이냐 그말이거든.

 

옛날에 어떤 선원에 조실(祖室) 스님이 계셨는데 후원에 나가보니까 수챗구녁에, 공양주(供養主)가 솥을 씻어 가지고 그 구정물을 붓다가 그냥 구정물에 밥알이 떠내려 가지고 수챗구녁에 있는 것을 조실 스님이 보셨습니다.

‘이 쌀 한 톨에 시주(施主)의 은혜가 일곱근 반인데 이 쌀을 이렇게 함부로 해 가지고 수챗구녁에다가 버리다니’ 스님이 아주 화를 내셨어.

 

그러니까 도량신(道場神)이 나타나 가지고 ‘여러 해 동안을 내가 이 도량(道場)에 있으면서 스님을 뵙지를 못했는데 오늘에사 스님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거든.

 

그 스님은 평소에 항상 그 깨달은 경지가 낭연독존(朗然獨存)하도록 그렇게 일체처 일체시에 그렇게 지내시니까 도량신도 그 스님을 볼라야 볼 수가 없었거든. 그러다가 한 생각 화를 내니까 그 좀을 타서 도량신이 그 스님을 보게 되었다 그말이여.

이것은 우리가 한 생각 냄으로 해서 도량신뿐만이 아니라 팔만사천 마구니의 올가미에 걸려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일화(逸話)지마는.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또 참선을 하는 수행인은 그 ‘한 생각’ 단속하는 것이 기가 막히게 중요한 것이다 그말이여.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을 해 나가느냐’가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느냐,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느냐 또는 해태굴(懈怠窟)에 빠지냐가 판별이 나는 것이다 그말이여.

지옥으로 가느냐, 천당에 가느냐의 바로 기로(岐路)요, 이 마구니의 올가미에 걸려들고 안 걸려드느냐의 그 판가름이 한 생각 단속하는 데에 달려있다 그거거든.(42분46초~53분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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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악업(惡業) ; 나쁜 결과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 또는 전생(前生)의 나쁜 행위.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요지부동(搖之不動 흔들다·흔들리다 요/어조사 지/아닐 부/움직일 동) ;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떠한 경계에도 움직이지 않거나 태도의 변화가 없음을 이르는 말.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사자(使者 사신 사/놈 자) : 죽은 사람의 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일을 한다는 저승의 귀신.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견지(見地) ; 견처(見處). 안목(眼目). 사물, 현상 따위를 관찰하거나 판단하는 입장.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식(識) ; 산스크리트어 vijñāna  팔리어 viññāṇa 대상을 식별하고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인식 작용. 인식 주관.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8식설(八識說)은 유식설(唯識說)에서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곧,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 · 말나식(末那識) · 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육근문두(六根門頭) ; 육근(六根 - 眼耳鼻舌身意)의 문 앞. 육근과의 경계.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딴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 ; '잠깐(매우 짧은 시간 동안에, 매우 짧은 시간)'의 사투리.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수챗구녁 ; ‘수챗구멍(허드렛물이나 빗물 따위가 빠져나가는 구멍)’의 사투리.

*공양주(供養主) ; 절에서 밥을 짓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이 쌀 한 톨에 시주(施主)의 은혜가 일곱근 반인데' ; 일미칠근(一米七斤). ‘쌀 한 톨을 생산하기 위해 농부가 흘리는 땀의 무게가 일곱 근이다’라는 말로, 쌀을 비롯한 모든 생산물이 매우 소중하고 귀한 정성이 들어간 것임을 알고, 또 그럼으로써 그것들에 감사하고 아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참고 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42~145. p147. (가로판 p149~151. p154)

於戱라  佛子여  一衣一食이  莫非農夫之血이요  織女之苦어늘 道眼이  未明하면  如何消得이리요.

(註解) 傳燈에  一道人이  道眼이  未明故로  身爲木菌하야  以還信施하니라.

 

아 ! 불자여。그대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이 농부와 직녀의 피와 땀 아닌 것이 없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떻게 소화하리요!

(주해) 전등록에 「옛날 어떤 도 닦는 사람이 도의 눈이 밝지 못한 탓으로 죽어서 나무버섯이 되어 시주의 은혜를 갚았다」고 하니라.

 

故로  曰,  要識披毛戴角底麼아  卽今에  虛受信施者是어늘  有人은  未飢而食하며 未寒而衣하니  是誠何心哉아  都不思目前之樂이  便是身後之苦也라 하시니라.

(註解) 智論에  一道人이  五粒粟으로  受牛身하야  生償筋骨하고  死還皮肉하니 虛受信施가  報應如響이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되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베푸는 것을 헛되이 받은 자가 이것이어늘,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무슨 마음일까? 눈앞의 쾌락이 바로 후생의 괴로움인 줄을 도무지 생각지 않는구나!」하시니라.

(주해) 「지도론」에 이르기를 「한 수도인이 다섯 낱 좁쌀 때문에 소 몸을 받아, 살아서는 뼈가 휘도록 일해 주고, 죽어서는 가죽과 살로써 빚을 갚았다」하시니 헛되이 시주것 받은 응보가 메아리와 같으니라.

 

故로  曰,  道人은  進食을  如進毒하고  受施를  如受箭이니 幣厚言甘은  道人所畏라 하시니라.

(註解) 進食을  如進毒者는  畏喪其道眼也요  受施를  如受箭者는  畏失其道果也니라.

 

그러므로 이르시되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는 것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할지니,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를 닦는 사람의 두려워할 바라」하시니라.

(주해)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듯 하라는 말은 도의 눈을 잃을까 두려워해서이고, 시주 받기를 화살을 받듯 하라는 말은 도의 열매를 잃을까 두려워함이니라.

 

[참고 ②] (1)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권상(卷上) 백운화상초록(白雲和尙抄錄 | 원조각성 번역·해설 | 현음사) p111~112. (2) 『전등록(傳燈錄) 1』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婆’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10 참고.

迦那提波尊者得法 後至毗羅國 彼有長者 名梵摩淨德 一日園中 樹生大耳如菌 味甚美 唯長者與第二子羅睺羅多 取而食之 取已隨長 盡而復生 自餘他人 皆不能見 時尊者知其宿因 遂至其家 長者問其故 尊者曰 汝家昔曾供養一比丘 然其比丘道眼未明 虛沾信施故 報爲木菌 唯汝與子精誠供養 得以享之 餘卽否矣 又問 長者年多少 答曰七十有九 乃說偈曰 入道不通理 復身還信施 汝年八十一 其樹不生耳

 

가나제바 존자께서 용수 대사에게 법을 얻으시고 그 뒤에 비라국에 가시었다. 그곳에 장자가 있으니 이름은 범마정덕이었다.

어느 날 정원 가운데 나무에 큰 귀가 생기되 버섯과 같고 맛은 매우 좋았다. 오직 장자와 그의 두 번째 아들 라후라다가 따다 먹었는데 따고 나면 다시 자라고, 없어진 다음에도 다시 또 생겼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지 못했다.

 

이 때 가나제바 존자께서 그 전생의 인연을 아시고 드디어 그 집에 가셨다. 장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가나제바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전생에 한 비구를 공양했다. 그러나 그 비구는 도안(道眼)이 밝지를 못해서 헛되이 신심으로 시주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 나무의 버섯이 되었다. 오직 너와 너의 둘째 아들만이 정성껏 그 비구에게 공양을 올렸기 때문에 누릴 수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한 것이다”

 

또 물으시되 “장자의 나이가 얼마냐?” 장자가 답하기를 “79세입니다”

가나제바께서 이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도에 들어가 진리를 통달하지 못하면 몸을 바꾸어 시주의 것을 갚아주나니, 너의 나이가 81세가 되면 그 나무에서 버섯이 나지 않으리라’

*도량신(道場神) : 도량(道場)의 수호신.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 원각(圓覺)의 대지(大智)가 밝게 홀로 드러나다.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한 깨달음. 진여(眞如)의 체득. 부처님의 지혜.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에서.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 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하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214.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보조국사어록』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p87, 102 참고.

*올가미 ; 노끈이나 철선 따위로, 잡아당겨도 매듭이 풀어지지 않도록 한 가닥을 고리처럼 만들어 짐승을 잡는 기구.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또 참선을 하는 수행인은 그 ‘한 생각’ 단속하는 것이 기가 막히게 중요한 것이다 ; 일념단속(一念團束).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해태굴(懈怠窟 게으를 해/게으를 태/굴 굴)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의 굴(窟).

*기로(岐路 갈림길 기/길 로) ; ①길 방향이 서로 다르게 나누어지는 지점. ②갈림길(둘 이상의 갈래로 나누어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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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경계(境界) (No.321)—어떠한 경계에도 바로 화두를 들어 자기로 돌아오면 흥망성쇠, 희로애락 한 장면 한 장면이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 되는 것입니다.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1) 20분 7초.

(2) 8분 29초.

 

[법문] 송담스님(No.321)—1987년 2월 첫째 일요법회(87.02.01) (용321)

 

(1)------------------

 

해마다 새해가 돌아오면 무엇인가 그 일 년 동안 항상 마음에 명심하고 그것을 하나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서 자기에 그 채찍을 삼고 자기를 다스려 나가는 말씀을 한마디씩을 했었습니다.

저지난해에는 ‘스스로 성내지 말아라’ 이런 말씀도 했고, 또 그다음에는 ‘남을 성나게 하지 말아라’ 이런 말도 했고.

 

그런데 금년에는 '속지 말아라. 경계(境界)에 속지 말아라'

우리는 항상 명심을 해서 도(道)를 닦을라고 그러고 부처님을 믿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깜박한 사이에 경계에 속고 마는 것입니다.

 

경계라고 하는 것은 외경(外境)도 있고 내경(內境)도 있는데, 밖에 모든 사람이나 사물에 그것에 내가 속는 것입니다. 그 속아 가지고 진심(瞋心)을 내기도 하고 또 원망하기도 하고 또 미워하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성을 내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 밖에 있는 모든 경계는 그 원인이 까닭 없이 밖에서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잘 관찰을 해 보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기와 관계되는 사건이, 인연이 전부 자기로부터서 자기라고 하는 뿌리로부터서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자기한테 있는 것이지, 나타나기는 밖에 나타났지마는 그 원인의 뿌리는 자기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중심을 잃어버리면 항상 속는 것입니다.

 

우리 도(道)를 닦는 사람이 '중심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화두(話頭)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화두를 놓쳐버리면 보는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듣는 것이 제대로 들리지를 않고, 생각하는 것이 제대로 생각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 하나를 바로 거각(擧却)을 하고 바로 관조(觀照)를 할 줄 안다면 언제나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밖에 어떠한 사태가 벌어지고 어떠한 일이 자기에게 충격을 준다 하더라도 그 경계에 속지를 않는 것입니다.

 

도 닦는 사람이 가장 경계(警戒)하고 두려워할 것은 속지 않는 것입니다.

바깥 경계에 속지 않는 것은 그래도 쉬운데, 정말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는 거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열심히 수행을 하다보면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獨露)하게 되고, 망상(妄想)을 없앨라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없어져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화두가 독로하는 그런 경계를 만나게 되는데,

거기에서 밖에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시끄러운 줄을 모르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마저도 전혀 느끼지를 않는, 고요하고 편안하고 맑고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신기로운 그러한 경지를 맛보게 되는 것인데, 그럴 때에 자기에게 속는 것입니다.

 

‘아! 바로 이것이 참 경계로구나. 이러한 상태로 영원히 있었으면. 이럴 때 누가 나를 깨닫게 해 주지 아니할까. 어서 여기서 툭 터졌으면’ 이러한 생각들이 바로 경계에 속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가 독로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 끊어져서 순일무잡한 경계가 온다 하더라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물론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고, 혼침(昏沈)이 일어나고 가슴이 답답하고 모다 그래도 짜증을 내서는 아니된 것처럼, 경계가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순일무잡한 경지가 온다 하더라도 깨달음을 기다리거나, 빨리 깨닫기를 바래거나, '하! 좋다'고 하는 생각을 낸 것, 이것도 또한 경계에 속는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희로애락(喜怒哀樂)—기뻐하지 아니하면 성내고, 성내지 아니하면은 슬퍼하고, 슬퍼하지 아니하면 즐거워하고, 희로애락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또 흥망성쇠(興亡盛衰), 지금 한참 모든 일이 잘 되어가지 아니하면은, 또 모든 일이 또 여의치 못하고, 흥망성쇠 이게 잠시도 고대로 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 모다 이러한 상황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러한 상황에 나도 계속해서 마음이 말려들어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미워했다가, 때로는 원망했다가, 때로는 저주하고, 때로는 불평불만을 하고, 때로는 근심 걱정을 하고, 이러는 가운데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일평생 동안을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한(恨)을 남긴 채 숨을 거두게 되는데, 다행히 이 불법을 만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참선법을 아는 사람은 뭔 일이 내 뜻대로 되어도 우쭐대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화두를 들고, 뭔 일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을 당해도 근심을 하고 성내기 대신 바로 화두를 들고.

바로 흥망성쇠와 희로애락 그 한 장면 한 장면이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요,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이요, 그것이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수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을 믿는 도학자는 산중에서 도를 닦건, 세간에서 도를 닦건, 슬픈 일을 당하면 바로 그 슬픈 일 자체가 나로 돌아오는 발판이요, 기분 나쁜 일을 당해도 기분 나쁜 그 일로 해서 오랫동안 그러한 경계에 묶여 있지를 않고 퍼뜩 화두를 들고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제 어떤 손님이 오셔서 변비증이 심하고, 또 삼백육십 골절이 마디마디 아프고, 또 기억력이 다 없어지고 그런다는 말씀을 호소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 드렸습니다.

 

몸에 육체는 나서 늙어서 병들어 가는 그 생로병사의 단계를 거쳐서 결국은 백년 미만에 이 몸뚱이를 버리고서 다시 새 몸을 받기 위해서 떠나는데, 그동안에라도 우리는 몸이 건강하기를 다 바랩니다.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거두어도 그래서 건강하다 하더라도 그래도 백년을 못 넘기고 다 가게 되는데, 그래도 사는 동안에는 건강을 해야지요.

 

어떻게 하면 건강하냐 하면, 첫째는 대소변을 잘 배설을 해야 합니다. 잘 먹어야 한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배설을 잘하는 것은 먹는 것보단 몇십 배가 더 중요합니다.

 

먹기만 잘 먹고 배설을 못하면 그 건강이 유지가 되지 않고, 그건 참 집안에서도 하수구가 맥혀서 고장이 난다든지, 또 화장실의 변기가 막혀서 안 나간다면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뭐 밥 한 끼니 두 끼니 굶어서는 별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수구가 막혀서 주방에 구정물이 나가지 않는다면 그거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변기가 막혀서 안 나간다면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대소변리(大小便利)가 잘 배설이 되지 아니하면 건강에 큰 소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게 인자 의학적으로 여러 가지로 그것이 다 설명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여러분은 설명을 하지 아니해도 잘 아실 것입니다.

대변을 눌 때 매일매일 배설을 하지 아니하고 이틀 삼일 이렇게 못 누게 되면, 그 처음에 영양을 섭취하고 그다음에는 그래도 안 나가면은 수분을 섭취하고, 그래도 안 나가면 대소변 속에 있는 독소까지 계속해서 흡입을 해 가지고 그 흡입된 그 독소는 혈관으로 몸으로 해서 전부 몸을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비가 있는 분은 결국은 몸이 무겁고 골치가 아프고 삭신이 아프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삭신만 아픈 게 아니라 오장육부에 독소가 다 돌고 돌기 때문에 오장육부에 전부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진대사(新陳代謝)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데, 활발하게 유지해 나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음식물, 그런 육체적인 물질적인 신진대사만 필요하냐 하면 우리 정신적인 것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기쁜 생각이 되었건, 성내는 생각이 되었건, 슬픈 생각이 되었건,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러한 생각에 오래 묶여 있으면, 그런 생각이 오랫동안 우리 마음속에 있어 가지고 없어지지 아니하면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성을 내고 있으면 그거 심장도 나빠지고 소화도 안 되고, 계속 아침부터서 성내는 일만 당하고 속에서 그 성내는 마음이 풀어지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얼굴빛이 대번에 아무리 원래 이쁘게 생긴 얼굴도 매일매일 성내 갖고 있다면 그 얼굴은 주름살이 생기고, 눈과 눈 사이에 ‘내 천(川)’자가 생기고, 눈에는 독사와 같은 독기(毒氣)와 살기(殺氣)가 풍기게 될 것입니다.

슬픈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슬픔에 잠겨 있다면 혈액순환도 잘 안될 것이고, 몸의 건강도 나빠질 것이고, 정신적인 것도 의기(意氣)가 소침(消沈)이 되고, 백병(百病)이 다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기쁜 것, 세속에도 기쁘면 참 좋은 것같이 생각이 되지만, 기쁨도 적당하니 기뻐야지 기쁜 것이 지나치면은 그것도 사람이 기절을 해서 죽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영양이 있는 거라고 해서 많이 먹으면 좋을 거 같지마는 그것도 과잉섭취를 하면 당뇨병이 생기고 여러 가지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쁨도 역시 슬픔이나 성내는 것이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이 파랑 불이나 노랑 불이나 빨강 불이나 다 전깃불인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감정 그런 것은 지나치게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것은 우리의 정신위생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 성내고 있다든지, 밤낮 슬퍼하고 있다든지 감정에 오랫동안 언짢은, 특히 그 원망하는 마음이 속에 항상 마음속에 있다든지, 남을 미워하는 생각이 항상 가슴속에 있어 가지고 없어지지 않는다든지, 그러면 결국은 남을 저주하게 됩니다.

남을 저주하게 되면 물론 상대방에게도 안 좋지마는, 상대방을 망하기를 바라고 상대방을 미워하고 하면 먼저 자기 먼저 안 좋은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안 좋기 때문에 그런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잠깐 일어난다 하더라도 바로 그 생각을 돌려서 없애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선 자기가 그 독에 중독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대변 소변이 오랫동안 체내에 머물러서 배설이 아니되면 병이 난 것 몇백 배 해로운 것이 성내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슬픈 마음, 저주하는 마음, 불평불만하는 마음, 이런 부정적인 이러한 생각들이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우선 자기의 정신 상태도 안 좋지마는, 자기 건강을 해롭게 하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운명을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러한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들어오는 어떠한 경계를 보고 속지를 말어.

속지를 말고서 바로!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터억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서 일 초 동안에 그것을 흩어 버려야 돼.

 

음식은 어느 시간만큼 위장에서 십이지장으로 소장으로 대장으로 그리 내려가면서 적당한 시간 동안 체내에 머물러 있어야 영양을 섭취하지요. 먹자마자 밑으로 흘러 내려간다면은 밤낮 설사만 하다가 영양실조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면은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화두를 돌이켜서 깨달음으로 향하는 생각으로 돌이켜야지, 좋은 생각이나 기쁜 생각이나 슬픈 생각이나 성나는 생각, 심지어 원망하고 저주하는 생각은 자체가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사 좋지만, 우리는 무량겁을 지어온 업(業)이 있기 때문에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육창(六窓)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를 말고 바로 화두로 돌이켜라 그거거든.(11분50초~31분55초)

 

 

 

(2)------------------

 

미운 생각을 억지로 참고, 성내는 마음을 억지로 참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억지로 참으면 임시 그 자리는 보류가 되겠지만 그 속에서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고 해 가지고 오랫동안 쌓이게 되면 결국은 그놈이 일시에 폭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소! 참어! 참는 것이 약이네'

그리 나는 참기를 별로 권하지를 않고 돌리라고 그럽니다.

 

탁! 돌이켜. 돌이켜서 화두로 돌이켜 버리고 그래서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것이 없도록 그때그때 돌려서 풀어서 어떠한 종류의 생각도 바로 이 화두를 드는 밑거름으로 삼어라 이거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어렵지만 자꾸 해 버릇하면 그것도 길이 나서 습관이 되어 가지고, 주먹 같은 놈이 치밀어 오르다가도 탁!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해 버리면 스르르르르 녹아져서 없어져 버리거든. 이건 경험을 해 보신 분은 누구든 아실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불행한 자기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고, 고약한 성격을 아주 훌륭한 성격으로 개선을 하신 분도 참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경계에 속지 말고 바로 자기로 돌아오라.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염기불파(念起不怕)하고 유공각지(唯恐覺遲)라. 생각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각(覺) 더딘 것을 두려워하라'

이 각(覺) 더디다고 하는—'각(覺), 빨리 깨닫도록 해라'하는 게 ‘빨리 화두로 돌이켜라’ 그말이거든.

 

깨달은 사람은 대원각지(大圓覺智), 크고 뚜렷하게 깨달은 그 지혜가 낭연독존(朗然獨存)을 하도록 항상 그렇게 인자 다스려 나가겠지만.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떤 것이 깨달은 경계인가를 모르는 우리로서는 화두를 드는 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첩경이니까 그렇게 화두를 자꾸 들면, 하근(下根)이 자꾸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상근(上根)이 되어 가는 거고.

 

서커스단에 그 묘기라든지, 올림픽 때에 체조하는 그 선수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어렵게 어렵게 부축을 받으면서 스폰지 위에서 수백 번, 수천 번을 되풀이해서 하면서 결국은 그러한 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뭣고?’야 무슨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고.

자꾸 생각은, 끊임없이 참선할 수 있는 계기는 자동으로 우리는 무진장 타고났으니까 그 계기를 놓치지 말고 그때그때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든다 말이여.

 

해 보면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것이 어디가 있는가?'

해 보기 전에는 ‘아이구! 그거 어려워서 상근대지(上根大智)나 하지 우리 업보중생(業報衆生)은 그런 거 해 봤자 어려울 거다’ 전부 다 해 보지도 않고 그런 생각들을 합니다마는, 해 보면 '이렇게 간단하고, 이렇게 쉬웁고, 정말 이렇게 신기하고도 묘한 것은 없구나' 그런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활을 해 나가는 데 항상 모든 것을 밝은 면을 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어두운 면도 있고 밝은 면도 있습니다. 똑같은 일 하나를 놔 놓고도 어떤 사람은 '잘했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못했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좋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좋지 않다'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밝은 면을 볼려고 노력을 하면 모든 것이 다 좋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운명을 밝게 운명을 열어가고자 하면 모든 것을—사람이 되었건, 어떠한 사건이 되었건, 어떤 물건이 되었건 무엇이든지 밝은 면으로 보도록 그렇게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러면 자기 운명이 밝아지는 것이여.

똑같은 일을 가지고 놓고도 그것을 어두운 쪽으로만 보고 비관적으로만 보고 그러면 점점 그 사람 운수 팔자는 점점 어두운 데로만 열려 나가는 것입니다.

 

밝은 쪽으로 볼려고 노력을 하고, 낙관적으로 모든 것을 볼려고 노력을 하고, 그러면 성격도 차츰 밝아지고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기고, 자기 마음도 편안하고 또 모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밝아짐으로 해서 얼굴도 밝아지고, 모든 생각이 밝기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말들도 모두가 밝고 명랑하고 희망적인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고, 행동도 역시 보람을 느끼게 되고.

남에게 그 사람을 보면은 용기가 나고, 부애 났던 생각도 그 사람하고 얘기를 좀 하다보면 그 부애 나는 것이 다 없어지게 되고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서는 항상 향내가 풍기게 되고 앞뒤에서 봐도 멋이 줄줄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정신 그리고 우리의 운명을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불행과 암흑으로 나를 끌고 가느냐, 행복과 희망으로 우리를 끌고 가느냐는 그 한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밝게 시원하게, 그리고 보람 있게 지혜롭게 우리의 생각을 가져 나가면서 어떠한 일을 보거나 어떠한 소리를 듣거나 무슨 생각을 느낄 때라도 항상 화두 ‘이뭣고?’ 이리 돌이키면서 산다면,

우리는 너무너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다행스럽고, 나에게는 얼마든지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새록새록 느끼게 될 것입니다.(31분56초~40분2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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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명(座右銘 자리 좌/오른쪽 우/새길 명) ; 늘 자리[座] 옆[右]에 새겨[銘] 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진심(瞋心) ; 왈칵 성내는 마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주요한 네 가지 현상. 출생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생(生), 노쇠하는 현상을 노(老), 병든 현상을 병(病),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사(死)라 한다.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일반적 형식으로서 사상(四相)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고통이기 때문에 사고(四苦)라고도 한다. 생로병사가 사라진 경계가 무위법(無爲法)인 열반(涅槃)이다.

삼라만상의 사상인 생주이멸(生住異滅)과 세계의 생성소멸 과정을 나타내는 성주괴공(成住壞空)도 동일한 형식이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生), 머물고(住), 변화하고(異), 소멸함(滅). 또는 그런 현상.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대소변리(大小便利 큰 대/작을 소/똥오줌 변/편리할 리) ; 대변(大便 '똥'을 점잖게 이르는 말)과 소변(小便 '오줌'을 점잖게 이르는 말). *便利(변리) : 똥, 오줌 따위를 무의식중에 배설함.

*삭신 ; 몸의 근육과 뼈마디.

*신진대사(新陳代謝 새 신/묵을 진/대신할·교체할 대/물러날 사) ; 생물체가 몸 밖으로부터 섭취한 영양물질을 몸 안에서 분해하고, 합성하여 생체 성분이나 생명 활동에 쓰는 물질이나 에너지를 생성하고 필요하지 않은 물질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작용. 물질대사(物質代謝)라고도 함.

*의기소침(意氣銷沈, 意氣消沈 뜻 의/기운 기/사라질 소/잠길·가라앉을·잃을 침) ; 의기(意氣 적극적으로 무슨 일을 하려는 마음이나 기개)가 사라지고[銷] 가라앉음[沈]. 기운이 없어지고 풀이 죽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육창(六窓 여섯 육/창문 창) ; '육근(六根)'을 여섯 개의 창으로 비유한 것.

*육창일원(六窓一猿) ; 여섯 창문이 있는 집에 한 마리의 원숭이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이리저리 여섯 개의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다는 비유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육창(六窓)에 비유하고 심식(心識)을 한 마리의 원숭이에 비유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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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파염기(不怕念起) 유공각지(唯恐覺遲) ;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참고]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14.  『수심결』 (지유선사 현토역해 | 도서출판 窓) p83~88 참고.

或者 不知善惡性空 堅坐不動 捺伏身心 如石壓草 以爲修心 是大惑矣 故云 聲聞 心心斷惑 能斷之心 是賊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눌러 조복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라고 하셨다.

 

但諦觀殺盜淫妄 從性而起 起卽無起 當處便寂 何須更斷 所以云  不怕念起 唯恐覺遲 又云 念起卽覺 覺之卽無

 

다만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성품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자세히 관조한다면 일어남이 곧 일어남이 없는 것이라, 그 바탕이 고요한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그러므로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하셨고 또 ‘생각이 일어나거던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진다’하셨다.

 

故 悟人分上 雖有客塵煩惱 俱成醍醐 但照惑無本 空華三界 如風卷煙 幻化六塵 如湯消氷

 

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있다 해도 그것은 다 제호를 이룬다. 다만 미혹(迷惑)이란 근본이 없는 것임을 관조하여 알면 허공의 꽃과 같은 삼계(三界)가 바람이 연기를 거둠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은 육진(六塵)이 마치 끓는 물에 녹는 얼음과 같을 것이다.

 

若能如是念念修習 不忘照顧 定慧等持 則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 自然斷除 功行 自然增進 煩惱盡時 生死卽絶

 

만일 이처럼 생각생각에 닦고 익히며, 마음을 관조하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면,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밝게 드러날 것이다. 죄업이 자연히 없어지고, 공덕이 절로 늘어나서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도 끊어질 것이다.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근본 무명, 근본 번뇌)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투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용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快樂)해 근심이 없으리니, 이름하여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一O入九 ~ 一一六三) ‘答 汪內翰‘

先聖云 ’瞥起是病 不續是藥‘ ’不怕念起 唯恐覺遲‘

옛 성인이 이르시되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병이요, 계속되지 않는 것이 약이다’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참고] 『종경록(宗鏡錄)』 제38권 (영명연수 九O四 ~九七五)

禪門中云 不怕念起 唯慮覺遲 又云瞥起是病 不續是藥 以心生卽是罪生時故 是以初心攝念爲先 是入道之階漸 如諸經要集云 攝心一處 便是功德叢林 散慮片時 卽名煩惱羅刹 所以曇光釋子 降猛虎於膝前 螺髻仙人 宿巢禽於頂上

 

선문 가운데 이르되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닫기가 더딜까 염려할 따름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되 “갑자기 일어남은 병이요 계속되지 않음은 약이니, 마음을 낸즉 죄가 생기는 때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처음 마음이 났을 때 생각을 거두어들임이 으뜸이 되나니, 이것이 도에 들어가는 단계점차이다. 마치 제경요집경에서 이르되 “마음을 한곳으로 거두어들임은 공덕의 총림이요, 생각이 조각조각 흩어질 때를 곧 번뇌의 나찰이라고 한다”고 함과 같다.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 원각(圓覺)의 대지(大智)가 밝게 홀로 드러나다.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한 깨달음. 진여(眞如)의 체득. 부처님의 지혜.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에서.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 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하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214.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보조국사어록』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p87, 102 참고.

*상근(上根 위 상/뿌리 근) ; 상근기(上根機).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는 매우 뛰어난 소질과 능력, 또는 그러한 소질과 능력을 지닌 사람.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業,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고락苦樂). 업과(業果)라고도 하며, 업인(業因)과 과보(果報)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Posted by 닥공닥정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13분 24초)

 

[법문] 송담스님(No.122)—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용122)

 

앞으로 이 일요법회 때는 참선법(參禪法)에 대해서 주로 중점을 두고 법회를 운영해 나가겠습니다마는,

혹 참선을 하면 무엇이 나타나고 보이고, 그래가지고 무엇이 뭐 허연 옷을 입은 사람이 획 지내가고, 뭐라고 나를 내 이마를 만져주면서 뭐라고 법문을 해주시고 그런다고 아주 처음 들어와서 아지도 못한 사람한테 자랑을 하고, 자기가 아주 반쯤 도통(道通)한 것처럼 갖다 위세(威勢)를 부리고 그런 사람이, 그런 삿된 소견(所見)을 가진 사람이 가끔 있는 걸로 듣고 있습니다.

 

처음 오신 분은 암만 앉아 봤자 가슴만 답답할 뿐이지 도대체 보이는 것도 없고.

'벌써 내가 이 화두(話頭)를 타고 참선한 지가 벌써 3년이나 되는데 아무것도 알아진 것도 없고 보인 곳이 없습니다. 근데 제가 뭘 화두를 잘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이렇게 문의를 하신 신도님이 계십니다.

 

근데 절대로 이 참선은 옳게 하는 한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잘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른거리고 무엇이 보이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 잘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떡! 처음 들어온 후배들한테 으시대기 위해서 그러한 못된 소리를 지껄이고 으시댄다고서야 그것 참 부끄럽기 한량이 없는 일입니다.

누가 그러한, 40년 50년을 댕겼다 하더라도 그런 소리하걸랑 '아하, 이 분이 공부가 잘못되었구나' 이렇게 탁! 알아차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그런 말을 듣고 '아이구, 나도 그런 것이 좀 빨리 나타났으면' 그렇게 생각한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또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만 되었다 하면은 그 사람은 참선은 참 바로잡기가 어렵습니다. 공부만 하려고 하면 그런 것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래가지고 그 사람은 공부 잘 못하게 되는 거여.

 

그래서 그런 것이 나타나기를 바래지도 말고, 누가 나타난다고 자랑삼아 얘기하면 '음, 당신 공부 잘못했구나'

 

'당신 잘못했다'고 일러줄 필요도 없습니다. 벌써 다 알고 있습니다. 많이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원래 삿된 생각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나타난 것이에요. 일러줘도 소용이 없어요.

일러주면 '아, 그렇습니까. 아 감사합니다' 그래놓고는 나가서 또 고 짓을 하거든요. 그래서 절대로 그러한 말을 곧이듣지도 마세요.

 

공부할 때에 하다 보면,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쉬흔 가지의 그러한 증상이 나타날 수가 있다.

누굴 보면 '아, 저 사람이 지금 시장에 간다고 나와 가지고는 친구 집에 춤추러 가는구나' 사람 떡! 보면 알아. '저 사람은 곗돈 가지고 계 추리러 가는구나' 그것도 척 보면 알아요. '아하! 저 사람은 시집을 두 번 갔구나' 척 보면 알거든.

 

'옴마니반메훔'이나, '관세음보살'이나, 기도 같은 거 또는 참선 하다 보면 그러한 것이 알아지는 수가 있어요. 근데 그것이 잘 공부를 해 갖고 도통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신통력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알았으면...' 한 소원을 가지고 했다 이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것이 나타나는데, 그런 것이 나타나도 이것이 정법(正法)이 아니요, 이것이 깨달음 바른 깨달음이 아니라고 한 것을 애당초에 알고 탁! 용기허게 독하게 그것을 뿌리쳐 버리고서 탁! '이뭣고?'를 올바르게 해 가면 그런 것이 맥을 못 추리고 그냥 없어져 버리는데.

 

아, 그 묘하거든. '내가 어떻게 해서 내가 이런 좋은 것을 알았는가' 속으로 생각하면 재미가 옥실옥실하고.

또 딴 사람한테 그것을 탁! 한마디씩 알아맞출 때 그 사람이 나를 그냥, 아주 그냥 도사로 숭배를 하고, 막 내 말 한마디면 뭐 천하 없는 사람도 무릎을 꿇고 굽신굽신하니까 '이거 보통 좋은 것이 아니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그놈을 살살 눈치봐 가면서 한마디씩 써먹고 도사 노릇을 갖다가 하니까, 모두 그냥 사람들이 그냥 굽신굽신하니까는 거기서 그냥 아주 그냥 행세하기가 썩 좋다 그말이여.

돈도 갖다 주고, 옷도 갖다 주고, 말 한마디면 뭐 지가 장관부인 아니라 천하 없는 놈도 지 앞에는 호령 한마디에 그냥 꿈쩍을 못하거든.

 

그렇게 해가지고 삿된 짓을 하고, 도사 노릇을 하고 있는 그러한 분을 여러분 가운데에 혹 살살 나 몰래 찾아다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은 참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을 하시고.

 

내가 설사 내일 어떻게 될 줄을 모르고, 내가 이 사업이 잘될지 못될지를 모르고, 자기 남편이 잘될지 못될지, 자기의 운수가 어떻게 될지 답답하고 모를망정 모를수록에 화두를 들고 자기의 근본 문제, 참나를 찾기를 위해서 노력을 해야지, 설사 자기 남편이 잘되고 못되고 한 것을 미리 알아봤자 별수가 없습니다.

잘될 때 잘되고, 결국은 아무리 그것을 알고 있더라도 또 망할 때 망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해서 안 망하는 것이 아니에요.

 

망하되 그 망함으로 인해서 자기의 본심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 흥하되 흥함으로 인해서 자기가 흔들림을 받지 아니할 것,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공자님과 같은 성현도 진나라에 들어가서 일주일 동안이라고 하는 기간을 굶주림에 시달림을 받았고,

양허라고 하는 공자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생긴 사람이 있었는데, 그놈이 온갖 못된 짓을 해가지고 관가에 쫓김을 받고 있었는데 마치 공자님 모습이 그 불량한 못된 사람하고 얼굴이 비슷해가지고 그 범인인줄 의심을 받아가지고 큰 곤경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제자가 공자님에 묻기를 "세상에 선생님은 성현이신데, 성현이 세상에 이러한 일을 당할 수가 있습니까? 성현도 이러한 곤란을 당할 수가 있습니까?"

"성현이라고 해서 어찌 곤경을 안 당할 수가 있느냐, 당하되 범부(凡夫)는 이러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마음이 변해가지고는 가누지를 못하는 것이고, 성현은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해도 조끔도 마음에 동요를 받지를 아니하고, 그것이 범부와 성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이 논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러한 삼계(三界)에 대도사(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시고, 성인 가운데에 성현이시지만 때로는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다. 조달(調達)이로부터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당하셨고.

목련존자와 같은 (성현은) 그러한 신통이 자재한 그러한 성현이지만 외도(外道)의 돌팔매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아가지고 결국은 열반(涅槃)에 드신 것입니다.

 

성현이라 해서 어려운 일을 안 당한 것이 아니어요. 자기가 과거에 지은 업(業)에 따라서 받을 것은 다 받습니다.

받되, 범부는 복수를 할 마음을 내고 마음이 독사처럼 되아 가지고 원망을 하고 저주를 하다가 결국은 죽어가지만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 정법에 있어서는 쪼끔도 마음에 동요가 없어.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 곱게 그것을, 피할 수가 있어도 일부러 안 피한 것이여. 피해 봤자 오히려 이자까지 더 불어서 더 고약하게 당한 것인데 뭐하러 그것을 피할 것이냐 말이여.

그래서 그러한 것을 어떻게 미연에 피해 보자고 점쟁이 집으로, 관상 사주쟁이로 쫓아대닐 것이 아니라 자꾸 이 공부를 쌓아서 정법을 닦아서 과거에 지은 업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능력으로 그것을 곱게 받아넘기고 수월하게 받아넘기고,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 그것을 잘 받아넘기고 오히려 웬수가 자기로 인해서 감화를 받도록 이러한 길을 우리는 모색해 나가야 할 걸 생각을 합니다.

 

불법은 방편(方便)이, 팔만사천 가지 방편이 있어서 정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 방편법이 다 버릴 것이 없이 다 좋은 법이 되는 것이고 도(道)에 보탬이 되는 것이고, 정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방편에 떨어지면 오히려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는 것이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는 것이여.

정법을 믿는 사람은 온갖 방편법이 다 조도법(助道法)이요, 도에 도움이 되는 법이 되고, 정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불법을 믿는다고 죽도록 한다는 것이 결국은 사도(邪道)에 떨어지는 원인밖에는 아니 되는 것이에요.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그러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난 것이라 여러분은 반드시 금생에 이 정법을 통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라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하고 꼭 그렇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다음 법회는 사월초파일입니다. 앞으로 18일 간이 남아있습니다마는 서로서로 권고해서 사월초파일,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경축일에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더구나 그날은 공휴일로 지정이 되아 있어서 모두 다 참석하시기가 좋을 것입니다.

 

'가봤자 뭐 앉아서 밥 먹을 데도 없고, 뭐 비빔밥이나 뭐 거지처럼... 그래서 내가 챙피해서 못 간다'

맛있는 음식은 댁에서 잘해서 잡숫고, 절에는 법(法)의 밥을 잡수러 오시는 것입니다.

 

물질로 된 음식은 이 육체에 영양을 공급을 하는 음식이라면, 이 정법(正法)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것입니다.

그날 오셔서 정법 들은 것으로써 배부른 것을 삼으셔야지, 맛있는 대접, 편안하니 앉어서 고급으로 잡숴 영혼과 육체까지 갖다 영양을 공급하려고 하는 생각은 너무 욕심이 지나치신 것입니다.

 

밥을 못 잡수면 물이라도 한 모금 먹고 가도 그것도 고맙게 생각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하고, 그날은 꼭 참석을 하셔서 우리의 스승이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부처님의 탄생을 마음껏 축복하고 그래가지고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을 가뜩 타 가지고 가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1시간13분44초~1시간27분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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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위세(威勢 위엄·세력·힘 위/형세·권세·기세 세) ; ①위엄(威嚴)이 있거나 맹렬한 기세(氣勢). ②사람을 두렵게 하여 복종하게 하는 힘.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쉬흔 가지의 그러한 증상이 나타난다, 나타날 수가 있다' ; 능엄경(楞嚴經) 변마장(辨魔障). 능엄경 조도분(助道分)에 있는, 수행도상에 있어 나타날 수 있는, 오음(五陰 -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 녹아 없어질 때에 나타나는 갖가지 마장(魔障)을 밝혀, 수행자들이 사특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한 부처님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삼계(三界)에 대도사(大導師)' ; 삼계도사(三界導師). 삼계(三界)의 중생을 열반(涅槃)로 인도(引導)하는 위대한 스승[師]. 부처님을 말함.

*사생자부(四生慈父) ; 육도윤회(六途輪廻)하는 세계에서 4가지 방식(四生)으로—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태어나는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대자비(大慈悲)의 아버지. 부처님을 말함.

*조달(調達) ; 제바달다(提婆達多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devadatta의 음사). 번역하여 천열(天熱), 천수(天授), 천여(天與).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출가하여 그의 제자가 됨. 부처님에게 승단을 물려줄 것을 청하여 거절당하자 오백여 명의 비구를 규합하여 승단을 이탈함. 여러 번 부처님을 살해하려다 그 과보로 살아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목건련(目犍連, 目連) ; 산스크리트어 maudgalyāyana의 음사. 대(大)목건련 또는 마하(摩訶)목건련이라고도 한다. 원명 꼴리따.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의 한 사람.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인근 마을의 사리불(舍利弗)와 친하여 어느 날 바라문교의 축제를 구경하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나서 라자가하(王舍城)의 유명한 회의론자 산자야 문하로 들어갔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하던 중에,

사리불이 라자가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를 만나 들은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 그리고 또 그 소멸까지도 /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네”라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사리불한테 듣고는,

사리불과 산자야의 제자 250명과 함께 죽림정사를 방문해 부처님께 귀의했다. 신통력이 뛰어나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일컬음. 사리불과 함께 불교교단의 중심인물이었다.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탁발하는 도중에 외도(外道)들이 던진 돌과 기왓장에 맞아 고통을 겪는 중에, 사리불이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붓다에게 나아가 열반에 들겠다고 말씀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마수촌에서 열반에 들었다.

*'목련존자와 같은 (성현은) 그러한 신통이 자재한 그러한 성현이지만 외도(外道)의 돌팔매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아가지고 결국은 열반(涅槃)에 드신 것입니다' ;

[참고] 『법구경 - 담마파다』 (전재성 역주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p451~454, 『법구경이야기 2』 (무념·응진 역 | 옛길) p 384~390.

목련존자의 과거 업연(業緣) ; 먼 과거 전생에 목련(目連)은 늙은 눈먼 부모를 모시고 나이가 들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고 살고 있었는데, 부모는 그것이 안타까워 성화를 하는 바람에 그는 젊은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에게 시집온 여인은 처음 며칠 동안에는 별 불평없이 눈먼 시부모를 잘 모시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시부모를 보기만 해도 짜증을 내며 같이 살수 없다고 했으나,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도 모른 척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외출하여 일을 보러 간 사이에 그녀는 일부러 진흙과 쌀겨와 쌀죽의 찌꺼기를 집안 여기저기에 흩뜨려 놓았다.

이렇게 해 놓고 돌아온 남편에게 눈먼 당신의 부모가 이렇게 해 놓았다고, 자기는 이제 시부모와 더이상 같이 못 산다고 하며 계속 들볶자 그는 아내의 말만 믿고 부모를 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딴 곳에 사는 친척이 부모님더러 한번 오라고 한다고 말하고는 수레에 태워 숲속에 깊이 들어가서, ‘아버지, 이 고삐 좀 잡고 계세요. 황소가 길을 잘 알고 있어서 가만 놔두어도 잘 갈 겁니다. 여기는 도둑들이 출몰하는 곳이니 저는 내려서 살펴봐야겠습니다.’하고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속에 들어간 그는 마치 도둑들이 공격을 해오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니까, 부모는 놀라면서 ‘아들아, 우리는 살 만큼 살았다. 우리는 신경쓰지 말고 너라도 어서 도망쳐라’고 하였다. 아들은 소리를 외치며 도적들처럼 다가와 부모를 죽여 시체를 숲속에 버린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 악업으로 그는 무수한 세월동안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러고도 악행의 과보가 아직 다하지 않아서 100생 동안 온몸이 가루가 될 정도로 두들겨 맞아죽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과거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들을 모시고 열심히 수행하면서 서원을 세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 때 그는 미래 세상에 고따마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면 자기는 그 부처님 밑에서 으뜸가는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많은 공덕 바라밀을 성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목련존자의 태어남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었고, 결국 외도들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라한을 이룬 성자였기 때문에 중생처럼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완전한 적멸(寂滅)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같이 목련존자의 전생과 그에 따른 과보를 말씀하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법구경 137~140)을 읊으시었다.

“죄가 없고 자신과 남을 해치지 않는 자에게, 폭력를 사용하여 해를 끼치면, 참으로 아주 빠르게 다음 10가지 중 하나에 떨어지리라.

①심한 고통을 당함. ②아주 가난해짐. ③몸의 상해(신체적 절단). ④중대한 질병이나 정신이상을 일으킴. ⑤왕의 노여움을 사 모든 재산을 빼앗김. ⑥재산과 명예를 회복할 수 없는 고소를 당함. ⑦가족이 생명을 잃음. ⑧재산이 천재지변 등으로 파괴됨. ⑨집에 벼락이 내리거나 불에 탐. @그런 뒤 그 어리석은 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리.”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대도정법(大道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4분42초)

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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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5분 25초)

 

[법문] 송담스님(No.124)—1980년(경신년) 하안거 결제 법어(80.05.28)(용124)

 

누차에 걸쳐서 말씀을 한 바지만 이 공부는 이론, 지식, 상식, 이러한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알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 참선(參禪)하는 데는 동원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건 고대로 놔둬 버리고 다못 바보가 되어 가지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생각밖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많이 읽은 책, 많이 들은 법문이 하나도 필요가 없고 다못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분별심으로 따져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거듭 말씀을 드리고.

공부를 하다가 어떠한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어떤 경지가 나타나면 설사 그런 경계(境界)가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던지, 부처님이 나타나서 무엇을 경책을 주시고, 무슨 손으로 이마를 만져 주시고, 또는 무슨 약을 주시고, 이런 것들이 그런 경계가 나타났다 하드라도 그것은 공부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 환상(幻相)으로 나타나는 것이여.

 

환각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참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눈을 뜨고 성성(惺惺)한 마음으로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갈 따름이어야지 '하! 이런 것이 나타난 것 보니까 내가 무슨 큰 도를 통할란가보다. 어디 또 헌가 한번 눈을 감고 한번 찾어보자' 이래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가 나타나면 그것이 신기하고 묘해서 누구한테 자랑을 하고 싶고 그렇게 해 가지고 자기가 아주 공부를 잘한 증거로 그런 것이 나타난 것처럼 새로 들어온 사람한테 자랑을 해 가지고 한목 으시댈라고 그러한 짓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참으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옳게 공부를 해 나가면 그런 것이 나타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평소에 그러한 것이 나타나기를 바래는 마음이 잠깐이라도 있으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가지고 그러한 현상이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벽에다 던진 고무공이 다시 자기에게 튀겨져 오듯이 자기가 그러한 마음속에, 그러한 잠재의식 속에 그러한 것이 조금이라도 그런 그림자가 있을 때 그러한 것이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든지, 주력을 한다던지, 또는 염불한다든지, 참선 한다든지 해서 그런 경지가 나타난 것이 다 그러한 원인으로 해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은 정신을 깨끗이 성성(惺惺)한 정신으로 해 나가고 눈을 절대로 감지 말고 뜨고 하고 그러면은 그런 것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경지는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나타나는 것이어서 언제나 성성한 마음으로 공부를 다져 나가고 눈을 뜨고 하면 그런 것이 여간해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혹 본의 아니게 나타났다 하드라도 그것이 참 경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두시고 그런 것에 대해서 두 번 다시 신경을 쓰지 말고, 없는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다못 화두만을 성성히 들어 나가십시오.

그러한 신기한 경지가 나타나되 신경을 쓰지 아니하고 관심을 거기에 기울이지 아니하면 해로울 것도 말 것도 없지만,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자꾸 그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그런 것을 이리저리 남에게 말해 가지고 쓰여 먹고 하면 결국은 거기에서 외도(外道)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한번 삿된 경지에 떨어져 놓으면 여간해서는 바로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나무나 판때기에 못을 박을 때 처음에 박을 때 정확하게 박어야지, 그 조끔 찌그러지게 박아 놓으면 빼서 다시 그 옆에다 박을라고 박아 봤자 다시 아까 그 구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에 올바르게 해 가야지, 한번 잘못 들어가 놓으면 잘못인 줄 알고 할려고 해도 하다 보면 다시 그 경지가 딱 나타나 버린다 그말이여.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시작할 때 바른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어서 하고, 해 갈 때에도 자주자주 법문(法門)을 듣고서 그 법문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면서 또 법문을 들어야 빗나가지 아니하고 올바르게 닦을 수가 있고 올바르게 닦아야만 바른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47분25초~52분4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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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分別)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 ; 완전히 잠이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정신이 어렴풋한 순간.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Posted by 닥공닥정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 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6분 41초)

 

[법문]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용524)

 

참선(參禪)을 하는데 자꾸 이상스런 어떤 경계(境界)가 나타난다 하면 그 경계가 좋은 경계가 되었건, 무슨 신비한 경계가 되었건 거기에 집착(執着)을 하면 안 돼. 그것은 그대로 놔둬 버리고 정신을 딱! 챙겨 가지고 화두(話頭)를 계속해서 화두를 들어 나가야 돼.

천하 없는 신비하고도 묘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따라가고 거기에 집착하면 그건 공부가 아냐. 그냥 고대로 물리치려고 하지도 말고 그대로 놔둔 채 똑바른 정신으로 화두만 떠억 들고 나가면 계속 그러면 결국은 그 경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여.

 

공부하는 가운데 환상이 나타나거나, 부처님이 나타나거나,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거나 별별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참 경계가 아니야.

 

그리고 참선하고 있으면 집에서 뭔 일 일어나는 것이 나타나서 미리 알게 되고, ‘집에 누가 죽었다’하면 가서 보면 죽어 갖고 있고, ‘누가 올 거다’하면—참선 중에 그것이 그냥 자연히 알아져서, 가서 보면 누가 와 있기도 하고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식(識)이 맑아지니까, 그 맑아진 식의 능력으로 그것이 알아지는 수도 있고 또 어떠한 잡신(雜神)이 이런 것을 와서 일러주기도 하고 그런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식(識)이 맑아져서 알아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도(道)를 통한 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환히 알아지니까 ‘내가 도통(道通)을 했구나’ 그렇게 착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식(識)이 맑아지면 그런 것이 알아지는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도(道), 내가 나를 깨달아서 견성성불(見成成佛) 하는 것과는 영판 길이 다릅니다 그게.

그것은 공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고 거기에 집착하면 정말 사도(邪道)로 빠지게 되는 것이니까 집착하지 말고, 그냥 고대로—그걸 사용하려고 하지도 말고, 좋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없었던 걸로 놔 버려야 합니다.

놔 버리고 자꾸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으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꾸준히 들고 나가면 그런 것이 있다고 해서 해로울 것도 없습니다.

 

화두를 놔 버리고 그런 데에 집착을 하고 그런 데에 빠져 가지고, 그런 거 아는 소리를 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정도(正道) 하고는 멀어져 버리는 것이고, 잘되어 봤자 점쟁이 같은 것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니까,

모처럼 이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그러한, 말해서 초능력이라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은—뭣한 사람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무척 노력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건 정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또 예불(禮佛)을 하러 올라가고 내려가고 또는 밤에 정진할 때, 환히 아주 백 촉짜리 불을 켠 것처럼 환히 모든 것이 비쳐.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데 자기 눈에는 환히 그렇게 광명(光明)이 보이는 수가 있어.

그런 것도 역시 그런 거를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머지않아서 내가 도통하려고 이런가 보다’ 그러한 생각도 하지 말어. 집착하지 아니하면 아무 상관이 없어.

 

그것이 꼭 '나쁜 것이다. 좋은 것이다' 말할 것도 아니고, 문제는 거기에 집착하면 그것이 나쁜 것으로 변하는 거고, 집착하지 않고 놔둬 버리고 올바르게 정진을 해 나가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여. 그렇게 아시기 바라고.

 

그리고 ‘정진하다 보면 코로 향내가 난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향내가 날 수도 있고.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는 그런 것이 없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향내가 정상적으로 나는 향내라면 다른 사람 코에도 다 그 향내가 나야 할 텐데 자기에만 느끼는 것이거든.

 

그러니까 자기가 그동안에 어떻게 어떠한 공부를 해 왔느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해 왔느냐? 과거에 어떠한 업을 지었느냐? 그런 것에 따라서 그렇게 향내가 날 수도 있고, 캄캄한 밤에도 환히 모든 것이 다 보일 수도 있고, 여기서 수백 리 떨어진 데에서 하는 소리를 여기서 들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경계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50가지의 그런 여러 가지 경계에 대해서 소상(昭詳)하니 말씀을 해 놓으신 것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도(道)와는 별개의 것이여.

그런 경계가 나타났을 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우리 정법을 수행해 나가는 사람의 주의해야 할 마음가짐이다.

그런 신기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가 일어나면, 그것에 집착을 했다 하면 거기서부터 정도(正道)에서는 멀어져 버리는 것이다 하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시기를 바라고.(40분27초~47분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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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집착(執着, 執著 잡을 집/붙을 착) ;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 사물이나 도리를 고집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 한다.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 등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물질[色] · 소리[聲] · 향기[香] · 맛[味] · 감촉[觸] · 법(法)의 6가지 외부적인 대상인 6경(六境)을 대할 때 생겨나는 6가지 인식작용이 6식(六識)이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정도(正道) ; ①올바른 도. 올바른 실천법. ②팔정도(八正道)의 약칭.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능엄경(楞嚴經) ; 본이름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10권. 당(唐)의 반자밀제(般刺蜜帝) 번역.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세존과 아난(阿難)의 문답으로 시작하여 깨달음의 본성과 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하고 여래장(如來藏)이 무엇인가를 밝힘.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관음신앙이라 하고 능엄다라니(楞嚴陀羅尼)를 설한 다음, 보살의 수행 단계, 중생이 수행하는 과정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번뇌에 대해 그 원인과 종류를 밝힘.

*능엄경(楞嚴經) 변마장(辨魔障) ; 능엄경 조도분(助道分)에 있는, 수행도상에 있어 나타날 수 있는, 오음(五陰 -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 녹아 없어질 때에 나타나는 갖가지 마장(魔障)을 밝혀, 수행자들이 사특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한 부처님 가르침.

*소상(昭祥)하다 ; (이유나 설명이)자세하고 분명하다.

*불가사의(不可思議) ;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 또는 가르침을 뜻하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상태를 일컫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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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 이치(理致)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 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11분 11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 하안거 결제  백일기도 입재.(용240)
 
처음에는 앉는 자세를 배우고  호흡하는 법도 배우고 그래가지고 화두(話頭) 드는 법을 배워서  가면, 처음에는 곧잘 그런대로 되어가서 이렇게 되어가면  되겠구나
그렇게 해서 앉는데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기는 허지만 별로 졸음도  오고, 생각은  생각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화두만 자꾸 들고 나가고,
그대로 가면 이거  달만  내가 무슨 공부에 대해서 기초를 잡을  있겠구나. 이런 식으로 해서 3년만 하면 내가 틀림없이 견성(見性)  거다 이런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대들었는데.
 
과연 처음에는 졸음도  오고 생각만  일어났다 꺼졌다 는데, 나중에  달을  가도 별로 공부가 처음 시작할 때보다 무엇이  나아진  같지 않고,
 달을 해도처음에는 졸음은  왔었는데  달쯤 허니까 졸음이  퍼일어나고, 졸음에 빠졌다가 졸음에서 겨우 어떻게 정신차려서 졸음이 깰만 하면 그때는  망상(妄想) 퍼일어나고,망상을 실컷 하다가 보면은 나중에는  졸음이 오고.
그래서 졸음과 망상이 번갈라 가면서 일어나 가지고 도대체 공부가 잘된 것 같지를 않고.
 
나중에는 울화통(鬱火통) 터질라 그러 가슴이 답답하고,  시간이 대여섯 시간처럼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지고, 가만히 시계를 보면은 앞으로 10분만 지내면 이제 방선(放禪) 하겠다하는데  10분이 1시간보다도  지루하고 길게 느껴진다.
이럴   답답할  일어나서 밖에 가서 포행(布行)  하고 바람도 쐬면 좋겠는데, 5분이나 10 남겨 놓고 자발없이 일어날 수도 없고, 이렇게 해서  ,  , 한 철이 지내갑니다.
 
그런데  답답허고 지루하고 그때  공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때가 참으로 공부해 나아가는데 중요한 고비다하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셔야 합니다.
공부가  걸음 나아갈려면 그러헌 답답허고 견디기 어려울 그런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시간이 지루허고, 그런 고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애기를 길러  경험이 있으시면 아시겠지만, 갓난애기를 길러 보면 무럭무럭   먹고  크다가 설사병이 나기도 하고 어디 병이 나기도 하고 그런데,  병을 앓고 나면 살은 빠지지만 그전에 아니 하던 새로운 재주를 부리게 됩니다.
재롱을 피우게 되기도 하고,  이상한 귀여운 짓을 하게 되고,  말을 그동안에 한마디도 못하던 애기가 무슨 말도 한마디씩 허기도 허고 그러는데.
병치레하고 나면  크거든.   가량  크면서, 살은 빠지면서 키는 크고 그러면서 재롱은 늘고 그러는 것을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던지 사업을  때나, 학문을 하거나  이런 참선을  때에도  고비 올라서려고  때에는 반드시 그러헌 진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답답하고 재미가 없고 공부가 허기 싫어지기도 하고 그러헌 고비를 만났을 , 조금도 그것을 짜증을 내거나 내가  공부가  될려고 () 두터워서  공부 못할 징조인가 보다 이런 생각을 갖지를 말고,
 
「이건 공부를 허다 보면  계단 올라설려고  때에 이런 증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깊이 명심을 하고,
그러한 경계(境界) 나타나더라도 오히려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허면서, 짜증이나 또는 물러서려는 그런 생각을 갖지 말고서, 오히려 좋은 징조라고 하는 것을 알고서 고비를  지혜롭게 넘겨야 하는 것입니다.
 고비를 넘기고 나면 한결 앉기도 수월하고 공부허기도 수월해지는 것을 느끼게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수월하게  들리고 화두가  들린다 해서  좋아하는 마음을 내기가 쉬운데  좋아하는 마음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지어가면 우리 공부허는 사람의 주변에는 항시 마군(魔軍)이가 와서 육근문두(六根門頭)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마군이(마구니)가 와서 기다리고 있느냐?’하면 공부를 해서 () 이루게 되면 마군이가  자리가 영토가 좁아지는 것입니다.
 
나라도 법도(法度) 있어서 잘해 나가면 도둑이 발붙일 곳이 없어지듯이, 나라가 법이 문란해지고 경찰이나 군인이나 이런 힘이 모다 분열이 되어가지고 힘이 타락되어 가지고 힘이 없어지면, 곳곳에 깡패가 득실거리고 도둑이 일어나고 그래가지고 일반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운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다스려지고 모다 법률에 기강이 서고 그러면 도둑이나 깡패나 모다 사기꾼들이 발붙일 곳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도둑이나 깡패나 그런 못된 사람들은 나라가 질서가 잡히는 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군이들도 역시, 공부해 나가는데 있어서 마군이들도  수행인이 공부를 열심히 허면 그래가지고 그이가 () 통하게 되면 자기네 발붙일 곳이 없기 때문에, 항시 주변에서 지키고 있다가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틈을 타서 침입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눈으로도 들어오고, 귀로도 들어오고, 코나 입으로도 들어오고, 몸뚱이로도 들어오고, 생각을 통해서도 들어와서,  육근문두에 항시 마군이가 틈을 엿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은   생각 어떻게 먹느냐?   생각 마군이가 들어오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파트나 주택가에  틈을 타서 강도나 절도가 들어오는 거와 마찬가지로 집안 문단속을  하고, 집안을 잘 거시기하면 그러헌 도둑이 엿보지를 못하겠지만, 도둑은 항시 그런  나오기를이모저모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은 들어오고.
 주인이  단속을 해도 영리한 도둑은 일부러  틈을 맨들어 가지고 갖은 수단을 부려 가지고 틈을 내도록 한눈을 팔도록 맨들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들어오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닦는 사람에게는  점을 명심을 하고, 어떠한 경계를 만나더라도  경계에 속지를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군이가 들어올 때에, 마군이가 나를 유혹할 때에는 언제라도 나의 뜻에 맞는 내가 좋아하는 그러한 탈을 쓰고 나에게 접근을  온다고 하는 사실.
사기꾼이 어떠한 사람을 사기를  때에는 흉악한 그러헌 얼굴을 가지고 나타나지 아니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써 나에게 접근을  오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면은 돈벌이가 잘된다고 유혹을 하고, 그이가 () 좋아하면 그런 것을 가지고 와서 유혹을 하고, 명예나 권리를 좋아하면 명예나 권리 그런 것을 미끼로  가지고 그것을 잘해준다고 이렇게  가지고 접근을  오는 것입니다.
 
우리 공부해 나아가는 데에도 반드시 그와 같다고 허는 것을 명심을 하고, 그러헌 경계에 내가 현혹되지 않도록 좋은 것을 보아도 거기에서 화두를 들고, 더군다나  뜻에 맞지 않는 것을 보고는 더욱  화두를 들고서 공부를  나가야 허는 것입니다.(10분35초~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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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울화통(鬱火통) ; [주로 치밀다 터지다’, ‘터뜨리다 등과 함께 쓰여]몹시 답답하거나 분한 마음이 쌓이고 쌓인 . ‘울화(鬱火)’ 강조하여 이르는 말이다.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자발없다 ; (언행이)가볍고 참을성이 없다.
*() ; (산스크리트어 : karma카르마)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선악(善惡)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 과보(果報).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단전호흡 ; 분류 참선(자세, 호흡)’ 참고.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마구니(마군 魔軍)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육근문두(六根門頭) ; 육근(六根 : 眼耳鼻舌身意)  . 육근과의 경계.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법도(法度 법 법/법도 도) ; 법칙(法則)과 제도(制度). 법규(法規)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규칙이나 의례를 가리키는 말이다.
*() ; ①인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 존재의 총칭. ②육체. ③집착 또는 색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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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 . 줄여서 ().  감각기관[]  인식작용[]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 이치(理致)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 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등을 예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10분 20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59)—병인년 하안거 결제 법어(86.04.17)(세등59)

 

노종평처험(路從平處險)하고  인향정중망(人向靜中忙)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멱화화란득(覓火和爛得)하고  담천대월귀(擔泉帶月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노종평처험(路從平處險)하고  인향정중망(人向靜中忙)이다.

길은 평평한 곳으로부터 험악해지고, 사람은 고요한 곳을 향해서 바빠지더라. 평평한, 평탄한 곳이 있기 때문에 험악한 험난한 길이 있지, 본래 평탄한 길이 없었다면 험악한 길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그말이여.

나차운 데가 있으니까 높은 데가 있고, 높은 데가 있으니까  나차운 데가 있는 것이지, 본래부터서 전부가 높다면 구태여 험(險)하다고  것이 없어.

 

평탄한 평지가 있기 때문에, 평지를 걸어 가다가 길이 험악해지니까 !  길이 험악해졌구나하고 느끼는 것이지, 평탄할 것도 없고 본래  높은 고지에서만 있다면은 어디가 험악하다는 소리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요한 가운데에 있다가, 고요한 데에 집착해 가지고 고요한 데에 처해 있기 때문에 바빠지고 시끄럽고 그런 것이지, 본래 고요한 데에 있지 아니하고, 고요한 줄을 모르고 살았다면 구태여 시끄럽고 바쁘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처음부터서 고생을 하고  사람은 구태여 고생이다, 고생스럽다’한 것을 느끼지 않지만, 처음에 호강을 하고 살던 사람이 조금 형세가 어려워지면  곤란한 것을 배(倍)나 느끼고  곤란한 것을 견디기가 심히 어려운 법이고.

 

공부도 처음부터서 시끄러운 속에서 공부를 익히고, 생활하는 속에서 공부를 익힌 사람은  주변이 시끄럽고 일을 하고 복잡한 환경을 만나더라도, 공부가 그것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것을 느끼지를 않는 것입니다.

밤낮 고요한 데에만 집착해 가지고 고요한 데에서만 공부를 익힌 사람은 조금 누가 발걸음 소리만 나고,  열었다 닫었다 하는 소리만 나고, 옆에서 무슨 말하는 소리 또는  지내가는 소리, 비행기 다니는 소리, 이런 소리만  나도 화두(話頭)가 달아나 버리고 신경질이 나면서 공부가 안된다고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평지라고 평탄한 것만을 좋아하고, 고요한 것만을 좋아해서 그런 데에서만 생활을 하고, 그런 속에서만 공부를 익힌 사람은 그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공부를 하기가 어려운 거여.

화초도 밤낮 온실에서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습도와 적당한 광선만을 쬐면서 자란 화초는 밖에다 내다 놓면 조금 햇빛이 따가우면은 시들어버리고, 조금 바람이 세고 그러면은 견디지를 못하고 얼어죽고 이러는 것입니다.

 

공부라는 것이  고요한 데서만 하라는 것이 아니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黙動靜) 간에 어떠한 경계 속에서도 흔들림을 받지 아니하고, 희로애락과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떠한 경계(境界)를 만나더라도 그러한 경계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그러한 경계에 장애를 받지 아니하고,

조용한 데를 만나면 조용한 대로 좋고, 시끄러운 데를 만나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변화무쌍한 그러한 복잡한 경계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성성(惺惺)하고, 이렇게 공부가 되어 가도록 우리는 공부를 익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멱화화란득(覓火和爛得)이요  담천대월귀(擔泉帶月歸).

불을 찾음에 데기를 쉽고, 불을 찾아서 불을 가까이하면은 옷을 태우거나 살을 데거나, 불을 가까이하면  경우가 많고,

담천대월귀(擔泉帶月歸). 물을, 샘을 짊어지면 달을 띠고 돌아가. 물을 떠 가지고 가면은 달이  물에 비추니까 달도 따라온다 그말이여.

 

제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불을 가까이하고 항상  속에서 불을 가까이하게 되면은 옷을 태우거나 살을 데거나 까딱하면 타죽기도 하고 그런 것이고,

물을 가까이하면은 항상  있는 곳에는 달이 비치기 마련이니까  가까이 있으면은 달도 거기에 따라 있는 것이다.

 

‘불’이라는  무엇인가? 탐진치 삼독심(三毒心), 오욕락(五欲樂) 이런 것들이 모다 불과 같은 것이어서 그런 것을 가까이하면 반드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는 구렁텅이에 빠지기가 쉬운 것이고,

 

물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윤택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씻어서 깨끗이 하는 것이니까 선지식(善知識), 좋은 도반(道伴), 그리고 법문(法門), 그리고 항상 염불을 하던지 참선을 하던지,

우리 참선(參禪)하는 대중은 항상 선지식과 도반을 가까이하고, 청정도량을 여의지 아니하고, 대중처(大衆處)를 여의지 아니하고, 그리고 항상 화두를 들고 수행을 하면 달이 거기에 따라온다’는 것은 깨달음이 내게 돌아온다’ 그말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승단(僧團) 제도를 맨들어서 발심(發心)한 사람이 출가해 가지고 좋은 도반들과 함께 도를 닦도록 하신 그런 제도를 만드신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처음~1026)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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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路從平處險  人向靜中忙’ ; 卍新纂續藏經 제 71책 《요당유일선사어록(了堂惟一禪師語錄)》 권2 참고. 大正藏 《철옹화상어록(徹翁和尙語錄)》 상권 참고.

*(게송) ‘覓火和爛得  擔泉帶月歸’ ; 大正藏 제 47책 《허당화상어록(虛堂和尙語錄)》 1권 참고.

*나찹다 ; ‘낮다’의 사투리.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

*() ; 자기의 뜻에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 해치는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 ; 인과(因果)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樂,五欲,五慾)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소리,향기,,감촉(色聲香味觸)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 죽어서 간다는  가지 괴로운 세계.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 마음의 . 선우(善友).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 수행하는 . 불법(佛法) 닦으면서 사귄 .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진리에 이르는 .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대중처(大衆處) ; 대중처소(大衆處所). 많은 스님, 또는 사부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도량) 말한다.

*승단(僧團) ; 승가(僧伽). (산스크리트)(팔리) saṃgha(상가)에서 유래하였다. (화합중(和合衆)이라 번역.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 화합하고 있는 불교 교단을 뜻한다. 보통은 출가자의 집단을 가르키지만, 넓게는 재가(在家) 신도도 포함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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