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무위법(유위법)2025. 1. 24. 06:52

무위법(전강선사 No.108)—(게송)浮雲富貴非留意~ | 무위법이란, 내 마음에 있느니라. 심득(心得)을, 내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 내 마음을 깨닫는 참선법 | ‘이뭣고?’가 화두 중에는 제일 근본 | ‘이뭣고?’ 하나 깨달아 버리면 그게 무위법, 영원한 법이다. 생사가 영원히 없다.


*무위법(無爲法) ; (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dharma) 무위법은 무위의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원래 무위 혹은 무위법은 열반(涅槃)의 다른 명칭.

*무위(無爲) ; ①(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 팔리어: asavkhata) 무위(無爲)는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 없는 것으로 유위의 대(對)가 되며, 조작되지 않은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 즉 생멸변화를 떠난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②온갖 분별이 끊어진 마음 상태. 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마음 상태.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 상태.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의 삼독(三毒)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


무위법이라 하는 것은 ‘함이 없는 법’인데 ‘한정이 없는 법’인데, 한정이 없는 법이라 하는 것은 어디 가서 있냐?
유위법은 내 마음 밖에 있다마는—모도 하늘이나 비비상천 같은 데나, 내 마음 저 밖에 가서 있느니라마는. 무위법이란, 함이 없는 법이라는 것은 내 마음에 있느니라. 내 마음! 마음을 얻어야, 심득(心得)을 해야 한다. 내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내 마음을 깨닫는 법은 뭐고?
밥 먹고 옷 입고, 가고 오고 일체처에 그 뭣이 하는가? 응? 그 순전히 내가 하지 않는가! 내 몸뚱이 요까짓 것이 하는가? 몸뚱이 요놈이 내가 시켜서—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내가 시켜서 하지, 그놈이 그걸 하는가? 그러니 내가 나를 깨달아 얻는 것이여.

‘이뭣고?’ 하나 떡! 깨달아 버리면 그게 무위법이여. 한정이 없는 법이여. 영원한 법이다. 생사가 영원히 없고 인생이라는 문제도 없다.

 

(13분 40초)


[법문] 전강선사(No.108)—이뭣고 화두법, 월봉외도, 선요, 자경(임자72.01.09.새벽) (전108)

부운부귀비유의(浮雲富貴非留意)허고  와각공명기염정(蝸角功名豈染情)고
나무~아미타불~
춘일쾌청춘수족(春日快晴春睡足)이다  와청산조백반성(臥聽山鳥百般聲)고
나무~아미타불~

부운부귀비유의(浮雲富貴非留意)다. 부귀(富貴)라 하는 것이 좋기는 좋다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나와서 그 부자 되고 부자가 될 것 같으면 거기에는 귀(貴)가 따른다. 부자 되고 귀하게 처억 그 참, 대과(大科) 큰 벼슬을 해 가지고는 그저 천만인이 앙시(仰視)하고 좋기는 좋다마는 거기에 그만 그 한번 떨어지면은 도문(道門)과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호귀(豪貴) 부귀(富貴)에는 득도난(得道難)이다. 도 닦기가 어려워. 그 부귀 복 받느라고 도저히 못혀. 그런데 우리 부처님 같은 참 용맹, 그 큰 대(大) 그러헌 부귀를 가지시고도 그걸 썩 내번지고 나오셔서 도를 닦았다.

와각공명기염정(蝸角功名豈染情)이냐. 또 그 부귀라는 것이 그게 잠깐 있다가 마는 건데, 인생 일생이라도 그녀러 것 얼마 된가? 잠깐 그저 부귀라고 붙어 있지마는 그 와각(蝸角)이다. 달팽이 뿔때기 같은 것이다.
달팽이란 놈이 뿔때기 뿌욱 나오면 두 뿔때기가 아주 뭐 이놈을 들입대 내둘르고 야단치지마는, 건들면 쏙 들어가 버리고 없거든. 그렇게 허망하다 그말이지.

공명(功名)도 그런 것이다. 아무리 천하 공명을 다 한다 한들 다한 때가 있으니, 없어지는 때가 있으니 그것은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그걸 유위법(有爲法)이라 햐. 잠깐 있다 없어지는 것을 유의법이라 햐.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법을 무위법(無爲法)이라 하고. ‘한정(限定)이 없는 법’이라 한다 그말이여.

그 유위법이라 하는 것은 부귀나 공명이나 그 다음에 이 세상에 별별 색상을 얻어서 상(相)으로 모도 얻고, 모양으로 모도 얻고 아무리 좋은 걸 다 얻어도 그 법은 유위법이다 그말이여.
함이 있는[有爲], 한정이 있는 법이니라. 한정(限定)이 있는 법이기 때문에 그것 다해 버리면 그놈 한정 다 지나 버리면 도로 마찬가지. 처음이나 끝이나 마찬가지.

무위법이라 하는 것은 ‘함이 없는 법’인데 ‘한정이 없는 법’인데, 한정이 없는 법이라 하는 것은 어디 가서 있냐?
유위법은 내 마음 밖에 있다마는—모도 하늘이나 비비상천 같은 데나, 내 마음 저 밖에 가서 있느니라마는. 무위법이란, 함이 없는 법이라는 것은 내 마음에 있느니라. 내 마음! 마음을 얻어야, 심득(心得)을 해야 한다. 내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내 마음을 깨닫는 법은 뭐고?
밥 먹고 옷 입고, 가고 오고 일체처에 그 뭣이 하는가? 응? 그 순전히 내가 하지 않는가!
내 몸뚱이 요까짓 것이 하는가? 몸뚱이 요놈이 내가 시켜서—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내가 시켜서 하지, 그놈이 그걸 하는가? 그러니 내가 나를 깨달아 얻는 것이여.

『아무개야.』 『예.』 그놈을 깨달아 얻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걸 참선법(參禪法)이라 햐. 세상에 이 참선법, 뭐 내가 모든 것을 내가 하는데, 내가 하는 놈을 찾는다 그말이여. 그게 안되아?
고봉 스님 말씀이나 우리 부처님, 저 모두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이 ‘콩인지 팥인지 알면은 한다’고 했어. 숙맥(菽麥)도 모르면은 그 화두들 줄, 화두를 할 줄 모르니까 안되지마는.

『이?』 『이?』해 봐. 『이?』
『이?』해 놓고는 『이? 한 놈이 뭐냐?』 그말이여. 『이뭣고?』

『이?』  아! 『이? 한 놈이 뭐여?』 곧 의심을 짊어지고 들어가네. 『이?』 그 찾는 놈을 짊어지고 들어가. 『이?』 하고 『뭣고?』  『이?』 아! 또 『이? 한 놈이 뭣고?』
잠에 거꾸러지지 말고 망상에... 응, 그놈 『이? 뭣고?』 아! 이것 못혀 세상에. 아무리 똥멍청이리라도 이건 할 거다 그말이여. 『이? 뭣고?』

아! 세상에 ‘이뭣고?’를 ‘알 수 없고 답답하다 모른다’ 알 수 없고 답답하고 모른다는 생각을 붙일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뭣고?’만, 다만 ‘이뭣고?’만 하면은 ‘이뭣고?’가 ‘알 수 없는 놈’이 의심(疑心)인데. 아! 그놈만 할찌니 그놈이 옳은 놈인데 왜 ‘답답하다 모른다’ 그려. 무엇을 알라고 ‘답답하다 모른다’ 그려.
모르는 그놈이 툭! 터지면은 견성(見性)인데. 인제 그놈이 터질 때가 있는데. 그놈이 아무때나 아무때나 터지나? 또 허고 또 허고, 또 허고 또 헌다. 무엇을 할 바냐?

우리가 세상에 이 몸뚱이 받아 가지고 나와서 이 몸뚱이 끌고 댕기는 주인공 찾는데. 아! 내가 나 찾는데. 뭐가 거가 도무지 무슨 뭐 멀고 가깝고, 무슨 뭐 답답하고, 무슨 모르고 알고 할 게 있는가?

『이뭣고?』하면 알 수 없는 놈 하나 푹 나온다. 『이뭣고?』 또 『이뭣고?』하면 또 알 수 없는 놈 하나뿐.
알 수 없는 그놈 때문에 다른 망념이 길어나는 곳도 없지마는, 망념이 풀 길어나데끼 길어난 게 없어. 자꾸 『이뭣고?』를 해야사—다른 일체 망념이 본래 없는 것이지마는 그놈이 퍼 일어나 싼다 그말이여—자취 없이 일어나는 못된 번뇌 망상이 거가서 붙들 못혀. 『이뭣고?』, 『이뭣고?』다.

‘이뭣고?’가 이것이 제일 화두(話頭) 중에는 근본인 것이여.
‘만법(萬法)이 귀일(歸一)인데, 일만 법이 하나로 돌아갔는데 일귀하처(一歸何處)오? 하나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그것이 내나 ‘이뭣고?’뿐이여. 그것도 ‘이뭣고?’가 주장이여.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뭘라고 기드란허니 ‘일만 법이 하나로 돌아갔는데 하나는 어디로 갔는고?’ 야단스럽게 찾을 게 있는가? 『이뭣고?』 참 단순하고 간단하고 ‘이뭣고?’뿐이다.

‘이뭣고?’ 하나 떡! 깨달아 버리면 그게 무위법이여. 한정이 없는 법이여. 영원한 법이다. 생사가 영원히 없고 인생이라는 문제도 없다 거가. 무슨 놈의 인생이냐? 거가서.

세상에 이런 일을, 내가 세상에 나와서 이러한 기가 막힌 중대한 참선법 이러한 일을, 내 일을 두고 응, 어따가 뜻을 헐까 보냐. 이 송(頌)이 시방 그것이여.
부운부귀(浮雲富貴)도 뜻한 법이 없어. 부운부귀 그까짓 것 해 봤던들 유위법 칠팔십 년 그저 허다 말 거, 공명(功名)도 달팽이 뿔따귀 같은 고까진 것 거다가서 뜻을 모두 적시냐? 내 뜻을 갖다 모두 물들리냐? 허연 비단 옷감에다가서 시커먼 물들이데끼 물을 들이고 있느냐.

『내』 찾아야 하겠다. 『내』 하나 찾을 때 그 무위법, 『나』 하나 터억 찾아 들어갈 때, 먹고살 것이 없나? 더 먹고살 거 더 있는 법이여. 제석천왕(帝釋天王)도 그 도 닦는 사람만 모두 보호해 줄라고 천하 보물을 다 가지고 있다 그말이여.

이러한 도학자(道學者)가 참 되었구나. 그렇게 믿기 어렵고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이다마는.
그렇게 가깝고도 곧 그만 그저 내 눈동자 속에 들어 있고, 내 코구녁 속에 들어 있고, 내 혈근 속에 들어 있고, 아! 이놈 뭐 여가(여기) 있는데 그렇게 찾기 어렵구나. 그렇게 믿기 어렵고.
이놈을 믿지 못하면은 유위법, 상견(相見)법에 처백혀 가지고는 죄만 퍼짓지, 도리 없다. 이 법이여.


춘일쾌청춘수족(春日快晴春睡足)이다  와청산조백반성(臥聽山鳥百般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아! 이것 하나 깨달아 버리면, 나 하나 내가 찾아 번지면 뭔 일이 있냔 말이여? 다시, 응.
부귀면 뭣 하며 공명은 뭣 할 것이냐? 부귀 같은 것은 인자 마음대로 내가 천 번이라도 할 수 있고 만 번이라도 할 수 있고—천하에 저 밖에 있는 보물, 천하에 보물 그것이 아니라, 내 속에 터억 그 내 보물을 내가 찾아 놨으니 부귀만 해? 공명은 뭣이여? 전체가 공명이고 전체가 부귀지.

춘일쾌청(春日快晴)헌디 춘수족(春睡足)이다. 춘일은 봄날은 쾌청한데, 봄날 쾌청이란 것은 지금 내 자리, 본분(本分) 내가 나 깨달은 경계에다 비유한 것이거든.
춘일은 쾌청헌디 춘수(春睡)가 족(足)하구나. 봄 잠이 족하다. 잠이나 잘라면 잘까, 뭐 할 일이 있나 말이여? 터억 깨달아 버렸어.

와청산조백반성(臥聽山鳥百般聲)이다. 누워서 산새 백 가지 우는 소리나 아! 그놈이 듣는디 그놈이 모도 무비(無比) 시(是)로구나. 다 그놈도 새소리까장이라도 어디 도망을 갈 곳이 없다. 전부 내 자가용이요. 내가 마음대로 그 묘코 막 쓸 것이다.(처음~13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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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부운부귀비유의~’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著) ‘朴上舍草堂’ 게송 참고.
*대과(大科) ; 예전에, 과거(科擧)의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를 소과(小科)에 상대하여 이르던 말.
*천만인(千萬人) ; 셀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많은 사람.
*앙시(仰視)하다 ; 존경하여 우러러보다.
*도문(道門) ; ①도에 이르는 문. 부처님의 가르침. ②불문(佛門). 부처님의 법문(法門). 불교(佛敎)라는 문.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서는 문. 깨달음으로 들어서는 문.
*호귀득도난(豪貴得道難) ; 호걸스럽고 귀하면 도(道)를 얻기 어렵다.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12장. [후한(後漢) 가섭마등(迦葉摩騰)ㆍ법란(法蘭) 공역]
佛言 天下有五難 貧窮布施難 豪貴學道難 制命不死難 得睹佛經難 生値佛世難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하에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다. 가난하고 궁핍하면 보시(布施)하기 어렵고, 호걸스럽고 귀하면 도(道)를 배우기 어렵고, 수명을 맘대로 하고 싶지만 죽지 않기 어렵고, 부처님 경전을 보게 되기 어렵고, 살아서 부처님의 세상을 만나기 어렵다”
*호귀(豪貴 호걸·귀인 호/귀할 귀) ; 권세가 있고 귀함.
*내번지다 ; ‘내버리다’의 사투리.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그녀러 ; ‘그따위(그러한 부류의.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의 사투리.
*들입대 ; 들입다. 세차게 마구.
*유위법(有爲法) ; 위(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고, 유위(有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을 가지는 것.
①여러 인연(因緣)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또는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 및 존재(사물).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현상계의 일체의 사물. 인과 관계 위에 있는 존재.
②온갖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형성된 현상.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의식 작용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차별 현상. 인식 주관의 망념으로 조작한 차별 현상.

유위법(有爲法)은 인연에 의하여 화합생성된 것이므로 생(生)도 있고 멸(滅)도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하고, 무위법(無爲法)은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절대적인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무위법(無爲法) ; (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dharma) 무위법은 무위의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원래 무위 혹은 무위법은 열반(涅槃)의 다른 명칭.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숙맥(菽麥 콩 숙/보리 맥) ; ①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의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나온 말로 사리 분별을 못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이르는 말. ②콩과 보리.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조주는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 장삼을 하나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僧問 萬法歸一一歸何所 師云 老僧在靑州作得一領布衫重七斤 『전등록(傳燈錄)』 제10권. 조주선사.
僧問趙州 '萬法歸一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作一領布衫重七斤' 『벽암록(碧巖錄)』 제45칙.

*송(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물들이데끼 ; 물들이듯이.
*-데끼 ;  ‘ -듯이’의 사투리.
*제석천왕(帝釋天王) ;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 신[天神]들의 제왕[帝]인 샤크라〔釋〕라는 뜻. 제석(帝釋), 석제(釋帝), 제석천(帝釋天), 제석왕(帝釋王), 제석태자(帝釋太子), 천주(天主)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 등으로 음역하고 줄여서 석제환인(釋提桓因, 釋帝桓因) · 제석천(帝釋天)이라 한다.
『법화현찬(法華玄贊)』에서는 “범어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에서 ‘석가’는 성(姓)씨이며 ‘능(能)이라 한역하고, ‘제바’는 ‘천(天)’이라 한역하며, ‘인달라’는 ‘제(帝)’라 한역하니 곧 ‘능천제(能天帝)’라 한다” 뜻으로 보면 ‘석가(능히) 제바(하늘의) 인달라(제왕)’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이 있는데 그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과 32신(神)을 통솔하면서 불법(佛法)과 불제자를 보호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그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그 성(城)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
제석천은 본래 인도 성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 중 벼락을 신격화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서는 범천(梵天)과 함께 호법선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나타나 법회를 수호하고 사바세계 인간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여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동일시하여 숭배하였다.
<잡아함경>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와구(臥具)·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신중탱화(神衆幀畵)에 한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도학자(道學者) ; 도(道)를 닦는 사람. 수행자(修行者).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상견(相見) ; 상(相)이 있다는 견해.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번지다 ; 보조 동사 ‘버리다(앞 동사의 동작이 이미 끝났음을 나타내는 말)’의 사투리.
*‘천하에 보물 그것이 아니라, 내 속에 터억 그 내 보물을 내가 찾아 놨으니 부귀만 해? 공명은 뭣이여? 전체가 공명이고 전체가 부귀지’ ; 밖에서 찾지 말라.
*밖에서 찾지 말라 ;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열심히만 참선 정진해 가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니까,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루 속에 든 자라, 자기가 아무리 종일토록 버르적거려도 구덕 속에 들어있는 자라는 거기에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아무개야!” “예”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놈을 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거든.(송담스님 No.577—19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❶] 『선문촬요(禪門撮要)』 (경허선사 編) ‘달마대사 관심론(達摩大師觀心論)’에서.
慧可問曰  若有人 志求佛道 當修何法 最爲省要 師答曰 唯觀心一法 摠攝諸行 名爲省要

혜가(慧可)가 여쭈었다. “불도(佛道)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겠습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였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하나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問曰 云何一法 摠攝諸行 師答曰 心者 萬法之根本也  一切諸法 唯心所生  若能了心 萬行俱備 猶如大樹 所有枝條 及諸花菓 皆悉因根 栽樹者 存根而始生 伐樹者 去根而必死 若了心修道則 省功而易成 若不了心而修道 乃費功而無益 故知一切善惡 皆由自心 心外別求 終無是處

“어찌하여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고 하십니까?”
“마음이란 온갖 법의 근본이요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만행(萬行)을 다 갖추게 된다. 이를테면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 등이 모두 뿌리로 말미암아 있으니, 나무를 가꾸려면 뿌리를 북돋우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베려면 뿌리를 없애야 반드시 죽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을 알아서 도를 닦으면 노력은 적게 들어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만약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모든 선과 악은 다 자기 마음에서 생겼으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끝내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참고 ❷]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 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참고 ❸]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 지눌 스님)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 離此心外 無佛可成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 하여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幻化, 幻과 같은 變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부터 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법(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 있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님이다.

 


[참고 ❹] 송담스님(No.577)—19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96.11.03)(13분10초)
홍엽난봉추색리(紅葉亂峰秋色裏)에  석양소우단교변(夕陽疎雨斷橋邊)이로구나
나무~아마타불~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한데  나개친증도지두(那箇親曾到地頭)오
나무~아미타불~

홍엽난봉추색리(紅葉亂峰秋色裏)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지러운 봉다리, 높고 낮은 봉다리와 계곡에 가을색이 깊었다 그 말이여. 요새 한창 오대산이나 설악산, 내장산이나 또는 백양산, 도처 방방곡곡에 산과 들이 모다 단풍이 져서 한참 아름다움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석양소우단교변(夕陽疎雨斷橋邊)이다, 석양에 성근 비는 끊어진 다리 가로구나.

우리 삼천리강산(三千里江山)에 가을 경치의 한 장면을 읊은 것이지만, 우리는 무량겁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면서 지금 이 시간,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몇천만 년을 그렇게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것이 바로 나이의 많고 적은 것을 물을 것도 없이, 우리는 저 역사가 없는 과거에, 그 때를 따질 수가 없는 무량겁 전으로부터 오늘까지 왔으니, 우리는 어지러운 봉다리에 단풍이 진 가을철을 맞이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 말이여.

가을철은 나무와 풀들이 모다 단풍이 들어서 잠간동안 울긋불긋 아름답다고는 하지마는 며칠 안 지나가면 이 단풍이 시들어서 볼쌍사납게 다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파리는 단풍이 졌지만 모든 나무나 풀, 곡식들은 다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단풍이 지는 것입니다.
봄에는 그 잎이 푸릇푸릇하고, 여름에는 사뭇 녹음(綠陰)이 그렇게 깊은 것도 가을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 태양으로부터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런 푸른 빛깔이 필요해서인 것입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수분과 태양에서 받아들인 기운을 그 이파리가 그놈을 배합을 해서 그 열매를 맺는데 온 힘을 다 거기다 쏟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매를 맺게 한 다음에는 그 이파리는 시들어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량겁(無量劫)을 육도법계(六道法界)를 돌고 돌면서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습니까? 우리는 무슨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 무량 다겁생래(多劫生來)를 오늘날까지 걸어왔습니까? 다행히 우리는 금생에 불법을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서, 권리를 위해서, 재산을 위해서,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때로는 목숨까지 거기다 바치면서 그런 것을 얻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다 얻어지기도 어렵고, 설사 얻었다 해도 영원히 자기 것이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위가 온통 그러한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는 불법을 믿고, 참나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것만하더라도 우리는 참 다행스런 일이고,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생각할수록 복된 그러한 처지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다행스럽고 복된 처지이기는 하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럭저럭 지낼 수는 없습니다. 기왕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을진대는 정말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서 기어코 이 몸으로, 이 육신으로, 이 육신 받았을 금생에 이 문제를 해결을 해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남이 내 열매를 맺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자기의 열매를 자기가 해야 합니다. 나무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뭇가지의 열매는 그 나뭇가지에서 되도록 해야지, 다른 나뭇가지가 와서 자기를 잘 맺게 해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열심히만 해 가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니까,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루 속에 든 자라, 자기가 아무리 종일토록 버르적거려도 구덕 속에 들어있는 자라는 거기에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아무개야!”
“예”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놈을 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거든.

‘이 무슨 물건이냐?’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을 하면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자꾸 챙기고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우리는 경계(境界)를 당하면 깜박깜박 잊어버리거든. 잊어버린 줄 알면 또 챙기면 그만이여.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이거든.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냄새 맡을 때, 혀로 맛볼 때, 일체처 일체시에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거기에 있는 것을 바로 거기서 챙기는 것이니까 이것은 사실 어렵다고 생각할 것도 없고, 하나도 복잡하다고 생각할 것이 없어.

‘이뭣고?’ ‘이뭣고?’
잠깐 놓쳤다고 해서 어디 가는 것이 아닌 거여. 거기에 있는 것이지.

귀가 먹지 않았으니까 소리도 들릴  것이고, 눈이 멀지 않았으니까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보일 것이여. 보여도 그냥 고대로 놔두고 자기는 ‘이뭣고?’거든. 그저 수저로 밥을 떠 넣고 저분으로 반찬을 집어서 입에 넣어서 저작(咀嚼)을 하면서 생각은 ‘이뭣고?’거든.
그래서 옛날 사람은 시끄럽고 복잡한 장바닥에 가 가지고, 일부로 거기 가서 정진을 한 그러한 분들도 있었다 그 말이여. 그러한 속에서도 시끄러운 소리가 방해가 되지 않는가? 그 속에서 공부가 되는가 안 되는가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이거든.(15분26초~28분32초)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 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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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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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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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