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이뭣고? 화두2018. 11. 7. 00:13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18분 23초)

 

[법문] 송담스님(No.030)—77년 입춘법회(77.02.04)(용030)

 

무엇이 화두(話頭)냐?

 

우리는 하루 종일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고 음식을 먹고, 손으로는 만지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몸뚱이로는 춥고 더운 것을 알고 그럽니다.

그런데 눈이 본다고 하면은 금방 죽은 사람도 눈이 있지마는 아직 몸이 뜨뜻하고 눈이 아직 멀쩡한데 보이지 않습니다. 또 귀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듣는 것이 아니라, 금방 죽은 사람은 귀가 분명히 아직 세포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은 듣지를 못합니다.

 

또 눈으로 무엇을 골똘히 보고 있을 때에는 옆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무슨 말을 해도 잘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또는 귀로 무엇을 아주 골똘히 무엇을 듣고 있을 때에는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면은 귀로 듣는 놈이나, 눈으로 보는 놈이나, 코로 냄새를 맡은 놈이나 전부가 다, 눈 자체가 보는 것이 아니고, 귀 자체가 듣는 것이 아니고, 입 자체가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놈, 듣는 놈, 맛보는 놈, 만지는 놈, 걸어가는 놈은 별도로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맛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입을 통해서 말을 할 뿐이지, 입 자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눈 자체가 보는 것이 아니고, 귀 자체가 듣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들어서 볼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들을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성낼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웃을 줄도 알며, 밥 먹을 줄도 아는가?

여러분들은 ‘그것은 마음일 것이다’ 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마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들어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지 ‘그 마음 자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인(古人)들이 편의상 ‘마음’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 놓았을 뿐이지, 그 자체는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이다, 성품이다, 자성이다’ 여러 가지 이름은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에 지내지 못해!

사람도 ‘갑돌이다, 갑순이다’ 이름은 뭐라고도 붙일 수가 있습니다. 또 ‘갑돌이’를 ‘을돌이’라고 이름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뭐라고 붙였거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 자체!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름만 알아 가지고는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관절 무엇을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였는가? 대관절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것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생겼는가?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보는 사람이 없고, 확인을 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대관절 무엇인가?

 

그놈이 들어서 볼 줄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뭘 좋은 걸 주면은 기뻐할 줄도 알고, 아프면은 신음할 줄도 알고, 슬퍼한 일을 당하면 울 줄도 알고, 여기 앉아서도 서울 일을 생각하기도 하고, 미국을 생각할 수도 있고, 지금 오늘 이 시간에 10년 전, 30년 전, 40년 전 일도 생각할라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대관절 그놈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이기에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無窮無盡)한 것인가?

 

우리가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아오는 동안 그놈의 명령에 의해서, 그놈의 조종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지금 이 몸뚱이를 끌고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금생뿐만이 아니라 전생(前生), 저 전생,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그놈이 여기서 태어났다, 저기서 태어났다 하면서 사람도 되었다 짐승도 되었다, 천상에도 갔다 지옥에도 갔다, 부자도 되었다 가난뱅이도 되었다, 선량한 사람도 되었다 악한 사람도 되었다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 자리에까지 오신 것입니다.

 

그놈을 잠시도 떠나서는 우리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도 떠날 수 없이 같이 살아오면서 왜 우리는 그놈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을까요?

 

그것을 분명히 우리가 보아 깨닫는다고 하면은 그것이 부처님인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붓다(Buddha)’라고 한 말을 중국에서 ‘불타(佛陀)’라고 음사(音寫)를 해서, 그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오면서 ‘부텨, 부텨’로 되었다가 지금은 ‘부처’ 이렇게 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라고 하는 것은 인도 말로 ‘붓다(Buddha)’가 삼천 년을 내려오면서 ‘부처’로 그렇게 전해 변해졌다.

 

그러면 인도 말로 ‘붓다’라 하는 말은 무엇이냐? ‘깨달음’ 또는 ‘깨달은 분’ 이러한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 가르침’ ‘깨닫는 길’ 이렇게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요새 학자들이 연구해서 어떠한 이치를 궁리해 가지고 알아 들어가고 자꾸 따져 들어가 가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해서 어떠한 결론이 내려지면 그것을 사물에다가 적용을 시켜보고, 그래 가지고 잘 적용이 되면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으로써 성립을 시키고 해서 이렇게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는 그래서 아는 것,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사량분별심을 떠나서—사량분별심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과 아는 것과의 차이는 사량분별을 사용을 해서 얻어지는 결론은 ‘아는 것’이고 지식이고, 사량분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생사 없는 이치를 보는 것을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굉장히 우리의 중생으로서는 전연(全然) 인연이 없는 아주 저 어디 극락세계나 가야 그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고, 우리로부터서 먼 데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겠지마는,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데 있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심을 가지고 알려고 하기 때문에 깨달음은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을 놓을 때 깨달음은 저절로 우리에게 딱! 붙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하는 데 있어서 몸을 바르게 가지고, 그다음에 호흡을 고르게 한 다음에는 화두를 생각을 해라.

 

화두를 생각하는 것은 사량분별이 아니냐?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화두를 의심(疑心)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 엄격히 말하면 생각이 아닌 것은 아니지마는, 이리저리 자꾸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서 따져 들어간다고 하면은 그것은 분명 사량(思量)이지마는.

따져 들어가지 말고, 무조건하고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놈이 무엇인고?’ 이렇게만 의심을 하신다고 하면은 이것은 사량이면서 사량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하는 데는 제일 해롭고 금지된 것이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버릇, 이것을 제일 엄격히 단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이놈이 뭣고?’

 

성이 날 때도 ‘이뭣고?’ 무엇이 들어서 이렇게 성낼 줄을 아느냐?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도 ‘이뭣고?’

 

우리의 생각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어떠헌 생각, 또 그놈을 바로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한다면은—일어나는 생각이 번져 가지고 삼재가 되고, 사백사병(四百四病)이 되는데,

일어나는 생각이 퍼지기 전에 그놈으로 ‘이뭣고?’ 이렇게 한다고 하면은 일어나는 그 생각은 나로 하여금 생사해탈(生死解脫)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법문(法門)이요, 발판이요, 나의 호위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말씀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듣고, 이 자리에서부터 이 공부를 충실히—생각, 생각 헛되이 날려보내지 말고, 일어나는 생각을 바로 되돌려서 ‘이뭣고?’

 

첫째, 몸을 단정히 하고, 깊은 그리고 조용한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차 타고 가면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앉아서도 하고, 밥 먹으면서도 하고, 똥 누면서도 하고, 소지(掃地)하면서도 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뭣고?’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한다” 그러한 말씀은 아직 참선을 할 줄 모르는 말씀이여.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바로 그놈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그놈으로 ‘이뭣고?’를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쥐를 잡을려면 고양이로 쥐를 보통 잡습니다마는, 그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쥐를 잡는 데에는 쥐를 동원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쥐를 잡아 가지고 항아리 속에다 넣어 놓고는 소고기도 조금—며칠을 굶긴 다음에 소고기를 사다가 조금씩 떼어서 먹입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조금씩 먹여서 안 죽을 만큼씩만 먹여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하되 계속 배가 고프게 만든 다음에 다른 쥐를 한 마리를 잡아서 넣어 줍니다. 그러면은 그놈이 어떻게 배가 고프던지, 그 쥐를 기어코 잡어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얼마 있다 또 쥐 한 마리를 넣어 줍니다. 또 쥐를 잡어먹습니다. 그래서 쥐가 쥐 잡어먹는데 아주 선수가 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완전히 쥐를 잘 잡어먹게 될 때에 그 쥐를 풀어서 놔두면은 쥐구멍으로 자유자재로 다니면서 모든 쥐를 다 잡어먹게 되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뭄뚱이가 커서 쥐구멍에는 들어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구멍 속에 들어가 버린 뒤에는 쥐가 나오기 전에는 잡어먹을 수가 없지마는, 이 쥐는 마음대로 쥐구멍으로 드나들면서 잡어먹는데.

고양이 소리만 나도 쥐는 벌써 알고서 다시는 나오지를 않지마는, 쥐가 다니는 데에는 아무도 그 쥐를 경계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나오게 됩니다. 나오는 쪽쪽 잡어먹고, 안 나오면 구녁으로 들어가서 잡어먹고 해서, 한 쥐가 모든 쥐를 다 소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농담같은 얘기지마는, 화두라고 하는 것은 모든 쥐를 잡어먹는 쥐라고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화두도 분명 우리의 중생의 사리상량으로 처음에 시작을 하지마는, 옳은 방법으로 자꾸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화두를 들고 화두를 참구하고 해 나가다 보면은 사리상량이 사리상량 아닌 사리상량으로 되어 가지고,

일체 번뇌망상, 무량겁으로 지어온 모든 업(業)을 이놈이 다 주워 삼키게 되고, 다 주워 삼킨 다음에 배가 툭! 터져서 죽어 나동그라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화두 참선법은 달마 스님이 천삼백여 년 전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셔 가지고 달마 스님 밑에 2조(二祖) 혜가 대사,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선사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뭣고?’라고 하는 화두를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하택 신회선사에게 ‘이 무슨 물건이냐?’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괴우고 아래로는 땅을 괴우며,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하고 물었습니다.

하택 신회선사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요, 하택 저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六祖)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앞으로 공부를 많이 해 가지고 크게 되어 보았자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되겠다, 강사밖에는 못되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룻날 남악 회양선사가 어려서 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남악 회양선사는 육조 스님이 물으신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 데 대해서 콱! 맥혀 가지고 뭐라고 말씀을 해야 좋을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길로 “대관절 무슨 물건이냐? 무슨 물건이냐?” 콱! 맥힌 상태에서 8년이 지내갔습니다. 그때는 화두라고 하는 그런 말도 없었을 때입니다.

대관절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 데 대해서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꽉 맥혀 가지고 8년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참선은 콱! 맥혀야만 되는 것입니다. 알 수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머리가 영리해 가지고 퍼뜩하면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배우고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맺으려고 하고 알아 들어가고, 이것은 참선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한다고 해도 이것은 생사해탈과는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생사(生死)의 업(業)을 조장하는 데에 그치는 것입니다.(26분37초~45분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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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무궁무진(無窮無盡 없을 무/다할 궁/없을 무/다할 진) ; ①수량이 끝도 없고 다함도 없을 정도로 많다. ②끝도 없고 다함도 없음.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전연(全然 온전할 전/그러할 연) ; 주로 부정어와 함께 쓰여 ‘조금도’, ‘아주’, ‘완전히’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그 내용의 정도를 가장 높은 수준으로 강조할 때 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사백사병(四百四病) ; 인체에 일어나는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사대(四大)—지(地)·수(水)·화(火)·풍(風)의 부조화로 각 요소에 대해서 101가지 병이 있다고 한다.

지(地)와 화(火)에서 일어나는 열병(熱病)이 202가지, 수(水)와 풍(風)에서 일어나는 냉병(冷病)이 202가지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경전에 그들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일정하지 않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소지(掃地 쓸 소/땅 지) ; ①마당(땅)을 쓺.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 ②청소.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

 

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육조(六祖) : (638 ~ 713)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스물 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麈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麈埃)」라고 지었다。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18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칠십육 세로써 입적하였다。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지해종사(知解宗師)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知解]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를 말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