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염주2020. 11. 9. 16:15

염주(No.454)—수행하는데 염지방편(念持方便)으로, 염불이 끊어지지 않고, 화두가 끊어지지 않는 방편으로 염주를 사용 | ‘이뭣고?’ 했을 때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하는 것이지, ‘이뭣고’ 글자가 문제가 아니다.

 

*염주(念珠) ; 산스크리트어 pāsaka mālā. 작은 구슬을 여러 개 실에다 꿰어 둥글게 만들어 불보살 명호 · 다라니 · 예배나 염송의 횟수 등을 헤아리는데 사용하는 법구(法具).

염주의 재료는 금 · 은 · 철 · 적동(赤銅) · 수정(水精) · 유리(瑠璃) · 침수단향(沈水檀香) · 진주 · 산호(珊瑚) · 목환자(木槵子) · 연자(連子) · 보리자(菩提子) 등을 사용한다. 염주 구슬의 개수는 108개 · 54개 · 27개 · 14개 등으로 만드나, 경전에 따라 차이가 있다.

 

(8분 13초)

 

[법문] 송담스님(No.454)—1991년 하안거해제 법어(91.08.24) (용454)

 

오늘 백중날을 기해서 몇 분의 이름을 밝히지 아니한 불자(佛子)들이 서로 정성을 모여서 이런 염주(念珠), 중국에서 참 어렵게 도입한 중국 향나무로 만든 염주입니다. 이 염주를 여러분에게 공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 염주는 염불(念佛)을 하는데 쓰이는 것인데, ‘염지방편(念持方便)’ 염지(念持)—생각 염(念)자, 가질 지(持)자, ‘염지’하는 염지는 억념(億念)하는 거야. 항상 생각하고 ‘가질 지(持)’자는 받아 갖는 거야.

 

잠시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 한 생각 '나무아미타불' 부르고 또 그 다음에 딴 망념이 거기에 끼어 들어갈 기회를 주지 않고 다시 '나무아미타불'해서 이렇게 불러 가지고, 마지막 죽을 때 숨 딱 끊어질 때까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해서,

그렇게 하면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숨 딱 끊어지자마자 아미타불(阿彌陀佛)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오셔서 영접을 하러 오신다 그말이여.

 

그런 데에 쓰이는 것이 바로 이 염주여. 긴 것은 천염(千念)도 있지마는 보통 108염주고, 반으로 잘라서 54 또 그놈을 반으로 잘라서 27개 이렇게 하고,

또 굵은 것은 10개씩을 꿰매서 이렇게 따그락 따그락 이렇게 돌리는데 그렇게 큰 것은 보통 노스님네나 갖지, 젊은 스님네나 보살님네들이 따그락 따그락 하면 볼쌍 사나워서 못쓰는 거여. 보통 돌리면 백팔염주를 돌리시는데, 그리고 간편하게는 팔에다가 하는 그런 단주(短珠)도 있고 그렇죠.

 

그런데 그러한 염불할 때 쓰이는 것이지만 중국에 송나라 이후로는 염불선(念佛禪)이라 해서 한편으로는 염불도 하고 또 참선도 하고 두 가지를 겸해서 닦는 그러한 수행법이 번져서, 우리나라도 참선 하면서도 기도도 하고, 참선 하면서도 아침으로는 경(經)도 읽고, 참선 하면서도 또 염불도 하고 그러한 스님네도 있고 또 대부분의 보살님네들도 그렇게 하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나만을 가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으나 사나 ‘이뭣고?’ 하나만을 가지고 한 그런 스님네는 구태여 염주 돌릴 필요도 없고 그렇지마는,

또 염불 안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참선하면서도—입으로나 마음으로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전혀 부르지 않고 ‘이뭣고?’ 화두만 들면서도—따그락 따그락 이렇게 단주도 돌리고 염주를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방(禪房)에 앉아서 따그락 따그락 하면 옆에 분들한테 방해가 되어서 도저히 안 됩니다. 안 되고,

혼자 행각(行脚)을 하거나, 혼자 토굴(土窟)에 있거나, 혼자 있을 때는 화두를 들고 ‘이뭣고?’하면서도 염주를 돌려도 괜찮은데, 혹 잘못 알아가지고 염주를 돌리면서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 이래서는 안 돼.

 

‘이뭣고?’ 한번 부른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보다도 수승하다 그러니까, 오늘부터서 나도 하루에 십만 번씩을 ‘이뭣고’를 하리라.

‘이뭣고’ ..... ‘이뭣고’가 나중에는 ‘먹고 먹고 먹고’해 가지고 ‘먹고 먹고 먹고’ 나 그런 분을 봤는데, 절대로 참선(參禪)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이뭣고?’ 한 번 들어가지고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을 탁! 관(觀)하는 거야.

‘이뭣고’ 횟수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여. ‘이뭣고?’를 한 번을 하고, 한 번 척 챙겨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을 관하는 거여.

 

관하는데, 혼침(昏沈)이 오고 잠이 올 때에는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미간(眉間)에다 탁 놓고 관하는 거여. 그리고 산란심(散亂心)이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할 때에는 그 화두를 단전(丹田)에다가 따악 놓고 관하는 거여.

그래서 따—악 그 의심을 관하는 거,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했을 때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하는 것이지, ‘이뭣고, 이뭣고’ 글자가 문제가 아니거든.

 

그것을 착각을 하시지 말고, 아침에 한 번 든 화두가 없어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고대로 있으면 점심 먹을 때까지 화두 한 번만 들어도 괜찮은 거야.

그러다가 화두가 없어지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오면 그때 ‘이뭣고?’ 한 번 딱! 들고, 의심이 끊어졌을 때 한 번씩 들고 들고 하는 거여.

 

이 염주를 노나 드리는데, 여기서 노나 드리면 혼잡하고 복잡하니까 공양 잡숫고 저기 마당 끝에 나가시면 거기서 이렇게 싸놓고 노나 드릴테니까,

염주를 돌리시되, 돌릴 때마다 108개니까 백팔번뇌(百八煩惱)가 거기서 끊어지고 또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 의단 속에서 이렇게 돌리실 수도 있고 또 염불하실 때 돌릴 수도 있고 이것은 참 다목적이고.

 

항상 이렇게 목에 거시고, 돌리시고 하면은 백팔번뇌가 보리심(菩提心)으로 변하고, 그래서 그러한 수행하는데 염지방편(念持方便)으로, 우리의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항상 염불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화두가 끊어지지 않는 방편으로 이것을 사용하신다면은 이것을 시주(施主)한 그분네들이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고, 모두가 다 이 인연으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을 하면서 오늘 법문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걸 욕심 사납게 2개씩, 3개씩 가져가시려 하지 말고 한 개씩만 질서 있게 다 가지고.. 충분히 많이 준비를 했으니까 한 개씩만, 오늘 오신 분은 어른이나 애기나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다 노나 드리겠습니다.

 

오늘 백중일(百中日)에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는 다 좋은 곳으로 해탈도(解脫道)로 나아가시게 될 것입니다.(64분47초~1시간13분)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고] 『불설목환자경(佛說木槵子經)』 (失譯) (송성수 번역 | 동국역경원)

聞如是 一時佛遊羅閱祇耆闍崛山中 與大比丘衆一千二百五十人俱 菩薩無數 名稱遠聞 天人所敬 時 難國王名波流離 遣使來到佛所 頂禮佛足 白佛言 世尊 我國邊小 頻歲寇賊 五穀勇貴 疾病流行 人民困苦 我恒不得安臥 如來法藏 多悉深廣 我有憂務 不得修行 唯願世尊 特垂慈愍 賜我要法 使我日夜易得修行 未來世中 遠離衆苦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라열기(羅閱祇 : 왕사성)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큰 비구 대중 1,250명과 셀 수 없이 많은 보살과 함께 지내셨는데, 그 명성이 널리 전해져 천상과 인간의 공경을 받았다. 그때 난국(難國)의 왕 파유리(波流離)가 보낸 사신이 부처님께 찾아와 땅에 엎드려 발아래 예배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우리나라는 변방의 소국이라 해마다 도적이 국경을 침범하고, 오곡이 너무도 귀해 질병이 유행하며 인민들이 곤궁한 곳입니다. 제가 이 일로 항상 편하게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여래의 모든 법장(法藏)이 비록 깊고 넓으나, 저는 근심과 일이 많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원하건대 세존께서는 사랑과 연민을 베푸시어 저에게 요긴한 법을 주십시오. 제가 밤낮으로 쉽게 수행할 수 있게 하시고, 오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통을 멀리 여의게 해주십시오.”

 

佛告王言 若欲滅煩惱障 報障者 當貫木槵子一百八 以常自隨 若行若坐若臥 恒當至心無分散意 稱佛陀 達摩 僧伽名 乃過一木槵子 如是漸次度木槵子 若十若二十 若百若千 乃至百千萬 若能滿二十萬遍 身心不亂 無諸諂曲者 捨命得生第三焰天 衣食自然 常安樂行 若復能滿一百萬遍者 當得斷除百八結業 始名背生死流 趣向泥洹 永斷煩惱根 獲無上果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번뇌장(煩惱障)과 보장(報障)을 없애고 싶다면 목환자(木槵子) 108개를 꿰어 항상 스스로 지니라. 다니거나 앉거나 눕거나, 늘 지극한 마음으로 뜻을 분산하지 말고 불타(佛陀)ㆍ달마(達摩)ㆍ승가(僧伽)를 부르며 목환자 한 알씩 돌려라. 이렇게 점차로 목환자를 열 번, 스무 번, 백 번, 천 번, 내지 백천만 번을 돌려라. 만일 20만 번을 채우면 몸과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며 모든 사특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죽어서는 제3 염천(焰天)에 태어나 옷과 음식이 저절로 풍족하고 항상 안락하리라. 백만 번을 채운다면 당연히 108번뇌의 업을 끊어 없애게 될 것이며, 비로소 생사의 흐름을 등졌다고 하거니와 열반[泥洹]으로 나아가 번뇌의 뿌리를 영원히 끊고 위없는 과보를 획득하리라.”

 

*목환자(木槵子) ; 학명 Sapindus mukorossi, Gaertn. 무환자(無患子)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 또는 그 나무의 씨앗을 가리키는 말. 환자(槵子) 목환자(木患子) 무환자(無患子) 등이라고도 한다. 높이는 20미터에 달한다. 씨앗은 염주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여러 재료 중 하나이다. 역시 염주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모감주나무는 동일하게 무환자나무과에 속하기 때문에 같은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나무이다.

『불설목환자경(佛說木槵子經)』에는, 부처님께서는 이 목환자로 만든 염주를 굴리면서 삼보(三寶)를 칭념하면 여러 종류의 좋은 과보를 얻을 수 있고, 마침내는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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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12. (가로판) p117.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니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註解) 阿彌陀佛六字法門이  定出輪㢠之捷徑也라. 心則緣佛境界하야  憶持不忘하고,  口則稱佛名號하야  分明不亂이니,  如是心口相應이  名曰念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의 육자 법문은 바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되 분명하고 일심불난(一心不亂)해야 하니,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이 염불이다.

*염지방편(念持方便) ; 마음이 흐뜨러지지 않도록 생각을 가다듬고, 참뜻을 알기 위해 쓰는 수단과 방법.

*억념(億念 생각하다·기억하다·잊지 않다 억/생각·생각하다·기억하다·외우다·읊다·암송하다 념) ; ①기억함. 마음으로 생각하여 간직함. 계속 생각함. 마음 속에 간직하여 잊지 않음. 마음으로 생각하여 늘 생각해 냄. ②생각을 떠올리다. 생각해내다. 과거를 생각해내는 마음 작용.

③특히 마음속으로 아미타불의 공덕을 계속 생각함. 늘 부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이름을 부름. 늘 아미타불을 외움.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 「나무」는 범어로 namas 또는 namo 인데, 경례(敬禮) • 공경(恭敬) • 순종(順從) • 귀명(歸命) • 귀의(歸依) 같은 여러 뜻이 있고, 「아미타(amita)」는 한량없다는 뜻인데, 여기에는 무량수(無量壽 amitayus)와 무량광(無量光 amitabha)의 뜻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면, 한량없는 목숨과 광명을 지닌 부처님께 경례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염불에는 옅고 깊은 여러 가지가 있어서,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는 21가지의 염불삼매(念佛三昧)를 가르쳤고, 『지도론(智度論)』에는 염불하는 차례를 말하기를, 처음엔 부처님의 이름을 생각하고, 다음으로 부처님의 몸 • 상호(相好) • 신통 • 공덕을 생각하고, 그다음으로 부처님의 오분 법신(五分法身)을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원만한 과덕(果德)을 생각하라 하였다.

또 천태(天台智顗禪師)의 오방편염불문(五方便念佛門)에는 명호를 불러 가서 나는 문[稱名往生門]과, 형상을 생각하여 죄악을 없애는 문[觀相滅罪門]과, 모든 경계가 오직 마음임을 생각하는 문[諸境唯心門]과, 마음과 경계를 함께 떠나는 문[心境俱離門]과, 성품이 두렷이 통하는 문[性起圓通門]의 다섯 가지를 말하였고,

지욱선사(智旭禪師)의 『우익종론(藕益宗論)』에서는 딴 부처를 생각하는 것[念他佛], 제 부처를 생각하는 것[念自佛], 나와 남을 함께 생각하는 것[自他俱念]의 세 가지로 말한 바도 있거니와,

 

가장 쉽게 똑바로 말하자면, 부처님의 참 몸은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無量光] 그것이며,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無量壽] 그것이다. 이것을 「十」으로 또는 「O」으로 표시한다.

가로 그은 「—」은 무한한 공간에 찼다[橫亘十方]는 뜻이고, 내리 긋는 「|」은 무궁한 시간에 뻗침[竪窮三際]을 표시한다. 그리하여 불교의 十은 기독교의 十과 모양도 다르고 뜻도 다르다.

 

그러므로 염불함에는 이 무량한 광명이 끝없이 뻗친 것을 생각하여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을 지어 가지만 나중에는 능소(能所)가 저절로 떨어져서, 생각하는 마음과 보이는 광명이 따로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온갖 생각이 빛 하나로 뭉쳐지고, 마침내는 그 빛까지도 떨어져서 천진한 부처(天眞佛)의 참 몸이 나타나고 성품의 극락세계가 실현되는 것이다.

*망념(妄念) ; 망상(妄想).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 아미타불의 오른편 보처(補處). 산스크리트 Mahasthama-prapta  마하살타마발라발다(摩訶薩馱摩鉢羅鉢跢)라고 음역. ‘대정진(大精進)’ ‘대세지’ 또는 ‘득대세지(得大勢志)’라고도 하며 줄여서 그냥 ‘세지(勢至)’라고도 번역.

아미타불에게 자비문, 지혜문이 있는 가운데서,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문을 나타내고, 대세지는 지혜의 문을 나타낸다. 이 보살의 지혜 광명이 모든 중생에게 비치어 삼도(三途)를 여의고, 위없는 힘을 얻게 하므로 대세지라 한다. 또 발을 디디면 삼천세계와 마군의 궁전이 진동하므로 대세지라 한다.

형상은 정병이 표현된 보관을 썼으며, 염불하는 수행자를 맞을 때에는 항상 합장을 하는 모습을 한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 관세음(觀世音)은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의 번역,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세간(世間)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왼쪽 보처(補處).

또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 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한다. 또 광세음(光世音) · 관세음(觀世音) · 관세자재(觀世自在) ·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쓰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의 주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다.

한국에서는 동해에 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가 관음 도량으로 유명하다.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행각(行脚) : ①수행자가 일정한 주소를 갖지 않고 스승이나 벗을 구하여, 자기의 수행이나 교화를 위해 곳곳을 편력하는 것. ②스승의 슬하(膝下)를 떠나서 선(禪) 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좋은 벗을 구하여, 마치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과 같이 발길 닿는 대로 여러 곳을 편력하는 것. 이것을 행하는 자를 행각승(行脚僧) 또는 운수(雲水)라고 함.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 번 들어가지고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을 탁! 관(觀)하는 거야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딴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백팔번뇌(百八煩惱) ; 중생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마음 작용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리심(菩提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백중(百中)날 ; 음력 칠월 보름날. 석 달간의 하안거(夏安居)를 마치는 날. 하안거를 마친 수행자들에게 공양을 올리어 그 공덕으로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제한 목련존자의 효심을 기원으로 하는, 우리의 선망부모의 영가를 천도하는 법요식을 거행하는 날(우란분회 盂蘭盆會). 백중(百衆) · 백종(百種)이라고도 한다.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 · 고려 시대에는 이날 국가적으로 '우란분회'를 열었으나 조선 시대 이후로 절에서만 여러 가지 음식을 갖추어 재를 올리고, 농가에서는 이날 하루 농번기의 피로를 씻기 위해 머슴을 쉬게 하였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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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