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보시2024. 5. 10. 10:20

보시(No.257)—아육왕의 암마륵 과일 반 조각 보시, 『아육왕경』 반암마륵시승인연품(半菴摩勒施僧因緣品), (게송)今我阿育王~ | 보시는 언제나 바로 그때그때에 해야, 『백유경』 어리석은 사람이 소젖을 모은 비유(愚人集牛乳喩).
도(道)에 들어가는 첫 단계가 욕심을 버리는 것, 보시는 자기 마음을 비우게 하는, 그리고 모든 재앙을 소멸하는 가장 좋은 방법 | 보시를 행하면 죽을 운수도, 어려운 재앙도 막을 수가 있다 | 화두 들고 정진하는 것이야말로 삼재를 소멸하고 예방하는 가장 근원적인 길.


*보시(布施) : [산스크리트어] dāna 음을 따라 단나(檀那) · 다나(柁那) · 단(檀) 등으로 음사(音寫)한다. 물질 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05~106.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 한 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참고 ❷] 『백유경(百喩經)』 제1권. (존자尊者 승가사나僧伽斯那 찬집撰集 | 소제蕭齊 천축삼장天竺三藏 구나비지求那毘地 한역漢譯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2. 어리석은 사람이 소젖을 모은 비유(愚人集牛乳喩)」
昔有愚人將會賓客 欲集牛乳以擬供設 而作是念 我今若豫於日日中犛取牛乳 牛乳漸多卒無安處 或復酢敗 不如卽就牛腹盛之 待臨會時當頓犛取 作是念已 便捉牸牛母子 各繫異處

옛날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장차 손님을 청하여 소의 젖을 모아 대접하려고 자리를 마련하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만약 날마다 미리 소젖을 짜두면 소젖은 점점 많아져 마침내 둘 곳이 없게 될 것이며, 또한 맛도 변해 못쓰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기보다는 소젖을 소 뱃속에 모아두었다가 모임이 있을 때쯤에 한꺼번에 짜내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곧 어미소와 새끼를 따로 매어 두었다.

却後一月 爾乃設會迎置賓客 方牽牛來欲犛取乳 而此牛乳卽乾無有 時爲衆賓或瞋或笑

한 달이 지난 후 잔치를 마련하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소를 끌고 와서 젖을 짜려 하였으나 그 소의 젖은 말라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거기 모인 손님들은 성을 내거나 혹은 비웃었다.

愚人亦爾 欲修布施 方言待我大有之時 然後頓施 未及聚頃 或爲縣官水火盜賊之所侵奪 或卒命終不及時施 彼亦如是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보시(布施)를 하려다가 ‘내게 재물이 많이 쌓이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보시하리라’고 생각하지만, 모으기도 전에 관청이나 수재(水災)나 화재(火災)나  혹은 도적에게 빼앗기거나 또는 갑자기 목숨을 마치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보시할 수 없게 된다. 저들 또한 이와 같다.

 

 

(1) 14분 26초.

 

(2) 10분 43초.

 


[법문] 송담스님(No.257)—1985년 입춘법회(85.02.04) (용257)

(1)------------------

아육왕(阿育王)은 부처님 당시에 어린아이로서 길에서 소꼽장난을 하다가 모래와 흙으로 성(城)을 쌓고 길을 닦고 그러다가 부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부처님께 그 길을 터드리면서 ‘어서 이리 지나가십시오’ 하고 길을 내드렸습니다.
소꼽장난을 하면서 부처님께 길을 닦아 드리는 그 공덕으로, 부처님께서는 ‘앞으로 백년 후에 너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다’ 하고 수기(授記)를 주셨습니다.
전륜성왕은 무력으로써 천하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불법(佛法)으로써 천하를 통일하는 위대한 왕을 갖다가 천자(天子)를 전륜성왕이라 하는데, 전륜성왕도 부처님과 똑같이 32상(三十二相)을 갖추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 아육왕이 과연 부처님 열반하신 뒤, 백년 만에 인도에 태어나서 전 인도를 갖다가 통일을 하고 불법으로써 인도 천지를 다스린 그러한 성군(聖君)이었던 것입니다.
그 아육왕이 국토를 순례하며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네팔(Nepal)에 들렸을 때에 부처님의 탄생지인 그 룸비니(Lumbini) 동산에 높은 돌기둥 탑을 세우고 거기에다가, 「여기는 부처님께서 탄생한 곳이니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어라」하는 그러한 칙어(勅語)를 돌에 새겨 놨습니다. 그 돌기둥 탑과 그러한 그 돌에 기록한 비문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성지 순례로 가셨던 분들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 아육왕(阿育王)은 일생 동안 그렇게 많은 보시를 행하고, 불법을 옹호하고, 불법으로써 부처님 진리로써 천하를 다스렸습니다. 그러자 그 아육왕은 마침내 병을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병을 앓고 눕게 되자 보시하려는 마음이 더욱 높아져 가지고 밤으로 낮으로 황금 뭉탱이를 계원사(鷄園寺)라 하는 절로 갖다가 바쳤습니다. 절을 고치시도록 보내고, 대중공양을 하시라고 보내고, 그저 계속 날이면 날마다 황금을 보내기를 그치지 아니했습니다.

그때에 불법을 잘 믿지 아니한 한 대신이 태자에게 권해 가지고, 그때 태자(太子)는 삼파지(三波地)라고 하는 태자인데, 그 태자에게 권해서 그 황금을 쌓아 둔 창고 문을 굳게 닫고 그 황금을 내가지 못하도록 엄중하게 그 창고 문을 갖다가 지키게 했던 것입니다.
아육왕은 계속해서 그 황금을 갖다 바치라고 했지만, 그 무서운 위력을 가졌던 전륜성왕도 병이 들어 앓아눕게 되자 그 왕의 명령은 시행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때에 왕은 점점 기력은 쇠해져 갔습니다.

왕은 게송을 읊기를,

금아아육왕(今我阿育王)이  무부자재력(無復自在力)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반암마륵(唯半菴摩勒)이  어아득자재(於我得自在)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금아아육왕(今我阿育王)이 무부자재력(無復自在力)이다. 이제 나 아육왕이 아무런 자재력이 없구나. 아무 힘이 없구나.
오직 암마륵(菴摩勒) 반 조각에, 암마륵 과실만이 나에게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손에—암마륵이라고 하는 인도에서 나는 과일인데, 그 암마륵 과일 반 조각 밖에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구나.

이러한 처량한 게송을 읊고서, (아육왕을) 모시고 있는 신하를 시켜서 그 반 조각 암마륵 과일을 계원사로 보내드렸던 것입니다. 계원사 원주 스님은 그 반 조각의 조그마한 암마륵 과일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가지고, 죽을 쑤는데 그것을 섞어 가지고 여러 대중이 고루고루 그것을 공양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인도를 통일해 가지고 날으는 새도 떨어뜨리는 그러한 위대했던 아육왕도 늙어서 병이 드니까 그리고 그 권한이 태자에게로 돌아가니까 아무 힘이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창고에는 산더미 같은 황금이 쌓여 있고, 칠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하더라도 늙고 병들면 이미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시(布施)라 하는 것은 언제나 바로 그때그때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보시,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행하는 보시, 돈이 없어 병을 치료 못하는 그러한 사람에게 보시, 수행하는 스님네에게 보시, 그러한 보시는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자면 부자 대로 언제나 그때그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많이 돈을 벌어서 하리라’ 하면 그때는 자기의 뜻대로 되어지지 아니한 것입니다. 왜 그때그때 하지를 못하고 ‘나중에 많이 벌어서 하리라’ 하는 생각을 내느냐 하면,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의 욕심인 것입니다. (녹음 끊김) ...하기보다는 이 작은 돈을 잘 굴려서 큰돈을 만들어 가지고 나도 잘살고, 그때 여유가 있으면 마음껏 보시를 하리라. 이것은 어리석고 탐심에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것을 해 버리면 뭘 먹고 살며, 장사는 무엇으로 하며, 사업은 무엇으로 하느냐? 그러니 이때에 할 것이 아니라 이것은 우선 먹어야 하고, 장사를 해야 하고,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어 가지고 그때 해도 늦지 아니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갖기 때문에 그때그때 분(分) 따라서 할 수 있는 보시를 뒤로 미루고 못하게 되어서, 씨를 뿌리는 계절을 놓치기 때문에 정당(正當) 수확을 해야 할 가을철에 가서는 거둘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잔치 때 쓰기 위해서 우유를 짜지 아니하고 한 달 내 두었다가 잔칫날 짜려고 보니까 젖이 말라서 별로 많이 나오지 못했다'고 하는 『비유경(譬喩經)』의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젖은 매일매일 짜야 젖이 더욱 더 잘 나오는 것입니다. 짜지 않고 한 달 내 놔두면 젖이 밭아 버리고, 한 달 동안 모인 젖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욕심과 탐심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보시할 줄을 모르고 자꾸 쌓아 모으려고만 할 때에 인정사정없이 남을 해롭게 하게 되고, 남에게 원한을 사게 하는 결과로, 돌아오는 것은 원수와 원수의 결과, 재앙을 끌어드리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31분31초~45분56초)





(2)------------------

육바라밀(六波羅蜜)에 첫째에 보시라고 하는 항목이 있는 것은 도(道)에 들어가는 첫 단계가 욕심을 버리는 것이거든. 보시는 자기 마음을 비우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인 것입니다. 모든 재앙을 소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보시는 재보시(財布施)가 있고, 법보시(法布施)가 있습니다. 재물, 자기에게 있는 금은전보(金銀錢寶)와 의복과 먹을 음식, 그러한 물질로 보시하는 법이 있고, 법을 설해서 법으로 보시하는 법이 있습니다. 또 물질로도 하고 마음으로 보시할 수도 있습니다.
보시의 형태는 크고 작은 것과 유형무형의 여러 가지 의미의 보시가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의 보시도 보시는 자기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업(業)의 종자(種子)를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모든 재앙을 미리 막는 가장 좋은 슬기로운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보시를 통해서 자기를 비우게 하는 그러한 항목이 바로 보살도(菩薩道)의 육바라밀의 첫째 항목에 넣어 놓은 것은 너무너무 부처님께서 설정을 잘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가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그러한 조항이지만 보시(布施)를 첫 꼭대기에다 넣은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 절실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중생은 무엇이던지 탐심과 욕심으로써 자꾸 쌓아 모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깨뜨려 버리고 비움으로써 지혜(智慧)로 나아가는 첫 단계가 되기 때문에 보시는...

부처님이 아무리 안 잡수어도 법당의 부처님이 배고프다고 하신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떡을 갖다놔도 한 덩어리도 잡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마지(摩旨)를 짓고, 공양을 올려도 잡수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보시의 공덕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탐심과 욕심을 비우고, 모든 재앙을 소멸케 하려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방편(方便)인 것입니다.(49분51초)

보시를 행하면 죽을 운수(運數)도 때우는 것이고, 어려운 재앙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시를 하지 아니하고 욕심껏 쌓아 모으다가 그 돈을 한푼도 쓰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된 사람도 적지 않는 것입니다.

늙어서 쓰기 위해서—젊어서는 쓰더라도 또 벌게 되니까 또 쓰고 벌고 그러다가도, 나이가 오십이 넘고 육십이 넘으면 '이제는 내가 돈도 벌 수 없고 이 돈 떨어지면 어디서 돈이 있어서 쓸 것인가, 돈이 떨어지면 이제는 나는 물이 말라버리는 고기와 같아서 꼼짝을 못할 것이다' 이래 가지고 쌓으고 또 쌓고 해 가지고 영판 한번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모르고 쓰지를 않고 있다가, 죽은 뒤에 보면 돈 뭉텅이가 10번, 20번 쌓고 쌓은 뭉텅이가 나오거든.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구들장을 파고 구들장 밑에다가 항아리를 묻고 돈을 갖다가 몇백만 원을 묻어 놓고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죽었는데, 그 구들장 위에 방석을 놔 놨는데 방석이 뜰썩뜰썩해서 보니까 큰 구렁이가—그 죽은 사람이 업이 되어 가지고, 그 업으로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 자기가 묻어놨던 그 돈 항아리에 애착을 끊지를 못해 가지고, 그 방석 밑에 또아리를 틀고 혀를 널름널름, 이것은 몇십여 년 전에 어떤 절에서 있었던 실화인 것입니다.
죽은 뒤에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 그 영단(靈壇), 영위(靈位) 그 위패 모신 상(床)에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며, 그 구렁이를 집어 버리니까 그 구렁이를 따라가니까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는 그런 설화도 있습니다마는.

삼재(三災)를 면하려면 부작(符作)을 갖다가 붙이고, 무슨 액막이를 하고 그러기보다는 삼재를 든 분은 보시를 행하는 것, 그리고 방생(放生)을 하고 보시를 하는 것, 이런 것이 차라리 훌륭한 지혜로운 방편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방편이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근원에서 해결 짓는 방법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으며, 복과 죄가 없는 것이다’ 하는 정법의 말씀을 믿고서 한 생각 돌이켜서 좋은 일을 당해도 화두(話頭)를 들고, 궂은일을 당해도 화두를 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話頭)를 들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는 것이야말로 삼재를 소멸하고 예방하는 가장 근원적인 길이라고 감히 단언(斷言)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입춘 법회가 끝나면 점심공양도 하시지 않고 어디를 가시는지 급히 문밖으로 도망치듯이 빠져나갈 분들이 상당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틀림없이 한 장에 5만 원, 10만 원, 20만 원하는 부작을 사러 점쟁이나 무당집으로 쫓아가실 것입니다.
부작 한 장으로 재앙을 막고, 자기가 지은 업장(業障)을 소멸할 수 있다면 우리 용화사에서도 부작은 몇만 장이라도 찍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을 위안하는 데는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것으로써 삼재가 면해질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지은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받게 됩니다. 기왕 받을 바에는 우리는 받으면서 새로운 원수를 맺을 것이 아니라, 받으면서 오히려 자기의 과거 죄를 진정으로 참회(懺悔)하고, 받으면서 오히려 위대한 스승을 만나고 불보살을 만난 그러한 기분으로 그것을 받아서 소화를 시킨다면, 깨끗이 받아서 해결 짓고서 새로운 광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받으면서 새로운 원수를 또 이중 삼중으로 맺어 나가는 그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것이 너무너무 다행한 인연이라고 생각을 합니다.(45분56초~56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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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육왕(阿育王) ; 산스크리트어 aśoka 팔리어 asoka의 음사. 무우(無憂)라고 번역.
찬드라굽타(candragupta)가 마가다국(magadha國) 난다(nanda)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마우리야(maurya) 왕조의 제3대 왕으로 인도 남단부를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하였다. 재위 기원전 270년경~230년경.

즉위 8년에 인도 북부 동해안의 뱅골만에 위치한—오늘날 오릿사주의 대부분—깔링가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살육, 사망, 이주의 대 참상을 매우 괴로워하고 비통하게 여겨, ‘무력의 정복’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비폭력과 정의에 기초한 ‘다르마(法)의 정복’으로 전환하였다.
아육왕의 주선으로 도읍지인 화씨성(華氏城)의 아육승가람(阿育僧伽藍)에서 천여 명의 비구들이 제3차 결집(結集)을 행하여, 경(經) · 율(律) · 논(論)의 삼장(三藏)을 정리하였다.

불교에 귀의하여 수많은 탑과 사원을 세우고, 수많은 사절들을 인도 전역에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하였다. 특히, 자신의 아들 마힌다(mahinda)와 딸 상가밋타(saṅghamittā)를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그곳에 불교를 전하였다.
왕은 자신의 뜻과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암벽(바위)에 또는 석주(石柱 돌기둥)에 칙령(勅令)을 새겨 세웠다. 왕이 죽은 후, 마우리야 왕조는 서서히 분열되어 기원전 180년경에 멸망하였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 • 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德)을 공덕이라고 한다.
*전륜성왕(轉輪聖王) ; 산스크리트어 cakravarti-rāja 인도 신화에서, 칠보(七寶)를 갖추고 정법(正法)으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있는 대륙을 다스리는 왕. 32상(相: 신체의 특징) · 7보(寶)를 갖추고, 무력에 의하지 않고 정법에 의해 세계를 정복·지배한다고 한다.

하늘로부터 받은 윤보(輪寶)를 굴려 모든 장애를 물리친다고 함. 윤보에는 금·은·동·철의 네 가지가 있는데, 금륜보(金輪寶)를 지닌 금륜왕(金輪王)은 네 대륙을 다스리고, 은륜보(銀輪寶)를 지닌 은륜왕(銀輪王)은 세 대륙을, 동륜보(銅輪寶)를 지닌 동륜왕(銅輪王)은 두 대륙을, 철륜보(鐵輪寶)를 지닌 철륜왕(鐵輪王)은 한 대륙을 다스린다고 함.
전통적으로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阿育王](BC 3세기)을 세속의 전륜성왕이라고도 말한다.
*수기(授記) ; 부처님이 불법에 귀의한 중생에게 어느 시기, 어느 국토에서 어떤 이름의 부처로 태어날 것이며, 그 수명은 얼마나 될 것이라는 것 등을 낱낱이 제시하면서, 미래세의 언젠가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을 말한다. 또는 부처님이 중생에게 기별(記別)을 주는 것을 말한다.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천자(天子) ; 천제(天帝)의 아들, 즉 하늘의 뜻을 받아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군주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이르는 말. 우리나라에서는 임금 또는 왕(王)이라고 하였다.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룸비니(Lumbinī) ;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ārtha), 즉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탄생한 곳으로 네팔 남동부 테라이(Terai) 지방, 바이라와(Bhairawa)의 서방에 있다. 석가족(샤카족)의 도읍 카필라바스투의 유적이 약 16km 서쪽에 있다.

이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는 19세게 말까지만 해도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중, 1896년 독일의 고고학자 앨로이스 휘러(Alois Anton Führer)가 오늘날의 네팔 테라이 지역에 있는 옛 사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울창한 숲에 버려져 있는 아쇼카왕 석주(石柱)를 발견했다.

석주에 새겨진 내용은, ‘자비로운 삐야다시 왕(아쇼카 왕의 다른 이름)은 왕위에 오른지 20년에 이곳을 방문하고 참배하였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Śākyamuni Buddha)께서 이곳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주위에 돌담을 쌓고 돌기둥(石柱)을 세우게 했다.
부처님께서 여기 룸비니 마을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이 마을에 세금을 면제하였고, 단지 생산의 8분의 1만  내도록 하였다.’ 이로써 부처님의 탄생지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칙어(勅語 칙서勅書·조서詔書 칙/말씀 어) ; 임금이 몸소 이름. 또는 그런 말씀이나 그것을 적은 포고문(布告文).
*아육왕(阿育王)은 일생 동안 그렇게 많은 보시를 행하고, 불법을 옹호하고, 불법으로써 부처님 진리로써 천하를 다스렸습니다 ; 
[참고] 아쇼카왕은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약 2백년 후, 인도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왕으로서 기원전 269년 경에 즉위하여 36년간 인도 남단부를 제외한 전 인도를 통치하였는데,
즉위 8년(B.C. 262)에 인도 북부 동해안의 뱅골만에 위치한—오늘날 오릿사주의 대부분—깔링가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살육, 사망, 이주의 대 참상을 매우 괴로워하고 비통하게 여겨, 그가 ‘무력의 정복’을 버리고 ‘다르마(法)의 정복’으로 전환하는 이정표가 된다.

아쇼카의 '다르마(法)' 개념은 직접적인 불교의 특징적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핵심은 윤리적인 바른 삶 ①바른 인간관계 : 웃어른 · 이웃에 대한 존경, 수행자에 관대함, 노예나 종의 바른 처우, 모든 교단의 화합과 비난 금지. ②계행과 바른 삶 : 살생금지, 동물 희생제 금지, 적게 소비. ③다르마의 수행과 백성의 복지 :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 7가지의 경전을 듣고 명상하도록 함, 보시와 복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결실을 통해 모든 사람이 현세와 내세의 모든 이익과 행복을 얻기 바라는 부처님의 ‘다르마(法)’를 근본으로 한다.

이 다르마의 내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암벽(바위)에 또는 석주(石柱 돌기둥)에 칙령(勅令)을 새겨 세웠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쇼카 왕이 즉위 20년이 되던 해, B.C. 250년 무렵에 룸비니를 방문하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룸비니 석주(石柱)이다.

*보시(布施) : [산스크리트어] dāna 음을 따라 단나(檀那) · 다나(柁那) · 단(檀) 등으로 음사(音寫)한다. 물질 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05~106.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 한 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대중공양(大衆供養) ; ①수행자에게 음식을 올리는 일. ②대중이 함께 식사하는 일.
*(게송) ‘금아아육왕(今我阿育王)~’ ; 『아육왕경(阿育王經)』  제5권. 「第五 半菴摩勒施 僧因緣品(암마륵 반 개를 스님에게 보시한 인연품)」 (양梁 부남扶南 승가바라僧伽婆羅 한역漢譯)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분(分 직분·신분·분수 분)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限度 일정한 정도. 또는 한정된 정도). 분수(分數).
*정당(正當) ; ‘정당하다(이치에 맞아 올바르고 마땅하다)’의 어근.
*'잔치 때 쓰기 위해서 우유를 짜지 아니하고 한 달 내 두었다가 잔칫날 짜려고 보니까 젖이 말라서 별로 많이 나오지 못했다'고 하는 『비유경(譬喩經)』의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 『백유경(百喩經)』 제1권. (존자尊者 승가사나僧伽斯那 찬집撰集 | 소제蕭齊 천축삼장天竺三藏 구나비지求那毘地 한역漢譯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2. 어리석은 사람이 소젖을 모은 비유(愚人集牛乳喩)」
[참고] 昔有愚人將會賓客 欲集牛乳以擬供設 而作是念 我今若豫於日日中犛取牛乳 牛乳漸多卒無安處 或復酢敗 不如卽就牛腹盛之 待臨會時當頓犛取 作是念已 便捉牸牛母子 各繫異處

옛날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장차 손님을 청하여 소의 젖을 모아 대접하려고 자리를 마련하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만약 날마다 미리 소젖을 짜두면 소젖은 점점 많아져 마침내 둘 곳이 없게 될 것이며, 또한 맛도 변해 못쓰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기보다는 소젖을 소 뱃속에 모아두었다가 모임이 있을 때쯤에 한꺼번에 짜내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곧 어미소와 새끼를 따로 매어 두었다.

却後一月 爾乃設會迎置賓客 方牽牛來欲犛取乳 而此牛乳卽乾無有 時爲衆賓或瞋或笑

한 달이 지난 후 잔치를 마련하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소를 끌고 와서 젖을 짜려 하였으나 그 소의 젖은 말라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거기 모인 손님들은 성을 내거나 혹은 비웃었다.

愚人亦爾 欲修布施 方言待我大有之時 然後頓施 未及聚頃 或爲縣官水火盜賊之所侵奪 或卒命終不及時施 彼亦如是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보시(布施)를 하려다가 ‘내게 재물이 많이 쌓이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보시하리라’고 생각하지만, 모으기도 전에 관청이나 수재(水災)나 화재(火災)나  혹은 도적에게 빼앗기거나 또는 갑자기 목숨을 마치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보시할 수 없게 된다. 저들 또한 이와 같다.
*밭다 ; (무엇이) 바싹 졸아서 물기가 거의 없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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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 · 도(度) · 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여섯 가지 수행의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법보시(法布施) ; 다른 사람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이나 불서(佛書)를 베풂. 타인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법을 보시한 공덕은 매우 뛰어나 한량이 없다고 하셨다.

[참고] 『제경요집(諸經要集)』 10권. (석도세釋道世 집集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18. 육도부(六度部) [육도부에는 여섯 가지 편(篇)이 있음]
제1 보시편(布施篇第一)[보시에 따로 일곱 가지 연(緣)이 있음] (4)법시연(法施緣).

述曰:此明財 法相對 挍量優劣
故智度論云 佛說 施中法施第一 何以故 財施有量 法施無量 財施欲界報 法施出三界報 財施不能斷漏 法施淸升彼岸 財施但感人天報 法施通感三乘果
財施愚智俱閑 法施唯局智人 財施唯能施者得福 法施通益能所 財施愚畜能受 法施唯局聰人 財施但益色身 法施能利心神 財施能增貪病 法施能除三毒

[自述] 이것은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를 서로 대비시켜 그 우세하고 하열함을 비교하여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시 중에는 법시(法施)가 제일이다. 왜냐 하면 재물의 보시는 한량이 있지만 법의 보시는 한량이 없기 때문이요, 재물의 보시는 욕계(欲界)의 과보를 얻지만 법의 보시는 삼계(三界)를 벗어나는 과보를 얻기 때문이며, 재물의 보시는 번뇌[漏]를 끊을 수 없으나 법의 보시는 저 언덕[彼岸]에 청정하게 오르기 때문이요, 재물의 보시는 다만 인간 세계와 천상의 과보를 감득(感得)하지만 법의 보시는 삼승(三乘)의 과보를 감통(感通)하기 때문이다.
재물의 보시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다 할 수 있지만 법의 보시는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게 국한되었기 때문이요, 재물의 보시는 오직 보시한 사람만이 복을 얻을 수 있으나 법의 보시는 보시한 사람과 보시를 받은 사람이 통틀어 이익이 되기 때문이며, 재물의 보시는 어리석은 짐승도 받을 수 있지만 법의 보시는 오직 총명한 사람에 국한될 뿐이기 때문이며, 재물의 보시는 다만 색신(色身)만을 이롭게 할 뿐이지만 법의 보시는 능히 마음과 정신까지도 이롭게 하기 때문이며, 재물의 보시는 탐욕과 질병을 증장시킬 수 있으나 법의 보시는 삼독(三毒)을 다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니라.’

故大集經云 施寶雖多 不如至心誦持一偈 法施最妙 勝過飮食
又未曾有經云 天帝問野干曰 施食 施法 有何功德 唯願說之 野干答曰 布施飮食 濟一日之命 施珍寶財物 濟一世之乏 增益繫縛 說法敎化 名爲法施 能令衆生 出世間道

그러므로 『대집경(大集經)』에서 말하였다. '아무리 많은 보물을 보시했어도 그것은 지극한 마음으로 한 게송을 외워 지니느니만 못하나니, 법의 보시는 가장 절묘하여 많은 음식을 보시한 것보다 우세하다'
또 『미증유경(未曾有經 : 未曾有因緣經)』에서 말하였다.
천제(天帝)가 야간(野干)에게 물었다. '음식을 보시하거나 법을 보시하면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부디 설명하여 주십시오'
야간이 대답하였다. ‘음식을 보시하면 하루의 목숨을 구제하고, 귀중한 보배나 재물을 보시하면 한 생[世]의 궁핍함을 구제하지만, 그것은 다 계박[繫縛 : 집착]만을 더할 뿐이다. 법을 설하여 교화하는 것을 법시(法施)라고 하는데, 이것은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世間)의 도를 벗어나게 한다'

又大丈夫論云 財施者 人道中有 法施者 大悲中有 財施者除衆生身苦 法施者除衆生心苦 財施愛多者施與 財寶 愚癡多者施與 其法 財施者爲其作無盡錢財 法施者爲得無盡智 財施者爲得身樂 法施者爲得心樂 財施者爲衆生所愛 法施者爲世間所敬 財施者爲愚人所愛 法施者爲智者所愛 財施者能與現樂 法施者能與天道涅槃之樂 如偈曰

佛智處虛空 大悲爲密雲 法施如甘雨 充滿陰界池
四攝爲方便 安樂解脫因 修治八正道 能得涅槃果

또 『대장부론(大丈夫論)』에서 말하였다.
“재물의 보시는 인간 세계에 있는 일이고 법의 보시는 큰 자비 가운데 있는 일이다. 재물을 보시하면 중생들 몸의 고통을 없애주고, 법을 보시하면 중생들 마음의 고통을 없애준다. 재물의 보시는 애착이 많은 이에게는 재물과 보배를 베풀어 주지만, 어리석음이 많은 이에게는 그 법을 베풀어 준다. 재물을 보시하면 그 행위로 인하여 다함이 없는 재물을 얻고, 법을 보시한 사람은 다함이 없는 지혜를 얻으며, 재물을 보시한 사람은 몸의 안락을 얻고 법을 보시한 사람은 마음의 안락을 얻으며, 재물을 보시한 사람은 중생들에게 사랑을 받고 법을 보시한 사람은 세간의 존경을 받으며, 재물을 보시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법을 보시한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재물을 보시한 사람에겐 현재의 즐거움을 주고 법을 보시한 사람에겐 하늘 세계나 열반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부처님의 지혜가 허공에 있을 때에
큰 자비는 빽빽한 구름이 되며
법의 보시는 마치 단비와 같아
음계(陰界)의 못에 가득 찬다.

네 가지 섭법(攝法)은 방편이 되고
안락(安樂)과 해탈의 씨앗이 되며
여덟 가지 바른 도를 닦고 다스리면
능히 열반의 과보를 얻을 수 있으리.”

又月燈三昧經云 佛言 若有菩薩 行於法施 有十種利益 何等爲十 一棄捨惡事 二能作善事 三住善人法 四淨佛國土 五趣詣道場 六捨所愛事 七降伏煩惱 八於諸衆生施福德分 九於諸衆生修習慈心 十見法得於喜樂

또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보살이 법시(法施)를 실천하면 열 가지 이익이 있느니라. 그 무엇이 열 가지 이익인가?
첫째는 악한 일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능히 착한 일을 지으며, 셋째는 착한 사람의 법에 머무르고, 넷째는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이 하며, 다섯째는 도량으로 나아가고, 여섯째는 사랑하는 일을 버리며, 일곱째는 번뇌를 항복받고, 여덟째는 모든 중생들에게 복덕의 일부분을 베풀어 주며, 아홉째는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자비의 마음을 닦아 익히고, 열째는 법을 보고 기쁨을 얻는 것이니라.’”

又菩薩地持論云 菩薩知彼邪見求法智者 不授其法 不與經卷 若性貪財 賣經卷者 亦不施與法 若得經卷 隱藏不現 亦不施與法 若非彼人所知義者 亦不施與 若是彼所知義 於此經卷 已自知義 則便持經 隨所樂與 若未知義 自須修學 又知他人所有如是經 示語其處 若更書與 菩薩當自觀心 少有法慳者 當持經與 爲法施故 我寧以法施 現世癡瘂 爲除煩惱 猶尙應施 況作將來智慧方便

또 『보살지지론(菩薩地持論)』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저들이 삿된 견해로 법의 지혜를 구하는 것을 알면 그에게는 법을 주지 않고 경전도 주지 않는다. 만약 그의 성질이 재물을 탐하여 경전을 파는 사람인 줄 알면 그에게는 법을 베풀어 주지 않고, 만약 경전을 감춰두고 내어놓지 않으면 그에게도 법을 주지 않는다.
만약 그가 이치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에게도 베풀어 주지 않고, 만일 그가 이치를 알고 이 경전에 대하여 이미 스스로 그 이치를 알면 곧 경전을 가져다가 그가 좋아하는 바에 따라 줄 것이다. 만약 그 뜻을 알지 못하면 스스로 꼭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또 다른 사람이 이와 같은 경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면 그 대목의 뜻을 가르쳐 주거나 또는 베껴서 주느니라. 보살은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여 조금이라도 법을 아끼는 이가 있으면 법의 보시를 위해서라도 마땅히 경전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나는 차라리 법을 보시함으로써 현재 세계에 벙어리가 될지언정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마땅히 보시해야 하겠거늘 더구나 그것이 장래에 지혜와 방편이 되는 것이겠는가?

又優婆塞戒經云 若有比丘 比丘尼 優婆塞 優婆夷 能敎化人 具足戒施多聞智慧 若以紙墨 令人書寫 若自書寫如來正典 然後施人令得讀誦 是名法施 如是施者 未來天上得好上色 何以故
衆生聞法 斷除瞋心 以是因緣 未來世中 得成上色
衆生聞法 慈心不殺 以是因緣 未來世中 得壽命長
衆生聞法 不盜他財寶 以是因緣 未來世中 多饒財寶
衆生聞法 開心樂施 以是因緣 未來世中 身得大力
衆生聞法 離諸放逸 以是因緣 未來世中 身得安樂
衆生聞法 除瞋癡心 以是因緣 未來世中 得無礙辯
衆生聞法 信心無礙 以是因緣 未來世中 信心明了
戒施聞慧 亦復如是 故知法施殊勝過於財施

또 『우바새계경』에서 말하였다.
“만약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사람을 잘 교화하여 계율ㆍ보시ㆍ다문(多聞)ㆍ지혜를 원만하게 갖추거나, 혹은 종이와 먹으로써 사람들을 시켜 쓰고 베끼게 하거나, 혹은 여래의 바른 경전을 스스로 베껴 쓴 뒤에 남에게 보시하여 그로 하여금 읽고 외우게 하면 이것을 법시(法施)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법을 보시하는 사람은 미래 세상엔 천상에 태어나서 최고로 좋은 몸을 얻는다.

왜냐 하면 중생들이 그 법을 들으면 성내는 마음을 끊어 없애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미래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몸을 얻는다.
중생들이 법을 들으면 인자한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미래 세계엔 긴 수명을 얻는다.
중생이 그 법을 들으면 다른 사람의 재물과 보배를 훔치지 않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미래 세계엔 많은 재물과 보배를 얻는다.
중생이 그 법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보시하기를 좋아하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미래 세계엔 몸에 큰 힘을 얻는다.
중생이 그 법을 들으면 모든 방일한 행위를 여의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미래 세계엔 안락한 몸을 얻는다.
중생이 그 법을 들으면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걸림이 없는 말재주를 얻는다.
중생이 그 법을 들으면 믿는 마음에 의심이 없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미래 세상엔 믿는 마음이 밝고 또렷해진다.
계율ㆍ보시ㆍ다문ㆍ지혜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그러므로 법을 보시하는 것은 재물을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나고 훌륭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問 旣知法施勝過財施 今時 衆生但學法施 不行財施 未知得不
答 爲不解財施 迷心而施 苟求色聲人天樂報 恐墜三塗 不成出世 所以聖人慇懃歎法 令其悟解三事體空 而行財施 速成菩提涅槃勝果 自餘戒 忍六度萬行 皆藉智慧 開導成勝

【문】 법을 보시하는 것이 재물을 보시하는 것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그런데도 현재의 중생들이 오직 법을 보시하는 것만 배우고 재물 보시는 실행하지 않는다면, 모르기는 해도 그래도 되는 것인가?
【답】 재물 보시하는 것을 진정 모르고 미혹한 마음으로 보시하여 구차하게 빛깔과 음성, 인간 세계나 천상의 즐거운 과보만 구하다가 삼악도(三惡塗)에 떨어져서 세간을 벗어나는 법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들은 은근히 법을 찬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 가지 일의 본체가 공(空)한 것임을 깨닫고, 재물을 보시하게 함으로써 속히 보리(菩提) 열반(涅槃)의 뛰어난 과업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계율과 인욕 등 육도(六度 :육바라밀)의 만행(萬行)은 다 지혜의 힘을 빌어 우세한 과업을 이룬다는 것을 개도(開導)한 것이다.

又智度論云 前五度譬同盲人 第六般若事同有目 若不得般若 開導前五 便墮惡道 不成出世 若聞法施 過於捨財 愚人不解 卽便秘財 唯樂讀經 若行此法 不如有人解心捨施一錢 勝過迷心讀經百千萬卷
是以如來設敎意存解行 若唯解無行 解則便虛 若唯行無解 行則便孤 要具解行方到彼岸 若唯解無行 如人有目無足 不能遠涉 若唯行無解 如人有足無目 不能見道 又唯解無行 譬同狂花不結子實 若唯行無解 譬同子實不依花發 是故要須解行雙行 方成佛果也

또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앞의 다섯 바라밀[度]은 비유하면 눈먼 사람과 같고, 여섯 번째 반야바라밀의 일은 밝은 눈이 있는 사람과 같다. 만약 반야(般若)를 얻지 못하고 앞의 다섯 바라밀을 개도(開導)하면 곧 악한 세계에 떨어져서 세간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법을 보시하는 것이 재물을 보시하는 것보다 낫다는 설법을 듣고서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를 못하고, 곧 재물을 감추어 두고 오직 경전 읽기만 즐겨한다. 만일 이러한 법을 실행한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 마음으로 깨닫고 일 전의 돈을 보시하는 것만 못하다. 일 전이라도 보시하는 것은 미혹한 마음으로 백천만 권의 경전을 읽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해(解)와 행(行)에 뜻을 두라고 가르침을 베푸신 것이다. 만일 알기만 하고 실천이 없으면 그 앎은 곧 공허한 것이요, 만일 오직 실천만 있고 앎이 없으면 그 실천은 곧 외로울 것이니, 아는 것과 실천을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저 열반의 언덕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到彼岸].
만약 오직 알기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눈만 있고 발이 없어서 멀리 건너갈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만일 오직 실천만 있고 앎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발만 있고 눈이 없어서 길을 보지 못하고 마구 가는 것과 같다.
또 오직 알기만 하고 실천이 없으면 마치 헛꽃과 같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고, 또한 오직 실천은 하되 앎이 없으면 마치 종자와 같아서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이해와 실천을 함께 행해야 비로소 부처님의 과업을 이룰 수 있다.”


제6 지혜편(智慧篇第六)[여기에는 두 가지 연(緣)이 있음] (2)구법연(求法緣第二) 중에서.

布施飮食 濟一日之命 施珍寶者 濟一世之厄 增益生死 說法敎化者 能令衆生 出世間道 得三乘果 免三惡道 受人天樂 是故佛說 以法布施 功德無量

음식을 보시하는 것은 하루 동안의 목숨만을 구제해 주는 것이요, 진귀한 보배로 보시하는 것은 한 세대의 재액을 구제해 주고 생사에 이익을 더하는 것에 그치지만, 법을 설하여 교화하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을 벗어나게 하는 도(道)로써 삼승(三乘)의 과(果)를 얻고 세 갈래 악한 세계[三惡道]를 면하게 하여 인간이나 하늘의 즐거움[人天樂]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法)을 보시(布施)하는 것은 그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셨습니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보살도(菩薩道) ; ①보살의 수행. 보살이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갖추어 깨달음에 이르는 도. ②대승불교.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마지(摩旨) ; 부처님께 올리는 밥.
부처님께 올리는 밥은 대부분 사시(巳時), 즉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올린다. 이것은 생전에 부처님이 하루에 한 번 그 시간에 밥을 먹은 데서 유래한다.

사시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마지 올린다’고 하는데, 한자를 풀이하면 (摩指, 摩旨, 磨旨) ‘손으로 만들어 올린다 혹은 정성스럽게 만든 공양을 올리오니 제 뜻을 감읍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영판 ; 아주.
* ; 업은 한 집안의 재물 신격으로서 흔히 구렁이, 족제비 등으로 상징된다. 집안에 이런 동물이 어느 곳이든 머물러 있어야 가업이 번창한다고 믿고 있다.
*영단(靈壇) ; 영가의 위패를 두는 단(壇).
*영위(靈位 신령 령/자리 위) ; ①혼백[靈]의 자리[位]. ②신위(神位). 또는 위패(位牌).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 · 앉은삼재),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삼재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삼재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작(符作) ; ‘부적(符籍)’의 변한 말.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 ;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액막이(厄-- 액·불행한 일·재앙 액) ; 앞으로 닥칠 나쁜 운을 미리 막는 일.
*방생(放生) ; 사람에게 잡힌 물고기나 새, 짐승 따위를 산이나 물에 놓아서 살려 주는 일. 불교도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첫째 계(戒)인 불살생계(不殺生戒)보다 적극적인 선을 실천하는 선행(善行)이다.
*‘본래 생사(生死)가 없으며~’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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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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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ㅂ/보시2019. 4. 22. 11:01

*보시(布施) : [범] dāna 음을 따라 단나(檀那) · 다나(柁那) · 단(檀) 등으로 음사(音寫)한다. 물질 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05~106.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한 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대승불교도들의 실천덕목 중 하나. 상(相)에 머뭄[住]이 없는[無] 보시.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1/3) 20분 50초.

(2/3) 20분 36초.

(3/3) 6분 40초.

 

[법문] 송담스님(No.353)—88년 신수기도 회향(88.02.26)(용353)

 

(1/3)----------------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에 계실 때 아주 부자 집안이 있었는데, 아들을 하나 밖에는 기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아주 신심이 돈독해서 항상 부처님께 나아가서 부처님 설법을 듣고 집에 와서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너무 부처님 법문에 감동을 받아가지고 ‘내가 세속에 이렇게 묻혀서 있을 것이 아니라 출가를 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가지고 정말 대도(大道)를 성취하리라’ 이런 마음을 먹고서, 아주 마음의 결정을 하고 부모님께 출가할 의사(意思)를 표시를 했습니다.

 

그 부모는 “우리 늙은이 앞에 자식이라고는 너 하나 밖에 없는데, 네가 출가해 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 도저히 안 된다” 이렇게 허락을 아니 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도저히 출가할 뜻을 굽힐 수가 없어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그래가지고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돈을 갖다가 부모님께 드리면서 “부모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대단히 죄송하나 내가 출가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하고자 하는 이 깊고도 큰 뜻을 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동안 번 이 재산을 옴막 드릴테니 이것을 마음껏 잡숫고 싶은 대로 잡숫고, 입고 싶은 대로 입고 그리고서 남은 돈은 보시를 하십시오”

이렇게 간곡히 부탁을 하고서 적당한 날이 돌아오면은 출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워낙 간탐심(慳貪心)이 많아가지고 그 많은 재산을, 평생 동안 쓰고도 남을 만한 재산을 한푼도 쓰지 않고 땅속 깊이 항아리에다 담아서 묻었습니다.

아까워서 먹지도 못하고, 아까워서 입지도 못하고, 남에게 보시도 못하고서 땅속에다 묻어 놓은 채, 행여나 누가 그걸 손댈까봐 밤낮으로 그걸 지키면서 벌벌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 부모가 돌아갔습니다.

 

돈 한푼도 쓰지 못하고 마지막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어머니 장례를 잘 지내고서 ‘참,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안되기는 안되었지마는 드디어 내가 출가할 수 있는 기회는 왔구나’ 이리하고서 가산을 버려 버리고서,

부처님께 나아가서 출가를 해가지고 어떻게 폐침망찬(廢寢忘餐)하고, 밥먹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대도를 성취를 했습니다.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을 했어.

 

아라한과를 증득을 해가지고서 갠지스 강(Ganges江)—항하(恒河) 가에다가 암자(庵子)를 짓고서 거기서 보림(保任)을 하고 있는데, 밤이 으스름해지면은 어디서 참 이상한 슬피 우는 그 귀신 소리가 나.

 

‘그 참 이상하다?’ 그 소리 난 데를 살살 걸어가서 보니까, 머리를 갖다가 산발(散髮)을 하고서 그리고서 얼굴은 어떻게 험상궂게 생긴 데다가 손가락 발가락은 앙상해가지고 마치 불에다가 끄슬러 놓은 것 같이 그렇게 생겨 가지고는 그 통곡을 하면서 운다 그말이여.

 

“대관절 네가 누구길래 내 공부하는 데 가까이 와 가지고 그렇게 밤만 되면 통곡을 하는고?” 물어보니까,

“예,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성자(聖者)의 어미입니다. 내가, 어미가 죽어가지고 이러한 아귀(餓鬼)의 꼴이 되었습니다. 성자가 되셨으니 자비로써 이 어미를 갖다가 제도를 해주시오”하고 간곡히 부탁을 했어.

 

그 말을 듣고 그 성자는 너무 참 기가 막혀.

아라한과를 증득을 했으니 생사에 초월을 하고 무슨 거기에 인간의 얽매임이 있으리오마는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세상에 저러한 아귀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고 있어.

 

그 아귀가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아귀가 되어가지고 목이 말라서 물을 먹기 위해서 강변으로 쫓아가면은 강은 순식간에 말라버리고, 배가 고파서 저 먼 데에 과일 밭이 보여서 과일을 실컷 먹기 위해서 쫓아가면 순식간에 과일 밭이 쑥대밭이 되어버려. 이렇게 해서 여태까지 내가 물 한 모금 못 먹고, 과일 한 개를 먹지 못하고서 이렇게 피골이 상접한데”

 

몸뚱이는 장구통만큼, 이렇게 큰 절구통 같이 배는 크고, 목구멍은 실낱 끝 모가지여. 그래서 아귀의 모습은 ‘장구통 배아지에 실낱 끝 모가지’라고 옛날부터서 전해 내려오는데.

 

그 성자가 말하기를 “어머니께 전생에 보시를 하라고 그렇게 말씀을 내가 드렸는데 어머니께서 그것을 탐심이 과해 가지고 쓰지도 못하고, 남에게 보시도 안 하고 그렇게 그러시더니 결국은 이렇게 되셨구려” 그러면서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아귀가 부탁하기를 “내가 그때 그 많은 재산을 아까워서 못 쓰고 울타리 밑에다가 묻어놨는데 그것을 파다가 스님네와 부처님, 그리고 여러 대중에게 고루고루 베풀고, 가난한 사람한테도 베풀고 해서 보시를 좀 해주시고, 그리고 부처님께 설법을 좀 해서 내 이름을 좀 불러주면서 나를 좀 천도(薦度)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어.

 

그래서 그 성자는 옛날에 자기가 살던 집을 찾아와 가지고 울타리 밑에를 그럴만한 데를 여기저기 파보니까, 과연 그 항아리 속에 엄청난 금은보화(金銀寶貨)가 들어있어서 그걸 갖다가 널리 보시를 하고 큰 대시회(大施會)를 열어가지고 대중공양(大衆供養)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비롯한 부처님의 제자들이 모두 잘 공양을 하셨는데, 그 아귀가 그 공양 석상(席上) 저 갓에 가서 벌벌벌벌 떨면서 울면서, 그 공양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거기 서 있었는데,

그 공양이 다 끝나자 그 아귀가 엎드려서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을 하면서 “석가 세존(世尊)이시여! 이 불쌍한 죄 많은 중생을 위해서 참회(懺悔)를 받으시고 설법을 해서 제도해 주시옵소서” 아주 간곡히 울면서 간청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아드님이신 성자도 또 같이 엎드려서 슬피 울면서 “세존이시여! 원컨대 이 조그마한 공양하는 공덕으로 참회를 받으시고 이 불쌍한 아귀 중생에게 빨리 해탈을 얻도록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청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심(慈悲心)을 일으키셔서 방편력(方便力)으로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 바람에 거기에 운집(雲集)한 모든 대중과 이 우주 법계에 가득한 유주무주(有主無住)의 고혼(孤魂)들까지라도 모두 해탈을 하고, 그 아귀도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워낙 죄를 많이 짓고 간탐이 심해서 해탈도는 증득을 못하고 겨우 아귀의 몸을 간신히 벗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그 성자가 참선을 하면서 선정(禪定) 중에 ‘지금쯤은 우리 어머니가 어디에 태어나셨나?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하고 가만히 작관(作觀)을 해보니까 아직도 귀신의 몸을 벗지를 못하고서, 고통은 받지는 않는데 아주 재산이 많은 귀신이 되어가지고 있다 그말이여.

살아있는 사람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있지마는 귀신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잘 알 수는 없으나 하여간 경전에 아주 부자의 귀신이 되어가지고 그 재산을 또 지키고 있다 그말이여.

 

사람이 탐심이 많으면 죽어서도 좋은 곳을 가지 못하고, 그 자기의 재산을—자기가 모아놓고 평생에 쓰지 못한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귀신이 되어가지고 그 재산을 항상 지키면서 그 애착 때문에 떠나지를 못하고 있는 수도 있고.

또 구렁이 같은 것이 되어가지고 그 집안에 용마루 밑에나, 어디 창고 벽 사이나 모다 그런데 가서 구렁이가 되어가지고 여러 해 동안을 그것을 지키면서 있는 것입니다. 그걸 '업'이라고 그러는데.

 

그래서 그 부자 귀신이 되어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성자가 거기를 가 가지고서 “옛날에 어머니가 그렇게 간탐심이 심해가지고 아귀도에 떨어져서 그 고통을 한 것을 벌써 잊었습니까? 부처님의 그 공덕으로 그렇게 고통을 잠시 벗었으면은 아주 벗어 버릴 일이지, 어찌 다시 이런 부자 귀신이 되어가지고 또 지금도 간탐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눈물로써 호소를 했으나 “나는 이 재산 없으면 못살어. 내가 이 재산 지키는 재미로 이렇게 살고 있는데 나는 못 버린다”고 아주 그냥 탁! 잡아뗀다 그말이여.

 

그래도 아주 여러 시간을 두고 이리 설득하고 저리 설득하고 해가지고 간신히 무엇을 얻어냈냐 하면, 백목(白木) 두 필을 겨우 얻어냈습니다.

 

얻어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와서 ‘돈으로 바꿔가지고 스님네께 보시 공양을 하리라’하고 아직은 그 어떤 스님한테 임시로 그것을 맡겨 놨는데, 얼마 있다가 그걸 찾아다가 팔려고 가니까 그것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것 이상하다’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 어머니가 다시 훔쳐갔구나’ 생각을 하고 다시 어머니한테 가서 보니까 과연 그 백목 두 필이 그 어머니한테 가서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또 설득을 해가지고 또 찾아다가 다시 맡겨놨는데 또 찾아가고, 세 번을 그렇게 찾아왔다가 또 도둑을 맞고, 찾아왔다가 도둑을 맞고, 그러니까 그 맡았던 스님이 진심(瞋心)을 내는데 ‘나 앞으로 이거 못 맡겠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그걸 팔아서 대중에게 나눠드릴 게 아니라, 아주 이 자리에서 조금씩 잘라서 나눠드릴 수 밖에 없다 해가지고 그 자리에서 그것을 끊어 가지고 스님네한테 전부 다 나눠드려가지고 그 자리에서 모두 옷을 해서 그래가지고 입었습니다. 그런데 아! 그 옷이 또 자고 나면 없어져 버려.

 

그래서 그런 탐심이라 하는 것은, 중생의 탐심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 탐심 때문에 그 무서운 아귀도에 떨어져서 그 고통을 받고도 정을 못 떼시고, 또 재물 부자 귀신이 되어가지고 간신히 보시한 것이 그것이 또 아까워 가지고 세 번을 훔쳐오더니, 네 번째는 옷을 만들어서 입고 있는 것도 잠깐 벗어 놓은 차에 그것도 또 훔쳐 가버린다 말이여.

 

부처님께서 그러한 사실을, 대중이 그렇게 옷을 도둑맞았다고 하는 그러한 모다 사실을 부처님께서 들으시고서 대중하게 설법을 하시기를,

“탐욕의 불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간탐하는 욕심의 불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로구나! 길이길이 악도(惡途)에 떨어져서 무량겁(無量劫)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 탐욕의 무서운 독이로구나! 너희들은 어서 속히 중생들의 그 탐욕의 때를 빨리 벗어 버릴지니라”

 

그래서 그 탐욕을 벗어 버리는 그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은 그것이 바로 보시(布施)인 것입니다.

 

보시라 하는 것은 보통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남에게 나눠주는 것을 다 보시라고 생각하고, 재산이라든지, 재산 가운데에는 돈도 있고 금은보화 또는 먹을 거 또는 입는 거 이런 물질 보시를 대충 다 보시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절에다 시주를 한다든지, 스님네께 공양을 한다든지 또는 양로원이나 고아원 또는 형무소, 그렇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그러한 물질을 보시한 것이 바로 보시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그것도 보시가 아닌 것은 아니야.

 

그 밖에도 몸뚱이, 신체의 보시가 있어. 몸뚱이를 배고픈 호랑이한테 보시를 한 것. 부처님께서 과거에 인행(因行) 때에 배고픈 호랑이에게 그 몸뚱이를 보시하는 설화가 있습니다마는 그런 거라든지,

또 스님네가 돌아가실 때에 산중에서 돌아가시면은 산중에 사는 모두 산짐승에게 보시를 하고 또 물에서 돌아가시면은 수중의 모든 중생들에게 보시를 하고, 이러한 몸뚱이를 보시하는 것이여.

 

또 이 몸뚱이의 살과 뼈만이 아니라,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 노력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그 노력을 보시하는 것도 또한 한 보시의 종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보시’가 있어. 마음의 보시는 수행을 해서 탐진치 삼독을 버리는 거여. 그것이 바로 마음의 보시고.

또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도 하나의—당신이 누려야 할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는 것도 그것도 보시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순치황제 출가하신 것도 또한 보시여.

 

수행을 해서 아(我)가 공(空)하고, 법(法)이 공하고,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구공(俱空)하는 것이 그것도 또한 엄격히 말하면 그것도 하나의 마음의 보시라 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리고 법보시(法布施)가 있는데, 경전을 인쇄해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시를 한 거 이것 법보시고 또 자기가 수행을 해서 깨달은 바가 있던지, 경전을 봐서 부처님의 거룩한 법을 아는 바가 있으면 그것을 인연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법을 믿도록 인도하는 것 이것도 또한 법보시에 들어갈 것입니다.(5분6초~25분54초)

 

 

 

(2/3)----------------

 

아까 마음의 삼독심을 버리고 아공과 법공, 구공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마음의 보시’라 했지만, 우리가 일상 생활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마음의 보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남의 잘못을 용서(容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자존심만을 내세우고 남의 인격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저 사람의 입장이 되어가지고 나의 주장을 양보하고 그 사람의 뜻을 따라주는 것, 부부간에도 그렇고, 친구 간에도 그렇고, 형제간에도 그렇고.

자기의 뜻이 옳다고 주장하고 자기의 의견만을 내세우면 이것은 마음의 보시가 아닌 것입니다.

 

보시를 하는 곳에서 일체 중생을 수순(隨順)하고, 그것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 속에 제일 첫번째 있는 단바라밀(檀波羅蜜), 보시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로 보시하고, 몸뚱이로 보시하고 또는 법으로 보시하고, 이 보시를 자꾸 부처님께서 권장하시는 뜻은 보시를 그렇게 함으로써 마지막에 가서는 마음의 보시의 참뜻을 터득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남을 용서를 못하고, 남의 잘못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공격을 해대고 미워하고 용서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보시를 하지 안했기 때문에,

보시를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견을 국집(局執)한 것은 자기의 재산을 남에게 베풀지 아니하고 항아리에다 담아서 땅속에다 묻어놓고 지키다가 아귀가 되고 구렁이가 된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기의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아치(我癡)를 자기의 마음의 재산으로 삼아서 그것에 국집해 가지고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남에게 양보할 줄을 모르고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을 하다가 결국은 아내와 싸우고, 남편과 싸우고, 부모 자식간에 싸우고, 친구 간에 싸우고, 모든 이웃과 싸운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해탈도를 증득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세계가 어떻게 그 사회가 복을 받게 되며, 행복한 그리고 평화로운 세계가 이룩되겠습니까.

 

 

이번 무진년 새해를 맞이해서 신수기도를 일주일간 참으로 정성껏 받들었습니다. 새벽부터 이 법당에 가득 모여서 기도를 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렇게 기도에 많은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이 참석을 하셔서 기도하신 것은 대단히 기특하고, 감사하고 참 훌륭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한 기도를 하느냐 하면은 그 기도를 통해서 보시의 참뜻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 보시, 신체의 보시, 마음의 보시, 법보시 이러한 여러 가지 보시를 그때그때 상대에 따라서, 상황이 따라서, 자유자재로 보시를 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보시를 하면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며 소원을 성취를 하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런 재산이라든지, 몸뚱이라든지 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자존심이라 하는 것이 전부가 업(業) 소생(所生)인 것입니다. 업으로 뭉쳐진 것이여요.

 

탐욕을 가졌기 때문에 그 탐욕의 소산(所産)으로 결국은 그런 재산이 뭉쳐졌고, 이 몸뚱이도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이 몸뚱이를 받아나게 된 것이고,

자기의 자존심도, 아무리 학식이 높고 이 세상에 제일가는 명예와 권리를 가졌다 하더라고 그 마음속에 자기의 마음을 비우지 못했다면 그러한 것들도 전부 탐진치 삼독의 소산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탐진치 삼독이라 하는 것을 우리는 가까운 그 비근한 예를 들어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꿈을 꾸면, 구렁이나 그런 뱀 꿈을 꾸거나 돼지꿈을 꾸면은 재수가 있다 해가지고 그 이튿날 당장 나가서 복권을 삽니다.

 

어째서 구렁이 꿈이나 돼지꿈을 꾸면, 물론 용도 구렁이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용꿈이나 구렁이나 돼지꿈을 꾸면은 재수가 있다’해 가지고 그 이튿날 복권을 사면은 1억짜리가 당선된다고 믿고 다투어 그 꿈을 서로 살려고 그러고 그런데, 그 돼지도 완전히 탐욕의 권화신(權化身)인 것입니다.

 

돼지는 욕심이 많아가지고 먹을 것을 보면은 제 새끼도 소용없고, 옆에 누가 올까봐서 오면 막 물어뜯어 버리면서 배아지가 터지도록 막 먹어 대는 것입니다.

사람도 식탐이 많은 사람은 먹을 것을 보면 옆에 사람이 있는 것이 보이지를 않고, 잔뜩 먹고 옆구리가 빵빵해져야 “어째서 빨리들 안 먹어?” 자기가 배가 부르기 전에는 옆에 사람 배고픈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게 다 가만히 그 사람 한참 먹고 있을 때 눈을 보면 영락없이 돼지 눈입니다. 돼지라든지 구렁이라는 것이 전부 전생(前生)에 탐심이 많아가지고 그러한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탐심 많은 그 탐착심, 자기가 모아 놓은 재산 먹지 못하고 쓰지 못하고 꽁꽁 뭉쳐서 땅속에다 묻어놓고 갔다 하면은 백발백중 구렁이가 되어가지고 집에 와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헌 집, 묵은 집을 뜯으면은 귀 달린 구렁이가 나온다고 그럼니다.

이게 다 그 집안에 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피땀 흘려 모아가지고 그 재산을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물려주고서 그놈 아까워서 어디로 뚝 떠나지를 못하고 구렁이가 되어가지고 그 집에 와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다 ‘업’이라고 그러죠. 그러한 구렁이.

 

그리고 꿈에 똥항에 빠졌다든지, 똥을 옷에다가 쌌다든지, 무슨 똥을 보면 또 재수가 있다고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똥이라든지 구렁이라든지 용이나 또 돼지 이런 것들은 바로 그것이 재물, 재산과 동격인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 그러한 것을 보면 재수가 있다고 참 좋아들 합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어디를 지나가시는데, 부처님께서 제일 앞에 서서 바리때를 들고 이렇게 가시는데 요리 골짜구니를 보시고서 “어이쿠! 구렁이 봐라. 독사(毒蛇) 봐라” 그러고 부처님 지나가시니까,

그 뒤에 따라가던 사리불(舍利弗), 목련존자(目連尊者), 차츰차츰 제자들도 이리 보면서 “어이쿠! 독사 봐라” 가면서 그러니까. 그러면서 제자들이 쑤욱 다 지나갔는데.

 

저만큼서 풀을 뜯던 사람이 ‘아!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이 저기 독사가 있다고 깜짝 깜짝 놀라면서 지나가시는데 대관절 무슨 무서운 독사가 있기에 그런고?’하고 살금살금 가서 조심스럽게 골짜기를 들여다보니까,

 

아따! 금은보화가 찬란하게 번쩍거리는데 ‘참 이상하다? 어째서 저것을 독사라고 하고 지나갔을까? 내 눈에는 저것이 헛보이나 보다’ 해가지고, 무서워서 돌멩이를 거기다가 던져보니까 ‘쨍그랑!’하고 소리가 나는데, 저것이 독사 같으면 꿈틀거리고 물러 쫓아올텐데 오히려 그 번쩍번쩍하면서 쨍그랑하고 소리가 나고.

아, 몇 번을 던져 봐도 마찬가지다 그말이여. 그래서 가 가지고는 작대기로 이리저리 쑤석거려 봐도 독사 커녕은 분명히 칠보(七寶)가 분명하다 말이여.

 

그놈을 갖다가 속적삼을 벗어서 탁! 싸아 가지고는 누가 쳐다보나 어쩌나 두리번거리면서 마침 아무도 안 보고 있으니까 그놈을 갖다가 집으로 가지고 와 가지고는 그냥 벌벌 벌벌 떨면서 마당 저 뒤에다가 구덩이를 파고서 탁! 항아리에다 담아서 묻어놓고는.

 

아! 그놈을 해놓고는 너무너무 좋아서 잠이 안 오네. 그래가지고는 밤중에면 가만히 가서 뚜껑을 열고 만지작거리다 도로 넣고 넣고.

이렇게 좋은 것을 그냥 묻어만 놔서 안되겠고, 조금씩 뜯어다가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또 집도 고치고, 논도 사고 해서 차츰차츰 인자 심심하면 한덩어리씩 내다팔고 팔고 그랬는데.

 

며칠 있더니 관가에서, 지금 같으면 형사대들이 그냥 와 가지고는 집을 둘러싸고는 “이놈 나오라”고 고함을 질러서 그래가지고는 무슨 일인고 하고 나갔더니, “너 이놈” 다짜고짜로 때려 묶어서 끌고가 가지고는 아주 그냥 뒈지게 뚜드려 패서 몰골이 났다 그말이여.

 

“너 이놈. 바른대로 대라. 나라의 보물이 잃어버린 지가 여러 날이 되어도 간 곳이 없는데 이놈, 네놈이 훔쳐다 팔아먹어?”

“아닙니다, 제가 팔아먹지를 않았습니다”

 

“이놈, 안 팔아먹어? 네가 갖다가 아무데 금방에다가 몇 번을 이러이런 것을 팔아먹지 않았냐?”

“훔치지는 절대 안 했고 골짜구니에서 주워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나쁜 놈의 자식! 주워 와? 골짜구니에 왜 나라의 창고에 든 놈이 거기에 있어? 이 나쁜 놈, 요놈이 맛을 봐야 해” 어떻게 뚜드려 맞았던지 볼기가 아주 그냥 개떡처럼 뚜드려 맞았어.

그래가지고는 기절을 했다가 찬물을 찌그려서 또 뚜드려 패고 해서 날이면 날마다 뚜드려 맞고, 몇 번을 죽었다 살아나가지고 아주 그냥 궁뎅이가 말로 할 수가 없어.

 

꿍꿍 앓으면서 “아휴, 그때 부처님이 독사라고 그러더니 정말 이놈이 독사로구나!”

아, 그냥 그 말을 푹 해버렸다 그말이여. 그러니까 그 말을 옥졸이 듣고 가서 보고를 했어. “그놈 잡아오너라”

 

“부처님이 어떻고 어때?” 그러니까, “예, 사실은 부처님이 지나가시면서 ‘이거 독사’라고 그랬는데 내가 아무리 봐도 독사가 아니기에 주워 왔습니다”

급히 사람을 부처님께 보내 가지고 “정말 그 골짜구니에서 독사를 보신 일이 있었습니까?”하니까, “응, 그걸 봤지”

 

사실이 확인이 되니까, “너 이놈! 아무리 그걸 주웠기로서니 그 많은 보물을 주웠으면 당연히 나라에다 바쳐야 하는 것인데, 네가 숨겨놓고 살살 그놈을 팔아먹은 죄가 마땅히 널 사형을 시킬 일이로되, 부처님과 관련이 되어졌어. 그러니 부처님의 그 공덕으로 봐서 너를 살려준다”해 가지고는 풀어줬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리고 부처님 제자들은 그런 재물을 분명히 그것을 독사로 보셨기 때문에 깜짝 깜짝 ‘이크! 이크!’하면서 지나가셨습니다.

 

부처님이야 그까짓 것이 뭐 금이나 자갈이나 그것가지고 탐내실 분은 아니로되, 만약에 부처님 제자 가운데에 좀 아직 확실히 도를 이루지 못한 조금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서, 만약에 그놈을 살며시 훔쳐다가 놓고 팔아먹었다 하면은 진짜 그 스님도 독사에 물렸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마는,

부처님과 제자들은 확실히 그것이 독사인 줄 아셨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고 지나가셨으므로 그런 국법에 저촉을 받으시지를 않았습니다.

 

어리석은 나무꾼이 그것을 독사라고 부처님과 제자들이 일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현혹이 되어가지고 그놈을 훔쳐다 놓고 팔아먹다가 그 참 못 당할 그런 곤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재산이라고 하는 것이 독사요, 똥보다도 더 더럽고 독사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여.

그러나 세속에 살면서는 그것이 나중에 독사가 되었건, 똥이 되었건 우선 그것이 없으면 당장 먹고 살 수가 없고, 집도 재산인데 그것이 없으면 이 몸뚱이를 갖다가 거처(居處)를 할 수가 없고 자녀들도 가르킬 수도 없고, 아무것도 안되어 버려져.

 

출가한 스님네는 그저 도(道)만 열심히 닦으면은 도 닦다가 굶어 죽은 일이 없기 때문에 나가서 돈벌이 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 하지만, 세속에 사시면서는 천상 돈이 있어야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어.

어디 나가서 자기 동기 간한테 가서 손 벌려도 잘 주지도 않고, 친구 간한테도 좀 가난해서 돈이 없다고 돈 달라고 하면 당장 그 이튿날부터선 친구도 별로 반가워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 돈 있으되 그것을 적당한 방법으로 잘 벌고 열심히 벌고, 벌어서 요긴하게 쓰고 그리고 또 적당하게 보시도 하면서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은 하되,

그것이 아까워서 먹지 못하고 쓰지 못하고 땅에다 묻어놓고 벌벌 떨다가 아귀가 된다든지, 구렁이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탓으로 참 그렇게 비참하고 불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는 재산을 열심히 벌고 또 소중하게 관리를 하고, 쓸 때 자기를 위해서도 쓰고, 집안을 위해서도 쓰되 경우에 따라서는 잘 베풀 줄도 알아야 다음 생에 끊임없는 복록(福祿)을 또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푸는 것은 자기의 업장(業障)과 모든 재액(災厄)을 갖다가 그 물질적인 재산을 버리면서 자기의 업장도 거기서 녹아지는 것이고, 탐심도 거기서 녹아지면서 동시에 그것이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쓰고 남을 복(福)의 씨를 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7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해서 마음이 청정해졌고 업장이 소멸이 되었습니다.

 

이 회향날 또 이러한 조실 스님의 법문과 산승의 이런 말씀을 듣고서 ‘참! 과연 옳은 말이다. 내가 그동안에 아까 와서 아낄 줄만 알았지 정말 보시의 참뜻을 내가 몰랐구나!’ 이리 생각을 하고,

앞으로는 그 재산을 옳게 관리하고, 옳게 쓰고, 옳게 베푼다면—그거 써 버리면 아주 없어질 줄 알고, 늙으면은 간탐심이 굳어져 갖고 보시를 잘 못합니다.

 

젊어서는 또 생기거니 하고, 생길 수도 있고 벌 수도 있으니까 더러 쓰다가, 나이가 한 오십 육십 되면 인자 돈 내가 벌 수도 없고, 누가 잘 갖다주지도 않으니까 ‘이것 떨어져 버리면 내가 인자 꼼짝을 못하겠다’해 가지고 열 번, 스무 번 꽁꽁 싸가지고는 깊은 데다 넣어 놓고 있다가 결국은 죽어버리면 참 그거 못쓰는 것입니다.

 

이 회향날을 맞이해서 보시(布施)가 마음의 업장을 소멸하고, 나아가서는 「참 보시」는 물질적 보시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그 보시야말로 보시의 참뜻이라고 하는 거.

 

그리고 남에게 보시 하되 ‘내가 보시를 했다 하는 생각’ 상(相)이 있고, ‘내가 이렇게 보시를 했으니까 나한테 그 보답을 해야 한다’고 하는 보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으면 이것은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가 아닌 것입니다.

 

무주상 보시라야 그 공덕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한 것이지, 유주상(有住相)으로 하면 그 보시가 아주 그 조그만한 한계가 있는 그러한 보시 밖에는 안되고, 그 보시 공덕으로 얻어봤자 유루(有漏)의 복 밖에는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무주상 보시를 해야 무루복(無漏福)을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25분55초~46분31초)

 

 

 

(3/3)----------------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요  인거황천명재가(人去黃泉名在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채득백화성밀후(採得百花成蜜後)에  부지신고위수감(不知辛苦爲誰甘)고

나무~아미타불~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요, 기러기는 저 하늘가에 날아갔는데 그 기러기 발자취는 모래사장에 남아 있고,

인거황천(人去黃泉)에 명재가(名在家)로구나. 사람은 저 황천(黃泉)으로 떠났는데 그 이름만 자기 살던 집에 남아 있구나.

 

채득백화성밀후(採得百花成蜜後)에, 벌이 일백 가지 꽃에서 꿀을 따다가 놨는데,

부지신고위수감(不知辛苦爲誰甘)이다. 그 벌이 백 리, 이백 리 밖에까지 나가서 온갖 풀과 꽃, 그리고 심지어는 시궁창, 변소, 간장독 또 뱀 썩은 거, 모든 짐승이 썩은 거, 쇠똥, 천 가지, 만 가지 물건에서 꿀이 될만한 요소를 빨아다가 그래서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며 그 벌의 세계에 있어서도 위계질서가 분명해가지고 그 법도가 엄한 것이며, 놀고먹는 벌은 다 물어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 가지, 만 가지 고통을 사양하지 않고 모아 놓은 꿀, 자기네들도 함부로 먹지 않고 꿀통에다가 그렇게 일 년 내에 모아 놓은 꿀을, 벌의 그 고통은 아랑곳없는 사람이 그놈을 딱 도려서 따다가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평생 동안 명예와 권리를 위해서 젊어서부터서 공부하고 피땀 흘려서 노력을 하고, 밤잠 안 자고 공부하고 그래가지고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 검사가 되고, 도지사 장관이 되고 그러한 하늘을 찌르는 높은 명예와 권리를 얻었다 해도,

마치 기러기 하늘 끝에 날아간 뒤에 발자취만 모래밭에 남듯이, 황천에 한번 떠나 버리면 아무 할 일없이 이름만 얼마동안 세상에 남아 있다가 오래되면 그것마저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피땀 흘려서 모은 재산 아까워서 먹지 못하고 쓰지 못하고 꽁꽁 뭉쳐놨던 재산, 가는 길에 한푼 가져가지 못하고 그 재산은 엉뚱한 사람이 그것을 먹어 치우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백년을 다 못다 사는 이 무상한 몸뚱이를 가지고 태어났으되 무엇을 위해서 그러면은 이 몸뚱이와 목숨을 바쳐야 하느냐?

 

명예도 헛것이요, 권리도 헛것이요, 재산도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되고 가지고 갈 수가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부처님의 법, 정법(正法)을 믿고 그것을 실천해.

그래서 ‘참나’를 깨닫는 것만이 이것이 영원한 것이며 내가 영원히 참나를 찾아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다. 

 

금년에 삼재(三災)가 드신 분들은 지난 입춘에 기도를 열심히 하셨을 것이고 또 이번에 신수기도에도 참 열심히 새벽같이 나와서 열심히 하셨을 줄 생각합니다.

 

많이 업장이 소멸이 되고 삼재를 면하셨을 것입니다마는 아주 정말 깨끗이 뿌리째 그 삼독의 악귀를 갖다가 내버리려면은 이웃의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에게 보시하시고 또 절에 불사(佛事)가 있으면 보시하시고 또 병든 스님네가 있으면 보시를 해서 아주 마지막 그 끝마무리를 잘하십시오.

 

이번 한번 뿐만이 아니라 세세생생에 정법에 의지해서 도를 닦으면서 그러한 무주상 보시를 하시는 것은 세세생생에 삼재팔난(三災八難)을 면하고, 무량무변의 무루복을 증득해서 복(福)과 혜(慧)를 구족(具足)한 그러한 인격완성을 성취하실 것입니다.(46분33초~53분1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3)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옴막 ; '전부(全部)'의 사투리.

*간탐심(慳貪心 아낄 간/탐할 탐/마음 심) ; 몹시 인색하고 욕심이 많은 마음.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 :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증득(證得) ;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함.

*항하(恒河) ; 갠지스 강(Ganges江,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하여 인도 북부를 가로질러 벵골 만(灣)으로 흘러들어 가는 인도 최대의 강. 길이는 2,510킬로미터).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성자(聖者) ; 모든 번뇌를 버리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

*아귀(餓鬼) ; 생전에 탐욕이나 질투가 많아 육도(六道) 중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 이르게 된 죽은 사람의 영혼. 몸이 앙상하게 마르고 목구멍이 바늘구멍 같아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 늘 굶주린다고 한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시회(施會) ; 베푸는 모임.

*대중공양(大衆供養) ; ①수행자에게 음식을 올리는 일. ②대중이 함께 식사하는 일.

*석상(席上) ; [주로 일부 명사 뒤에 쓰여]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

* ; ‘가(바깥쪽 경계가 되는 가장자리 부분이나 그 부근)’의 사투리.

*오체투지(五體投地) ; 불교 신자가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고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께 큰절을 올려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방법. 신체의 다섯 부위를 땅에 닿게 하는 절. 먼저 두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한다.

고대 인도에서 행하여지던 예법 가운데 상대방의 발을 받드는 접족례(接足禮)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륜투지(五輪投地)ㆍ오륜착지(五輪着地)ㆍ거신투지(擧身投地)ㆍ투지례(投地禮)라고도 한다.

*세존(世尊) : [범] Bhagavat ; Lokanatha ; Lokajyestha의 음역(音譯)으로 바가범(婆伽梵) 로가나타(路迦那他) 로가야슬타(路伽惹瑟吒)라 하며 부처님 십호(十號)의 하나,

부처님은 원만한 공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시므로, 이렇게 부르며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〇(70)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改過自新),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罪隨心滅).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心本空寂),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罪業無寄).

*자비(慈悲) ; 자(慈)는 ‘우정, 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로,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뜻, 비(悲)는 ‘연민, 동정’을 원의(原義)로,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뜻. 불보살(佛菩薩)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방편력(方便力) ; 뛰어난 교화방법. 일을 성공시키기 위한 방법론적 지혜의 힘. 방편의 작용. 중생을 인도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고안하여 세상에 펼치는 지혜의 작용.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유주무주(有主無主) ; ①주인(영가를 인도해 줄만한 인연있는 사람)이 있거나 없는. ②제주(祭主)가 있거나 없는.

*고혼(孤魂) ; 문상(問喪)할 사람이 없는 외로운 넋.

*선정(禪定) ; 산스크리트의 디야나(dhyāna), 팔리어 자나(jhāna)의 음역(音譯)인 선(禪)과 그 의역(意譯)인 정(定)이 합하여 생긴 말. 선(禪)은 정(定)·정려(靜慮)·기악(棄惡)·사유수(思惟修) 등으로 의역한다.

6바라밀의 하나. 마음 고요한 내관(內觀). 마음의 번뇌를 가라 앉히는 것. 정신 집중의 수련. 좌선에 의해 몸과 마음이 깊게 통일 된 상태.

*백목(白木) ; 무명실로 짠 천.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아귀•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보시(布施) : [범] dāna 음을 따라 단나(檀那) · 다나(柁那) · 단(檀) 등으로 음사(音寫)한다. 물질 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아공(我空) ; 인공(人空). 인무아(人無我).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아집(我執)에 대해,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아집(我執)은 번뇌장(煩惱障)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장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열반(또는 해탈)을 가로막아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게 하는 장애라는 의미이다.

*법공(法空) ; 법무아(法無我). 존재하는 만물 각각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법집(法執)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법집(法執)은 소지장(所知障)이라고도 하는데, 소지장은 참된 지혜, 즉 보리(菩提)가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라는 의미이다.

*구공(俱空):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경지에 차례로 도달한 후, 다시 그 아공(我空)과 법공(法空)까지도 버려 비로소 제법(諸法)의 본성에 계합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수행에 의해 이러한 경지를 증득한 것을 뜻한다.

 

 

 

-----------------(2/3)

 

*수순(隨順) ; 남의 뜻에 따르거나 순순히 따름.

*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도(度)·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여섯 가지 수행의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단바라밀(檀波羅蜜) ;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단(檀)은 산스크리트어 dāna의 음사(音寫)로 보시, 보시(布施)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바라밀(波羅蜜)은 도(度)•도피안(到彼岸)이란 뜻임.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수행의 법을 말함.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과 같음.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아만(我慢 나 아/거만할·게으를 만) ; 스스로를 높여서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① 오온(五蘊)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신체에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김. 자신을 과대 평가함.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애(我愛) ; 자아에 대한 애착심.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치(我癡) ; 자아(自我)를 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똥항(똥缸 항아리 항) : 재래식 화장실(칙간)의 바닥을 파고 이를 묻어 분뇨를 저장하던 것으로 이 항아리에 분뇨가 가득 차면 똥장군 등에 퍼담아 밭에 내다 거름으로 이용하였다.

*권화신(權化身) ; 여러 가지로 변하여 나타난 몸.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들어 안팎에 칠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라고도 한다.

*사리불(舍利弗), 목련존자(目連尊者)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속적삼 ; 저고리 속에 껴입는 적삼. 저고리 모양의 윗도리로 땀이 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입는 홑옷이다.

*다짜고짜로 ; 어떤 일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덮어놓고 바로.

*몰골 ; 볼품없는 모양새.

*거처(居處 있을·살 거/머무를·곳 처) ; ①일정하게 자리를 잡고 머무는 곳. ②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머무름.

*손 벌리다 ; 돈 따위를 귀찮게 요구하다.

*복록(福祿 복 복/복 록) ; 타고난 복과 벼슬아치의 녹봉(祿俸 예전에, 나라에서 벼슬아치들에게 벼슬살이에 대한 보수로 주던 곡식이나 베, 돈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는 뜻에서, 복되고 영화로운 삶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재액(災厄) ; 재앙으로 입게 되는 불운.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상(相) ; ①모습, 형태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대승불교도들의 실천덕목 중 하나. 상(相)에 머뭄(住)이 없는(無) 보시.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05~106.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한 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참고] 『금강경오가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무비 역해 | 불광출판부) p141~145, 『금강경오가해 설의 - 육조스님 금강경』 (원순 옮김 | 도서출판 법공양) p101~104.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 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또 수보리야, 보살은 법(法)에 응당히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할지니, 이른바 색(色)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물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육조 스님 해의解義)

부차(復次)라 한 것은 앞을 이어서 뒷말을 일으키려는 것이니라.

범부(凡夫)의 보시는 다만 아름다운 외모와 오욕의 쾌락을 구하는 고로, 그 과보가 다하면 곧 삼악도(三惡途 지옥,아귀,축생)에 떨어지므로, 세존께서 크나큰 자비로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무상보시(無相布施)’를 행하도록 가르치시니, 아름다운 외모나 오욕(五欲)의 쾌락을 구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는 인색한 마음을 없애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함이니, 이와 같이 상응(相應)하는 것이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色布施)’이니라.

 

무상(無相)의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한다'는 마음도 없고, 베푸는 물건도 없으며,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相布施)'라 하느니라. 보살이 보시(布施)를 행할 때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없으면 그 얻는 복이 시방(十方)의 허공과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일설에 '보(布)'란 '普(넓다)'요, '시(施)'란 '散(사방에 흩어버린다)'이니, 가슴 가운데 있는 모든 망념·습기·번뇌를 널리 흩어버려 사상(四相)도 끊어지고 마음에 전혀 쌓여 있지 않는 것이 '참 보시(眞布施)'라 하며, 또 일설에는 '보(布)'란 '普'니 육진 경계(六塵境界)에 머물지 않으며 유루(有漏)의 분별도 하지 않아 오직 항상 청정한 데 돌아가서 만법(萬法)이 공적(空寂)함을 요달함이니라.

 

만약 이 뜻을 요달하지 않으면 오직 온갖 업(業)만 더하므로, 모름지기 안으로 탐애(貪愛)를 없애고 밖으로 보시를 행해서 안밖이 상응하여야 무량한 복을 얻게 될 것이니라.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보아도 그 허물을 보지 않아서 자성(自性) 가운데 분별을 내지 않음이 '이상(離相)'이 되느니라.

가르침에 의해 수행해서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는 것이 곧 선법(善法)인 것이라. 수행인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선법이라 할 수 없고, 능소심(能所心)이 멸하지 않으면 마침내 해탈치 못하니, 순간순간 항상 반야지혜를 행하여야 그 복이 무량무변한 것이니라.

 

이같은 수행에 의지하면 일체 인천(人天 사람과 하늘신)의 공경하고 공양함이 따르니 이것을 복덕(福德)이라 하도다. 항상 부주상보시(不住相布施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보시)를 행하여 널리 일체 모든 중생들을 공경하면 그 공덕이 끝이 없어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무량무변(無量無邊) ; 한없이 크고 넓음. 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음.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 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4분 51초)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써,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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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雁飛天末迹留沙 人去黃泉名在家’ ;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36 게송 참고.

*(게송) ‘採得百花成蜜後 不知辛苦爲誰甘’ ;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36 게송 참고. 당대시인(唐代詩人) 나은(羅隱 833~909)의 시 《봉(蜂)》 참고.

*황천(黃泉) ; 저승(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

*아랑곳없다 ; 어떤 일에 참견을 하거나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이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일.

*삼재팔난(三災八難)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과 깨달음으로 향하는 청정한 수행에 방해가 되는 여덟 가지 난관.

삼재(三災) :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이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앉은삼재)를,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팔난(八難) : 깨달음으로 향하는 청정한 수행에 방해가 되는 여덟 가지 난관.

①지옥(地獄). ②아귀(餓鬼). ③축생(畜生). ④장수천(長壽天). ⑤변지(邊地). ⑥맹롱음아(盲聾瘖瘂). ⑦세지변총(世智辯聰). ⑧불전불후(佛前佛後).

①,②,③은 고통에 시달려 수행할 수 없기 때문,

④는 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여러 천(天)으로, 수명이 길고 편안하여 불법(佛法)을 구하지 않기 때문, ⑤는 북구로주(北俱盧洲)로서, 사주(四洲) 가운데 가장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

⑥은 눈이 멀고 귀먹고 말 못하기 때문, ⑦은 세속의 지혜는 있어도 그릇된 견해에 빠져 바른 가르침을 구하지 않기 때문, ⑧은 가르침을 설할 부처님이 안 계시기 때문임.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빠짐없이 두루 갖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