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공화(空花)2020. 3. 29. 21:05

 

 

공리화(No.533)—(게송)萬法由來空裏花 豈宜徒算海中沙 但從鐵壁銀山去 不問如何又若何 |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나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해 나갈 뿐이다.

 

*공리화(空裏花) ; 공화(空花, 空華).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88~89. (가로판 p92~94)

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이  如見空花起滅이니라.

 

중생이 나는 것 없는[無生] 가운데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註解) 性本無生故로  無生涅也요  空本無花故로  無起滅也라  見生死者는  如見空花起也요  見涅槃者는  如見空花滅也니라  然이나  起本無起요 滅本無滅이라  於此二見에  不用窮詰이니  是故로  *思益經云, 諸佛出世가  非爲度衆生이요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라 하시니라.

 

(주해) 성품에는 본래 남이 없으므로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없고 허공에도 본래 꽃이 없으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생사가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타나도 나타남이 없고, 사라져도 사라짐이 없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하여서는 더 따질 것이 없다。그러므로 『사익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견해를 건지기 위해서다」라고 하시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 에서.

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안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 ‘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환(幻)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6분 58초)

 

[법문] 송담스님(No.533)—1994년(갑술년) 하안거결제 법어(94.05.25) (용533)

 

만법유래공리화(萬法由來空裏花)헌디  기의도산해중사(豈宜徒算海中沙)리오

나무~아미타불~

단종철벽은산거(但從鐵壁銀山去)호되  불문여하우약하(不問如何又若何)니라

나무~아미타불~

 

만법(萬法)이 원래로 허공(虛空) 속에 꽃이다.

온 법계(法界)에 일월성진(日月星辰)과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두두물물(頭頭物物)과 산천초목과 일체(一切) 만법(萬法)이 다 허공 속에 핀 꽃이여.

 

허공 속에 무슨 꽃이 있는가?

눈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볼 때에는 허공은 맑아서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난 사람의 눈에는 허공 속에 온갖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여.

실지는 없는 것인데, 눈병 난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허공 속의 꽃이다.

 

기의도산해중사(豈宜徒算海中沙)리오. 어찌 쓸데없이 모래, 바다 가운데 모래를 세고 있느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몸뚱이 자체도 지 · 수 · 화 · 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한 것이고, 이 가죽 주머니 속에는 피와 똥과 오줌과 고름이 가득차 있는 더럽고도 추하고, 허망하고도 보잘 것 없는 그런 몸뚱이로 태어났으면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눈으로 보고 · 귀로 듣고 · 코로 냄새 맡고 · 혀로 맛보고 · 몸으로 느끼고 · 생각으로 온갖 것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고는.

그런 것들이 다 바다 가운데 있는 모래를 얼마나 되는가 세어 보고, 모래 속에 있는 이쁘게 생긴 조개껍질 같은 것을 주워가지고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서로 그것을 취(取)할려고 싸우고, 일평생 동안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가지고 오욕락(五慾樂)에 빠져서 그것을 자기가 취(取)할려고 싸우는 것들이 허공 속에 있는 꽃인 줄 모르고, 바다 가운데에 있는 모래를 세고 있는 것에다가 비유를 하신 것이여.

 

확실히 그것이 영원성(永遠性)이 없는 것이고 허망(虛妄)한 것인 줄 알고, 쓸데없는 것인 줄 확실히 안다면 이 더러운 몸뚱이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을, 그놈을 찾는 일밖에는 인생(人生)으로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거거든.

 

단종철벽은산거(但從鐵壁銀山去)여. 은산철벽(銀山鐵壁),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참구(參究)하되 다맛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앞이 콱 맥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오직 본참공안에 대한 의심이 은산철벽처럼 그렇게 일념만년(一念萬年)으로 지어가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이거여.

 

'이 공부를 해서 내가 정말 깨달을 수 있는 것인가, 깨달을 수 없을까?' '정말 내가 깨달을 만한 그러한 근기(根機)가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도 따질 것이 없어.

 

불문여하우약하(不問如何又若何)여.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묻지를 말아라.

 

이 몸뚱이는 비록 허망(虛妄)하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조끔도 다름이 없는 거여. 진여불성(眞如佛性)은.

그래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나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해 나갈 뿐이다.(처음~7분1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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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만법유래공리화(萬法由來空裏花)~'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제5권. 「선게(禪偈)」 '贈圓沙彌求頌' 게송 참고.

*만법(萬法 일만 만/법 법) ; 모든 존재 · 사상(事象 관찰할 수 있는 사물과 현상). 여기에서의 법은 사상 · 사물의 뜻이다. 일체법(一切法) · 제법(諸法)이라고도 한다.

*'허공(虛空) 속에 꽃' ; 공리화(空裏花). 공화(空花).

*공화(空花, 空華) ;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공화(366:88년 칠석:3분44초).mp3
1.72MB

[참고] 송담스님(No.366)—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3분 44초)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한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하고 그렇게 딱! 믿어 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왜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이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병이 든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이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저 더운 날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그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그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 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못 믿을 것도 없다 그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그 자성이 없다’고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시고, 성현들이 ‘없다’고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안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분명히 이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그 성현의 말씀을 안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 ‘그냥 없다’고 딱!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참 그게 그렇게, 당장 그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을 얻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은(銀)으로 만든 산이요, 쇠로 만든 벽에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앞뒤가 다 끊어져 버린 절박한 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아무것도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거기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가리킴.

 

수행자에게 이 은산철벽은 내 몸과 목숨을 다해서 뚫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는 관문(關門)으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 등어리에 올라타고서 그 입부리를 소 등에다가 처쑤셔박는 것처럼,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입부리와 머리와 몸을 압량해서, 합해서 처박고 돌격을 해 들어가야 한다.

자기의 근기(根機)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건강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어리석고 영리한 것도 따질 것도 없고, 남녀노소도 따질 것도 없고, 유식 무식도 따질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되 불급불완(不急不緩), 너무 용을 쓰고 몰아붙여도 안 되고 너무 늘어져 처져도 안 되고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어야 한다. 공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따질 것이 없다.[송담스님(No.577) 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7~158 에서.(가로판 p150~151)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
ㄱ/공화(空花)2020. 1. 10. 17:27

공화(空花) (No.176)—(게송)萬事悠悠此百年~ | 일점영명(一點靈明) | 생사는 본래 없다 | (게송)萬朶靑山圍梵刹~ | 생사 없는 진여불성 자리.

 

*공화(空花, 空華) ;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88~89. (가로판 p92~94)

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이  如見空花起滅이니라.

 

중생이 나는 것 없는[無生] 가운데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註解) 性本無生故로  無生涅也요  空本無花故로  無起滅也라  見生死者는  如見空花起也요  見涅槃者는  如見空花滅也니라  然이나  起本無起요 滅本無滅이라  於此二見에  不用窮詰이니  是故로  *思益經云, 諸佛出世가  非爲度衆生이요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라 하시니라.

 

(주해) 성품에는 본래 남이 없으므로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없고 허공에도 본래 꽃이 없으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생사가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타나도 나타남이 없고, 사라져도 사라짐이 없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하여서는 더 따질 것이 없다。그러므로 『사익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견해를 건지기 위해서다」라고 하시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에서.

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안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 ‘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환(幻)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1) 13분 19초.

(2) 9분 44초.

 

[법문] 송담스님(No.176)—민대법화 영가 3재(82.07.10) (용176)

 

(1)------------------

 

만사유유차백년(萬事悠悠此百年)한데  환여역려잠류련(還如逆旅暫留連)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별천애구시객(一別天涯俱是客)인데  부운유수석양변(浮雲流水夕陽邊)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사유유차백년(萬事悠悠此百年)한데  환여역려잠류련(還如逆旅暫留連)이로구나.

만사(萬事)가 유유(悠悠)한 이 백년(百年), 사람이 나서 한평생을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백 년인데, 그 백 년 동안 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을 울다가 웃다가 슬퍼하다가 성내다가 기뻐하다가, 이럭저럭하면서 백 년 동안 인생살이가 마치 뭣과 같으냐 하면 여행을 하는 거와 같다.

 

여행을 하는데, 출발해 가지고 목적지에까지 도달하는데 때로는 날씨가 좋았다가 때로는 비가 왔다가 때로는 바람이 불었다가, 겨울이면 눈이 왔다가 먹구름이 끼다가, 평지를 가다가 또는 물을 건너기도 하고 또는 산을 오르기도 하고 산을 내리기도 하고, 인생 일생사가 마치 긴 여행을 하는 거와 같다.

 

일별천애구시객(一別天涯俱是客)인데  부운유수석양변(浮雲流水夕陽邊)이로구나. 한번 저 하늘갓으로 떠나버리면, 이별을 해서 뚝 떠나버리면 떠나는 사람도 손이요, 전송을 하는 사람도 손이더라.

나도 여행을 하고 저 사람도 여행을 하는데, 여행하는 도중에 두 사람이 만나서 잠시 한 여관에 들어서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을 자다가 날이 새면 한 사람은 동쪽으로 떠나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떠나는 그러한 경우에 동쪽으로 떠나는 사람도 손이요, 서쪽으로 떠나는 사람도 객(客)이더라.

 

전송(餞送)을 하면서 또 전송을 받으니까 두 사람이 다 손인데, 부운유수석양변(浮雲流水夕陽邊)이여. 구름은, 하늘에서 떠 있는 구름은 바람 따라서 저 하늘갓으로 날아가고, 흐르는 물은 높은 데서 낮차운 데로 낮차운 데로 흐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떠나는 사람이 뜬구름같이 떠났다면 서쪽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 내려가고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부모를 의지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때로는 남자로 태어나고 또 어떤 경우는 여자로 태어났어. 태어난 사람이 서로 결혼을 해서 아들딸 낳고 돈 벌고 이리 살다가 한 사람이 먼저 떠나고 또 한 사람은 나중에 떠나는데.

뜬구름이 하늘에서 바람 따라서 날아갔다고 해서 슬퍼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흐르는 물이 지세(地勢) 따라서 흐르고 흘러서 바다로 내려갔다고 해서 그것을 슬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여행 중에 두 사람이 만나가지고 여관에서 하룻밤 같이 이야기하고 지내다가 그 이튿날 이별할 때에 조금 섭섭은... 아주 다정한 경우에는 좀 섭섭한 생각은 있을 수가 있겠지만, 그걸 다리를 뻗고 땅을 치고 통곡하고 그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가족을 이루다가 한 사람이 먼저 가고 뒷사람이 뒤에 간다고 해서 그렇게 통곡을 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그럴 것도 사실은 없는데.

정(情)으로 얽힌 존재들이라 기왕이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같이 해로(偕老)를 하고 자기의 명(命)을 다했으면 좋겠지만, 생사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라, 이렇게 젊은 나이로 인생을 이승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민대법화 영가, 오늘 3재를 맞이해서 숙세의 인연이 있어서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서 3재 천도(薦度) 법요식(法要式)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미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최상승 법문에 의해서 무량겁 업장(業障)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버렸고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라서 다시 거기에다가 더 설할 법이 없지만 재자(齋者)의 간청으로 산승(山僧)이 잠간 법상(法床)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뜬구름 같은 인생이요, 흐르는 물과 같은 인생이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 몸뚱이가 이루어졌지만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일점영명(一點靈明)은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지수화풍 사대가 무너져서 이 육신은 버렸지만 이 일점영명은 무너진 것이 아니여.

 

생사(生死)라 하는 것은 ‘낳다’고 해서 새로 태어난 것이 없고 ‘죽었다’고 해서 없어질 것도 없을 바에는—마치 허공에 꽃이 눈병 걸린 사람의 눈에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원래 공화(空花)는 없는 것이여.

눈병 걸린 사람에게 있어서 허공에 공화가 피었다고 해서 그 공화 자체가 피어 있는 것이 아니고, 눈병이 나아 버린 뒤에는 공화가 그 찰나에 없어진다고 해서 원래 없어졌든 공화가 새롭게 무엇이 없어질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공화 자체는 눈병이 난 뒤에나, 눈병이 치료가 된 뒤에나 원래 공화는 없었던 것이여.

중생의 생사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없는 생사에 무엇을 슬퍼할 것이 있고, 무엇을 천도(薦度)할 것이 또한 있느냐 이 말씀이여.

 

생사는 뜬구름 공화(空花)와 같은 것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로 원망하고 친숙하고 한 것도 또한 무엇을 원망하며 무엇을 애착을 가질 것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처음~13분21초)

 

 

 

(2)------------------

 

만타청산위범찰(萬朶靑山圍梵刹)한데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하고  가가문외통장안(家家門外通長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타청산위범찰(萬朶靑山圍梵刹)인데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라.

만 송이 울긋불긋한 꽃과 잎이 우거진 청산에 둘러싸인 절이여. 절은 만 송이의 청산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고,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라. 한 장대 길이만큼 높이 뜬 붉은 해는 영대(靈臺)를 비추더라.

영대는, 우리의 몸뚱이를 끌고 다니던 주인공 그 영대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이 빛나고, 지금 우리 용화사 법당 주변의 산이 천산만산(千山萬山)이 위요(圍繞)하고 있고, 붉은 꽃과 푸른 숲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는데.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요, 곳곳이 푸른 버드나무에는 가히 말을 매 둘만 하다. 말을 버드나무에다가 말을 매 놓듯이—목적지를 향해서 가는데 말을 타고 가는데, 그 말을 쉬는데 있어서 어디라도 그 있는 버드나무에 묶어 맬 수가 있고.

가가문외통장안(家家門外通長安)이라. 어느 집이든지 문밖에 나가면 방향을 잡어가면은 결국은 서울에 도달할 수가 있더라. 모든 길은 다 서울로 통하고 있더라.

 

생사(生死)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일정한 모양과 일정한 국집(局執)된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뜨면 해와 달이요, 땅으로 내려오면 산이요 물이요 나무요. 인연 따라서 천당도 좋고 극락도 좋습니다.

새로운 몸을 받아 날 때까지는 이 용화사 법보전에 여러 도반들과 더불어 법문을 듣고 삼매(三昧)에 들었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좋은 곳에 태어나서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아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없는데 무엇을 도(道)를 닦으며, 본래 생사가 없는데 무슨 중생을 제도(濟度)하리요마는, 생사 없는 곳을 향해서 해탈(解脫)을 해야 하고, 설할 바 없는 법(法)을 향해서 법을 설해야 하고, 닦을 바 없는 곳을 향해서 닦아야 하고, 한 중생도 제도 받을 바가 없는 곳을 향해서 제도를 하는 것이 바로 이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분명 생사가 없지마는 태어났다가 한평생을 살다가 또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치에 있어서는 분명 생사가 없지마는 현실에 있어서는 면할 수 없는 생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이 출현을 하셔야 하고, 우리는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 의지해서 닦아야 하고, 이렇게 또 천도 법요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인생에 있어서 짧은 생애를 가졌지만 본래 어질고 착하고, 불법에 깊은 인연을 맺었고 그러한 공덕(功德)으로 인해서 이 정법(正法) 도량에서 천도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한이 있다 하더라도, 못다 푼 한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 이 시간을 기해서 깨끗이 다 잊어버리고, 다 풀어버리고, 실상(實相)의 자리에 안주하시기를 바랍니다.(13분25초~23분9초)

 

 

 

------------------(1)

 

*(게송) ‘만사유유차백년~’ ; 1, 2, 3구는 『경허집(鏡虛集)』 (경허성우 스님) ‘和映湖堂(영호당에게 화답하다)’ 4구는 ‘別友人(벗을 작별하며)’.

*만사(萬事) ; ①여러 가지 온갖 일. ②집착으로 가득 찬 마음의 모든 것.

*유유하다(悠悠-- 멀·아득할·한가할 유) ; ①움직임이 한가하고 여유가 있고 느리다. ②아득하게 멀거나 오래되다.

*한평생(한平生) ; 살아 있는 동안. 일평생(一平生). 평생. 필생(畢生).

*하늘갓 ; 하늘가(하늘의 끝). 천애(天涯 : 하늘의 끝.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 손님. 객(客). ①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 ②남의 집을 방문한 사람. 남의 집이나 여관 따위에 묵고 있는 사람. ③지나가다 잠시 들른 사람.

*전송(餞送 전별할·보낼 전/보낼·전송할 송) ; 서운하여 전별(餞別 떠나는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 인사를 하여 보냄[送]. 예를 갖추어 떠나보냄을 이르는 말.

*뜬구름 ; ①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②덧없는 세상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해로(偕老 함께 해/늙을 로) ; 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며 늙음.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천도 법요식(薦度 法要式) ; 천도재(薦度齋).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재자(齋者) ; 절에 재(齋)를 올리거나 불공(佛供)하러 온 사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일점영명(一點靈明) ; 일점영광(一點靈光). 한 점의 신령한 밝음. 우리 본래 마음. 불성을 가리킨다.

*'공화 자체는 눈병이 난 뒤에나, 눈병이 치료가 된 뒤에나 원래 공화는 없었던 것이여. 중생의 생사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2)

 

*(게송) ‘萬朶靑山圍梵刹  一竿紅日照靈臺’ ; 불교 장의(葬儀) 의식 「시다림(尸陀林) : 죽은 이를 위해 설법하는 의식」 ‘염습(殮襲)’ 안좌게(安坐偈) 참고.

*(게송) ‘處處綠楊堪繫馬  家家門外通長安’ ; 불교 장의(葬儀) 의식 「시다림(尸陀林) : 죽은 이를 위해 설법하는 의식」 ‘발인(發靷)’ 기감(起龕) 참고.

*영대(靈臺 신령할 영/대·받침대 대) ;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뜻으로 마음을 이르는 말.

*위요(圍繞 둘레·에워쌀 위/두를·에워쌀 요) ; 어떤 지역이나 현상을 둘러쌈.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삼매(三昧) : 정(定). ①계(戒) · 정(定) · 혜(慧) 3학의 하나. ②[범] samadhi 음대로 써서 삼마지(三摩地) · 삼마야(三摩耶) 또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마음을 집중 · 통일시키는 수행, 또는 그 수행으로 이르게 된 평온한 마음 상태.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Posted by 닥공닥정
ㄱ/공화(空花)2016. 7. 12. 10:51

공화(空花) (No.366)—최상승법 수행인은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라고 믿어 버리는 것이여 | 눈병, 허공의 꽃.

 

*공화(空花, 空華) ; ().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 .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 말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88~89. (가로판 p92~94)
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이  如見空花起滅이니라.

중생이 나는 것 없는[無生] 가운데서 망녕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註解) 性本無生故로  無生涅也요  空本無花故로  無起滅也라  見生死者는  如見空花起也요  見涅槃者는  如見空花滅也니라  然이나  起本無起요 滅本無滅이라  於此二見에  不用窮詰이니  是故로  *思益經云, 諸佛出世가  非爲度衆生이요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라 하시니라.

(주해) 성품에는 본래 남이 없으므로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없고 허공에도 본래 꽃이 없으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생사가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타나도 나타남이 없고, 사라져도 사라짐이 없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하여서는 더 따질 것이 없다。그러므로 『사익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견해를 건지기 위해서다」라고 하시니라.

 

(7분 24초)

 

[법문] 송담스님(No.366)—88(무진년) 칠석차례 법어(88.08.18)(용366)

 

망상(妄想) 끊을려고 해서는 아니 되는 거여. 망상을 끊을려고 하면끊을려고 하는 생각 바로 망상이 되기 때문에 망상을 끊을려고 해서는 아니 되는 거여.

마치 일어나는 파도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꾸 손으로나, 판때기로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물을 누른다든지,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이리저리 친다든지, 이래봤자 파도가 없어지기 커녕은 오히려 새로운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말이여.

 

소승(小乘) 공부하는 법이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을 없앨려고 한다 그말이여.

망상이라고 하는 것을 인증을 하고 망상을 없앨려고 무한히 노력을 하고,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서 생사를 없애기 위해서 무한히 노력을 .

 

심지어는낳다 죽었다 생사가 싫으니까, 생사를 없게 하기 위해서 태중(胎中) 들어가기를 꺼린다 그말이여.

사람이나 짐승의 뱃속에 태중에 들어가면은 낳게 되고, 낳으면은 늙어서 병들어 죽게 되니까, 늙어서 병들어 죽어가는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받지 않기 위해서 태중에 들어가. 태중에 들어가는 것을 제일 무서워한다 그말이여.

 

그러기 때문에 태중에 들어갈려면은 어떻게 해야 들어가냐? 우리의 중생의 번뇌(煩惱) 끊어야 한다.

번뇌가 바로 생사심이고 생사심 때문에 () 들어가게 되고, 태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낳게 되고, 낳음으로써 늙어서 병들어 죽는다.

생사(生死) 들어갈라면은 () 들어가야 하고, 태에 들어갈라면은 우리의 번뇌 망상을 끊어야 한다. 그래서 번뇌 망상을 끊기 위해서 한량없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승들의 수행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면 대승법, 최상승법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아무리 최상승법을 믿고 이렇게 참선을 한다고 해도 한량없는 번뇌와 망상이 일어납니다. 눈으로 보면은 보는 데에서 일어나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 듣는 데에서 일어나고, 무엇을 맛보면 맛난 데에서쓰다, 달다, 맛있다, 맛이 없다끊임없이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 생각이 일어난다 그말이여.

코로 무슨 냄새를 맡으면은! 이거 무슨 기름 냄새가 난다, 무슨 고약한 시궁창 냄새가 난다, 무슨 좋은 냄새가 난다, ! 이거 무슨 향내냐? 무슨 화장품 냄새냐?’ 이래 가지고 코를 통해서도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난다 그말이여.

 

그런데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생사(生死)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하고 그렇게 ! 믿어 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본래 없는 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병이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더운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나 생각해 보라 그말이여.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 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없다 하면, ‘없다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믿을 것도 없다 그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자성이 없다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없다 하시고, 성현들이없다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없다 하면 말을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분명히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성현의 말씀을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그냥 없다 !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그게 그렇게, 당장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 얻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1644~247)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고]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 에서 요약.

〇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 생기는데, 육식(六識)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있는 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 동시에 ()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우주 법계가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소소영령(昭昭靈靈) 우리의참나라고 하는 불성(佛性) 생사(生死) 없는 것입니다.

 

생사가 없는 이치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생사는 본래 없다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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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妄想 망녕될 /생각 )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 생각() , 또는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

*소승(小乘) : [] Hinayana 소승(小乘)이란 작은 수레란 뜻이다。수레는 사람을 태워서 험한 곳을 지나 안전한 곳에 가게 하는 것인데, 작은 수레는 아이들이나 타게 되며, 옅은 물이나 건널 있는 것이다。<법화경>에는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처음 인천교를 말씀하신 다음으로 옅고 낮은 이치의 길을 가르쳐, 생각을 끊고 마음을 비게 하여 열반(涅槃) 고요한 즐거움을 얻도록 하셨다。그 속에는 사제법(四諦法) 깨치면 아라한(阿羅漢) 되고, 십이 인연법(十二因緣法) 깨치면 연각(綠覺)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승에도 가지 길이 있으므로 이승(二乘)이라고도 한다。소승법을 말씀한 대표적 경전은 <아함경(阿含經)> <구사론(俱舍論)> <성실론(成實論)> <사분승계본(四分僧戒本)> <사분비구니계본> 등이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괴로워할 )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성냄()•어리석음()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앞의 () () ()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 삼도(三道) 설명한다. 번뇌[]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 과보를 받게 된다.

*대승(大乘) : [] Mahayana 대승(大乘)이란 수레를 뜻한다。큰 () 뜻을 세워서 나를 희생하여 모든 중생을 즐겁고 편안하게 건져 주겠다는 보살심(菩薩心) 있는 이들을 위하여, 육도(六度) 만행(萬行) 닦아 가도록 깊은 이치를 말씀하신 법문이다.

대표적인 경전은 <반야경(般若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능가경(楞伽經)> <기신론(起信論)> <범망경(梵網經)> 같은 것들이다.

법문을 요약하여 말하면, 세상에 온갖 물질과 (森羅萬象) 벌어져 있으나, 낱낱이 현상(現象) 그대로 비어 없는 것이며, 모든 차별된 것이 그대로 평등하여 열반인 것이다。따라서 무엇에나 걸릴 것이 없는 것이다.

소승의 열반이 소극적이며 작고 옅은 것이라면 대승의 열반은 적극적이며 크고 참된 것이다。한 중생도 남음이 없이 모두 제도한 뒤에야, 자기가 성불하겠다는 소원이야말로 대승의 보살심인 것이다.

*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

*고냥 ; 그냥. 이상의 변화 없이 상태 고대로.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