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신불(No.414)—(게송)見色非干色 聞聲不是聲 色聲不礙處 親到法王城 | 거울 속에 나타난 삼라만상 두두물물은 자기의 얼굴이다 |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 진진찰찰이 다 부처님, 일체 소리가 다 부처님의 설법, 일체 색상이 다 법신불의 몸뚱이다. 그러니 거기에 즉해서 '참나'를 깨닫는 화두로 돌아와야 한다.


*법신불(法身佛) ; 법신(法身).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법불(法佛) · 이불(理佛) · 실불(實佛) · 법신불(法身佛) · 법성신(法性身) · 자성신(自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한물건’이란 것도 이것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絶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무슨 소리를 듣던지, 무슨 모양을 보던지 그것을 듣고 봄과 동시에 그것을 인연해서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즉시 ‘이뭣고?’ 이렇게 다잽이를 해 가면 마침내는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설(說)하고 들음[聽]이 동시인 법신불의 설(說)한 바 없이 설한 법문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신불은 우리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오직 보신(報身)이나 화신(化身)만이 우리는 볼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것은 초보의 단계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고 또 그렇게 말을 해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는, 정말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법보제자(法寶弟子)는 「진진찰찰이 다 부처님이요, 새소리 닭소리 바람소리 일체 소리가 다 부처님의 설법이요, 일체 색상(色相)이 다 부처님의 몸뚱이다. 그러니 거기에 즉해서 '참나'를 깨닫는 화두(話頭)로 돌아와야 한다」고 하는 철저한 신심(信心)을 가지고 그렇게 공부를 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뭣고?’ 한마디에 ‘참나’를 깨닫고,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어찌 거짓말이겠습니까.

 

(15분 59초)


[법문] 송담스님(No.414)—1990년 4월 첫째 일요법회(용414)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에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色相)—청황적백의 빛깔이나, 크고 작고 짧고 길고 하는 모든 모양이 그것이 색(色)이 아니여. 모든 색상이 색상이 아니여. 모든 소리를 듣되 그 소리가 소리가 아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색상(色相)이다. 저것은 집이요, 저것은 나무요, 저것은 바위요, 저것은 자동차다. 저것은 산이고 저것은 들이다’ 다 그 색상으로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또 ‘그것이 푸르다 붉다 희다 검다’ 또 이렇게 그것에 대해서 자기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또 그렇게 생각이 자꾸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색상(色相)이 색상(色相)이 아니다」 이거거든. 중생은 그걸 보고 ‘색상이다’ 하고 색상이라고 보고서 온갖 색상에 대한 알음알이가 일어나는데, 그 색상이 색상이 아니다.
또 소리를 들으면 ‘저건 애기가 우는 소리다, 자동차 소리다, 비행기 소리다, 저건 기계 돌아가는 소리다, 저건 기침 소리다’ 다 소리를 듣고서 소리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 다 이 생각 저 생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소리가 아니다」 이거거든.

그러면 「색상을 보되 색상이 아니고, 온갖 소리를 듣되 소리가 아니다」 하는 말은 무슨 말인가?

온갖 색상, 온갖 소리에 걸리지 아니하면(色聲不礙處)—그런데 다 거기에 걸리거든. 걸려 가지고 그놈에 끌려서, 보면 보는 대로 끌려 나가 가지고 그놈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무슨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라고 하는 그 소리의 올가미에 걸려 가지고 그놈에 끌려다녀.
그런데 그놈에 걸리지 아니하면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다. 친히 법왕(法王)이 계시는 곳에 도달하느니라.


우리 눈 앞에 보는 모든 것,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거,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거, 생각으로 느낄 수 있는 거, 전부가 그것이 다 제법(諸法)인데, 우리 눈 앞에 벌려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이것이 제법인데, 그 제법(諸法)은 거울 속에 나타난 형상이다 그거거든.

이 허공(虛空)이라고 하는 큰, 이 끝없이 넓고 넓은 이 텅 빈 거울 속에 나타난 모양인데, 그 모양이 모양이 아니고, 산이 나타나되 그 산이 산이 아니고, 소가 나타나되 소가 소가 아니여. 그러면 소가 아니고 산이 아니면 무엇이냐?
자기의 얼굴이여! 그것이. 거울 속에 나타난 얼굴을 보고서 자기의 얼굴을 보는 거여.

무슨 소리를 듣되 그 소리 쪽으로 끌려가지 말고, 그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그 소리에서 자기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무슨 형상을 보되 그 형상으로 끌려다니지 말고 그 보는 형상에서 바로 자기를 보라 이거거든.
정든 사람이 죽으면 ‘정든 사람이 죽었다’ 해 가지고 울고불고 슬픔에 잠기고 그것에 다 끝날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해서 일단은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고, 자기의 죽음만 생각할 게 아니라, 바로 거기서 자기로 돌아올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시시각각으로 나타나는 소리와 모양을 보고서 전부 다 그리 끌려다니고, 일생을 그러고 무량겁(無量劫)을 그렇게 내려오기 때문에 생사(生死)의 수레바퀴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해.

눈으로 보는 모든 색상, 귀로 듣는 모든 소리, 우리의 생각에 떠오르는 온갖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생각들, 그것을 제법(諸法)이라 그러거든.
우리가 ‘법(法)’ 하면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의 법(法) 하면은 ‘부처님과 법과 거룩한 스님은 삼보가 일체(一體)다’ 그러는데, 부처님이 설하신 법만 법이 아니고 우주법계에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그것을 제법(諸法)이라 그러는데, 왜 그것을 제법이라고 하냐 그 말이여.

우리 눈으로 보면은 전부가 무상(無常)한 것이고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어서 전부가 무상하고 허망하고 믿을 수 없는 것 뿐인데 그것을 어째서 거기다가 제법(諸法)이라 하냐?
그것이, 바로 그것이 법이기 때문에 법이라 그런 거여. 그것을 통해서 ‘자기’로 돌아올 수가 있으니 그것이 어찌 부처님의 설하신 법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이여.

모든 삼라만상의—나나,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이나 동물이나 그런 정(情)이 있는 모든 동물 또 무정물(無情物), 산천초목, 일월성진 그런 것들이,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이 ‘나’다. 왜 그것이 ‘나’냐?
그것은 법신불(法身佛)이기 때문에 그래. 법신불의 몸뚱이요, 법신불의 설법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서 자기로 돌아올 수 있어야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이 아니냐!

그래서 그 거울 속에 나타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얼굴이여. 거울 속에 나타난 모습, 허공이라고 하는 큰 거울 속에 나타난 삼라만상 두두물물을 바로 거기에 즉해서 자기로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그곳이 법왕(法王)이 계시는 곳이더라, 법왕성(法王城)이다 이거거든.


진진찰찰(塵塵刹刹)—온 해나 달이나, 산이나 돌이나, 한 포기의 풀 이파리나, 우는 새소리 이것이 다 진진찰찰인데 이것이 법신불(法身佛)의 모습이요, 법신불의 설법(說法)이여. 왜 그러냐 하면 법신불은 무설이설(無說而說)인데, 설한 바 없이 설하신 것이 법신불의 설법인데 어떻게 설하시냐?
동시(同時)에 설(說)하시면서 동시에 듣는 거여. 한 포기의 풀도 간단(間斷)없이 법을 설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설법을 또 듣고 있어. 한덩어리의 주먹만 한 돌, 좁쌀알만 한 모래알 하나하나라도 바로 그 위치에서 위없는 법을 설하면서 동시에 법을 또 듣고 계신 것이여. 설할 때 따로 있고, 들을 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설(說)과 청(聽)이 동시(同時)여.

이러한 도리(道理)를 우리가 바로 깨달라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도리는 말이나 생각으로 구할 수 없는 것이여. 중생의 사량분별로 헤아려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여. 이것은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하는 거여.

이러한 법문은 어떻게 하면은 그러한 도리를 깨달을 수가 있느냐?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그 소리 듣자마자 ‘이뭣고~?’ 눈을 통해서 무슨 모양을 보자마자 바로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
슬픈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기쁜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붉은 것을 봐도 ‘이뭣고?’ 파란 것을 봐도 ‘이뭣고?’
좋은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속상한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무슨 소리를 듣던지, 무슨 모양을 보던지 그것을 듣고 봄과 동시에 그것을 인연해서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즉시 ‘이뭣고?’ 이렇게 다잽이를 해 가면 마침내는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설(說)하고 들음[聽]이 동시인 법신불의 설(說)한 바 없이 설한 법문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신불은 우리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오직 보신(報身)이나 화신(化身)만이 우리는 볼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것은 초보의 단계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고 또 그렇게 말을 해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는, 정말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법보제자(法寶弟子)는 「진진찰찰이 다 부처님이요, 새소리 닭소리 바람소리 일체 소리가 다 부처님의 설법이요, 일체 색상(色相)이 다 부처님의 몸뚱이다. 그러니 거기에 즉해서 '참나'를 깨닫는 화두(話頭)로 돌아와야 한다」고 하는 철저한 신심(信心)을 가지고 그렇게 공부를 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뭣고?’ 한마디에 ‘참나’를 깨닫고,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어찌 거짓말이겠습니까.(16분33초~32분3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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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 ; 『금강경오가해』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야부 게송 참고.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법왕(法王) : [범] dharmaraja  부처님은 진리 곧 법을 가장 밝게 깨치시고, 법을 걸림 없이 쓰시고 법을 널리 가르쳐서 법에 있어 제일 높은 어른이므로, 「법의 임금」이라고 존칭한 말이다. 또한 모든 세속 임금들에게도 큰 스승이 되고, 온갖 성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므로 법왕이라 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 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 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삼보(三寶) ;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집단(僧寶) 의 3가지를 보배에 비유한 말. 이것은 불교를 구성하는 3가지의 중요한 요소임.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임.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계(法界) ; [범] dharmadhatu  dharma 곧 법은 온갖 유형 무형의 물질과 모든 일과 어떤 이치이거나를 다 들어 말하고  dhatu는 경계(境界) 또는 범위(範圍)란 말이다. 그러므로 온갖 것[萬有]을 총괄하여 하는 말이니, 우주의 전체와 진리의 전체, 법 성품(法性)의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成],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住], 쇠퇴하여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壞], 모든 것이 괴멸되어 허공만 있는 과정(상태)[空]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4~135. (가로판 p139~141)
佛云,  無常之火가  燒諸世間이라 하시고  又云,  衆生苦火가  四面俱焚이라 하시며 又云,  諸煩惱賊이  常伺殺人이라 하시니  道人은  宜自警悟하야  如救頭燃이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살라 버린다」하시고, 또 「중생들의 고뇌의 불이 사면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하시며, 또 「모든 번뇌의 적이 항상 너희들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하시니, 수도인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할지어다.

註解(주해) 身有生老病死하고  界有成住壞空하고  心有生住異滅하니  此無常苦火가 四面俱焚者也라
【謹白參玄人하노니  光陰을  莫虛度하라

몸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세계에는 이루어지고 지속되고 파괴되고 없어져 버리는 것이 있으며, 마음에는 일어나고 머물고 변해 가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덧없는 고뇌의 불이 사면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치를 참구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부디 광음을 아껴 헛되이 보내지 말라.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주요한 네 가지 현상. 출생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생(生), 노쇠하는 현상을 노(老), 병든 현상을 병(病),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사(死)라 한다.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일반적 형식으로서 사상(四相)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고통이기 때문에 사고(四苦)라고도 한다. 생로병사가 사라진 경계가 무위법(無爲法)인 열반(涅槃)이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生], 머물고[住], 변화하고[異], 소멸함[滅]. 또는 그런 현상.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법신불(法身佛) ; 법신(法身).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법불(法佛) · 이불(理佛) · 실불(實佛) · 법신불(法身佛) · 법성신(法性身) · 자성신(自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한물건’이란 것도 이것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絶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영장(靈長) ; 영묘(靈妙)한 능력을 가진 우두머리[長]. 인간을 다른 생물과 대비하여 이른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진진찰찰(塵塵刹刹) ; ①티끌 수와 같이 무수한 국토를 말한다. ②미세한 티끌 가운데에도 국토가 있다는 것.
진진찰토(塵塵刹土), 찰찰진진(刹刹塵塵)이라고도 한다. 진진(塵塵)은 티끌. 찰(刹)은 산스크리트어 kṣetra의 음사(音寫). 토(土), 국(國), 처(處)라고 번역. 국토. 세계. 땅. 장소. 영역.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絶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絶]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대총상(大總相法門) ; 진여(眞如)를 가르켜 말함. 진여의 실체. 진여가 광대하여 모든 것을 포섭한 것을 대(大)라 하고, 일미 평등(一味平等)하여 차별의 모양을 여읜 것을 총상(總相), 수행하는 이의 모범이 되는 것을 법(法), 관하는 지혜가 드나드는 것을 문(門)이라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 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보신(報身) ;부처가 전생에 보살로 있을 때 세운 서원(誓願)과 수행의 과보(果報)로서 받은 몸. 
모든 부처가 법신 · 보신 · 화신을 동시에 갖추고 있지만 대표적인 보신불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사여래(藥師如來) 등이 있다.
아미타불은 48가지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성불한 보신불로서 서방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건립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약사여래는 12가지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성불한 후 동방의 유리세계(瑠璃世界)에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고 한다.
*화신(化身) ; 화현(化現)한 몸[身]. 변화된 신체. 화신불(nirmaka-kaya 化身佛). 부처의 삼신(三身 : 法身 · 報身 · 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응화신(應化身) · 변화신(變化身) ·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19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여기 (용화선원 대웅전 법보단)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대웅전 법보단, 舊 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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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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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