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 15분.

(2) 11분 32초.

 

[법문] 전강선사(No.250) - 고담화상법어 2 (72.06.03.새벽)[몽산법어 부록 06](전250)

 

(1)-------------------

 

'이뭣고?'를 허는데 '이-뭣고?' 시심마(是甚麽)거든. 시심마.

'이 시(是)'자, 심(甚)자는 '무엇'이란 심(甚)자여. '무엇인고?' 그 심(甚)자여.

시심마(是甚麽), 마(麽)자는 아무 거 의미 없는 자여. '뭣이냐?' 그말이여. 뜻 밑에 그 받침이여.

 

두 자 뿐이여. 심마(甚麽)뿐이여. 심마(甚麽).

시심마(是甚麽)여. 석자 뿐이여.

 

“이”, 봐 “이” 했지.

“이”, “이” 해 놓고 보니 뭐냐? 그말이여. 뭐여?

 

다시 들어보시오. “이” 해 놓고 보니 뭐여?

그걸 못 들어? 못 들을 게 뭐여.

 

천하에 도무지 무슨 뭐, 어디 그 무슨 뭐 뭐 뭐, 어디 거다가 뭐 책보로 싸 놨나? 뭘로 뭐 뭉쳐 놓았나?

 

'이뭣고?' '이- 뭣고?'

'이- 헌 놈이 뭣고?' 할 것 없어. '이- 뭣고?'

 

'뭣고?' 허면 '이- 뭣고?'

'뭣고?' 허면 알 수 없는 놈 하나 딱! 불거진다.

알 수 없다. 알 수 없구나. 그거이 그걸 활구(活句)라 햐. 알 수 없는 걸 활구라 햐.

 

요만큼이라도 조만큼이라도 터럭끝만큼이라도 실끝만큼이라도 뭣이 붙으면, 뭐 거 따질, 분석할 것이, 해석할 것이, 아는 것이 붙으면 그걸 사(邪)라 햐. 사견(邪見)이라 햐. 그거 사견참선(邪見參禪)이여. 그것은 해석참선이고. 못써.

 

그까짓 참선은 미(迷)헌 중생이 더 미(迷)혀. 단조무명(但助無明)이여. 더 무명만 더 죄만 짓는 것이여. 참선헌다고 해 봤던들 죄만 짓는 것이여.

따져 보고, 분석해 보고, 알아보고 허면은 그만 고것이 숭악한 사선(邪禪), 삿된 선이여.

 

더 참선 되도 않고, 더 되기만 하고, 참선방 앉을래야 앉을 수도 없고, 앉으면 잠 아니면 따지고 분석허고. 천하에 못쓸 것이여.

 

'이- 뭣고?' '이-헌, 이- 뭣고?' 가만히 힘쓸 것 하나 없어. 거 힘쓸 것 하나 없어.

'이뭣고?' 그놈 인자 가만히 '뭣고?'해 놓고는 알 수 없는 놈이 하나 나오면은, 가만히 알 수 없는 그놈의 대가리를, 알 수 없는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가만히 관(觀)헌다. 관혀.

 

관(觀)은 무슨 관인고? 관이라는 것이 '볼 관(觀)'자인디 뭐 다른 것인가?

 

아! 우리집이, 지금 우리집 방안이 어떻게 생겼으며, 우리 방안에 농이 어디 놓아져 있으며, 우리 방 자리는 뭘로 깔았으며,

그 가만히 여기 있어도, 가서 직접—우리 실눈은 지금 여기 와 있고, 내 눈뜨고 보는 이 실눈은 여기 있지마는 눈 감아도 보이지 않어? 환하니. 그와 같은 관(觀)이 있어.

 

거 가서 눈으로 뚝 뜨고 내 눈깔 뚝 뜨고 보는 관(觀) 말고, 눈을 감아도 관이 있어. 그놈이 역력(歷歷)허게 나타나.

 

'이뭣고?' '이- 뭣고? 뭣고?' 의심 좋다.

그 의심, 알 수 없는 '의심 의(疑)'자거든, 알 수 없는 그 '의(疑)'자거든.

 

그게 활구참선(活句參禪)이여. 서산 스님께서 바로 또 활구참선 말씀도 해 놓으셨지마는.

수참활구(須參活句)요, 오직 학자가 활구를 헐지언정 막참사구(莫參死句)다. 사구(死句) 말아라.

사구, '죽을 사(死)'자, 사구(死句) 죽은 참선. 사구(死句)란 건 아까 사선(邪禪) 모도 삿된 거, 요리 생각해서 알고, 조리 생각해서 붙여 보고, 요것이다 조것이다.

 

응, 요거 조그만한 것이, 조그만 어린 아이가 아! 그 여러 가지를 내가 한 댓 가지나 낱낱이 해석을 허고 앉었다 그말이여.

"그 어디서 배웠느냐? 니 어디서 그래 가지고 너 왔느냐?” 물은즉, 저 어디 정혜사에서인가 어디서인가 모도 그렇게 해석해 가지고 왔대.

 

고놈 정혜사서 했다고 않지마는, 아! 고런 몇이 거그서 왔는디 다 그러거든.

아 이거 이거 참, 큰일나 버렸어. 맨 그렇거든.

 

거기에는 무슨 참선이 그런 참선이 있는고, 참 이상스러운 선(禪)이여.

그래가지고 그 우리 견성(見性)이 어디 있으며,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어디 있으며, 부처님의 정법(正法)이 거기에서 그만 모도 매장되어 버리지, 어디 있어?

그것을 그 뿌럭대기를 좀 파버리고 캐버려야 되지.

 

'이뭣고?'

해 들어갈수록에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 증대되면 그놈만 자꾸 해 나가면은 세상에 그뿐이여, 그뿐이여.

알 수 없는 놈 하나뿐이여. 단, 알 수 없는 놈 하나뿐이니 그렇게 단순하고 그렇게 그대로 응, 그대로 활구 아닌가. 얼마나 쉽냐 그말이여. 얼마나 그 참 직접이고.

 

하! 이런 내 참, 왜 거다가서 뭣 땀세 글쎄 사구(死句)를 만들아.

활구(活句)인디, 본래 활구인디 활구를 갖다 따지고 붙이면 사구가 되어 번져.

 

'참선 학자들아! 참선 허는 학자야! 활구참선을 허지 사구참선 말아라. 말아라' 부처님 말씀이 그 말뿐이여. 꼭 활구참선 하나뿐이여, 다시.

 

활구참선법이라는 건 경절문(徑截門)이여.

저 성불도(成佛圖) 놀아 보셨지? 성불도 놀아 보면은 왜 그 각 제취(諸趣)로 천취(天趣)로 모도 돌고, 저 지옥 아귀 삼악도 악취(惡趣)로 돌고 모도 그렇게 되고, 그 다음에는 오십오위(五十五位) 점차(漸次)로 올라가기도 허고, 이 도 들어가지 못허고 있지?

 

경절문은 바로 뚝딱 올라가서 대각(大覺)으로 올라가 버리는 거여.

 

참선법은 점차(漸次) 지위도 없고, 이렇게 차제(次第)도 없고, 한 계단 한 계단 뛰어서 부처 되아 가는 법도 없고.

바로 그만 내 마음, 내 마음 '이- 헌 놈 이놈, 이- 헌 놈이 뭣고? 이놈' 툭 깨달라 버리면 그만 한발에 한걸음에 오십오위니 뭔 위(位)니 없어. 그냥 저 최상 대각에 올라가 버려.

 

무슨 점차가 있으며 무슨 지위가 있어?

아! 그런 참선법, 경절문 법이란 말이여. 그렇게 활구참선을 허셔야 된다 그말이여.

 

그러니 내 마음 내가 깨닫는 걸 참선법이라고 허는디—도통법, 그것이 그 바로 도통법이여.

그 법을 내놓고, 정법을 내놓고 뭘 할 것이냐 그말이여.

 

 

이 법을, '이뭣고?'를 해 나가는데....

 

'이뭣고?'를 한번 거각(擧却)하고 또 한번 거각하고.

처음에는 대체 원 그 하도 처음이니까, 하도 내가 생겨난 때가 없건마는 역사가 없건마는, 한번도 해 본 때가 없기 땀세, 처음이기 땀세 안되아.

 

한번 해 봐도 안되고, '이뭣고?' 해 봐도 안되고, '이뭣고?' 허면 도무지 그놈의 자리가 점점 더 껌껌허기만 하고, 뭣이 '이뭣고?'만 허면 뭣이 아는 것이 푹 나올까 싶고.

별별 망상이 그만 뒤끓고, 아무 망상이니 뭣이니 없다가도 '이뭣고?'만 탁 허기만 하면은 그만 그런 놈의 망상이 더 퍼일어나고, 잠이 또 그놈만 생각하면은 그놈 마구니 잠이 들어오네.

 

그놈 참, 그러니까 좀 성가셔. 좀 처음에는 그렇게 성가셔.

 

한 철 혀. 첫 철, 한철 해 보면은 안되아. 그러지마는 안된다고 해서 퇴타(退墮)해 버리고 안 해 버리면 쓸 것인가? 무엇을 헐라고.

 

이놈을, '이뭣고?'를, 내가 나를 깨달라 놓지 못하면, 찾아 놓지 못하면 밤낮 이놈의 칠통(漆桶), 이놈의 깜깜한 중생—세상에 내 낯반대기 나를 몰랐으니 내 온 곳도 깜깜하고,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도 깜깜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건마는 깜깜해. 열 달 동안을 어머니 뱃속에서 그 감옥 생활 했지마는 깜깜혀. 나올 때까장도 깜깜혀. 두어 살 응, 서너 살 먹도록까장 깜깜혀.

아! 겨우겨우 한 너더댓 살 먹으면 인자 그 사람의 그 의식이, 사람의 그 식(識)이 뭣이 붙어서 인제 다 안다 그말이여.

 

자! 허니, 인생 문제다. 세상에 이놈의 인생 문제가 어째도 이렇게 나를 몰라 가지고 이렇게 깜깜해 가지고는 거기에서 남[生]에, 늙어서, 병이 들어서, 뒈지는 것 밖에 없으니 죽는 것 밖에 없으니,

죽으면은 몸뚱이만 죽지, 내가 죽는가? '참내'가 죽어?

 

그 내가 어째 이놈의 고(苦)뿐이 하고야, 아이고야! 고(苦)밖에는 없어.

지옥밖에 떨어질 디 없고, 짓는 것이 죄밖에는 지은 것이 없고, 그저 천사만념(千思萬念)이 깨닫지 못한 중생은 그저 이놈의 생각 일어나는 것이 맨 죄다.

 

맨 삿된 마음, 못된 마음, 살생할 마음, 넘 속일 마음, 도둑질헐 마음, 사음질헐 마음, 그저 맨 그런 못된 마음뿐이니, 마음 죄가 더 크다. 몸뚱이로 짓는 죄보담도 마음으로 짓는 죄가 더 크다.

내가 이 몸뚱이로 남을 때려 패 죽이는 것보담도 마음으로 '저놈 내가 죽여야지' 그것이 더 커. 그게 대승계(大乘戒)여. 더 크다 그말이여.

 

중생의 거족동념(擧足動念)이, 우리 인생의 거족동념이—발 한 번 옮겨 놓고, 마음 한 번 내는 것이 전부가 죄뿐이니, 이놈의 죄만 퍼지어서 저 악도(惡途), 지옥에 떨어지고 개 배때기, 말 배때기, 구렁이 배때기 속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문제냐 그말이여. 인생 문제.

 

금생에 사람 몸뚱이 요까짓 것 좀 되었다고, 똥자루 하나 짊어지고 돌아댕기는 것이지.

참선도 않고 그만 그저 동념 죄업(罪業)만, 거족동념 죄업만 퍼짓고 말 것이여?

 

이놈의 인생 문제 봐라.

인생이 이런 문제를 두고 오늘 살았으니깐 족하고, 오늘 이만 하니깐 족하고, 내 세상이야 싶지. 아이고, 참!

 

이 좀 편안하고, 이 좀 젊고, 이 좀 이만헌 요만한 기회 있을 적에 정신채려라 말이여. 참 채려라.

어찌 '이뭣고?'를 모르냐? 아! '이뭣고?' 하나를 몰라? 글쎄. '이뭣고?' 허는 법이다.

 

한 번 혀, 또 한 번 혀. 그렇게 안되지마는 퇴타하지 말아라. 안될수록에 더욱 발심(發心)을 하고 더욱 믿고 더 철저히 해야 하는 법이다.(20분24초~35분24초)

 

 

 

(2)-------------------

 

한 번 혀, 두 번 혀, 세 번 혀, 열 번 혀, 백 번 혀, 천 번 혀, 만 번 혀, 자꾸 해 봐라.

자꾸 허면은 그 모도 일어나는 망념 망상이 고놈이 그 자리에서 잦아지고, 그 자리에서 다 녹아지고, 나중에는 '이뭣고?'가 의심이 그 들입대 일어나는 바람에—잠도 고놈이 어디 온 곳이 있나? 잠도 고놈이 오도 않는다. 인자 '이뭣고?' 그놈의 의심이 턱 일어나면은 잠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오래 할 것 같으면 역여유천(亦如流泉)이다. 흐르는 저 물, 솟아 올라오는 물구녁에 물 나오듯, 그 물 항상 떨어지지 않고 나오는 물이 있지 않는가?

항상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나오는 석간수(石間水) 같은 물 같애서, 항상 물이 나오드끼 이 화두도 그 자리에서 그렇게 일어난다.

 

그 반야력(般若力)이 '이뭣고?' 생각하는, '이뭣고?', '이뭣고?' 그 참 생각하는 그 활구 의단이 의심이 그 일어나기 시작하면 없앨래야 없애지 못해아.

그 물구녁 아무리 막아 봐라. 껍닥에서 나오는 디 아무리 틀어 막아봐라. 기어니 옆을 뚫고 나온다.

 

'이뭣고?' 역시 똑같다. '이뭣고?' 역시 그렇게 나오는 거여. '이뭣고?'가 똑 새암물 솟아 나오드끼 그 '이뭣고?'가 절로 자꾸 나온다. 이것을 유천(流泉)이라 한다. 흐르는 샘에 물 나오듯 헌다 비유했어.

 

역여유천(亦如流泉)한다. 그래 가지고는 나중에 심공경적(心空境寂)이 된다.

마음이 공(空)한다, 심공(心空)이라는 것은, 마음이 공(空)했다는 것은 이놈 마음이 들어서 구백생멸심(九百生滅心)이 일어나고, 별별 망념이 구름 퍼일어나듯 헌디, 고것이 없어져 버려. 고걸 심공(心空)이라 햐.

 

일체 망념이 자진해 버려. 아! 그놈이 뭐 암만 낼라고 해도 없어. '이뭣고?'뿐이지. 하! 그것 참.

뭐 그전에 그 제대로 돌아댕김서 금방 있다가도 나도 자신도 자기도 모르게 나가 버리고 돌아댕기고 망념이, 아! 이러든 놈이 도무지 뭐 어디 간 곳 온 곳이 없다. 거 없어.

 

알 수 없는 '이뭣고?'만 나오는구나. 그 소 발자취 아닌가? 소 발자취, 거 얻은 놈 아닌가?

거 '이뭣고?'만 자꾸 새암물 솟드끼 솟는구나.

 

아! 이렇게 해 주어서 못 알아들으면은 그 어떻게 헐 것이여. 못 알아들어?

 

눈을 저렇게 뜨고 있으면 잠을 자는 것인가, 설법을 듣는 것인가? 모르겠구나.

 

우주다, 삼라만상이다, 모든 상이 마음에서 일어나서 있는 것인데, 마음이 공(空)해 버렸으니 뭐 일체 경계가 없다. 있어도 없어. 발을 딛고 걸어 댕겨도 없어. 하! 이런 꼴 좀 봐라.

마음이 공(空)해 번지고 경계(境界)가 적적(寂寂)해 번져.

 

'이뭣고?' 하나는 그만 언제거나 그대로 가만히 원 자나깨나 뜨나오나 아! 잠은 잤지마는 언제 잠잤는지 눈 뚝 떠 보면 '이뭣고?'뿐이다.

 

내가 실지로 해 봤구만. 법화경을 읽다가 글쎄 초저녁에 '이까짓 내가 경, 경(經)을 이거 읽다가 뒈지면 뭣 할 것이냐? 이거'

나이 그때 어리지마는 어릴 때 글을 읽으라고 해 쌌지마는 '경(經)만 읽다가 응, 죽으면 어찌 되아?'

 

모기 좀 뜯어먹으면 보시 좀 허지, 딱딱 소리를 내고 앉아 있어? 응.

그 무슨 짓이여 그것이? 보시도 좀 헐란지라 그 좀 배부르게 먹여 주지.

 

법화경을 읽다가 법화경 그 방편품, 그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어가서 지옥고 받는 그 대문(大文)을 읽다가 '그 세상에 이거 이것만 내가 이 설식기포(부)(說食飢夫)지, 글만 읽고 앉었으면, 참선을 해야지! 아, 내가 이뭣고?를 해야지. 이것만 해, 뭣혀 이거?'

 

원 책을 그만 내던져 버리고 싶고 하다가는 에잇! 책 딱 덮어 번지고 가만히 앉어서, 조주(趙州) 무자(無字) 해 나가는 것을 내가 배웠거든.

내가 어디서 탔든지 탔는데, 옳게 큰스님한테 가 타들 못하고 그럭저럭 탔는디, 그냥 조주 무자(無字)를 허래.

가만히 무자를.. 아! 무자(無字)가 들어와서 가슴 가운데 와서 딱! 붙었는디, 아 이것 참 기맥히데 처음인디.

 

처음에 글 읽다가 좀 해 보는디, 어떻게 독하게 한바탕 무상한 생각이 일어났든지, 경 읽다가 그 방편품 지옥고 받는 데를 보다가 발심이 되았든지 어쨌든지, 참 발심인지 뭔지 딱! 들어오더니 화두가 그만 딱 붙었네.

이놈을 관(觀)해 가지고는 어떻게 그날 밤에 그 탁! 했든지, 아 그래도 어떻게 앉어서 그럭저럭 허다 잤는디, 자고 일어났는디 새벽에 화두가 그대로 가만히 있어.

 

옳게 헌 화두인지, 글케 헌 화두인지 알도 못헐 때지마는, 고 생각헌 대로 고대로 가만히 있대, 화두가.

아따! 어떻게 참 좋은 생각이 나고 혼자 '곧 뛰겄어. 이러면 내가 곧 견성허겄구나. 이거 곧 견성헐... 내가... 아, 세상에 이러헌 참선법을 내가 가서 어서 참선을 해야지. 곧 견성을 헐 것인데 내가 경만 읽고 있어? 이까짓 놈의 경을 읽고 있어?'

 

나갈 생각이 굴뚝 같애도 내보내야지. 스님이 뭐 어떻게 안 내보내니깐 못 나간다 그말이여. 그러다가 어쩌다가 틈을 타 나오기는 나왔지마는.

 

곧 되는 것이여. 거 한 철, 두 철도 될 수 있는 것이고.

 

그거, 한 번 허다가 '아이고! 이거 안되아' 두 번 하다가 '에이고! 이놈의 것 못혀' 또 한 번 해보다가도 '아이고! 이거 좀 어디 가 좀 놀았으면, 아! 어디 가서 화투나 한번 치꺼나'

이렇게 이렇게 어떻게 그만 허다가 또 그만 뭔 별념(別念) 냈다가, 또 그만 퇴타 좀 했다가 또 해보다가, 요렇게 허면은 육억칠천만 년 미륵하생(彌勒下生)이니까, 미륵하생까지 계산해 보면 육억칠천만 년이여.

 

육억칠천만 년을 해봐. 아무 소용없어.

화두라고 헐 것도 말 것도 없고, 그건 공부라고 헐 것도 말 것도 없고, 그건 죽은 참선도 아니여.

 

참선이라는 건 그렇게 허는 법이 아니여.

그저 똑 절대 발심(發心)이고, 절대 분심(憤心)이고, 분심 가운데 의단(疑團)이 일어나 가지고는 입지여산(立志如山)을 해라. 뜻을 세우기를 산같이 해라.

 

이것 않고는 뭣을 헐 바냐? 무엇을 해?

응, 세상에서 글쎄 임금 노릇을 허면 다할 때가 있고, 백만장자가 백만 부귀가 부귀 다할 때가 있고, 인간이 아무리 별짓 다 허드래도 죽을 날이 오니, 그날을 생각해야 할 거 아니냐?

 

죽은 날 생각해 봐라. 부귀 다한 날 생각해 봐라. 지위 다 가버린 날 생각해 봐라. 어떠냐?

 

나 원, 저 이박사 야단치고 처음에 왼통 우리 대통령이라고 야단치고 그 야단 쳐 쌌더니, 이박사 죽을 때 어디서 병이 들어 가지고 와서는 고국을 생각해서 돌아오지 못하고 앓는단 말 듣고, 그 앓으면서 그 한탄 탄식헌단 말 듣고 기가 차더라.

 

지위나 권리나 부귀 명예라는 것이 다할 날이 없음사 하지마는 다할 날이 앞에 곧 닥쳐오고.

인생이라는 것은 이별밖에 없다. 다 여의고 버리고, 나 홀로 돌아서는 그때 가서 참선밖에는 없다. '이뭣고?' 밖에는 없어.

 

'이뭣고?'를 바로 깨닫지는 못하고 의심만 독로, 알 수 없이만 가드래도 염라대왕이 자귀의(自歸依)를 혀. 항복을 해 버려.

 

헌데, 이러헌 심(心), 마음이 일체 번뇌 망상이 그만 제대로 공, 그대로 공도 없어.

공(空)해 버리고, 마음이 공했으니 경계(境界)가 적적(寂寂), 경계도 아무것도 없다. 이런 때가 온다. 참말로 그때래야 화두가 하나 독로해야 쾌락안연(快樂安然)허리라. 그 쾌락하고 안연할 것이다.

 

쾌락안연을 거다가 둘 거 뭐 있나?

의단(疑團) 하나 독로(獨露)해 번지면 뭐 쾌락이니, 안연이니, 안락(安樂)이니 붙지 못해야 그놈이 참 화두지. 안연(安然)허리라.

 

화두를 '이뭣고?' '이-뭣고?' 요렇게 똑 해 나가란 말이여. 여까지 화두는 해 두고.(35분25초~46분5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단조무명(但助無明) ; '오직 무명만 도와 줄 뿐이니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용화선원刊) p82. (가로판 p86)

迷心修道하면  但助無明이니라

미욱한 마음으로 도를 닦는 것은 오직 무명만 도와 줄 뿐이니라.

 

(註解) 悟若未徹이면  修豈稱眞哉리요  悟修之義는  如膏明이  相賴하고  目足이  相資니라

철저히 깨치지 못하였다면 어찌 참되게 닦을 수 있으랴!  깨침과 닦는 것은 마치 기름과 불이 서로 따르고,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것과 같으니라.

*무명(無明) : [범]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관(觀)한다 ;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

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역력(歷歷 지낼·수를 셀·다할·두루 력) ; '뚜렷하다'는 말.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묘사이다. 사유 분별할 여지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현상을 묘사한다.

*역력명명(歷歷明明) ; 뚜렷하고 분명하다는 말. 역력과 명명은 동일한 뜻이며, 중첩하여 어감을 강하게 한다.

사유 분별할 여지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현상을 묘사한다. 어떤 조작도 없고 어떤 분별도 들어설 여지없는 본분(本分)이 드러난 경계를 나타낸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땀세 ; 땀새. ‘~땜에(~때문에)’의 사투리.

*수참활구(須參活句) 막참사구(莫參死句) ; '활구를 참구할지언정, 사구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용화선원刊) p49~50. (가로판 p50~51)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할지언정, 사구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이 아래는 특히 활구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지름길 경/끊을 절/문 문) ; 지름길문. 경절(徑截)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 교문(敎門)의 55위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성불도(成佛圖) ;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놀이 가운데 하나.

염불 · 참선 · 교학의 수행을 통해 성불의 길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108단계로 구성한 도판(그림판)과 '나무아미타불'이 적힌 3개의 주사위와 두 분의 부처님과 18분 보살님 명호가 적힌 20개의 말을 사용하여 수행을 통해 육도윤회를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게 구성된 놀이.

*오십오위(五十五位) ; 처음 건혜지(乾慧地)를 지나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사가행(四加行)·십지(十地)를 하나하나 거쳐서 올라가야 성불하게 된다는 말.

*점차(漸次) ; 시간이나 차례에 따라 조금씩.

*대각(大覺) ; 부처님의 깨달음. 정각(正覺) 대오(大悟) 등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깨닫고[自覺] 남들도 깨달음으로 인도하여[覺他] 각(覺)과 행(行)이 원만하게 갖추어졌으므로 대각이라 한다. 또는 부처님 자체를 가리키는 말.

*차제(次第) ; 차례(次例 순서 있게 구분하여 벌여 나가는 관계).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대승계(大乘戒) ; 대승의 보살이 받아 지켜야 할 계율. 보살계라고도 한다.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 · 아귀 · 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동[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罪] 행위[業 : 身口意 三業].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2)

 

*들입다 ; 세차게 마구.

*반야력(般若力) ; 반야의 힘. 참된 지혜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가 생사윤회의 원인이며, 반야는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 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심공(心空) ; ①허공과 같이 큰 마음. 마음이 본질적으로 무한히 넓고 커서 만상을 포용하는 허공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마음이 텅 빈 경계 또는 그러한 도리. 마음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 텅 비고 고요하며 어떤 상에도 걸리지 않는 경지에 들어 있다는 뜻.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적적(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 한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설식기포(설식기부 說食飢夫) ; '입으로(말로만) 밥, 밥, 해봤자 먹지 못하여 배를 곯다' '바로 참선 수행을 해야지, 경만 보는 것은 소용이 없다'


[참고] 『능엄경요해(楞嚴經要解)』 (계환戒環) 「능엄경요해서(楞嚴經要解序)」 (급남 찬 及南 撰)
〇像季已還 道術旣裂 明心之士 妄認緣塵 爲物所轉 義學之徒 虗驕多聞 不全道力 奇才茂器 皆流爲蒸砂迷客 說食飢夫

[참고] 『능엄경(楞嚴經)』 제1권, '견도분(見道分)' (일귀 역주 | 샘이 깊은 물) p79~80.
〇自我從佛 發心出家 恃佛威神 常自思惟 無勞我修 將謂如來 惠我三昧 不知身心 本不相代 失我本心 雖身出家 心不入道 譬如窮子 捨父逃逝 今日乃知 雖有多聞 若不修行 與不聞等 如人說食 終不能飽

제(아난)가 부처님을 따라 발심하여 출가한 이래로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만 믿고 항상 '제가 애써 닦지 아니하여도 여래께서 삼매(三昧)를 얻게 해 주실 것이다'고 생각했지, 몸과 마음이 본래 서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만 저의 본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마음이 아직 도(道)에 들지 못한 것이 마치 궁자(窮子)가 아버지를 피하여 도망 다니는 것과 같았습니다. 금일에야 비로소 비록 다문(多聞)했다 하더라도 만약 수행하지 아니하면 듣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이 음식을 말하는 것으로는 마침내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