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다가 저 죽는다’ ; 우리는 진묵겁(盡墨劫) 전에 이미 깨달음, 부처님과 조끔도 차별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도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족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한 생각 딱 돌이키면—어디서 깨달음이 오는 것도 아니요, 누가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곳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원만구족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너무나도 간결하고 송곳으로 찌르듯 하는 그러헌 법문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진묵겁 전부터서 원만구족해 있으면서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냐?

육도법계(六道法界)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시기 때문에 육도(六道)를 여의고 적광토(寂光土)는 따로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뭣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요긴한 길은 오직 이 한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할 때, 불이 펄펄 타오르는 지옥으로 느껴졌던 것이, 한 생각 돌이킨 곳에 바로 그것이 천당이 되고, 극락이 되는 그 묘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 활구참선법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송담스님(No.111) 79년 동지 법회에서]

 

(10분 55초)

 

[법문] 송담스님(No.232)—84년 동안거해제 법어(84.02.16)(용232)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라. 마음에 얻으면, 마음에 도리를 얻으면 손에 응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다. 겨울이 되면 눈 내리고, 가을이 되면 밝은 달이 뜨며, 봄바람이 불면 아름다운 꽃이 피어서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 가더라.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인데, 아침마다 새벽마다 닭은 오경(五更)에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봄이 오매 곳곳이 산에 아름다운 꽃이 울긋불긋 피더라.

 

무슨 색상을 보던지 무슨 소리를 듣던지, 그 보고 듣고 생각하는 데에 그 본질을 잃어버리면,

일상 생활하는 것을 그것이 다 복잡하고—밥해 먹고 옷 빨아 입고,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모두 돌보아주고, 살림을 꾸려나가고 세간살이를 해 나가고 한 것이 그것이 모두 복잡하고 그것 때문에 공부가 못한다 해 가지고, 그런 일용을 갖다가 다 버려버리고 따로 어떠한 특별한 생애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가정 생활 그것이 공부에 방해가 되고, 그런 것들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집안 식구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것이 다 업(業)으로 만나는 원수 것들이다’ 이러한 생각이 속에서 뽁짝뽁짝 일어난 때에는 벌써 그 사람 공부가 잘 안되는 때거든.

화두(話頭)를 놓쳐 버리고 공부가 안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속에서 막 퍼일어나 가지고 ‘어떻게 해야 이것을 벗어날꼬?’ 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님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속에서 일어나 가지고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어디로 갈까? 떠나 버릴까, 휘저어 버릴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날 때에는 벌써 공부가 안되는 때거든.

공부가 안되기 때문에 그 뜻을 얻지를 못해. 그 뜻을 얻지를 못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는 것이 그렇게 나를 갖다가 뒤흔들거든.

 

그 근원을 얻으면—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바로 거기에서 탁! 자기의 근본으로 돌아올 수 있으면, 자기의 근원으로 돌아온다면, 모든 기회와 모든 경계상(境界上)에서 바로 그놈을 막 잡어 쓸 수가 있는 거여.

 

세수할 때는 세수한다고 그놈이 어디로 갈 거냐 그말이여.

먹을 때는 어디로 가? 그 먹는 놈 내놓고 그게 어디로 갈 거냐 그말이여.

비를 들고 마당을 쓸 때는 쓰는 놈 내놓고 어디 가서 찾느냐 그말이여.

 

바로 뜻을 얻어 가면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모든 색상(色相)이 바로 그것이 부처님 진신(眞身)이요, 이 세상에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는 일체가 다 법신불(法身佛)의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냐 그말이여.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찾다가 저 죽는다” 그런 말씀이 있는데, 바로 그놈을 내놓고 따로 찾으면 그 무엇이 나올 거냐 그말이여.

 

이건 너무 가까워서—무슨 물건을 잃어 버렸을 때 자기 손에 쥐고 찾는다든지, 바싹 바로 자기 무릎 밑에 코앞에 있는 것을 놔두고 저 멀리 찾으면 그건 찾을 수가 없는 거여.

흔히 가까운 데다 놓고 멀리 찾다가 시간을 낭비하는 수가 있는데, 우리가 우리의 자성(自性)을 찾는 데에도 언제나 가까운 데에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데 있는데 그놈을 멀리 찾으면 그건 없거든.

 

‘가까운 데에 있으니까 「찾다가 저 죽는다」했으니, 찾지 아니하면 언제나 거기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부할 게 뭐 있느냐. 눈에 볼 때는 보는 놈이고, 귀로 들을 때는 듣는 놈이고, 무슨 생각을 할 때는 생각하는 놈 그놈인데 무엇을 찾을 거 뭐 있느냐.

그렇다면 뭐 참선(參禪)도 군더더기고 ‘찾는다’는 자체가 틀려 버렸다니까, 안 찾고 고대로 놔두면 언제나 거기 있다’ 그 일리가 있는 말 같지만.

 

찾다 찾다가 아주 목숨을 바쳐서 찾고, 찾다가 찾다가 해 가지고 ‘찾는 놈’과 ‘찾으려는 놈’과 일체가 하나가 되어서 그래 가지고 ‘찾는다’는 생각까지 끊어지되,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의단이, 의관(疑觀)이 한담(寒潭)에, 파도 없는 못에 뚜렷한 달이 턱! 박히듯이,

 

알 수 없는 의단이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가운데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독로하되 거기에도 빠지지 말고 오직 의단만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독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가지고,

거기에서 그놈이 타파(打破)되어 가지고 그런 뒤에 바로 보는 놈이요, 듣는 놈이요, 생각하는 놈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총가옹(摠家翁)으로 이렇게 되는 게지,

 

그러한 고비를 넘지 아니하고 의리(義理)로, 들은 풍월(風月)로,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찾는 놈이 그놈이고, 듣는 놈이 그놈이고, 바로 이거 말하는 놈이 이놈이다’

이러한 생각 가지고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생사해탈도 아니요, 견성도 아니고, 그러한 것은 의리선(義理禪)도 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우리는 화두를 거각(擧却)을 해 가지고, 화두를 갖다가 여법(如法)하게 참구(參究)를 해서 화두 공안 타파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49분26초~60분2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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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득지재심응재수~ ; [금강경오가해]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오경(五更) ; ①하룻밤을 초경(初更)에서 오경(五更)까지 다섯으로 나눈 시각을 아울러 이르는 말.

②하룻밤을 다섯 시기로 나누었을 때의 다섯째 부분.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이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진신(眞身) ;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를 뜻함. 법신(法身).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좌선할 때 자타(自他)의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두두물물(頭頭物物) ; 온갖 사물과 현상.

*가옹(家翁) ; 집안의 주인(主人). 주인공.

*의리(義理)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

*풍월(風月) ; ①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 ②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읊거나 노래함. 또는 그 시나 노래.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참구(參究 헤아릴 참, 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