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보소(寶所)2021. 1. 17. 16:40

보소(No.198)—보소(寶所)가 재근(在近)이다 |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치라.


*보소(寶所) ; 보배[보물寶物]가 있는 곳[所]. 대승(大乘)의 최고 경계인 구경열반(究竟涅槃 깨달음의 극치에 달한 최상의 열반)을 비유한다. 곧 성불(成佛)을 말한다. 반면에 소승의 열반은 진실이 아닌 화성(化城 일시의 환화幻化의 성城)에 비유한다.

보소(寶所)라는 말은, '보배[보물寶物]가 있는 곳[所]'이라는 말은 진심(眞心) · 본래 부처[本佛] · 자성(自性)의 보배이다.


*화성(化城) ; 일시의 환화(幻化)의 성(城). 소승의 경계를 비유함. 법화경에서 설한 7종의 비유[법화칠유法華七喩]의 하나.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을 대승의 불과(佛果), 곧 '보배가 있는 장소[寶所]에 이르게 하려고 하나, 가는 길이 멀고 험악하므로 중생이 두려워하여 보물을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하니, 방편으로 먼저 소승열반을 설하셨으니, 마치 화성(化城)을 만들어 그곳에서 중생이 휴식을 취해 피로를 다 풀게 한 후 화성(化城)을 없애 버리고, '보물 있는 곳이 멀지 않다[寶所在近]' 하며 대승의 불과(佛果)에 이르게 한다는 것에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


[참고]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 『법화경』 (청량사 | 조인도철 역해), 『법화경』 (시공사 | 이연숙 옮김) 참고.

비구들아, 만일 여래(如來)가 열반할 때가 되면, 또 대중들이 청정할 뿐 아니라 믿고 이해함이 견실하여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이치를 환히 알며 깊은 선정을 성취하게 되면, 여래는 이를 알고 곧 성문과 보살들을 모아 이 가르침을 설한다.

세상에 이승(二乘, 성문과 연각)으로 멸도하는 일은 없나니 오직 일불승(一佛乘)으로써만 멸도(滅度)할 수 있다.

비구들아, 알라. 나는 중생들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그들이 소법(小法)을 즐기며 오욕에 깊이 집착함을 알았기에 방편으로 열반을 설했고, 중생들은 내 말을 듣고는 곧 믿고 받아 지녔다.


예를 들어, 아주 험난한 데다 사람마저 살지 않아 무시무시하며, 길이가 5백 유순이나 되는 나쁜 길[惡道]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진귀한 보물 있는 곳에 가기 위해 그곳을 지나려 한다고 하자.

그때 그들 가운데 한 길잡이[導師]가 매우 총명하여 그 길의 형세를 환히 다 알고 있었기에, 무리들을 이끌고 그 무서운 곳을 지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무리들은 얼마 가지 않아 귀찮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 길잡이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너무나 피곤한 데다 무서워서 도저히 더이상 갈 수가 없소. 게다가 갈 길도 아직 멀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소.’


그러자 갖가지 방편(方便)을 지니고 있는 길잡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 참 딱하도다. 어째서 큰 진귀한 보물을 포기하고 돌아가고자 하는가?’ 그리고는 방편을 써서 그 길의 3백 유순 되는 지점에 신통력으로 성(城) 한 채를 만들어 놓고서 무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두려워 마시오. 그리고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마시오. 여기 이렇게 큰 성이 있으니 들어가서 마음껏 지내시오. 이 성에 들어가면 편안히 지낼 수 있고, 또 앞으로 더 나아가면 보물이 있는 곳[寶所]에 다다를 수 있소’


그러자 지쳐 있던 무리들은 매우 기뻐하며 기적 같은 일[未曾有]이라고 찬탄하며 말했다. ‘이제 이 험한 길[惡道]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얻었도다.’

그리고 그들은 신통력으로 만들어진 성[化城]으로 들어가, 이미 험한 길 다 벗어났고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길잡이[導師]는 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한 뒤 피로가 다 풀린 줄 알고는, 신통력으로 만든 성[化城]을 없애 버리고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어서 갑시다. 보물 있는 곳이 멀지 않소(寶處在近). 예전에 있던 큰 성은 그대들을 쉬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신통력으로 만든 것이었소.’


비구들아, 여래 또한 이와 같아서 그대들을 이끄는 큰 스승(大導師)이다. 그래서 모든 생사 번뇌와 악도(惡道)가 험난하고도 하염없이 긴 것을 알고 또 응당 떠나고 건너야 할 것임을 안다.

그러나 만일 중생들이 단지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만 듣는다면, 부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가까이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또 ‘부처님 되는 길은 멀고도 머니 오래도록 노력하여야 성불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또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겁 많고 약하고 하열(下劣)함을 알기에 중도에 쉬게 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두 가지 열반을 설했다.


그리고 만일 중생들이 이 두 경지에 안주하면 여래는 곧 다시 이렇게 설한다.

‘그대들이 머물고 있는 경지는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운 경지일 뿐이니,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대들이 얻은 열반을 잘 관찰하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진실한 열반이 아니요. 다만 여래가 방편으로 일불승을 분별하여 삼승(三乘)으로 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저 길잡이가 무리들을 쉬게 하기 위하여 신통력으로 큰 성을 만들고, 다시 충분히 쉬었음을 알고는 ‘보물이 있는 곳은 가깝소. 그리고 이 성은 진짜가 아니라 내가 신통력으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일불승(一佛乘) ; 산스크리트어 eka-buddha-yāna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함.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가르침. 모든 중생을 성불하게 하는 부처님의 유일한 가르침.


[참고] 『전심법요(傳心法要)』 (황벽희운黃蘗希運 선사)

言化城者 二乘及十地等覺妙覺 皆是權立接引之敎 竝爲化城 言寶所者 乃眞心本佛自性之寶


화성(化城)이라는 것은 이승(二乘)과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을 말함이니 모두가 방편으로 세워 인도하는 가르침으로써 이를 모두 화성이라 한다. 또 보소(寶所 보배의 장소)라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진심(眞心)인 본래의 부처[本佛]이며, 자성(自性)의 보배를 말한다.


此寶不屬情量 不可建立 無佛無衆生 無能無所 何處有城 若問此旣是化城 何處爲寶所 寶所不可指 指卽有方所 非眞寶所也 故云在近而已 不可定量言之 但當體會契之卽是


이 보배는 정량(情量 범부의 망념분별)에 속한 것이 아니며, 건립할 수도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는데 어느 곳에 성(城)이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이미 화성(化城)이라면 '어느 곳이 보배의 장소[寶所]인가?'라고 묻는다 해도 보배의 장소는 가리킬 수 없다. 가리킨다면 곧 방향과 처소가 있게 되므로 참으로 보배의 장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까이에 있다[在近]'고만 말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헤아려서 말할 수 없으니 다만 당체(當體)에 계합하면 되는 것이다.



(1분 31초)

[법문] 송담스님(No.198)—1983년 4월 첫째 일요법회(83.04.03) (용198)


죽비(竹篦)를 치세요.


(입선 入禪)


같이 입선을 한 이 공덕(功德)으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모두가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기를 축원(祝願)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소(寶所)가 재근(在近)이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또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치라’ 하셨습니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보배 곳, 영원히 평생 동안 쓰고도 남을 소중한 보배. 영원한 보물. 그 보배 곳,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쳐라.(41분51초~43분27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대도정법(大道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축원(祝願 빌·기원할 축/원할·바랄 원)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보소(寶所) ; 보배[보물寶物]가 있는 곳[所]. 대승(大乘)의 최고 경계인 구경열반(究竟涅槃 깨달음의 극치에 달한 최상의 열반)을 비유한다. 곧 성불(成佛)을 말한다. 반면에 소승의 열반은 진실이 아닌 화성(化城 일시의 환화幻化의 성城)에 비유한다.

보소(寶所)라는 말은, '보배[보물寶物]가 있는 곳[所]'이라는 말은 진심(眞心) · 본래 부처[本佛] · 자성(自性)의 보배이다.

*화성(化城) ; 일시의 환화(幻化)의 성(城). 소승의 경계를 비유함. 법화경에서 설한 7종의 비유[법화칠유法華七喩]의 하나.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을 대승의 불과(佛果), 곧 '보배가 있는 장소[寶所]에 이르게 하려고 하나, 가는 길이 멀고 험악하므로 중생이 두려워하여 보물을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하니, 방편으로 먼저 소승열반을 설하셨으니, 마치 화성(化城)을 만들어 그곳에서 중생이 휴식을 취해 피로를 다 풀게 한 후 화성(化城)을 없애 버리고, '보물 있는 곳이 멀지 않다[寶所在近]' 하며 대승의 불과(佛果)에 이르게 한다는 것에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


[참고]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 『법화경』 (청량사 | 조인도철 역해), 『법화경』 (시공사 | 이연숙 옮김) 참고.

비구들아, 만일 여래(如來)가 열반할 때가 되면, 또 대중들이 청정할 뿐 아니라 믿고 이해함이 견실하여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이치를 환히 알며 깊은 선정을 성취하게 되면, 여래는 이를 알고 곧 성문과 보살들을 모아 이 가르침을 설한다.

세상에 이승(二乘, 성문과 연각)으로 멸도하는 일은 없나니 오직 일불승(一佛乘)으로써만 멸도(滅度)할 수 있다.

비구들아, 알라. 나는 중생들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그들이 소법(小法)을 즐기며 오욕에 깊이 집착함을 알았기에 방편으로 열반을 설했고, 중생들은 내 말을 듣고는 곧 믿고 받아 지녔다.


예를 들어, 아주 험난한 데다 사람마저 살지 않아 무시무시하며, 길이가 5백 유순이나 되는 나쁜 길[惡道]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진귀한 보물 있는 곳에 가기 위해 그곳을 지나려 한다고 하자.

그때 그들 가운데 한 길잡이[導師]가 매우 총명하여 그 길의 형세를 환히 다 알고 있었기에, 무리들을 이끌고 그 무서운 곳을 지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무리들은 얼마 가지 않아 귀찮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 길잡이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너무나 피곤한 데다 무서워서 도저히 더이상 갈 수가 없소. 게다가 갈 길도 아직 멀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소.’


그러자 갖가지 방편(方便)을 지니고 있는 길잡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 참 딱하도다. 어째서 큰 진귀한 보물을 포기하고 돌아가고자 하는가?’ 그리고는 방편을 써서 그 길의 3백 유순 되는 지점에 신통력으로 성(城) 한 채를 만들어 놓고서 무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두려워 마시오. 그리고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마시오. 여기 이렇게 큰 성이 있으니 들어가서 마음껏 지내시오. 이 성에 들어가면 편안히 지낼 수 있고, 또 앞으로 더 나아가면 보물이 있는 곳[寶所]에 다다를 수 있소’


그러자 지쳐 있던 무리들은 매우 기뻐하며 기적 같은 일[未曾有]이라고 찬탄하며 말했다. ‘이제 이 험한 길[惡道]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얻었도다.’

그리고 그들은 신통력으로 만들어진 성[化城]으로 들어가, 이미 험한 길 다 벗어났고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길잡이[導師]는 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한 뒤 피로가 다 풀린 줄 알고는, 신통력으로 만든 성[化城]을 없애 버리고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어서 갑시다. 보물 있는 곳이 멀지 않소(寶處在近). 예전에 있던 큰 성은 그대들을 쉬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신통력으로 만든 것이었소.’


비구들아, 여래 또한 이와 같아서 그대들을 이끄는 큰 스승(大導師)이다. 그래서 모든 생사 번뇌와 악도(惡道)가 험난하고도 하염없이 긴 것을 알고 또 응당 떠나고 건너야 할 것임을 안다.

그러나 만일 중생들이 단지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만 듣는다면, 부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가까이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또 ‘부처님 되는 길은 멀고도 머니 오래도록 노력하여야 성불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또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겁 많고 약하고 하열(下劣)함을 알기에 중도에 쉬게 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두 가지 열반을 설했다.


그리고 만일 중생들이 이 두 경지에 안주하면 여래는 곧 다시 이렇게 설한다.

‘그대들이 머물고 있는 경지는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운 경지일 뿐이니,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대들이 얻은 열반을 잘 관찰하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진실한 열반이 아니요. 다만 여래가 방편으로 일불승을 분별하여 삼승(三乘)으로 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저 길잡이가 무리들을 쉬게 하기 위하여 신통력으로 큰 성을 만들고, 다시 충분히 쉬었음을 알고는 ‘보물이 있는 곳은 가깝소. 그리고 이 성은 진짜가 아니라 내가 신통력으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일불승(一佛乘) ; 산스크리트어 eka-buddha-yāna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함.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가르침. 모든 중생을 성불하게 하는 부처님의 유일한 가르침.


[참고] 『전심법요(傳心法要)』 (황벽희운黃蘗希運 선사)

言化城者 二乘及十地等覺妙覺 皆是權立接引之敎 竝爲化城 言寶所者 乃眞心本佛自性之寶


화성(化城)이라는 것은 이승(二乘)과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을 말함이니 모두가 방편으로 세워 인도하는 가르침으로써 이를 모두 화성이라 한다. 또 보소(寶所 보배의 장소)라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진심(眞心)인 본래의 부처[本佛]이며, 자성(自性)의 보배를 말한다.


此寶不屬情量 不可建立 無佛無衆生 無能無所 何處有城 若問此旣是化城 何處爲寶所 寶所不可指 指卽有方所 非眞寶所也 故云在近而已 不可定量言之 但當體會契之卽是


이 보배는 정량(情量 범부의 망념분별)에 속한 것이 아니며, 건립할 수도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는데 어느 곳에 성(城)이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이미 화성(化城)이라면 '어느 곳이 보배의 장소[寶所]인가?'라고 묻는다 해도 보배의 장소는 가리킬 수 없다. 가리킨다면 곧 방향과 처소가 있게 되므로 참으로 보배의 장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까이에 있다[在近]'고만 말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헤아려서 말할 수 없으니 다만 당체(當體)에 계합하면 되는 것이다.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쳐라' ; 수불세수(水不洗水).  '물로 물을 씻을 수 없다'는 말. '금으로 금을 교환할 필요가 없다[金不博金]'과 같은 비유이며 대구(對句)로 쓰인다.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이 불성(佛性)을 가진 부처이기 때문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 합일해야지 대상화하여 이분(二分)하거나 자기 밖에서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참고 ❶]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금강경』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도 말고, 법 아닌 것을 취하지도 말아야 한다.


【야부(冶父)】 金不愽(博)金 水不洗水

금으로 금을 살 수(교환할 필요가) 없으며,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한다.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只是一般金 豈分能愽所愽 只是一般水 豈分能洗所洗 恁麽 則法則一味 見有二取 二取相亡 一味方現

다만 이 똑같은 금인데, 어떻게 팔 금과 살 금을 나누며, 다만 똑같은 물인데 씻는 물과 씻어지는 물을 어떻게 나누겠는가. 이러한즉 법은 한맛인데 보는 것에 두 가지 취함이 있으니, 두 가지 취함이 서로 없어져야 비로소 한맛이 나타날 것이다.


【야부(冶父)】 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 水寒夜冷魚難覓 留得空般載月歸

가지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요,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 비로소 장부로다. 물도 차고 밤도 추워 고기 찾기 어려우니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도다.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得一心存未是奇 一處亦亡是丈夫 到這裡 凡情脫盡 聖解亦亡 但將無私照 却來是非場

일심을 얻어 간직함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 한 곳마저도 없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범부의 망심도 다 떨어지고 성인의 앎도 없으며, 다만 사심 없는 비춤을 가지고 시비의 마당에 다시 올 뿐이다.


[참고 ❷] 『종용록(從容錄)』 제51칙 '법안선륙(法眼舡陸)'

水不洗水 金不博金 佛不求佛 法不說法

물로 물을 씻지 못하고 금으로 금을 바꿀 수 없으며, 부처가 부처를 구하지 못하고 법으로 법을 설할 수 없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