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사십이장경2020. 5. 6. 08:31

사십이장경(No.593)—『사십이장경』 제27장 | 사견(邪見) 공견(空見)에 빠지지 말라 | 화두가 성성적적한 가운데 의단이 독로하면 그때는 그 의단을 관(觀)해 나가는 거여. 의심관(疑心觀) | 『사십이장경』 제18장.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 후한(後漢)의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이 함께 한역.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보시(布施), 애욕의 단절 등 불교의 요지를 42장에 걸쳐 적절한 비유로써 간명하게 풀어 설한 경(經). 최초의 한역(漢譯) 불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27장.

佛言 夫爲道者 猶木在水 尋流而行 不觸兩岸 不爲人取 不爲鬼神所遮 不爲泂流所住 亦不腐敗 吾保此木 決定入海 學道之人 不爲情欲所惑 不爲衆邪所嬈 精進無爲 吾保此人 必得道矣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도를 닦는 사람은 마치 나무가 물에 있어서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것과 같다. 양쪽 기슭에도 닿지 않으며, 사람이 건지지도 않으며, 귀신에게 가로 막히지도 않으며, 소용돌이에 머물지도 않으며, 또 썩지도 않는다면, 나는 이 나무가 결정코 바다에 들어갈 것을 보장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정욕에 미혹되지 않고, 온갖 삿된 견해에도 휘말리지 않고, 함이 없이 정진해 나간다면, 나는 이 사람이 반드시 도를 얻을 것을 보장한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18장.

佛言 吾法 念無念念 行無行行 言無言言 修無修修 會者近爾 迷者遠乎 言語道斷 非物所拘 差之毫釐 失之須臾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법은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하며, 말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닦되 닦음이 없이 닦나니,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진리와 가깝지만 모르는 사람은 더욱 멀어지리라.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며 물질에 매이지 아니하니 털끝 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잠깐 사이에 잃어버리리라.

 

(18분 54초)

 

[법문] 송담스님(No.593)—1997년 정축년 하안거 해제 (용593)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하시기를,

'대저 도(道)를 닦는 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한 나무토막이 물에 있어서 흐름을 따라서 흘러 흘러가다보면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 또 흘러가다가 어떠한 사람한테 이렇게 사람이 건져버리지 않고 또 어떠한 귀신이나 그런 것에 의해서 차단을 당하지 아니하고, 또 소용돌이치는 그런 물 소용돌이 속에 빠져서 빙빙 돌면서 떠내려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가다가, 흘러 내려가다가 썩어져서 없어져버리지만 않는다면, 그 나무토막은 결정코 바다에 도달하는 거와 같다'

 

그러면 <양쪽 언덕에, 물이 흘러가다가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는다>하는 것은 생사(生死)니 열반(涅槃)이니 하는 그러한 소견(所見)에, 그러한 두 언덕에 집착(執著)을 하지 아니한 것을 비유한 것이고.

<사람에게 건짐을 당하지 않는 것>은 인천(人天)에, 사람의 세계나 하늘나라에 선업(善業)을 지어가지고 복(福) 받는데 빠지지 아니한 것을 비유한 것이여.

 

사람이 살아감에 악(惡)한 짓은 하지 말고 선업(善業)을 닦아서 사람으로 태어나되 좋은 곳에 태어나고, 하늘나라에 태어나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이 도문(道門)에 있어서는 그렇게 복(福) 받고 호강하고 잘 먹고 잘산 거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복 받고,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고 그러면 자연히 사람이 교만해지고 거만해지고 남을 업신여기고 편안한 데에 빠져가지고 도(道) 닦을 마음을 내기가 어려워서 그거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별로 그걸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귀신에 차단(遮斷)을 당하지 않는 것>은 사견, 불법을 믿으면서도 정법(正法)에 대한 바른 사상이 백히지를 못하고 사견(邪見)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사견에 빠져 놓으면 겉으로는 열심히 도(道)를 닦은 것 같애도 속마음에 사견에 떨어져 있어 놓으면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현(出現)해도 그 사람은 제도할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이미 그릇에, 아무리 그 그릇이 좋아도 못된 것이 가뜩차 갖고 있으면 다른 것을 아무리 그 그릇에다 담으려고 담어도 소용이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견 가운데에도 가장 으뜸가는 사견은 인과법(因果法)을 믿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견(空見)에 집착해 빠지는 것이여.

공견에 빠지면은 인과법을 믿지 않고 막행막식 해가지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법도(法度)가 없어가지고 마구잽이 닥치는 대로 하거든.

 

인과법을 철저히 믿으면 말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하고 무서운 것을 알며, 행동 하나가 얼마나 무섭고 소중한 것인 줄 알며, 그러기 때문에 인과법을 철저히 믿어야 저절로 악업(惡業)을 짓지 아니하고 정법(正法)을 믿고서 정법에 대한 바른 사상이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물이 빙빙빙 도는 회오리 소(沼)에 한 번 빠지면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해> 삼계(三界)의 회오리거든.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 삼계(三界)의 회오리 속에 빠지면 여간해서 거기에서 헤어나지를 못해.

그속에는 오욕락(五欲樂)—재산에 대한, 색(色)에 대한, 명예 권리에 대한, 또 안락(安樂)과 수면(睡眠)에 대한 그런 오욕락에 빠져가지고, 그리고 서로 인연을 악연(惡緣)과 선연(善緣)을 지어가지고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고 또 복수하고 은혜를 갚고 그러한 업연(業緣)에 얽혀가지고 여간해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그말이여.

 

인과법을 믿되, 믿기는 철저히 믿되, 거기에 '어떻게 하면 인과(因果) 속에서 해탈(解脫)할 수 있느냐?'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여.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고 정법에 의해서 수행(修行)을 해야 우리가 이 생사(生死)의 윤회(輪廻) 속에서 살면서 거기에 얽히지 아니하고 해탈(解脫)하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 나무토막이 흘러가다가 썩어서 부패해가지고 부서져버리면 바다에 이르지 못하는데> 그것은 무엇에다가 비유한 것이냐 하면은 불교에 소승(小乘)과 중승(中乘)에, 이승(二乘)에는 멸진정(滅盡定) 외도(外道), 멸진정이라고 하는 경계(境界)가 있는데 그 멸진정에 한 번 빠져 놓으면 몇만 겁(劫)이 지내도 거기서 헤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말이여.

 

수행을 하되, 참선(參禪)을 하되 무기(無記)에 빠져가지고, 그 편안하고 깨끗하고 조용한 그 경계에 빠져서 그것에 맛을 들여 가지고 거기에 빠진 채 그것이 공부인 줄 알고 수행을 하면 결국은 이승(二乘)의 멸진정(滅盡定)에 빠져가지고 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참선을 하되 처음에는 화두를 들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자꾸 일으켜 가지고 또 챙기고 또 챙기고 하지만, 차츰차츰 망상(妄想)이 가라앉고 조용하고 깨끗해지면 화두 드는 것도 귀찮애지고, 화두를 들면은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가 흩어질까 두려워서 화두를 들지 않고 가만히 고요한 것을 맛보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기공(無記空)에 빠지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산승(山僧)이 항상—화두가 끊어지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와서 화두를 놓치거나 하면 다시 자기의 화두를 들되, 이미 들어진 화두가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한 가운데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거든 거기에서는 자꾸 거기다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그렇게 어거지로 거기다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말고, 이미 독로한 그 의단을 묘(妙)하게 잘 관(觀)해 가도록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보면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그 의심관(疑心觀)을 하다가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르르 하니 의심이 성성(惺惺)하지를 못하고 그냥 의심이 없어져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럴 때는 터억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자기의 화두[本參話頭]를,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때는 한 번 또 챙겨야 하는 거여. 챙겨가지고 또 성성하고 적적한 가운데 의단이 독로하면 그때는 그 독로한 의단을 터억 관(觀)해 나가는 거여.

 

'어떤 것이 무기(無記)냐?' '어떤 것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들려져 갖고 있느냐’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관찰을 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 생사(生死)니 열반(涅槃)이니 한 소견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인천(人天)의 선업(善業)에 걸리지 아니하고> <사견(邪見)에 맥히지 아니하고> <삼계(三界)의 회오리에 빠지지 아니하고> <이승(二乘)의 멸진정(滅盡定)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거각(擧却)해 가지고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해도 성성적적하게 의단이 독로한 채로 나가면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고조사(古祖師)가 한결같이 보증(保證)을 하시고 증명(證明)을 하신 바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들어갈 수 있도록 간곡(懇曲)하게 설법을 해 주시는 선지식, 또 그러한 선지식이 설해주신 법문을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라도 자주 들으면서 정진(精進)을 해 간다면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에 말씀하시기를,

'내 법(法)은 염무념념(念無念念)이요, 생각하되 생각 없이 생각하고, 행무행행(行無行行)하며, 행하되 행하는 바가 없이 행하고, 언무언언(言無言言)하며, 말을 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수무수수(修無修修)하야, 닦되 닦음이 없이 닦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바로 나의 정법(正法)이다' 그 말씀입니다.

 

이 무념(無念)의 념(念), 무행(無行)의 행(行), 무언(無言)의 언(言), 무수(無修)의 수(修)의 이 뜻을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수행하는 요지(要旨)가 거기에 있어.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이 수행법을 아지를 못한 사람은, 미(迷)한 사람은 저 멀다 그말이여.[會者近爾 迷者遠乎]

 

이것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닦아가는 이 법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여, 말길이 끊어졌으며, 비물소구(非物所拘)여, 이것을 가로막을 아무 물건도 거기는 없는 것이며, 그런데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이것이 무념(無念)이요, 이것이 무행(無行)이요, 이것이 무언(無言)이요, 이것이 무수(無修)요, 이것이 무증(無證)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그것이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말이여.

실지수유(失之須臾)여. 수유(須臾)라고 하는 것은 잠깐, 번갯불 번쩍하는 그 찰나간(刹那間)을 ‘수유(須臾)’라 그러는데, 수유 동안에 놓쳐버리는 것이여.

 

근게 도저히 이 도리(道理)는 여기에 나아가려면은 활구참선(活句參禪)보다 더 요긴(要緊)한 방법은 없다 그말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녹음법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나아가야 거기에는 병폐(病弊)가 붙지를 못하고 사견(邪見)이 거기에는 붙지를 못하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복탁(卜度)으로 요리조리 따지고 비교하고 분석해서 의리(義理)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면은 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할 뿐만 아니라 점점 도(道)에는 멀어져 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 보았자 그것은 사견(邪見)이요, 저 죽고 남 죽이고 불법(佛法)을 망해 먹을 외도(外道)가 되는 것이다.

 

일생 동안을 알 수가 없고, 아무것도 얻은 바도 없고, 본 바도 없고, 느낀 바도 없어도 그 상관이 없어.

알 수 없는 의단으로 나가면은 결정코 깨달음을 얻고야만 마는 것이고,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하지 아니해서 그렇다면 그것은 아무도 원망할 것도 없고, 그것은 별로 나쁜 것이 없어.

 

아무리 바르게 열심히 해도 인연이 도래하지 아니하면 더디 깨닫게 되는 것이고, 얼마 안 닦아도 퍼뜩 깨달은 사람은 전생(前生)에 많이 닦아 놓은 사람이고.

전생에 닦아 놓은 것이 없으면은 금생(今生)에 비록 열심히 한다고 해도 더디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고, 마지막 죽어갈 때도 깨닫지 못하고 의단이 독로한 채 터억 숨을 거둘 수 있다면은 무엇이 원통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빨리 깨달라 가지고 '아무개가 견성(見性)했다', '내가 빨리 조실(祖室)도 한바탕 해야겠다', '천하(天下)를 향해서 큰소리도 한번 쳐봐야겠다'

쯧! 도(道)가 무엇인 줄 모를 때에는 혹 그런 생각도 할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먹을 것도 안 먹고, 하고 싶은 것도 안 하고 청춘을 버리고 참 도(道)를 닦게 될 수도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해도 그것이 오히려 좋고, 누가 나를 무시를 하거나 업신여기거나 일생을 바보처럼 산다 해도 그 속에 한량없는 법희선열(法喜禪悅)이 있는 법이지, 누가 알아주고 그런다고 해서 그게 괴롭기만 하지 그 별로 좋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은 과거에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께서 말씀하신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든지,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선교석(禪敎釋)」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바보가 되아 가지고 말귀도 못 알아듣고, 오직 배고플 때 밥이나 먹고 화장실이나 갈 줄이나 알제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똥멍청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고.

만공(滿空) 스님께서도 "그러한 바보가 되어서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일대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니라"고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 도반들께서도 그러한 마음으로 수행을 하신다면은 결정코 남에게 속지 않는, 속임을 당하지 않는 진정한 수행자가 되실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많은 수행자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21분2초~39분5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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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二十七 無著得道)』 -- 卍新纂大日本續藏經 第37冊 No.669 四十二章經註 (1卷) 【宋 守遂註 明 了童補註】

佛言 夫爲道者 猶木在水尋流而行 不觸兩岸 不爲人取 不爲鬼神所遮 不爲洄流所住 亦不腐敗 吾保此木決定入海

(註) [不觸生死涅槃兩岸 不爲人天有漏善業所取 不爲邪見鬼神所遮 不爲三界洄流所住 亦不腐敗於二乘滅定 決入薩婆若海]

 

學道之人 不爲情欲所惑 不爲衆邪所嬈 精進無爲 吾保此人 必得道矣

(註) [情欲不能惑 衆邪不能嬈 正進無爲 道遠乎哉]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十八)』

佛言 吾法 念無念念 行無行行 言無言言 修無修修 會者近爾 迷者遠乎 言語道斷 非物所拘 差之毫釐 失之須臾.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법은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하며, 말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닦되 닦음이 없이 닦나니,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진리와 가깝지만 모르는 사람은 더욱 멀어지리라.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며 물질에 매이지 아니하니 털끝 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잠깐 사이에 잃어버리리라.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시절인연(時節因緣) ; 시절이 도래(到來)하고 인연이 합쳐지는 기회.

[참고] 시절(時節) : 어떤 시기나 때. 도래(到來)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기회(機會)—어떠한 일, 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

*도래(到來 이를 도/올 래)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법희선열(法喜禪悅) ;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듣고 따르는 기쁨[喜]과 선정(禪定)에 드는 기쁨[悅].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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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