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자 ( 庵子, 菴子 ) ; 작은 절 . 큰 절에 딸린 부속 절 . 도 ( 道 ) 를 닦는 자그마한 집 . 초암 ( 草庵 ), 모암 ( 茅庵 ) 이라고도 한다 .
(12분 15초)
[법문] 송담스님 (No.663)—2002 년 동안거해제 법어 (02.02.06) (용663)
오주차암오막식 ( 吾住此庵吾莫識 ) 인데 심심밀밀무옹색 ( 深深密密無壅塞 ) 이로구나
나무 ~ 아미타불 ~
함개건곤몰향배 ( 函蓋乾坤沒向背 ) 하야 부주동서여남북 ( 不住東西與南北 ) 이로구나
나무 ~ 아미타불 ~
오주차암오막식 ( 吾住此庵吾莫識 ) 이다 . 내가 이 절에 머물고 있으되 , 이 암자 ( 庵子 ) 에 머물고 있으되 나도 또한 알 수가 없구나 . 내가 왜 여기에 머물고 있는가를 알 수가 없다 이거거든 .
심심밀밀무옹색 ( 深深密密無壅塞 ) 이여 . 깊고 깊고 밀밀해서 옹색(壅塞)함이 없다 . ‘ 옹색함이 없다’고 한 것은 아무 부족하고 부자유한 것이 없다 이것입니다 .
함개건곤몰향배 ( 函蓋乾坤沒向背 ) 요 . 하늘과 땅이 앞과 뒤가 없고 ,
부주동서여남북 ( 不住東西與南北 ) 이다 . 동서남북에 주착한 바도 없다 .
이 게송은 태고보우 ( 太古普愚 ) 선사가 당신이 주석하고 계시었던 태고암에서 ‘ 태고암가 ( 太古庵歌 )’ 라고 하는 시를 읊은 한 구절입니다 .
여기에 표현한 암자 ( 庵子 ) 라고 하는 것은 태고암에 대한 말이겠으나 , 산승이 이 게송을 볼 때에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사바세계가 자기의 암자요 ,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 자기의 암자요 , 우리가 삼동 ( 三冬 ) 에 지냈던 자기의 그 선원 그곳이 바로 자기의 암자요 , 가깝게 말하면 우리가 머물러 입고 있는 이 육체가 각자 자기의 조그마한 암자가 될 것입니다 .
그 암자에 왜 자기가 지금 이 육체를 짊어지고 다니며 , 왜 이 한 철에 자기의 석 달 동안 지낸 그 선방에 지내게 되었는가 ? 물론 이래저래 해서 이러한 인연으로 거기에 산다고 말은 할 수가 있겠으나 사실은 알 수가 없습니다 .
왜 금생에 이 몸뚱이를 뒤집어쓰고 나왔는가 ? 이 조그만한 육체의 암자를 가지고 태어났는가 ? 한 생각 한 생각이 왜 이 한 생각 , 생각 자체를 우리는 암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알 수 없는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되 그 생각이 밀밀(密密)하고 깊고 깊어서 , 그 생각이 일어나는 생각을 어떻게 자기가 왜 그 생각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가를 모릅니다 . 그래도 아무 걸림이 없이 생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
한 생각 일 분 일 초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 우리의 육체도 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 육체를 받아났으나 , 그 육체가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갈는지 모릅니다 .
물론 분석을 하면 지수화풍 ( 地水火風 ) 사대(四大)로 뭉쳐졌고 또 죽게 되면은 지수화풍 사대로 돌아가겠으나 , 지수화풍 그 자체를 우리는 또 모릅니다 .
우리의 생각이 일어나는 생주이멸 ( 生住異滅 ) 도 알 수가 없고 , 육체를 이루고 있는 지수화풍도 사실은 그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 모르지마는 우리는 또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고 일 분 일 초를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
하늘은 머리 위에 있고 땅은 다리 밑에 있으나 , 어디를 두고 앞이라고 하고 어디를 보고 뒤라고 하겠으며 , 동서남북을 우리는 나침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마는 동서남북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
우리가 편의상 경도(經度)다 , 위도(緯度)다 해 가지고 동서남북을 지도상에 그려 놓고 있습니다마는 이름이 동 ( 東 ) 이고 , 이름이 서 ( 西 ) 지 원래 동서남북은 없는 것입니다 . 그러한 속에서 우리는 또 오늘을 살고 있고 , 한 시간 한 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
우리가 만일 불법을 만나지 못하고 또 정법을 만나지 못해서 화두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다면은 우리는 나침반 없는 조각배로 저 태평양 속에 던져져 있는 거와 같은 신세일 것입니다 .
이 끝없는 우주법계 속에 이 몸뚱이는 태어났으며 , 그 속에서 끊임없이 희로애락 속에서 우리는 물거품처럼 떠돌다가 언제 꺼져버릴는지도 모를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다행히 불법을 만났고 또 정법을 만나서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이 있습니다 .
알 수 없는 의심 , 의관 ( 疑觀 ) 이라고 하는 화두를 가지고 우리는 분명히 목표가 있고 , 그 목표를 향해서 또 하루를 살아가고 있어서 , 정처 없는 무주고혼(無主孤魂 ) 의 신세로 일생을 살다가 육도 ( 六途 ) 를 또 윤회 ( 輪廻 ) 하게 될 그러한 처절하고도 외로운 영혼이 우리는 아닙니다 .
우리는 분명히 갈 곳이 있고 분명히 목표가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비록 보잘 것 없는 한 중생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뚜렷이 목표가 있고 , 우리 몸뚱이 속에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法身)이 상주하고 계신 그 법을 믿기 때문에 ,
우리는 설사 말세에 태어났고 , 온 세계가 성주괴공과 흥망성쇠 속에 탐진치 ( 貪瞋癡 ) 삼독 ( 三毒 ) 으로 싸우고 있고 , 언제 불바다가 될는지도 모르는 이 사바세계에 살지마는 우리는 결단코 그러한 생사 속에 영원을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 우리는 다행하고 행복한 존재들이면서 동시에 우리는 행복하고 경행 ( 慶幸 ) 할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
정녕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영원히 바르게 살려면은 우리는 한 생각 속에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단속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한 편을 듣고 , 산승은 우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들을 향해서 이러한 다행한 인연을 만난 것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
비록 석 달 동안에 용화사 또 중앙선원 또 인제 법보선원 또 저 전주의 위봉사 선원 또 승련사 선원 , 대전에 또 이 복전암 선원 또 세등선원, 방방곡곡에서 정법을 믿는 목숨을 걸고 수행하던 정진하던 도반들이 모였으니 두서없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할 것은 오직 이 한 생각을 단속하는 일 뿐입니다 .
한 생각으로 인해서 그것이 무량겁 ( 無量劫 ) 이 되고 , 우리의 이 한 생각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도솔천(兜率天)에도 가고 극락세계(極樂世界)도 가고 또 육도도 윤회하게 되는 것인 만큼 ,
해제(解制)를 했다고 해서 — 다음 산철결제 또 여름결제를 우리는 또 결제 ( 結制)를 하게 됩니다 — 해제 동안에 정말 단속을 잘해서 정진을 잘해야 우리는 분명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 .(12 분 49 초 ~25 분 3 초 )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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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 ) ‘ 오주차암오막식 ~’ ; 『태고집 ( 太古集 ) 』 ( 雪栖 편 , 김달진 역주 | 세계사 ) ‘ 태고암가 ( 太古庵歌 )’ p90 참고 .
* 밀밀(密密 빽빽할·촘촘할 밀) ; 빈틈없이 빽빽히 들어찬 것.
* 사대 ( 四大 )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 사람의 몸이 땅 , 물 , 불 , 바람 ( 地 , 水 , 火 , 風 ) 의 네 ( 四 ) 원소 ( 大 ) 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
* 생주이멸 ( 生住異滅 ) ; 모든 사물이 생기고 ( 生 ), 머물고 ( 住 ), 변화하고 ( 異 ), 소멸함 ( 滅 ). 또는 그런 현상 .
* 의관 ( 疑觀 ) ; 의심관 ( 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 ( 現前 ) 하면 ,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 ( 觀照 ) 를 하는 것 .
[ 참고 ] 송담스님 ( 세등선원 No.68)— 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 (1988.01.17) (5분 59초)
〇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 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 두 철 ,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
그렇게 순일하게 ,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 ( 疑團 ) 이 독로 ( 獨露 ) 하걸랑 ,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 ( 惺惺 ) 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 ( 觀照 ) 를 하는 거여 . 알 수 없는 의심의 관 ( 觀 ) 이여 . 의심관 ( 疑心觀 ).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 ( 疑團 ) 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 긴 ( 緊 ) 과 완 ( 緩 ) 긴완 ( 緊緩 ) 을 득기중 ( 得其中 ) 을 해야 혀 . 그것이 묘한 관 ( 觀 ) 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
관 ( 觀 ) 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 생각없는 생각을 관 ( 觀 ) 이라 하는 거여 .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 ( 觀 ) 으로 들어가는 거여 .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 묘 ( 妙 ) 한 의심 ( 疑心 ) 의 관 ( 觀 )’ 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
1 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할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 나는 성성적적 ( 惺惺寂寂 ) 허게 그 의심의 관 ( 觀 ) 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 ( 僧俗 ) 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 ( 選佛場 ) 이요 , 그게 바로 선방 ( 禪房 ) 이요 , 공부처 ( 工夫處 ) 다 그말이여 .
[ 참고 ] 송담스님 (No256)—85 년 2 월 첫째 일요법회 (85.02.03) (5분 57초)
〇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 호흡을 바르게 하고 ,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 ( 話頭 ) 를 어떻게 의심 ( 疑心 ) 하느냐 ?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 한 철 , 두 철 , 세 철 , 3 년 , 5 년 , 10 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 ( 參究 ) 하고 ,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 이것은 한 말로 ‘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 — 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 ( 善知識 ) 도 필요 없고 ,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 ( 疑觀 ) 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 자기가 일구월심 ( 日久月深 ) 항시 면면밀밀 ( 綿綿密密 ) 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 그 의심관 , 관 ( 觀 ) 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 생각 없는 생각 ’ 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 ( 活句參禪 ) 은 ‘ 의심 ( 疑心 ) 의 관 ’ 이라야 돼 .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 서산에 지려고 할 때 ,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 — 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 ( 觀 ) 하는 것입니다 .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 ( 觀 ) 인 것입니다 .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 그것을 갖다가 일관 ( 日觀 ) 이라 그러거든 .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 여러 가지 관법 ( 觀法 ) 이 있는데 , 이 참선도 하나의 ‘ 의심의 관법 ’ 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
성성 ( 惺惺 ) 하고 적적 ( 寂寂 ) 하면서도 ,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 ( 疑團 ) 이 독로 ( 獨露 ) 하도록 , 처음에는 ‘ 이뭣고 ?’ ‘ 이뭣고 ?’ 하지만 나중에는 ‘ 이뭣고 ?’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 — 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 ( 打成一片 ) 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 ( 打破 ) 하게 되고 ,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 ( 一串都穿 ) 을 해 . 자기의 본래면목 ( 本來面目 ) 과 역대조사 ( 歷代祖師 ) 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
* 무주고혼 ( 無主孤魂 ) ; 이름없는 또는 천도주체가 없는 외로운 영혼 . 천도 ( 薦度 ) 및 시식 ( 施食 ) 을 행할 때 재 ( 齋 ) 를 올려주는 생존하는 인연주체가 없는 영가 ( 靈駕 ) 를 일컫는다 . 이에 대하여 천도재를 모시는 주체가 있는 영혼을 유주혼 ( 有主魂 ) 이라 한다 .
* 육도 ( 六途 , 六道 ) ; 중생이 선악 ( 善惡 ) 의 업 ( 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 ) 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 지옥도 ( 地獄道 ), 아귀도 ( 餓鬼道 ), 축생도 ( 畜生道 ), 아수라도 ( 阿修羅道 ), 인간도 ( 人間道 ), 천상도 ( 天上道 ) 가 있다 .
* 비로자나 ( 毘盧遮那 ) ; 비로자나 ( 毘盧遮那 ) 는 vairocana 의 음사 ( 音寫 ). 노사나 ( 盧舍那 )· 자나 ( 遮那 ) 등으로도 음사한다 . 태양처럼 일체법을 비추어 관조하는 광대무변한 지혜를 지닌 부처님 .
한역어로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 ( 光明遍照 , 日 ),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 ( 廣博嚴淨 ),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 ( 遍一切處 ) 등이라 한다 .
* 법신 ( 法身 ) : [범 ] dharma - kaya ‘ 법 몸 ’ 이란 말인데 , 법불 ( 法佛 ) · 이불 ( 理佛 ) · 실불 ( 實佛 ) · 법신불 ( 法身佛 ) · 법성신 ( 法性身 ) · 자성신 ( 自性身 ) · 진여불 ( 眞如佛 ) · 법계성 ( 法界性 )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 한물건 ’ 이란 것도 이것이다 .
진리 그 자체 ,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 진여의 본 바탕 ( 眞如本體 )’ 을 이름이니 ,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 離四句 )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 ( 絕百非 ),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
* 말세 ( 末世 끝 말 / 세상 세 ) ; ①도덕 , 풍속 ,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 ( 正法 ) 의 세상 , 그 다음 천년을 상법 ( 像法 ) 의 세상 ,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 ( 末法 ) 의 세상이라고 한다 .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 삼독 ( 三毒 ) ; 사람의 착한 마음 ( 善根 ) 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 욕심 · 성냄 · 어리석음 ( 貪瞋癡 ) 따위를 독 ( 毒 ) 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
* 경행 ( 慶幸 ) ; 경사스럽고 다행 ( 多幸 ) 한 일 .
* 무량겁 ( 無量劫 )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 劫과 刧 는 동자 ( 同字 ).
* 도솔천 ( 兜率天 ) ; 욕계 육천 ( 欲界六天 ) 의 넷째 하늘 .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 ( 須彌山 ) 이며 , 그 꼭대기에서 12 만 유순 ( 由旬 )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 ( 內院 ) 과 외원 ( 外院 ) 으로 구별되어 있다 .
내원은 내원궁 ( 內院宮 ) 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 ( 彌勒菩薩 ) 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 (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 억 7 천만 년 뒤에 ) 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 외원은 수많은 천인 ( 天人 ) 들이 오욕 ( 五欲 ) 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 도솔 ( 兜率 ) 의 뜻은 지족 ( 知足 ).
* 극락세계 ( 極樂世界 )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 淨土 ).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 [ 極 ] 안락 [ 樂 ] 하고 자유로운 세상 [ 世界 ] 이다 . 안양 ( 安養 ), 안락국 ( 安樂國 ), 연화장세계 ( 蓮華藏世界 ), 무량수불토 ( 無量壽佛土 ), 무량광명토 ( 無量光明土 ), 무량청정토 ( 無量淸淨土 ) 라고도 함 .
* 해제 ( 解制 풀 해 / 만들 · 법도 제 ) ; ① ( 안거 ) 를 마침 . ②재계 ( 齋戒 ) 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
* 결제 ( 結制 맺을 결 / 만들 · 법도 제 ) ; 참선 수행하는 안거 ( 安居 ) 에 들어감 . 하안거는 음력 4 월 15 일에 결제하며 , 동안거는 음력 10 월 15 일에 결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