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의심(화두드는 법)'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24.02.29 의심(화두드는 법)(No.423)—무자 화두 | (게송)修行須是用心眞~ | 화두를 드는 그 찰나에 마음 길이 끊어져야 | 자세를 바르게, 단전호흡과 단제로 순숙해지면 그때 전제(全提)로 들어라.
  2. 2022.11.22 의심(화두드는 법) (전강선사 No.014)—아는 걸로는 소용없어 | 탁! 맥혀서 알 수 없는 것이 활구(活句) | 구백생멸심(九百生滅心) | 화두는 물러가지 않으면 다 된다.
  3. 2022.08.08 의심(화두드는 법)((No.233))—알 수 없는 그 묘관(妙觀) | 경(經)은 노정기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그 생각에 즉(卽)해서 | 수마(睡魔) | 득력(得力).
  4. 2022.03.28 의단독로((No.217))—(게송)南北東西無定着 生涯只在一枝筇 舌頭細嚼煙霞味 直入千峰更萬峰 | 오직 한 의단에 목숨을 걸어 가는 데에다가 비유하는 게송.
  5. 2021.08.14 의심(화두드는 법) ((세등51))—대의지하 필유대오 | 최상승법은 일념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는 것 | (게송)摩尼珠人不識~ | 깨닫기를 바랄 것이 없다.
  6. 2021.06.02 의심(화두드는 법) ((No.472))—(게송)男兒大丈夫~ | 발심한 사람이 바로 대장부 | 운전 초보와 능숙자 비유 |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으로 하면 소임 속에서 공부가 된다.
  7. 2020.12.18 의심(화두드는 법) (세등24)—호흡과 화두가 함께 잘되어지게 |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선방 | 참선을 하면 몸이 건강해지고 결정코 깨달음까지 이르른다.
  8. 2020.12.04 의심(No.256)—일관(日觀) | 묘한 의심관(疑心觀) |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한다 |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觀法)’
  9. 2020.03.22 의심(No.332)—공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10. 2020.03.07 의심(화두드는 법) (No.345)—화두순숙(話頭純熟) 의단독로(疑團獨露) 타성일편(打成一片) 공안타파(公案打破) 확철대오(廓徹大悟).

의심(화두드는 법)(No.423)—무자 화두 | (게송)修行須是用心眞~ | 화두를 드는 그 찰나에 마음 길이 끊어져야 |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과 아울러서 단제로 기초를 다진 뒤에는 순숙해지면 그때 가서 전제(全提)로 들어라 | 전제(全提)와 단제(單提)와 근제(勤提)를 적절하게 운용을 해라.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18분 46초)


[법문] 송담스님(No.423)—1990년 하안거해제 및 8월 첫째일요법회(용423)

수행수시용심진(修行須是用心眞)이라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時道易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미오이도단재아(迷悟二途端在我)하고  시비이자막수인(是非二字莫隨人)이어다
나무~아미타불~

수행(修行)은 수시용심진(須是用心眞)하라. 수행해 나가는 데는 모름지기 그 마음 씀을 참되게 해라. 진실하게 해라.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時道易親)이니라. 마음이 만약 참되다면 도(道)는 친하기 쉬우니라.

아까 전강(田岡) 조실 스님 법문에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라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하셨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어. 오직 간택함을 혐의(嫌疑)한다’
간택(揀擇), 간택은 이리저리 가리는 거여. 가리고 이것저것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가리는 것이 간택인데, “그 '간택을 혐의한다'고 한 말이 무서운 간택이라” 조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그 도를 수행을 해 나가는데 그 마음 씀을 참되게 해라. 그 마음 씀이 참되면은 도는 친하기가 가깝다. 바로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

‘마음 쓴다’고 하는 표현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화두를 들어 나갈 때에—그 화두(話頭), 화두는 다른 말로 하면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그 공안은 따져,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고 분석하고 더듬어 들어가고 이런 것이 제일 공안을 참구(參究)하는 데에 주의할 것이 바로 이 따지는 것이거든.

공안을 분석하고 따져서 아무리 따지고 따져서 들어가 봤자, 그렇게 따져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천하 없는 그럴싸한 결론을 얻어서 수긍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으로써 얻어지는 결론이라 그것은 망상(妄想)에 지나지 못한 것이여.

어쨌든지 화두는 ‘이뭣고?’ 화두를 하던지,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던지, 조주의 무자(無字)를 하던지, 화두를 드는 그 찰나에 마음 길이 끊어져야 되는 거여.
‘이뭣고?’ 다못 ‘이뭣고?’ 그 의심뿐이여. 앞 생각도 끊어지고 뒷 생각도 끊어지고, ‘이것이 옳게 하는가 그르게 하는가?’ 그런 생각까지도 끊어져버리고,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해.

또 조주(趙州) 무자(無字), 무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뿐이지, ‘어째서 없다고 하는 것이 나은가, 어째서 무라고 하는 것이 나은가?’ 그러한 생각도 거기에는 붙어서는 안 돼.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런데 무자(無字) 화두는 자고로 대단히 논란이 많은 화두여. 논란이 많지마는 그 무자 화두에 옳게 참(參)해 가지고 참구를 바르게만 하면 그 무자 화두를 타파(打破)함으로써 많은 큰 깨달음을 얻은 도인(道人)들이 배출을 하는 것입니다.

몽산 스님께서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이라고 하는 법어도 설하시고 또 『몽산법어(蒙山法語)』에는 무자 화두가 많이 거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역시 무자 화두를 가지고 정진하는 분들이 많아서 오늘은 그 무자 화두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몽산 스님의 그 ‘무자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단제(單提)와 전제(全提)가 있는데, (단제는) 그냥 ‘무(無)~~~’ 거기는 전혀 의심을 붙이지 않고 ‘무(無)~~~’

어느 스님이 조주 스님한테 ‘저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여쭈어 보니까, 조주 스님이 ‘무(無)’ 그러셨단 말이여.
조주 스님이 ‘무(無)’라 그랬으니 ‘무(無)~~~’, 그냥 ‘무(無)~~~’ 하고, 무슨 망상이 일어나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무슨 소리가 귀에 들리거나 ‘무(無)~~~’ 항상 무자(無字)가 끊어지지 않도록. 앉아서도 ‘무(無)’, 서서도 '무(無)’, 밥 먹으면서도 ‘무(無)’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러지 않는 거여, 단제(單提)는. 그냥 ‘무(無)~~~’ 하고 무자(無字)만을 항상 생각하고, 무자(無字)만을 들어서 ‘무(無)~~~’ 해 가지고 그 ‘무(無)’를 관하는 거여. 이것이 단제인데.
전제(全提)는 조주의 뜻,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거여.

그러면 단제(單提)는 어떠한 이익이 있느냐 하면은 항상 ‘무(無)~~~’ 하는 무자에다가만 자꾸 정신집중을 하기 때문에 복잡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 없어. 그리고 비교적 무(無)에 정신집중을 하기가 무난해 그저, 초학자로서.
그런데 그 무자(無字)를 하는 데 생각을 한군데다 딱 집중하는 데에는 참 좋은 이익이 있는데, 까딱하면 그 ‘무(無)~~~’ 그놈만 들여다보다가 스르르르 하니 혼침(昏沈)에 빠지기가 쉽다 그 말이여.

왜 혼침에 빠지기 쉽냐 하면은 정신집중이 잘된 반면에 생각이 조용한 데 이렇게 빠져 가지고 스르르 하니 잠이 들어버려. 계속 또 잠이 들다가 또 일어나서 또 ‘무(無)~~~’ 하면, 평생 동안 무(無)하면 정신집중은 비교적 잘되고,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무(無)’ 하나만을 생각하니까 조금도 어려움이 없고 이 생각 저 생각이 안 일어나고 좋은데,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분이 없어. 그저 조용하니 조용한 데에만 집중만 해서 혹 오신통(五神通)까지도 날 수가 있어.
조용하고 고요하고 고요한 데에 집중을 하다 보면 저절로 망상이 끊어져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아주 무심(無心) 경계에 들어가서 그래 가지고 혹 오신통은 날른지는 모르나, 확철대오는 할 수가 없다. 누진통(漏盡通)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전제(全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간절히 간절히 의심을 들다 보면 의심을 들어서 정신을 성성(惺惺)하게 하는 데에는 대단히 좋아.
그런데 성성(惺惺)한 가운데에도 적적(寂寂)하고, 성성하면서도 적적하도록 이 참구(參究)하는 묘리(妙理)를 얻지 못하면은 공연히 생각이 어지러워. 적적하게 들어가지를 못하고 비교적 성성하기는 하는데 생각이 이렇게 고요해지지를 못하는 흠집이 있어.

그래 가지고 좀 성질이 급하고 그런 양성(陽性)을 가진,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하고 의심을 아주 힘을 써서 간절히 간절히 하다 보면 상기(上氣)가 되는 폐단이 있고, 골치가 아파지는 폐단도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몽산 스님은 이 단제(單提)와 전제(全提)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말씀을 하셨나 하면은, 초학자(初學者)는 단제로써 공부를 지어 나가라. 다맛 ‘무(無)~~~’ 하고 단제로 공부를 해 나가면, 그걸 일구월심(日久月深)해 나가면 생각도 가라앉고 망상도 가라앉고, 좀 자리가 잡혀.

더군다나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무(無)~~~’ 무(無)를 길게 이렇게 하면서 숨을 내쉰다 말이여.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무~~~’ 이렇게 단제로 그렇게 일구월심 얼마 동안 정진을 해 나가면 순숙(純熟)해져서 망상도 다 가라앉아 버리고 이렇게 된 다음에 전제(全提)로 들어가라 이거여.

단제로 계속하다 보면 너무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맑고 좋으니까 계속해서 단제로만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망상도 가라앉고 그래서 순숙해지면 그때 가서 전제(全提)로 들어라.
‘무(無), 무(無)~~~’가 아니라 ‘무(無)? 어째서 무(無)?’ 그때 가서 ‘어째서?’에다가 의심(疑心)의 초점을 두어 가지고 의심으로 들어가라 이거거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까지 처음에는 다 하다가, 나중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무(無)’라고 한 소리까지 안 하고 ‘어째서?’ 그렇게만 해도 벌써 의단(疑團)이 딱 나중에는 드러나게 된다 그 말이여.
의단이 드러나면, ‘어째서?’ 소리도 안 해도 떠억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한 그 의단이 드러나게 된다면, 뭐 자꾸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런 소리를 자꾸 뜰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나 처음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 해야 돼. 이렇게 해서 자꾸 의심이 끊어지면 또 하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그렇게 길게 여러 글자를 안 하더라도 의심이 들리면, 다못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만 해 나가도 된다 그 말이여. 이 초학자가 단제로써 기초를 다져 가지고, 단전호흡과 아울러서 단제로 기초를 다진 뒤에는 ‘무(無)?’ ‘무(無)라니?’ 이렇게만 해도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초학자의 단계에서는 단제로 해 가지고, 기초가 이루어져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된 다음에는 전제(全提)로써 화두를 잘 거각(擧却)해 나가면 ‘어째서?’ 하고 용을 쓰고 이마에다가 힘을 들여서 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여.
기초도 되지도 않고, 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어째서?’ 하고 어거지로 힘을 쓰고 한다면 육단심(肉團心)이 동(動)해 가지고 상기가 일어나고 골치 아픈 병이 생기고, 화두도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의단이 독로하지를 못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몽산법어집을 낸 그 몽산 스님의 무자 화두를 관하는 법에는 이렇게까지 참 자상하게 말씀을 해놓으셨고, 또 그렇게 해 나가되 그래도 정진하다 보면 이렇게 겨울에 문을 닫고 정진을 하면은 30분만 지나면은 사람 콧구멍에서 나오는 모다 탄산가스로 인해서 공기가 탁해지고 방안 온도가 높아지면 아무리 성성하게 잡드리를 해도 혼침에 들기가 쉽고, 또 요새처럼 여름에 날씨가 더웁고 그러면 아무리 정신을 차려도 꺼벅꺼벅 졸음이 온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는 전제(全提)로,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전제(全提)로 단속을 하고 또 그렇게 하다가도 워낙 산란심(散亂心)이 많으면 그때는 또 단제로 화두를 들어 보라 그 말이여. ‘무(無)’ 단제로 한 번 해 보고.
화두가 의심이 자꾸 끊어져. 잠깐 들으면 있다가 또 끊어지고 또 끊어지고 자꾸 이렇게 단절이 되면, 그때는 근제(勤提)를 하라. ‘부지런할 근(勤)’ 자, 자주자주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라.

그래서 혼침 올 때는 전제(全提)로 들어 보고, 산란심이 일어날 때에는 단제로 한번 대체를 해 보고, 자꾸 화두가 끊어져싸면 근제, ‘부지런할 근(勤)’ 자 근제로 단속을 하고, 이렇게 해서 전제(全提)와 단제(單提)와 근제(勤提)를 적절하게 운용을 해서 혼침과 산란과 간단(間斷)을 단절되는 것을 대처해 나가는, 스스로 그걸 잘 방편을 써서 단속을 해 나가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14분51초~33분3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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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수행수시용심진(修行須是用心眞)~’ ; 중봉명본 스님의 「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二十九 ‘寄同參十首’ 게송 참고.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저서로는 《전강대종사 법어 「언하대오(言下大悟)」》가 있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혐의(嫌疑 싫어할 혐/의심할·괴이히 여길·두려워할·의심스러울 의) ; 꺼리고 싫어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2분33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몽산(蒙山) : 남송과 원(元)대의 임제종 양기파 스님, (1231 ~ 1298 또는 1308) 이름은 덕이(德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 시양 고안현(時陽高安縣)에서 났다。그 고향 시양이 당나라 때에는 균주(筠州)였기 때문에 고균(古筠) 비구라고 한 일도 있었고, 여릉도 몽산에 있었으므로 몽산 화상이라 하며,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있었으므로 전산 화상이라기도 하고, 휴휴암(休休庵)에 있었으므로 휴휴암주라기도 하였다.
고산(鼓山)의 완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의 법을 이었다。그의 교화한 시기는 원나라 세조(世祖)때이며, 우리 고려의 충렬왕 때이다。그래서 고려의 고승들과 문필의 거래가 많았고, 그의 저서 가운데 <법어약록(法語略錄)> <수심결(修心訣)>등은 이조 중엽에 있어 우리 글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 ; 『몽산법어(蒙山法語)』의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을 말함.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은 조주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참선 수행에 있어서 본참공안에 대해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 참구를 하지 않고, 사량분별 · 알음알이로 공부를 삼는 잘못된 병폐를 10가지로 정리하여 그 병폐를 알고 극복해 올바른 활구참선을 하기 위한 몽산 스님의 법문.
*몽산법어(蒙山法語) ; 중국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참고]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몽산법어』는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데에 관한 법문(法門)만을 수록한 법어집입니다. 여러분이 이 『몽산법어』 서문(序文)을 읽어보시면 이 책이 어떠한 책이며, 얼마나 공부해 나가는 데 요긴한 책인가를 아실 수가 있고.
그리고 이 몽산법어를 한 구절씩—여러분은 선지식(善知識)을 항상 만나 뵙기가 어려우니까 공부하다가 가끔 법문을 듣고 싶으면, 이 몽산법어를 한 편씩을 보시면 선지식 법문 들은 거와 같아서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또 의정(疑情)이 돈발을 해서 참선이 잘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몽산법어> 총 68편의 동영상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몽산법어'에도 자세한 용어풀이와 함께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단제(單提) ;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단제(單提)는 그냥 ‘무~’ 하고, 의심을 붙이지 않고 아무 일체 다른 말은 없이 ‘무~’만을 관하는 것.
*전제(全提) ; 전(全) 부분이 들고 일어남(全分提起)의 뜻. 본래 그대로 나타냄. 전부를 그대로 나타내 보임.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전제(全提)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상기(上氣) ; ①[한의] 피가 뇌로 몰리는 현상.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나며, 발한, 두통, 이명(耳鳴), 현기증 따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②얼굴이 흥분이나 수치감으로 붉어짐.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 ·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육단심(肉團心) : [범어] Hrdaya. 흘리다야(紇利陀耶)는 번역해 육단심(肉團心)이며 약칭이 육심(肉心)이다. 4심(四心)의 하나. 사람 육신의 오장(五臟) 중의 심장(心臟)이다. 그 형태가 8판(瓣)의 육엽(肉葉)으로 이루어졌다. 의근(意根)이 의탁한 곳.
*탄산가스(炭酸gas) ; 탄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가스. 대기 중에 소량 존재하는 무색 무취의 기체로 공기보다 약 1.5배 무겁다. 탄소를 포함하고 있는 물질이 탈 때나 동물이 호흡할 때 생기며 식물의 광합성에 사용된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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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ㅇ/의심(화두드는 법)2022. 11. 22. 19:39

의심(화두드는 법) (전강선사 No.014)—아는 걸로는 소용없어. 知之一字 衆禍之門 | 참구(參句)라 하는 것은 그대로 활구(活句) | 탁! 맥혀서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다'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먹는다'

아미타불 한마디 부른 가운데에 구백 생멸심(九百生滅心)이 그 속에 들어 있다 | 입껍데기로만 말어라 | 하근 중생은 화두밖에는 없어 | 화두가 안 들린 원인은 이 못된 중생념, 십악(十惡) | 화두가 안 되도 물러가지 아니허면 다 된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 12분 6초.

 

(2) 15분 3초.


[법문] 전강선사(No.014)—전강선사 일대기 제7호(경술1970년 12월 10일 새벽.음) (전014)

(1)------------------

“여하시(如何是)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인고? 어떤 것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인고?”
생사해탈법이 서천(西天)에서, 서역(西域)서 왔으니까 서래의를 물은 것이여. 서래, 그때는 그 인도(印度) 모도 저 서래(西來) 아닌가. 서쪽 아닌가, 여그서. 확철대오(廓徹大悟)헌 생사 없는 대해탈법이 서쪽에서 왔으니까 서래의(西來意)를 묻는 것이여.

“그 서쪽에서 온 그 뜻이 어떻습니까?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자 이빨에 털이 났느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느니라”

그 원, 세상에 그... 따지면 그 뭐 아무데나 붙일 수 있제. 수수꺼끼, 아(兒)들 수수꺼끼처럼. 뭐 수수꺼끼나 뭐 다를 것이 무엇이 있어.

수수꺼끼 그녀러 것, 그것 참 처음에 들어 보면 깜깜 알 수 없지. 그러지마는 그 따져서 모도 붙여 보면은 다 알 수 있는 것이여. 허지마는, 그 수수꺼끼 그거 천 개, 만 개를 다 알아 봤던들 그 뭣허는 것이여? 따져서 모도 아는 것이니.

이리저리 생각해 마음으로 따져서 아는 것은 소용없다 그말이여. 그걸 해석이라 그래. 모도 해석해서, 모도 생각을 붙여서, 뉘기 짜서 아는 것 가지고는 소용없어. 그러기에 지지일자(知之一字) 중화지문(衆禍之門)이여. 아는 것이라는 것은 중화(衆禍)의 문이여. 아는 걸로는 소용없어. 참선법은 그게 아니여.

‘어째서 판자 이빨, 판자 이빨에 털이 났다고 했는고?’
‘조주 스님이 그렇게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으니,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닥 했는고?’
법상(法床)에 올라올 때마다 내가 해 주지. 왜 이래? 이놈을 가지고 모도 대중이 지금 철두철미허게 정진해 나가니까, 이걸 해 줄 수밖에 없지. 제일 중요헌 것이니까.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저 나무 판자 말이여, 나무 판자. 나무로 썰어 논 판자 말이여!
‘판자 이빨에 터럭이 났다’ 어떤 것을 판자 이빨이라 하며, 판자 이빨에 뭔 털이 나? 털이 왜 거가 나? 원 당최, 세상에 거 뭔 소리냔 말이여? 무슨 뜻이여?
알 수 없구나! 알 수 없는 그 의심. 알 수 없는 걸 의심이라고 안 혀? 가령, 사람을 내가 하나 잊어버렸는디, 그 사람이 도망갔는디 ‘어디로 갔나? 어디로 갔을까?’ 간 곳을 알 수 없다.

‘응! 그 사람이 아무 디가 있을 것이다. 거그 있는가?’ ‘아무 디 찾아가면 거 있을 것이다. 아! 거그는 저, 어디 무슨 지리산 가 있을까?’ 고렇게 따지지를 말어. 그 사람이 갔는데, '어디로 갔는고?' 알 수 없구나.

‘어디로 갔는가? 금강산으로 갔는가? 태백산 속으로 들어갔는가?’ 이렇게 분석허지를 말고.
‘어디로 갔는고?’ 알 수 없어. 그저 무조건 여하약하허고 알 수 없다.

수참활구(須參活句)언정, 수참참구(須參參句)언정, 모름이 참구를 헐지언정—참구, '참구헐 참(參)' 자, '연구헐 참(參)' 자. 수참활구언정, 활구를 참상(參詳) 헐지언정. 참(參)이여, 참(參). 참의(參意)가 아니라, 참(參)이여.

참의(參意)라는 것은—참구와 참의와 달라. 참구(參句)라 하는 것은 그대로 활구(活句)여, 그것이. '살 활(活)' 자, '글귀 구(句)' 자, 활구여.
활구를 참상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상허지 말어라. 사구라 하는 것은 그건 내가 먼첨 죽고 남 죽이는 것이여, 그거. 천하에 못쓴 것이 참선에 사구다 그 말이여.
사구(死句)라 하는 것은 모도 아는 것이여. 이치도 있고, 모든 이치가 거그 들어붙고. 모도 아는 것이고, 모도 해석해서. 그것이 선(禪)이 아니여. 참선이라는 것은 그걸 선이라고 안 혀. 허니, 탁! 맥혀서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을 활구(活句)락 햐.

‘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다’ 당장에 판대기 이빨에 털 난 도리를 알 수 없지. 그 도리를 알 수 없는 것이 조주의 뜻이니라. 조주의 뜻이여.
‘어째서 조주 스님은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고 했는고?’ 그 조주의 뜻을 찾는 것이,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는 놈을 알 수 없는 것이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난 놈이 다르고, 조주 스님의 뜻이 다르고, 요리 가서 찾고 조리 가고, 그거 못써. 그걸 참의(參意)라 햐. ‘조주 스님 뜻은 무엇이여, 판대기 이빨에 털은 무엇이며, 그건 다른가 어쩐가?’ 모도 참의여. 참구(參句)가 못 되고 참의(參意)여! 활구가 못 되고 사구여!
요것을 분간해서, 화두를 똑! 한 밥 먹을 동안을 허드래도 고렇게 야물딱지게 다루어 들어가야 혀.
화두 잘못허면은, 화두병 들어 버리면은 그만이니까. 무슨 공부여. 공부는, 무슨 공부가 그런 공부가 있나? 그건 소용없는 공부여.

이치로 모도 그 수수꺼끼 같은 거, 왜 그런 것도 처음에 들으면 꽉 맥혀 모르제. 그놈을 자꾸 상량(商量)허면은, 사량(思量)을 붙이면은 그만 알거든.

인방(寅方), “인(寅)은, 호랭이는 질고, 용단(龍短)이라. 용은 짜룹다. 그게 뭔 뜻이냐?”
아, 그놈의 것, 용은 지드란헌 지드란헌 배암 같이 생긴 진 놈이고, 호랭이는 쪼끄만헌 짜룬 것인디, 어째서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닥 했는고? 아, 그거 알 수 없거든.

그것 따져 보면 안다 그말이여. 용단(龍短)이다. 용이라 하는 것은 진방(辰方)을 용이라 햐, 진방.
동서남북에 방우가 다 있어. 열두 방우가 있지 않어? 자축인묘진사오미(子丑寅卯辰巳午未)...

진방이 거, '용 진(辰)' 자, 진방. 용(龍)이라고 헌단 말이여. 진방에서 해가 뜰 때에는 해가 자룹고, 인방(寅方)에서 해가 뜰 때에는 해가 질다 그 말이여. 그러니께 호랭이는 질고 용은 짜룹다 그 말이여. 그놈을 갖다가서 “무엇이냐?” 물으면, 따지면 알거든. 그 방우를 따지면 아는 그런 것이여.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먹는다. 그 뭔 뜻이냐?” 아, 그거 설찬히 어렵다 그 말이여. 그 생각해 보면 또 그것도, 퇴깽이는 묘방(卯方). 동방(東方)이 묘(卯)거든. 동쪽이 묘니까, 묘에서 해가 올라와 가지고, 퇴깽이 알이란 말이여.
저 유방(酉方)으로 넘어가거든. 해 넘어가는 데 유방(酉方)이니까. 유방, 닭이 집어먹는다 그 말이여. 퇴깽이 알을 닭이 집어생킨다 그 말이여. 아, 거 모도 설찬히 수수께끼라도 그렇게...

그렇게 따지는 건 절대 아니여, 선(禪)이라는 것은.

또 그러고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그대로 딱!
내가 어제 아침에, “그 꿀 먹을 때에 어떻게 했으면 살아 가겄느냐?” “달다!”

내가 도장원(都壯元)했다고 안혀? 내가 도장원했다고 안혀? 역사적으로 도장원이지! 당시에 어찌 바로 해 놨는데, 아니라고 헐 수가 있는가? 못 하지.

그, 고렇게 공안이란 게 딱! 조사관(祖師關)이란 게 백혀 있어.

조사관은 도무지, 뭔 데서 갖다와서 무슨... 어떻게 무슨 저... 뭐락 하노? 그 출처(出處)같은 거, 그런 것도 없어. 출처가 어디 그 조사관에 가 출처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고, 어록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여.
다맛 조사서래의에 딱! 답해 논 것이 ‘판치생모’여. 그 조사관 딱! 해 놓은 것이여.(9분59초~22분5초)





(2)------------------

아미타불(阿彌陀佛) 부른 사람이 ‘아미타불밖에 없으니,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은 극락세계 간다’ 이렇게 믿고는 고성염불(高聲念佛) 헌다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러고 앉었지.
그 부르면서 그 속에는 아미타불 한마디 부른 가운데에 구백 생멸심(九百生滅心)이 거그 그 속에 들어 있다. 온갖 분별심이 거 다 붙어 있네.

멸업장진언(滅業障眞言) ‘옴 아로륵계 사바하’ 업장(業障) 녹인다고 “옴 아로륵계 사바하, 옴 아로륵계 사바하”
그놈 소리, 고성염불 소리에, “아로륵계 사바하, 아로륵계 사바하” 뭔, 저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이 부르는 속에 가서 미세헌 생사념(生死念)이 꽉! 들어찼네. 이것을 알아야 혀.
그러니 “그 구피변(口皮邊)으로, 입껍데기로 헌 것이 무슨 이익이 있느냐?” 그랬거든. 그 이익이 없어.

경을 읽드래도 “여시아문(如是我聞) 일시불재사위국(一時佛在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그거 뭣이여?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니라. 네 마음 네가 한번 반조(返照)를 못허면은, 알 수 없는 놈이 반조여.

내가 나를 몰랐으니까 아지 못헌, 알 수 없는 놈을 하나 추켜들어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 거기에는 그 미세한 가리같은—가리 찌클으면 부우 허데끼—고러헌 망념(妄念)이 없어.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래야 중생념을 항복 받는 것이지, 그 이외에는 없는 것이여.
그래서 그 의단독로를, 구피변(口皮邊)을 제일 말했거든. 입껍데기로만 말어라 이 말이여.

그래서 ‘옴마니반메훔’이라든지, 정상화불수(頂上化佛手) 주문(呪文)이라든지, 팔만사천 주문 읽는 법이 거, 고성지(高聲持)가 있지. 소리 높여, '높을 고(高)' 자, '소리 성(聲)' 자, '가질 지(持)' 자, 고성지가 있고.
그다음 미성지(微聲持)가 있고, '가늘 미(微)' 자, '소리 성(聲)' 자, '가질 지(持)' 자, 미성지가 있고. 그다음에 유가지(唯加持)가 있고, '오직 유(唯)' 자, '더할 가(加)' 자, '가질 지(持)' 자, 유가지가 있고. 그다음 금강지(金剛持)가 있어, 금강지. 금강지라는 것이 그것은 뭐...

“옴마니반메훔” 그것 고성지고, 내 귀에만 들린 것 (작은 목소리로)“옴마니반메훔” 그것 미성지고, 유가지라 하는 것은 셋바닥도 동(動)치 않고, 설근(舌根)도 동치 않고 헌게 유가지고, 그다음에 금강지여.

금강지라 하는 것은, 당초에 금강지라는 것은 셋바닥이고 무슨 뭔, 동치 않고 동허고... 거그는 천성(千聖)도 불식(不識)이여! 불불(佛佛)도 불상견(不相見)이여!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여! 금강지라는 것은.
‘금강지로 들어가야 헌다’ 해 놨어. 그러니 그게 바로 곧 그 선(禪)보담도 더 혀. 그 밀(密)이여. 밀교(密敎)라는 게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여.

그래 가지고는 처억 그 관법(觀法)이 있는디, 이사무사지묘(以思無思之妙)다. 생각으로써 생각 없는 묘(妙)가 있어. 그 헐래야 못허는 것이여.
반사영염(返思靈焰)에 무궁(無窮)이다. 도리어 영염(靈焰)에 신령스런 불꽃, 영염에 무궁을 관한다. 영염무궁(靈焰無窮)을 관한다. 또 그 생각도, 사진(思盡)이 환원(還源)이다. 그 생각이 다하여 근원에 돌아가느니라.

그 근원이 어디가 근원인가? 근원이 어디인디 근원으로 돌아가는가 말이여?
생전 해야 그건 중생념으로 되지 않어! 관법과 반조법(返照法)과 다 그려. 이렇지. 어떻게 허는 것이 불... 허니, 우리 중생은 성상상주(性相常住)해서 사리불이(事理不二)헌 곳이 어느 곳인가 말이여?

그 나가상정(那伽常定)이니라. ‘나가상정에 들어온다’ 허는 게, 그것이 참으로 바로 돌아가는 귀향처인디, 구경처(究竟處)인디 어떻게 혀? 중생념으로 되아?

이 중생은 도무지 눈만 뜨면, 잠만 잘 것 같으면 제팔 뢰야식장(第八賴耶識藏)에 가 딱 잠겨서, 근본식(根本識), 근본무명(根本無明)에 가 딱! 주저앉어 잠겨 가지고는, 천지(天地) 분간(分揀) 아무것도 모르고 매(昧)해 버리는 건디.
거그서 일념이 나올 것 같으면은 그만 육식(六識)으로 벌어져, 육정(六情)으로 벌어져 육근의식이 되아 가지고는, 그 육백 생멸심이 퍼일어나 가지고는 전부 생멸심 뿐인데 어떻게 헐 거냔 말이여.

거, 그래 가지고는, 그걸 가지고는 뭐 아무리, 뭐 지성으로 해 보고 그대로 되는가?
‘옴마니반메훔’을 많이 많이 부를 것 같으면은 그만 부귀, 굉장헌 부귀를 헌다 했어. 어디 그 되나? 정상화불수(頂上化佛手)는 칠 일만 헐 것 같으면은 아, 그만 육신통(六神通)이 막 난다 했어. 그 되나?
미쳐 버리지. 중생견(衆生見)으로 되냐 그말이여? 벌써 금강지를 턱 들어가서도 그와 같은 관법이 있는디.

허니, 우리 범부선(凡夫禪)이라 하는 것은 범부는, 우리 지금 중생이라 하는 것은 그저 이 말세선, 우리도 지금 말세선이여. 이 말세선이기 따문에 말세(末世) 학자라는 건 상근이 없어. 뭐 상근(上根) · 중근(中根) · 하근(下根)이 언제는 있고 언제는 없으리오마는, 헐 수 없이 또 그놈의 말세가 있어.
말세 중생이라는 것은 너무 간혜(乾慧)가 많아. 마른 그 간혜가 너무 많여. 간혜 많은 것이, 너무 퍼떡 퍼떡 잘 아는 것이 그것이 하근(下根)이여. 상근대지(上根大智)는 분석, 따지는 게 없어! 그만 막 들어가지. 그대로.

허니, 우리 하근 중생이 어쩔 수 없어! 화두밖에는 없어.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냐?”
“판치생모(版齒生毛)니라. 판대기 이빨에 털 났느니라”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그놈의 중생념 속에, 중생 그 망상 번뇌 속에서 요것 하나를 처억 그놈을 어떻게 만들아 가지고, 받아 가지고 해볼라니 되냔 말이여? 죽어도 안 되는 것이 그뿐이다.
오직해야 ‘역수탱주(逆水撑舟)니라’ 물을, 들입대 흘러가는 기맥힌 급류 중에, 급허니 흘러가는 물에 사람이 거그 발자취도 거그 뭐 대보지 못헐 만헌 그러헌 그 급류에 배를 끄집어 올린 것 같다.

그러니 왜 그렇게 안 될 꺼여? 화두가 왜 그렇게 도망가?
유구유원(悠久悠遠)이여. 더욱 멀어져. 헐라고 허면 더 멀어져. 아! 이런 화두를 끄집을라면 더 멀어지네. 이런, 이런 놈의 꼴 좀 보소!

왜 그렇게 안 된 원인이 뭐냐 이 말이여.
그렇게 화두가 안 들린 원인이라는 것은 뭐냐 허면은 이 못된 중생념—그 살생이나 하고, 도둑질이나 하고, 사음 음행질이나 하고, 거짓말이나 하고, 두 가지 양설(兩舌), 그저 악구(惡口), 고런 놈의 습기(習氣), 그저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 이 십악(十惡) 그 중죄짓는 버르쟁이, 그 마음 고놈으로써, 일어나는 마음으로써 퍼진 고놈이 전면의지(纏綿意地)해서—뜻 땅에, 내 뜻 뿌럭대기가 꽉! 솜처럼 때리 얽허져 가지고는 그놈 조금 잠복시켜 놓고 화두를 ‘어째 판대기 이빨에 털 났다 했는고?’ 해도, 그놈이 그만 도로 퍼일어나.

이놈의 것은 도무지 백억천만 겁에 내 생겨난 때가 없이 오면서 지어 논 놈의, 그놈의 그만 그 번뇌 망상이 그놈이 뒤끓어 일어나니, 도모지 화두를 추켜들라면은 그렇게도 급류 중에 배 끌어올릴라 헌 것처럼 조금 이러면, 한 일 고쯤 끄집어 올려 놓으면 십 고나 물러가고, 십 고 끄집어 올려 놓으면 백 고나 물러가고, 이놈이 이렇다 그 말이여. 허지마는, 불가불 이 말세 학자가 닦을 것은 선(禪)이여.

“어째서 판대기 이빨에 털났다 했는고?” 의심, 알 수 없는 놈만 찾어.
안 되면 또 허고, 안 되면 또 허고, 안 되도 또 해서 물러가지 말어라. 그 신심(信心)만 물러가지 아니허면, 참으로 발심해서 그 철저헌 신심만 물러가지 아니헐 것 같으면은 수불견성성불(誰不見性成佛)이냐? 누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못할 꺼냐? 허! 물러가지 아니허면 다 된단 말이여.

허니, 처음에 화두학자가 처음 들어와서, 한 사나흘이나 한...
여그 선생님도 저 봐. 아주 참, 세상에서 아주 강연도 참, 웅변대회에서 제일가신 선생님이시고, 학교 선생님도 여태까장 수십 년을 해 나오시고 또 다 저 종교계에서 근 20년 동안 종교를 참, 그렇게 도를 닦아 오셨지마는, 무척 깊으라니 연구를 많이 허셨어.

그래 가지고 저렇게 오셔서 지금 참말로 이... 그래도 참선은 아마 그렇게 몇 철을 앞두고 해 보시지는 안 했는가 어쩐가 말씀은 그러지마는, 또 많이 허셨는지도 모르제.
이렇게 오셨지마는, 마음은 그저 한 일주일에 그만 일 마치고, ‘참선법이 참말로 그와 같이 깨달은 법이 있다면은 내가 일주일 동안에, 일주일 꺼리 밖에 될 것 뭐 있나?’ 그래 가지고 한 일주일 한번 해 보신다고 어저께 오셨는디 아, 이렇게 오셔서 엊저녁부텀 무척 고생을 하셨겠지.

그같이 편안헌 방에서 잠 편안히 잘 주무셨을 것이고, 좋은 그저 참 이부자리 속에서 편안히 주무셨을 터인디, 여기에 오셔서 그만 같이 모도 한방에서 이렇게 고생허고 주무시고, 인자 앞으로 일주일 동안을 한번 저렇게 고생을 같이 해보신다고 밥도 같이 그만 그 반찬도 아무것도 없고, 또 아침부터 죽 자시고, 이것을 모도 저렇게 견뎌 가시면서 한 일주일 동안 해보신다고 하는 그러헌 용맹심(勇猛心)을 가지고 오셨는데. 무척 참, 그 용맹심 거룩헌 마음이시여.

“계시라”고. 이렇게 해놨는데.
일주일 동안에 한번 용맹심으로써 일 마칠 마음을 가지신 것이여. 허지만 일주일 동안에 못헌다고 해서 퇴타(退墮)가 있으면 안 된단 말씀이여. 또 일주일, 또 일주일, 그저 언제까지든지 일주일 일주일이 자꾸 계속되아 나가야 허신단 말씀이여. 여까장.

내 그저, 내가 그래 정성스런 마음으로써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여. 미국사람 같은 사람은 손이 오면은 반찬이 있건 없건 한 가지면 한 가지 채려 놓고 “정성껏 채렸으니 많이 잡사 주십시오” 우리 동양사람은 잔뜩 채려 놓고도 “반찬이 없지마는 많이 잡사 주십시오”
그래 동양사람 인사는 그 좀, 그 서양사람 인사만치 바르지 못혀. 그대로가 못 된다 그 말이여. 모도 꾸며대서... 내 있는 대로 헌 말씀이여. 여까장 했습니다.(38분23초~53분2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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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서천(西天) ; ①서쪽 하늘. ②서천 서역국(西天西域國 : 인도의 옛 이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지지일자(知之一字)가 중화지문(衆禍之門) ; 「‘알 지(知)’ 자 한 글자가 온갖 재앙의 문이다」
[참고 ①] 『대혜보각선사어록』 제16권 대혜보각선사보설(大慧普覺禪師普說) ‘부경간이 청한 보설(傅經幹請普說)’ (대혜종고 1089~1163 | 김태완 옮김 | 소명출판) p230~234 참고.
那箇是生而之知者 如趙州作沙彌時 同本師行脚到南泉 値南泉臥次 本師禮拜了 趙州方禮拜 南泉問云 近離甚處 州云 近離瑞像 泉云 還見瑞像麽 州云 瑞像則不見 面前只見臥如來 南泉遂起 問 爾是有主沙彌 無主沙彌 州云 是有主沙彌 泉云 那個是爾主 若是如今禪和家 便近前彈指 打箇圓相 喝一喝拍一拍 拂袖便行 放出這般惡氣息 爾看他趙州 緩緩地近前道 孟春猶寒 伏惟和尙尊候萬福 泉乃喚維那云 此沙彌別處安排

어떤 것이 태어나면서 아는 경우인가? 예컨대, 조주 스님(778~897)이 사미였을 때에 본사(本師)와 함께 행각하여 남전(南泉)에 이르렀는데, 마침 남전 스님(748~834)이 누워 있었다. 본사가 절을 하고서 조주 스님이 막 절을 하려고 하는데 남전 스님이 물었다.

‘최근 어디를 떠나왔는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서상(瑞像)을 떠나왔습니다’

남전 스님이 물었다. ‘서상을 보았는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서상은 보지 못했지만, 눈앞에서 다만 누워 있는 여래를 봅니다’

남전 스님이 이에 일어나 물었다. ‘그대는 스승이 있는 사미인가? 스승이 없는 사미인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스승이 있는 사미입니다’

남전 스님이 말했다. ‘누가 그대의 스승인가?’

만약 요즈음의 선객이라면, 곧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퉁기거나, 한 개 원상(圓相)을 그리거나, 한 번 고함을 지르거나, 박수를 한 번 치거나, 소매를 털고서 곧장 가거나 하는 등등의 더러운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그대들은 보아라. 저 조주 스님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초봄이니 아직 춥습니다. 스님에게 만복이 깃들기를 삼가 빕니다’

남전이 이에 유나(維那)를 불러 말했다. ‘이 사미를 특별히 대접하여라’

次日却來問 如何是道 南泉也不行棒 也不下喝 也不談玄 也不說妙 也不牽經 也不引論 也不擧古人公案 亦不說事 亦不說理 只實頭向他道 平常心是道 爲他趙州已理會得平常心了 便却問 還假趣向也無 泉云 擬向卽乖 州云 不擬爭知是道 泉云 道不屬知 不屬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眞達不疑之道 猶如太虛廓然蕩豁 豈可於中彊是非耶 趙州於言下千了百當

다음날 다시 와서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남전 스님은 방망이를 휘두르지도 않고, 고함을 지르지도 않고, 현묘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경론을 인용하지도 않고, 옛사람의 공안(公案)을 말하지도 않고, 사실을 말하지도 않고, 이치를 말하지도 않고, 다만 확실하게 그에게 말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

조주 스님은 이미 평상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다시 물었다. ‘향하여 다가갈 수 있습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향하여 다가가려 하면 어긋난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향하여 다가가지 않으면 어떻게 도를 압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도는 앎[知]에 속하지도 않고, 알지 못함[不知]에 속하지도 않는다. 앎은 허망하게 깨어 있는 것이고, 알지 못함은 깜깜한 무기(無記)이다. 만약 참으로 의심없이 도에 통달하면, 마치 커다란 허공과 같아서 막힘없이 텅 비었는데, 어떻게 그 속에서 억지로 옳으니 그르니 할 수 있겠느냐?’조주 스님은 그 말을 듣고서 밝게 깨달았다.

南泉道 道不屬知 不屬不知 圭峰謂之靈知 荷澤謂之 知之一字衆妙之門 黃龍死心云 知之一字衆禍之門 要見圭峰 荷澤則易 要見死心則難 到這裏須是具超方眼 說似人不得 傳與人不得 所以圜悟先師說 趙州禪只在口脣皮上 難奈他何 如善用兵者 不齎糧行 就爾水草糧食 又殺了爾

남전 스님은 ‘도는 앎에 속하지도 않고, 알지 못함에 속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지만, 규봉 스님(780~841)은 그것을 일러 ‘신령스런 앎[영지(靈知)]’이라 하였고, 하택 스님(684~758)은 그것을 일러 ‘지(知) 한 글자는 온갖 묘함의 문(門)이다’라 하였고, 황룡사심(1043~1114) 스님은 말하기를 ‘지(知) 한 글자는 온갖 재앙의 문(門)이다’라 하였으니, 규봉과 하택을 알기는 쉬우나 사심(死心)을 알기는 어렵다. 여기에 이르러선 모름지기 테두리와 격식을 벗어난 안목을 갖추어야 하니,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없고, 남에게 전해 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원오 선사(先師 1063~1135)께서는 말씀하시길 ‘조주의 선(禪)은 다만 입술 위에 있으니, 그것을 어떻게 하기는 어렵다(다른 번역 : 조주의 선이 그저 말로 되는 것이라면 무에 어려울 게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마치 용병(用兵)을 잘하는 자가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그대의 수초(水草)를 양식으로 삼아 그대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참고 ②] 『고봉화상 선요 어록』 (고봉 1238~1295 |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시중(示衆 其十四)’ p110~112 참고.
若論參禪之要 不可執蒲團爲工夫 墮於昏沈散亂中 落在輕安寂靜裏 總皆不覺不知 非唯虛喪光陰 難消施主供養 一朝眼光落地之時 畢竟將何所靠

만약 참선의 요점을 논하자면 방석에 앉는 것을 집착하여 공부를 삼아 혼침과 산란 가운데 떨어지거나, 편안하고 고요한 속에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모두 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리니 오직 세월을 허송할 뿐 아니라 시주들의 공양을 소화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루 아침에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필경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山僧昔年在衆 除二時粥飯 不曾上蒲團 只是從朝至暮 東行西行 步步不離 心心無間 如是經及三載 曾無一念懈怠心 一日驀然踏著自家底 元來寸步不曾移

산승이 옛날 대중에 있을 때 죽과 밥 먹는 두 때를 제외하고 방석 위에 올라앉지 않고 다만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걸음걸음에 여의지 않고 마음 마음이 간격이 없었다. 이와같이 3년을 지내도록 일찌기 한 생각도 게으른 마음이 없다가 하루는 문득 나의 고향[自家]을 밟고 나니 원래 한 걸음도 옮긴 것이 아니었더라.

昏沈掉擧 喜怒哀樂 卽是眞如佛性 智慧解脫 只緣不遇斯人 醍醐上味 飜成毒藥 靈利漢 假饒直下知非 全身擔荷 正好朝打三千 暮打八百 何故 豈不見道 知之一字 衆禍之門

혼침과 도거, 희로애락이 그대로 진여불성이고 지혜해탈이건만 다만 인연이 이러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제호상미가 도리어 독약이 되었다. 영리한 사람이 가령 당장에 그른 줄 알아 온 몸으로 짊어지더라도 바로 아침에 삼천 번을 때리고 저녁에 팔백 번을 때릴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어찌 '지(知)라는 한 글자가 모든 재앙의 문이다'라는 말을 알지 못하는가?

若論此事 如蚊子上鐵牛相似 更不問如何若何 便向下觜不得處 拌命一鑽 和身透入 正恁麼時 如處百千萬億香水海中 取之無盡 用之無竭 設使志不堅心不一 悠悠漾漾 東飛西飛 饒你飛到非想非非想天 依舊只是箇餓蚊子

만약 이 일을 논하자면, 모기가 쇠로 된 소에 오르는 것과 같아서 다시 이러쿵 저러쿵 묻지 않고 당장에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버리고 한 번 뚫어서 몸으로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런 때 마치 백천만억 향수해(香水海)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취(取)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고갈됨이 없지만, 설사 뜻이 견고하지 않고 마음이 한결같지 않아 아득히 출렁대며 동으로 날고 서로 날다가 설사 네가 날아서 비비상천에 이른다하더라도 여전히 다만 한 마리 굶주린 모기일 뿐이더라.

[참고 ③] 『선가귀감』 (청허휴정 1520~1604 / 1564년에 지은 책) (용화선원刊) p220~221. (가로판 p226~227)
神光이  不昧하야  萬古徽猷로다  入此門來에  莫存知解어다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밝고나。이 문 안에 들어오매 알음알이를 두지 말지어다.



 

(註解) 神光不昧者는  結上昭昭靈靈也요  萬古徽猷者는  結上本不生滅也요  莫存知解者는 結上不可守名生解也라  門者는  有凡聖出入義하니  如荷澤의  所謂知之一字가 衆妙之門也라 


 


(주해) 거룩한 빛이 어둡지 않다는 것은 첫 머리의 「밝고 신령하다」는 것을 맺는 말이요, 만고에 밝다 함은 「본래부터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맺는 말이며,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하는 것은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하는 것을 맺는 말이다。「문(門)」이란 범부와 성인이 드나든다는 뜻이 있으니, 마치 하택신회 선사가 이른바 ‘알 지(知)’자 한 자가 온갖 묘한 이치의 문이라고 한 것과 같다.

吁라  起於名狀不得하야  結於莫存知解하니  一篇葛藤을 一句都破也로다  然이나  始終*一解요  中擧萬行하니  如*世典之三義也라 知解二字는  佛法之大害故로  特擧而終之하니  荷澤神會禪師가  不得爲曹溪嫡子者는 以此也라

아! 「이름 지을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다」는 데서 시작하여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것으로 끝을 맺으니, 이 한 권에 얽힌 넌출을 한마디 말로 모두 끊어 버렸다。그리하여 처음과 끝을 일해(一解)로써 말하고, 중간에는 온갖 행동을 들어 보였으니, 마치 유교 경전의 삼의와 같다。지해(知解) 두 글자는 불법에 큰 해독이 되므로 특별히 들어서 끝을 마치니 하택신회 선사가 조계의 적자가 못 됨은 이 때문이다.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참구(參句) ; 언구(言句 화두)를 참상(參祥)하는 것.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參意)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參句)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참상(參祥) ; 참구(參究).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알음알이. 지해(知解).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질다 ; ‘길다’의 사투리.
*짜룹다 ; ‘짧다’의 사투리.
*방우 ; ‘방위(方位)‘의 사투리.
*진방(辰方) ; 이십사방위(二十四方位)의 하나. 정동(正東)에서 남으로 30도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각도 안의 방향이다. 진(辰)은 십이지(十二支)의 다섯째 지지(地支)로 용(龍)을 상징한다.
*퇴깽이 ; ‘토끼’의 사투리.
*설찬히 ; 솔찬이. 솔찬히. ‘아주 많이. 상당히. 제법’의 사투리.
*도장원(都壯元) ; 장원(壯元). ①예전에, 과거(科擧)의 갑과(甲科)에서 일등으로 급제하는 일이나 그 사람을 이르던 말. ②글을 제일 잘 지어 성적이 첫째임. 또는 그런 사람.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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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고성염불(高聲念佛) ; 크고 높은 소리로 외는 염불. 큰소리로 염불하면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그치게 하여 쉽게 삼매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참고] 『아미타경통찬소(阿彌陀經通贊疏)』 중권(中卷) (규기찬窺基撰)
高聲念佛 有十種功德 一、能排睡眠 二、天魔驚怖 三、聲遍十方 四、三塗息苦 五、外聲不入 六、心不散亂 七、勇猛精進 八、諸佛歡喜 九、三昧現前 十、往生淨土

고성염불에 열 가지 공덕이 있다. ①능히 수면(睡眠)을 쫓는다. ②천마(天魔 : 魔王 波旬)가 두려워한다. ③염불소리가 시방(十方)에 두루한다. ④삼도(三塗 :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을 쉬게 한다. ⑤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⑥마음에 산란함이 없어진다. ⑦용맹히 정진한다. ⑧모든 부처님께서 환희하신다. ⑨삼매가 나타난다. ⑩정토(淨土)에 왕생한다.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 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 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니라' ; 「십무익(十無益 : 열 가지 무익한 것)」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선사의 시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청매집(靑梅集)』 (하권)에 있는 게송. 「십무익송(十無益頌)」이라고도 한다.
①심불반조 간경무익(心不返照 看經無益) 마음을 반조치 아니하면 경을 봐도 이익이 없고
②부달성공 좌선무익(不達性空 坐禪無益) 성품의 공함을 요달치 못하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고
③경인망과 구도무익(輕因望果 求道無益) 원인을 가벼이 하고 과보를 바라면 도를 구해도 이익이 없고
④불신정법 고행무익(不信正法 苦行無益) 정법을 믿지 않으면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고
⑤부절아만 학법무익(不折我慢 學法無益) 아만을 꺾지 않으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고
⑥내무실덕 외의무익(內無實德 外儀無益) 안으로 실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위의를 세워도 이익이 없고
⑦흠인사덕 제중무익(欠人師德 濟衆無益) 스승으로서의 덕이 부족하면 중생을 제도해도 이익이 없고
⑧심비신실 교언무익(心非信實 巧言無益) 마음이 진실치 않으면 교묘한 말을 해도 이익이 없고
⑨일생괴각 처중무익(一生乖角 處衆無益) 일생을 괴각질을 하면 대중과 함께 해도 이익이 없고
⑩만복무식 교만무익(滿腹無識 憍慢無益) 뱃속에 무식만 가득하면 교만해도 이익이 없다.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 조선 중기의 스님. 호는 청매(靑梅), 자는 묵계(默契). 청허휴정(淸虛休靜 서산대사)의 제자.
명아주 지팡이에 갈포옷을 입고 금강산 · 태백산 · 지리산 · 구월산을 두루 다녔다. 이렇게 삼십여 년 지내다 묘향산에서 참선하던 중,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을 따라 승병장의 한 사람으로 3년 동안 싸워 공을 세웠다. 왜군이 물러가자 전라도의 부안 변산에 이르러 아차봉(丫嵯峰) 마천대(摩天臺) 기슭 월명암에서 지냈다.
또 그림에 능해 1617년(광해군 9) 왕명으로 벽계정심(碧溪淨心) · 벽송지엄(碧松智嚴) · 부용영관(芙蓉靈觀) · 청허휴정(淸虛休靜) · 부휴선수(浮休善修) 등 다섯 스님의 진영을 그려 조사당(祖師堂)에 모시고 제문(祭文)을 지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의 연곡사(燕谷寺)에서 1623년(인조 1) 76세에 입적하였다.
*반조(返照) ; 돌이켜 살펴보는 것.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가리 ; ‘가루[분(粉), 분말(粉末)]’의 사투리.
*찌클다 ; ‘뿌리다(곳곳에 흩어지도록 던지거나 떨어지게 하다)’의 사투리.
*망념(妄念) ; 망상(妄想).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셋바닥 ; ‘혓바닥(‘혀’를 속되게 이르는 말)’의 사투리.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 ;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하다.
*이사무사지묘(以思無思之妙) ; ’생각으로써 생각 없는 묘(妙)‘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11권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703~704 참고.
師問 如何是眞佛住處 祐曰 以思無思之妙 返思靈焰之無窮 思盡還源 性相常住 事理不二 眞佛如如」 師於言下頓悟

대사(앙산)가 물었다. “어떤 것이 참 부처가 사는 곳입니까?”
영우 선사가 말하기를 “생각하면서도 생각 없는 묘함으로써 신령한 불꽃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되,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품[性]과 모습[相]이 항상 머무르고 일[事]과 이치[理]가 둘이 아니라서 참 부처가 여여(如如)하리라” 대사가 이 말끝에 단박에 깨달았다.
*나가상정(那伽常定) ; 행주좌와(行住坐臥)의 4위의(四威儀) 어느 때에도 항상(恒常) 삼매[定]에 들어 있는 부처님의 경지를 말함. 나가(那伽)는 용 또는 코끼리。 물에서는 용이 제일 힘이 세고 육지에서는 코끼리가 제일 힘이 세기 때문에 부처와 아라한을 나가(那伽)라 한다.
*구경처(究竟處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곳·때·지위 처) ; 최후의 도달처. 주로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인 경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제팔 뢰야식장(第八賴耶識藏) ; 제팔 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참고] 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근본식(根本識) ; 본식(本識), 근식(根識) 등이라고도 한다. 근본식은 유식학파에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지칭하는 말로 주로 사용한다.
*근본무명(根本無明) ; 모든 번뇌(煩惱)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깨닫지 못하고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리킨다. 곧 진여(眞如)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한 생각으로 가장 미세하게 움직이는 마음이며, 생사윤회의 근본이 된다.
지말무명(枝末無明)의 상대어. 무시무명(無始無明), 근본혹(根本惑), 근본불각(根本不覺), 근본번뇌(根本煩惱), 원품무명(元品無明) 등과 같은 뜻이다.
*매(昧)하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모른다. 어둡다.
*육정(六情) ; 육근(六根).
*중생견(衆生見) ; 중생의 번뇌에 얽매여 전도몽상(顚倒夢想 :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한 잘못된 견해.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상근(上根 위 상/뿌리 근)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매우 뛰어난 사람.
*간혜(乾慧) : 비록 깨쳐서 지혜가 났더라도, 정(定)의 힘이 충실하지 못하면 그것은 마른 지혜라고 한다。마른 지혜는 죽고 나는 이치를 알더라도, 나고 죽는 데 마음대로 자유자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乾 = 하늘 건, 마를 간)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역수탱주(逆水撑舟 거스를 역/물 수/배를 젓다 탱/배 주) ;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다’
*십악(十惡) ;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〇몸(身)—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婬 삿된 음행).
〇말(口)—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〇뜻(意)—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⓪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전면의지(纏綿意地 얽을 전/얽힐 면/뜻 의/땅 지) ; 마음의 밭에 얽히고설켜.
[참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보조국사(普照國師)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서.
無始習熟  愛欲恚痴纏綿意地  暫伏還起  如隔日瘧  一切時中  直須用加行方便智慧之力  痛自遮護  豈可閒謾  遊談無根  虛喪天日  欲冀心宗而求出路哉.

비롯함이 없는 옛적부터 익혀 온 애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에 얽히고설켜서, 잠깐 조복 되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마치 하루 걸러 앓는 학질병과 같으니라.
어느 때에나 모름지기 바로 수행을 더하는 방편과 지혜의 힘을 써서, 간절히 스스로 막아 지켜야 하거늘, 어찌 한가하게 근거 없는 잡된 이야기를 하여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마음의 근본을 깨닫기를 바래며 생사 벗어나는 길을 구하고자 하겠는가?
* ; '공이[杵]'의 사투리.
*공이 ; 절구나 방아확에 든 물건을 찧거나 빻는 기구. 메공이, 돌공이, 쇠공이, 절굿공이, 방앗공이 따위가 있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용맹심(勇猛心) ; 두려움 없이 용감하며 기운차고 씩씩한 맹렬한 마음.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선문(禪門) ; 선종(禪宗).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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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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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의심(화두드는 법)((No.233))—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 |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 | 경(經)은 노정기(路程記) | 참선법은 최상승법, 교외별전(敎外別傳).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하는,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수마(睡魔) | 생력(省力), 힘을 덜은 것이 바로 득력(得力), 힘을 얻는 것.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19분 41초)

 


[법문]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끊어져 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렇게 해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 스님이 천하 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法擧揚)을 해 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맡었지만, 원오극근 선사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하시지 안 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 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한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갖다가 막 강짜로 압력을 가해 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어갈 때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데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생각을 내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먹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데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하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53분16초~1시간12분5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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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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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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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단독로((No.217))—(게송)南北東西無定着 生涯只在一枝筇 舌頭細嚼煙霞味 直入千峰更萬峰 | 오직 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향해서 목숨을 걸어 가는 데에다가 비유하는 게송입니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8분 15초)

 


[법문] 송담스님(No.217)—1983년(계해년) 추계산철 해제 법회(83.09.30.음) (용217) (의심)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허고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煙霞味)하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한디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구나.
동서남북 정처가 없어. 출가해서 걸망을 지고 도반과 선지식을 찾아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하기 위해서 행각을 하는 분상에는 동서남북 정착(定着)함이 없어.
생애(生涯)는 지재일지공(只在一枝筇)이여. 오직 주장자 하나에 온 생애를 다 맽겨버렸다 그 말이여. 주장자가 동쪽으로 행하면 동쪽으로, 금년 여름에는 동쪽에서 지내다가 겨울철에는 북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갔다 남쪽으로 갔다 동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갔다, 주장자 하나로 생애를 맽겼는데.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煙霞味)여.
무엇을 먹고 사느냐? 무슨 음식을 먹고서 영양을 섭취해 가지고 이 생애를 끌고 가느냐?
연하(煙霞), 안개와 연기를 씹어서 먹고 거기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도 안개는 끼고, 끼어 있는 그 안개를 먹고 살지, 쌀이나 콩이나 팥이나 무슨 고기나 그러한 세속에서 말하는 영양 있는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하루 세끼 밥을 먹되 맛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한 오리도 걸칠 것이 없이, 그러기 때문에 밥을 먹되 쌀이 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실오라기가 없는 그런 옷을 입고, 그리고 먹는 것은 연하(煙霞), 자욱이 아침에 끼었다 낮에는 또 벗거지고, 다시 해가 저물면 또 끼었다가 또 벗거지고 하는 그 자욱한 안개를 먹고 산다.
이 안개라고 하는 것은 생사(生死) 요달(了達)을 하기 위해서 입으로 물질로 된 그것을 먹고 이 영양을 섭취한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는 알 수 없는 공안 화두에 대의심(大疑心) 그놈 하나로 그놈에다가 나에 온갖 정성과 온갖 분심(憤心)과 생명을 거기다가 걸고, 먹어도 먹은 줄을 모르고 추워도 추운 줄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고 오직 그 의단(疑團) 하나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연하(煙霞)를 먹고 산다.

그래 가지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다. 천봉(千峰), 바로 천(千) 봉아리 속을 향해서 들어가고 다시 또 만(萬) 봉아리를 향해서 간다.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그 수없는 것을 보고, 수없는 것을 듣고, 수없는 생각이 일어나는 그것들이 모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우리 앞에 제출되는 모든 것은 바로 그것이 천 봉오리고 만 봉오리다 그 말이여.
그 봉오리 봉오리 넘을 때마다 거기에서 피렴심(疲厭心)도 느끼지 아니하고, 소득심(所得心)도 갖지를 아니하고, 만족심도 갖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향해서 목숨을 걸어 가는 데에다가 비유하는 게송입니다.(처음~8분2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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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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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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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화두드는 법) ((세등51))—참선에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들어 있다.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 (게송)摩尼珠人不識~ | 바로 공부를 지어 가는 마당에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어.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8분47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51)—1984(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어(84.07.17) (세등51)

처음에 선방에 와 가지고 정진을 하되, 올바르게 공부를 못해 가지고 참 가석하게도 몸에 병이 난다든지 또는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돌이키기 어려운 그러한 지경에 이른 사람을 가끔 봅니다.

이 참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이거여. 화두를 타 가지고 그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는 데 있어서 큰 의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여.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여. 큰 의심을 가지고 정진을 해야 그 큰 의심이 터지면서 크게 깨달어. 의심이 시원찮으면 깨닫기도 어려우려니와 설사 어떠한 소견이 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깨달음이라 볼 수가 없어. 그러니 큰 깨달음(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무슨 법문을 듣거나, 무슨 경을 보거나, 무슨 일을 만나거나 온갖 종류에 의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의심이 날 때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일에 대한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 다른 의심을 풀려고 하지 말고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유리병이 있는데, 그 유리병은 주둥이는 쪼끄마하고 그 밑에 몸뚱이는 크낙해 가지고 그 유리병 속에다가 오리 새끼를 집어넣었다. 오리 새끼 금방 깐 거야 조그마하기 때문에 그 유리병 작은 주둥이로 집어넣었어. 오리 새끼를.
넣어 가지고 날마다 물도 주고 먹이도 주고 해 가지고 그 오리를 먹여 살렸는데 한 달 두 달 석 달 넉 달 크니까, 그 오리가 크막한 애미가 되었어. 몸뚱이는 크니까 그 안에서 맘대로 오리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컸는데, 그 오리를 유리병 밖으로 꺼내야겠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유리병을 깨지도 말고 그 오리도 다치지 않게 어떻게 이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느냐?' 이러한 문제를 냈다.

이것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중에 하나지만, 어떤 사람이 수수께끼처럼 이 문제를 물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여. '유리병을 어떻게 깨지 않고 그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는가?' 그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오리를 죽여 가지고 대가리 띠어서 꺼내고, 날갯죽지 꺼내고, 발목쟁이 꺼내고, 몸뚱이도 토막을 내서 꺼내고, 아 그렇게나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유리병을 유리를 갖다가 확 깨 가지고 그렇다면은 오리를 다치지 않고 꺼낼 수가 있겠으나, '유리병도 조금도 깨지 말고 다치지 않게 하고 그리고서 오리도 상하지 않게 어떻게 꺼낼 수가 있는가?'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자기는 '이뭣고?' 화두를 하고 있는데, 누가 그 오리 꺼내는 문제를 제기를 했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도 '어떻게 하면 오리를 꺼낼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자기는 '이뭣고?'를 해라 그 말이여.
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분은, 설사 다른 공안—오리 새끼 꺼내는 공안이 되었건, 또는 이뭣고 공안이 되었건, 또는 판치생모 화두에 대한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건 간에, 그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이외의 화두나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하물며 세속에 어떠한 문제나 경전에 있는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어. 천 가지 만 가지 모든 의심을 만났을 때에 탁! 똘똘 그놈을 뭉쳐서 자기의 본참공안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렇게 해 나간다면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산을 보더라도 '아, 산이 푸르르구나, 산봉우리에는 구름이 끼였구나' 이런 식으로 쫓아가지 말고, 푸른 산을 보자마자 바로 자기의 화두(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정전백수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판치생모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자기의 본참화두로 돌아와. 이것이 바로 천의만의(千疑萬疑)가 병작일의(倂作一疑)다 그 말이여. 이 화두에, 자기의 본참(本參)에 대한 의심이 철저하지 못하면 이것이 큰 병(病)이여.
꺼떡허면 자기 화두는 놔 버리고 어믄 다리를 긁어. 어믄 일에 신경을 쓰고, 어믄 일에 걸려든다 그 말이여. 이것이 병 중에서는 최고의 큰 병이여.

눈으로 보면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무엇을 들으면 듣는 데에 끄달리고, 먹는 데에 끄달리고, 뭘 생각하는 데에 끄달리고, 남이 잘하고 잘 못하는 데에 끄달리고, 그게 다 발심(發心)이 철저하지를 못하고 자기의 본참(本參)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 육근(六根) 육식(六識) 십팔계(十八界)에 잠시도 편안할 겨를이 없이 십팔천(十八天)을 돌고 돌아. 그러다가 잘못 끌어 박히면은 삼악도에 떨어져서 헤어날 기약이 없다 그 말이여.

삼악도(三惡途)가 어디에 있으며, 십팔천(十八天)이 어디가 있는가?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일념 속에 들어 있고, 십팔천이 일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 생각을 맹렬히 단속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에 충실하다면 당장 금생에 그 사람에게는 삼악도도 찾을 길이 없고, 십팔천도 어디서 찾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금생에 결정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요, 세세생생에 어느 곳에 삼악도를 찾을 것이냐 그 말이여. 내가 떨어져야 할 삼악도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십팔천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니주인불식(摩尼珠人不識)이여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육반신용(六般神用)이 공불공(空不空)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마니주(摩尼珠), 이 마니주를 터억 지니면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고, 육도법계를 자유자재로 댕기되 하나도 손상을 입지를 안 해. 그 마니주를 지녔건만 사람이 알지를 못하더라.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여. 그 마니주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여래장(如來藏) 속에 그것이 떠억 감추어져 있더라 그 말이여. 여래장이 무엇인가?

여래장은 바로 우리 중생심(衆生心)이어늘, 중생심 그 제8식(第八識)이 바로 그것이 여래장인데, 그 여래장 속에서 일체 희로애락과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일어나는 색성향미촉법, 육근 · 육식 · 육진(六塵. 六境)이 바로 여래장 속에서 일어나는 물결인데, 그 여래장 속에 그 마니주가 들어 있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여섯 가지 신통(神通)을 부리는데, 그 여섯 가지 신통이—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고, 혀를 통해서 맛을 보고, 육체 몸을 통해서 차고 덥고 하는 것을 느끼고, 의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인식을 한다. 그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 마니주를 가진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신묘한 신통이다.

그런데 그 신통은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요, 분명히 있으되 비어 있는 것이고, 분명히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 그렇게 소소영령하건마는 그놈을 찾어보면 돌이켜 찾어보면 자취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비었으되 비지 아니한 것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로구나. 이 마니주, 이 한 알갱이 구슬이 뚜렷하게 빛나고 있건마는, 분명히 색깔이 빛깔이 있으되 빛깔이 없더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차 있으되 찾으면 간 곳이 없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소소영령하건마는 볼라야 볼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으니, 어찌 이것이 색상(色相)이 있다고 하며 색상이 없다고 할 것인가? 있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니,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가 없어.

중생의 소견으로 '있네, 없네' 따질 필요가 없어. 따져봤자 맞지 아니한 것을 왜 따져?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가지고서는 56억 7천만년 뒤에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따져도 이것은 해결 날 문제가 아니여. 오직 본참공안에 충실해서—나아가자니 앞이 맥히고, 물러서자니 뒤도 맥혀. 꽉 맥힌 의심으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불 속에 들어앉은 거와 같아서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앞이 맥혔으니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자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어. 왼쪽으로도 맥혔고, 오른쪽으로도 맥혔어.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불이 훨훨훨 타고 있다 그 말이여. 그냥 있을 수도 없고 나가자니 팔방이 사방이 꽉 맥혔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거냐?

'이뭣고?'

우리는 꿈을 꿀 때에 무서운 호랑이나 큰 구랭이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뿔 달린 무서운 악귀 같은 것에 핍박을 받아서 도망갈라고 하니 발이 떨어지지를 않고, 그 자리에 있자니 잡혀 죽게 생겼고,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꿈을 꾸는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옛날에 참선하지 아니할 때에는 고함을 지른다든지, 막 도망갈라고 몸부림을 치되 도망갈 수도 없고, 그러다가 한참동안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자기가 지르는 자기의 고함소리에 눈을 뜨고 보면 전신에 땀이 흠뻑 젖어 갖고 있는 그러한 꿈을 꾼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법을 알아 가지고 참선을 한 뒤에는 그러한 상황 속에 화두를 탁! 들어 버리면 눈이 딱! 떠져 버린단 말이여.
비단 꿈속에 뿐만이 아니여. 인간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나는 일, 속상하는 일, 기분 나쁜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슬픈 일을 당하거나, 기쁜 일을 당하거나, 일체 선악 경계를 당했을 때, 화두를 딱! 들어 보라 그 말이여. 어디에 속상한 일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분한 생각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슬프고 괴로운 생각이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정진을 다그쳐 나가면 깨닫기를 바랠 것이 없어. 독 안에 든 자라와 같아서 지가 어디를 갈 거냐 그 말이여. 깨달음을 기다리지도 말고, 조급한 생각을 내지도 말고, 누가 와서 나를 깨닫게 해 주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어. 바로 공부를 지어 가는 마당에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어.

'어서 빨리 깨달러 가지고 남 앞에 큰소리 한번 쳐보리라'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가 있어. 큰소리쳐서 뭣해?(23분11초~41분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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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의심(화두드는 법) ((No.472))—(게송)男兒大丈夫~ | 정법을 믿고 발심한 사람이 바로 남아대장부 | 운전 초보와 능숙자 비유 |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으로 하면 소임 속에서 공부가 된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3분 6초)

 


[법문] 송담스님(No.472)—1992년 5월 첫째일요법회(92.05.03) (용472)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가  작사막망로(作事莫莽鹵)니라
나무~아미타불~
경정철석심(勁挺鐵石心)으로  직취보리로(直取菩提路)니라
나무~아미타불~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가  작사막망로(作事莫莽鹵)라.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는 육체상으로 남성(男性)을 받아 난 사람만을 여기서는 남아대장부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육체상으로 여자의 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오욕락(五欲樂)이 무상(無常)한 줄 알고 발심(發心)해서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이 사람은 남아대장부입니다.

설사 고추가 달렸어도 정법을 믿지 않고 오욕락에 빠져서 그렇게 산 사람은 그거 대장부라 할 수가 없어. 미련하기가 한이 없고 어리석기가 한이 없어.
정말 몸뚱이야 어떻게 생겼건, 정법을 믿고 발심한 사람이면 그게 바로 남아대장부다 그 말이여.

그런 발심을 한 남아대장부는 작사막망로(作事莫莽鹵)여.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향해서 나아가는 데 그럭저럭하고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그말이여. 한번 시작했으면, 정말 부처님이 왕궁의 부귀를 버리고 설산에 들어갔으면 거기에 그럭저럭하실 수가 있었겠느냐 그 말이여.
우리도 그 장부(丈夫)를 본받아서 발심을 한 이상 어찌 그럭저럭 등한히 하고 사소한 일에 진심을 내고, 사소한 일에 우리의 아까운 시간과 생각을 빼앗기고 흔들릴 수가 있겠느냐 그거거든.

경정철석심(勁挺鐵石心)으로, 굳고 굳은 쇠와 돌같은 마음으로 직취보리로(直取菩提路)니라. 바로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을지니라.  한산, 한산(寒山) 습득(拾得)의 한산 성현의 게송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지은, 참 숙세에 지은 공덕으로 원력으로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한국에 태어났고 또 불법을 만났고 정법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정말 남아대장부로서 또 참선을 시작했다면 철저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배산에 일단 들어갔으면 기어코 보배를 캐내야만 말아야지, 그럭저럭 끌적끌적하다가 돌아올 수야 있겠느냐 이거거든.

참선은 '지금 열심히 해가지고 장차 기어코 견성성불(見性成佛)하리라' 이러한 게 아닙니다.
참선은 '이뭣고?' 이외의 어떠한 일에도 집착심을 가져선 안 돼. 어지간한 일이면은 인연 따라서 수용하고, 오직 한 생각 철석같은 마음으로 '이뭣고?' 하나만을 단속해 나가야 돼.

우리는 상근기(上根機)도 아니고, 중근기(中根機)도 아니고, 하근기(下根機)거든.
하근기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가 없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것에도 정신을 쓰고 저것에도 정신 쓸 겨를이 없어.

그렇다고 해서 자기 소임도 안 보고 아무것도 안 하고 어디 가서 혼자 '이뭣고?'만 하고 백가지 일을 다 버리라는 게 아니야.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하되 그 속에서 화두 하나를 잡드리해 나가는데 전심전력을 다하라 이거거든.

"어떻게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서 공양주(供養主)를 열심히 하냐?"
"'이뭣고?'만 열심히 하다 보면 밥이 어떻게 되겠느냐? 밥할 때에는 밥을 정성을 쏟아야지 '이뭣고?'만 하고 있으면 밥이 죽이 되는지, 떡이 되는지, 되겠느냐?"
참, 어떤 수행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대단히 중요한 문제거든.

공양을 짓는데 전 정성을 거기다 쏟다보면 화두가 달아나 버리고, 화두를 열심히 들다 보면 밥이 다 타 버리거나 죽이 되거나 한다 그말이여. 틀림없이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채소밭에 매는데 '요것이 채소냐, 요것이 잡초냐'를 봐 가지고 가려서 뽑아야지 '이뭣고?'만 열심히 하다 보면 뽑는 것이 채소는 뽑아 버리고 남는 것은 잡초만 남고 그렇다는 것이지.

설사 그런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 화두를 놓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화두 잘해서 확철대오하기 위해서 채소도 가꾸고 밥도 짓는데.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는 '밥이 타는 한이 있더라도 화두를 열심히 들어야 하냐?' '그렇더라도 화두는 조금 등한히 들더라도 밥할 때는 밥할 때 정신을 쏟아야 하지 않냐?'
이것은 그 사람 사람의 견해에 따라서 이것을 옳다고 주장할 수가 있고, 저것을 옳다고 주장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 내가 지금 여기에 사부대중이 다 모이셨는데 '밥이 타더라도 화두를 열심히 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분 손 한번 들어 보세요. 내리세요.
'화두는 좀 등한히 들더라도 밥을 잘해야지' 그렇게 생각하신 분 손들어 보세요.

그러면 이래도 손도 안 들고, 저래도 손도 안 들면 뭐여?(웃음)
그건 아마 '두 가지가 다 일리가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뭐라고 주장할 수가 없다' 그래서 손을 안 드신 분은 손 들어 봐요. 내리세요.

그런데 내가 한 예를 들겠는데, 자동차 운전을 하면 눈으로는 앞을 봐야 하고 또 앞에 걸린 거울로는 뒤를 봐야 하고, 양쪽 거울을 통해서 끊임없이 뒤도 살피고 앞도 봐야 하고,
손으로는 운전을 하고, 발로는 브레이크도 밟았다 악셀레이터도 밟았다 클러치도 밟았다 하고, 손은 요새는 뭐 노클러치가 있어서 아주 편리하게 어지간하면 다 달릴 수가 있는데.

두 손, 두 발, 눈, 그리고 귀도 항상 열어놓고 초비상으로 살펴야 하고, 코로도 이상한 냄새가 나면 그것도 '엔진에 무슨 문제가 있냐?' 코도 있어야 하고, 이목구비와 사지백체를 다 적절하게 다 활용을 해야지, 앞만 보고 가도 안 되고 뒤만 봐도 안 되고. 앞 보면서 뒤를 봐야지, 뒤 보면서 앞을 안 봐도 안 되거든. 그러니 이론상으로는 도저히 운전을 못 해 먹을 노릇이다 그 말이여.
그래도 처음에는 앞을 보면서 뒷이 잘 안 보여도 자꾸 연습을 하다 보면, 앞 보면서도 뒤도 보고 옆에 사람과 이야기하면서도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듣고, 할 것 다 하고, 한다 그 말이여.

그것을 입각해서 생각해 보면 화두 들면서도 밥을 잘 지을 수가 있어요. 또 밥을 잘 지으면서도 화두를 들을 수가 있는 거여.
처음에는 좀 어려울는지 모르지만 자꾸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신심과 분심으로 열심히 해 나가면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거여.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고.

밥도 자꾸 열심히 하다 보면—처음에는 자꾸 뚜껑을 열어 보고 싶거든. 밥이 다 퍼졌나 안 퍼졌나, 물이 아직도 있냐 없냐, 자꾸 열어 봐. 두 번 세 번 열어 보면 그 밥은 맛이 없어.
자꾸 하면 거기서 나오는 김이 위에로 올라오냐, 옆으로 피식 하고 나오느냐, 그 김 나오는 것만 봐도 물이 다 되었다, 아직도 물이 있다, 그걸 알 수 있는 거여.

문제는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이 문제지, 해보지도 않고 겉할뜨기로 이론만 가지고 될 것이냐? 안 될 것이냐? 그것 따지다 시간 다 가는 거여.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열심히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들면서도 한눈팔지 않고 정성으로 공양주를 하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열흘, 한 달, 두 달 하다 보면 밥도 잘되면서 화두도 터억 들리게 된 때가 오는 것이다 그 말이여.

해보지도 않고 조금 해보고서 주둥이만 까 가지고 이렇구 저렇구 따져 싸면 그거 안 되는 거거든.(30분54초~43분5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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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ㅇ/의심(화두드는 법)2020. 12. 18. 08:09

의심(화두드는 법) (세등24)—단전호흡과 화두가 함께 잘되어 가지게 | 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 있는 선방, 선불장(選佛場)이다 | 참선을 하면 몸이 건강해지고 결정코 깨달음까지 이르른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아까 몽산(蒙山) 스님한테 책임을 따져야 됩니다. 몽산 스님이 '대신 지옥에 간다'고 맹세를 하셨거든. 나도 역시 몽산 스님과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깨닫지 못한다면 나도 여러분을 대신해서 지옥에 간다』고 자신있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도 그것을 느꼈고, 이러한 선지식(善知識)들의 법문을 여지없이 믿기 때문에 추호(秋毫)도 나는 의심이 없습니다.

 

(14분 40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 (세등24)

 

언제든지 좌선(坐禪)을 해서, 딱 참선 시작할 때에는 준비 호흡으로 숨을 가득 가슴으로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만큼 참었다가 입으로 ‘후—’ 하고 다 내쉬어 버리고 나서, 그렇게 2번을 하고서,

3번째는 가슴으로 들어마시지를 말고 가슴과 윗배는 고대로 놔두고 아랫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불어나도록, 볼록해지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면서 숨을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윗배와 가슴은 약간은 움직이겠지만 거의 가만히 있도록 유지를 하면서 아랫배만 약간 볼록해진다 말이여.

 

들어마시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3초, 3초 동안에 스르르르 하니 아주 수월하게 들어마시는 거여. 너무 오랜 시간을 걸려서 들어마실라고 하지를 말고,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셨으면 너무 가득 들어마시지를 말고, 아까 준비 호흡을 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지만 인자 본(本) 호흡, 단전호흡에 들어가서는 배가 터지도록 들어마시면 안된다.

 

8부쯤만 들어마셔. 더 들어마실수 있지마는 8부쯤만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8부쯤 들어마신 상태에서 약 3초 동안을 머물러.

딱 정지한 상태에서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이렇게 홀쪽해지도록.

 

그 홀쪽해지기 시작할 때 그때 ‘이뭣고~?’ 속으로 그렇게 하면서 숨을 내쉬는 거여.

 

이것은 아주 초보자를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보자는 이러한 방법을 써서 하면 단전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 들어가면 머지않아서 단전호흡도 잘되고, ‘단전호흡 했다’하면 화두도 거기에 붙여서 함께 잘되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익숙해진 사람은 숨을 들어마시거나 내쉬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그까짓 것도 구애 없이 항시 화두의 의단(疑團)이 항시 목전(目前)에 상주해서, 눈앞에 항시 나타나서 일여(一如)하겠지만,

처음 한 사람은 ‘이뭣고?’ 해도, 금방 ‘이뭣고?’한 사이에 생각은 동쪽으로 서쪽으로 왔다갔다 하고, 어렸을 때로 날아갔다, 집으로 날아갔다, 야단이거든. 그러다 보면 화두를 놓쳐 버린다.

 

그래서 다시 또 챙길라면은 힘이 들거든. 그러다 억지로 ‘이뭣고?’ ‘이뭣고?’ 하다 보면은 모가지만 뻣뻣해 가지고 골만 빠개질라고 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도 안되고.

아! 이러니 할려고 마음은 내는데, 할려고 하면은 잘 안되니 그거 어떻게 하냐?

 

그래서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여러 가지로 다 경험을 해 보고 연구를 한 결과 이 단전호흡을 겸해서 하도록 이렇게 모다 지도를 해 오셨다 그말이여.

그래서 지금 오늘 유독 결제날이기 때문에 단전호흡하는 법과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벌써 넘어서 배가 고파 죽겠는데, 고만 했으면’ 이러시겠지만 굶어서 돌아가시지를 않습니다. 조금 배가 고파야 말이 들어가지, 잔뜩 먹고 쌕쌕거리게 되면은 졸음만 오지 법문이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시장한 다음에 잡숴야 밥이 맛이 있습니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하면서 내쉬는데, 숨을 들어마실 때 어떻게 들어마시냐 하면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불룩하도록 이렇게 하지를 말고, 물론 코로는 들어가겠지만 우리의 기분으로는 저 궁둥이 뒤에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이렇게 볼록해지도록 그런 기분으로 들어마시고,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머물렀다 내쉴 때는 ‘이리 해서 코로 내쉰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내쉴 때도 저리 뒤로 해서, 궁둥이 뒤로 해서 저 뒤로 쑤욱 내보낸다는 그런 기분으로 내쉬어 보시라 그말이여.

 

저 뒤에서 쑤욱 들어마셨다, 들어마신 호흡을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저 뒤로 쑤욱 배꼽을 뒤로 잡어당기면서 뒤로 내쉬는 거여.

 

그런데 절대로 무리하게 억지로 하지를 말어. 너무 억지로 해 가지고는 그냥 한 두어 번만 하면 숨이 가쁘게 이렇게 하시다가 ‘아이고! 그거 되아서 못하겠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예요.

 

아주 수월하게—들어마시는데 3초 걸리고,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한 4~5초 걸리게 조용하게 내쉬고, 이렇게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하는 거기에다가 ‘이뭣고~?’ 하는 알 수 없는 의단을 거기다가, 배꼽밑에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거기다가 관심을 두고서 화두를 거각(擧却)해 보시라 그말이여.

백 명이면 백 명, 몸도 차츰 건강해지고 가벼워지고 골치 아픈 병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하면 병이 낫거든.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있는 사람도 그게 낫고, 집안에서 무슨 일로 속이 상해서 가슴앓이 속병이 있는 사람도 이것을 하면 그 병이 낫는다 그말이여.

 

이것을 하면서 화두까지 거기다 겸해서 하면은 결정코 깨달음까지 이르른다 이말이여.

화두는 아니하고 밤낮 고것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병을 고치는 데에는 효과가 있지만 그래 갖고는 그건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여.

 

거기에다 화두를 꼭 붙여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해 나가면 몸도 건강하고 마침내는 깨달음에까지 이르른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이렇게 해 나가면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지 아니하고 가정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하시고 낮에도 시간 있는 대로 그렇게 하시고, 이 공부는 꼭 앉어서만 하는 게 아니라 일하면서, 말하면서, 걸어가면서, 차 타면서, 행주좌와 간에 할 수 있는 것이라, 오늘 백일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은 모두가 다 이 세등선원에 방부를 들인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못 장소가 형편상 이 세등선원일 수도 있고, 또 보문사일 수도 있고, 군산일 수도 있고, 또 시내일 수도 있고, 조치원일 수도 있고, 청주일 수도 있고, 서울일 수도 있습니다. 장소야 어디건 그거 상관이 없어.

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 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여. 선불장(選佛場)이여.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 있는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한 생각 한 생각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고, 한 생각 일어나는 그자리에서 숨을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

업장(業障)이 거기에서 봄눈 녹듯이 녹아 없어지거든. 업장이 녹아지면은 소원성취는 거기에 있거든.

 

 

내가 그전에는 얼굴이 아주 시커먼 사람인데, 아! 30년을 참선을 하니까, 내 얼굴보고 검다고 하지 않는다 그말이여.

성질이 아주 불같아 가지고 신경질을 잘내기로 아주 유명하고, 고집이 센 사람인데, 아! 참선을 했더니 나 보고 마음보 고약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 별로 없다.

 

여러분 가운데 혹 얼굴이 검어서 고민인 사람, 얼굴에 무엇이 많이 나서 고민인 사람, 또 신경질을 많이 내고 고집이 세다고 욕을 먹고 그러한 평판이 있는 분, 오장육부에 병이 많은—내가 또 병주머니여서 학교를 다닐 때는 1년에 한 달 내지 두 달은 꼭 결석을 했다.

아, 그런데 출가해 가지고 참선을 하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대단히 건강하다고 그런는데, 내가 별로 약도 많이 먹지도 않고, 병원에 가기를 그렇게 죽기보다 더 싫어한 사람이어서 병원에 잘 안 가고 그러는데, 참선을 해서 이렇게 몸도 건강해진 것 같어.

 

여러분들도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제가 금방 이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의식주 문제라든지, 일상 생활 속에서 화두를 단속하는 이러한 법을 명심을 해서 실천에 옮기신다면 얼굴도 예뻐질 것이고 오장육부의 병도 다 나아질 것이고,

성격이 고약하다고 평판이 있는 시어머니, 며느리, 스승, 상좌 할 것 없이 다 불보살과 같이—나는 워낙 고약한 사람이라 그렇지, 보통 된 사람이 그만큼 열심히만 하면 틀림없이 금생에 불보살과 같이 될 것을 나는 맹세를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아까 몽산(蒙山) 스님한테 책임을 따져야 됩니다. 몽산 스님이 '대신 지옥에 간다'고 맹세를 하셨거든.

나도 역시 몽산 스님과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깨닫지 못한다면 나도 여러분을 대신해서 지옥에 간다』고 자신있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도 그것을 느꼈고, 이러한 선지식(善知識)들의 법문을 여지없이 믿기 때문에 추호(秋毫)도 나는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오늘 결제일을 기해서 여기에 모이신 출가한 스님네나 마을에 계신 신도 여러분들, 오늘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정말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결정코 대도를 성취해 주시기를 간곡(懇曲)히 부탁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구름 일어나듯이, 산에 구름 일어나듯이 한도 없이 끝도 없이 천 가지, 만 가지 말을 이렇게 말을 한다 하더라도 저 바다 위에 떠있는 밝은 달은 원래로 말이 없느니라.

 

마지막 한마디는 끝내 여러분에게 드리지를 못합니다. 이 주장자에게 맡기고 내려갑니다.(1시간11분36초~1시간26분1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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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坐禪) ; 단정히 앉아서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선(禪) 수행을 하는 것.

*8부쯤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4분 48초)

[참고 ❸] 송담스님(No.401)—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이 한 철을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하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들이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들이나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하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 하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하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祖師)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立繩)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54분57초~59분45초)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소원성취(所願成就) ; 소원(바라는 것 또는 바라는 일)을 성취하는 것.

 

우리가 소원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본래 내 마음과 부처님 마음은 하나였었는데, 번뇌 망상으로 인해 업장(業障)이 가로막기 때문에 성취를 못하는 것이니까, 업장만 소멸한다고 하면은 소원성취는 바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성취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번뇌를 깨끗이 끊어 없애면 내 마음과 부처님 마음이 하나가 되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 감응(感應)이 되어서 소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 내 마음속에 무량겁으로부터 지어 내려오면서 저장해 놓은 번뇌 망상으로 인한 죄업의 종자(種子)를 소멸하고, 그놈을 돌려가지고 깨달음이 되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등등 자신의 본참화두를 철저한 신심(信心)과 큰 분심(憤心)과 큰 의심(疑心)을 가지고 간절히 알뜰히 정진하는 것입니다.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15권 '大智度論釋初品中毘梨耶波羅蜜義第二十六(초품 중 비리야[精進]바라밀을 풀이함)' (용수 지음 | 구마라집 한역 |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 동국역경원)

欲成佛道凡有二門 一者福德 二者智慧 行施戒忍是爲福德門 知一切諸法實相摩訶般若波羅蜜 是爲智慧門 菩薩入福德門 除一切罪所願皆得 若不得願者 以罪垢遮故 入智慧門則不厭生死 不樂涅槃 二事一故

 

불도(佛道)를 이루고자 하는 데 무릇 두 문이 있으니, 하나는 복덕(福德)이요 둘은 지혜(智慧)의 문이다. 보시(施)와 지계(戒)와 인욕(忍)을 행하는 것은 복덕의 문이요, 모든 법의 실상인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을 아는 것은 지혜의 문이다.

보살은 복덕문에 들어가서 일체의 죄업을 제거하고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죄업의 때[罪垢]에 차단 당했기 때문이다. 지혜의 문에 들어가더라도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열반도 즐기지 않게 된다. 두 일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今欲出生摩訶般若波羅蜜 般若波羅蜜 要因禪定門 禪定門必須大精進力 何以故散亂心 不能得見諸法實相 譬如風中然燈不能照物 燈在密屋明必能照

 

이제 마하반야바라밀을 출생시키고자 하는데, 반야바라밀은 반드시 선정문(禪定門)을 인하며, 선정문은 반드시 대정진(大精進)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산란한 마음[散亂心]으로는 모든 법의 실상[諸法實相]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바람 속에서 등불을 켜면 물건을 비출 수 없지만 밀실(密室)에다 등을 켜면 밝게 타올라 반드시 물건을 비추는 것과 같다.

*병주머니 ; 갖가지 병이 많은 사람 또는 그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몽산(蒙山) : 남송과 원(元)대의 임제종 양기파 스님, (1231 ~ 1298 또는 1308) 이름은 덕이(德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 시양 고안현(時陽高安縣)에서 났다。그 고향 시양이 당나라 때에는 균주(筠州)였기 때문에 고균(古筠) 비구라고 한 일도 있었고, 여릉도 몽산에 있었으므로 몽산 화상이라 하며,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있었으므로 전산 화상이라기도 하고, 휴휴암(休休庵)에 있었으므로 휴휴암주라기도 하였다.

고산(鼓山)의 완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의 법을 이었다。그의 교화한 시기는 원나라 세조(世祖)때이며, 우리 고려의 충렬왕 때이다。그래서 고려의 고승들과 문필의 거래가 많았고, 그의 저서 가운데 <법어약록(法語略錄)> <수심결(修心訣)>등은 이조 중엽에 있어 우리 글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몽산법어(蒙山法語) ;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 『몽산법어』가 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아까 몽산 스님한테 책임을 따져야 됩니다. 몽산 스님이 '대신 지옥에 간다'고 맹세를 하셨거든' ;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p97-99. (가로판 p95~97)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삼 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추호도’, ‘추호의’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간곡히(懇曲- 간절할 간/간절할 곡) ;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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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No.256)—일관(日觀) | 묘한 의심관(疑心觀) |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한다 |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觀法)’ | 자세와 호흡과 화두가 삼위(三位)가 일체(一體)가 되도록 잘 조정해 나가야 한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8분 8초)

 

[법문]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 (용256)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房付)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그렇게 참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법문(法門)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疑心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이렇게 삼위(三位)가 일체(一體)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그 이튿날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그 다음 날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인자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白骨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터억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도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 터억—그 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리불 존자와 아나율 존자의 그 굳은 결심, 우리도 그러한 결심이 투철해야 할 것이고 또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끝내는 자기 스스로 터득한 그 의심관으로써 자기의 정진의 마지막 고비를 넘긴다면, 누구라도 그만한 결심과 그만한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르게 그리고 자기의 정신과 육체의 온갖 힘과 정성을 다 바쳐서 다듬어 나간다면 누구라도 자기의 면목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塔在玉欄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한아름 버드나무 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다 걸어 두노라.

 

오늘 일요법회 법어를 마쳤습니다. (70분55초~79분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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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선방(菩薩禪房) ; 보살선원(菩薩禪院). 스님이 수행하는 선원과 같은 기간과 방식으로 보살님(신도)들이 정진 할 수 있는 선원. 용화선원에는 스님선원, 보살선원이 있고 또 매일 언제든지 와서 정진할 수 있는 시민선원이 있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참상(參祥).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선우(善友)•친우(親友)•선친우(善親友)•승우(勝友)라고도 함.

*묘한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5분 59초)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쌓을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쌓으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할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5분 57초)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빈틈없이 빽빽하게 죽 잇따라 들어차 있다'는 말. 끊이지 않고 빈틈없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면면(綿綿 솜·이어질·연속할 면) ;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계속 이어지는 것.

*밀밀(密密 빽빽할·촘촘할 밀) ; 빈틈없이 빽빽히 들어찬 것.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맷방석 ; 주로 매통(벼를 넣고 갈아서 겉겨를 벗기는 데 쓰는 기구)이나 맷돌(곡식을 가는 데 쓰는 도구) 아래 깔아 곡식을 담거나 방석으로 쓰는 짚으로 만든 물건.

멍석보다 작고 둥글며 전(물건의 위쪽 가장자리가 조금 넓적하게 된 부분)이 있다.

*백골관(白骨觀) ; 시신(屍身)의 피부와 근육이 모두 없어져 백골(白骨)만 남아 있거나, 흩어져 있는 모습을 관(觀)하여 몸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인생무상을 깨닫는 관법(觀法). 고골관(枯骨觀)이라고도 한다. 구상(九想)의 하나.

[참고] 구상(九想) ; 구상(九相)이라고도 한다. 탐욕을 제거하고, 혹업(惑業 무명번뇌와 업)을 멀리하기 위해 사람의 시신(屍身)에 대해 수행하는 9종류의 관상(觀相 깊이 생각에 집중하는 것).

부정관(不淨觀)의 9단계를 말한다.

①시신이 부어 팽창하는 것을 관상하는 창상(脹想).

②바람에 날리고, 햇빛에 쪼여 시신의 색이 변하는 것을 관하는 청어상(青瘀想).

③시신이 부패되는 것을 관하는 괴상(壞想).

④부패를 끝내고 혈육이 땅에 스며드는 것을 관하는 혈도상(血塗想).

⑤시체에서 벌레와 고름이 흘러나오고 살이 흩어져 낭자한 모습을 관하는 농란상(膿爛想).

⑥새나 짐승이 와서 시신을 먹는 것을 관찰하는 담상(噉想).

⑦새나 짐승에게 먹혀 근골두수(筋骨頭手)가 분열, 파산되는 것을 관하는 산상(散想).

⑧육신이 이미 다해 백골만 남게 되는 것을 관하는 골상(骨想).

⑨백골이 불에 태워져, 재로 돌아가는 것을 관하는 소상(燒想).

*관법(觀法) ; 마음을 지금 여기에 두고, 분별적인 사유에 휩싸이지 않고, 대상[諸法]의 인상이나 겉모습에 떠돌지 않고, 대상을 꿰뚫어서 대상[諸法]의 진실한 모습을 통찰하는 수행. 이로써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고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하고 열반(涅槃 -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을 깨닫게 한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공안(화두)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일관도천(一串都穿 한 일/꼬챙이 관/모두 도/꿰뚫을 천) ;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p137~138. (가로판 p133~134)

迷雲이  散盡하면  萬里靑天에  中秋寶月이  湛徹澄源하리니 虛空에  發焰하며  海底에  生煙하야  驀然磕着에  打破重玄하리니 祖師公案을  一串에  都穿하며  諸佛妙理가  無不周圓하리라

 

미혹의 구름이 다 흩어지면 만리청천(靑天)에 가을달이 깊이 맑은 근원에 사무치리니, 허공에서 불이 나며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문득 맷돌 맞듯 하야 깊은 현관(玄關)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을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으며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가 두루 원만치 않음이 없으리라.

 

*허공발염해저생연(虛空發焰海底生煙) : 확철대오(廓徹大悟)하기 직전에 정신혁명이 일어나는 경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

*합착(磕着) : 맷돌 위•아래짝이 서로 꽉 들어맞듯이 수행자가 애를 쓰다가 어느 때 홀연히 진리에 계합하는 것을 비유함。 「축착합착(築着磕着)」합해서 쓰임.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사리불 존자와 아나율 존자의 그 굳은 결심' ‘사리불 존자와 아나율 존자의 그 굳은 결심’에 대한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게송)‘一把柳條收不得 和風塔在玉欄干’ ;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제23권 황정견(黃庭堅)거사 게송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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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No.332)—공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4분 35초)

 

[법문]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87.06.07) (용332)

 

설사 화두(話頭) 하나를 타가지고 일심(一心)으로 참구(參究)를 해서 '이뭣고?'
 해 갈수록 재미가 없고, 알아진 것도 없고, 얻어진 것도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그러더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참을성 있게, 끈기 있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부처님이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미륵불(彌勒佛)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본래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조끔도 차이가 없는 바로 동일(同一)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부처를 찾을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절대로 부처를 찾아서는 안돼.

 

그리고 그 부처님으로부터서 나오는 번뇌망상(煩惱妄想) 이것이 딴 것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이기 때문에 그 번뇌망상을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다맛 우리가 확인을 못했을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님이었고, 그 부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바로 그것이 '깨달음의 작용(作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철저히 믿기를,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이여.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는다면, 자기도 도(道)를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는 자신만만한 그런 긍지를 가져야 하는 것이고, 자기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을려고 하고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잠시도 일으켜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또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만, 물론 그 '번뇌(煩惱)다' '망상(妄想)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되아.

버릴려고 한다고 버려지지도 않고,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이 또한 하나의 망상(妄想)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부처 되기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려고 하는 생각을 냈다하면 그것도 망상(妄想)이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고, 번뇌 일어나는 것을 성화(成火)를 대고 짜증을 낸다면 그것도 번뇌망상이요,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기 때문에 점점 불에다가 섶을 집어넣은 거와 같애서 깨달음으로부터서는 정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진심(瞋心)이 날 때에도 퍼뜩 '이뭣고?'

슬픔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괴로움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넘어져도 '이뭣고?'

뒤집어져도 '이뭣고?'


사업이 잘되아도 '이뭣고?'

사업이 실패해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 화두 하나로써 단속해 나가면, 거기에서 번뇌는 없앨려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거고,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해도 거기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58분~62분3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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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

의심(화두드는 법) (No.345)—화두순숙(話頭純熟) 의단독로(疑團獨露) 타성일편(打成一片) 공안타파(公案打破) 확철대오(廓徹大悟).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그때 해야 하는 거고,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무량겁을 지내오면서 한번 모처럼 불법(佛法) · 정법을 만나 가지고, 하고 싶은 마음 났을 때 계속해서 몰아붙이지 못하면 그래 가지고 그 고비가 식어 버리면 다시 그런 경계가 오도록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0분 20초)

 

[법문] 송담스님(No.345)—1988년 1월 첫째일요법회(88.01.03) (용345)

 

기본자세를 잘하고 그다음에는 호흡을 바르게 해라.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보통 사람은 다 허파로, 가슴으로 호흡을 하는데 참선(參禪)을 한 사람은 배꼽 밑에 단전(丹田)으로 호흡을 해라 이거거든.

 

가슴은 고대로 놔 두고서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쉴 때는 아랫배가 홀쪽해지도록 호흡함에 따라서 아랫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니까 배로 호흡을 한다, '단전으로 호흡을 하라' 그래서 이것을 단전호흡이라 그러는데.

 

이 화두(話頭)만을 올바르게 참구(參究)를 해 나가면 자세도 둘째 문제고, 호흡도 둘째 문제라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화두를 참으로 바르게 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 화두를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는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자꾸 간절히 간절히 화두를 참구, 화두를 이렇게 의심을 해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점점 이 골똘하고 간절히 하다 보면 이 기운이 머리로 올라가게 되는 그러한 경우가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물론 체질이 아무리 화두를 가지고 열심히 참구를 해도 기운이 올라가지 아니한 특수하게 잘 타고 난 사람은 상관이 없지만,

체질에 따라서 조금 신경을 쓰면 열이 올라가고 눈이 붉어지고 얼굴이 붉어지고 하는 그러한 체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참선을 열심히 한답시고 계속 단전호흡을 하지 않고서 열심히 화두만 하다 보면 그렇게 상기(上氣)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애당초에 참선을 시작할 때부터 바른 자세와 단전호흡을 기본으로 해서 그러면서 화두를 참구하면 백무일실(百無一失)이여. 백 명이면 백 명 다 이 부작용 없이 상기병(上氣病)같은 그런 무서운 병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올바르게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전호흡, 숨을 다 내뱉어버리고 그리고서 스르르르르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심에 따라서 아랫배가 약 3센치 가량 볼록하게 하라 그말이여.

들어마실 때 너무 가득 들어마시면 힘이 드니까 8부(八部)쯤만 들어마셔. 조금 더 들어마실 수 있지만 완전히 뱃속이 가득차도록 들어마시지 말고 8부쯤만 들어마셔.

 

8부쯤 들어마셨거든 일단 정지를 해. 딱 정지를 하되 약 3초 가량 딱 정지를 했다가 또 조용하게 숨을 인자 코로 내쉬되 그 볼록했던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이렇게 해서 숨을 내쉬고.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르 하니 들어마시되 들어마심에 따라서 배가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8부쯤 들어마셨으면 또 일단 정지했다가 또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는데.

 

그러면 화두는 언제 드느냐 하면은 내쉴 때, 들어마셨다가 3초 쉬었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속으로 하면서 화두를 이렇게 하는 거여.

 

또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이런 화두를 하신 분은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무르면서 '어째서?'해 가지고, 내쉬면서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또는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셔 가지고 또 3초 동안 정지하면서 '어째서?'해 가지고, 내쉬면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처음 최초로 초학자는 이렇게 숨을 내쉴 때마다 이렇게 화두를 한번씩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공부가 익숙해지고 안정이 되어가면 숨쉴 때마다 화두를 들을 필요가 없어.

숨은 몇 번을 쉬되, 그 알 수 없는—'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이뭣고?'했을 때 하고 남은, 한 뒤 끝에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을 묵묵히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숨을 두 번을 쉬거나, 세 번을 쉬거나, 네 번을 쉬거나, 숨이야 그때그때 계속 쉬면서도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데다가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뭐꼬, 이뭐꼬' 계속 그렇게 덮치기로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없어지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오거든 그때 화두를 한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참으로 공부가 순숙(純熟)해지면 아침에 일어나서 한번 들고, 아침공양 할 때까지 한번 들어서 고대로 그 화두에 의심이 있으면은 계속해서 화두를 새로 안 들어도 된다 그말이여.

밥을 먹으면서도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순수무잡한 의단이 고대로 독로해 있으면은 화두를 거기다가 덮치기로 뭐 자꾸 '이뭣고, 이뭣고' 할 필요가 없다 그말이여. 오히려 잔잔한 물에다가 막대기를 휘저어서 물결을 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이여.

 

한번 든 화두가 하루 종일 있고, 저녁에 자기 위해서 자리에 누워서도 고대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언제 잠이 든 중 모르게 들었는데 꿈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하고, 새벽에 일어나서도 고대로 화두가 들려져 있다면 그건 참, 공부가 정말 순숙해진 경계다.

그러한 상태로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정말 내가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다! 이것을 내 놓고는 내가 할 일이 없다!'

오직 여기에 나의 인생을 다 여기다 바치고, 나의 목숨을 다 여기다 바치고, 그러한 마음으로 알뜰히 해나가면 누구라도 다 이렇게 적적(寂寂)하고 성성해서 한번 든 화두가 하루도 가고 이틀도 가고 사흘도 가고, 이런 경지에 이런 순수무잡(純粹無雜)한 경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경지에 도달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면 그럴 때에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누가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래지 말고, 한결같이 그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의단을 갖다가 잘 거각(擧却)해 나가, 관조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순수무잡한 경지에 들어가서 깨닫기를 바랜다던지, 누가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랜다던지, 빨리 깨달을려고 생각을 일으킨다던지 이런 것은 모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에까지 와 가지고 자기의 그것을 갖다가 망가뜨려 버리게 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그때 해야 하는 거고,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한번 모처럼 무량겁(無量劫)을 지내오면서 모처럼 불법(佛法)을 만나고 정법(正法)을 만나 가지고 하고 싶은 마음 났을 때 계속해서 몰아붙이지 못하면 그래 가지고 그 고비가 식어 버리면 다시 그런 경계가 오도록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50분27초~60분4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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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1분 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상기(上氣) ; ①[한의] 피가 뇌로 몰리는 현상.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나며, 발한, 두통, 이명(耳鳴), 현기증 따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②얼굴이 흥분이나 수치감으로 붉어짐.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팔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이뭣고?'했을 때 하고 남은, 한 뒤 끝에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을 묵묵히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딴생각 ; 별념(別念).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적적성성(寂寂惺惺) ; 성성적적(惺惺寂寂).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공부는 하고 싶을 때 그때 해야 하는 거고,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한번 모처럼 무량겁(無量劫)을 지내오면서 모처럼 불법(佛法)을 만나고 정법(正法)을 만나 가지고 하고 싶은 마음 났을 때 계속해서 몰아붙이지 못하면 그래 가지고 그 고비가 식어 버리면 다시 그런 경계가 오도록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

[참고] 『서장(書狀)』 '답탕승상(答湯丞相)' 참고.

人身難得 佛法難逢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참고] 『선관책진(禪關策進)』 「제1 제조법어절요(諸祖法語節要 : 여러 조사의 법어 중에서 오직 공부 지어 가는 데에 요긴한 대목만을 뽑아 요약함)」 '황룡사심신선사소참(黃龍死心新禪師小參)' 참고.

諸上座 人身難得 佛法難聞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상좌들이여!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듣기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