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무시선 무처선2022. 6. 6. 16:20

무시선 무처선(No.627)—(게송)一從違背本心王~ | 우리가 믿어야 할 일은 '우리가 본래 법신불이었다'고 하는 사실 |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이 딴 데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다 | '파도와 물'의 비유 | 번뇌, 망상, 탐진치 삼독심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여. 시간도 따로 없는 것이고, 장소도 따로 없는 것.

한 생각 탁! 바로 잡으면 아까까지 지옥에 있었던 사람이 한 생각으로 인해서 천당에도 갈 수가 있다 | 술에 취해가지고 완전히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도 자기집을 찾아가게 되어 있다, 수십 년을 항상 자기집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 살아서 극락에 가는 연습, 살아서 도솔천내원궁에 가는 연습이 바로 ‘이뭣고?’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일여(一如)하게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선(禪).

[참고]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법문에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신 분은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정진(精進)이여.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거든. ‘어느 곳이고 선(禪)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때고 참선 아닌 때가 없다’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 ‘걸음 걸음이 미륵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요, 생각 생각이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곳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바로 이러한 도리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30분19초~31분2초)

[참고] 송담스님(No.152)—1981년 10월 첫째일요법회(참선법B)에서.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요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니라 염념석가출세(念念釋迦出世)요  보보미륵하생(步步彌勒下生)이니라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요. 어떤 색상을 보는 그때가 바로 ‘참나’를 깨달을 때요. 문성시증처(聞聲是證處)라. 어떤 소리를 듣는 그때가 ‘참나’를 증득(證得)할 바로 그 곳이드라. 
그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무엇을 볼 때마다, 무슨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다져 나가면,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미륵 부처님이 하강하시든 바로 그것이더라.(41분22초~44분9초) - (게송) ‘견색시증처~’ ; 『금강경오가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함허 설의(說誼) 게송 참고.

 

(24분 28초)


[법문] 송담스님(No.627)—99년 6월 첫째 일요법회(99.06.06) (용627)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나무~아미타불~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 한 번 본심왕(本心王)을 어기고 등지고 떠난 뒤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몇 번이나 삼악도(三惡途)에 들어갔으며 몇 번이나 사생(四生)을 겪어 왔던가.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을 겪어 왔던가.
삼도(三途)를 수천만 번, 태란습화 사생의 몸을 수억만 번을 거쳐서 이렇게 오늘날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말이여.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오늘 번뇌(煩惱)의 생각을 깨끗이 씻어 제(除)하고 보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다.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본고향(本故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방금 우리는 임자년에, 임자년이라고 하면 전강 조실 스님께서 갑인년 섣달 초이튿날 열반(涅槃)에 드셨는데 임자년은 갑인년보다 3년 전입니다. 임자, 계축, 갑인, 열반하시기 3년 전에 설하신 법문을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 들으신 바와 같이, 비록 녹음 테이프(tape)를 통해서 들었지만, 금방 이 법상에 올라오셔서 그 열렬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우리는 실지로 설하신 것처럼 우리는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오늘 일요법회 법문은 조실 스님 법문 한 편 턱 들으면 그것으로서 족하겠지마는, 산승(山僧)이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은 여러 도반(道伴)들에게 일요일이라 산으로 바다로 놀러가실 수도 있고 쉬실 수도 있건마는, 날씨도 더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법회에 나오셨으니 원장으로서 인사 말씀 한마디 하고 우리가 다 같이 정진을 잘하자고 하는 다짐하고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자 이 자리에 올라왔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내가 나 찾는 공부, 철저한 신심으로 그것밖에는 할 수 없다‘고 하는 요지, 그 공부해 나가는 구체적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에 대해서 그렇게 간곡히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원래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미륵 부처님이나 또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나 다 같이 저 근본에 올라가서는 우리도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한 몸이요, 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생각 무명(無明)이 동(動)함으로 해서, 이것이 ‘본심왕(本心王)을 어겼다’고 표현한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본심왕을 어기고 떠났다고 하는 것은, 한 생각 무명심이 발동함으로 해서 아직까지도 우리는 중생의 탈을 벗지 못하고 삼도(三途)와 사생(四生)을 돌고 돌면서 갖은 크고 작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 할 일은 '우리가 본래 법신불이었다'고 하는 사실과 그렇게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몸안에 있는 법신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미륵불이나 똑같은 그 법신불이 우리 안에 역력히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은 업연(業緣)에 따라서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고, 아귀도에도 태어나고 그러고 있지마는,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이 법신불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손상됨이 없이 고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철저히 믿는 것이 정법(正法)을 믿는 것이고 그것이 불법(佛法)을 믿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월초파일에 이천육백 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하신 뜻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서 탄생하셨다' 하지만, 어떻게 제도합니까?
‘모든 중생들에게 다 같이 법신불이 계시다’고 하는 거, ‘법신불이 계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모든 중생, 너희들이 부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탄생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께 공경을 최고의 존경과 공경을 바치고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불공(佛供)을 드리고 합니다마는, 그 모든 신앙 생활 가운데에 으뜸이 되고 뿌리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히 믿는 데에서부터서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이 말씀을 하시기를 ‘중생이 곧 부처니, 바로 내가 나 자신이 부처니 부처를 밖에서 찾지 말아라’하시는 거고.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이니,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눈으로 봤다 하면 거기서 번뇌의 물결이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었다 하면은 번뇌의 물결이 일어나고,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은 번뇌의 생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없는 끝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 번뇌를 여의지 않고 거기에 보리가 있다는—보리(菩提)는 깨달음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보리라고 하는데—그 번뇌를 여의지 않고 깨달음이 거기에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붙어 있다고 하면 좀 어폐(語弊)가 있을는지 모르지마는, 바로 그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이 딴 데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말이여. 이것이 바로 대승법(大乘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하자면은 파도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 파도는 물이 곧 인연 따라서 움직거리면 그것이 파도인데, 파도는 물을 여의고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파도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기에 물이 있는 거고, 물이 있으면은 물결이 파도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물결을 버리고 물을 찾는 한에는 물속에 들어앉어서도 물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중생을 여의고 부처를 찾을 수가 없는 거고,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을 구하는 한에는 깨달음 속에 있으면서 깨달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한 것은 깨닫기 위해서 한다’ 하지만 깨달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선해 본 사람이면 끊임없이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마는, 그 번뇌를 여의고 참선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몸뚱이가 바로 부처님 몸뚱이고, 우리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수없는 번뇌가 바로 그것이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最上乘法)에서는 아까 부처님으로부터 달마 스님까지 인도에서 28대, 달마 스님이 중국으로 오셔서 육조 혜능 스님까지 6대, 그래서 육조 스님까지 해서 33대를 삽삼이라고 합니다마는 삽삼조사(卅三祖師).
그 삽삼조사로 육조 스님 때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뭣고?’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고 하는 것을 금방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그것이 오늘날까지 조사들에 의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으로 오늘날까지 최상승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최상승법은 굉장히 어렵고 복잡하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부처도 내 몸 밖에서 찾지 말 것, 참선도 번뇌를 여의고 찾지 말 것,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내가 바로 부처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번뇌를 여의고 참선을 할라고 하지를 마세요. 무슨 망상이 일어나거나 번뇌가 일어나거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여.

탐심이 일어날 때도 그 탐심이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 딱! 즉해 가지고 ‘이뭣고?’여. 미운 생각이 일어나거나 원망하는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을 버리고 따로 참선을 하려고 하지 말고 바로 일어나는 그놈에 즉해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간다면 바로 이렇게 살아 있는 참선을 해 버릇하면 번뇌가 일어날수록 더 좋은 것이고, 탐진치 삼독심이 치열하게 일어날수록에 바로 거기에다 발판을 두고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를 한다면 혼침(昏沈)이 일어날 수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미운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그래서 이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여. 시간도 따로 없는 것이고, 장소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편의상 입선(入禪), 방선(放禪)의 시간을 두고 선방(禪房)이라고 하는 특별한 조용한 곳을 마련해 가지고 거기에 가서 다 같이 죽비(竹篦)를 치고 정진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이고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이지 진짜 살아 있는 공부는 꼭 선방에 와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권도나 검도나 유도나 기본자세를 철저히 익힘으로 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 기본의 살아 있는 응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을 철저히 익힌 것은 대단히 좋은 것이기는 하나, 언제나 기본에만 입각해서 딱 틀어박힌 참선이 그것은 진짜 살아 있는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쩌다가 업(業)에 걸려서 감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 감옥에서도 탁! ‘이뭣고?’를 할 수 있다면 감옥이 바로 선방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부간에 사랑하고 부부간에 싸우고 부부간에 생활에 대한 근심 걱정을 한 바로 그곳이 바로 그곳이 살아 있는 선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다시 참선에 대한 관념을 바로 잡아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무척 살기가 교통이라든지 모든 생활이 편리하게는 되었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행복해졌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점점 사는 것이 더 복잡하고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교육도 그렇고 일체가 간 곳마다 더 복잡해지고 다단해지고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때일수록 이 살아 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이것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인생을 바로 살기가 어렵고, 이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가기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 오늘 이 번뇌의 생각을 깨끗이 씻어 제(除)한다고 하는 것은 활구참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르게 활구참선하는 그 근본을 딱! 알고 보면 삼도고(三途苦)니,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이니 그것 버릴 것이 못됩니다.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지옥은 현실 속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형무소 교도소가 꼭 지옥이냐 하면 그게 아니고,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 바로 우리 몸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육도(六途)가 들어있다고 봐야 정말 육도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생각 뒤집어지면 지옥도 되고, 독사도 되고, 아귀도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탁! 바로 잡으면 아까까지 지옥에 있었던 사람이 한 생각으로 인해서 천당에도 갈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죽은 뒤에, 금생에 살아서 악업(惡業)을 지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하는 그 말씀을 나는 믿습니다마는, 살아서 우리가 들어가는 지옥도 있다고 하는 것을 철저히 우리가 인식을 한다면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은 걱정이 없습니다.
내나 살아서 지옥 가는 연습을 한 사람이 죽어서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에 살아서부터서 지옥에 안 가는 행위를 한다면 지옥 그렇게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지옥이 무엇인가를 알고, 이 마음속에 있는 지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살아서 지옥 갈 짓을 안 하게 되고, 살아서부터 지옥 가는 연습을 안 한다면 죽어서 지옥 갈 것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술을 많이 먹고 술버릇이 고약한 사람은 술을 안 먹을 때는 성현 군자고 그렇게 착한 사람이 술만 들어갔다 하면은 자기 자신을 자제를 못하고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가지고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용케도 자기집은 찾아갑니다. 가서 꺼꾸러져도 자기집 문 앞에 가서 꺼꾸러져 가지고 거기서 쓰러져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꺼꾸러져서 잡니다.
왜 그러냐?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을 항상 자기집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술에 취해가지고 완전히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도 자기집을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옥에 가는 것도 살아서 지옥 가는 행위를 많이 한 사람은 틀림없이 이 몸뚱이를 버리고 영혼이 갈 때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서 지옥에 안 가는, 천당에 가는 연습을 많이 한 사람은 숨 떨어지자마자 천당에 가는 거고, 살아서 극락(極樂) 가는 연습을 많이 한 사람은 숨 떨어지자마자 쏜살같이 극락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극락(極樂)에 가는 연습,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는 연습이 바로 ‘이뭣고?’라 이것입니다.
탐심이 나도 바로 거기서 ‘이뭣고?’ 해 버리면, 탐심의 한 생각 일어날 때 그것이 구체화되기 전에 탁! ‘이뭣고?’를 해 버리면 영락없이 지옥으로 갈 차를 타려다가 안 타버리고 극락으로 가는 차에 올라탄다면 물어 볼 것도 없이 극락에 간 거여.

그래서 ‘이뭣고?’는 천하에 간단하고 별로 맛은 없지만, 내가 바로 부처요, ‘이뭣고?’가 바로 살아서 극락에 가고,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연습이고, 바로 한 생각에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올라가는 공부라고 하는 것을 믿고 고대로 실천한다면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고 혼탁하고 그래도 한탄할 거 없습니다.
어려운 고비고비 만날 때일수록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거기서부터서 이 지상에 극락이 되어가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엄동설한(嚴冬雪寒) 소한, 대한 때는 이대로 가다가는 다 얼어죽을 것 같지만 그 시간에 지혜롭게 건강을 관리하고 잘 하다보면 금방 또 입춘, 우수가 돌아와서 봄이 온 거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그래도 탁! 정신만 차리고 ‘이뭣고?’만 열심히 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직장,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다보면 머지않아서 우리도 또 잘살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마음으로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드라도 자기 할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하다보면 반드시 또 살아 갈 길이 있습니다. 온 국민이 그렇게 노력할 때 우리나라는 잘사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 죽을 것 같지마는 또 살길이 열리고 좋은 세상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역사는 누가 눈에 안 보이는 어떤 존재가 있어서 역사를 만든 게 아니라 내나 인간이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좋은 역사도 만들고, 어려운 시대를 좋은 시대로 맨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에 각자 주인이 자기 살림을 잘 돌보고 자기 일을 잘할 때 그 집안도 잘되고 회사도 잘되고 사회도 올바르게 되어가는 것입니다.(처음~24분3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일종위배본심왕~’ ; 『석문의범(釋門儀範)』 관욕(灌浴) 입실게(入室偈) 참고.

 


[참고] 송담스님(No.457)—1991년 11월 첫째 일요법회에서. (5분 54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여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고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니라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한번 본심왕(本心王)을 배반(背反)한 이래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이냐. 몇 번이나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途)에 들어갔고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을 몇 번이나 겪어왔더냐 그 말이여.
몇수십만 번을 짐승이 되었다가 날짐승이 되었다가, 긴짐승이 되었다가, 네발 달린 짐승이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이러면서 돌고 돌아서 금일에까지 왔더냐.

원래는 우리도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똑같은 조금도 차등(差等)이 없는 본심왕이었다 그말이여. 그 본심의 왕을 배반한 탓으로 해서 우리는 삼악도와 사생을 돌고 돌아서 몇억만 겁을 겪어 가지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더라.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고, 오늘 번뇌에 물든 그 번뇌염을 깨끗이 다 씻어 버리고,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다.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을 떠나서 객지(客地)로 객지로 떠돌아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떠돌이 신세로써 참 거러지 신세가 되어 가지고 그렇게 떠돌다가 비로소 자기 고향 갈 길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기쁘겠느냐.

남북 이산가족(離散家族)들이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가족 상봉, 그것참 그러한 경험이 있으신 분이 많이 계시겠지만 정든 사람과 이별하고, 고향과 가족 친지를 이별하고, 한 나라에 손바닥만한 땅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한 그런 것 생각해 보면 참 기가 막히지마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원래 본심왕이였었는데, 그 왕이 그 본심왕을 갖다가 등져 버리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가지고 삼악도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돌고 돌면서 가진 고초를 당하고 금생에까지 무량겁을 겪어 왔을 뿐만 아니라 내생(來生)에도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또 그런 것이 거듭될 그런 신세가 다행히 불법(佛法)을 만나고 정법(正法)을 만나서 우리가 본심왕의 본위치로 돌아갈수 있게 되었다면 이건 참 50억 인구 가운데 가장 행운아라고 할까, 가장 행복한 삶을 받아났다고 할 것입니다.

이 정법,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을 헛되이 지내지 아니하고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잘 거각하고 단속하고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함으로써 우리의 본고향(本故鄕)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이거거든.

고향을 모를 때에는 갈 곳도 없고, 가 봤자 별 목적이 없어.
그러니 ‘우선 잘 먹고 보자, 우선 잘 입고 보자, 나중에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가더라도 우선 부자로 살아 보자, 좋은 차도 가져 보자, 좋은 집도 가져 보자’하지만, 고향이 있는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았다면 한시바삐 고향길을 향해서 계속 걸어야 하거든.

입는 것도 얼어죽지 아니하면 족하고 먹는 것도 굶어죽지 아니하면 족하고, 어쨌든지 한 걸음이라도 빨리 고향을 향해서 게으르지 않게 걸어가는 것 밖에는 어디에다가 시간과 힘을 허비할 것이냐 그거거든.(21분20초~27분13초)
*본심왕(本心王) ; 본래 진여불성(眞如佛性).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생(四生) ;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네 가지 생(生), 네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이른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본고향(本故鄕) ; 본향(本鄕). 고향.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녹음 테이프(錄音tape) ; 소리를 기록하는 테이프. 카세트(cassette)라고 하는 녹음기에 간편하게 장착하여 녹음을 하거나 녹음된 것을 재생하는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 : 전용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종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얇고 긴 띠 위에 자성을 띤 가루를 입힌 자기 테이프)를 말한다.

소리나 영상[음성법문, 영상법문]을 재생하는 방식이 녹음 테이프에서 CD(compact disk)를 거쳐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노사나불(盧舍那佛) ;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고 깨달음을 성취하여 장엄된 몸을 가지고 보토(報土 : 부처님께서 과거 인위因位에서 행한 서원행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정토)에 계시면서 설법하는 부처님.
삼신불(三身佛)은 (1)영원불변의 진리[法]를 몸[身]으로 삼고 있는 법신불(法身佛), (2)수행에 의해 공덕을 쌓은 과보(果報)로써 온갖 덕이 원만구족한 불신(佛身)인 보신불(報身佛), (3)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身]으로 변하는[化] 화신불(化身佛, 應身)을 이르는 말인데, 노사나불은 이 중 보신불이다.

이들 삼신(三身)의 상호관계는 흡사 달의 체(體)와 그 빛, 그리고 그 그림자와 같다고 하며, 이것을 일월삼신(一月三身)이라고 한다.
곧 법신(法身)의 이체(理體)가 유일상주불변(唯一常住不變)인 것을 달의 체(體)에 비유하고, 보신(報身)의 지혜가 법신의 이체(理體)에서 생겨 일체를 비치는 것을 달의 빛에 비유하며, 응신(應身)은 변화하는 작용으로서 기연(機緣)에 따라서 나타나는 불신(佛身)이므로 달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念佛三昧寶王論卷中).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태양처럼 일체법을 비추어 관조하는 광대무변한 지혜를 지닌 부처님.
한역어로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法身)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법불(法佛) · 이불(理佛) · 실불(實佛) · 법신불(法身佛) · 법성신(法性身) · 자성신(自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한물건’이란 것도 이것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絕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무명(無明) ; 모든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 번뇌. 사제(四諦)에 대한 무지로서,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번뇌. 본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원초적 번뇌.
*삼도(三途) ; 삼악도(三惡途),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 열반의 경지)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는 과보)의 인연을 부른다.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業]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의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이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 :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 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삽삼조사(卅三祖師) : 삼십삼세 조사(三十三世祖師).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부처님을 대신할 전 교단(敎團)의 어른을 한 분씩 정하여 내려왔다。그것은 스승되는 어른이 그 제자들 가운데서 빼어난 이를 선택하여 법(法)을 전하고, 그 증거로써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衣鉢)를 전해 주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 1.가섭존자, 2.아란존자, 3.상나화수....이렇게 전승되어 28대 되는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중국에 와서 중국의 초조(初祖)가 되고, 그로부터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로 내려왔는데, 위 33인의 조사를 삽삼조사라 한다.
육조 혜능에 이르러서는 불법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정통(正統)으로 내려가는 전례를 폐지하고, 따라서 의발을 전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육조 스님 때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뭣고?’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 ;

 


[참고] 송담스님(No.264)—1985년 4월 첫째 일요법회에서. (5분 50초)
흔히 화두하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이뭣고?’를 많이 말씀을 하게 됩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말은 임제(臨濟) 스님 이후로 임제종에서 이 화두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 이전에 육조(六祖) 스님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는 땅을 떠받치며, 밝기로는 해보다 더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항상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하는 가운데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터억 앞에 나와서, ‘그것은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이 하택신회, 저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불성이니 제불의 본원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 되겠다. 불교학자밖에는 못 되겠다’

이 불교(佛教)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앞으로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해도 지해종자(知解種子)밖에는 못 되겠다’ 이렇게 점검을 하셨습니다.

그리자 남악회양(南嶽懷讓)이 왔습니다. 와서 터억 절을 하니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한 물음에 대해서 꽉 맥혀서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 몸을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택신회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무슨 하택신회의 불성이니 이렇게 즉각 그 대답을 했는데, 남악회양은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묻는데 대해서, 앞이 꽉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라. 그 뒤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8년 동안을 ‘대관절 이게 무슨 물건인고?’ 앉아서도 그 생각, 서서도 그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 일을 하면서도 그 생각, 똥을 누면서도 그 생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이렇게 하기를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하니,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할 것이 없지를 않지마는 오렴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가(印可)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참선법, 활구참선법은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더듬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악회양 선사처럼 대뜸 처음부터서 꽉 맥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갑자기 걸어가다가 기둥이나 벼람박에 이마빡을 부딪쳤을 때 그때 상황이 어떻습니까?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꽉 맥혀서 앞뒷이 끊어져야 그 공부를 옳게 해 나가는 것이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 이론, 무슨 철학, 불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 그것을 갖다가 아는 대로 끌어다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종합을 하고, 비교를 하고, 적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61분31초~67분22초)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에서. (9분 10초)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業)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일여(一如)하게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선(禪).
[참고]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법문에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신 분은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정진(精進)이여.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거든. ‘어느 곳이고 선(禪)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때고 참선 아닌 때가 없다’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 ‘걸음 걸음이 미륵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요, 생각 생각이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곳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바로 이러한 도리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30분19초~31분2초)

[참고] 송담스님(No.152)—1981년 10월 첫째일요법회(참선법B)에서.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요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니라 염념석가출세(念念釋迦出世)요  보보미륵하생(步步彌勒下生)이니라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요. 어떤 색상을 보는 그때가 바로 ‘참나’를 깨달을 때요. 문성시증처(聞聲是證處)라. 어떤 소리를 듣는 그때가 ‘참나’를 증득(證得)할 바로 그 곳이드라. 
그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무엇을 볼 때마다, 무슨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다져 나가면,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미륵 부처님이 하강하시든 바로 그것이더라.(41분22초~44분9초) - (게송) ‘견색시증처~’ ; [금강경오가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함허 설의(說誼) 게송 참고.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부처님을 만들어 내는 장소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승당(僧堂). 선방(禪房).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도고(三途苦, 三塗苦) ; 악한 일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는 3가지 미혹한 생존(지옥•아귀•축생)에서의 고통.
*고주망태 ; 술을 많이 마셔 취하여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
*인사불성(人事不省 사람 인/일 사/아니·못할 불/살필 성) ; 사람[人]으로서 지켜야 할 일[事]을 살피지[省] 못함[不].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태.
*극락(極樂) ; 극락세계(極樂世界). 극락정토(極樂淨土).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이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범어 Tatha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엄동설한(嚴冬雪寒 혹독할 엄/겨울 동/눈 설/찰 한) ; 혹독하게[嚴] 추운 겨울[冬]에 눈[雪] 내린 뒤의 추위[寒].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ㅁ/무시선 무처선2017. 12. 20. 18:30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일여(一如)하게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
 

(2분 21초)

 

[법문] 송담스님(세등선원No.34)—신유년 하안거 반결제 법어(81.05.29)(세등34)
 
어제 오늘  사람의 수좌(首座)로부터 공부에  자문을 받았는데,  정진(精進)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상관이 없어.
걸어갈 때나,  있을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말을  때나, 말을 아니하고 있을 때나, 움직일 때나, 고요히 있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분별(分別)이 없이 다못 어디서 무엇을  있던지 간에   없는 화두(話頭)만을 거각(擧却)할 뿐이여.
 
그렇게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때도 없이, 어떠한 특정한 장소도 없이 다못 일여(一如)하게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 관조(觀照) 나갈 뿐이지만,
그래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앉아서 기본자세,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기본자세로 정진을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가장 힘을 얻기 쉽다.
 
그래서 고래(古來)로부터 참선(參禪)을 좌선(坐禪)’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것이다. 기본자세로 앉아서 정진한 것이 제일 효과적이고 득력(得力)을 기가 쉽기 때문에 그래 해 온 것이다.(11분27초~13분4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고] 송담스님(No.299)—1986 5 첫째 일요법회 법문에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신 분은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정진(精進)이여.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거든. ‘어느 곳이고 ()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때고 참선 아닌 때가 없다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 걸음 걸음이 미륵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요, 생각 생각이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곳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바로 이러한 도리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3019~312)
 
[참고] 송담스님(No.152)—1981 10 첫째일요법회(참선법B)에서.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니라  염념석가출세(念念釋迦出世)  보보미륵하생(步步彌勒下生)이니라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 어떤 색상을 보는 그때가 바로 참나 깨달을 때요. 문성시증처(聞聲是證處). 어떤 소리를 듣는 그때가 참나 증득(證得) 바로  곳이드라
그렇게  생각  생각을 무엇을  때마다, 무슨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다져 나가면,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요,  걸음  걸음 걸어가는   걸음  걸음이 바로 미륵 부처님이 하강하시든 바로 그것이더라.(4122~449) - (게송) ‘견색시증처~’ ; [금강경오가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함허 설의(說誼) 게송 참고.
 
 
---------------------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정진(精進) : [] Vi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보살이 수행하는  바라밀(六波羅蜜) 하나。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그러나 닦는 생각() 닦는 () 있어서는  된다。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분별(分別)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리(事理)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바가 아니다」라고 .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말씀  말씀이 마치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 바란들 어찌 가히   있으랴?
 
做工夫호대 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活路] 찾는 것같이 할지니,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어조사 )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丹田]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  없는 생각 ()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일여(一如) ;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눌  없음.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 ②지()로써 (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 (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 ()하여 바르게 아는 .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하여 체성(體性) 없음이 마치 물에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功行]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 () 앞에 나타나 ()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책상다리할 /앉을 ) ;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 발바닥을, ()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오른발을 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앉는 길상좌(吉祥坐)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고래(古來) ; ('고래에', '고래로' 꼴로 쓰여)옛날부터 줄곧.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안되던 것이 할라고  해도 저절로  되어질 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Posted by 닥공닥정
ㅁ/무시선 무처선2016. 7. 25. 19:56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No.299)—일상생활 속에서 화두를 들고 공부를 지어 나가게 될 때에 공부가 익숙해진 선객(禪客)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일여(一如)하게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

 

(9분 1초)

 

[법문] 송담스님(No.299)—1986 5 첫째 일요법회(86.05.04)(용299)

 

여러분에게 아주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사실 공부는 선방(禪房) 들어와서 죽비() 치고 입선(入禪) 하는 그것만이 공부가 아니고,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 화두(話頭) 들고생활 속에서 성날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슬플 슬픈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속이 상할 속상하는 생각을 버리고 찾지를 말고 바로 생각에 ()해서 화두를 거각(擧却) 하도록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그렇게 공부를 지어 나가게 때에 공부가 익숙해진 선객(禪客)이라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공부를 지어 가는 사람은 ()에서 생활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 참선(參禪)이요,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것도 그것이 바로 참선이요.

 

이런 법회에 절에 오실 때에 차를 타시는 것도 참선이요, 차에서 내려서 걸어서 절에까지 오시는 것도 참선이고.

도량(道場) 들어서서 어떠한 스님을 만나면은 노소간(老少間) 합장을 하고 이렇게 배례(拜禮) 하는 것도 참선이요. 신도분을 만나서도 미소를 지으면서 합장을 하고 이렇게안녕하셨느냐 인사 한마디하는 것도 그것이 모두가 참선 아닌 것이 없다 말씀입니다.

 

법당에 떠억 들어와서도 자기가 앉을 만한 자리에 따악! 방석을 가지고 와서 앉아서, 허리를 펴고 반가부좌(半跏趺坐) 또는 가부좌(跏趺坐) 하고서 화두를 들고 법회가 시작할 때까지 참선을 하시는 , 이것이 참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일반 다른 사찰에는 절에 무슨 법회가 있다 하면은 법당에 들어와서 잡담을 많이 가지고 법당이 와글와글 와글와글 가지고 장터처럼 모다 그러는데.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들어오시면 제각기 자리에 앉아서 들어오시자마자 떠억! 참선을 하셔서. 그러니 법당에 들어오기 전에는 법당 안에 분도 계신가 보다하고. 와서 너무너무 조용하기 때문에.

그런데 들어와서 보면 법당에 여명 대중이 ! 앉아 있다. 바늘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만큼 그렇게 엄숙하고 조용해야 것이다 그말이여.

 

먼저 오신 분은 있으면 앞으로 앉으시고, 나중에 오신 분은 차츰차츰 이어서 이렇게 앉고, 제일 나중에 오신 분은 자연히 그래서 뒤에 앉으시고, 이렇게 되어야 것입니다.

어중간하니 중간에 가서 앉으면, 앞에는 비워놓고 뒤에 가서 앉었고이렇게 되지를 않고 차례차례 앞에서부터 내려간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먼저 와서 하신 분이 그렇게 경건하고 엄숙하게 정진을 하고 계신다면, 뒤에 오신 분들도 자연히 차례차례 앉으면서 앉자마자 참선하시고, 앉자마자 참선하시고 해서, 법회 시작할 때까지 삼십 전에 오시거나, 시간 전에 오시거나 먼저 오셔서 정진하신다면 그것도 또한 좋은 것이 아니냐 말씀입니다.

이것이 용화사 법보제자들이 법문을 들으러 오셔서, 법당에 들어오셔서 취해야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른 법보재(法寶齋)라든지, 초파일이라든지 그밖에 입춘이나 동지차례라든지 이럴 부처님 앞에, 영단(靈壇) 앞에 차려 놓은 모든 재물(齋物) 공양(供養) 하시게 때에는 알아서 고루고루 잡숫도록 모다 해드릴 텐데.

여기서 직접 손을 대서 서로 다투어서 그것을 잡술라고 하는 그런 일은물론 여기에 계신 분은 대부분 그러실 리가 없겠지만, 가끔 많이 손님이 오시다 보면 종종 그런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일들은 질서 없는 일이고, 법보제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질서가 없는 곳에는 혼란이 오고, 혼란이 오는 곳에는 화두를 들고 경건하게 정진한 수행인의 자세가 수가 없는 곳입니다. 들어오실 때에도 그렇게 질서있게 그렇게 하시려니와 법회가 끝나고 나가실 때에도 차례차례 이렇게 나가시도록 그렇게 하시고.

식당에 내려가셔서 공양을 하시게 때에도 차례차례 질서 있게 그렇게 하신다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러한 일들이 고대로 바로 정진이 되도록.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신 분은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정진(精進)이여. 그래서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거든. ‘어느 곳이고 ()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때고 참선 아닌 때가 없다그래서무처선 무시선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걸음 걸음이 미륵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요, 생각 생각이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곳이어야 한다그런 것이 바로 이러한 도리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디 가서나는 용화사 다니면서 법문을 듣고, 최상승법(最上乘法) 법문에 의지해서 활구참선(活句參禪) 합니다감히 이렇게 말씀을 하기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도량에 왔을 때만 그러실 것이 아니라, 조계사라든지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들으러 가시더라도 고대로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용화사 신도는 다르구나 말을 잘하고 그래서가 아니라, 하는 행동이 벌써 다르고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마디가 다르고, 경건하게 합장을 하고 이렇게 미소를 지으면서 신도끼리 인사 한마디 하는 것도 벌써 다르고.

 

어느 법당에 법문을 들으러 들어가서 따악 앉아 계신 모습만 봐도! 저분은 바로 참선을 하시는 분이로구나. 저분은 바로 용화사 법보제자로구나이렇게 되도록 해야 생각을 합니다.(2333~3233)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고] 송담스님(No.152)—1981 10 첫째일요법회(참선법B)에서.

〇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니라  염념석가출세(念念釋迦出世)  보보미륵하생(步步彌勒下生)이니라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 어떤 색상을 보는 그때가 바로참나 깨달을 때요. 문성시증처(聞聲是證處). 어떤 소리를 듣는 그때가참나 증득(證得) 바로 곳이드라.

 

그렇게 생각 생각을 무엇을 때마다, 무슨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다져 나가면,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요, 걸음 걸음 걸어가는 걸음 걸음이 바로 미륵 부처님이 하강하시든 바로 그것이더라.(4122~449) - (게송) ‘견색시증처~’ ; [금강경오가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함허 설의(說誼) 게송 참고.

 

 

---------------------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죽비( 대나무 /빗치개·통발 )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 들어가는 , 좌선(坐禪) 시작하는 . 참선(좌선)수행.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어조사 )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丹田]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이뭣고~?’   ‘ 없는 생각()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선객(禪客 참선 /손님사람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 ·남의 ) ; 남의 집이나 가정을 높여 가리키는 .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일지 않고도량으로 읽음.

*배례(拜禮) ; 절을 하여 예를 갖춤. 또는 .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책상다리할 /앉을 ) ; 결가부좌(結跏趺坐) 줄임말.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 발바닥을, ()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법보전(法寶殿) ; 법보전은 용화선원의 ()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 전당이라는 .
그래서 진리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모셨고,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영단(靈壇) ; 영가의 위패를 두는 ().

*재물(齋物) ; 절에서 () 지낼 신도나 재자(齋者) 부처님이나 영단(靈壇 영가의 위패를 두는 ) 올린 공양물(供養物).

*공양(供養) ; ①불()•()•() 삼보(三寶) 음식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

*정진(精進) : [] Vi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보살이 수행하는 바라밀(六波羅蜜) 하나。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그러나 닦는 생각() 닦는 () 있어서는 된다。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걸음 걸음이 미륵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요, 생각 생각이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곳이어야 한다 ;

[참고] 송담스님(No.152)—1981 10 첫째일요법회(참선법B)에서.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니라  염념석가출세(念念釋迦出世)  보보미륵하생(步步彌勒下生)이니라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 어떤 색상을 보는 그때가 바로참나 깨달을 때요. 문성시증처(聞聲是證處), 어떤 소리를 듣는 그때가참나 증득(證得) 바로 곳이드라

그렇게 생각 생각을 무엇을 때마다, 무슨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다져 나가면,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요, 걸음 걸음 걸어가는 걸음 걸음이 바로 미륵 부처님이 하강하시든 바로 그것이더라. - (게송) ‘견색시증처~’ : [금강경오가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함허 설의(說誼) 게송 참고.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간화선(看話禪) ; () 화두(話頭) 말이다. 간화(看話)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을 본다[]’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화두를 ()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최상승법(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