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대력보살2018. 11. 9. 21:21

*대력보살(大力菩薩) ; 큰 힘을 가진 보살. '대력'은 무루업(無漏業)에 의하여 무명(無明)으로부터 벗어나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한 것을 형용한 말이다.

 

*무루업(無漏業 없을 무/샐·구멍·번뇌 루/선악의 소행所行 업) ; 번뇌 없는 청정한 업. 오염된 과보도 청정한 과보도 초래하지 않는 업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조건이다. '무루'란 번뇌가 없거나 더이상 번뇌를 증장시키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유루업과 대칭된다.

 

*무명(無明) : [범]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기신론(起信論)>에 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6분 37초)

 

[법문] 송담스님(No.457)—1991년 11월 첫째 일요법회(용457)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생사 바닷속에서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리고 이 세상이 전부가 생사의 바다요, 우리의 마음속도 생사심(生死心)의 그 바닷속이여 바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사대해(生死大海)인데, 그 생사대해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면 죽는 거여.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 줄 몰라. 불이 나거나, 자동차 무슨 사고가 나거나, 난리가 나거나, 정신 못 차리면 죽는 거고, 정신만 탁! 차리면 반드시 살아갈 길이 있는 거여.

 

그래서 저 호숫가에서 버스가 뒤집어져 가지고 다 죽었는데, 그중에 참선(參禪)하는 비구니 스님 한 사람이 그 차가 뒤집어져 가지고 바다에 빠진 그 속에서 화두(話頭)를 들었다 그말이여. 그러니까 환하니 문이 보여. 그리 요렇게 요렇게 헤쳐 나왔어.

나오고 보니까 돌도 안 돌아온 애기가 물속에 떠서 허우적허우적 하고 있다 말이여. 그래서 그 애기를 건지고 두 사람 딱 살아났거든. 지금 그 비구니 스님이 살아있거든. 그래서 용궁에 갔다고 해서 별명이 용궁 스님인데.

 

화두를 들면은 그런 경우에도 살아나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나는 거여. 왜 그러냐? ‘호랑이 열두 번 물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옛날부터서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거든. 틀림이 없거든.

생사(生死),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의 그 무서운 생사 속에서 정념을 잃지 아니하면 바로 그 사람을 대력보살(大力菩薩)이라 했어. 대력보살! '큰 힘을 가진 보살'이라 그래.

 

정념(正念)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터억 화두를 드는 거여.

지금 우리는 무엇이 정(正)이고 무엇이 사(邪)고 그거 따질 겨를이 없거든. 화두 하나만 딱! 챙겨버리면 사심(邪心)은 거기에 붙지를 못하는 거여.

 

그렇게 화두를 들고 계속해 나가다 보면 저절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순일무잡한 타성일편 경지에 들어가면 거기에 망념이 붙질 못하니까 무념(無念)의 경지에 들어가서 타악!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버리면 바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 아니냐 그거거든.

 

따로 정진을 할라고 마음을 내지 말고 자꾸 화두만 들어. 되거나 안 되거나 따질 것도 없고 화두만 들면 저절로 망념은 거기에 붙지 못하고, 거기에 무슨 삿된 생각이 붙을 것이냐 그말이여.

 

아까 조실(祖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의리선(義理禪)을 하지 마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공안(公案)을 따지고 그런 짓을 하지 마라.

공안을 의리로 따져서 그럴싸하니 해답을 얻어봤자 그게 어디에 쓰는 것이냐 그거거든. 아무 소용없어.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을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얻어 가지고, 이 공안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고 저 공안을 물으면 저렇게 대답하고,

요새 조사어록(祖師語錄)들이 많이 번역이 되어 나와 가지고 그런 것을 죽죽 읽어서, 머리 좋은 사람은 몇 번 안 읽으면 이렇게 물으니까 이렇게 대답하고 저렇게 물으니까 이렇게 대답하고, 그 알아 가지고 제법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법담(法談)을 척척하고, 어디다 쓰는 것이냐 그말이여.

 

아무 소용없거든!

 

설사 일생 동안 참선을 해도, 공안(公案) 하나를 대답을 못해도 상관 없어.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면 반드시 금생(今生)에 타파하게 되고,

 

설사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해도 금생에 숨을 거둘 때에도 터억 화두를 들고 그 의단 하나로서 숨을 거두어 보라 그말이여.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태어나거나, 설사 사람 몸을 받더라도 내생(來生)에 다시 몸을 바꾸어 가지고 또 이 정법문중(正法門中)을 만나서 내생에는 전강(田岡) 조실 스님처럼 어린 나이에 툭 터져버리거든.

 

물론 금생에 참 어린 나이로 선방에 나오셔서 정말 생명을 바쳐서 정진을 하셨기도 했지만, 어떤 스님은 조실 스님 보고 ‘전생공부(前生工夫)'라고. '전생에 그렇게 해놨기 때문에 금생에 그렇게 툭 터졌다'고, '전생공부'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듣기도 했지만,

 

하여간 금생에 여법하게 해 놓은 공부는, 금생에 설사 깨닫지 못했어도 전혀 헛것이 아니고 내생에 일찍 툭 터지는 것이여. 그런 신념을 가지고 공연히 속효심(速效心)을 가지고 빨리 깨닫기를 기달릴 일이 아니라 여법하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는 것 뿐이여.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기다릴 것도 없고 조금도 조급한 생각을 가질 것이 없어.(46분20초~52분5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고] *무루업(無漏業 없을 무/샐·구멍·번뇌 루/선악의 소행所行 업) ; 번뇌 없는 청정한 업. 오염된 과보도 청정한 과보도 초래하지 않는 업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조건이다. '무루'란 번뇌가 없거나 더이상 번뇌를 증장시키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유루업과 대칭된다.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曇無讖 譯) 권37 ‘迦葉菩薩品 第十二之五’

〇迦葉菩薩白佛言 世尊 是無漏業 非是黑法 何因緣故 不名爲白 善男子 無有報故 不名爲白 對治黑故 故名爲白 我今乃說 受果報者 名之爲白 是無漏業 不受報故 不名爲白 名爲寂靜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이 무루업은 삿되고 더러운 흑법(黑法)이 아닌데, 어떤 인연으로 청정하고 선한 백법(白法)이라 하지 않습니까?’

‘선남자여, 과보가 없다고 하여 청정하다[白]고 하지 않으며, 삿되고 더러운 것[黑]을 대치하므로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과보를 받는 자를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무루업은 과보를 받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지 않고 고요하다[寂靜]고 한다’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龍樹菩薩 造 | 鳩摩羅什 譯) 권94 ‘釋四諦品 第八十四’

〇無漏業 能破不善 有漏業 能拔衆生令離善惡果報中 問曰 無漏業應是白 何以言非白非黑 答曰 無漏法雖淸淨無垢 以空無相無作故無所分別 不得言白 黑白是相待法 此中無相待故不得言白 復次 無漏業能滅一切 諸觀中分別故有黑白 此中無觀故無白

 

무루업은 불선(악)의 유루업을 타파할 수 있어 중생을 빼낼 수 있고 선악의 과보에서 떠나게 한다.

묻는다. ‘무루업은 응당 청정할 것인데, 어째서 청정하지도 더럽지도 않다[非白非黑]고 말하는가?’

답한다. ‘무루법은 비록 청정하여 번뇌의 때가 없지만 공 · 무상 · 무작의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별할 여지가 없으므로 청정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더럽다거나[黑] 청정하다[白]는 것은 상대적 조건이 되는 법이지만 여기(무루법) 안에는 상대가 없으므로 청정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무루업은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 있다. 모든 관찰에서는 분별하는 작용으로 인하여 더럽거나 청정한 차별이 있지만 무루업 안에서는 관찰이 없으므로 청정함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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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〇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생사대해(生死大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중생이 생사유전하는 세계를 '큰 바다(大海)'에 비유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정념(正念) ; 바른 생각. 선종(禪宗)에서의 바른 생각이란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한 생각(參究一念). 일체 경계(境界)에 끌려가지 않고, 바로 자기의 본참공안으로 돌아오는 것.

*사심(邪心) ; 삿된 마음. 삿된 교설 · 외도를 따르거나,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이익을 구하며,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치는 등 계율에 어긋나거나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마음을 총괄적으로 나타낸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무념(無念) ; ①망념이 없는 것. 정념(正念)을 말한다. ②모든 법을 보면서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것.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어록(祖師語錄) ;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법담(法談 부처의 가르침 법/말씀·말할 담) ; 불교의 도리에 관하여 나누는 이야기. 또는 그러한 설법(說法). 선사(禪師)들이 본분(本分 : 근본 깨달음本覺)에 대하여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 법화(法話)와 같은 말.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속효심(速效心) ; 빨리 효과 나기를 바라는 마음.

 

Posted by 닥공닥정
ㅇ/이뭣고? 화두2018. 11. 7. 00:13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18분 23초)

 

[법문] 송담스님(No.030)—77년 입춘법회(77.02.04)(용030)

 

무엇이 화두(話頭)냐?

 

우리는 하루 종일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고 음식을 먹고, 손으로는 만지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몸뚱이로는 춥고 더운 것을 알고 그럽니다.

그런데 눈이 본다고 하면은 금방 죽은 사람도 눈이 있지마는 아직 몸이 뜨뜻하고 눈이 아직 멀쩡한데 보이지 않습니다. 또 귀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듣는 것이 아니라, 금방 죽은 사람은 귀가 분명히 아직 세포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은 듣지를 못합니다.

 

또 눈으로 무엇을 골똘히 보고 있을 때에는 옆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무슨 말을 해도 잘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또는 귀로 무엇을 아주 골똘히 무엇을 듣고 있을 때에는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면은 귀로 듣는 놈이나, 눈으로 보는 놈이나, 코로 냄새를 맡은 놈이나 전부가 다, 눈 자체가 보는 것이 아니고, 귀 자체가 듣는 것이 아니고, 입 자체가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놈, 듣는 놈, 맛보는 놈, 만지는 놈, 걸어가는 놈은 별도로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맛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입을 통해서 말을 할 뿐이지, 입 자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눈 자체가 보는 것이 아니고, 귀 자체가 듣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들어서 볼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들을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성낼 줄 알고, 무엇이 들어서 웃을 줄도 알며, 밥 먹을 줄도 아는가?

여러분들은 ‘그것은 마음일 것이다’ 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마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들어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지 ‘그 마음 자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인(古人)들이 편의상 ‘마음’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 놓았을 뿐이지, 그 자체는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이다, 성품이다, 자성이다’ 여러 가지 이름은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에 지내지 못해!

사람도 ‘갑돌이다, 갑순이다’ 이름은 뭐라고도 붙일 수가 있습니다. 또 ‘갑돌이’를 ‘을돌이’라고 이름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뭐라고 붙였거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 자체!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름만 알아 가지고는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관절 무엇을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였는가? 대관절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것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생겼는가?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보는 사람이 없고, 확인을 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대관절 무엇인가?

 

그놈이 들어서 볼 줄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뭘 좋은 걸 주면은 기뻐할 줄도 알고, 아프면은 신음할 줄도 알고, 슬퍼한 일을 당하면 울 줄도 알고, 여기 앉아서도 서울 일을 생각하기도 하고, 미국을 생각할 수도 있고, 지금 오늘 이 시간에 10년 전, 30년 전, 40년 전 일도 생각할라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대관절 그놈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이기에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無窮無盡)한 것인가?

 

우리가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아오는 동안 그놈의 명령에 의해서, 그놈의 조종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지금 이 몸뚱이를 끌고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금생뿐만이 아니라 전생(前生), 저 전생,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그놈이 여기서 태어났다, 저기서 태어났다 하면서 사람도 되었다 짐승도 되었다, 천상에도 갔다 지옥에도 갔다, 부자도 되었다 가난뱅이도 되었다, 선량한 사람도 되었다 악한 사람도 되었다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 자리에까지 오신 것입니다.

 

그놈을 잠시도 떠나서는 우리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도 떠날 수 없이 같이 살아오면서 왜 우리는 그놈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을까요?

 

그것을 분명히 우리가 보아 깨닫는다고 하면은 그것이 부처님인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붓다(Buddha)’라고 한 말을 중국에서 ‘불타(佛陀)’라고 음사(音寫)를 해서, 그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오면서 ‘부텨, 부텨’로 되었다가 지금은 ‘부처’ 이렇게 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라고 하는 것은 인도 말로 ‘붓다(Buddha)’가 삼천 년을 내려오면서 ‘부처’로 그렇게 전해 변해졌다.

 

그러면 인도 말로 ‘붓다’라 하는 말은 무엇이냐? ‘깨달음’ 또는 ‘깨달은 분’ 이러한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 가르침’ ‘깨닫는 길’ 이렇게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요새 학자들이 연구해서 어떠한 이치를 궁리해 가지고 알아 들어가고 자꾸 따져 들어가 가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해서 어떠한 결론이 내려지면 그것을 사물에다가 적용을 시켜보고, 그래 가지고 잘 적용이 되면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으로써 성립을 시키고 해서 이렇게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는 그래서 아는 것,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사량분별심을 떠나서—사량분별심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과 아는 것과의 차이는 사량분별을 사용을 해서 얻어지는 결론은 ‘아는 것’이고 지식이고, 사량분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생사 없는 이치를 보는 것을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굉장히 우리의 중생으로서는 전연(全然) 인연이 없는 아주 저 어디 극락세계나 가야 그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고, 우리로부터서 먼 데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겠지마는,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데 있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심을 가지고 알려고 하기 때문에 깨달음은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을 놓을 때 깨달음은 저절로 우리에게 딱! 붙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하는 데 있어서 몸을 바르게 가지고, 그다음에 호흡을 고르게 한 다음에는 화두를 생각을 해라.

 

화두를 생각하는 것은 사량분별이 아니냐?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화두를 의심(疑心)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 엄격히 말하면 생각이 아닌 것은 아니지마는, 이리저리 자꾸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서 따져 들어간다고 하면은 그것은 분명 사량(思量)이지마는.

따져 들어가지 말고, 무조건하고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놈이 무엇인고?’ 이렇게만 의심을 하신다고 하면은 이것은 사량이면서 사량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하는 데는 제일 해롭고 금지된 것이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버릇, 이것을 제일 엄격히 단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이놈이 뭣고?’

 

성이 날 때도 ‘이뭣고?’ 무엇이 들어서 이렇게 성낼 줄을 아느냐?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도 ‘이뭣고?’

 

우리의 생각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어떠헌 생각, 또 그놈을 바로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한다면은—일어나는 생각이 번져 가지고 삼재가 되고, 사백사병(四百四病)이 되는데,

일어나는 생각이 퍼지기 전에 그놈으로 ‘이뭣고?’ 이렇게 한다고 하면은 일어나는 그 생각은 나로 하여금 생사해탈(生死解脫)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법문(法門)이요, 발판이요, 나의 호위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말씀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듣고, 이 자리에서부터 이 공부를 충실히—생각, 생각 헛되이 날려보내지 말고, 일어나는 생각을 바로 되돌려서 ‘이뭣고?’

 

첫째, 몸을 단정히 하고, 깊은 그리고 조용한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차 타고 가면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앉아서도 하고, 밥 먹으면서도 하고, 똥 누면서도 하고, 소지(掃地)하면서도 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뭣고?’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한다” 그러한 말씀은 아직 참선을 할 줄 모르는 말씀이여.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바로 그놈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그놈으로 ‘이뭣고?’를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쥐를 잡을려면 고양이로 쥐를 보통 잡습니다마는, 그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쥐를 잡는 데에는 쥐를 동원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쥐를 잡아 가지고 항아리 속에다 넣어 놓고는 소고기도 조금—며칠을 굶긴 다음에 소고기를 사다가 조금씩 떼어서 먹입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조금씩 먹여서 안 죽을 만큼씩만 먹여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하되 계속 배가 고프게 만든 다음에 다른 쥐를 한 마리를 잡아서 넣어 줍니다. 그러면은 그놈이 어떻게 배가 고프던지, 그 쥐를 기어코 잡어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얼마 있다 또 쥐 한 마리를 넣어 줍니다. 또 쥐를 잡어먹습니다. 그래서 쥐가 쥐 잡어먹는데 아주 선수가 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완전히 쥐를 잘 잡어먹게 될 때에 그 쥐를 풀어서 놔두면은 쥐구멍으로 자유자재로 다니면서 모든 쥐를 다 잡어먹게 되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뭄뚱이가 커서 쥐구멍에는 들어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구멍 속에 들어가 버린 뒤에는 쥐가 나오기 전에는 잡어먹을 수가 없지마는, 이 쥐는 마음대로 쥐구멍으로 드나들면서 잡어먹는데.

고양이 소리만 나도 쥐는 벌써 알고서 다시는 나오지를 않지마는, 쥐가 다니는 데에는 아무도 그 쥐를 경계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나오게 됩니다. 나오는 쪽쪽 잡어먹고, 안 나오면 구녁으로 들어가서 잡어먹고 해서, 한 쥐가 모든 쥐를 다 소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농담같은 얘기지마는, 화두라고 하는 것은 모든 쥐를 잡어먹는 쥐라고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화두도 분명 우리의 중생의 사리상량으로 처음에 시작을 하지마는, 옳은 방법으로 자꾸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화두를 들고 화두를 참구하고 해 나가다 보면은 사리상량이 사리상량 아닌 사리상량으로 되어 가지고,

일체 번뇌망상, 무량겁으로 지어온 모든 업(業)을 이놈이 다 주워 삼키게 되고, 다 주워 삼킨 다음에 배가 툭! 터져서 죽어 나동그라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화두 참선법은 달마 스님이 천삼백여 년 전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셔 가지고 달마 스님 밑에 2조(二祖) 혜가 대사,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선사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뭣고?’라고 하는 화두를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하택 신회선사에게 ‘이 무슨 물건이냐?’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괴우고 아래로는 땅을 괴우며,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하고 물었습니다.

하택 신회선사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요, 하택 저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六祖)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앞으로 공부를 많이 해 가지고 크게 되어 보았자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되겠다, 강사밖에는 못되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룻날 남악 회양선사가 어려서 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남악 회양선사는 육조 스님이 물으신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 데 대해서 콱! 맥혀 가지고 뭐라고 말씀을 해야 좋을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길로 “대관절 무슨 물건이냐? 무슨 물건이냐?” 콱! 맥힌 상태에서 8년이 지내갔습니다. 그때는 화두라고 하는 그런 말도 없었을 때입니다.

대관절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 데 대해서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꽉 맥혀 가지고 8년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참선은 콱! 맥혀야만 되는 것입니다. 알 수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머리가 영리해 가지고 퍼뜩하면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배우고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맺으려고 하고 알아 들어가고, 이것은 참선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한다고 해도 이것은 생사해탈과는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생사(生死)의 업(業)을 조장하는 데에 그치는 것입니다.(26분37초~45분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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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무궁무진(無窮無盡 없을 무/다할 궁/없을 무/다할 진) ; ①수량이 끝도 없고 다함도 없을 정도로 많다. ②끝도 없고 다함도 없음.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전연(全然 온전할 전/그러할 연) ; 주로 부정어와 함께 쓰여 ‘조금도’, ‘아주’, ‘완전히’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그 내용의 정도를 가장 높은 수준으로 강조할 때 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사백사병(四百四病) ; 인체에 일어나는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사대(四大)—지(地)·수(水)·화(火)·풍(風)의 부조화로 각 요소에 대해서 101가지 병이 있다고 한다.

지(地)와 화(火)에서 일어나는 열병(熱病)이 202가지, 수(水)와 풍(風)에서 일어나는 냉병(冷病)이 202가지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경전에 그들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일정하지 않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소지(掃地 쓸 소/땅 지) ; ①마당(땅)을 쓺.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 ②청소.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

 

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육조(六祖) : (638 ~ 713)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스물 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麈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麈埃)」라고 지었다。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18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칠십육 세로써 입적하였다。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지해종사(知解宗師)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知解]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를 말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Posted by 닥공닥정
ㅁ/무상2018. 11. 4. 10:44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8분 39초)

 

[법문] 송담스님(No.183)—82년 9월 첫째일요법회(용183)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하고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헌디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소년은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기가 어려운데, 일촌광음(一寸光陰)을 불가경(不可輕)이니라. 한마디 그늘을 경(輕)허리 하지 말지니라.

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한데, 연못에 우거진 봄풀은, 우거진 풀은 아직 봄꿈을 채 깨기도 전에 뜰 앞에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가 나는구나.

 

여기에 천여 명의 대중이 운집(雲集)했습니다마는, 엊그제 국민학교를 다니고 유치원을 다니고 어머니를 따라서 외갓집을 가고 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흰머리가 많이 섞여 났습니다. 60, 70 된 노보살님도 어렸을 때 젊었을 때 생각하면 햇수로 따지면 60년 전이요, 70년 전이지만 불과 엊그제 같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은 덧없이 늙어 가건마는, 배움은 도(道)는 이룬 것이 없어. 그러니 한 치 그늘을 아껴라. 일분일초(一分一秒)를 함부로 보내지 말아라 이것입니다.

 

이 참선(參禪)은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알뜰히 단속해 나가는 것이 도를 빨리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별도리(別道理)가 없습니다. 별 방법이 없고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돌이키는 오직 거기에 대도 성취하는 열쇠가 달려 있습니다.

 

한 생각을 섣불리 지내는 사람은 대도(大道)는커녕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밖에는 할 길이 없는 것이고, 무량겁 생사윤회를 끊고 대도를 성취하려면 한 생각 단속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 한 생각을 바른 신심(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탁! 돌이켜 관조할 때 무량겁 생사 업연(業緣)이 거기에서 무너져 버리고 대도에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채 봄꿈을, 봄에 뜨뜻한 봄에 한숨 그 꾸벅꾸벅 졸은 그 봄꿈을 깨기도 전에 벌써 오동잎에 가을 소리가 났다 이것입니다.

'조금 나이 들어서 하리라. 막내아들, 막내딸 결혼이나 시켜놓고 본격적으로 참선을 하리라' 다 부질없는 생각이요 어리석은 핑계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젊어서 해야 하고, 한 살이라도 덜 먹어서 해야지 늙어서는 생각뿐이고 되지도 잘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숨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젊다고 안 죽는 것도 아니고, 어려서도 죽고 젊어서도 죽고, 어제 건강한 사람이 오늘 죽기도 하고.

그래서 도대체 인생의 무상(無常)한 것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 한 생각부터 돌이키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서, 이 찰나부터서 공부를 시작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 생각 돌이키는 것이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이것이 정법(正法)이요,

다른 절에 가도 다 부처님의 좋은 말씀 다 법문을 해 주시는 스님이 계시고 다 참선을 가르켜 주신 절이 왜 없겠습니까마는,

부처님께서 '와서 들어라. 그리고 와서 보라. 그러면 알 것이다' 하셨습니다. 불법(佛法)은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숨긴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와서 보고 와서 들으면 아는 것입니다. 보고 들으면 바른 믿음이 생기고, 분심이 나고, 의심이 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용화사 가서 법문(法門)을 들으라'고, 와서 들어 본 사람이 또 다른 인연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42분58초~51분3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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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소년이로학난성~' ; 주자(朱子)의 <권학가(勸學歌)>

*일촌광음(一寸光陰 한 일/마디·조금 촌/빛 광/응달 음) ; 아주 짧은 시간. 또는 얼마 안 되는 시간. 촌음(寸陰). 촌각(寸刻).

*일촌(一寸 한 일/마디 촌) ; ①얼마 안 되는 것. 약간. 조금. 잠깐. ②촌(寸). 한 치(약 3.03cm).

*광음(光陰 빛 광/응달 음) ; 햇빛[光]과 그늘[陰], 즉 낮과 밤이라는 뜻으로, 시간이나 세월을 이르는 말.

*경(輕)하다 ; ①(무엇의 가치나 비중이)대수롭지 아니하다. ②(말이나 행동이)진중하지 못하고 경솔하다.

*가을 소리[秋聲] ; 가을을 느끼게 하는 소리. 가을철의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 등을 이른다.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일분일초(一分一秒) ; '1분과 1초'로 아주 짧은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별도리(別道理) ;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나 수단. 다른 방법이나 수단.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업연(業緣) ; 업(業)의 과보(果報)를 초래하는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 열반의 경지)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는 과보)의 인연을 부른다.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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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1) 21분 28초.

(2) 21분 19초.

 

[법문] 송담스님(No.183)—82년 9월 첫째일요법회(용183)

 

(1)------------------

 

무변찰해허명경(無邊刹海虛明鏡)이요  적겁매진광미휴(積劫埋塵光未虧)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종래천성부동진(從來千聖不同塵)헌디  하사횡신성색리(何事橫身聲色裏)인고

나무~아미타불~

 

무변찰해허명경(無邊刹海虛明鏡)이요. 가없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텅 비고 밝은 거울인데, 그 밝고 빈 거울에 무량겁을 두고 티끌이 쌓이고 쌓여서 그 거울을 티끌로 뒤덮었건만, 그 거울 자체의 광명은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더라.

 

종래천성부동진(從來千聖不同塵)헌디 하사횡신성색리(何事橫身聲色裏)인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성현들은 그 티끌과 한 가지 하지 안 했어. 시방찰해가 온통 티끌인데, 그 티끌에 조금도 묻지를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는 소리와 빛, 소리와 빛의 티끌 속에 몸을 비겼는고. 티끌 속에 왜 파묻혀서 허우적거리고 있느냐.

 

 

오늘은 임술년 9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무더웠던 여름도 다 가고 칠석도 지내고, 백중도 지내고 제법 서늘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슬프고 기쁜, 이 슬픔과 기쁨으로 범벅이 된 인생살이는 한 벼개에 꿈에 지내지 못하고[悲歡一枕夢], 한바탕 꿈에 지내지 못하고, 일생동안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만나는 인생살이도 잠깐 불과 10년 동안에 정, 애정, 인정 얽힌 것에 불과한 것이여[聚散十年情].

말없이 머리를, 고개를 돌이켜 보니[無言却回首] 산마루 위에는 흰구름이 일어나는구나[山頂白雲生]' 이러한 게송을 맨 처음에 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출현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12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갖은 고행을 하시고, 그 가운데 여러 스승을 차례차례로 사사(師事)하고 차례차례로 버리시기를 12년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두고 고행을 하신 끝에 마침내 보리수(菩提樹)하에서 새벽 동천(東天)에 반짝거리는 샛별을 보시고 성불(成佛)을 하셨습니다.

그 부처님이 아니셨던들 우리는 영원토록 생사(生死)의 고해(苦海)에서 몸부림치며 육도법계(六途法界)를 윤회를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무엇이 바른 길인가? 무엇이 우리의 참다운 행복인가? 그것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러한 성현 가운데 성현을 스승으로 받들 수가 있기에, 우리는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태어났으면서도 우리는 외롭지 아니하고 우리는 슬프지 아니하고,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찾아서 희망과 보람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法)을 믿으면서도 아직도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까닭은 우리의 신심(信心)이 바르지 못하고 철저하지 못하고, 실천에 있어서 대분심(大憤心)과 용기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절에 10년, 20년을 다니고 평생토록 부처님밖에는 모르고 그러면서도 바로 깨닫지 못한 것은 그 믿음이 바르지 못하고 철저하지 못한 까닭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어떻게 믿어야 바르게 믿는 것이냐?

 

어떤 사람은 '용화사 가서 정법(正法)을 믿어라.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으려면 주안 용화사를 가라' 이런 말을 듣고 분개를 하면서 '어찌 용화사만 정법이고, 용화사만 최상승법이냐, 부처님 법은 온 시방법계에 두루하고, 꽉 차 있는 것이 불법인데 어찌 용화사만 불법일 것이냐. 어느 절에서도 어느 절에 가도 부처님은 다 모셔 있고, 어느 절에 가도 스님은 다 계시고, 설교하는 절은 어디라도 다 정법이 있지 어찌 용화사만 정법이겠느냐' 그렇게 분개를 하는 분이 있다 이것입니다.

 

그 말이 절대로 일리가 있는 말일 것입니다. 어찌 하필 용화사 부처님만 참 부처님이고 용화사 스님들만 진짜스님이고, 용화사 설법만 정법이겠습니까.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 法身)은 우주법계에 꽉 차서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고, 오히려 눈을 가리우고 부처님을 아니 볼라고 하니까 열 손가락 사이마다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마는.

바로 말하자면 부처님 안 계신 곳이 어디가 있으며, 불법 없는 곳이 어디가 있으며, 무엇이 정법이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혜의 눈을 뜬 사람은 눈을 감아도 부처님이요 눈을 떠도 부처님이요, 귀를 막아도 부처님이요 귀를 열어도 부처님이요, 하늘 땅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법신체(法身體) 아닌 것이 없지마는.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예를 들자면 철이 들어서 아무데를 가더라도 산에를 가도 좋고, 바다를 가도 좋고, 숲속을 가도 좋고, 사막을 가도 좋고, 아무데를 가도 걱정이 없을 만큼 몸이 단련이 되고 그만큼 튼튼한 사람은 상관이 없지만, 아직 자라지를 못해서 그런 사람은 함부로 산에 가도 위험한 것이고, 함부로 물가에 가도 위험한 것이고, 함부로 험악한 데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용화사로 가야 참선 하는 법을 기초부터서 잘 배울 수가 있다'한 말이 그렇게 해서 해당이 되는 것이지, 바로 참선을 화두를 들 줄 알고 올바르게 공부할 수 있다면야 산꼭대기를 가나, 바닷가에를 가나, 무인도를 가나, 어디를 가서 한들 공부를 못하겠습니까.

정(正)과 사(邪)를 가릴 줄을 알고 공부하는 법을 바로 안다면 외도(外道), 마구니 속에 들어가서 한들 무엇이 방해로울 것이 있습니까.

 

 

정법은 다른 게 아니고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절을 많이 하고, 시주를 많이 하고, 멸치 꼬리 하나도 안 먹고, 파 마늘을 안 먹고, 모기 파리 하나도 안 죽이고,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아니하고, 이렇게 계율을 청정히 지키면서 그저 절밖에는 모르고 일생을 사는 그러한 스님, 그러한 청신사 청신녀들이 계시는데 대단히 훌륭하지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불법(佛法)을 바로 믿었다고 할 수가 없거든. 물론 불교를 믿는 사람이 계율을 청정히 갖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일이로되 거기에 그쳐 가지고 불법을 참으로 바로 믿었다고 할 수가 없어.

 

'불법을 바로 믿었다', 정신(正信)이라 하면 자기도 아무리 죄가 많건, 근기가 약하건, 여자건, 말세에 태어났건, 무식하건,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자기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을 가지면 그것이 바로 불법을 바르게 믿는 것이여. 그 신념이 서 있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어.

 

'죄가 많으니까 나는 불법을 깨달을 수가 없을 것이다. 업(業)이 많고 근기(根機)가 약하고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깨달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말세(末世)에 태어난 사람이 무슨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차라리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차라리 염불을 하고 경을 열심히 읽어야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죽을 때 아미타불이 나를 반야용선(般若龍船)에다 태워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데려다 주실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은 어떠한 근기에는 혹 약이 될 수가 있겠지만, 거기에 국집(局執)한다면 불법을 바르게 믿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법을 바르게 믿고도 대분심(大憤心)과 대용기(大勇氣)가 없으면은 도는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천안통, 천안제일(天眼第一)인 아나율 존자는 애당초에 부처님 사촌으로 출가해 가지고,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는데 꾸벅꾸벅 졸았다 그말이여.

조니까, 부처님께서 걱정을 하시기를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가 없고, 썩은 흙벽에다가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조개가 바다 속에서 천년 동안을 잠을 자고도 파도 소리 때문에 잠 한숨 못 잤다고 그런 말이 있는데, 세상에 법문(法門)을 들으면서 졸음을 자다니 그래가지고 무슨 도업(道業)을 성취할 것이냐. 축생만도 못한 놈'이라고 크게 꾸지람을 하셨습니다.

 

'법문을 듣다가 졸아? 그것이 축생 과보(畜生果報) 밖에는 무엇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참 뼈아픈 꾸지람을 듣고 분심이 나서 6일간을 잠을 안 잤습니다. 눈 한번 깜빡 아니하고 앉은 채로 6일을 버텼습니다. 6일을 눈을 깜빡거리지 아니하고, 6일을 딱 버티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눈이 탁 멀자 천안통(天眼通)이 열렸던 것입니다. 천안통이 열려가지고 염부제(閻浮提)의 모든 사물과 상황을 손바닥 위에 구슬을 보듯이 그렇게 온 세계를 다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천안통이 열려서 온 세계를 손바닥에 구슬 보듯이 보았지만, 바느질하는 데에 바늘귀는 꿸 수가 없었던지, 원시경전에 보면 아나율 존자가 바느질을 할 때에는 부처님께서 항시 바늘귀를 꿰어 주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처음~21분31초)

 

 

 

(2)------------------

 

부처님 말씀 한마디에 6일 동안을 분심을 내 가지고 잠을 안 자 가지고 결국은 눈이 멀어버린 그 제자를 위해서 바늘귀를 꿰어 주시고, 바느질도 해 주시고, 여러 가지 그 시중을 부처님께서 손수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 눈병이 났는데 아사세왕(阿闍世王) 어의(御醫)이며, 부처님의 주치의를 맡고 있던 기파(耆婆)대감을 명해 가지고 아나율 존자의 눈병을 치료하게 했습니다마는, 기파대감이 아무리 좋은 약을 쓰고 침을 놓고 치료를 해도 조금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래 기파대감이 부처님께 "저의 힘으로는 나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가 어의로서 못 고치는 병이 없는데 어찌 아나율의 눈병을 못 고친단 말이냐?"

"못 고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잠을 자야 하는데, 좋은 약을 쓰면서 잠을 자야 눈병이 나을 텐데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네가 내 말 한마디에 분심을 낸 것은 좋지마는, 그래도 잠을 자면서 정진을 해야지 그렇게 잠을 안 자 가지고 되겠느냐"

아무리 잠을 자라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끝까지 잠을 안 자 가지고 결국은 눈이 그렇게 멀어버렸던 것입니다.

 

 

또 부처님 제자, 십대제자 가운데에 지혜가 제일인 사리불 존자가—목련 존자와 부처님 왼팔 오른팔 그 두 수제자(首弟子)인 그 사리불 존자가 지혜로서 제일인데, 그 사리불 존자는 원래 외도의 제자로 있다가 목련 존자와 함께 자기 자신의 제자 백 명들을 이끌고 부처님께 귀의해서 부처님 법문을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해 가지고 십대제자 가운데에 지혜가 제일인 그러한 성현인데, 그 사리불 존자는 전생에 무엇이었었냐 하면은 독사(毒蛇)였었던 것입니다.

그 사리불 존자는 전생에 독사가 되어 있었을 때가 있었기 때문에 성현이 되어 가지고서도 그 진심(瞋心)을 내는 습기(習氣)가 항시 조금씩 나타났다 이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앉아서 좌선을 하시다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셔서 포행을 하시는데, 부처님의 아드님이신 라후라 존자가 아직 어렸을 때인데 그 라후라가 부처님 뒤를 따라서 부처님을 모시고 같이 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라후라 존자는 아주 6살 어렸을 때 출가를 했는데, 출가했을 때 부처님께서 그 당신의 수제자인 사리불 존자를 시켜서 '네가 좀 거두어 주어라' 이렇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래 라후라 존자의 은사 스님이 사리불 존자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께서 그 당신의 아드님이신 라후라 존자가 따라온 것을 이리 보시더니, "네가 어떻게 그렇게 해서 바짝 말랐느냐? 어떻게 몸이 그렇게 폐로(肺癆)와졌느냐? 그렇게 쇠약해졌느냐?" 이렇게 물어 보셨습니다.

그 라후라 존자가 게송으로써 대답하기를, 소락(酥酪)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그 빠다(버터)와 비슷한 음식인데 내나 우유를 끊이면은 거기에서 떠오르는 기름을 모아 가지고 만드는 음식인데,

"소락을 먹으면 몸이 튼튼해지고 또 기름을 먹으면은 몸이 튼튼해지고 그러한 것을 또 무슨 고기라든지 모다 그런 것을 먹으면 힘이 생기고 한 것을 부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게송으로써 부처님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지금 이 대중 가운데에 누가 제일 큰스님인고?" 그렇게 물어보셨습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저의 스승인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 밑에 제일 큰스님이지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이 "사리불은 부정식(不淨食)을 하느니라"

부정식이라 하는 것은, '아니 불(不)’자, '조촐할 정(淨)’자, 부정(不淨), "부정식을 하느니라. 청정한 음식을 안 먹고 청정하지 못한 음식을 먹느니라" 아, 부처님이 밑도 끝도 없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말이여.

 

그러니까 그 라후라 존자가 자기 스승한테 가서 "아, 부처님이 그 스님 보고 부정식을 한다고 하시데요" 그렇게 말을 했다 그말이여.

그 말을 듣고 사리불 존자는 그 뒤부터서는 일체 어떠한 신도나 왕이나 대신이나 장자가 공양 청장을 해도 응하지를 안 했습니다.

 

부처님도 그전에까지도 왕이나 대신이나 장자나 신심 있는 신도가 좋은 음식을 마련해 놓고 공양 청(請)을 하면 모다 제자를 거느리고 가서 공양을 잡숫고 오시고 그랬는데 부처님도 딱! 끊어 버리시고 안 가시자, 부처님이 안 가신 뒤에는 사리불한테 모다 공양 청을 하면은 사리불이 또 가서 공양을 받아 자시고 오시고 그랬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그 말씀을 한 그 말을 듣고 부터서는 사리불도 딱! 끊어버리고 공양에 응하지를 안 했습니다.

 

그때 왕과 대신과 장자들이 사리불에 공양을 청하러 갔습니다. "나는 가지를 않겠다"

"어째서 안 가십니까? 부처님도 안 가시고 사리불 존자까지 안 가시면 우리 신도들은 어떻게 청정한 법문을 들으며, 법의 인연을 맺는 복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부처님께 가서 "부처님마저도 공양을 응하시지 아니하고, 사리불 존자까지도 응하시지 아니한다면은 어떻게 우리 신도가 복을 지으며 법문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발 부처님은 정 안 가신다면 사리불 존자라도 가도록 좀 말씀을 해 주십시오"

"사리불 존자는 내가 아무리 말하고 너희들이 아무리 청한들 결단코 가지를 아니할 것이다"

"왜 그렀습니까?"

 

사리불 존자는 전생에 독사였었는데, 독사로서 어느 왕을 물었다. 그래서 독사가 왕을 물어버리고 어디로 달아나 버렸는데, 왕의 몸에 그 독이 번져가지고 죽게 되었어. 그래서 천하의 명의를 다 불러다가 그 독사에 물린 독을 빼고 병을 낫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나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 의원들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이 독을 뺄 수가 없고 그 독사로 하여금 스스로 이 독을 빨게 해야만 이 병은 나을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 독사를 오게 할 수가 있느냐?' 그래 그 의원들이 모다 합심을 해 가지고 주문을 외워 가지고 그 독사가 제절로 왕 앞에 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독사가 왕 앞에 와서 딱 도사리고 있는데 그 옆에다가 장작불을 갖다가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는 불을 펴서 훨훨훨 타게 해 놓고서는, '독사야! 네가 이 왕을 물었는데, 네가 문 자리에서 거기다가 네가 이 독을 빨아먹으면 너를 살려주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너는 이 모닥불에다가 집어넣어서 태워 죽이리라'

 

독사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의 독을 밖으로 내뿜기 위해서 물었는데 어찌 내가 그 독한 독을 다시 빨아먹을 수가 있을까보냐. 차라리 내가 불더미 속에 들어가서 타서 죽을지언정 나는 그 독을 다시는 못 빨아먹겠다. 이래가지고 그 독사가 펄쩍 뛰어가지고 불더미 속에 들어가서 타서 죽었습니다. 그 타서 죽은 그 독사가 사리불 존자다 이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무슨 말이든지 한마디 딱 했다 하면은 한 번 탁! 결심을 하고 독한 마음을 먹고 결심을 해 버리면 천하 없는 사람이 뭐라 해도 그 뜻을 굽히지를 안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부처님께서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그 말씀 한마디 했다고 해서 왕이나 대신이나 장자가 공양 청장을 해도 다시는 응하지를 아니했다 이것입니다.

 

그 부정식이라는 게, 첫째 그 짐승을 죽일 때에 그 현장을 목격하지 아니한 고기, 그 짐승을 죽일 때에 비명 지른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한 고기, 또 나를 위해서 일부러 죽이지 아니한 고기, 또 세 사람 이상의 손을 거친 고기, 독수리나 맹수 같은 것이 먹다가 버린 고기, 이러한 종류의 다섯 가지 고기를 깨끗한 고기라 해서 이것을 오정육(五淨肉)이라, 다섯 가지 깨끗한 고기라 해서 이것을 오정육이라 그러고.

그렇지 아니한 고기는 다 그것이 부정한 고기다 이것입니다. 또 음식에 파나 마늘이나 부추 모다 그러한 것이 들어간 음식은 이것이 깨끗한 음식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신도 집에서 밥을 먹게 되면 음식 속에 그러한 부정한 것이 섞여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무심히 먹다 보면 부정식을 하게 되는데, 그래 사리불 존자는 아라한과(阿羅漢)를 증득한 성현이라 신통이 다 육신통(六神通)이 자재(自在)하고 그렇지만 또 무심할 경우에는 또 그런 음식 속에 그러한 것이 혹 섞여 있을 수가 있어서 무심히 먹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은 부정식을 한다' 한 말씀을 하셨는데.

 

라후라 존자가—'어째서 네가 그렇게 살이 쪽 빠져 가지고 그렇게 그러느냐'한 말 끝에 '뭐 공양 청을 안 하고 그 영양 있는 것을 안 먹으니까 이렇게 살이 빠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한 그러한 뜻으로 넌즈시 그 돌려서 게송으로 읊으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 말 한마디에 다시는 공양에 응하지 아니할 그 고집, 그 의지력, 그 결단심, 이러한 것이 결국은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그런 밑거름이 되지 안 했겠느냐?

 

그리고 아나율 존자는 '법문 듣다가 존다'고—우리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녹음으로 들으면 '존다'고 그 꾸지람을 하신 법문을 가끔 듣는데, 어떠한 법문 가운데에는 '눈구녘을 쑤셔 버린다'고 이러한 참 과격한 꾸지람을 하시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

법문을 듣다가 꾸지람을 듣기도 예사고, '눈구녁을 쑤셔 버린다'고 이러한 말씀을 들을 수도 있는데, 어떠한 신도 하나는 조실 스님 법문을 빠뜨리지 않고 듣다가 눈구녁을 쑤셔 버린다는 말을 듣고 몇 해 동안을 법문을 들으러 안 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또 산승의 말을 들으면서 졸고 계신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졸고 있는 사람 보기가 싫어서 조실 스님도 법문하실 때 눈을 감고 많이 법문을 하시고, 산승도 그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보면 도대체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듣기가 싫으면 꾸벅꾸벅 졸고 있을까?

'차라리 안 보고 모두가 눈이 초롱초롱해서 저의 말을 잘 듣고 계시리라' 이렇게 생각이 들어가야 좋은 말이 술술 나오지, 여기서 저기서 듣기 싫어서 졸고 있고, 하품을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고 있으면 무슨 신심으로 얘기를 법문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한마디 꾸지람을 듣고 그 꾸지람을 명심을 해서 분심을 내서 아나율 존자와 같이 잠을 안 자고, 사리불 존자와 같이 다시는 공양에 응하지 아니할만한 그러한 고집과 결단심이 없어가지고 어떻게 대도를 성취할 것이냐 이 말이여.

 

'분심이 안 난다. 신심이 안 난다. 아무리 화두(話頭)를 들어도 의심(疑心)이 안 난다. 어떻게 하면 의단(疑團)이 일어날 수가 있겠으며, 어떻게 하면 분심이 나겠습니까? 어떻게 좋은 말씀을 한마디해서 신심과 분심과 대의단이 나도록 해달라'고 가끔 그러한 수좌(首座) 스님들이 와서 그렇게 부탁을 합니다마는, 신심과 분심과 의단은 자기 자신이 일으켜야지 어떻게 그것을...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한마디 한 그 말에서 분심을 내고, '법문을 듣다 졸려 가지고 그래가지고 어떻게 도를 성취할 것이냐? 죽어서 조개밖에는 못될 것이다. 죽어서 축생의 과보밖에는 못될 것이다' 이런 말 한마디에도 대분심을 내고.

이러한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채찍을 가해 가지고 분심을 내야지, 내가 장군죽비(將軍竹篦)로 한 대, 두 대 쳐 본들 그때만 등어리가 따끔하고 돌아서면 그만인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있느냐.(21분32초~42분5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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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무변찰해허명경(無邊刹海虛明鏡)~ ;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峯和尙廣錄)』 (제14권) ‘別傳覺心’

*갓없다 ; ‘가없다(끝이 없다)’의 옛말.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시방찰해(十方刹海) ; 시방세계(十方世界). 찰(刹)은 범어 ksetra의 음역으로 뜻은 토지 · 육지 · 영역. 따라서 찰해는 육해(陸海), 즉 육지와 바다란 의미로 세계를 말한다.

*빗기다[橫] ; ①'가로지르다(양쪽 사이에 기다란 막대나 줄 따위를 가로로 놓거나 꽂다)'의 옛말. ②'비끼다(비스듬히 놓이거나 늘어지다)'의 옛말.

*사사하다(師事-- 스승 사/섬길 사) ; 스승[師]으로 섬겨[事] 가르침을 받다.

*보리수(菩提樹) ; 산스크리트어 bodhi-vṛkṣa  원래 이름은 아설타(阿說他, 산스크리트어 aśvattha)이며, 그 열매를 필발라(畢鉢羅, 산스크리트어 pippala)라고 하는 데서 이 나무를 필발라수(畢鉢羅樹)라고도 하고, 붓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였으므로 보리수라고 함. 상록 교목으로, 잎은 심장 모양이며 끝이 뾰족함.

*샛별 ; 새벽별. 명성(明星).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새벽별, 태백성(太白星), 계명성(啓明星), 장경성(長庚星) 등이라고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비로자나(毘盧遮那) ;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이르는 말. 비로자나는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을 형상화한 것.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법신체(法身體) ; 법신(法身)의 체(體)를 가리키는 말.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부처님을 가리킨다.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법불(法佛) · 이불(理佛) · 실불(實佛) · 법신불(法身佛) · 법성신(法性身) · 자성신(自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한물건’이란 것도 이것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絶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십대제자(十大弟子) ; 석가모니의 제자 중 수행과 지혜가 뛰어난 10명을 이르는 말.

①사리불(舍利弗) : 산스크리트어 śāriputra의 음사.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지혜가 뛰어나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 일컬음. 원래 목건련(目犍連)과 함께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sañjaya)의 수제자였으나 붓다의 제자인 앗사지로부터 그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250명의 동료들과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됨.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다.

②목건련(目犍連) : 산스크리트어 maud galyāyana의 음사.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신통력이 뛰어나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일컬음. 원래 산자야(sañjaya)의 수제자였으나 사리불(舍利弗)과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됨.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다.

③가섭(迦葉) : 산스크리트어 kāśyapa의 음사. 마가다국(magadha國) 출신으로, 엄격하게 수행하여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일컬음. 결혼했으나 아내와 함께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됨. 붓다가 입멸한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한 제1차 결집(結集) 때, 그 모임을 주도함.

④수보리(須菩提) : 산스크리트어 subhūti의 음사. 사위국(舍衛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공(空)의 이치에 밝아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일컬음. 그래서 공(空)을 설하는 경(經)에 자주 등장하여 설법함.

⑤부루나(富樓那) : 산스크리트어 pūrṇa의 음사. 바라문 출신으로, 설법을 잘 하여 설법제일(說法第一)이라 일컬음. 녹야원(鹿野苑)에서 붓다의 설법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됨. 인도의 서쪽 지방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하다가 거기에 입적함.

⑥아나율(阿那律) : 산스크리트어 aniruddha의 음사. 붓다의 사촌 동생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에 왔을 때, 아난(阿難)·난타(難陀) 등과 함께 출가함. 통찰력이 깊어 천안제일(天眼第一) 이라 일컬음.

⑦가전연(迦旃延) : 산스크리트어 kātyāyana의 음사. 인도의 서쪽에 있던 아반티국(avanti國)의 크샤트리야 출신으로, 왕의 명령에 따라 붓다를 그 나라로 초청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출가함.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함. 교리에 밝아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 일컬음.

⑧우바리(優波離) : 산스크리트어 upāli의 음사. 노예 계급인 수드라 출신으로 석가족의 이발사였는데, 아난(阿難)·난타(難陀)·아나율(阿那律) 등이 출가할 때 같이 붓다의 제자가 됨.

계율에 엄격하여 지계제일(持戒第一)이라 일컬음. 붓다가 입멸한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한 제1차 결집(結集) 때, 계율에 대한 모든 사항을 암송함으로써 율장(律藏)의 성립에 크게 기여함.

⑨나후라(羅睺羅) : 산스크리트어 rāhula의 음사. 붓다의 아들.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에 왔을 때,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犍連)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함. 지켜야 할 것은 스스로 잘 지켜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일컬음.

⑩아난(阿難) : 산스크리트어 ānanda의 음사. 붓다의 사촌 동생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에 왔을 때 난타(難陀)·아나율(阿那律) 등과 함께 출가함. 붓다의 나이 50여 세에 시자(侍者)로 추천되어 붓다가 입멸할 때까지 보좌하면서 가장 많은 설법을 들어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일컬음.

붓다에게 여성의 출가를 3번이나 간청하여 허락을 받음. 붓다가 입멸한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한 제1차 결집(結集) 때, 아난이 기억을 더듬어 가며 “이렇게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붓다께서는……”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암송하면, 여러 비구들은 아난의 기억이 맞는지를 확인하여 잘못이 있으면 정정한 후, 모두 함께 암송함으로써 경장(經藏)이 결집됨.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축생과보(畜生果報) ; 축생(畜生)으로 태어나는 과보(果報).

*과보(果報 열매 과/갚을 보) ;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천안통(天眼通) ;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염부제(閻浮提) ; 염부(閻浮). 남염부제(南閻浮提). 섬부주(贍部洲). 남섬부주(南贍部洲). 산스크리트어 jambu-dvīpa의 음사. 염부(閻浮), 섬부(贍部)는 jambu의 음역어이며, 제(提)와 주(洲)는 dvipa의 각각 음역어 및 의역어이다. jambu는 나무 이름.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네 대륙(四洲)이 있는데, '염부'라는 이름은 여기에 자란다는 점부(jambu)에 유래하며, 남방에 있기 때문에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 함. 불전(佛典)에서는 ‘인간세계의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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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진심(瞋心) ; 왈칵 성내는 마음.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대하여 미워하거나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페롭다 ; '파리하다(몸이 마르고 낯빛이나 살색이 핏기가 전혀 없다)'의 사투리.

*소락(酥酪 연유 소/쇠젖 락) ; 소나 양 등의 젖.

*오정육(五淨肉) ; 스님들이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다섯 가지의 청정한 고기. 오종정육(五種淨肉).

①나를 위해 죽이는 것을 목격하지 않은 것(不見爲我殺). ②나를 위해 죽였다는 것을 듣지 못한 것(不聞爲我殺). ③나를 위해 죽였다고 의심되지 않는 것(不疑爲我殺). ④수명이 다하여 저절로 죽은 것(自死). ⑤새가 먹다 남긴 것(鳥殘).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 -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자재(自在 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①자기가 원하는 대로인 것.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인 것. 자유자재로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원하는 대로의 경지. ②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 ③자유롭다. 자신에게 의존하다. ④독립. ⑤느긋한 심신의 작용. 잡혀지지 않는 것. ⑥불보살에 갖추어진 힘을 말함.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도 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장군죽비(將軍竹篦) ; 보통 죽비(竹篦)는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40~50센티의 불교 용구인데, 장군죽비는 참선할 때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진 수행자의 어깨를 쳐서 졸음을 쫓는 약 2m의 큰 죽비.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