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소소영령2018. 5. 24. 21:54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11분 33초)

 

[법문] 송담스님(No.240)—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용240)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인데, 「그 찾는 그놈을 다시 되찾는다」 그것입니다.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하면 일상생활(日常生活)인데. 일상생활에 앉고 서고 눕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도 내고 슬퍼하기도 하고, 이것이 바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인데, 이것이 일생생활이거든.

 

그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거든.

이 몸뚱이를 끌고 서울도 가고, 서울에서 요리 끌고 오기도 허고, 이 몸뚱이를 시켜서 성도 내게도 하고, 슬퍼하게도 하고, 말도 시키기도 하고, 또 밥도 먹으라 그러고, 그 안에서 조정하는 놈이 있어.

그놈이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는 없는데, 분명히 이 몸뚱이 안에 이 몸뚱이를 운전하는 조종하는 놈이 있다 그말이여.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그말이여. ‘이것이 무엇이냐?’ ‘이뭣고?’

 

‘대관절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을 허지만,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허는 이놈이 바로 무엇이냐?」 이거여.

「‘이뭣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 뭣고?」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 찾는 놈을 되찾는 것이거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종일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렇게 허라는 것은 아니여.

‘이뭣고?’ 이렇게 허되, 그 속의 뜻은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말이거든.

 

그러나 실지로 헐 때에는 자꾸 「‘이뭣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러라는 게 아니여.

 

또 뭣헌 분은 「‘이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이 있다」 그렇게 내가 말씀을 했더니, 한 번 할 때에 육백만 번이면 열 번을 허면 육천만 번이고, 또 백 번을 하면 육억 번이다.

그래가지고 ‘내가 백 번이야 그까짓 것 1분 동안에 백 번을 하면 10분 동안이면은 천 번을 할 수가 있고 허니까, 그것을 육백에다 곱하면 이렇게 되겠다’ 해 가지고는 「이뭣고」 「이뭣고」.....「이뭣고」를 갖다가 수없이 그렇게 하는데, 그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말이거든.

 

한 번을 하되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한 그 간절(懇切)한 의심(疑心)으로 하라는 거지, 입으로 그저 횟수를 많이 채우라는 말씀은 아니거든. ‘이뭣고?’

그리고 ‘간단(間斷)없이 하라’ 그 말도,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말이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 말소리가 끊어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어요.

 

이 참선이라 하는 건 참, 바르게 하는 방법을 가르켜 드리기도 참 어렵고, 또 그것을 방법을 바르게 배우기도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너무 쉬웁고 간단한데 실지로 해보면 이 화두(話頭)를 바르게 들 줄 알기가 그렇게 쉬운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3년씩 또는 10년씩 선방(禪房)에 다니면서도 또 그 공부를 하셔도 그 진짜 화두를 올바르게 들고 있는 분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화두 하나만 제대로 딱 들어 버린다면 견성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성불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생사해탈하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부득이(不得已)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한다’ 부득이 해서 ‘견성(見性)을 해야 한다’ 부득이해서 ‘성불(成佛)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을 하지,

사실은 생사해탈해야 할 생사도 없는 것이고, 깨달라야 할 법(法)도 없고, 도(道)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해탈 해야 한다’하면, ‘생사해탈’이란 말에 딱! 국집(局執)을 하고, ‘견성을 해야 한다’하면 그 견성이라고 하는 말에 꽉! 국집을 하고, ‘성불을 해야 한다’하면 그 성불이라는 말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 그 국집하는 찰나에 화두를 놓치게 되고 자기를 놓치게 되는 것이여.

 

‘견성성불해라, 생사해탈을 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화두를 들게 하기 위해서, 바로 자기를 관조(觀照)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그 말에 떨어지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

 

방안에 있는 파리를 문을 닫고서 파리를 내키면 그 파리가—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내키면은 천장에 가 붙고, 천장에 가 붙은 파리를 내키면 동쪽 벽에 붙고, 동쪽 벽에 파리를 내키면 서쪽에 가 붙고, 서쪽 벽에 붙은 파리를 내키면 남쪽에 가서 붙고.

이래가지고 그 파리 내키면은 반드시 어디 가서 또 붙는다 그말이여.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어디에 가도 붙으면 안 되거든.

 

다맛 알 수 없는 의심만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가야지, 무엇이 좋다고 한다고 해서 그 좋다고 하는데 붙으면 안 돼.

 

이렇게 오늘 갑자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 법요식에 사부대중이 이렇게 모이셨는데,

그 법문(法門)을 듣고 무엇을 많이 알기 위해서 법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 법문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생각이 떨어진다면, 그건 좋은 생각에 집착했더라도 마찬가지고 더군다나 옳지 못한 생각에 집착했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집착한 마음이 떨어진다면 여기까지 오셔서 법문을 들은 공덕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무슨 법문을 들었어도 그 법문에 국집을 하면 좋은 약을 먹고서도 그 약에 중독(中毒)이 된 거와 같애요.

그 약을 먹은 것은 속에 병이 떨어지라고 먹는 것이지, 그 약을 먹고 약에 중독이 되서 부작용이 일어난다면 그 약을 차라리 안 먹은 것만도 못하거든.

 

오늘 법요식뿐만이 아니라 팔만대장경 경전도 역시 마찬가지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설하신 모든 법문이 또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법(法)에 국집하면—아주 신심 있는 이는 그 법에 매우 깊이 국집을 하는 수가 있는데, 그 국집을 한다면 부처님 법문을 옳게 가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했고 금강경(金剛經)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마는 「법(法)이라 하는 것은 강을 건너가는 배와 같은 것이다(知我說法 如筏喩者)」 그 배는 강을 건너는 데 목적이 있지, 강을 건너가지고서도 그 배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것입니다.

「법에 국집해도 못쓰거든 하물며 법 아닌 것에 있어서랴(法尙應捨 何況非法)」 금강경에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법문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기의 화두를 놓아 버려서는 아니 되거든.

법문을 들을 때일수록 자기의 화두가 더욱 성성(惺惺)하게 잘 들려져 있어야 하거든.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판치생모」 화두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정전백수자」하시는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을 해야 하거든.

 

그 알 수 없는 화두가 들어져 있는 상태에서 법문을 들어보면 법문이 더욱 더 잘 들리고, 비단 법문 들을 때뿐만이 아니라 생활을 하면서—밥 먹을 때에도 그렇고, 세수할 때도 그렇고, 차를 탈 때에도 그렇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그 화두가 항시 들려져 있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하시도록 그렇게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21분46초~33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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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부득이(不得已)하다 ; 마지못하여 할 수 없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내키다 ; (사람이 무엇을)공간을 넓히려고 바깥쪽으로 물리어 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는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것, 즉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줄임말이다.

풀이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대 반야경 육백부(六百部) 중에서 五七七권에 해당되고, 그 내용이 약 3백송(三百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대략 서기 150~200년경의 대승경전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 밝게 비출 수 있다는 금강석을 부처님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로 비유한 것이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예리하고 반짝이는 완전한 반야의 공지(空智)로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뜻.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용화선원刊) p53.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