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반야영주2017. 2. 21. 15:27

반야영주(般若靈珠) (No.539)—(게송)차주비대역비소~ |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신령스런 구슬, ‘참나’를 찾을  있는 곳이요 바로  때다.


*반야영주(般若靈珠) ; 반야(般若, 지혜)를 신통묘용이 자유자재한 영주(靈珠, 신령한 구슬)에 비유한 말.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30권) 단하화상(丹霞和尙)의 ‘완주음(翫珠吟)’에서.

〇般若靈珠妙難測  法性海中親認得  隱顯常遊五蘊中  內外光明大神力  此珠非大亦非小  晝夜光明皆悉照  覓時無物又無  起坐相隨常了了 ~~.

 

반야의 신령한 구슬은 묘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법성의 바다 속에서 친히 얻어야 한다. 숨었다 드러났다 항상 오온(五蘊) 가운데 노닐면서 안팎의 광명은 큰 신력(神力)이로다.

이 반야의 영주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니 밤낮으로 광명은 모든 것을 비추네. 찾아보면 한 물건도 없고 또한 자취도 없지만 일어설 때나 앉을 때나 서로 따르면서 항상 요요(了了)하다.

 

 

(13분 59초)

 

 

[법문] 송담스님(No.539)—94년(갑술년) 동안거결제 백일기도 입재(94.11.17)(용539)

 

차주비대역비소(此珠非大亦非小)헌데  주야광명개실조(晝夜光明皆悉照)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멱시무물우무종(覓時無物又無)허되  기좌상수상요요(起坐相隨常了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차주비대역비소(此珠非大亦非小).  구슬, 반야(般若) 신령스러운 구슬이 묘(妙)해서 측량을  수가 없어. 그런데  반야의 영주(靈珠) 크다고  수도 없고, 작다고  수도 없어.

크기로 말하면은 대천세계(大千世界)  싸고도 남고, 작다고 하면은 바늘로 찌를 수도 없을 만큼 작을 수도 있는 것이여.

 

 구슬은 어디서 나왔냐? 법성해(法性海) 가운데에서 얻은 거여. 법성해는 시방세계(十方世界) 무한대로 끝이 없는 대법성의 바다에서 친히 얻은 것이다 그말이여.

금생에  반야영주를 부모로부터  몸뚱이를 받아날  같이  몸뚱이 속에  반야영주(般若靈珠) 따라왔어.

 

그러면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에는 없었느냐 하면은,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에도  반야영주는 우주법계에  차있는 거여.

무량억겁(無量億劫)  태어난 때가 없어. 생겨난 때가 없이  반야영주는  법성(法性) 바다 가운데 가득 차서 빛나고 있는 것이거든. 그런데 당장  몸뚱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뭉쳐진  몸뚱이 속에  반야영주가 들어있다 그말이여.

 

주야광명개실조(晝夜光明皆悉照). 태양이 아무리 밝다 해도 낮에만 빛나고 밤에는 태양빛을  수가 없지마는  반야영주는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항상 빛나고 있다 그말이여.

 

멱시무물우무종(覓時無物又無)이다. 그런데  반야영주, 어떻게 신통이 자재하고 묘하던지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어.

태양빛이 아무리 밝아도  땅속 깊이 들어가면은 태양빛이 거기는 미치지를 못하고 무엇이 가로막으면 거기에는 비추지를 못하는데,  반야영주는 시간과 공간에도 걸리지 않고 언제나 빛나고 있건마는 찾아보면  수도 없고  수도 없어.  자취도 없다 그말이여.

 

그런데 기좌상수상요요(起坐相隨常了了).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黙動靜) 일어설 때나 앉을 때나 항상 따라댕겨. 그래가지고 항상 요요명명(了了明明)하다 그말이여.

부르면 대답할  알고, 무슨 소리가 나면 들을 줄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배고프면  먹을 줄도 알고. 신통묘용(神通妙用)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

 

그러헌 놈을 우리가 낱낱이  가지고 있거든.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말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은 조실 스님께서 73—77세에 열반하셨는데 4 전에, 열반하시기 4  73  설하신 법문인데,

 법문 가운데에  할라야   수가 없다. 의심을  할라야    없고, 참선을 안 할래야   수가 없고. ' 된다' 소리가 무슨 말이냐?” 너무나도 분명하게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본질을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놈이 어디로 깊이 깊이 숨어있는 것도 아니고,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 공간에 가로막힌 것도 아니여.

 

우리가 눈으로  , 귀로 들을 , 코로 냄새 맡을 , 혀로 맛을  ,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낄 , 배고프고 아프고 육체적인 모든 감각. 정신적으로 근심 걱정, 슬픔과 괴로움, 외로움, 원망스러움, 두려운 생각, 미운 생각, 일체 정신 작용하는 것이 바로  신령스러운 구슬로부터 그러한 작용이 나온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러한 작용이 일어날  바로 거기에 ()해서 우리는 그놈을 찾어야 한다 그말이여.

 

우리가 고양이를 찾을라면 고양이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가고, 더러운 오물을 치울라면은 더러운 냄새나는 곳을 찾아가면 거기에 우리가 치워야  것들이 쓰레기가 있다 그말이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바로 우리가 우리의 신령스러운 구슬, ‘참나’를 찾을  있는 곳이요, 바로  때다 그말이여.

 

잊어버리기가  어려워!  하기가  어렵다!

완전히 죽어서 의식이 없어진 상태라면 모르지만, 살아서 숨쉬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는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방법만을 바로 안다면  공부는 안 할라야   수가 없는 거여. 하나도 어려웁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

 

누워서도 하고, 앉아서도 하고, 속이 상할 때도 하고, 배고플 때도 하고, 아플 때도 하고, 근심 걱정 있을 때도 하라. ‘이뭣고?’ 하라 그말이여.

속이 상할  계속 속상하는 일만 이리 생각, 저리 생각 해봤자  속상하는 것이 점점 커질지언정 해결이  되거든. 속상할  바로 ‘이뭣고?’  보라 그말이여.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주먹탱이 같은 놈이 치밀어 오르다가도 스르르르 가라앉거든. 근심 걱정을 없애는 방법도 이것밖에는 없고, 슬픔과 외로움을 없애는 방법도 이것밖에는 없고.

 

처음에는 별로 잘된  같지 않고  재미도 없지만, 자꾸 하다 보면 할랴고  해도 저절로 되어. ‘이뭣고?’  번에 시커먼 가슴속에 먹구름이 흩어지게 된다 그말이여.

아무리 달이 밝아도 먹구름이 끼어 가지고 있으면은 껌껌한데 구름만 치워버리면 환히 밝아지듯이, 우리는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의 먹구름 속에서 살고 있는데  먹구름을 찰나(刹那) 간에 날려 버리는 방법이 바로 ‘이뭣고?’다 이거여.

 

어떤 사람이 “참선이 좋은 줄은 법문을 듣고  알겠는데 변소에 가서도 ‘이뭣고?’를 해도 괜찮습니까?

“변소에 가서도 해야지요”

 

“아! 그거, 경전을 읽을 때는 양치질도 하고 손도 씻고 그리고 떠억 향불을 켜놓고 금강경도 읽고 그런데 !  참선법이라 하는 것은 금강경이나 법화경 화엄경보다도  좋고 그런 경을 읽은 공덕보다도 훨씬 몇백 배가  수승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부른 공덕보다도 ‘이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공덕이 낫고 그렇다는데 그렇게 좋은 것을 어떻게 화장실에 앉아서 실례하고 있으면서 ‘이뭣고?’ 수가 차마 있습니까?”

 

그분이 정말  참선이 소중하고  좋다고  것을 너무나도 깊이 믿었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을 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운데도 그런 분이 계실란가 모르지만 전혀 염려할  없습니다. 변소에 가서 끙끙거리면서도‘이뭣고?’ 그렇다고 해서 전혀 죄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희로애락, 생로병사, 빈부귀천, 일체 시비와 흥망성쇠 속에서도 오직  ‘이뭣고?’ 하나라, 이것으로써만이 거기에서 나의 중심을 잡아가고, 나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지혜로써 자비로써 모든  해결할  있는 능력은 오직 이 길밖에는 없는 것이여.

 

병을 앓고 있을 때도 끙끙 앓으면서도 ‘이뭣고?’ 사람이 코앞에서  죽어갈 때도, 자기가 죽게 되었을 때도 ‘이뭣고?’ 이렇게  나가야. 그러한 굳은 신념이 있다면 공부가  된다, 의심(疑心)이  난다 그러한 걱정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따라다니거든. 우리의 주인공(主人公) 여의고는 우리는  1분 1초도  수가 없는 것이고.  살고있다고 하는 자체가  신령스러운   물건’의 뿌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말이여.(처음~143)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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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차주비대역비소~’ ; [전등록(傳燈錄)] (제30권) 단하화상(丹霞和尙)의 ‘완주음(翫珠吟)’ 참고.

*반야(般若) : [] prajna  [] panna  파리어를 음대로  것인데, 지혜(智慧) 또는 밝은 것이란 말이다.

*대천세계(大千世界) ;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약칭.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시방세계(十方世界) ;  세계. 사방(四方 )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 상하(上下) 있는 무수한 세계.

*무량억겁(無量億劫) ; 헤아릴  없이  시간.

*법성(法性) ; ①있는 그대로의 본성, 상태. ②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변하지 않는 진실, 진리.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 사람의 몸이 , , , 바람(,,,) () 원소()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요요명명(了了明明) ; 요요(了了)하고 명명(明明)하다.

*요요(了了 마칠·깨달을·분명할 ) ; 뚜렷하고 분명한 모양. 명확한 모양. 슬기로운 모양. 현명한 모양.

*명명(明明) ; 환히 드러난 모양. 분명한 모양.

*신통묘용(神通妙用) ; 신통(神通) 묘용(妙用).

*신통(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없는 것을 헤아림을 ()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이라 한다. ①신기(神奇 : 신비롭고 기이하다) 정도로 ()하다. ②모든 것을 신기(神奇)롭게 통달(通達).

*묘용(妙用) ; 신묘(神妙 : 신통하고 기묘함) 작용(作用).

*자유자재(自由自在) ; 아무 거리낌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즉해서(卽-- ·즉시 ) ; .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순간 바로. 당장에 ).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이뭣고(是甚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왔다.

*주먹탱이 ; 주먹(다섯 손가락을 모두 오무려 쥔 손)같이 둥글고 단단하게 한데 뭉쳐진 어떤 것.

*번뇌(煩惱 번거러울 /괴로워할 )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 [逼惱, 惱亂] 등의 뜻으로 번뇌(煩惱)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성냄()•어리석음()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앞의 () () ()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이러한 번뇌[]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 6도의 생사윤회에 묶이게 되고 고통[] 과보를 받게 된다. [ -  -  三道]

*망상(妄想 망녕될 /생각 )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 생각() , 또는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

*찰나(刹那 ·짧은시간 /어찌 )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동자(同字).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 주인옹(主人翁).

*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 물건’ ‘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 11~13.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 一物者는  何物고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麼物  麼來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説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물건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소이이다.

Posted by 닥공닥정